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당골-廣德山-望京山-雪華山-외암민속마을 산행기
눈이 내리면 꼭 가고 싶은 山이 있었습니다
무성한 숲이 울창한 지난 여름에서부터 생각해 두었던 山입니다
눈 내리는 날이 아니면 그 멋을 아름다움을 더하지 못한다고
눈이 내리면 꼭 찾아 보려고 아껴 두었던 산입니다
특히 雪華山...
이름에서부터 눈을 연상시키는 雪華山...
지금부터 충절의 고장 충남 아산시 온양온천에 있는 雪華山으로
저와 함께 떠나 볼까요?
[산행 개념도]
아산시 온양온천역에서 송악면 강당골로 가 광덕산에서 설화산을 거쳐
외암리 민속마을 앞으로 한바퀴 도는 제법 긴 거리의 종주코스입니다
[온양온천역]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연장 개통되어 수도 서울의 심장부에서
단 한번에, 그리고 저렴한 교통비로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온천까지 쉽게
갈수 있으니 발전된 교통시설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名所를 만들어 줍니다
설 명절 연휴의 첫날인 1월 24일(토)에 온양온천역에 내렸습니다
저는 아주 오래전에 이곳을 스쳐 지나 도고온천을 간적이 한번 있었을 뿐
처음으로 온양온천역에 내려 나왔습니다
[온양온천역앞]
온양온천역앞은 제법 번화한 거리로 많은 자동차들이 길을 메우고
지난 밤새 내린 눈으로 절묘한 경관을 보여 주고 있는데
하얀 눈이 쌓였는데도 溫泉이 솟아 나는 곳이라 생각하니
땅도 하늘도 사람들도 모두 따뜻한 느낌을 주는 듯 합니다
광덕산-설화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역에서 나와 좌측 버스 정류장으로 가야합니다
길 건너편으로 건너지 말아야 합니다. 건너지 말고 바로 좌측 버스 정류장입니다
[버스 정류장에 있는 버스 시간표]
광덕산 강당골까지 가는 버스는 오로지 "120번" 하나 뿐입니다
그리고 운행하는 시간이 오전엔 8시와 10시, 12시 단 세번 뿐입니다
저는 온양온천역 앞에서 정확히 10시 5분에 120번 버스를 탓습니다
이 버스 시간표를 잘 메모해 두어야합니다. 산행을 끝내고 역으로 돌아 올때도
이 시간표를 활용해야 하기때문입니다. 버스는 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나올때엔 오후 5시 버스를 '외암민속마을'앞에서 5시 8분에 탓습니다
그리고 교통비는 카드로 1,050원인데 은행신용카드는 결재가 않되어
현금으로 1,100원을 냈습니다. 서울과는 다른 점입니다
[설화산과 데이콤 기지국]
버스는 온양온천역에서 30~40분 정도 걸려 광덕산 등산로입구인 '강당골'까지 갑니다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온양의 案山인 雪華山'이 위용을 드러내며
데이콤 기지국의 커다란 위성 안테나를 볼수 있습니다
광덕산-망경산을 돌아 저 앞에 보이는 설화산으로 올 예정입니다
[강당골]
광덕산의 산행 들머리인 '강당골 버스 종점에는 주차장과 '여울목 화장실'이
예쁘게 단장을 하고 방문객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광덕산 산행 들머리]
강당골 주차장의 '여울목 화장실' 뒤로 광덕산 산행로는 잘 정비되어
세파에 찌든 사람들을 어서 오라고 부릅니다.
더 넓은 廣德을 베풀겠다고.....
오전 10시 40분에 눈 덮인 廣德山-望京山-雪華山 산행을 시작합니다.
사진에는 눈 내리는게 보이지 않아 눈이 내리게 만들었습니다
[강당골]
강당골은 이름있는 아산의 名所
광덕산내의 계곡인 강당골은 일명 양화담이라고도 한답니다.
이곳은 물이 맑고 계곡의 주변은 울창한 노목이 숲을 이루고 있어서 심산유곡의 정취를
맛 볼 수 있으며 개울바닥이 암반으로 되어 있어 물과 숲 돌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계곡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여름철 피서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답니다.
또한 강당골이 있는 송악면은 전국에서 사슴을 제일 많이 사육하는 지역이라는군요.
그래서 현지에서 다양한 사슴제품을 구입을 할 수 있다는군요
[登路앞 정자]
이곳에서 산행 준비를 합니다.
우리나라 최대 명절인 '설날' 연휴 첫날이고 눈이 많이 내려서인지
광덕산을 찾은 산객들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은 "눈"을 한도 끝도 없이 만끽하며 산행을 하겠군요
[광덕산 산행 안내도]
강당골 계곡으로 오르지 않고 '철마봉 코스'로 오릅니다.
대부분의 산객들은 계곡보다는 능선을 좋아합니다
[산행 들머리]
조금 올라와서 산행 들머리인 정자를 뒤돌아 봤습니다
등산로는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철마봉 입구]
광덕산 정상까지 3.2km라고 안내해 주네요.
여기서 정상까지 1시간 25분 걸렸으니 평범한 오르막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철마봉 오르는 길]
온양온천역에서 10시 버스를 함께 탄 산객들이 앞에 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대 명절인 설날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가는데
지난밤에 내린 눈으로 고속도로, 특히 서해안 고속도로는 정체가 심해 완전히 움직일수 없는
상태라는 사실을 안것은 집에 돌아와 본 뉴스에서였습니다
[철마봉 오르는 길]
광덕산 오르는 산길은 조용하고 한산합니다
일년중에 이런 날을 만나 산에 오르기도 쉽지 않으니
오늘 광덕산-망경산-설화산에 온것은 특별한 행운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철마봉 오르는 길]
아산시 온양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溫泉湯이 생긴 곳으로 유명하여 일반 국민들 뿐만 아니라
일찍이 많은 王들이 피부병 치료와 휴가를 위해 행궁을 짓고 즐겨 찾았던 곳이지요?
산행과 온천욕....정말 좋은 궁합입니다
[철마봉 정상]
철마봉 정상에는 산불감시 초소가 하나 덩그렇게 놓여있을 뿐이고
철마봉을 알리는 어느 표지도 없어서, 철마봉 봉우리인지 알기 어렵더군요
아산시 온양에 오면 생각나는 인물은 뭐니 누구니 해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입니다
이순신장군은 전국민이 존경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인물 중 한분으로 자리 메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위대한 영웅이십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는 수많은 연구가 있어 왔으며, 특히 드라마로 여러번 방영되어
그의 생과 업적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등잔불 밑이 어둡다고 "이순신장군의 죽음"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많은 의문을 남기고 있어 오늘은 "이순신장군의 죽음"에 대해 한번 생각 해 볼까 합니다
[철마봉 정상에서 바라 보는 광덕산]
"이순신장군의 죽음"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적군의 흉탄에 맞아 戰死했다고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날이 1598년 11월 19일이며 이순신장군의 나이가 54세였던 해입니다.
그러나 세간에는 이런 저런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고,
이순신장군에 대한 평가도 임진왜란이 끝난후 200여년이 지난 1792년에 정조대왕이
공식적으로 "이충무공전서" 편찬을 지시하고 장군을 영의정에 추종하며
'어제신도비'를 세우고 나서 1975년에 '이충무공전서'가 발간되니
이순신장군은 정조대왕에 의해 새로운 빛으로 우리 역사 속에 우뚝 서게됩니다.
그리고 근데에 와서는 '5.16 군사쿠데타 정권'에 의해 "軍人 이순신장군"으로 더욱 영웅화 됩니다
광화문 앞 "세종로"에 있던 "세종대왕 동상"이 어느 날에 갑자기 없어지고
"충무로"에 있어야 할 "충무공 동상"이 "세종로"에 우뚝 서는 일이 생겨난것도 군사정권 때의 일입니다
그래서 세종로에는 세종대왕이 없고, 충무로에는 충무공이 없다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것이지요
그러한 과정에서 "이순신장군의 죽음"은 영웅적 죽음인 戰死처리 되었습니다
그러나......의문은 1598년 11월19일부터 계속되 오고 있습니다
저는 영웅 이순신장군의 위대함에 대해 조금이라도 누가 되게하려는 취지가 아니고
오로지 수많은 세월 속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들의 내용을 알려 드리려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떠한 의도도 없음을 미리 알려 드리오니 그저 재미로 읽어 보시길 바람니다
[철마봉을 하산하고 있습니다]
"이순신장군의 죽음"에 대해서는 戰死했다는 공식적 죽음 이외에
크게 두가지의 說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자살설"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은둔설"입니다
이순신장군이 戰死했던 자살했던, 또 은둔했던 그것이 뭔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 괜히 까발려
문제없이 존경 받는 이순신장군의 명예를 실추시킬수도 있는 일이 아니냐고
항변하시는 분들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러한 의문이 뭔지를 그냥 생각해 보는 것이라 생각해 주시고
오늘 산행을 하며 함께 생각해 보자는 취지이니 단순히 재미로라도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람니다
그리고 이러한 說을 아시는 분들도 무척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林道 쉼터]
철마봉을 내려 가면 林道를 만나며 쉬어 갈수 있는 정자가 나옵니다
"이순신 장군 자살설"
1598년 11월19일 노량해전
이순신장군은 1598년 11월19일 노량해전 당시 우연히 戰死한 것이 아니라,
戰死의 형식을 빌어서 자살하기 위해 갑옷마저 벗어 두고 함대의 선두에 서서
지휘하다가 장열하게 전사하였다는 주장입니다.
"자살설"은 실제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200여년에 걸쳐
많은 이들에 의해 끈임없이 설왕설래 된바 있으며 아직까지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자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논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林道 쉼터]
李敏敍(1633∼1688)가 쓴 김덕령장군의 전기 속에 이순신장군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李舜臣方戰 免甲自中丸以死""이순신은 한참 싸울 적에 갑옷을 벗고 스스로 적탄에 맞아 죽었다"
李敏敍는 누구인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심각해진 사회적·경제적 위기를
균역법과 대동법의 실시로 헤쳐나갈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이의 실현을 적극 주장하기도 한 李敏敍.
李敏敍는 효종·현종·숙종의 3대에 걸쳐 승지·대사간·대제학·이조판서·우참찬 등을 거쳐
지돈녕부사까지 역임한 대단한 조선의 文臣입니다
이 사람이 쓴 임진왜란의 또 다른 영웅 "김덕령 장군"의 전기에 이순신장군의 죽음에 대해 기록해 놨으니
그냥 단순히 간과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林道 쉼터에서 광덕산 정상으로 가는 길]
이순신장군은 사천해전 당시 어깨 관통으로 고생한 이래 새로이 개발된 방탄 조끼 '환삼'도 있었는데
노량해전에는 방탄쪼끼 '환삼'은 커녕 아예 처음부터 갑옷도 입지 않고
삼도수군통제사의 붉은 융복만을 입은 채
아침 8시의 빛나는 태양 앞에서 왜군의 조총 정조준거리 4∼5m 앞에 우뚝 선 것이라니
스스로 죽기를 결심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林道 쉼터에서 보이는 광덕산 정상]
금산군 이성윤[1570∼1620]이 "노량 충렬사"에 써 붙인 시의 문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心知功大 終難賞志 決身殲 意露肝""공로 커도 상 못탈것 미리 알고서 제 몸 던져 충성 뵈러 결심했던가"
전쟁에서 이겨도 자신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政派들과
백성들의 우상이 된 이순신으로 인해 왕권의 위협을 느끼는 선조(宣祖)임금으로 부터
분명 '토사구팽(狡兎死良狗)' 당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자살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이상이 지금까지의 "이순신장군 자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논거입니다
[광덕산 정상으로 가는 된비알]
광덕산 정상으로 오르는 깔딱고개를 오릅니다
[광덕산 정상]
드디어 廣德山 정상이 먹구름을 뚤고 환하게 나타납니다
땀 흘리며 오른 것에 대한 보상을 완전히 해 줍니다
[광덕산 정상]
12시 5분에 광덕산 정상에 올랐으니 강당골에서 1시간 25분 걸렸습니다.
廣德山 정상은 산이름 그대로 넓직한 공터가 모든 산객들을 보담아 주는 듯 합니다
이런 날에도 막걸리 장사는 두명이나 두군데에 자리를 펴고 산객들에게 막걸리를 제공합니다
지난 5월 꽃피는 계절에 찾았던 감상보다 눈 덮인 겨울이 더 정감이 갑니다
[광덕산 정상석과 天地正氣]
광덕산은 높이가 699m로서 이쪽에서는 가장 높은 산입니다
[광덕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광덕사 방향]
지난해 5월에는 이 코스로 광덕산을 올랐었습니다
저 아래 "광덕사"에 우리나라 최초의 '호두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광덕산 정상에서 바라 본 금북정맥이 지나는 각흘고개 방향]
이 산줄기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금북정맥이 지나는 '각흘고개'로 갑니다
그리고 '아산지맥'이라고하는 아산시를 감싸고 있는 봉수산과 도고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광덕산 정상에서 바라 보는 雪華山]
앞으로 가야 할 雪華山이 변덕스런 날씨에도 잠깐 화려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눈 속에 빛나는 雪華山"
이 사진을 오늘의 Photo로 선정했습니다
[광덕산 정상에서 장군바위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이순신장군의 은둔설"
이순신장군은 戰死한것도 아니고, 더더욱 자살한 것도 아니며,
노량해전에서 적군의 흉탄에 우연히 맞아 죽은 것도 아니며
그 이후 70세가 될때까지 살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은둔설"을 믿는 편입니다. 오로지 개인적 생각임을 강조합니다
[광덕산에서 장군바위까지 능선]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을 이야기 하기 전에 당시 상황과
조선의 제14대 왕인 宣祖에 대해 먼저 알아봐야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宣祖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입니다.
도저히 왕위에 오를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중종은 누구입니까? 연산군을 무력으로 내몰고 권력을 장악한 쿠데타 정권 아닙니까?
그러한 대물림으로 오를수 없는 왕위에 오른 宣祖는 언제나 왕권에 대해 불안해 하였습니다
원래 宣祖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이러한 정치적 배경으로 항상 불안해 하고
정통성 없는 왕이었기에 항상 정적에 대해 의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백성들의 영웅으로 떠오르는 이순신장군을 宣祖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광덕산에서 장군바위까지 능선]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이 끊임없이 제기 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 "宣祖實錄"만이 유일하게 "수정宣祖實錄"이 다시 쓰여지고
두개의 판이하게 다른 내용의 實錄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순신장군에 대한 기록도 다르게 기록되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에 대해 하나 하나 근거가 되는 것들을
함께 생각해 보자구여
[장군바위앞 갈림길]
광덕산 정상에서 약 30분 정도 걸려 장군바위에 왔습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하산하면 천안시 광덕면 "광덕사"로 가는 길이며
좌측은 아산시 송악면 강당골로 내려 가는 길입니다. 제가 산행을 시작했던 곳으로 원점회귀할수 있지요
천안 광덕사를 기점으로 하던, 아산 오양 강당골을 기점으로 하던
"광덕산" 등산 코스는 광덕산 정상을 올라 여기 장군바위에서 대부분 하산합니다
"광덕산" 등산코스의 마지막 갈림길이라 할수 있습니다
망경산과 설화산은 직진합니다
[장군바위]
광덕산은 肉山이기에 바위 구경하기가 어렵습니다
광덕산에선 이 장군바위가 제일 큰 바위이라 합니다
[장군바위 내력]
[장군바위 뒷모습]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유언을 잘 뜯어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이 일어 나는 날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이미 죽어 조선 침략 전쟁을 포기하여
철군의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으며 조선과 明나라에 의해 이미 패배한 일본군은 대부분 도망갔는데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도 전라도 순천에서 그 근처의 해안 지역인 왜교(倭橋)로 이동하여
해상 경로를 통해 철수하려 하였는데 퇴각하는 적을 노량 앞바다에서 섬멸작전을 벌이던 이순신장군은
불행이도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합니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유언.
1598년 11월 19일 퇴각하는 적과 노량 앞바다에서 대전을 치르는 선상에서
장군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며 죽음의 순간에도 아군의 동요를 염려하며
곁에 있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에게 위와 같은 말을 유언으로 남깁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 말은 "이충무공행록"에 기록되 있읍니다.
그러나 이 유언 속에 "은둔설"의 실체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부용묘 갈림길]
퇴각하는 적군들이 도망 가기도 바쁜데 사정거리가 10m도 않되는 조총에 맞아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순신장군이 조총에 맞았다면 정말로 자살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도져히 있을수 없는 상황이란것입니다
그리고 이순신장군이 전사하는 광경을 본 사람이 맏아들 '회'와 조카 '완', 몸종 김이(金伊) 이외에는
본 사람이 지금까지도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순신장군은 그 동안의 전투에서 데리고 다니지 않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을 데리고
그리고 몸종 김이(金伊)까지 데리고 이미 끝난 전쟁터로 나가 싸웠을까요?
그리고 왜 친족인 맏아들과 조카, 몸종 김이(金伊)만이 장군의 죽음을 보았을까요?
[장군바위에서 망경산 가는 길]
장군바위를 지나 가면 바로 앞에 커다란 산봉우리가 나타납니다
대부분 망경산으로 착각하게합니다만 망경산은 저런 봉우리를 두어개 지나가야 나옵니다
노량해전에 나갈 때 이순신장군은 이미 마지막 전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답니다
조선이 왜놈들에게서 승리 했다는 사실을 알고 도망가는 마지막 놈들을 소탕하러 갔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거취를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있었답니다
그 동안 宣祖는 이순신장군을 두번이나 죽일려고 했습니다.
첫번째는 이순신장군이 육군일때 모함으로 그렇게 된것이고
두번째 이유는 부산항에 진을 치고 있는 일본군들을 쳐 부수라는 宣祖의 어명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부산항에 쳐들어 가는 것은 휘발유통을 메고 불속에 뛰어 드는 것과 같다고 어명을 어깁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조선 해군이 몽땅 사라진다고 어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소연을 했지만
더더욱 뿔따구가 난 宣祖로 부터 국문을 당해 거의 죽다시피 하고서 쫄병으로 강등 당하고서야 풀려났습니다
그것도 이순신장군 대신에 어명을 받든 '원균'이 부산항을 공격하다가 조선 해군 모두와 함께 작살이 나고서야
사형을 시키려던 이순신장군을 감옥에서 석방하지요
모두 알다시피 그래서 '白衣從軍'을 두번이나 하게 된것입니다.
사람들의 흔적이 없는 길을 따라 호젓한 산행을 합니다만
바람이 매우 세차게 불었습니다
노량해전이 끝나면 전쟁이 완전히 끝나므로
이순신장군은 살아서 육지에 올라 가나, 죽어서 올라 가나
결국 宣祖와 붕당세력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것이란 사실을
똑똑한 이순신장군은 스스로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어명을 따른 '원균'에 의해 초토화되버린 조선해군에 남아있는 배 겨우 13척으로 승리를 일구면
이순신을 반대했던 인간들로부터 다가 올 위험은 불을 보듯 뻔한것이었답니다
그래서 완벽한 알리바이를 노량해전 선상에서 만들어 세상에는 죽은 것으로 만들고
자신은 몰래 조용히 아무도 모르는 어느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16년 후에 70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는 것입니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유언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삼도수군통제사 옆에는 많은 참모들이 항상 명령을 기다리며 함께 있어야하는데도
그 장면을 본 사람이 오로지 맏아들 '회'와 조카 '완',몸종 김이(金伊) 이외에는 없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이해하시겠습니까?
[강당골 갈림길]
좌측으로 내려가면 쉽게 강당골로 탈출 할수 있습니다
망경대는 직진입니다
위에서 제가 언급한 이야기들은
"이충무공 전서"에 부록으로 수록된,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李芬)이 기록한 행록(行錄)에 나오는데
이순신의 최후의 모습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 기록에는 이순신장군이 적의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을 당시 이순신의 사망을 알았던 인물은
아들 '회'와 조카 '완', 그리고 몸종 '김이(金伊)'밖에 없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장군이 사망한 뒤 임시로 함대의 지휘를 맡은 이 역시 아들 '회'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참모들과 부하 장수들로 가득한 기함 지휘소에서 함대 사령관이 저격을 당해 사망하였는데도
그것을 단지 3명밖에 알지 못했다는 점을 어떻게 해석 해야하겠습니까?
더더욱 삼도수군절도사의 지휘권이 고참 부하 장수가 아닌 신출내기인 아들과 조카에게 돌아갔다는 점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극히 의심스러운 점입니다.
"이충무공 전서"의 "행록(行錄)"을 미루어 보면
결국 이것은 이순신장군의 은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조작한 것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믿던 말든 생각과 판단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광덕산 능선]
뒤 돌아 보니 지나온 광덕산 능선이 위용을 자랑합니다
이순신장군은 아시다시피 1598년 11월 19일에 '공식적으로 사망'하여
그 시신은 20일 뒤인 12월 10일에 고향인 아산으로 옮겨집니다.
하지만 국가가 장례비용을 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례는 그로부터 80일이 경과한 다음 해 2월 11일에 치러지며 가묘에 이순신장군을 모십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5년 뒤인 1614년에 정식으로 묘를 만들어 장군을 안치합니다.
이것은 이순신장군이 노량 해전 이후 宣祖와 붕당세력들을 피해 은둔하여 살다가
1614년에 실제로 사망하여 장례를 치렀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라고 "은둔설"을 주장합니다.
[설화산]
멀리 설화산이 보입니다. 아직도 갈길이 많이 남았습니다
이순신장군이 쓴 詩 한수 속에서 장군의 마음을 읽을수 있습니다
아득하다 북쪽 소식 들을 길 없네, 외로운 신하가 때를 잘못 만나 한이구나.
소매 속엔 적을 꺾을 병법 있건만, 가슴 속엔 백성 구할 방책이 없네.
천지는 캄캄하여 서리 엉키고, 산과 바다엔 피비린내 진동하네.
말을 풀어 화양으로 돌려보낸 뒤, 복건 쓴 처사되어 살아가리라.
이순신장군은 노량해전 이전에 이런 詩를 지었습니다.
이미 장군은 자신의 처지와 앞으로의 계획을 예견하고 있는 듯 하지 않습니까?
저의 앞에는 두사람이 지나간 발자욱만이 길안내를 하고 있는데
눈과 바람은 때때로 앞에간 산객들의 발자욱을 지웠다 말았다 합니다
"은둔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도 들춰냅니다
"조선 수군은 원거리 포격전을 주로 구사하였기에, 야간보다는 주간에 해전에 임하였다.
하지만 노량 해전만큼은 야간에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야음을 틈타 이순신을 도피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망경산]
우측으로 망경산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망경산은 望京山으로 쓰며 이곳에서 "서울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라합니다. 그러나 지난해 5월에 올랐었을 때에 서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울을 그리워하는 산"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망경산-설화산 갈림길 삼거리]
설화산은 직진하면 됩니다만
망경산은 이곳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내려 가야합니다.
1시 25분에 이곳에 도착했으니 강당골에서 2시간 45분이 걸렸으며
광덕산 정상에서는 1시간이 걸렸습니다
[망경산-설화산 갈림길 이정표]
설화산은 세출리방향으로 갑니다
망경산을 갔다가 설화산을 가려면 망경산을 갔다가 반드시 이곳으로 되돌아 와야합니다
망경산에서 설화산으로 직접 가는 길은 없으니 참고하셔야합니다
이곳에서 망경산을 갔다 오려면 약 한시간 정도 걸림니다
저는 오늘 망경산을 갔다 오려 했으니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버스 시간을 맞추기 위해
오늘은 망경산을 생략하기로 합니다.
망경산과 태화산에 대해선 저의 지난해 5월17일 산행기를 참고하시기 바람니다
광덕산 林道가 나 있는 세출리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눈이 내리다가 다시 햇빛이 나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설화산이 예쁘게 나타납니다. 맨 끝의 봉우리가 설화산입니다
눈 내린 雪華山이 글자 그대로 눈 속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발자욱을 지우며 쌓였던 눈까지 날려 보냅니다
망경산 갈림길에서 세출리 방향으로 조금 내려 갑니다
[林道 쉼터]
철마봉에서 광덕산 정상 오르는 길에 있었던 林道가 광덕산 허리를 가로질러
여기까지 뻗어 있습니다. 오른 쪽으로 '수철리' 가는 길입니다
1시 40분경 이곳에 도착하여 간단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林道 쉼터]
설화산은 산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가야합니다
[雪華山 가는 길]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을 강력히 반대하는 정통 학자들이 대다수라는 것도 알려드림니다
앞서 제가 언급한 여러 근거들은 근본적으로 잘못됫다는 것이며
이순신장군은 戰死 한것이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宣祖實錄"과 "수정宣祖實錄"에 기초를 두고 하는 正說입니다
"不滅의 이순신장군" - 어떻던 이순신장군은 우리 민족의 영웅이십니다
23전 23승, 13대 133에서도 이긴 세계사를 다시 쓰게한 인물
[雪華山 가는 길]
雪華山이 점점 다가 오며, 오른쪽으로 배방산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雪華山의 모습은 점점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닺고있습니다
눈 내리는 날이 아니고는 맛볼수 없는 경치는 極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雪華山 가는 길]
광덕산과 설화산에는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 영향으로 남쪽지방에는 소나무가 잘 자라지 못한다고하는데
광덕산과 설화산에는 거의 소나무로 덮여 있어 名山임을 증명해 줍니다
소나무가 길 양옆에서 호위를 하는 하얀 눈길을 따라 마냥 걷고 또 걷습니다
이렇게 즐거운 산행은 처음입니다
[강당골 갈림길]
광덕산 설화산 종주 코스는 좌측으로 내려 가면 무조건 '강당골'임으로 긴급한 일이나
피로를 느낄 때엔 언제나 탈출이 쉬우니 부담없이 걸을수 있어 강력히 추천하고 싶습니다
[雪華山 가는 길]
현재 미국 웨스트포인트를 비롯해 전 세계 23개국의 사관 학교에서 "이 순신 전략"이
"사막의 여우 롬멜"과 함께 군사교육 필수전공 과정에 포함 되어 있다고 하는군요
이순신장군이 얼마나 위대한 영웅인지 단적으로 알수 있습니다
[무덤이 있는 산봉우리]
설화산 가는 길에는 제법 높은 산봉우리가 세개가 있는데
무덤이 있는 이 봉우리가 첫번째로 나타나며 설화산이 조망됩니다
앞에 눈에 덮여 있는 것이 무덤입니다
[무덤이 있는 봉우리에서 뒤 돌아 본 "望京山"]
"望京山"이 확실한 모습을 더러내고 있군요
좌측 어렴푸시 보이는 산이 泰華山입니다
지난해 5월 "광덕산-망경산-태화산" 종주를 했습니다
[자연보호 안내판이 있는 봉우리]
높은 봉우리 중에 두번째로 넘는 봉우리엔 "자연보호" 안내판이 매우 크게 설치되 있습니다
'자연보호'를 외치고 있는 안내판이 자연을 홰손 시키고 있습니다
[雪華山 가는 길]
'자연보호' 안내판이 있는 봉우리를 지나고 나면 본격적인 雪華山코스로 들어 섭니다
이제부터 광덕산-망경산-설화산코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는 진정한 雪華山입니다
[雪華山 가는 길]
설화산이 점점 다가 옵니다만, 아직도 높은 봉우리를 넘어야 다시 설화산 정상으로 갈수있습니다
여기서부터가 경사가 심한 마지막 두개 봉우리를 넘습니다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설화산이 보입니다
[눈꽃]
예쁜가요?
[雪華山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
설화산 바로 앞에 있는 높은 봉우리를 오릅니다
눈은 점점 더 많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雪華山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에서 뒤 돌아 본 망경산과 태화산]
이 봉우리에서 남쪽 방향이며 좌측이 泰華山이고 우측이 望京山인데,
가운데 계곡에 있는 고개 이름이 "넋티고개"입니다
광덕산에서 망경산을 지나 '넋티고개'를 통과해 태화산으로 오른 지난 5월이 생각납니다
[雪華山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에서 바라 본 동쪽 방향에 있는 "배방산"]
배방산과 태화산은 산줄기로 연결되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아산지맥"은 저 앞의 '배방산'에서 태화산을 오르고 '넋티고개'를 건너
'망경산'과 '광덕산'을 지나 금북정맥 마루금이 지나는 '각흘고개'와 봉수산,도고산을 잇는
산줄기를 말합니다. "아산지맥"은 산경표에 나오는 지맥이 아니고 아산에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지맥이라합니다. 하루에 종주하기에는 어려우나 여름철에는 하는 사람들도 있나봅니다
[雪華山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에서 남서쪽 광덕산]
지나온 광덕산 산줄기가 그림 같습니다
가운데 맨끝 봉우리가 광덕산 정상입니다. 철마봉 능선도 잘 보이는군요
지나온 저런 산줄기를 지나와 바라보면 뿌듯한 성취감이 들지요
[雪華山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에서 서쪽 방향 - 온양 송악면]
외암리 민속마을이 있는 송악면 외암리
이 봉우리에서 산객 세사람을 만났습니다
최대 명절인 설날을 앞두고,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 짧지 않은 거리인
강당골-광덕산-망경산-설화산-외암민속마을 코스를 찾은 이 분들...진짜 산꾼들이지요?
장군바위 이후에서 처음 만난 산객들입니다. 반가웠습니다
[기념 사진]
기념 사진을 한컷했습니다.
앞에 마스크를 한 사람은 이곳 아산에 사시는 분인데 아산의 산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분이더군요
아산의 산들과 '아산지맥', 그리고 설화산에 대한 많은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철1호선이 온양까지 연장 개통되고 난 이후의 온양온천의 변한 모습을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요즈음 온양온천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룬다고합니다. 노인네들이 차비가 꽁짜인 전철을 타고
온양으로 와 온천욕을 하며 하루를 보내고 가는 유명코스가 되어 손님이 폭발적으로 늘어 난다고하는군요
작년 한해에 온양의 인구가 10,000명이 늘었다고 온양온천역앞에 커다란 현수막으로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뒷편의 두분은 요즈음 정맥을 종주 중이라하는데 설연휴를 이용해 이곳을 찾았다고합니다
이 두분과는 온양온천역까지 함께 갔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즐겁고 안전한 산행 많이 하시길 기원합니다"
[가야 할 설화산]
눈이 많이 내립니다
눈 내리는 雪華山으로 이젠 네명이서 함께 출발합니다
진짜 산꾼들이지요?
[안부 사거리]
봉우리를 내려오면 안부 사거리가 나오는데 직진하면 설화산으로 오릅니다
우측으로는 '초원 아파트'와 '맹씨행단'으로 가는 길입니다
좌측으로는 오전에 버스를 타고 지나쳤던 외암리 민속마을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입니다
초원아파트나 외암민속마을로 가려면, 설화산 정상에 올랐다가 여기로 되돌아 와야합니다
'초원아파트'방향은 시내버스가 자주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더군요
맹씨행단(孟氏杏亶)은 본래 최영장군이 살던 집이었는데
이웃집에 살던 맹사성의 사람됨을 눈여겨 본 최영장군이 맹사성을 손녀사위로 삼고 집까지
물려주어 맹사성 일가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맹사성 정승이 심은 600여년 된 은행나무와 고택이 있는데,
이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민가라고 하는군요.
고택 뒤에는 맹 정승과 그의 부친인 희도, 조부 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세덕사가 있다고합니다.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어서 행단이라 부른 것으로 추정하나,
공부하던 자리의 의미인 행단이 된 것으로도 추정된다합니다
[설화산]
폭설이 내리는 설화산을 오릅니다
혼자 걷다가 여럿이 걸으니 또 다른 느낌을 주는군요
[설화산]
설화산 정상부에는 내리는 눈이 차곡차곡 쌓여 雪景을 더욱 아름답게 합니다
[雪華山 정상]
雪華山 정상에 오르니 세차게 부는 바람에 선명한 색깔을 띄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습니다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만 눈도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雪華山 정상]
雪華山 정상은 좁은 공간인데 친절하게도 산객들을 위해 평상을 설치해 놨습니다
雪華山은 다섯 봉우리가 솟아서 오봉산이라고 한다는군요
[雪華山 정상]
雪華山의 유래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雪華山은 산꼭대기의 모양이 붓끝을 닮았다고 文筆峰이라고도 한다고하며
山勢가 매우 영특하고 장관을 이뤄 이 주변 마을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네요
대표적 인물이 '이순신장군, 맹사성, 이간 선생'이랍니다
[雪華山 정상]
길은 떠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던데.......
시간도 보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을 맞기 위함이라하던데.....
눈으로 뒤덮히는 雪華山에 서니
또 흘러 간다
소중한 나의 날들이......
[雪華山 정상에서 바라본 지나온 봉우리]
다시 저 봉우리 사이의 안부로 내려 가야합니다
눈이 많이 내리기 때문에. 설화산 정상에서는 먼곳을 조망할수 없었습니다
[雪華山을 하산합니다]
눈..눈..雪..雪..雪
[雪華山을 하산합니다]
눈..눈..雪..雪..雪
[雪華山 내려 가는 길]
[雪華山]
내려와 뒤 돌아 본 雪華山.....
아름답습니다
[외암민속마을]
외암마을은 충청도의 대표적 양반 마을로서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36호로 (1999년 12월 28일) 국가에서 지정 보호하고 있는 마을이랍니다
[외암민속마을]
약5백년 전에 이 마을에 정착한 예안 이씨 일가가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어 살고 있다고합니다
[외암민속마을]
최근에는 이곳에서 사극이나 영화 촬영이 종종 있으며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답니다
영화 사상 최단기간에 전국관객 500만명을 돌파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필름 제작·쇼박스 배급)의 촬영지 중 한곳이 외암리 마을이다.
손예진, 조승우, 조인성 주연의 흥행 영화 '클래식' 의 배경 중 한곳 역시 외암리 마을이다.
그 외의 영화로는 [소릉],[동첨]등이 이곳에서 촬영하였다.
외암리 마을의 건재 이상익의 고택이 영화 [취화선] 속 이응헌의 집 배경이 됐다. 장승업이 머슴살이를 하면서 그림에 대한 꿈을 펼치기 시작한 곳이며 소운이라는 학처럼 고운 여인을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SBS 드라마 [옥이이모]
SBS 드라마 [임꺽정]
KBS 드라마 [찬란한 여명]
KBS 드라마 [당신]
SBS 드라마 [덕이]
KBS 드라마 [꼭지]
KBS 드라마 [소문난 여자]
KBS 드라마 [새엄마]
SBS대하드라마 [야인시대]
삼성생명 CF
[외암민속마을]
외암 이간 선생이 쓴 [외암기]에 "예안이씨가 온양에 들어와 살게 된지 이미 5세가 되었다" 고 하였는데, 조선 명종 때 장사랑을 지낸 이연은 6대조이고, 이사종은 5대조가 된다. 그렇다면 이사종 때부터 이곳에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외암기]에서는 선조 이사종이 그의 부친인 이연의 묘를 송악의외록에 정하면서, 별업을 외암에 지어 열승정(閱勝停)의 위치에 대해 읍지에서도 기록되어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예안이씨는 전의 이씨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로 10세손인 익(翊)이 예안이씨의 시조가 된다. 7세손인 이연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둘째 아들 이사종 계열만 번창하고 있는데, 이사종부터 예안이씨 온양파가 시작되었다.
[외암민속마을]
외암 이간 선생은 조선후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예안, 자는 공거(公擧),호는 외암 외에 추월헌(秋月軒)이라고 하였다.
숙종 36년(1710)순무사 이만성(李晩成)에 의하여 장릉참봉(葬綾參奉)으로 천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6년뒤인 숙종 42년(1716)에 다시 천거되어 세자시강원자의가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젊은데도 벼슬이 뛰어오름을 논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숙종실록에서도 '호서사인(濠西士人)이간'이라는 표현이 보이듯
이 온양 향리에서 주로 지낸 이간은 31세 되던 해 권선재를 건립하여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영조 3년 51세로 일생을 마감했는데 정조는 이조참판과 성균관 좨주를 증직하였으며 순조는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시호는 문정공이고 저서로는 [외암유고]가 있다. 마을에는 외암 이간의 학문적 유업을 기리는 사당이 있고 매년 외암 이간 선생이 사망한 음력 3월14일 불천위제사를 지낸다. 외암 선생의 묘소는 외암리 오른쪽 산기슭에 있으며 입구에 신도비가 남아있다
[외암민속마을]
[외암민속마을 입구]
외암민속마을은 입장료를 어른 2,000원을 받고 있었으나
설화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 갈수 있더군요
이곳에서 120번 버스를 5시 5분에 탓습니다
총산행 시간은 6시간 20분이 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