『경기옛길-경흥길』
      『제2길 천보산길 : 의정부역-축석령』


  [제2길 천보산길 실트랙']            ★ 사진 클릭하면 크데 확대 됨 ★  
  <경기옛길-경흥길> 두번째 답사코스인 <제2길 천보산길>의 실트랙 지도입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무지무지 크게 확대 됩니다.
 

  ['의정부역 5번출입구']                10:00        
  2022년 1월 26일 (수)  맑음      
  <제2길 천보산길>의 출발지는 <의정부역 5번출구>입니다.
  좌측 차도를 건너 가면...


  ['안중근의사 상']         
  <의정부역전근린공원>이 크게 아름답게 조성되 있는데, 그 중에 "안중근의사 상"이 다른 곳의 것과는
  아주 다른 포즈를 취하는 동상이 있는데.....권총을 빼내며 <이또 히로부미>를 향해 돌진 하는듯...



  ['제2길 출발지점']                  
  <안중근의사상> 앞에는 "경흥2길-천보산길"의 출발지를 알리는 안내판과 <스탬프함>이 있고
  정면엔 <의정부관광안내소>가 우체국 모양을 하고 있는데, 
  

  ['5-1번 출입구']              
  <제2길-천보산길>은 <지하상가 5-1번출입구>를 이용해 건너편 <태조 이성계 상>으로 건너 갑니다.
  길안내표지는 <지하상가 6-4번출구>로 안내하지만 <지하상가 5-2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이성계상>이
  있으니 <5-2번 출구>를 이용하는게 가장 가깝고


  ['이성계 상']                10:09    
  저는 모르고 시키는대로 <6-4번 출구>로 나가 다시 <5-2번출구> 앞으로 돌아 오니
  조용할 날 하루도 없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 朝鮮>을 開國한 "태조 이성계 상"이 
  <의정부의 명동>인 <의정부행복로> 입구에 용맹스런 활쏘기 포즈를 취하며 호령을 하고 있습니다.
  <의정부 議政府>라는 지명을 만들어 준 왕이기에 특별히 세운듯...
  조선왕조 27명의 왕 중에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태조>와 <태종>을 호칭 할때엔 이름을 뒤에 붙이죠.
  <태조 이성계>라던가 <태종 이방원>이라고.....다른 왕들은 이름조차도 모르죠? ㅎㅎ
  왜그러는지 아세요? ^*^


  ['행복로' <신혼부부상>]      
  <행복로>를 통과하는데 먼저 <신혼부부상>이 눈길을 끌고...


  ['행복로' <중년부부상>]        
  이어서 <중년부부상>도 세워져 있는데....
  사진 속 앞에 보이는 한자를 알수 있나요?  제가 보기엔 <암반수 巖盤水>라고 생각되는데...
  이 조형물에 수로를 만들고 물이 흐르게 조경을 했는데, 지하 103m에서 지하수를 끌어 올려 흐르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셔도 되는 물이라고 자랑하고 있더군요.



  ['밀레니움 오밸리스크']      
  계속해서 로타리 마다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데
  <밀레니엄 오벨리스크>라는 조형물도 눈길을 끌고
  

  ['말타기']              
  추억의 <말타기 놀이> 조형물도 있습니다.


  ['파발로터리']                       10:18

  [지명의 유래]                         
  <의정부 행복로>를 통과하면 <행복로>의 끝에서
  "파발로터리"를 만나는데 지명의 유래는 안내문을 참고하고


  ['의정부경전철']             
  이어서 <의정부경전철> 밑으로 조금 진행하면....


  ['양주교' 앞 '양지공원']                10:23      
  <의정부경전철>이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는 곳에 <양주교>라는 <중량천> 다리를 만납니다.
  교각 뒤에는 "양지공원"이라는 표지석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중랑천']         
  <의정부시>를 관통하고 있는 <중랑천>을 만나는데
  <중랑천>으로 내려 가서 남쪽으로 조금 진행하면...


  ['중랑천-부용천' 합수지점]              10:26          
  <중랑천>을 건너는 첫번째 다리를 만나는데, 이곳이 좌측<부용천>이 <중랑천>에 합수하는 곳이더군요.
  다리를 건너 좌측 <부용천>으로 들어 가면...


  ['부용교']               10ㅣ28       
  <부용천>이 그 이름을 다하고 <중랑천>에 합수하며 소멸되는 곳에 <부용교>라는 다리가 있고...
  이제부터 <부용천>을 따라 <새말인도교>까지 660m를 진행합니다.


  ['금신교']                 10:34    
  "부용천 芙蓉川"은 <의정부시 금오동(金梧洞)~신곡동(新谷洞)> 일대를 흐르는 길이 9.2km의
  작은 규모의 하천이지만 <의정부시>의 대표 생태하천이라고 합니다. 봄에 벗꽃이 유명하다고...
  <금신교>를 지나면....


  ['새말인도교']             10:38        ★ 길조심 ★          
  <부용천>의 세번째 다리인 "새말인도교"를 만나는데
  <경흥길>은 여기서 좌측 계단으로 올라 가야 합니다.
  <경흥길> 안내표지판은 보이지 않았고, 안내리본이 좌측 계단 위 나무에 하나 걸려 있었습니다.
  둑으로 올라 가면....


  ['그린힐아파트 107동']              
  우측에 <그린힐아파트 107동>이 바로 보이는데, 좌측 골목으로 나가면...


  ['43번국도'-'꽃동네 버스정류장']               10:41        
  오리지날 <경흥길>이라고 추정되는 <43번국도>를 만나는데
  <꽃동네 버스정류장>이 있습니다.


  ['꽃동네 입구']            
  이제부터 <43번국도>를 건너 <꽃동네>로 들어가 <천보산>으로 진행하게 됩니다.
  


  ['마을회관']                  
  '의정부시 금오동'에 있는 <꽃동네>를 대체로 직진 통과하면...
 

  ['소림사' 입구]                 10:51        
  <소림사> 입구를 만나는데 <제2길 천보산길 안내판>과 <의순공주묘 안내판>이 설치되 있습니다.
  <의순공주묘>는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데 안내판은 이곳에 설치해 놔서 혼돈을 줍니다만....
  여기서 <의순공주묘>를 다녀 오도록 하겠습니다.
  좌측을 바라보면...


  ['의순공주묘' 가는 길]                  
  좌측에 있는 빌라의 이름은 <정은리치빌>이며 이 뒷길의 약50m쯤에 <의순공주묘>가 있습니다.
  조금 들어 가면...
 

  ['의순공주묘' 입구]                     
  좌측에 있는 빌라의 이름이 <힐링타운>이라는 빌라였는데 
  이 빌라 뒤에 나무 몇그루가 있으며 문인석이 두개 서있지만 초라한 묘가 있는데
  누구의 묘인지 분명하게 알려주는 안내판도 없이 <의순공주묘>라고 추정된다는 묘가 있더군요.
 

  ['의순공주묘']                    10:55

  [안내문]                          
  "의순공주묘 義順公主墓"
  이곳 묘 앞에는 없고, 조금전 <소림사> 앞에 있던 안내문을 여기서 소개 하면
  안내문에 <족두리묘>라고도 한다고 하는데, <병자호란> 후 <청나라>가 공녀로 공주를 보내라는 
  지시를 받고,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가는 도중 <평안도 정주> 쯤 갔을 때 
  정조를 지키기 위해 투신자살 했는데 족두리만 건저 올렸다는 내용이 있는데 터무니 없는 낭설이랍니다.
  이것은 역사 기록에는 전혀 없는 지어낸 전설 일뿐인데 공식 안내문에 스스로 터무니 없는 전설이라
  하면서도 기록하여 공공연하게 알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의순공주>에 대해선 <조선왕조실록>에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되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천보산>을 걸으며 <효종실록>을 중심으로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뒤에서 본 '의순공주묘']                        
  뒤에서 바라본 <의순공주묘>는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관리를 안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의정부시>에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를 해 달라고 요청을 수없이 했다지만
  <의정부시>는 이 묘가 실제 <의순공주묘>인지 뭔지 확실한 근거가 없어 문화재로 지정 할수 없다고
  그냥 방치하고 있답니다. 이곳을 지나 다니는 산객들이나 관심있는 분들이 이 묘를 보며
  대부분 한마디씩 하며, 이런 <의정부시>의 처분을 욕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욕하기 전에 <왜 그럴까?>라고 생각해 보고 그 근거를 제시하며 욕해야 하지 않나요?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가 잘난척 습관성 비난이 난무하고 있으니....
  필자인 <파란문>은 이 묘가 <의순공주묘>라고 심정은 가지만 <의순공주묘>라고 확신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제가 "심정은 간다" 라고 하는 그 이유는....


  ['금림군 이개윤 묘']                         
  <의순공주묘>에서 30~40m 떨어진 곳에 
  <의순공주>의 아버지인 "금림군 이개윤 묘"가 있기 때문입니다.
  묘소 관리를 잘하고 있어서 <의순공주>의 묘와는 관리 상태가 완전 비교됩니다.
  여기 관리 하는 김에 옆의 <의순공주묘>라고 추정되는 묘도 관리 좀 해주지....
  묘비에는 "顯祿大夫 錦林君 墓"라고 쓰여 있으며 <부인 문화류씨>와 합장 되 있다고 합니다.
  <금림군 이개윤>은 <성종>의 서자인 <익양군 이회>의 3세손으로 왕족이었습니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가 공녀로 공주를 보내라는 명령을 받은 <효종>을 비롯한 왕족 사대부들은 
  모두 자기 딸을 공녀로 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에 자기 딸을 공녀로 보내겠다고 나선 사람이 바로 이 묘의 주인인 왕족 <금림군 이개윤>이었으며
  그 딸의 이름이 "이애숙 李愛淑"이었는데, 얼시구 좋구나 <효종>은 그녀를 자신의 양녀로 삼아
  "큰 뜻에 순응한 여인"이라고 "의순공주 義順公主"라는 칭호를 주고 <청나라>에 보냈습니다.
  '비운의 여인' <이애숙-의순공주>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소림사' 입구]                11:08     
  <금림군묘>와 <의순공주묘>라 추정하는 묘를 둘러 보고 
  다시 <소림사 입구>로 돌아와 <천보산 옆구리>를 돌며 <경흥길>을 이어 갑니다.
  여기서부터 <의정부시 소풍길>과 함께 하기에 지금부터는 <의정부 소풍길>을 참고 하면 되겠습니다.
  <현충탑>까지 "6.2km'라고 알려 줍니다.

  
  ['천보산 둘레길']                         
  <천보산> 옆구리 <의정부소풍길>을 걸으며 <의순공주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때는 바야흐로 조선시대 <병자호란(1636년)>이 있었던 후 <효종> 때 였습니다.
  <조선>은 <청나라>에 치욕의 패배를 한 댓가로 왕과 대신의 아들들을 인질로 보내고, 
  <조선>의 수많은 딸들을 '공녀'로 바쳤는데, 이때 공녀로 간 소녀들이 수만명이랍니다.
  <병자호란> 때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한 <인조>가 얼마후 인질로 잡혀 갔던 아들 둘이 돌아 오자
  둘 중에 <소현세자>는 자신이 죽이고, 둘째 <봉림대군>을 왕에 오르게 하니 그가 바로 <효종>이었죠.
  그 때 <청나라>도 <태종(홍타이지)>가 죽고 어린 아들이 황제로 즉위하였는데, 
  너무 어린지라 황제의 삼촌인 "도르곤"이라는 놈이 섭정을 하며 황제 대역을 하는 최고 권력자였죠..
  하필이면 그때쯤에 아내를 잃은 <도르곤>은 사신을 보내 <조선> 왕의 딸, 즉 공주 중에서 
  자신의 배필을 구해줄 것을 요구해 왔습니다.
  그 놈 <도르곤>은 자신들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한 조선의 공주를 아내로 삼고 싶었던가 봅니다.
  <효종>에게는 공주가 다섯명이나 있었지만 어찌 그런 못된 놈의 오랑캐에게 
  그 귀하디 귀한 공주를 시집보낼 수 있겠는가... 더러워 미칠 지경이었겠죠.
  <병자호란>때 잡혀갔다가 되돌아온 많은 여인들이 "환향녀→화냥년"으로 불리면서 
  치욕스런 대접을 받았던 것도 그 때였으니....
  그렇지만 전쟁에서 처절한 패배를 당한 <조선>은 나라의 힘이 부족하니 청나라를 무시할 수 없었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무슨 더 큰 행패를 부릴 지 모르기 때문에
  <효종>의 고민은 깊어만 갔답니다. 대신들도 당연히 덩달아 걱정이 많았습니다만...
  다행히도 얼마후 <청나라>는 꼭 공주가 아니어도 왕족이나 대신의 딸이어도 좋다는 언질을 줍니다.
  얼씨구나 <효종>은 종친과 대신들을 불러 대책을 의논하며 왕족이나 대신들의 도움을 은근히 기대
  했습니다만, 대부분의 왕족과 대신들은 저마다 자신의 딸을 숨기기에 바빴답니다.
  이는 사랑스런 자신의 딸을 지키고,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한편으로는 국가적 위기를 외면하는 것이기도 했겠죠.
  누군가는 희생양이 되어야 그들의 요구와 행패를 막을 수 있을 텐데....
  짜쟌~~ 이때 왕족의 한 사람인 <금림군 이개윤>이 용맹스럽게 <효종> 앞에 나섭니다.
  그는 <성종>의 4대손으로 당당한 왕족 종실의 한 사람이어서 자격도 갖추고 있었는데
  <금림군 이개윤>은 스스로 자신의 딸을 <청나라>에 시집 보내겠다고 자원합니다.


  [전망명소]                   11:20

  ['의정부시' 조망]                               
  <소림사> 입구에서 12분 정도 오름길을 오르면 <전망명소>를 만납니다.
  오늘 날씨는 맑으나 연무가 껴 조망은 별루이군요.
    <의순공주의 결혼>에 대한 <효종 실록>을 살펴 보면 
  <금림군 이개윤>이 스스로 자신의 딸 "이애숙 李愛淑"을 <청나라>에 시집 보내겠다고 자원하여 
  <효종>은 숨통이 트이게 되었는데....
  <금림군 이개윤>이 스스로 자신의 딸을 <청나라>에 시집 보내겠다는 이같은 보고를 받은 <효종>은 
  너무나도 기쁘고 감동하여 그녀를 궁으로 불러 들여 만나 그녀의 모습을 보니 공주로서의 아름다움과
  위엄까지도 갖추고도 남음이 있어 너무 좋아 했다고 기록되 있습니다.
  그리하여 <효종>은 그녀를 자신의 양녀로 삼고, "의순공주 義順公主"로 호칭토록 하였답니다.
  <이애숙>은 이제 조선의 공주 <의순공주>로 신분 세탁이 된 것이었습니다.
  <의순義順>이라고 한 것은 '대의에 순종'했다는 뜻이니 결국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운명에 
  순종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니 <효종>의 교묘한 방법으로 희생양이 된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딸을 공녀로 바치겠다고 한 <금림군 이개윤>과 기꺼이 가겠다고 한 
  <이애숙>이지만, 하지만 당시 <이개윤>과 그 딸의 장한 결심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답니다.
  어느 누가 머리 빡빡깍고 싸움 밖에 모르는 미개한 몽고놈들에게 시집 가고 싶어 했겠습니까?
  <유교문화>가 <조선>을 지배하는 사회관념 속에서 사람들은 <이개윤>을 두고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딸을 팔아먹은 자라고 비방하기도 했답니다.
  <유교문화> 속에선 당연한 비방이겠죠?
  사실 <의순공주>는 조선의 여인 중에서, 특히 왕족과 대신의 딸들 중에서,
  누군가는 <청나라> 황제역활을 하던 <도르곤>의 배필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수용하였던 것인데
  그것은 돈을 위한 것도 아니고 권력을 갖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 됩니다.
  그들은 왕족으로서 이미 적당한 돈과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자신의 희생을 통해  타인의 괴로움을 경감시켜 주려는 
  "살신성인의 정신", 바로 그것이었다고 필자인 <파란문>은 생각해 주고 싶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살펴 보면
  <효종 1년> 1650년 4월 22일,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출발하자 <효종>은 서대문 밖 <모화관>까지 나아가 송별했으며, 
  백관들은 반으로 나누어 <홍제원>까지 수행토록 했다. 그녀의 오빠 두 명이 수행원으로서 
  그녀를 청나라까지 배종하였고, 우수한 역관 5명, 공노비 중에서 선발된 시녀 16명과 
  유모, 몸종, 수모(首母: 머리단장과 화장을 책임지는 여성), 의녀 등이 그녀를 따랐다. 
  5월 21일, <도르곤>이 6만 명의 수행인을 이끌고 <산해관> 부근의 연산(連山)으로 마중나와
  혼인의식과 초야를 치렀다.
  
  이와 같이 <의순공주>의 혼례는 국가적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진행 되었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수 있으니 떠도는 설화에 현혹되지 말아야 겠습니다.


  [오름길]

  [내림길]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다시 내려 가면 계단이 나타나는데....
  <조선 국왕>의 대대적인 환송을 받으며 시집간 <의순공주>의 <청나라>에서 생활을 알아보면...
  이런저런 상황 속에서 <효종>의 극진한 애정과 후원을 받으며 
  마침내 청나라로 간 <의순공주>는 <도르곤>과 정식 결혼식을 올렸답니다.
  몽고족 <도르곤>이 <조선>의 <의순공주>를 보자마자 조선공주의 기품있는 모습과 아름다움에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나 뭐래나....여튼 무지 흡족해 했다고 한것은 틀림 없었답니다.
  (일부 설화에는 못 생겨서 소박 맞았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이는 <유교문화>의 <조선백성>이
  <의순공주>를 '화냥년'으로 비하 시키기 위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기록에는 <도르곤>이 <의순공주>를 가리켜 "백송골"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는데
  그것은 "흰색의 매"라는 뜻이니 그녀가 매처럼 날렵하고 고운 자태를 지녔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쁘지 않고 기품없는 여자였으면 <조선 조정>이 <청나라>에 공녀로 바쳤겠습니까? 후환 두렵게...
  결혼한 <도르곤>과 <의순공주>는 금슬이 좋았다고 합니다.
  <의순공주>도 <도르곤>을 사랑하는 마음이 싹텃던 것으로도 보입니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불행하게도 <도르곤>은 <의순공주>와 결혼한지 불과 7개월만에 사냥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만약 <도르곤>이 오래 살았다면 둘 사이의 사랑도 깊어지고,
  그 만큼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도 좋아졌을 것인데.......
  <도르곤>이 죽자 <의순공주>는 <청나라>의 다른 황족인 <박락>이라는 놈에게 넘겨 졌으나...
  두번째 남편인 <박락>도 1년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그녀의 삶도 무지무지 불행한 것이죠?
  그녀는 이후 <북경>에서 3년여간을 혼자서 쓸쓸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갈림길]                      11:28             

  [갈림길]                      11:32

  [갈림길]                       11:43    
  <의정부시 금오동>의 주택가와 아파트단지에 밀접한 산이어서 곳곳에 접속로가 많아 갈림길이
  많았으니 길찾기에 유의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의순공주>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 오는 과정과 그 후를 알아 보면...
  <효종 6년> 1655년, <의순공주>의 아버지인 <이개윤>이 조선의 사신으로 '북경'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수소문한 끝에 자기의 딸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청나라 황제>에게 글을 올려 자기 딸인 <의순공주>를 조선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하였고
  <청나라> 황제도 이를 허락하였답니다.
  <청나라>의 황제인 <순치제>가 보낸 칙서의 내용을 인용하면... 
  "<의순공주>가 미망인(孀)이 되어 종친의 사저(邸)에 지내며 부모 형제와 멀리 떨어졌으니
  측은하게 여긴지 오래 되었는데, 아비인 <이개윤>이 딸을 보고자 주청하니 더욱 안쓰러워 
  의정대신(議政大臣)과 함께 귀국시켜 친지와 살 수 있도록 하니 조선에선 따르라."
  
  <효종 7년> 1656년 4월 26일에 <의순공주>가 조선으로 귀국하였다고 기록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16세에 고국을 떠난지 7년만에 아버지를 따라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죠.
  <효종>은 <호조>에 명을 내려 그녀에게 매달 쌀을 내려 평생을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친척과 이웃들의 못된 비아냥과 손가락질이었답니다.
  <청나라 오랑캐>에게 몸과 마음을 더럽힌 여자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화냥년"~
  <조선 조정>까지도 더이상 정치적 가치도 사라진 그녀에 대해 태도도 돌변했습니다.
  <사헌부>에서 <의순공주>를 조선으로 데려온 <금림군 이개윤>을 탄핵하여 파직시켰으며
  <사간원>에서는 파직으로는 벌이 부족하다 하여 <이개윤>은 삭탈관작되어 성 밖으로 쫓겨났고
  또한, 귀국한 <의순공주>의 칭호는 "이개윤의 딸(女 혹은 女子)"로 격하되었답니다.
  나쁜놈들 X씨끼들~
  <효종>의 지극한 보살핌도 주위 사람들의 멸시와 냉대를 극복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녀는 그렇게 쓸쓸하게 세월을 보내다가 조선에 돌아온지 6년만에 병으로 죽었답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28세의 꽃다운 젊은 나이였습니다.
  <효종>은 그녀의 죽음을 가련하게 여겨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배려해 주었지만
  국가 권력에 의해 정략적 재물로만 쓰여지고 버려진....
  슬픈 아픔을 간직한 여인의 초라한 묘에는 몇닢의 낙엽만 묘를 덮고 있을 뿐 이었습니다.

  결국 그녀도 <환향녀→화냥년>이 되고 말았으며 그녀의 묘도 그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듯 합니다.
  <경흥길>을 걸으며 만난 <공주>들의 묘....
  <숯장수 한경록>에게 시집 보내진 <의혜공주> 이야기와 함께 <의순공주>의 기구한 운명은
  <경흥길>을 걷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군요.


  [내림길]  

  [다리]                     11:44    
  <천보산 둘레길>인 <의정부 소풍길>을 내려 가면 처음으로 다리를 하나 만납니다.
  이 다리 앞에는...
 

  ['금오동 파스텔아파트']               11:45       
  '의정부시 금오동'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파스텔아파트>가 지척에 있는데
  <경흥길>은 좌측 산능선으로 올라 갑니다.
  2분 정도 올라 가면....
 

  ['화춘군묘' 조망]                       

  ['화춘군묘']                    11:47~11:50       
  "화춘군묘 花春君墓"를 만납니다.
  잠시후 만나게 될 "인성군 仁城君"의 손자이더군요.
  그러니까 <선조>의 일곱번째 아들이 <인성군>이니 <선조>의 증손자가 되겠습니다.
  조선시대엔 왕족은 과거에 응시 할수 없어 일반관직에 나갈수 없었는데, <화춘군>은 품행과
  학식이 중후해서 왕족 종실 신분으로 관직에 입직 출사하여 관직에 진출한 희귀한 사례라고 합니다.
  문관 겸 무관으로 관직생활을 하며 <명의대부明義大夫>와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總府 都總管>의 
  지위에 올랐던 특출한 왕족이었답니다.
 

  ['천보산' 조망]            

  ['인성군묘' 조망]                          
  <화춘군묘>에서 능선으로 올라 가면 <천보산 정상>이 조망되고
  <인성군묘>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성군묘' 조망]                   


  ['인성군 묘']                12:12~12:46              
  "인성군 묘 仁城君墓"
  <인성군>에 대해선 안내문에 설명이 되 있습니다.


  ['인성군묘'에서 조망]                        
  <선조>의 일곱번째 아들인 <인성군>은 비운의 혁명가 였답니다.
  엄청 똑똑한 인물이었지만 결국 쿠데타에 연루되어 조카인 <인조>에 의해 사사되었답니다.


  ['가톨릭대 의정부성모병원' 조망]                       
  <인성군묘> 뒤로 올라 펼쳐지는 <의정부시 금오동>과 <가토릭대 성모병원>을 조망하고
  계단을 따라 내려 가면...


  ['천보산 탑고개' 등산로 출입구]                 12:48     
  <천보산 탑고개>와 연결되는 등산로 입구를 만나 통과합니다.
  여기서 <천보산 탑고개> 방향으로 올라 가면 <인성군>의 어머니인 <정빈 민씨 묘>가 있습니다.
  <정빈 민씨>는 <선조>의 후궁이죠.


  ['바위고개']                12:57       
  <탑고개 등산로 입구>에서 10여분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가면
  바위를 쌓아 놓은듯한 독특한 城같은 고개를 만나고

 
  [내림길]                   
  계속해서 내림길을 6분여 내려 가면...


  [계곡]                  1:03      
  계곡을 만나고...

 
  [오름길]                 
  다시 오름길을 10여분 오르면....

             

  [송전철탑]               1:12      
  송전철탑이 지나는 봉우리에 도착하는데...
  여기선 좌측 아래에 있는 <양주터널>로 통하는 도로에서 나는 자동차들의 굉음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쉼터]                  1:13

  ['축석령' 조망]                  
  송전철탑 앞에는 간이 의자 하나가 있는 쉼터가 있는데
  오늘 코스의 종점인 <한북정맥> 마루금이 지나는 <축석령>이 조망됩니다.
 

  [내림길]

  ['자금사거리 굴다리']                 1:22          
  다시 10여분 내림길을 내려 가면 <자금사거리 굴다리>를 만나 통과하면...


  ['자금사거리']               1:24       
  <자금사거리>를 만납니다.
  <의정부>에서 <양주 고읍>으로 통하는 <양주터널 입구>이고...


  ['금곡교버스정류장']              1:25        
  이어서 <금곡교버스정류장>이 있는데, 오리지날길은 여기서 좌측으로 갑니다만
  그냥 이 <43번국도>를 따라 가도 큰 차이 없더군요.
  15분 정도 진행하면....


  ['본자일' 입구]                    1:40        '
  <본자일입구>를 만나는데 여기서 길을 건너 가라고 안내합니다.
  길을 건너 건너편 길을 따라 4분여 올라 가면....


  ['축석령 옛길' 입구]                  1:44          
  <축석령 옛길 입구>를 만나며 <경흥길>과 <소풍길>은 우측 옛길로 안내됩니다.


  ['축석령' 조망]                1:50       
  <한북정맥>이 지나는 <축석령>이 조금 더 가까이 조망되는데, 여기서 보니 좀 큰 고개 같군요.


  ['현충탑' 입구]                 1:58       
  이어서 <현충탑 입구>를 만나는데 안으로 올라 가면....


  ['현충탑']

  ['현충탑' 의미]                           
  조금 독특한 모양의 <현충탑>이 건립되 있고...


  ['천보산' 조망]                
  뒤돌아 보니 지나온 <천보산>이 조망됩니다.
 

  [''현충탑' 동문]                    2:03      
  <현충탑 동문>은 잠겨 있지만 편의상 그냥 문을 넘어 가서 
  10여분 옛길을 진행하면...


  ['43번국도' 합류]                 2:12        
  헤어졌던 <43번국도>를 다시 만나고


  ['축석령']                  2:17    
  이어서 <의정부시>와 <포천시>의 경계를 넘어 <포천시>로 들어 가고...


  ['축석령 삼거리']                2:19            '
  이어서 바로 <축석고개 삼거리>를 만나는데


  ['제2길 천보산길' 종점-'제3길 축석고갯길' 시점]          2:20    
  삼거리에는 <호국로>라는 표지석과 조형물이 있으며
  <경흥길 제2길 천보산길>의 종점이 되겠습니다.
  <경흥길 제3길 축석고갯길>의 출발 안내판과 <스탬프함>은 우측 뒤에 있으니 유의해야 하겠더군요.
  오늘 걸은 거리는 11,5km였으며 4시간 20분이 걸렸습니다.
  이번 코스도 <천보산>의 옆구리를 오르내리는 등산로로서 제법 체력소모를 요하는 코스였습니다.
  <의순공주>의 기막힌 삶과 국가에 의해 희생된 한 여인의 운명을 기록을 통해 알아 보며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관심있게 눈여겨 보아야 할 의미있는 답사길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여기클릭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