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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송파구 이곳저곳』
『'잠실도'와 '부리도'의 흔적을 찾아서』
['카카오맵']
<9호선 삼전역>에서 출발하여 <잠실본동 주민센타>와 붙어 있는 <잠실근린공원>을 찾아 가서
그곳에 세워진 "새내 내력비"와 "부군당지 표지석"을 찾아 보고,
<잠실종합운동장> 건너편에 있는 <아시아공원>으로 이동하여 "부리도 표지석"을 탐방합니다.
['잠실근린공원']
2021년 4월 27일 (화) 흐림
<삼전역 1번출구>에서 가까운 "잠실근린공원"을 찾아 갔습니다.
이 공원 주변에는 <잠실본동 주민센타>와 <서울잠전초등학교>가 붙어 있었습니다.
['새내 내력비']
<잠실근린공원>에는 "새내 내력비"가 세워져 있더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하철2호선>이 통과하는 <잠실종합운장역>과 <잠실역> 사이에는
"신천역 新川驛"이 있었는데, 2017년 1월에 그러니까 불과 4년 전에 역명을 <신천역>에서
"잠실새내역"으로 바꾸었답니다.
역명을 바꿔 달라는 주민들의 요구 중에는 <신촌역>과 발음이 비슷하다라던가 뭐 큰 의미없는
사항이었지만, 비싼 강남지역의 이미지를 살리고 집값 땅값에서 <강북의 신촌>과 차별화를 위한
것은 아닌지 논란이 많았죠. 여하튼 이제는 <지하철2호선>이 통과하는 <송파구>에는
<잠실종합운장역>→<잠실새내역>→<잠실역>→<잠실나루역>으로 "잠실"이라는 명칭을 모두
붙이게 되었지요. "잠실 蠶室"이라는 그 의미가 "뽕나무밭"이라는 것인데도....
이곳에 건립된 내력비에는 옛날 "새내 新川"이라는 샛강이 이 지역에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잠시후 <부리도 내력비>에 가서 종합적으로 알아 보겠습니다.
['부군당지 표지석']
<잠실근린공원>에는 또한 "부군당 표지석"이 설치되 있는데
<남한산성> 축성의 일등 공신이었던 "이회"와 그의 부인 "송씨 宋氏"에 관한 사연이 담겨 있으며
부인 <송씨>가 남편의 뒤를 따라 이 근처 <새내>에서 투신자살한 그 절개를 기리기 위해
<부군당 府君堂>을 지어 추모했던 곳이라고 하는데...
이들에 대한 공식적 추모 사당이 <남한산성>의 <수어장대>옆에 건립되어 있죠.
<이회>와 그의 부인에 대한 사연은 위 안내문을 참고 하면 되겠고
<남한산성 수어장대> 옆에 있는 "청량당 淸凉堂"을 참고로 보여 드립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옆에 있는 '청량당']
간신들에 의해 희생된 충직한 관리들이 어디 한두명이겠습니까만 <이회>와 같이 억울한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몇해 전 [인조}때에 <남한산성> 축성 책임자로 <벽암대사>와 <이회>가
지명되고, <벽암대사>는 계획보다 빨리 성을 쌓고 공사 비용도 남아 반납까지 했다죠?
그런데 <이회>는 공사에 차질을 빚으며 늦어지고, 공사비도 모자라 추가 비용을 요구했답니다.
이에 간신들이 <이회>를 무능과 횡령등으로 모함하여 사형시켜버렸지요.
그런데 나중 알고보니 <이회>는 성을 꼼꼼히 쌓느라 시간이 더 걸렸고, 모자르는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부인 <성씨>까지 팔도를 돌며 쌀을 모아 일꾼들의 식사를 대접하며 남편을 도왔다는게 밝혀졌답니다.
부인이 남편을 돕기 위해 그렇게 했는데도 남편이 처형당한 것을 알고 비통한 마음에 <새내>에 몸을
던졌다고..그리하여 그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을 지었다는 것인데, '사후약방문'의 대명사라
할수있겠죠. 무고한 사람을 죽인 그 간신들을 사형 시켰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ㅠ
['서거정 선생'의 '삼전도 가는 길에'라는 詩]
"서거정 선생"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 겸 정치인이셨죠?
"徐居正 선생"은 우리 역사 속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대단한 관료이셨습니다.
"徐居正 선생"은 45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시며
6조판서를 모두 지낸 엄청난 인물입니다.
특히 권력의 꽃이라는 대제학을 23년간 지냈으며 숱한 시를 남겼죠.
하지만 권력이 바뀔 때마다 권력에 빌붙어 따라 다녀 '해바라기' 정치인의 대명사이기도 하죠.
<단종>을 죽이고 권력찬탈을 한 쿠데타 주역의 <수양대군> 편에 붙어 <계유정란>의 공신이 되며...
['잠실종합운동장']
"상전벽해 桑田碧海"
<동국여지비고>와 <대동지지>에는 "이 지역이 여주, 충주로 가는 길목으로 뽕나무밭이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조선 초기부터 양잠을 장려하여 "잠실 蠶室"이 된거죠.
그런 뽕나무밭에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고, <105층 롯데월드>와 우후죽순 같은 아파트들이
즐비한 도시로 완전 탈바꿈 했으니 그야말로 <桑田碧海>라는 사자성어의 원산지가 아닌가요.
[치욕의 '삼전도비']
1960년대의 "삼전도비 三田渡碑"입니다.
누가 찍은 사진인지 모르지만 <삼전도비>와 <남한산성>을 절묘한 각도로 기록을 남겨서 퍼온
사진입니다. <삼전도비>는 정식 이름이 아니고 <대청황제공덕비>이지만 항복을 만천하에
알리는 <항복비>이죠.
강남지역이 개발되기 전..그러니까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을 때의 <잠실 지역>이 펼쳐집니다.
<잠실지역>이 어떻게 <桑田碧海>라는 사자성어의 진원지인지도 알려 주는 사진입니다.
1637년 1월 30일 눈 내린 <삼전도>에 칼바람이 휘몰아 치던 날에 치욕의 <남한산성>을 뒤에
두고 <인조>가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하던 <삼전도>가 펼쳐 집니다.
오욕과 수난의 <삼전도비>는 홍수로 땅 속에 뭍히기도 했고, 민족 자긍심에 불타는 사람들에
의해 홰손되기도 했는데, 비극의 역사도 역사라고 현재는 <석촌호수 서호>에 지붕도 있는
누각에 안치되 있는데 <105층 롯데월드>와 우후죽순 같은 아파트들의 호위를 받으며 있습니다.
다음 사진입니다.
[현재 "롯데월드' 앞 '석촌호수 서호'에 있는 '삼전도비']
'몽고어' '만주어' '한자' 세개로 세겨진 '삼전도비'의 비문을 번역하여 알려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리석은 조선 왕은, 위대한 청국 황제에게 반항했다.
청국 황제는 어리석은 조선 왕을 타이르고, 자신의 대죄를 납득시켰다.
양심에 눈을 뜬 조선 왕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맹성하고,
위대한 청국 황제의 신하가 되는 것을 맹세했다.
우리 조선은 이 청국 황제의 공덕을 영원히 잊지 않고,
또 청국에 반항한 어리석은 죄를 반성하기 위해서,
이 석비를 세우기로 한다.
<파란문>이 [인조]를 '최악의 왕'이라고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이유 중에 하나 입니다.
['종합운동장억 2번출입구']
<잠실종합운동장> 정문 맞은편에는 <잠실운동장역 2번 출입구>가 있고
그 옆에는 "아시아공원"이 있습니다.
이 공원은 <1986년 아시안게임>이 열릴 때 조성된 공원이랍니다.
['아시아공원']
<아시아공원>과 <정신여중고> 사이에 "부리도 浮里島"라는 안내석이 있습니다.
이 지역이 옛날 "부리도 浮里島"라는 섬이었다는거죠.
['부리도 표지석']
[안내문]
"부리도 浮里島" <뜰 浮>에 <마을 里>, <섬 島>이니 한마디로 "떠내려 온 마을"이라는데
저는 여름철에 비만 오면 잠기는 섬이어서 "물 위에 떠 있는 마을"이란게 더 설덕력이 있습니다.
<잠실>도 <뽕나무 밭>에서 온 지명이라고 하지만,
<비만 내리면 잠기는 마을>에서 온 지명이기도 하답니다.
<부리도>를 추억하는 주민들이 표지석을 세웠다고 하는데 읽기 어렵더라도 안내문을 꼭 읽어
보시기 바람니다. 제가 모르고 지나온 세월을 되돌려 주는군요.
제가 여러 자료를 검토하여 요약하면...
"잠실섬 蠶室島"은 <중종 15년> 그러니까 1520년 여름까지는
<한강> 건너편 <자양동>에 붙어 있던 <자양반도> 였답니다.
그런데 그해 여름 엄청난 홍수가 발생하여 샛강이 생기며 <자양반도>는 <잠실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잠실섬> 아랫쪽엔 <부리도>라는 조그마한 섬이 만들어 졌다는군요.
그리고 모두 잘 아시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엔 이 지역 지형이 완전 바꼈답니다.
그후 홍수를 막기 위한 제방공사 등을 하다가 1980년대 초 <한강의 기적>이라는 소리를 듣는
한강개발로 현재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음 역사적 사진들을 보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대동여지도']
['조선총독부' 발행 당시 지도]
['1920년대 한강의 섬']
일제강점기 시대의 이 지도들을 보면 <중종 15년> 그러니까 1520년 대홍수가 있었던
여름철 이전까지는 <잠실도>는 <자양반도>에 붙어 있었고, 그때 <샛강>이 생기며 <잠실도>라는 섬이
되었다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 <한강>의 본류와 지류가 뒤바뀌며 지형까지 완전 바뀌고
현재는 <한강의 본류>였던 <송파강>이 <석촌호수>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석촌호수>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전엔 <한강의 본류>가 흐르던 <송파강>이었다는
것을 알수있으며, <잠실도>는 상당부분 <한강>에 침식되었다는 것도 알수 있습니다.
[1960년대 잠실지역 항공사진]
이 사진이 현재의 <석촌호수>가 옛날 <한강의 본류>인 <송파강>이였다는 것을 확실히 알수 있게 해
주는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자양반도>에 있던 <新川>이 <한강의 본류>가 되어 엄청 넓어
졌다는 것을 알수 있으며 <한강의 본류>가 흐르던 <송파강>이 현재 <석촌호수>로 그 흔적만 남아
있다는 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한강개발>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확연히 느낄수 있지요?
그리고...현재는...
['카카오맵']
현재는 이런 모습으로 완전 "상전벽해 桑田碧海"가 되었습니다.
바로 위 <1960년대 항공사진>과 현재의 <카카오맵>...그리고 <조선총독부 지도>를 비교 해 보면
<잠실도>와 <부리도>, 그리고 현재의 <석촌호수>와 <송파강>의 옛 모습을 상상해 볼수 있습니다.
도한 <뚝섬지역>인 <저자도>까지 비교해 볼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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