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삼청공원에서 북촌을 따라 광교까지』
                        <2부>
   <1부> 못 보신 분들은  [종로구]청계광장에서 중학천을 따라 삼청공원까지 답사기 여기 클릭
 

  [전체 답사 지도] 

  ['여섯번째구간-삼청공원에서 김형태가옥까지 실트랙]                 
    6. "삼청공원-감사원-취운정-현상윤집터-동양차문화원-
        맹사성집터-북촌6경-이명박살던집-이준구가옥-김형태가옥"


  ['삼청공원 정문']                 
   
  2021년 11월 16일 (수) 맑음   
   "1부 청계광장에서 중학천을 따라 삼청공원까지"에 이어 <2부>가 시작됩니다.
  
  물이 맑고 <水淸>, 숲이 맑으며 <山淸>, 사람의 마음까지도 맑은 곳 <人淸>
  그래서 "삼청 三淸"이라 한다는 <삼청공원>의 정문을 통과하여 <감사원> 앞으로 가면...


  ['감사원']               
  <감사원>을 만나는데 <감사원> 앞에 <주한 베트남 대사관>이 있고


  ['취운정 터']                      
  <감사원> 정문을 지나 <삼청터널 입구>로 가면 모퉁이에
  "취운정 터 翠雲亭址" 표지판이 있습니다.
  <명성황후>의 족벌 중에 변절하지 않고 청렴했던 몇 않되는 인물중에 한 분이 "민영익"인데
  그의 아버지 "민태호"가 지은 집이 <취운정>이며 대를 이어 살던 집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감사원> 주변이 <취운정>이었다고...
  <민씨 족벌 세도정치>의 대명사인 아버지 <민태호>는 <갑신정변> 때에 개화파에 의해 참살 당했는데
  그의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반대의 길을 걸은 <민영익>이죠.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 다를수 있나?
  그런데 이들과 비숫한 <친일파 아버지와 독립군 아들>은 또 여럿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비유학생인 <유길준>이 이 <취운정>에 유폐인지 여튼 숨어 살며 쓴 유명한 책이 
  "서유견문 西遊見聞"이라서 <취운정>이 일반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답니다.
  <유길준>은 개화파였지만 결국 변절하여 일본으로부터 하사금까지 받아 챙겨 아쉬움을 남깁니다.
  일본은 친일에 고맙다고 작위까지 하사했지만 하사금만 받고 작위는 받지 않아 그나마 다행.
  *<유길준 묘>는 <하남 검단산 등산로>에 있지요.


  ['중앙중고교']                 
  이어서 <중앙중고등학교> 후문을 만나는데 여기도 찾아 봐야할 곳이 몇 있어 다음에 답사할 예정입니다.


  ['중앙중고' 조망]                   
  <중앙 중고등학교>에서 꼭 봐야 할 곳은 <창덕궁>과 <신선원전>인데 다음에 근접 촬영 하기로 하고


  ['현상윤 집터']             
  <중앙중고>에서 <가회동 북촌로>를 따라 조금 내려 가면
  "기당 현상윤선생 집터 幾堂玄相允先生家址" 표지석이 있는데
  <현상윤선생>은 우리나라 제1호 박사이며 <중앙고보>의 교장을 지내고
  <고려대> 초대 총장을 지내신 교육자이자 문학가이시죠.
  <고려대> 총장 시절 <6.25전쟁>이 터졌을 때 납북인지 월북인지 북으로 가서 소식이 없었는데
  최근 알려진 바로는 <북한>에 있는 <재북인사의 묘>에 안장되 있답니다.
  *<동양그룹 현재현회장>이 <현상윤선생>의 손자랍니다.


  ['북촌로']

  ['맹사성 집터' 가는 길]                
  <가회동>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 <가회동 북촌로>를 따라 조금 더 내려 가면
  우측에 독특하게 한옥에 개업한 <이 해박는 집>이라는 치과를 만납니다.
  여기서 우측 골목으로 조금 올라 가면....


  ['한화 김승연회장집' 입구']                          
  곧 바로 <한화그룹>의 <김승연회장집> 입구를 만납니다.
  앞에 있는 집이 경비실인듯 해서 경비원에게 <김승연회장댁>이 맞냐고 물으니 자기는 모른답니다.
  나도 아는데 그런것도 모르는 사람이 여긴 왜 있지? ㅎ 알려주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는가 봅니다만
  유튜브 검색해 보면 이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이나 노동자들 동영상 많습니다.


  ['북촌 정상]

  ['맹현']                     
  조금 가파른 오름길을 잠시 올라 가면 북촌 봉우리 정상에 도착하는데 꼭대기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면
  "맹현 孟峴"이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맹사성 집터>라고 분명히 표기하지는 않고 <맹고개 孟峴>로 표기해 놨습니다.
  여기서 좌측 <동양차문화관>으로 들어 가면....
  

  ['고불서당']               
  "고불서당 古佛書堂"이라는 집이 있는데 <古佛>은 <맹사성 선생의 호>지요. 
  워낙 유명한 사육신 중에 한분이니 선생에 대해선 생략하고...
  오리지날 옛집은 아닐테고  요즘 지은듯
  여기서 우측을 보면...


  ['동양차문화원']                     
  <동양차문화원>이 있습니다.
  <북촌 北村> 조망처로는 최고라고 자랑하는데 <맹사성 집터>라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당연히 영업적인 안내로 여겨지는데 조망을 위해선 입장료를 5,000원 내야 한다고 하네요.
  차 한잔 써비스로 준다고....물론 카페 이용료로 차 한잔 마시며 조망하는 비용으로는 비싼건 아니지만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조망을 할수 있으니 시간도 없어 그냥 패스하고


  ['북촌 한옥마을']                  
  <동양차문화원> 우측 골목을 빙 돌아 가면 
  우측으로 첫번째 골목을 만나는데


  ['북촌팔경 중 6경']                       
  첫번째 우측 골목이 <북촌8경> 중에 <제6경>이라는 한옥촌이 남산을 바라보며 펼쳐져 있습니다.
  이 근처에 <북촌4~7경>이 몰려 있다는데 모두 답사하지는 못하고...
  이 한옥촌은 일제시대에 <정세권>이라는 건축업자가 지어 분양한 한옥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집 모양이 거의 같고...


  ['이명박 전대통령 살던 집']                      
  두번째 골목에는 <이명박 전대통령>이 대선 후보일때 길지 않은 기간동안 살았다는 집이 있는데
  <북촌로 11가길 39번지>로 '카카오지도'에는 <취운정스파스위츠바이락고재>라고 표기되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려면 <북촌>에 살아야 한다는 점괘가 있는지 <이회창 후보><정주영후보> 등도 
  <북촌>으로 일시 이사를 했죠. 결과는...ㅎ
  뒤에 <이준구 가옥>이 보이는데...


  ['이준구 가옥']

  [안내문]                           
  "가회동 이준구 가옥 嘉會洞 李俊九 家屋"
  현재 이 집의 소유자가 <이준구>라는 사람이니 그에 대해선 알 필요 없고
  이 집을 처음 짓고 산 사람이 중요하죠? ㅎ
  반민족행위자 <민영휘>의 맏아들 <민대익>이 세도가의 위세를 떨치며 지은 일제시대 집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이 집은 원래 집의 일부만 남아 있다고 하니 원래 이 집 규모를 짐작 할수 있겠습니다.
  일제시대에 개성에서 신돌이라는 화강암을 가져오고, 프랑스산 기와를 수입해서
  이런 프랑스식 양식에 한옥을 약간 가미한 대저택을 <가회동> 북촌 꼭대기에 지었으니....
  <명성왕후>를 등에 업고 세도를 부리며 부정축재를 한 <민씨 족벌>의 한 단면을 보는듯 해서 좀 씁슬...
  이 집은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는데 <이명박 살던집>  윗쪽 끝에서만 보이더군요.
 

  ['가회동 북촌로']                      
  다시 <가회동 북촌로>로 나와 조금 내려 가면....



  ['김형태 가옥'] 

  [안내문]                 
  <서울민속자료 제30호>로 지정된 "김형태 가옥"을 만납니다.
  <김형태씨>도 현재 이 집 소유자여서 알아 볼 필요가 없고
  원래 소유자는 "이달용 李達鎔"이라는 놈이군요.
  이 놈은 <흥선대원군>의 조카인 <이재완>의 아들인데, 그러니 <고종>의 오촌 조카가 되는 놈이죠.
  왕족이면서 나라를 팔아 먹는데 앞장 서며 친일행위를 한 나쁜놈 중에 나쁜놈, 치졸한 놈이죠.
 

  ['일곱번째구간-김형태가옥에서 정독도서관까지 실트랙]          
    7. "김형태가옥-가회동성당-가회동한씨가옥-진단학회터-손병희집터-
        백인제가옥-최승희집터-성삼문집터-김옥균집터-정독도서관"
 

  ['가회동 성당']  

  [안내문]                       
  <김형태 가옥>에서 조금 더 내려 가면 "가회동 성당"을 만납니다.
  "주문모 신부 周文謨"가 조선에 와서 첫 미사를 올린 곳이라는군요.
  <주문모 신부>는 <중국사람>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신부랍니다.


  ['재동초교' 뒤]                    
  <가회동 성당>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좌측에 <재동초등학교> 뒷모습니 보이기 시작하는데
  조금 못미쳐 좌측에 <휘겸재>가 있습니다.


  ['휘겸재' ('가회동 한씨가옥')]                         
  "휘겸재 (가회동 한씨가옥 嘉會洞韓氏家屋)"
  밖에서 보기엔 좀 큰 일반 한옥 같이 보이나 안에 들어 가 보면 어마어마 크고 너른 대저택입니다.
  어찌 대저택은 거의 대부분 친일파들 중에서도 최고 악질 친일파들의 집인지...에그~~
  지금은 앞에 있는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을 해야 안으로 들어 갈수 있어 들어 가 보는 건 생략했습니다.
  왜냐하면 잠시후 방문 할 <백인제 가옥>을 지은 놈이 이 집 주인이었던 <한상룡>이기 때문입니다.
  <한상룡>은 우리나라 최초 한성은행을 설립 운영했지만 악질 고리대금업자라 할수 있습니다.
  <경제계의 이완용>이라고 할 정도...
  이 쌔끼 얼마나 친일 행위를 했는지 집 이름도 <한상룡 가옥>이라 하지 못하고 <한씨가옥>이라
  했겠습니까. 잠시 후 <백인재 가옥>에서 더 자세히 알아 보겠지만
  이곳 북촌의 대저택들은 거의 대부분 다 친일매국노들의 집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재동초' 뒷골목]                   
  <한씨가옥>을 지나면 바로 <재동초등학교> 뒷골목을 만납니다.
  이 골목으로 50m 정도 조금 들어 가면...


  ['진단학회 터']                         
  "진단학회 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앞에 보이는 "락고재 樂古齋"라고 하는 한옥집이 <진단학회>가 일시 있었던 곳이랍니다.
  1934년 한국인 학자들이 조선총독부 또는 일본인 학자들이 주도하는 관변적 연구풍토에서 벗어나 
  한국 및 인근지역의 문화를 독자적으로 연구풍토를 구축하기 위해 만든 학회라고 주장 합니다만
  일부 식민사관등에서 탈피하지 못해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한 단체였죠.


  ['가회동 주민센터']                
  <재동초등학교> 됫골목 <진단학회 터>에서 다시 나오면, 건너편 좌측엔 <가회동주민센타>가 있고
  우측엔 <북촌박물관>이 있는데 골목 입구 <북촌박물관> 앞으로 가면...


  ['손병희선생 집터 표지석']                  
  "손병희 孫秉熙 선생 집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손병희선생>이 살던 집은 이 빌딩 <북촌박물관> 뒤 골목 안에 있습니다.
  

  ['손병희선생 살던 집']                                   
  "손병희 孫秉熙 선생 살던 집"
  극열 친일파가 아닌 분으로는 아마도 유일하게 대저택에서 사신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손병희선생>도 그렇게 좋게만 볼수는 없지만...
  여하튼 우리나라 <동학>의 3대 교주로 <동학>을 <천도교>로 일으켜 세우며 많은 헌금이 들어 와 
  교세가 확장되어 부유하게 된것은 틀림없는듯 합니다.


  ['백인제 가옥']                 
  <손병희선생 살던 집>에서 조금 더 들어 가면 "백인제 가옥"을 만납니다.
  <백병원>과 <인제대학교>의 설립자인 <백인제>가 살던 집이었는데
  현재는 <서울시>가 매입하여 개보수 해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32호>로 지정해 일반에 공개하고 있습니다.
  입장료는 없으며 월요일엔 휴관이니 시간 맞춰 가야 겠습니다.
  <北村>에서 두번째로 으리으리한 한옥이 되겠습니다.
  잠시 후 들릴 <윤보선家>가 제일 크고 으리으리 한데 들어가 관람 할수는 없으니 여기가 최고.
  조금전 <휘겸재(한씨가옥)>은 세번째?    
   

  ['중문']

  ['백인제 가옥' 안내문]                     
  <솟을대문>을 통과하면 중문을 만나는데 중문은 벽돌문으로 되 있군요. 
  <백인제>는 최근까지 집 소유자일 뿐이고, 이 집을 처음 짓고 산 사람이 누군인지가 중요 하겠죠?
   

  ['사랑채']                    
  이 저택의 역대 소유자는 크게 네명으로 구분된답니다.
  이 가옥을 짓고 최초로 거주한 사람은 "한상룡 韓相龍 (1880~1947)"이랍니다.
  친일매국노 중에서도 첫번째 매국노인 <이완용>이 그의 외삼촌인데 그 끝빨로 우리나라 초창기 
  금융가를 지배한 인물입니다. <경제계의 이완용>이라 할 정도였답니다.
  친일 왕족인 <고종>의 종형 <이재완>을 내세워 설립한 <한성은행>의 총무로 부임하여 
  실질적인 경영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일본 제국의 신임을 얻어 1923년에는
  <이완용>의 형인 <이윤용>의 뒤를 이어 <한성은행 두취(행장)>으로 취임하고, 
  <동양척식회사> 설립위원이 되었으며, 초대 조선총독부 총독인 <데라우찌>의 동상을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 기념회 발기인으로 활약하며 일본에 전투기를 사 주는등 뼈빠지게 친일행위를 했죠.
  당시 은행이라는게 고리대금업자였죠. 우리 백성들의 땀과 피를 고리로 빨아 먹으며 떼부자가 되어
  지은 집이 이 집과 조금 전 <휘겸재>등 여러 채랍니다.
   <압록강 흑송>을 가져다 지었을 정도이니 최고급 자재를 사용 한것은 물론 고유 한옥과 현대적
   유리창문을 조화시켜 그야말로 명품 개량 한옥을 만들었답니다.
   그리곤 총독부 고위 관료를 집으로 초청해 허구한날 연회를 배풀곤 했다는군요.
 

  ['작은 사랑채']                    
  <사랑채> 좌측엔 <작은 사랑채>가 붙어 있는데 ...
  두번째 이 집 주인은 "최선익 1905~?"이라고 하는 개성 출신 부호이자 민족 언론인이었답니다.
  <조선일보> 주주이자 기자로 활약하다가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하여 <여운형선생>을 사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부사장을 맡았답니다. 매물로 나온 이 집이 더러운 친일매국노의 집이란 걸 알면서도
  한옥에 대한 애착으로 인수하여 집을 새로 수리하고 살다가 여러 사정이 여의치 않아 <백인제>에게
  이 집을 1944년에 매각하고, 이어서 터진 <6.25 때>에 납북되어 생사를 알수 없는 상황이 되었답니다.


  ['작은사랑채'-'영상 상영실']                     
  <작은사랑채> 끝 방은 현재 <영상 안내실>로 이용하고 있더군요.
  영상에는 <백인제-최경진 부부>의 장녀가 여러 일화를 소개 하고 있었습니다.
  


  [기념사진]                    
  이 집의 세번째 주인이 "백인제 白麟濟 (1898~?)" 입니다.
  <백인제>에 대해선 안내문에 잘 설명 되 있으니 안내문을 참고 하시고...
  사진 속에 홍일점 여인이 그의 부인인 "최경진 1908~2011"이랍니다.
  <최경진여사>는 일본 <나라고등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배화여고> 선생을 할때 <백인제>와 
  결혼했다는데, 남편이 납북 된 후 <백병원>을 실제 일군 사람이랍니다.
  <최경진 여사>는 103세까지 장수했는데 뉴스였지요.
  사진 속의 인물 중에 제가 확신을 갖고 알수 있는 분은 앞줄 좌측에서 두번째에 앉아 있는 
  <춘원 이광수>이고. 가운데 <최경진여사>의 우측에 않아 있는 <서재필>입니다.
  <백인제>는 윗줄 좌측에서 다섯번째라고 하는데 정확치 않습니다.
  <서재필>은 독립운동가로 교과서에 까지 실리며 포장됬지만, 일찍이 <미국 국적>을 취득한 
  미국사람이며, 스스로 미국사람이고 싶어하며 조선을 우습게 본 철저한 이기주의자였죠.
  <갑신정변> 쿠데타의 주역 중 최연소 22살의 <서재필>은 일본으로 토꼈다가 미국에 귀화하고..
  미국에서 정식 의사는 아니지만 여튼 의사 인턴까지는 해서 <백인제>와 더 가까운척 한듯..
  여하튼 당시 내노라하는 인물들이 초대되어 기념사진을 찍은 것은 틀림없네요.


  ['백인제-최경진 결혼사진']                        
  신랑 <백인제> 우측 옆에 흰바지저고리를 입은 사람이 <춘원 이광수>랍니다.
  사제지간이라고 하는군요.
  여튼 일제시대 무지 인기있는 외과의사였던 <백인제>는 떼돈을 벌었나 봅니다. 
  진료를 받을려는 환자들이 한달 이상 줄을 서야 할 정도였다니....
  그러니 이런 집도 사들이고, 대학도 설립하고 <백병원>이라는 종합병원도 만들고....
  <백인제>는 특히 사냥을 좋아해서 <북한산>등으로 사냥을 나가 잡은 맷돼지 등으로
  이 집 정원에서 미국국적의 <서재필>등을 초대해 바베큐 파티를 자주 열었다고 하네요.



  [안내문]                 
  <백인제-최경진 부부>가 이 집을 매입하게 된 동기와 과정은 안내문에 나와 있습니다.


  [안채와 2층]                
  <사랑채> 뒤에는 <안채>가 있는데 2층이 있습니다.
  <한상룡>이 이 집을 지을 때 친일파로서 일본식 집 흉내를 낸게 아닌가 추측한답니다.


  [안채 뒤 부엌과 좌측 별채]               
  <안채> 뒤로 돌아 가 보니 부엌이 상당히 크고
  또 다시 <별채>가 상당한 규모로 있는데 <백인제>의 장인 장모가 살았다고 하네요.
  <백인제>는 이 집에서 고작 6년 정도 살다 북으로 갔으니, 아마도 부인인 <최경진>이 친정 부모를
  이곳에 모셨다고 봐야 하겠죠?
  

  ['별당']

  [안내문]                 
  제일 높은 곳에 있는 <별당>입니다.
  <한상룡>이 인생 절정의 쾌락을 즐기며 영원토록 살고자 마련한 <별당>이었겠지만 
  그도 고작 67세를 일기로 세상과 하직했습니다만, 당시 하도 사람들로 부터 욕을 많이 얻어 먹어서인지
  그 당시 나이로는 제법 오래 산 것이죠? ㅎㅎ
  그 후 집주인이었던 <최선익>과 <백인제>도 인생 중반에 북으로 가 죽었으니 인생무상입니다.


  ['별당']                   
  <별당>을 나오며 뒤돌아 본 <별당>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집 자체만은 정말 멋있습니다.


  ['별당' 앞 산책로]                        
  <별당> 앞에서 담장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 있군요.
   

  ['사랑채'와 '안채' 조망']                        
  의사가 되어 돈 많이 번 <백인제>는 <6.25>때에 미처 피난을 못가 북으로 잡혀갔답니다.
  부인 <최경진여사>와 사이에서 2남 4녀를 두고 모두 잘 키웠다고 입시철만 되면 주목 받았죠.
  생사를 알수 없게 된 <백인제> 다음으로 그의 부인 <최경진여사>가 이 집의 제4대 주인이 되어 
  원형 변경없이 이 집을 잘 가꾸고 살다가 이 집은 2009년 11월에 <서울시>에 넘기고
  자신은 2011년 7월 3일 10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답니다.


  ['정독도서관' 조망]                        
  <백인제 가옥> 옆에는 <옛 경기고> 자리인 <정독도서관>이 붙어 있습니다.
  잠시후 도서관에 올라가 이곳을 조망하겠습니다.


  ['재동초앞 교차로']                      
  <손병희선생 집>과 <백인제가옥>이 있는 골목에서 다시 <가회동 북촌로>로 나가면
  <재동초등학교 앞 사거리>를 만나는데, 대각선 건너편에 있는 <한뫼촌>이라는 음식점인
  <옛 최승희 집>을 다녀 오도록 합니다.


  ['최승희 집' 입구]

  ['최승희 집' 입구]                                  '
  <최승희집>은 <헌법재판소> 북측 건너편에 있는데 현재 "한뫼촌"이라는 음식점입니다.
  골목 안으로 들어 가면....
   

  ['한뫼촌']                        
  <한뫼촌>이라는 음식점 입구 벽에 "최승희 집터"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최승희' 사진]                            
  <한뫼촌> 대문 안에는 <최승희 사진>이 두장 걸려 있더군요.
  우리나라 최초, 최대 한류스타였던 월북 무용수 <최승희의 집>이었답니다. 
  현재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지금은 한정식집으로 쓰이고 있어 어쩐지 아쉬움이 있습니다.
  
['북한 애국열사 능'에 잠들고 있는 '최승희']
"최승희 (1911~1969)" 18살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열고, 25살에 <나의 자서전>을 썼고, 그의 책 <조선민족무용기본>과 <조선아동무용기본>은 조선 춤의 기본 교과서가 될 만큼 무용에 대해선 천재였다고 불려진 여인이죠.
['한뫼촌' 음식점] <최승희>가 살았던 집 안을 횡하니 둘러보고 ['홍현' 조망] 다시 <재동초 사거리>로 나와 서쪽으로 올라 갑니다. 서쪽엔 나즈막한 언덕이 보이는데 언덕으로 올라 가 <정독도서관>을 둘러 보고 다시 내려와 좌측 <윤보선家>로 가는 골목으로 갈 예정입니다. ['홍현'] 붉은 흙이 고개를 뒤덮고 있어 "홍현 紅峴"이라 한답니다. 지금은 물론 아스팔트로 뒤덮혀 있지만 이 고개엔 <서울교육박물관>이 있는데 <옛 경기고등학교>의 한 건물입니다. 좌측 <정독도서관 정문>으로 들어가 이리로 나올 예정입니다. ['동아일보 창간사옥 터'] <정독도서관> 정문으로 가는 내리막 길 <정독도서관 정문> 앞에는 "동아일보 창간사옥 터"라는 표지석이 있고 ['정독도서관' 정문] "정독도서관" 정문에 도착합니다. "옛 경기고등학교"로서 도서관으로 바뀌고 나서는 처음으로 방문하는 겁니다. 정문에는 "장원서 터""성삼문 선생 살던 곳"이라는 표지석이 역사적인 곳이라고 강조하고 ['옛 경기고'] 머리를 싸메고 이 교문을 통과하려고 공부했던 그 시절이 눈 가에 눈웃음 치게 하는 군요. ^.^ ['정독도서관'] 이제는 "정독도서관 正讀圖書館"으로 변모해 시민들의 휴식과 양식을 주는 곳이 되었군요. 여기서 우측으로 가면.... ['도서관 중앙통로'] 본관으로 올라 가는 중앙 통로가 있는데, 예전엔 운동장이었던 곳을 공원으로 조성해 놨습니다. 여기서 우측을 바라보면.... ['김옥균 집터 표지석' 조망] ['김옥균 집터'] 모르고 가면 찾기 어려운 "김옥균 집터"표지석이 있습니다. <서재필>도 이곳 <김옥균>의 집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다지요.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쿠데타가 모의 된 곳이기도 합니다. <갑신정변>에서 실패한 <김옥균>은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지요. 10년간에 걸친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다시 집권한 <민씨 정권>은 이들을 대역죄인으로 규정하고 자객을 보내는 한편, 일본 정부에 이들을 송환할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거절했고 하지만 일본은 1886년 8월 이용가치가 떨어진 <김옥균>을 '오가사와라 섬'에 연금시켰고 1888년에는 '홋카이도'로 이송했다가 1890년에야 풀어 주었답니다. 일본에 배신감을 느끼며 실망한 <김옥균>은 1894년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과 담판할 생각으로 '상하이'로 건너갔으나, <민씨 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洪鐘宇)>에게 암살되었습니다. <청나라>는 <김옥균>의 시체와 <홍종우>를 조선 정부에 인도했고 <김옥균>의 시체는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어 전국에 효시되었습니다. 효수 사진이 있는데 처참해서 못 올리겠습니다. 같은 쿠데타 동지 였던 <박영효>가 <김옥균>에 대해 일본에 망명해서 살며 자주 언급한 말을 인용하면... "옥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대는 무능한 자야.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탕아지. 도쿄에서 조선 사람, 일본 사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 물쓰듯하고 말이지. 결국 갑신혁명이 실패한 것도 그런 엉터리 지도자 때문일세. 그를 믿고 설익은 청년들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 꼴이 난 걸세. 그렇다고 옥균이 진짜 리더였나? 나와 홍영식이 다 했지" 충남 아산에 있는 <김옥균 묘>에 세워진 <묘비명>에는 "嗚呼,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비상한 시대를 만났지만, 비상한 공적도 없이, 비상한 죽음만 얻었도다." ['경근당''옥첩당' 있던 곳] 서쪽편엔 운동장이 공터로 남아 있는데 <1부>에서 언급 한바 있는 <경복궁 건춘문> 앞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을 <전두환 쿠데타 세력>들이 그 자리에 <기무사 테니스장>을 만든다고 문화재를 지들 맘대로 이곳으로 이전 했던 곳입니다. 민주화가 되고 다시 원래 자리로 이전 했으니 망정이지만 문화재도 모르는 무식한 군바리들의 행태는 이것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정말 과관이었습니다. <경근당>과 <옥첩당>이라는 문화재가 테니스장을 위해 <전두환 패거리들>이 국민의 세금을 들여 유랑생활을 시킨 것이니...그도 그저께 저 세상으로 갔더군요. 이 공터 우측 끝 <백인제 가옥 조망>이라고 표기 한 곳으로 가 보면.... ['백인제 가옥' 조망] 조금 전에 관람했던 <백인제 가옥>이 가까이 조망되고... ['인왕제색도' 기념탑] 공원으로 조성된 운동장 가운ㄷ데로 다시 가면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인왕제색도 기념비"가 있습니다. 비 내린 후의 인왕산의 경치를 그린 국보 그림이죠. 깜박하고 여기서 바라보는 <인왕산>을 촬영 못해 아쉽습니다. 다음에 꼭 촬영해야지... ['경기고 본관 앞'] [안내문] "정독 도서관 正讀圖書館" 한자로 <正讀>이라고 쓰는데...원래 "책을 깊이 있게 읽다" 할 때는 <精讀>이라고 하죠. 여기는 <박정희 전대통령> 이름의 <正>를 넣어 지은 도서관 이름이라서 그렇게 됬다고... 또한 "Library"를 우리말로 "도서관"이라고 한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 생각이지만.. '책을 많이 비치하고 그 책을 읽는 곳'에 <그림 圖>가 왜 들어 가느냐라는 것 때문입니다. 일본식 번역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그렇다치고... [물레방아] ['도서관 2관 3관 사이] 공원화 된 도서관을 이곳저곳 둘러보고 ['서울교육박물관'] <홍현 紅峴>에 있는 <서울교육박물관> 앞으로 나가면... ['여덜번째구간-서울교육박물관에서 안동별궁터까지 실트랙] 8. "정독도서관-서울교육박물관-조선어학회터- 윤보선家-감고당터-안동별궁터" ['홍현'에서 '윤보선가' 가는 길] <재동초 사거리> 방향에 우측 <윤보선家> 가는 길이 있습니다. ['윤보선家'와 '조선어학회터'] 골목으로 들어 가면... ['조선어학회 터'] "조선어학회 터 朝鮮語學會址"표지석을 만납니다. <한글학회>의 전신이죠. 이런 좋은 일 하던 사람들의 활동 공간들은 왜이리 초라한지...ㅠ ['윤보선家' 담장] ['윤보선家' 정문] <北村> 최고의 한옥 저택인 "윤보선家"를 둘러 봅니다만 현재도 후손들이 살고 있어 내부는 공개되지 않아 들어 갈수 없어 아쉽습니다. <4.19혁명>에 의해 <이승만독재정권>이 무너지며 탄생한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살던 집입니다. <윤보선대통령>의 아버지 <윤치소>는 누구인가...이런 정도는 알고 가야죠? 친일반민족행위자 <윤웅렬>과 동생 <윤영렬>....<윤영렬>의 아들이 <윤치소>이고 <윤치영>의 형이죠. <윤보선>의 아버지 <윤치소>는 <동학농민군> 토벌에 앞장서며 <조선총독부 참의>까지 올라간 사람입니다. 세째 아들인 <윤원선>은 그러니까 <윤보선>의 동생은 <흥선대원군>의 증손녀와 결혼하여 황실 가족이 되기도 했지요. ['감고당길'에서 '정독도서관' 조망] <윤보선家>에서 나와 <감고당길>로 들어서서 뒤돌아 보면 조금전에 들렸던 <정독도서관>이 가까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 길은 <옛 경기고 학생>들의 등하교길이었습니다. ['감고당길'] 이어서 <육교>를 하나 만나는데 이 육교 유명한 육교이죠 ㅎㅎ 이 육교는 좌측 <덕성여고>와 우측 <덕성여중>을 연결하는 교내 육교인데 옛날 <서울 5대 극성> 기억하십니까? 그 중에 대표 극성 여고가 <덕성여고>라고들 했죠? ㅎㅎ 당시 농담 하나 언급하면...저 육교 위에서 <덕성여고 여학생>들 일부가 밑에 등하교하는 <경기고 남학생>들을 히야까시ㅎ 히곤 했다는...ㅎ <풍문여고>는 몸빼바지를 입었었고 <덕성여고>는 치마를 입었었는데...ㅎ ['덕성여고' 정문] ['덕성여고'] "덕성여고"는 그렇게 예전도 아닌 1966년까지 "감고당 感古堂"이 있었던 곳이랍니다. <숙종>의 두번째 왕비인 <인현왕후>가 그 유명한 <장희빈>에 의해 폐비가 되어 쫒겨나 폐서인으로 산 곳이 <감고당>이랍니다. 또한 <명성왕후>가 여덟살 때에 한양으로 올라와 이곳에서 살았는데 왕비로 간택.책봉 되는 1866년<고종3년>까지 머물렀답니다. 그런 연유로 건물은 현재 <여주>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로 이전 복원되 있습니다 사진 보여 드리면... ['감고당'- 현재 '여주' <명성황후 생가>에 이전 되 있슴] 더 자세한 사항은 "여주여강길 5코스 황학산길" 답사기 여기 클릭 ['여성독립운동가길'] <감고당길>은 또한 <여성독립운동가길>이라고도 하는군요. <덕성여고>와 붙어 있는 <옛 풍문여고>로 가면... ['서울공예박물관'] ['옛 풍문여고'] "풍문여자고등학교"가 있었던 자리 입니다만, 현재는 "서울공예박물관"으로 변모해 있군요. <명성왕후>의 <민씨 족벌정권>은 부정부패가 극에 달해 전국에서 <동학혁명><임오군란>등 여러 반란이 일어나며 나라는 아수라장이 되기 시작했지요. 이 틈을 노리는 외세의 침락 그림자가 드리우고.... <고종>은 민심수습을 해야 했습니다. 그 첫번째로 <부정축재 가문>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그 중에 <민영휘>에게도 명령을 내려 어쩔수 없이 재산의 아주 일부를 내 놓고 설립한 학교가 <휘문고등학교>와 <풍문여자고등학교> 랍니다. 당시 설립된 사립학교 다수가 그런 조치로 설립됬지만.. <고종>이 학교 이름도 지어 줬는데 돈을 낸 <민영휘>의 <휘 徽>에 <글 文>자를 붙여 <휘문 徽文>이라 하고, 또한 <민영휘>의 처인 <안유풍 安遺豊여사>의 <풍 豊>에 <글 文>을 붙여 <豊文>이라고 했답니다. 필자인 <파란문>이 <휘문高> 출신이라 잘 압니다. ㅎ 그러니까 <휘문>과 <풍문>은 같은 뿌리인거죠. 지금도 <민씨 가문>이 운영하고 있지요. 그런데 <휘문>은 일찌기 <강남>으로 이사했지만, <풍문여고>는 2017년 3월에 남녀공학학교가 되어 <자곡동>으로 이사해서 <풍문고등학교>가 되었더군요. ['풍문여고'와 '안동별궁'] [이전 복원 되 있는 '안동별궁'] [안내문] "안동별궁 安洞別宮" 이 곳은 원래 왕실의 대군들이 살던 <연경궁>이 있었는데 <고종> 때에 건물을 새로 지어 <고종>과 <명성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순종>의 가례를 올렸는데 <순종>의 첫번째 세자빈인 <순명효왕후 민씨>와 결혼식을 올렸고, <순명효왕후>가 죽자 두번째 <순정효왕후 윤씨>와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 유명하죠. 그러다가 <민영휘>의 맏아들 <민대식>에게 넘어 가고...<풍문여고>가 설립되고.... ['풍문여고'와 주변 전경] 주변을 촬영한 사진이 있어 캡쳐해 올립니다. <北村>이 전체적으로 조망되는데..특히 <휘문고 (현 현대그룹사옥)>와 <풍문여고 (현 서울공예박물관)>의 위치를 확연히 알수 있군요. 바로 앞 공터는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식산은행의 관사>가 있었고, 해방 후부터는 <미국대사관저>가 있던 곳인데 <대한항공>이 인수해서 호텔을 지을려다가 <땅콩 회항 사건>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공터로 남아 있답니다. 이곳은 <경복궁> 바로 옆 동산이었는데, 소나무가 울창한 고개였다고 <송현 松峴>이라 한데서 이 동네 이름이 <송현동>이 되었답니다. ['안동별궁 표지석'] <옛 풍문여고> 정문에 "안동별궁 安洞別宮" 표지석이 설치되 있습니다. <안국동>이라는 지명과 관련된 <안동별궁>이라고 ['아홉번째구간-안동별궁에서 광교까지 실트랙] 9. "안동별궁터-충훈부터-우정총국-조계사-민영환자결지-태화관터- 순화궁터-한양중심점표지석-의금부터-보신각-전옥서터-광교" [''북인사 안내소'와 '충훈부 터'] <풍문여고> 정문 건너편에는 <인사동 북쪽 출입구>가 있으며 "북인사 안내소"가 있으며 그 앞에는 "충훈부 터 忠勳部址" 표지석이 있는데, 실제 터는 뒤에 별도로 있더군요. 또한 "해방병단 결단식 터 海防兵團" 표지석도 있었습니다. <해군> 창설 결단식이 있었다고 ['일획을 긋다'] <인사동 북쪽 입구>에 세워져 있는 <일획을 긋다>라는 조형물이 눈길을 끌고.... 이 근처에 예전 <김영삼 총재> 시절 <신민당 당사>가 있었는데... ['우정총국' 앞] <안국동 사거리>에서 <종각>방향으로 조금 가면 "체신기념관"을 만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이 있었던 자리이며 <갑신정변>의 진원지이죠. '3일 천하'로 끝나긴 했지만 <부르주아혁명>의 발화지였던 '종로구 견지동' "우정총국"입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쓰는 의약의 공급과 임금이 하사하는 의약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던 관서인 "전의감 典醫監"이 있었다고 하며 임금의 초상화를 그린다거나, 궁중의 각종 행사를 기록으로 그리거나, 풍경을 사생하는 등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일체의 그림을 관장하던 관청인 "도화서 圖畵署"도 있었었답니다. 또한 <민씨 세도 족벌> 중에 몇 안되는 우국충정의 "충정공 민영환"이 살던 집터가 앞 주차장 자리였답니다. ['우정총국'] [안내문] "체신기념관" 이 우체국 개원식이 당시엔 근대선진국가로 가는 큰 상징적 행사였답니다. 그래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본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죠. ['민영환 동상'] "민영환 閔泳煥 (1861~1905)"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도 다른 집안이 얼마나 있을까 <민영환>의 아버지 "민겸호 閔謙鎬 (1838~1882)"가 <민씨 족벌세력>의 우두머리 격으로 <흥선 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남동생이죠. 그러니까 <고종>의 외삼촌이 되는거죠. 당시 <민겸호>는 "선혜청당상" 겸 "병조판서"였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국방장관이었던거죠. 그런 그가 기존 군인들의 봉급을 13개월이나 주지 않고, 그나마 한달치를 주었는데 쌀에 모래와 겨를 섞어 주어 마침내 불만이 폭발한 군인들이 <민겸호>를 죽이고 항거한 사건이 바로 <임오군란>이죠. 군사데타가 아니라 단순히 우리에게도 먹고 살수 있는 봉급을 달라는 단순한 요구였던 군란이었지요. 그러니까 <충정공 민영환>의 아버지 <민겸호>는 <임오군란>의 원흉으로 탐관오리의 절정이었습니다. 아들 <민영환>은 어떠 했는가. 1905년 <을사늑약>이 채결되며 나라가 식민상태로 들어가자 격렬한 저항을 했으나, 이미 국운은 기울어 다른 방법으로는 저항할 방법이 없어지자, 자결로서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세통의 유서를 남겼는데 <조선백성들에게 각성을 요청하는 내용>과 다른 한통은 <재경 외국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조선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며 또 다른 한통은 <고종에게 올리는 글>이었습니다. <민영환>이 자결하자 우국충정에 뒤따라 자결하는 사람이 대여섯명이나 더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 다를수 있습니까? ['조계사' 조망] <우정국>과 <조계사>는 서로 붙어 있어 경계가 없습니다. <조계사>로 넘어 가면... ['조계사 백송'] "조계사 백송 曹溪寺 白松 (천연기념물 제9호)" 가을 국화 퍼레이드 속에서 화려하게 보이지만 부처님의 가호가 없는지 여러번의 외과적 수술울 했지만 거의 죽어 가고 있는 <조게사 白松>입니다. ['조계사 회화나무'] <조계사>에는 4~500년 수령의 <회화나무>도 있습니다. ['조계사'] 국화로 뒤덮힌 <조계사>는 우리나라 불교의 총본산이지만 설립된 역사는 아주 짧습니다. 1911년에 <만해 한용운>과 <이회광>이 <중동중학교> 자리에 <각황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답니다. ['조계사 정문'] 국화축제가 열리고 있는 <조계사>를 나와 ['종각' 방향 '우정국로'] <종각> 방향으로 조금 걸으면... ['제일은행 본점'] <제일은행 본점>이 나타나는데, 옛날 이곳엔 <신신백화점>이 있었고, 뒤의 공터는 겨울철 스케이트장이 되곤 해서 스케이트 타러 오곤 했었는데....그동안 엄청나게 변했습니다. 여기서 좌측을 바라보면 ['태화빌딩' 조망] <태화빙딩>이 보이는데... ['옛 세븐당구장'] 사거리에 이 건물이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군요. 학창시절 이곳 2층에 <세븐당구장>이 있었는데, 가끔 원정 당구를 왔던 기억이 납니다. 저의 집은 <익선동>이었으니 그리 멀지 않은데 있었지만... 미국에서 의사를 하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간 친구가 이 당구장 최고수였는데...그때 700을 쳤으니까... ['하나로투어빌딩''태화빌딩''하나로빌딩' 조망] ['민영환 자결터'] <하나로빌딩> 앞마당에는 앞에서 언급한 "충정공 민영환 선생 자결터"가 있습니다. <민영환>이 자결한 자리에서 죽순이 돋아 났다고들 하지만 그런게 아니라 <민영환>이 자결할때 피뭍은 옷을 부인인 <박수영씨>가 집에 보관했는데 8개월 후쯤 피뭍은 그 옷이 있는 방에서 죽순이 돋아나 보관했다고 합니다. 죽순은 폭 8cm, 길이 50cm 정도의 나무 상자 속에 넣어 보관하다가 유족들이 1962년에 <고려대>에 기증해서 <고려대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답니다. 다음 사진입니다.
또한 고려대 박물관에는 <혈죽>과 1906년 7월 15일 일본인 사진기사 <기쿠다>가 촬영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답니다. 다음 사진입니다.
했빛이 잘 들어 오지 못하는 방에 흙과 수분이 없는 바닦에서 대나무가 자랄수 있는지 논란도 많습니다만 우리는 우국충정의 그 뜻을 기리며 "血竹=애국심"으로 믿고... 믿어 주고 있는거겠죠.
['태화빌딩'] ['3.1독립선언유적지' 안내문] "명월관 明月館" <명월관>은 1904년에 구한말 궁중에서 요리를 담당하던 <안순환>이라는 사람이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옛 동아일보:현 일민미술관> 자리에 <궁중요리 음식점>으로 개업했는데, 화재가 나 종로3가에 있는 <현 'CGV피카디리1958'극장> 자리로 이전하여 음식점으로 대성황을 이루기 시작 했답니다. 1890년 '관기제도'가 없어지자 실직한 궁중의 기녀들과 지방의 관기들이 모여 들어 <명월관>은 사교장으로 변모하며 새로운 유흥 문화의 장으로 승승장구 했답니다. 시간이 지나며 친일파들이 나라를 팔아 먹은 돈으로 흥청망청 방탕하게 노는 기생집으로 변모하고 주요 고객이 <이완용> <송병준> <이지용>등 친일매국노들이었답니다. 장사가 잘되니 분점이 생겼는데 이곳 <태화관>도 <명월관>의 별관이었는데, 식사 술 춤과 노래를 함께하는 종합 유흥업소를 만들며 1918년 본점이 화재로 소실되자 실제 본점 보다 더 성황을 이루어서 <명월관>하면 이곳 <태화관>으로 인식되며 종합 유흥업소로 이름을 날렸답니다. <태화관>은 원래 <중종>의 딸 <순화공주>가 살았던 <순화궁>이라는 宮이었는데 <이완용>이 자기 소유로 만들어 <이완용의 별장>을 만들었답니다. 그리곤 <이토 히로부미>와 이곳에서 政事를 논의 하기도 했답니다. 그후 <이완용>이 <명월관>에 넘긴거죠. 이러한 내력이 있는 <태화관>에서 <삼일독립선언>이 이루어 졌다는게 의미가 남다릅니다. ['순화궁 터']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 사이에 "순화궁 順和宮" 표지석이 있습니다. <중종>이 자신의 딸 <순화공주>를 위해 지어 주었기에 <순화궁>이라 불려졌지만 이곳엔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가 살았고 그녀 사후 사당으로 사용되었다네요. [백과사전]을 인용하면... "한성부 중부 견평방에 영응대군의 딸 길안현주와 사위 구수영이 살았고, 인조의 생모 인헌왕후가 태어난 저택이 있었다. 이 저택은 구수영의 후손으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조선 후기에는 김흥근의 소유가 되었다. 헌종 사후 후궁 경빈 김씨가 나와 살면서 ‘순화궁(順和宮)’이 되었다. 이후 이윤용, 이완용이 소유하였고,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중 29인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요정 태화관이 있었다. 현재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이 세워져 있다." ['하나로빌딩'] ['하나로빌딩 로비'] ['한양중심점 표지석' '하마대'] [안내문] <순화궁 표지석> 좌측에 있는 <하나로빌딩> 입구에 <서울의 중심점 표지석> 안내석이 있는데 오리지날 표지석은 안으로 들어가 로비 끝에 있으니 알고 가야 볼수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을 짓고 <한양의 중심점>을 표기 했다는데 아직도 남아 있답니다. 좌측에 있는 돌은 <순화궁>에 있었던 <하마비> 옆에 있던 말 타고 내릴 때의 디딤돌이랍니다. ['종각역 1번출입구'] <종각역1번출입구> 앞 <'SC제일은행 본점'> 앞에는 "의금부 터 義禁府址" 표지석이 있습니다. 현재의 <'SC제일은행 본점'> 자리에 검찰청 대법원 국정원을 한데 묶어 집행하는 무시무시한 <의금부>가 있었던 곳으로 탐관오리와 국사범들에겐 지옥같았던 곳이죠. 특히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때에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장군>을 어명을 거역했다고 <선조>는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장군]을 계급장 떼고 이곳 <의금부>로 압송하여 3월4일에는 감옥에 가두고 문초를 가했답니다. 전쟁, 더구나 海戰에 대해선 X도 모르는 <선조>가 자기 꼴리는대로 어명을 내린 결과죠. [선조실록]에는 "이순신은 참으로 역적이다. 이제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고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라고 목청을 높였다고 기록되 있으니... 하지만 <원균>이 폐전하자 <선조>는 어쩔수 없이 <이순신>을 풀어 주고 다시 나가 싸우라고 했죠. 27일간 옥살이와 고문을 당하고 4월1일에 출옥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지요. 그후 1년 후에 <노량해전>에서 순국하고...(차라리 감옥에 있었으면 목숨은 부지 할수 있었을텐데...) 자세한 내용은 제가 두발로 쓴 "[이순신백의종군길] 서울구간 답사기"를 참고 하시기 바람니다. ['피맛골'의 흔적] ['피맛골' 안내문] ['피마골' 위치] 사라진 "피맛골 避馬골" <피마골>은 <종로> 양옆에 있었답니다.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이 늘어 나며 <종로> 대로변에는 난잡하게 불법 노점상들이 들어 서기 시작해 "가게"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게 되었답니다. <1부>에서 언급 했드시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개최 하며 대내외에 <대한제국>의 위상을 알리려고 <종로>의 난잡한 "가게"들을 철거하고 길을 넓혔답니다. 이 때 <종로>의 남쪽 <피맛골>까지 철거 했는데, 철거된 상점들을 <남대문> 근처 <선혜청> 부근으로 이전시켜 영업 할수 있도록 해 주었는데 이게 <남대문 시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대문시장>은 철거된 <종로 남측 피맛골의 가게>들이 옮겨가 만들어진 시장이라고 ['현 피맛골'] [12년 전 '피맛골'] [12년 전 '청일집'] 제가 학창시절 자주 찾았던 <피맛골>의 <참새집><열차집><청일집>은 현대판 빌딩 숲 속으로 들어 갔습니다. ['보신각'] ['6.25 때 폭격 맞은 '보신각 종'] "보신각 普信閣" 조선왕조 출범 때부터 <한양도성>과 성밖의 통행금지와 해제를 알리기 위해 4대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 종루였는데 지금은 년말에 <제야의 종>을 울리는 곳으로 변했죠. <보신각 普信閣>이라는 명칭은 1895년 <고종 32년>에 처음 <보신각>이라 했다는데 그러니까 <갑신정변> 다음 해에 <종각>에서 <보신각>으로 이름이 변경된 것인데 <6.25전쟁> 후 폐허가 된 이후 새로 만들면서 1953년에 <이승만 대통령>이 편액을 썼답니다. 1979년엔 철근 콩크리트로 <보신각>을 새로 짓고 鐘도 새로 만들어 치고 있답니다. ['영풍빌딩'] 건너편엔 <영풍빌딩>이 있는데 저 자리가 <전옥서 典獄署>가 있던 자리인데 <전봉준 장군> 동상이 있는 곳입니다. ['전봉준 像'] [안내문] <녹두장군 전봉준>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 하고 ['전옥서 터'와 '황성신문 터'] <영풍빌딩> 앞 <전봉준 장군 동상> 좌측 <종각역6번출입구> 앞에는 "전옥서 典獄署" 표지석이 있는데 "죄인들을 수감하는 감옥"이 있던 자리이고 우측 <종각역5번출입구> 옆에는 "황성신문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광교'] 오전에 출발했던 <광교>로 돌아와서 <옛 조흥은행 본점>이었던 <현 신한은행 광교빌딩>을 조망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화폐개혁>이 있었을 때 아버지와 돈가방을 들고 새 돈으로 바꾸러 왔던 기억이 납니다. 세월도 빠릅니다. ['광통관' 조망] [뒤돌아 본 '종각'] <청계천 광교>로 나가 출발지였던 <광통관> 건너편에서 버스를 타고 귀가 했습니다. <1부><2부> 합쳐서 오늘 걸은 거리는 약14km였으며 6시간이 걸렸습니다 "길은 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길은 돌아 오기 위해 있는 것이다. 역사는 흘러 간 유물이 아니다. 역사는 다가 오는 미래를 가늠하는 현재의 거울이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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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삼청동천을 따라 삼청공원까지 1부』
『삼청공원에서 北村을 따라 청계천 광교까지 2부』


  [전체 답사 지도] 

  ['첫구간:청계광장'에서 '종로구청'까지 실트랙]                 
    1."광통관-광교-청계광장-우포도청-기념비전-
       혜정교-중학천-정도전집터(종로구청)"  


  ['광통관']                           
  2021년 11월 16일 (수) 맑음   
  오늘은 <광교>와 <을지로입구역> 사이에 있는 "광통관"에서 답사를 시작합니다.


  ['광통관']                   

  [안내문]                            
  "광통관 廣通館"
  현존하는 국내 은행 건물 중에 제일 오래된 은행건물이랍니다.
  지금도 <우리은행 종로 금융센타>로 사용되고 있는데 <광통교> 앞에 있다고 <광통관>이라 했답니다.
  112년전 <대한제국>시기 일본의 경제침탈에 맞서고자 국가재정을 담당하던 <탁지부>에서 세운 
  금융기관인데, <탁지부>는 지금의 <기획재정부>에 해당하는 정부기관이었죠.
  여하튼 <대한제국 황실>이 세운 '하늘 아래 최고'라는 <天一銀行>이 있었던 자리랍니다.
  "프랑스 바로크풍"의 건물을 지어 선진국 다운 면모를 갖추고자 했답니다.
   
                       
           현존하는 <대한제국 건축물>을 참고 하면 <광통관>의 위상을 알수 있고...


  ['회동서관 터']             
  <광통관>에서 <광교> 방향으로 조금 진행하면 <현 신한은행 광교빌딩> 옆에
  "회동서관 터 匯東書館址" 표지석이 설치되 있습니다.
  이 서점 겸 출판사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랫동안 영업을 했던 서점을 겸한 출판사였답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광수의 무정> 등을 이 출판사가 간행 했다고


  ['광교'에서 조망]                       
  <청계천>에 건설된 "광교 廣橋"에서 <종각 사거리>를 조망합니다.
  <광교> 자리엔 원래 잠시후 만나게 될 "광통교 廣通橋"가 있었습니다만, 
  도로 확장으로 <광교>를 설치하고 오리지날 <광통교>는 보존을 위해 좌측 위로 옮겨놨지요.


  ['청계천' 상류방향 조망] 

  ['광통교']

  [안내문]                       
  <청계천> 상류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가면 복원해 놓은 오리지날 "광통교 廣通橋"를 만납니다.
  1970년대 <청계천 복개공사>등으로 매몰되었던 <광통교>를 이곳으로 옮겨 복원해 놨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광통교 廣通橋"의 석물은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이자 조선왕조 최초의 왕비인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의 석물을 가져와 다리를 만들어. <태조 이성계>의 첫번째 부인이며 후에 왕비로 추존된 
  <신의왕후>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복수심에 부관참시하듯 만든 다리가 바로 이 다리이죠.
  누구나 <신덕왕후>를 밟고 다니라고....


  ['모전교']                 
  "모전교 毛廛橋"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이 <청계천>에 합류하는 지점 바로 아래에 설치한 <청계천>의 다리인데
  <무교동>과 <서린동>을 연결하는 다리로서 <청계천> 최상류에 있는 다리랍니다.
  다리 모퉁이에서 과일을 파는 가게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모전 毛廛>은 "과일가게"를 의미하죠.
  <모전교>는 일제시대까진 있었으나 개발과정에서 완전 없어져, 현재 이 다리는 이름만 <모전교>랍니다.
      
       ['일제강점기시대 모전교 사진']                 
       양산을 쓴 여인과 전봇대가 인상적입니다.


  ['청계광장 폭포']               
  <백운동천> <삼청동천>등 지류들이 합쳐져 "청계천 淸溪川"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는 폭포입니다.
  원래 모습은 찾을수 없고 완전 현대화 공원화 되었습니다.
  <한강>의 물을 정수하여 이곳으로 끌어 당겨 흘려 보내고 있는데 유지.관리비가 1년에 약74억원이
  든다고 지난 2021년 국정감사 자료에 나와 있더군요.


  ['청계광장']                     
  <청계광장 폭포> 위에는 완전 복개되어 물줄기를 볼수 없는데, <백운동천 白雲洞川>이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 가고 있다는 의미의 홈을 파 놓았습니다.
  그리고 우측에는 "中學川入水之源"이라는 표석이 있는데....


  ['중학천입수지원']                
  "中學川入水之源"이라는 말은 "중학천 中學川"이라는 개천이 흘러 들어 오는 곳이란 뜻인데
  <북악산> 동남쪽 기슭 <삼청공원>등에서 발원하여 <경복궁>의 동쪽으로 흘러
  이곳으로 오는 "삼청동천 三淸洞川"에 있는 개천의 일부분 이름인데 
  "중부학당" 앞에서 이곳까지 구간 개천의 이름을  "중학천 中學川"이라 한답니다.


  ['종로'에서 뒤돌아 본 '중학천']                        
  <청계광장>에 있는 "中學川入水之源"에서 <서린동>을 통과하여 <종로>에서 뒤돌아 본
  "중학천 中學川"의 흔적입니다.
  <두물머리>를 한자로 "兩水" 또는 "열수 洌水"라고 쓰는데 여기선 뭔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리지날 <중학천>과 나란히 있는 <모형 중학천>을 의미하는건아닌지...


  ['종로']               
  50여m 정도의 짧은 <서린동 구간 중학천>을 통과하면 <종로>가 앞을 가로 막습니다.
  옛날엔 이곳에 좌우로 "혜정교 惠政橋"라는 다리가 있었었답니다.
  좌측 <세종대로사거리>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면....


  ['우포도청' 터]                 
  <광화문우체국> 앞에 "우포도청 터 右捕盜廳址" 표지석이 설치되 있습니다.
  도둑놈들을 체포하는 즉, 치안업무를 하는 관청이 좌우에 있었다는 것이고


  ['세종대로 사거리']                          
  <세종대로사거리>, 즉 <조선시대 육조거리>에서 <교보빌딩> 앞에 있는 <기념비전>을 조망하고


  ['기념비전'] 

  [안내문]                        
  <기념비전>의 비석에는 "大韓帝國 大皇帝 寶齡六旬 御極 四十年 稱慶紀念頌"이라고 쓰여 있는데
  우리들은 이 건물을 근냥 <비각>이라고만 합니다만....
  <고종황제> 즉위 40년이 된 것(어극사십년)과 51세 생일(망육순:60을 바라본다는 뜻)을 기념해 
  세운 것이 랍니다. 그리고 이 글은 당시 황태자인 <순종>이 썼는데,
  현판에는 간략하게 "기념비전 記念碑殿"이라고만 적혀 있지만 이것이 건립된 1902년 전후의
  우리나라 상황을 돌아보면 <고종황제>의 꿈과 좌절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고종>은 곧 있을 자신의 즉위 40주년 행사를 이용해 대규모 '칭경'(稱慶,경사를 치르는) 예식을 
  하기로 준비한 것이 바로 이 "기념비전 記念碑殿"입니다.
  외빈들에게 <대한제국>의 위상을 보여 주기 위해, 일본 교토에 이어 동양에서 두 번째로 종로에 
  전차를 놓았고, 이를 계기로 그동안 온갖 가게들로 난잡했던 종로를 깨끗이 확장 정리했습니다.
  이와같이 몰락하는 조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노력을 무지무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한 조선의 모습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으나 뜻대로만 되지는 않았죠.
  <칭경식>을 위한 <기념비전>이 완공된 1902년 '함경도'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여 
  행사를 1903년 4월로 1년 연기했지만, 이번에는 <영친왕>의 두창으로 또다시 9월로 연기했고, 
  그나마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전쟁위기의 고조로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이 <기념비전>을 짓기만 하고 기념식은 올리지 못한 슬픈 <기념비전>인거죠.
  이후 <러일전쟁(1904)>과 <을사늑약(1905)>으로 조선은 사실상 식민상태에 들어갔고, 
  이를 벗어나려는 <고종>의 몸부림은 <헤이그밀사사건(1907)>을 마지막으로 왕위에서 마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이곳 <기념비전>은 <대한제국>의 희망과 좌절을 한꺼번에 껴안고
  있는 역사적 장소인데...사람들은 무심히 그 앞을 오가고 있습니다.
  

    [<기념비각>의 변천 모습]

    [완성 당시의 모습]    
    <기념비각>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과 출입문인 <만세문>은 일제시대 쪽바리가 가지고 가 
    자기집 대문과 담장으로 사용하던 것을 <만세문>만 되찾아 와 복원했답니다.
    그래서 옛날엔 있던 담장이 현재는 없습니다.


  ['도로원표']                       
 그리고 이 기념비각에는 "도로원표 道路元標"가 있습니다.
 지난번 <백운동천 답사기>에서 본 바와 같이 건너편 <세종로파출소> 앞에 <新도로원표>가 있는데...
 원래 <세종대로사거리> 가운데에 있었는데 교통상황등으로 이전되었답니다.
 <도로원표>가 어디에 있던 우리나라 <도로법 시행령 제50조>에 
 "서울에서 각 도시간 거리를 따지는 <기준점>의 위치는 <광화문광장의 중앙>으로 한다'고 규정되
 있으니 혼동 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종각' 방향]

  ['염상섭 像']

  [안내문]                      
  <기념비전>에서 종로 방향으로 <염상섭선생 상>이 있는데
  여기서 남쪽을 바라보면...


  ['혜정교 터' 조망]                      
  "혜정교 惠政橋" 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종로>를 통과하는 <중학천>을 건너는 다리였는데 현재는 흔적 조차 보이지 않게 복개되었습니다.
  이 다리 옆에 <우포도청>이 있었기 때문에 <포청다리>라고도 불렀다는데 특히 이곳에서
  탐관오리들이나 중범죄자들의 사형을 집행하곤 했답니다. 그래서 <혜정교>인데...
  <惠政>이라는 말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정치"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최고로 많이 통행하는 이곳에서 처형을 함으로서 전시효과를 노렸다고...


  ['시전행랑' 유구 전시관]

  ['시전행랑 유구'] 

  [안내문]                            
  <혜정교> 터 옆에는 <시전행랑>이라는 가게들의 유구를 전시해 놨고



  ['중학천 석축 유구']                       
  <혜정교>에서 북쪽으로 <중학천>을 따라 조금 올라 가면 "중학천 석축 유구"가 있습니다.
  <중학천>은 완전 복개되어 그 모습을 볼수 없는데, 이곳에서만 <중학천 석축> 10m를 볼수 있어
  그나마 <중학천>이 있었었다는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삼봉로 회전교차로']                               
  좌측 [교보빌딩]과 [KT본사빌딩] 뒤를 따라 복개된 <중학천>을 진행하면
  <미대사관>과 <종로구청> 사이의 회전교차로를 만나는데
  <중학천 복개 흔적>은 여기까지 조성해 놨으며 이후 부터는 조성된 <모형 중학천> 조차도 없어집니다.
  앞에 보이는 <옛 수송초등학교>는 현재 철거 중에 있으며 <종로구청> 신관을 짓는 답니다.
  저 자리는 "정도전 집터"라고 하는데 우측으로 돌아 갑니다.
 

  [뒤돌아 본 '중학천 흔적']              

  ['중학천' 안내문]                      
  <청계광장>에서 이곳까지 <중학천>의 흔적을 복개된 도로 위에 조성해 놧습니다.
  <洌上眞源>은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고...
  <중학천>에 대한 안내문이 있는데, <북악산의 남서쪽>에서 흘러내려 온다고 해 놨습니다만
  <북악산의 남동쪽>에서 흘러 내려 오는 개천이라고 고쳐야 할듯....
 

  ['두번째 구간 지도']                 
    2."정도전집터(종로구청)-수송목-이색영당-사복시터-
    의정부터-중부학당터-제용감터-사포서터-소녀상-동십자각"  



  [철거 중인 "옛 수송초등학교"]                  
  철거공사 중인 <옛 수송초등학교> 건물을 우측으로 돌아 나갑니다.
  <종로구청 신관>을 짓는다고 합니다.
  우측에는...
 

  ['수송목']                      
  <코리안리재보험회사> 앞에 <수송목 壽松木>이라고 이름지은 소나무가 있는데
  이 지역이 <수송동 壽松洞>이여서 붙인듯...
 

  ['정도전 집터' 조망]                  
  좌측이 공사중인 <옛 수송초등학교>이고 가운데가 <현 종로구청>이며, 우측이 <이마빌딩 利馬빌딩>
  여기서  "정도전 집터"를 개념도를 통해 알아 보면.... 
         
          ['정도전 집터' 위치도]                  
      상당한 규모의 집터 였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조선>을 개국하면서 개국의 당사자인 자기 집을 <경복궁> 바로 앞에 위세당당하게 지은듯...
 <정도전>은 이곳에서 4년밖에 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죽음과 동시에 역적이 되어 
 그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했고 <조선왕조 500년> 동안 철저하게 역적으로 뭍혀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가 역적이라는 주홍글씨를 떼고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 한것은 <흥선 대원군> 때였죠.
 <대원군>이 망해가는 <조선왕조>를 다시 세우기 위해선 <조선>을 실제 건국하며 <경복궁>을 건설한
 <정도전>을 소환해서 <경복궁>을 다시 복원해야만 했던 <대원군>의 정치적 필요성 때문인거였죠.
 우측 <利馬빌딩> 자리엔 <정도전 집 마굿간>이 있었었다는데 일제강점기 이후 기마경찰서로 사용되었고, 
 이는 해방 이후 서울기마경찰대로 이름만 바뀐 채 지속되다가 1972년 성동구 성수동으로 이전했답니다
 그 후 이곳에는 빌딩이 들어섰지만 그 이름은 '말을 이롭게 한다'는 뜻의 <이마(利馬)빌딩>이어서
 그래도 역사를 좀 아는 사람이 작명하여, 옛 정취를 조금은 나타내고 있는 듯 합니다.


  ['목은 이색 영당' 홍살문]

  ['영당 삼문']

  ['影堂]                    

  [안내문]                       
  <종로구청> 건너편엔 "이색 영당 李穡 影堂"이 있습니다.
  <이색선생>은 <정몽주>와 <정도전>의 스승이었답니다.
  <정몽주>는 <정도전>의 선배로서 나라를 걱정하는 <정도전>을 좋아했답니다. 
  이러한 관계로 <정도전>이 "역성혁명"의 기본 틀을 세우는데 지침서 역할을 했던 <맹자>를 건네준 
  사람이 바로 <정몽주>였답니다.
  <정도전>은 이 책을 읽으며 "민심은 곧 하늘"이라는 <민본주의>를 깨우쳤고, 
  민심을 잃은 왕조는 혁명을 일으켜 바꾸어야 한다는 사상을 터득한 것이었죠. 
  이로써 그토록 가까웠던 <정도전>과 <정몽주>는 망해가는 <고려>에 대한 "혁명"과 "개혁"으로 뜻을
  달리하게 되었는데, 결국 "혁명"을 주장한 <정도전>의 역성혁명이 성공함으로써 
  "개혁"으로 보다 좋은 <고려>를 만들려던 <정몽주>는 <이방원>의 칼에 의해 선죽교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하며 <고려>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스승이었던 "牧隱 李穡 先生"의 影堂이 <정도전>의 집 바로 앞에 있어 묘한 느낌이 드는군요.
 

  ['보성사 터'-'중동학교 옛터']

  ['신흥대학 터'-'숙명여고 터']                       
  <이색선생 영당> 뒤에는 <수송공원>이 있는데 이 일대는 여러 학교들이 있었던 학교터 였답니다.
  그 중에서 "신흥대학" 터가 이곳이라는 것이 새삼스러웠습니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던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인 <신흥대학>이 이곳에서 다시 꽃피웠었군요.
  <문재인 대통령>의 출신학교인 <경희대학교>가 <신흥대학>의 이름만 바꾼 대학인데...


  ['종로구청' 회귀]

  ['사복시 터' 표지석]                          
  다시 <종로구청>으로 돌아와 구청 로비를 통과하여 서쪽문으로 나가면
  <말 馬>와 관계되는 모든 업무를 총괄하던 "사복시 司僕寺"가 있었었다는 표지석이 있는데
  당시의 馬는 지금의 자동차와 같은 교통수단 역활을 했으니 정치 경제 군사분야에서 엄청 중요해서 
  그 업무를 관장하는 관청을 <경복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둔 듯 합니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광화문육조거리>에 있는 <교보빌딩><'KT본사'><미대사관><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리는
  일제시대까지 <서울법대>의 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지질조사서>,<경관강습소>가
  <호조><한성부><이조>가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었답니다.
  <6,25전쟁>으로 이 건물들은 폭격으로 완전 폐허가 되었는데 1960년 2월에 새로운 정부청사를 
  미국의 원조로 짓기 시작했는데, 어쩔수 없이 가운데 중요 건물은 <미대사관>이 되고....
  원조 금액이 남아 옆에 <미대사관>과 모양이 같은 빌딩을 지었는데 이 건물이 현재의 박물관입니다.
  한편,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쿠데타세력은 육사 5기와 8기를 주축으로 '군사혁명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쿠데타를 성공시킨 후 이틀 뒤 입법-사법-행정 등 3권을 모두 장악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이 건물에 설치하고 군사정권시대로 들어 갔지요.
  참고로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의 집무실은 북동쪽방향(경복궁 쪽)으로 끝 방이었으니 
  역사지리적으로 바로 이곳이 쿠데타세력의 수뇌부였던 곳이랍니다.


  ['의정부 터'-'중부학당 터'] 

  ['중부학당' 안내문]                      
  현재 <광화문시민열린광장> 공사를 하고 있는 건너편 좌측 자리는 "의정부 議政府"가 있었고
  우측엔 "중부학당 中部學堂"이 있었던 곳이라 합니다.
  "삼청동천 三淸洞川"은 이곳 <중부학당>에서부터 <청계천>까지를 "중학천 中學川"이라고
  별도로 名命했답니다. 지금까지 복개된 흔적을 걸었던 길이 <중학천 복개도로>였습니다.


  ['제용감 터'-'사포서 터']                             
  <중부학당 터>에서 우측으로 가면 "제용감터 濟用監址"가 있고
  우측 길 건너편엔 "사포서터 司圃署址"가 있습니다.


  ['소녀상']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원조 "소녀상"이 오늘도 외로운 투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김운성.김서경 부부작가>가 공동으로 작업한 작품으로, 높이 130cm로 치마저고리를 입고, 
  짧은 단발머리와 손을 웅켜쥔 소녀가 의자에 앉은 채 일본대사관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작가가 인터뷰에서 직접 밝힌 <소녀상>에 깃든 의미를 조금 알아보고 가겠습니다.
  1.“조형물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꽃,고무신,빈 의자,나비를 만들자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때 아내가 '할머니보다 소녀상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열서너살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은 소녀의 슬픈 사연을 형상화시키는 작업을 하자고 했다. 
  할머니가 가졌던 과거 꿈 많던 소녀시절을 돌려 주자는 의미에서였다.”
  2. 소녀상은 쌍꺼풀이 없고 코가 높지 않으며 얼굴이 둥글고 사랑스럽다. 머리카락은 단발인데 
  자세히 보면 거칠게 뜯겨진 모습이다. 원래는 댕기머리였는데 일본군이 잘랐다. 단발로 할까, 
  댕기머리로 할까 고민이 있었는데 강제로 끌려간 것이니 단발로 결정했다.
  스님이 속세를 떠날 때 머리를 깎는 것처럼 단발은 인연이 끊김을 상징한다.
  3. 제작 기간은 약 6개월이 걸렸다. 전쟁과 인권이라는 명제에다 억울하고 슬픈 감정을 이입했다. 
  작업에 몰입하면서 많이 아팠다. 소녀가 한복을 입은 모습은 조선을 상징한다. 어린 여자이지만 
  다부지고 의연한 모습을 형상화시키고 싶었다. 한창 작품을 만들고 있는데 일본 측에서 조형물제작을 
  중단시켜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어이없고 화가 나서 원 설계엔 무릎 위에 다소곳하게 모은 손을 
  주먹으로 바꿨다. 소녀의 눈빛에도 신경을 썼다. 일본대사관 건물을 뚫어지게 보며 '너희들이 
  한 짓을 봐라' 사죄를 하지 않은 데 대한 꾸짖는 모습을 담고자 했다. 잔잔한 감동을 주고 싶었다.
  

  ['소녀와 나비']                                    
  <소녀상>이 갖는 가장 의미있는 의미는 저는 네번째라고 생각됩니다.
  4. 소녀상 왼쪽 어깨에 앉아 있는 새는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상징물이다. 
  그러면서 자유와 평화의 의미가 담겨있다. 뜯겨진 머리는 타의에 의해 가족과 조국을 단절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표현했다. 빈 의자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의자다. 
  수요집회 때 강제위안부 할머니가 앉는 자리다. 
  그러면서 우리가 앉아 공감하는 자리이고 우리와 다음 세대가 풀어가야 할 자리다. 
  소녀의 맨발은 험난한 삶과 여정을 의미한다. 
  소녀는 발뒤꿈치가 들려 있다. 
  이는 남에게 손가락질 받을까봐 아무에게도 말을 못 하고 숨죽이며 살아야했던 아픔을 의미한다. 
  강제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선 아직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없음이다. 
  뒤에 그림자는 소녀의 그림자가 아니라 할머니의 그림자다. 
  그 그림자 속에 하얀 나비가 있다. 하얀 나비는 환생을 의미한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딸아이가 뭔가 허전하다면서 그림자를 만들자고 제안해 수용했다


  ['동십자각' 앞]                        
  <소녀상>에서 <경복궁>으로 가면 먼저 "동십자각 東十字閣"을 만납니다.
  <경복궁>의 동남쪽 <궁담 宮墻> 모서리에 있는 <망루>이죠.
  담장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
   

  ['정도전 피살지']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의 최측근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조선의 국가이데올로기를 수립했지만, 
  역성혁명 6년 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에 의해 피살되었지요.
  <민본주의>.... 요즘으로 치자면 <내각책임제>를 국가의 정치질서로 확립하려한 <정도전>이었지만
  <봉건왕조국가>에선 도저히 용납 될수 없었던 <왕조>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이방원>이는 분노하며
  <정도전>을 죽였습니다.
  당시 정도전은 측근들과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자리를 하고 있다가 피습 당했다고 합니다. 
  그 위치는 앞에 보이는 현 <일본대사관> 뒤 <트윈트리타워> 일대라고 합니다. 
  이렇게 숨진 <정도전>은 1865년(고종2년) <경복궁> 중건과 더불어 복권이 되기까지 500여년 동안
  그저 육신만을 잃은 것이 아니라 역적이 되어 역사 속에서 사라져야만 했었습니다.
 

  ['세번째 구간 지도']                    
    3."동십자각-법련사-두가현-한성부북부관아터-건춘문-
      국립현대미술관-경근당-옥첩당-장생전교터-국립민속박물관
   

  ['법련사']                        
  <동십자각>을 지나 <경복궁 담장>을 따라 올라 갑니다.
  이 도로는 복개된 "삼청동천 三淸洞川"인데 그 어디에서도 개천이란걸 알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복개되어 옛모습을 추측 조차 할수 없습니다.
  <법련사> 다음에 있는 하얀 건물(미술관) 뒤로 돌아 들어 가면...


  ['두가헌' 입구 주차장']   

  ['두가헌']                       
  "두가헌"이라는 좀 독특한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한옥에서 양식을 제공하는 레스토랑인데 메뉴는 단1개로 138,000원/1인 을 하더군요.
  그런데 이 집은 1910년대 지은 집으로 <고종>의 후궁 <광화당 이씨>와 <삼축당 김씨>가 살던 곳이라고
  <경복궁>에서 <고종>이 부르면 언제나 재빨리 갈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건춘문> 앞에 있습니다.
  <고종>이 부르기만 기다리고 있는 <후궁>인지 <매춘부>인지 모르는 여인들의 대기소였던거죠.


  ['한성부 북부 관아 터']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의미의 <두가헌>을 지나면 "한성북부관아터" 표지석을 만나는데
  앞에는 <경복궁>의 동쪽 대문인 "건춘문 建春門"이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습니다.
  동쪽은 "봄 春"을 의미하기에 <건춘문 建春門>으로 짓고,
  서쪽 문은 <영추문 迎秋門>으로 "가을 秋"를 의미하며 지은 이름.
  현재는 옛 풍광을 알수 없어 일제시대 옛 사진을 보여 드리면...

  ['경복궁' 동쪽 '삼청동천']                
  바로 앞에 보이는 대문이 "광화문 光化門"이고 그 뒤에 보이는 문이 "건춘문 建春門"입니다.
  <광화문>이 왠? <삼청동천> 옆 동북쪽에 있어? 라고 의문을 갖는 분들은 세심한 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광화문>은 쪽바리들이 <조선총독부>를 지으며  <경복궁 옆구리>로 이전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건춘문> 북쪽으로 옮긴거죠. 죽일놈들...
  더 자세한 사진을 보면

          
            ['광화문' 앞 '삼청동천'에서 빨래하는 광경]                
            옮겨 놓은 <광화문> 앞 <삼청동천>에서 빨래하는 아낙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건춘문> 건너편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웅장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벽돌 건물은 본래 1932년 <경성의학전문대학의 외래진료소>로 지었으나, 
  해방 후 전쟁을 겪으며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쓰여 오다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변모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그런데 이곳 <국군서울지구병원>엔 1971년부터 <보안사령부(기무사)>가 함께 있었지요.
  <전두환>이가 <박대통령> 곁에서 <하나회>를 결성하여 <박대통령>을 보위 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우며 활동하던 곳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던 1979년 <10·26사건> 때 <궁정동 안가>에서 피살된 
  <박정희 대통령>의 시신이 옮겨진 곳이 바로 이곳  <국군서울지구병원>이었습니다.
  당시 외부에 있던 <보안사 사령관 전두환>은 <청와대 경호실>에 있던 동생 <전경환>으로부터 
  급변 사태에 대한 전화와 이곳 <보안사1처장 정도영>의 급보를 듣고 <10·26사태>를 제일 먼저 
  파악하고 군부를 장악하며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으며 실세로 등장하기 시작했지요.
  이런 빠른 정보 입수와 이미 짜여져 있었던 치밀한 계획으로 그의 <12·12 쿠데타>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고도 볼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역사의 현장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재탄생되어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 와 기쁨니다.
  그런데 미술관 관람은 코로나사태로 인터넷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어 관람은 할수 없었습니다.
  

  ['경근당' '옥첩당' 가는 길]                               
  미술관 본관을 지나면 미술관 뒤에 <경근당><옥첩당>이 보입니다.




  [안내문]                  
  <경근당>과 <옥첩당>은 조선 시대 국왕의 친가 쪽 종친을 관리했던 <종친부>가 있던 곳이랍니다.
  이 건물에 대해선 안내문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한가지 덧부치자면 이 건물은 
  1981년 <전두환정권>의 <기무사(보안사)>가 테니스장을 만들기 위해 이 건물을 
  2부에서 답사하는 <정독도서관> 운동장으로 이전했었습니다. 
  군바리 쿠데타 정권들의 안하무인 격인 무식한 전횡의 상징이었죠. 
  이런 놈들의 우두머리인 <전두환>을 칭송한 야당 대권후보도 있더군요.
  그후 <기무사>와 <국군서울지구병원>이 이전하면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종친부 건물>입니다.
   

  ['인왕산 조망 포토존'] 

  ['경복궁'과 '인왕산 치마바위']                          
  <기무사(보안사)>가 있었던 자리엔 <인왕산 포토존>이 있습니다.
  <인왕산 치마바위>에 서려있는 "중종"과 "단경왕후"의 사랑 얘기...
  제가 몇번 언급 한바 있습니다만 다시 한번 더 짧게 알려 드리면....
  "중종"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쿠데타 세력들에게 꼼짝도 못하고 
  강제적으로 사랑하는 "단경왕후"를 눈물로 떠나 보낼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중종"은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그녀가 보고 싶어 경복궁 경회루 앞에 나와
  그녀가 산다는 "인왕산"방향을 바라보며 그리움의 눈물을 흘렸다고 하지요.
  폐서인이 되어 쌩과부로 홀로 사는 '단경왕후'는 그 사실을 소문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녀는 궁궐에서 입던 자신의 다홍치마를 인왕산 바위에 걸쳐 놓아 자신의 입지를
  알리곤 하였답니다. 왕이여~~ 날 보러 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이후 단 한번도 다시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
  바라만 볼수 밖에 없는 사랑......"치마바위"의 내력입니다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으로 들어 가는 정문 앞에 <말타기> 조형물이 있습니다.
  요즘 유명한 <오징어게임>에 이 <말타기 게임>은 왜 없는지...ㅎ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에 대해 뭘 좀 알아야 관람하는 의미가 있는데 아는게 없으니 <민속박물관>은 횅하니 둘러 보고....
   

  ['장생전교']                        
  <민속박물관> 정문 앞에는 "장생전교 長生殿橋"가 <삼청동천>에 있었답니다.
  이 앞엔 궁중의 장례에 쓰이는 棺槨의 제작과 수선을 담당하던 관청인 <長生殿>이 있었는데
  그 관청 앞에 있는 다리라고 <장생전교>가 되었다고...
 


  ['네번째 구간 지도']                      
    4."장생전교-소격서터-복정-화기도감터-기기국번사창-삼청동삼거리


  ['팔판동 삼거리']                        
  <민속박물관> 정문 앞 <장생전교>에서 조금 더 올라 가면 <팔판동 삼거리>를 만납니다.
  <팔판동 八判洞>은 "여덟명의 판서가 살았다"는 데서 유래하는 이름이라죠? ㅎ
  8명의 판서가 누구였는지는 모른답니다.
  여기서 좌측은 <청와대> 가는 길이고, 우측이 <삼청동>으로 올라 가는 길인데
  우측으로 조금만 더 올라 가면....


  ['소격서 터']                     
  <삼청파출소> 우측 옆구리에 "소격서 터 昭格署址" 표지석이 있습니다.
  <소격서>는 <도교>의 제천행사로 <삼청성진>에게 지내는 초제를 담당하는 기관이었답니다.


  ['복정우물터' 조망]                             
  <소격서 터>가 있는 <삼청파출소>를 50m쯤 지나면 주차장 우측에 목욕탕 굴뚝이 보입니다.
  저곳에 <복정우물>이 잇다고 해서 찾아 가는데, 앞에 있는 주차장 우측 골목으로 들어 갑니다.



  ['복정']                    
  "복정 福井"
  조선시대엔 궁중에서만 이 우물을 이용 할수 있었다네요.
  그많큼 수질이 좋다는 얘기여서 <코리아사우나>라는 목욕탕도 생겼나 본데 현재는 폐업한듯합니다.


  ['북촌로5나길']               
  <복정>에서 위로 올라 가면 <북촌로>를 만나는데 조망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안산' '인왕산' 조망]

  ['인왕산' '청와대' '북악산' 조망]         
  설명이 필요 없는 경치를 보여주고...


  ['삼청공원' 조망']                 
  오늘 <성제우물>이라고 표기 한 곳까지 올라 갈 예정입니다.


  ['총리공관' 조망]             
  바로 아래엔 <총리공관>이 보이는데 공관 안에는 수령 약300년의 <삼청동 측백나무>와
  수령 약 900년인 <삼청동 등나무>가 함께 있는데, 측백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54호>로
  등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55호>로 지정되 있답니다. 등나무는 <고려시대>에 심은 것이라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등나무>랍니다.
  현재의 <국무총리공관>은 조선시대에는 <태화궁(太和宮)> 자리였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이완용>의 이복형인 <이윤용>의 집으로
  또한 <민씨 족벌정치>의 대명사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인 <민규식 자택>으로, 
  또한 쪽바리들이 설립한 <경성전기주식회사>의 관사로 쓰였던 곳이랍니다


  [내림길]

  [급경사 내림길]                        
  <북촌로>에서 다시 <삼청동길>로 내려 가는 급경사 계단길입니다.


  ['삼청동거리']              
  지금도 흐르고 있을 <삼청동천>의 복개된 거리를 잠시 거닐면...
  

  ['화기도감 터']                               
  "한국금융연수원"정문을 만납니다.
  정문 좌측에 "화기도감터 火器都監址" 표지석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처절한 아픔으로 남은 <조총>을 우리도 만들자고 설립한 총포 제작소로
  그 중요성 때문에 <영의정> 직속으로 운영되었답니다.


  ['금융연수원 정문']


  ['기기국 번사창']

  [안내문]                  
  <금융연수원> 정문으로 들어 가 좌측 <관리동> 방향으로 올라 가면
  "기기국 번사창 機器局 飜沙廠"이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모래 뒤치는 곳>, <나무 비계 만드는 곳>, <금속 주형 제조소>, <창고> 등 여러 동(棟)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번사창>은 그 건물들 중의 하나로 추정된답니다.
  1885년 부터 무기를 제조하던 곳. 더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 참조
   

  ['단팥죽집']                       
  <금융연수원> 정문에서 <삼청동길> 방향으로 "단팥죽집"이 있는데 상호가 독특합니다.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    ^*^


  ['삼청동 삼거리']                       
  이어서 <삼청동 삼거리>를 만나는데 직진성 좌측길에 <옥호정 표지석>이 있습니다.
 

  ['다섯번째 구간 지도']                      
    5."삼청동삼거리-옥호정-운용대-성제정-기천석-삼청공원-감사원


  ['옥호정 터']                     
  "옥호정터玉壺亭址" 표지석
  '세도정치'의 원조 <김조순>의 第宅이 있었던 자리라는군요. 第宅은 살림집과 정자가 함께 있는 집.
  옛날엔 이 근처의 경치가 엄청 좋은 <경복궁> 바로 뒤 三淸地域이었으니 
  당대 제일의 세도가인 <김조순>의 왕궁같은 대저택이 있을만 했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김조순의 저택>은 어디로 언제 사라진걸까.....

        
         ['옥호정도']                     
         "옥호정도  玉壺亭圖"는 <효명세자>가 <도화서(圖畵署)>로 하여금 그리게 하여 
         외할아버지 <김조순>에게 바친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원흉인 <김조순>의 저택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그림으로 
         <중앙박물관>에 소장되 있답니다.
   

  ['심청동 마을버스 종점']                     
  <옥호정>을 지나면 <삼청동 마을버스 종점>으로 <종로11번마을버스> 종점인데
  좌측 골목으로 올라 갑니다.


  ['칠보사']                        
  절 같지도 않은 <칠보사>라는 절을 지나면...


  [갈림길]                    
  골목 샛길을 만나는데 직진하면 바로 <성제정>으로 갈수 있지만
  먼저 <운용대 터>를 둘러 보고 <성제정>으로 갑니다.
  좌측 골목으로 들어 가면...


  ['운용대 터']                             
  "운용대 雲龍臺"라는 각자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찾을수 없었습니다.
  집 안 뒷담 밑 바위에 있다는데...
  "운용정 雲龍亭"
  "서촌 5사정(射亭)" 중의 하나인데 <서촌 5사정>은 활쏘기 연습장 다섯곳을 말하는데
  <삼청동의 운용정><옥인동의 등룡정><사직동의 등과정.대송정><누상동의 백호정>이죠.
  대부분 이미 제가 답사 했습니다.


  ['운용대 터']                   
  집안을 들여다 보았지만 알고 가지 않으면 알수 없겠습니다.
  남의 집안에 카메라 들이 대기도 좀 그렇죠? ㅎ 집주인께 죄송....


  ['삼청공원' 방향 조망]               
  <운용대 터>에서 <삼청공원> 방향을 조망하는데, 가운데 엄청 큰 학교 건물 같은게 새로이 들어 섯는데
  아마도 <국군서울지구병원>이 이전 했나 봅니다.
  뒤에 보이는 산줄기는 <한양성곽>이 지나는 <북악산 능선>


  ['성제우물' 조망]

  ['성제우물']         
  <운용대>에서 조금 내려 가면 "성제정 星祭井"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
  이 우물은 <정조>의 수라상에 진상된 우물 물이라고 소개 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 <삼청파출소> 옆에 있었던 <소격서>의 <삼청전 三淸殿> 初祭 때에 사용했던 물이라고 하며
  민간에서 발음이 잘못 전해져 <형제정 兄弟井>이라 불리워 졌답니다.
  <한양도성도 漢陽都城圖>엔 <형제정 兄弟井>이라 표기하고 있습니다.
  <삼청전 三淸殿>의 三淸은 <玉淸><上淸><太淸>으로서 하늘에 있는 <별의 세계>를 일컷는  
  <도교 道敎>의 용어랍니다.


  [오름길]

  ['도교' 흔적]                             
  "삼청동 기천석 三淸洞 紀天石"
  <성제정>에서 위로 조금 올라 가면 '道敎의 흔적'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기천석 紀天石>이 있는데
  여기가 혹시 <삼청전 三淸殿>의 기천석이 아닌지......
                  紀天石
                  康日菴
                  徐月堂
  "하늘에 소원을 비는 바위"라는 뜻일테고 밑에는 사람 이름인듯....
   

  ['감사원' 조망]                   
  <성제정>에서 다시 <삼청동마을버스정류장>으로 내려 가며 <감사원>을 조망하고...


  ['삼청동 마을버스 종점']                       
  다시 <삼청동마을버스종점>으로 내려와 좌측 <삼청터널>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가면...


  [삼청공원 산책로']                    
  현재는 <교육평가원>이지만 <국립현대미술관>에 있었던 <국군서울지구병원>이 이전해 있던 건물의
  뒤에 있는 <삼청테니스장> 옆에 <삼청공원 산책로>가 데크로 조성되 있습니다.


  ['삼청동천']                          
  여기까지 올라 온 이유는 <삼청동천>이 복개되지 않고 남아있는 유일한 곳이어서 찾은 것입니다.
  이곳 100여m 구간이 자연 상태를 유지 한다는데....이렇게 아름다운 <삼청동천>은 복개되어 시내를
  통과하고 있으니 좀 아쉽지만, 여기서라도 <삼청동천>을 흠뻑 감상합니다.


  ['삼청공원 안내도'] 

  ['일청교']                    
  데크 산책로를 잠시 지나면 <삼청공원 후문>을 만나는데 <삼청동천>을 건너는 <일청교 一淸橋>가
  가을을 뒤집어 쓰고 나그네를 반깁니다. 어디엔가 <二淸橋><三淸橋>도 있겠지만 공원 속으로...


  [공원길]

  ['삼청공원 숲속도서관']              
  제가 고교 학창시절에 가끔 찾았던 <삼청공원>을 횡하니 통과하면
  "삼청공원 숲속도서관"을 만나는데 이 도서관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서관이더군요.
  카페와 도서관을 함께 운영하는 도서관인데 <뉴욕타임즈>에도 소개된 도서관이라는군요.
  기사 내용 중에 일부를 소개하면...
  
 “필자는 1년 전 서울에 있는 삼청공원 숲속 도서관에서 혁신의 미래를 보았다. 
  숲이 우거진 공원 안에는 간결한 디자인의 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훌륭한 책들과 함께 
  중앙에는 카페와 작은 안뜰이 있었다.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사람들은 쿠션에 기대 
  창가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고 테이블에 놓여있는 카피 한 잔과 치즈 케이크를 먹으며 창밖의 
  단풍을 감상하고 있었다.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 중 하나이며, 
  최신 기술로 가득한 곳이다. 이 도서관은 이러한 것들에 대한 힐링의 장소로 특별히 설계된 곳이다.
  (중략)
  이러한 혁신은 과거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철저하게 미래에 집중된 솔루션이다. 
  유토피아에 대한 길을 개척하는 기술 중심적인 혁신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우리가 무엇을 배웠는지, 실제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반영한 ‘사람 중심의 미래’에 
  중점을 둔 혁신인 것이다. 혁신이 공원에 더 많은 도서관을 짓는 것이라면,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유아숲체험장']

  ['삼청공원 정문']         
  <삼청공원> 정문을 나서며 1부 답사기를 마치고 <2부 북촌을 걷다>가 이어 집니다.

                "길은 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길은 돌아 오기 위해 있는 것이다.
                 역사는 흘러 간 유물이 아니다.
                 역사는 다가 오는 미래를 가늠하는 현재의 거울이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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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구』
 『시청역에서 창의문까지 역사탐방』
                   - 2부 -


  ['창의궁터'에서 '칠궁'까지 실트랙]              
  
    3. "창의궁터-보안여관-백송-김가진집터-세종대왕탄신지-
        이완용집-이광수집-청와대사랑채-무궁화동산-칠궁"        
   
  2021년 11월 2일 (화) 구름 약간 맑음   
  <1부>에 이어 <2부>가 시작됩니다.


  ['창의궁 터']                 
  "창의궁 터 彰義宮址"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연잉군> 시절에 살던 궁이었답니다. 이런 집을 "잠저"라고 하죠.
  <영조>의 어머니인 무술이 출신 "숙빈 최씨"가 여기서 49세를 일기로 죽었답니다.
  잠시후 찾아 볼 <육상궁>에 이 여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리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고 난후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정빈 이씨"에게서 태어난 
  "화순옹주"를 <영조>는 사위로 [추사 김정희]의 할아버지인 [김한신]을 맞아드리고 결혼시켜 
  이 [창의궁]에서 살게 했죠. 그런데 [김한신]이 일찍 죽자 [화순옹주]도 따라 자살해 버리지요.
  이런 부인을 "열녀"라고 하는데 조선왕조에서 왕족 출신 "열녀"는 오직 [화순옹주] 뿐이랍니다.
  하지만 아버지 <영조>에게는 무지무지 불효한 딸이 되어 불효한 딸을 인정 할수 없다고
  아버지인 <영조>는 자기 딸인 [화순옹주]의 장례식장에도 가지 않았다는거 아닙니까.
  "열녀"가 된 [화순옹주]와 그녀의 후손인 [추사 김정희]가 [창의궁]에서 살게 된 연유가 되겠습니다.  
  <창의궁터>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 가면....


  ['영추문']               
  가을 풍광이 물씬 물씬 풍기는 "경복궁 영추문 迎秋門" 주변이 펼쳐집니다.
  <경북궁>의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의 반대편에 있는 서쪽 문이죠.
  동쪽은 '봄'에 해당하여 <춘春>이라고 하였는데, '가을'은 서쪽 문이어서 <추秋>를 붙였다고.
  주로 승지 등 관료들이 일상적으로 출입하는 문으로 이용하였답니다.


  ['통의동 마을마당']                      
  <영추문> 앞에는 <통의동 마을마당>이 있는데 이 뒷쪽에 <백송 터>와 <추사 김정희 집터>가 있습니다.
  <보안여관>을 다녀와 가도록 합니다.



  ['보안여관']                 
  "보안여관"을 만납니다. 단순한 오래된 여관인데 왜 찾았냐구요? ㅎ
  1930년에 지어진 여관인데 당시 많은 문학인들이 이 여관에 툭숙하며 창작활동을 했다네요.
  대표적 작가들 중에 '서정주' '김동리'등이 장기 투숙하며 『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했답니다.
  2006년 문을 닫고 철거 위기에 놓였던 건물을 일맥문화재단과 메타로그에서 인수해서
  옛 흔적을 그대로 살려 일반이들에게 무료 개방하고 있습니다.


  ['통의동 백송']   
          
            [안내문]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도 했었던 백송은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2년 전에 왔었을 땐 백송 앞 집 벽에 "추사 김정희 선생 초상화"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창의궁>은 <영추문> 앞에서부터 이곳까지 매우 큰 궁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선생>의 할아버지 "김한신"의 고향은 '충남 예산'이지요.
  그러니까 할아버지 "김한신"이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결혼해서 살게 된 집은
  [영조] 자신이 살던 {창의궁}을 물려 주어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드시....
  <추사 김정희>는 <화순옹주>의 피를 이어 받았으니 왕족의 피가 조금이라도 흐르는 것이죠.
  <추사 김정희선생>이 이곳에 살때 북한산을 무척 자주 올랐는데, 
  이때에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찾아냈죠. 그리고 연구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김가진선생 집터' 조망]               
  <백송터>에서 <자하문길>로 나가면 건너편에 <'GS25편의점'>이 보입니다.
  저곳으로 건너 가면...


  ['김가진선생 집터']                 
  "김가진 집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 분은 잠시후 찾아 볼 <충정공 김상용>의 11대 후손이지만 서얼 출신이라 과거 응시 자격이 없어
  서얼에게 허락된 규장각 검서관으로 관직을 했으나 워낙 똑똑해서 중요한 외교업무까지 했는데
  <갑신정변> 이후 서얼차별이 철폐되자 41세 되던 1886년(고종 23)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구한말의 개화파 문신이자, 독립운동가. 외교사적으로는 한국 최초의 재외공관 상주 외교관이기도 한
  선생은 한글 학교를 설립하고 법부대신, 규장각 대제학까지 오른 수재였습니다.
  일제강점기시대엔 독립운동가로 변신하여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하고 <김좌진장군>의 고문을 맡기도..
  대한제국 고위 공직자인 <대신> 출신 중에 유일하게 독립운동에 뛰어 든 분입니다
  나머지 <대신>들은 대부분 친일파가 되어 나라를 팔아 먹는데 앞장 섯습니다.


  ['토속촌삼계탕']                          
  <'GS편의점'> 뒤에는 <토속촌삼계탕> 음식점이 있는데 <노무현대통령>이 즐겨 찾던 음식점이라서
  퇴임 후 <이명박 정권>이 세무조사를 하기도 해 더 유명해 진 음식점인데, 이 집 옆 주차장 근처에
  <김가진 선생>의 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옥류동천'-'백운동천' 합수부]
                     
                       [안내도]                  
  <김가진선생 집터>에서 북쪽으로 잠시 올라 가면 <우리은행>이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이곳이 <옥류동천>이 <백운동천>에 합류하는 지점이 되겠습니다.
  좌측으로 올라 가면 <이상의 집> <윤동주 하숙집> <수성동계곡>등이 있는데
  자세한 사항은 제가 쓴 "서울 서촌 역사유적 탐방기"를 참고 하시고
  

  ['통인동']

  ['세종대왕 탄신지']                 
  이어서 <통인동>이 시작되는 사거리 <독일안경점> 앞에 있는
  "세종대왕 나신 곳" 표지석을 만납니다.


  ['통인시장']                     
  "통인시장 通仁市場"
  [경복궁] 옆 사대부 집안들과 신흥 중인들이 많이 살았던 "서촌"의 먹거리를 제공해 온 시장이랍니다.
  지금은 떡볶기가 유명하던데...ㅎ
  일제강점기시대엔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에 근무하는 쪽바리들이 많이 이용했답니다.
  현재는 쿠폰으로 <엽전>을 구매해서 음식을 사먹는 시장으로 좀 유명하죠


  ['옥인동']                  
  <통인시장>을 지나면 <옥인동>이 시작됩니다.
  <이완용 저택> 정문은 앞에 보이는 <옥인교회> 좌측에 있습니다.
  먼저 <이완용 저택> 정문으로 갔다가 되돌아 나와 좌측 뒷골목으로 가서 <이완용 저택>을 보겠습니다.


  ['옥인교회']                       
  <옥인교회> 바로 뒤에 <이완용의 저택> 중 본관이 아직도 건재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완용 저택']                      
  "이완용 집"
  이 집은 <이완용>이 실제 살았던 오리지날 그대로의 집은 아니고 누군가 인수하여 새로 단장했다는데 
  원래 집과 거의 비슷하게 복원 된 것이 확실 하답니다. 
                 당시 실제 집 사진은 자료가 없고 신문 기사에 난 집을 보여 드리면...
[ <이완용의 옥인동 가옥> 신축 기사(1909년 12월 6일자 매일신보)] [<이완용 장례식> 기사(1926년 2월 13일자 매일신보)에 나타난 이완용가옥]
현재의 집 모양과 거의 같은데 주변 정원 등이 다릅니다. 4,000여평이었다니 짐작되죠? 지금은 본관 건물만 비슷하게 복원되고, 그 정원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완용 집' 뒷 골목] <이완용 저택>을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뒷 골목으로 돌아 가면 "상촌재 上村齋"가 있는데 <종로구 문화재단>이 공공으로 운영하는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전시와 함께 한복, 한글, 전통공예 등 한국문화 콘텐츠 활성화를 위한 거점공간이랍니다. 그리고 <민주언론시민연합>이 <이완용 저택> 바로 옆에 있어 묘한 느낌을 줍니다. <상촌재>와 <민주언론연합>은 물론 주변이 대부분 <이완용 저택>이었답니다. ['이완용 저택'] 뒷 골목에서는 <이완용 저택>이 조금 더 잘 보입니다. ['조선총독부 지도'] <조선총독부 지도>를 보면 친일파의 극치인 <이완용 저택>과 <윤덕영 저택>의 위치와 규모를 알수 있는데, "이완용"의 집은 [통인시장] 북쪽에 약4,000여평의 저택을 지었답니다. 또한 <윤덕영의 저택>은 더 크고 넓어 '옥인동'의 57%인 16,628평이었다고 하니... <이완용>은 우리나라를 팔아 먹은 돈으로...호의호식하려 했습니다만, 그렇게 오래 살지도 못하고 1926년 양력 2월 11일, 세간에선 한창 음력설 준비를 서두를 때 그는 서울 옥인동 자기 집에서 겨울철만 되면 해수병이 도졌는데, 이때에도 천식으로 자리에 누웠는데 이번엔 완전 가버렸습니다. 윗 지도의 가운데 [순화병원 順化病院]이 잠시후 만날 <자수궁터=겸재선생 집터>입니다. 지도 윗쪽에 [재생원]이라고 표기된 곳이 현재의 "서울농학교"-"선희궁터"입니다. [뒷쪽에서 '이완용 저택' 조망] <이완용>은 1913년 이 집을 짓고 1926년 양력 2월 11일 죽을 때까지 살았다는군요. 불과 13년 간이지만.... "여간첩 김수임 사건의 현장" 해방 후에는 미군 헌병대사령관 <존. E. 베어드>가 이 집을 관사로 사용하며 살았는데 <김수임>이 <존. E. 베어드>와 이곳에서 동거하며 살았답니다. 재미있죠? <이완용>이 살던 집에서 <미군헌병사령관>과 <여간첩 김수임>이 짝짜쿵 동거생활을 했답니다. 이화여고,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와 통역관으로 활약하다 미국헌병사령과과 짝짜쿵~ <김수임>의 절친이 유명한 <모윤숙>, 그리고 <낭랑클럽>의 멤버들... <김수임>은 그녀의 영원한 첫사랑 <이강국>의 월북을 도운 혐의로 1950년 4월 체포되어 2개월 만에 사형 선고를 받고, <6.25 전쟁> 직전에 바로 처형되었죠. <이강국>은 그후 북한 초대 외무상이 되었지만,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이강국> 역시 북에서 미군 스파이로 몰려 처형된 것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과 재미를 더 느끼려면 다음을 참고하세요 "모윤숙의 패악질과 여간첩 김수임사건" ['순화원' '자수궁' 터] [안내문] <이완용 저택>과 <민주언론연합회>를 돌아 나가면 "순화원 {자수궁터}"를 만납니다. 지난 <서촌 답사기>에서 답사했으므로 생략하고 ['사이버수사과' '과학수사과''] <순화원터-자수궁터>를 지나 북쪽에는 "사이버수사과.과학수사과"라는 경찰부서가 있는데 이곳이 <남영동 대공분실>과 같은 <옥인동 대공분실>이 있던 곳으로 악명 높은 곳이었죠.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게 아니라 독재정권의 정권안보를 위해 사건을 조작하기 위해 존재하던 것들이 지금은 사이버과학수사과로 변신했나 봅니다. 잘 하는 일... ['효자동'] <이완용 저택>에서 <자하문로>를 건너 가면 <효자동>이며 <경복궁>으로 행하게 되는데... ['쌍홍문 터'] <성주빌라>라는 빌라 앞에 이정표와 표지판이 있습니다. <성주빌라> 좌측 뒤에 <신익희선생>이 살던 집이 있는데 비좁은 골목에 있어 사진 촬영이 어렵고 우측 직진성 길 좌측엔 <춘원 이광수 집>이 있습니다. "쌍홍문터 雙紅門址" <효자동>이라는 지명을 만든 효자 <조희정>과 <조희철>의 정려문 한쌍이 있었던 자리라고 그래서 이 동네가 <효자동>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답니다. ['춘원 이광수 집'] "춘원 이광수 살던 집" 우리나라 3대 천재라는 <춘원 이광수>, '해에서 소년에게'를 쓴 <최남선>, '임꺽정'의 <홍명희>... <이광수>는 변절하여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선동하며 일제강점기를 보내다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 된 곳도 이곳이라죠. <육당 최남선>의 우리나라 최초의 新詩라는 '해에서 소년에게'는 <일본이 조선 소년에게> 친일 하라는 의미의 詩인데...우리는 이런 詩를 교과서에서 배우는 친일 청산 못한 시대에 살았죠. '임꺽정'의 <홍명희>는 북으로 가고... 이 집은 <이광수>의 집이라기 보다 그의 부인인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산부인과 의사 <허영숙>의 집이라 해야 할것입니다. <김수임 여간첩사건>과도 연관된 <모윤숙>, <노천명>, <일엽스님 김원주> 등등의 신여성들과 수많은 스캔들을 만든 <이광수>를 부인 <허영숙>은 <이광수>를 인간 이하로 취급하며, 학대와 조롱을 일삼다가 결국 이혼했지요.이혼 당해도 싸지요? ㅎㅎ 그들의 딸들은 아직도 미국에 살고 있다는데 좀 오래 됬지만 언젠가엔가 귀국해서 "아버지의 친일행위를 사죄한다"고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진명여중고교' 터] <이광수 집> 앞에는 <청와대행정관실>이 있는데 옛 <진명여고>가 있던 자리이죠. '목아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여....' <사슴>을 쓴 시인 <노천명>이 여기 출신. <진명여고>는 <대한제국 황실이 세운 최초의 여학교>라고 하는데 <고종>의 애첩이던 <엄상궁>이 <황귀비 엄씨>가 되어 이 학교를 세우는 역활을 했다죠. ['효자로'] <옛 진명여고>를 지나면 <효자로>를 다시 만나며 <청와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청와대 사랑채' 앞 분수대] <효자동 삼거리>엔 <청와대> 앞 분수대가 설치되 있고 ['청와대 사랑채'] "청와대 사랑채" <한국의 관광>과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이지요. 이미 여러번 답사 했으므로 생략하고... ['겸재 정선'의 그림 배경 '백악산'] <한국화>의 선구자인 <진경산수화>의 "겸재 정선 선생"이 현재의 <경복고>자리에서 태어나 살다가 조금전 <이완용 저택> 옆에 있었던 "자수궁 터=순화병원=정선살던집터"로 이사하여 살며 <西村>의 여러 경치를 그렸는데 주로 <백악산><인왕산>을 그린 "장동팔경첩"이 전하고 있습니다. <청와대>가 있는 이 지역이 옛날엔 <장동 壯洞>이었답니다. 그 그림들 중에 이 지역과 관련있는 안내판에 나와 있는 그림만 현재와 비교하며 감상하겠습니다. ['겸재 정선' "대은암"] "대은암 大隱岩"이라는 그림은 <중종> 때의 <지정 남곤>이 이곳의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집을 짓고 살면서 집 옆의 바위에 <대은암 大隱岩>이라는 각자를 새긴데서 유래 한답니다. 훈구파 <남곤>은 <조광조>등 신진사림파를 숙청 하는데 앞장 서서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역사는 그를 아주 나쁘게 평가하지요. 그래서 말년에 조용히 은거하며 살았는데, 그가 자기 집 옆 바위에 새긴 "숨어 있는 큰 바위"라는 의미의 <大隱岩>은 자기를 잘난척 비유 한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겸재 정선' "독락정"] "독락정 獨樂亭" '홀로 풍악을 즐기는 곳'이라는 의미겠고 ['겸재 정선' "취미대"] "취미대 翠微臺" '푸르름이 어스럼해지는 곳'...즉 산비탈을 의미하는듯...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은 자기 자유이니 나름대로 감상하면 되겠지요? ㅎ ['무궁화동산' 앞] <청와대 분수대>에서 <백악산>을 바라보며 <겸재 정선> 선생의 그림과 함께 경치를 감상하고 <무궁화동산>으로 건너 갑니다. 사복 차림의 청와대 경호원들이 거부감을 덜 주며 경비를 곳곳에서 서고 있고 ['무궁화동산' 정문] <10.26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의 현장인 <궁정동 안가>를 헐고 <김영삼대통령>이 공원을 만들었죠 ['김대중 대통령' 기념식수] 입구를 들어 서면 <김대중대통령>이 심은 <기념식수>도 있고... ['무궁화동산' 중앙 쉼터] 공원 가운데엔 쉼터도 있습니다. ['김상헌 집터'] <무궁화동산>은 <병자호란> 때의 주전파인 "청음 김상헌" 선생의 집이 있던 곳이어서 조금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감상한 <대은암>이나 <독락정> <취미대>를 자주 방문하며 남긴 詩도 있더군요.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 저는 이 詩보다 <병자호란> 때의 화친파인 <최명길>과 나누는 대화가 더 기억에 남습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박정희대통령 시해장소'] <궁정동 안가>를 헐고 공원을 만들 때 그래도 <박대통령 시해 위치>는 표시했다는군요. <김상헌 시비>로 들어 가는 입구 "소나무 밑 바위" 자리랍니다. ['칠궁'에서 '자하문고개'까지 실트랙] 4. "칠궁-1.21사태격전지-경복고-청운초-정철집터-김상용집터- 정주영회장집-청운각터-경기상고-백운동천-자하문고개" ['칠궁안내소'] <무궁화동산> 북문 쪽에는 "칠궁안내소"가 있습니다. <칠궁>은 코로나사태로 문을 닫은 이래 오늘 처음으로 개방하며 해설도 한다고 해서 관람을 합니다. 무료이지만 입장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한시간에 한번이니 안내판을 참고하세요~ <주의> : <청와대> 옆이라 신분증은 필히 지참해야 합니다. ['칠궁 정문'] <칠궁> 입장은 정문 옆에 있는 샛문으로 가더군요. [안내문] [안내도] 해설사의 해설을 10여분 듣고 출발했습니다. 해설사가 코로라사태로 2년여만에 해설을 해서 좀 매끄럽지 못하더라도 이해해 달라고 하던데 아주 매끄러웠으니 걱정 할 필요 없겠습니다. ^.^ 한마디로 "칠궁 七宮"은 "왕을 낳은 어머니이지만 왕비가 못된 후궁이었던 여인 일곱명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사당" 입니다. ['풍월헌 風月軒'] ['송죽재 松竹齋'] ['재실' 안내문]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을 먼저 둘러 보는데 <청와대>가 <칠궁>을 많이 침범한듯.... ['삼락당'과 '중문'] <재실> 좌측으로 들어 가면 <삼락당>이라는 생활공간이 있고 우측에 사당으로 들어 가는 <중문>이 있는데, <중문>을 통과하면 .... ['육상궁 毓祥宮'과 '연호궁 延祜宮'] [현판] ['육상궁' 안내문] ['연호궁' 안내문] 사당은 하나지만 두분을 모시고 있는 "육상궁 毓祥宮""연호궁 延祜宮"이 함께 있고 "육상궁 毓祥宮"은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사당"인데 드라마 <동이>에서 <동이>였던 <숙종>의 총애를 받은 무술이 였습니다만 <영조>를 낳아 <숙빈>에 오른 입지전적 여인이죠. 당시 <장희빈>을 축출하여 죽이는데 결정적 역활을 한 여인이기도.... 무술이 출신 어머니를 컴플렉스로 여긴 <영조>는 어머니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어머니의 무덤인 <효령묘>를 <효령원>으로 격상시키고 자주 참배를 갔으며 이곳에 "육상궁 毓祥宮"이라는 사당을 만든게 대표적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칠궁>은 원래 <육상궁 毓祥宮>에서 시작 된것이죠. ['냉천 冷泉'] ['영조'가 직접 쓴 오언시] <육상궁 毓祥宮> 좌측에는 "냉천 冷泉"이 있는데 <영조>가 직접 지은 詩가 있습니다. <영조>는 여기저기 다니며 이런 글들을 무지 많이 남겼지요. ['냉천정 冷泉亭'] [안내문] "냉천정 冷泉亭" <냉천> 옆에 있는 정각인데, <영조>의 어진을 모신 곳이고 ['자연 紫淵'] [안내문] 사당에 연못도 조성한 갖출건 모두 갖춘 아름다운 사당입니다. ['삼문'] <냉천정>에서 <대빈궁>으로 들어 가려면 다시 별도의 <삼문>으로 들어 가야 하더군요. [감실 내부와 신위] 宮의 내부는 공개하지 않는데 관람객을 위해 내부 모습을 사진으로 안내하더군요. ['덕안궁'] [안내문] <삼문>으로 들어 가면 먼저 "덕안궁 德安宮"이 가운데 있습니다. <고종>의 애첩이었던 <엄상궁>이 <명성왕후>가 죽고 <대한제국>이 되자 <순헌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가 되었죠. <영친왕>을 낳았기 때문에 이곳에 ['저경궁 儲慶宮'] ['대빈궁 大嬪宮'] ['대빈궁 大嬪宮'] ['선희궁 宣禧宮'] ['경우궁 景祐宮'] "대빈궁 大嬪宮" 좌측엔 "저경궁 儲慶宮"이 있는데 <선조>의 후궁으로 추존왕인 <원종>을 낳은 <인빈 김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고 우측엔 "선희궁 宣禧宮""경우궁 景祐宮"이 한 사당 안에 있습니다. <선희궁>은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의 어머니이자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의 사당이고 <경우궁>은 <순조>의 어머니이며 <정조>의 마지막 후궁이었던 <수빈 박씨>의 사당이랍니다. 그런데 <수빈 박씨>는 <유빈 박씨 綏嬪 朴氏>로 불러야 한다고 최근 학자들이 주장하는데 <綏>의 발음이 당시엔 <유>였다고.... ['대빈궁 大嬪宮'] <칠궁>에는 또 하나의 유명세를 타는 무지무지 유명한 여인의 사당이 있습니다. 바로 "대빈궁 大嬪宮"입니다. 무술이에서 왕비에 까지 오른 여인천하의 입지전적 여인인 <장옥정>..... 우리에게 <장희빈>이라고 더 알려진 <경종>의 어머니이자 <숙종>의 후궁에서 왕비까지 오른 여인이죠. 사당의 기둥도 다른 후궁들의 기둥과 모양이 다릅니다. 다른 사당은 사각형 기둥인데, <장희빈>의 사당은 원통형입니다. 왕비까지 올랐던 여인이라 예우를 갖춰 기둥도 원토영으로 하고 "대빈궁 大嬪宮"이라 한듯 ['주한 교황청 대사관'] <칠궁>을 관람하고 나오면 <주한 교황청 대사관>이 있고 ['1.21사태 격전지'] <칠궁> 담장을 따라 <창의문로>를 조금 오르면 <청운실버센타(노인정)> 앞에서 "1.21사태 총격전 터"를 표시하는 "북한 무장공비 침투 저지한곳" 표지석을 만납니다. <창의문> 앞 <최규식 종로경찰서장 동상>이 있는 곳인 줄 알았는데 <청와대> 담벼락 옆에서 총격전이 벌어 졌었군요. ['궁정교회'] <궁정동 宮井洞>은 근처에 우물이 많았나 봅니다. <七宮>과 <우물井>이 합쳐진 동네 이름이라고 ['경복고등학교' 정문] <경복고등학교> 자리가 "겸재 정선 선생"의 생가가 있었던 곳이랍니다. 정문을 통해 학교 본관 앞으로 올라 가면... ['경복고 본관 앞'] ['겸재 정선' 집터] "겸재 정선 謙齋 鄭敾" 1676년~1759년 <영조>대에 활동한 화가이자 관리 중국 그림을 모방만 하던 "실경산수화" 시대를 뛰어 넘어 새로운 화법인 "진경산수화 眞景山水畵"를 탄생시키며 발전시킨 그를 저는 "한국화의 시조"라고도 표현 하고 싶습니다. 일본놈들까지도 "신조선 산수화 新朝鮮山水畵"라고 극찬을 했으니까요 여기서 태어나 52세까지 사시고 조금전에 찾아봤던 <이완용 저택> 옆 "자수궁 터" 근처로 이사를 하고 84세까지 장수하셨는데, 선생은 후진도 많이 양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단원 김홍도", "심사정" "김희겸"등이 그의 제자이죠 ['청운초등학교' 앞] ['청운초' 운동장-'자교 유구'] <경복고등학교>에서 <자하문로>로 나가면 건너편에 <청운초등학교>가 보입니다. 이 곳 운동장엔 <자수궁> 근처에 있었던 "자교 慈橋"의 유구를 옮겨 보관하고 있으며 "송강 정찰"의 생가가 있던 곳이라는데.... ['정철 생가터'] "송강 정찰" 생가터 표지석은 교문 앞에 세워져 있고.... 우리나라 國文學史에 우뚝 솟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한글로 쓴 詩歌 중에선 가장 아름답다는 "관동별곡"과 "사미인곡"등을 남겼죠. 말빨 글빨에서는 그를 이길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말과 글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정철"이지만 끊임없는 권력욕이 그를 파멸의 길로 인도했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청운초 후문'] <청운초등학교> 후문으로 가면 골목 삼거리가 있는데 우측으로 30m 정도 들어 가서 <김상용선생 집터>를 확인하고 다시 나와 위로 올라 갑니다. 먼저 우측으로 30m 정도 들어 가면.... ['김상용 집터'] "김상용 金尙容" 1561~1637 <병자호란> 당시 <인조>대에 병조판서,이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했는데 <병자호란>을 막지 못하자 책임을 느끼고 자폭 순절한 의지의 한국인이죠. <병자호란>의 주전파 <김상헌>의 친형입니다. 그런데 조그마한 안내 표지판을 땅바닥에 눞혀놔서 모르고 가면 도저히 찾기 어렵겠습니다. 뭔 보물찾기 하는 것도 아닌데 어찌 표지판을 땅바닥에 눞혀 놨을까.... ['청운 현대아파트'] ['백세청풍' 각자] <김상용 집터>에서 다시 <청운초등학교> 후문으로 나와 위로 조금 올라 가면 <청운현대아파트>를 만나는데 앞에 "백세청풍 百歲淸風" 각자가 있는 바위가 있는데 주택 담장 주축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刻字는 조금전 찾아 봤던 "김상용"선생이 "청풍계"라는 계곡의 아름다움믈 노래하며 새긴 글이라 합니다. "오랜 세월 세대를 두고 맑은 바람이 부는 곳"이란 뜻이겠죠? 시멘트로 둘러 싸인 담벼락에라도 남겨 두어 다행인가? ㅎ ['겸재 정선'의 '청풍계'] 이 계곡의 옛 모습은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림으로 남겨 놨습니다. <인왕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계곡으로 지금의 모습과 비교됩니다. 이 그림 계곡 중간쯤에 <현대그룹>을 세계적 기업으로 일군 <정주영 회장 자택>이 현재도 있는데 조금더 올라 가면.... ['정주영회장 집' 조망] ['정주영회장 집' 정문] [집 내부] {빌려 온 사진) <청운동> 골목의 최상단부에 "정주영회장 자택"이 있는데 예상보다 크지 않습니다. <백세청풍 百歲淸風>의 기운을 미리 알았는지 <인왕산> 자락 <청풍계 淸風溪>에 자리했습니다. <청와대>와 가까운 이곳에 자리 잡은건 필요시 언제나 <박대통령>의 <청와대>를 들락 거릴수 있어서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주한 브루나이 대사관''] 다시 <청운초등학교>로 내려와 조금 올라 가면 <주한 브루나이 대사관>이 <경기상고> 건너편에 있는데, 여기서 좌측 골목으로 조금 올라 가면.... ['대시멀'] ['옛 청운각'] 현재 <대시멀>이라는 촬영 대여처로 있는 이 집은 일제강점기 시절 <경성전기 사장의 집>이었는데, 해방 후 <이시영 부통령 관사>로 쓰였답니다 그 이후 요정정치의 산실로 군림한 유명한 "청운각 淸雲閣" 으로 변했고, 이곳에서 <한일협정의 기본 윤곽>이 마련되었다고 하네요. 이곳에서 한밤중 회담을 했던 일본 <시나 외상>의 유명한 말 “역사는 밤에 이뤄졌다”는 말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답니다 ['경기상고' 정문] 다시 <자하문로>로 나와 <경기상고>로 들어 가면... ['청송당 터'] ['청송당유지'] "청송당 聽松堂" 표지석에 "조광조"의 제자로 대학자 '청송 성수침'이 두문불출하며 공부했던 독서당터"라고 합니다. "청송 성수침 聽松 成守琛" 선생이 누구인지 먼저 알아 보겠습니다. "율곡 이이"와 절친한 친구이자 대학자로 알려진 "우계 성혼 牛溪 成渾"선생의 아버지이죠. [조선왕조]가 개국하고 일정시간이 흐르자 정치집단들이 나타나 당파 싸움을 벌이죠.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와 신진세력 [사림파]가 대립을 시작했습니다만, [4대사화]를 통해 [사림파]가 처참하게 당하며 멸망의 길을 걷다가, [훈구파]의 독주에 위협을 느낀 [선조]가 [사림파]를 등용하기 시작했죠.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등이 [사림파]의 대를 이어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고, 개혁세력의 거장인 "정암 조광조"와 그의 제자 "청송 성수침"선생으로 이어진 [사림파]의 후예이니 이들을 [사림파] 중에서도 이들이 "西村"에 산다고 "서인 西人"이라 하게 되었는데, 그 "西人들의 聖地"가 바로 "성혼선생"의 아버지가 세운 "청송당 聽松堂"이 되는 것이니 그 의미는 크다 할수 있겠습니다 ['겸재 정선' "청송당"] 이 근처에서 태어나 살았던 "겸재 정선 선생"이 진경산수화로 "청송당"을 남겼습니다 옛 풍치를 감상 할수 있어 다행입니다. ['자하문터널' 입구] <경기상고>를 나와 올라가면 <자하문터널>을 만나는데 우측길로 올라 가면... ['자하문터널' 위] ['백운장' 터] ['안내문] "백운장 터 白雲莊址" 안내문에 상세히 설명해 놨습니다. <동농 김가진> 선생은 대한제국 대신 출신 중에 유일하게 독립운동에 뛰어 든 분입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대대손손 흥하다는 말이 지금도 유효한데..... ['겸재 정선' "백운동"] <겸재 정선> 선생이 이곳 <백운동>에 대해서도 진경산수화를 남겨 옛 정취를 느낄수 있고 [오름길] <옛 백운장>의 입구를 알리는듯 하는 탑같은 돌기둥이 있는데 이 길로 계속 올라 가면... ['청운화장실'] <청운화장실>이 나오더군요. ['인왕산숲길'] ['청운공원'] 이 길은 <인왕산 숲길>이 이어지는 길이고 ['청운문학도서관'] <백운동 계곡>의 상단부엔 <청운문학도서관>이 있는데 <동농 김가진>선생의 뜻을 기리며 <백운장>이 있었던 계곡 상단에 설립된 도서관이라 합니다. ['윤동주문학관''] "윤동주문학관" 앞에서 답사를 마치고 ['청계천 발원지'] <자하문>으로 더 익숙한 <창의문> 입구에 "청계천 발원지"가 있는데 여기가 아니라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있다는 표지석입니다. ['겸재 정선' "창의문"] <겸재 정선> 선생이 이곳 <창의문>에 대한 경치도 남겼습니다. ['자하문고개'] <자하문고개>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귀가 했습니다. 오늘 걸은 거리는 약14km였으며, 5시간 25분 정도 걸렸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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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구』
 『시청에서 창의문까지 역사탐방』
              - 1부 -


  ['시청'에서 '경희궁'까지 실트랙]                 
    
  1. "시청-서울시의회-도로원표-훈련도감터-서울역사박물관-
      경희궁-경교장-4.19기념도서관-한글가온길 입구" 
  
  <시청역>에서 <세종대로>를 따라 <세종대로 사거리>로 가서 좌회전하여 <새문안로>로 갑니다.
  <서대문사거리>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 와 <한글가온길>을 이용하여 <육조거리뒷골목>으로


  ['시청역3번출구']                           
  2021년 11월 2일 (화) 구름 약간 맑음   
  서울지역에도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11월초에 길을 나섭니다.
  <시청역3번출구>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 가면...


  ['서울시의회']                   
        
          [안내문]                            
   "서울특별시 의회"를 만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하는데...
   요약하면 일제시대 경성시민들을 위한 공연장인 <부민관 府民館>이었는데 
   해방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다가 <시민회관>이 되고, 현재는 <서울시의회>가 이용하고 있답니다.
   이 건물이 <부민관>일때, 그러니까 일제시대 1945년 7월 24일 
   대한애국청년단원 강윤국(康潤國)·조문기(趙文紀)·유만수(柳萬秀) 등이 친일파 박춘금(朴春琴)이
   조직한 대의당(大義黨) 주최로 동남아, 일본 괴뢰정부의 대표가 참석하는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대회가 열리지 못하도록 이곳을 폭파한 사건이 일어 났답니다.
   제가 기억하는건 대학 때에 <"MBC 10대 가수 가요제">가 여기서 열렸는데....
   당시 최고 인기 코메디언이었던 <구봉서.곽규석씨>와 인기 가수였던 남진, 이상렬, 이용복, 정훈희, 
   조미미, 하춘화와 김세환, 정미조, 김추자등이 경연을 벌이고 상을 주는 자리였는데
   전기합선으로 화재가 발생해 난장판이 된 기억이 납니다.
   이 때 일화로, 당시 '맹인 가수'로 유명했던 가수 이용복씨는 화재가 발생하기 직전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도우미와 함께 행사장을 나왔는데, 이용복이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화재가 발생했다고
   그리고 제가 학창시정 <국회의사당>이었을 때 <김두한의 오물투척사건>이 기억 납니다.
   <삼성그룹> <이병철회장>이 <사카린 밀수사건>을 일으켰을때 당시 여당인 <자유당>이 옹호하자
   더러운 인간들이라고 <탑골공원 변소>에서 똥물을 퍼와 국무위원석에 왕창 투척한 사건이
   새록새록합니다. 요즘 국회에도 좀 그러고 싶을 때가 있죠? ㅎㅎ


  ['광화문원표공원']

  ['도로 원표'] 

  [안내문]                 
  "도로 원표 道路元標 Zeromilestone"
  <서울>에서 <부산>을 갈때 거리는 어디서 어디까지를 잰 것일까? 평상시 매우 궁금했죠?
  <서울>이나 <부산>등 각 지역의 면적이 장난이 아닌데, 도로 거리를 이정표에 표시 할때 기준점이
  당연히 있어야 하겠지요. 그 기준점이 바로 이곳  "도로 원표 道路元標 Zeromilestone"랍니다.
  가끔 다니면서도 이런게 여기 있는줄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에휴~


  ['청계천' 시작지점]                       
  <도로원표> 건너편에는
  <한양도성> 안을 흐르는 유일한 개천인 "청계천"이 자기 이름을 갖는 시작점이 있습니다.
  <청계천>으로 흘러 드는 枝川에 대해선 잠시후 자세히 알아 보기로 하고...


  ['광화문빌딩']                    
  <도로원표>를 지나면 <동아면세점>이 있는 "광화문빌딩"을 만납니다.
  이 자리엔 "국제극장"이 있었었죠.

        
          ['국제극장']
        
          ['국제극장' 앞 분수대와 '구 동아일보' 조망]                  
         <국제극장>은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영화 개봉관이었던 서울의 대표적 극장이었죠.
         사진에는 <장희빈>이 상영되고 있는 걸로 보아 1961년도에 찍은 사진인듯
         김진규, 김지미, 조미령, 주증녀 등 당시 최고 인기 배우들이 등장 했던걸로 기억됩니다.
         건너편엔 <옛 동아일보 사옥>이 보이는군요. 현재 <일민 김상만 미술관>
         <일민 김상만>은 <인촌 김성수>의 장남이죠.
         <피맛골>은 빌딩숲으로 변모했군요.


  ['종로' 방향 조망]               
  <옛 국제극장>에서 <종로> 방향을 촬영했습니다.
  우측 <일민미술관>이 윗 사진의 <옛 동아일보 사옥>이란걸 알수 있고...


  ['경복궁' 방향 조망]                      
    <옛 국제극장> 앞에서 길을 건너며 북쪽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현재 <광화문 광장>은 대규모 공사 중이라 대부분 출입금지이군요.
  <육조거리>가 있었던 거리인데 앞으로 하나 하나 답사할 예정인데
  윗 사진에 빨간색 화살표는 <백운동천>이 <청계천>으로 가는 물줄기를 표시 한것입니다.
  하지만 그 물줄기는 복개공사로 그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보이지 않습니다.
  
        
        
            ['육조거리']                       


  ['백운동천']
               

  ['수선전도 首善全圖']                 
  <경복궁> 서북지역에서 <청계천>으로 흘러 가는 개천들에 대한 개념도와 
  <고산자 김정호>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수선전도 首善全圖>입니다.
  <수서전도>에 노란색으로 표기한 원이 현위치입니다.
  이렇듯 <청계천>을 만드는 지천 중에 가장 큰 지천이 <백운동천>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오늘은 <백운동천>을 따라 <청계천 발원지>인 <창의문>까지 올라 갈 예정입니다.


  ['아주개']                        
  "야주개 夜珠峴"
  잠시후 들리게 될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빛이 나 밤에도 이 고개까지 비친다고
  붙여진 고개 이름이라고...


  ['새문안교회']               
  <새문안교회>가 엄청 크고 화려한 모양으로 재탄생했군요. 번창하는 곳은 교회등 종교시설이 대표적..
  이 지역이 옛날부터 "새로 만들어진 문 안쪽"이라고 <새문 안>이라고 했는데 <새문>은 <돈의문>을
  의미하죠. 서대문은 원래 현재의 <사직터널> 위 쯤에 있었던 <서전문 西箭門>이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이 지역으로 옮겨 새로 지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동네가 <새문안>이 되었고
  교회 이름까지 <새문안 교회>라고 짓게 되었답니다. 
  또한 <새문안로>를 <신문로>라고도 하는데, 한자로 표기했을 때 <新門路>가 되니


  ['훈련도감' 터]                 
  <새문안교회>를 지나면 "훈련도감"이 있었었다는 표지석을 만납니다.


  ['한글가온길' 입구]                          
  <훈련도감터>를 지나면 "한글가온길 입구"를 만나는데
  직진해서 <경희궁>과 <경교장>, <돈의문 터>, 그리고 <4.19혁명기념도서관>을 둘러 보고 
  다시 돌아와 우측 <한글가온길>로 갈 예정입니다.


  ['흥화문' 터]                         
  이어서 <구세군회관> 건물 모퉁이에 "흥화문 원래 자리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곳부터 <경희궁>이 시작되었다는 것인데, 현재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여기서
  제법 먼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작성 된 <서궐도안>을 먼저 보고 답사를 시작하면
  <경희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서궐도안']                         
  1820년 <순조> 때에 그려진 "서궐도안" <보물 제1534호>입니다. <경희궁>을 <서궐 西闕>이라고 했죠.
  다른 궁궐과 달리 정문인 <흥화문>이 우측 아래 동쪽을 향하고 있고 (현재 구세군회관 자리)
  <궐내각사> 자리가 현재의 <서울역사박물관>이란 걸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궁궐도 일직선으로 남향을 하고 있는데, 건물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알수 있죠. 
  

  ['서울역사박물관' 입구']

  ['금천교']                 
  모든 궁궐의 정문을 지나면 반드시 "금천교 禁川橋"가 있죠.
  궁궐을 출입하는 관리들은 몸과 마을을 깨긋이 하고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나쁜 기운을 모두 씻어 내고 통과하라는 의미조 있겠죠.
  여기엔 정문인 <흥화문>은 없지만 <금천교>는 흔적이 남아 복원을 해 놨습니다.
  <금천교>를 지나면 궁궐이 시작되는게 아니라 현재는 <서울역사박물관>이 시작됩니다. 
  옛날 <궐내각사>가 있던 자리인거죠.


  ['옛 다리 표지석']  

  ['복청교'와 '소의교']                
                                         
          [안내문]                        
  <서울>이 개발되면서 사라진 다리들의 표석을 찾아 몇개 전시해 놨고



  ['광화문 콘크리트 구조 부재']                    
  <박정희정권> 시절에 <광화문>을 복원하며서 무식하게 철근콘크리트로 복원했죠. 1968년도에...
  그리고 현판을 <박정희대통령>이 써서 붙였었죠. 
  <김영삼정권> 때에 철거 복원 하면서 부재를 몇점 전시 해 놨습니다.


  ['종루 주춧돌']                       
  지하철 공사 하다가 발굴된 오리지날 <보신각>의 종루 주춧돌을 전시해 놨습니다.
  <보신각>이라고 부르게 된게 <고종> 이후부터라는거 처음 알았습니다. ㅎ


        

  [추억의 '전차']            
  교복 입고 등교하는 아들에게 보자기에 싼 벤또(도시락)을 급히 가져와 전달하는 엄마의 모정이
  맘 찡하게 하는 광경이 추억 속에...
 

  ['경희궁공원']              
  <경희궁공원>을 지나면...


  ['흥화문']                  
        
          [안내문]                  
        
          ['옛 흥화문']
                  
                    [1930년대 폐허가 된 '경희궁']                   
  흥망성쇄...질곡 많은 "흥화문 興化門"이 자기 자리도 아닌 곳에서 옛날을 그리워 하며 서 있습니다.
  이 문은 <이또 히로부미 伊藤博文>의 사당인 <박문사 博文寺>의 정문으로 옮겨 사용되었는데
  그 자리가 현재 '장충동' <신라호텔>입니다.
  그러니까 이 <흥화문>은 <신라호텔>로 갔다가 되돌아 온 것이죠.
 

  ['서울중고등학교' 터]                      
  "서울중고등학교 터"
  1910년 5월에 일본인 거류민단에 의해 <경희궁터>에 설립된 <경성중학교>가 광복 후 일본인의 
  철수로 폐교되자 서울시에서 이를 인수하여 <서울공립중학교>로 개교하였답니다
  지금은 <서초동>으로 이전했고...
 

  ['서울시 교육청' 조망]                  
  <서울시 교육청>이 옆에 보이고, <기상청>도 그 옆에 있었는데....


  ['경희궁']
        
          [안내문]

  [안내도]                    
  "경희궁 慶熙宮"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조선왕조 건물들은 쪽바리들이 불태운게 아니라 우리 백성들이 화가 나서
  <경복궁> 등에 불질렀다고도 합니다. 백성들을 두고 저만 살겠다고 도망간 <선조>가 더 적군이란거죠.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이 <조선왕조>를 재건하기 시작하며 이 궁궐을 새로 만들었답니다.
  하지만 그도 기득권세력들에 의해 사라지고 <임진왜란>에 이어 다시 <병자호란>으로 갔지요.
 

  ['숭정문']

  ['숭정전']

  [안내문]                       
  <숭정문>을 들어 서면 "숭정전 崇政殿"이 펼쳐집니다.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과 유명한 <조대비>의 아들 <헌종>이 즉위식을 올린 곳이랍니다.
  특히 <사도세장>의 아들 <정조>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며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외친 곳으로 유명합니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보수기득권세력인 훈구파들에 대한 선전포고 였습니다.
  이 건물 오리지날은 현재 <동국대학교>에 이전 되 있는데 <정각원>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고
  이 건물은 새로 만들어 복원한 건물이랍니다.


  ['자정전']

  [안내문]                          
  <숭정전> 뒤에는 "자정전 資政殿"이 있습니다.


  ['옛 서울고' 터]                   
  <숭정전>을 둘러 보고 <숭정문>으로 다시 나와 바라보는 <옛 서울고 터>입니다.
  윗 사진에서 본 폐허가 되었던 <경희궁>과 현재 모습을 비교하면 진짜 <개천에서 용 났다>라고 할수도


  ['서대문' 방향]

  ['돈의문 박물관 마을']                          
  <경희궁>을 나가 <서대문>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가면
  <서대문>의 본명인 <돈의문>의 역사 박물관 마을이 있고


  ['돈의문 터']                
  "돈의문 敦義門址"
  우리가 일반적으로 西大門이라고 부르는 <돈의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 졌고 
  복원하려니 도로 사정등도 있고 특히 천문학적 비용 때문에 복원도 할수 없답니다.
  사진 속에는 아직도 남아 있으니 보여 드리면....
  
        
        

           ['돈의문']                
          시대별로 <돈의문>의 주변 모습이 확연히 다릅니다.
          전차가 <돈의문>을 통과하고 있는게 재미 있습니다.


  ['경교장']
        
          [안내문]                    
  "경교장 京橋莊"
  <백범 김구선생>이 기거 한 곳으로 여러번 담사 한바 있어 오늘은 생락하고
  <경교장>을 다시 언급하는 것은 잠시 후 답사할 <이기붕 저택 터>와 비교하기 위해서 입니다.
  <경교장>을 나서서 <서대문로터리>로 향하면...
  

  ['4.19혁명기념도서관']                                    
  "4.19혁명 기념도서관"을 만납니다.
  이곳이 <3.15부정선거>의 원흉인 "만송 이기붕 晩松 李起鵬"이 살던 집터입니다.
  <충남 괴산> 출신으로 8·15 광복 이후 <이승만>의 비서, 국방부 장관, 서울특별시 시장, 
  국회의장직을 역임한 대한만국 역사를 뒤 흔든 인물인데....
  <보성고>를 졸업하고 <연세대>를 다니다 중퇴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접시닦기를 하며 
  아이오와주 <데이버 대학교>를 졸업한 의지의 한국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권력 욕심은 그를 인생 나락으로 곤두박질
  독재 영구 집권욕에서 치뤄진<3,15부정선거>로........


  ['서울적십자병원']
             
  [좌측에서부터 '장남 이강석' 프란체스카여사' '이승만' '이기붕' '박마라아여사' 차남' 이강욱'] 
  <이기붕>의 저택은 <4.19혁명기념도서관> 뒤 <서울적십자병원>에 까지 걸쳐 있었었답니다.
  <이기붕>은 장남 <이강석>을 아들이 없던 <이승만>의 양자로 입양시키고 차기 대권을 노렸습니다만...
  <3.15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은 되었지만 <4.19혁명>이 일어나 그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려고 하던 찰라에 당시 <경무대> 육군 소위로 근무 중이던 장남 <이강석>이
  권총으로 아버지, 어머니, 동생을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지요.
  권력욕이 낳은 비극의 반대급부는 총살이었습니다. 그 이후 정권도.....
   

  ['한글가온길' 입구]                        
  <경희궁>과 <이기붕 집터>를 돌아 보고 다시 <한글가온길> 입구로 돌아 갔습니다.
  <가온길>은 <가운데 길>이라는 순수 우리말이라네요.
   

  ['한글가온길'에서 '창의궁터' 까지 실트랙]    
                         
  2. 한글회관-육군무관학교터-봉상시터-방정환탄생지-한성전보총국너-사역원터-
     주시경집터-종침교터-내자호텔터-장흥고터-금천교터-창의궁터
      
  <한글가온길>에서 <육조거리 뒷골목>을 지나 <광화문역사거리>를 통과하여
  <창의궁터>까지 가는 지도입니다.


  ['한글회관']                        
  <한글가온길>로 들어 가면 먼저 <한글회관>을 만나고


  ['육군무관학교' 터]                 
  <한글회관> 건너편 <신문로빌딩> 앞에 "육군무관학교 터" 표지석이 있으며


  [봉상시터' 조망]

  ['봉상시' 터]                
  이어서 모르고 가면 찾기 어려운 "봉상시 터"가 있습니다.


  ['로얄빌딩' 앞 '방정환선생 탄생지' 조망]

  ['방정환 선생 탄생지']                   
  <봉상시 터>에서 우화전하면 <로양빌딩>을 만나는데 <세종문화회관> 뒤 입니다.
  이곳에 <소파 방정환선생 탄신지> 표지석이 있습니다.
  "어른"이라는 말에 대칭되는 "어린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어린이들의 대부이시죠.
  

  ['세종문화회관' 뒤 삼거리]                               
  <방정환선생탄신지> 앞에 삼거리가 있는데,
  먼저 우측 <세종문화회관> 뒤 울타리에 설치된 <사역원터>를 확인하고 좌측 골목으로 진행합니다.
  그 이유는 좌측 골목이 복개된 <백운동천>이 흘러 <청계천>으로 가는 물줄기이기 때문입니다.


  ['사역원 터' '한성전보총국' '양정학교 터']                   
  <세종문화회관> 뒤 울타리에는 세개의 표지가 있는데
  먼저 "한성전보총국"이 있었었다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1885년 6월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전선을 연결하여 서로 전보를 주고받았던 곳
  그 옆에는 "사역원 터 司譯院址"
  외국어 통역관의 양성과 번역 통역을 담당하던 곳
  "양정 창학터 養正創學址"
  <양정학교>가 원래 이곳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작했군요.
   

  ['용비어천家' 빌딩]                        
  <용비어천家>라는 오피스텔은 "주시경선생 집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앞뒤 구석구석 찾아 봤는데도 별도의 안내판은 보이지 않았고...


  ['종교교회'] 

  ['종교교회' 정문 앞]                        
  "종교교회 琮橋敎會"
  독특한 이름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종교 宗敎 religion>을 의미하는 <종교교회>가 아니라
  이 앞에 흐르는 <백운동천>에 다리가 있었는데 그 다리 이름이 <종침교 琮琛橋><종교 琮橋>여서
  교회 이름도 다리 이름 <종교 琮橋>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네요. ㅎㅎ
  이 교회는 <배화학당>을 설립한 선교사 <조세핀 캠벨>이 세운 교회 중에 하나랍니다.
  <조세핀 캠벨>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이라고 합니다.
  교회 이름을 만들게 한 <종침교>는 여기서 대각선 방향 건너편 <김&장법률사무소> 빌딩 옆에 있습니다.


  ['종교교회' 앞에서 '종침교 표석' 조망] 

  ['종침교 터']                          
  "종침교 琮琛橋"
  <백운동천>은 완전 복개되어 흔적을 찾을수 없지만 지금도 이 도로 밑으로 흘러 <청계천>으로 가고
  있는데, 여기에 다리가 있었다는 것인데 무지 무지 유명한 역사적 에피소드가 있는 다리랍니다.
  조선 <성종>대에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위하기 위한 어전회의가 열렸는데, 
  당시 형제였던 <충정공 허종 許琮>과 <문정공 허침 許琛>은 <윤씨>의 아들 <연산군>이 세자로 
  있음을 걱정해, 고민 끝에 사직동에 사는 누이를 찾아 조언을 구했답니다. 이에 그 누이는 꾀를 내어,
  훗날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화를 면키 어려우니 어전회의에 가지 말라고 했답니다.
  이런 누이의 조언에 따라 그들은 궁궐로 가는 이 다리 위에서 일부러 낙마해 다리를 다침으로써 
  어전회의에 참석 못할 구실을 만들었다고.....
  이로써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올라 자신의 생모 <폐비 윤씨> 복위 문제로 일으킨 
  <갑자사화(1504)> 때, 이 형제는 살아남았고, <허종>과 <허침>의 목숨을 구해준 다리라 하여 
  사람들은 그 이름에서 한 자씩 따와 <종침교>라 했고, 세월이 흐르며 <종교>로 이름이 줄었다고...
  <종.침 琮.琛>한자의 의미를 옥편에서 찾아보니
  <종琮>은 '옥으로 만든 홀대'를 의미하고, <침琛>은 '보배'라는 뜻으로 좋은 뜻이더군요.
   

  ['서울경찰청']                        
  <종침교>를 지나면 "서울경찰청"이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는 "내자호텔"이 있던 자리이죠?
  일제시대 <미쿠니(三國)석탄회사>의 사원 아파트가 있던 자리에 <내자호텔>이라는 이름으로
  재 탄생해 주한 미군들의 숙소로 사용되다가 일반호텔이 되었는데, 유명한 일화가 있는 호텔이었죠
  <10.26사건>으로 <김재규 정보부장>이 재판을 받던 재판장에서 나온 이야기 하나 언급하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음주 가무에 동원된 여성들이 <궁정동 안가>로 가기 직전 
  이곳 <내자호텔> 1층 커피숍으로 호출되어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을 기다리며 유의사항을
  교육받던 곳이었는데, 그때 동원 관리되던 여성들의 수가 200여명이었다네요.
. 특히 <10.26사건> 때에 사건 현장에 있었던 두 여인의 현장검증이 이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인데,
  이 둘은 <여대생 신재순>과 <가수 심수봉>이었죠. <심수봉>도 대학생 시절...
  그이후 <그때 그사람>이라는 노래가 공전의 힛트를 쳤고....


  ['장흥고 터']                        
  <서울경찰청> 자리는 조선시대 "장흥고 터 長興庫址" 였군요.


  ['경복궁역교차로']                          
  <내자동>을 지나면 <경복궁역 교차로>를 만납니다.
  길 건너 좌측은 <경복궁역1번출입구>가 있는데 저곳에는 <한성정부유적표지석>이 있고
  그 뒤에 <금천(교)시장>이 있었는데 <청계천> 이북에선 매우 큰 시장었다는군요.
  그런데 도로 확장 공사로 쪼그라 들었다는데....


  ['세종마을음식문화거리']               
  <금천(교)시장>이라는 명칭은 이젠 찾아 볼수 없고 <세종마을음식문화거리>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이 근처에서 <백운동천>를 건너 <경복궁>으로 가는 다리가 있었었다는데


  ['적선골음식문화거리']                       
  <세종마을음식문화거리>라는 <금천(교)시장> 건너편에는 <적선골음식문화거리>가 <경복궁>까지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곳에  <고려 충숙왕> 때 만든 당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 <금천교>가 있었었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1928년 물길이 도로로 변하며 매몰되고 말았다는군요.


  ['금천교'의 옛 모습]               
  <백운동천>이 제법 큰 물길이었군요.


  ['경복궁']                    
  <적선골음식문화거리>를 통과하면 <경복궁>을 만나는데 <국립고궁박물관>이 담 너머 보입니다.
  <적선동 積善洞>은 주역에 나오는 <적선지가 필유여경 積善之家 必有餘慶>에서 따온 말이라는데
  "이웃에 선을 베풀며 살자"라는 의미를 가진 동네 지명의 유래라고..


  ['창의궁 터']                 
  <효자로>를 따라 조금 올라 가면 "창의궁 터"를 만나는데
  <영조>가 왕이 되기 전 <연잉군> 시절에 살던 집..이런 집을 '잠저'라고 하죠.
   
  여기서 『1부』답사기를 마치고 계속해서 『2부』답사기로 이어 집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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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구』
『함춘원 창경궁 성균관 흥덕사』2부


  ['함춘원 창경궁 성균관 흥덕사' 실트랙]

  ['성균관' 주변 실트랙]                          
  <서울대 의과대학>과 <서울대병원>이 자리 하고 있는 <종로구 연건동>의 <함춘원 터>와
  <와룡동>의 <창경궁>을 답사하고, 조선 최대 최고 인재 양성소인 <성균관>이 있는 <명륜동>과 
  그리고 숱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흥덕사 터>와 <장면 박사 옛집>과 <여운형선생 피살현장>이 있는
  <혜화동>을 둘러 보겠습니다.
  "<1부> <함춘원>과 <창경궁> 답사기"  에 이어
  <2부>는 <명륜동>과 <혜화동>에 있는 <성균관>과 <흥덕사터><장면가옥>등을 갑니다.


  ['창경궁 월근문' 앞]               2:22               
  2021년 10월 21일 (목) 구름 약간 맑음   
  <창경궁> 답사를 마치고 <창경궁 월근문>에서 계속해서 <2부 성균관-흥덕사 터>로 갑니다.


  ['국립어린이과학관']                    
  <창경궁 월근문> 바로 옆에는 <국립어린이과학관>이 있고.
  그 뒤에는 <서울특별시 선거관리위원회>가 <창경궁> 담장에 붙어 있더군요.
  도로를 따라 <어린이과학관>을 지나면...


  ['명륜동' 골목 입구']

  ['명륜동 골목길']                            
  <어린이과학관> 옆으로 돌아 골목으로 들어가 골목길을 5~6분 진행하면....


  ['성균관 담장']                   2:30               
  <성균관> 담장을 만나는데, <창경궁 집춘문>을 다녀 오기 위해 여기로 왔습니다.
  사진에 표기한 [뜸들이다]라는 좀 독특한 이름을 가진 음식점 좌측 골목으로 들어 가야 합니다.


  ['집춘문' 입구]                    
  [뜸들이다]라는 음식점 옆 골목은 "막다른 길"이라고 안내하고 있는데 이 길 끝까지 올라 가야 합니다.
  골목 끝에 <창경궁 집춘문>이 보입니다. 


  [계단]

  ['집춘문']                     2:32                   
  "창경궁 집춘문 集春門"
  이 門은 일반인이나 관리들이 통용하는 문이 아니라,
  임금이 <성균관>내 <대성전(공자사당)>에 "작헌례"를 올릴 때 가기 위해 이용하던 문이랍니다.
  "작헌례"는 "능이나 사당을 참배하고 술잔을 올리는 의식"을 말하는데 <문묘대제>라고 한답니다.
  <유교>를 국교로 나라의 이념으로 삼은 <조선왕조>가 매우 중시하는 일이 <성균관 제례> 였으니
  임금이 직접 참석하여 제례를 올리는 일은 국가의 큰 행사여서, 반드시 참석해야 했답니다.
  그런 "작헌례"를 위해 왕궁에서 가장 가까운 문과 길을 만들었는데 이 길을 "거둥길"이라 한답니다.
  이 길이 100여년 동안 폐쇠 되 있어서 <종로구>는 <종묘>와 <창경궁>을 지나 <성균관>까지 
  한번에 이어지는 도보 코스를 한번에 관광할 수 있도록 예산을 들여 "거둥길"을 2008년에 
  조성하였다는데, 시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예산만 낭비한 꼴이 되고 문은 굳게 닫혀있습니다.
  제가 이 문을 기필코 찾은 이유는 
  <고종>과 <명성왕후>가 모시고 자문을 구했던 '비선실세' 무속인 "진령군"이 드나 들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찾은 것입니다. 임금이 거둥 할때 이용하던 문을 최근의 <최순실> 같은 '비선실세'였던
  무속인 "진령군"이 드나들었을 걸로 추정되어 그녀에 대해 알아 보기 위함입니다.
  나라의 운명과 중대한 정책을 무속인의 예언에 의지한 <고종>과 <명성왕후>..특히 <명성왕후>....
  잠시후 <흥덕사 터>에 가서 자세히 알아 보기로 하고...


  ['성균관대학' 정문]                    2:37                 
  <집춘문>에서 <성균관 문묘> 정문까지는 200m 정도 되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정문으로도 사용되는 정문을 들어서면...



  ['하마비와 탕평비각']                2:38     
  <성균관> 정문에는 "탕평비 蕩平碑"가 세워져 있으며 <하마비>도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권력을 손에 쥐려고 피터지게 싸우는 정치집단들....
  <탕평책>을 시행하여 좋은 역사의 평가를 받는 <영조>가 1742년에 세운 碑라고 합니다.
  <영조>가 친필로 비각에 세긴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  
  "두루 원만하고 편향되지 않음이 군자의 마음이고, 
  편향되고 원만하지 못함이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신삼문']                    2:39

  [안내문]                 
  "신삼문 神三門"
  "문묘 文廟"의 정문으로서 "성현들의 혼령이 드나드는 세칸짜리 문"이어서 <神三門>이라 하는데
  현재는 닽혀 있어서, <성균관 문묘>로 들어 가려면 <동삼문>을 이용해야 합니다.


  ['동삼문']                   2:4             
  <신삼문>에서 다시 교문 옆에 있는 <성균관웨딩홀>로 돌아 와 웨딩홀 앞에 있는 <동삼문>을 
  이용해야 <성균관> 안으로 들어가 구경 할수 있습니다.
  "동삼문 東三門"은 <어삼문 御三門>이라고도 하는데 임금이 드나드는 門'
  우측에 보이는 門은 <향문>으로 유생들이 드나드는 문



  ['문묘'와 '성균관' 안내도]               
  <문묘>와 <성균관> 안내도를 숙지하고 들어가야 관람이 용이합니다.
  건물수와 규모가 그렇게 많거나 크지 않아 꼼꼼이 둘러 볼수 있더군요.


  ['대성전']

  ['문묘'와 '석전대제' 안네문]                
  <동삼문>으로 들어가 좌측으로 가면
  "대성전 大成殿""문묘 文廟"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보물 제14호>
  <유교>의 창시자 <공자 孔子>와 여러 성현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 랍니다.
  여기서 제사를 올릴 때 임금이 직접 참석하여 성대하게 거행되었는데 
  이 제례행사를 <석전대제> 또는 <문묘대제>라고 하며 이 행사를 할때 연주하는 음악을
  "문묘제례악 文廟祭禮樂"이라고 하지요. 
  <세종실록>과 <악학괘범>에 실려 있으며 제사를 올리며 <성균관 유생>들의 입학축하식을 할때도
  춤과 함께 음악을 연주했답니다. <중요 무형문화제 85호>로 지정되 있답니다.


  ['명륜당']

  ['명륜당' 내부]

  [안내문]                           
  "명륜당 明倫堂"
  "인간의 사회 윤리를 밝힌다"라는 의미의 <명륜당>은 <성균관>의 메인 강의실이라 할수 있겠죠.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성균관"이라는 이름에서 "성균 成均"은 
  "성인재지미취(成人材之未就), 균풍속지부제(均風俗之不齊)"에서 각각의 앞 글자들을 따온 것으로,
  "인재로서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풍속으로써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한다"라는 뜻이라고


  ['동재' 조망]

  ['대성전' 은행나무 조망]

  ['서재' 조망]                            
  <명륜당> 앞에는 유생들의 공부방이자 기숙사인 <동재 東齋>와 <서재 西齋>가 좌우에 20여칸씩 있고
  가운데엔 은행나무 두그루가 있는데 <천연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된 <성균관>의 살아 있는 역사랍니다.
  <중종 14년(1519년)>에 대사성을 지낸 <윤탁(尹卓)>이 심었으며, 나이는 500살 정도로 추정된다고...
  <동재 東齋>와 <서재 西齋>에는 방 마다 각 4~6명씩 기거하며 공부했다는데, 환경이 열악해서
  부잣집 자재들은 빆으로 나가 <반촌 伴村>의 하숙집을 이용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하네요.
  예나 지금이나 대학 주변엔 하숙집 자취집이 번창했는데 특히 이곳 <명륜동(반촌)>은 
  <성균관 유생들>로 인해 엄청 북적거리는 곳이었답니다.
  

  ['존경각']

  ['향관청']                 
  <명륜당> 뒤로 나가면...
  "존경각 尊經閣 "과 "육일각 六一閣", "향관청 享官廳"등 부속 건물들이 있습니다.
  <명륜당> 우측 뒤에는 <존경각 尊經閣 >이 있는데 <성균관>의 <도서관>이었다고 하며
  그  우측 뒤에 있는 <육일각 六一閣>은 활과 화살을 보관하던 건물이라 하며,
  <향관청 享官廳>은 문묘의 행사 때 제관들이 숙식하고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을 두는 곳이었다고


  ['비천당' 입구]                         
  <명륜당> 좌측 뒤에는 <비천당>으로 가는 문이 있는데 모르고 가면 놓치는 곳입니다.
  뒤로는 <성균관대학교>가 보이기 시작하고
  문 밖으로 나가면



  ['비천당']                    
  "비천당 丕闡堂"이 있습니다.
  "丕闡大猷"라는 말에서 <송시열>이 따온 말이라는데 "큰 도를 크게 밝힌다"라는 뜻이라고...
  <클 비丕>와 <열 천闡>이라는 어려운 한자 이군요.
  이곳은 강의나 과거시험을 보던 곳이라고 합니다.



  ['진사식당']                          
  "진사식당 進士食堂"
  수백명의 유생들이 동시에 식사를 하는 식당이었답니다.
  밥 먹는 사람들이 워낙 많았으니 이 식당에 납품되는 식자재가 엄청 많아 여러 일들이 발생했다는데...
  <세조 4년> 실록에는 <성균관> 학생 200명이 1년간 소비하는 식량이 960석인데 
  <양현고>의 수입은 600석으로서 크게 부족한 실정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짐작 할수 있습니다.
  잠시 후에 <양현고 터>에 가서 알아 보기로 하고 <성균관> 관람을 마치고 나가면....


  ['성균관 컨벤웨딩홀' 정문]                3:14             
  <성균관>에서 운영하는 <성균관컨베션웨딩홀> 정문 앞에서 북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바로 <양현고 터 표지석>을 만납니다.
 

  ['양현고' 터 표지석]                    3:18               
  "양현고 터 養賢庫址"
  <성균관>의 유생들이 워낙 많았으니 매일 매일 식자재를 조달하는 일이 큰 문제여서
  <성균관> 유생들의 식량·물품 공급을 담당한 기관을 만들었는데 그 기관이 <양현고>였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 成均館>과 그 주변의 마을 <반촌 泮村>에 대해 알아 보면
  <반 泮>이란 글자는 <국립학교>라는 뜻으로, <반궁 泮宮>은 <성균관>의 별칭이며 
  <반궁 泮宮>을 감싸고 흐르는 물길이 <반수 泮水>, 그 주변의 마을을 <반촌 泮村>이라 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반민 泮民>이라 했답니다.
  특히 <성균관>에 납품하는 쇠고기를 독점적으로 도살 납품하는 권한을 천민인 <반민 泮民>들이 갖게
  되면서 <반촌 泮村>은 富村이 되며 특권을 누리는 마을이 되었답니다.


  ['흥덕사 터' 답사 실트랙]                  
  <성균관 양현고터>에서 <흥덕사>가 있었던 <옛 보성고등학교>를 돌아 나오는 실트랙 지도입니다.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

  [옛 '보성고' 정문]                      3:23                  
  <양현고터>에서 <혜화동>방향 북쪽으로 5분 정도 진행하면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을 만납니다.
  이 자리는 "옛 보성중고등학교 터"입니다만 그 이전엔 무지 중요한 역사적인 곳입니다.
  <흥덕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며, <우암 송시열>이 집을 짓고 살던 집이 있었던 곳이며
  <임오군란> 후에는 <북묘 北廟>라는 <관우 사당>이 <고종>에 의해 지어져, <진령군>이란 무당이 
  <고종>과 <명성왕후>의 총애를 받으며 요즘의 <최순실>이 하던 국정농단을 일삼은 곳입니다.
 

  ['아이들극장']                  
  <옛 보성중고> 자리 한켠엔 <아이들극장>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골목을 따라 올라 가면....


  ['흥덕사' 터]

  ['흥덕사 터 표지석'과 '하마비']              3:26        
  "흥덕사 터 興德寺址"
  <흥덕사터>는 윗 지도의 <서울과학고>와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자리인 <옛 보성중고> 자리에 
  엄청나게 큰 터를 차지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표지석은 골목에 세워놨군요.
  <태종1년(1401년)> 여름에 태상왕(太上王) <태조 이성계>가 예전에 자기가 살던 집을 희사하여
  <흥덕사>를 창건하게 하였답니다. <태조 이성계>는 이 절을 지어 대대로 나라를 복되게 하며, 
  위로는 선조를 복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이롭게 하여, 종묘사직이 영구히 견고하고 
  왕실의 계통이 끊이지 않도록 하고자 이 절을 지었다고 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열열한 불교 신봉자여서 언제나 <무학대사>를 멘토로 삼으며 함께 했죠.
  하지만 <흥덕사>는 <조선왕조>가 <유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운영하며 <불교>는 쇄퇴하는 가운데
  <연산군> 시절에는 '숭유억불 정책'이 극에 달하며 사원철폐령으로 완전 폐사 되어 사라 졌다가 
  <병자호란> 이후에는 <우암 송시열>의 저택이 들어 서고
  <고종> 때엔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북묘 北廟>로 재 등장하고,
  그 이후 <동국대>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가 되고, 다시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가
  되었다가 <보성중고등학교>가 되고 다시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과 <서울과학고>로 변신했답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과 <서울과학고> 자리는 "흥덕사"라는 절이 있다가
  <고종>과 <명성왕후> 때에는 "북묘 北廟"가 설립되어 "진령군"이라는 무속인이 국정을 농단한
  곳으로 <최순실>이 <청와대>를 들락거리며 국정농단 한것과 같이 <창경궁 집춘문>을 들락 거리며
  국정을 농단하며 <조선왕조>는 몰락 해 갔습니다.
  <고종>과 <명성왕후>이 지어준  "북묘 北廟""진령군"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을 참고 하면 되겠습니다.
  "<최순실>보다 더했던 <진령군> 이야기"  여기 클릭
    "[北廟] 북묘묘정비 北廟廟庭碑  여기 클릭
 

  ['증주벽립']                      3:29

  ['증주벽립' 위치]

  ['송시열 집터' 안내문]                       
  <흥덕사 터 표지석>에서 골목을 따라 조금 더 올라 가면
  "증주벽립 曾朱壁立"이라는 암벽 각자를 만나며, 
  옆에는 "우암 송시열 집터"라고 알리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우암 송시열>의 집은 <흥덕사> 터에 지었기에 어마어마하게 넓은 면적이라고 기록 되 있습니다.
  그러니까 <송시열>의 집은 조금전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과 <서울과학고>에서 부터 
  뒷쪽 <북악산 자락 한양도성>까지 이 근처 계곡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옛날엔 <송시열>의 집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어서 "송동 宋洞"이라고 했답니다.
  이곳은 <송시열 집>의 뒷쪽 끝이라고 추정되는 <북악산 자락 한양성곽> 근처 입니다만
  완전 변모된 요즘에 표지석을 마땅히 세울 곳이 없어 그 흔적이 쪼끔이라도 남아 있는 곳에 세운듯....
  <송시열>은 이 바위에 앉아 경치를 즐기며 <증자 曾子>와 <주자 朱子>의 뜻을 높이 세우려 했을 테지만
  현재는 어느 빌라의 축대가 되어 화려했던 옛날을 곱씹으며 쓸쓸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정치권력도 무상하고 인생도 무상하단걸 느낌니다.
  <조선왕조실로>에 무려 3,000번 이상 이름이 등장하는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은 
  <임진왜란> 이후 <인조> 때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곧 후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스승이 되었고, 계속해서 <숙종> 때까지 장수하며 노론의 영수로 막강한 권세를 누린 <우암 송시열>.
  물론 <숙종> 때에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숙종>의 반감을 사서
  유배를 가고 그후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 했지만 82세까지 살았으니 당시로는 <大老>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그렇게 호의적으로 보지는 않는듯 합니다.
  "증주벽립 曾朱壁立"은 "증자와 주자의 뜻을 계승하고 그 뜻을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샛길]                       3:33

  ['한양도성' 쉼터]              3:36            
  <증자벽립 각자>에서 직진하여 샛길로 조금 올라 가면 <한양도성>을 바로 만납니다.
  그러니까 <송시열의 집>은 <한양성곽>이 뒷 담장이었다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성북동 별서' 조망]                   
  <한양도성>에서 <성북동>을 조망하면 먼저 "간송미술관"이 가까이 조망되고
  그뒤로 "성북동 별서"라고 표기 한곳이 <갑신정변> 때에 <명성왕후>가 피신 한 곳인데
  무속인 <진령군>이 거주하는 <혜화동> "북묘 北廟"로 먼저 피신했다가 
  다시 더 먼 곳으로 피신 한곳이 "성북동 별서"였답니다.
  <명성왕후 민씨>의 오빠인 <민겸호>를 죽이고 궁으로 쳐들어간 구식군대의 반란을 <임오군란>이라 하죠
  이때에 도피 한 곳은 <장호원>이었고....   36계의 명수인 <명성왕후>였습니다.
  이렇게 살해 위험에 시달리며 산 <명성왕후>여서 위혐을 피하기 위해 얼굴을 노출 한 적이 거의 없어
  사진이나 초상화 등 분명한 얼굴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얼굴이 알려지면 피살의 위험을 더 받기에...
  하지만 <을미사변> 때에는 쪽바리들의 칼부림에 결국은 시해 당했다고 합니다만, 
  최근 비밀 해제된 미국과 러시아의 비밀외교문서에서 <명성왕후>는 그때도 또 도피해서 
  즉, <을미사변> 때에도 죽지 않고 어디론가 도피해서 살아 있었다는게 밣혀지고 있습니다.


  ['한양성곽']

  ['혜화동-성북동 고개']                 3:46            
  <한양도성>을 따라 내려 가면 <혜화동>과 <성북동>을 넘나드는 고개를 만나는데
  이곳 <돈까스>가 유명하죠. ㅎㅎ


  ['경신고' '서울과학고' 사잇길]                
  <경신고>와 <서울과학고> 사잇길을 내려 가며


  ['서울과학고']                     
  <옛 송시열의 집터> 였고, <고종>과 <명성왕후>의 신임을 얻은 무속인 <진령군>이 국정농단을 하던
  "북묘 北廟"가 있었던 <옛 보성고> 자리에 <서울과학고>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보았던 <曾朱壁立>이라는 각자가 있는 바위의 위치를 보면 <우암 송시열>의 저택을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옛 보성고' 앞 로터리]                     3:51                   
  <흥덕사>와 <북묘>....<옛 보성고>가 있었던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앞 로터리를 지나
  <혜화동 로터리> 방향으로 조금 내려 가면....



  ['혜화초등학교']                  3:54                 
  "혜화초등학교"를 만납니다.
  이 초등학교 자리에는 원래 <혜화여고>가 있었는데 2000년대 초에 초등학교가 들어 섯답니다.
  <성균관>에 독점적으로 소를 도살하여 쇠고기를 납품하며 높은 소득으로 부자가 된 <반촌>의 
  <반민 泮民>들이 자기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설립한 사립학교가 "숭정의숙"이었는데, 
  쇠고기 판매 금액 일부를 학교 운영비로 내놓으며 학교를 운영 했답니다.
  천민에서 벗어 나고자 교육을 장려했던게죠.
  <혜화초등학교>는 원래 <성균관> 옆에 있었던 <숭정의숙> 터에 세워 졌었는데 여기로 이전했다고
   

  ['장면 가옥' 조망]                      3:55

  ['장면 선생' 동상]

  ['장면 가옥' 정문]

  [안내문]                            
  <혜화조등학교> 건너편에는 "장면 총리 가옥"이 있습니다.
  주미 한국 대사-국무총리-부통령 등을 지냈는데, 
  <제2공화국>은 내각책임제였으니 당시 국무총리였던 그는 실제 대통령이었다 해도 되는 정치가이며, 
  대학 교수 출신이자 <동성상고> 교장등을 지낸 교육자였습니다.
  선생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민주화>. <친일 논란>. <5.16쿠데타 방관>등에 대해 아직 정립 된바가 
  없어 제가 언급하기엔 부적절하여 생략합니다.


  ['혜화동 로터리']                  4:03            
  "혜화동 로터리"
  <조선중앙일보 사장>이기도 했던 "몽양 여운형 선생"이 테러 당한 곳이어서 맘 아픈 곳입니다.
  해방 정국에서 <여운형 선생>은 우익의 <이승만>, 좌익의 <박헌영>, 민족주의 세력의 <김구> 등이
  한 뜻을 갖도록 하기 위해 발로 뛰고 또 뛴 분이죠.
  테러리스트 <한지근>의 단독 범행이라고 발표되었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고, 
  <미군정>과 결탁한 극우세력의 테러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정설은 아직도 없습니다.
  <여운형 선생> 테러의 최고 수혜자는 누구? 김일성? 이승만? 미국?  
   1947년 7월 19일
  12번의 테러를 당하다가 결국 이곳에서 마지막 생을 마감했는데, 당시 <조선체육회장>이던 선생은
  <"IOC" 가입 축하 축구경기>가 열리는 <동대문운동장> 경기 참관 후, 
  <창경궁>에서 <미군정>으로 부터 <민정장관(국무총리)>를 제안 받고 임명장 받으로 가다가 
  피살 당했으니....그리고 이어서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도 피살 당하고
  남북 분단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세력을 잃고 사라지며 남북분단으로 가고 말았지요.
  우익으로부터는 <빨갱이>로, 좌익으로부터는 <미제의 앞잡이>, <회색분자>로 매도 당하면서도
  좌우익의 협력을 도모했던 <여운형 선생>은 2008년 2월 <노무현 정부> 마지막 날에 
  <대한민국장(독립운동 서훈 1급)>으로 추서되었습니다.


  ['혜화역3번 출입구']                4:12        
  <함춘원 터>와 <창경궁>, <성균관>과 <흥덕사 터>를 둘러 보고
  다시 <혜화역3번출입구>로 돌아 와 귀가 했습니다.
  오늘 걸은 거리는10.5km로 약4시간이 걸렸습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제가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을 답사하고 한번 쓴 내용을 한번 더 언급하겠습니다.
    
  『성균관과 유교문화』에 대한 생각.....  
  세상만사가 과하면 모두 독이 된다는거는 불변의 진리이죠.
  신진개혁세력들도 장기집권하면 수구 부패세력으로 변하는건 인간사 본연의 모습...
  서원을 기반으로 나라 곳곳에서 권력화 된 선비들....나라를 말아 먹기 시작했죠.
  우리나라는 "유교문화-성리학"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고 
  세계 발전에 동참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할수 없죠.
  이 문제에 대해선 제 개인적 생각보다 학자들이 언급한 책 내용 일부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에 발간된 "김경일교수"가 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 일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 책이 발간되자마자 당시로는 엄청난 30만부가 팔렸는데, 이 책으로 저자는 [성균관 유림]들로부터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지만 2004년 11월에 대법원은 무죄로 판결해 최종 승소했습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내용 일부를 보여 드림니다.

 『유교는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가르치겠다'는 오만을 버려야한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한다. 
 정치는 국가 경영의 허황된 청사진일랑 버리고 엎드려 봉사하겠다는 다짐을 해야한다.』--- p.289 
『우리의 지도층 인사들이 공자와 유교에 애착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것은 논리를 따지지 않으며 절대적 권위에 복종케 하는 수직윤리이기 때문이다. 
 충이든 효든.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받아들이도록 만들기만 하면 만사 편안한 지배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 '남성'을 위한 도덕, 
 '어른'을 위한 도덕,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 
 때문에 공자의 도덕을 받아들인 유교문화는 정치적 기만과 위선,남성 우월 의식과 여성 착취,
 젊음과 창의성의 말살 그리고 주검 숭배가 낳은 우울함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이것들은 사람이 살아 숨쉬는 삶의 공간에 꼭 필요한 투명성과 평등, 창의력, 생명력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가치이다.』
『실용적 학문과 경제적 활동을 천시하다가 근대화에 뒤쳐진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학사적 젠체와 
 엘리트주의, 그리고 그 기득권층의 보수대결집 배후에는 유교의 사농공상적 신분질서 관념이 있으며,
 논리보다는 힘을 우선하는 토론 부재의 사회분위기는 유교의 가부장 의식과 군사독재의 권위주의가
 짬뽕된 결과이다. 혈연, 학연, 지연에 대한 맹목적 충성과 그로 인한 끼리끼리의 협잡과 폐쇄성,
 분파주의는 조상 숭배와 족보 자랑이라는 유교적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며, 지배층의 도덕적 위선과 
 무능력, 부패를 가려주고 말끝마다. '도덕성 회복'이니 '민심이 천심'이니 하며 국민을 속이는 데는 
 있지도 않은 군자와 성인의 입김이 한몫하기 때문이다.
 또 뿌리깊은 차별대우에 시달리는 여성과 획일적 교육으로 자유와 창의성을 박탈 당하는 아이들은
 남성과 성인 중심 유교문화의 최대 피해자들이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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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구』
 『함춘원 창경궁 성균관 흥덕사』1부


  ['함춘원 창경궁 성균관 흥덕사' 실트랙]

  ['함춘원-창경궁' 실트랙]
          
  현재 <서울대 의과대학>과 <서울대병원>이 자리 하고 있는 <종로구 연건동>의 <함춘원>과
  <와룡동>의 <창경궁>을 답사하고, 조선 최대 인재 양성소인 <성균관>이 있는 <명륜동>과 
  그리고 숱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흥덕사 터>와 <장면 박사 옛집>과 <여운형선생 피살현장>이 있는
  <혜화동>을 둘러 보겠습니다.
  <1부>는 <연건동>과 <창경궁>이고, <2부>는 <명륜동>과 <혜화동>입니다.


  ['혜화역3번출구']              12:16         
  2021년 10월 21일 (목) 구름 약간 맑음   
  지난 <동대문에서 대학로까지> 답사를 하고 마친 <4호선 혜화역>에서 답사를 시작합니다.
  <혜화역3번출구>에서 50m쯤 직진하면...


  ['서울의대 정문']                 12:17
  
  <서울대 의대 정문>을 만납니다.
  여기서 <경모궁 터>를 가기 위해선 학교로 들어가 우측으로 돌아 들어 갑니다.


  ['학교 내']
  
  <융합관> 앞으로 올라 가면...


  ['경모궁' 터']                     12:20
  
   "경모궁 景慕宮" 터
  좌측엔 <서울대병원 본관>이 있고 우측엔 <의과학관>이 있는데, 
  그 사이에  "경모궁 景慕宮" 터가 복원을 오래도록 기다리며 쓸쓸히 남아 있습니다.
  현재 <서울대 의과대학>과 <서울대병원>이 자리 하고 있는 <종로구 연건동>의 대부분이
  예전엔 <창경궁>의 후원인 "함춘원 含春園"이라는 정원이었답니다.
  <인조> 때엔 <함춘원>의 절반 이상을 방목장으로 활용하기도 했다는군요.
  현재는 이 지역을 <서울대 병원>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데 <함춘원>에 설립했던 
  "경모궁 景慕宮" 터가 마지막 안간 힘을 쓰며 남아 복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경모궁터' 1930년대 사진)
  
   "경모궁 景慕宮"
   <영조>가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고,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는 <배봉산> 자락에 <영우원>
   이라는 墓에 안장하고, 1764년 3월 1일 이곳에는 "수은묘 垂恩廟"라는 사당을 마련했는데
   후에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이름을 <경모궁 景慕宮>으로 격상하고 크게 중건했답니다.
   일제강점기 시대까지 남아 있었던 <경모궁>이 사진으로 그 규모를 알려 주며 <정조>의 효심을 알수 
   있게 해 줍니다.


  ['경모궁 터' 전경]                     12:26

  ['안내문']
  
  "경모궁 景慕宮"은 현재 정문만 남아 있을 뿐 일제강점기 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사라졌답니다
  "봄을 흠뻑 머금고 있다"는 "함춘원 含春園" 터에 우리나라 최대 최고의 <서울대병원>이 자리하고
  있어 그나마 좀 위안이 됩니다.


  ['서울대병원']

  ['대한의원 병동터']               12:33
  
  <경모궁 景慕宮> 터에서 "서울대병원 본관"앞으로 나가면
  <서울대병원>의 모태인 "대한의원 병동 터"가 유물로 남아 있는데
  그 동안 관심없이 스쳐 지나 다니다가 이번에 관심을 갖고 보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안내문에 "설립자:대한제국(고종황제)"라는 글귀가 새삼스럽군요. 국립 병원이란 의미겠죠?


  ['대한의원' (현 의학박물관}]                 12:37

  [안내문]
  
  "대한의원"
  조선시대의 <광혜원><광제원>등의 의료기관의 맥을 잇는 근대 의학의 효시로서 
  <서울대병원>으로 이어지는 국립의료기관이었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이 건물은 건축학적 史料로도 중요헤서 <사적 제248호>로 지정되어
  현재는 <의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답니다.

        

  ['지석영 선생' 동상]
  
  <대한의원> 앞에는 "지석영 선생 동상"이 눈길을 끕니다.


  ['원남동 로터리']                       12:43
  
  <함춘원>이 있었던 자리에 설립된 <경모궁>과 <서울대의대병원>을 둘러 보고
  서남쪽 문으로 나가면 <원남동 로터리>를 만나며 <창경궁>이 건너편에 보입니다.
  <원남동 苑南洞>은 일제강점기 시절 쪽바리들의 횡포가 마을 이름에서도 남아 있는 곳이죠.
  <창경궁>을 희화화 해서 <동물원.식물원>등으로 개조해 <창경원>으로 만들고
  동네 이름도 <창경원>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원남동 苑南洞>이라 하고, 
  <창경원>의 서쪽에 있는 마을은 <원서동 苑西洞>으로 바꾸었죠.
  그런데 이렇게 이름을 바꾸자고 기안하고 실행한 사람들은 쪽바리가 아니라 우리나라 친일파들이
  서로 뒤질세라 앞장서서 했다는 사실이 더 가슴 아프게 합니다.



  ['선인문']                    12:44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으로 가는 길에 "선인문 宣人門"이 먼저 보입니다.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는 너무나 많은 역사 인물들이 살아서 또는 죽어서 나간 門이기 때문이죠.
  <선인문>은 <동궁(東宮)>의 정문으로서 조정의 신하들이 주로 출입하였지만
  그 유명한 <장희빈> <사도세자>등의 시체가 나간 문이라는데 잠시 후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홍화문']                     12:47
  
  "홍화문 弘化門" <보물 제384호>
  "홍화 弘化"라는 단어의 뜻은 "조화를 넓힌다, 德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뜻.
  <조선왕조>의 궁궐 대문 중에 유일하게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정문이랍니다.
  그 이유는 <왕의 거처>가 아니라 <왕비의 거처>로 만들어진 궁궐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정치를 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왕이 <영조>이죠.


  ['창경궁' 안내문]

  [안내도]
  
  수많은 전각들은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고 중요한 건물들만 복원되 있는 <창경궁>입니다.
  <창경궁(昌慶宮)>의 처음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으로, 1418년 왕위에 오른 <세종>이 생존해 있는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이었답니다. 그 이후 <성종 13년(1482)> 창덕궁의 수리를 
  논하는 자리에서 대비전의 세 어른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폐허처럼 남아 있던 <수강궁> 수리를 명하면서 
  <창경궁>으로 재탄생 되었답니다.


  ['옥천교'와 '명정문']                   12:51
  
  정문인 <홍화문>으로 들어 가면 먼저 "옥천교 玉川橋"를 만나며, 이어 "명정문 明政門"이 기다립니다.
  다른 궁궐에서는 "금천교 禁川橋"라고 하여 다리를 건너는 관인들이 청렴한 마음을 가지고 
  백성과 나라 일을 위해 임금에게 나아가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창경궁>은 왕비들이 주로 거처했기에, 좀 이쁜 이름인 "옥구슬 같은 맑은 물"이 흐르는 곳 다리라고 
  "玉川橋"라 한듯합니다. <보물 제386호>


  ['외행각' 안내도]

  [안내문]
   
  <영조>는 <균역밥> 시행에 앞서 백성들의 여론을 듣기 위해 <홍화문> 앞에 나가 백성들과 만났다고...
  

  ['玉川']
  
  <옥천교> 위에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옥천>을 조망하고 갑니다.


  ['명전전' 앞 박석마당]

  ['명정전']
  
  "명정전 明政殿" <국보 제226호>
  <창경궁>의 "법전 法殿"입니다.
  국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장소이죠.
  <인종>이 1544년(중종 39)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 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 <광해군>이 재건하여 현재에 이르는데,
  현존하는 조선 궁궐의 正殿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랍니다.. 국보로 지정 되었고...


  ['명정전 어좌']

  ['명정전' 앞 '내행각']
  
  품계석이 나열되 있는 <명정전> 앞 마당입니다. 
  이곳에서 치뤄진 기억에 남는 제일 유명한 행사는 
  66세의 <영조>가 15살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혼례식이 1759년(영조35) 6월에 바로 이곳에서 
  거행되어, 현대에 여러 영화와 드라마로 재현된 장소여서 더욱 유명해졌지요..
  이 결혼식으로 졸지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할머니가 된 15살의 어린 소녀 <정순왕후>....
  그러니까 <정순왕후>는 아들이 되어 버린 <사도세자>보다 10살이 적은 엄마가 되고, 
  손자가 되는 <정조>보다 7살 많은 할머니가 되는 것이었죠.
  그 이후 <정순왕후>와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흘러 가며 <조선왕조>는 멸망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문정전' 뒷문]
  
  <명정전>에서 좌측으로 돌아 가면 "문정전 文政殿"이 <명정전>과 연결되 있고


  ['숭문당']

  ['빈양문']                  
  
  <명정전>에서 내전으로 통하는 <빈양문 賓陽門> 옆에는 "숭문당 崇文堂"이 있습니다.
  국왕이 경연(經筵)을 벌이던 곳으로, 특히 <영조>는 성균관 유생이나 종친들을 접견하고, 
  유생들을 시험하기도 한 곳이랍니다.
 

  ['문정전' 내부]

  ['문정전']
  
  "문정전 文政殿" 
  <사도세자>에게 자진하라는 어명을 내리는 역사의 현장이라 별도로 언급하기로 하고
 

  ['문정전' 일원 안내도]
            
    ['동궐도'의 '문정전']

  [안내문]
  
  <문정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위 안내문을 참고 하면 되겠습니다. 
 
     
       [영화 '사도' 포스터]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영화를 모두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수 없지만 <영화 '사도'>는 그런데로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갈등을 잘 표현 했다는 평가가 내려졌는지 흥행에도 성공한 영화였죠.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직접 뚜껑에 못을 박아 죽이는 장면인데
  영화에서는 이 장면을 조금전에 지나온 <명정전> 앞 마당 답도 앞에서 촬영을 했습니다만
  역사에는 이곳 <문정전> 앞에서 행해 졌답니다.
  아들에게 칼을 주고 스스로 자결하라고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와 애원으로 실패하자 
  뒤주에 가둬 죽였죠.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쳐 죽어 갈때 아들인 왕세손 <정조>는 할아버지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만 세손의 애원도 무시하고, 뒤주는 잠시후 찾아 볼 <선인문> 근처로 옮겨져 
  8일간이나 접근 금지로 방치 된채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서 죽었습니다.
  아들까지 죽이며 권력을 휘두르고 싶었던 <영조>는 그후 고작 13년 더 살다 죽었습니다.
  그래도 조선왕조 최장수 왕으로 82세까지 살았으니...
  노망 들어 가는 <영조>가 죽기를 오래도록 기다리다 드디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식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하며 복수에 나섯지요.
  <영조>의 후계가 아니라 <사도세자>의 후계라는 선언은 정적들의 가슴을 써늘하게 한 것이죠
 

  [뒤돌아 본 '문정전']
  
  <문정전>을 나와 뒤돌아 본 <문정전>입니다.
  <사도세자>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듯 하며, 어린 <정조>의 입술 깨무는 역사의 현장이 연상 됩니다.


  ['관천대' 조망]                   1:06
  
  <문정전> 앞에는 "관천대"가 보입니다.
  <관천대>를 중심으로 우측에는 <동궁전>이 있었고, 좌측에는 <궐내각사>가 있었답니다.
  일제강점기 시대엔 이곳에 <동물원>을 만들어 왕궁을 놀이터로 전락시켜 희화화했죠.
  우측으로 조금 가면...


  ['동궁' 일원]

  ['동궐도'의 '동궁 일원']
            
                ['동궁' 위치도]
  
  이 주변이 "동궁 터 일원"이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세자>가 거처하며 13년간 대리청정을 하던 곳이기도 한 곳이죠.
  또한 잊지 말아야 할 일은 <장희빈>이 <왕비>에서 강등 당해 <희빈>으로 머물던 <취선당>이
  <동궁> 근처였다는데 확실한 위치는 알수 없답니다.
  그 유명한 <취선당> 저주 사건.... <취선당>에 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죽기를 
  빌었다는 곳이 바로 이 근처 <취선당>이였다는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처럼 <장희빈>의 저주로 <인현왕후>가 죽은 것일까....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표독한 악녀 <장희빈>이라는 여인에 대해선 실록에 기록이 제법 많습니다.
  <장옥정 (훗날 희빈장씨禧嬪 張氏)>는 1659년 음력 9월 9일 
  '한성부 연은방(현재 서울시 은평구)'에 위치한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역관으로 중인 출신 집안이였으나 역사서에 기록이 남을 만큼 막대한 재산가였으니,
  그 부가 막대하여 그것을 매개로 권력까지 누릴 수 있는 
  지금으로 따지면 수백억대의 자산가 집안의 막내 딸이였습니다.
  <숙종실록 1686년 12월 10일>에 "역관 <장현>은 國中의 巨富다."라고 기록 되 있습니다.
  <장옥정>은 <숙종(1661년)>보다는 2살 연상의 여인이였고 
  피비린내 나는 왕비 쟁탈전을 벌인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1667년)>와는 무려 8살이 많은 
  나이로 나이 차이가 컷습니다.
  "장옥정의 미모"
  조선왕조실록에서 '여성의 외모'를 언급한 사례는 나타나지 않고 딱 한번 나타나는데
  바로 <숙종>이 <장옥정>을 보고 한 말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숙종 13년 6월 16일>에 기록 된 "얼굴이 자못 아름다웠다"라고 말한 것이 유일무이합니다.
  그 이후에도 <장옥정>의 미모를 조심하라는 서인들의 견제가 담긴 상소가 여러번이나 올라 갔다는
  기록이 나타나는 걸로 보아 <장옥정>의 미모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인현왕후 저주사건>에 연루되 <취선당>에서 자진하라는 어명을 받고 죽어 사라졌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장희빈>이 죽을 때 오만 발악을 하며 사약을 받지 않았다고 묘사 되지만
  실록에는 <숙종 27년 (1701년 10월 8일)>에 "장씨에게 자진할 것을 명하는 비망기를 내렸다."
  이틀 후 <숙종 27년(1701년 10월 10일)>엔 "임금이 장씨가 이미 자진하였다고 하교했다"
  <숙종실록>에 "<희빈 장씨>가 자진하였다"라고 기록되고 더 이상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수 많은 드라마들 처럼 <장희빈>은 사약을 받고 오만 발악을 하며 죽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목을 메고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정적들이 쓴 <사씨남정기>등 야사에는
  <장희빈>을 몰아내기 위한 음모로 그녀를 악녀로 표현 했다고 보는 것이죠.



  ['관천대']                     1:10
  
  "관천대" <보물 제851호>
  요즘으로 보면 <천문대> 역활을 한 곳이고, 
  이 근처엔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자격루>가 있었었답니다.


  ['관천대'에서 '문정전' 조망]
  
  <관천대>에서 역사의 현장인 <문정전>을 조망하고 우측 <선인문> 방향으로 나가면



  ['궐내각사' 터]
  
  대궐 내에 있었던 여러 행정기관인 <궐내각사>가 빼곡히 있었던 자리가 펼쳐집니다만
  그런 <궐내각사>는 오간데 없고 그저 쪽바리들이 만든 <옛 동물원>이 떠 오릅니다.
  이곳에 있던 <동물원>은 <과천>에 있는 <서울대공원>으로 1983년 10월에 옮겼답니다.
  

  ['선인문']                      1:14
  
  <궐내각사>와 <동물원>이 있었던 숲을 지나면 "선인문 宣仁門"을 만납니다.
  <배풀 宣> <어질 仁>자를 사용하는 門.
  하지만 이 문은 <창경궁>에서 일어난 비극을 모두 목격한 門이랍니다.
  <연산군>이 왕위에서 쫒겨나 추방 당한 門이며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 그의 세자빈인 <세자빈 강씨>가 그의 아들인 세손 셋을 데리고
  영문도 모른체 궐밖으로 내쳐져 <제주도>로 귀양을 간 門이며
  미모로 왕을 사로 잡고 무술이에서 왕비까지 올랐던 <장희빈>이 죽어 시신이 나간 門이며....



  ['회화나무']
  
  <선인문 宣仁門> 앞에는 400여년 동안 이 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지켜본 <회화나무>가 
  지구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온 몸을 비틀며 땅바닦으로 주저 앉을려고 몸부림 치고 있으나
  인간들이 떠받쳐 주며 보호하고 있어 어쩐지 어정쩡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회화나무>가 목격한 사건 중에 가장 처절 했을 사건은 바로 <사도세자>가 이 門 근처에서
  뒤주에 갇쳐 오뉴월 땡볕을 맞으며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8일간 사투를 벌이다 죽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애절 하게 느껴 집니다.
   

  ['문정문']

  ['빈양문']                 1:22
  
  <선인문>에서 다시 <문정전>으로 돌아와 "빈양문 賓陽門"을 통과해 내전으로 들어 갑니다.
  <빈양(賓陽)>은 "밝음을 공경히 맞이한다"는 뜻
  정치행위를 하는 政殿에서 사생활 영역인 내전으로 통하는 門이랍니다.


  ['창경궁 내전']
  
  <빈양문>을 통과하면 내전이 펼쳐지는데


  ['함인정']

  [안내문]
  
  먼저 "함인정 含仁亭"을 만나는데 임금과 신하가 소통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는데
  <영조>가 과거 급제자들에게 하사주를 내린 곳으로 기록에 나와 있고


  ['환경전']
  
  <함인정> 뒤편엔 "환경전 歡慶殿"이 있습니다.
  이곳은 국왕이 주로 생활하던 침전이라는데, <중종>과 <소현세자>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답니다.
  <중종>이 이곳에서 병을 앓고 있을 때 내의녀였던 유명한 <대장금>이 진료와 간호를 했다고 
  드라마에 나오는데, 실제 <중종>은 <대장금>을 신뢰하여 자신의 진료와 대비전 동궁전까지도 
  진료를 의뢰하고 그 공로로 상을 받았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아버지 <인조>와 장남인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세손>들의 죽음에 대해선 
  다른 답사기에서 여러번 언급 했기에 생략하고.


  ['환경전'에서 바라보는 '경춘전']
  
  "경춘전 景春殿"은 "햇볕 따뜻한 봄"이라는 뜻으로 주로 대비들이 거처하던 곳이랍니다.
  왕의 침전인 <환경전>을 대비의 침전인 <경춘전>이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게 특이합니다.
  <경춘전 景春殿> 편액의 글씨는 <순조>의 어필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22대 정조>와 <24대 헌종>이 태어났다고 하며,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즉 <인수대비 한씨>와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 
  <정조>의 생모 <헌경왕후>, 즉 <혜경궁 홍씨> 등이 승하 하였답니다.
  <사도세자>는 <정조>를 낳기 전에 용이 이곳 <경춘전>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경춘전> 동쪽 벽에 용 그림을 그려두었는데,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誕生殿(탄생전)"이라 쓴 현판을 걸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고....


  ['환경전'과 '경춘전' 안내문]
  
  <환경전>과 <경춘전>에 대한 공식 안내문을 참고 하고
  뒤로 나가면...


  ['영춘헌'과 '집복헌']


  [안내문]
  
  "영춘헌 迎春軒"과 "집복헌 集福軒"
  <영춘헌>은 <정조>가 즉위 후 자주 머물렀던 장소이면서, 1800년 49세의 나이로 승하한 곳이기도
  한데, <정조>는 <영춘헌>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이용 하다가 이곳에서 승하 하였답니다.
  <집복헌>에서 1735년(영조11년1월)에 <사도세자>가 태어 나고, 
  1790년(정조14년6월)에는 <순조>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답니다.
  <정조>가 무척 아끼고 사랑한 후궁인 <수빈 박씨>가 이곳에 거처하며 낳은 유일한 아들이 
  <순조>여서 <정조>는 마지막 후궁인 <수빈 박씨>를 <휘경원>에 모셔 그곳에  잠들게 하고 있죠.
 

  ['집복헌'과 '양화당' 사이 암반]
  
  <집복헌>과 <양화당> 사이에는 독특한 암반이 있고, 그 뒤로 계단은 후원으로 가는 길인데
  계단 윗 자리에 <정조>는 자신의 어머니인 <헌경왕후>, 즉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자경전>을 지어 준 곳이라고
 

  ['통명전'과 '양화당']

  [안내도]

  [안내문]
  
  "통명전 通明殿"과 "양화당 養和堂"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랍니다.
  <통명전> 옆의 <양화당>은 내전의 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는데...


  ['양화당']
  
  "양화당 養和堂"
  "조화로움을 기른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양화당>은 옆에 있는 <통명전>의 내전이었답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주>로 도망 갔던 <선조>는 돌아 와 보니 <경복궁>은 불타 없어져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거쳐 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는데....
  이어서 <병자호란>이 터지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줄행랑을 쳤지만 결국 항복을 하고 돌아와
  장기간 생활 한 곳이 바로 이곳 <양화당>이었답니다. 또한 이곳에서 <청나라> 사신들을 접견했다고
  쪽바리들에게 깨지고, 때놈들 한테 피터지면서도 살아 남아 백성들의 세금을 축낸 인간들의 
  모습이 어슬렁거리는 느낌이 듭니다.


  ['통명전']
  
   "통명전 通明殿" <보물 제816호>
   "통달하여 밝다"라는 의미의 <통명전>은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는데
   그 동안 수많은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 된 내전의 으뜸 전각이랍니다.
   왕비의 침전인 <통명전>에는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게 특징이며
   앞 마당에는 박석을 깔아 연회나 의례를 할수 있도록 해서 왕실 내전의 각종 행사를 했답니다.
   <명정전> 앞 마당이 정치적 행사를 하는 곳이라면 이곳은 왕실 내전의 행사를 하던 곳이란 걸 알수
   있으니 <창경궁>의 최고 내전 임이 틀림없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인 "<장희빈>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었던 곳으로
   <인현왕후>가 결국 이곳에서 승하 하였답니다.
   <숙종 20년(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희빈으로 강등된 <장옥정>은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려 <인현왕후 꼭두각시>에 화살을 쏘고
   이곳 <통명전> 일대에 <꼭두각시와 동물 사체>등 흉물을 파묻고 저주를 하며 죽기를 기원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을 알고 답사를 하면 답사하는 재미가 배가 될 것입니다.
   "<장희빈>의 <인형왕후> 저주사건"으로 <인현왕후>가 실제 저주를 받아 죽었을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현왕후>는 원래 약골이어서 아기도 낳지 못하며 여러 병을 앓고 
   있었다고 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무려 2,000여번이나 언급 되 있고, 
   병세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450번 정도 언급 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나타난 <인현왕후>의 '죽음에 이르는 병'은 <고관절 부근 환도 혈>에 종기가 심해 고름이 
   나오고, 그 종기가 다른 곳에 번져 <복막염>으로 이어지고 복통, 설사, 구토등으로 1년반 동안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저승으로 갔다고 기록되 있습니다.
   의학적 사망 원인이야 그렇다 할지라도, <인현왕후>는 <숙종>에 의해 강제 이혼 당해
   폐비가 되어 쫒겨나 어려운 서민 생활을 하며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는 어마무시 했답니다.
   5년간의 폐서인 생활 후 <갑술환국>으로 환궁 혰을 때엔 이미 몸과 마음도 폐인이 되다시피 
   된 상태 였다니....
   <장희빈>은 그러한 낌새를 알고 <인현왕후>의 병세를 보며 저주를 퍼부었었고, 
   그 저주가 우연히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게 되었으나, 
   저주에 의해 <인현왕후>가 죽었다고 믿는 분은 없겠지요? ^*^


  ['蓮池']
  
  <통명전> 옆에는 "열천 冽泉"이라는 샘과 "연지 蓮池"라는 연못이 있어
  여인들의 공간 다웁게 예쁘게 정원을 만들어 놨습니다.
  <열천 冽泉>에서 매우 찬 물이 흘러 나왔나 본데, 
  기록에는 <영조>가 "샘물이 맵도록 차다"고 하였다고 


  ['함양문' 조망]
  
  <통명전>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蓮池> 뒤로 <함양문>이 지척에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함양문>으로 올라 가면...


  ['함양문']                   1:37
  
  "함양문 咸陽門"
  <창덕궁>과 <창경궁>을 연결하는 門으로 현재는 별도의 입장권을 구매 해야 통과 할수 있고


  ['통명전' 뒷길]

  ['자경전' 터]                    1:38

  [안내문]
  
  <함양문>에서 <통명전> 뒷길을 조금 걸으면 "자경전 터 慈慶殿址"를 만납니다.
  <정조>는 어머니인 <헌경왕후>, 즉 <혜경궁 홍씨>를 위해 이곳에 내전을 지어 주었는데
  조금 전에 들렸던 <서울의대> 안에 있던 <사도세자 사당>인 <경모궁>을 마주하며 매일 바라 볼수
  있도록 이곳 높은 곳에 동향으로 지었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정조>가 이곳에 <자경원>을 세운 이유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을 때 아내로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수수방관 했다고 느낀 <정조>는
  지금이라도 매일 <사도세자>의 사당을 바라보며 반성하라고 이곳에 지어 준게 아닐까?라고 추측...
  여하튼 <정조>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죽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하며 어머니가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은 것을 분명히 보고 알고 있었으니....
  하여튼 <혜경궁 홍씨>는 여기서 그의 자서전이라 할수 있는 "한중록 閑中錄"을 썻답니다.
  <한중록 閑中錄>은 '한가한 시간에 쓴 기록'이라는 뜻이지만
  태어나서 어린시절과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50여년간의 궁중생활을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인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선 차마 얘기 할수 없다고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죠.


  ['창경궁 내전' 조망]
  
  <자경전>이 있었던 곳에서 바라보는 남쪽 <창경궁 내전>입니다.
  이렇게 내전이 전체적으로 조망 되는 곳은 이곳 뿐이랍니다.
  <남산>이 바로 조망되는군요
   
          

  [안내문]                 1:41
  
  "풍기대 風旗臺"는 <보물 제846호>로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측정하는 거고
  "앙부일구 仰釜日晷"는 <보물 제845호>로 "해시계"


  ['성종 태실' 조망]



  ['성종 태실'과 안내문]              1:45
  
  <풍기대>에서 북쪽으로 잠시 가면 좌측에 "성종 태실과 태실비"가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에 나와 있고



  ['내전 터' 일원]                    1:48
  
  <성종 태실>에서 동산을 내려 가면 <내전 터 일원>이 있는데 
  수많은 궁녀들이 거쳐 했을 내전은 없고, 숲만 우거져 있습니다.


  ['춘당지' 앞]                   1:49
  
  <춘당지> 앞에는 너른 공터가 있는데 여기서 우측에 있는 "월근문"을 다녀와 <춘당지>로 갑니다.


  ['월근문' 입구]

  ['월근문']               1:51
  
  "월근문 月覲門"은 <창경궁 관리사무소> 앞에 있더군요.
  孝子인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廟)인 건너편 <경모궁>에 수시로 참배하기 위하여
  1779년(정조3년)에 건립하였는데, <정조>가 매달 초하루 <경모궁>에 참배하러 거둥할 때에는 
  반드시 이 문을 경유하였기 때문에 <월근문 月覲門>이라 이름하였답니다.



  [안내문]                    
  
  "춘당지 春塘池"
  안내문에 설명이 잘 되 있습니다.


  ['춘당지' 전경]                  1:54
  
 이곳의  "대 춘당지 大春塘池"는 원래 연못이 아니라 논이었답니다.
 왕과 왕비가 각기 농사와 양잠을 하며 체험 할수 있도록 궁궐 안에 둔 논과 뽕밭이었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쪽바리들이 이곳에 연못을 만들고 위로 케이블카를 설치한 유락시설로 만들어
 완전히 놀이터로 만들었죠. 제가 국민학교 시절 소풍을 이곳으로 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방에 있는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이곳으로 많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칠층석탑' 조망]
  
  <춘당지> 가운데에 있는 섬은 옛날엔 없었고 
  겨울이면 이곳이 스케이트장이 되어 스케이트 타러 오곤 했던 기억이 먼저 떠 오르는군요.
   


  ['팔각칠층석탑']                  1:56
  
  안내문을 참고 하고 조금 더 올라 가면...
   

  ['대온실']                      1:57
  
  "대온실"을 만납니다.
  1909년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랍니다. 
  <대온실>은 <창덕궁>에 거처하는 <순종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쪽바리들이 <창덕궁>에 
  인접한 <창경궁>내에 <동물원>과 함께 지었답니다. 쪽바리가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가 시공하여 
  완성하였으며, 철골구조와 목조가 혼합된 구조체를 유리로 둘러싼 서양식 온실이랍니다. 
  2004년 우리나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하네요.


  ['관덕정' 앞 공터]                  1:58
  
  <대온실> 우측에 <관덕정>과 <집춘문>이 있어 다녀 옵니다.


  ['집춘문' 입구]
  
   <집춘문>으로 올라 가는 길 좌측에 <관덕정>이 보입니다.
   <관덕정>으로 올라 가면....
    

  ['관덕정']

  [안내문]
  
  임금이 활을 쏘던 정자였다고


  ['집춘문' 입구]


  ['집춘문']                  2:04
  
  <관덕정>에서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 가면 "집춘문 集春門"을 만납니다.
  이 문은 후원의 동문으로, <성균관> 서쪽과 제일 가까워 국왕들이 <성균관>으로 나갈 때에는 
  이 문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잠시후 <성균관>을 갈때 이 문의 바같쪽으로 접근 해 보겠습니다.


  ['백송']                      2:10

  ]안내문]
  
  <집춘문>에서 돌아와 <홍화문>으로 내려 가는 중간에 
  우리나라에선 보긴 어려운 "백송 白松"을 만납니다.
  우리나라에 생존하는 백송은 천연기념물로 지정 되 있지요.
  

  ['내전' 앞길]
  
  <백송>에서 <홍화문> 쪽으로 조금 더 가면...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2:14
  
  <회화나무>와 <느티나무>가 뒤엉켜 자라고 있는 광경을 
  <혜경궁 홍씨>와 <정조> 사이의 갈등으로 해석해 표현하는 듯한 안내판이 보입니다.
   

  ['홍화문']                    2:16

  ['홍화문' 앞]                2:17
  
  약 2시간반 동안의 <창경궁> 답사를 마치고 <홍화문>을 통과해 나가면 
  <서울대암병원>이 정면에 보이는데,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명륜동' 방향]
  
  <명륜동> 방향으로 우측에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이 보이고
  그 앞에는


  ['월근문']                   2:20

  [안내문]
  
  조금 전 궁 안에서 보았던 <창경궁관리사무소> 앞에 있었던  "월근문 月覲門"을 밖에서 봅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 廟>인 <경모궁>으로 갈 때 매월 초하루에 이용했다는 문입니다.
  이 문 건너편에는


  ['경모궁' 조망]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입구가 있으며 그 너머에 <경모궁>이 지척에 있습니다.
  장례식장 옆에는 <현충탑>이 하나 있는데 <이름 모를 자유전사 비>라고 하는데
  <6.25전쟁> 때에 싸우다 부상 당해 이 병원으로 이송됬지만 안타깝게 전사한 이름 모를 전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했다는 충혼탑이랍니다.


  ['함춘원-창경궁' 실트랙]
  
  <1부 함춘원-창경궁 답사>는 이곳 <월근문>에서 마치고 
  계속해서 <2부 성균관-흥덕사 답사기>가 이어 집니다.
   "배봉산 영우원-휘경원을 찾아서" 여기 클릭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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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종로구』
 『동대문에서 대학로까지 역사유적』


  ['동대문문화역사공원역'에서 '동대문'까지 실트랙]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출발하여 <훈련원터> <미육군공병단터> <성제묘> <염초청터>를 둘러
  보고, <전태일 분신터>와 <동대문전차차고터>를 지나 <북평관터> <한양성곽박물관>을 통과하여
  <낙산 정상>에 오르고, <창신채석장전망대>와 <총무당>을 답사하고 <이화장>과 <대학로>를 갑니다.


  ['동재문역사문화공원역' 1번출입구]              12:14       
  2021년 10월 13일 (수) 구름 약간 맑음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DP"는 <옛 동대문운동장>에 2014년에 건축한 복합문화공간이랍니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라는 건축설계가가 설계한 '환유의 풍경'을 담은 세계 최대 규모의 
  "3차원 비정형 건축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동대문야구장 유구' 전시]
  
  <옛 동대문운동장 터>는 역사적으로 군대와 관련이 많습니다.
  <조선 훈련도감>의 분영인 <하도감>이 1594년에 설치되여 400여년을 군사훈련으로 운영하다가
  <구 한말>에는 <하도감>을 신식군대인 <별기군>으로 바꿔 훈련원으로 사용 했는데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면서 <하도감>을 폐지하고, 이곳에 <청나라> 제독 <오장경>이 주둔했고
 그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쪽바리들이 이곳에 <경성운동장>을 건설했다는데...
  1925년 일본의 왕세자였던 "히로히또"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나라 군사역사가 살아 있는 <하도감 터>를 매립하여 운동장을 만들었다는거 아닙니까. 에휴~~
  '히로히또'는 일본 최장 군주가 되고 세계2차대전을 벌여 최후에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한 일왕인데
  1989년에 아들 '아키히토'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었으니 죽은지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때 매립되어 흔적을 찾을수 없다가 2008년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복원 공사를 할때 
  땅 속에 뭍혀있던 유구들을 찾아 모아 이곳에 전시 했답니다.


  [사거리에서 '동대문' 방향 조망]                12:22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사거리>에서 잠시 후 방문할 <동대문> 방향을 조망하고


  [사거리에서 '을지로5가' 방향]
  
  먼저 <을지로5가> 방향으로 100m 정도 조금 진행하면....



  ['중앙의료원']                       12:25
  
  "국립중앙의료원"을 만납니다. 두번째 방문입니다.
  "국립중앙의료원"은 <한국전쟁> 후 부상병과 환자 진료와 의료요원 교육을 목적으로 
  스칸디나비아 3국, 즉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과 국제연합한국재건단, 한국정부가 함께 설치한 
  공공의료원이랍니다.
  요즘 '코로나19사태'로 눈코 뜰새 없다는 "국립중앙의료원" 안으로 들어 가면
  정면으로 보이는 의료원 본관 앞에 "훈련원 터"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군인들의 무술훈련과 "무과 과거시험"을 보던 "훈련원"이 있었던 곳이란거죠.
  그러니까 조금전 <동대문운동장 터>의 <하도감>의 본부가 이꼿 <훈련원>이었던거죠.
  "훈련원 訓鍊院"은 1392년(태조1년)에 설치하여 조선왕조가 멸망 할때까지 존속된
  <조선왕조 500여년>을 지탱하는 군대의 핵심 군인을 뽑고 훈련했던 곳이어서 그 의미는 무척 큽니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총칼로 무장한 막강한 무력을 가진 군사집단의 중심지였으니
  <중종반정>등 쿠데타의 핵심 거처이기도 했답니다.


  ['훈련원공원']                     12:29
        
          ['윤관장군 동상']

  ['훈현원공원 광장']

  ['안내문']
  
  <중앙의료원> 옆에는 "훈련원공원"이 조성되 있습니다.
  <옛 훈련원>은 이 공원과 <중앙의료원>을 중심으로 <을지로6가>와 <청계천6가> 사이 모두가
  <훈련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이순신 장군"이 처음 무과 과거를 본 곳이기도 한데, 말타기 시험에서 말을 타다가 낙마하여 
  다리가 부러져 낙방한 곳이어서 역사의 현장을 찾는 느낌이 새롭습니다.
  낙방한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봄 2월, 32세의 나이로 무과에 간신히 합격했답니다.
  성적은 합격자 28명중 중간 정도인 丙科(병과)의 제4등이었다는데 그런 정도의 성적이라면 종전 
  같으면 관직을 제수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할 정도라니 어느 정도 시험점수였는지 알수 있죠.
  하지만 시험 점수로만 인간을 평가 할순 없죠? 성적과 능력은 별개라는 교훈을 준 '이순신장군'입니다
  이곳엔 조선시대 장군들의 동상은 없고, 고려시대의 <윤관장군> 동상이 설치되 있어 좀 그렇군요.
  왜냐하면 고려시대엔 <개성>에 <훈련원>이 있었으니 조선시대와는 관계없는 곳이니까요.


  ['훈련원공원 종합체육관']                   12:32
  
  <훈련원공원> 서쪽에는 <훈련원공원 종합체육관>이 있는데, 그 앞에 표지석이 하나 있습니다.
  "경성사범학교 교지비 京城師範學校 校址碑"
  쪽바리들이 1921년 4월에 일본인 초등교원 양성기관으로 설치했던 <조선총독부사범학교>를 
  1922년에 <관립 경성사범학교>로 개편하여 교사 양성을 한 곳이랍니다.
  그러니까 <훈련원>을 해산하고 그 터에 <경성사범학교>를 설립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개칭 승격되었고, 그 이후 <농업협동조합중앙회>가 있다가 
  다시 우리나라 "헌법재판소"가 이 자리를 차지 하고 있었던 것이죠.
  <헌법재판소>는 <종로구 재동>에 있었던 <옛 창덕여고> 자리로 이사했습니다.
  <훈련원>→<경성사범학교>→<서울사범대>→<농협중앙회>→<헌법재판소>→<훈령원공원>으로
  변모한 역사의 흔적


  ['동호로']                       12:34
  
  <훈련원공원>에서 서쪽 골목으로 나가면 <동호로>를 만납니다.
  <동호로>는 <종로5가>에서 <청계천5가>를 지나 <장충체육관>으로 이어지는 도로랍니다.
  50m 정도 <청계천> 방향으로 가면...



  ['구 경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                    12:35
  
  <경성사범학교>가 있었던 <훈련원공원> 뒤에는
  "구 경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가 폐가가 되며 쓸쓸히 있습니다.
  <경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는 조금전 <훈련원공원>에 있었던 <경성사범학교> 뒤에 딸려 있던 
  3개의 부속학교 가운데 하나였답니다. 1922년 설립된 이 학교는 일본인 학동들을 위한 학교였다는군요.
  <6,25전쟁>을 격으며 이 학교는 "미육군 극동공병단(FED)"이 주둔해 오다가
  현재는 <국방부 소관 국유재산>이니 출입을 제한 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을 뿐
  앞으로 월 하려는지 이렇게 방치되 있습니다.


  ['청계5가 지하상가 4번출입구']                  12:39
  
   <구 경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에서 조금 진행하면 <청계5가 지하상가 4번출입구>를 만나는데
   건너편에 "성제묘"가 있다고 해서 찾아 가야 하는데 길찾기에 유의 해야 하더군요.
   <←성제묘>라고 표기 한곳을 자세히 보면....


  ['성제묘' 조망]
  
  <코리아 못>이라는 가게와 <경북수출포장>이라는 가게 사이 골목으로 들어 가야 하더군.
  지하상가를 통과해 건너 가면....



  ['성제묘']

  ['현성전']

  [안내문]
  
  "성제묘 聖帝廟"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삼국지>의 <관우 關羽>를 神으로 모시는 사당으로 민간인이 세운 私廟랍니다.
  참고로 국가가 세운 <성제묘 聖帝廟>는 "동묘 東廟"가 있지요.
  사진 촬영을 위해 간신히 담벼락을 타고 올라 <관우 부부>를 모신 전각인 <현성전 顯聖殿>을 찍고
  골목을 나와 <청계천>으로 조금 가면...


  ['염초청 터']                   12:45
  
  "염초청 터 焰硝廳址"
  <염초청焰硝廳>은 조선시대 "화약"을 제조하던 관아로서 임진왜란 때 이곳에 본청이 설치되었답니다. 
  관아의 규모는 112칸으로 비교적 큰 것이었는데, 고려시대 말부터 이어온 화약제조 기술이 이어져 
  <염초청>은 조선의 국방기술의 중심에 있었던 관청이었답니다.
  1882년 <임오군란> 때에 폐지 되고 이 자리에 <방산시장>이 들어 서게 되었다고...
  조선시대 <염초청>은 도성에 2곳이 자리잡고 있었다는데
  하나는 이곳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의 서울역 근처 <염천교(鹽川橋)>에 위치하고 있었답니다. 
  <염천교>라는 이름의 유래부터가 <염초청> 앞에 있다고 하여 <염청교焰廳橋>,<염초청교焰硝廳橋>라 
  불리다가 후대에 이름이 바뀐 것이라고 합니다. 


  ['마전교']
  
  <염초청터> 표지석 건너편엔 "마전교 馬廛橋"가 <청계천>을 건너게 해 줍니다.
  <마전교>는 조선시대 지금의 <종로5가>와 <을지로6가(방산동)> 사이의 <청계천>에 놓여진 다리인데.
  건립시기는 <태종> 때 쯤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영조> 때에 이르러 <마전교>라 불리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다리 주변에서 말을 사고 파는 시장이 열렸기 때문에 "말전다리라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고


  ['청계천 평화시장']
   
  <마전교> 앞 <염초청 터>에서 <청계천>을 따라 내려 가면
  우측엔 <평화시장>의 <헌책방 서점>들이 좀 보이는데 예전엔 엄청 많았던 <헌책방거리>였었죠.
  

  ['전태일다리']                  12:58~1:06
  
  <평화시장 헌책방거리>를 지나면 <평화시장> 중심부에 도착하는데
  "전태일다리"라고 하는 "버들다리"를 만납니다.
  이곳이 또한 근대 노동운동 역사의 현장이죠.


  ['버들다리' 위의 '전태일']

  ['전태일']
  
  <버들다리> 위에는 "전태일 全泰壹 (1948년 9월 28일~1970년 11월 13일)" 像이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더 얘기할 말이 없습니다. 모두 아는 얘기이니....


  ['전태일' 분신 장소]

  [분신장소 표시판']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이곳에서 스물둘의 나이로 노동착취에 항거하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과 함께 분신한 장소가 그날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표지판 위를
  지나는 사람들은 분주하기만 합니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 뒤로 서슬퍼런 군사독재정권 속에서도 많은 노동관련 이슈들이 터져 나왔고,
  분신사건 이후로 <박정희 대통령>은 71년 세번째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면서 자신의 공약에 
  <노동문제해결>을 넣어서 처리를 천명했으나, 당선된 후에는 이를 뒤집고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해서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아예 박탈해 버렸지요.
  그리고 1년뒤 10월엔 <유신>으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여사>는 아들의 뒤를 이어 노동운동을 계속 하다가 
  <전두환> 정권 시절 계엄포고 위반으로 감옥생활을 했는데, 최근 검찰이 직권으로 재심 신청을 해서
  곧 대법원의 무죄 판결이 나오겠습니다만, 그 어머니는 별세하신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오간수문교']                       1:08
  
  <전태일다리>에서 조금 더 내려 가면 <오간수문교>를 만나는데 좌회전하면...


  ['흥인지문']                  1:10

  [안내문]
  
  "보물 제1호 흥인지문 興仁之門>
  <동대문역 7번출입구> 앞에는 "경성괘도회사터"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때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요즘 말로 <서울 외곽 전철역>이 있었습니다.
  시내에는 <전차>가 다녔지만 <동대문>에서 <왕십리-뚝섬-광나루>까지는 <괘도전차>가 다녔지요.
  철길 옆에는 무수한 판잣집들이 나열되 있어 주택난을 실감하게 했으며, 많은 어린이들이 위험하게
  철길에서 놀던 광경이 희미하게 스쳐 갑니다.
  

  ['전차 차고 터']                  

  [안내문]
  
  <동대문> 앞 시내 방향에는 "전차 차고 터"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발전소>와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상영지인 <한성전기회사>가 있었던 곳이랍니다.
  그 후엔 <동대문시장>이 자리 잡고 특히 현재의 "JW메리어트 동대문스퀘어서울 호텔"이 있는 자리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 있었죠.
 

  ['1955년도 사진']
  
  1955년도에 촬영한 <동대문 전차 차고지> 사진입니다.
  <전차 차고지>와 주변을 확실히 알수 있죠?
  격세지감을 느낌니다. ^.^
 

  ['흥인지문공원' 조망]
  
  <동대문> 옆 <흥인지문공원>을 바라보며 <이화동> 방향으로 건너 가면...
 

  ['북평관 터']                    1:16
  
  <서울게임아카데미>라는 건물 앞에서 "북평관 터 北平館址" 표지석을 만납니다.
  조선 초기 농경생활이 미진했던 <여진족>들이 말,산삼, 모피 등을 가져와 
  의류와 쌀 등 먹거리와 물물교환을 해 가곤 했다는데, 당시 <여진족>의 사신들을 접대하기 위해 만든
  국영의 <객관(客館)>이었는데 조선 중기에 없어 졌답니다.


  ['디자인재단' '한양도성박물관']
  
  건너편에는 "한양도성박물관""디자인재단"이 있는 건물이 보입니다.
  이 건물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화여대부속병원>이었지요.
  <한양도성박물관> 뒤로 올라 가서



  ['한양도성 낙산구간']                   
  
  <한양도성 성곽>을 따라 <낙산> 정상 방향으로올라 가면...


  ['창신 채석장전망대' 조망]                    1:28
  
  <창신동>에 있는 <창신숭인 채석장전망대>가 조망됩니다.
  잠시후 <채석장전망대>를 답사 할 예정이어서 어디인지 미리 확인하는 겁니다.


  ['이화동']
  
  <한양성곽> 정상부까지 나름대로 개성을 뽐내는 <이화동 카페>들이 즐비하게 널어서 있습니다.
  조금 더 올라 가면...


  [쉼터 전망대]                     1:38
  
  <서울시내>를 조망하기 좋은 곳에 쉼터가 있어 쉬며 조망을 하고 갑니다.
  

  [북쪽 조망]
  
  북쪽으로는 <북한산>의 <보현봉>과 그 뒤로 <백운대 인수봉>등이 보이고


  [서쪽 조망]
  
  서쪽으로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과 <서울대병원>이 보입니다.
  여기서 <서울대병원>을 조금 줌인해 보면...
   

  ['서울대병원' 조망]
  
  앞으로 찾아 갈 <마로니에공원>과 <서울대병원> <창경궁>이 지척에 있습니다.


  [남쪽 조망]
  
  남쪽을 바라보면 역시 <남산>이 확실히 조망됩니다.


  ['낙산' 정상]                       1:43
  
  좌청룡 우백호라는 풍수지리에 <좌청룡>에 해당한다는 "낙산 駱山 124.3m" 정상에 올랐습니다.


  ['창신 채석장전망대' 조망]
  
  <낙산> 정상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잠시 후 다녀올 <창신숭인 채석장 전망대> 위치를 가늠해 보고


  ['한성대' 조망]
  
  북쪽으로는 <한성대> 좌측 아래에 있는 <삼군부 총무당>의 위치를 가늠 해 보고 
  잠시 후 다녀 올 예정입니다.


  ['낙산공원' 주변 지도]
  
  <낙산> 정상에서 앞으로 진행 하게 될 코스를 지도를 통해 알아 보고 출발합니다.
  먼저 <창신숭인 채석장 전망대>를 다녀와 <삼군부 총무당>을 들리고 <낙산공원 중앙광장>으로 돌아와
  <이화장>을 거쳐 <대학로>로 갈 예정입니다.


  ['낙산공원' 출입문]                       1:45
  
  <한양성곽>의 <낙산공원>을 빠져 나가 앞에 보이는 <창신쌍용아파트202동>으로 가서
  우측으로 <채석장>을 다녀 옵니다.
 

  ['창신숭인 채석장전망대']                   1:53~2:05
  
  "창신숭인 채석장 전망대"
  <일제강점기> 시절에 여러 공공기관의 건물을 짓기 위해 채석을 한 채석장이 바로 <낙산>의 동쪽에
  있어서 그 파괴된 <창신동 숭인동>의 흔적을 조망 하도록 전망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사정상 오후4시부터 오픈한다고 문을 잠궈 놨더군요. 휴~
  카페를 이용하지 않고서도 무료로 엘리베이트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 조망 할수 있다는데...
 

  [근린공원]
  
  할수 없이 아래에 있는 근린공원으로 내려 가니 채석장 90도 절벽이 바로 앞에 있고


  ['동망봉 채석장' 조망]
  
  <단종 비>인 <정순왕후>가 <영월>로 유배를 간 <단종>을 그리워 하며 한없이 울었다는 <동망봉>이
  건너편에 보입니다.
  <서울역> <시청> <구 조선총독부> <한국은행>등 근대 서울을 대표하는 일제시대 건축물들을 짓는데
  이곳에서 채석한 돌을 사용 했답니다.
  바위의 질도 좋고, 거리가 가까워 운반이 쉬워서 <낙산>과 <동망봉>등을 폭파 했답니다.
  <창신동>이 '달동네'라는 빈촌이 된 이유 중에 하나라고 하니 볼수록 애처롭습니다.
  <동망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제가 쓴 
  "비운의 왕비 '정순왕후'의 흔적을 찾아서" 여기 클릭 


  ['낙산 삼거리' 회귀]                     2:09
  
  <채석장 전망대>에서 다시 <창신쌍용아파트202동> 앞으로 와 <낙산삼거리>라는 버스정류장에서
  계단으로 내려 갑니다.


  [계단 내림길]
  
  이 계단은 <한성대>로 내려 가는 계단인데 제법 긴 계단이었습니다.
  계단을 3분여 내려 가면...


  ['한성대' 옆골목]                    2:12
  
  <한성대> 담장 옆 골목길을 만나는데 <삼군부 총무당>을 다녀와 좌측 계단으로 올라 갈 예정입니다.
  100m 정도 골목을 내려 가면...


  ['삼선어린이집' 출입구]                     2:14
  
  <삼선어린이집> 입구를 만나는데 여기가 <삼선공원>이기도 하더군요.


  ['삼선공원']
  
  <삼선어린이집> 앞에는 <삼선공원>이 펼쳐지는데 조금 내려 가면...
   

  ['총무당' 뒷면]                     2:16~2:18

  ['총무당']

  [안내문]
  
  "삼군부 총무당 三軍府總武堂"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이 건물은 현재의 <광화문> 앞에 있는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대원군>이 설치한 군사기관이었던
  "삼군부 三軍府"의 중심 건물이랍니다.
  <총무당總武堂>은 <청헌당淸憲堂>·<덕의당德義堂>과 함께 원래 삼군부 내에 있었던 건물인데
  1930년대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다고하고, <덕의당>은 언젠가 없어졌고, 
  <청헌당>은 1967년 <정부종합청사>가 건립될 때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경내로 옮겨졌답니다.
  요즘같으면 '국방부' 건물인데 쪽바리들이 이 구석진 곳으로 옮긴 이유야 짐작하겠지만
  해방이 된 후 지금까지도 인적이 드문 이곳에 두고 있다는 것은 좀 이상합니다.


  ['낙산' 정상 회귀]                      2:29
  
  <채석장 전망대>와 <삼군부 총무당>을 둘러 보고 다시 <낙산공원>으로 돌아 와서


  ['낙산공원']                    2:31~2:39
  
  <낙산공원> 정상에서 좌측으로 내려 가면



  [계단 내림길]
  
  계단 내림길이 <낙산중앙광장>으로 이어지는데
  내려 가서 뒤돌아 보면...


  ['낙산중앙광장']                    2:44
  
  "낙산중앙공원"에는 "낙산전시관"이 있고, 공연장과 편의점도 있더군요.
  여기서 남쪽 방향으로 조금 가면...


  ['동숭어린이집']                  2:48~2:53

  ['이화장' 조망]                    
  
  <동숭어린이집>을 만나 우회전 하면 <이화장>이 보입니다.
  우측으로 돌아 <이화장>으로 가면...


  [이화장' 후문]                   2:59

  ['이화장' 정문]                  2:01

  [안내문]
  
  "이화장 梨花莊"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우남 이승만 박사"가 살던 집이란건 다 알지만...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하는데 안내문 내용이 좀 그렇군요.
  이곳은 일찍이 <중종> 때의 문신인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옛 집터로 
  일명 <신대(申臺)>라 부르기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던 곳이었답니다. 
  <중종> 때 문장.글씨.그림을 잘하여 당대의 삼절(三絶)이라는 칭송을 받은 <신잠(申潛,1491∼1554)>이
  <이화정에서 술에 취하여>라는 시를 읊으며 젊은 날을 회고하였다는데, 
  거기에 "庭前只有李花樹 不見當時歌舞人"는 구절이 나온답니다.
  해석하면 "뜰 앞엔 배꽃만이 피었을 뿐, 노래하고 춤추던 그때 사람들 볼 수 없구나"라는 뜻
   

  ['이화사거리']                       3:09
  
  <이화장>에서 <이화사거리>로 나가면 <대학로>가 이어 집니다.


  ['서울사대부국' '서울사대부여중']
  
  <이화사거리>에는 <서울사범대학 부설 초등학교와 여자중학교>가 있습니다.
  <훈련원터> 뒤에 있던 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한듯합니다.


  ['대학로']
  
  <대학로>가 펼쳐집니다.
  1975년도 까지 <서울대학교>가 있었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


  ['흥덕동천']
  
  "흥덕동천 興德洞川"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산 곳이 현재의 '혜화동' <옛 보성중고> 자리었답니다.
  말년의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 난 뒤 자신이 살았던 집터를 절터로 희사하여 <흥덕사>가
  세워 졌다고 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을 비롯한 신하들이 <유교국가>를 건설하려 했지만
  자신은 끝까지 불교를 신봉한 열열한 불교신자였지요. 그후 <흥덕사>라는 절이 있어 <흥덕동>이
  되었다는데 그곳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개천이어서 <흥덕동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현재 보는 이 <대학로>는 <흥덕동천>이 흐르는 아름다운 개천이었답니다. 
  <구 서울대>와 <대학로> 사이에 흐르던 <흥덕동천>을 서울대생들이 <세느강>이라 부르고
  <서울대 본관> 앞 다리를 <미라보 다리>라고 하며 <흥덕동천>을 건너 다녔다는데 
  현재는 <지하철4호선> 공사를 할때 완전 복개되어 지표면에 이렇게 흔적 모양만 남겨 놓고 
  사라 졌지만, <흥덕동천>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마 복개된 이 거리 밑으로 현재도 흐르고 있답니다.


  ['한국방송통신대' 정문]                   3:13~3:18

  ]'한국방송통신대' 본관]
  
  이어서 "한국방송통신대"를 만납니다.
  <구 서울대> 자리를 이어 받아 평생학습사회 교육 메카로 올라 섯다고...
  


  ['방송대 역사관'']

  [안내문]
  
  "방송대 역사관" 
  <대한제국> 때의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목조건물로서 <사적 제279호>로 지정 됬답니다.
  이 건물은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청사>였다는군요.
  후에 이 시험소는 <서울대 공대>로 이어 졌다고


  {'마로니에 공원']

  ['마로니에 공원 야외 공연장']                    3:19~3:30
  
  "마로니에 공원"
  <구 서울대 본관> 앞에 있었던 공간을 활용하여 공원을 만들었는데 <동아그룹>이 건설 기부했다는군요.
  <마로니에 공원>엔 진짜 <마로니에 나무>는 세 그루 밖게 없고, 대부분 일본칠엽수라고 하는군요.
  <경성제국대학>으로 시작된 학교이기에 일본칠엽수가...
   

  ['예술가의 집']

  [안내문]
  
  "구 서울대 본관"
  현재 <예술가의 집>으로 활용하고 있는 이 건물이 
  <옛 서울대 본관>으로서 이곳에 아직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서울대 건물이라고


  ['이상옥 열사']
  
  <마로니에공원>엔 "이상옥 열사상"이 있는데 저에게는 좀 생소한 독립애국지사이군요.


  ['서울대터 표지석']

  ['옛 서울대 모형도']

  [안내문]
  
  <마로니에 공원> 가운데엔 <옛 서울대 터> 표지석과 <옛 캠퍼스 모형>이 설치되 있고


  ['아르코미술관']

  ['아르코예술극장']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한국문화>와 <예술생산의 심장부>로서의 건축물로
  건축사적으로도 보존가치가 높아 2013년에 <서울 미래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답니다.
  <아르코>가 뭔 뜻인지 사전을 찾아 봐도 알수 없었는데 알고 보니 웃음이 나더군요. ㅎㅎ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영어 표기로 "Arts Council Korea"라고 하는데 이것의 약자라고 하는데
  "arko"를 음역 한것이라고...ㅎㅎ 이런것도 예술인가? 


  ['이음']                    3:31
  
  모르는게 너무 많다는 것을 이곳 "이음"에서도 절실히 느꼈습니다.
  뭔 뜻인지 뭐하는 곳인지 궁금했는데 그냥 지나치기만 했기에 이번 기회에 실체가 뭔지 알아 봣습니다.
  이곳 "이음""한국장애인 문화 예술원"이 2015년도에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이어주는 공간이며, 누구에게나 열린 문화예술 창작 발표와 교육의 장이랍니다
  한마디로 <장애인 문화예술의 장>이라고 할수 있는데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이어 주는 곳>이라고
  

  ['파랑새극장']
  
  "파랑새극장"
  1984년에 문을 연 대학로 최초의 민간 소극장으로 <김광석>, <동물원>, <들국화>, <신촌블루스> 등 
  다양한 뮤지션들이 <파랑새 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하고, 관객과 만나 음악세계를 만들어 왔답니다.
  코로나사태로 이곳의 예술문화 극장들은 개점 휴업....빨리 정상을 되 찾아야 할텐데


  ['학림다방']                      3:32
  
  <파랑새극장> 건너편에는 유명한 "학림다방"이 아직도 존속하고 있군요.
  "학림사건"
  1981년 군사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학생운동단체를 국가전복세력으로 몰아
  일망타진 했다는 사건이 <학림사건>이었는데, 학생들이 시위를 계획한 곳이 바로 저 <학림다방>이어서
  붙여진 이름이죠. <전두환 세력>은 학생들을 안기부가 불법체포하여 장기간의 불법 구금과 고문을 
  통하여 사건을 조작하여 최대 무기징역까지 때렸지요.
  하지만 2012년 대법원은 재심판결에서  "사법부의 과오로 인해 피고인들이 고초를 겪은 것에 대해 
  사과드린다. 이 판결이 조그만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며 모두 무죄 판결을 다시 내렸습니다.


  [조형물]
  
  <파랑새극장> 앞에 있는 뭔 뜻인지 모를 조형물을 보며 답사를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귀가했습니다.


  ['동대문' 주변 지도]

  ['낙산공원' 주변 지도]
  
  오늘 걸은 거리는 약8km이며, 3시간 15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점점 깊어 가는 가을 속에서 찾아본 역사 문화 유적이었는데 정말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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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남산 국치길과 중앙정보부』Ⅱ
  
  

  <중앙정보부(안기부) 제6국- 취조실 재현>


  [다녀온 길]
          
  <1부>에 이어 <Ⅱ부>에는 <조선통감부>가 있었던 <옛 중앙정보부(안기부)> 주변을 답사합니다.
  <숭의여대(경성신사)>-<리라초등학교(노기신사)>-<조선통감부터(ㅏㅠㄴ)>-<예장공원(조선통감부관사)>-
  <서울소방재본부(중정 행정동)>-<산림문학관(중정부장 공관)>-<기억의 터(조선통감 관저)>-
  <서울유스호스텔(중정 본관)>-<서울시남산청사(중정대공수사국)>-<남산한옥마을(일제헌병사령부)>-
  <한국의 집(총독부정무총감 관저)>-<충무로(혼마치)>



  ['숭의여대' '리라초' 입구]                   1:50
    
  <Ⅰ부>의 마지막 답사지였던 <외교구락부>가 있었던 <숭의여대 별관>에서 <숭의여대 본교>로
  올라 가면 <리라초등학교 정문>과 <숭의여대 정문>을 만납니다.
  정문 입구에 이곳이 예전 "경성신사 京城神社""일제 갑오역기념비"가 있었던 곳이라고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숭의여대' 정문]
  
  <숭의여고>는 '영등포구 대방동>으로 이전했고, 여기엔 <숭의여대>와 <숭의초교>가 남아 있습니다.
  이 학교는 <경성신사>에 대한 것보다 설립 과정에 우리 현대사가 압축되어 있답니다. 
  <숭의여학교>는 본래 <평양>에 외국 선교사가 설립해 30여년간 운영 한 여학교였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시절 이 학교는 신사 참배 거부라는 죄명으로 폐교되었답니다.
  그 학교에 다녔던  <박현숙>이라는 학생이 졸업 후 <평양 3.1만세운동>등을 주도 했다고, 
  해방후 <이승만정권>에서 승승장구하여 1953년 '대한부인회 최고위원'을 역임하고 
  지금 이 자리 <경성신사>가 있던 자리에 자신이 다니던 <평양>의 <숭의여학교> 이름을 그대로 
  <숭의여고>를 설립하여 직접 이사장이 되며, 이어서 '무임소장관' '자유당 국회의원'을 지내고, 
  <5.16혁명> 뒤에는 '공화당 국회의원'이 됬답니다. 
  사실 이곳은 공원 용지라 학교 설립이 불가능했지만 자유당 권력을 등에 업고 학교를 지었다는 
  일화도 <'서울&'>에 나와 있더군요. 학교 운동장 한켠에는 <안중근의사 동상>도 세워져 있다는데
  이 동상은 친일파 <김경승>이라는 사람이 만든 것이라 묘한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고...
  <경성신사>의 흔적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본관으로 올라 가는 계단이 그대로 남아 있고
  기타 유구들이 학교기념관 앞에 남아 있다는데 코로나사태로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들어 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경성신사'] ['경성신사 배전']
현 <숭의여자대학교>에 있었다는 "경성신사 京城神社" 1898년에 일본거류민단이 <남산대신궁 南山大神宮>을 만들어 참배하기 시작한 최초의 <일본신사>인데 1916년에 이름을 "경성신사 京城神社"로 개칭하여 정식 神社가 되었답니다. 일본 천황가의 시조신이라는 <아마데라스 오미카미>등 네명의 귀신을 모시고 조선을 영원히 자신의 땅으로 지켜주기를 일본 귀신들에게 빌었답니다. 이것도 모자라 <Ⅰ부>에서 탐사했던 <남산>에 "조선신궁 朝鮮神宮"을 어마어마한 크기로 1925년에 지을 때까지 이곳이 쪽바리들의 종교시설이었답니다. <갑오역>은 <청일전쟁>을 의미 한다고 하며, 그 전쟁 승리 기념비가 <갑오역기념비>라고 한다는데 ['리라초등학교'] "리라초등학교" 이곳엔 "노기신사 乃木神社"가 있었던 곳인데, <乃木神社>보다 <리라초등학교>가 더 관심 갑니다. <리라초교> 설립자인 <권응팔>이 전쟁 시기 부랑아 소년 등 우범 집단을 데려다 간단한 기술을 가르치는 <직업소년학교>에서 시작했답니다. 1957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높게 평가해 이곳 <노기 신사 터>를 내줘서 설립되었답니다. <리라초등학교>라는 이름도 1965년 <권응팔>의 장녀 <권리라>가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아예 딸의 이름을 따서 <리라초등학교>가 되었고, 당시 병아리를 닮은 딸을 위해 병아리 모양의 교모를 만들었고, 교복은 물론 교사의 색깔도 노란색으로 통일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제가 국민학교 시절 <남산의 리라>는 부잣집 자녀들이 다니는 선망의 사립 국민학교였습니다. 아마 최초로 실내외에 대형 수영장이 있고, <스쿨버스>가 운행된 국민학교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세월과 함께 <권응팔>의 딸 <권리라>가 최근까지 교장을 해 왓다고 하네요. 현재 이 초등학교 다닐려면 분기(3달)에 3,000,000원 정도 내야 한다니 부유층들이 애용하지요. <이명박 전대통령>의 딸들이 다닌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학이 대부분 그렇지만 이 학교도 완전히 세습학교이죠. ['리라아트고'] <리라 아트 고등학교>는 <권응팔>이 경찰관으로 <6.25전쟁> 시기 부랑아 소년 등 우범 집단을 데려다 간단한 기술을 가르치는‘직업소년학교’에서 시작했다고 앞에서도 언급했습니다. 전쟁의 혼란스런 시기에 사비를 털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고아들을 열과 성을 다해 돌보고 공부를 가르친다는 소식은 미국에 까지 알려져 뉴욕 타임즈와 리더스다이제스트가 특별 취재 보도하기도 했으며, 일본의 아사히신문 등 세계 각국 및 우리나라 언론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답니다. 또한 이 사실은 미국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참교육의 본보기가 되었고, 당시 한국의 국민학교 4학년 도덕교과서에도 이 내용이 실렸답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친히 직업소년학교를 방문하여 격려를 하고, 이를 높게 평가해 이곳 <노기 신사 터>를 내줘서 설립된 역사가 있다고...
['노기 신사']
<리라 아트 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노기신사 乃木神社"의 사진입니다.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전쟁의 영웅으로 우리나라 <이순신장군> 추앙과 비스무리한 일본놈이죠. 전쟁범죄자 일본 <메이지천황 明治天皇>의 절대 충신으로 전쟁에 참전했으며, 천황의 아들인 <히로히토 황태자>의 가정교사도 했던 인물입니다. 전쟁에선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지만 충성심이 엄청 부각된 日本神으로 추앙 받는데... 결정적인 칭송의 배경은 <메이지천황 明治天皇>이 죽자 장례식 때 자신도 부인과 함께 할복자살해서 그 충성심이 돋보였다는 것입니다. <안중근의사>가 보았다면 "그런게 애국이나 충성이 아니고 <메이지천황>이 살아 침략전쟁을 할때 니가 <메이지천황>을 죽였어야 애국이고 충신인거야~"라고 했을 것.... 이 인간에 대해선 다음을 참고 하세요.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 군신(軍神)인가 우장(愚将)인가?" ['조선통감부(총독부) 터' 조망] 1:55 <숭의여대>와 <리라학원> 정문 옆에는 <남산 에니메이션센타>가 있었던 자리가 철거되고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데, 그 이전엔 "KBS방송국"이 있었던 이곳이 "조선통감부 (후 총독부)"가 있었던 자리 랍니다. 역사를 좀 정리 해 보면... (1) 1905년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된 <을사늑약>과 함께 침략의 본거지를 지은 곳이 바로 이곳 "조선통감부"입니다. <남산>을 무지 좋아 한 쪽바리들은 비록 <남산의 북사면>이지만 북향이 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이곳에 통감부를 지었다죠. (2) 1910년 <경술년>에 <한일합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완전 식민지화로 가면서 <조선통감부>의 이름을 "조선통독부"로 변경하여 1926년까지 존속 했었답니다. 그리고 1926년 <경복궁>에 새로 지은 "조선통독부" 건물로 이사했답니다. <통감부>와 <총독부>의 차이는 거의 없다는 걸 알수 있죠?
['조선통감부(총독부)'] ['조선통감부 주변']
당시 <통감부>의 위치와 모양 규모를 알수 있는 사진이라 생각됩니다. 빌딩이 없던 시절의 <예장동> 주변이어서 <명동성당>이 매우 가까이 있다는게 또 새삼스럽습니다. <동본원사>의 위치도 기억 해 두세요
['조선통감부(총독부)']
당시 <조선통감부> 사진입니다. 침략의 전초기지라 할수 있겠습니다. ['조선통감부' (옛 '에니메이션센타') 자리] <조선통감부>가 있던 자리는 후에 <'KBS방송국>이 되었다가 다시 <남산에니메이션센타>가 되었는데 지금은 철거하고 뭘 새로 지을려는지 공터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 조금 내려 가면.... ['한양교회'] 1:57
["동본원사"]
<한양교회>를 만납니다. 일제시대엔 "동본원사 東本願寺 (히가시혼간지)"가 있던 자리랍니다. 그 이후에 이 주변은 "KBS TV 방송국"이 자리 했었고..... 일본 <교오토>에 근거를 둔 일본 불교 <정토종> 절간이 <동본원사 東本願寺>인데 남산 주변에 모여 살던 쪽바리들을 위해 절간을 새로 지은 것이었답니다. 종교시설 <동본원사 東本願寺>라는 절간은 전국 대도시 몇곳에 있었었답니다. 대표적인게 <부산 동본원사>와 <목포 동본원사>... 당시 <부산>은 관문이니 당연하고, <목포>는 '쌀 수탈'로 엄청 많은 쪽바리들이 몰려 들었다죠. ['드라마센타'] 1:58 일제시대 <통감부> 부속건물이 있던 곳에 <유치진 선생>이 미국 록펠러 재단의 도움을 받아 설립한 극장이죠. 선생은 우리나라 희곡 작가, 연출가...연극 문화예술의 선구자란 평을 받지만, 일제시대 일본 칭송 연극을 무지 많이 공연한 <친일반민족행위자>여서 좀 그렇지요? <청록파 시인 유치환>의 형 ['적십자사'와 '예장공원' 조망] <대한적십자사>와 <예장공원>이 조망됩니다. <적십자사>는 옛날에 <중앙정보부 학원사찰과>가 있었던 곳이라 하고 <예장공원>은 몇달 전인 2021년 6월 9일 새로 만든 공원이랍니다. ['예장공원 안내도'] ['예장공원'] 2:00 "예장공원 藝場公園" <예장동 藝場洞>은 조선시대 군인들의 武藝를 연마하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일제강점기> 시대와 <권위주의 군사정권> 시대를 거치며 암울한 시대를 상징하는 곳이 됬죠. 그래서 <서울시>는 <조선통감부 관사>가 자리 했다가 <중앙정보부6국>..그러다 <교통방송>이 되었던 자리를 헐고 새로이 <예장공원>을 만들었답니다. ['조선통감부(총독부) 관사 유구'] "조선통감부 관사 터" 관사가 있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구를 누구나 볼수 있도록 재현해 놨습니다. ['기억6'] [안내문] 이 자리는 "중앙정보부(안기부) 제6국"이 있었던 곳으로 얼마 전까진 <서울시 균형발전본부>였는데 모두 철거하고 이렇게 "기억6"이라는 빨간 우체통 모양의 <옛 공포의 취조실>을 재현해 놨습니다. ['기억6' 내부] ['빨간우체통'] <옛 중정6국 취조실>은 입장료 없이 무료더군요. 들어 가니 음습한 음향과 소름끼치는 중정 요원의 목소리가 취조실 안을 공포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남산 갑시다 ~~" "아아악 숨 막혀~~" 빨간 우체통을 설치해 놨는데, 훗날까지 처참한 인권탄압의 현장을 잊지 말고 전하자고 설치했답니다. [안내문] 제가 별도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게 안내문에 소상히 안내하고 있습니다. ['취조실'] [안내문] 저러한 지하 취조실에 끌려가면서도 민주화운동을 하던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오솔길'] 2:07 <일본통감부(총독부) 관사>와 <중정(안기부)6국>이 있던 자리를 차용해서 얼마 전까지도 "TBS 교통방송" 이 있었던 자리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가운데 길을 <남산 위의 저 소나무길>이란 이름으로 꾸며 놨습니다. 애국가 2절에 나오는 가사에서 따 왔답니다. ['서울소방재난본부'] 2:08 현재는 "서울소방방재본부"로 사용하고 있지만 이 건물이 "중앙정보부(안기부) 행정동"이었답니다. <중앙정보부장(안기부장)>의 관사는 좌측 뒤에 있더군요. 관사로 갑니다. ['문학의 집'] 2:11 현재 <문학의 집>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곳이 "중앙정보부장 관사"였고 뒤에 보이는 건물로 가면.... ['산림문학관'] 2:12~2:22 (10분 휴식) 현재 <산림문학관>으로 이용되는 "중정부장 경호원 숙소"였답니다. ['옛 정보부 정문'] 2:24 <중정부장 관사>를 둘러 보고 다시 <서울소방방재본부> 정문으로 나가면 <옛 중앙정보부 정문>의 모습이 여전히 살아 있는듯 보이는데 옛날엔 엄청 큰 철문이 있었지만..... <옛 중앙정보부 본관>을 가기 위해선 여기서 우측 길로 올라 가야 하더군요. ['중앙정보부 본관' 가는 길] 2:25 우측길로 올라 가면 "기억의 터"라는 조그만 공원이 있더군요. 그 공원 터가 에전 "조선통감" 먹고 자고 하는 관저가 있었다는 것인데 ['조선통감 관저' 가는 길] 옛 <조선통감 관저> 사진과 윗 사진을 보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들어 가는 길과 나무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수 있군요. ['기억의 터' 입구] 2:26 "조선통감 관저"가 있었던 자리엔 "기억의 터"라는 조그만 공원이 조성되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시대>와 <군사독재시대>를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취지로 19,755명의 기부를 받아 이 공원을 만들었답니다. ['대지의 눈'] "대지의 눈"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지 못해 우린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라고 외치는 피해 위안부들이 앞으로 어떻게 해결되는지를 끝까지 바라 보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답니다. 그래서 "아직은 감을 수 없는 대지의 눈"이라 한답니다. ['조선통감 관저 터''] 이어서 "조선통감 관저 터"를 알리는 표지석과 "거꾸로 세운 동상"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조선통감 관저'와 '하야시 곤스케' 동상] [작품 '거꾸로 세운 동상'] [안내문] 내용은 안내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야시 곤스케>는 1905년 <덕수궁 중명전>에서 <초대 조선총감 이토히로부미>를 모시고 <을사늑약>을 체결한 <일본공사>였으며 그때까지 사진의 관저는 <일본공사관저>였는데 그때 사진 속의 동상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토히로부미>가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하면서 이 관저는 <조선통감관저>가 되었다는데... 1910년 8월 22일 오후 4시 제3대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을 통감관저로 불러 "일·한 병합조약"을 체결하고 1주일 후인 8월 29일 이를 공포한 치욕의 역사가 남아 있는 곳.....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면서 <통감>은 <총독>으로 격상되었으며 1938년 현재의 <청와대> 자리에 <조선총독관저>를 새로 지어 옮겨 갔습니다. 해방 후 그 관저는 <경무대>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다시 <청와대>가 되었지요. 제가 어렸을 때 <경무대> 를 지나 다녔는데 그 때는 담이 요즘 사유지 철조망 같은 울타리여서 <윤보선 대통령>이 산책하는게 훤히 보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얘깁니다. [작품 '세상의 배꼽'] 계속해서 "세상의 배꼽"이라는 작품이 이어 집니다. <세상의 배꼽>은 이 세상의 중심부라는 의미를 담고 있겠는데 <통감관저>가 있던 터에 민족의 치욕을 누르고 이제는 추모의 공간으로 극적인 반전을 꾀한 의미있는 시도로 보이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원반형 반석>을 둘러싼 <81개>의 <자연석>은 전국 각지에서 모은 것으로, 강제로 부모, 조국과 헤어져야 했던 전국의 할머니들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세계인권선언문'] 2:33 <기억의 터>라는 공원을 지나 <중앙정보부 본관>으로 가는 길엔 <세계인권선언문>이 눈길을 끄는데 다시는 <인권>을 무자비하게 짓밟지 말자는 의미겠죠? 에휴~ 인권이라는 단어를 모르던 개쌍노무시끼들..그런 놈들은 아직도 연금 받으며 잘 먹고 잘살아요. ['서울유스호스텔' (옛 중정 본관)] 2:34 현재 "서울유스호스텔"인 이 건물이 "중앙정보부(안기부) 본관"이었답니다. <군사정권>의 파수꾼으로 국민을 억압해 정권유지를 한 권위주의의 상징인 건물입니다. 1961년 <중앙정보부>가 만들어지면서 <김종필 중령>이 맡아서 3천명의 요원들과 함께 했으나, 3년 후에는 요원의 수가 37만명에 달할 정도로 대공업무, 내란죄, 외란죄, 반란죄 등의 범죄 수사와 정보업무를 광범위하게 담당했답니다. 독재정권의 유지를 위해 반정부 세력에 대한 광범위한 감시와 통제를 철저히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이 건물은 <서울시 코로나 생활치료센타>로 이용되고 있어 접근금지 였습니다. ['서울종합방재센타'] <본관> 앞엔 <서울종합방센타>가 있는데 예전 본관과 지하로 연결된 <중정의 지하 방카>였답니다. 지하 취조실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났을까 아 ~ 얼마나 많은 민주인사들이 이곳에서 영장 없이 체포되어 강압과 고문으로 빨갱이와 간첩이 되었나 [터널] 2:36 본관을 지나면 짧은 터널이 있는데 어마무시한 <대공수사국>으로 가는 길이랍니다. ['남산창작센타' 앞] 터널을 지나면 앗! 좌측에 <남산1호터널>로 들어 가는 도로가 보이고, 그 위에 <한옥마을>과 연결되는 육교가 새로 건설되 있군요. <대공수사국>으로 가는 길에는 다시 긴 터널이 나타납니다. ['남산창작센타'] 2:39 우측에는 "남산창작센타"가 있는데 예전엔 "중정요원 체육관"이었답니다. ['소릿길 터널' 앞] <소릿길>이라는 이름이 새로 붙여진 <터널>이 앞에 나타나며, 좌측엔 <한옥마을>로 연결되는 육교가 있습니다. <대공수사국>을 다녀와 좌측 육교로 넘어 갈 예정입니다. ['소릿길 터널'] 2:40 <중앙정보부 제5별관> 및 <안기부 대공수사국>이 있던 <남산별관>으로 가기 위해선 이 터널을 통과 해야 했는데, 이 앞에는 엄청나게 큰 찌저지는 소리를 내는 철제문이 있었답니다. 눈을 가리고 끌려 가던 공포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이 터널에 음향기기를 2015년에 설치하여 이곳으로 잡혀온 사람들이 들었을 공포스러운 타자기 소리, 철문소리, 발자국 소리, 물소리, 노랫소리 등 5가지로 짜인 소리들을 터널을 지나는 동안 들을 수 있게 설치했다는데 제가 통과 할땐 아쉽게 그런 소리는 나지 않았습니다. ['서울시청 별관' (옛 중정 대공수사실)] 2:42 "서울시중부공원녹지사업소"로 사용되고 있는 "옛 <중앙정보부 제5별관> 및 <안기부 대공수사국>"이 있던 건물이랍니다. 간첩을 잡는 곳이 아니라 정권에 저항하는 세력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곳이란게 대법원 판결로 확인되었지요. 100% 전부는 아니겠지만.... 수 많은 조작 간첩이 있었지만 당시 <서울대 상대 학생>이었던 "천상병 시인"을 잊지 못합니다. 1967년에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동백림간첩단사건"을 기억 하시나요. 독일과 프랑스에서 활동하거나 유학중인 학생들이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이었죠. 그 중에는 유명한 작곡자 "윤이상씨", 화가 "이응로"씨 등 200여명을 체포하여 재판에 넘겼는데 발표와는 달리 최종 대법원에선 간첩혐의에 대해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던 사건이었죠. 지금까지도 독재정권의 정권연장을 위한 국면 전환용 조작사건이라고 회자되고 있는 사건이죠. 당시 우리나라 정치적 상황을 알아야 그 사건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여 "삼선개헌"을 위한 준비를 하려는데 최대 걸림돌이 개헌을 위한 국회의원 2/3 의석수 확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967년 6월 8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 2/3 의석수를 확보합니다. 하지만 부정선거라는 규탄이 전국에서 일어나는데 대학생들 뿐만 아니라 고등학생들까지 부정선거 항의 시위에 참가하는 '자유당 3.15부정선거' 이후 최대의 데모가 일어났죠. 그때 저도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소극적이었지만 데모에 참여했던 기억이 납니다. '박정희정권'은 30개 대학과 148개 고등학교를 임시 휴업시키는 등 데모를 진압하려했습니다. 당시로는 주요 도시의 모든 고등학교 대학교가 휴업 당한거였지요. 박정희정권의 장기집권을 둘러싼 분기점에 놓여 있었는데.... 이 때에 등장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메뉴인 간첩단사건"이 발표되어 공안정국이 시작되는데, 그 간첩단사건이 바로 "동백림간첩단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의 지휘자는 '날으는 새도 떨어 뜨린다'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었죠. 그런데 외국에 나가 본적도 없는 "천상병 시인"도 간첩단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발표됩니다. 모두 의아해 했는데 범죄사유가 "서울대 상대" 동기동창인 '강빈구'가 간첩인 것을 알면서도 신고를 하지 않았고, 그가 갖고 온 공작금을 받아썼다는 혐의"였습니다. 서울대 동기동창 '강빈구'는 독일에 유학 갔었을 때 '동 베를린'에 여행 갔다가 왔다는 사실을 '천상병'에게 자랑삼아 이야기 했는데 이것이 간첩행위와 간첩 불고지죄가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 당시엔 독일도 '동.서독'으로 분단된 국가였지만 "동베를린"으로 여행을 할수 있던 때여서 "동베를린"에 갔다 온 것은 한국인에겐 자랑거리였답니다. 공작금이라고 하는 것도 그 친구로부터 가끔 막걸리값을 얻어 사 먹었는데 그것이 공작금으로 몰려 당시 '남산 중정 지하실'에 끌려가 엄청난 고문을 당하며 반신불수가 되며 6개월이나 감금 당하며 죽다가 풀려 났답니다. 특히 전기 고문을 수차례 당했는데 성기에 전기고문을 해 생식능력을 상실해 자식을 낳지 못하는 천인공노 할 지경에 이르렀지요. 중앙정보부는 전기고문을 하면서까지 간첩단으로 몰려고 했으나 혐의를 찾지 못하고 풀어줬는데 "천상병 시인"은 그 이후 완전히 폐인이 되어 고행길로 들어서서 술을 마시며 奇行을 했지요. 국가기관에 의해 저질러지는 이런 일들은 아직까지도 정치적 고비마다 발생하고 있지는 않은지.. 저는 "천상병 시인"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가 노래한 "이 세상은 아름다운 소풍길"이라는 싯귀가 정말일까?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생식능력이 없는 '천상병 시인'을 남편으로 맞이한 "목순옥(睦順玉)여사"가 운영하던 '종로구 인사동'의 "귀천 歸天"이라는 전통찻집도 문을 닫았더군요. "목순옥여사"가 <시인 세계> "2007년 가을호"에 <시인의 아내>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의 일부를 소개하며 "천상병 시인"을 회고해 봅니다. "남편이 소풍을 끝내고 하늘나라로 간지 11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아직도 소풍길을 다니고 있습니다. 이 소풍길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 남기고 가야할 일이 아직 남았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제가 촬영하고 쓴 다음 사진과 글을 볼까요? ['천상병 시인' 동상] (수락산등산로 입구 근처에서 2014년 5월 19일에 촬영한 사진) <수락산역>에서 <수락산등산로 입구>로 가는 '노원구 상계동'의 <수락산디자인거리>에 있는 "시인 천상병공원"에 있는 "천상병시인 동상"입니다. 이 동상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저는 다음과 같이 느껴 집니다. 몰골이 앙상한 행려병자 같은 시인은 이제 하늘나라로 가려고 일어 서는 듯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이 하늘로 가려는 시인을 붙잡고 못가게 메달리는 듯 하군요. "아직 갈 때가 아니에요~"라고 어린이들이 생때를 쓰는듯 합니다. 강아지까지 시인의 고무신을 껴 안고 하늘로 가지 말라고 하는 듯하게 보여 저에게는 무척 슬픈 느낌으로 다가 옵니다. 이 사진만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림니다. 그가 쓴 <귀천>이라는 시는 너무 유명하니 <새>라는 시를 소개 합니다.
['한옥마을 육교'] 2:44 <대공수사국>을 둘러 보고 다시 <소릿길터널>을 통과하여 <남산한옥마을 육교>를 건너 갑니다. ['한옥마을 북문'] 2:47 <한옥마을 담장>을 따라 조금 가면 <한옥마을 북문>을 만납니다. ['망북루'] 북문 옆에는 <한옥마을>을 두루 조망 할수 있는 "망북루 望北樓}라는 팔각정이 있고 ['서울천년타임캡슐'] <망북루>에서 내려 가면 바로 "서울천년타임캡슐"이 있는 곳을 만납니다. [미로] <타임캡슐>이 있는 곳으로 내려 가는 미로같은 길을 잠시 내려 가면 ['서울천년타임캡슐'] 2:50 "서울천년타임캡슐"을 만납니다. 2394년 11월 29일에 개봉 할 예정이라고.... ['타임캡슐' 출입구] 2:53 나와서 뒤돌아 본 <타임캡슐 정문>입니다. ['남산골공원'] <타임캡슐>에서 부터 "남산골공원"이 이어지며 신혼부부들이 기념사진을 남기ㅣ기도 하더군요. ['남산한옥마을'] 2:56 이어서 "남산한옥마을"을 만납니다. ['남산한옥마을' 안내도] ★ 사진을 클릭하면 무지무지 확대 됨 ★ <남산한옥마을 안내도>입니다. 제가 편집해서 무지 크게 확대해서 볼수 있도록 했으니 확대해서 보시면 좋겠고 ['민영휘 옛집'] [안내문] ['민영휘 옛집'] 이 집은 저의 모교 설립자의 집이여서 잘 알지만 다음에 자세히 언급 하기로 하고... 이곳은 전통혼례식이 주말에 주로 열리는 곳입니다. 예전에 이곳 예식에 참석해 슨 참관기가 있으니 참고 하세요 『남산한옥마을』전통혼례식 참관기 ['윤덕영 첩 가옥'] [안내문] "윤덕영 尹德榮 1873~1940" 이 개쌔끼는 누구인가 "이완용"이와 함께 나라를 팔아 먹은 친일파 중에 최고 친일매국노이죠. 이 새끼는 "순종"의 왕비인 "순정효황후"의 백부, 그러니까 큰아버지가 되죠. 그러니까 아래에 언급하는 <윤택영>의 형이 됩니다. "윤덕영"과 "순정효황후" 사이에서 벌어진 유명한 일화가 있죠. <이완용>이와 나라를 팔아 먹을 때 옥쇄를 찍어야 하는데, 이 때 옥쇄를 "순정효황후"가 치마 속에 감추고 주지 않자, 이 새끼는 아무리 조카라 하지만 황후인데 황후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옥쇄를 빼앗아 [한일합방문서]에 도장을 찍게 한 천인공노 할 핵심 친일매국노이죠. 그외에도 "고종"을 겁박하여 일본천황을 알현하게 한다거나 헤아릴수 없는 반민족 행위를 했죠. 친일의 하일라이트는 "윤덕영"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것인데 아직도 그런 소문은 유효하답니다 이런 나쁜 놈들이 아니면 무슨 수로 이런 집을 20채씩이나 짓고 살았겠습니까 이곳에 있는 한옥은 <첩>의 집을 지어 준 것이니 저기 집은 다음 사진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일본놈들이 나라를 판 <윤덕영>에게 하사금으로 준 돈으로 지은 제일 큰 집이 제가 <서울 서촌 역사 답사기>에서 언급했던 다음 사진의 서양식 집이었습니다.
['윤덕영'이 '옥인동'에 지은 '벽수산장']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서울 서촌 역사유적 탐방기 1부" 여기 클릭 ['윤택영 재실'] [안내문] <윤택영>은 누구인가 대한제국 <순종>의 장인으로 조선의 마지막 <부원군>이고, 그러니까 <순정효황후>의 친정아버지이며, 위의 <윤덕영>의 동생입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된 나라를 팔아 먹는데 큰 일을 한 매국노 입니다. 이런 인간들 아니면 이런 집을 짓고 살수 없었죠. ['천우각'] 3:05 <남산한옥마을>은 일제강점기시대 "일본현병대사령부"였습니다. <중앙정보부 안기부> 보다 더 무시무시한 탄압과 인권 말살을 했던 <일본헌병대>였습니다. <남산한옥마을>이 우리 평시민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질려고 <친일매국노들>의 집을 엄청난 돈을 들여 전시하는지 알수 없습니다. 저런 집이 부러운게 아니라 위화감을 조성하는 듯 한데.... "<친일매국노>가 되어야 이런 집을 짓고 살수 있다~"라고 하는 메시지는 아닌지.... ['남산' 조망] <일본헌병대>가 무력으로 식민지 통치를 하는데 첨병이 되며 주둔했던 <남산한옥마을>에서 <조선통감부>가 바로 옆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한옥마을 정문'] 3:08
['옛 일본 헌병대 사령부 정문']
<남산한옥마을> 정문을 나서며, 옛 일본헌병대 정문 사진을 봅니다. 그리고 이곳은 <한국수도경비사령부>가 대물림을 했던 곳이기도 하죠. ['한국의 집' 입구] 3:11 <한옥마을> 옆에는 "한국의 집"이라는 한식점이 있습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시대엔 <조선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의 관저였답니다. 진입 도로가 아직도 유물로 남아 있는데...독특하죠? ['박팽년 집터'] <조선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의 관저였던 <한국의 집>은 "박퍙년 집터"라고 표지석까지 설치 해 놨습니다. <세종대왕> 시대 한글창제에도 한몫 했다는 <사육신> 중에 한 분이죠. 이 분이 살던 집을 기리 보존하지 못하고 쪽바리들의 관저로 물려 줬다니 슬픈 마음 뿐입니다. ['충무로'] ['혼마치 (本町)'] "충무로와 명동" <경성의 혼마치> 일제강점기 시대 총감부 공사관등 대부분의 관청이 이 근처에 있어 가장 많은 쪽바리들이 살며 조선의 경제권을 장악하여 번 돈으로 흥청망청 소비하던 곳이 <경성의 혼마치>라고 불리워진 <충무로와 명동>이랍니다. <혼마치 (本町)>는 일본 <오오사카>의 번화가이기도 하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관련있는 곳 ['충무로역4번출입구'] 3:15 암울하고 굴곡진 역사를 뒤돌아 보며 다시는 그런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답사를 마칩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서울 중구』
  
  『남산 국치길과 중앙정보부 1부』 
  
  
[남산에 있었던 "조선신궁 朝鮮神宮" 전경]
[다녀온 길] 일제강점기시대 쪽바리들이 무한히 사랑했던 南山............木覓山 <조선통감부>와 <조선신궁>등을 南山에 짓고, 침략의 마수를 내 뻗었던 곳이 南山이었답니다. <서울시>가 그 침략의 역사를 잊지 말자고 <남산>에 "남산 국치길"을 조성 했다고 해서 나름대로 많은 예습을 하고 답사에 나섭니다. <서울시 관련 홈페이지>와 <블로그 송풍수월>에 게재된 『남산의 역사와 문화』를 참고 해 답사 했다는 것을 알려 드림니다. ['명동역 5번출입구'] 12:30 2021년 9월 23일 (목) 구름 약간 맑음 <4호선 명동역 5번출구>에서 답사를 시작합니다. ['명동역5번출구' 앞] <명동역 5번출구> 정면으로 <신세계백화점 신관>이 보이는 <회현사거리>로 진행해서 우측 <소공동> 방향으로 방향을 틀면 ['서울중앙우체국'] ['홍영식 동상'] 12:35 "서울중앙우체국"이 <제비 날개 모양>을 하고 우뚝 솟아 있으며 정문 앞에는 <우정총국>의 초대 총판이었던 "홍영식 1855~1884"의 동상이 있더군요. 현재의 이 자리는 일제시대 <경성우편국>이 있던 자리이고, 당시 <우정총국>은 현재의 <조계사> 옆에 있었으며, 지금은 <체신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더군요. <홍영식>은 <우정총국>을 세우고 개국 축하 파티를 여는 틈을 이용해 <갑신정변>이라는 쿠데타를 <박영효><김옥균>등과 함께 일으킨 인물이죠. 하지만 3일만에 쿠데타는 실패로 끝나고 <청나라 군>에 의해 스무아홉살에 살해 당한 인물인데, 이곳에 동상까지 세울만한 인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갑신정변>이란게 일본놈들의 후원을 받고 한 쿠데타이니....
[현재 '서울중앙우체국' 자리에 있었던 '경성우편국']
['한국은행'] <서울중앙우체국> 건너편에는 "한국은행"이 있습니다. 일제침략의 대명사 중에 하나인 <조선은행>이 있던 자리입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건물을 짓고 친필 휘호를 남긴 <조선은행 머릿돌>을 없애지 않고 남겨 두기로 했다는 "조선은행 본점 건물"은 현재 <화폐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고, 그 뒤에 신축건물을 새로 지어 <한국은행 본점>이 우리나라 금융을 총괄 관리하고 있습니다. ['신세계백화점'] ['신세계백화점' 신관과 구관] <한국은행> 건너편에는 "신세계백화점"이 있습니다. 이 백화점은 일제시대에 우리나라 소비문화를 바꿔 놓았다는 "미스꼬시 백화점" 이었답니다. 현재의 <롯데백화점>은 <조지아백화점>이 있었던 자리고, 현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악명 높았던 <동양척식회사>가 있었답니다. <미스꼬시백화점>을 중심으로 밀집된 고급 상가들이 불야성을 이루는 <충무로>, 즉 <혼마치 本町>는 당시 <경성> 사람이면 누구나 가서 맘껏 소비하고 즐기고 싶어한 욕망의 해방구 였답니다. 그러나 동시에 '내지인'으로 불린 쪽바리들이 식민지 지배층으로서 특권적 삶을 누리는 "선망과 배제의 공간"이기도 했답니다. <이상의 날개> 읽어 보셨나요? 아내가 몸을 팔고 가져다 주는 돈..그 돈을 변소에 버리고 그 단절된 관계를 벗어나 "날개"를 꿈구며 올라간 건물의 옥상이 저 <미쓰꼬시백화점> 옥상이었죠.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솟아 나길 바라는 그는 추락을 위해서인가 ...자유룰 위해선가... 환락의 상징 <미스꼬시백화점>에서 몸도 마음도 사고 파는 자본주의를 경멸하는 것인가....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일제 강점기 시절의 암울함 속에서 무차별적으로 밀어 닥치는 자본주의 환락 환상이 어른거리는 <이상의 날개>에도 등장하는 <미스꼬시 백화점>이란걸 생각하며 바라보면 감회가 남다를 겁니다. ['회현사거리'] 12:40 <경성우편국><조선은행><미스꼬시백화점>을 둘러 보고 다시 <회현사거리>로 돌아 와 <남산>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직진해서 <남산3호터널> 방향으로 잠시 올라 가면.... ['남산3호터널' 앞] 12:45 <남산3호터널> 조금 못미쳐 갈림길을 만나는데 <남산오르미 승강장> 방향을 안내합니다. 직진성 우측길로 올라 가면... ['남산오르미 승강장'] 12:47 "남산오르미 승강장"을 만나며, 좌측엔 "남산3호터널준공기념탑"이 있습니다. 탑승은 무료이고 누구나 탈수 있는데, 운행시간 중에 일요일 운행시간을 유의하면 되겠습니다. [경사형 엘리베이트] <남산오르미>는 경사형 엘리베이트였습니다. 무료여서 더 즐겁고...ㅎㅎ 또한 <남산>으로 오르는 가장 편리하고 쉬운 시설이었습니다. ['남산3호터널 요금소'] <남산오르미>를 타고 올라 가는데 지난주에 답사 했던 <남산옛길>의 <삼풍아파트>가 보입니다. 제가 이 <남산오르미>를 이용하게 된 것은 지난번 <남산옛길>을 걸을 때 보여서 뭔가 해서 검색해 봤더니 바로 이 <남산오르미>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이 코스를 택했구요. ㅎ [뒤돌아 본 '회현사거리'] 1층과 2층 두개층만 있는 <남산오르미>지만 운행 거리가 제법 되지요? 잠깐이지만 뷰도 좋아서 대 만족이었습니다. ㅎ ['남산오르미 승강장'과 '남산케이블카 승강장'] 12:50 <남산오르미>의 2층은 <남산케이블카> 승강장 바로 옆이었습니다. <남산 정상>으로 가실 분들은 여기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 가면 간단한데 왕복 13,000원 여기서부터 <서울시>가 조성한 "남산 국치길"을 시작합니다. 우측으로 조금 올라 가면... ['국치길'] <국치길>에 있는 첫번째 '국치의 상징'인 <한양공원비> 이정표를 만납니다. ['한양공원비 쉼터'] 12:53 ['한양공원비'] ['한양공원비' 뒷면] [안내문] "한양공원비"를 만나는데.... 일제강점기시대 쪽바리들의 <남산사랑>이 시작되는 징표라 할수 있는 <한양공원비>가 길섶에 서 있는데, 뒷면의 글자들은 모두 홰손되어 알아 볼수 없습니다만 안내문을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남산> 일대 약 30만평을 무상 임대해 쪽바리들을 위한 어마어마한 <남산공원>을 만들었는데, <고종>이 <한양공원>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답니다. 비석에 새겨진 "漢陽公園"이라는 글자는 <고종>의 진필이라니....갸우뚱 ~~ ['남산3호터널기계실' 입구] 12:58 이어서 <남산3호터널기계실> 출입문을 만나는데, 지난주 <남산옛길>을 걸을 때 통과했던 곳입니다. ['삼순이계단' 앞] 12:59 이어서 <안중근의사기념관>으로 바로 올라 갈수 있는 <삼순이계단>을 지나 <백범광장>으로 먼저 갑니다. <조선신궁터>를 답사 한 후 <삼순이계단>으로 내려 올 예정입니다. ['호현당' 앞 삼거리] 1:00 <호현당> 앞 삼거리를 건너 <호현당>으로 가면... ['호현당'] 1:03 "호현당 好賢堂"은 "어진 사람들(賢人)이 좋아 하는 집"이라는 의미라는데... 코로나 시대에 인기 있는 무료 야외 예식장이라고 하네요. ['백범광장'] 1:03 <호현당> 바로 옆에 <백범광장>이 있으며 "백범 김구 선생 동상"도 보입니다. 이곳에 <백범광장>을 만든 사연에 대해선 앞으로 답사하게 될 <조선신궁>에서 느낄수 있겠고 ['남산' 오름길] <남산>으로 오르는 오름길이 시작됩니다. 현재 지형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얫길의 여운이 남아 있는듯 한데.... 다음 옛 사진을 보자구요.
['조선신궁' 전경 사진] '서울역'을 찾아 보세요 ㅎ 바로 앞 큰집 ['조선신궁 384계단' 오름길] ['조선신궁' 정문]
일제는 1925년에 "조선신궁 朝鮮神宮"을 짓고 조선인의 영혼까지 점령하려고 했답니다. 학생, 징병된 병사, 징용 가는 사람들...모두 이곳에서 강제 '신사참배'를 해야 했답니다. <조선신궁>으로 오르는 계단이 <384개 계단>이었다는데, 현재와는 지형과 경사도가 다르군요. ['안중근의사 기념관' 앞 광장] 1:06 <옛 384계단>으로 추정되는 오름길을 오르면 <안중근의사 기념관>과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 앞 광장을 만나는데 아곳이 옛날 <조선신궁> 앞 광장이었답니다. <조선신궁> 건물은 앞에 표시한 곳에 있었다는데, 후에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건립되고 이어서 <육영수여사>가 심혈을 기우린 <남산식물원>이 있던 자리인데, 현재는 <한양도성 유적지>로 탈바꿈 했습니다. ['안중근의사 동상'] ['안중근의사' 휘호] <조선신궁>이 있던 앞 광장에 <이토 히로부미>의 심장을 멈추게 한 "안중근의사"와 기념관이 대한 건아의 건재함을 알리며 쪽바리들의 접근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見利思義見危授命" "이익을 보면 정의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해 지면 목숨을 주라" 1910년 2월에 <여순감옥>에서 쓴 글로서 <보물 제569-6호>로 지정된 유명한 글이죠. ['한양도성 유적 전시관'] <조선신궁>이 있었던 자리는 <남산식물원>이 차지하다가 지난해 그러니까 2020년 11월에 "한양도성 유적 전시관"으로 변모 했답니다. ['한양도성 유적 전시관 안내도'] ['한양도성 유적'] 이 <한양도성>을 밑에 깔고 <조선신궁>이 세워지고, 해방 후엔 다시 <이승만대통령 동상>이 세워졌다가 <4.19의거>로 철거되고 <남산식물원>이 <어린이회관>과 함께 들어 섯지요. 슬픈 역사를 걷어내고 이제 <한양도성> 유적으로 복원되었답니다. ['방공호'] <한양도성 유적지>를 지나면 <神殿>이 있었던 자리 뒤에 <방공호>가 눈길을 끕니다. [방공호 입구] [안내문] 쪽바리들도 공습은 무서워 해서 곳곳에 방공호를 만들었다지요. 특히 이곳 <조선신궁>의 방공호는 더 큰 의미를 주는듯 하군요. 경비병들도 숨어 있었으리라 제가 다녀 온 다른 방공호는 <김포공항> 근처의 <강서구 궁산땅굴>이 인상 깊었습니다. [방공호에서 바라보는 '조선신궁터'] <방공호>에서 바라보는 <조선신궁 터> 입니다. 다음 옛 사진들을 감상 해 볼까요? 이 자리가 일제강점기 시절엔 어떠 했는지 실감 할수 있습니다. ['조선신궁 전경도'] ['조선신궁'] 이 사진은 현재의 <잠두봉>에서 촬영 한듯한데 규모가 상당합니다. 당시의 <경성역>이 지척에 보이는게 더욱 새삼스럽군요. <서울역>과 <남산> 사이에 <대우빌딩>등 대형 빌딩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 보이지 않아 거리가 엄청 멀게 느껴졌는데, 아무 건물도 없이 보니 매우 가깝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군요. <만리동 고개>도 보이고...^*^ ['조선신궁 배전 터'] [안내문] <神殿>이 있었던 자리에서 조금 내려 가면 "배전 拜殿 터"가 있는데 <배전 拜殿>의 기초 구조물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배전 터 위치'] ['배전'] <배전 拜殿>은 <신궁 神宮> 앞에 있는 건물로 글자 그대로 "절하는 곳"을 의미하겠죠 ['조선신궁' 배치도] <배전 拜殿> 뒷 사무소 등 집들이 있는 곳에 현재 <남산도서관>과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있습니다.
['우남 이승만 대통령 동상']
해방이 되면서 <남산 조선신궁>은 완전 폭파되었답니다. 그 자리엔 80세의 절대권력자인 "이승만대통령"의 동상을 세워 그의 만수무강을 빌었답니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가 쓴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인용 합니다. "이 동상은 몸통 길이가 23.5척(7m), 축대 높이를 합하면 81척(25m)로 당시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동상이었다. (중략) 동상 건립에 필요했던 3억환가량의 자금은 전국 극장 입장권에 10~20환씩의 경축금을 부과해 해결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 동상은 1960년 <4.19의거> 뒤 해체 철거됐답니다. <이승만>의 호인 <우남>을 따 지었던 <남산> 정상의 <우남정> 또한 <4.19의거> 때 파괴됐다가, 1968년 <남산팔각정>이라는 이름으로 재건돼 오늘에 이르고 있답니다 부산의 <용두산공원>도 <우남공원>으로 변경되었다가 <4.19의거>후 제 이름을 찾았지요. 정치권력의 부침에 따라 <남산>과 우리 산하는 심하게 굴곡되 왔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현재 개인 보관중인 동상 일부]
해방 후 <대한민국 제1.2.3대 대통령>을 지낸 절대 권력자였던 <이승만박사>는 <4.19의거> 후 <미국 하와이>로 도망가 살다 그곳에서 5년 정도 더 살다가 요양원에서 죽었지요. 이곳에 있었던 동상은 그 이후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서 알아 보았습니다. 해체 철거 후 <이승만박사> 동상의 행방에 대한 신문기사를 인용합니다. "윗 사진은 <코리아 라이프> 1970년 3월호에 보도된 <서울 명륜동 1가>에 남겨진 이승만 동상의 잔영들이다. 머리부분만 남아 있는 왼쪽의 동상은 남산에 세워졌던 것이고, 상반신만 남은 오른쪽의 동상은 파고다공원에 세워졌던 것이다" 30년이 흐른 현재도 <명륜동 1가> 주택에 남아 있다고 하네요. ['남산 분수대'] [안내문] <일제강점기시대>와 <이승만독재시대>가 지나니 <5.16군사쿠데타>세력이 <남산>을 점령했습니다. <배전 拜殿> 아랫쪽엔 <5.16군사쿠데타> 후 <박정희대통령>과 <육영수여사>가 심혈을 기우려 설립한 <어린이회관 (현 교육정보연구원)>과 <남산식물원>, 그리고 <분수>가 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여러번 아범님 따라 올랐던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민주화가 된 현재에는 있을수 없는 권위주의 시대의 잔존물인거죠. 이 사진을 보면 <조선신궁>과 <이승만박사 동상>,<남산식물원>의 위치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수 있군요.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1:20 <분수대>에서 내려 가면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 옆 <삼순이계단>으로 내려 가는 곳에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가 있습니다. ['위안부 기림비'] <아시아 태평양 13개국>의 수십만명의 여성과 소녀들의 고통을 증명하기 위해 세웠답니다. <한국><중국><필리핀>의 세 소녀를 <김학순 할머니>가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랍니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실을 실명으로 처음 증언한 분이 <김학순 할머니>라고 하죠? 25년여 전에 이미 작고하셨습니다. ['삼순이 계단']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를 지나면 "삼순이계단"을 만납니다. ['남산둘레길 북측순환로 입구'] 1:26 <삼순이계단>을 내려가 다시 <남산순환로>로 내려가 진행하면, <남산둘레길>과 연결되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국치길>은 좌측 <남산순환로>로 이어 집니다. ['한양공원비' 조망] 조금전 오르면서 들렸던 <한양공원비>가 건너편에 보이고 ['남산케이블카 승강장'] 1:29 이어서 <남산케이블카 승강장>을 지나면 ['남산 돈까스 거리'] 1:30 좀 유명한 <남산돈까스거리>가 시작됩니다. 대여섯집의 돈까스집이 있는데, 저는 이 남산돈까스를 추천하지 않습니다. 가격은 13,000원씩이나 하는데 맛은 7~8,000원짜리 다른 집과 별 차이 없는듯 해서 입니다. ['반공청년운동 순국열사 기념비' 입구] 1:31 <남산돈까스거리> 건너편에 이런 계단 하나를 만나는데 <반공청년운동 순국열사 기념비> 입구라고 해서 또 언제 오겠나 싶어 올라가 봅니다. ['반공청녀운동 순국열사 기념비'] 1:33~1:35 [안내문] "반공청년운동 순국열사 기념비" 우리나라 남산에 이런게 있었나? 의아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에 있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좀 애매모호 합니다. 실제 있었던 일인지..있기를 바라는 것인지... [내림길] "애국 愛國"....간단히 말해 나라를 사랑하는 것. 과거에도 수많은 애국자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이처럼 애국은 아주 숭고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애국청년단체>라는게 있었는지...있었다면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 보기 위해 검색을 했더니 <박사모 홈페이지>가 나오며 실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애국청년단체>라는 단어만 검색 되더군요. 그러니까 이곳에 있는 기념비 안내문의 <애국청년단체>라는 단체는 검색되지 않았습니다. 이 기념비를 만드는데 성금을 내고 기여한 분들의 명단이 별도 비석으로 세워져 있어 자세히 봤더니 <정일권><김종필><이후락>...등등이고, 건립위원회 회장이 <이은상>...ㅎㅎ 대략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이 <육국제1보병사단 창설지>라고 하는 표지석도 있더군요. 이 표지석을 세운 당시 보병1사단장이던 <신현돈>씨는 무지 유명하죠? ㅎ 대통령 해외 순방 중이라 엄중 경계태세가 내려진 가운데 별 넷의 군단장이 만취 상태로 추태를 부리며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민간인들과 싸우지를 않나 개지랄 떨다가 수사가 진행되자 전역했죠. 2014년도 일이니 그리 오래 전도 아니니 기억납니다. 잠시후 탐방하게 되는 <중앙정보부>가 눈 앞에 서성거립니다. ['원조 남산 왕 돈까스' 앞] ['재미로' 입구] 1:40 <기념비>를 내려가 건너편으로 건너 가면 <원조 남산 왕 돈까스> 음식점 옆에 <숭의여대 별관 입구>가 있고, <재미로>라는 길안내 이정표가 보입니다. 여기서 군사정권시대에 유명했던 <남산외교구락부>를 답사하고 <리라초등학교>로 가겠습니다. 트럭이 공사를 위해 주차되 있어 사진으로 길 확인이 좀 그렇지만 트럭 뒤에 너른 계단이 있습니다. 계단으로 내려 가면... ['숭의여대 별관'] 1:42 그러면 "숭의여대 별관 정문"을 만나며 <외교구락부>는 사진 속의 주차장 옆에 있습니다. ['외교구락부'] "남산 외교구락부 터"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이곳이 7~80년대 그 유명했던 <남산외교구락부>라는 걸 증명합니다. <구락부>는 "club"을 일본식 발음으로 표기한거죠. <외교클럽>이 맞지만 당시의 표기가 더 친근감이 드는건 너무 많은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리라 ['외교구락부 이야기'] 국내 최초의 서양식 레스토랑인데 유명한 정치인들인 <신익희.조병옥.장택상.윤치영>씨가 이 레스토랑을 설립했다는 사실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고 할수 있는데..... 군부독재시대에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인물들...40대 기수론의 <김영삼><김대중>선생들이 회동과 회견등 굵지굵직한 행사를 거행 한곳으로 유명하지요. 특히 <나훈아> <김지미>씨가 약혼 발표를 한곳으로도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던 곳이죠. <김지미씨> 1940년생이고 <나훈아씨> 1947년생이니 연상의 여인에서부터 최고 인기를 누리던 가수였으니 세간의 화제는 보통이 아니었죠? ㅎㅎ <김지미씨>는 미국에서 산답니다. [옛 '외교구락부'] 사연 많았던 <남산외교구락부>의 실제 옛 모습입니다. 민주화와 함께 <외교구락부>는 역활을 잃어 숯불갈비집으로, 예식장으로, 다시 레스토랑으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지만 결국 문을 닫고 <숭의여대>에 팔려 <숭의여대 별관>이 되었답니다. ['조병옥선생''신익희선생'] ['이민우' 'YS' 'DJ'] <외교구락부>를 만들고 이용했던 분들의 사진이 안내판에 있어 촬영했습니다. 벌써 추억이 되버린 인물들입니다. ['숭의여대' 조망] 1:46 <외교구락부>에서 <숭의여대>와 <리라초등학교>를 바라보며 올라 갑니다. "남산 국치길과 중앙정보부Ⅱ 2부로 이어 집니다. 여기 클릭"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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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남산 옛길』 
['남산옛길']
['남산옛길 안내도'] ['남산옛길 코스'] [탐방코스 실트랙] "남산옛길"은 약2.5km 정도 되는 짧은 코스이지만 <남산> 기슭에 숨어 있는 역사의 향기를 느꺄 볼수 있는 코스로 <열두명의 정승>을 배출한 <정광필선생>의 생가 앞 <은행나무>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덕형선생>과 <이항복선생>의 집터가 근처에 있어 그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탄생된 지역이어서 더욱 관심이 갔습니다. ['회현역(남대문시장) 1번 출입구'] 오후 2시 40분 2021년 9월 18일 (일) 구름 약간 맑음 조금 늦은 시간에 <4호선 회현역 (남대문시장역)> 1번 출구를 나서며 답사를 시작합니다. ['퇴계로'] <회현역 1번출구> 정면으로 두번째 빌딩인 <우리은행 본점>으로 진행하면.... ['우리은행 본점 앞'] <우리은행 본점> 옆에 안내석이 하나 보이는데... ['은행나무'] ['은행나무 설화'] "회현동 은행나무"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에 나와 있으니 안내문을 참고 하시고... <남산옛길>에서 볼거리 중에 최고 볼거리라고 하는군요. ['정광필 집터'] <은행나무> 쉼터 좌측에는 "정광필 선생 집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설치되 있는데 그렇다면 현재의 <우리은행 본점 터>가 <정광필선생 집터>가 되는 것이니 그의 위상을 느낄수 있습니다. "정광필 鄭光弼 <1462년(세조8)~1538년(중종33)>" <성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연산군> 시절에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임금 (연산군)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했다가 아산으로 유배된 할말은 하는 강직한 사람이었답니다. <중종>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답니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527년 다시 <영의정>에 오른 <중종>대의 핵심 정치인이었답니다. <문익공 文翼公>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12명의 과거 급제자 후손을 두었고 장수 하신걸로도 유명하답니다. 한편 이 집터에서 <병자호란>에서 주전파로 유명한 <김상용><김상헌>선생도 이곳에서 태어 났다고.. <정광필선생>의 외손이랍니다. <김상헌 선생>이 <병자호란> 당시에 살던 집은 <김재규 중정부장>이 <박대통령>을 권총으로 시해한 유명한 <궁정동 안가> 자리가 그의 집이었다죠. <김영삼대통령>이 <궁정동 안가> 자리를 현재 <무궁화동산>으로 만들어 <김상헌선생 집터>라는 표지석과 詩碑 <가노라 삼각산아 잘 있거라 한강수야~~>만 세워져 있더군요. ]'호텔 렉스' 앞] <정광필선생 집터> 은행나무를 지나면 우측에 <호텔 렉스>가 있고 좌측에 <롯데캐슬아이리스아파트>가 있는 사잇길로 진행하는데 <남산>의 <서울타워>와 <교육정보교육원>이 아주 가까이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사진의 한계 때문에 사진 속에는 조그마하게 보이지만.... 그래도 <남산옛길>의 정취가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NEW SUN GUESTHOUSE'] 이어서 "NEW SUN GUESTHOUSE" 건물 벽면에 <남산옛길> 표시가 있으며 안내도 등 관광 안내를 하고 있더군요. 여기서 50m쯤 조금더 올라 가면.... ['삼거리] ★ 중요한 갈림길 ★ <수도종합공사>라는 가게 앞에 삼거리를 만납니다. 이 삼거리는 <남산옛길>에서 매우 중요한 삼거리 였는데, <청운의 길>은 우측으로 가는데, 한편 <소나무 숲길>의 출발점이 되는 중요한 삼거리 였습니다. 저는 집에서 미리 조사를 하여 종합적으로 탐방 할수 있는 길을 미리 나름대로 계획하고 와서 먼저 직진길인 <소나무 숲길>을 오르고 내려 올때 우측길로 내려 왔다가 다시 올라 가 <저잣거리길>로 진행 할 예정입니다. 먼저 앞에 보이는 <회현체육센타> 방향으로 올라 가면.... ['중구회현 체육센타' 앞] <중구회현체육센타> 앞에 삼거리가 있는데 <소나무숲길>은 좌측으로 갑니다만 <체육센타> 뒤에 쬐끔 보이는 빨간색 아파트인 <별장아파트> 앞에 있는 <회현동 경로당>을 다녀와서 좌측으로 갈 예정입니다. <중구회현체육센타>가 옛 <회현 제1 시범아파트> 자리였답니다. 잠시후 <회현 제2 시범아파트>로 올라가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별장아파트>로 올라 가면.... ['회현경로당'] <별장아파트> 앞에 <회현경로당>이 있는데, 저곳이 "표암 강세황 姜世晃선생 (1713~1791)"의 집터 였다고 하는군요. <강세황 선생>은 누구인가....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니 화가로만 알고 있지는 않나요? <영조><정조>시대의 인물로 <한성판윤(서울시장)> <예조판서> 까지 지낸 고위급 관료였죠. 詩 書 畵를 섭렵하는 三絶로 불리웠으며 <예원의 총수>로 군림했답니다. <영조>는 그가 書畵를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심이 좋지 않아서 천한 기술이라고 업신여길 사람이 있을 터이니 다시는 그림 잘 그린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고 하자, 이에 감격하여 이때부터 거의 20년 동안 붓을 놓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일화가 유명하죠. 76세에 <금강산>을 유람하며 기행문과 그림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 분이 살았던 곳이 여기라니...시멘트 콩크리트 건축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폐쇠 공간 속에서 그가 살던 그 시절의 산수화를 생각해 보기만 합니다. ['남산 힐 호텔' 조망] <강세황 집터>를 나와 다시 <체육센타> 앞 삼거리에서 좌측 골목으로 잠깐 올라 가면 적산가옥 인듯한 일본식 2층집이 아직도 그 모양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골목인데 <남산 힐 호텔>이 보이고 ['작품 임금의 자리'] <남산 힐 호텔> 옆 계단에 "임금의 자리"라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계단은 <삼풍아파트>로 올라 가는 계단이더군요. 일반적으로 御座 뒤에는 <일월오악도>가 그려진 병풍이 있는데, 여기선 왠 <십장생도>가 그려져있남? [삼거리] <임금의 자리>라는 그림이 있는 <삼풍아파트 계단>을 지나면 바로 삼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윤주한의원'] <윤주한의원>이 있으며, 이 한의원 정문 담벼락에는... ['작품 선비의 길'] "선비의 길"이라는 벽화가 있습니다. ['삼풍아파트' 입구] 이어서 <삼풍아파트> 차량 진출입구를 만나는데 <남산옛길>은 좌측 방음벽 옆 계단으로 안내되고 있었습니다. [계단] ['남산3호터널 톨게이트'] 계단 입구에는 <남산3호터널 요금소>가 보이는데 <요금소>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출입구가 있더군요. 그러니까 이 계단 좌측 방음막은 <요란스런 <남산3호터널> 차량 소음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남촌어린이놀이터'] 제법 긴 데크 계단을 올라 가면 "남촌어린이놀이터"를 만나는데.... 여기서 <소나무숲길>이라는 <남산옛길>의 소나무를 좀 볼수 있었고, 다른 곳에선 소나무를 못봤습니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듯 바람 소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현재 <남산>에는 소나무 보단 다른 수종의 나무들이 점령했다고 합니다. ['남촌어린이놀이터'] [도로] <남촌어린이놀이터> 앞에는 포장도로가 있는데 이 도로는 <남산3호터널 환기 기계실> 진출입로더군요. 이 길 따라 조금 올라 가면.... ['남산3호터널 기계실' 출입문] <남산3호터널기계실> 정문을 만나 우회전하고 ['남산순환로'] ['삼순이 계단' 조망] <남산순환로>인 <소파로>를 올라 가면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 건물 옆에 있는 "삼순이 계단"을 보고.. ['백범광장' 앞 삼거리] <백범광장>과 <남산>을 연결하는 생태터널 앞 삼거리를 지나면... ['마뫼'] <마뫼>라는 전망 좋은 조그마한 카페를 만납니다. <회현동> 조망에는 최고라고... "회현동 會賢洞"이라는 남산골 동네는 "현인들을 많이 배출하여 현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랍니다. "마뫼"는 <南山> 즉, 오리지날 이름 <목멱산 木覓山>의 순 우리말이라는데 일반명사인 <남산>은 알아도 고유명사인 <목멱산>은 잘 모르죠? 특히 순 우리 말이라는 <마뫼>는? ㅎ [엘리베이트] <마뫼>에서 <남산옛길>의 정점인 엘리베이트를 조망하며 옆에 있는 "제2시범아파트"를 조망합니다. <남산옛길>의 <청운의 길>과 <소나무숲길>이 만나는 정점이더군요.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인 <시민아파트>를 아십니까? 그리고 당시 <시민아파트>와 <시범아파트>의 차이점을 아시나요? <6.25전쟁> 이후 서울로 몰려드는 인구집중으로 서울 전역이 판잣집으로 뒤덮이다시피 했다죠. <박통>은 그들의 주택난도 해결하고 도시개발도 하기 위해 <부산시장>을 하던 군대 후배 <김현옥>을 <서울시장>으로 앉히며, <불도져>라는 별명 다웁게 2,000가구도 아닌 아파트 2,000동을 2년 안에 짓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의 밀어 부치기 공사를 했답니다 판잣집 철거민들을 위한 아파트 건설공사. 1호는 <서대문구 천연동> <안산> 근처에 지어지고, 이어서 바로 <마포구 창전동>에 있는 <와우산> 일대에 엄청난 규모의 아파트들이 들어 서기 시작했다지요. 이때의 아파트 이름이 <시민아파트> 였답니다. <와우산>에 있다고 <와우아파트>로 불리워 졌고... 하지만 부실공사로 지은 이 아파트들은 속절없이 허물어 지며 <김현옥시장>과 함께 사라졌죠. <가수 조영남>이 <신고산타령>이라는 노래를 개사해서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 ♬ 우르르르 ♪"로 불러 군사정권들은 그를 출연정지를 시키기도 했지요. 제가 대학시절이었습니다. <와우시민아파트>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고 튼튼한 아파트의 시범을 보이겠다고 지은 시민아파트가 <회현 시범아파트>였답니다. 그러니까 그 이후 업그레이드 된 아파트였던 것이죠. 중앙난방으로 온수도 나오는 당시로는 획기적으로 살기 좋은 아파트로 알려지며 인기가 짱이었답니다. 판잣집 철거민들을 위해 지은 <회현 시범아파트>는 공기, 경치 좋은 남산 자락에 있어 인기 연애인들이 더 많은 돈을 주고 입주하기 시작했고, 특히 <중앙정보부>가 가까이 있어 끗빨있던 중정요원들이 앞다퉈 입주 한 곳이 바로 이 <회현 시범아파트>였답니다.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 할수 있죠? <회현 제1 시범아파트>는 헐리고 없는데 조금 전에 보았던 <회현체육센타> 자리였다고 하고, 보이는 이 아파트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회현 제2 시범아파트>랍니다. <회현 제2 시범아파트>는 올해로 준공 51년을 넘었답니다. 세월 만큼 세월이 더덕더덕 붙어 있습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단 말이 실감납니다. 15평 정도 크기에 방2개 화장실 하나로 구성된 이 아파트가 70년대엔 인기 연예인들에게 까지 엄청 인기있는 아파트였다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군요. 철거민을 품기 위한 아파트는 이제 다시 철거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시>는 철거 대신 리모델링을 택했다고 하네요. 리모델링해서 청년예술가를 위한 공방과 작업실 등이 들어설 계획이라니 잘된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때려 부수고 새로 짓는 것만이 개발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라져 가는 옛것들에 대한 따듯한 보존도 선진 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되고.... [엘리베이트에서 '남산' 조망] 엘리베이트를 타기 전에 <남산>을 조망합니다. "누에 머리를 닮았다"고 <잠두봉 蠶頭峰>이라고 하는 봉우리가 가까이 보입니다. 서울 시내 조망으로는 최고로 포토죤이 있죠. <백범광장>에서 바라보면 진짜 "누에 머리"처럼 보입니다. ['남산옛길-저잣거리길' 조망] 엘리베이트에서 <남산옛길>의 정점을 조망하고 내려 가서... [뒤돌아 본 엘리베이트] <청운의 꿈>을 안고 오르내리며 공부하던 선비들이 거닐었을 <남산옛길> <회현 제2시범아파트>가 어떤 모습으로 다시 우리에게 찾아 올지 궁금합니다. 리모델링 해서 젊은 예술가들이 활보하면 다시 찾아 보겠습니다. 이곳이 <남산옛길>의 <청운의 길>과 <소나무숲길>이 만나는 꼭지점이더군요. [안내도] 이곳에 <현위치>를 알리는 안내도가 설치되 있었습니다. 저는 빨간색으로 그은 길을 따라 이곳으로 올랐고, 파란색선으로 그은 길을 따라 하산합니다. 하산 할때엔 골목 좌우를 몇번 왔다리 갔다리 하니 유의 해야 합니다. [벽화거리] 엘리베이트가 있는 <회현 제2시범아파트>에서 <청운의 길>을 따라 내려 가면 먼저 좌측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골목으로 잠시 지나고... [삼거리] ★ 중요한 삼거리 ★ 이어서 <제일유리상사>라는 영업을 하는지 문 닫았는지 모를 가게 앞에 삼거리가 있는데 <청운의 길>은 우측 골목으로 연결되 있어 <소나무숲길>의 출발지였던 <수도종합공사> 앞 삼거리까지 내려 갔다가 다시 돌아 와야 <청운의 길>을 완주 할수 있으니 유의 해야겠습니다. 우측 골목으로 내려 가면... ['청운의 길'] <청운의 길>에선 가장 가파른 골목이 150m 정도 이어지더군요. 내려 가면... ['소나무숲길' 출발지] ★ 중요한 삼거리 ★ <소나무숲길>의 출발지였던 <수도종합공사> 앞에 도착하는데 <제일유리상사>에서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3분 정도였으니 비교적 짧은 골목이었습니다. ['청운의 길' 오름길] 다시 왔던 길로 올라 갑니다. 올라 갈때는 사진 촬영 없이 올라 갔더니 2분 걸리더군요. ['제일유리상사' 앞 삼거리] 다시 <제일유리상사> 앞 삼거리에 돌아와 우측으로 30m쯤 내려 갑니다. 여기서부턴 "저잣거리길"이 이어 집니다. ['정화예술대학'] <정화예술대학교 남산캠퍼스>가 있고 ['신세계슈퍼마켓' 앞 삼거리] ★ 중요한 삼거리 ★ 이어서 <신세계슈퍼마켓> 앞 삼거리를 만나는데 여기선 우측에 있는 <회현사랑채>를 다녀 옵니다. ['회현사랑채' 앞 골목] <회현사랑채>로 통하는 골목은 사람만 왕래 할수 있는 좁은 계단 골목이었습니다. ['회현사랑채'] "회현사랑채"는 오래된 근대 가옥을 리모델링하여 주민들을 위한 공공 공유 공간이랍니다. ['작품 골목길']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선생>의 호가 <백사>인데 이 마을을 <백사마을>이라고도 하는군요. 잠시후 <백사 이항복선생 집터>를 방문합니다. ['남산의 사계절 음식점' 앞 사거리] ★ 중요한 사거리 ★ 다시 <신세계슈퍼마켓> 앞 삼거리로 돌아와 조금 내려 가면 <남산의 사계절>이라는 음식점 앞 사거리를 만나는데, 여기선 좌측에 있는 <쌍회정터>와 <계단집>을 다녀 옵니다. ['계단집' 가는 길] <남산의 사계절> 음식점 앞 사거리에서 <계단집> 가는 길 입니다. 50m쯤 고개를 넘어 가면.... ['일신교회' 앞] <일신교회>를 만나며 <쌍회정터 표지판>이 보이는데 맞은편에 <계단집>이 있습니다. ['계단집'] "계단집" 도시재생사업으로 리모델링 한 <적산가옥>이랍니다. 붉은 지붕을 얹은 일본식 2층집... 근대 일본가옥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적산가옥이랍니다. 원형 탁상에 둘러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다다미방>은 다른 카페에서는 볼 수 없는 <계단집> 만의 특별한 공간이라고 자랑합니다. 현재 <계단집>은 주민 바리스타 4명과 대형 프랜차이즈 점장, 개인카페 운영 경험이 있는 주민 매니저가 협업해 마을카페로 활용하고 있다는데 많은 젊은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지 많이 찾아와 인기있는 명소가 되어 있더군요. 나오는 젊은이와 대화 파란문 : "커피값은 얼마하던가요?" 젊은이 : "아메리카노 한잔에 3,500원 하더라구요" 파란문 : "그렇게 안 비싸네?" 젊은이 : "그러게요. 저도 그렇게 생각햇어요. ^.^" ['쌍회정터'] <계단집> 문앞 <일신교회> 입구에 "쌍회정터 雙檜亭址"표지판이 있습니다. <백사 이항복선생>의 집앞에 정자가 있던 곳인데, 그후 집 새 주인이 다시 전나무 앞에 정자를 지어 "雙檜亭"이 되었다는군요. 여기서 멀지 않은 <대우재단센타> 빌딩이 있는 곳이 <이덕형선생> 집이 있었다고 하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이 어릴적에 잼있고 재치있는 에피소드가 이곳 <회현동>에서 만들어 졌다는 것을 알수 있군요. <백사 이항복선생>이 후에 살던 집은 현재 <배화여고> 안에 "필운대"라고 하는 곳이죠 자세한 내용은 제가 쓴 "서울 서촌 역사유적 탐방기" 여기 클릭 ['회현역' 방향] 다시 <남산의 사계절> 음식점 사거리로 돌아와 <저잣거리길>로 내려 가면.... ['회현동 주민센타'] "회현동주민센타"를 만나는데...여기 어디에 있다는 벽화는 못보고 ['성도교회' 앞 사거리] ★ 중요한 사거리 ★ <회현동주민센타>에서 다시 조금 더 내려 가면 다시 사거리를 만나는데 여기선 우측에 있는 벽화를 구경하고 돌아 옵니다. 우측 골목으로 30m쯤 가면... ['24시 셀프빨래방'] <24시 셀프빨래방>이 있는데 빨래방 벽에 벽화가 있습니다. ['작품 장원급제'] 이곳 벽화 이름은 "장원급제"라는 그림이었는데 요즘말로 하면 <수석합격>이라는 뜻이죠? ['성도교회'] 다시 <저잣거리길>로 나와 조금 내려 가면 <성도교회>를 지나고 ['정화예술대'] <회현역>과 아주 가까운 곳인데 <정화예술대>가 여기도 있군요. ['회현역(남대문시장)"] 오후 3시 40분 지하철 <회현역(남대문시장역) 1번출입구>로 돌아와 <남산옛길> 답사를 마침니다. ['실트랙'] 거리는 예상보다 짧아 약2.5km였으며 정확히 1시간이 걸렸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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