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역]
'한밭' - 그 밭 가운데 우뚝 솟은 鷄龍山 !
그 동안 무척이나 올라보고싶었던 鷄龍山을 가기 위해
2009년 3월 15일(일) 오전 9시 19분에 대전역에 내렸습니다
모두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대전역앞 광장]
대전역앞 광장에는 전국에서 선택되어 초청된 산객들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으며
왠지 큰 즐거움을 한가득 안고 돌아 갈듯한 느낌이 吉祥之地 大田의 하늘에 포근하게 퍼집니다
곧바로 오늘의 산행지 鷄龍山으로 향했습니다
제가 오늘 대전의 鷄龍山을 찾아 오게 된 사연은 앞으로 설명 드리겠습니다만
이 세상이 얼마나 살만한 세상인가를 봄볕처럼 알려주는 그런 만남이었습니다
[대전역앞 노래비]
대전역앞 광장에는 "대전사랑 추억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모두 알만한 "대전 부르스"
잘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기적소리 슬피우는 눈물의 플레트홈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영시 오십분 무정하게 떠나가는 대전발 영시 오십분
세상은 잠이들어 고요한 이 밤 영원히 변치말자 맹세했건만
나만이 소리치며 올줄이야 눈물로 헤어지는 쓰린 심정
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 아~ 보슬비에 젖어가는 목포행 완행열차
최치수선생이 작사한 "대전 부르스"는 김부해선생이 작곡하셨습니다.
1959년 안정애가 불러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고 근간엔 조용필, 장사익씨등이 불렀습니다
최치수선생은 아시는 분들이 별로이겠으나 '배호'가 부른 "안개낀 장춘단공원"과
"경상도 아가씨의 순정"을 작사하셨다면 어느 정도 그분의 성가를 알수 있겠지요?
[대전특구 첨단 I.T 연구단지]
대전역에서 계룡산으로 가는 길에는
"목포행 완행 열차"가 오가던 그런 옛날의 大田이 아니고
첨단산업연구단지가 화려한 면모를 자랑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더욱 알차게하려는듯 마천루들이 새로움으로 다가 옵니다
대전도 많이 발전했습니다
[동학사 입구 - 박정자 삼거리]
대전역에서 약 30분 정도 달려 오니 "박정자 삼거리"가 나왔습니다
똑 바로 가면 '공주市'로 가며 왼쪽으로 "계룡산 동학사"로 가는 삼거리입니다.
박정자여사와 무슨 관련이 있어 삼거리 이름을 '박정자 삼거리'라고 지었는 줄 알았더니
朴氏 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亭子를 지었다고 朴亭子 삼거리가 되었다는군요
박정자 여사와는 아무른 관계가 없더군요..ㅎㅎ
[계룡산 장군봉]
'박정자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동학사 방향으로 틀어 가면
우측에 우락부락한 岳山이 먼저 우리를 반겨 줍니다.
이름하여 "장군봉"입니다.
계룡산을 종주하려면 여기 "장군봉"에서부터 "신선봉", "삼불봉", "자연성릉", "관음봉",
"쌀개봉", "천황봉", "연천봉", "문필봉"을 올라야 하겠더군요.
다음에 기회가 오면 종주를 한번은 꼭 해야 겠습니다
[동학사 가는 길]
대전을 대표하는 진산 다웁게 계곡에는 많은 특징있는 업소들이 손님들을 유혹하고....
멀리 계룡산의 주능선이 벌써부터 산객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합니다
[동학사 입구 - 주차장 앞]
차량은 더 이상 들어 갈수 없는 동학사 입구에 서니 "계룡산 천황봉"이 보입니다.
국립공원 다웁게 깨끗하게 정리 정돈된 거리는 산객들에게 친근감을 주고
약간의 바람을 제외하곤 산행하기에 좋은 날씨까지
어서 빨리 계룡산의 품에 안기라고 산봉우리들이 손짓하고있습니다
[함께한 "정암카페" 회원님들]
오늘 제가 대전 계룡산까지 산행을 오게 된 사연이 있습니다
충남대 의대 교수님으로 오랜 세월 후진 양성에 힘쓰시다 2년전쯤 정년퇴임하신
晶巖 김광진 교수님이 전국에 흩어져 있는 晶巖카페회원님 중 우수(?)회윈님들을
대전 계룡산으로 직접 초대를 해 주었습니다.
인터넷에서만 만나다가 직접 만나 함께 산행을 할수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신 것이지요
또한 참석해 주신 분들의 면면이 너무 훌륭하신 분들이라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앞으로 산행을 하면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사진의 우측에서 좌측으로
雲山 김택근 詩人님, 晶巖 김광진 교수님, 내과의사 서지원님, 素山 김홍주 산행문화연구소장님,
대구에서 오신 土含山 정용구님, 대구에서 오신 용담 김명자님, 부산에서 오신 心泉 정만옥님,
서울에서 오신 세레나 권혜숙님, 필자 파란문
[동학사 입구 - 천정골 갈림길]
동학사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천정골 산행 코스" 들머리가 계룡산을 찾는 산객들을
모두 불러 모아 계곡을 가득 메웁니다
'동학사'는 출입하는데 문화재 관람료를 2,000원 내야 하기도 하지만
동학사 산행코스가 너무 짧아 90% 이상의 산객들이 '천정골 코스'로 오르더군요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동학사'로는 한명도 가지 않습니다
[천정골 산행 들머리]
오전 10시 30분경 처음으로 만난 분들과 "천정골 산행 들머리"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천정골]
많은 산객들로 계곡은 묘한 느낌으로 다가 옵니다
서울에 북한산과 관악산이 엄청난 산객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면,
대전에선 계룡산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 넣어 주겠지요
[천정골]
저는 오늘 鷄龍山을 처음으로 찾아 왔습니다.
그 명성이야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만 직접 찾아 흠뻑 젖어 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다행이 이런 기회를 만들어 주신 晶巖교수님 덕분으로 즐거운 산행을 하고있습니다
사진의 가운데 앞을 바라 보시는 분이 晶巖교수님이신데 山을 정말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晶巖교수님의 어느 글을 보았더니 "山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쓰셨더군요.
아마도 오랜 연구활동을 하시다 건강을 많이 헤쳤던 모양입니다.
등산을 하고나서부터 건강을 되찾고 삶의 활력을 얻어셨다고 하시더군요
지금도 최소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산행을 하시고, 신문에 산행기도 연재하시고....
詩人이자 수필가이시며, 특히 요즘 "대덕R&D특구합창단원"으로 맹활약하고 있답니다
정년퇴임하셨지만 아직도 몇개 대학에 강의를 나가고 있답니다
晶巖교수님의 카페를 가실려면 여기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천정골]
완만한 경사의 오르막을 여유를 가지고 담소를 나누며 오릅니다
건강산행코스로는 알맞는 코스인듯합니다
[큰배재]
동학사입구에서 약 1시간20분 정도 오르니 "큰배재"라고하는 고갯길이 나옵니다.
[큰배재]
계룡산에는 '큰배재'와 '작은배재'가 있는데, 이름의 내력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합니다만,
'큰배재'는 동학사계곡과 갑사계곡 사이에 있습니다. 옛 전설에 의하면 이 고개가
옛날에는 "물 길"이어서 배(船)가 넘나 들었다고 "배재"라고 한다고 합니다.
晶巖교수님이 이곳 저곳 알아 봤으나 아는 분이 없었는데, 어느 분이 위와 같은 전설을
들려 주었다고 저에게 설명 해 주었으니 어느 정도 믿어도 되겠지요? ㅎㅎ
사실 이런 전설은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이런 전설이라도 산행길에는 청량제가 됩니다
[큰배재]
전설을 얼마나 믿느냐하는건 순전히 자신의 몫입니다만...제가 예를 하나 들께요
남극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붙어 있던 땅덩어리가 떨어져 아시아 대륙으로 흘러와
부닥친 땅덩어리가 '인도'이고, 아시아 대륙과 충돌할때 솟아 오른 땅덩어리가
'히말라야 산맥'이며, 8,000m가 넘는 산들로 이루어진 히말라야가 옛날에 진짜로 바다였으니
큰배재, 작은배재의 전설이 결코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리라......ㅎ
전설을 너무 허무맹랑한것으로만 생각하면 않된다는 주장입니다. ㅎㅎ
[남매탑으로 가는 길]
고려시대 "이자겸의 난"에 대해 핵교 국사시간에 배웠지요?
그런데 '이자겸의 난'만 알고 그 내용은 잘 모르시죠?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입니다
"이자겸의 난"은 태조 왕건이 세운 高麗 王氏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실패한 쿠데타입니다.
이자겸에 대해선 제가 "천관산 산행기'에서 한번 쓴적이 있습니다만...
(지금까지도 인터넷에서 저의 '천관산 산행기'가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으니 찾아 읽어 보세요~ㅎㅎ)
고려 무신정권시대 초기에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던 이자겸
이자겸이 무지 울궈먹은 "十八子爲王" - 즉 李氏가 王이 된다는 도참설을 예언하고 놀다
사돈지간인 척준경에게 배반의 뒷통수를 맞고 죽어 갑니다.
"十八子爲王" - 즉 李氏가 王이 된다는 도참설은 이미 이자겸이 오랫동안 울궈먹은 것인데
얼마후에 그러니까 고려말에 이성계가 뒤따라 또 울궈 먹고, 그 때는 성공을 하죠?
제가 "十八子爲王" - 즉 李氏가 王이 된다는 도참설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鷄龍山을 오를 때엔 "十八子爲王"說로 조선을 개국하는 이성계가
朝鮮의 首都를 이곳 鷄龍山에 세울려고 했기 때문이며....
朝鮮의 멸망을 기원하는 "정감록(鄭監錄)"이라는 예언서를 뺄수없기에
먼저 "十八子爲王"설을 언급한것입니다
[남매탑 고개]
조선왕조를 괴롭혔던 모든 유언비어의 저수지는 '정감록(鄭鑑錄)'이었다고 합니다.
불교를 통치기반으로 정권을 유지한 고려시대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는
새로운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주자학(朱子學)을 근간으로하는 '유교'를 朝鮮王祖를 지키는
기본 이념으로 세우지요. 이 유교이념이 조선왕조의 '용천검'이었다면,
鄭鑑錄은 李氏가 망하고 鄭氏王祖를 고대했던 左派의 장풍과 같은 것이었답니다.
오늘 함께 산행을 하게 된 '素山 김홍주 산행문화연구소장님'의 설명을 토대로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용천검 유교사상과 장풍 정감록의 한판 대결. 장풍은 모래바람을 일으켰답니다.
'鄭氏王祖說'에 노이로제가 걸린 조선왕실에서는 19세기 후반에 좌파의 책동을
원천봉쇄하기 위하여 부득이 좌파의 전매특허인 풍수도참을 역으로 동원했다고합니다.
그래서 鄭氏의 홈그라운드인 鷄龍山에 압정사(壓鄭寺)라고 하는 이름의 절을 세웠는데
좌파의 장풍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鄭氏를 누르는 절'까지 세웠겠는지 알만하지 않습니까?
[남매탑 고개 이정표]
'이자겸의 난'을 일으킨 고려의 이자겸은 조선시대의 한명회의 스승 쯤 되는 인간이죠.
딸 셋을 왕비로 만들고 특히 외손자인 '인종'에게 친딸 두명을 시집 보냈으니
전세계사에서도 빛나는 엄청난 역사적 인물이죠
무슨 말인가하면...'인종'의 엄마가 이자겸의 첫째 딸입니다.
그런데 인종의 와이프가 이자겸의 둘째 딸과 셋째 딸입니다.
그러니까 인종은 자기 엄마 여동생, 즉 이모 두명과 한방에서 같이 먹고 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자겸'이 어떤 위력적 인물이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지요? ㅎㅎ
(더 궁금하신 분들은 저의 '천관산 산행기'를 읽어 보세요)
수양대군에 빌붙어 쿠데타를 일으킨 조선의 한명회는 딸 두명을 왕비로 만들었죠?
그래도 조선의 聖君에 속하는 성종과 예종의 왕비가 한명회의 딸들입니다
제가 저의 산행기에서 자주 얘기하는 "딸을 왕비 만들기"의 기네스북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이자겸과 한명회입니다.
그런 이자겸이 만들어 낸 것이 "十八子爲王"이라는 도참설이고,
민중 속에서 특히 계룡산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도참설이 '정감록(鄭鑑錄)'이었답니다.
[남매탑으로 가는 길]
제가 이글을 쓰기위해 조선왕조실록 태조편을 다시 몽땅 정독을 했습니다
그리고 '素山 김홍주 산행문화연구소장님'의 설명을 참고하여 이 글을 씁니다
1392년에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王氏들이 아직까지도 우굴대는 개성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태조2년, 즉 1393년 음력 정월 직접 계룡산에 행차해 산세를 휘둘러 보았습니다.
풍수지리에 일가견을 가진 무학대사가 이때에 이 산의 이름을 "계룡산"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태조를 수행해 현지로 내려온 무학대사는 新首都 예정지 '신도안'의 좌우 산세를 살핀 다음
"계룡산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 용이 날아 하늘로 오르는 형상)이다." 라고 했답니다
여기서 말한‘金鷄'는 富의 상징,‘飛龍'은 현명한 임금을 의미한답니다.
즉, 이곳에 도읍하면 풍요한 태평세월이 보장된다는 말입니다.
무학대사는 金鷄의 '鷄'와 飛龍의‘龍'을 차용해 산 이름을 鷄龍山이라 부르자 했고
그 말대로 됐다고 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곧바로 新首都를 이곳으로 정하고 공사 개시를 지시해
그해 3월부터 王都 건설의 삽질 소리가 계룡산 골짜기에 메아리쳤답니다.
[동학사 갈림길]
남매탑고개와 남매탑 사이에 있는 "동학사 등산길"과 만나는 삼거리입니다
동학사에서 여기까지는 1.7km이니 매우 가깝군요.
[남매탑]
12시 10분경에 남매탑이 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남매탑은 계룡산과 동학사를 대표하는 내력을 가진 곳임을 "동학사 홈 페이지"에서 알았습니다.
동학사 홈페이지 "창건"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 있습니다
동학사의 최초창건은 남매탑 전설에 전해지는 상원조사로 부터 시작된다.
신라시대에 상원조사가 암자를 짓고 수도하다가 입적한 후,
724년(신라 33대 성덕왕 23)그곳에 그의 제자 회의화상이 쌍탑을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에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도량이라 하여 절 이름을 청량사라 하였다
그러므로 '동학사'의 원래 이름은 청량사였으며
남매탑 전설의 실제 인물이 '상원조사'였다는 것입니다
[남매탑]
"남매탑"에 대해서는 동학사 홈페이지의 설명을 인용하겠습니다
동학사에서 북쪽으로 1.8km 쯤 오르면 나란히 서있는 2기의 탑이 있다.
보물 제1284호로 지정되어 있는 청량사지(淸凉寺沚)의 5층석탑과
보물 제1285호로 지정되어 있는 7층석탑이 바로 그것이다.
계룡산 삼불봉 아래 동쪽 8부능선, 해발 약 590m의 등산로 옆에 있는 이 탑의 사지는
근처에 [청량사淸凉寺]라는 '막새 기와'가 발견되어 청량사지라고 부르고 있다.
청량사는 임진왜란때 병화로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고, 이 탑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일명 남매탑 또는 오뉘탑이라 부르기도 하고 이 2기의 석탑들은 1950년대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1년에 복원하였다. 사역내에는 현재 상원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이 탑이 서있는 곳은 청량사(淸凉寺)가 있던 곳이었군요
[남매탑]
남매탑은 우측의 7층석탑, 즉 키가 큰 석탑이 오빠탑이고
좌측의 5층석탑, 즉 조금 작은 키의 탑이 여동생탑이라고 합니다
두개의 탑이 나란히 있다고 淸凉寺址雙塔이라고도 한답니다
[상원암]
옛 淸凉寺가 있던 곳에는 '上元庵'이라는 암자가 있고 많은 산객들이
점심식사를 하는 곳으로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남매탑 전설]
"남매탑의 전설"은 대략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통일신라시대 때의 한 스님이 이곳에서 토굴을 파고 수도를 하고 있었답니다
저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게 있습니다. 왜 수도를 할때 습기 많고, 벌레 많고,
더러운 환경의 토굴을 파고 수도를 하는지..??.. 맑고 깨끗한 곳에서 수도를 해야
수도가 잘되지 않겠습니까? (가난하고 갈곳없는 불쌍한 사람들이 굴속에 들어 가 살았지요)
여하튼 그 스님이 수도를 하고 있던 어는 날,
호랑이 한마리가 나타나 입을 벌리고 울부짖고 있었답니다
그 스님이 - 그 스님은 청량사 개산자인 '상원조사' - 호랑이 입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더니
큰 가시 하나가 목구멍에 걸려있어서 가시를 뽑아 주었답니다.
며칠뒤, 호랑이는 아리따운 한 아가씨를 업고 와 놓고 갔답니다
스님의 은공에 보답하는 뜻이었다고 공식적으로 이곳 안내판에 써놓고 그림까지 그려 안내하고있습니다
호랑이 이쎄끼가 아무리 고마워도 그렇지 아리따운 아가씨를 납치해와 스님한테 상납을 해?
그것도 굴 파고 들어 앉아 수도하는 중에게 아릿따운 아가씨를 상납하는건 아무리 전설이라도
공식적으로 떠벌려 알릴 필요가 없고 오히려 숨겨야 할 전설인듯합니다. 교육적으로도...
아가씨를 잃어버린 그 가족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얼마전 인기 탈렌트 장자연양이 자살을 했지요? 자살 사유가 "성 상납 강요", 구타등이라고하는데...
호랑이 쎄끼가 그 때부터 벌써 성상납을 해?
[남매탑에서의 달콤한 휴식]
호랑이에게 납치된 그 아가씨는 '상주 사람'으로 혼인을 치루는 날 밤에 납치되었다고합니다
세상에 그렇게 좋은 날에 더스틴 호프만의 '졸업'영화도 아닌데 인간도 아닌 호랑이에게 납치가 되?
그리고 아맀따운 아가씨, 그것도 결혼 첫날밤에 납치해서 스님에게 성상납을 하고...
그 때는 산에 눈이 쌓이고 날씨도 무척 추웠다고 합니다
세월은 가고....추위가 물러 가고 따뜻한 봄이 왔답니다.
그 아가씨는 토굴 파고 수도하며 살고있는 스님하고,
한 계절을 첩첩산중에서 함께 살았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 스님도 혼인 첫날밤에 납치되 온 그 아가씨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음 어느 구석이 찔렸는지
이제와서 남녀의 연을 맺을수 없다고 아가씨를 집으로 돌려 보냈답니다
그러나 그 아가씨의 부모는 딸을 그 스님에게 다시 돌려 보냈답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결혼식 올리는 날 밤에 호랑이에게 납치되어 어느 산중 토굴 속에서 중하고 한 계절을 살다가
다시 돌아 온 딸을 다시 그냥 받아 들여 다른 남자에게 시집 보내랴하겠습니까?
아니면 그 중에게 다시 돌려 보내겠습니까?
요즘이면 몰라도 그 당시라면 더더욱 돌려 보낼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호랑이한테 납치되어 중하고 살다 온 여자를 다시 어디로 시집을 보내겠습니까?
그 스님 - 상원조사-는 돌아 온 아가씨와 혼인 할수 없는 '스님'이었기에 부부의 연은 맺을수 없어
'男妹의 의'를 맺고, 비구와 비구니로서 살았답니다. 처녀 독수공방 시켰단 말인데....??
그들이 죽고 난 다음 그들의 "남매의 정"을 기리기 위해 '상원조사'의 제자 '회의화상'이
이 쌍탑을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학사에는 여승들만 사는가요?
[삼불봉 가는 길]
태조 이성계의 "계룡산 신도안"에 대한 천도 건설사업은
1393년 연말 조선 개국 공신 "하륜(河崙)"의 맹렬한 반대로 파국을 맞습니다.
하륜(河崙)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계룡산을 반대했습니다.
첫째, 남쪽에 너무 치우쳐 한반도의 동쪽·서쪽·북쪽과 교통이 불편하다.
둘째, 주변에 큰 강이 없어 세금은 물론 물산을 운반할 큰 배가 드나들지 못한다.
셋째, 계룡산의 풍수는 중국의 풍수가 호순신(胡舜臣·송나라)이 말한
이른바 ‘수파장생쇠패입지(水破長生,衰敗立至)’의 땅이다.
즉, 흘러나가는 물이 땅의 기운을 약화시켜 나라가 곧 쇠망할 곳에 해당한다.
조정 대신들은 공방 끝에 하륜의 주장을 채택해 계룡산 천도 계획은 결국 백지화되고 말았습니다.
공사 시작 1년만에 중단된것입니다.
참고로 동해안에 있는 양양의 "하조대" 아시지요?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하조대"의 "하"가 하륜(河崙)의 "하"이고, 조준의 "조"를 합쳐 "하조대"라고 이름 지었답니다
하륜과 조준은 조선 개국공신이었지만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잡은 태종 이방원에 의해
정권에서 밀려나 강원도 양양 바닷가로 가 "하조대"에서 은거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이지요
[삼불봉 - 금잔듸고개 갈림길]
조선의 수도가 한양으로 결정되자 계룡산 천도설은 한동안 잊혀졌다고 합니다.
계룡산의 풍수에 대한 평가도 신통치 않았다고하는데
전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인문과학지리서를 쓴 청화산인 이중환선생은
그의 30년 업적을 기록한 ‘택리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계룡산은 웅장하기가 개성의 오관산에 미치지 못하고, 수려함도 서울의 삼각산만 못하다.”
그러나 17세기 말부터 계룡산 신화는 부활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정권 싸움과 붕당정치, 부패한 권력, 부정부패, 전쟁등으로 민심은 조선왕조를 이반하기 시작했고
그로 말미암아 다시 "계룡산 천도설"이 고개를 든 것 같다고 합니다.
[삼불봉 - 금잔듸고개 갈림길]
여암 신경준선생의 "산경표"에 나오는 "금남정맥" 마루금이 계룡산 천황봉과 쌀개봉,
관음봉, 자연성능, 그리고 삼불봉을 지나 여기로 와 금잔듸고개와 수정봉으로 달려
부여의 부소산으로 가 맥을 다하는 그 중요한 "금남정맥" 갈림길에 온것입니다
[삼불봉 가는 길]
홍만종이라는 사람이 1678년에 지은‘순오지(旬五志)'라고 하는 책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계룡산 아래 새 수도 건설을 시작했을 때의 전설을 수록해 놨다고 합니다.
태조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계룡산은 전읍(尊邑 즉,鄭)이 들어설 곳이라며
당장 계룡산을 떠나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떠났다고...
이 설화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고합니다.
이것으로만 보아도 계룡산에 정씨가 도읍한다는 이야기는 서민은 물론, 양반들 사이에도
이미 널리 퍼졌던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정감록'이 널리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군요.
[삼불봉 오르는 길]
삼불봉 오르는 "금남정맥' 마루금에 올라 타니 계룡산의 주봉인 천황봉이 도도한 자태를 드러내고
몸통은 龍이요, 닭의 벼슬을 닮았다는 계룡산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삼불봉 오르는 길]
가파른 계단을 올라 가야 세분의 부처가 사는 '三佛峰'으로 갈수 있으니
힘들이지 않고는 정상을 밟을수 없나 봅니다
[삼불봉 정상]
불교 냄새가 물씬 나는 이름을 가진 三佛峰에 올랐습니다
이 때의 시간이 오후 1시경이었습니다
[삼불봉 정상]
삼불봉은 계룡산8경 중에 제2경으로 겨울철 雪花가 압권이라고합니다
흰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의 삼불봉을 연상해 봅니다
[三佛峰 정상]
三佛峰 정상에 두 선생님이 포즈를 취했습니다
왼쪽이 素山 김홍주 선생님이시고,
오른쪽이 晶巖 김광진 교수님이십니다
오늘 저의 산행기 내용의 상당 부분을 알려 주신 분들입니다
[삼불봉에서 바라 보는 천황봉, 쌀개봉, 관음봉, 연천봉, 문필봉]
계룡산 천황봉은 군부대와 각 방송국, 통신사들의 송수신탑으로 뒤덮혀
일반인들의 접근을 금지하고 있어 갈수 없는 곳입니다.
천황봉 좌측 아래로 "계룡대"가 우리나라 방어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삼불봉 하산]
가파른 삼불봉을 내려갑니다
[奇巖怪石과 바위위에 자라는 소나무]
우리 집에 가져 가면... 돈 좀 벌텐데...
[삼불봉 아래 양지바른 계곡]
이곳에 자리를 펴고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점심식사]
오늘 점심식사 메뉴는 무척 다양했습니다.
다양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전국 각지에서 식사를 준비해 왔기 때문에
'청도 生미나리'에서부터 부산의 생선요리까지.....
계룡산 삼불봉 아래에서 '청도 生미나리' 먹어 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슈~~
[점심식사]
술 마시는 사람이 저 밖에 없어서 혼자 마시기에 다소 쑥스러웠지만....
그래도 계룡산을 또 언제 올지 모르는데 한잔 하지 않을수 없지요 ㅎㅎ
전국에서 가지고 온 다양한 식사에 취하고...
여러 사람들의 따뜻한 정에 취하고...
계룡산의 아름다움에도 취했습니다
저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삼불봉]
삼불봉 아래에서 바라보니 부처 세분이 앉아 있는듯하군요
[삼불봉 아래에서 바라 보는 관음봉, 연천봉, 문필봉]
명산 중의 명산 계룡산
조선 5대 명산을 꼽으라면 어느 산들을 꼽겠습니까
택리지를 쓴 청화산인 이중환선생을 덜먹이지 않아도
백두산, 묘향산, 금강산, 계룡산, 지리산이랍니다
[계룡 저수지]
甲寺 방향에 있는 계룡저수지가 흐릿한 안개 속에 비칩니다
[삼불봉]
자연성릉으로 가며 뒤 돌아본 '삼불봉'
저 봉우리 중턱에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天關門]
[自然城稜]
삼불봉을 지나 봉우리를 두어개 넘어 오니 펼쳐지는 계룡산!
특히 自然城稜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천황봉에서 관음봉까지의 능선은 전설속의 鷄龍을 보여 주는 듯합니다
삼불봉에서 관음봉까지는 계룡산을 대표하는 능선이 자연적인 城郭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自然城綾
[自然城稜 가는 하산 길]
朝鮮十勝地들어 보셨지요?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피란(避亂)·보신(保身)의 장소 열군데...십승지(十勝地)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기록은 〈정감록 鄭鑑錄>〈징비록 懲毖錄〉〈유산록 遊山錄〉〈운기귀책 運奇龜責〉·
〈삼한산림비기 三韓山林秘記〉〈남사고비결 南師古秘訣〉〈도선비결 道詵秘訣〉·
〈토정가장결 土亭家藏訣>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데 대체적으로 공통되는 장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自然城稜 가는 길에 있는 기암괴석]
십승지(十勝地)
풍기의 금계촌-영주군 풍기읍의 금계동·욕금동·삼가동 일대
합천 가야산의 만수동 동북쪽-?
공주의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공주군 유구면과 마곡면을 각각 흐르고 있는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의 지역
부안 호암(壺巖) 아래- ?
예천 금당동 동북쪽- 예천군 용문면 죽림동의 금당실(金塘室) 지역
보은 속리산 아래의 증항(甑項) 근처-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인 시루봉 아래 안부(鞍部) 지역
남원 운봉(雲峯) 지리산 아래의 동점촌(銅店村)- ?
안동의 화곡(華谷) - 봉화 내성면 지역,
단양(丹陽)의 영춘(永春)-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 부근
무주(茂朱)의 무풍(茂風) 북동쪽 -?
[自然城稜]
앗! 이게 왠일입니까?
自然城稜이 아니고 人工城稜을 설치해 놨군요
自然城稜 위를 걷고 싶었는데....
아마도 自然城稜은 보존도 해야하고, 위험하기도 해 일반 등산객들을 위해
이런 人工城稜을 설치 했겠지만 조금은 아쉽군요
[지나온 삼불봉을 뒤 돌아 봅니다]
[自然城稜 가는 길]
[自然城稜 가는 길]
[自然城稜]
自然城稜의 아름다운 경치
[自然城稜]
天然요새같은 自然城이 펼쳐져 있습니다.
정말 멋집니다.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自然城稜]
[自然城稜]
바위들이 거북등처럼 갈라져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풍상을 겪었는지 가희 짐작이 됩니다
얼마나 많은 바람과, 얼마나 많은 눈비와, 얼마나 많은 햇볕을 맞았을까
30억년의 역사를 보는 듯합니다
[自然城稜에서 바라 보는 관음봉]
[自然城稜에서 내려다 본 동학사 계곡]
사진의 한 가운데, 계곡 가운데에 '동학사'가 조그마하게 보입니다
우측 산줄기에 '향적봉'이 있습니다
[自然城稜에서 바라 보는 관음봉]
오늘 마지막으로 힘을 들여 올라야하는 된비알입니다
[觀音峰 오르는 된비알]
가파른 된비알을 치고 觀音峰으로 올라 갑니다
하늘의 소리를 들어러 가는 길 - 觀世音路
[觀音峰을 오르며 뒤 돌아 본 自然城稜]
가운데 세개의 봉우리 중에 가운데 봉우리가 삼불봉인데
큰 봉우리가 세개가 있으니 이것도 삼불봉이 아닐까요?
[觀音峰 정상에 있는 亭子]
觀音峰 정상에는 등산객들의 편의를 위해 이렇게 높은 곳에 亭子를 만들어 놨습니다
[觀音峰에서 내려다 본 동학사 계곡]
[觀音峰에서 뒤 돌아 본 삼불봉과 자연성릉]
[觀音峰에서 바라 본 계룡산의 최고봉 천황봉]
[觀音峰 정상]
[觀音峰 정상석]
일반 등산객들에게는 觀音峰이 계룡산의 정상입니다
해발 816m의 觀音峰 정상석은 오늘 저와 동행하신 素山 김홍주선생님이 건립하셨답니다
제가 오늘 얼마나 자랑스러운 날인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저는 보통 이런 분들과 함께 산행을 합니다..ㅎㅎ
[素山 김홍주 선생님]
素山 김홍주선생님은 정말 山에 대해서는 대단하신 분입니다.
아시는 분들은 이미 모두 아시겠지만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략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素山선생님은 금년에 연세가 78세이십니다. 그런데 무척 건강해 보이시죠?
오늘 계룡산을 저와 함께 거뜬하게 올랐습니다
이제까시 쓰신 山에 관한 책만 아홉권이랍니다
산행문화연구소장님이시며 월간 '산'에서 "호서의 산"을 연재하시기도 합니다
블로그도 운영하고 계시니 찾아 가 보시기 바람니다
http://blog.daum.net/taracode/10185327
[동학사-관음봉-연천봉 갈림길]
관음봉 바로 아래에 동학사로 하산하는 길과, 연천봉, 문필봉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습니다
쌀개봉과 천황봉도 여기서 가야하나 군부대 점령지로 갈수가 없습니다
[동학사-관음봉-연천봉 갈림길]
[동학사로 하산하는 길]
동학사로 내려 가는 계곡길은 가파른 내리막이었으며
너덜이 많이 나딍굴고 있었습니다
[동학사로 하산하는 길에서 올려다 본 관음봉 암벽]
[동학사로 하산하는 길에서 바라 본 향적봉 줄기의 기암괴석]
[동학사로 하산하는 길]
오늘 連天峰을 꼭 갔다 오려고 했습니다만, 시간 관계상 그냥 내려 갑니다.
계룡산 연천봉(連天峯) 꼭대기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암각되어 있다고합니다
方百馬角 口或禾生
방백마각 구혹화생
이 글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고합니다
방백(方百)은 네모진 100년으로 본다. 400년(四百年)이 네모진 100년이다.
그 다음에 마(馬)는 십이지로 환산하면 오(午)이다. 오를 파자하면 80(八十)이 된다.
각(角)은 뿔이 두개라는 소리다.
이를 전부 합치면 482년이라는 숫자가 도출된다.
뒷부분의 구혹(口或)을 합치면 국(國)자가 나온다.
역시 화생(禾生)을 합치면 이(移)자가 성립된다.
옛날에는 이(移)자를 화생이라고도 사용하였다.
앞뒤를 연결하면 ‘482년만에 나라(조선)를 옮긴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조선왕조 창업이 1392년이니 여기에 482년을 합하면 1874년이 나온다.
일본의 조선침략이 시작되는 강화도조약이 1876년에 맺어졌으니 대략 이 무렵에 조선은 나라를 옮긴다.
즉, 망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런 뜻이라면 그것을 몰래 바위에 새긴 사람이 누굴지는 뻔합니다.
그는 조선왕조의 몰락을 염원한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어쩌면 ‘정감록’의 신봉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각석의 풀이는 한동안 민심을 동요시켰다고 합니다.
[동학사 계곡의 고목]
方百馬角 口或禾生이라는 글자를
일본 학자들은 역으로 비결을 이용하여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 합병은 하늘의 뜻이라고 일본 학자들은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도참이 서울 삼각산 꼭대기 바위에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백운대에서 얼핏 본듯한데
관심있게 보지 않았는데 의미심장한 글이라는군요
‘방부복과(方夫卜戈) 구혹화다(口或禾多)’라는 글씨가 있다고합니다.
방부(方夫)를 조립하면 경(庚)을 가리키고, 복과(卜戈)는 술(戌)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경술(庚戌)년에 나라를 옮긴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는군요
따라서 1910년인 경술년의 한일합방이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고합니다
朝鮮이 망한 날과 같은거지요
정신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잠깐 한눈 팔면 코베어 가는 그런 세상입니다
[동학사 계곡의 고목]
↓ 隱仙폭포 - 설명은 사진 참고 하세요
↓쌀개봉 - 설명은 사진참고하세요
[東鶴寺]
東鶴寺는 절의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으므로 동학사라고 했으며,
고려의 충신이자 '동방이학'의 조종인 정몽주를
이 절에 제향했으므로 동학사라고 했다는 설도 있답니다.
[東鶴寺]
東鶴寺는 女僧들이 수도하는 곳입니다.
수덕사와 같은 비구니들의 가람입니다
[東鶴寺]
東鶴寺는 임진왜란, 6.25를 거치며 완전히 불타없어졌답니다
현재의 건물들은 모두 1960년 이후에 새로 지어진 것이라합니다
[東鶴寺 肅慕殿, 東鷄詞, 三隱閣]
素山선생님이 힘주어 설명해 주신 鷄龍山招魂閣址
素山선생님은 계룡산 동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적지는 바로 이곳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절간에 '홍살문'이 있는 이유가 바로 이곳 때문에 있다고 하더군요
肅慕殿은 세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단종'을 모신 殿이라고하며
'단종' 복위를 꾀하다 참혹하게 처형 당한 사육신과 그외에 순절한 충신들의 원혼을 모신 곳이랍니다
세조2년에 매월당 김시습이 초혼제를 여기서 지내니, 세조도 감복받아 이들을 기리도록 허락하였답니다
[東鶴寺]
東鷄詞는 신라 19대 눌지왕 시절에 인질로 일본에 잡혀간 눌지왕의 아우 '매사흔'을
구출하고 왜지에서 산화해 간 박제상의 항일 추혼을 모신 곳이랍니다
[길상암]
三隱閣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고려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 즉 三隱의 위패를 모신 곳이라합니다
[鶴바위]
東鶴寺라는 이름을 짓게 해준 바위가 바로 이 "鶴바위"였다고합니다
鶴 같아 보입니까? 저는 그냥 암벽으로 보이는데...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대화에서
"부처의 눈엔 중생도 부처로 보이고, 개눈엔 똥만 보인다"고 했으니
저는 속세인간임에 틀림없나 봅니다..ㅎㅎ
길상전에서 조금 내려 오면 좌측에 있습니다
[국립공원 계룡산 관리사무소]
[뒷풀이]
晶巖 선생님이 모두를 대전 제1의 참치회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오랜만에 참치회를 먹으니 입안이 혁명을 일으킬 정도였습니다
晶巖 선생님 고마웠습니다
횐님들 무지 무지 반가웠습니다
이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곳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산행 개념도]
『漢北紺岳枝脈2區間』
간파고개-감악산-설마치고개(어룡고개)-
무건이고개-수레미고개-수레너미고개
2009년 3월 8일
春三月 두번째 일요일
약간의 안개가 끼었으나 화창한 봄날씨에 바람도 없는 산행하기 좋은 날
漢北紺岳枝脈2區間을 정복하기 위해 발길을 옮깁니다
오늘도 "서울백두클럽"과 함께 합니다
[간파고개]
경기도 양주시와 연천군의 경계선이 되는 "간파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원래 1구간 날머리였던 "수레너미고개"에서 감악산을 넘어 이곳으로 오려고 했으나
2區間 거리가 다소 길어 逆으로 진행합니다
[간파고개]
이 고개 이름은 지도에 따라 다르게 표기하고있습니다. 주로 간패고개라고들 하더군요
정확한 이 고개 이름은 간파고개입니다.
방패 干, 고개 坡로서 양주시에서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로 넘어 가는 고개입니다
[간파고개]
漢北紺岳枝脈3區間 들머리가 되기도하는 '간파고개' 동쪽으로 "마차산" 가는 길입니다
이곳에서 산행 준비를 하고 출발합니다.
이 길은 다음 한북감악지맥3구간 들머리가 됨으로 3월22일에 다시 이곳에 와
앞에 보이는 길로 "마차산"을 오르고 "도감포"로 갈것입니다
[간파고개]
지맥 마루금은 앞의 건물을 가로 질러 가야합니다만, 피해서 좌측으로 내려가
우회하여 감악산을 오릅니다
9시45분 산행을 시작합니다
[간파고개]
약간 양주 방향으로 내려가 감악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비탈길을 치고 오릅니다
비탈길을 치고 올라 "간파고개"를 뒤돌아 봅니다
저 멀리 漢北紺岳枝脈3區間의 핵심 봉우리인 마차산이 보이는군요
3월22일에 저곳으로 올라,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도감포"로 가서,
漢北紺岳枝脈을 졸업할 예정입니다
"간파고개"에서 감악산 정상까지는 거의 오르막입니다
된비알을 치고 올라 가야합니다
[감악산]
약 30분 정도 된비알을 치고 오르면 멀리 감악산 정상과 '임꺽정봉'이 보이기 시작하며
오늘 산행은 저 감악산 정상을 보며 오르고, 감악산을 뒤돌아 보며 목적지까지 내려 갑니다
그러므로 오늘 산행기에는 '감악산 임꺽정봉'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너무 자주 등장하여 다소 식상할수도 있겠으나
그것마저 없었다면 우리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알수 없었을 것입니다
'길은 길에 연이어 끝이 없으므로....'
감악산은 모두 아시다시피 京畿5岳인 개성의 송악산, 서울의 관악산,
포천의 운악산, 경기도에선 가장 높은 가평의 화악산과 함께 명성을 날리고 있는 산입니다
[임꺽정봉]
감악산의 대표 봉우리는 감악산 정상이라기 보다 "임꺽정봉"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감악산을 京畿5岳에 들어 갈수 있게 해준 봉우리라 할수 있으니
감악산에 가면 반드시 "임꺽정봉"을 올라 보아야합니다
오르는 길엔 소나무가 제법 많으며,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헬기장]
'간파고개'에서 쉬지 않고 1시간을 오르니 '헬기장'이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산행을 할때엔 30분 정도 오르면 한번 쉬는데
"서울백두클럽"의 횐님들은 1시간에 한번정도 쉽니다
산행 초보들에겐 다소 벅찰수 있는 진행입니다만....
여하튼 걷는데는 모두 도사들입니다. ㅎㅎ
[헬기장]
10시55분에 헬기장에 도착했으니 간파고개에서 1시간10분 걸렸습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휴식
감악산 정상이 바로 보입니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20분 정도 걸립니다
감악산 정상에는 KBS DMB 방송 전파송출탑이 어마어마한 크기로 솟아 있어
양주,파주,연천 어느 곳에서나 감악산을 알아 볼수 있습니다.
[헬기장]
헬기장에서 남서쪽으로 보이는 웅장한 암봉이 '임꺽정봉'입니다
옛날 임꺽정이 관군에 쫏겨 도망칠때 저곳 봉우리 낭떨어지 중간에 나있는
조그만 굴에 들어가 숨었다고해서 '임꺽정굴'이라고 한답니다
'임꺽정굴'은 일반인들은 가 볼수 없는 낭떨어지에 있는데 남선굴(南仙屈)이라고도 한다는군요
고려말의 문신인 '남을진'은 정치가 문란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사천현으로 낙향하였답니다
이성계가 쿠데타로 조선을 개국한 후 벼슬에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고사하였다고 합니다
이성계는 두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충절을 높이 사 사찬백(沙川伯)에 봉하였는데
남을진이 통곡하기를 "내가 산속 깊이 들어가지 못하여 이런일이 벌어졌노라"고 하면서
쿠데타로 왕이 된 이성계로부터 벼슬을 받는 것이 무지 부끄러워, 머리를 풀고 감악산 석굴속에 들어가
눈으로 해를 보지않고 발로 석굴밖의 땅을 밟지 않으면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합니다
그래서 후세사람들은 이곳을 '남을진'이 神仙이 되었다하여 '南仙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1842년에 쓰여진 "양주목읍지"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이성계의 쿠데타는 수많은 고려충신들을 '두문불출'하게 만들었습니다
[헬기장]
헬기장에서 북쪽을 바라 보면 북능선이 보이고, 중간에 있는 암봉이
'자라바위'라고하는데 여기서는 그 모양새를 알아 볼수 없군요
헬기장에서 지나온 '간파고개'와 3구간에서 갈 '마차산'이 아득하게 보입니다
마차산 뒤로 '소요산'이 운해 위에 떠있습니다
[감악산 정상 오르는 길]
헬기장에서 감악산 정상까지가 가장 가파른 오르막입니다
경치 구경 할 틈도없이 숨막히는 된비알을 오릅니다
[감악산 정상 오르는 길]
京畿5岳 다웁게 바위들이 웅장함을 자랑합니다
[감악산 정상 오르는 길]
[감악산 정상 오르는 길]
정상부 북쪽사면에는 아직도 눈이 녹지 않고 그 수명을 연장하려는듯
서로 꼭 껴안고 봄기운을 무서워하고 있는듯합니다
[전망대]
[전망대]
전망대에서 천길 낭떨어지 아래로 펼쳐지는 양주시 은현면과 남면,
그리고 좌측 '봉암저수지'와 우측 제법 큰 '원당저수지'가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감악산 정상]
감악산 정상이 다가 옵니다
[성모 마리아 상]
북녁을 향해 서있는 성모 마리아상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감악산에서 성모 마리아상이 북녁을 향해 평화를 호소하고...
성모 마리아상을 보니 생각나는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지난 2월 16일 선종(善終)하신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께서
2003년 11월 18일 서울대 초청강연 중 하신 말씀을 옮겨 봅니다.
삶이 뭔가, 삶이 뭔가 생각하다가 너무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기차를 탔다 이겁니다.
기차를 타고 한참 가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웃음)
추기경이 하신 말씀이니 더욱 재미있게 느껴져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은 그렇게 화려한것도 아니고, 그러게 초라한 것도 아닌
그냥 사는 모습 그 자체이지요.
[KBS DMB 방송 전파송출소]
감악산 정상에는 "KBS DMB 방송 전파송출소"를 큰 규모로 지었습니다
지난해에 왔을 때엔 공사중이었는데 이젠 완공이 되었고
감악산 정상까지 자동차도로를 포장까지 했더군요
요즘은 산 정상을 군부대 대신에 방송이나 통신사들의 건물들이 차지하고있습니다
[감악산 정상]
감악산 정상으로 오르는 마지막 오르막
[감악산 정상]
감악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제법 넓은 정상부입니다만 많은 산객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올라온 '간파고개'에서의 감악지맥 마루금을 따라 오르는 코스에선 일반 산객들을
단 한명도 볼수 없었습니다만, 정상에 오르니 무척 많은 산객들이 우굴거리는군요
이유는 감악산 등산코스는 주로 '설마리' 감악 계곡의 "법륜사"에서 원점회귀 산행을 하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지맥 종주자들이 다니는 길에는 일반 등산객이 힘들고 길찾기도 어려워
쉽게 접근할수 있고 주차하기도 편리한 일반 등산로를 좋아하고, 지맥길은 싫어하기 때문이지요.
프로와 아마의 차이라 할수 있을려는지....ㅎㅎ
지맥을 다녀 보면 일반 등산로를 다니는게 너무 재미없다는 것을 확연히 알수 있을텐데....
[감악산 정상]
감악산 정상은 現代와 古代가 공존하고 있는듯합니다
모든 글자가 세월의 풍상에 이기지 못하고 사라진 이름 모를 비석과
미래의 방송이라하는 초현대식 DMB방송 송출 안테나가 천하를 내려다 보는 감악산 정상
그리고 군부대의 초소
많은 것을 생각하게합니다
[감악산 정상석]
감악산은 감색 紺. 큰산嶽
[감악산 정상]
뒤에 보이는 비석은 세월의 풍상에 비석의 표면은 모두 마모되어 글자를 젼혀 알수 없어서
공식적인 안내판에 추측으로만 이 비석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설인귀 제단"이라는 설과 "진흥왕 순수비"라는 설 두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설인귀는 당나라 태종때 요즘 말로 하자면 쫄병으로 군대에 입대해서
사령관이 되는 입지전적 인물이었죠. 주로 우리 고구려를 침략하는 앞잡이 역할을 하였으며,
결국 고구려를 멸망 시키는 핵심 장군이었답니다
진흥왕 순수비라는 설은 모양이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와 매우 흡사하다는데서 유래하였답니다
그러나 모두 추정만 할 뿐 정확한 사실은 모르고 있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모로 조사한 내용을 '설마치고개'로 하산할때 알려 드리겠습니다
[감악산 정상]
감악산 정상에서 북서쪽 '까치봉'으로 가는 길로 나가면
군부대 초소와 통신사들의 안테나가 있는데 이곳으로 나가면
1,600년전에서 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로 차지하려고했던
"임진강"의 "고랑포"와 적성평야가 펼쳐집니다
[감악산 정상에서 바라 보는 적성과 임진강]
오늘은 안개로 조망이 트이지 않는군요.
이곳에서 京畿五岳이 모두 보인다는 곳인데....
특히 개성의 '송악산'이 맑은 날에는 잘 보인다는데 앞에 임진강도 희미하게 보이는군요
앞에 펼쳐진 마을이 적성이며 城이 있었다고 積城입니다. 그 앞으로 임진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임진강 주변에는 고구려시대와 고려시대의 수많은 城이 있으나 발굴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임진강을 건너는 '고랑포'가 있습니다. 고랑포는 영남지방에서부터 개성으로 가는
핵심 교통로였다고합니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화신백화점 분점"이 이곳에 있었다고하니
그 옛 명성을 짐작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6.25는 그러한 영화를 송두리째 앗아 가 버렸습니다
'도라산'은 잘 보이는데 안개 때문에 오늘은 보이지 않습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향 '서라벌'로 돌아 가지 못하고 뭍힌 곳이기도합니다
新羅의 都邑인 경주로 돌아 가지 못하고 낙랑공주와 함께 고향을 바라 보며 눈물을 흘리며
그리워했다는 것이 '都羅山'의 이름이 지어지게 된 동기라 하니
이곳이 어떤 곳인지 가히 짐작할수 있습니다
[감악산 정상에서 바라 보는 임꺽정봉]
감악산 정상과 임꺽정봉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으며 '감악지맥 마루금'은
앞 봉우리 우측으로 나있습니다.
임꺽정봉을 올랐다가 다시 마루금으로 되 돌아 와야합니다
[어름골재]
감악산 정상과 임꺽정봉 사이에 법륜사에서 올라 오는 계곡 등산로를 만나는데
이곳이 '어름골재'입니다.
법륜사에서 이곳까지 얼음이 오래토록 남아 있어 그렇게 불리워졌다지만
이 계곡엔 숯을 굽는 가마가 많이 있었다고합니다
[임꺽정봉 정상으로 가는 길]
[임꺽정봉 안부]
[임꺽정봉]
임꺽정봉을 오르는 코스에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좌측으로 올랐다가 다시 내려와야합니다
[임꺽정봉]
암벽에 로프 하나 걸려있어 오랜동안 줄을 서서 오르고 내려야합니다
[임꺽정봉]
암벽을 오르면 임꺽정봉 설명안내판이 있는데 글자들이 모두 지워져 알아 볼수 없습니다
임꺽정은 홍길동(洪吉童)·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일컬어집니다
도적도 그냥 도적이 아니라 의적으로서 백성들에게 인기있는 도적이었습니다
조선 명종시절 몰락농민과 백정·천인들을 규합하여 지배층의 수탈정치에 저항하며
요즘 말로 하자면 민주주의를 부르짖었지요
[임꺽정봉]
임꺽정봉에서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 안내판이 있는 곳을 바라봤습니다
林巨正은 경기도 양주 '불곡산' 아래에서 백정 신분으로 태어나 황해도에서 주로 생활했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비슷한 처지의 농민 수십 명과 그 가족으로 집단을 이루어
황해도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도적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날쌔고 용맹스러우며 지혜로웠던 그는 1559년경 황해도·경기도·평안도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이 지역의 관청이나 양반·토호의 집을 습격, 이들이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인 재물을 빼앗았습니다.
또한 서울·평양 간 도로와 그밖의 주요교통로를 장악하여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토지세·공물·진상물 등을 탈취했습니다. 빼앗은 재물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어 의적으로서의
성가를 높이고 이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기에 오랜동안 세를 유지 할수 있었습니다
관군의 끈질긴 추격으로부터 도망하던 중 마침내 1562년 1월 서흥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당해,
15일 만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임꺽정봉에서 바라 본 '장군봉'과 지맥 마루금]
감악산에서 가장 아름운 곳이 이곳입니다.
'임꺽정봉-장군봉-병풍바위-악귀봉'능선
[임꺽정봉에서 바라 본 '악귀봉'과 지맥 마루금']
바로 앞 가운데 능선이 '설마치고개'로 가는 지맥 마루금입니다
[임꺽정봉에서 바라 본 '신암저수지'와 지맥 마루금]
가운데 오른쪽 능선이 지맥 마루금이며, 신암저수지를 옆에 끼고 내려갑니다
오른쪽 멀리 보이는 하얀 부분에 있는 도로가 '설마치고개'입니다
[임꺽정봉을 내려 갑니다]
감악지맥 마루금은 임꺽정봉 앞 능선으로 올라 가야합니다
[부도골 내려 가는 길]
저는 부도골로 내려 가는 길로 내려가 오른쪽 으로 올라가 마루금을 올라 탓습니다
[장군봉]
장군봉 마루금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며....
[악귀봉과 신암저수지]
장군봉 능선에서 바라 본 악귀봉과 신암저수지입니다
마루금은 '악귀봉'을 오른쪽으로 우회하여 '신암저수지' 방향으로 내려 가야합니다
[장군봉 능선에서 바라 본 감악산 정상]
감악산 정상은 岳山이라 할수 없고, 이곳 임꺽정봉과 장군봉, 악귀봉이 岳山입니다
[병풍바위-얼굴바위]
사람의 얼굴 옆모습처럼 보인다고 얼굴바위라고도 하며, 병풍바위라고도한답니다
'임꺽정봉'이 멀리 보입니다. 임꺽정굴에서 관군의 추격을 뿌리치기위해 숨었을 임꺽정.
봉건사회에 저항하며 짧은 한 생애를 보낸 임꺽정........
요즘에 태어 났더라면 국회의원 정도는 했을텐데...
[병풍바위 내려가는 계단]
[악귀봉]
아래 안부에서 앞에 보이는 '악귀봉'을 우회하여 지맥 마루금으로 가야합니다
지나온 병풍바위 계단을 뒤돌아 보았습니다
'악귀봉' 안부에서 우회합니다
앞으로 '한북감악지맥2구간을 종주 하실 분들은 '서울백두클럽' 표지기를 참고하시면
많은 도움이 될것입니다
[지맥 갈림길]
매우 중요한 갈림길입니다.
일반 등산객들은 모두 이곳에서 법륜사로 하산합니다
그러나 지맥 종주하는 산객들은 여기서 앞으로 직진하여 '악귀봉'을 우회하여
전진해야합니다. 이곳에서 알바를 많이 하니 유의하여야합니다
[서울백두클럽 표지기]
서울백두클럽의 초록색 표지기를 따라 가면 길찾기가 매우 쉽습니다
'악귀봉'을 돌아 내려 와서 뒤돌아 본 '임꺽정봉'입니다
절벽에 굴도 보이는 듯합니다
[어룡고개로 하산 하는 길]
일반 등산객을 단 한명도 찾아 볼수없는 지맥길
조용하고 한산합니다
[군 유격 훈련장]
조금 내려 가니 군 유격훈련장이 나왔으며,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이곳에 12시 45분에 도착했으니 '간파고개'에서 3시간이 걸렸습니다
[군 가스 실습실]
현역으로 군대를 갔다 오신 분들은 한번쯤은 들어 가 봤을 '가스실'이 있습니다
이곳은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이었으나 해제되어 이렇게 이런 시설을
추억으로 삼으며 다닐수 있게 됬으니 격세지감이 듭니다
가스실에서 바라 본 임꺽정봉
추억의 가스실을 지나 지맥 마루금을 따라 갑니다
[신암 저수지]
신암저수지는 지금으로부터 약30년전에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만들어 졌다고하며
면적은 95ha이고 저수량은 387,000t이라고 합니다
신암저수지를 조금 지나니 우측으로 '설마치고개' 971번 지방도로가 보입니다
[서울 양천구 목동에 사시는 沈熔輔 先生]
저의 산행기를 읽으시는 분들에게 꼭 소개해 드리고 싶은 분이십니다.
이 분의 연세가 72세이신데 아직도 일주일에 평균 4~5일은 등산을 다니신답니다
지난번에 우리나라 4,000산 등정 기록 기념도 했더군요. 축하드림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백두대간 9정맥은 물론, 전국 대부분의 산에는 이 분의 표지기가 달려있습니다.
산행하시다가 4,000산 등정, 서울 陽川 沈熔輔라는 표지기가 보이면
이 분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72세에 이렇게 산을 오를수나 있을려는지 그게 더 관심이 갑니다. 에구~
[설마치고개 - 어룡고개 ]
오늘 산행의 반환점 정도 되는 "설마치고개'가 보입니다
오전에 '간파고개'에 우리를 내려 놓았던 관광버스가 이곳에 와 다시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로를 느끼는 분들을 위해서 산로를 탈출할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산행을 하니 초보 산객들도 얼마던지 참여 할수 있습니다
[설마치고개]
설마치고개에는 터널화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설마치고개 - 어룡고개 ]
오후 2시 5분에 '설마치고개'에 도달하였으니, '간파고개'에서 4시간 20분이 걸렸습니다
앞으로도 4시간을 더 가야 합니다
[설마치고개 - 어룡고개 ]
양주시 남면 시낭ㅁ리에서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로 넘어 가는 고개 이름입니다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말을 타고 달리던 고개라고 붙여졌다고합니다
설마치고개는 한자로 薛馬馳라고 쓰는데 馳가 "말 달릴 치"라는 말이므로
설인귀가 말을 타고 '무건리'에서 감악산으로 무술 훈련을 하던 속이라는 말입니다
[설마치고개 - 어룡고개 ]
설마치고개를 지나 지맥길을 오르며 내려다 본 설마치고개
이제는 설인귀도 임금도 간곳없고 산객들과 차량들이 넘나들고 있습니다
薛馬馳고개를 어룡고개라고도 하는데, 한자로 御龍이라고 쓰며
여기서 龍은 전설 속의 동물 용이 아니라 언덕 룡입니다
즉 임금이 넘어 간 고개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전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 항복을 하러 이 고개를 넘어,
고랑포를 지나 개성으로 갔다고 합니다. 항복하러 가며 禮物을 수레에 싣고 갔는데
그 수레의 행렬이 십리를 넘었다고 합니다.
'경순왕'의 맏아들 "金一"은 항복을 거절하고 신라를 재건하기 위해 금강산으로 가지요.
프로 레스링 선수 金一과 이름이 같은 그가 바로 그 유명한 "麻衣太子"이지요
"麻衣太子"는 왕건의 고려군사들에게 들키지 않기위해 거지 행각을 하기위해
삼베옷을 입고 갔다고해서 얻어진 닉네임이지요. 본명은 "金一"입니다
설마치고개를 지나 반대편 마루금에 올라 감악산쪽 신암저수지 전망대가 있었던
봉우리를 뒤돌아 보았습니다
[삼거리]
날등에 올라 서면 첫번째 삼거리가 희미하게 나오는데 우측으로 갑니다
설마치고개에서 수레너미고개까지는 알바하기 쉬운 갈림길이 많으므로
주의를 많이 요합니다
[멀어져 가는 감악산 임꺽정봉]
이제부터 감악산 임꺽정봉을 뒤로하며 계속 전진합니다
[무건이고개 가는 길]
[무건이고개 가는 길]
'서울백두클럽 회원' 이외의 산객들은 단 한명도 만나지 못한
호젓한 산길을 봄바람 맞으며 걷고 또 걷습니다
[군 유격 훈련장]
이곳 능선도 군 훈련장이었습니다
탱크들이 다니는 넓은 길이 나오면 직진하여 마루금으로 올라 갑니다
[무명봉]
철조망을 끼고 매우 가파른 된비알을 올라 갑니다
이미 많은 시간을 걸었기에 피로를 많이 느낌니다
[무명봉]
사진에서는 완만하게 보이는 봉우리이지만 실제는 경사가 심합니다
[무명봉]
봉우리 정상에 올라 휴식을 취했습니다.
'설마치고개'에서 약 1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파평산]
북서쪽으로 '파평산'이 보이는군요
[탱크 훈련장]
탱크들 보이시나요?
한북정맥에 붙어있는 지맥에는 군부대 투성이였지요
[무건이고개 가는 길]
薛仁貴에 대해 제가 조사한바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중국의 경극(京劇) 독목관(獨木關)에는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과 설인귀(薛仁貴),
그리고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등장합니다.
그 경극의 내용은 이세민이 고구려 영토인 봉황산(鳳凰山)에서 연개소문에 패해 위기에 빠졌을 때
설인귀가 나타나 구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구당서(舊唐書)'에 나오는 '설인귀 열전(列傳)'은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고 돌아온 이세민이
설인귀에게 "짐(朕)은 요동(遼東)을 얻은 것에 기뻐하지 않고, 경을 얻은 것에 기뻐한다"
(朕不喜得遼東,喜得卿也)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한쪽 눈을 잃고 애꾸 눈이 되어 패주한 주제에 “요동을 얻었다”는 말은 허세에 불과하지만
당태종 이세민에 의해 이후 설인귀는 중국인의 영웅이 됩니다.
서기 670년에는 지금의 감숙성(甘肅省)과 신강성(新疆省) 일대를 공격해 큰 공을 세우기도 하지만
중국인들이 설인귀를 좋아하는 근본 이유는
그가 일개 농민 출신으로 대장군까지 된 입지전적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무건이고개 가는 길]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이제는 힘드는 봉우리가 되겠습니다
설인귀는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제사를 지내던 인물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경기도 적성현(積城縣)조는 감악산(紺嶽山)을 설명하면서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사람이 당나라 장수 설인귀를 제사 지내어 산신(山神)을 삼았다'고
한다”라고 기록했으며, 또한‘신증동국여지승람’적성현 조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한 배경은‘한국지명총람' 파주 조에 실려 있습니다.
"설인귀는 적성 부근에서 태어나 감악산에서 무술을 익혔는데,
당나라에 가서 모국인 고구려를 쳤다.
그리고 후에 이를 자책해 죽은 뒤 감악산의 산신이 되어 우리나라를 도왔다"는 것입니다.
황현(黃玹)도 ‘매천야록’에서 “전설에 의하면 적성현 설마치(薛馬峙)는 설인귀가
말을 달리던 곳이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이것는 아마도 설인귀를 고구려 출신으로
만들고 싶었던 후세인들의 창작일 것이라 여겨집니다.
[무건이고개 가는 길]
지금 배경 음악으로 흐르고 있는 음악은 콜럼버스 미대륙발견 500주년 기념영화 주제곡입니다.
70년대 초부터 꾸준히 솔로 앨범을 발표해 온 반젤리스가
1992년에 발표한 영화 <1492 Conquest Of Paradise>에서 특유의 웅장한 사운드를 들려주며
자신의 작곡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곡으로 유명합니다
[무건이고개 가는 길]
"지구는 둥글다"라는 신념 하나로 당시엔 낭떨어지라고 하던 수평선을 넘어
新大陸을 찾아 나선 '컬럼버스'
그래서 이 음악의 제목이 Conquest Of Paradise입니다
컬럼버스는 이탈리아 사람이지만 스페인의 도움으로 신대륙 탐험에 나섰지요
그는 죽을 때까지도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라고 믿었답니다.
그래서 아직도 아메리카 원주민을 미국 이외의 나라에선 '인디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참고로 미국 사람들은 '인디언'이라고 하지 않고 'Native American'이라고 부름니다
미국에 갔을 때 원주민을 '인디안'이라고 하면 않된다는걸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감악산 임꺽정봉]
감악산 임꺽정봉이 점점 더 멀어져 갑니다
[무건이고개 가는 길]
[무건이 고개]
3시 35분에 무건이고개에 도착했습니다
'무건이고개'에는 초소가 있으며 갈림길이었습니다
양주시 남면 점말에서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로 넘어 가는 고개입니다.
즉 '무건리고개'가 음운변화를 거쳐 '무건이고개'로 불리워지고 있다고합니다
'무건리'는 武建里로 쓰며 '설인귀'의 전설이 있더군요
'설인귀'는 구척 장신으로 어려서부터 기골이 수려하고 힘이 센 장사로서
당시 세도가인 '상산 김씨'묘를 쓸 당시 술을 세동이나 마시고 난 후
아름드리 나무들을 캐내는데 무밭에서 무 뽑듯이 하였다 합니다.
그 후 율포리 임진강변 벼랑에 갔을 때 석벽에 있는 바위가 갈라지면서 용마가 뛰어나와
말을 타고 감악산 천왕봉 아래 백운동을 가니 밭을 갈던 농부가 쟁기에 걸려 캐낸
큰 궤짝속에서 갑옷과 투구를 얻었으며 백운대 삼태봉(4체봉) 칼바위에서 보검을 얻은 후
武建里 골짜기에서 감악산을 오르내리며 군마훈련을 익혀
무훈을 세웠다하여 武建里로 호칭하였다고 합니다
[군부대 시설]
[수레미고개]
수레를 밀고 올라야 한다고 붙여진 '수레미고개'가 나타납니다
[수레미고개]
'수레미고개'는 양주시 남면과 광적면의 경계이며,
파주시 적성면의 경계가 됩니다
[고도계 307m봉]
막바지 제일 높은 봉우리를 오릅니다.
이제까지 많이 걸었기에 무척 힘이 듭니다
[고도계 307m봉]
[고도계 307m봉]
[고도계 307m봉]
마지막으로 높은 봉우리를 올라 주변을 조망합니다
[고도계 307m봉]
감악산은 점점 더 멀어져 갑니다
[고도계 307m봉]
멀리 "마차산'과 그 뒤로 아득히 '소요산'이 보이는군요
[고도계 307m봉]
고도계 307m봉에서 바라 본 "노고산"
[군 화생방 훈련봉]
[불곡산과 도락산]
마지막 봉우리에서 마지막으로 뒤 돌아 본 감악산과 마차산,
마지막 봉우리에서 바라 본 1구간의 노고산
[수레너미고개]
오늘 산행의 종착역 '수레너미고개'에 저녁 6시 정각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니까 '간파고개'를 오전 9시 45분에 출발하였으니 8시간 15분이 걸렸습니다
'수레너미고개'는 '수루네미고개', 수루너미고개', '수르레미고개'등등으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조사한바로는 수레너미고개"가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
[수레너미고개]
이곳은 양주시 광적면에서 파주시 법원읍 오현리로 넘어 가는 고개입니다.
옛날 중국으로 넘어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답니다.
그래서 이 고개는 수레가 끊임없이 넘어가 '수레넘이'-'수레너미'로 음운변화 하였다고하며
한문으로는 車踰嶺, 또는 車踰峴으로 대동여지도와 조선화유승람에
나와 있다고 하니 수레너미고개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의 地名은 이렇듯 세월과 사투리등으로 많이 변해서 語原을 알기 어려워졌는데
국토지리원에서 재정립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뒷풀이]
긴 산행을 끝내고 함께하는 뒷풀이 시간은 정말 즐겁습니다
그러나 너무 즐거운 나머지 필요 이상으로 뒷풀이를 오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일회용품 줄이기, 적당한 음주문화 창달, 고품위 분위기 조성 등으로
좀더 발전된 산악회 모임을 만들기 위해 서로 더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뒷풀이]
18.7km를 걸었으며, 8시간 15분이 걸렸습니다
서로 완주를 축하하며, 시원하게 술 한잔~~!!
『北漢山 입술바위』
우의동-도선사-상궁바위-입술바위-낙화암 암장-
쪽두리봉-백운산장-위문-대서문-산성입구
바야흐로 어두침침하고 황량한 겨울은
春三月 햇살에 얼굴을 밝게 폅니다
친구끼리 연인끼리 이웃끼리 화기애애하게
大自然 속으로 旅行하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아무리 붙들고 놓지 않으려해도 떠날 겨울은 떠나고
올 봄은 또 옵니다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봄나들이의 첫 산행은
말로만 듣고 다른 분들이 찍은 사진에서만 보던
『北漢山 입술바위』를 직접 찾아 보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우의동 시내버스 종점]
30년전이나 지금이나 특별히 변하지 않은 듯한 '우의동 버스 종점'
그 버스 종점에서 바라 보는 삼각산 -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 는 30년이 아니라
수십억년을 큰 변화 없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감싸고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2월28일(토)
적당한 기온, 잔잔한 바람은 산행하기에는 좋은 날씨였습니다
[우이동 버스종점에서 바라 보는 '우이암']
앞 가운데 봉우리인 도봉산 남능선에 "소의 귀" 모양을 하고 우뚝서 있는 "牛耳巖"
가운데 봉우리의 약간 길죽한 바위가 '우이암'입니다만, 저 바위 때문에 이 동네 이름이
'우이동'으로 만들어 졌으니 저 바위의 위력과 명성을 알만하지 않겠습니까?
자세히 보면 저 봉우리가 "소"의 형상을 하고 우이암이 "귀"가 된다고 하는데....
우이암 뒤로 도봉산의 주봉인 만장대와 자운봉이 보입니다
[도선사와 백운대 등로입구]
실질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도선사 앞입니다.
우이동 버스 종점에서 이곳까지 걸을려면 40분 정도 아스팔트 길을 올라와야합니다
북한산 등산을 하기도 전에 맥이 빠지는 그런 코스입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택시가 성업 중에 있습니다. 합승을 하는데 한사람당 1,500원입니다
내려 갈때는 1,000원
이곳에서 똑 바로 올라 가면 하루재를 지나 백운대와 인수봉,
그리고 영봉과 상장능선으로 갈수 있습니다
좌측 뒤로는 도선사로 갑니다
[도선사 입구]
북한산성 용암문 코스로 가려면 이곳 도선사 경내를 통과해서 가야합니다
오전 10시 30분에 산행을 본격 시작합니다
[도선사 일주문]
道詵寺는 매우 유명한 절이지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박정희대통령과 육영수여사가 다닌 절이기에 유명해 졌습니다
그리고 정주영 현대그룹회장도 이 절에 다녔지요
박정희 육군 소장이 쿠데타 모의를 한곳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육영수여사의 佛心은 대단해서 이곳 도선사의 주지였던 '청담'대종사로부터
대덕화 大德華라는 佛名까지 받았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佛心이 등을 돌렸는지 두분 모두 총탄에 맞아 죽었습니다
[청담스님]
도선사를 開山하신 분은 신라시대 道詵國師입니다
그러나 도선사가 重建되고 번창되게 한 스님은 앞에 보이는 "청담스님" 때였습니다.
박정희 군사정권 때에 박정희대통령의 후광을 업고 이 절의 주지인 청담스님이
"한국불교정화유신운동"의 총수가 되면서 조계종 종정까지 되며 도선사를 최고의
절로 만들었습니다. 주변의 도로는 모두 박대통령이 만들어 준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용암문 등산로 입구]
북한산성 용암문 코스로 오르는 등산로는 도선사 경내 좌측으로 나 있으며
"道詵橋"를 지나 갑니다
[용암문 등산로]
저도 이 코스로는 처음 와 봅니다
비교적 사람들이 없어 한적하며, 용암문까지 거리가 짧아 동네분들이 주로 이용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코스라고합니다
[도선사와 삼각산]
도선사의 규모가 장난이 아닙니다.
대부분 현대식 철근 콩크리트로 지어진 많은 건물 뒤로
삼각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있습니다
[용암문으로 가는 등산로]
가파른 된비알이 나옵니다.
여기서 부터 정신 차리고 올라야 "상궁바위"를 보고 올라 갈수 있습니다.
잘못하면 그냥 지나치기 일수입니다
[상궁바위]
도선사에서 급경삿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처음으로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은 큰 바위가 나옵니다
저 바위 뒤에 "상궁바위"가 있으니 관심을 가지고 올라야 합니다
[상궁바위]
큰 바위 오른쪽을 돌아 뒤로 가면 "상궁바위"가 나옵니다
정식 명칭은 "김상궁사리탑"이 있는 바위가 되겠습니다
등산로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그냥 지나칩니다
[상궁바위]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위에는 구멍이 나 있는데 이곳이 "사리함"이라하며
그 아래에 쓰여 있는 글자는 모두 알수 있겠죠?
金尙宮淨光花之舍利塔 同治癸酉十月日立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김상궁정광화지사리탑" '동치계유시월일립'이라고 읽겠습니다
"淨光花"는 金尙宮의 佛法名이라하며 '맑고 빛나는 꽃'으로 해석할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佛法名은 여성에게는 잘 붙여주지 않는다는데 金尙宮의 佛心이 상당하였나 봅니다.
저는 아직까지 여성에게서 "사리"가 나왔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는데, 여성에게서
'사리'가 나올 정도였으니 당시에도 획기적인 사건이라 여기에 "舍利塔"을 만들었겠지요
여성에게서 舍利가 나왔다니.....
舍利는 현대 과학으로도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합니다만, 주로 남성들이 성생활을
극단적으로 자제하여 발생되는 일종의 '담석'같은 것이라고 하지요?
그러니 여성에게는 발생될수 없다고 하는게 일반적 說인데.....
同治癸酉十月日立의 同治는 중국 靑나라의 연호이고 1862~1874 사이인데
조선에서는 철종 13년~고종 11년 사이 동안이라합니다.
癸酉十月日立의 癸酉는 60년에 한번씩 있는 해이지요.
그러니 癸酉年은 ... 1753, 1813, 1873, 1933, 1993 ....입니다
1862~1897년 사이의 계유년은 1873년 뿐입니다
그러므로 김상궁의 사리탑은 1873년 10월에 세웠다는 뜻이 되며
고종10년에 김상궁은 여성으로서는 특이하게 사리를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궁바위]
평생을 宮에서 王族들을 뫼시며 결혼도 못하고 살다가 갔을 金尙宮에게
淨光花라는 法名을 붙여 준 것은 필히 그 女人의 품격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일것입니다
金尙宮舍利塔을 바라 보니, 수많은 인간들의 사랑과 배신, 절개와 욕정 사이에서
그 옛날의 그 여인의 모습이 희미하게 스쳐 지나 가는 것은 저 뿐만이 아니겠지요
'맑게 빛나는 꽃'......
이 정도의 자료가 있으면 얼마던지 조사가 가능하여 이 여인에 대해 잘 알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분들 다 아는데 나만 모르는가?...
소설이나 드라마의 소재가 충분할듯합니다....
[입술바위 가는 길]
상궁바위를 지나자 마자 바로 오른쪽으로 능선 올라 가는 길이 희미하게 있습니다
이 길로 올라 가야합니다
사진은 상궁바위를 지나와 뒤돌아 보면서 찍었는데, 능선으로 올라 가는 길이 보이시죠?
입술바위를 가려면 또 정신 차려야 합니다.
저는 지나쳤다가 다시 내려와 올라 가는 것입니다. ㅎㅎ
[입술바위 가는 길]
약간 희미하지만 그래도 알수 있는 능선 오르는 길을 오릅니다
"사리"가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가요?
대부분 佛徒들 사후 화장한 뒤에 유골에서 나온 동글 동글한 결정체를 의미 한다고 하죠
맞습니다. 뜻은 맞는데 왜 "사리"라고 하는 지는 아시는 분들이 거의 없더라구요.
사리를 한자로 쓰면 집舍자에 이로울 利입니다.
"舍利"라는 한문이 부처님이나 스님들의 유골에서 나온 결정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까?
의미와 한자는 아무른 관계가 없습니다. 한문을 뜻글자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리(舍利)는 옛 인도말-산스크리트어의 Sarira를 중국에서 표기 할때
가장 중국어 원음에 가까운 舍利(중국 발음으로 [sheli])로 音譯한것을
우리나라에서 다시 한문 舍利를 우리말 소리인 '사리'로 音譯한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리(舍利)'는 소리글자이지 뜻 글자가 아닙니다
[입술바위 가는 길]
능선에 올라 서면 좌측으로 능선길이 나있습니다
이 능선길을 따라 올라 갑니다
[입술바위 가는 길]
능선길을 조금 오르면 사진에 보이는 큰 바위가 나타납니다.
저 바위를 지나갑니다
[만경대]
삼각산의 '만경대'가 정면에서 펼쳐집니다.
萬가지의 경치가 펼쳐진다고 萬景臺라고 하는데
조선 개국 공신인 삼봉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개성에서 천도를 하기 위해
터를 보기 위해 올라가 지금의 서울을 내려다 보았다고 "望京臺"라고도 합니다
[무당골]
큰 바위를 조금 지나 오면 아래쪽으로 소위 "무당골"이라하는 조그만 공터가 보입니다
[무당골 제단]
공터로 내려 오면 무당들이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있습니다
북한산에서 촛불 켜고 제를 지내는 사람들이 삼국시대 때부터 많았다고 합니다.
북한산진흥왕순수비에도 쓰여 있으니 지역토속신앙의 진원지가 북한산이었던 것이죠
10여년 전부터 국립공원에서 철저히 단속을 해 요즘은 제를 지내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입술바위 가는 길]
제단의 오른쪽 계곡에 사진에서 보는 큰 바위가 있습니다.
"입술바위"는 저 바위 오른쪽 계곡길로 올라 가야합니다.
여기서도 정신 바짝 차려야합니다.
사람들의 흔적이 거의 없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입술바위 가는 길]
큰 바위 오른쪽 계곡길은 이렇게 나 있습니다
오늘이 3월로 가는 토요일인데도 이 코스에서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뭔말이냐하면 길을 모른다고 누구에게 물어 볼 사람도 없는 외진 곳이란 뜻입니다
앞으로 가실 분들은 저의 산행기를 잘 메모해 가야 산속에서 알바를 면할수 있습니다
[입술바위 가는 길]
계곡 좌측을 따라 조금 올라 가면 좌측으로 가는 길과 우측 계곡을 건너 계곡을 따라
올라 가는 길로 나뉘어 지는데 우측으로 건너 올라 갑니다.
여기서 좌측을 따라 올라 가면 "낙화암 암장"으로 갔다가 "입술바위"로 가고
우측으로 가면 다양한 바위를 구경하며 "입술바위"로 먼저 가는 길입니다
우측길을 추천합니다. "낙화암 암장"은 입술바위 후에 볼수 있습니다
[입술바위 가는 길]
太古의 신비를 간직한 바위들을 만나며 감상하며 오릅니다
수북히 쌓인 낙엽을 푹푹 밟으며 길없는 길을 오릅니다
[굴]
비가 오거나 비박을 할때 들어 갈수 있는 조그만 굴이 우측으로 보입니다
[굴속]
굴 속에는 이런 괴이한 모양의 돌이 굴을 찌르고 있습니다
[네로황제 바위]
네로황제가 여자를 겁탈하는 모양의 바위를 지나갑니다
[자라바위]
자라가 일어 서 있는 듯한 바이 사이로 지나가면....
[입술바위]
긴가민가하는 "입술바위"가 나타납니다.
보이시나요? 저 앞의 넓직한 바위에 붙어 있는 "입술"
[입술바위]
드디어 "입술바위"가 나옵니다
'상궁바위'에서 약 30분 정도 걸렸습니다
수많은 바위들 중에 어느 한 바위에 "입술"이 달려 있으니 관심을 가지고 가야 볼수 있습니다
[입술바위]
조금 가까이 가 보았습니다
[입술바위]
조금 더 가까이 가 보았습니다
百聞이 不如一見입니다.
정말 절묘합니다.
여기서 詩 한수 들려 드리겠습니다
입맞춤
이미란
분홍빛
입술 위 살포시
보드라운
촉감 더 가까이
나도 모르게
본능의 힘 다해
혀끝의
전율로 끌어 당겼어
이렇듯
사랑은
뜻하지 않은 입맞춤처럼
시도 때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것
[입술바위]
이 코스에서 처음으로 만난 산객 부부.
고생해서 간신히 이 바위를 찾았다고 하더군요
특별히 '입술바위'를 찾아 나서지 않으면 올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낙화암 암장 가는 길]
"입술바위"까지 와서 "낙화암 암장"을 보지 않고 갈수는 없겠지요?
"낙화암 암장"은 "입술바위"에서 30m 정도 떨어진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입술바위" 좌측으로 희미한 길이 나 있습니다.
좌측 희미한 길을 따라 약 30m정도 갑니다
[낙화암 암장]
"입술바위"에서 약30m 정도 오면 우측으로 큰 암벽이 보이는데
이 암벽의 뒷면이 "낙화암 암장"입니다
[낙화암 암장]
암벽의 뒷면이 암벽인지 황토흙인지 모를 황토색 암벽이 있는데
왜 사람들이 "낙화암 암장"이라고 이름 붙였는지 모르겠으나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낙화암 암장]
황토흙을 발라 놓은듯한 암벽은 붉은 색의 꽃이 떨어지는 느낌을 주기도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초보 암벽등반가들의 암벽오르기 연습장으로 사용하고있더군요
온통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북한산에 황토색 암벽은 독특했습니다
[입술바위]
"낙화암 암장"에서 다시 "입술바위로 돌아 왔습니다
다시 보아도 "입술바위"는 절묘했습니다
화강암 암벽에 화산암이 점을 찍어 입술을 만들고 있으니....
"백운산장"으로 가는 길은 "입술바위" 오른쪽 옆길로 올라 갑니다
여기서 "백운산장" 찾아 가는데 1시간이 걸렸으니 길 찾느라 조금 헤멨습니다
앞으로 이 산행기를 보고 가실 분들은 설명을 잘 메모 해 가셔야 덜 고생 합니다
[고래바위]
"입술바위"에서 조금 올라 가면 "고래바위"가 나오는데 정말 고래를 닮았습니다
그런데 이 고래바위에 잘난 낙서를 해논 바보 같은 인간이 있어서 고발합니다
[백운산장 가는 길]
백운대피소를 가야 위문을 지나 백운대를 가고 하산을 할수있기 때문에
백운산장은 꼭 가야합니다
[백운산장 가는 길]
계곡길로 계속 똑 바로 오르면 "만경대" 밑 "쪽두리봉"으로 오를수 있지만
길이 험난하고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없어 길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입술바위"에서 오르다 오른쪽 능선으로 오릅니다.
그러면 제법 길 같은 길이 안내를 합니다
계속 능선길을 따라 올라 갑니다
[안부]
능선길이 끝나는 지점에 좌측에서 오는 길을 만나는 안부가 나옵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내려가 우측으로 오르면 바로 백운산장 넘어 가는 산마루가 나옵니다
그런데 저희는 여기서 우측으로 가는 바람에 고생을 했습니다
좌측길은 제법 내리막길입니다만
조금 내려 가서 우측으로 올라 가면 됩니다
좌측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우측길로 올라 갔습니다
알바를 한거죠. 그러나 이곳으로 가니 구경거리는 많았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길은 "쪽두리봉"을 바로 치고 오르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길이 험난해 초보산객을 데리고 갈수 없어 갔다가 다시 되돌아 왔으니
참고하시기 바람니다
[만경대]
능선에서 바라 본 "만경대"
정말 아름답습니다
요즈음 지각있는 분들이 북한산의 본명을 찾아 주자는 운동을 하고 있더군요
그렇습니다. 北漢山은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입니다.
한강의 북쪽에 있는 산이라고 그냥 쓰여진 산이름입니다.
'숭례문'을 南大門이라고하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北漢山의 본명은 三角山입니다.
여암 신경준선생이 작성한 "산경표"에는 "漢北正脈"에 "三角山"이라고 적고 있으며,
一名 "負兒山"이라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負兒는 아기를 업고 있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在京北三十里 楊州南三十九里라고 위치까지 적어놨습니다
산경표 뿐만 아니라 모든 고지도에 모두 삼각산이라고 합니다
"백운산장"은 앞에 보이는 가운데 암봉 오른쪽 옆으로 올라야 합니다
[쪽두리봉]
북한산에는 "쪽두리봉"이 또 불광동쪽에도 있습니다
"수리봉"이라고도하고 "독바위"라고도 하는 불광동쪽 "쪽두리봉"이 더 유명하지요
이곳의 "쪽두리봉"은 저도 처음으로 접해 봅니다
저 쪽두리봉을 직접 릿찌로 넘어 갈수도 있으나 위험하더군요
쪽두리봉 좌측 능선계곡으로 올라 넘는 것이 정답입니다
저는 초보 산객을 데리고 "쪽두리봉"을 직접 넘다가 되돌아 왔습니다. ㅎㅎ
[영봉, 도봉산]
우측으로 가운데 靈峰과 그 뒤로 도봉산이 줄기를 이루면서 자태를 뽑내고 있습니다
가운데 좌측 능선이 "상장능선"입니다
여기를 오르지 않고는 구경할수 없는 광경입니다
[쪽두리봉 능선]
靈峰에서 뻗어 오는 능선이 "쪽두리봉"으로 가고, 다시 "만경대"에 부닥칩니다
이 암벽을 넘어 가다가 되돌아 온것입니다
[쪽두리봉 오르는 길]
쪽두리봉을 거의 다 올랐다가 다시 내려 왔습니다
재미는 있었습니만 위험한 짓이었습니다
[쪽두리봉과 만경대 사이 고개]
쪽두리봉 좌측으로 내려 갔다가 다시 계곡따라 올라 가니
"백운산장"으로 넘어 가는 고개가 나왔습니다
오른쪽이 "쪽두리봉"으로 가는 능선이고, 좌측이 "만경대 가는 길
[백운산장]
"쪽두리봉 고개에 올라 서니 "인수봉"과 백운산장"이 눈에 확 들어 왔습니다
[백운산장 가는 길]
고개에서 좌측으로 조금 가니 "용암문"에서 오는 "낭만길"을 만나
오른쪽으로 내려 갔습니다
[백운산장]
"백운대피소"와 인수봉이 동양화처럼 펼쳐집니다
쪽두리봉 고개에서 바라 보는 "인수봉"과 "백운산장"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백운산장]
12시 30분경에 도착했습니다
도선사에서 약2시간이 걸렸군요
백운산장을 가기전에 계곡에서 점심식사를 약 1시간반 동안 했습니다
[백운산장에 걸려있는 등산 안내도]
[백운산장에서 바라 보는 쪽두리봉]
예전에는 무심코 지났는데, 오늘은 쪽두리봉을 지나 왔기에 쪽두리봉을 바라봤습니다
이쪽에서는 쪽두리봉 느낌보다는 상투를 틀어 놓은듯하군요
저 봉우리 옆 고개를 넘어 왔습니다
여하튼 백운산장 앞 "쪽두리봉"은 오늘 처음으로 눈에 집어 넣었습니다
[백운대 가는 길]
백운대 오르는 길은 역시 수많은 산객들로 만원입니다
[위문]
북한산의 최고봉인 "백운대"를 오르는 길이므로 북한산에서 제일 유명한 산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북한산성 위문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衛門"이 보입니다
[위문]
북한산성에는 13개의 門과 지금은 없어진 水門 하나가 있어 총 14개의 문이 있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北漢山城十二之門 종주 산행을 많이 합니다
물론 저도 종주를 했으며 저의 산행기도 있으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참고 하시기 바람니다
14개의 문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문이 "衛門"입니다
해발 720m정도 되는 곳에 있습니다
[백운대 오르는 길]
오늘도 백운대 오르는 등로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오르고 있습니다
병목현상으로 올라 갔다 오려면 많은 시간이 걸려 오늘은 생략합니다
[인수봉]
세계에서 최고로 꼽는다는 암벽등반코스 -- 仁壽峰
오늘은 등반가들이 별루입니다
[백운대 암봉]
바위들을 하나 하나 보면 동물원에 온듯합니다
[북한산성 안으로 하산하는 코스]
[북한산성 안으로 하산하는 코스]
[대동사]
오른쪽 "北門" 방향으로 대동사가 보입니다
北門과 원효봉을 가려면 대동사를 지나 올라 가면 됩니다.
[약수터]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오면 시원한 계곡과 약수터가 기다립니다
여기서 시원하게 씻고 상쾌하게 하산합니다
[유흥업소가 있는 산성유락단지]
국립공원 안에서 연기를 피우며 장사를 하는 유흥업소들이 밀집해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막걸리에 도토리묵을 먹고 봉고차 얻어 타고 쉽게 산성입구로 내려갔습니다
이 업소들도 금년 내로 모두 철거된다고하는군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원효봉]
[산성입구에서 뒤 돌아 본 북한산]
[산성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뒤 돌아 본 북한산]
[연신내 지하철역]
연신내 시장안에 있는 "대구 볼탕집"에서 한잔 걸치고 취해서...ㅎㅎ
[종로3가 단성사]
함께한 山友들이 또 한잔 더 하자고해 종로3가에서 내려 취할 정도로 마셨습니다
오랜만에 종로3가에 서니 단성사극장이 이렇게 변했더군요.
봉화 사는 친구가 얼마전 "전차타고 통학하던 종로3가"가 기억에 새롭다고 하길래
사진 촬영을 했습니다. 이 산행기를 볼래나?
[종로3가]
2월28일 토요일 밤의 종로3가 사거리에는
시위대와 전투경찰들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더군요.
"조중동"이 "TV 방송"도 소유 할수 있도록 하겠다는 한나라당의 '미디어법'을 반대하는
시위대와 시위를 막을려는 전투경찰들이 서로 고생하지 않도록 국회에서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할텐데.....
오늘산행한 개념도입니다
'입술바위'에서 백운산장 넘어 가는 길이 어려웠습니다
『漢北紺嶽枝脈 1區間』
말머리고개-한강봉-은봉산-소사고개-팔일봉-하우고개-노아산-
게너미고개-264m봉-세우게고개-노고산-수레너미고개
눈이라도 펄펄 내렸으면..하고 기대도 했는데
비가 내릴려면 가뭄도 심한데 주룩주룩 내리던지
겨울답지 않은 보슬비가 아주 쬐끔 내리는 2월22일 오전 9시 20분경에
이름도 재미있는 '말머리고개'에 왔습니다.
명성지맥을 끝내고, 새로이 시작하는 한북감악지맥의 들머리 - "말머리고개"
[산행 개념도]
북한산 뒷자락 송추에서 장흥계곡을 지나 양주시 백석으로 넘어 가는 고개에서
크고 작은 산봉우리와 고개를 여럿 넘어 미지의 세계로 나아 가려합니다
지맥 접속 거리까지 합쳐 약 20km의 거리를 걸어서 가려고 합니다
[말머리고개]
오전 9시 20분경에 도착한 '서울백두클럽' 횐님들이 산행 준비를 합니다
'말머리고개에는 잔설이 조금 남아 있었으며, 보슬비가 아주 쬐끔씩 내리고 있습니다
[말머리고개]
'말머리고개'는 한북오두지맥이 지나는 마루금입니다.
말머리고개'에는 전망대를 만들고 있어서 앞으로는 양주군 백석읍과
'한북감악지맥'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겠더군요
[말머리고개]
말머리고개에 만들고 있는 전망대에서 '한북감악지맥'을 조망했습니다
우측 멀리 송전철탑이 보이는 봉우리가 "은봉산 隱鳳山"이며,
은봉산 좌측 능선을 타고 가운데 보이는 고개가 "소사고개 所沙고개"입니다
'소사고개' 좌측으로 八日峰가는 길입니다.
앞으로 여기서 우측으로 올라 '한강봉'을 지나 저 산줄기를 모두 걸어 갈것입니다.
[말머리고개]
'말머리고개'와 '소사고개' 사이에 "기산저수지"가 있으며,
저수지 주변에는 유락단지가 조성되어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기산 관광 유원지"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관광안내도]
관광안내도가 제법 세밀하게 안내하고 있습니다만,
'한북감악지맥'에 대한 안내는 없어 아쉬웠습니다
[말머리고개 - 산행 들머리]
말머리고개 정상부에 좌측으로 산행 들머리가 나 있으며
9시 25분경에 산행을 시작합니다
[말머리고개 - 산행 들머리]
조금 올라와서 '말머리고개'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올지 몰라 '말머리고개-산행 들머리'를 뒤돌아 봅니다
[한강봉 오르는 길]
말머리고개에서 한강봉 오르는 길에는 "꾀꼬리봉"이 좌측에 있습니다만
큰 어려움 없이 비교적 잘 나 있는 등로를 따라 오릅니다
[한북오두지맥 분기점]
꼭 알아 두어야 할 중요한 갈림길이자 분기점입니다.
말머리고개에서 약 20여분 오르면 漢北正脈을 만납니다
이곳에서 "오두지맥"이 분기하여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오두산'까지 갑니다.
자유로 '오두산 전망대'까지 간다면 이해가 쉬울것입니다
[한북정맥 안내판]
"한강봉산사랑산우회"라는 단체가 친절하게 설치해놓은 "한북정맥과 오두지맥"에 대한 안내와
설명을 해 놨습니다. 그러나 이게 왠일입니까?
상식 이하의 오류를 이렇게 크게 설치를 해 놨으니 눈을 의심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위의 "이정표"와 "안내문"이 한북정맥과 오두지맥(도봉지맥)을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말도 되지 않는 설명을 해놔 놀라울 뿐입니다
이정표와 지도, 설명이 모두 엉터리입니다.
'한북정맥'을 '도봉지맥'이라고 해 놨으며, '오두지맥'을 '한북정맥'으로 표기하고 있으니 어인 일?
"한강봉산사랑산우회"라는 단체는 챙피하지도 않을까요?
그리고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이 오류를 지적하지 않았단 말인가요??
모두 그냥 지나쳤을 뿐인가? 아니면 제가 바보입니까?
[한북오두지맥 분기점]
한강봉 방향으로 조금 와 "한북오두지맥 분기점"을 뒤 돌아 봤습니다
똑 바로 가면 "한북정맥"이며, 우측으로 가면 지금 올라온 '말머리고개'를 지나
"오두산"으로 가는 "오두지맥길"입니다
똑 바로 가는 한북정맥은 "챌봉"으로 가 송추에서 의정부로 넘어가는 "울대고개"를 지나
"사패산", "도봉산"을 지나 북한산의 "상장능선"을 타고 "솔고개"를 지나
예비군 훈련소가 있는 노고산, 일산의 고봉산, 파주의 "장명산"으로 갑니다
참고로, 저 분기점을 지나면 한북정맥상의 "챌봉"이 나오는데,
"챌봉"은 제일높은 봉우리라는 뜻의 '제일봉'이 변한것이라고도 하고
옛 문헌에는 차일봉(遮日峯)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봉우리 모양이 마치 차일을 친것과 흡사하다는 뜻이라고합니다
[한강봉 가는 길]
'한북오두지맥 분기점'에서 북쪽으로 바로 "한강봉"이 보입니다
분기점에서 약 10분쯤이면 한강봉 정상에 오를수 있습니다
[한강봉 정상]
너무 쉽게 한강봉 漢江峰에 오릅니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봉화를 올렸다고 하여 '봉화봉'이라고도 한답니다
9시 55분에 도착했으니 '말머리고개'에서 30분 정도 걸렸습니다
[한강봉 정상]
'한강봉' 정상에는 깃대가 있고 이정표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한강"이 보인다고 "한강봉"이라 했다는데....
오늘은 산행하기엔 좋은 날씨이지만,
雲霧로 시야가 막혀 외부 세계를 조망 할수 없는게 큰 단점이었습니다
[한강봉 이정표]
오늘 '감악지맥 1구간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인 "한강봉"입니다
한강봉에는 별도의 정상석은 없고 이정표로 정상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한강봉'은 한북감악지맥의 분기점으로 유명합니다
이제부터 실제 "한북감악지맥"을 답사하게 되겠습니다
이곳에서 '호명산'과 '챌봉', 그리고 "불곡산"을 조망해야하는데,
雲霧로 멋진 경치를 촬영하지 못하는군요
[한강봉]
"한북감악지맥"이 서쪽방향으로 뻗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머나 먼 "한북감악지맥"을 걸어 갑니다. 신이 납니다
[은봉산 가는 길]
감악지맥 마루금은 비교적 완만한 능선으로 걷기에 편했으며
울창한 소나무들이 호위해 주어 산책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이정표]
'기산리' 방향으로 직진합니다
[느르미 고개]
한강봉과 은봉산 사이에 잇는 느르미 고개입니다
양주시 백석읍 신지마을에서 기산리로 넘는 고개입니다
10시 25분에 이곳을 통과합니다
[송전철탑]
아까 산행 시작하기 전 '말머리고개'에서 바라 보았던 은봉산의 '송전철탑'입니다
'말머리고개'에선 멀리만 보였지만 와서 보니 또 금방입니다
[은봉산 가는 길]
송전철탑을 지나 잘 뚤려있는 임도를 따라 갑니다
이곳 '감악지맥'의 地名에 대해 알아 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나 자료를 구할수 없었는데
다행히 "양주문화원에서 '양주 지명의 유래"라는 책을 펴 냈더군요.
어렵싸리 그 책을 구해 궁금했던 감악지맥의 여러 地名을 알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알려 드리는 것들은 양주문화원의 검증을 받은 것을
'홍어와 무인도' 애독자 여러분들에게 알려 드리는 것이오니 믿어도 좋습니다
[은봉산 정상]
은봉산 정상도 어렵지않게 왔습니다
은봉산 정상은 군사훈련장이었으며 철문을 열고 들어 가야 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감악지맥 1구간에 있는 軍部隊는 모두 空軍이었습니다
이런 산줄기 전방에는 陸軍이 방어를 하고 있는데 '空軍'이 주둔하고
공군의 훈련장이 육군의 훈련장과 다름이 거의 없었습니다
[은봉산 정상]
은봉산 隱鳳山의 유래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옛날 옛적에 이 근처에 사는 南氏일가가 이산에 장례를 치르는데,
지관이 말하길 "이곳을 파다가 바위돌이 나오면 시신을 그위에 올려놓고 묻으라" 하였답니다.
그러나 자손들은 조상을 차마 돌위에다 장례 지낼 수 없어 바닥에 깔려있는 바위돌을 들어 내었더니
그 바위 아래에 숨어있던 봉황 鳳凰이 날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은봉산 隱鳳山은 봉황 鳳凰이 숨어 있던 山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보시는 바와 같이 空軍들의 훈련장으로 모두 파헤쳐져 방카와 훈련시설 만이 있습니다
鳳凰은 어디가고...
그래서 鳳凰을 찾으려 육군 대신에 공군이 와 있나? ㅎㅎ
[은봉산에서 바라 본 '말머리 고개']
은봉산에서 '말머리고개'를 뒤 돌아 봤습니다.
'오두지맥'은 선명합니다만 '말머리고개'는 운무로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은봉산에서 소사고개로]
은봉산에서 소사고개로 내려 가는 길은 군사도로가 잘 나있습니다
은봉산은 봉황이 숨어 있었다고 隱鳳山이라 하지만
일설에는 일제시대 때 일본놈들이 이곳에서 銀을 채굴하였다고 하며
산중턱에는 당시에 채굴했던 은굴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銀과 관련이 있다고도하는군요
[소사고개]
은봉산에서 조금 내려 오면 바로 "소사고개"가 나옵니다
불쌍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방호벽'과 군방어시설이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습니다. 명성지맥에서 수없이 보아 온 슬픈 시설들입니다
[소사고개]
소사고개는 한자로 所沙峴으로 쓰며, 소새고개라고도 한답니다
이 고갯길을 기산저수지에서 보면 기다란 산줄기가 마치 뱀의 모양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라 하는데
풍수지리설에는 만약 이 근방에 묘지를 쓰면 "소새"라는 새가 뱀을 쪼는 모양이 되므로
家勢가 기운다고 하는데 실제로 허씨집안이 묘소를 쓰고 망했다고 하는군요. ㅎㅎ
[소사고개]
소사고개에서 바라 보는 기산 저수지 방향
기산 저수지 아랫쪽에는 '마장저수지'가 있고 그 부근에 "감사원 감사교육원"이 있지요
18세기 중반의 문헌인 여지도서(1757~1765)에서
이 '소사고개'는 읍치에서 서쪽으로 30리 거리에 있으며
영조의 생모 최무수리의 묘인 소령원(昭寧園)으로 가는 통로라고 설명하고 있답니다
소령원은 광탄에 있으며 무지하게 큰 능입니다. 시간 날때 한번쯤 가 볼만한 곳이지요
최무수리는 궁의 무수리였는데 숙종의 눈에 들어 숙종의 후궁이 되지요
그래도 영조의 친어머니이고, 정조의 증조 할머니가 됩니다
[팔일봉 오르는 길]
'소사고개'에서 짧은 된비알을 치고 올라 갑니다
팔일봉으로 가는 길입니다
[초소]
된비알을 오르면 능선에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듯한 군초소인지 산불 감시소인지 잘 모르는 초소가 있습니다
[팔일봉으로 가는 능선에서 뒤돌아 본 '은봉산']
'소사고개'를 지나 '팔일봉'으로 가는 능선에서 옆으로 본 '은봉산'
[팔일봉으로 가는 능선길]
'감악지맥 1구간'은 등산이라기 보다는 '트랙킹'이었습니다
[팔일봉 갈림길]
11시 15분에 이곳에 도착했으니 '말머리고개'에서 여기까지 1시간 50분 정도 걸렸군요
감악지맥 마루금에서 '팔일봉'은 약간 벗어나 있습니다.
이곳 삼거리에서 우측으로는 '감악지맥길'이며, '팔일봉'은 좌측으로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 와야 합니다.
저는 힘들어도 '홍어와 무인도' 애독자를 위해서 '팔일봉'을 갔다가 오려 합니다
항상 무지하게 친절한 '파란문'....ㅎㅎ 오로지 팬들을 위해서 고생합니다. ㅎㅎ
[팔일봉 갈림길에서 뒤 돌아 본 감악지맥]
'팔일봉 갈림길 삼거리'에서 뒤 돌아 봤습니다
가운데 움푹 파인 곳이 조금 전에 지나온 "소사고개"이며
좌측 산봉우리가 '은봉산'이며, 윗쪽으로 '느르미고개'와 '한강봉'이 잘 보입니다
[팔일봉 가는 길]
갈림길 삼거리에서 등로로 올라 서니 '팔일봉'이 멀리 보입니다
가까운지 알았는데 제법 먼 길이었습니다
여기 쯤에서 괜히 왔다고 생각합니다만 엎질러진 물이니 계속 갑니다
[팔일봉 헬기장]
가파른 오르막을 헐떡이며 15분 정도 오르니 헬기장이 나왔으며
[팔일봉 가는 길]
다시 5분 정도 더 올라 갑니다
[팔일봉 정상]
'팔일봉 정상입니다.
'팔일봉'에는 정상석 대신에 이런 팻말을 하나 세워 놨습니다.
'팔일봉'은 한자로 八日峰으로 쓰며,
8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산에서 해를 맞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463m높이로서 오늘 산행코스에선 두번째로 높은 봉우리입니다
다른 말로는 거룻봉이라고도 했는데 산등성이 생김새가 마치 거룻배와 같다고 합니다
봉화를 올리던 봉화터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군요
[팔일봉에서 바라 보는 '마장저수지 방향]
사실 제가 힘들어도 '팔일봉'을 오른 이유는 주변 경관을 촬영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나 운무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랫쪽에 보이는 건물이 '감사교육원'인듯....
'송추칸츄리클럽', 서원벨리C.C. 마장저수지, 오두지맥....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요
이러줄 알았으면 편하게 그냥 가는건데..ㅉㅉ
[삼거리 갈림길]
감악지맥 갈림길로 되돌아 왔습니다
올때는 15분 걸렸으니 이곳에서 '팔일봉'까지 왕복 약40분이 걸렸습니다
오르막 경사가 있기 때문에 제법 힘들었습니다
[삼거리]
지맥길을 따라 '하우고개' 방향으로 가는데 갈림길이 나오며 우측길로 갑니다
이런 지맥길은 이런 갈림길을 만날때 가장 당혹스럽지요
잘못하면 알바를 합니다
['하우고개' 가는 길에서 뒤 돌아 본 '소사고개']
이 사진 잘 봐 두세요~ 아주 귀한 사진입니다.
맨 끝에 오늘 산행을 시작했던 "말머리고개"가 선명하게 보이고,
가운데 조금 전에 지나온 "소사고개"가 더욱 선명하게 보입니다
S字를 그리며 산행을 하고 있습니다
[하우고개]
'팔일봉' 갈림길에서 금새 '하우고개'에 도달합니다
'팔일봉'을 갔다 오느라 늦어져 홀로 걷고 있습니다
[하우고개]
'하우고개'는 4거리였습니다
하우고개에 대한 자료는 양주문화원이 펴낸 '地名의 유래'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청계산에 있는 '하우고개'에 대한 유래를 알려 드리니
이것은 그져 참고하시기 바람니다. 왜냐하면 그곳의 유래와 이곳은 틀릴수 있으니까요.
아시는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경기도 의왕에서 판교로 넘어 가는 고개가 하나 있는데
'한남관악지맥'상에 있는 청계산과 우담산 사이에 있는 "하우고개" 입니다
제가 '서울백두클럽'과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된 뜻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광교산에서 청계산을 지나 양재동 화물터미날까지 종주 할때에 이곳에서 우연인지 필연인지
서울백두클럽의 산행 리더인 '산산산님'을 만났지요.
그곳 '하우고개'는 이해하기 쉽게 얘기하자면 '외곽순환고속도로' "청계산 톨게이트" 앞에 있는
"청계터널" 위로 지나는 옛고개길이라면 짐작이 가시나요? 그곳도 '하우고개'입니다
지금은 4차선 고속화도로가 뚤려있어 찻길을 무단횡단하기가 겁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산산산님'의 길안내로 水路를 통해 건넜고 , 이것이 저의 산행기에 올려져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하오고개 넘는 방법'이 되었답니다
저의 산행기 찾아 읽어 보세요~
[하우고개]
청계산 '하우고개'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안산 바닷가에 사는 鹽夫(염전일 하는 사람) 둘이 다툼이 있었는데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아서 광주에 있는 관아로 재판을 받으러 이 고갯길을 넘어 갔답니다
그런데 이 고갯길을 넘을 쯤에 서로 조금씩 양보하여 和解하였다고 하는군요
그 이후부터 이 고갯길을 넘으면 서로 和解한다는 전설이 생겨나 '화해고개'로 불리워지다가
오랜 세월동안 音韻변화를 거쳐 "하우고개"가 되었다고 하더군요..ㅎㅎ
이곳의 '하우고개'도 그와 같은 유래를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하우고개','도마치고개', '갈마치고개' 등등은 전국에 많이 분포되있습니다.
고유명사라기 보다는 보통명사에 가깝기 때문일겁니다.
도마치고개는 말을 타고 가다가 말이 힘들어 내려서 말과 함께 걸어 고개를 넘는다고
"도마치"고개라 하지요?
또 "갈마치고개"는 말이 갈증을 느낄때 물을 먹여 올라야 한다고 "갈마치고개"라고 한답니다
모두 고개 넘기가 힘든 곳이지만 중요한 교통고개인 곳에 주로 붙여져 있습니다
[하우고개]
햐~ 기가 막힙니다.
여기서 뒤돌아 보니 "말머리고개"와 "소사고개", 그리고 여기 "하우고개"가
일직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말 절묘합니다
아마도 이런 사진을 알고 찍은 사람은 저 밖에 없지 않을까요? ㅎㅎ
[점심식사]
'하우고개'에서 언제나 즐거운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오늘은 많은 산객들이 참여하여 왁자지껄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새로 참여하신 분들이 다섯분 정도 있었으며, 모두 산에 대해선 한소리하는
베테랑들이었습니다. 특히 연세가 높으신 어르신들이어서 저 같은 나이는
아주 젊은 얘들 나이였습니다. ㅎㅎ
앞으로는 산행 예약을 미리 미리 하지 않으면 함께 할수 없을것 같습니다.
이번에 29인승 넓직한 좌석의 버스였는데 27명이 참여했으니 앞으로 부지런 하지 않으면
함께하지 못할수 있으니 미리미리 예약하시기 바람니다
앞으로는 버스 몇대 전세 낼까요? ㅎㅎ
[노아산 가는 길]
'하우고개'에서 '노아산'까지는 탱크들이 다니는 군사도로입니다
멀리 '노아산'이 보입니다만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더군요
[노아산 가는 길에 뒤 돌아 본 '팔일봉']
노아산 가는 길에 뒤 돌아 보니 '八日峰'이 그 윤곽을 확연히 더러냅니다
[노아산 가는 길]
완만한 경사를 따라 탱크길을 진행하는데 얼었던 땅이 녹아 질퍽됩니다
노아산 가는 길은 이곳이 제일 경사가 심한 곳이니 얼마나 쉬운지 아시겠죠
[노아산 갈림길]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노아산과 '게너미고개'로 가는 갈림길입니다
앞에 보이는 군초소가 있는 곳이 '노아산' 정상입니다만,
갔다가 되 돌아 와야하고, 특별히 볼거리도 없으며, 군부대들이 주둔하고 있어
'노아산' 정상은 피하고 지맥 마루금을 따라 오른쪽 '게너미고개'로 향합니다
'노아산'은 한자로 老兒山이라고 씁니다.
그러니 '노인과 어린이'라는 뜻인데, 주로 묘를 쓸때 풍수지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군요
또한 老兒山은 월암산(月岩山)이라고도 하는데 산에 바위가 많아
달빛이 바위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합니다
그러나 바위는 커녕 찐한 황토만이 걷는 길을 어렵게 합니다
[노아산에서 뒤 돌아 본 '소사고개'와 '말머리고개']
[노아산에서 게너미고개 가는 길]
노아산 공터에서 오른쪽으로 지맥길이 나있습니다
[게너미고개 가는 길]
갈수록 산높이가 낮아지며 마을들이 잘 보이기 시작합니다
[양주시 연곡리]
한우를 키우는 목장과 한우들이 한결 따뜻해진 봄을 만끽하는듯합니다
정겨운 시골이 옆에 성큼 다가와 있습니다
[게너미고개 가는 길]
게너미고개 가는 길에는 무덤이 많았습니다.
[게너미고개]
드디어 '게너미고개'에 왔습니다.
우리를 '말머리고개'에서 내려줬던 관광버스가 우리는 걷게하고 자기는 빈차로 쌩~하니 편하게
'게너미고개'에 와서 지친 사람은 여기서 버스를 타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버스를 타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더군요
모두 산에 대해선 일가견을 가진 분들이기도 하겠지만, 감악1구간은 보신바와 같이
걷기에 편한 길이기도 해서일겁니다
1시 20분에 도착하여 1시 35분에 다시 출발합니다
'말머리고개'에서 약 3시간 정도 걸렸군요
[게너미고개]
지도마다 地名 표기가 틀림니다만 오늘 저의 산행기를 보신 분들은
감악지맥에 나오는 地名에 대해선 확신을 갖게 될것입니다
게너미고개는 한자로 蟹踰嶺 해유령으로 씁니다
蟹는 '게'를 말하는 '해'이며, 踰는 넘을 '유'입니다
다시 말해 "게가 기어 넘는 고개"라고 "게너미고개"가 된 것입니다
'게네미고개'는 잘못 표기 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수 있겠죠?
[게너미고개]
'게너미고개'의 유래는 조금 재미있더군요
이곳 임진강 주변의 개천에는 '민물 게'가 지금도 많이 살고 있답니다
옛날 아주 옛날이었답니다.
앞으로 가야할 노고산(老姑山)에는 老姑할머니가 살고 있었답니다.
老姑할머니는 늙은 시할미를 말하겠지요?
어느날 하루는 노고할미가 다리 한쪽은 노고산에 걸치고, 다른 한쪽은 광적면 도락산에 걸친 후
황새등고개에 있는 요강바위에 오줌을 쌌다고 합니다. 가랭이가 무지 길었군요. ㅎㅎ
이 노고할미 오줌통이 얼마나 컷으면 이때 요강바위가 넘치면서
인근 개울에 뜨거운 오줌이 넘쳐 흐르게 되었답니다. 하여간 무지 많이 싼 모양이죠? ㅎ
이때 개울에 살던 민물게들이 노고할미의 뜨거운 오줌에 깜짝 놀라, 살기 위해
이고개를 넘어 비암리와 파주시 발랑리쪽으로 허겁지겁 넘어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광적 연곡리 일대에는 민물게가 전혀 보이지 않고,
비암리와 발랑리에서만 민물게가 있다고 하니 우연의 일치가 아니고 진짜로 노고할미가
찐~하게 오줌을 갈기긴 갈긴 모양입니다. ㅎㅎ
이런 유산한 얘기들 중에 개구리와 관련된 얘기, 즉 어느 처녀가 앉아 오줌을 싸는데
개구리가 앗 뜨거~!!하며 굴(?)속으로 뛰어 들어가 뭐~ 어떻게 되었다나? ㅎㅎ
그런 얘기는 들어 본적이 있어도 '민물 게' 얘기는 "게너미고개"를 넘으며 처음으로 듣습니다.
蟹踰嶺 해유령
이곳 '게너미고개', 즉 蟹踰嶺 해유령은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가 있었던 곳입니다
다시 떠 올리기도 싫은 "임진왜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는 일본군에게서 최초로 승전보를 올리는 전투가 바로 蟹踰嶺 戰鬪입니다
그래서 이 고개 조금 아래에 해유령전첩비를 세우고 기념하며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있습니다
[해유령전첩비] (가까운데 못갔다 와 자료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해유령 전첩지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왜병과의 육지 싸움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둔
곳이람니다. 그 당시에 신각·이양원·이혼의 합동작전으로 지형적으로 유리한 해유령에서
왜병 70여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둬 조선군대의 사기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고합니다.
그러나 도성 남쪽 한강 방어선에서 왜군을 막지 못한 김명원은 자신이 전투에서 이기지 못한
책임을 당시 부원수 신각 장군에게 뒤집어 씌워 장군은 처형되었다고하는 안타까운 역사가 있는데
해유령전첩비은 1977년 국난극복의 전승을 기념하고,
억울하게 죽은 신각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노고산 가는 길]
'게너미고개'를 지나 "264m봉"을 지나면 건너편에 "노고산"이 나타납니다.
[세우개고개 가는 길]
'게너미고개'에서 노고산으로 가려면 "264m봉"을 지나 "세우개고개"를 지나 가야합니다
[세우개고개]
최근에 포장을 하고 야생동물 이동통로 '에코 브릿지'를 만들어 놨습니다
세우개고개는 한자로 三峴이라고 쓰며, 앞에 보이는 터널의 이름도
三峴터널이라고합니다.
마을이름을 '안새우개'라 부르는데 이 마을에서 밖으로 나가려면 '세고개', '우골고개(점말고개)',
'언굴고개(갈곡령)', '자작고개(화암령)'를 넘어야 한다는데서 유래한다고합니다
세고개에서 음운이 변한것으로 보기도 한답니다
[세우개고개]
'에코 브릿지'를 지나 '노고산'으로 향합니다
[노고산 오르는 길]
오늘 등산의 마지막 오르막이 되겠습니다
솔잎이 떨어져 쌓여 가는 경삿길을 더욱 미끄럽게합니다
붉은 솔닢이 인상적입니다
[군사도로]
소나무 숲을 지나 오르면 군사도로가 나타납니다.
이곳은 중요한 곳이니 앞으로 이 산행기를 보고 가실 분들은 메모를 해 둬야 할것입니다
지맥 마루금은 앞의 능선을 타고 '노고산'으로 올라야 합니다.
그러나 노고산 정상까지 갔으나 군부대와 지뢰 매설 경고문으로 더 이상 진행할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잘 나있는 군사도로를 따라 가면 쉽게 하산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고 앞에 보이는 지맥길을 따라 올라 갔습니다
[노고산]
지맥 능선에 올라 서니 노고산 老姑山정상이 보입니다
[갈림길]
노고산 정상에 올라 갔던 선답자들이 다시 내려와 더 이상 길이 없다고 해
상의한 끝에 좌측 군사도로 우횟길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우회길]
급경사 내리막길로 내려 갑니다.
[군사도로]
지맥 마루금을 버리고 군사도로로 다시 내려 올수 밖에 없었습니다
[노고산 군부대]
감악지맥 마루금을 버리고 군사도로로 전진하니 군부대 입구가 나왔습니다
[老姑山]
老姑山 정상은 空軍의 미사일 부대가 온통 차지하고 있으니, 도져히 지나 갈수가 없었습니다
姑는 시어머니 姑이지요. "고부간의 갈등" 할때의 "고"입니다
그러니 老姑山은 늙은 시어머니산이란 뜻이 되겠지요.
'게너미고개'에서 얘기했던 "老姑할미"는 늙은 시할미가 되겠는데, 시할미가 얼마나
오줌보가 컷으면 오줌이 넘쳐 민물 게가 줄행랑을 쳤겠습니까
아마도 이런 얘기는 며느리들이 어려운 시집살이 속에서 시어미를 뒤에서 욕할때
하던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老姑山]
보이십니까? 미사일 !!
아무리 깡다구가 좋아도 저 미사일 부대는 통과 못하겠더군요. 어휴~ 무서워~
사실 미사일 보다 보초가 더 무섭지요? ㅎㅎ
감악지맥의 군부대는 미사일 부대까지 모두 공군이 관할하고 있는게 특징입니다
최전방 산삐알에 '空軍'이라~....은봉산에서 이미 말씀드린바와 같이 감악지맥1구간에는
모두 '空軍'이 지키고 있습니다
저런 미사일을 보니 조금은 든든하기도 합니다. 북한이 함부러 침범 할수는 없겠지요?
[수레너미고개로 하산 하는 길]
미사일 부대 때문에 어쩔수 없이 감악지맥 마루금을 버리고 군부대 도로를 이용합니다
명성지맥2구간에서 탱크포사격장도 가로 질러 들어 갔는데.......
[56번 국도]
군부대 도로를 따라 20여분 내려 가니 56번 국도가 나왔습니다.
이 길을 따라 북동쪽으로 올라 가야 "수레너미고개"가 나옵니다.
[수레너미고개 방호벽]
진짜 '수레너미고개'는 이 사진의 끝 지점에 있습니다만
제2구간에서 만나기로 하고 "감악지맥 1구간"을 여기서 끝냅니다
총산행 거리 지맥 접근 거리 포함하여 약 19.5km이며, 6시간 25분 정도 걸렸습니다
산행길이 평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뒷풀이]
그리고 바로 '서울백두클럽'의 자랑인 뒷풀이가 시작됩니다
군부대 입구 공터에 자리 잡고 굽고, 찌지고, 마시고.....
이 시간이 언제나 제일 행복한 시간이지요.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림니다
[GPS60님]
돌아 오는 버스 안에서 ....
제가 이분을 특별히 소개해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분의 아이디는 "GPS60님"입니다.
그런데 1934년生이라고 하시니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보다 더 잘 걷는거 있지요. 저는 이제 어디 가서 산 얘기를 할수 없게 됬습니다.ㅎㅎ
그 동안 GPS 들고 홀로 이산 저산 유람하시다가 이번에 2년만에 이런 모임에 동참했다고 하는군요
홀로 산행도 의미 있지만, '서울백두클럽'과 함께한 산행이 무척이나 즐거웠던 듯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감악지맥 전구간을 함께 하실듯 즐거워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즐겁고 안전한 산행 많이 하시기 바람니다
[둥글레님]
그리고 또 한분 더 소개해 드려야 겠습니다
오늘 '서울백두클럽'에 처음으로 함께하신 분이신데 아이디 "둥글레님"이라고
이분도 연세가 7학년이십니다. 그런데도 힘차게 걷는 산행 능력은 물론이고,
집으로 돌아 가는 관광버스를 세워 모두에게 생맥주를 한잔씩 대접하셨습니다.
'서울백두클럽'과 함께한 오늘 하루가 너무 즐거웠다고 한방 쏘신겁니다.
그러니 더더욱 소개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참여 해 주시길 바라옵니다
3월 8일 한북감악지맥 2구간에서 다시 만나요~~!!
감사합니다
홍어에 대해 얼마나 아세요?
바다에서 오는 선물 - 생선
그 생선들 중에서도 가장 값진 생선을 하나 택하라면 저는 "홍어"를 꼽습니다
나의 홍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자연히 저의 블로그 이름이 왜 "홍어와 무인도"인지도 넘겨 짚을수 있습니다
홍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흑산도를 빼 놓을수 없습니다
흑산도를 이야기 하자면 또한 우리 국토 이야기를 건너 뛸수가 없습니다.
옷도 오래 입으면 헤어져 너덜거리듯 삼면이 바다인 우리 강토도 무척 늙어
너덜거린지 오래여서 여기저기 섬이 많은 반도이기도 합니다
섬을 이야기 하자면 신안군을 뺄수 없습니다.
전라남도 신안군은 1004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섬의 천국이고
바다를 합친 면적은 신안군을 뺀 전라남도보다 더 넓다고 하니
육지에선 봉화군이요 바다에선 신안군이 최대라 할수 있겠습니다.
흑산도 -
우리나라 서남쪽 끝머리에 있는 작은 섬이라고 어렴푸시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다섯번째로 큰 섬이며, 유인도 11개 무인도 89개로 모두
100개로 이루어져 있답니다. 흑산도라는 이름은 검푸른 바다는 물론 동백나무,
후박나무 등 상록수로 덮인 섬 전체의 색깔이 멀리서 보면 사시사철 검푸르다
못해 아예 검게 보인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라합니다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는 님을 기다리다 검게 타버렸다지요? ㅎㅎ
흑산도는 茶山 정약용선생의 친형인 정약전선생이 1801년 신유사옥 사건으로
유배 간 곳으로도 유명하지요. 西洋文化와 천주교를 일찍이 접하고 실학사상으로
봉건사회인 조선을 개혁 하고져 했던 사람들
- 정약용 삼형제 -
요즘 말로 하자면 수구세력에 대항해 진보세력의 우두머리 '정조대왕'을 정점으로
진보세력의 대열에 섰다가 '정조대왕'의 죽음과 함께 수구세력들 -즉 정순왕후와
세도정치세력인 안동 김씨세력들로 부터 천주교를 빌미로 처참한 정치 보복을 당하고..
정약용의 둘째 큰형인 정약종은 감옥에서 죽고..(천주교는 순교로 표현)...
셋째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
정약용 자신은 포항으로 유배 되었다가 잘 아시는 전남 강진으로 유배....
서두가 길었습니다만 '홍어'를 생각하면 이러한 것들이 생각나 먼저 적었습니다.
왜냐하면 '홍어'를 이야기 하려면 정약전선생의 '자산어보'를 인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흑산도 홍어가 유명해진 것은 오래 전이라합니다.
선조들이 흑산도에서 고기를 잡아 육지에 팔러 나갈 때 한달 이상이 걸려
육지에 도착하면 대부분의 고기가 상해 먹지 못하였으나
유독 홍어만이 먹어도 탈이 나지 않아 그때부터 며칠씩 보관하였다가 먹는
전통이 내려왔다고합니다.
홍어는 '본초강목'에서는 태양어(邰陽魚)라 하고,
모양이 연잎을 닮았다 하여 하어(荷魚)라고도 하였으며,
교미하는 방법이 괴이하다 하여 해음어(海淫魚)라고도 하였답니다.
'자산어보'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고 넘어 가겠습니다
자산어보(玆山魚譜)의 玆山은 黑山과 같이 쓰이던 흑산도地名이라합니다
즉 흑산도의 물고기 생태 연구서라 할수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산학 연구서로 평가된다고하며
현대 우리나라 수산학 연구서가 역사적으로 비교 검토 할수 있는 유일한
연구서 이기도 하답니다. 이 귀중한 '자산어보' 유산은 규장각·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자산어보에서 홍어(洪魚)는 '분어'로 표기되 있으며
속명을 홍어(洪魚)라 하였는데 그 내용이 아주 재미 있습니다.
'자산어보'에서 홍어의 특이한 교미 모습을 일컫는 대목이 있습니다.
"홍어 수컷의 생식기는 몸체에 비해 굉장히 크고 긴 편으로 꼬리 양쪽에 두 개가긴 다리처럼 나 있다. 생식기 끝에는 꺼칠한 가시가 수없이 박혀있는데 암컷과교접할 때 잘 빠져나가지 않게 하는 구조이다. 그런 탓에 암컷이 그물에 걸려움직이지 못할 때 재빨리 수컷이 올라탔다가 그물을 올릴 때 함께 따라 올라오고 만다."
간단하게 말씀드려 홍어라는 물고기는 엄청 큰 생식기를 두개나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나 육지의 동물들처럼 올라타 삽입식 교미를 하는 특이한 물고기입니다
낚시로 홍어 암놈만 한마리 잡으면 그 주변의 홍어 숫놈은 거의 몽땅 잡을수 있는
이유가 한번 삽입한 숫놈의 생식기는 거의 빠지지 않아 암놈을 잡아 올릴때 같이
붙어 따라 올라오기 때문에 숫놈을 잡고 다시 암놈을 바다에 던지면
즉시 다른 숫놈이 또 교미하여 잡혀 올라 옵니다
이걸 반복하면 암놈의 생식기는 너덜거리는 정도가 되겠지요
이를 두고 '자산어보'에는
"홍어 암컷은 먹이 때문에 죽고, 수컷은 간음때문에 죽음을 당하게 되는 바,음(淫)을 탐내는 자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즘은 섹스가 어둠 속에서 나와 활보하니 이런 이야기를 자유롭게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듯 합니다. 세상이 많이 바겼다고 해야 하겠지요
특히 요즘 이런 홍어의 쌕스 능력을 보고 뭇남성들은 홍어를 스테미너식 물고기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만한게 홍어X'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군대 갔다 온 남성들은 최소 한번 이상 이 말을 내 뱉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의 어원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 몇개를
소개 하겠습니다.
숫컷은 생식기가 크고 가시가 있어 어부들이 그물 손상을 막기 위해 잡히자 마자
짤라 버려 쓸모없는 것의 대명사여서 생겨났다는 설이 있으며,
가장 그럴듯한 설은 암컷의 값이 숫컷보다 훨씬 비싸기 때문에 암컷으로 위장 시키기
위해 숫컷이 잡히자 마자 거시기를 짤랐다는 데에서 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홍어들의 산란기가 다가 오면 암컷이 숫컷의 생식기를 툭툭 쳐서
암컷이 숫컷을 유혹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발기한 숫컷이 인정사정 없이 올라 타서
교미를 하는데 그 다음은 '자산어보'에 나와 있는데로 입니다.
암컷이 숫컷의 생식기를 자기 마음대로 툭툭 친다고 해서 '만만한게 홍어 X'라는
속어가 나왔다는 설입니다
대부분의 물고기들은 암컷이 산란을 해 놓으면 숫컷이 그 알 위에 정액을 하얗게
뿌리는 것이 교미라 할수 있는데, 홍어는 육지의 동물들과 같이 삽입형태의 교미를
하는 것이 특이한 물고기라 할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제가 수많은 웹써핑을 통해 구한 홍어 암수 사진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홍어 숫컷의 생식기가 다리처럼 두개로 크게 달려 있습니다
이 사진의 암수를 잘 기억해 두어야합니다.
그래야 저의 글들을 읽을때 이해가 쉽습니다. 특히 생식기를 잘 보아야 합니다
홍어는 암컷이 훨씬 더 비쌉니다. 암컷이 숫컷보다 세배 이상 비싸다고 합니다.
음식점에서 나오는 밑반찬의 홍어 무침은 수입 숫컷으로 보면 무리 없습니다.
흑산도에서 잡힌 홍어 암컷은 한마리에 7~8십만원 정도 하니
음식점에 나오는 반찬 홍어 무침은 100% 수입 숫컷으로 보면 틀림없습니다
홍어시장에 가면 홍어가 주욱 널려있지요.
어떤 주인은 홍어 숫놈 생식기를 뚝 잘라내서 암놈으로 위장시키기도 합니다.
요즘은 정보화 시대이니 이 글을 읽는 분들은 홍어를 살 때
제일 먼저 숫놈인지 암놈인지 구별부터 하겠지요?
위에서 사진으로 확인 했으니 홍어의 생식기를 짤랐는지 오리지날 암놈인지
시장에 가서 확실하게 구별 할수 있겠지요?
예전엔 어물전 일꾼들은 술 생각이 날때 안주감으로 아무 가게나 가서
숫홍어 생식기만을 뚝 잘라가곤 했다고 합니다. 홍어값이 비싸니 푸대접받는
홍어X라도 썰어다가 소주 안주를 삼았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주인은 모른 채 했는데 속으로는 수컷이 비싼 암컷으로 변했으니
아예 잘됐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홍어가 아무리 귀해도 "숫컷의 X"만은
만만한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만만한게 홍어 X"라는 말이 탄생 되었다는 유력한 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홍어 숫컷의 생식 능력이 막강하다는 사실이 알려 지면서
많은 남성들이 즐겨 찾는 것이 되버렸습니다.
'만만한게 홍어X'도 세월 따라 그 의미는 변하는 가 봅니다.
요즈음은 홍어집에서 단골들에게만 특별히 X를 하나씩 선사한다니.....
거의 대부분의 물고기는 물 밖에서 죽으면 썩기 시작합니다.
즉 부폐하기 시작 하죠. 그러나 홍어는 썩지 않고 발효가 일어 납니다.
죽어서 더 유익한 물고기로 재탄생합니다
제가 홍어를 최고로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몸은 입에서 부터 오장육부가 음식물을 소화 시키고
그 영양분을 흡수 처리 하는 기관들이지요
"음식물의 소화" -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단백질을 아미노산으로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바꾸는 일"이라고 할수도 있겠지요
단백질이 아미노산으로 화학적 반응을 일으킬때 '암모니아 가스'가 나오지요....
우리 인간들은 방귀를 뀝니다. 방귀를 뀌지 않으면 소화를 시키지 못한다는 의미와
같으므로 살아 있는 인간은 모두 방귀를 뀌어야 하며 또한 뀝니다.
방귀가 단백질이 아미노산으로 화학적 반응을 일으 킬때 나오는 암모니아 가스입니다.
물론 공기도 섞여 나옵니다만..
홍어의 발효는 "인간의 음식물 소화"와 같은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과 똑 같습니다.
발효라는 의미가 단백질을 미생물의 활동으로 아미노산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니....
인간의 입속에 들어 오기전에 단백질인 홍어의 몸통살이 발효를 통해 이미 아미노산화
되어 있어 인간의 몸 속에서 별도로 소화 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암모니아 가스 냄새가 이를 증명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암모니아 가스 냄새가 나지 않는 죽은 홍어는 먹으면 않되며, 암모니아 냄새가
많이 난다면 발효가 많이 됫다고 할수 있으며 소화엔 더 좋다고 할수 있겠죠
이것은 홍어의 피부가 틈실하고 피부에 끈적끈적한 점액이 많이 분비되는데
이 점액이 발광 박테리아로서 비피더스균과 함께 발효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비피더스균은 주로 볏짚에 서식하기 때문에
홍어나 청국장, 메주를 발효 시킬 때에 볏짚을 함께 넣는 것입니다
콩으로 청국장, 메주 만드는 것과 홍어 삭히는 것은 꼭 같은 이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홍어를 삭힐 때 홍어를 미리 깨끗이 씻는 것은
홍어 피부에 분비되는 점액을 없애는 일이기에 절대 하지 말아야 하겠지요?
참고로 칠레 수입산 보다 흑산도 홍어가 더 좋은 이유는
수입산은 냉동처리하여 오랜 기간 동안 운송 되어 오는 이유도 있겠지만,홍어의
피부에 나오는 점액이 칠레 수입산보다 흑산도산이 훨씬 많기 때문이라 하는군요
수입산과 흑산도산의 구별은 색깔로 하는데 흑산도산이 약간 더 붉다고 하네요
나이를 먹어 가면 갈수록 인간의 몸은 산성화 되어 간다고 합니다
홍어를 좋아하는 두번째 이유가 "강 알카리성 식품"이기 때문입니다.
잘 삭힌 홍어의 알카리산도는 Ph7이상이라니 섭취 했을때 산성화된 우리 몸을
알카리성으로 최소한 더이상의 산성화를 막아 주는데 효과가 있겠지요
특히 여성들의 기미, 죽은 깨, 검버섯등 피부 미용에는 최고라고 하는 설이 있으며,
산후조리에도 좋다고 하는군요
홍어에는 고도불포화지방산75% 함유하고 이속에 EPA, DHA 35% 이상이며
유리아미노산(TAURINE 성분)을 포함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성분들은 뇌졸증, 혈관질환, 심부전증등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뇌세포를 생성 시키는 성분이 많다고 하니 치매에 걸리지 않을려면
삭힌 홍어를 많이 먹어야 겠습니다
관절염에 좋은 식품은 먹어서 관절까지 흡수되게 하는 황산콘드로이친이 있는데
이 영양소는 [상어연골과 지느러미][달팽이와 우렁][녹용이나 녹각]
[소의 도가니탕]에 들어 있는데, 특이하게도 우리가 회나 무침, 찌개로 먹는 홍어나
가오리에는 엄청나게 많은 관절염 치료제인 황산콘드로이친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홍어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감이 꽃게라고 하는군요
정약전선생의 '자산어보'에는 홍어를 즐기는 방법과 효능들이 잘 나와 있습니다.
"홍어는 장이 깨끗해지고 술독을 해독하고,숙취를 해소시켜주고,거담 효과가 뛰어나다.그래서 특히 남도국악인들은 가래를 삭혀 준다고 하여 즐겨 먹는다"
아시다시피 현재도 전라도 지역에는 음식상에 홍어는 없어서는 않될 음식이지요
그래서 관혼상제에 차리는 음식에 홍어가 없으면 행사를 치루지 못할정도이라합니다
무인도에서 홍어를 먹는다!!~~
그럴수 있다면........
상상 속의 무인도에서
찡하게 코끝을 아리게하는 홍어의 암모니아 냄새를 맡으며
모든 근심 걱정 벗어 던지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건배를 하며 홍어를 먹는 맛
저의 블로그 "홍어와 무인도"에서 만날수 있습니다
흑산도 홍어는 비싸서 아무나 즐길수 없습니다만
시대가 좋아져 南美産 홍어도 양호한 상태로 잘 운송되오고, 저렴한 가격으로
살수 있으니 잘 삭히면 비슷한 효과를 얻을수 있으니 많이 즐기시고,
냄새가 많이 난다는둥 비위거슬린다고 그것도 못먹는 분들은 "홍어와 무인도"에서
저의 글들을 즐기시며 대리 만족하시기 바람니다
홍 어
문예진
내 몸 한가운데 불멸의 아귀
그 곳에 홍어가 산다.
극렬한 쾌락의 절정
여체의 정점에 드리운 죽음의 냄새
오랜 세월 미식가들은 탐닉해 왔다
홍어의 삭은 살점에서 피어나는 오묘한 냄새
온 우주를 빨아 들일 듯한
여인의 둔덕에
코를 박고 취하고 싶은 날
홍어를 찾는 것은 아닐까
해풍에 단단해진 살덩이
두엄 속에서 곰삭은 홍어의 살점을 씹는 순간
입안 가득 퍼지는
젊은 과부의 아찔한 음부 냄새
코는 곤두 서고
아랫도리가 아릿하다
중복 더위의 입관식
죽어서야 겨우 허리를 편 노파
차안(此岸)의 냄새
씻어도
씻어내도
돌아서면 밥 냄새처럼 피어 오르는 가랭이 냄새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 밥
붉어진 눈으로
홍어를 씹는다
문예진
*1976년 경북 김천생
추계예대 문예창작과와 한양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8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질 나쁜 연예"(2004년, 믿음사)
2007년 제26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2009년 청계산 시산제
세월은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며
시간 속에 사는 우리가
가고 오고 변하는 것일 뿐이다.
세월이 덧없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기 때문에 덧없는 것이다
1년에 한번하는 시산제
1년에 한번인데도 그동안 무척 많이 한듯합니다
시간 속에 사는 우리가 그 동안 무척이나 많이
가고, 오고, 변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겠습니다
[청계산 원터골 입구]
2월 15일 (일)
매년 2월 셋째주 일요일에 지내는 동창회 "시산제"에 참석하기 위해 이른 아침 집을나서
양재역 2번 출구로 나와 강남역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 "4432번" 시내버스를 타고
"청계산 원터골" 앞으로 왔습니다.
청계산을 찾는 대부분의 산객들이 '양재역 3번 출구'로 나와 "4432번" 버스를 타는데
이것 또한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죠. 여기서 대부분 타기 때문에 무척 복잡합니다
양재역 2번 출구로 나가 "4432번"을 한 정거장 앞 강남역 방향에 있는
'영동중학교'앞 정류장에서 타면 편할수 있습니다
[청계산 원터골 입구]
청계산에는 "원터골"이 두군데 있습니다.
가장 많은 산객들이 몰리는 이곳 "원터골"과 안양 인덕원쪽에서 가는 "청계사" 방향으로
"하오고개"를 넘어 가기 바로 전에도 "원터골"이 있습니다.
"원터골"이란 地名은 쉬운 말을 어렵게 만들어 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그냥 사용합니다.
"원터골"에 대해 알려 드리죠
옛날에는 한양에서 남쪽지방을 갈때 "달래내고개"를 걷거나 말을 타고 넘어야 했습니다.
특히 말을 타고 넘는 사람들 - 즉 관리들이 이곳에서 말을 빌려 타고 넘는 "驛院"이 있었답니다.
그 "驛院" 자리가 이곳에 있었다고 "驛院터"라고 하다가 "驛"은 빼고 쉽게 "院터"라고만 하였고
"院터"가 있는 마을을 "원터골"이라 하게 되었으니, 전국에 "원터골"은 이곳뿐만 아니라
중요한 고개가 있는 곳엔 많이 있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굴다리 위로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으니 격세지감을 느낌니다
말을 타고 "달래내고개"를 넘는 사람은 이제 찾아 볼수 없으니
"원터골"이 무슨 의미인지 알 필요도 없이 잊혀져 가버림니다.
[청계산 원터골]
경부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 가면 바로 삼거리가 나오며
등산로는 우측으로 올라 가야합니다.
수 많은 음식점과 등산용품점이 줄을 서 산객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청계산 등산로 입구]
삼거리에서 약 100m쯤 올라 가면, 청계산 원터골 등산로 입구가 나오며
좌측에 만남의 장소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곳에서 만남니다
오전 10시가 조금 못되어 도착했습니다
[청계산 등산로 입구]
원터골 만남의 장소에는 무척 오래된 보호수가 세월을 머금고 어렵게 생명을 이어가고
수많은 인간들은 건강산행을 위해 늙어 가는 보호수를 보며 청계산을 오릅니다
[청계산 등산로 입구]
청계산 원터골과 양재화물터미날등에서 "매봉"까지 오르는 코스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부자들이 산다는 '서초구'에 있습니다.
부자 동네에 있는 산이라 시설도 여느 산보다 잘 해 놨습니다.
산행후 신발의 흙 먼지를 털라고 골프장에나 있는 압축공기 분사기도 있습니다
[삼거리 이정표]
등산로입구에서 조금 오르면 삼거리가 나옵니다.
이곳에서 어느 곳으로 가나 다시 '매봉'에서 만납니다만, 직진을 하면 계단이 많고,
좌측으로 가면 자연미가 아직 살아있는 등로여서 우리들은 주로 좌측 등로로 오릅니다
이곳에서 "매봉" 정상까지 2.2km는 된비알로서 땀좀 흘림니다
다행이 새벽에 눈이 조금 내려 청계산 산행에 운치를 조금 더 느낄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산객들이 청계산을 조금 우습게 봅니다만
제 생각으로는 훌륭한 건강 산행 코스라고 생각합니다.
'원터골 등산로 입구'에서 '매봉'까지 2.2km는 급경사 된비알로서 무척 힘드는데도
별거 아니라고들 합니다. 아마 자주 다녀서 길을 잘 알기 때문이겠고,
肉山이라 오르는 등로에선 조망이 없어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어서이기도 하겠죠
처음 이곳을 오르면 많이 힘들어 합니다
청계산은 서울에 붙어있는 산이기에 휴일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명소입니다
년간 약 500만명이 이용한다고 하는군요
저의 동창회 산악회 이름은 "휘마루"입니다.
휘는 아시다시피 모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아름다울 徽입니다.
마루는 산등성마루를 의미합니다.
"휘마루"는 한달에 한번 셋째주 일요일에 이곳 청계산에 모여 산행을 합니다.
건강산행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만, 高校 졸업후 오랜 세월 동안 흩어져 살아오다
서로 얼굴 마주하며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그런 만남의 장이기도 합니다.
발족된지 벌써 십년이 넘었나 봅니다
[쉼터]
어느 산이나 처음엔 힘이 들지요. 워밍업도 부족하고 모처럼 된비알을 오르면
숨이 차고 땀이 납니다. 하지만 그럴 때쯤에는 곧바로 '쉼터'가 나옵니다.
저는 등산은 참 쉬운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힘들면 쉬면되니까요
힘들면 앉아 쉬고, 또 오르고, 또 쉬고.....그러다 보면 정상이 나타나더군요
저도 등산 예찬론자가 된지 얼마되지 않습니다만 하면 할수록 즐거운게
산에 가는 일이 되 버렸습니다.
요즈음엔 산의 매력에 푹 빠져 이산 저산 돌아 다니며 살고 있습니다
적당하게 내려준 하얀 눈이 운치를 더해 줍니다. 오늘 눈 구경으로 본전 뽑았습니다.
저는 '아이젠'을 준비 못한 친구를 위해 아이젠을 빌려 주는 바람에 미끌어져
이 부근에서 메기를 한마리 잡았습니다. ㅎㅎ
그래서 카메라 렌즈에 흙이 뭍었는데 모르고 계속 사진을 찍어 사진의 가운데 부분이
지져분하게 나오니 양해 바람니다
눈 내린 날의 산행은 낭만이 가득합니다.
배경 음악으로 흐르는 노래는 조금 오래 된 노래입니다만
고교 동창들과 이런 산행을 하며 있었던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길 때 사용하려고
남겨 두었던 "내일로 가는 마차"라는 노래입니다.
내일로 가는 마차
이재성
해저문 창가에 가득 눈물젖은 별빛이 와도
슬퍼말아라 친구야
깨진꿈이 서러우면 작은불을 밝히려마
두손을 모으고 친구야
가슴까지 태웠던 사랑은
지난꿈이 되었어도 슬퍼말아라 친구야
참을수 없는 슬픔이 다가와 너의 두볼을 적시거든
눈을감고 내일로 가자 친구야
지나버린 시간일랑 남기고 떠나자
눈물이 앞을 가려도 스쳐지나는 바람 바람 바람인것을
친구야 눈물을 숨기렴
내일로 가는 마차를 타고가자 타고 떠나자
내일로 가는 마차를 타고가자 타고 떠나자
지나버린 시간일랑 남기고 떠나자
눈물이 앞을 가려도 스쳐지나는
바람 바람 바람인 것을 친구야 눈물을 숨기렴
내일로 가는 마차를 타고가자 타고 떠나자
내일로 가는 마차를 타고가자 타고 떠나자
청계산은 바위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肉山입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고 산행을 하면 매봉 부근과 망경봉 석기봉 근처에서
웅장한 바위들을 구경할수 있습니다
[쉼터 정자]
청계산에는 여러 편의시설이 비교적 잘 되있습니다.
중간 중간 요소요소에는 쉼터가 잘 만들어져 있어 산객들을 편하게 해 줍니다
[쉼터 정자]
이곳 정자 쉼터에서 전열을 재정비해 마지막 된비알을 오를 준비를 합니다
이곳에서 매봉까지가 가장 힘든 급경사 코스이기 때문입니다.
[쉼터 이정표]
이곳이 꼭 알아 두어야 할 지점입니다.
"매봉" 정상을 밟고 "혈읍재-청계산 정상"으로 가고 싶으신 분들은 계단길로 직진하여 오릅니다
다만, 산행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나 힘든 분들은 여기서 좌측길로 가면 "매봉"을 오르지 않고,
'매봉'을 우회해서 "혈읍재- 청계산 정상"으로 갈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두팀으로 나뉘어 오릅니다
매봉을 오르는 사람들은 직진해서 계단으로 오르고
체력에 문제가 있는 분들은 좌측 우회로를 이용합니다
매봉으로 오르는 계단을 올라와 뒤돌아 보았습니다.
쉼터가 정확한 지점에서 휴식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잘 설치된 계단을 따라 계속 오릅니다
청계산 매봉 근처는 서초구청에서 나무 계단으로 도배를 해 놨습니다
[쉼터]
부자 동네 다웁게 곳곳에 쉼터를 잘 만들어놔 산행하기에 편합니다
처음으로 시야가 확 트이는 곳이기에 이곳에서 주변 경관을 조망하고 가야합니다.
북동쪽 강남 방향
가운데 멀리 보이는 산이 워커힐이 있는 '아차산'입니다.
동쪽방향
가운데 산이 "인릉산"입니다.
청계산과 인릉산 사이에 경부고속도로가 지나 가며, 고속도로 굴다리에서 산행을 시작했으니
어느 정도 올라 왔는지 짐작할수 있습니다
"인릉산"은 성남市界종주 산행을 할때 지나 가는 성남市界의 일부입니다
[관악산]
冠岳山이 남성미를 자랑하며 불꽃처럼 솟아 있습니다
한남정맥 광교산에서 분기한 "관악지맥"은 바라산, 우담산,청계산을 지나
앞에 보이는 우측 청계산 옥녀봉을 지나 우면산으로 가 남태령을 넘어 관악산으로 갑니다
옛부터 관악산은 남성적인 산으로 표현하고 청계산은 여성스러운 산으로 표현했습니다
관악산과 청계산은 같은 산줄기에 있는 산들이죠
[매봉 헬기장]
청계산 매봉 헬기장이 매봉 근처에 있습니다
헬기장이 아니라 공원같이 꾸며 놨습니다
[매봉 헬기장]
매봉 헬기장은 쉼터
[매봉 헬기장에서 바라 본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과 검단지맥]
멀리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과 '검단산'이 "검단 지맥"을 이루고 뻗어 있군요
앞의 '인릉산'과 남한산성 사이에 "서울공항"이 보입니다
성남市界종주산행을 저는 거의 다 했습니다.
남한산성이 있는 청계산을 올라 검단산 - 왕기봉 - 이배재고개 - 연리지봉 - 갈마치 - 영장산 -
일곱삼거리 - 분당율동공원뒷산길 - 태재 - 불곡산........
그리고 수원의 광교산 - 백운산 - 바라산 - 우담산 - 하오고개 - 청계산 국사봉 - 이수봉 -
석기봉 - 망경봉 - 혈읍재 - 매봉 - 옥녀봉 - 양재동화물터미날 까지
두번으로 나누어 11시간40분과 10시간 10분이 걸려 주파 한바 있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저의 산행기를 참고하시면 많은 도움이 될것입니다
산행기 이름은 "광교산 지지대고개에서 청계산 양재동 화물터미날까지"와
"남한산성에서 불곡산까지"입니다
'매봉'을 향해 오르는 길도 잘 정비되 있어 등산로인지 전망대 구경가는 길인지
구분 할수 없을 정도로 돈을 발라 놨습니다
[돌문바위]
'매봉코스'의 유명지인 "돌문바위"입니다
"돌門"인데 이 돌門을 세바퀴 돌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나 뭐래나....
저는 갈때마다 돌았는데도 소원이 이루어 지는 걸 못봤습니다
저 앞에 서서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는 중은 지난 십년동안 한자리에서 목탁을 두드림니다
명당자리에서 수입이 아주 짭짤하겠더군요. 그러니 계속하겠지요?
청계산에 놓인 모든 계단은 서초구 주민들이 헌납한 것들로 만들었다고
계단마다 기부자 명단을 붙여 놨습니다.
기부자들은 기부만 하고 여기로 등산은 오지 않고 골프장으로 주로 가겠지요?
[매바위]
"매봉"에는 "매바위"와 "매봉"이 있습니다
[매바위]
[매봉]
'매바위'에서 '매봉'은 약 100m정도... 가깝습니다
"매봉 정상입니다.
"매봉"은 582.5m 높이로 제법 높은 산입니다
[매봉 정상석]
매봉 정상석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내 아무것도 가진것 없건마는
머리 위에 항시 푸른 하늘 우러렀으매
이렇듯 마음 행복 되노라
[매봉에서 바라 보는 서울시내와 북한산]
날씨가 흐려 조망이 별루입니다
날씨가 좋으면 북한산이 지척입니다
서울의 중심부입니다
'매봉'을 내려가 망경봉으로 향합니다
청계산은 서울특별시의 남쪽관문에 위치해 있어 서울로 상경하는 시민들에게 녹색의 푸르름을 안겨 주며
도시의 삭막함을 절감시켜주며 연간 이용자수가 500여만명으로 휴일에는 6만명 이상이 이용하고 있어
도시지역에 대한 “녹색허파”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고
수도권 이천만 주민들의 자연휴식처로서 애용되고 있답니다
'혈읍재' 가는 길에서 바라 본 '망경봉'입니다
'망경봉'은 청계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며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청계산의 유래를 살펴보면
청계산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라고 합니다.
그전에는 청룡산이란 이름이 목은 이색(고려말의 학자. 포은, 야은과 함께 고려말의 삼은)의
詩에 보일 뿐이라고 합니다.
청룡산 아래 옛절
얼음과 눈이 끊어진 언덕이
들과 계곡에 잇닿았구나
단정히 남쪽 창에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종소리 처음 울리고 닭이 깃들려하네
청계산에 대해서는 모두 잘 아시므로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풍수지리에선 관악산을 우백호, 청계산은 좌청룡으로 보며
관악산은 힘이 솟는 男性으로 비유하고, 청계산은 아리따운 女性으로 비유합니다
남성적인 岳山의 관악산과 玉女峰등 여성적 이미지가 강한 청계산은 '관악지맥'으로 붙은 산입니다
[혈읍재]
혈읍재도 중요한 곳입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내려 가면 '옛골'로 바로 등산로를 탈출할수 있습니다.
체력이 약하신 분들은 이곳에서 하산하면 됩니다.
우측으로 가는 길은 "망경봉"으로 오르지 않고 우회하는 길입니다.
대부분 오른쪽 우회길로 가는데 중간에 "마왕굴"을 경유하여 "이수봉"쪽으로 갈수 있습니다
직진하여 망경봉 정상 군부대 철조망을 타고 망경봉을 오를수 있습니다
[혈읍재]
오늘은 직진하여 망경봉 군부대 철조망 좌측길로 가려합니다
이 코스는 저도 처음 가 봅니다
[망경봉에 있는 미군부대]
혈읍재에서 직진하여 망경봉 정상으로 가면 갈림길 이정표가 나오는데,
우측은 망경봉 정상으로 가는 길이며, 어느 쪽으로 가나 군부대를 돌아
다시 망경봉 헬기장에서 만납니다
망경봉 좌측 우회로로 처음 가 보는데 길이 편하게 잘 나 있더군요
청계산에는 대표적인 봉우리가 네개있습니다.
지금 지나온 "매봉"
그리고 지금 우회하고 있기에 알수 없는 청계산의 최고봉인 "망경봉"이 있으며
"이수봉"과 "국사봉"이 있습니다
망경봉은 望京峰으로서 고려말 '조견선생'이
이성계의 쿠데타로 이곳에 은신하며 서울을 바라보며 나라를 걱정한곳이라합니다
그래서 望京峰이라 이름 지었다고 하며, 이와 유사한 산봉우리 이름은 북한산에도 있지요
삼각산을 이루고 있는 "백운대", "인수봉", 그리고 "만경대"인데, 이 "만경대"를
"망경대"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萬가지 경치가 보인다고 "萬景臺"라고 합니다만
조선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한양천도를 하려고 이곳에 올라
앞으로 서울이 될 한양을 바라 보았다고 "望京臺"라고도 한답니다
'마왕굴' 코스 보다 이 코스를 추천합니다.
"이수봉"은 조선 연산군 때의 유학자인 정여창 선생이 스승 김종직과 벗 김굉필이 연루된
무오사화의 변고를 예견하고, 한때 이 산에 은거하며 생명의 위기를 두번이나
넘겼다하여 후학인 정구 선생이 이수봉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二壽峰이라는 말쌈입니다.
이수봉의 높이는 545m입니다
國思峰은 540m 높이로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지자
청계산에 은거하던 고려의 충신 조윤(趙胤)이 멸망한 나라를
생각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시산제 장소]
우회로를 잠시 돌아 나아 가니 시산제 공터가 바로 나왔습니다
매년 60회 선배들과 함께 시산제를 지내는데, 60회는 벌써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62회도 시산제 준비를 합니다
현수막을 걸고....
제삿상을 차립니다
돼지머리는 준비하기도 힘들고 무거워 요즈음 저희들은 돼지저금통으로 대체하여
시산제를 지냅니다. 오가는 사람들이 아이디어가 좋다고 하더군요
돼지머리 대신에 돼지머리 누른 고기는 준비를 합니다
구색은 제법 갖추고 식순도 조금 복잡하지만 할건 다 합니다
축문과 산악인 선서를 하고....
산짱이 제일 먼저 산신령께 3배 제례를 올립니다
산짱과 산총님~! 수고하셨습니다.
금년 한해동안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이 되도록
산신령님도 도와 주실거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모두 제배하고 돼지저금통에 금일봉을 넣고...
오늘은 총교우회 산악회인 "휘산회" 산행대장인 63회 이재현 대장이 직접 참석하여
시산제를 함께 빛내 주었습니다.
또한 60회 산악회 대표 선배님들이 62회 시산제에 배향해 주었습니다
선후배간의 정이 넘쳐 나는 광경입니다
[응원가 제창]
씩씩하다 우리는 휘문의 건아~♬
온 누리를 빛내일 휘문 학도다~!!
응원가 제창을 끝으로 시산제를 모두 끝냅니다
날씨도 좋지 않은데 약 20여명의 교우들이 참석하여 시산제를 무사히 지냈습니다
가장 즐거운 식사시간
저는 동기동창인데도 처음 만나는 동기가 있었습니다
동기동창 끼리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말하니 모두 웃을수 밖에...ㅎㅎ
옛골로 하산합니다. 이곳으로 하산하면 간단하게 버스 정류장으로 갈수 있습니다
약 30분이면 하산 완료합니다
하산하는 길은 군사도로를 따라 내려 오기 때문에 간단하며
군사도로가 S자인 곳에는 지름길을 이용합니다
62회 동기동창 여러분~!
오늘 저의 산행기를 보시면 청계산 등산 코스가 쉽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사실 청계산을 풀코스로 뛸려면 만만치 않습니다만, 오늘과 같은 코스는
등산 완전 초보라 할지라도 오를수 있는 간단한 산행코스입니다.
지금까지 "휘마루" 참여를 미적 미적 하셨던 분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동참하시고, 이러한 기회로 등산에 입문하여 마니아가 되시기 바람니다
나이들면 반드시 등산은 해야합니다
[뒷풀이]
옛골로 내려와 화기애애한 뒤풀이를 하고
2009년 휘마루 시산제를 마쳤습니다
오늘 저의 산행기를 보시는 모든 분들
금년 한해도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 많이 하시기 바람니다
화이팅!!~~
명성지맥 5구간 산행기 운산리고개 - 보장산 - 배모루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그 끝은 다시 새로운 시작으로 가고... 명성지맥 종주를 엊그제 시작한듯한데 어느듯 마지막 5구간을 하러 길을 나서니 시작과 끝이 무었을 의미하는지 묘한 느낌을 줍니다
[운산리 고개] 2009년 2월 8일 일요일 오전 9시 40분 포천시 창수면 "雲山里고개"에 도착했습니다 지난 1월 11일에 명성지맥 4구간의 날머리였던 곳입니다 우측 뒤에 있는 집앞에서 고기 구우며 뒷풀이를 했지요 안개가 많이 낀 운산리고개가 지난 4구간의 즐거움을 조용히 일깨워줍니다
[운산리 고개] 한달여만에 다시 찾은 "雲山里고개"는 변함없이 철통방위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오가는 사람들은 없고 차량도 만나기 어려운 고개입니다만 언제 찾아 올지도 모를 북한의 탱크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무기가 많이 개발되어 저런 방호벽으로 적의 침략을 막아 낼수는 없을텐데... 그렇다면 시대도 바꼈으니 이젠 구시대의 유물을 깨끗하게 정리 할 필요는 없을까...
[운산리 고개] 명성지맥 종주팀인 '서울백두클럽' 회원님들의 마음은 마지막 구간을 멋지게 장식하려는지 산행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산행 시작] 운산리 고개 방호벽 옆으로 난 비포장 차로를 따라 조금 오르다 가운데 山路인 명성지맥 마루금으로 들어 섭니다 좌측 비포장 車路는 보장산 정상까지 이어지는데, 지맥 종주를 하는 우리는 마루금을 따라 감으로 이 車路를 가끔 만나 건너 가며, 보장산 정상에서 최종적으로 만납니다
[보장산 등로] '운산리고개'에서 '보장산' 오르는 구간이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급경사 구간이 의외로 짧아 전체적으로는 쉬운 코스라는 평이 많았습니다
[軍방어시설] 명성지맥이 지나는 포천 철원지방은 아시다시피 휴전선이 아주 가까운 지역이기에 지맥길은 대부분 軍방어시설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다소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 오르는데 오늘은 "정월 대보름 이브"인데도 날씨가 봄날 같았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서 산행하기에는 좋았으나 따뜻한 날씨로 인해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시야가 트이지 않아 주변 경관을 촬영 할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산행구간도 짧고, 문화재나 역사적 사건 같은 얘깃꺼리가 없는 지역이기에 산행기는 재미없을 수 밖에 없음을 모두 예감하시겠죠? ㅎㅎ 안개까지 끼어 주변 경치까지 볼수 없어 더더욱 갑갑한 산행기가 되겠습니다 여기까지 읽고 그냥 가버리는 분들도 있겠지요? 재미없으니 그냥 가세요. 시간 낭비 마시고...ㅎㅎ
[첫번째 된비알] 운산리고개에서 약30분 정도 오르면 갑자기 짧은 급경사 오르막이 나타납니다. 이 급경사 오르막 위가 아까 들머리에서 헤어져 오르는 車路입니다.
[車路]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車路에 올라와 약간 아랫쪽으로 내려가 마루금을 따라 오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차로를 따라 약간 오르다가 왼쪽으로 급경사 사면을 올랐습니다만 고생이었습니다 쉽게 오르려면 이 車路를 따라 올라도 보장산 정상까지 갈수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람니다
[보장산 오르는 급경사 사면] 다른 분들은 아랫쪽에서 마루금을 탓습니다만, 저와 몇몇분들은 車路를 따라 약간 올라 가다가 왼쪽 된비알로 붙었습니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었습니다
[보장산 오르는 급경사 구간] 사진에서 보이는 경사보다 훨씬 급한 경사였습니다. 그러나 이 구간에서 땀을 좀 흘렸을 뿐 전체적으론 쉬운 코스였습니다
[보장산 오르는 급경사 구간]
[보장산 오르는 급경사 구간] 햇빛이 비치지 않는 登路 곳곳에는 이슬과 안개가 나뭇가지에 눈처럼 얼어 붙어 색다른 아름다움을 안겨줍니다
[424m봉 - 쉼터]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을 한시간 정도 오르니 봉우리 같지 않은 봉우리가 나왔는데 여기가 고도계로 424m 봉우리였으며 쉴수있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10시 40분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거리는 약 1.8km 급경사 오르막은 여기까지입니다.
하지만 정상은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다시 약 50분 정도 더 올라야 정상에 다다릅니다
지금 배경 음악으로 흐르는 노래는 매우 유명한 노래이지요? 제가 관악산 산행기에서 한번 소개해 드린적이 있는 노래인데 그 때 반응이 "이 노래 죽인다~"라고 처음 듣는 분들도 좋다고 격찬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한번 더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할 얘기도 없고해서...ㅎㅎ
명성지맥 마루금이 선명해서 편안한 산행을 할수 있는 구간입니다 이 노래는 The Road to Freedom이며 우리말로는 모두 아실테고... 이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Chris de Burgh 라고하는 영국 가수입니다만 이 양반은 외교관인 아버지 때문에 아르헨티나에서 1948년에 태어나 가수가 되었는데 그래서 영국이나 미국보다 남미에서 더 좋은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나이가 환갑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군요
[車路 교차점] 마루금과 車路가 다시 만나는 곳이 나오며, 여기서 직진합니다. 車路를 따라 올라 가도 됩니다 The Road to Freedom은 제목에서와 같이 自由를 갈구하는 노래입니다. 특히 전쟁을 반대하는 反戰歌謠이죠. 제가 이 노래를 오늘 산행기의 배경 음악으로 선정한 이유는 "명성지맥 종주"를 하면서 느낀 戰爭의 傷痕 때문입니다. 명성지맥 거의 전구간이 戰爭을 막아내기 위한 시설과 군인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동족을 향해 총뿌리를 겨누고있는 현장을 지나며 꼭 이 노래를 명성지맥 마지막 구간의 배경 음악으로 사용하려고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노래 입니다
[車路와 지맥 마루금] 車路와 나란히 보장산 정상까지 올라 갑니다 "자유를 위한 길"이라고 번역할수 있겠습니다만 이 노래 가사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 나간 아들이 戰死했나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을 생각하며 애처럽게 읊조리는 한탄의 소리입니다 자유를 위해 떠난 아들이 진정 자유를 지키는 것인지 돼묻고있는 이율배반적 내용을 노래합니다 실력없는 제가 번역한 가사를 한번 음미해 보시지요 우리네 마음이나 저쪽 서양사람들이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낄수 있을 것입니다
[고로쇠] 저는 처음으로 고로쇠 나무와 고로쇠 수액 체취현장을 직접 보았습니다 활짝 열린 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게 느껴지며 그 바람이 내게 말해주고 있구나 - 이제 여름은 갔다고 - -그러나 어둠 속에서 겨울이 폭풍우를 거느리고 기다린다고 - 나는 이제 늙었고 뼈마디도 다 약해져버렸어 그러니 이젠 내 아들이 나의 모든 것인데.... 그런데도 그 아들이 자유를 위해 싸우러 가버렸어 내 심장까지 가지고 -
[車路와 지맥 마루금] 나는 일평생 이 땅을 사랑해왔어 내 두 손으로 이 땅을 일궈왔지 하지만 이 자유라는 게 땅에 뿌려진 씨앗 위로 비를 뿌려줄 수 있을까? 이 자유라는 게 고통을 치유해주고 내 아들을 다시 내게 데려다 줄 수 있을까? 오오오....
[보장산 헬기장] 나는 그들이 저 아래 저 바위에서 배 타고 떠나는 걸 지켜봤어 마치 바다가 끊임없이 포효하는 듯했어 많은 이들이 자유의 길을 위해 그 길 위로 떨어져 암석 위에서 죽어가고 있어 나는 일평생 이 땅을 사랑해왔어 나의 두 손으로 이 땅을 일궈왔지 하지만 이 자유라는 게 땅에 뿌려진 씨앗 위로 비를 뿌려줄 수 있을까? 이 자유라는게 고통을 치유해주고 내 아들을 다시 내게 데려다 줄 수 있을까? 오오오...
[보장산 헬기장 위 방카] 온 세상이 다 잠들어 있었던 지난 밤에 나는 내 아들 꿈을 꿨어 그 아들은 어딘지 어두운 숲 속에서 길을 잃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어... 하얀 눈은 펑펑 쏟아지고 있는데.... 오오오.....
[헬기장 위 방카를 올라 좌측으로 조금 갑니다] 자유를 위해 전쟁터에 나간 아들은 자유를 얻지 못하고 죽었나 봅니다 남아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자유를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아들은 자유를 위해 나갔는데 자유를 완전히 잃다니... 통곡하는 아빠의 마음을 노래하는 "자유에의 길"입니다 그 '자유에의 길'은 '자유에의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이었다고....
[보장산 정상] 寶藏山 정상은 특별한 인기척도 없이 나타납니다 정상석도 없고 사람들의 흔적도 거의 없었습니다. GPS 고도계가 없었으면 여기가 보장산 정상인지 알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제가 종이로 '보장산 정상'을 알리는 표지를 했습니다 이 표지는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금새 없어 질것입니다 寶物이 많이 숨겨져 있다고 寶藏山이라는 이름까지 얻은 산인데 정상석 하나 없다니, 정상석도 보물이었는지 도둑놈들이 정상석까지 몽땅 훔쳐 갔단 말인가!!~~
[보장산 정상] 11시 30분경에 보장산 정상에 도착했으니 운산리고개에서 1시간 50분이 걸렸습니다 산꾼들은 지도와 나침판등을 이용해 위치를 다시 점검하고있습니다
[점심 식사] 점심식사 시간으로는 약간 이른 시간이었습니다만 보장산 정상에서 "정월 대보름 이브"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대보름이라고 대보름에 맞는 음식들을 준비해 오신 회원님들 덕분에 나같은 넘은 오늘이 "정월 대보름"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됬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하여간 명성지맥 다섯구간 중에 11시 30분경에 점심을 먹은 건 처음이었습니다
[독도] 보장산 정상에서 '배모루'로 가는 지맥길이 혼동을 주었습니다 프로들이 어느 곳으로 가야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있습니다
[보장산 정상에서 오른쪽 능선을 타고 내려와 뒤돌아 본 보장산 정상] 급경사 내리막입니다
보장산 정상에서 급경사 내리막 구간을 내려 와 앞을 보니 넘어야 할 봉우리들이 계속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명성지맥 보장산 구간 마루금은 운치도있고 한적했으며 날씨도 따뜻해 걷기에 무척 좋았습니다
[소나무] 이런 소나무가 우리 집에 있으면 몇억은 할텐데....
멋진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뒤 돌아 보았습니다 벌써 많이 내려 왔군요. 가운데 봉우리 뒤에 보장산 정상이 있는데 가운데 봉우리를 지나 왔습니다
크고 작은 봉우리를 수없이 넘어 갑니다
병에 걸린 나무 - 사람으로 따지자면 일종의 癌이라는군요
[초소 봉우리] 중요한 봉우리가 나옵니다. 이 봉우리에는 초소와 망가진 레이다 안테나가 하나 있습니다. 이 봉우리를 반드시 지나 가야 마루금을 정확히 따라 가는 것입니다
[초소 봉우리]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듯한 초소와 레이다 같은 안테나가 흉물스럽게 있습니다 이 초소는 철조망으로 차단되 있으나 철조망에 뚤려있는 구멍을 지나 직진합니다
[초소봉우리에서 뒤돌아 본 보장산 정상] 맨 뒤의 보장산 정상에서 가운데 산줄기를 따라 내려왔습니다. 많이 왔죠? 종착점이 다가 옵니다.
[초소 봉우리] 초소 문으로 나가 직진해야합니다. 오른쪽으로 가는 길도 있더군요
[분명한 명성지맥 마루금]
초소가 있는 봉우리에서 몇개의 봉우리를 지나갑니다
초소가 있는 봉우리 다음 봉우리에서 보장산 정상을 뒤 돌아 보니 확실한 "명성지맥 마루금"을 알수 있습니다 보장산 정상에서 가운데 산줄기를 따라 내려 왔습니다
[서울백두클럽 표지기] 이 산행기를 보고 명성지맥을 종주 하실 분들은 초록색으로 빛나는 "서울백두클럽" 표지기를 따라 가시면 알바하는 일은 없으실 겁니다
안개가 다소 걷히고 종착점이 다가 오니 시야가 트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군부대 뿐...
[하산] 마지막 내리막길을 내려 갑니다. 급경사 입니다
[軍 유격 훈련장] 이 봉우리가 軍 유격훈련장이더군요. 그러니까 유격훈련장 안으로 내려 와야 정확한 마루금을 따라 내려 오는 것입니다 이 유격훈련장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듯...
[軍 유격 훈련장] 유격훈련장을 내려 옵니다
[軍 각개전투 훈련장] 유격훈련장을 내려 오니 '軍 각개전투 훈련장'이 나왔습니다 이 훈련장은 지금도 사용하는 훈련장인듯합니다
[軍 각개전투 훈련장] 각개전투 훈련장에서 뒤 돌아 보니 '유격훈련장 봉우리'와 '명성지맥 마루금'이 잘 조망됩니다
각개전투훈련장을 나오면 좌측으로 이런 길이 나있습니다 우측은 군부대 입구이니 왼족으로 가야합니다
각개전투훈련장에서 고개를 올라 서면 찾기 어려운 삼거리 갈림길이 이런 모양을 하고 기다림니다 여기서 왼쪽으로 내려 갑니다
[산행 날머리] 명성지맥 全區間의 날머리인 "배모루"가 나옵니다. 오전에 우리를 테우고 왔던 버스가 용케도 날머리를 찾아 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곳은 군부대 입구이기도 하더군요 "명성지맥" 2008년 11월 23일(일) 포천과 화천의 경계인 광덕고개에서 명성지맥 종주를 시작하였습니다. 한북정맥 "광덕산 정상"에서 분기하는 명성지맥은 "자등현"을 지나 다시 "각흘산"을 오르고... 전쟁의 상흔이 산마루를 헐뜯어 놓은 듯한 "防火線"을 지나, 독립투사 장준하선생이 의문의 추락사를 했다는 "약사령"과 약사령능선"을 지나갔었습니다.
[산행 날머리] 산행 날머리를 나와 날머리를 촬영했습니다. 좌측 산객이 나오는 곳입니다 이 도로는 군부대 진입로입니다 12월14일(일)에는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들으며 겸재 정선(鄭敾)선생이 우리나라 최초의 독창적인 "진경산수화"를 그린 "삼부연폭포"를 지나 하늘도 울고 '궁예'도 울었다는 '명성산'을 지났습니다. 그리고 꿈에도 잊지 못할 탱크소리 우러렁거리는 "탱크 사격 훈련장"을 통과하여 "여우봉"을 넘고 "여우고개"를 지나갔었던게 엊그제 같습니다
[산행 날머리] 오후 2시 50분에 이곳에 도착했으니 5시간 10분 걸렸습니다 2008년 12월28일(일)에는 송년산행으로 '여우고개'에서 노루들의 서식지 "사향산"을 넘고, 이리들이 우굴거렸다는 "낭유고개"를 지났습니다. 관세음보살이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떨쳐준다는 "관음산"을 오르고 도적들이 오가는 행인들에게 돈을 뜯는다고 이름 붙여진 "도내지고개"를 지났습니다. 그리고 2,500,000여명의 생명을 앗아간 6.25 전쟁에 참전했던 '태국군 참전기념비' 앞에서 잊을수 없는 완전 짬뽕찌개에 쐬주로 송년산행을 자축하던 시간...아~~!! 다시 오지는 않으리~
[산행 날머리] "37번 옛국도"에 있는 군 사격부대 입구가 명성지맥 날머리입니다 "37번 신국도"는 건너편에 4차선으로 잘 나 있습니다 2009년 1월 11일(일) 神仙들이 내려와 놀고, 佛僧들이 춤을 춘다는 "불무산"을 넘고, 계곡이 깊어 낮에도 밤처럼 어둡다는 "밤고개"를 지나 구름이 언제나 산을 덮고 있다는 "운산리고개'에서 차가운 영하의 기온에도 불구하고 뒷풀이는 계속되었죠
[永平川] 그리고 오늘 보물이 엄청나게 숨겨져있다는 "보장산"을 넘어 故蘇城이 있었다고 붙여진 '고소성리'의 끝자락인 "배모루"에 왔습니다 枝脈은 永平川에 가로 막혀 더 이상 뻗어 가지 못하고 침몰하는 곳 - "배모루"에서 멈췄습니다 "명성지맥의 끝"입니다 정말 기나긴 여정이었습니다
[배모루] 명성지맥이 그 맥을 다하고 가라 앉는 곳 - "배모루" 이 지역 - 즉 고소성리는 우측은 한탄강이고, 좌측은 영평천이며 두 강이 이곳에서 만나는 두물머리입니다. 지금은 저렇게 다리가 놓여 자유롭게 다닐수 있지만, 옛날에는 배를 타야지만 바깥 세상으로 나갈수 있었답니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영평천(永平川)을 건너는 "배모루"라는 나루터가 오래전부터 있었답니다. 그리고 나루터에는 이 永平川을 건너는 조그만 배가 있었는데, '배를 매어 놓은 선착장'이란 뜻으로 순 우리말인 배모루라 불리우고 있답니다. 길고 긴 "명성지맥" 전구간을 완주하고 '배모루'에서 명성지맥을 졸업하니 감회가 남다름니다
[오리고기집] '배모루' 앞에 있는 오리고기집에서 '명성지맥 졸업식'을 했습니다
[뒷풀이] 오늘 졸업식은 명성지맥 완주 자축의 의미도 있었지만 '서울백두클럽' 회장님의 막내딸 결혼식 답례행사도 겸했습니다 결혼식을 축하해 주신 분들에게 회장님이 대포를 한방 쏘셨습니다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저는 미안한 마음이 앞을 가렸지만 앞으로 산행에 열심히 참여하여 고마움에 답하려합니다 좋은 자리를 만들어 주신 회장님께 다시 한번 감사 드림니다
[대보름 달] 돌아 오는 길에 휴게소에서 하늘을 바라보니 두둥실 밝은 대보름 달이 아직 훤한 하늘을 비추고 있습니다 鳴聲枝脈 즐거운 추억으로 남기며.... 함께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림니다
[구글어스 괘적도] 오늘 산행 거리는 약 9km였으며, 산행시간은 3시간 40분이며 휴식및 식사시간이 1시간 30분이었습니다 "감악지맥"에서 다시 만나요~~!
내장산 산행기
『정읍사』
- 작자미상 -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데를 드데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 데 졈그를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內藏山 조각공원에서 바라 본 "內藏山 西來峰"]
동국여지승람에서 지리산, 천관산, 월출산, 변산과 함께
湖南地方 5大 名山으로 지정된 "內藏山" -
2009년 2월의 첫날인 일요일에
전라북도 정읍시에 있는 내장산을 찾아 "휘산회"와 함께 길을 나섯습니다
[內藏山 조각공원]
'내장산 국립공원'은 "내장사"라고하는 볼품없는 절간이
국립공원 내장산을 찾는 산객들에게도 무자비한 2,500원의 문화재 관람료를 징수하고있더군요
이곳, 內藏山 조각공원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문화재 관람료를 징수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차장에서 내장사 입구를 통과하여 백련암에서 시작하는 산행은
우선 주차장에서 내장사까지 약 1시간 가까이 걸어 가서 산행을 시작하여야 함으로
관람료 내고, 트렉킹으로 한시간을 길바닥에서 허비해야하기 때문에
'內藏山 조각공원'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입니다
[준비운동]
휘문고등학교 졸업생들의 산악회인 '휘산회'는
발족한 이래 최대의 인원인 200여명이 이번 내장산 산행에 참가하였다고하며
관광버스 다섯대가 동원되었습니다.
특히 겨울인 2월달에 이런 참가인원은 미쳐 예상조차 할수 없었을 정도로 많았답니다
꽃피는 봄이 오면 아마도 엄청난 교우들이 참여하지 않을까~
앞으로 1,000명 이상이 참석하리라~~
[산행 개념도]
주차장에서 내장사까지 얼마나 먼지 아시겠지요?
이곳을 산행 들머리로 잡은 집행부의 의도를 처음엔 오로지 입장료-돈 때문인줄만 알았는데
내려 올때에서나 그 참뜻을 알았습니다
내려 오는데도 약 1시간 걸렸으니 올라 가려면 고생께나 하겠죠?
그리고 문화재 관람료 2,500원을 내야하고....
[조각공원 산행 들머리]
오전 11시 15분에 산행을 시작합니다
오늘은 "눈 덮인 내장산"을 기대하며 雪景에 대비하였는데
우리나라 기상관측 이래 2월초 날씨로는 최고 높은 기온을 나타냈다고하니
陰地와 高地 이외에선 눈을 만나기 어려웠습니다
[조각공원 산행 들머리]
등산로는 비교적 잘 정비되 있었습니다
[조각공원 산행 들머리]
등산로에 조금 들어와 산행 들머리를 뒤돌아 보았습니다
'조각공원 등산로 입구'는 찾기 쉽습니다. 내장사로 올라 가다 첫번째로 넓은
공터에 간단한 조각품이 있는 곳입니다
[된비알]
[된비알]
등산로에 들어서면 곧바로 된비알이 시작됩니다
숨돌릴 틈도 없이 오르막은 서래봉까지 계속됩니다
[내장 저수지]
가뿐 숨을 몰아쉬며 30여분 오르면 '내장 저수지'가 흐르는 땀을 잠시 멎게 해줍니다
오늘 산행중에는 계속 저 '내장 저수지'가 산객들의 위치를 알려줍니다
[계단]
내장산에는 친절하게도 곳곳에 계단을 설치해 놨습니다
누구나 쉽게 오를수 있도록 많은 공사비를 들여 설치하였겠지만
산꾼들에겐 이런 인공시설물이 눈에 가시처럼 보입니다.
서래봉 정상부로 으르면 녹지 않은 눈이 조금있습니다
[서래봉-불출봉 갈림길]
이곳이 중요한 갈림길입니다
西來峰은 內藏山을 대표하는 봉우리이기에 꼭 올라 보고싶은 마음이 들지요
내장사에서 찍는 사진에는 반드시 내장사 대웅전 뒤 배경으로 西來峰이 나옵니다
그래서 내장산의 대표 봉우리가 된것인데 가장 화려한 모습을 자랑합니다
불출봉으로 가려면 西來峰을 갔다가 이곳으로 되 돌아 와야합니다
[갈림길 이정표]
불출봉은 그냥 우측으로 가면 되지만 西來峰을 갔다가 불출봉으로 가려면
西來峰을 갔다가 이곳으로 되 돌아 와야합니다
[西來峰 가는 길]
갈림길에서 서래봉까지는 20분 정도 걸리므로 왕복 3~40분 정도 걸림니다
그러나....
[西來峰 가는 길]
엄청나게 가파른 철제 계단이 앞을 가로 막습니다
사진에서 느껴지는 경사보다 실제는 훨신 더 가파릅니다.
제 느낌에는 7~80도 정도 되는 경사도 같았습니다
[西來峰 가는 길]
내장사에서 백련암을 거쳐 '서래봉'으로 오르는 코스는
'서래봉'을 지나 이 철제 계단을 넘어 와 '불출봉'으로 갑니다
그 코스로 오는 초보 아줌마산객이 가파른 경사도 때문에 내려오지 못하고
낑낑대며 고생하고 있어 도와 주었습니다
[西來峰]
西來峰은 여러개의 봉우리로 병풍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만
主峰을 오르려면 더 가파른 철제 계단을 하나 더 올라야 합니다
西來峰은 멀리서 바라 보아야 아름다움을 느낄수 있으며
앞으로 연지봉 까치봉등 여러 봉우리를 돌며 얼마던지 구경할수 있기 때문에
특별히 이곳에 왔다가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니 참고하시기 바람니다
[西來峰 뒷봉우리에서 바라 본 "불출봉"]
앞으로 가야할 봉우리들입니다
[西來峰 뒷봉우리에서 바라 본 "내장 저수지]
[가파른 철제 계단]
西來峰에서 다시 불출봉 갈림길로 돌아 가고 있습니다
[불출봉 가는 길]
서래봉에서 내려와 불출봉으로 올라 갑니다
井邑市는 원래부터 마을 이름이 井邑이었기에 邑으로 고정 된듯합니다
都市가 된 지금 井邑에 市를 붙여 井邑市로 표기하니 느낌이 조금 야릇합니다
序頭에 정읍사를 올렸습니다
내장사가 있는 井邑에 오니 정읍사가 생각나서입니다
고등학교때 '국어'시간이외에 별도로 '古文'시간이 있었죠? 요즘에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古文'은 어려운 과목이라 '古文'시간이 오면 '拷問'시간이라고 하던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ㅎㅎ
정읍사는 우리나라에서 한글로 표기된 최고(最古)의 가요이지요?
현재 전해져 내려오는 가요중에 백제 가요로서는 또한 유일한 가요이기도 합니다.
핵교 때 배운 "정읍사"를 오늘 산행을 하며 복습해 보겠습니다
[西來藥水]
서래봉-불출봉 갈림길에서 불출봉 방향으로 조금 오르니 "西來藥水"터가
길바닥에 덩그러이 누워있었습니다.
그리고 약숫물은 나오지 않았기에 빈 플라스틱 바가지만이 목마른 산객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내장산 9개봉 능선]
내장산 9개 봉우리 종주등산코스는 말발굽 모양을 하고, 거대한 능선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12시쯤에 능선에 오르니 내장산 안쪽의 '내장사'가 보이며 9개 봉우리가 환하게 조망됩니다
새벽부터 집을 나선 교우들은 벌써 점심 식사를 옹기종기 모여 하기 시작합니다
가파른 된비알을 오르는 등산은 대략 여기서 끝나고 높고 낮은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코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1시간 10분정도 걸렸습니다
[장군봉, 연자봉]
내장산은 "호남정맥" 지나는 대표적인 산으로서
산안에 숨겨진 것이 무궁무진하다하여 내장(內藏)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답니다
건너편 좌측 끝 봉우리가 '장군봉'이며 그 우측 조그마하게 뽈록 나온 봉우리가 '연자봉'입니다
저 앞에 보이는 장군봉, 연자봉, 신선봉, 까치봉까지가 "호남정맥 마루금"이 지나갑니다
백두대간 장수군 영취산(주화산)에서 분기한 호남정맥은 진안 마이산을 거쳐
완주의 만덕산, 정읍의 '옥정호'옆을 지나 내장산으로 와 '장군봉', '연자봉',
'신선봉'을 거쳐 '까치봉'에서 "백암산"으로 갑니다.
그리곤 광주 무등산을 지나 광양의 백운산에서 그 脈을 다합니다
[불출봉, 망해봉, 연지봉]
우측 서쪽방향으로 앞으로 가야할 봉우리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출봉, 망해봉, 연지봉이 조망됩니다
[불출봉 가는 길]
정읍사라는 가요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 정읍(井邑)은 전주(全州)의 속현(屬縣)이었답니다.
아주 옛날, 그러니까 백제시대 쯤으로 추정되는 정읍(井邑)에 한 장삿꾼이 있었답니다
어느날 이 장삿꾼이 행상을 떠났는데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아내는 걱정이 많이 되겠지요?
그래서 그의 아내가 산 위의 바위에 올라가 달빛 아래로 뻗친 길을 바라보며,
남편이 밤에 다니다가 해를 입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진흙에 빠지는 것에 비유하며 읖조리는 것이 가요가 되었답니다.
이것는 망부가(望夫歌)의 하나로 남편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노래이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정읍 등점산에 망부석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불출봉 가는 길]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정읍사"는 3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번째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가 "달님에게 청원"하는 대목입니다
달님이시여 높이 높이 돋으시어
아~!, 멀리 멀리 비추어 주세요.
[불출봉 가는 길]
불출봉 가는 길에는 크고 작은 봉우리를 몇개 넘어야하며
내장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西來峰에서 불출봉사이"의 山路를 따라 갑니다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데를 드데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둘째절은 아내가 장사 떠난 남편에 대한 염려를 하는 대목입니다
님은 전주시장에 가 계시옵니까
아, 진 곳을 디딜까 두렵습니다.
"져재"는 큰 시장인 전주시장으로...
'진 곳'은 땅이 질퍽하게 진곳, 즉 위험한 곳을 의미하는데
후에 조선시대에는 '질퍽한 곳- 여성의 거시기'를 의미하니
'남편이 바람 피는 것'으로 해석하여
이 "정읍사"를 퇴폐적이라고 국가가 공식적으로 금지곡으로 지정까지 하기도 합니다
중종 때의 일이죠.
요즘같으면 전두환, 박정희 시대에도 금지되지 않는, 말도 않되는 금지이지요
[불출봉 앞 무명봉]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 데 졈그를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세번째절은 아내가 "남편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대목입니다
아, 내 님이 가는 곳에
날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남편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믿음의 이미지가 듬북 담긴 아내의 기원입니다.
이렇게 달에게 소망을 기원하는 우리의 민속 신앙과도 관련된다고 배웠습니다
[불출봉 앞 무명봉]
불출봉이 보입니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핵교때 노트를 찾아 보았더니 이런게 있더군요
노피곰, 머리곰 → '곰'은 '강세 접미사'
[불출봉]
불출봉은 철제 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불출봉 오르는 길]
[불출봉 정상]
전설에 의하면 불출봉에 안개나 구름이 끼면 그 해에 가뭄이 계속된다고 기록해 놨습니다
이런 전설을 공식적으로 알려주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1년 365일 중에 구름이나 안개가 끼는 날이 분명히 있을텐데....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언제나 '가뭄'이어야하겠네요..어찌 이런 무식한 사람들이있는지...
[불출봉 정상]
불출봉 정상에는 전망대를 만들어 놨기에 동서남북을 조망하기 좋았습니다
[불출봉 정상에 뒤 돌아 본 지나온 '서래봉']
"정읍"하면 떠오르는 것이 "정읍사"이외에도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 슬픈 노래입니다
[불출봉 정상에서 내려다 본 '내장저수지']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설이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때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자리 메김하고 있습니다
[불출봉 정상에서 바라 본 앞으로 가야할 봉우리들]
망해봉, 연지봉이 보입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 새야
녹두꽃이 떨어지면 부지깽이 매맞는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 새야
아버지의 넋새보오 엄마죽은 넋이외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너는어이 날라왔니
솔잎댓잎 푸릇푸릇 봄철인가 날라왔지
[불출봉 갈림길]
불출봉 밑에는 갈림길이 있습니다
'내장사'로 바로 내려 갈수있는 지름길이 있기에, 컨디션이 나쁜 분들은 여기서
山路를 탈츨할수 있습니다
[점심식사]
불출봉을 조금 지나 내장산 원적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능선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오늘은 저의 동기동창이 14명이나 함께했으며 가장 많은 참석기록을 갈아치웠습니다
[불출봉을 내려가 망해봉으로 향합니다]
정조대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조선은 "勢道政治"시대로 들어 가지요.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 할수 있다'는
외척세력인 안동김씨·풍양조씨등의 "勢道政治"는 조선의 농촌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운명을 갈라놓지요
탐관오리들이 날뛰고 정의가 불의에 짖밟히는 세상에서 참다 참다 들고 일어 난 농민들의 봉기.
바로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입니다. 불과 115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정읍군수가 "조병갑" 탐관오리였는데, 이 양반의 증손녀가 조기숙씨(50세)라고 밣혀졌으니
정말 오래전 일이 아닙니다. 조기숙씨는 참여정부의 '청와대 홍보수석'이었으며, 이화여대 교수이지요
그 동학혁명의 발상지가 바로 이곳 "정읍"이며 "녹두장군 전봉준"이 선봉에 섰지요
[망해봉 앞 무명봉]
불출봉과 망해봉 사이에도 이름 모를 큰 봉우리가 하나 있어 이 봉우리도 넘어야합니다
전봉준의 외침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르름은 그 본의가 다른 데 있지 않고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함이다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리라.
키가 유난히도 작아 쬐끄만 "녹두"라는 별명을 얻은 "전봉준"이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이름하여 "녹두장군 전봉준"
전봉준 - 녹두처럼 생겼지요? ㅎㅎ
[망해봉 앞 무명봉]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던 농민들의 꿈은 깨어지고
결국 녹두장군 전봉준도 사로잡혀 목을 베이고 말았으나
사람들은 이 안타까운 일을 파랑새 노래에 담아 부르면서 좋은 세상이 오기를 꿈꾸었습니다
[망해봉 앞 무명봉에서 뒤돌아 본 지나온 '불출봉'과 '서래봉']
지나 온 불출봉과 서래봉이 그림같이 펼쳐져 있습니다
파랑새에 대한 의미는 크게 두가지 설이 있는데
동학농민운동(1894) 때에
일본군이 푸른색 군복을 입어 파랑새는 일본군을 뜻하며
전봉준이 녹두장군이라 불리었던 점을 보아
녹두밭은 전봉준을 상징하고
청포장수는 백성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망해봉 앞 무명봉에서 바라 본 건너편 산줄기]
건너편 좌측에서 우측으로 '장군봉', '연자봉', '신선봉'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내장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神仙峰'입니다
"호남정맥"의 내장산 구간을 보고 계십니다
[望海峰이 보입니다]
이제 올라야 할 望海峰입니다
"파랑새"는 또 다른 설이 있습니다.
다름아니 "팔왕설"이지요
전봉준은 전(全)자를 파자하여 팔(八)왕(王) 이라고도 불리었고
이것이 音韻변화되어 '팔왕새'가 "파랑새"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노래는 아이들에게 널리 불리는 동요이기도 한데,
아이들의 입을 빌린 어른의 동요라고도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노래는 조수미등 몇몇 성악가들이 부르기도 하여 유명합니다
[望海峰 오르는 길]
望海峰 오르는 길도 가파릅니다
"동학농민운동"의 발단은 당시 정읍군수였던 "조병갑"이 탐관오리로서 백성들로부터
무자비한 수탈을 해 전봉준등 농민대표들이 바른정치를 호소했으나 거부당하며 일어났습니다
또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우리나라를 침략하려는 저의를 들어내면서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전봉준장군은 12만 명의 군사를 지휘 손병희의 10만 군사와 함께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지요.
동학 농민군은 중·남부 전지역과 함경남도, 평안남도까지 세력을 폈으나
유명한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최신식 무기 "캐틀링"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패한 후
순창으로 잠적하여 재기를 꾀하다가 붙잡혀 1895년 3월 처형되었습니다
우리민족의 울분은 그렇게 처참하게 짖밟히고 "일제강점기시대"로 갑니다.
오호~ 통재라~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望海峰 정상]
전봉준은 감옥에서 간수들에게 무수히 구타 당하자 그는 분연히 꾸짖기를,
"선비는 가히 죽일 수는 있어도 치욕을 주는 것은 아니다.
내가 국법을 어겼으면 마땅히 국법으로 다스려 죽여라! "
그리고 그에게 참형(1894년 3월 9일)이 내려지자
"나를 종로 네거리에서 죽여라. 백성들을 보고 싶다." 하면서
스스로의 죽음조차 선택하였으니 이때가 그의 나이 41세였습니다.
마지막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녹두장군 전봉준.
이런 전봉준장군이었기에 그를 애도하는 한 소절의 슬프고도 암울한 노래가
아직까지도 전해져 내려와 우리의 가슴을 적시고 있는 것입니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을미적 - - 병신되면 못가느니.
을미년에 적을 쳐부수지 못하면
병신년에는 병신되어 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望海峰 안내]
[望海峰 정상에서 바라 보는 서해 방향]
望海峰 정상에서는 서쪽으로 西海가 보인다고 합니다만
오늘은 약간의 운무로 볼수없습니다.
정상에는 사용할수 없는 화장실이 하나 있더군요
[望海峰 정상에서 바라 보는 북쪽 정읍시내 방향]
정읍시가지가 약간 보입니다
[望海峰 정상에서 바라 보는 지나 온 불출봉과 서래봉]
[望海峰 정상에서 바라 보는 앞으로 가야할 봉우리들]
앞으로 가야할 봉우리가 줄을 서 잇습니다
우측에서부터 '연지봉', '까치봉', '신선봉', '연자봉'
[望海峰 내려 가는 급경사 계단]
[연지봉 정상]
蓮池峰은 아마도 불교적 이름인듯합니다
오늘 지나온 봉우리 중에서 내장산을 전체적으로 보기에는 가장 조망이 좋았습니다
[연지봉 정상]
연지봉 정상은 내장산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내장산을 이루고 있는 산줄기가 말발굽모양으로 생겼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수 있습니다
오늘은 신선봉, 연자봉, 장군봉으로 시간 관계상 가지 못하고
다음 봉우리인 "까치봉"에서 가운데 능선을 따라 내려가 오른쪽
"금선계곡"을 타고 내장사로 갔습니다
[연지봉 안내판]
여기도 상식적인 얘기를 무슨 특별한듯이 알리고 있군요
"연지봉에 구름이 끼며는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불출봉에서와 같이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고 있지요? 에구~ 그렇게 할 얘기가 없냐?
[연지봉 정상에서 뒤 돌아 본 망해봉]
[연지봉 정상에서 바라 본 '까치봉', '신선봉', '연자봉', '장군봉']
오늘은 우측 첫번째 높은 봉우리인 '까치봉'까지만 갑니다
"호남정맥" 내장산 구간을 모두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연지봉을 하산하여 까치봉을 오릅니다]
[까치봉 정상]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까치봉'입니다
'까치봉'은 내장산 "말발굽" 모양의 능선에서 가운데 봉우리에 해당됩니다
[까치봉 정상]
봉우리의 모양이 까치가 날개를 편 형상이라 '까치봉'이라 한다고하나
정상에서는 그 형상을 촬영할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호남정맥을 따라 백양사까지 걸어 가는 트렉킹도 해볼만 하더군요
[까치봉 정상에서 바라 보는 '서래봉']
'西來峰'이 석양빛을 받으며 내장산 봉우리중에서 가장 아름바운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가운데 계곡밑에 내장사가 쬐끔 보입니다
그리고 가운데 능선을 타고 우측으로 내려가 "금선계곡"으로 하산합니다
[까치봉 정상에서 바라 보는 서쪽 '입암산', '백양산']
입암산도 유명한 산입니다. 백양산과 함께 내장산국립공원에 포함되 있지요
[까치봉 정상에서 바라 보는 남동쪽 호남정맥 '신선봉,'연자봉', '장군봉'']
시간 관계상 저 봉우리들을 모두 돌아 보지 못하고 대신 가운데 금선계곡을 구경합니다
오후3시 정각에 까치봉'에 올랐습니다만, 5시30분에 '휘산회' 버스가 출발한다고....
특히 내장사에서 주차장까지가 1시간이 걸리기때문에 집행부가 가로 막아
하산을 독려하여 신선봉, 장군봉은 포기했습니다
[까치봉 하산]
급경사 내리막을 한시간 정도 내려갑니다
[금선계곡]
한시간 정도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 오니 금선계곡이 하얀 눈속에서
해맑은 물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부터 내장사까지는 거의 평지인데 30분 정도 내려갑니다
[금선계곡]
금선계곡의 맑은 물에 발을 담그니 10초를 못견디게 차겁더군요
그러나 세수하고 발을 씻으니
하루 산행의 모든 피로가 한꺼번에 날라 가 버렸습니다
[금선계곡]
조금 있으니 후미 그룹이 내려와 금선계곡에 발을 담금니다
[금선계곡]
정상부근에도 별루인 눈이 계곡에는 그대로 남아 있군요
[내장사]
30여분 내려 오니 '내장사' 후문이 나왔습니다
내장사는 정말 볼품없는, 볼게 없는 조그마한 절간입니다
가을 단풍 때문에 유명해져 원래 '영은사'라는 절간 이름을 '내장사'로 바꾼지도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내장사]
내장사에 갔다 오신 분들은 거의 다 이 사진과 같은 사진을 찍고 옵니다
뒤로 "西來峰"이 병풍처럼 내장사를 둘러 싸고 있읍니다
내장사에서 볼거리는 이 경치 하나와 가을 단풍 뿐입니다.
'문화재 관람료'를 받고 있지만 특별한 문화재는 없습니다
모든 건물은 근간에 새로 지은 것들이여서 古風스런 건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 보러 문화재 관람료 2,500원 내기는 너무 아깝습니다
[내장사]
대웅전에서 정문방향을 보고 한컷했습니다
탑도 근간에 만든 것이라 세월의 떼가 뭍지 않아 깨끗합니다
[定慧樓]
현판에 쉬운 한자를 어렵게 써놔서 무슨 글자인지 알아 봤습니다
定慧樓를 저처럼 무식한 넘은 알아 보지 못하게 써놨는데
定은 禪定으로 마음을 한곳에 머물게 하는것이라 하며
慧는 바른 지혜를 일으켜서 理와 事를 밝게 관조하는 것을 말한다는군요
이런 불교의 가르침을 강조하는 절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입장료를 받는 것은 무엇을 '관조'하기 위함인가
[단풍나무 숲]
정혜루에서 일주문까지 촘촘히 서있는 단풍나무
내장사는 내장사보다 이 단풍나무 숲이 훨씬 더 유명하지요
이 단풍나무 때문에 가을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파가 몰림니다
하지만 이 겨울에는 볼품없는 앙상한 裸木일뿐....
[내장사 일주문]
[내장사에 대한 공식적인 안내문]
내장사는 백제시대에 '영은조사'가 세워 "영은사"라 했는데
어느때인가부터 '영은사'를 '내장사'라고 호칭하게됬다고하니 자기들도
'내장사'의 내력을 정확히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6.25때 모두 소실되어 1971년 국립공원 지정과 함께 복원하고 있다고합니다
[내장산 케이블카]
내장산에는 관광객들을 위해 '케이블카'를 운행하고 있더군요.
물론 '문화재 관람료'를 내고 들어와 이런 시설을 또 사용료 내고 이용해야합니다
저와 같이 '조각공원'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내장사 뒷문으로 들어 오면 관람료 면제입니다. ㅎㅎ
[우화정]
연못에 정자를 세워놨습니다
[주차장 가는 길]
내장사에서 주차장까지는 약 한시간 가까이 걸림니다
그리고 씨즌에는 관광마차를 운행하며 또 차비를 받는다는군요
오늘은 겨울철이라 그런 운송수단을 운행하지 않아 무지무지 걸었습니다
아스팔트길 트렉킹이 더 다리 아프지요
하여간 호남지방 5대명산이라고 하는 내장산을 둘러 보았는데
그다지 강한 인상은 남기 않았습니다
가을에 단풍 구경을 와야 내장산의 명성을 느낄수 있으려는지.....
우측 능선이 '호남정맥'인데....
[산행 개념도]
강당골-廣德山-望京山-雪華山-외암민속마을 산행기
눈이 내리면 꼭 가고 싶은 山이 있었습니다
무성한 숲이 울창한 지난 여름에서부터 생각해 두었던 山입니다
눈 내리는 날이 아니면 그 멋을 아름다움을 더하지 못한다고
눈이 내리면 꼭 찾아 보려고 아껴 두었던 산입니다
특히 雪華山...
이름에서부터 눈을 연상시키는 雪華山...
지금부터 충절의 고장 충남 아산시 온양온천에 있는 雪華山으로
저와 함께 떠나 볼까요?
[산행 개념도]
아산시 온양온천역에서 송악면 강당골로 가 광덕산에서 설화산을 거쳐
외암리 민속마을 앞으로 한바퀴 도는 제법 긴 거리의 종주코스입니다
[온양온천역]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연장 개통되어 수도 서울의 심장부에서
단 한번에, 그리고 저렴한 교통비로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온천까지 쉽게
갈수 있으니 발전된 교통시설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名所를 만들어 줍니다
설 명절 연휴의 첫날인 1월 24일(토)에 온양온천역에 내렸습니다
저는 아주 오래전에 이곳을 스쳐 지나 도고온천을 간적이 한번 있었을 뿐
처음으로 온양온천역에 내려 나왔습니다
[온양온천역앞]
온양온천역앞은 제법 번화한 거리로 많은 자동차들이 길을 메우고
지난 밤새 내린 눈으로 절묘한 경관을 보여 주고 있는데
하얀 눈이 쌓였는데도 溫泉이 솟아 나는 곳이라 생각하니
땅도 하늘도 사람들도 모두 따뜻한 느낌을 주는 듯 합니다
광덕산-설화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역에서 나와 좌측 버스 정류장으로 가야합니다
길 건너편으로 건너지 말아야 합니다. 건너지 말고 바로 좌측 버스 정류장입니다
[버스 정류장에 있는 버스 시간표]
광덕산 강당골까지 가는 버스는 오로지 "120번" 하나 뿐입니다
그리고 운행하는 시간이 오전엔 8시와 10시, 12시 단 세번 뿐입니다
저는 온양온천역 앞에서 정확히 10시 5분에 120번 버스를 탓습니다
이 버스 시간표를 잘 메모해 두어야합니다. 산행을 끝내고 역으로 돌아 올때도
이 시간표를 활용해야 하기때문입니다. 버스는 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나올때엔 오후 5시 버스를 '외암민속마을'앞에서 5시 8분에 탓습니다
그리고 교통비는 카드로 1,050원인데 은행신용카드는 결재가 않되어
현금으로 1,100원을 냈습니다. 서울과는 다른 점입니다
[설화산과 데이콤 기지국]
버스는 온양온천역에서 30~40분 정도 걸려 광덕산 등산로입구인 '강당골'까지 갑니다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온양의 案山인 雪華山'이 위용을 드러내며
데이콤 기지국의 커다란 위성 안테나를 볼수 있습니다
광덕산-망경산을 돌아 저 앞에 보이는 설화산으로 올 예정입니다
[강당골]
광덕산의 산행 들머리인 '강당골 버스 종점에는 주차장과 '여울목 화장실'이
예쁘게 단장을 하고 방문객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광덕산 산행 들머리]
강당골 주차장의 '여울목 화장실' 뒤로 광덕산 산행로는 잘 정비되어
세파에 찌든 사람들을 어서 오라고 부릅니다.
더 넓은 廣德을 베풀겠다고.....
오전 10시 40분에 눈 덮인 廣德山-望京山-雪華山 산행을 시작합니다.
사진에는 눈 내리는게 보이지 않아 눈이 내리게 만들었습니다
[강당골]
강당골은 이름있는 아산의 名所
광덕산내의 계곡인 강당골은 일명 양화담이라고도 한답니다.
이곳은 물이 맑고 계곡의 주변은 울창한 노목이 숲을 이루고 있어서 심산유곡의 정취를
맛 볼 수 있으며 개울바닥이 암반으로 되어 있어 물과 숲 돌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계곡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여름철 피서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답니다.
또한 강당골이 있는 송악면은 전국에서 사슴을 제일 많이 사육하는 지역이라는군요.
그래서 현지에서 다양한 사슴제품을 구입을 할 수 있다는군요
[登路앞 정자]
이곳에서 산행 준비를 합니다.
우리나라 최대 명절인 '설날' 연휴 첫날이고 눈이 많이 내려서인지
광덕산을 찾은 산객들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은 "눈"을 한도 끝도 없이 만끽하며 산행을 하겠군요
[광덕산 산행 안내도]
강당골 계곡으로 오르지 않고 '철마봉 코스'로 오릅니다.
대부분의 산객들은 계곡보다는 능선을 좋아합니다
[산행 들머리]
조금 올라와서 산행 들머리인 정자를 뒤돌아 봤습니다
등산로는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철마봉 입구]
광덕산 정상까지 3.2km라고 안내해 주네요.
여기서 정상까지 1시간 25분 걸렸으니 평범한 오르막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철마봉 오르는 길]
온양온천역에서 10시 버스를 함께 탄 산객들이 앞에 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대 명절인 설날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가는데
지난밤에 내린 눈으로 고속도로, 특히 서해안 고속도로는 정체가 심해 완전히 움직일수 없는
상태라는 사실을 안것은 집에 돌아와 본 뉴스에서였습니다
[철마봉 오르는 길]
광덕산 오르는 산길은 조용하고 한산합니다
일년중에 이런 날을 만나 산에 오르기도 쉽지 않으니
오늘 광덕산-망경산-설화산에 온것은 특별한 행운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철마봉 오르는 길]
아산시 온양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溫泉湯이 생긴 곳으로 유명하여 일반 국민들 뿐만 아니라
일찍이 많은 王들이 피부병 치료와 휴가를 위해 행궁을 짓고 즐겨 찾았던 곳이지요?
산행과 온천욕....정말 좋은 궁합입니다
[철마봉 정상]
철마봉 정상에는 산불감시 초소가 하나 덩그렇게 놓여있을 뿐이고
철마봉을 알리는 어느 표지도 없어서, 철마봉 봉우리인지 알기 어렵더군요
아산시 온양에 오면 생각나는 인물은 뭐니 누구니 해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입니다
이순신장군은 전국민이 존경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인물 중 한분으로 자리 메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위대한 영웅이십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는 수많은 연구가 있어 왔으며, 특히 드라마로 여러번 방영되어
그의 생과 업적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등잔불 밑이 어둡다고 "이순신장군의 죽음"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많은 의문을 남기고 있어 오늘은 "이순신장군의 죽음"에 대해 한번 생각 해 볼까 합니다
[철마봉 정상에서 바라 보는 광덕산]
"이순신장군의 죽음"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적군의 흉탄에 맞아 戰死했다고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날이 1598년 11월 19일이며 이순신장군의 나이가 54세였던 해입니다.
그러나 세간에는 이런 저런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고,
이순신장군에 대한 평가도 임진왜란이 끝난후 200여년이 지난 1792년에 정조대왕이
공식적으로 "이충무공전서" 편찬을 지시하고 장군을 영의정에 추종하며
'어제신도비'를 세우고 나서 1975년에 '이충무공전서'가 발간되니
이순신장군은 정조대왕에 의해 새로운 빛으로 우리 역사 속에 우뚝 서게됩니다.
그리고 근데에 와서는 '5.16 군사쿠데타 정권'에 의해 "軍人 이순신장군"으로 더욱 영웅화 됩니다
광화문 앞 "세종로"에 있던 "세종대왕 동상"이 어느 날에 갑자기 없어지고
"충무로"에 있어야 할 "충무공 동상"이 "세종로"에 우뚝 서는 일이 생겨난것도 군사정권 때의 일입니다
그래서 세종로에는 세종대왕이 없고, 충무로에는 충무공이 없다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것이지요
그러한 과정에서 "이순신장군의 죽음"은 영웅적 죽음인 戰死처리 되었습니다
그러나......의문은 1598년 11월19일부터 계속되 오고 있습니다
저는 영웅 이순신장군의 위대함에 대해 조금이라도 누가 되게하려는 취지가 아니고
오로지 수많은 세월 속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들의 내용을 알려 드리려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떠한 의도도 없음을 미리 알려 드리오니 그저 재미로 읽어 보시길 바람니다
[철마봉을 하산하고 있습니다]
"이순신장군의 죽음"에 대해서는 戰死했다는 공식적 죽음 이외에
크게 두가지의 說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자살설"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은둔설"입니다
이순신장군이 戰死했던 자살했던, 또 은둔했던 그것이 뭔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 괜히 까발려
문제없이 존경 받는 이순신장군의 명예를 실추시킬수도 있는 일이 아니냐고
항변하시는 분들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러한 의문이 뭔지를 그냥 생각해 보는 것이라 생각해 주시고
오늘 산행을 하며 함께 생각해 보자는 취지이니 단순히 재미로라도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람니다
그리고 이러한 說을 아시는 분들도 무척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林道 쉼터]
철마봉을 내려 가면 林道를 만나며 쉬어 갈수 있는 정자가 나옵니다
"이순신 장군 자살설"
1598년 11월19일 노량해전
이순신장군은 1598년 11월19일 노량해전 당시 우연히 戰死한 것이 아니라,
戰死의 형식을 빌어서 자살하기 위해 갑옷마저 벗어 두고 함대의 선두에 서서
지휘하다가 장열하게 전사하였다는 주장입니다.
"자살설"은 실제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200여년에 걸쳐
많은 이들에 의해 끈임없이 설왕설래 된바 있으며 아직까지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자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논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林道 쉼터]
李敏敍(1633∼1688)가 쓴 김덕령장군의 전기 속에 이순신장군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李舜臣方戰 免甲自中丸以死""이순신은 한참 싸울 적에 갑옷을 벗고 스스로 적탄에 맞아 죽었다"
李敏敍는 누구인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심각해진 사회적·경제적 위기를
균역법과 대동법의 실시로 헤쳐나갈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이의 실현을 적극 주장하기도 한 李敏敍.
李敏敍는 효종·현종·숙종의 3대에 걸쳐 승지·대사간·대제학·이조판서·우참찬 등을 거쳐
지돈녕부사까지 역임한 대단한 조선의 文臣입니다
이 사람이 쓴 임진왜란의 또 다른 영웅 "김덕령 장군"의 전기에 이순신장군의 죽음에 대해 기록해 놨으니
그냥 단순히 간과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林道 쉼터에서 광덕산 정상으로 가는 길]
이순신장군은 사천해전 당시 어깨 관통으로 고생한 이래 새로이 개발된 방탄 조끼 '환삼'도 있었는데
노량해전에는 방탄쪼끼 '환삼'은 커녕 아예 처음부터 갑옷도 입지 않고
삼도수군통제사의 붉은 융복만을 입은 채
아침 8시의 빛나는 태양 앞에서 왜군의 조총 정조준거리 4∼5m 앞에 우뚝 선 것이라니
스스로 죽기를 결심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林道 쉼터에서 보이는 광덕산 정상]
금산군 이성윤[1570∼1620]이 "노량 충렬사"에 써 붙인 시의 문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心知功大 終難賞志 決身殲 意露肝""공로 커도 상 못탈것 미리 알고서 제 몸 던져 충성 뵈러 결심했던가"
전쟁에서 이겨도 자신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政派들과
백성들의 우상이 된 이순신으로 인해 왕권의 위협을 느끼는 선조(宣祖)임금으로 부터
분명 '토사구팽(狡兎死良狗)' 당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자살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이상이 지금까지의 "이순신장군 자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논거입니다
[광덕산 정상으로 가는 된비알]
광덕산 정상으로 오르는 깔딱고개를 오릅니다
[광덕산 정상]
드디어 廣德山 정상이 먹구름을 뚤고 환하게 나타납니다
땀 흘리며 오른 것에 대한 보상을 완전히 해 줍니다
[광덕산 정상]
12시 5분에 광덕산 정상에 올랐으니 강당골에서 1시간 25분 걸렸습니다.
廣德山 정상은 산이름 그대로 넓직한 공터가 모든 산객들을 보담아 주는 듯 합니다
이런 날에도 막걸리 장사는 두명이나 두군데에 자리를 펴고 산객들에게 막걸리를 제공합니다
지난 5월 꽃피는 계절에 찾았던 감상보다 눈 덮인 겨울이 더 정감이 갑니다
[광덕산 정상석과 天地正氣]
광덕산은 높이가 699m로서 이쪽에서는 가장 높은 산입니다
[광덕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광덕사 방향]
지난해 5월에는 이 코스로 광덕산을 올랐었습니다
저 아래 "광덕사"에 우리나라 최초의 '호두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광덕산 정상에서 바라 본 금북정맥이 지나는 각흘고개 방향]
이 산줄기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금북정맥이 지나는 '각흘고개'로 갑니다
그리고 '아산지맥'이라고하는 아산시를 감싸고 있는 봉수산과 도고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광덕산 정상에서 바라 보는 雪華山]
앞으로 가야 할 雪華山이 변덕스런 날씨에도 잠깐 화려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눈 속에 빛나는 雪華山"
이 사진을 오늘의 Photo로 선정했습니다
[광덕산 정상에서 장군바위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이순신장군의 은둔설"
이순신장군은 戰死한것도 아니고, 더더욱 자살한 것도 아니며,
노량해전에서 적군의 흉탄에 우연히 맞아 죽은 것도 아니며
그 이후 70세가 될때까지 살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은둔설"을 믿는 편입니다. 오로지 개인적 생각임을 강조합니다
[광덕산에서 장군바위까지 능선]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을 이야기 하기 전에 당시 상황과
조선의 제14대 왕인 宣祖에 대해 먼저 알아봐야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宣祖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입니다.
도저히 왕위에 오를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중종은 누구입니까? 연산군을 무력으로 내몰고 권력을 장악한 쿠데타 정권 아닙니까?
그러한 대물림으로 오를수 없는 왕위에 오른 宣祖는 언제나 왕권에 대해 불안해 하였습니다
원래 宣祖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이러한 정치적 배경으로 항상 불안해 하고
정통성 없는 왕이었기에 항상 정적에 대해 의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백성들의 영웅으로 떠오르는 이순신장군을 宣祖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광덕산에서 장군바위까지 능선]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이 끊임없이 제기 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 "宣祖實錄"만이 유일하게 "수정宣祖實錄"이 다시 쓰여지고
두개의 판이하게 다른 내용의 實錄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순신장군에 대한 기록도 다르게 기록되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에 대해 하나 하나 근거가 되는 것들을
함께 생각해 보자구여
[장군바위앞 갈림길]
광덕산 정상에서 약 30분 정도 걸려 장군바위에 왔습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하산하면 천안시 광덕면 "광덕사"로 가는 길이며
좌측은 아산시 송악면 강당골로 내려 가는 길입니다. 제가 산행을 시작했던 곳으로 원점회귀할수 있지요
천안 광덕사를 기점으로 하던, 아산 오양 강당골을 기점으로 하던
"광덕산" 등산 코스는 광덕산 정상을 올라 여기 장군바위에서 대부분 하산합니다
"광덕산" 등산코스의 마지막 갈림길이라 할수 있습니다
망경산과 설화산은 직진합니다
[장군바위]
광덕산은 肉山이기에 바위 구경하기가 어렵습니다
광덕산에선 이 장군바위가 제일 큰 바위이라 합니다
[장군바위 내력]
[장군바위 뒷모습]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유언을 잘 뜯어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이 일어 나는 날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이미 죽어 조선 침략 전쟁을 포기하여
철군의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으며 조선과 明나라에 의해 이미 패배한 일본군은 대부분 도망갔는데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도 전라도 순천에서 그 근처의 해안 지역인 왜교(倭橋)로 이동하여
해상 경로를 통해 철수하려 하였는데 퇴각하는 적을 노량 앞바다에서 섬멸작전을 벌이던 이순신장군은
불행이도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합니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유언.
1598년 11월 19일 퇴각하는 적과 노량 앞바다에서 대전을 치르는 선상에서
장군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며 죽음의 순간에도 아군의 동요를 염려하며
곁에 있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에게 위와 같은 말을 유언으로 남깁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 말은 "이충무공행록"에 기록되 있읍니다.
그러나 이 유언 속에 "은둔설"의 실체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부용묘 갈림길]
퇴각하는 적군들이 도망 가기도 바쁜데 사정거리가 10m도 않되는 조총에 맞아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순신장군이 조총에 맞았다면 정말로 자살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도져히 있을수 없는 상황이란것입니다
그리고 이순신장군이 전사하는 광경을 본 사람이 맏아들 '회'와 조카 '완', 몸종 김이(金伊) 이외에는
본 사람이 지금까지도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순신장군은 그 동안의 전투에서 데리고 다니지 않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을 데리고
그리고 몸종 김이(金伊)까지 데리고 이미 끝난 전쟁터로 나가 싸웠을까요?
그리고 왜 친족인 맏아들과 조카, 몸종 김이(金伊)만이 장군의 죽음을 보았을까요?
[장군바위에서 망경산 가는 길]
장군바위를 지나 가면 바로 앞에 커다란 산봉우리가 나타납니다
대부분 망경산으로 착각하게합니다만 망경산은 저런 봉우리를 두어개 지나가야 나옵니다
노량해전에 나갈 때 이순신장군은 이미 마지막 전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답니다
조선이 왜놈들에게서 승리 했다는 사실을 알고 도망가는 마지막 놈들을 소탕하러 갔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거취를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있었답니다
그 동안 宣祖는 이순신장군을 두번이나 죽일려고 했습니다.
첫번째는 이순신장군이 육군일때 모함으로 그렇게 된것이고
두번째 이유는 부산항에 진을 치고 있는 일본군들을 쳐 부수라는 宣祖의 어명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부산항에 쳐들어 가는 것은 휘발유통을 메고 불속에 뛰어 드는 것과 같다고 어명을 어깁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조선 해군이 몽땅 사라진다고 어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소연을 했지만
더더욱 뿔따구가 난 宣祖로 부터 국문을 당해 거의 죽다시피 하고서 쫄병으로 강등 당하고서야 풀려났습니다
그것도 이순신장군 대신에 어명을 받든 '원균'이 부산항을 공격하다가 조선 해군 모두와 함께 작살이 나고서야
사형을 시키려던 이순신장군을 감옥에서 석방하지요
모두 알다시피 그래서 '白衣從軍'을 두번이나 하게 된것입니다.
사람들의 흔적이 없는 길을 따라 호젓한 산행을 합니다만
바람이 매우 세차게 불었습니다
노량해전이 끝나면 전쟁이 완전히 끝나므로
이순신장군은 살아서 육지에 올라 가나, 죽어서 올라 가나
결국 宣祖와 붕당세력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것이란 사실을
똑똑한 이순신장군은 스스로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어명을 따른 '원균'에 의해 초토화되버린 조선해군에 남아있는 배 겨우 13척으로 승리를 일구면
이순신을 반대했던 인간들로부터 다가 올 위험은 불을 보듯 뻔한것이었답니다
그래서 완벽한 알리바이를 노량해전 선상에서 만들어 세상에는 죽은 것으로 만들고
자신은 몰래 조용히 아무도 모르는 어느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16년 후에 70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는 것입니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유언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삼도수군통제사 옆에는 많은 참모들이 항상 명령을 기다리며 함께 있어야하는데도
그 장면을 본 사람이 오로지 맏아들 '회'와 조카 '완',몸종 김이(金伊) 이외에는 없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이해하시겠습니까?
[강당골 갈림길]
좌측으로 내려가면 쉽게 강당골로 탈출 할수 있습니다
망경대는 직진입니다
위에서 제가 언급한 이야기들은
"이충무공 전서"에 부록으로 수록된,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李芬)이 기록한 행록(行錄)에 나오는데
이순신의 최후의 모습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 기록에는 이순신장군이 적의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을 당시 이순신의 사망을 알았던 인물은
아들 '회'와 조카 '완', 그리고 몸종 '김이(金伊)'밖에 없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장군이 사망한 뒤 임시로 함대의 지휘를 맡은 이 역시 아들 '회'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참모들과 부하 장수들로 가득한 기함 지휘소에서 함대 사령관이 저격을 당해 사망하였는데도
그것을 단지 3명밖에 알지 못했다는 점을 어떻게 해석 해야하겠습니까?
더더욱 삼도수군절도사의 지휘권이 고참 부하 장수가 아닌 신출내기인 아들과 조카에게 돌아갔다는 점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극히 의심스러운 점입니다.
"이충무공 전서"의 "행록(行錄)"을 미루어 보면
결국 이것은 이순신장군의 은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조작한 것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믿던 말든 생각과 판단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광덕산 능선]
뒤 돌아 보니 지나온 광덕산 능선이 위용을 자랑합니다
이순신장군은 아시다시피 1598년 11월 19일에 '공식적으로 사망'하여
그 시신은 20일 뒤인 12월 10일에 고향인 아산으로 옮겨집니다.
하지만 국가가 장례비용을 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례는 그로부터 80일이 경과한 다음 해 2월 11일에 치러지며 가묘에 이순신장군을 모십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5년 뒤인 1614년에 정식으로 묘를 만들어 장군을 안치합니다.
이것은 이순신장군이 노량 해전 이후 宣祖와 붕당세력들을 피해 은둔하여 살다가
1614년에 실제로 사망하여 장례를 치렀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라고 "은둔설"을 주장합니다.
[설화산]
멀리 설화산이 보입니다. 아직도 갈길이 많이 남았습니다
이순신장군이 쓴 詩 한수 속에서 장군의 마음을 읽을수 있습니다
아득하다 북쪽 소식 들을 길 없네, 외로운 신하가 때를 잘못 만나 한이구나.
소매 속엔 적을 꺾을 병법 있건만, 가슴 속엔 백성 구할 방책이 없네.
천지는 캄캄하여 서리 엉키고, 산과 바다엔 피비린내 진동하네.
말을 풀어 화양으로 돌려보낸 뒤, 복건 쓴 처사되어 살아가리라.
이순신장군은 노량해전 이전에 이런 詩를 지었습니다.
이미 장군은 자신의 처지와 앞으로의 계획을 예견하고 있는 듯 하지 않습니까?
저의 앞에는 두사람이 지나간 발자욱만이 길안내를 하고 있는데
눈과 바람은 때때로 앞에간 산객들의 발자욱을 지웠다 말았다 합니다
"은둔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도 들춰냅니다
"조선 수군은 원거리 포격전을 주로 구사하였기에, 야간보다는 주간에 해전에 임하였다.
하지만 노량 해전만큼은 야간에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야음을 틈타 이순신을 도피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망경산]
우측으로 망경산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망경산은 望京山으로 쓰며 이곳에서 "서울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라합니다. 그러나 지난해 5월에 올랐었을 때에 서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울을 그리워하는 산"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망경산-설화산 갈림길 삼거리]
설화산은 직진하면 됩니다만
망경산은 이곳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내려 가야합니다.
1시 25분에 이곳에 도착했으니 강당골에서 2시간 45분이 걸렸으며
광덕산 정상에서는 1시간이 걸렸습니다
[망경산-설화산 갈림길 이정표]
설화산은 세출리방향으로 갑니다
망경산을 갔다가 설화산을 가려면 망경산을 갔다가 반드시 이곳으로 되돌아 와야합니다
망경산에서 설화산으로 직접 가는 길은 없으니 참고하셔야합니다
이곳에서 망경산을 갔다 오려면 약 한시간 정도 걸림니다
저는 오늘 망경산을 갔다 오려 했으니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버스 시간을 맞추기 위해
오늘은 망경산을 생략하기로 합니다.
망경산과 태화산에 대해선 저의 지난해 5월17일 산행기를 참고하시기 바람니다
광덕산 林道가 나 있는 세출리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눈이 내리다가 다시 햇빛이 나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설화산이 예쁘게 나타납니다. 맨 끝의 봉우리가 설화산입니다
눈 내린 雪華山이 글자 그대로 눈 속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발자욱을 지우며 쌓였던 눈까지 날려 보냅니다
망경산 갈림길에서 세출리 방향으로 조금 내려 갑니다
[林道 쉼터]
철마봉에서 광덕산 정상 오르는 길에 있었던 林道가 광덕산 허리를 가로질러
여기까지 뻗어 있습니다. 오른 쪽으로 '수철리' 가는 길입니다
1시 40분경 이곳에 도착하여 간단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林道 쉼터]
설화산은 산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가야합니다
[雪華山 가는 길]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을 강력히 반대하는 정통 학자들이 대다수라는 것도 알려드림니다
앞서 제가 언급한 여러 근거들은 근본적으로 잘못됫다는 것이며
이순신장군은 戰死 한것이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宣祖實錄"과 "수정宣祖實錄"에 기초를 두고 하는 正說입니다
"不滅의 이순신장군" - 어떻던 이순신장군은 우리 민족의 영웅이십니다
23전 23승, 13대 133에서도 이긴 세계사를 다시 쓰게한 인물
[雪華山 가는 길]
雪華山이 점점 다가 오며, 오른쪽으로 배방산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雪華山의 모습은 점점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닺고있습니다
눈 내리는 날이 아니고는 맛볼수 없는 경치는 極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雪華山 가는 길]
광덕산과 설화산에는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 영향으로 남쪽지방에는 소나무가 잘 자라지 못한다고하는데
광덕산과 설화산에는 거의 소나무로 덮여 있어 名山임을 증명해 줍니다
소나무가 길 양옆에서 호위를 하는 하얀 눈길을 따라 마냥 걷고 또 걷습니다
이렇게 즐거운 산행은 처음입니다
[강당골 갈림길]
광덕산 설화산 종주 코스는 좌측으로 내려 가면 무조건 '강당골'임으로 긴급한 일이나
피로를 느낄 때엔 언제나 탈출이 쉬우니 부담없이 걸을수 있어 강력히 추천하고 싶습니다
[雪華山 가는 길]
현재 미국 웨스트포인트를 비롯해 전 세계 23개국의 사관 학교에서 "이 순신 전략"이
"사막의 여우 롬멜"과 함께 군사교육 필수전공 과정에 포함 되어 있다고 하는군요
이순신장군이 얼마나 위대한 영웅인지 단적으로 알수 있습니다
[무덤이 있는 산봉우리]
설화산 가는 길에는 제법 높은 산봉우리가 세개가 있는데
무덤이 있는 이 봉우리가 첫번째로 나타나며 설화산이 조망됩니다
앞에 눈에 덮여 있는 것이 무덤입니다
[무덤이 있는 봉우리에서 뒤 돌아 본 "望京山"]
"望京山"이 확실한 모습을 더러내고 있군요
좌측 어렴푸시 보이는 산이 泰華山입니다
지난해 5월 "광덕산-망경산-태화산" 종주를 했습니다
[자연보호 안내판이 있는 봉우리]
높은 봉우리 중에 두번째로 넘는 봉우리엔 "자연보호" 안내판이 매우 크게 설치되 있습니다
'자연보호'를 외치고 있는 안내판이 자연을 홰손 시키고 있습니다
[雪華山 가는 길]
'자연보호' 안내판이 있는 봉우리를 지나고 나면 본격적인 雪華山코스로 들어 섭니다
이제부터 광덕산-망경산-설화산코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는 진정한 雪華山입니다
[雪華山 가는 길]
설화산이 점점 다가 옵니다만, 아직도 높은 봉우리를 넘어야 다시 설화산 정상으로 갈수있습니다
여기서부터가 경사가 심한 마지막 두개 봉우리를 넘습니다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설화산이 보입니다
[눈꽃]
예쁜가요?
[雪華山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
설화산 바로 앞에 있는 높은 봉우리를 오릅니다
눈은 점점 더 많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雪華山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에서 뒤 돌아 본 망경산과 태화산]
이 봉우리에서 남쪽 방향이며 좌측이 泰華山이고 우측이 望京山인데,
가운데 계곡에 있는 고개 이름이 "넋티고개"입니다
광덕산에서 망경산을 지나 '넋티고개'를 통과해 태화산으로 오른 지난 5월이 생각납니다
[雪華山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에서 바라 본 동쪽 방향에 있는 "배방산"]
배방산과 태화산은 산줄기로 연결되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아산지맥"은 저 앞의 '배방산'에서 태화산을 오르고 '넋티고개'를 건너
'망경산'과 '광덕산'을 지나 금북정맥 마루금이 지나는 '각흘고개'와 봉수산,도고산을 잇는
산줄기를 말합니다. "아산지맥"은 산경표에 나오는 지맥이 아니고 아산에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지맥이라합니다. 하루에 종주하기에는 어려우나 여름철에는 하는 사람들도 있나봅니다
[雪華山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에서 남서쪽 광덕산]
지나온 광덕산 산줄기가 그림 같습니다
가운데 맨끝 봉우리가 광덕산 정상입니다. 철마봉 능선도 잘 보이는군요
지나온 저런 산줄기를 지나와 바라보면 뿌듯한 성취감이 들지요
[雪華山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에서 서쪽 방향 - 온양 송악면]
외암리 민속마을이 있는 송악면 외암리
이 봉우리에서 산객 세사람을 만났습니다
최대 명절인 설날을 앞두고,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 짧지 않은 거리인
강당골-광덕산-망경산-설화산-외암민속마을 코스를 찾은 이 분들...진짜 산꾼들이지요?
장군바위 이후에서 처음 만난 산객들입니다. 반가웠습니다
[기념 사진]
기념 사진을 한컷했습니다.
앞에 마스크를 한 사람은 이곳 아산에 사시는 분인데 아산의 산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분이더군요
아산의 산들과 '아산지맥', 그리고 설화산에 대한 많은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철1호선이 온양까지 연장 개통되고 난 이후의 온양온천의 변한 모습을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요즈음 온양온천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룬다고합니다. 노인네들이 차비가 꽁짜인 전철을 타고
온양으로 와 온천욕을 하며 하루를 보내고 가는 유명코스가 되어 손님이 폭발적으로 늘어 난다고하는군요
작년 한해에 온양의 인구가 10,000명이 늘었다고 온양온천역앞에 커다란 현수막으로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뒷편의 두분은 요즈음 정맥을 종주 중이라하는데 설연휴를 이용해 이곳을 찾았다고합니다
이 두분과는 온양온천역까지 함께 갔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즐겁고 안전한 산행 많이 하시길 기원합니다"
[가야 할 설화산]
눈이 많이 내립니다
눈 내리는 雪華山으로 이젠 네명이서 함께 출발합니다
진짜 산꾼들이지요?
[안부 사거리]
봉우리를 내려오면 안부 사거리가 나오는데 직진하면 설화산으로 오릅니다
우측으로는 '초원 아파트'와 '맹씨행단'으로 가는 길입니다
좌측으로는 오전에 버스를 타고 지나쳤던 외암리 민속마을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입니다
초원아파트나 외암민속마을로 가려면, 설화산 정상에 올랐다가 여기로 되돌아 와야합니다
'초원아파트'방향은 시내버스가 자주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더군요
맹씨행단(孟氏杏亶)은 본래 최영장군이 살던 집이었는데
이웃집에 살던 맹사성의 사람됨을 눈여겨 본 최영장군이 맹사성을 손녀사위로 삼고 집까지
물려주어 맹사성 일가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맹사성 정승이 심은 600여년 된 은행나무와 고택이 있는데,
이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민가라고 하는군요.
고택 뒤에는 맹 정승과 그의 부친인 희도, 조부 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세덕사가 있다고합니다.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어서 행단이라 부른 것으로 추정하나,
공부하던 자리의 의미인 행단이 된 것으로도 추정된다합니다
[설화산]
폭설이 내리는 설화산을 오릅니다
혼자 걷다가 여럿이 걸으니 또 다른 느낌을 주는군요
[설화산]
설화산 정상부에는 내리는 눈이 차곡차곡 쌓여 雪景을 더욱 아름답게 합니다
[雪華山 정상]
雪華山 정상에 오르니 세차게 부는 바람에 선명한 색깔을 띄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습니다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만 눈도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雪華山 정상]
雪華山 정상은 좁은 공간인데 친절하게도 산객들을 위해 평상을 설치해 놨습니다
雪華山은 다섯 봉우리가 솟아서 오봉산이라고 한다는군요
[雪華山 정상]
雪華山의 유래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雪華山은 산꼭대기의 모양이 붓끝을 닮았다고 文筆峰이라고도 한다고하며
山勢가 매우 영특하고 장관을 이뤄 이 주변 마을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네요
대표적 인물이 '이순신장군, 맹사성, 이간 선생'이랍니다
[雪華山 정상]
길은 떠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던데.......
시간도 보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을 맞기 위함이라하던데.....
눈으로 뒤덮히는 雪華山에 서니
또 흘러 간다
소중한 나의 날들이......
[雪華山 정상에서 바라본 지나온 봉우리]
다시 저 봉우리 사이의 안부로 내려 가야합니다
눈이 많이 내리기 때문에. 설화산 정상에서는 먼곳을 조망할수 없었습니다
[雪華山을 하산합니다]
눈..눈..雪..雪..雪
[雪華山을 하산합니다]
눈..눈..雪..雪..雪
[雪華山 내려 가는 길]
[雪華山]
내려와 뒤 돌아 본 雪華山.....
아름답습니다
[외암민속마을]
외암마을은 충청도의 대표적 양반 마을로서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36호로 (1999년 12월 28일) 국가에서 지정 보호하고 있는 마을이랍니다
[외암민속마을]
약5백년 전에 이 마을에 정착한 예안 이씨 일가가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어 살고 있다고합니다
[외암민속마을]
최근에는 이곳에서 사극이나 영화 촬영이 종종 있으며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답니다
영화 사상 최단기간에 전국관객 500만명을 돌파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필름 제작·쇼박스 배급)의 촬영지 중 한곳이 외암리 마을이다.
손예진, 조승우, 조인성 주연의 흥행 영화 '클래식' 의 배경 중 한곳 역시 외암리 마을이다.
그 외의 영화로는 [소릉],[동첨]등이 이곳에서 촬영하였다.
외암리 마을의 건재 이상익의 고택이 영화 [취화선] 속 이응헌의 집 배경이 됐다. 장승업이 머슴살이를 하면서 그림에 대한 꿈을 펼치기 시작한 곳이며 소운이라는 학처럼 고운 여인을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SBS 드라마 [옥이이모]
SBS 드라마 [임꺽정]
KBS 드라마 [찬란한 여명]
KBS 드라마 [당신]
SBS 드라마 [덕이]
KBS 드라마 [꼭지]
KBS 드라마 [소문난 여자]
KBS 드라마 [새엄마]
SBS대하드라마 [야인시대]
삼성생명 CF
[외암민속마을]
외암 이간 선생이 쓴 [외암기]에 "예안이씨가 온양에 들어와 살게 된지 이미 5세가 되었다" 고 하였는데, 조선 명종 때 장사랑을 지낸 이연은 6대조이고, 이사종은 5대조가 된다. 그렇다면 이사종 때부터 이곳에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외암기]에서는 선조 이사종이 그의 부친인 이연의 묘를 송악의외록에 정하면서, 별업을 외암에 지어 열승정(閱勝停)의 위치에 대해 읍지에서도 기록되어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예안이씨는 전의 이씨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로 10세손인 익(翊)이 예안이씨의 시조가 된다. 7세손인 이연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둘째 아들 이사종 계열만 번창하고 있는데, 이사종부터 예안이씨 온양파가 시작되었다.
[외암민속마을]
외암 이간 선생은 조선후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예안, 자는 공거(公擧),호는 외암 외에 추월헌(秋月軒)이라고 하였다.
숙종 36년(1710)순무사 이만성(李晩成)에 의하여 장릉참봉(葬綾參奉)으로 천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6년뒤인 숙종 42년(1716)에 다시 천거되어 세자시강원자의가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젊은데도 벼슬이 뛰어오름을 논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숙종실록에서도 '호서사인(濠西士人)이간'이라는 표현이 보이듯
이 온양 향리에서 주로 지낸 이간은 31세 되던 해 권선재를 건립하여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영조 3년 51세로 일생을 마감했는데 정조는 이조참판과 성균관 좨주를 증직하였으며 순조는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시호는 문정공이고 저서로는 [외암유고]가 있다. 마을에는 외암 이간의 학문적 유업을 기리는 사당이 있고 매년 외암 이간 선생이 사망한 음력 3월14일 불천위제사를 지낸다. 외암 선생의 묘소는 외암리 오른쪽 산기슭에 있으며 입구에 신도비가 남아있다
[외암민속마을]
[외암민속마을 입구]
외암민속마을은 입장료를 어른 2,000원을 받고 있었으나
설화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 갈수 있더군요
이곳에서 120번 버스를 5시 5분에 탓습니다
총산행 시간은 6시간 20분이 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