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요산 역사 속으로....
5월10일(토)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우리나라 불교의 巨聖 원효스님의 숨결이 깃든
동두천 "逍遙山"을 찾아 나섰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 특집 산행을 하려고...ㅎ
동두천역
소요산 역까지 전철이 연결되어 소요산 가기가 무척 쉬워졌으며
그로인해 산객들의 수가 몇배 늘었다고 합니다
중앙선 팔당역이 신설되어 예봉산-적갑산-운길산-수종사가
새로운 등산 코스로 각광 받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전철의 운행 간격이 40분 이상이라 시간표를 잘 맞추어야 하며,
시간을 놓치면 2~3분 거리 때문에 오랜 시간을 동두천역에서 기다려야하오니
전철 시간표를 인터넷을 이용하여 확인 하시고 출발하시기 바람니다
소요산역
40여분 이상의 간격을 두고 전철이 도착하기에, 도착하는 열차의 승객들은 한거번에
왕창 쏟아져 나오고.........또 그런 간격으로 산객들이 소요산으로 들어 갑니다
소요산역
40여분의 간격으로 �아져 나오는 산객들로 잠시 동안 소요산역은 북적댑니다
편의 시설은 화장실을 비롯해 초만원을 이루더군요
화장실을 이용하는데 줄을 오랜동안 섰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됫지만 화장실은
소요산 자재암 일주문까지 여러군데에 깨끗한 시설로 줄을 서 있으니 복잡한 소요산역에서
줄을 서 기다릴 필요는 없었으니 참고 하시기 바람니다
소요산역앞 횡단보도
앞의 수퍼옆 노랑 현수막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소요산을 감으로 휩쓸려 가도 무방할듯합니다
골목을 따라 조금 가면 견본 하우스가 있는 이런 양갈래길이 나오는데....
우측으로 갑니다
좌측은 소요산 산림욕장 입구입니다
(입장료 아까우신 분들은 여기로...하지만 자재암 구경은 못합니다)
소요산 자재암 입구를 알리는 바위 이정표와 잘 포장된 길이 나옵니다
이 길을 따라 약 30여분 트랙킹을 해야 자재암을 지나 등산코스로 들어 설수 있으니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워밍업을 하며 걷습니다
소방서, 자유수호평화박물관 앞
소요산역에서 말씀드렸다시피 화장실은 곳곳에 설치되있으니 복잡한 소요산역은
피하셔도 무방합니다. 또한 집이나 가게에서 물을 미리 준비 할 필요도 없더군요.
곳곳에 물을 준비 할수 있는 급수대가 있었습니다
소요산 관리 사무실 앞
저는 오늘 우리나라 불교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을 비롯해 불교의 종주국인 인도에 까지
佛法을 전파하시고 聖人으로 우뚝 서신 '원효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산행 중에
이런 저런 각도에서 음미 해 보려 합니다
물론 여러 기록들을 읽고 역사적 기록이나 현대 학자들의 저서등을 참고 하여 읖조리지만
나름대로 주관적 의견이나 생각이 많이 있으므로 재미삼아 그냥 읽어 보시기 바람니다
소요산 등산 안내도가 큼직하게 길 가운데에서 안내하며,
안내도 바로 뒷쪽으로 "요석궁터"가 있었다는 안내와 함께 그 자리에 공원을 만들어 놨다는
안내판을 만날수 있습니다
요석궁터
오늘 소요산을 거닐며 가장 많이 나올 인물이 원효와 요석공주(瑤石公主)가
되리라는 것은 벌써 짐작 가시죠? ㅎㅎ
그렇습니다. 인류 역사상 흔치 않은 스님과 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오늘 산행 내내
소요산 기슭을 수놓을 것입니다
소요산은 어떤 거창한 의미가 있는게 아니고 단순하게
"소요[逍遙] : [명사]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산에서 소요[逍遙]한 사람들중에 유명한 선인들은
화담 서경덕, 봉래 양사언, 매월당 김시습이 있으며 소요산의 절경에 취해
자주 소요하였다는 기록들이 있듯이, 병풍을 펼쳐 놓은 듯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제가 올라 본 결과 그렇게 만만하게 소요할만한 산은 아닌듯합니다
매표소
어른 2,000원.........좀 과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오로지 자재암 문화재 관람료라 합니다.
조금 있다 알게 되겠지만 '자재암'이라는 절간은 그간에 새로 지은 볼품없는 초라한
절간같지 않은 절이었습니다. 알려진 명성에 비하면 정말 초라했습니다.
그래서 역앞 골목 음식점 종업원들이 입구에서 입장료 내지 않고 가는 코스를 알려 주며
하산후에 자기 집을 들리라고 영업행위도 했습니다만, 저는 초행길이라 입장료를 내고
대다수가 이용하는 길을 갈수밖에 없으므로 다음부터는 "소요산삼림욕장입구' 쪽으로
이용 할것입니다. 앞에 사진으로 소개해 드렸죠?
트랙킹을 제법 합니다..약30여분
산을 다니다 보면 절간을 만나고, 만나는 절간의 거의 대부분은 원효와 의상이 開山했다고
알리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분들 원효와 의상스님은 스님이 아니라 절간을 지어러 다니는
건축가들이라고 해야 할 정도 아닌가요?.
직접 짓기도 했겠지만 "해동국의 석가"라는 칭호를 들었으니
절간을 짓는 자들이 너도 나도 할것없이 원효와 의상을 팔아 먹었을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소요산자재암 일주문
대한불교조계종 "소요산 자재암"
그 밑에 "京畿小金剛"이라는 안내판이 보이시나요?
소요산은 경기도의 작은 금강산이라 칭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하는 얘기겠죠
글쎄요...저는 그렇게까지는 아니라 여겨 집니다만, 아름다운 곳은 틀림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절간은 이름뒤에 절寺자를 붙이는데 여기는 自在庵이라 한것에 의문이
가시는 분은 아마 저와 같이 탐구열이 있는 분이시죠..ㅎㅎ
왜? 自在寺라고 하지 않고 自在庵이라 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寺자가 붙는 절간은 종교활동을 하는 곳이고 이렇게 庵자가 붙은 곳은 수련을 목적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원효스님은 수련을 하였지 종교활동을 한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곳 자재암은 지금은 종교활동 뿐만 아니라 입장료까지 징수하고 있습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원효스님이 수련했다는 원효굴이 규모가 상당하게 나타납니다
제가 생각 할때는 수련 할때 굴속은 오히려 수련에 도움이 되지 않을 듯 합니다
습도도 높으며, 보기엔 그럴듯하지만 각종 벌레들이 서식하기 때문에 건강에 해로울 듯 합니다
소요산을 올라 보니 수련하기 좋은 장소가 한두 곳이 아니더군요..물론 제 관점에서..ㅎ
원효굴 오른쪽으로 "俗離橋"가 나옵니다
저는 불교신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
단지 한때 종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나름대로 불교와 기독교를 공부하고
분석해 보기도 했습니다. 대학시절 공부한답시고 덕유산 용추사에 들어가 7개월정도 있으며
불교에 대해 아주 쬐끔 들은바 있으며, 기독교는 약10년정도 교회를 다닌적이 있습니다
종교는 종교로 믿어야하는데, 종교의 본질을 파헤치려했기에 종교적인 인간이 되지 못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물건너 불보듯 이렇게 비판적 시각으로 살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俗離橋"를 건널땐 世俗의 번뇌와 근심 걱정을 완전히 이별하고싶었습니다.
무지 무지하게 이기주의적이죠? ㅎ
"俗離橋"를 지나면 삼거리 이정표 - 등산코스 상세 안내도가 환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서 선택해야 합니다 왼쪽으로 갈려는지..오른 쪽으로 갈려는지...
소요산 등산코스는 U자 모양의 말발굽 모양으로 생겨서
어느쪽으로 가던 이곳으로 다시 내려옵니다.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왼쪽 코스를 따라 자재암 - 하백운대 - 중백운대 - 상백운대 -
나한대 - 의상대 - 공주봉을 거쳐 이곳으로 오기로 하고 산행을 시작합니다
왼쪽 계단으로 오릅니다. 그리 오래 오르지 않습니다
길지 않은 계단을 오르면 "自在庵"이 그 자태를 내 보입니다.
규모가 의외로 작은데 놀랍니다.
그리고 건축물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근간에 지었다는 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앞에 보이는 건물이 거의 전부입니다
원래 寺가 아니고 庵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수 있습니다
좌측 건물이 원효스님이 기거했던 초막 자리였다하며, 오른쪽이 대웅전 같지 않은 대웅전
건물은 달랑 윗 사진의 두체와 좌우에 최근에 지은 듯한 부속 건물 두체가 더 있었을 뿐이며
규모가 너무 작았습니다. 그래서 축소 사진으로 올림니다
대웅전만 확대해서 다시 보여드림니다.
초파일이 모래이기에 법회가 열리고 있었으며, 울려 퍼지는 목탁 소리는 스피커를 타고
산행하는 소요산 골자기에 내내 울려 퍼졌습니다.
소요산 등산 능선은 말발굽처럼 생겨 한바퀴 뺑 돌기에 어느 곳에서나 목탁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대웅전 뒤에 "三聖閣"이라는 조그만 건물이 하나 더 있어 올라 가 봤습니다.
三聖은 七星, 山神, 獨星을 가리키는 말이죠?
七星은 도교의 북두칠성이 불교화한 것으로 壽命長生 한다는 별이고,
山神은 불교와 관련없는 우리나라 민족 고유의 산악신앙의 토속신으로 호랑이와
더불어 나타나 만사형통을 주관하는 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獨星은 스승 없이 혼자 깨달은 聖子를 말하지요.
이 三聖은 모두 불교 밖에서 수용한 신이기 때문에 건물은 전(殿)이라 하지않고
각(閣)이라 하는데 여기엔 그런 설명이 없어서 제가 계룡산 갑사에 있는
삼성각의 설명서를 참고하여 여기 알려 드림니다.
삼성각 현판과 내부
한두평 될듯한 좁은 곳에서 공양을 하고 절을 하며 소원을 비는 분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三聖이 누군지 뭐하는 神인지 아는지 모르는지..그저 자기 잘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고 있는 듯했습니다만...종교란 뭐 그런거니
삼성각에서 내려다 본 自在庵전경과 나한전 동굴 밖의 암벽
나한전은 아래 사진을 보시고 위에서 내려다 본 사진을 보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나한전
컴퓨러에는 나한전의 "나"자가 한문으로 없으니 사진의 한문을 참고하세요
참고하고 뭐고 할것도 없이 "나한"이라는 말의 뜻은 제가 여러번 저의 산행기에서
언급한바 있습니다. 석가모니의 16 제자들을 이르는 말이며, 인도 옛말(티벳트語)를 중국어로
音譯한것이라고 말한적 있습니다.
이 곳 '나한전'은 석모니의 16제자와 부처를 모신 殿이며, 바로 우측 옆에
원효약수가 있습니다
동굴 속의 나한전 내부 모습
동굴 속에 수많은 촛불로 공기가 별루이고...습기
석가 제자들이 좀 괴로울듯
나한전을 끝으로 自在庵을 모두 둘러 보고 본격적으로 登山을 시작합니다
나한전 바로 왼쪽 옆으로 등산로는 곧 엎어질듯 날카로운 각도를 세우며
체력에 자신있는 분들만 오르라고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禮佛을 드리러 왔거나 관광차 오신 분들은 여기까지가 모든 여정입니다
당찬 마음을 가지고 올라야합니다
경사도는 평균 60~70도 정도 될 정도로 급경사이며 '하백운대'까지 계속 되며,
이 구간이 오늘 등산 코스 중에 가장 힘든 코스가 되겠습니다
뒤따라 오시는 분들을 봅니다.
급경사가 실감 나시나요?
숨가쁘게 오르면 첫번째 휴식을 취할수 있는 전망대가 나오며
건너편에 오늘 등산의 하일라이트가 될 "나한대"와 소요산의 최고봉인 "의상대"가
울창한 숲을 뚫고 보입니다.
여기서 보고 정상이 가까운 줄 알았습니다만, 뒷쪽으로 다섯개의 산봉우리를
오르고 내리고 오르고를 해야 정상에 갈수 있었습니다.
소요[逍遙]하며 산행 했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란걸 느끼며
글자 그대로 登山을 합니다
장난 아닙니다.
멋 모르고 따라 올랐던 자재암 구경왔던 사람들은 중도에서 대부분 하산합니다
땀이 나고, 숨이 차기 시작합니다.
숨이 차고 땀이 나기 시작 할 무렵부터 이럴때 등산하는 신체적 기분은 점점 더 좋아 집니다.
이런 기분은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되었죠?
달리기이던 등산이던 무슨 운동이던 30여분 이상 계속하면 숨이 차고 땀이 날때쯤에
기분이 좀 좋아지고 "이제 몸이 좀 풀리기 시작하는군"이란 말을 많이 하죠?
그 이전까지는 제일 힘들고 괴롭습니다만.....
숨이 차고 땀이 날때쯤에 우리 몸속에서 "세파 엔돌핀"이란 호르몬이 분비 된다고하죠.
이 호르몬이 기분을 좋게하고 모든 근육을 부드럽게 해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운동을 하려면, 최소한 30분이상 땀이 날때까지 해야 효과가 있다는거죠
소요산 등산코스의 장점은 고비마다 휴식을 취할수 있는 전망대가 있어서
차근 차근 오르면 그렇게 괴롭지는 않겠더군요...점점 소요[逍遙]의 의미를
터득해 갑니다.
서너번의 전망 휴게터를 지나야 '하백운대'에 오를수 있습니다
'하백운대'까지가 가장 경사가 심합니다
소요산도 肉山에 속한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정상봉우리들과 칼바위 능선을 제외하고는 흙이라 숲이 우거져 바같 세상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자재암이 있는 계곡을 뒤돌아 보며...오르고 또 오름니다
소요산은 화강암, 퇴적암, 편무암등 다양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듯한 산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산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 여기는 봉우리마다
암석의 종류가 다른듯했습니다. 저도 옛날에 모 광업회사 해외자원개발실에 근무한적이 있어
지질에 대해 쬐끔 줏어 들은 초보적인 지식은 있습니다. ㅎㅎ
하백운대 정상이 보입니다
소요산 전철역에서 여기까지 이곳 저곳 자재암들을 구경하며 올라 1시간30분 정도
걸린듯합니다.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고 저는 말합니다. 제가 등산을 홀로 하는 이유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산행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악회나 동반자가 있으면 아무래도 단체 생활에 동조 해야하기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사진도 찍어야하고, 내력이나 사연도 자세히 알아 봐야하기에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그리고 쉬고 싶을 때 쉬고, 마시고 싶을 때 퍼질러 앉아 세월아 네월아 할수 있기때문입니다.
대자연을 감상도하고, 세상살이 스트레스도 풀며, 소리도 지르고, 잠도 자고.....
이정표를 스테인레스로 만들어 놓은 것이 독특했습니다
'하백운대 정상'
왜 백운대라 했는지는 조사하지 못했습니다만, 여느 산이나 같이 하얀 구름이 걸려
쉬어 가고, 또한 그 雲海를 위에서 내려다 보며 감상도 하는 그런 곳이라 이름 했겠죠
여기에도 막걸리를 올려 판매하시는 분이 있더군요. 대단한 생존노력입니다
'하백운대'를 내려 '중백운대'로 향합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본듯한데 이곳 쯤에 風穴이 있다고 하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여름엔 시원한 바람이 나오고 겨울엔 상대적으로 따뜻한 바람이 나온다고 하던데...
그리고 개발 예정이라는 이야기까지 기억 납니다만, 찾을 수가 없었고
다른 분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아시는 분들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제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본의 아니게 되버렸습니다..ㅎㅎ
이제부터 소요산 자재암의 핵심 이야기를 산행을 하며 얘기 하렵니다
아시는 분들도 많으실겁니다만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함께 하시죠...
원효스님에 대해 알아 보고, 원효와 요석공주와의 三日夜話 얘기를 하겠습니다.
원효는 아시다시피 佛敎를 나라 통치 이념으로 佛國을 이룰려고 했던 新羅時代의
진평왕 39년(617년)에 지금의 대구옆 경산시에서 태어 났습니다
아버지는 '설 담날'이라는 분이고 벼슬을 했는데 지금으로 따지자면 6급 공무원쯤 되는
신라시대 관직 서열 17계급중에 열한번째 서열인 육두품 내마(奈麻)의 지위에 있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원효불기(元曉不羈)에는 원효에 대해 7가지 설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중백운대를 향하여...
7가지 설화중에 첫번째가 원효의 탄생에 관한 것입니다
앞으로 쓰는 글들은 물론 기록에 기초를 두고 쓰지만 저의 주관적 상상력과 개인 의견이
많이 가미되어 다소 사실과 다를수도 있으며, 과장 허무맹랑 할수도 있으니 참고적으로
그저 재미로 읽어 주시길 바라며 종교적 다툼은 별 의미가 없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원효의 아버지 설 담날과 어머니 사이에는 자식이 없어서 오랜 동안 고민하며,
자식을 얻기 위한 노력을 많이 기울이던 어느날 밤....
부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습니다.
아직 날이 새지 않은 그런 시각이었습니다.
"그럼.....내가 꿈을 꾸었단 말인가?
이건 예사 꿈이 아니야. 너무나도 생생한꿈 이렇게 멋진꿈은 처음이야."
사리부인은 자신의 마음이 설레는것을 느꼈습니다.
놀랍고도 기이한 예감이 부인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어둠속이었지만 부인의 마음은 조금도 어둡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환한 꽃밭에라도 서 있는 느낌,
아니면 귀하고 아름다운 꽃가마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느낌이었다할수있습니다.
부인은 자고있는 남편을 흔들었다.
"여보,여보."
사리부인이 흔들었지만 남편, 설담날은 끄덕도 하지 않았습니다.
부인은 다시 흔들었습니다. 그제야 남편은 겨우 눈을 떠며...
깅상도 남편 무뚝뚝한건 예나 지금이나 뭐 변하겠소만
"왜 그러오? 날이 새려면 아직 먼 것 같은데..." 설담날은 돌아 누웠습니다.
"여보, 내 말 좀 들어봐요.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응, 으응........." 설담날은 건성으로 대답했습니다.
"글쎄, 여보. 하늘의 별 중에서 큰 별 하나가 새가 날아들듯 내 몸속으로 떨어졌어요."
" 지금 뭐라고 했소?"
설담날은 홱 몸을 돌리며 큰소리로 물었습니다.
아무리 무뚝뚝하기로 세계적인 깅상도 냄편도 이런건 짱구가 획 돌아 가죠
잽싸게 이불 뒤집어 쓰고 '내 아 나~도~'하며 작업을 했겠죠?
이렇게 원효는 잉태됩니다요~
어머니가 원효(元曉)를 잉태(孕胎)하여 만삭이 되었을 때
불지촌의 북쪽 율곡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홀연 산기를 일으켜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안에 자리를 마련하고 해산하였답니다.
그래서 그 밤나무를 '사라수(沙羅樹)' 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나무의 열매가 보통과 달랐으므로 '사라밤' 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중백운대가 보입니다
하,중,상 백운대 중에서 중백운대의 경치가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두번째 이야기는 밤에 관한 이야기인데
옛날 절을 주관한 이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룻저녁에 밤 두 개씩을 끼니로 주었더니,
종은 불만을 품고 관가에 송소하였답니다. 관가에서 그 밤을 가져다가 살펴보았더니,
한 개가 바구니 하나에 가득 차는 큰 밤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관리는 도리어 종 한 사람에게 한 개씩을 주도록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나무가 있는 골짜기를 율곡(栗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 군요
여기서 제 개인적인 이야기 하나 들려 드릴까요?
제 아버님이 제 이름을 지을 때 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살아 생전에 말씀 하신적이 있습니다
꿈의 내용인즉
"깊은 산속에 밤나무가 무지하게 많았는데, 그 밤나무들이 모두 갑자기 꽃을 활짝 피우더니
그 밤꽃 사이로 네가 홀연이 나오더라~ 그래서 밤栗자에 영화榮자를 택했노라~"
ㅎㅎ 세월이 흘러 제가 원효 전기를 읽어 본 다음...
"음~~아버님이 내 이름 지을 때 원효 탄생설화를 컨닝했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일제시대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신 분이 이러한 컨닝을 했다면 의미있다고...
왜냐면 컨닝도 뭘 쬐끔이라도 알아야 컨닝하는거 아닌가요? ㅎㅎ
돌아 가신지 30년이 넘었으니 저도 아버지 없이 여기까지 홀로 왔습니다
이제와서야 아버님이 자꾸 그리워지는군요..세월 가봐야 쬐끔 철든다더니....제가 그렇습니다
훗날.....제 아들들에게도 그리운 아빠가 되어야 할텐데....
세번째 이야기
원효의 어머니가 일찍 유성(流星)이 품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원효(元曉)를 잉태하였는데
해산할 때가 되자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원효(元曉)는 천성이 남달리 총명하여 스승 없이 학문을 깨쳤다고 합니다
이런 분들을 獨聖이라 하지요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에서 중국 송나라의 찬영이 쓴 '송신라고승전 원효편'등을 참고하여
이런 설화를 썼다고 하니, 이미 원효와 의상대사는 신라의 聖人일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인도에 까지 그 명성이 자자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럴때 한국인으로 태어 난걸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중백운대의 소나무들은 수령도 오래되고 험난한 지형에서 자라고 있어 모양도
험난하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숱한 북풍한설에 시달려 북쪽에서 남쪽으로 줄기와
가지가 기울었더군요
네번째 이야기가 원효와 요석공주와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산행기의 핵심이므로 별도로 올리겠습니다
다섯번째 이야기는 원효가 요석공주와의 간통 사건으로 파계승이 되어 거리로 나가
거지, 창녀들과 어울리며 양아치 행세를 하다 깨우침을 느끼고 귀족불교에서
민중불교, 즉 대승불교의 길을 걷는 과정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
여섯번째 이야기는 원효(元曉)는 바다 龍의 권유에 따라 노상(路上)에서
조서(詔書)를 받고 ≪금강삼매경소 金剛三昧經疏≫를 소의 두 뿔 위에 놓고 저술하여
이것을 ‘각승(角乘)’이라고 불렀는데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두 가지 깨달음의 미묘한 뜻을 나타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곱번째 이야기는 원효의 입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원효(元曉)가 입적하였을 때
아들 설총(薛聰)이 유해를 부수어 진용을 빚어 분황사에 안치하였다고 하며
설총(薛聰)이 절을 하니 원효상(元曉像)이 문득 돌아보았다고도 합니다
소상은 그 이후 돌아보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상백운대를 향하여 중백운대를 하산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원효불기(元曉不羈)에 기록되 있는 네번째 이야기가
三日夜話로 유명한 원효와 요석공주와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원효는 의상대사의 9년 선배이고,
지금은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 있는 우리의 보물인 "왕오천축국전"의 저자인
혜초스님들과 한 시대 사람이었지요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순교자 이 차돈과 원광스님, 자장율사를 흠모하며
불교에 귀의합니다
상백운대를 향하여....
원효와 요석공주에 대한 저의 글은 물론 역사적 기록에 근거를 두고 씁니다만
매우 주관적 시각에서 드라마 극본같은 흥미 위주로 과장되고 비유되며 기술하오니
그저 재미로 읽어 주시기 바라며 종교적 시각으로는 제발 보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본명이 '설 서당'인 원효는 중이 되기 전에 그 유명한 신라의 화랑이었습니다.
화랑이 되려면 어느 정도의 신분도 있어야 했지만, 수능시험 400점 만점에
380점 이상은 얻어야하고, 강건한 체력과 무예도 있어야 들어 갈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요즘 우리나라 SKY대학에 사관학교를 합친 그런 곳에 들어 갈수 있는 능력이
있는 그런 자들이어야 했답니다.
이 당시 요석공주는 공주가 되기 전이었습니다.
김춘추의 둘째딸인 요석은 사실 이 때에 이미 원효인 설 서당과 눈에 불이 붙어
오가는 눈길 속에 ♥♡♥ 요런게 발산되고 있었습니다
새삼스럽게 요석궁에 들어 간게 아닙니다. 이미 짝사랑 연애질을 했던거죠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요...
로미오와 쥴리엣이 신라시대에도 왔다 갔단 말입니까.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 !!~~ 양희은이 이들을 두고 그 노래를 부르진 않았겠죠?
하지만 이들은 처녀 총각으로서는 사랑을 이루지 못합니다
요석은 원효와 같은 화랑이었던 '진 여랑'이라고 하는 다른 고위직 자녀와 정략적 결혼을 하게 됩니다.
당시 정치적 상황은 신라, 백제, 고구려가 최후의 막바지 땅따먹기 시합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석의 신랑 '진 여랑'과 원효는 백제와의 전투에 참여하고, '진 여랑'은 그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요석은 봄철 버들강아지에 물오르듯 한창 나이에 청산과부가 됩니다요~~ 아깝다 에구
한편 살아 남은 '설 서당'은 전투에서의 참혹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보고,
인간사의 허무를 느끼고 머리 깍고 중이 됩니다............
아까운 청산과부 요석을 완전히 과부로 홀로 남겨 두고...
상백운대로 가는 능선은 암반 위에서 자라는 소나무가 인상적입니다
스님이 되어 돌아 온 원효
또 이 뭔 웃기는 일이란 말입니까.
세익스피어의 희곡 속에나 나올법한 母女가 한 남자를 서로 짝사랑하는 일이 일어 납니다
요석공주와 요석공주의 엄마인 왕비는 원효를 서로 짝사랑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옷길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사실은 삼국유사에는 없지만 野史에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원효에게 서로 잘 보일려고 두 母女가 경쟁적으로 노력합니다.
어느날 왕비가 설법을 듣는 다는 핑개로 스님이 된 원효를 宮으로 불러 드립니다
이런 일은 자주 있었답니다.
남자 맛을 아는 왕비와 공주는 원효가 스님이 아니라 멋진남자 화랑으로만 느껴지고
소녀시절 첫사랑의 연민과 사랑했던 이에게 가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이루어질수 없는 스님과의 속세의 인연을 끊으려 긴긴밤을 보내지만 끊을수 없었답니다
그래서 요석 공주는 원효를 위한 법복과 행장을 만들어 선물도 하고...
연꽃도 꽃꽂이 잘 하여 선물하고..
점점 속내를 원효에게 알리고 있었습니다.
요석공주도 이미 현대 여성과 같은 적극성을 보였습니다
여성들이 자기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는 여성상위시대는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역사에서 신라시대가 절정기라 할수 있겠습니다
우리나라 역대 왕조에서 女王을 둘이나 배출한 유일한 王朝이니까요
한편 머리 빡빡 깍고 면도질까지해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머리에 모양을 내고 스님이 된 원효.
스님이 되면 뭣합니까? 스님 되면 인간의 본성도 사라집니까?
억제 할 뿐이지 절대 본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동양, 서양, 아프리카, 아메리카 어느 곳의 그 어느 누구도 인간의 본성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청춘의 첫사랑 요석과의 열정이 아직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 원효 -
눈을 감지 않아도 눈 앞에 아른 거리는 어여쁜 과부 요석공주가 적극적으로 대쉬해 오는데
아무리 스님이라도 아직 넷떼루도 떼지 않은 화랑 출신 원효의 마음은 상상에 맡겨도 되겠지요
요석공주는 아빠인 무열왕에게도 속내를 드러내고 졸랐습니다. 원효와 결혼 시켜달라고....
이렇게 홀로 짝사랑만 하고 사느니 죽는게 더 낫겠다고 엄포도 넣습니다
아마 이런 얘기는 처음 들으시는 분들이 많으실겁니다.
이글을 쓰는 '파란문'이 너무 오바 하는 거 아님감? 하면서 의문시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그 동안 모두 우리나라 불교의 巨聖 원효스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싶으신 분들이
이런 저런 속들여다 보이는 그런 내용들의 이야기들은 감추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이 많이 감추었다죠
오로지 원효에 의해 요석공주가 당했다고만 알고 있지요?
신라시대 많큼 여성 상위시대는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시대 보다 더한 시대 였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여왕들을 배출한 유일한 왕조이니까요..시대적 상황도 고려하며...
상백운대가 보입니다
그리고 여기까지도 막걸리 올려다 파는 분이 계십니다. 삶에 대한 대단한 집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먹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길이나 물어 보고 그냥 가더군요.ㅉㅉ
날이 갈수록 사모하는 마음이 더해 가는 요석공주와 스님이기 전에 한 남성인 원효.
세상에 이런 시나리오가 지구상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내면의 번뇌는 연민과 사랑...
그리고 부처님의 계율과 승려로서의 명예등 참으로 많은 것들 속에서
고뇌하는 원효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원효 아니라 석가모니라도 고민 않할수있겠냐?라고 하신다구요? ㅎㅎ
상백운대
원효 - 세로운 세계를 만나다
고뇌와 번민 속에서 나날을 보내던 원효에게 새로운 깨달음의 기회가 옵니다
깨달음인지 술수인지 핑게인지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수는 없습니다만
제가 생각컨데 분명 원효는 '묘수'를 찾을려고 노력했을꺼라 확신합니다
깨달음인지 술수인지 모르지만 원효는 행동에 나섭니다
바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남산의 거지 땡초 대안대사와의 만남과
그 유명한 요석공주와의 3일간의 사랑이야기가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상백운대 정상
여러분~!
이 이야기는 기록된 자료에 의존 하거나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통해 진실여부를 떠나서
우리가 이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배우며 현실의 자기 삶 속에서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지 살펴보는 일이라고 여겨 저는 매우 감명 깊게 느끼는 이야기이니
아시는 얘기라 할지라도 한번 더 음미 해 보시길 권합니다
상백운대에서 나한대로 가는 길목에 "칼바위 능선"이 있습니다
소요산의 압권이라 할수 있는 멋진 곳이니 가시면 꼭 감상 하시기 바람니다
왜냐면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그냥 지나치더라구요
원효에게 요석공주와의 결합에 결정적 역활을 하게 되는 대안대사와의 일화는 중요합니다
경주의 남산 작은 토굴에 사는 거지같은 대안대사는 말 그대로 타락한 땡초의 모습이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홀로 도인인 것입니다
원효는 왕실에서 설법을 하는 왕실의 고승대덕이고.
대안대사는 중생들의 눈에는 타락한 중(땡초)의 모습이니 둘은 서로 극과 극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느날, 원효를 좋아하는 왕비의 부름을 받고 설법하러 왕궁으로 교자를 타고 가는 도중에
대안 대사와 운명적으로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대안 대사는 술에 취해 거지꼴을 하고서는 가마위의 원효대사에게 씨부립니다
"부처님 말씀에 위도 없고 아래도 없으며, 있음도 없고 없음도 없는데.
어떤 놈은 복이 많아 사람위에 사람이 타고 가며 (사람을 가마에 태우고 가는 것을 빗대)
좋은 옷을 걸치고 , 좋은 곳만 들락거리느냐……?"큰 소리로 조롱합니다
"어떤 놈은 천지가 내 집이고, 내 법당이니 걸림도 없고, 막힘도 없으며,
천지가 다 내 것인데 어떤 놈이 더 편한가! 어디 한번 해보자 "하며 고함을 치니
그 소리가 원효에게는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로 들렸고
다른 사람들은 술 먹은 미친 중놈의 미친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원효는 자기 신분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날따라. 비가 부슬 부슬 내렸고......
왕실에서 설법을 하는데. 요석공주 이 싸가지 없는 과부가 비에 젖은 옷을 입고
속살이 살짝 살짝 들여다 보이는 요염한 자태로 나 좀 잡아 잡슈~~ 우~하며 있는게 아닌가
세상의 남자가 아무리 스님이라 하더라도 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집에 와서 별짓을 다해도 동하는 그 마음을 삭힐수는 없었습니다
칼바위 능선의 소나무들
다음날.
원효는 대안대사를 찾아 나섭니다
토굴 안에는 죽은 어미 곁에 오소리 새끼인지 호랑이 새끼인지 새끼 한마리가 끙끙대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원효는 그 슬피 울고 있는 소리가 너무 애처롭고 슬퍼서 그를 위해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이때 대안대사가 돌아와 목탁을 치고 있는 원효를 보며
"당신!!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앙?" 성질 버럭 내며 물었습니다
원효는 "어린 이것이 어미가 죽어 울고 있기에 불쌍해서 염불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대안대사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완전히 비웃으며
"쯔쯔쯔...배고플 때는 밥을 주는 것이 염불이니라……" 하며 아랫마을에서 동냥해온 젖을 물리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원효는 또 한번 대안대사에게 쇠망치로 매를 맞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며 혼자 중얼거립니다.
"아~하. 미친 승이 아니라...고승 대덕 이로구나. 내가 고승대덕이 아니고 이 분이 고승대덕이로다~"
원효는 정식으로 무릎을 꿇고 자초지종 자신의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대안대사는 "좋다. 좋다. 날 따라와라 ~!"
칼바위 능선 정말 아름답고 멋있고....
대안대사는 원효를 데리고 서라벌의 어느 대포 집에 들어가 여자 둘을 사이에 두고 술을 마십니다.
원효는 '술은 않먹습니다. 여자도 멀리합니다' 하며 안절부절 하고 있었습니다.
술에 취한 대안 대사
"진리를 가는 데는 마음 따로 몸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니라~"
극락을 갈려면 추락을 맛보아야지 극락을 가는 거야…….
원효에게 이래도 법에 걸리고 저래도 경계에 걸려서는 영원히 한발자락도 나갈 수 없을 것이야.
요석이 꾀거든.하루 밤을 보내고.
목탁을 쳐 주거라……
그리고 그걸 뛰어 넘어라……"
칼바위 능선 -
원효는 요석공주를 사모하는 마음과 이름 있는 승려의 신분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었으리라~~
어떤 놈이고 갈등 하지 않을 남성이 있겠는가!!
의상이 내성적이라면 원효는 외향적 성격이라 할수 있습니다
호탕하고 판단이 서면 과감히 실행에 옮기는 그런 성미였습니다
고민과 번민........속에서 살아 오다가 대안대사로 부터 완벽한 해법을 찾아 낸 원효는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이 유명한 말이 이렇게 탄생 되고 이 말을 서라벌 거리 거리에서 씨부리고 다닙니다
요즈음 개그콘써트식으로 말하자면
"도끼가 도끼 다울려면 도끼 구멍에 또끼 자루를 끼워야지~~
자루 없는 도끼가 도끼인가? 구멍에 박히지 않은 자루없는 도끼가 도끼인가~~!!" ㅎㅎ
그런데 이 방식은 요석공주의 고모가 되는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를 업어 가는
백제의 무왕이 신라 서라벌에서 한번 써 먹은 방법과 유사한 방법이지요?
이것이 그 유명한 향가로서 最古 오래된 "서동요(薯童謠)"이지요?
동요(후에 백제 무왕이 됨)가 선화공주를 업어 갈려고 서라벌에서 스캔들을 떠벌리고 다니죠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 놓고
서동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한마디로 스캔들을 인위적 의도적으로 뿌리고 다녀 스캔들이 현실화 된다는 얘기입니다
백제 무왕이 신라의 공주를 왕비로 삼을려고 사용한 스캔들 뿌리기이었죠
이 '서동요'는 내용이야 스캔들이지만 국문학사에서는 이두문자 연구에 최고로 꼽지요
칼바위 능선의 바위들은 이렇게 칼처럼 생겼습니다
편마암이라고 하나요?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살아 온 흔적이 낭자합니다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원효가 퍼트리고 다니는 의도적 스캔들 "도끼자루와 도끼구멍 이야기"를 알아 들을 사람은
요석공주와 무열왕, 그리고 왕비 밖에 더 있었겠슈?
"짜식이 이제야 정신 차리고 꼬심을 당했군~~!!"이라 생각 한 무열왕은
"짜식이 명색이 스님인데 파계승까지 될 각오로 내 딸을 만족 시켜줄까?"라고 의심도 하며
거리를 떠돌고 있는 원효를 모셔 오라고 신하를 보냅니다.
월정교..문천교라고도 하더군요. 서라벌의 남산 밑에 있다는데..저는 못 가봤습니다
짠~~ 무열왕의 신하가 월정교를 건널 때, 이미 올줄 알고 있었던 원효가 쑈를 벌입니다.
원효의 짱구도 여색 앞에선 아주 잘 돌아 갑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안대사를 만났는지도 모름니다. 그렇다면 대단한 고수일텐데..ㅋㅋ
갑자기 발을 헛디디는 척 하며 월정교 아래로 떨어져 옷을 모두 적십니다.
왜그러는지 모두 아시져?
중이라도 간통을 하려면 옷은 벗어야 할테니....
내 옷 벗겨 줘~~나 이젠 중 안할래~~파계승, 그러니 요석공주와 간통 할테야~~라는 신호였던 것입니다
상백운대와 나한대 사이의 이정표
이젠 이런 소요산 사진은 눈에도 안들어 오죠? ㅎㅎ
3일간의 사랑
요석궁에 들어가게 된 원효는 자연스럽게 적셔진 승복이 요석공주에 의해 벗겨지고
수많은 나날을 독수공방으로 보내 온 두 남녀에게 촌음도 아까워하며
알몸으로 모든 것을 주고 받는 열정적인 정사는 벌어집니다...
뭇세상 사람들은 간통이라 폄하하지만
제가 생각컨데 절대 간통은 아니고 '스님과 공주의 정사'라고....
세계사에 남는 희귀한 로멘스라 여깁니다
중이 고기 맛을 보면 벼렁빡에 벼룩도 남아 나지 않는다~라는 옛말이 있죠. 속담인가?ㅎ
이들이 하루로 족하겠습니까? 3일 밤낮을 붙어 떨어 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3일 밤낮을 이 소요산의 소나무처럼 붙어 있었다니까요~~
결혼을 목적으로 같이 3일밤낮을 붙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과부와 중이 성행위 만을 하고 헤어 진다면 무슨 법에 접촉 될까요?
에구~ 이런 사례가 없어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요즘 옥소리가 헌법재판소에 간통이 뭔 죄인가요?하며 헌법소원을 냈던데..
옥소리의 얘기는 "내가 내몸 이불 속에서 뭔짓을 하던 국가가 왠 참견이여?"
"국가가 언제 날 만족 시켜준적있어?" "내 성행위를 니네들이 왠 참견이야!!~~"
"내가 니네들에게도 피해 줬어?..닝기리~" 이렇게 항변하고 있죠
시대가 바꼈다고 판결이 합법적으로 나지 않을까~한다는 신문기사들이 있더군요
로마제국의 멸망의 원인 아십니까?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로마 시민의 문란한 성생활이었답니다
세계 방방곡곡 식민지에서 들어 오는 엄청난 富
그 다음 갈곳은 인간이 갈수 있는 최후 최고의 오락 SEX라고 하더군요
로마에는 화려한 공중 목욕탕이 수없이 들어 서고 문란한 性狂亂은 시작 되었죠
그 결과 로마 시민의 40%이상이 성병에 결려 종족 보전을 할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죠
그래서 콘스탄티니우스 대제는 로마를 버리고 터어키 이스탄불로 도읍을 옮기는 거지요.
소위 말하는 동로마 제국이 로마가 아닌 터어키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문란한 성생활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우리나라와 우리 역사를 좌우하는 문제 일수 있습니다
짧은 한 순간을 살다 가는 하루살이로 인간을 평가하면 않된다고 강조합니다
(저의 블로그 '역사의 숨결'란에 "간통과 로마제국의 멸망"이라는 글이 있으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찾아가 보세요~)
애 못낳는 여자가 절에 가서 백일 기도 드리면 애를 낳는다는 말이 있는데
정자와 난자가 만나지 않아도 애가 탄생 될수 있나요?
많은 사람들이 생각컨데 애못낳는 여자가 백일 동안 절에 있으면
분명 뭔 일이 벌어지지~~~그러니 애를 낳지~~라고 입방아를 찧습니다
3일이 지난 후, 원효는 이별을 고합니다..요석공주에게...
"단물 쓴물 다 빨아먹고 떠난다구? 이 땡중아!!~"라고 요석공주가 말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요석공주는 원효대사 가슴을 만지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딜 가시든지 태산보다도 높고 바다보다도 깊고 넓은 이 가슴속에
티끌보다도 작은 먼지보다도 적은 내가 어느 한구석 기댈 데는 없는지요?"라고 묻습니다
그런 물음에 원효는 대안대사에게서 배운 말을 써 먹습니다
요런 잔머리는 잘 돌아 갑니다
" 있다도 없고 없다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며.
더불어 나도 없는데. 그대가 어디 머물 자리가 있겠느냐?
요석공주는 원효를 그렇게 떠나보냅니다 . 아 무정한 땡중~
에구~ 아까버라~단 3일간의 사랑만 남기고 놈은 떠나가고~~
남은게 사랑만 남았겠습니까? 영자 숙자.....정자도 남아서
그 유명한 신라시대 최고의 학자 중 한사람인 "설 총"을 낳습니다
원효는 3일간의 정사 후....
한바탕 꿈이요. 허깨비 였구나 라고 뇌이며
이름 모를 어느 산속으로 가서 승복을 벗고 불목한이 되어
다시 행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수행을 했답니다
그곳이 바로 이곳
경기도 소요산 자재암이었답니다
칼바위 능선에서 나한대 가는 계곡에 있는 하산하는 길 안내 이정표
'소요산'의 정상인 ''나한대-의상봉'으로 갑니다.
나한대를 오르고 있습니다
나한대를 오르는 길도 경사도가 좀 있습니다
원효는 소요산 자재암에 들어 오기 전에
스님으로서 요석공주와 간통하여 수행의 길 - 불교-를 파계했으니
자기 자신을 ‘아랫것 중의 아래’라는 뜻의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하며 무아행을 폈습니다.
즉 저잣거리에 나가 거지, 창녀, 기층민중들 속에서
표주박에 걸림이 없다는 '무애(無碍)'라는 글을 새겨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돌아다니며,
하층 민중들과 더불어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염불을 외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교화하며 떠돌았다합니다
이 때부터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이것이 대승불교의 시발이 됩니다
뒤돌아 보며....
이는 <화엄경>의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모든 것에서 거리낌없는 사람이라야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벗어날 수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랍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오도적 삶을 크게 확대하고 사상의 깊이를 심화시켰으며,
오로지 일심사상으로 돌아가 널리 중생을 이익 되게 하였던 것이라고 한다는데...
나한대 정상
나한대 정상엔 구경거리가 별루입니다
나한대에서 의상대는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나한대에서 의상대로 향합니다
의상대 근처는 암석이 석영 같았습니다
의상대 가는 길도 절경입니다
산행 내내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소요산의 최고봉 - 의상대
의상대사는 여기 온적도 없고 원효가 와서 수행했는데....
왜 소요산의 최정상 봉우리를 원효봉이라 하지 않고 의상대라고 했을까....??
의상대 정상에서 주위를 관망합니다
의상대 아래는 천길 낭떨어지이고
의상대에서 바라 본 '공주봉'
저 공주봉이 요석공주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요석공주는 저 봉우리를 바라 보며 원효가 잘 되기를 기도했답니다
의상대에서 공주봉으로 내려 가는 길도 경사가 심합니다
이쪽으로 올라 오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계단이 길었고 경사가 심합니다
의상대와 공주봉 사이의 계곡에서 점심 식사 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도 이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쇠주 한잔 했습니다
오늘도 지난주와 같이 사태볶음 안주였으며 다른 것은 청양고추와 고추장이었습니다
공주봉으로 향합니다
만만하게 봤던 공주봉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공주봉이라서인지 공주 오르기가 힘든다고 지나는 뭇남성들이 우스개 소리를 합니다
힘들게 공주봉을 오릅니다
힘든 이유는 이제까지 많이 걸었고 소주도 한잔 해서 더욱 힘들어 나타나는 현상이겠죠
공주봉 정상이 나옵니다만 이곳은 장소가 협소했구요....
원효와 헤어진 요석공주는 일년후쯤 아들을 낳습니다
아시다시피 "설 총"입니다
요석공주가 그냥 청산과부로 어린 아들 하나 데리고 살 여자는 아니었나 봅니다
요석공주가 누구입니까? 원효라는 당시 國僧을 꼬셔서 3일 동안 정사를 벌인 여자 아닙니까?
"중 따먹는 여자"는 공식 기록으로는 요석 공주가 유일하지 않을까요?
보통 여자는 아니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공주봉 정상 휴게소는 옆에 잘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요석공주는 애만 하나 만들어 놓고 떠나 버린 서방을 찾아 나섰습니다
신라시대에 서라벌에서 여기 소요산까지 오려면 고생 깨나 했을 것입니다
땡중이던 뭐던 요석에게는 서방이었기에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서방 찾아 삼천리는 시작됩니다
소요산 산행 중에 미국인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 이유가 있더군요
제 개인 생각으로는 원효가 여기 소요산에 몰래 홀로 들어와 수행하지는 않았을 걸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요석공주가 서라벌에서 여기까지 찾아 올려면 거주지를 확인 했기에 가능 했을 걸로 짐작되기 때문.
요즘처럼 헨드폰이나 스마트폰이 있었겠습니까? 1,300년 전인데...KTX나 자가용이 있었겠습니까
즉, 원효가 슬쩍 요석공주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면 도져히 이곳 '소요산 자재암'을 알수 없었겠죠
공주봉 정상은 넓직하게 꾸며져 있어 놀기 좋았습니다
요석공주가 천신만고 끝에 찾아 온 소요산
아휴~ 이젠 서방 곁에서 닐리리~하며 살아야지..하고 생각 했겠지요
하지만 원효는 요석공주를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했답니다
이제는 佛僧으로 돌아가 수행에 만전을 다하겠으니, 공주는 돌아 가라고 냉정하게 뿌리칩니다
이래도 되는겁니까?
요즈음 같았으면 어쩌면 혼인빙자간통혐의로 쇠고랑을 찻을수도 있는데
머나먼 길을 온갖 고생을 다하며 찾아 온 여자에게 너무 합니니다~♬ 김수미가 曲을 할일
공주봉에서 바라본 미군 기지와 동두천 시가지
앞에 보이는 계곡 전부가 유명한 미군부대 동두천 사령부입니다
소요산에 미국사람이 많은 이유를 아시겠죠?
그런데 이 미군부대가 모두 평택으로 이전한다고 하지요
미군들로부터 나오는 딸라로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은 앞으로 어떡하나....
밤의 환락가로 라스베가스 같은 밤이 된다는 동두천이 이젠 다른 산업으로
경제를 일으켜야 할텐데....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무지하게 발전했습니다
정상 오른쪽으로 하산을 시작합니다
조금 내려 가니 전망대가 나오더군요
원효는 냉혹하게 요석공주를 뿌리치며 자재암에 올라 두문불출을 하니
요석공주는 에~라 이쌔끼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라고 생각했는지
오전에 올라 올때 봤던 일주문 밖 "요석 궁터"에 별궁을 짓고 살았답니다.
요새끼 꼴려서 밤에 내려 오면 국물이라도 주나 봐라~~!!
설마 이런진 않았겠죠?ㅎㅎ 하지만 궁을 짓고 살았다는 것은 확실한 모양인데......
오늘 산행에는 가지 못했던 이정표로만 보았던 "선녀탕"의 전설이 있는데
요것이 묘하게 혹시 선녀를 요석공주로 분하여 우회적으로 원효 위상을
업-그레이드 시킨게 아닌가합니다. 분명 제 생각입니다.
선녀탕과 자재암의 유래를 들려 드림니다
전망대에서 의상대를 올려다 보고...
이곳 自在庵에는 元曉가 머물 때 觀音菩薩을 親見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元曉가 庵子에서 혼자 수도할 때 비바람이 부는 어느 날 밤에
낯선 젊은 여자가 찾아와 하룻밤을 묵고 갈 것을 청했다고합니다
元曉는 비내리는 밤이므로 그 여인을 되돌려보낼 수가 없어 하룻밤 묵어 가도록 허락했습니다.
침침한 등불에 비친 그 여인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수도승인 元曉는 공연히 여자를 맞아들였다고 뉘우쳤지만 이미 허락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미 여자 맛을 본 원효인지라 눈을 감아도 이 여인의 모습이 떠올라 元曉는 精進을 할 수 없었습니다.
남자라면 당연한 일이고 아무렇지도 않다면 인간이 아닙니다
석영암으로 이루어진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니 천길 낭떨어지....
元曉는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법이다. 내가 色心이 없다면 이 여인은 목석이나 다름없다.
나의 오랜 修道를 이 여인으로 인하여 하룻밤 사이에 무너뜨릴 수 없다"고 되뇌면서
비에 젖은 여인을 따뜻한 곳으로 눕히고 손으로 차가운 몸을 주물러 녹여주었다고합니다
元曉는 묘한 느낌이 일어나지만 마음속으로 念佛을 하면서 유혹을 물리쳤다고하는데....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아무리 설화라 한다 하더라도...
원효 업그레이드 시킬려고 꾸민 이야기 냄새가 물씬 물씬 납니다만 계속합니다
내려가는 길의 경사도도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자재암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던 왼쪽 - 즉 공주봉부터 먼저 오르던
힘들기는 같을 듯 합니다
얼마 후 몸이 풀린 여인은 자리에 일어나 앉아 元曉에게 요염한 눈길을 보내고 접근해왔습니다.
여자란 다 이런 가요?
저는 이 여인이 요석공주라고 확신합니다만....설화에서는 절대 아니랍니다
元曉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갔다고합니다.
삥~신..옛날 거지 땡초 '대안대사'한테 배운건 요석공주한테만 써먹으라고 갈켜줬나? 아니면
이젠 인간세계를 떠나 진짜 해탈의 경지로 간다는 말인가
새벽녘에 元曉는 간밤에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난 계곡에 옷을 벗고 목욕을 하였답니다.
맑은 물에 몸을 담구어 간밤에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서
유혹을 물리친 佛心으로 기쁨에 젖어 있었다고하는군요
마침 그때 우연히 앞을 바라보니 아침 햇살에 비친 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이 갑자기 보여
元曉는 가까이 오지 말도록 나무랐다.고 하는데....그때 그 여인은
"제가 스님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님이 저를 꼬시는거 아닙니까?"하고 대꾸하였다네요.ㅎㅎ
맞는 말입니다. 밤중에 이 여인 몸을 주물러 주물탕으로만 녹여만 주고 ..만족 시켜주지는 않고...
새벽녁에 혼자 밖에 나가 홀라당 벗고 보는 앞에서 목욕을 해? 이게 여자 몸 달구는게 아니고 뭐여?
元曉는 이 말을 듣고 난 뒤 눈이 캄캄해지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답니다.
또 업그레이드 시킵니다..ㅎ
옛절터가 나왔으며 그 규모는 커지 않았을듯..
잠시 후 정신을 차려 자신을 되돌아보니 광명을 찾은 듯 그의 눈에는 주위 사물이 밝게 보였다는군요
元曉는 "나는 이제 깨달았다." 하면서 물 속에서 나와 옷을 벗은 채로 여인 앞으로 지나갔답니다
이거이 틀림없이 한탕 하고 난 다음의 일이라 여겨지는데 어떻던 설화는 그렇습니다..ㅎㅎ
절터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무슨 절이었는지도 안내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 여인은 더 이상 요염한 여자가 아니라
금빛 찬란한 後光을 띈 관세음보살(觀音菩薩)이 되어 폭포 위로 사라졌다는군요
ㅋㅋ 이거 말 됩니까? 여하튼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여인은 요석 공주를 빗대서 나타난 여인으로
생각합니다
觀音菩薩이 元曉의 佛心을 시험하기 위해 잠시 인간으로 現身한 것이랍니다.
이 절 이름을 自在庵이라고 고쳐 불렀던 이유는
"아무거리낌 없이 마음과 뜻을 다스릴 수 있었다"는 元曉의 깨달음에서 비롯된다고 하는데
원효에겐 여자 멀리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관세음 보살 여인은 요석공주 같지 않으세요? ㅎㅎ
하산이 끝나갈 무렵
뭔가 했더니 '자연보호 헌장' 비석이더군요
오전에 소요산을 오르며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했던 자재암 입구 삼거리에 다시 내려 왔습니다
오후가 되니 그림자가 땅바닥에 들어 눕기 시작합니다
오전에 들어 왔던 일주문을 나서며 트랙킹 코스를 내려 갑니다
입장료가 비싸게 느껴졌던 매표소를 지나고....
입장료 수입만 한달에 10억이 넘겠더군요..일년에 백억..억..억..
원효 덕으로 입장 수입을 벌어 들인다면 薛氏 집안이 혜택을 받아야 할텐데
조계종이 싹쓸이 하겠지요
心生卽種種心生 心滅卽種種心滅
如來大師云 三界虛僞 唯心所作
한 생각이 일어나니 갖가지 마음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사라지니 갖가지 마음이 사라진다.
여래께서 이르시되, 삼계가 허위이니 오직 마음만이 짓는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 특집
오늘 산행을 마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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