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北紺岳枝脈2區間』
간파고개-감악산-설마치고개(어룡고개)-
무건이고개-수레미고개-수레너미고개
2009년 3월 8일
春三月 두번째 일요일
약간의 안개가 끼었으나 화창한 봄날씨에 바람도 없는 산행하기 좋은 날
漢北紺岳枝脈2區間을 정복하기 위해 발길을 옮깁니다
오늘도 "서울백두클럽"과 함께 합니다
[간파고개]
경기도 양주시와 연천군의 경계선이 되는 "간파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원래 1구간 날머리였던 "수레너미고개"에서 감악산을 넘어 이곳으로 오려고 했으나
2區間 거리가 다소 길어 逆으로 진행합니다
[간파고개]
이 고개 이름은 지도에 따라 다르게 표기하고있습니다. 주로 간패고개라고들 하더군요
정확한 이 고개 이름은 간파고개입니다.
방패 干, 고개 坡로서 양주시에서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로 넘어 가는 고개입니다
[간파고개]
漢北紺岳枝脈3區間 들머리가 되기도하는 '간파고개' 동쪽으로 "마차산" 가는 길입니다
이곳에서 산행 준비를 하고 출발합니다.
이 길은 다음 한북감악지맥3구간 들머리가 됨으로 3월22일에 다시 이곳에 와
앞에 보이는 길로 "마차산"을 오르고 "도감포"로 갈것입니다
[간파고개]
지맥 마루금은 앞의 건물을 가로 질러 가야합니다만, 피해서 좌측으로 내려가
우회하여 감악산을 오릅니다
9시45분 산행을 시작합니다
[간파고개]
약간 양주 방향으로 내려가 감악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비탈길을 치고 오릅니다
비탈길을 치고 올라 "간파고개"를 뒤돌아 봅니다
저 멀리 漢北紺岳枝脈3區間의 핵심 봉우리인 마차산이 보이는군요
3월22일에 저곳으로 올라,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도감포"로 가서,
漢北紺岳枝脈을 졸업할 예정입니다
"간파고개"에서 감악산 정상까지는 거의 오르막입니다
된비알을 치고 올라 가야합니다
[감악산]
약 30분 정도 된비알을 치고 오르면 멀리 감악산 정상과 '임꺽정봉'이 보이기 시작하며
오늘 산행은 저 감악산 정상을 보며 오르고, 감악산을 뒤돌아 보며 목적지까지 내려 갑니다
그러므로 오늘 산행기에는 '감악산 임꺽정봉'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너무 자주 등장하여 다소 식상할수도 있겠으나
그것마저 없었다면 우리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알수 없었을 것입니다
'길은 길에 연이어 끝이 없으므로....'
감악산은 모두 아시다시피 京畿5岳인 개성의 송악산, 서울의 관악산,
포천의 운악산, 경기도에선 가장 높은 가평의 화악산과 함께 명성을 날리고 있는 산입니다
[임꺽정봉]
감악산의 대표 봉우리는 감악산 정상이라기 보다 "임꺽정봉"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감악산을 京畿5岳에 들어 갈수 있게 해준 봉우리라 할수 있으니
감악산에 가면 반드시 "임꺽정봉"을 올라 보아야합니다
오르는 길엔 소나무가 제법 많으며,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헬기장]
'간파고개'에서 쉬지 않고 1시간을 오르니 '헬기장'이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산행을 할때엔 30분 정도 오르면 한번 쉬는데
"서울백두클럽"의 횐님들은 1시간에 한번정도 쉽니다
산행 초보들에겐 다소 벅찰수 있는 진행입니다만....
여하튼 걷는데는 모두 도사들입니다. ㅎㅎ
[헬기장]
10시55분에 헬기장에 도착했으니 간파고개에서 1시간10분 걸렸습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휴식
감악산 정상이 바로 보입니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20분 정도 걸립니다
감악산 정상에는 KBS DMB 방송 전파송출탑이 어마어마한 크기로 솟아 있어
양주,파주,연천 어느 곳에서나 감악산을 알아 볼수 있습니다.
[헬기장]
헬기장에서 남서쪽으로 보이는 웅장한 암봉이 '임꺽정봉'입니다
옛날 임꺽정이 관군에 쫏겨 도망칠때 저곳 봉우리 낭떨어지 중간에 나있는
조그만 굴에 들어가 숨었다고해서 '임꺽정굴'이라고 한답니다
'임꺽정굴'은 일반인들은 가 볼수 없는 낭떨어지에 있는데 남선굴(南仙屈)이라고도 한다는군요
고려말의 문신인 '남을진'은 정치가 문란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사천현으로 낙향하였답니다
이성계가 쿠데타로 조선을 개국한 후 벼슬에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고사하였다고 합니다
이성계는 두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충절을 높이 사 사찬백(沙川伯)에 봉하였는데
남을진이 통곡하기를 "내가 산속 깊이 들어가지 못하여 이런일이 벌어졌노라"고 하면서
쿠데타로 왕이 된 이성계로부터 벼슬을 받는 것이 무지 부끄러워, 머리를 풀고 감악산 석굴속에 들어가
눈으로 해를 보지않고 발로 석굴밖의 땅을 밟지 않으면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합니다
그래서 후세사람들은 이곳을 '남을진'이 神仙이 되었다하여 '南仙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1842년에 쓰여진 "양주목읍지"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이성계의 쿠데타는 수많은 고려충신들을 '두문불출'하게 만들었습니다
[헬기장]
헬기장에서 북쪽을 바라 보면 북능선이 보이고, 중간에 있는 암봉이
'자라바위'라고하는데 여기서는 그 모양새를 알아 볼수 없군요
헬기장에서 지나온 '간파고개'와 3구간에서 갈 '마차산'이 아득하게 보입니다
마차산 뒤로 '소요산'이 운해 위에 떠있습니다
[감악산 정상 오르는 길]
헬기장에서 감악산 정상까지가 가장 가파른 오르막입니다
경치 구경 할 틈도없이 숨막히는 된비알을 오릅니다
[감악산 정상 오르는 길]
京畿5岳 다웁게 바위들이 웅장함을 자랑합니다
[감악산 정상 오르는 길]
[감악산 정상 오르는 길]
정상부 북쪽사면에는 아직도 눈이 녹지 않고 그 수명을 연장하려는듯
서로 꼭 껴안고 봄기운을 무서워하고 있는듯합니다
[전망대]
[전망대]
전망대에서 천길 낭떨어지 아래로 펼쳐지는 양주시 은현면과 남면,
그리고 좌측 '봉암저수지'와 우측 제법 큰 '원당저수지'가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감악산 정상]
감악산 정상이 다가 옵니다
[성모 마리아 상]
북녁을 향해 서있는 성모 마리아상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감악산에서 성모 마리아상이 북녁을 향해 평화를 호소하고...
성모 마리아상을 보니 생각나는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지난 2월 16일 선종(善終)하신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께서
2003년 11월 18일 서울대 초청강연 중 하신 말씀을 옮겨 봅니다.
삶이 뭔가, 삶이 뭔가 생각하다가 너무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기차를 탔다 이겁니다.
기차를 타고 한참 가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웃음)
추기경이 하신 말씀이니 더욱 재미있게 느껴져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은 그렇게 화려한것도 아니고, 그러게 초라한 것도 아닌
그냥 사는 모습 그 자체이지요.
[KBS DMB 방송 전파송출소]
감악산 정상에는 "KBS DMB 방송 전파송출소"를 큰 규모로 지었습니다
지난해에 왔을 때엔 공사중이었는데 이젠 완공이 되었고
감악산 정상까지 자동차도로를 포장까지 했더군요
요즘은 산 정상을 군부대 대신에 방송이나 통신사들의 건물들이 차지하고있습니다
[감악산 정상]
감악산 정상으로 오르는 마지막 오르막
[감악산 정상]
감악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제법 넓은 정상부입니다만 많은 산객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올라온 '간파고개'에서의 감악지맥 마루금을 따라 오르는 코스에선 일반 산객들을
단 한명도 볼수 없었습니다만, 정상에 오르니 무척 많은 산객들이 우굴거리는군요
이유는 감악산 등산코스는 주로 '설마리' 감악 계곡의 "법륜사"에서 원점회귀 산행을 하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지맥 종주자들이 다니는 길에는 일반 등산객이 힘들고 길찾기도 어려워
쉽게 접근할수 있고 주차하기도 편리한 일반 등산로를 좋아하고, 지맥길은 싫어하기 때문이지요.
프로와 아마의 차이라 할수 있을려는지....ㅎㅎ
지맥을 다녀 보면 일반 등산로를 다니는게 너무 재미없다는 것을 확연히 알수 있을텐데....
[감악산 정상]
감악산 정상은 現代와 古代가 공존하고 있는듯합니다
모든 글자가 세월의 풍상에 이기지 못하고 사라진 이름 모를 비석과
미래의 방송이라하는 초현대식 DMB방송 송출 안테나가 천하를 내려다 보는 감악산 정상
그리고 군부대의 초소
많은 것을 생각하게합니다
[감악산 정상석]
감악산은 감색 紺. 큰산嶽
[감악산 정상]
뒤에 보이는 비석은 세월의 풍상에 비석의 표면은 모두 마모되어 글자를 젼혀 알수 없어서
공식적인 안내판에 추측으로만 이 비석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설인귀 제단"이라는 설과 "진흥왕 순수비"라는 설 두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설인귀는 당나라 태종때 요즘 말로 하자면 쫄병으로 군대에 입대해서
사령관이 되는 입지전적 인물이었죠. 주로 우리 고구려를 침략하는 앞잡이 역할을 하였으며,
결국 고구려를 멸망 시키는 핵심 장군이었답니다
진흥왕 순수비라는 설은 모양이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와 매우 흡사하다는데서 유래하였답니다
그러나 모두 추정만 할 뿐 정확한 사실은 모르고 있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모로 조사한 내용을 '설마치고개'로 하산할때 알려 드리겠습니다
[감악산 정상]
감악산 정상에서 북서쪽 '까치봉'으로 가는 길로 나가면
군부대 초소와 통신사들의 안테나가 있는데 이곳으로 나가면
1,600년전에서 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로 차지하려고했던
"임진강"의 "고랑포"와 적성평야가 펼쳐집니다
[감악산 정상에서 바라 보는 적성과 임진강]
오늘은 안개로 조망이 트이지 않는군요.
이곳에서 京畿五岳이 모두 보인다는 곳인데....
특히 개성의 '송악산'이 맑은 날에는 잘 보인다는데 앞에 임진강도 희미하게 보이는군요
앞에 펼쳐진 마을이 적성이며 城이 있었다고 積城입니다. 그 앞으로 임진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임진강 주변에는 고구려시대와 고려시대의 수많은 城이 있으나 발굴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임진강을 건너는 '고랑포'가 있습니다. 고랑포는 영남지방에서부터 개성으로 가는
핵심 교통로였다고합니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화신백화점 분점"이 이곳에 있었다고하니
그 옛 명성을 짐작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6.25는 그러한 영화를 송두리째 앗아 가 버렸습니다
'도라산'은 잘 보이는데 안개 때문에 오늘은 보이지 않습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향 '서라벌'로 돌아 가지 못하고 뭍힌 곳이기도합니다
新羅의 都邑인 경주로 돌아 가지 못하고 낙랑공주와 함께 고향을 바라 보며 눈물을 흘리며
그리워했다는 것이 '都羅山'의 이름이 지어지게 된 동기라 하니
이곳이 어떤 곳인지 가히 짐작할수 있습니다
[감악산 정상에서 바라 보는 임꺽정봉]
감악산 정상과 임꺽정봉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으며 '감악지맥 마루금'은
앞 봉우리 우측으로 나있습니다.
임꺽정봉을 올랐다가 다시 마루금으로 되 돌아 와야합니다
[어름골재]
감악산 정상과 임꺽정봉 사이에 법륜사에서 올라 오는 계곡 등산로를 만나는데
이곳이 '어름골재'입니다.
법륜사에서 이곳까지 얼음이 오래토록 남아 있어 그렇게 불리워졌다지만
이 계곡엔 숯을 굽는 가마가 많이 있었다고합니다
[임꺽정봉 정상으로 가는 길]
[임꺽정봉 안부]
[임꺽정봉]
임꺽정봉을 오르는 코스에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좌측으로 올랐다가 다시 내려와야합니다
[임꺽정봉]
암벽에 로프 하나 걸려있어 오랜동안 줄을 서서 오르고 내려야합니다
[임꺽정봉]
암벽을 오르면 임꺽정봉 설명안내판이 있는데 글자들이 모두 지워져 알아 볼수 없습니다
임꺽정은 홍길동(洪吉童)·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일컬어집니다
도적도 그냥 도적이 아니라 의적으로서 백성들에게 인기있는 도적이었습니다
조선 명종시절 몰락농민과 백정·천인들을 규합하여 지배층의 수탈정치에 저항하며
요즘 말로 하자면 민주주의를 부르짖었지요
[임꺽정봉]
임꺽정봉에서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 안내판이 있는 곳을 바라봤습니다
林巨正은 경기도 양주 '불곡산' 아래에서 백정 신분으로 태어나 황해도에서 주로 생활했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비슷한 처지의 농민 수십 명과 그 가족으로 집단을 이루어
황해도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도적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날쌔고 용맹스러우며 지혜로웠던 그는 1559년경 황해도·경기도·평안도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이 지역의 관청이나 양반·토호의 집을 습격, 이들이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인 재물을 빼앗았습니다.
또한 서울·평양 간 도로와 그밖의 주요교통로를 장악하여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토지세·공물·진상물 등을 탈취했습니다. 빼앗은 재물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어 의적으로서의
성가를 높이고 이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기에 오랜동안 세를 유지 할수 있었습니다
관군의 끈질긴 추격으로부터 도망하던 중 마침내 1562년 1월 서흥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당해,
15일 만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임꺽정봉에서 바라 본 '장군봉'과 지맥 마루금]
감악산에서 가장 아름운 곳이 이곳입니다.
'임꺽정봉-장군봉-병풍바위-악귀봉'능선
[임꺽정봉에서 바라 본 '악귀봉'과 지맥 마루금']
바로 앞 가운데 능선이 '설마치고개'로 가는 지맥 마루금입니다
[임꺽정봉에서 바라 본 '신암저수지'와 지맥 마루금]
가운데 오른쪽 능선이 지맥 마루금이며, 신암저수지를 옆에 끼고 내려갑니다
오른쪽 멀리 보이는 하얀 부분에 있는 도로가 '설마치고개'입니다
[임꺽정봉을 내려 갑니다]
감악지맥 마루금은 임꺽정봉 앞 능선으로 올라 가야합니다
[부도골 내려 가는 길]
저는 부도골로 내려 가는 길로 내려가 오른쪽 으로 올라가 마루금을 올라 탓습니다
[장군봉]
장군봉 마루금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며....
[악귀봉과 신암저수지]
장군봉 능선에서 바라 본 악귀봉과 신암저수지입니다
마루금은 '악귀봉'을 오른쪽으로 우회하여 '신암저수지' 방향으로 내려 가야합니다
[장군봉 능선에서 바라 본 감악산 정상]
감악산 정상은 岳山이라 할수 없고, 이곳 임꺽정봉과 장군봉, 악귀봉이 岳山입니다
[병풍바위-얼굴바위]
사람의 얼굴 옆모습처럼 보인다고 얼굴바위라고도 하며, 병풍바위라고도한답니다
'임꺽정봉'이 멀리 보입니다. 임꺽정굴에서 관군의 추격을 뿌리치기위해 숨었을 임꺽정.
봉건사회에 저항하며 짧은 한 생애를 보낸 임꺽정........
요즘에 태어 났더라면 국회의원 정도는 했을텐데...
[병풍바위 내려가는 계단]
[악귀봉]
아래 안부에서 앞에 보이는 '악귀봉'을 우회하여 지맥 마루금으로 가야합니다
지나온 병풍바위 계단을 뒤돌아 보았습니다
'악귀봉' 안부에서 우회합니다
앞으로 '한북감악지맥2구간을 종주 하실 분들은 '서울백두클럽' 표지기를 참고하시면
많은 도움이 될것입니다
[지맥 갈림길]
매우 중요한 갈림길입니다.
일반 등산객들은 모두 이곳에서 법륜사로 하산합니다
그러나 지맥 종주하는 산객들은 여기서 앞으로 직진하여 '악귀봉'을 우회하여
전진해야합니다. 이곳에서 알바를 많이 하니 유의하여야합니다
[서울백두클럽 표지기]
서울백두클럽의 초록색 표지기를 따라 가면 길찾기가 매우 쉽습니다
'악귀봉'을 돌아 내려 와서 뒤돌아 본 '임꺽정봉'입니다
절벽에 굴도 보이는 듯합니다
[어룡고개로 하산 하는 길]
일반 등산객을 단 한명도 찾아 볼수없는 지맥길
조용하고 한산합니다
[군 유격 훈련장]
조금 내려 가니 군 유격훈련장이 나왔으며,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이곳에 12시 45분에 도착했으니 '간파고개'에서 3시간이 걸렸습니다
[군 가스 실습실]
현역으로 군대를 갔다 오신 분들은 한번쯤은 들어 가 봤을 '가스실'이 있습니다
이곳은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이었으나 해제되어 이렇게 이런 시설을
추억으로 삼으며 다닐수 있게 됬으니 격세지감이 듭니다
가스실에서 바라 본 임꺽정봉
추억의 가스실을 지나 지맥 마루금을 따라 갑니다
[신암 저수지]
신암저수지는 지금으로부터 약30년전에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만들어 졌다고하며
면적은 95ha이고 저수량은 387,000t이라고 합니다
신암저수지를 조금 지나니 우측으로 '설마치고개' 971번 지방도로가 보입니다
[서울 양천구 목동에 사시는 沈熔輔 先生]
저의 산행기를 읽으시는 분들에게 꼭 소개해 드리고 싶은 분이십니다.
이 분의 연세가 72세이신데 아직도 일주일에 평균 4~5일은 등산을 다니신답니다
지난번에 우리나라 4,000산 등정 기록 기념도 했더군요. 축하드림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백두대간 9정맥은 물론, 전국 대부분의 산에는 이 분의 표지기가 달려있습니다.
산행하시다가 4,000산 등정, 서울 陽川 沈熔輔라는 표지기가 보이면
이 분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72세에 이렇게 산을 오를수나 있을려는지 그게 더 관심이 갑니다. 에구~
[설마치고개 - 어룡고개 ]
오늘 산행의 반환점 정도 되는 "설마치고개'가 보입니다
오전에 '간파고개'에 우리를 내려 놓았던 관광버스가 이곳에 와 다시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로를 느끼는 분들을 위해서 산로를 탈출할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산행을 하니 초보 산객들도 얼마던지 참여 할수 있습니다
[설마치고개]
설마치고개에는 터널화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설마치고개 - 어룡고개 ]
오후 2시 5분에 '설마치고개'에 도달하였으니, '간파고개'에서 4시간 20분이 걸렸습니다
앞으로도 4시간을 더 가야 합니다
[설마치고개 - 어룡고개 ]
양주시 남면 시낭ㅁ리에서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로 넘어 가는 고개 이름입니다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말을 타고 달리던 고개라고 붙여졌다고합니다
설마치고개는 한자로 薛馬馳라고 쓰는데 馳가 "말 달릴 치"라는 말이므로
설인귀가 말을 타고 '무건리'에서 감악산으로 무술 훈련을 하던 속이라는 말입니다
[설마치고개 - 어룡고개 ]
설마치고개를 지나 지맥길을 오르며 내려다 본 설마치고개
이제는 설인귀도 임금도 간곳없고 산객들과 차량들이 넘나들고 있습니다
薛馬馳고개를 어룡고개라고도 하는데, 한자로 御龍이라고 쓰며
여기서 龍은 전설 속의 동물 용이 아니라 언덕 룡입니다
즉 임금이 넘어 간 고개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전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 항복을 하러 이 고개를 넘어,
고랑포를 지나 개성으로 갔다고 합니다. 항복하러 가며 禮物을 수레에 싣고 갔는데
그 수레의 행렬이 십리를 넘었다고 합니다.
'경순왕'의 맏아들 "金一"은 항복을 거절하고 신라를 재건하기 위해 금강산으로 가지요.
프로 레스링 선수 金一과 이름이 같은 그가 바로 그 유명한 "麻衣太子"이지요
"麻衣太子"는 왕건의 고려군사들에게 들키지 않기위해 거지 행각을 하기위해
삼베옷을 입고 갔다고해서 얻어진 닉네임이지요. 본명은 "金一"입니다
설마치고개를 지나 반대편 마루금에 올라 감악산쪽 신암저수지 전망대가 있었던
봉우리를 뒤돌아 보았습니다
[삼거리]
날등에 올라 서면 첫번째 삼거리가 희미하게 나오는데 우측으로 갑니다
설마치고개에서 수레너미고개까지는 알바하기 쉬운 갈림길이 많으므로
주의를 많이 요합니다
[멀어져 가는 감악산 임꺽정봉]
이제부터 감악산 임꺽정봉을 뒤로하며 계속 전진합니다
[무건이고개 가는 길]
[무건이고개 가는 길]
'서울백두클럽 회원' 이외의 산객들은 단 한명도 만나지 못한
호젓한 산길을 봄바람 맞으며 걷고 또 걷습니다
[군 유격 훈련장]
이곳 능선도 군 훈련장이었습니다
탱크들이 다니는 넓은 길이 나오면 직진하여 마루금으로 올라 갑니다
[무명봉]
철조망을 끼고 매우 가파른 된비알을 올라 갑니다
이미 많은 시간을 걸었기에 피로를 많이 느낌니다
[무명봉]
사진에서는 완만하게 보이는 봉우리이지만 실제는 경사가 심합니다
[무명봉]
봉우리 정상에 올라 휴식을 취했습니다.
'설마치고개'에서 약 1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파평산]
북서쪽으로 '파평산'이 보이는군요
[탱크 훈련장]
탱크들 보이시나요?
한북정맥에 붙어있는 지맥에는 군부대 투성이였지요
[무건이고개 가는 길]
薛仁貴에 대해 제가 조사한바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중국의 경극(京劇) 독목관(獨木關)에는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과 설인귀(薛仁貴),
그리고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등장합니다.
그 경극의 내용은 이세민이 고구려 영토인 봉황산(鳳凰山)에서 연개소문에 패해 위기에 빠졌을 때
설인귀가 나타나 구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구당서(舊唐書)'에 나오는 '설인귀 열전(列傳)'은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고 돌아온 이세민이
설인귀에게 "짐(朕)은 요동(遼東)을 얻은 것에 기뻐하지 않고, 경을 얻은 것에 기뻐한다"
(朕不喜得遼東,喜得卿也)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한쪽 눈을 잃고 애꾸 눈이 되어 패주한 주제에 “요동을 얻었다”는 말은 허세에 불과하지만
당태종 이세민에 의해 이후 설인귀는 중국인의 영웅이 됩니다.
서기 670년에는 지금의 감숙성(甘肅省)과 신강성(新疆省) 일대를 공격해 큰 공을 세우기도 하지만
중국인들이 설인귀를 좋아하는 근본 이유는
그가 일개 농민 출신으로 대장군까지 된 입지전적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무건이고개 가는 길]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이제는 힘드는 봉우리가 되겠습니다
설인귀는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제사를 지내던 인물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경기도 적성현(積城縣)조는 감악산(紺嶽山)을 설명하면서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사람이 당나라 장수 설인귀를 제사 지내어 산신(山神)을 삼았다'고
한다”라고 기록했으며, 또한‘신증동국여지승람’적성현 조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한 배경은‘한국지명총람' 파주 조에 실려 있습니다.
"설인귀는 적성 부근에서 태어나 감악산에서 무술을 익혔는데,
당나라에 가서 모국인 고구려를 쳤다.
그리고 후에 이를 자책해 죽은 뒤 감악산의 산신이 되어 우리나라를 도왔다"는 것입니다.
황현(黃玹)도 ‘매천야록’에서 “전설에 의하면 적성현 설마치(薛馬峙)는 설인귀가
말을 달리던 곳이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이것는 아마도 설인귀를 고구려 출신으로
만들고 싶었던 후세인들의 창작일 것이라 여겨집니다.
[무건이고개 가는 길]
지금 배경 음악으로 흐르고 있는 음악은 콜럼버스 미대륙발견 500주년 기념영화 주제곡입니다.
70년대 초부터 꾸준히 솔로 앨범을 발표해 온 반젤리스가
1992년에 발표한 영화 <1492 Conquest Of Paradise>에서 특유의 웅장한 사운드를 들려주며
자신의 작곡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곡으로 유명합니다
[무건이고개 가는 길]
"지구는 둥글다"라는 신념 하나로 당시엔 낭떨어지라고 하던 수평선을 넘어
新大陸을 찾아 나선 '컬럼버스'
그래서 이 음악의 제목이 Conquest Of Paradise입니다
컬럼버스는 이탈리아 사람이지만 스페인의 도움으로 신대륙 탐험에 나섰지요
그는 죽을 때까지도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라고 믿었답니다.
그래서 아직도 아메리카 원주민을 미국 이외의 나라에선 '인디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참고로 미국 사람들은 '인디언'이라고 하지 않고 'Native American'이라고 부름니다
미국에 갔을 때 원주민을 '인디안'이라고 하면 않된다는걸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감악산 임꺽정봉]
감악산 임꺽정봉이 점점 더 멀어져 갑니다
[무건이고개 가는 길]
[무건이 고개]
3시 35분에 무건이고개에 도착했습니다
'무건이고개'에는 초소가 있으며 갈림길이었습니다
양주시 남면 점말에서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로 넘어 가는 고개입니다.
즉 '무건리고개'가 음운변화를 거쳐 '무건이고개'로 불리워지고 있다고합니다
'무건리'는 武建里로 쓰며 '설인귀'의 전설이 있더군요
'설인귀'는 구척 장신으로 어려서부터 기골이 수려하고 힘이 센 장사로서
당시 세도가인 '상산 김씨'묘를 쓸 당시 술을 세동이나 마시고 난 후
아름드리 나무들을 캐내는데 무밭에서 무 뽑듯이 하였다 합니다.
그 후 율포리 임진강변 벼랑에 갔을 때 석벽에 있는 바위가 갈라지면서 용마가 뛰어나와
말을 타고 감악산 천왕봉 아래 백운동을 가니 밭을 갈던 농부가 쟁기에 걸려 캐낸
큰 궤짝속에서 갑옷과 투구를 얻었으며 백운대 삼태봉(4체봉) 칼바위에서 보검을 얻은 후
武建里 골짜기에서 감악산을 오르내리며 군마훈련을 익혀
무훈을 세웠다하여 武建里로 호칭하였다고 합니다
[군부대 시설]
[수레미고개]
수레를 밀고 올라야 한다고 붙여진 '수레미고개'가 나타납니다
[수레미고개]
'수레미고개'는 양주시 남면과 광적면의 경계이며,
파주시 적성면의 경계가 됩니다
[고도계 307m봉]
막바지 제일 높은 봉우리를 오릅니다.
이제까지 많이 걸었기에 무척 힘이 듭니다
[고도계 307m봉]
[고도계 307m봉]
[고도계 307m봉]
마지막으로 높은 봉우리를 올라 주변을 조망합니다
[고도계 307m봉]
감악산은 점점 더 멀어져 갑니다
[고도계 307m봉]
멀리 "마차산'과 그 뒤로 아득히 '소요산'이 보이는군요
[고도계 307m봉]
고도계 307m봉에서 바라 본 "노고산"
[군 화생방 훈련봉]
[불곡산과 도락산]
마지막 봉우리에서 마지막으로 뒤 돌아 본 감악산과 마차산,
마지막 봉우리에서 바라 본 1구간의 노고산
[수레너미고개]
오늘 산행의 종착역 '수레너미고개'에 저녁 6시 정각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니까 '간파고개'를 오전 9시 45분에 출발하였으니 8시간 15분이 걸렸습니다
'수레너미고개'는 '수루네미고개', 수루너미고개', '수르레미고개'등등으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조사한바로는 수레너미고개"가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
[수레너미고개]
이곳은 양주시 광적면에서 파주시 법원읍 오현리로 넘어 가는 고개입니다.
옛날 중국으로 넘어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답니다.
그래서 이 고개는 수레가 끊임없이 넘어가 '수레넘이'-'수레너미'로 음운변화 하였다고하며
한문으로는 車踰嶺, 또는 車踰峴으로 대동여지도와 조선화유승람에
나와 있다고 하니 수레너미고개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의 地名은 이렇듯 세월과 사투리등으로 많이 변해서 語原을 알기 어려워졌는데
국토지리원에서 재정립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뒷풀이]
긴 산행을 끝내고 함께하는 뒷풀이 시간은 정말 즐겁습니다
그러나 너무 즐거운 나머지 필요 이상으로 뒷풀이를 오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일회용품 줄이기, 적당한 음주문화 창달, 고품위 분위기 조성 등으로
좀더 발전된 산악회 모임을 만들기 위해 서로 더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뒷풀이]
18.7km를 걸었으며, 8시간 15분이 걸렸습니다
서로 완주를 축하하며, 시원하게 술 한잔~~!!
파란문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