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봉산-적갑산-운길산 - 수종사  연계 산행  
3월22일토요일 오전6시30분에 집을 나서 순두부로 아침을 해결하고
일산 백석역에서 7시9분 전철을 타고 옥수역에 8시쯤 내렸습니다

3호선 옥수역
오랜 기간동안 서울에서 살았지만 옥수역에 내려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지하역이 아니기에 자연광으로 비치는 햇살과 한강변의 공기가 새삼 싱그럽게 느껴졌습니다.
오늘도 앞에 가는 山友와 '단둘이 홀로' 제법 긴 코스인 예봉산-적갑산-운길산을 다녀 오려합니다.

중앙선 옥수역
대부분의 열차가 서울역에서 출발하는데 서울의 동쪽이나 동남쪽을 갈 때는
서울역이 아닌 '용산역'에서 출발을 하죠?
그 방향으로 갈때 청량리역에서 타본적은 제법있어도, 불행이도 '용산역'에서부터
기차를 타본적이 단한번도 없었습니다.
"전철 중앙선 옥수역" 이름도 매우 생소했습니다만 처음으로 한강 북로를 따라 여행하는 기분을
만끽하기위해 예봉산=운길산 산행도 산행이지만 이 중앙선 전철을 타고 한강변을 달리는
감상을 꼭 산행기에 올리고 싶었습니다.
         
수도권 전철이 '팔당역'까지 얼마전 개통이 되고 나서부터 
오늘 가려고하는 예봉산-운길산 등산객이 몇배가 늘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런 상황을 알고 그런 분들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떠나게 된것입니다.
최신형 전동차가 다가와 벌써부터 설레는 마음을 열어 주워 담으려 합니다

달리는 전철 안에서 - 구리 부근
한강변을 중앙선을 타고 가며 풍광을 많이 찍을려고 했는데, 찍은 사진들이 생각많큼
나오지 않아 고르고 골라 한장을 올립니다.
한강이 흐르는 강변 - 낭만적입니다
토요일 중앙선은 용산에서 덕소역까지 10분에 한대가 운행하고 있었으며
용산에서 팔당역까지는 30분에 한대가 운행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전철 3대에 한대가 팔당역까지 운행 함으로, 우리는 덕소역에서 내려 기다리다가
팔당가는 전철로 다시 갈아 탓습니다. 덕소에서 팔당역까지는 두정거장으로 5분정도...

팔당역
새로 지어진 팔당역은 규모도 크고 시설도 최신식이었습니다
뒤로 오늘 오를 '예봉산'이 보입니다.
            
        팔당역 내부                                              화장실
모든 시설이 새로 지어서인지 깨끗했습니다. 특히 화장실은 호텔 수준이었습니다.
먼 곳에서 오는 산객들은 여기서 기초적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고 출발하기에 아주 좋았습니다


팔당역
팔당역은 주차장도 넓어 산꾼들의 약속 장소로도 좋은듯합니다.
뒤로 오른쪽이 예빈산(견우,직녀봉)이 보이며, 좌측 조금 보이는 능선이 예봉산입니다.


팔당역앞 - 자동차 도로
오전 9시 20분경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팔당역앞에서 동쪽, 즉 양수리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갑니다.


예봉산 등산로입구
팔당역에서 조금 올라 오면 '팔당2리' 굴다리가 나오며, 
이 굴다리를 지나 큰 길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항상 등산로를 처음 찾아 들어가는 문제만 해결하면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이 사진을 봤는데도 못찾아 가는 사람은 앞으로 등산 다니지 마세요~~
뒤로 예봉산이 보입니다.


첫번째 만나는 삼거리
굴다리에서 5분정도 올라 오면 이리 갈까 저리 갈까~하는 삼거리가 나옵니다
저 앞에 사람들 모여 있는 곳 - 초행길은 이런 삼거리가 문제이지요.


등산로 안내판
이리 갈까 저리 갈까 고민 할 필요 없습니다. 요즘 안내판 설치가 잘 되있으니까요

             
              이정표
오른쪽은 예빈봉이나 율리봉을 거쳐 예봉산을 가는 길이니 초행이신 분들은 대부분
왼족의 예봉산 직코스를 선택해서 가더라구요.


이정표 왼쪽의 예봉산 직코스
예봉산은 전철 도착시간에 왕창 붐볐다가 30분 동안은 조용하고~ 이런 상황 반복~ㅎㅎ
당연하겠지요?
우리와 같은 전철을 탓던 사람들 한무더기는  모두 먼저 올라 갔습니다.

조금 올랐더니 같은 전철을 탓던 사람들을 금방 만났습니다.
벌써 휴식을 취하더군요. 토요일인데도 산객들이 많았습니다


오르막 시작
이제부터 숨쉴틈 없이 오르고 올라야 합니다

생각보다 경사도가 높았습니다
특히 쉬어가는 구간이 하나도 없이 오르막만 존재 했습니다.
예봉산 정상까지 이렇게 오르막이었습니다.

조금씩 오를수록
나뭇가지 사이로 한강이 조금씩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한강과 검단산
이제 제법 완벽한 제모습을 내보이기 시작하는 주변 풍광들.
이런 맛에 오르고 또 오르지요?
한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의 검단산이 예봉산과 키를 맞추어 갑니다.
검단산은 잘 아시다시피 매우 유명하며 
주로 강남구, 강동구, 하남시 사람들이 애용하는 등산 코스입니다.


검단산 우측의 하남시 전경 - 멀리 강동구

계속 오르막
예봉산 정상까지는 산행기를 특별히 쓸만한게 없습니다.
오로지 오르고 또 오르고..그리곤 한강구경과 예봉산 검단산의 도토리 키재기를 감상 하는 일과
조금후 등장하게 될 두물머리의 풍광을 감상하는 일..그게 전부입니다


이 날은 어느 산악회의 늦은 시산제를 하느려는 팀이 한팀 있었습니다
요즈음의 산악회에는 남자들 보다 여자가 더 많은 듯합니다.
세상의 모습은 자꾸만 변해 갑니다. 옛날엔 여자가 산에 다니는건..좀 그랬지요?


두물머리
동남쪽 방향으로 양수리(두물머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예봉산 정상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예봉산 정상 바로 밑에서...

예봉산 정상
드디어 정상에 다가 왔습니다.
예봉산 정상엔 많은 산꾼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 였습니다.
모든 동서남북의 조망이 가능한 곳이기도 하지만 역시 정상이다 보니
동그란 좁은 면적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증명사진은 산에 왔을때 찍는 것,  동서남북의 경치를  카메라에 담아
이 산행기를 읽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감회를 느끼도록 노력은 하는데...

           
      이정표                                                 다산 정약용선생의 詩팻말
팔당역에서 여기까지 1시간반 정도 걸렸습니다.
아마도 오르막을 오래 오르는 일은 앞으로 없을듯 합니다.
그러나 현재 11시 정도 됬지만 앞으로 약 다섯시간정도를 더 가야한다니
오르막은 차지하고 그 지루함과의 싸움을 해야 할듯하군요.


예봉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바라 본 양수리 -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오른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
금강산에서 흘러 흘러 오는 북한강과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검용소에서 발원하여 흘러 흘러 오는 남한강이
다시 바다로 손잡고 나가기 위해 모이는 곳 -  두물머리


예봉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바라 본 예빈산과 팔당호

예봉산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바라 본 하남시

예봉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바라 본 운길산
오늘 부지런히 저 운길산을 가야합니다


예봉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바라 본 적갑산 방향
적갑산을 돌아 운길산, 그리고 수종사까지 식사시간 포함해서 앞으로 약 5시간을 가야합니다.


예봉산과 적갑산 사이의 갈대밭

갈대밭에서 바라본 예봉산 - 정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올라와 장사를 하는 분들이 몇분 있었는데 대단한 집념입니다


갈대밭에서 바라본 검단산,고추봉, 용마산
이 갈대밭에서 산행 시작후 처음로 휴식을 취하며 가지고 온 과일도 먹었습니다

          
           철문봉
갈대밭에서 서쪽 능선을 타고 조금 가니 "철문봉"이 나왔습니다
이제부터 역사 속의 인물 중에서 제가 가장 닮고 싶었던 인물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퇴계 이황선생님이시라는건 
저의 글들을 읽으신 분들은 모두 아실겁니다.
제가 가장 닮고 싶고 따라 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분 - 茶山 정약용선생
이제 그 꿈을 접고 그분의 발톱사이의 때 많큼도 닮지도 못하고 가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제가 많이 아는 분이시니 산행을 하며 그분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고 싶습니다.
이곳 喆文峰은 정약전 둘째형, 정약종 셋째형, 그리고 정약용 삼형제가 청운의 꿈을 안고
젊은 시절 공부를 할때 건강관리를 위해 오르곤 했던 봉우리라 
'학문의 도(文)를 밝혔다(喆)'고 喆文峰이라 한답니다.
정약용 선생이 살던 집은 저 아래 팔당호 옆이라 여기 철문봉까지 오르 내리려면
아무리 빨리 다닌다해도 5시간은 걸렸을 겁니다만 건강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진리를
일찍이 깨우쳤고 나중의 大實學者 다웁게 말로만 떠벌리는게 아니라 실천으로 이미 등산을
생활화 하셨으니 그런 큰 업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산 정약용선생도 당시로서는 대단한 장수를 하셨죠. 칠십오세까지 사셨으니.....
우리 역사 속에서 높은 관직에 오르고 좋은 역사적 평가를 받으시는 분들은 거의 모두 등산을 하셨습니다
등산을 않하면 출세가 의미 없는거죠? 밑빠진 독에 물 부어 봤자..건강은 스스로 지켜야 하는거죠
정조대왕의 가정교사였던 채제공 선생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다산 정약용선생인데
당시 여러 직위를 맡으시고 영의정까지 하신 번암 채제공 선생의 관악산 산행기인 遊冠岳山記는 무지 무지 유명합니다
당시 예순일곱살에 관악산을 종주 했기에 유명한것입니다.
여든넷에 관악산 종주 하신분이 숙종 때에 서인의 수괴 송시열과 쌍벽을 이루던  남인의 총수 허목 선생이죠.
채제공 선생이 존경한 분이 바로 허목 선생이고 허목 선생이 존경한 분이 이황선생이며 세종때의 방촌 황희 선생이죠
이 분들 모두 등산을 엄청나게 좋아 해서 황희 선생이 팔순까지 사시고, 퇴계 이황선생이 칠순, 미수 허목 선생이 여든일곱,
번암 채제공선생이 팔순까지 사셨으니 당시로는 대단한 장수이지요
앞으로 다음 산행기 쓸때 소개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약용 선생은 채제공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철문봉에서 적갑산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
저를 자주 만나는 분들은 저의 주장을 귀가 아플 정도로 많이 듣고 상당 부분 공감하는 게 있는데...
'영종도 인천 국제공항'의 이름을 '정약용 국제 공항'으로 고쳐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 최고의 만물박사 -미술, 음악, 건축, 의학, 과학,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르네상스시대 당시 세계 최고라 할수 있는 사람 - 레오나르드 다빈치 -
이 사람에 대해선 더이상 설명 할 필요가 없지요? 
한국의 정약용선생이 이테리의 레오나르드 다빈치와 견줄수 있는 세계 유일의 인물이라고 주장 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테리의 수도인 로마의 국제공항 이름이 '레오나르드 다빈치 공항'이기 때문에
우리도 편협한 지역 지명으로 공항 이름을 지을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붙여 '정약용 국제공항'이나 '세종 국제공항'등으로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뉴욕의 국제 공항은 '존 에프 케네디 공항',  파리는 '드골 공항',  런던은 '히드로 공항', 이미 말했듯이
로마는 '레오나르드 다빈치 공항'입니다. 모두 지역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동양 쪽에서나 지역 지명을 붙입니다.
'인천 국제 공항'은 사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항인데도 인천 지역적 이미지가 짙습니다.
특히 외국인들에겐....


철문봉에서 패러글라이딩 활공장 가는 길
이제부터는 조막조막한 봉우리들을 오랐다가 내렸다를 반복해야합니다.
정약용선생이 집필한 책만해도 800여권이 넘으며, 그 책 내용들이 어떤 한 분야의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미술, 문학, 철학,...범죄수사, 심리학....과학, 기계, 건축학....
모든 분야를 섭렵하셨으니 레오나르드 다빈치와 견주어 모자람이 없다는거죠
오히려 더 훌륭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패러글라이딩 황공장
TV에서만 봤지 이런 곳은 처음입니다. 남양주시의 공식 활공장이니 의미있는 자리인 모양이죠?
저는 '활강'인줄로 알았는데 패러글라이딩은 공중에서 뛰어 내리는 게 아니라 공중을 날기 때문에
'활공'으로 쓴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패러글라이딩 활공 start 장소 
밑은 낭떨어지였습니다. 에구~ 저 같은 사람은 엄두를 못내겠습니다.
멀리 다리가 하나 보이시나요? 현재 건설중인 '서울-춘천'간 민자 고속도로라고 하더군요
앞의 아파트들이 구리시 덕소쯤이며 한강 건너편이 하남시


활공장의 휴식처 - 찻집
여러가지 파는 듯..


활공장의 찻집

뒷쪽에서 본 활공장
저 앞의 사람들 서 있는 곳 바로 앞이 낭떨어지 활공장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에서 적갑산 가는 내리막 길
오르락 내리락이 계속 됩니다
여기서 부터는 등산객을 보기가 힘들어 집니다. 대부분 중간에서 하산 했기 때문입니다


적갑산 가는 길에서 본 '운길산'이 푸르른 소나무 사이로..

또 오르막....적갑산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봉우리라 해도 그다지 크지 않고 구경거리도 별루였습니다
어디가 적갑산인지 별도 표시가 없었습니다. 대략 적갑산 부근이겠지...
다시 말해 적갑산은 조그만 봉우리 정도 였기 때문입니다
          
            정일근 시인의 "갈림길"이라는 詩팻말      
           길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
           너에게로 가는 길이 나에게 있었고
           나에게로 가는 길이 너에게 있었다
           지금 가장 멀고 험한 길을 걸어
           너는 나에게로 돌아 가고 있다
           나는 너에게로 돌아 가고 있다
           이제 작별이지
           이승에서의 길은 여기까지다
           길은 가까워 질수록 멀어 지는 것이니
           멀어 질수록 가까워 지는 것이니

또 걷고 걷습니다.

거의 하산 수준으로 내려가서 다시 오르고...운길산까지 계속 됩니다

곳곳에 이정표가 있고 외길이라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정표가 있는 곳엔 유명한 詩가 하나씩 걸려 있었습니다
           
            김종해 시인의 "새는 자기 길을 안다"
       하늘에 길이 있다는 것을
             새들이 먼저 안다
             하늘에 길을 내며 날던 새는
             길을 또한 지운다
             새들이 하늘 높이 길을 내지 않는 것은
             그위에 별들이 가는 길이 있기때문이다

茶山 정약용선생의 생가와 기념관, 그리고 묘소가 양수대교 옆 팔당호로 툭 튀어 나온 
능내리 마재 마을에 제법 규모가 크게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茶山 정약용선생을 떠올리면 전남 강진의 草堂을 생각합니다.
그곳이 곧 茶山 정약용선생의 本家같은 느낌을 받습니다만, 그곳은 생각하기도 끔찍한 유배지였씁니다.
그곳에서 18년간이라는 유배 생활을 하며 외롭게 지냈는데 왜 그토록 그곳이 더 각광 받을까요?
사실은 이곳 능내리 마재 마을이 本家이며 生家이니 이곳이 더 각광 받아야 당연한데도....
전라남도와 강진군의 공무원들이 업무를 잘해서일까요?
아시다시피 그곳이 각광 받는 이유는 그곳에서 정약용이라는 실학자가 일생의 최대 업적을 남기기 때문이죠
500여권이 넘는 책을 그곳에서 집필하였고 사연도 많았기 때문일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일들은 정약용선생의 호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정약용선생의 호는 사암 (俟菴)이며,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인데  '겨울 내를 건너고 이웃이 두렵다는   의미'를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사암 (俟菴)은 정약용선생이 가장 좋아한 호였다고 합니다. 
사암은 백세이사성인이불혹(百世以俟聖人而不惑) 즉 '뒷날의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함이 없다.' 라는  
기다림의 의미가 있고, 뒷날의 성인에게도 학문적 질책을 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자신감과 떳떳함이 배어있는 가장 선생다운 호라는 것입니다
 여유당(與猶堂)은 뭔 여유있게 사색을 즐기려고 지은게 아니고, 선생의 불우했던 정치적 환경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선생은 요즘 말로 하자면 사상범이었습니다. 천주교를 접했다는 이유 하나입니다.
그 이유로 유배생활 18년...
물론 정조대왕을 정점으로 한 진보 개혁파가 정조대왕의 의문의 죽음으로
보수 수구세력인 서인 벽파들로부터 처참한 정치보복을 당한 것이지만...
與猶의 與는 머뭇거릴 '여'이며, 猶는 망서릴 '유'로 
즉 망설이기를 사방을  두려운 마음으로 살피듯이 조심하면서 살아가겠다는 뜻이랍니다
선생의 호로 茶山이 많이 쓰이는건 전남 강진의 유배지 뒷산이 조그마한 '茶山'이라는 地名이어서
茶山에 사는 정약용을 나타낼때 쓰셨는데 이것이 후세에 그냥 '호'로 자리 메김하고 말았습니다.
선생이 유배생활을 끝내고 여기 本家에 왔을 때는 "洌水" 정약용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엔 한강을 '洌水'라고 했기에 '洌水'에 사는 정약용을 나타 낼때 사용했는데
그의 자서전에는 '洌水' 정약용이 쓰다...라고 되 있습니다.
이렇듯 정약용선생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후세엔 모두 "茶山" 정약용이 되 버리고 말았습니다.

등산로 가운데를 소나무가 가로 막고 있어 부닥칠 위험이 있어 여기 소개 합니다
모자 눌러 쓰고 가다 저도 부닥칠뻔 했습니다.
여기뿐만 아니라 산행시엔 항시 조심해야하죠?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 하시라~~!!

생강나무 꽃
이 노오란 꽃이 뭔 꽃인지 몰라 동행한 山友에게 물었더니 글세~산수유인가? 하며 자신 없어 했습니다.
그래서 궁금하면 못참는 성격 아시죠? 그런데 제가 즐겨찾는 블로그가 있는데 얼핏 생각이 나 들렸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 꽃에 대해 설명을 잘 해 놨더라구요. 물론 산수유로 혼동 하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생강나무 꽃
[한국의 야생화]여기 클릭해서 자세히 알아 보셈
세상 사는데 블로그가 얼마나 도움을 주는지 모두 아시져? 모든 정보가 무료이고..이해하기 쉽고..

중간 중간 하산길이 있는데 그런 곳엔 산꾼들이 좀 있더군요
이곳은 잘 알아두면 혹시 빨리 하산해야 할때 이곳에서 '도곡리'로 내려 가면 바로 교통편을 이용

도곡리 하산길이 있는 곳.
이곳은 잘 알아 두세요

여기에 이 유명한 글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정약용선생의 생가가 있는 곳이라 정약용선생의 글이 많았습니다.
이글은 강진 유배지에서 쓴 글인데 사연이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하지요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략히 소개 해 드리겠습니다.
정약용선생의 어머니는 그 유명한 '어부사시사'를 지은 고산 윤선도의 6대손이며 윤두서의 손녀입니다.
정약용선생의 부인은 풍산 홍씨인데 이 부인이 정약용선생이 유배지에 있을때 
'자신이 시집 올때 가지고 온 다홍치마 여섯폭'을 싸서 유배지로 보냄니다. 
이 치마는 흐르는 세월 속에 낡고 색이 바래져 있었습니다.
윤씨부인이 이 치마를 보내는 이유는 가히 짐작 하시겠죠. 
지금 병들어 고통스러우나 사랑하는 마음을 담고 시집 올때와 변함없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정약용선생은 이 빛바랜 치마를 짤라 4폭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남은 한폭엔  ‘매화병제도(梅花屛題圖)' 일명 ‘매조도(梅鳥圖)’라고도 하는 그림과 글을
시집간 딸에게 보냅니다. 그 매조도(梅鳥圖)에 써여 있는 글을 한글로 풀어 썬 것이 위의 시팻말입니다.
오리지날 보여 드리죠.
 
                 
                 翩翩飛鳥 (편편비조)
                 펄펄 하늘을 나는 새들이 
                 息我庭梅 (식아정매)
                 우리 집 뜰 앞 매화 가지에서 쉬는구나 
                 有烈其芳 (유열기방)
                 꽃다운 그 향기 은은하기도 하여 
                 惠然其來 (혜연기래)
                 즐거이 재잘거리려 찾아왔나보다 
                 爰止爰棲 (원지원서)
                 이렇게 이르러 둥지를 틀고
                 樂爾家室 (낙이가실)
                 너희는 네 집안을 즐겁게 해 주어라 
                 華之旣榮 (화지기영)
                 꽃은 이미 활짝 폈으니 
                 有賁其實 (유분기실)
                 이제 토실한 열매가 많이 달리겠구나 
딸에게 보낸 이 그림과 글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 되있으며
아들에게 보낸 4장의 하피첩(霞帔帖)은 문서로는 있었으나 실물이 없었는데
제작년 4월에 KBS의 TV진품명품에서 4장중 3장을 소장하고 있는 분의 출연으로
세상에 그 진면모를 나타냈었고 저는 그때 TV를 시청하고 있었는데 감정가가
1억이 나온 것으로 기억됩니다
하피첩(霞帔帖)은 노을 霞에 치마 帔로 직역하자면 노을치마이고 의역하자면..아시죠?
아내가 시집올때 입고 왔던 다홍치마가 노을빛으로 바래진 그 치마폭에
시집간 딸에게 보내는 유배지의 정약용선생의 마음을 냉철하게 담아 보내는 아빠의 마음 --
아들에게 보낸 편지도 무지 유명하죠? 다음 산행 때 소개하죠

사거리
약수터가 있는 사거리 고개에 도달하는데
여기서도 네군데로 하산 할수 있습니다.
우리 같은 먼데서 온 산꾼들은 무조건 '수종사'까지 가야만 할것입니다


제법 험난한 산을 다시 올라야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힘이 많이 들기 시작하더군요
산행 시작한지 4시간이상이 지났습니다.

산 하나를 넘어서 이제는 '운길산'에 다가 왔나 싶으면 다시 이름도 잘 모르는 산봉우리가 있고..
넘으면 또 있고를 반복했습니다

양수리가 조금씩 보이는 걸로 보아 운길산이 가까워 오는 걸 느낄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수종사'라는 절이 '두물머리'를 감상하는 최적의 위치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르고...

오르고 나면 또 나타나고...

건너편 예봉산이 시야에 들어 오니 운길산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걸 느끼겠습니다

마지막 릿지를 하고....
능선에는 암벽이라곤 거의 찾아 볼수 없고, 이곳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운길산을 오르는 마지막 피치
               
드디어 雲吉山에 올랐습니다            다른 산 봉우리에서는 찾기 어려운 평상도 있고..
구름도 쉬어 간다고 운길산이라는 군요

운길산에서 바라 본 두물머리
날이 좀 어두워 지기 시작합니다

운길산에서 수종사로 내려가는 길에 이제서야 올라 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여기서 수종사는 지척 거리였습니다.
올라 오는 여자들에게 '날씬한 여자들이 여긴 뭐하러 와요!!'~~했더니 모두 기분 좋아 하더군요..ㅎㅎ

수종사가 모습을 드러 냅니다

수종사는 매우 웅장하고 수련하는 스님들이 매우 많은 큰 절인줄 알았는데 그렇게 큰 절은 아니더군요

두물머리 구경에는 최적지라고 알려져 있어 기대를 많이 했는데
이제까지 예봉산 - 적갑산 - 운길산을 돌아 오면서 여러 각도에서 봐서 그런지
새로운 감은 좀 떨어졌습니다

水鐘寺는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러 오대산 상원사에 갔다가 길목인 두물머리 근처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는데, 밤중에 어디선가 이상한 북소리가 들려 찾아 따라 올라 가 보니
어느 동굴에 물방울 덜어지는 소리가 쇠북치는 소리와 같이 들렸다고 해서
水鐘寺라 했다고 합니다

기와로 만든 담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해탈문

앞의 사적기 뒤로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세월의 풍상을 안고 우뚝 서 있습니다.

만든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水鐘寺의 내력을 기록한 사적기

'칼의 노래' 김훈 작가 아시죠?
저의 고등학교, 대학 4년 선배되시고 일산에서 같은 동네에 살고 있죠
그의 저서 '자전거 여행'에서 여기 수종사를 노래한것이 있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수종사 마당에서 산하는 크게 열린다.
산하는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 굽이치며 다가와 다시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흘러나간다. 
내륙의 산악과 평야를 파행으로 흘러 온 남한강과 북한강이 눈 아래서 합쳐지고, 
거기까지 강을 따라온 산맥들이 다시 여러갈래로 모이고 흩어져 하구를 향하는 대오를 갖춘다. 
어디서부터 몰려오는 것인지, 산맥들의 대오는 푸르고 강성해서 하늘 밑을 가득 출렁대는데, 
그 푸른 기세의 먼 변방으로 낮은 봉우리들을 거느리고 품어서 자애롭다."

"수종사 절 마당에서, '열수'강은 '열수'마을을 3면으로 휘감고 크게 굽이치면서 돌아나간다. 
그 강 건너편 광주시 퇴촌면 앵자산 밑에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선각자들인 이벽(1754~1786), 
권철신(1736~1801), 권일신(1751~1791), 이승훈(1756~1801), 정약종(1750~1801)이 묻혀있다. 
그들은 모두 총명하고 반듯했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의 젊은 날은 서학을 통해서 새롭게 열리는 세계와 미래의 모습으로 설레었다. 
그들은 평등과 보편의 신세계를 향해 개안했다. 그들의 청춘은 찬란하고 치열했다. 
그리고 그들의 최후는 이단과 대역을 다스리는 형장에 으깨져 죽었거나 망나니의 칼에 베어졌고 
그 사체는 거리에 버려졌다. 
강물이 합쳐져서 앞으로 향하는 그 두물머리 남쪽 깊은 산속의 작은 암자에서 
전환하려는 꿈과 전환되지 못하는 세계의 참극은 비롯되었다. 
수종사 마당에서 합쳐지는 강물을 사이에 두고 
정다산의 고향과 강 건너 퇴촌면 천진암 언저리가 한눈에 보인다. 
강물에 실려오는  전환과 신생의 꿈이 아직도 그 양쪽 유적지 사이를 흐른다. 
합치고, 굽이쳐서 기어이 바다로 나아간다." 
 

수종사의 해우소는 특이합니다
신발을 벗고 해우소로 들어 갑니다


우리는 수종사의 후문으로 들어가 정문으로 나오다 보니 
이제서야 수종사 일주문이 보입니다

중리 마을에 내려와서 콜택시를 불렀는데 빈차가 없다고해서
양수대교까지 걸어 가다 행운스럽게 택시 합승을 할수 있었습니다
1인당 2,500원씩 네명이서 만원내고 팔당역까지 갔습니다

중리에서 팔당역 가는 택시 안에서....

드디어 서울 가는 전철을 탓습니다.
저녁 7시가 넘었습니다. 
새벽 6시30분에 집을 출발해서 순두부 한그릇 사먹고 팔당역에 도착하여
산행을 시작한 시간이 오전 9시 20분경이었으니 아홉시간반 정도 걸렸습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점심 먹는 시간도 한시간 정도 걸렸지만, 중리에 내려와서 차 기다리는 시간과
팔당역까지 오는데 차가 막혀 많이 걸려 예상보다 두시간반 정도 더 걸렸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저희들이 걸린 시간 정도는 각오 하고 가야 할 코스인듯합니다

팔당역에서 붉은 점선이 걸은 코스이며, 중리에서 초록색 점선이 택시를 탄 코스
어~휴~
쓰기도 힘들었지만 읽느라고 고생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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