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南山 벚꽃 축제
잔인한 달이라고하는 4월
어두운 겨울에서 벗어나 화려하게
너무나 화창하게 다가오는 4월
그래서 잔인하다고까지 했겠는가
무척이나 오랜만에 서울 南山에 나들이를 했습니다.
그것도 옆지기와 함께.....
벚꽃, 개나리꽃이 허드러지게 핀 南山을
한바귀 빙 돌고 왔습니다
[장충체육관 앞 사거리]
4월11일 토요일 오후 2시
지하철3호선 동국대역으로 나와
장충체육관과 장충단공원이 있는 장충동 4거리에 섯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南山을 오르며, 처음으로 "제2회 남산벚꽃축제" 구경을 하러 나온것입니다
그것도 와이프와 함께.....
[장충체육관 앞 사거리에서 바라 본 '남산타워']
"여의도 벚꽃놀이"는 자주 갔었습니다만
南山에 벚꽃구경하러는 처음입니다.
어느 학교 선생님이 11일(금)에 구경갔다온 안내를 보고
기회를 잡았습니다
[장충체육관 앞 사거리에 있는 돼지 조각상]
특히 등잔불 밑이 어둡다고...
서울에 살면서 남산을 올라 본 사람들은 오랜만에 한번 정도씩이거나
아예 올라 보지 못한 분들도 무척 많을거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홍어와 무인도" 애독자분들을 위해서라도
'파란문'이 한번 다녀와 못가본 분들에게 간접 경험이라도 시켜 드리고쟈
직접 나섰습니다. 저 착하죠? ㅎㅎ
[장춘단 공원 입구]
장춘동 냉면을 한그릇 사먹고 오후 2시 30분에 남산을 오릅니다
저는 "장충단공원"에는 처음입니다.
차를 타고 지나 치기만 했지 직접 들어가기는 처음입니다.
우리가 가볼 곳이 얼마나 많은지,,,
[수표교]
장충단공원 입구에는 "水標橋"가 멋진 위용을 자랑하며 놓여있습니다
이 다리는 돌다리로서 원래는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발전하는 서울이라는 미명아래 회색빛 콘크리트로 서울을 뒤덮는 1959년에
늘어나는 자동차길을 만들기 위해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답니다.
청계천 - 원래 淸溪川으로 맑은 물이 흐른다고 붙여진 이름이지만
당시 '청계천'은 하수구를 의미 할 정도로 서울의 모든 생활하수가 흘러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청계천을 콘크리트로 복개하고 차량통행에 도움을 주고 악취를 감추었습니다
"水標橋"는 조선 세종 2년(1420)에 세운 다리로,
당시에는 이곳에 소시장(牛市場)이 있었다 하여 ‘마전교’라 불리웠답니다.
세종 23년(1441) 수표(水標)(보물 제838호)를 만들어 이 다리 옆에 세우고
청계천의 물높이를 재어 홍수에 대비하도록 하였고,
영조 36년(1760)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경(庚)·진(辰)·지(地)·평(平)’이라는 글씨를 새겨두어
4단계의 물높이를 측정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水標橋"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청계천을 건너는 다리로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홍수 조절을 위한 알림판 역활도 하였답니다
다리에 설치되 있던 "水標"는 다리를 이곳으로 옮길 때 함께 옮겨왔다가
1973년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奬忠壇址]
장충단공원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아시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外勢의 침략으로 패망해 가는 조선왕조의 피맺힌 恨을 토로하며
日本 침략자들에 대항해 피흘리며 죽어간 애국충절의 魂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제단"입니다
특히 을미사변, 즉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에 목숨 바치며 싸우다 죽어 간
시위대장 홍계훈, 염도희, 이경호 열사들을 제사 지내는 곳이었답니다
애국충절의 魂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제단"인 奬忠壇은 6.25전쟁의 화마에 전소되고
이곳에 奬忠壇이 있었다고 알리는 奬忠壇址碑만이 홀로 서 있습니다
[奬忠壇址 표지석]
[奬忠壇碑]
한자로 된 `獎忠壇'의 세 글자는 고종황제의 어필이라고 합니다.
비(碑) 뒷면에는 충정공 민영환이 글을 짓고 직접 쓴 143자의 비문이 음각돼 있습니다.
그 내용 중 일부를 보면
“군인으로서 어려움에 당면해서 죽은 사람이 많으니 슬프다.
그 서릿발, 눈보라에도 늠름하고 당당했던 뛰어난 절개는 밝기가 해.별과 같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奬忠壇碑 설명]
[奬忠壇 公園]
奬忠壇 公園에 오니 전설적 가수 "배호"가 부른 "안개낀 장충단 공원"이 생각 납니다.
"대전 부르스"를 작사하신 '최치수선생'이 작사하시고, 배상태씨가 작곡한 "안개낀 장충단 공원"
이 노래는 단순한 연민의 노래가 아니고 日本 침략자들에 대항해 피흘리며 죽어간 애국충절의 魂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단순한 유행가로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그 이유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奬忠壇 公園 롤러스케이트장과 동국대학교 건물]
배호의 본명은 '배만금'이며,
1942.4.24.중국 산동성 제남시에서 부친 배국민 독립투사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독립투사의 아들입니다.
부친의 별세와 6.25 전쟁으로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다 겨우 중학교2년을 다니고 맙니다
다행히 당시 밴드마스타였던 외삼촌 '김광빈'으로부터 드럼을 배워 '김광빈악단'의 드러머로
음악계에 입문하여 전설적 가수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그의 노래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지요? 모두 잘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1971년 11월 11일 그를 괴롭히던 신장병으로 '스타'가 유명을 달리하고 사라졌습니다
아직 살아 있다면 67세밖에 않되는 나이인데 39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가 지난날의 추억을 그리워하며 슬픈사연이 깃든 애상의 표현으로 노래한 것은
어쩌면 배호 자신의 운명 같은 가련함을 추억속에 그려보며 구슬프고 애달프고 절절하게
숨넘어 가는 목소리로 불러진 노래들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안개낀 장충단 공원"은 독립투사인 아버지를 많이 생각하며 불렀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별한 연인을 생각하며 부르는 노래로 알고 있으나 잘 음미해 보시기 바람니다
안개낀 장충단공원
최치수 작사/ 배상태 작곡/배호 노래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 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번 어루만지며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쥐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 사람이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 있는데
외로움을 달래 가면서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이준 열사 동상]
[이준 열사 프로필]
[동국대 정문과 南山 올라 가는 길]
'장충단공원'에서 남산으로 올라 가려면
동국대학교 정문 바로 옆으로 난 계단으로 가면 됩니다
사진의 우측이 동국대 정문이고, 좌측이 남산 올라 가는 계단길입니다
[南山 올라 가는 길]
首都 서울의 중심공원 다웁게 모든 시설이 깨끗하게 잘 정비되 있습니다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비]
최현배선생은 우리나라 한글을 반석 위에 올려 놓으신 분이죠
근현대에 와서는 한글=세종대왕이 아니라 한글=최현배라고 할 정도이지요
[외솔 최현배 선생의 詩]
[南山 올라 가는 길]
허드러지게 핀 벚꽃
아름답습니까? 물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奬忠壇 公園의 벚꽃은 생각해 봐야할 점이 있습니다.
일본 쪽바리들이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식민지를 만들었을 때
信念있는 테러리스트 안중근의사는 일본 총독 "이또 히로부미 伊藤博文"를 살해합니다.
열 받은 쪽바리들은 "애국충절의 충신들을 招魂하는 제단인 奬忠壇"에서 제사를 금지하고
이곳 奬忠壇을 놀이公園으로 만들어 버렸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박문사 博文詞"라고 하는 신사를 만들고
"伊藤博文 이또 히로부미"의 넋을 달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벚꽃나무를 심었답니다
[南山 올라 가는 길에서 뒤 돌아 본 '신라호텔']
"伊藤博文"의 넋을 기리기 위한 "박문사 博文詞"는 해방과 함께 부셔졌지만
아직도 벚꽃나무는 남아 봄이면 허드러지게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제가 이 벚꽃길을 걸으면서도 기분이 별로 좋지 못한 사연을 이해 하시겠습니까?
벗꽃 그 자체야 나무랄수 없이 아름답지만
역사를 쬐끔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이곳의 벚꽃이 오히려 반감을 가질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南山 올라 가는 길 옆 동국대학교]
[南山 순환로]
동국대 정문에서 계단을 따라 오르면 "남산순환도로"를 만납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올라 가야합니다
저는 내려 갔다가 다시 올라왔습니다. 여기서도 저의 주특기인 알바를 했습니다. ㅎㅎ
[南山 순환로]
아래쪽으로 내려 가는 길.
계속 가면 케이블카 타는 곳이 나옵니다.
걸어서 남산 정상을 가려면 왼쪽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기억해 두시기 바람니다
[南山 순환로에서 바라 본 '남산타워]
벚꽃은 奬忠壇 公園이 있는 南山의 동쪽에만 집중적으로 피어있습니다.
그 이유는 알려 드린바와 같습니다.
남산타워가 보이는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石虎亭]
"石虎亭"이라고 하는 활쏘는 활터가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國弓을 즐기고 있더군요.
[石虎亭]
화살이 꽂히는 과녁이 상당히 멀리 있습니다.
"국립극장"의 위용도 함께 볼수있군요
[石虎亭 안내]
[南山 순환로]
석호정을 지나 계속 올라 갑니다
나름대로 벚꽃 구경도 하며....
[南山벚꽃축제]
南山벚꽃축제장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음악회를 하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구경은 못했습니다
[南山 순환로]
[南山 정상으로 가는 버스]
순환로를 따라 가면 국립극장쪽에서 올라 오는 南山車路를 만납니다.
남산 오르는데도 버스를 타고 오르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버스는 만원이었습니다
[南山타워로 올라 가는 길]
저는 걸어서 올라 갑니다
자칭 등산 좀 한다는 인간이 남산을 버스로 오르면 되겠습니까? ㅎㅎ
걸어서도 20여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걸어 가야 이것 저것 구경을 더 많이 할수 있습니다
[漢陽城廓]
조금 걸어 올라 가면 漢陽城廓을 만납니다
[漢陽城廓 탐방로]
우측으로 '漢陽城廓 탐방로'가 잘 설치되 있습니다
車路를 버리고 '漢陽城廓 탐방로'로 오릅니다
漢陽城廓 탐방로는 계단의 길이가 250m로 상당한 된비알이니 천천히 걸어 오르시길...
[漢陽城廓 탐방로]
서울이라는 이름이 탄생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제가 "여성봉-오봉-도봉산-우의암 산행기"에서 한번 쓴적이 있습니다
南山의 漢陽城을 보니 다시 한번 더 얘기를 하지 않을수가 없군요
고등학교 국어(고문)시간에 "서울"에 대한 어원을 배웠을 것입니다
서라벌>셔블>서울로 음운변화가 있었다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아무런 반론없이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아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이 주로 서라벌>셔블>서울은 터무니 없는 말도 않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漢陽城廓 탐방로]
서라벌>셔블>서울의 서벌은 한자로 徐伐로 사용했다고도 합니다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이 현재 우리나라의 '서울'이라는 것이 위치상으로도 문제가 있고
음운변화로도 문제가 있다고 하는 목소리가 큽니다
정말로 서울은 서라벌>셔블>서울의 음운변화를 거치며 탄생된 것일까?
저와 함께 추적 해 볼까요?
[漢陽城廓 탐방로]
"서울"에 대한 명칭에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첫째가 우리가 이미 학교 때 배운 서라벌>셔블>서울이라는 것이고....
[南山 山嶽會]
이곳은 남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체력단련장과 친목 모임터인듯합니다
1884년에 일어 난 갑신정변과 그 이후 外勢들의 침탈 음모들이 난무하는 세상을 거치고
결국 1910년 나라를 빼앗긴 한일합방 이후에는 이런 비참한 說도 있었습니다.
"서러워 울고있는 도시니까 서울로 부른다..."
이 說은 백성들의 입에서 나온 한탄의 말이겠지만 이 또한 하나의 說입니다
[南山 山嶽會 亭子뒤 '남산타워' 가는 산길]
"서울"이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정식 명칭으로 사용한것은
해방후 1946년 8월 16일 미국군정하에서 미국식 직제 개편으로 경성부→서울특별자유시로
경기도에서 분리되면서 '서울'이라는 이름이 새로이 탄생 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조선 개국과 동시에 한성-한양이라 불리워져 왔고
일제 강점기 시대엔 "경성"으로 명명되어 왔습니다.
[南山 山嶽會 亭子뒤 '남산타워' 가는 산길]
"서울"에 대해 제가 여러 참고 문헌들을 읽어보고 그 중에서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학설을 지금 부터 간단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특히 백승현씨가 쓴 '어디서 마음을 구하랴'라는 책을 주로 참고하여 알려 드리도록하겠습니다
[南山에서 두번째 높은 봉우리 정상]
서울은 왜 한자가 없을까?
서울은 한문상의 표기가 없고 대신에 한양(漢陽) 또는 漢城으로 되어 있습니다
서울은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천도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조선 건국과 함께 탄생된 도시가 오늘의 '서울'이 되었는데
탄생 될때의 이름이 漢陽이고 한양의 외곽에 城을 쌓고 난 다음에 漢城으로도 불리워졌습니다
그래서 서울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찾을려면 漢陽의 탄생 과정을 추적해 보아야합니다
[南山타워로 올라 가는 길]
"漢陽城廓 탐방로"와 "산길을 따라 봉우리를 넘으면 다시 남산순환차로와 만납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한 다음 궁궐을 짓고 도성을 쌓으려 할 때
그 성곽을 쌓는 기준선을 어떻게 잡아야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더하고 있던 어느 날
태조 이성계가 삼봉 정도전, 무학대사와 함께 협의를 하고 있는데 큰 눈이 내렸답니다
눈이 한양을 둘러 싸고 있는 산능선을 따라,
능선 밖에는 눈이 많이 쌓여있고, 능선 안쪽에는 눈이 조금 쌓여졌답니다
그 상황을 눈여겨 살펴본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 무학대사는 성곽을 쌓을 윤곽을 그리고
눈이 많이 쌓인 곳과 적게 쌓인 곳의 경계선을 따라 도성을 쌓게 했다고 합니다
한양과 한양 밖에 내린 눈이 경계선을 그어 준 것입니다
[南山타워로 올라 가는 길]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린 곳과의 경계선을 따라 쌓은 都城은
산의 능선을 따라 북악산-인왕산-남산-동대문에 있는 낙산을 연결하는 것으로
둘레가 40리에 이르렀습니다
즉 한양성곽은 "눈 雪" 경계선을 따라 건설된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이 "한양의 울타리"를 만들었다고하여 눈雪자를 써서 '설울'이라고 불렀습니다.
서울은 도성으로 한 때 설성雪城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다시 '설울'로 불리워 지면서 '설울'의 "ㄹ" 복음이 묵음화 되면서 서울로 발음 되어진 것이랍니다
요약하자면 서울은 雪울타리 →雪울 → 설울 →서울로 된 것이라 합니다
저는 이 이론이 가장 신빙성 있다고 생각 되며
또한 이것은 각종 기록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漢陽城廓]
다시 漢陽城廓을 들어 서면 남산의 정상부에 오게 되는 것입니다.
[南山타워]
[南山타워]
[현 위치 안내도]
남산 주차장에 있는 현 위치 안내도
[南山타워 주차장]
버스를 타고 내려 가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끝도 없습니다.
걸어가면 건강에도 좋고 시간도 오히려 절약되고 경제적인데...
[버스 운행 정보]
걸어서 남산 오르기도 힘드시는 분들을 위해 버스 운행 정보를 알려 드림니다
[주차장 매점과 중국식당]
마실 것을 아무것도 준비해 오지 않아서 마실것을 사러 매점에 들어 갔는데
매점은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모두 저와 같은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어 캔맥주와 음료수 사는데 10분이 걸렸습니다
앞으로 남산을 오르실 분들은 베낭에 미리 음식물을 준비해 오시기 바람니다.
저도 앞으로 온다면 반드시 베낭을 메고 음식물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옆의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파는데 4,500원이더군요
[캔맥주 한잔]
와이프는 맥주, 특히 카스를 무척 좋아합니다.
술꾼인 저는 음료수 마시고 와이프는 맥주 한캔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습니다
앞모습은 보여 드리지 않습니다. ㅎㅎ
[일본 관광객]
관광버스를 타고 단체로 오는 행렬은 거의 모두 일본사람들이었습니다
여하튼 반가운 일입니다
[南山 정상부]
人山人海를 이룹니다
[南山 '팔각정'앞 농악 공연]
흥겨운 농악을 공연하고 있었습니다.
운이 좋았지요. 2시에서 3시 사이에 하는듯...
[南山 '팔각정']
南山의 本名은 목멱산(木覓山)입니다
覓은 '찾을 "멱"이더군요
木覓山은 높이가 262m로 목멱산·인경산·마뫼 등으로도 불렸으며, 기반암은 화강암이랍니다.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 북쪽의 북악산과 함께 서울의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으며
漢陽城廓의 중요지입니다
[南山 '팔각정'안에서 바라본 '농악대 공연장']
[南山타워 앞]
[서울 N 타워]
[서울 N 타워]
[서울타워 매표소]
[서울타워 요금표]
서울타워에 들어 가는데 입장료를 내야하더군요.
입장료가 무려 어른 한사람당 7,000원이더군요
전망대까지 엘리베이터 타는 요금이 7,000원이면 좀 쎄지요?
그리고 점심식사는 26,000원/1인, 저녁은 38,000원/1인 합니다
휴~ 돈없으면 들어 가 보기도 어려운데, 다행히 워낙 복잡해서 매표 매진이 되어
돈을 쓸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다행이죠? ㅎㅎ
[南山烽燧臺]
[南山烽燧臺 설명]
[南山烽燧臺에서 바라 본 서울시내]
[南山烽燧臺에서 바라 본 서울시내]
바로 앞 건물이 '케이블카' 타는 곳입니다.
좌측 산이 "인왕산"이고, 가운데가 "북악산", 그 뒤에 어렴푸시 보이는 "북한산"
[케이블카를 타려는 사람들의 행렬]
참을성이 많으신 분들만 '케이블카'를 타세요. 무지 오래 기다려야합니다
걷지 못하는 분들과 함께....
[팔각정과 서울타워]
節彼南山霄漢連
扶輿磅礴見千年
如雲如蓋葱蘢氣
散作陽和布四埏
높다란 저 남산은 은하수와 연했는데
아름다운 기운 충만하여 천 년을 보겠네
구름 같고 일산 같은 숲의 무성한 기운이
화창한 봄기운으로 화하여 사방에 퍼지누나
[케이블 카]
[하산하는 길에 있는 '전망대']
[전망대에서 바라 본 서울]
서울의 대표 산인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조망됩니다
[전망대에서 바라 본 서울]
[남산 순환차로]
남산에서 계단을 내려 오면 남산순환차로를 만납니다
[상행 케이블카 타는 곳]
이곳에도 남산으로 올라 가려는 사람들이 케이블카를 타려고 줄을 길게 서 있습니다
[남산 케이블 카]
멋진 사진으로 케이블카를 탓다고 대리 만족하시기 바람니다 ㅎㅎ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올려다 본 남산]
충무로 "지하철 명동역"에서 남산을 올려다 봤습니다
[明洞]
우엑!!~~
명동을 지나 가려고했더니 발 붙일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1921년 대공황 이후 최고의 불경기라고하는데
明洞은 예외인가 봅니다
[明洞]
요즈음 明洞에는 일본 관광객들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하네요
현수막도 일본어 투성이었습니다.
불황에 조금은 다행이라 여겨집니다
[두산빌딩 지하 '맥스 생맥주']
와이프가 가자고한 을지로입구 두산빌딩 지하에 있는 "맥스 생맥주집"에서
훈제 닭고기와 생맥주를 먹으며 모처럼 데이트를 했답니다
화사한 봄날에 나들이 한번 못하신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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