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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소풍 참관기 親舊라는 말은 自由라는 말에서 유래됐다구 합니다 쉴만한 공간과 자유로움을 허락하는 사람이 바로 친구랍니다 모처럼 봄비 다운 봄비가 청승스럽게 내리던 날 쉴만한 공간과 자유로움을 서로 공유하자고 북한산 뒷자락 일영유원지에 있는 "장자원"으로 모여 세상살이도 잠시 잊고 하루를 함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날의 현장 속으로 함께 가 볼까요?

[지하철3호선 구파발역 4번출구] 5월 16일 오전 10시 30분 3호선 구파발역 4번출구 약속 장소에 약속시간에 맞춰 모여들기 시작하는 동기동창들 은평뉴타운 건설로 '구파발역' 주변과 교통체계가 완전히 바꿔져 지하철을 이용해야 쉽게 옛 생각으로도 올수 있습니다

[지하철3호선 구파발역 4번출구] 전동차가 한대씩 도착 할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반가운 얼굴들 사실 요즈음은 이 얼굴들을 이런 야유회 같은 즐거운 곳에서는 만나는 기회가 거의 없고 초상집이나 예식장에서 잠깐씩 만나는 게 고작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매우 특별한 날이라고 할수있습니다 호사다마....이런 특별한 날에는 심굴궂게도 비가 내립니다

[구파발터] 조선시대에 파발마(擺撥馬)를 두어, 서울과 의주 사이를 공무(公務)로 급(急)히 가는 사람이 타던 말 이 있었던 驛站. 구파발을 많이 다녀도 이런 표지석을 관심있게 보신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장자원] 구파발역에서 장자원에서 보내준 버스를 타고 일영유원지 "장자원"으로 갔습니다. "장자원"이라는 음식점은 야영을 할수 있는 규모가 큰 음식점이었습니다.

[장자원] "장자원"은 단체 야유회장으로 주로 이용되는 곳으로 야외에서 바베큐를 하며 운동장에서 축구도 하고 각종 놀이를 할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장자원] 조경도 잘 되있지요? 봄 철죽이 예쁘게 피어있고 신록이 더해가고 있습니다.

[장자원 소풍 본부] 제대로 맞추는게 없다고 국민들로 부터 "구라청"이라는 별명을 얻은 기상청이 이번에는 날씨예보가 적중했습니다 적중해야 할때에는 못하고, 하필 오늘 같은 날에는 적중을 합니다. 닝기리~ 하루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잠시도 쉬지 않고..... "구라청"을 "심술청"으로 바꿔줘야겠습니다. ㅎㅎ

[봄소풍 현수막] 집행부가 미리 준비한 "봄 야유회" 현수막. 다소 전시용이라는 느낌은 들지만 그래도 이걸 보는 당사자들은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집합 완료]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동창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제법 많지요?

[삼겹살 구이] 먼저 와서 행사 준비를 하는 부지런한 분들이 삼겹살을 지글지글 굽고 있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삼겹살은 이렇게 구워야 맛있지요? ㅎㅎ 이날 삼겹살이 얼마나 굽혔는지 알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선 한잔씩] 모두 자리에 앉아 본격적인 행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행사라고 해 봐야 술마시고 노래하고 잡담하고.....이런게 전부이지만 그래도 오늘의 의미를 한번 더 일깨우며 집행부의 노고에 감사도 드려야지요

[우선 한잔씩] 우선 술이 한잔씩 돌아 갑니다.... 분위기가 조금씩 UP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만 이런게 아니라 전국의 모든 동창회가 대부분 이렇게 진행되지요 사진에 뿌옇게 나오는건 삼겹살 굽는 연기입니다. 짐작할만하죠? 냄새가 진동합니다 소주 한잔씩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외국에 사는 우리 동창들은 이 광경을 보고 얼마나 참석하고 싶어할까..ㅎㅎ

[휘문여고 62회] 徽文女高가 있는 줄 여기서 처음 알았다구요? 이런 행사가 있으면 열심히 참석해 주시는 徽文女高62회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림니다. 앞으로는 더 많은 徽文女高生이 참석을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꽃과 나비는 함께 놀아야지요~~ 꽃과 나방이라 싫다구요? ㅋㅋ

[회장님 개회사] '회장님'의 인사 말씀을 시작으로 '봄소풍'은 화려한 막을 올림니다 휘문62회는 참으로 독특한 기수입니다 우리 동기 중에는 국회의원도 있고, 재벌그룹 회장님도 있고,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 HD건설의 사장, 해외본부장, 국내본부장을 싹쓸이 하고 그리고 여러 공기업 중요 임원을 맡아 열심히 일하는 동기들도 많이 있습니다. 교수, 교감, 교장등 교직에도 많으며, 의사도 많고, 백수도 많습니다 판검사 변호사만 없고 다른 분야는 모두 골고루 분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세계 많은 나라에서 한국인의 긍지를 잃지않고 열심히 사는 동기들도 무지 많습니다. 軍출신들도 많아 요즘은 군출신들이 이런 모임에 앞장을 섭니다.

[酒宴] 자유롭게 한잔씩하며 여흥을 즐깁니다 말이 필요없지요. 사실 제일 중요한게 이것입니다. ㅎㅎㅎ 한짠씩 쭈~우 ㄱ

[삼삼오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회포를 품니다.

[운동준비] 마시는 일도 중요하지만 축구경기를 하려고 합니다. 비가 내리는 통에 많이 자제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사고가 없었을수 있었겠죠? 비오는 날 한잔하고 이 나이에 축구경기.....위험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아직도 청춘이라고 대부분 나설려고 합니다. ㅎㅎ

[축구 시합] 축구 팀을 나누어야 하는데..... 그래서 두팀으로 나눴습니다. "오합지졸팀"과 "중구난방팀"으로....ㅋㅋㅋㅋ 축구하는 시간 보다 팀 짜는데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축구 시합] "오합지졸팀"과 "중구난방팀"이지만 서서히 열기가 넘치기 시작합니다. 이글 이글... 비록 몸과 마음이 따로 놀겠지만 열의는 대단합니다. 우승 상금도 없습니다. 이기면 술한잔 더 먹어야합니다. 그런데도 활활거리는 열의

[축구 시합]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오합지졸팀"과 "중구난방팀" 팀 이름대로 축구경기가 중구난방입니다만 열심히 공을 쫒아 다니는데 공을 실제로 직접 차본 사람은 몇명 않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헛발질만 하는거죠 세상에 비옷, 아니 좋은 말로 레인코트 입고 축구하는 이런 경기 구경해 봤습니까? 축구가 아니라 코메디이지요~ ㅎㅎ 그러나 "이 얼마만에 우리가 운동장에서 함께 축구해봤지?" 라는 질문에 "아마 40년은 넘은 것 같아~" "웃기지만 잼있지? ㅎㅎ"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놀수 있어야 할텐데.." "그래...건강하자구~"

[노래방] 본격적인 여흥이 시작되었습니다. 노래방은 상품도 걸려있어 애창곡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이 글은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에 알려지므로 인적사항은 밝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아는 사람들이기도하니까요

[노래방]

[노래방]

[노래방]

[노래방]

[노래방]

[노래방]

[노래방]

[노래방]

[노래방] 오늘 노래방은 이 친구가 하일라이트입니다. 공상현입니다. 최근에 취미생활로 배웠다는 쌕스폰이 프로급 수준입니다 우리 동기들 중에 밴드부 출신이 여렀있습니다만, 요즈음은 연주를 않한다는데 이 친구는 몇년한 쌕스폰으로 프로가 되어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노래 감상] 찍사도 앉아서 칭구들의 노래를 감상하며 한잔했습니다. 폼 보면 누가 누군지 대략 아시지요? ㅎㅎ

[봄비는 내리는데...] 질기게도 비가 내렸습니다 요즘 가뭄이므로 비를 탓할수도 없습니다.

[시상식] 시상식이 있었는데 1등엔 대전에서 온 교감선생님 부부가 탓습니다. 1등상은 "진주목걸이"였는데 무지하게 큰 보석상을 하는 동창이 기증한것입니다 아무튼 상을 받은 기분....너무 즐거워 보입니다. 축하합니다

[시상식] 2등 3등상을 받은 회장님과 전임 총무님 부부 알고보니 부부 동반한 사람들이 상을 타 갔군요..ㅎㅎ

[단체기념사진]

[회장과 총무] 회장님과 총무님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어린 양들을 계속 돌보아 주시길

[봄소풍 종료]

[해산] 행사가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 가라고하는데 갈 생각들을 않하고 서성거립니다. 왠 비는 이렇게도 내리는지....

[연신내 대구뽈탕집] 몇몇 친구들과 연신내에 있는 "대구 뽈탕집"으로 갔습니다. 이곳은 제가 북한산 등산을 갔다가 내려와 뒷풀이를 가끔 하던 곳이라서 시원하게 속풀이를 하려고 온것인데, 우루루 모두 따라 왔습니다. 집으로 그냥 가기는 아쉬움이 너무 많이 남았던게지요. ㅎㅎ 그래서 여기서 다시 술판이 벌어졌습니다

가기 싫은 발길을 어쩔수 없이 돌리는 밤은 점점 더 깊어 가고 있었습니다 나무는 그늘을 약속하고 구름은 비를 약속하듯이 우리는 따뜻한 우정을 약속합니다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 나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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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摩地脈3區間 마치고개-柏峯山-수레넘이고개-고래산-먹치고개 5월10일(일) 오전 8시30분 청량리역 4번출구에서 支脈山行을 좋아하는 "서울백두클럽" 회원님들과 天摩地脈3區間을 종주하기위해 길을 나섯습니다 [남양주시 호평동 구룡터 버스정류장] 청량리역앞 버스정류장에서 비금리행 [330-1]번 좌석버스를 타고 남양주시 호평주공아파트앞 "구룡터" 정류장에서 내렸습니다 오전 9시 25분경 "구룡터" 정류장은 "마치터널" 바로 앞에 있는 정류장이므로 여기서 내려야 산행들머리인 "마치고개"로 올라 갈수 있습니다 우측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마치고개"로 오르는 옛길이 나옵니다 [마치고개 옛길] 향수가 느껴지는 그 유명한 46번 국도 옛길 - 마석 넘어가는 마치고개. "서울에서 춘천"으로 가는 옛길이 한산한 모습으로 산객들을 부르고있습니다 지금은 터널이 뚤리고 길이 넓혀진 새로운 국도 46번이 이 옛길 아래로 쌩쌩 달리고있어서 우리 같은 산객들이나, '비젼힐스 골프장'을 가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낭만이 서려있는 "춘천가도" 마치고개를 옛날에 넘으려면 교통체증으로 고생을 했는데 이젠 걸어서 오르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마치고개] "구룡터" 버스정류장에서 마치고갯마루까지는 제법 멀어 25분 정도는 걸어야합니다 옛날에 이근처에서 맷돌을 많이 만들었다고, 摩石고개라고 하는 고개입니다 남양주군 호평동에서 和道邑 마석으로 넘어 가는 고개입니다. [마치고개 산행 들머리] "마치고개" 정상에 이정표와 함께 산행 들머리가 있습니다. 이곳부터 백봉산까지는 아주 독특하고 예쁜 이정표가 곳곳에 설치되 있습니다 9시55분에 산행을 시작합니다 [이정표] 모두 통일된 모양의 이정표가 예봉산, 예빈산까지 설치되 있습니다 그래서 힘들 땐 잠시 서서 한줄의 詩도 감상할수있도록 배려해 놔서 이곳 남양주시 담당 공무원은 정말 '산행'이 뭔지 아는 사람인듯합니다 [柏峯山 오르는 길] '마치고개'에서 柏峯山까지 2.3km는 제법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입니다 우리 '서울백두클럽' 선두는 약 50분이 걸려서 柏峯山 정상까지 올랐으니 속도가 장난이 아닙니다. [첫번째 쉼터] 柏峯山도 肉山이어서 바위 구경하기가 어렵습니다 처음으로 이 바위가 나오면 옷을 벗고 본격적 산행 준비를 하고 오릅니다 [첫번째 쉼터에서 조망] 첫번째 바위에서 올려다 보면 柏峯山 정상같은 봉우리가 조금 보입니다. 그러나 이 봉우리는 올라 가 보니 柏峯山 정상이 아니고, "서울 리조트 스키 슬루프"의 정상이 있는 봉우리였습니다. 하지만 이 봉우리에서 柏峯山 정상은 500m 떨어진 곳에 있으니 거의 정상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된비알] 제가 사진 찍을 줄을 몰라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르막 경사는 사진에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옆 계곡은 "서울 리조트 스키장"입니다 스키장에는 신록이 무러익어 가고..... 눈이라도 펑펑 쏟아지기를 기대하며 숲속을 오릅니다만 신록은 온 대지를 푸르게 만들며 날씨도 더워 땀이 나기 시작합니다 [호평동 주공아파트 단지] 지금 오르고 있는 능선은 "서울 리조트 스키장" 끝머리를 타고 오르는 것입니다. 뒤 돌아 보니 남양주시 "호평지구 아파트단지"가 펼쳐지고, 산행을 시작했던 "구룡터"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입니다 새로이 만들어진 46번 국도가 바쁜 사람들을 빠르게 옮겨주고 있습니다 [비젼힐스 골프장] 우측에는 "서울 리조트 스키장"이 있고 좌측에는 "비젼힐스 골프장"이 있습니다 천마지맥 산줄기는 스키장과 골프장이 양쪽에서 갈가먹어 산줄기가 앙상한 뼈대만 남아 있는데 외나무 다리 위를 걷는 느낌을 줍니다.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신록] 일주일 사이에 나뭇잎은 엄청 넓어지고 초록색으로 변했습니다 여름이 다가 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집니다 [계단] 앙상한 뼈대만 남은 외나무다리 같은 천마지맥 산줄기를 따라 가면 정상부근에 도착 했다는 느낌이 들때에 계단이 나타납니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 갑니다 [서울 리조트 스키 슬루프 꼭대기]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숲사이로 돌탑이 하나 나타는데..... 백봉산 정상 같은 느낌을 줍니다만 백봉산 정상 바로 옆 스키 슬루프입니다 [서울 리조트 스키 슬루프 꼭대기] 이곳이 '서울 리조트 스키장 슬루프 꼭대기입니다 573m봉우리를 깍아 반토막 내서 스키 슬루프 정상을 만들었습니다. 깍아 반토막 낸 이 봉우리 아래에서 스키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서울 리조트 스키 슬루프 꼭대기] 눈이 없는 스키장의 정상. 스키어들을 실어 나르는 리프트는 멈춰있으나, 겨울철의 스키 타는 소리가 들려 오는 듯합니다. 저도 스키 경력이 30년은 넘습니다. 비록 1년에 한두번 정도 탓습니다만, 햇수로는 30년이 넘지요...ㅎㅎ 30년동안 30번 정도 탄것 같네요..ㅎ [柏峯 가는 길] 스키장 봉우리를 지나면 이정표가 정상까지 500m 남았다고 알려줍니다 이때서야 스키장 봉우리가 柏峯山 정상이 아니란걸 알게 됩니다 [전망대 쉼터] 스키장에서 柏峯山 정상 가는 길목에 전망대 쉼터가 있습니다 "비젼힐스 골프장"인데 천마지맥 좌측에는 골프장이 펼쳐져있습니다 저도 오랜동안 골프에 미쳐서 일주일에 필드를 9번씩 나가는 적도 있었지요 물론 골프를 그만두고 등산과 수영을 한지가 벌써 7~8년됩니다 저의 산행기를 열심히 읽어보신 분들은 제가 왕년에 어떤 골퍼였는지 아시지요. 골프를 그만 둔 이유가 많이 있지만 대략 우스게 소리로 정리를 하면.... 1. 가만히 생각할 수록 정말 기도 안차는 것이 '골프'입니다. 운동같지도 않은 것이 하고 나면 즐겁기나 하나, 친구간에 우정이 돈독해 지기를 하나, 열은 열대로 받고, 시간은 시간대로 날아가고, 돈은 돈대로 들고 하니 말입니다. 2.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골프 공 한개 값이면 자장면 곱배기가 한 그릇인데 물에 빠트려도 의연한 체 허허 웃어야지... 인상쓰면 인간성 의심받기 마련이고........ 자장면 한 그릇을 물에 쏟아넣고 웃어보세요..아마 미친놈이라고 할 것입니다. [전망대 쉼터에서 바라보는 마석]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비젼힐스 골프장' 뒤로 펼쳐지는 화도읍 마석이 잘 보입니다 3. 그리고 원수 같은 골프채는 무슨 금딱지가 붙었는지 우라지게 비싸지요... 드라이버 랍시고 작대기 하나가 33인치 평면 칼라 TV 값과 맞먹고... 비밀 병기랍시고 몇 십만원짜리를 오늘 좋다고 사 놓으면 내일은 구형이라고 새로 사야지... 풀밭좀 걸었다고 드는 돈이 쌀 두가마에다가 그나마 한번 치려면 실력자를 동원해야 부킹되고.....더러워서 4. 돈몇푼 따면 곱배기로 밥 사야 하고, 돈잃으면 밥 안사주나 눈치봐야 하고, 안 맞아서 채라도 한번 집어던지면 상종못할 인간으로 찍히고, 신중하게 치면 늑장 플레이라고 욕먹고, 빨리치면 촐싹댄다고 욕먹고..... 5. 공이 잘맞으면 일 안하고 공만 쳤다고 욕먹고, 안맞으면 운동신경 없다고 욕먹고, 퍼팅이 쏙 들어가면 돈독 올랐다고 욕먹고, 못넣으면 소신없다고 욕먹고, 길면 쓸데없이 힘쓴다고 욕먹고, 짧으면 쫄았다고 욕먹고. - '해비치 골프장'에 가서 계속합니다 - [柏峯 정상에 있는 팔각정] 柏峯山 정상에 올라 왔습니다. 10시 45분경에 왔으니 마치고개에서 50분 정도 걸렸고, 구룡터에서는 1시간 20분정도 걸렸습니다 柏峯山 정상에는 2층짜리 팔각정이 우뚝 서있고, 앞에는 헬기장이 있습니다 [柏峯 정상] 柏峯山 정상에는 정상석과 태극기, 이정표가 팔각정 뒤에 서 있습니다 [柏峯 정상석] 柏峯山은 산봉우리 형체가 '잣송이' 같다고 하여 '잣봉'이라 하며, 백봉柏峯은 '잣봉'의 한자표기입니다 [柏峯 정상에서 뒤 돌아 본 천마산] 천마지맥의 대표산인 天摩山이 보입니다 [柏峯 정상에서 바라보는 앞으로 가야 할 천마지맥] 이 한장의 사진 - 오늘 산행에서 가장 소중한 사진입니다 앞으로 가야할 산들이 모두 펼쳐지고, 한강 건너 "검단산"까지 보입니다 이 사진 속의 산이름 안내는 다음 사진에서 설명합니다. 친절하지요? ㅎㅎ [柏峯 정상에서 바라보는 앞으로 가야 할 천마지맥] 앞으로 천마지맥3구간을 가실 분들은 이 사진을 잘 보아 두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바를 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베테랑이라고 알바를 않을것이라고 믿었는데, 상당수가 알바를 했습니다. 물론 저는 '수레넘이고개' 바로 앞에서만 알바를 했습니다만 다른 분들은 대부분 좌측으로 가지 않고 똑바로 직진해서 심한 알바를 했으니 이 산행기를 보고 다음에 오실분들은 저의 산행기를 잘 메모해 가셔야하겠습니다 [柏峯 정상에서 바라보는 갑산, 예봉산, 검단산] 사진 속의 산들에 대해선 다음 사진을 참고하세요 [柏峯 정상에서 바라보는 갑산, 예봉산, 검단산] [柏峯 정상에서 휴식] 柏峯 정상에서 정상주를 한잔씩 하고 휴식을 취했습니다. [柏峯 정상에서 하산] 柏峯 정상에서 '수레넘이 고개'로 향합니다 지금부터 알바를 많이하는 곳이니 유의 하여야합니다 [410m봉 갈림길 - 철탑] 알바를 가장 많이 하는곳 --- 이곳입니다. 柏峯 정상에서 조금 가면 처음으로 "송전철탑"을 만나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여기서 좌측 '큰길'로 가면 간단한데 대부분 직진합니다. 저는 직진하여 철탑이 있는 정상에서 좌측으로 능선을 탓습니다. 오리지날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좌측으로 난 길을 다시 만납니다. 알고 나면 쉬우나 모르면 전부 직진하여 1시간 이상 알바를 합니다 [갈림길 - 철탑에서 뒤 돌아 본 백봉산] 송전철탑에서 뒤돌아 보니 백봉산 정상이 숲으로 뒤덮혀있군요. 정상에서 어느 정도 거리인지 아시겠나요? [341m봉 가는 길] 한적하고 완만한 능선을 따라 341m봉을 향해 갑니다. 이 시간에 후미는 아까 철탑에서 직진하여 알바를 하고 있었으니...ㅉㅉ ㅎㅎ [341m봉] 341m봉도 중요합니다. 이곳에서도 좌측 능선을 타기 쉽습니다.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후미를 기다렸으나 후미는 오지않고 산속을 헤메고 있었습니다 이런 지맥을 다니는 사람들은 알바를 두려워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지요. ㅎㅎ 때론 길을 잃고 헤메였던 것들이 더 큰 추억으로 다가 오기도 합니다 알바도 엄연한 산행입니다 [갈림길] 잘 가서 '수레넘이 고개' 직전에서 우측으로 가야하는데, 좌측으로 가 저도 알바를 했습니다. 에구~ 물론 긴 거리는 아니었습니다만, 고생을 조금 더 했지요. 이곳에서 좌측으로 갔더니 和道邑 車山里가 나왔습니다 이름 모를 집으로 내려 갔습니다 지맥을 다니는 우리는 평상시에는 도저히 갈수 없는 곳을 가지요 기억나시나요? 명성지맥2구간에서 탱크 사격 훈련장으로 들어 간거....ㅎㅎ 그러니 이렇게 남의 집에 들어 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和道邑 車山里] 이 집 마당으로 내려와 집 주인에게 야단도 맞고.... 죄송하다고 싹싹 빌고..................저 고개 위로 무지 걸어야 됩니다 이럴때 사실 제일 힘들어요. 포장도로 알바 [86번 지방도 - 수레넘이 고개 오르는 길] 和道邑에서 瓦阜邑으로 엄어가는 "수레넘이고개"로 오릅니다. 길을 잃어 고생을 사서 하는거지요. 하지만 재미있습니다. [수레넘이 고개] "수레넘이"에 대해서는 "감악지맥"에서 몇번 설명하였습니다. 수레가 넘어 가는 고개라고...한자로는 車踰嶺...일반명사가 고유명사화 된것이니 "수레넘이고개'는 전국에 많이 분포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동네 이름이 車山里 이곳 "수레넘이고개" 밑으로는 "서울-춘천 민자 고속도로" 터널이 뚤리고 있습니다 [수레넘이 고개] 수레넘이고개에서 후미의 알바 사실을 알았는데.... '서울백두클럽 횐님들 중에 두분만 정상루트를 따라 오고있습니다. '서울백두클럽 羅대장님'이 알바를 했지만 다시 정상루트를 찾아 오고있습니다. 산을 오르 내리느라 알바를 한 우리보다 알바하며 정상루트를 찾아 오니 우리보다 늦게...ㅎㅎ [수레넘이고개 지나 철탑에서] 수레넘이고개 지나 339.4m봉 가는 길목에 있는 송전철탑에서 뒤 돌아 보니 백봉산 뒤로 천마산이 쬐끔 보입니다. [339.4m봉 가는 길] 이제부터는 길을 잃을 염려는 없습니다 [339.4m봉 가는 길] "수레넘이고개"에서 "고래산"지나 "먹치고개"까지는 산객들의 흔적이 별루입니다 오늘 이길을 가는 사람들은 오직 '서울백두클럽' 뿐입니다 [339.4m봉] "339.4m봉"은 특별한 봉우리 표시가 없습니다. 지도를 보고 대략 위치를 알아야합니다 이곳에서 휴식을 조금 취하고.... [339.4m봉] 이곳에서 "해비치 골프장"까지 가는 길도 조금 조심해야합니다. 좌측으로 가야하는데 직진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 몇군데 있습니다 ['해비치 골프장' 가는 길] '수레넘이고개'에서 "해비치 골프장" 정문 위 에코브릿지로 가는 길입니다. 우측에는 마을이 있는데 제법 알려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입니다. 월문리에는 "표적사"라고하는 절이 백봉산 아래에 있지요 [갑산] '해비치 골프장' 가는 길에서 보이는 우측 끝의 "갑산" 좌측 끝 능선위가 "고래산"이고 우측 끝에 멀리 보이는 산이 "갑산"입니다. [해비치 골프장] '천마지맥 마루금' 옆으로 "해비치 골프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시 제가 골프를 끊은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6. 옷을 화려하게 입고 골프하면 날라리라고 욕먹고, 점잖게 입으면 초상집 왔냐고 욕먹고, 인물 좋으면서 잘치면 제비같은 놈이라고 욕먹고 인물 나쁘면서 공도 못치면 뭐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고 욕먹고, 농담하면 까분다고 욕먹고, 진지하면 열 받았냐며 욕먹고, 도우미하고 농담하면 시시덕댄다고 욕먹고, 농담하지 않으면 분위기 망친다고 욕먹고.....닝기리~ [해비치 골프장] 7. 노는산 깎아 골프장 만들어도 좁은 땅에 만든다고 욕 먹고, 나무 심고 잔디 심어 키워놔도 농약 친다고 욕 먹고, 여름이라 햇볕 피할수 있나, 겨울이라고 누가 따스하게 손을 잡아 주나, 땡볕 눈보라는 고사하고, 제대한지가 언제인데 툭 하면 산등성이에서 각개전투, 미친개도 아닌데 물만 보면 피해 다녀야 하고..... 8. 공이 갈만한 자리는 무슨 심술로 모래 웅덩이와 연못을 파놓고, Hole은 꼭 처녀 엉덩이 꼭 그거 같은 곳에다 코구멍만 하게 뚫어 놓았으니... 아무리 "구멍 넣기" 게임이라 하더라도...18홀 십팔구멍을 찾아 헤메고 다니니.... [해비치 골프장 출입구 위의 에코브릿지] 9. 골프채 새채 사서 잘 치면 돈이 썩어난다고 욕하고, 새채 안사면 죽울 때 돈 싸가지고 갈거냐고 욕먹고, Buyer가 공치자고 해서 외국에 채가지고 나가면 남의 눈총받고, 그나마 몇번하고 나면 세무조사 한다고 겁주고... 선물로 받은 채 들고 들어오면 무슨 밀수꾼처럼 째려보고, 새벽 골프나가면 그렇게 공부 좀 하~지 하고 욕먹고, 남녀 어울리면 바람 났다고 욕먹고, 남자들 끼리만 치면 호모놈들이라고 욕먹고...... [해비치 골프장 정문] 10. 이글, 홀인원 한번하면 축하는 못할 망정 눈들이 퍼래 가지고 뜯어 먹고, 잘 쳐도, 못 쳐도, 자주 쳐도, 안쳐도, 새 채로 쳐도, 헌 채로 쳐도, 새벽에 쳐도, 낮에 쳐도, 비올때 쳐도, 눈 올때 쳐도, 시끄럽게 쳐도, 조용히 쳐도, 천천히 쳐도, 빨리 쳐도, 멀리 쳐도, 짧게 쳐도, 돈내고 쳐도, 접대 받아 쳐도, 우째든지 욕을 먹게 되어 있는 이런 빌어먹을 골프를 왜 하느냐 이 말이여!~~ 정말 골프하는 사람들이 전부 제 정신이란 말인가?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욕먹기도 지쳤고, 돈 쓰기도 아깝고, 이제 골프를 확 끊어 버리고, 골프채도 만지지 않아야 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프로 테스트에도 나가 볼 정도로 골프에 미쳤었지만 그래서 저는 골프를 진짜로 끊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욕먹을 일 전혀 없고, 건강에 최고이고, 경제적이고, 칭찬 받는 "등산과 수영"으로 바꿨습니다. 아시다시피 등산은 일주일에 한번은 꼭 하고, 수영은 매일 새벽 한시간씩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골퍼들이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주변에서 "골프 가자~~"하면 또 작대기 짊어지고 마눌 눈치 보며 필드로 나갑니다. ㅎㅎ [고래산 오르는 된비알] 체력이 조금 떨어진 상태에서 다시 '고래산'을 오르는 된비알을 오르니 무척 힘듭니다 [고래산 오르는 된비알] 오르고 또 오릅니다 [고래산 정상 갈림길] 천마지맥 마루금에 있는 "고래산" 갈림길입니다 대부분의 산객들은 "고래산 정상을 가지 않고 그냥 "먹치고개"로 갑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에 베낭을 두고 좌측으로 "고래산" 정상을 갔다가 오려합니다 [고래산 정상 가는 길] "고래산"은 산객들의 발길이 거의 없는 산이었습니다. 하지만 山路는 뚜렷해서 길을 찾기는 쉬웠습니다. [고래산 정상 가는 길] 소래산 갈림길에서 고래산 정상까지는 제법 멀었습니다. 왕복 30분은 잡아야합니다 [고래산 정상] "고래산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정상에는 '삼각점'이 하나 있을 뿐이고, 정상석은 없었습니다. 울창한 숲으로 외부 조망도 쉽지 않아 더더욱 정상의 의미를 잃고 있습니다 [고래산 정상] 어느 산악회에서 붙여 놓은 정상 표시기가 다행이 걸려 있었는데 이 종이는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금새 없어지겠지요. 하지만 "고래산" 정상임을 확인하고 돌아 왔습니다 [고래산 정상에서 뒤 돌아 본 갑산] 천만 다행으로 '고래산' 정상에서 "갑산"을 볼수 있었습니다. 오늘 원래 저 "갑산"을 넘어 "새재고개"까지 가려고했는데..... '오리로스'가 꼬시는 바람에 저 "갑산" 밑으로 들어가 '오리고기 로스'를 먹으며 산행을 마쳤습니다. [먹치고개로 하산] "천마지맥3구간"은 유명한 산도 없고, 역사적 유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산행기에 올릴만한 얘기거리가 별루입니다 하산하는 길에 어디서 본 인생역정 유머 "강남 부자와 강북 서민"이란 얘기 들려 드림이다 강남 부자 오늘 마누라와 외식을 먹으러 나왔다. 마누라는 애드워드 아일랜드산 바닷가재를 먹자 했으나 나는 그냥 늘 먹던대로 상어 지느러미를 먹자고 했다. 실랑이 끝에 토라진 마누라는 운전기사의 키를 뺏어 벤츠를 몰고 집에 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마누라의 생일이다. 사과의 기념으로 우리부부는 내일 호놀룰루에 여행을 간다. [먹치고개로 하산하는 길에 바라 본 "큰명산"] 강북 서민 오늘 마누라와 시장을 보고있었다. 마누라는 탕수육이 먹고싶다고 했다. 나는 집에 가서 밥이나 먹으라고 호통을 쳤다. 토라진 마누라는 그길로 바로 버스를 타고 혼자 집에 갔다. 나는 열이 받아서 집에가서 마누라를 무지하게 팼다. 헛소리 안 한다는 각서 까지 받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마누라 생일이다. 나는 참 무심한 남편이다. 집에 가는 길에 약국에서 파스를 사서 가야겠다 [먹치고개로 하산] 20년이 흐른후~~ 강남 서민 호놀룰루에 갔을땐 봄날였다. 중국 주식 열풍에 휩싸여 펀드에 재산 절반을 투자 했는데 건진것도 별로 없다. 잘 나가던 사업체 부도난건 오래전~ 그나마 강남이 슬럼화 한지라 집 한채 값도 이젠 강북 집에 세들어 살기도 모자란다. 이런저런 시름의 생각에 묻혀 있을때 마누라가 탕수육이 먹고 싶다고 한다. 화가 난 나는 오늘 무지하게 두들겨 팼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마누라 생일이다. 나는 참 무심한 남편이다. 약국에 가서 파스나 사서 붇여줘야겠다 [먹치고개로 하산] 강북 부자 강남이 슬럼화 되자 강북이 예전의 집 값보다 배나 올랐다. 허리끈 동여맨 마누라 덕에 사업도 성공했다. 모처럼 마눌과 외식을 하러 나왔다. 질린 바닷가제,상어지느러미도 그렇고 해서 제비집 스프나 곰발바닥 스프로 간단히 먹자고 했다. 실랑이 끝에 삐친 마누라는 곧바로 자가용 비행기 타고 호놀룰루로 가버렸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마누라 생일이다. 사과의 기념으로 자가용 비행기를 보잉747기로 바꿔 줘야겠다 과장이 너무 심했나요? ㅎㅎ 하지만 곧 이렇게 될지도 모릅니다 희망과 용기를 가지세요~~~~ [먹치고개 마을] '먹치고개" 마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먹치고개] "먹치고개" 왜 먹치고개라고 하는지는 알수가 없었습니다 이곳 "먹치고개"를 일반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 오려면 "중앙선 덕소역"에서 [88-3번] 마을버스를 타면 됩니다 오전 9시 30분에 출발하는 마을버스를 타면 약 20분 걸려 이곳에 도착합니다. 이 마을 버스는 배차간격이 길므로 시간을 마추어야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택시를 얼마던지 불러 탈수있습니다 전화하니까 금방 오더군요. 먹치고개에서 덕소역까지 8,000원 정도이니 4명이서 타면 버스 타는 비용보다 많이 비싸지는 않더군요 [갑산 아래 내치마을] 원래 "갑산"을 넘어 "새재고개"에서 3구간을 마치려고했으나 백봉산에서 알바를 많이해 오늘은 이곳의 유명한 '오리로스집'에서 뒷풀이로 산행을 마감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라 '오리로스집'으로 올라 갑니다. 그러나 유명한 오리로스집은 '먹치고개'에서 상당히 멀어, '갑산' 아래까지 올라 갔습니다 앞에 보이는 산이 '갑산'입니다 [오리로스집에서 뒷풀이] 청랭리나 구리 일대에서는 알려진 오리로스집이라고 하더군요 여하튼 즐거운 뒷풀이를하고 '천마지맥3구간을 마쳤습니다 다음 제4구간은 졸업구간입니다. 오늘 '새재고개'까지 진행을 못해 4구간은 더 걸어야하겠습니다 5월24일(일) 오전 9시까지 '중앙선 덕소역'에서 만나, 마을버스 [88-3번]을 9시30분에 타고 '먹치고개'로 다시 와서 산행을 시작합시다. (택시를 타도 됩니다) "천마지맥" 완주후 졸업식이 거행되니 더 많은 산객들의 참가를 기대합니다 [산행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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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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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白山 山行記 慶尙道라는 地名이 엄연히 있는데도 또다시 嶺南地方이라는 새로운 地名을 만든 白頭大幹 중에 하나의 山인 『小白山』을 찾아서 화창한 5월의 첫주에 "휘산회"와 함께 길을 나섯습니다 [치악휴게소] 서울 잠실 롯데월드에서 '중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를 따라 "북단양 I.C."까지 가는 길에 있는 '치악휴게소'에서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5월초 황금연휴 기간 가운데 5월3일 일요일이었습니다 [새밭계곡 河日川]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 "새밭계곡"에 흐르는 물은 小白山의 '國亡峯'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데 " 河日川"이라고 한답니다 이 河日川의 맑은 물은 南漢江으로 흘러 강화도 앞 西海로 멀고 먼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준비운동] "어의곡리"를 산행들머리로 小白山을 등산하는 산객들은 많지 않은듯합니다 오늘은 참가자가 그다지 많지 않은 "徽山會" 교우들은 1,439m 높이의 "小白山비로봉"을 오르기 위해 산행들머리인 "어의곡리" 주차장에서 준비운동을 합니다 [소백산 등산로 입구] "어의곡리 소백산 산행 들머리"는 주차장에서 오른쪽으로 나 있습니다 비로봉 5.1km라는 팻말이 벌써부터 압박감으로 다가 옵니다 10시 45분경에 출발합니다 "소백산국립공원"은 우리나라 20개의 국립공원중에 18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등산로] 小白山 山行은 "죽령"이나 "희방사"에서 주로 시작하는데 오늘은 색다른 小白山의 맛을 느끼기 위해 이 코스를 선택했나 봅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제까지 많은 산을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시시한 등산코스는 처음입니다. 小白山은 완전한 肉山으로 볼거리가 거의 없는데다, 계곡을 오르니 시야까지 꽉막혀 외부를 조망할수도 없으니 뒷동산을 오르는 것과 무슨 다름이 있겠습니까. 정상부를 제외하고는 정말 눈에 뵈는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산행기는 산행기가 아니라 이런 저런 얘기로 채워야 할것같습니다 [어의곡 마을] 등로를 조금 올라 "어의곡 마을"을 뒤돌아 봤습니다. "어의곡 산행 들머리"에는 조그만 주차장과 가옥 몇채가 있을 뿐인 조그만 마을이었습니다 "어의곡"이란 말의 유래는 두 골짜기가 어우러져 있어 엉이실, 응실 또는 어의곡(於儀谷)이라 했다고하는군요. 그리고 소백산 비로봉으로 오르는 마지막 마을이라 비로봉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 되겠습니다 [등로] '어의곡리'에서 오르는 등산로는 비교적 넓게 잘 정비되있습니다. 충청북도 단양군에서 경상북도 영주시로 넘어 갑니다. 그래서 이곳 단양과 풍기에서 군수를 지내신 퇴계 이황선생님의 이야기가 많아 퇴계 이황선생님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소백산 어의곡 탐방 지원소] 퇴계선생님은 "등산"을 매우 좋아 하셨고, 많은 山行記를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퇴계선생님이 남기신 유명한 산행에 대한 名言이 있지요? 아십니까? 제가 오래전에 쓴 登山과 遊山이라는 글을 다시 한번 올려 드리겠습니다 [산행 안내도] [등로] 우리나라 역사속 인물중에 가장 존경하는 분 있으십니까? 많은 분들중에서도 저는 퇴계 이황선생님을 가장 존경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학,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식견을 갖추신 분이시지만 제가 특히 좋아하는 연유는 선생께서 "등산"을 매우 좋아하셨기 때문입니다 퇴계선생님에 대해선 아시는 분들이 매우 많으실것같아 이런 글을 쓰기가 좀 그렇습니다만 한때 퇴계 선생님을 너무 좋아해서 그분의 향기를 느끼러 이곳 저곳 많이 다니다 나름대로는 매우 인상 깊었던 그 분의 새로운 면모를 깊이 느꼈기에 몇자 적습니다. 어려서부터 가냘픈 몸매에 허약했던 선생은 집안 살림살이까지 어려워 영양상태가 매우 안좋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도 주야를 가리지 않고 독학에 열중하여 더욱 허약해졌는데도 그 어려움을 이기고 일찍이 모든 과거시험에 장원급제를 하지요? 우리나라 역사 속 인물 중에 높은 관직을 고사하시고 사표를 가장 많이 제출하신 분이 바로 퇴계 이황 선생님이시랍니다. 총 오십여회라나...칠십회라나ㅎㅎ 王들이 제발 관직을 맡아 달라고 애원을 하였으니 선생님의 위상을 짐작 하실만 하지요? 영의정등 높은 관직을 사양하신 이유 중에는 치졸한 당파싸움하는 꼴을 직접 대하기도 싫었겠지만 핑개인지는 모르지만 건강이 시원치않아 사양한 경우가 많았답니다 그래서 관직에서 물러나 나이 들어서는 건강을 무지하게 챙기셨는데 주로 안동과 봉화사이의 청량산을 비롯해 소백산, 태백산, 월악산, 주흘산등, 많은 산에 등산을 함으로서 건강을 챙기시고 특히 청량산엔 "청량정사"에 기거하시며 많은 저서를 남기셨습니다 뭇 강호의 유생들은 퇴계선생님을 만나려면 청량산이나 소백산을 올라야 했으니 등산 못하는 강호의 유생들은 퇴계선생님을 만나 뵙기도 힘들었답니다 퇴계선생님의 등산에 관한 유명한 명언이 있죠? "讀書는 유산(遊山)이다" 퇴계선생님은 산을 오른다는 표현인 '登山'이라 하지 않고 "유산(遊山)"이라 하였습니다. 즉, 登山은 산을 오른다는 의미 밖에 없지요? 힘들게 산을 오르는것만이 아니라 산을 오르면 내려 가기도 해야하고, 또한 산행 도중 식사도 하고 계곡에 발도 담그며 경치를 즐겁게 즐기며 산행도 해야겠죠? 퇴계선생님은 이미 산행의 진정한 의미를 아시고 登山이라 하지 않고 유산(遊山)이라 했답니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앞으로 登山이라 하지 마시고 遊山이라고 하실거죠? 讀書에 대해선 더 설명할 필요 없겠지요? "책 속에 삶의 지혜와 지식이 모두 들어 있으니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내 곁에 올 생각말아라!" 선생은 讀書많큼 즐겁고 중요한 일이 없다고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책 속에 인생사 모든 섭리가 있고, 책 속에 자연의 천라만상의 이치가 들어 있으니, 책 읽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라 아니할수 없다" 遊山과 讀書를 동격으로, 讀書많큼 즐겁고 의미있는 인생사가 "遊山"이었던게죠 [계단] "讀書는 유산(遊山)이다"라는 말씀을 하신 글의 오리지날 원문을 직접 올려드리겠습니다 讀書如遊山 讀書人說遊山似 사람들은 글읽기가 산을 유람하는 것과 같다더니 今見遊山似讀書 이제 보니 산을 유람하는 것이 책 읽는 것과 같구나 工力盡時元自下 공력을 다하면 스스로 내려오는 법 淺深得處摠由渠 얕고 깊음을 아는 것 모두가 자기에게 달려있네 坐看雲起因知妙 조용히 앉아 일어나는 구름을 보고 오묘함을 알고 行到源頭始覺初 발길이 근원에 이르러 비로소 시초를 깨닫네 - 퇴계 이황 선생님이 쓰신 "讀書如遊山"에서 [계단] 사계절이 뚜렸한 우리나라는 계절따라 금수강산이 화려한 변모를 합니다. 여러분 어느 산이던 산으로 아주 자주 "遊山" 떠나지 않을래요? 퇴계선생님은 어려서부터 허약하였지만 遊山으로 칠순까지 건강하게 사셨습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장수이지요 확실히 뭘 아시는 분들은 遊山을 한다니까요~ 퇴계선생의 遊山계보는 미수 허목선생, 번암 채재공선생, 다산 정약용선생등으로 이어집니다 모두 산을 좋아하셔서 산행기를 많이 남기신 분들입니다 [계단 쉼터] 단양 丹陽은 鍊丹調陽에서 온 말로서 '연단鍊丹'은 神仙이 먹는 환약을 뜻하고, '조양調陽'은 빛이 골고루 따뜻하게 비춘다는 의미로 神仙이 다스리는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뜻이랍니다 우리나라 각 고을이 어느 한곳 나름대로 특징없는 곳이 어디있겠습니까만, 단양 丹陽은 특히 충주호로 수몰되어 사라진 고을이며, 현재의 고을은 새로이 계획적으로 이전하여 만들어진 고을이라 어쩌면 新都市라고 해야 할듯합니다 [계단] '어의곡리'에서 오르는 코스엔 계단이 의외로 많고 길었습니다. 하지만 예상외로 계단만 오르면 거의 정상부에 가까이 가는 것이니 힘든 구간은 계단 오르는 일이라 할수도 있겠습니다 [소백산 능선] '등산'이 아니고 '계단 오르기'를 하고나면 바로 소백산 능선이 펼쳐집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면 않됩니다. 여기서도 엄청 가야합니다. 여기까지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렸고, 식사시간 포함해서 앞으로도 1시간 정도 더 갑니다 [소백산 능선] 소백산 비로봉으로 가는 능선은 완만한 경사로 심하게 헐떡거리지는 않습니다 구경거리 없는 지루한 산길을 따라 갑니다 [국망봉 國亡峯] 지루한 능선길을 벗어나 시야가 트일쯤에 웅장한 산줄기가 장엄하게 다가 옵니다 바로 "白頭大幹"입니다. 여암 신경준선생이 만든 "산경표"에 우리나라 골간을 이루는 핵심이 "白頭大幹"이라고 새로운 圖式으로 표기해 놨습니다. 요즘 국토지리원에서 펴낸 지도에는 "太白山脈"과 "小白山脈"으로 표기되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왼쪽 봉우리가 "국망봉 國亡峯"입니다. [소백산 정상부 이정표] 소백산은 한반도의 중심에 우뚝솟아 백두대간의 장대함과 신비로움을 간직한 민족의 명산입니다 형제봉을 시작으로 신선봉, 국망봉, 비로봉, 연화봉 등 명봉들이 웅장함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충북에서는 1970년 속리산, 1984년 월악산에 이어 1987년 세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입니다. 소백산의 사계는 봄에는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의 야생화, 만산홍엽의 가을단풍과 백색 설화가 만개한 정상 풍경은 겨울 산행의 극치를 이루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또한 1,439m 비로봉 정상의 넓은 초지가 사시사철 장관을 이루어 한국의 알프스를 연상케 하며 1,349m 연화봉에 자리한 국립천문대는 우리나라 천문공학의 요람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5월말에서 6월 초면 소백산과 단양군 일원에서 전국적인 축제인 철쭉향기 그윽한 "소백산 철쭉제"가 성대히 개최되고 있습니다 [소백산 정상부로 오르는 길] 이름만 듣고 "소백산"을 찾는 산객들이 타고온 관광버스가 죽령 옛길을 가득 메우지만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는 "소백산" 산행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전형적으로 늙은 肉山이어서 생동감이 없이 펑퍼짐한 山勢가 夕陽 속으로 떠나가는 나그네같은 느낌을 주어 왠지 쓸쓸해 보여서입니다. [소백산 정상부] 소백산 비로봉 근처 정상부에 올랐습니다. 광활한 평전이 펼쳐집니다. 오로지 평전만..... [소백산 정상으로 가는 길] 우리 민족의 靈山은 白頭山입니다. 글자 그대로 머리가 하얀 산이라는 뜻인데 산정상부에는 나무가 없어 대머리같은 산이라는거죠?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白頭大幹은 太白山을 지나 이곳 小白山으로 옵니다 그리고 흘러 흘러 智異山으로 갑니다. 그래서 '지혜가 남다르게 뛰어나다'고 智異山이라 했는데, 智異山을 얼마 전까지 頭流山이라고 했지요 白'頭'가 흘러 와 생긴 산이라고 '頭'流山이라고 한것입니다 곧 白頭大幹의 시작과 끝을 의미하다고 볼수 있습니다 [소백산 정상으로 가는 길] 백두산이 머리가 허옇다고 白頭山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쓴 이유는 小白山의 산마루가 나무 한포기 찾아 보기 힘든 민둥산이된 믿거나 말거나하는 전설이 있어 이해를 돕기 위해 白頭山-太白山-小白山-頭流山(智異山) 이야기를 한것입니다 "小白山" 정상부는 왜 민둥산일까? [소백산 산봉우리들] 천년 사직을 말아 먹고, 금은보화를 실은 우마차가 십리를 이루며,竹嶺을 넘어, 王建이 새로 세운 高麗의 首都 개성으로 항복하러 가는 新羅의 마지막 王 - 경순왕 현명한 王인지, 비굴한 王인지, 王建의 딸 낙랑공주를 마눌로 얻고 新羅를 넘겨 주지요 [국망봉과 백두대간] 앞에 보이는 국망봉은 한자로 國亡峯이라고 씁니다 新羅의 마지막 王 - 경순왕이 현명하던 비굴하던 王建이 새로 세운 高麗에 항복을 합니다. 얻은 것은 목숨을 부지하고, 王建의 딸 낙랑공주를 마눌로 얻은 것이지요 경순왕으로부터 세자 책봉을 받은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高麗에 항복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라를 왕건의 고려로부터 회복하려다 실패하자, 엄동설한에 베옷 한벌만 걸치고 亡國의 恨을 달래며 금강산으로 들어 들어갔습니다. 거지가 되어 삼베 옷을 걸쳤을 수도 있겠지만, 고려 군사들에게 체포될까봐 변장하기 위해 麻依를 입었다고 보는게 더 합당하겠습니다. 이 세자의 이름은 옛 프로레스링 선수 김일선수와 같은 "金一"이며, "마의태자"는 '삼베옷을 입은 태자'라고 붙여진 닉네임이지요. 麻依太子 그후 마의태자는 이곳 小白山 국망봉에 올라서 갈수없는 멀리 옛 신라의 도읍 서라벌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합니다 그래서 저 앞에 보이는 산봉우리의 이름이 國亡峯이 되었다는데 麻依太子가 너무나도 슬피울어 뜨거운 눈물에 나무가 다 말라 죽어서 국망봉을 비롯한 소백산에는 나무가 자라지 아니하고 억새와 에델바이스등 목초만이 무성할 뿐이라고 옛부터 슬픈 내력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소백산 정상 - 비로봉] 白頭山이 머리가 벗겨져 붙여졌다면 小白山도 白頭山의 아우이거나 새끼인가 봅니다. 정상부에는 나무 찾아 보기 힘든 광활한 평전이 펼쳐지는데 보는 사람들에 따라 느껴지는 감상은 다르겠습니다. 저는 麻依太子의 전설 때문이 아니라도 왠지 아름답다기 보다는 황량해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小白山을 夕陽 속으로 떠나는 나그네 같은 느낌이 든다고 서두에서 말했습니다 [비로봉] 소백산 '비로봉' 정상에 왔습니다. 정말 구경거리 없는 산행길이었습니다 이 봉우리만 넘으면 바로 내려 가야합니다. 하지만 저의 산행기가 아직 소백산을 찾아 보지 못한 많은 분들에게 참고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오고 싶으세요? ㅎㅎ [비로봉 정상] 비로봉 정상에는 제법 넓은 공터가 있고, 공터 밖으로는 나가지 말라고 울타리를 쳐 놨습니다 보시는바와 같이 돌무덤과 정상석이 서있습니다. 小白山의 여러 봉우리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온 것입니다 [비로봉 정상석] 비로봉은 한자로 毘盧峯이라고 씁니다 옥편을 찾아 보면 毘 도울 비,盧 성 로(노)/목로 로(노), 峯 봉우리 봉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毘盧峯'을 한문의 뜻을 찾아 접근하려고하면 무슨 말인지 알수없습니다 왜냐하면 毘盧는 제가 저의 산행기에서 자주 언급하는 "뜻글자"가 아니라 "소리글자"인데 외국어를 한자로 音譯한것이기 때문입니다. 毘盧비로자나 毘盧蔗那를 줄인 말인데 인도의 옛글자인 '산스크리트語'로서 Vairocana를 中國語로 音譯한 것입니다. 毘盧蔗那의 중국 발음으로는 Vairocana에 가까운데, 우리나라에선 단순히 中國語로 音譯한 毘盧蔗那를 우리말로 그대로 音譯하여 '비로자나'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로자나'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산스크리트語' Vairocana의 뜻을 알면 됩니다 Vairocana는 "태양"이라는 뜻이며, 佛經에서는 '두루 빛을 비추는 자'라는 뜻입니다. 불교 종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불교에서 최고의 부처로 "비로자나佛"을 꼽습니다. '아미타佛' '관세음佛' '약사여래佛'등과 함께 종파에 따라 최고로 모시는 부처라는 말입니다. 毘盧峯은 이런 배경을 가진 최고의 봉우리라는 의미로 붙여진듯합니다. 아시다시피 금강산의 최고봉도 毘盧峯입니다. 소백산의 비로봉과 같은 한자입니다. 참고로 치악산의 "비로봉"은 한자가 "飛盧峯"입니다. [비로봉 정상석과 이정표] "毘盧峯" 정상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이어서 정상석이 두개있습니다 충북과 경북에서 각각 세워놨으니 한 걸음으로 兩道를 왕복 할수 있습니다 [비로봉 정상에서 바라 보는 "국망봉"] 麻依太子가 너무나도 슬피울어 뜨거운 눈물에 나무가 다 말라 죽어 저렇게 황량한 모습을 하고 있는 듯 합니다. 저 "國亡峯" 넘어 "고치령"이 있는데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객들이 그곳에서 竹嶺까지 區間으로 끊어 종주를 하루에 하지요. "고치령"은 "단종복위운동"을 한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금성대군"의 밀사들이 오르내린 숨은 역사가 있는 곳이기도합니다. 이 복위운동이 수양대군에게 발각되어 금성대군 뿐만이 아니라 이 일대의 백성들까지 초죽음을 당해 영주가 피바다를 이루었답니다. 또한 "고치령"은 "태백산"과 "소백산"을 분리시켜 경계를 이루는 곳이기도 하지요. [비로봉 정상에서 바라 보는 백두대간 "연화봉"] 白頭大幹이 장엄하게 뻗어있습니다. 제1연화봉, 연화봉, 제2연화봉(천문대)이 순서대로 누워있습니다. 저 산줄기를 따라 가면 竹嶺이 나옵니다. [비로봉 정상에서 바라 보는 백두대간 "죽령"방향] 소백산 죽령에 얽힌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퇴계 이황선생님과 쌍벽을 이룬 성리학의 대가 "주세붕선생"이 형조참판을 거쳐 호조참판으로 73세 되는 해에 드디어 병을 핑계로 은퇴 낙향하는 "이현보선생"과 죽령에서 조우하며 읊은 詩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현보선생이 먼저 환영 나온 주세붕선생에게 한수 날립니다 草草行裝白首郞(초초행장백수랑) 秋風匹馬嶺途長(추풍필마령도장) 莫言林下稀相見(막언림하희상견) 落葉歸根自是裳(낙엽귀근자족상) 초라한 행장에 흰 머리카락 휘날리는 사내가 가을바람 부는데 한 필의 말로 멀리 고개를 넘어 수풀 아래에서 서로가 드물게 만난 것에 대해 말하지 말라. 우리 인간들이 낙엽과 뿌리로 돌아가는 것은 스스로 늘 그러한 것이니라. -이현보- 주세붕선생이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飄飄歸興 ?漁郞(표표귀흥진어랑) 直沂驪江玉帶長(직기려강옥대장) 今日竹領回首意(금일죽령회수의) 乾坤萬古是綱常(건곤만고시강상) 깃발을 나부끼면서 흥겨운 마음으로 돌아온 사내는 여강을 거슬러 긴 옥대를 찬 채 줏대 있게 똑바로 온 것이오. 오늘날 죽령으로 머리를 되돌린 것은 하늘과 땅, 그리고 옛날과 고금에서 늘 이렇게 변함없는 진리일 뿐이오. -주세붕- [비로봉 정상에서 바라 보는 지나온 "어의곡 등산로"] 지나온 '어의곡' 등산로가 서부영화 "O.K목장의 결투"의 O.K목장 같습니다 [비로봉 정상에서 바라 보는 "영주시 순흥면"] 이제 내려 가야할 영주시 순흥면 삼가리가 펼쳐집니다. 뭉게 구름이 피어 오르는 광경이 여름 날씨 같습니다 오르면 또 내려 가는것. 이제부터 하산합니다. [비로봉 정상에서 바라 보는 하산길과 영주시 순흥면] 경북 영양 출신인 청록파 시인 "조지훈"선생은 처가가 이곳 영주여서 이곳에서 쓴 시가 있는데 제가 아주 좋아하는 詩입니다. 別離 조지훈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 나즉히 흰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 말 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뫼아리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連峰)을 바라보나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자주 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 방울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鴛鴦枕)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 가지 꺾어서 채찍 삼고 가옵신 님아…… 조지훈선생은 "향수"라는 詩를 쓴 "정지용선생님"이 등단시켰습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구요? ㅎㅎ "정지용선생님"이 저의 휘문고등학교 출신 선배이기도 하며, 또한 영어교사로도 재직하셔서 쪼끔 자랑겸 ...ㅎㅎ 4자 기수 선배님들은 '정지용선생님'에게서 수업 받던 시절을 잘 기억하시고 계셨는데 무척 엄하셨다고 하더군요. [하산하며 뒤 돌아 본 "비로봉"] 구경거리는 없고.... 국립공원 소백산엔 인공시설물만이 정상을 쳐받히고있고.... 그래서 "퇴계선생을 사랑한 여인 - 杜香"에 대해 얘기하며 산행기를 마치렵니다. 퇴계선생은 우리에게 근엄하고 학식이 풍부한 관료로 각인되 왔습니다. 그래서 퇴계선생의 "러브 스토리"를 아시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퇴계선생을 퇴계선생이 죽을 때까지 사랑한 여인 - "두향" 죽을 때까지 "두향"을 그리워했던 퇴계 이황선생 로미오와 주리엣의 러브 스토리보다 더 찐한 감동을 주는 "두향 아씨"와 "퇴계선생"의 러브 스토리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로서 정비석선생이 쓴 "名妓列傳" "杜香편"에 나와있는 글을 요약하고 나름대로 쬐끔 해석을 덧붙여 전해 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주머니 속에 들어 오면 우리를 행복하게하고, 나가면 슬프게 하는게 있지요. 바로 "돈"입니다. 요즘 새로나온 만원짜리에는 '세종대왕'이 그려져 있지만, 舊券에는 퇴계 이황선생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그 둘레에 스무 송이의 매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매화를 관심있게 보신 분은 아마 없으실겁니다. 우리가 수없이 만지고 본 그 "돈"에 매화가 그려진 사연이......."두향 아씨"와 관계가 있다면 우리는 그동안 "두향아씨"를 수없이 이미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산길] 조선조 중종 년 간에 단양에는 이름난 기생 '두향'이 있었답니다. 다섯 살 되면서 그 아비를 잃고, 열 살 되던 해에 그 어미마저 사별하자 그녀의 빼어난 자태를 아까워한 한 퇴기(退妓)에 의하여 길러지면서 기적에 오르게 됩니다. 몸매도 아름다웠거니와 거문고에 능하였으며 시문에도 능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특히 난(蘭)과 분매(盆梅-화분에 매화를 기름) 솜씨가 있었다고합니다 두향의 어미는 죽기 전에 화분 속에 매화 한 그루를 잘 길러 냈는데, 매년마다 그 분매에서 꽃이 피고 있었답니다. 두향은 그 어미가 죽자 기적에 오를 때까지 고이 잘 길러 냈다고합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매화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고하네요. 전신응시명월(前身應是明月) 기생수도매화(幾生修到梅花)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이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하산길] 운명이 운명 다울려면 모티베이션이 있어야지요 때마침 듣자하니 단양의 제 15대 군수로 퇴계 이황선생이 부임한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이때 이미 단양의 官妓가 되 있었던 두향은 퇴계라는 신임 군수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여 수소문하여 보았습니다. 약삭 빠르다고 해야겠죠? 그리곤 퇴계선생이 매화를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퇴계선생이 매화에 대해 쓴 詩는 118편이나 있는데 최초로 매화에 관헤 쓴 詩를 입수하여 음미해 봅니다 一樹庭梅雪滿枝(일수정매설만지) - 뜰앞에 매화나무 가지 가득 눈꽃 피니, 風塵湖海夢差池(풍진호해몽차지) - 풍진의 세상살이 꿈마저 어지럽네. 玉堂坐對春宵月(옥당좌대춘소월) - 옥당에 홀로 앉아 봄밤의 달을 보며, 鴻雁聲中有所思(홍안성중유소사) - 기러기 슬피 울 제 생각마다 산란하네 두향은 이 詩가 퇴계선생이 매화를 두고 읊은 詩이기는 하나 나라의 어지러움을 개탄하는 우국지정이 어린 詩임을 느낌니다. 비록 조정의 벼슬자리에 앉아 있으나, 바다같이 넓은 세상일이 좁은 연못 속에 뒤 엉겨 있는 듯, 어지럽고 산란함을 매화나무에 빗대어 읊은 시를 두고 두고 음미하였습니다 두향은 어느 사이 퇴계선생의 매화 시를 외우고 있었습니다. [하산하며 뒤 돌아 본 "비로봉"] 퇴계선생은 48세 되던 무신년(1542년) 정월에 단양군수로 부임하게됩니다. 운명적 만남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당시 두향은 단양의 官妓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官妓로서 두향은 신임 군수 퇴계 이황을 가까이 모시게 됩니다. 두향은 사별하던 어미로부터 물려받아 그동안 애지중지 기르던 매화를 퇴계의 처소에 옮겨놓았습니다. 제가 생각 할때는 두향이가 약삭 빠른 잔머리를 돌린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때마침 퇴계가 단양으로 부임하던 시기는 이른봄이라 화분 속의 매화도 곱게 피어 은은한 향기를 내 뿜고 있었습니다.처소에 든 퇴계선생은 환하게 피어난 매화를 보고 반기는 듯 하였으나, 이내 곧 매화 분을 가져온 사람에게 돌려 줄 것을 명하였습니다. 이에대해 두향은 매화분에 관한 자초지종을 아뢰고, 6년전의 퇴계선생이 읊은 매화 시를 외우면서, 매화는 고상하고 아담하여 속기(俗氣)가 없고, 추운 때에 더욱 아름다우며, 호젓한 향기가 뛰어나고, 격조가 높으며, 운치가 남다르며, 뼈대는 말랐지만 정신이 맑고, 찬바람과 눈보라에 시달리면서도, 곧은 마음을 고치지 않기 때문에 이 매화꽃과 함께 심신의 안정을 되찾고, 선생께서 단양 고을을 잘 다스려 줄 것을 아뢰었습니다. 이 정도면 천하의 퇴계선생이라도 홀리지 않을수 없겠지요? 미모까지 갖추었으니.... [하산길] 퇴계가 두향의 말을 듣고 생각을 해보니, 두향의 속마음이 진실 된 듯 한데, 고을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기위해 왔는데, 스스로가 백성으로부터 재물이나, 금전을 뇌물로 받는 것은 자기 스스로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무 한 그루 처소에 가져온 것을 차마 물리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그랬는지 두향레게 마음이 동해서 그랬는지는 현재로선 알수 없습니다. ㅎㅎ 왜냐하면 이 때에 퇴계선생은 첫 부인과 재취부인마저 사별하고, 아들도 이미 한 명이 유명을 달리한 때라, 인생의 깊은 고뇌와 함께 심신은 많이 쇠약하여 있었기때문입니다. 무척 외로웠던 퇴계선생. 그도 퇴계선생 이전에 男子이었기에..이겻이 중요하지요? ㅎㅎ ㅎㅎ이 때부터 두 사람은 시화(詩話)와 음률을 논하고, 지금의 단양팔경과 강선대를 거닐며 인생을 즐기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산길] 하지만 달콤한 사랑 뒤에는 반드시 애달픈 이별이 있는 법이지요 퇴계선생이 단양 군수로 부임한지 10개월만에 단양 땅을 떠나야만 할 일이 생깁니다. 그 해 10월에 퇴계선생의 친형인 '대헌공'이 직속상관인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해 옵니다. 형과 아우가 직속상하관계로 있으면 나라 일에 공평을 기 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세인들로부터 오해를 받게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퇴계는 그 날로 사표를 제출합니다, 청렴 결백한 그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의 성품을 알아차린 조정에서는 그를 충청도가 아닌 경상도 풍기 군수로 임명하게됩니다. 이렇게 되어 퇴계선생과 두향은 애달픈 이별을 하게 되는거지요. 삼류 소설같다구요? ㅎㅎ 인간지사가 모두 그렇고 그런거 아닙니까? 퇴계선생은 단양을 떠나 풍기 군수로 옮겨가면서 두향으로부터 받은 靑梅 한 그루도 함께 가져가서 고향인 안동의 도산서원에 심었다고 합니다 한편 퇴계선생이 떠난 후 두향은 부유함과 호사스러움을 앞 새우는 시중잡배들과 어울리는 것이 단 10개월 동안이나마 모시던 그 어른의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하고 아예 기생에서 물러 날 것을 결심하고 새로 부임한 사또에게 그 사연을 말하고 허락을 요청하였습니다. 신임 사또의 허락을 받아 기생에서 면천되어 물러난 두향은 오로지 퇴계만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면서 함께 노닐던 강변을 혼자서 거닐기도 하고, 수많은 사연들을 추억하면서 외롭게 살아갔습니다 [하산길] 헤어진지 어언 4년이 되는 어느 봄날에 문안 여쭈러 보낸 인편에 퇴계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두향에게 보내주었습니다. 黃卷中間對聖賢(황군중간대성현) - 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 -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속식) -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막햑요금탄절현) -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을 말라 이 시문의 끝 구절에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 마라"는 분명히 두향의 마음을 위로하는 내용임이 분명합니다 [小白山 毘爐寺] 그 후 20여년이 흘러 갔습니다. 1570년 어느 겨울날 퇴계선생은 방안의 梅花을 가리키며 "매형(梅兄)에게 물 잘 주라"는 말을 남기고 임종하였습니다. 퇴계선생은 죽을 때까지 梅花,, 즉 두향을 그리워하며 잘 챙겨 달라고 부탁하며 갔습니다 두향은 퇴계선생의 부음을 예측하고 사흘을 걸어서 찾아갔지만 신분이 기생이라 드러내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세 번 절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는 신변을 정리하고 시신은 강선대 아래 묻어달라는 마지막 유언과 함께 거문고 부여잡고 초혼가를 부르면서 부자탕을 마시고 세상을 하직합니다 두향杜香의 묘는 단양팔경 중 백미라 할 수 있는 '구담봉, 옥순봉' 근처 충주호 위에 떠있는 말목산 자락에서 퇴계선생과 노닐던 '강선대'가 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현재 그녀의 墓에는 다음과 같은 詩碑가 있는데 조선 숙종때의 월암(月巖) 이광려(李匡呂)의 작품이라합니다 孤墳臨官道(고분임관도) - 외로운 무덤 하나 국도변에 있는데, 頹沙暎紅 (퇴사영홍악) - 거치른 모래 밭엔 꽃도 볽게 피었네. 杜香名盡時(두향명진시) - 두향의 이름이 사라질 때면, 仙臺石應落(선대석응낙) - 강선대 바윗돌도 사라지리라 [휴식] [뒷풀이] 이번 산행에는 집행부에서 특별히 간편 부폐를 차려 교우들을 즐겁게했습니다 이곳에는 마땅한 음식점이 없어 이렇게 상을 차렸답니다. [뒷풀이] 앞으로도 가능하면 이렇게 해주면 교우들이 더 좋아 할텐데...ㅎㅎ 經師易遇 경사이우 人師難逢 인사난봉 "글 가르치는 스승은 만나기 쉬워도, 사람 만드는 인격이 높은 어진 스승은 만나기 어렵다" 퇴계선생을 생각하며...............소백산 산행을 마침니다 [산행개념도]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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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峰山 女性峰에서 晶巖교수님과 함께

 

 

 

 

 





 
             道峰山 山行記  
        정의공주묘-燕山君墓-
        우의동-圓通寺-牛耳巖-칼바위-五峰-女性峰-송추 
     
     [수유역 3번 출구]
     대전 충남대 의대 晶巖교수님이 도봉산 산행을 제안하시고 어려운 발걸음을 서울로 옮겼습니다
     고속버스를 타고 또 지하철을 두번씩 환승하며 지하철 4호선 수유역에 오셨습니다
     지난 3월15일 계룡산 산행을 주관하여주시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서울의 진산 중에 하나인 "道峰山"에서 그날의 감흥을 한번더 함께 하시자고
     대전에서 서울로 오신것이었습니다
     특히, 雲山 김택근 詩人님이 가까우신 분과 함께 "도봉산 산행"에 함께하시며 
     대전에서 오신 晶巖교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산행 지도]
     
     [정의공주 묘]
     수유역에서 [130번 시내버스]를 타고 방학동에 있는 "燕山君 墓"를 먼저 찾아 갔습니다
     "燕山君 墓" 들어 가는 길가에는 "정의공주 墓"가 먼저 보였습니다
     정의공주는 세종대왕의 둘째 딸이며, 매우 똑똑한 여자였습니다.
     "정의공주 묘"에는 남편인 良孝 安孟聃 양효 안맹담의 묘가 함께 있습니다
         
          [良孝 安公 神道碑]
          良孝 安孟聃은 세종대왕의 사위이니 출중한 인물임에는 틀림없겠습니다
          초서를 잘 써 서예가로도 이름이 높았고 활도 잘쏘고 음악,의학등 다방면에 능통했다고 합니다
          하기사 그 정도 수준이 되니 왕의 사위가 되었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 양반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는데 바로 酒님을 무지 좋아했다고합니다
          지나치게 술을 좋아한 안맹담.
          그래서 세종대왕이 '안맹담'과 함께 술 마시는 사람들은 모두 혼줄을 냈다고 할 정도였다네요
          그리고 처남이 되는 '수양대군'에 빌붙어 수양대군의 형인 "문종"의 아들인 "단종"을 죽이고,
          즉 조카를 삼촌이 죽이고 권력을 찬탈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는 사건에 적극 가담하여 
          일등공신이 되기도 했으니, 처세술(?)도 있는 기회주의자로 볼수도 있겠습니다
     
     [정의공주 묘]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한글을 만든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지시해서 '집현전'에서 만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반대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집현전 학자들은 맹렬한 반대를 하였습니다
     小國인 朝鮮이 자기 글을 만들어 가지면 大國인 中國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므로 한글 창제를
     극렬히 반대한것입니다. 세종대왕은 반대를 하는 집현전 학자들을 감옥에 까지 보내며 반대 하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 직접 철저한 비공개로 만들었습니다. 이때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도운 사람은
     세종대왕의 첫째 아들인 "문종"과 둘째 아들 "수양대군", 그리고 둘째 딸 "정의공주"였습니다
     '정의공주'는 한글 창제의 한 주역이었으니 어찌 쉽게 잊고 살수있겠습니까?
     이곳 근처 창동에 "정의여자고등학교"가 있는데 혹시 "정의공주"와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연산군 묘]
     지금까지 일반인들에겐 아득한 옛날의 전설처럼 되 버린 暴君 燕山君이 우리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고 은폐하고 있었던 "燕山君 墓"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暴君이던 聖君이던 우리의 역사 속에 있었던 王이었기에
     이번 기회에 "燕山君 墓"를 찾아 보려고 나선것입니다
     정암교수님도 흔쾌히 수락하시며 좋아하셨습니다
     
     [연산군 묘]
     '연산군 묘'는 '정의공주 묘' 바로 앞으로 난 골목으로 조금 들어 가면 나옵니다
      아파트 단지 한켠에 이런 王陵이 있다는 것도 놀랍고, 
      이때까지 이곳에 "연산군 묘"가 있다는 사실을 제가 모르고 있었던 것도 놀랍습니다
      "연산군 묘"를 관람하는데  입장료는 없으며, 다만 방명록을 작성하면 되더군요.
     
     [연산군 묘]
     "연산군 묘"는 현재 봉분에 잔디를 입히고, 보수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앞에 있었던 "정의공주 묘"와는 무척 대조적이었습니다
     비록 폐출된 王이지만 죽어서까지 어찌 공주보다 못한 대우를 받을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도 "연산군 묘"는 방치되 왔었다는 증거이기도합니다
     王陵이라고도 못하고 오로지 라고 해야하는 기구한 운명을 자초한 燕山君
     "燕山君 墓"는 맨 위 좌측 봉분이며, 
     그 우측 옆에는 燕山君의 부인인 廢妃 "거창愼氏"의 묘가 있습니다
     
     [연산군 묘]
     朝鮮王朝 최초의 폐왕(廢王)인 燕山君은 王 대신에 王子君의 예우로 조성되었기에 
     곡장(曲墻)과 상석(上石),장명등(長明燈),망주석(望柱石),문인석(文人石)만으로 
     조촐하게 만들어져있다고 합니다.
     왼쪽이 '연산군 묘' , 오른 쪽은 부인 '거창신씨 묘'
     
     [연산군 묘]
     연산군의 부인인 '거창愼氏'는 아무리 어렵고 고달퍼도 지아비를 끝까지 섬기는 
     조강지처[糟糠之妻]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장녹수"라는 창녀같은 여자의 치맛폭에서 온갖 쌕스로 노닥거리며 국정을 문란케하였는데도
     투기하지 아니하고 왕비로서 체통을 지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왕(廢王)이 된 暴君인 燕山君을 끝까지 모시고  살았으며, 
     燕山君이 죽고 난 다음, 燕山君은 유배지 강화도 교동(喬桐)에 비참하게 쓸쓸히 뭍혔는데 
     폐비가 된 거창愼氏부인이 중종에게 최소한의 예를 갖추어 달라고 하소연하여 
     묘를 이장하고 '王子의 묘'에 해당하는 수준까지 '墓'를 만들수 있게 되었다고합니다
          
          [연산군 묘비]
          "연산군 묘"에서 가장 처절한것은 碑石입니다.
          폐위된 王이었기에 봉분 앞의 비석 전면에는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고만 
          쓰여있는데, 이 碑名을 보면 애처롭게 까지 느껴집니다. 
          에구~ 살아서 잘하지....
     
     [연산군 묘]
     '연산군 묘'의 뒷쪽에 가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방학동 아파트 단지 바로 옆에 '연산군 묘'는 쓸쓸히 역사를 멀리하고 있습니다
     묘한 느낌이 스치고 지나 갑니다.
     
     [방학동 은행나무]
     燕山君 墓에서 바라보면 아파트 앞으로 거대한 나무가 한그루 서있습니다
     이 은행나무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수령을 자랑하는 860살 되는 나무랍니다
     
     [방학동 은행나무]
     
     [방학동 은행나무]
     은행나무 옆에는 공원을 만들어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군요.
     
     [방학동 은행나무]
     은행나무 뒤로 三角山이 "三角"임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망경대, 백운대, 인수봉.
     
     [우이동 버스 종점]
     '연산군 묘'에서 우이동 산행 들머리까지는 버스로 한 정거장입니다
     그러나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함으로 걸어서 우이동 산행 들머리까지 오기엔 조금 멀어
     다시 버스를 타고 우이동 정거장으로 왔습니다
     오늘 올라야 하는 "牛耳巖"이 보입니다
     여기서 우이암까지는 약 2.5km정도이니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닙니다
  
     [우이암 이정표]
  
     [우이암 등산로]
     처음에는 완만한 경사로 워밍업을 하며 오릅니다
     
     [우이암 등산로]
     중간 중간 몇개의 암벽 오르막을 지나 갑니다
     "牛耳南稜線"을 따라 오르는 것입니다
     
     [방학동 갈림길]
     30분 정도 오르면 "방학동 등산로 갈림길"을 만납니다
                
               [방학동 갈림길 이정표]
               牛耳巖 방향으로 조금 더 올라 갑니다
     
     [圓通寺 갈림길]
     "방학동 갈림길"에서 조금 오르면 牛耳巖, 圓通寺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이 "우이남능선"을 따라 牛耳巖으로 직접 오르는 길이고,
     우측이 圓通寺를 경유하여 牛耳巖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 하루 전날이므로 圓通寺를 구경하고 우이암으로 가려합니다
  
     [圓通寺 가는 길]
     평이한 등로를 따라 조금 갑니다
     
     [牛耳巖]
     초록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신록 사이로 牛耳巖이 보입니다.
     이 지역의 이름을 만든 牛耳巖이 자태를 뽐내기 시작합니다
          
          [圓通寺]
          圓通寺가 城郭처럼 높은 곳에 자리하고 어서 올라 오라고 하는군요
          이 골자기가 "무수골"입니다
          물 좋고 풍광 좋은 이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라고 하여 무수골 無愁골로
          이름 지어졌다는군요
     
     [圓通寺]
     원통사는 예로부터 좌우에 수락산과 삼각산을 거느리고 한강을 바라보는 도봉산의 최고 길지에 
     자리잡은 수행기도처로 알려져 왔다고합니다. 
     조선초기의 무학대사를 비롯해서 근대에는 만공·동산·춘성스님 등 선지식이 
     이곳에 머물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관음기도 도량으로도 유명하다는군요
     
     [圓通寺 앞 샘터]
     원통사 입구에는 샘터가 있으며 '감로수'라고하는데 水量이 풍부했습니다.
     암벽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곳에 풍부한 샘물이 솟아나니, 절터로는 안성맞춤이겠지요
     이곳에는 제가 본것만 두군데 샘물이 솟아났습니다
     물맛도 아주 시원하고 좋았습니다.
     이곳으로 가실 분들은 베낭이 무거우니 물을 조금만 준비하시고 이곳에서 보충하세요
     
     [圓通寺 입구]
     천년사찰인 원통사 입구는 일주문도 없고 범종루가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圓通寺 입구에서 올려다 본 "牛耳巖"]
     원통사 옆에서 뒷쪽의 牛耳巖을 촬영했습니다.
     "소의 귀"를 닮아 "牛耳巖"이라 한다는데 저는 눈씻고 다시 봐도 "쇠귀"모양은 아니었고
     보시는바와 같이 틈실한 男根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男根 모양을 한 바위들이 옆에도 여럿 있습니다
     
     [圓通寺 凡鍾樓]
     신라 경문왕3년(863)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 고려 문종 7년 관월 운개 스님이 중창하였고 
     본전인 관음보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 건물로 불단에는 아미타여래상과 관음보살상, 
     지장보살상이 봉안되어있고 불화는 아미타탱화가 모셔져 있고 
     신중탱화 1점과 소종 1점이 있다고합니다.
     뒤로 '우이암'이 절모한 조화를 이루며 서 있습니다
     
     [圓通寺 안에서 올려다 본 "牛耳巖"]
     원통사는 우이암 바로 아래에 지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奇岩怪石이 병풍을 두른듯 원통사를 감싸안고 있습니다.
     뒤의 바위들은 두꺼비, 학, 독수리, 거북등 108종류의 형상을 갖춘 바위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는데
     속세의 때를 벗지 못한 저는 "108"이라는 번뇌의 숫자와 동물형상과 물고기들의 모양이
     눈에 비쳐지지는 않지만 기암괴석들로 둘러 쌓인 광경은 아름답게 느껴 집니다
     숨은 그림찾기 해도 되겠습니다.
     
     [三聖閣 뒤의 奇岩怪石]
     하늘의 七星과 山의 山神, 홀로 천라만상을 깨우친 獨聖이 있다는 三聖閣.
     불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神들을 절간에 모셔 놓은 것은 
     불교를 믿지않고 오리지날 토속 신앙을 가진 조선사람들 까지 끌어 들이기 위한 것이지요
     결국은 불교도 "돈"을 벌기 위해 고육지책을 쓴 것이라고 할수있습니다
     
     [나한전]
     원통사 좌측 위로 올라 가니 엄청난 바위 밑에 동굴이 있으며
     이 굴에 "나한전"이 있습니다.
     "나한"은 석가의 제자들이죠?
     특히 열여섯 제자를 "나한"이라하고 산스크리트語를 漢譯한것이고,
     다시 그 漢文을 韓譯한것이지요.
     
     [나한전 내부]
     궁금해서 '나한전' 안을 문을 열고 들여다 보았습니다.
     키케한 향냄새와 습기로 숨쉬기도 힘들겠더군요.
     석가 제자들이 고생하고 있습니다
     
     [나한전 옆 "藥師殿"]
     藥師殿은 "약사여래"를 모시는 곳이지요
     세상의 병을 모두 고쳐주는 부처입니다.
     하지만 곳곳에 "약사여래"를 모신 藥師殿이 수없이 있지만 아직도 병은 만연하고 있습니다
     
     [藥師殿 앞 "相公岩"]
     이곳이 어쩌면 원통사의 하일라이트하고 할수 있는 역사적 증거가 있는 곳입니다
     藥師殿 앞에 있는 바위에 "相公岩"이라고  새겨진 글자가 보이시지요?
     이 글자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곳의 석굴에서 기도를 많이 했다고하는데,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마치던 어느날 天上의 相公[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배알하는 꿈을 꾸어
     이곳 藥師殿 앞 바위에 "相公岩"이라는 글씨를 새겼다고 합니다
     한가지 배울 점은 "天上의 相公"이 옥황상제 밑에 있는 높은 벼슬의 정승을 의미한다는것..
     하나 배웠죠? ㅎㅎ
     
     [三聖閣]
     佛敎와는 전혀 무관한 神들을 모시는 三聖閣이 여느 절이나 맨 위에 있습니다
     원통사 삼성각은 주변 기암괴석들로 더욱 신비로워 보입니다.
     하늘의 七星과 山의 山神, 홀로 천라만상을 깨우친 獨聖이 
     곧 뛰어 나올듯합니다
  
     [牛耳巖 오르는 길]
     원통사 바로 뒤로 "牛耳巖" 오르는 등산로가 있더군요
     아주 짧은 거리에 있으므로 쉽게 오를수 있습니다
     
     [自然城門]
     "牛耳巖"으로 오르는 등로에는 대문같은 바위를 통과하여
     신성한 인물들만 오르라고하는듯합니다
     
     [牛耳巖]
     5분도 걸리지 않고 "牛耳巖" 밑으로 왔는데
     "牛耳巖"으로 불리워지는 이 바위는 원래 "관음보살"이 부처님을 향해 기도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원래는 <觀音峯> 으로 불리었다고 합니다
     "개눈엔 똥만 보인다"는데.....제 눈엔 아무리 봐도 "쇠귀"나 '觀音峯' 같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X개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여러분들도 X개 아닙니까? ㅎㅎ
     저걸 보고 어찌 "쇠귀 牛耳, 觀音峯"이라고 할수 있습니까?
     옆에 서릿발 같은 핏줄까지....정말 뭇남성들이 부러워할 거시기 같고
     저걸 보는 여성들이 저걸 보고서도  성적 욕구가 살아 나지 않는 다면 .......
     평범한 인간이 아니겠지요? ㅎㅎ 石女
          
          [牛耳巖]
           우이암은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원통사에서 바라 보는 우의암은 男子 거시기 같지만....
           가까이서 보니 한낱 암벽에 불과하네요
          
           [牛耳巖옆 바위]
           牛耳巖옆에는 조금 작은 거시기들이 몇개 있습니다
           나이에 따라 골라~~ 골라~~ ♪  
     
     [道峰主稜線]
     牛耳巖에서 아주 쬐끔 올라 오면 "우이남능선"과 "道峰主稜線"이 만나는 이정표를 만납니다
     이곳에서 우이동쪽으로는 "우이남능선"이며, '칼바위' '자운봉'까지는 "道峰主稜線"입니다
     백두대간의 한북정맥이 지나가는 마루금이기도 하며, 광주산맥을 이루는 주요 산줄기이기도합니다
     
     [道峰主稜線 이정표]
     이곳에서 '우이남능선'을 타고 바로 하산 할수도 있고, 
     제가 올라 올때처럼 원통사를 들려 우회해서 갈수도 있습니다
     
     [道峰主稜線]
     道峰主稜線은 山勢가 아주 얇은 마루금이 칼처럼 서있는 稜線입니다
     그러므로 기암괴석이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牛耳巖]
     道峰主稜線에 올라와 牛耳巖을 내려다 봅니다.
     이곳에서는 또한 완전히 다른 모양으로 보여집니다.
     마음 속에 품었던 야릇한 욕망이 사라지고 "소의 귀"처럼 보이려합니다.
     에구 남자는 눈에 보이는 외모에 주로 욕망이 왔다 갔다 한다니까요~
     여성이 知德 아무리 높아도 외모에 더...........솔찍히 ㅎㅎ
     다른 분들도 저와 같지요?
     조물주는 절묘하게 인간을 만들어 놨습니다
     
     [道峰主稜線에서 바라 보는 道峰山 정상]
     道峰主稜線에 올라 오니 이제 시야가 확트이고 東西南北이 모두 조망됩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오는 道峰山정상입니다.
     道峰山 정상은 紫雲峰, 萬丈峰, 仙人峰, 주봉, 칼바위로 화려한 자태를 뽐냅니다
     
     [道峰主稜線에서 바라 보는 五峰]
     道峰山의 三大 名所는 [紫雲峰, 萬丈峰, 仙人峰]과 [五峰], [牛耳巖]이라 할수 있습니다
     "五峰"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군요
  
     [通天門]
     道峰主稜線에는 돌문이 하나있습니다.
     사람들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지만 저는 通天門이라고 합니다
     "하늘로 통하는 門"
     어지러워 짜증나는 이 세상을 멀리하고 하늘로 올라 가는 門
     이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을 버리고 평안한 곳으로 가는 門
     그리고 이 門을 통과함으로서 자신의 모든 죄악을 회개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다시 이 세상에 내려 갈수 있는 그런 門이기를 기대하는 門......
     
      [조망대]
     
     [牛耳巖]
     이제는 牛耳巖이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보여집니다.
     
     [기암괴석]
     
     [수락산]
     노원구 뒤로 '수락산'이 보입니다.
     안개가 끼여 사진이 선명하지 못합니다
     
     [불암산]
     '수락산' 옆으로 '불암산'이 보입니다
     
     [三角山]
     北漢山의 本名 찾아주기 운동이 전개 되고 있습니다
     모두 동참하여 앞으로는 北漢山의 本名 인 "三角山"으로 불러 주시기 바람니다
     제가 자주 언급합니다만
     北漢山은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입니다.
     "崇禮門"을 "南大門"이라고 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한강의 북쪽에 있다고 그냥 일반적으로 부르던 北漢山이라는 地名이 어느듯 고유명사화 되었습니다
     제발 "三角山"이라고 불러 주세요~~!! (이덕화)부탁해요~
     
     [道峰主稜線]
 
     燕山君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하고싶습니다
     조카 '단종'을 죽이고, '사육신'을 비롯한 수많은 충신들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한 수양대군 "세조"...
     불행은 여기서 부터 시작되지요
 
     
     [道峰主稜線 전망대에서 바라 보는 五峰]
 
     燕山君을 이야기 하려면  燕山君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燕山君의 아버지는 조선 제9대 왕인 "成宗"입니다.
     成宗은 수양대군 '세조'의 큰 아들 '덕종'의 둘째 아들입니다. 
     그리고 예종의 양자로 들어 가지요
     成宗의 正妃는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恭惠王后)이고, 둘째 妃가 燕山君의 어머니가 되는
     윤기무의 딸인 "폐비 윤씨"입니다. 그러나 燕山君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어머니인줄 알았습니다.
     폐비가 되어 "폐비 윤씨"로 조선왕조실록을 피로 물들게 만듭니다.
     "폐비 윤씨"는 후에 "齊獻王后"로 연산군에 의해 추존됩니다
     "폐비 윤씨"의 본명은 영화 "왕의 남자"에서 "윤소화"라고 하는데.....글쎄요
     우리나라 역사 영화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 "燕山君"
     燕山君을 이야기 하기 전에 "폐비 윤씨"가 된 齊獻王后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에 의해 暴君 "燕山君"이 잉태되니까요
 
     
     [道峰主稜線 전망대에서 바라 보는 道峰- 칼바위, 紫雲峰, 萬丈峰, 仙人峰]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능을 '품을 회(懷)', '돌이킬 회(懷)'를 써서 회릉(懷陵)이라 한 것은 
     그리운 어머니의 포근한 품에 다시 안기고 싶었던 사모곡이었을까? 
     새삼 연산군이 폭군 이전에 시인이었다는 기억을 懷陵회릉에서 곰곰 생각해 볼수있습니다. 
     "폐비 윤씨" 齊獻王后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청량리 지나 경희대가 있는 "회기동"이 생각납니다
     왜냐하면 그곳, 즉 경희대에 "폐비 윤씨" 齊獻王后의 陵이 있었고, 그 릉의 이름이 "懷陵"이었습니다.
     齊獻王后가 '폐비 윤씨"가 되고 릉 이름은 "懷墓"로 바뀝니다.
     그래서 동네 이름이 "懷墓洞 회묘동"이 되었는데 동네이름으로 좋지 않다고 후세 사람들이 "墓묘"를
     비슷한 한자 "基기"로 바꾸어 부르다가 이제는 완전히 한자가 틀리는 "회기동"이 되었답니다
     "폐비 윤씨" 齊獻王后의 墓는 고양시 서삼릉에 이장하여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고 있습니다
 
     
     [五峰-칼바위 갈림길]
     道峰主稜線 길이 갈라지는 곳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五峯으로 바로 갈수 있으며
     직진을 하면 "칼바위"로 갑니다
     우리는 "칼바위"로 갔다가 "五峯"으로 갑니다
     
     [三角山]
 
     "폐비 윤씨" 齊獻王后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민요가수 김영임씨가 부른 "회심곡"이 생각 납니다.
     燕山君의 어머니 "폐비 윤씨" 齊獻王后를 기리며 부르는 노래가 '회심곡懷心曲'입니다.
     는 폐비 윤씨의 무덤 이름이 되는 마음에 품을 회懷, 돌이 킬 회懷입니다.
     恨많은 女人의 상징이라 할 "폐비 윤씨" 齊獻王后, 그리고 회릉(懷陵)
     母子가 모두 廢妃, 廢王이 되고 죽어서도 설움을 받는 비극의 주인공들입니다
 
     
     [三角山]
 
     成宗 성종 -
     수양대군 '세조'의 妃이고 연산군의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와 
     어머니 소현황후(훗날 인수대비)한씨와 구 공신들과의 정치적 야합으로 13살에 탄생된 王이
     조선 9대 왕 成宗(자을산군)입니다.
     막강한 여성파워 앞에 제대로 자기의 정치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조선 최대의 폐륜아 연산군을 만든 불행한 왕입니다.
     물론 역사적 평가는 聖君으로 자리 메김하고 있습니다만....
 
  
     [칼바위 가는 길]
 
     燕山君의 어머니 "폐비 윤씨" 齊獻王后는 "고부간의 갈등"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남편인 성종의 얼굴을 할키고..등등 이유를 대고 있지만 
     사실은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와의 "조선 최대의 고부간의 갈등"으로 희생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폐비 윤씨"의 아들 燕山君에 의해 복수의 피바람이 몰아쳤습니다
 
     
     [도봉주능선에서 바라 보는 "五峰"]
 
     성종이 왕이었을 때를 "女人天下"라고들 하지요
     과부들의 천국이었지요.
     과부들이란 정희대비(세조妃), 인수대비(성종 어머니), 안순대비(예종의 계비) 세 과부를 지칭하는데
     정희대비만 빼고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 제헌왕후'와 이 과부들이 나이가 거의 같았습니다
     성종이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었기 때문에 인수대비는 연산군의 친할머니이면서도 법적으로는 큰할머니이니
     시어머니와 며느리 '폐비 윤씨' 사이의 나이가 8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으며,
     다른 대비들과는 나이가 같거나 오히려 며느리인 '폐비 윤씨'가 시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성종은 어머니 인수대비의 반대를 무릅쓰고, 12살이나 위인 연상의 여인이자 
     집안이 별 볼일 없는 윤씨를 왕비로 책봉했고 그해 연산군이 탄생합니다. 
     정희대비, 인수대비, 안순대비의 세 과부 대비들의 비호 아래 성종의 여성 섭렵은 
     조선조 제왕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화려했습니다. 
     최고로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그러니 일찍 죽지요 ㅎㅎ
     그래서 齊獻王后가 남편인 성종을 위하여 오죽했으면 옥체를 보존하라고 잔소리를 많이하고 
     급기야 부부싸움이 잦아 어느날 우연히도 成宗의 얼굴을 할키기까지 했겠습니까
     이 사건으로 꼬투리가 잡혀 齊獻王后는 廢妃가 되며 "폐비 윤씨"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힘이 되어줄 마땅한 배경이 없는 "齊獻王后 윤씨"는   
     명문가를 등에 업은 과부 여성들과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되었던 것입니다
 
     
     [칼바위와 "쥐바위"]
     "쥐바위"를 자세히 봐 두세요. 아시는 분들이 거의 없습니다.
     앞으로 저 바위 위로 올라 갑니다
     우특이 "칼바위"인데, "한북정맥"이 五峰방향으로 가지 않고 道峰主稜線으로 
     꺽여지는 곳입니다.
 
     (이 당시에 "어우동"이 맹 활약하던 때이지요?
     본래 어우동(어우을동)은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손자며느리입니다. 
     시문에 뛰어 났으나 너무 남자를 밝히는 호색여자로서
     남편에게 소박을 당한 후 당대의 한량들하고 한 세상 풍미하다 사형을 당한 조선의 옹녀이지요)
 
     
     [칼바위와 紫雲峰, 萬丈峰, 仙人峰]
     칼바위와 紫雲峰, 萬丈峰, 仙人峰이 道峰山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름답습니다
     
     [수락산]
 
     이 시대에 대한 이야기들은 수많은 영화로, 또한 드라마로 만들어져 모두다 알고 있는 얘기이리라. 
     성종이 가장 사랑한 여인이 '齊獻王后 폐비 윤씨'였으나 
     자신의 남편에 의해 죽음을 당한 '齊獻王后 폐비 윤씨'는 
     오직 한 남자의 사랑을 갈구했던 불행한 여인이었을 뿐입니다.
     12살이나 어린 아들같은 成宗을 사랑한 女人이었을 뿐입니다 
     성종이 소년 시절 12살이나 연상이었던 윤씨를 왕비로 책봉할 만큼 사랑한 것은 무엇일까? 
     소년 시절에 빠졌던 윤씨의 미모였을까? 
     아니면 절대권력을 가진 제왕이라 그런 나이 차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일까. 
     21살에 청상과부가 된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불과 8살의 차이에 시샘 당한 여자들의 다툼이었을까. 
     동갑내기 시어머니 안순대비의 질투 때문일까.
     여자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알수가 없습니다
 
     
     [칼바위 갈림길]
     "칼바위" 바로 밑에까지 왔습니다.
     여기서도 왼쪽으로 가면 "칼바위"를 오르지 않고 쉽게 "五峰"으로 갈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오른쪽으로 하산하면 "도봉역"이 나옵니다
     우리는 "칼바위-쥐바위"를 올랐다가 "五峰"으로 갑니다
  
     [칼바위 갈림길의 약도와 이정표]
 
     성종이 1494년 12월24일 창덕궁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자 
     29일 연산군이 20세의 젊은 왕으로 즉위합니다. 
     국장기간이던 1495년 3월16일 성종의 능에 묻을 지석(誌石)의 초안이 발단이 되어 
     연산군은 비로소 자신이 "폐비 윤씨"의 자식임을 알게 됩니다.
     지석誌石에는 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몰연도, 행적을 숨김없이 적어 상석과 능상 사이에 묻습니다.
     지석의 초안에서 폐비 윤씨의 아버지 윤기무의 이름이 드러나면서, 
     연산군은 생모로 알았던 '윤 호'의 딸 '정현왕후'의 아들이 아니고 
     '윤기무'의 딸 '폐비 윤씨'의 아들이 자신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로부터 피바람은 몰아쳤습니다.
     여러분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저 같아도 아마도 그러했을 것 같습니다
 
  
     [칼바위 오르는 계단]
     "칼바위"는 이름같이 매우 위험한 릿지구간입니다
     그래서 친절하게도 초보산객들을 위해 계단을 만들어 놨습니다
 
     연산군의 복수는 극에 달했습니다
     그 과정에 '폐비 윤씨'의 시어머니 '인수대비'는 손자에게 머리를 받혀 죽고 
     시어머니에게 쫓겨나 죽음을 당한 '폐비 윤씨'는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되고 회릉으로 격상하게 됩니다. 
     이 덕분에 '폐비 윤씨'는 어느 왕릉 못지 않은 능상과 석물로 단장했으나, 
     고작 2년 후에 '중종반정'으로 아들이 쫓겨나고 비참하게 죽게되니 
     과연 '한삼의 피'에 서린 원한이 풀렸을지는 의문입니다.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에 가장 많은 출연을 한 왕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모두 알만한 이야기이지만 나름대로 숨어 있는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읽을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칼바위에 붙어 피는 진달래]
          생명의 존귀함과 끈질김을 음미하면서 힘든 계단을 오릅니다
     
     [앞으로 가야 할 "五峰山과 五峰"]
     "칼바위"에 올라 가야할 "五峰山과 五峰"을 조망합니다
     능선의 오른쪽 앞에 있는 봉우리가 "五峰山"이고 뒷쪽이 "五峰"입니다.
     "五峰山과 五峰"은 구별해야합니다
     
     [칼바위에서 뒤 돌아 본 "道峰主稜線"과 "牛耳巖"]
     
     [칼바위에서 바라 보는 三角山과 "상장능선"]
     "한북정맥"이 "도봉주능선"과 "우이남능선"을 거쳐 "상장능선"으로 이어져 있는
     그림같은 풍경입니다.
     "한북정맥" 마루금은 "삼각산"으로 가지않고 "상장능선"으로 가 "솔고개"를 넘고
     예비군 훈련장 뒷산인 "노고산"을 지나 일산의 "고봉산"을 거쳐 파주의 "장명산"에서
     그 脈을 다합니다
     
     [쥐바위에서 바라보는 "칼바위"]
     700m가 넘는 곳이여서인지 아직도 진달래가 피어있습니다
     
     [쥐바위]
     
     [五峰 가는 길]
     晶巖교수님이 道峰山을 山行하시며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晶巖교수님은 "산은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정도로 산을 사랑하시고 즐겨찾으시는
     山客이신데 스스로 닉네임을 "夕陽 나그네"라고 합니다.
     
     [五峰에서 바라 보는 "牛耳巖"]
     
     [五峰]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봉우리들입니다.
     암벽등반을 할수있는 장비를 갖춘 사람들에게만 개방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 산객들은 여기서 구경만 하고 가야합니다
       
     [五峰에서 바라 보는 "三角山"과 "상장능선"]
     가운데 "상장능선"이 "한북정맥"이 지나는 산줄기입니다.
     저의 "상장능선 산행기"도 있으니 참고 하시고 못 가보신 분들은 가 보세요~
     
      [五峰에서 바라 보는 "三角山"]
     
     [女性峰]
     五峰에서 女性峰까지는 가깝습니다.
     女性峰은 지나번 산행기에서 자세히 탐구하였기에 오늘은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아니 女性峰은 설명 할 필요도 없습니다
     보시는 대로입니다.
     누가 이름 지었는지는 몰라도 생각이 조금 부족한것같습니다
     이것은 女性峰이 아니고 女性의 거시기를 닮은 바위가 있는 봉우리입니다
     이 바위가 어떻게 女性을 통칭하는 봉우리가 될수있겠습니까
     女性身體의 일부일 뿐인데.....아마 말하기가 조금 곤란해서 그런게 아닌지...
          
          [女性峰]
          牛耳巖과 女性峰
          道峰山에는 아주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모든 여자분들도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지나 가더군요
     
     [女性峰에서 바라 보는 五峰]
     모든 인간들은 女性의 이곳으로 부터 나왔느니라~
     그래서 五峰이 주위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고 철저히 호위하고 있습니다
     
     [송추로 하산하는 중간에 뒤 돌아 본 "女性峰"]
  
     [송추로 하산 하는 길]
     
     [송추 산행 들머리겸 날머리]
     晶巖교수님이 대전에서 올라오셔서 함께한 산행이었습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시길
     "이렇게 가까운 곳인데 서울-대전이라는 거리적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이제서야 찾아 봤다는게 부끄러울 뿐이지만, 아름다운 "북한산국립공원"을
     늦게나마 만끽할수 있어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었다"라고 말씀하시고....
     대전에서 서울 근교 산을 당일로 얼마던지 다닐수 있다는 융통성 있는 관념으로 바꾸시고
     앞으로 서울 근교 산들을 섭렵하실 태세로 귀향하셨습니다
     서울 주변의 산들이 남아 나지 않을수도 있겠습니다. 교수님이 모두 점령하시면...
     즐겁고 아름다운 산행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산행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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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鐵馬山에서 바라 보는 남양주시 진벌리




 
         [天摩枝脈2區間] 
     비월교-금단이 고개-鐵馬山 北峰-鐵馬山 南峰-
     과라리 고개- 배랭이 고개- 멸도봉-天摩山-磨峙고개

     
     [산행지도]
     2009년 4월 26일(일) 오전 8시 15분
     지하철 청량리역 4번 출구에서
     남양주시 수동면 비금리行 좌석버스 330-1번을 타고
     "天摩枝脈2區間"을 종주하기 위해 길을 나섯습니다
     
     [남양주군 수동면 금단골 "비월교-너래바우"앞]
     청량리-비금리를 다니는 좌석버스 330-1번은 약1시간30분 정도 걸려
     "비월교 다음 정거장인 "너래바우"에 섯습니다
     수동골 피서지 계곡이므로 업소도 제법 멋지게 꾸며놓고 손님들을 유혹합니다
     
     [주금산, 철마산 등산로 입구]
     "너래바우" 정류장 앞은 "주금산과 철마산" 등산로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주차장에서 산행 계획과 유의사항을 간단하게 전달받고 산행을 시작합니다
     오늘은 "天摩枝脈"중에서 가장 긴 거리를 걸어야 하는 2구간입니다.
     
     [철마산 등산 안내도]
     철마산이나 주금산을 올랐다가 원점회귀 할수 있는 곳이기에
     승용차를 몰고 와서 주차를 하고, 산행을 하고 난후 다시 차를 몰고 돌아 갈수있어 편리합니다.
     하지만 枝脈을 종주하는 우리는 이곳으로 돌아 오지 못합니다.
     
     [금단이 고개 가는 길]
     "너래바우" 주차장 뒤로 오르면 바로 "금단계곡 입구"가 나옵니다.
     여기서부터 "금단이 고개" 까지가 급경사 오르막으로 땀을 좀 흘려야 합니다
     
     [금단계곡]
     전날 비가 조금 와서 날씨는 제법 쌀쌀해서 강원도 지역에는 눈빨이 날린다는 뉴스가 있습니다.
     4월 하순 날씨로는 다소 이레적이지만 산행하기에는 아주 적당한 기온이며 
     가시거리가 길어 많은 곳을 조망 할수 있었습니다.
     "금단계곡"은 맑은 물이 소곤대며 흐르고......
     
     [금단계곡]
     서울 주변의 대표적 여름 피서지 다웁게 "금단계곡"은 맑은 물과
     아름다운 꽃으로 이쁘게 단장하고 산객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금단이 고개]
     '비월교-너래바우'에서 "금단이 고개"까지 약50분 걸렸습니다
     숨돌릴 여유도 없이 가파른 된비알을 올랐습니다.
     '금단이 고개'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鐵馬山"을 오릅니다
     
     [금단이 고개 이정표]
     "금단이 고개"는 지난 1구간의 날머리였지요.
     한북정맥 명덕삼거리에서 서파사거리를 건너 주금산을 오르고 도착했던 곳입니다.
     1구간이 7시간 30분 걸렸는데, 이번 2구간은 훨신 더 긴 거리입니다.
     오늘은 총 9시간 25분을 걷습니다.
     그래서 산행기를 많이 요약 축소했습니다.
     
     [鐵馬山]
     '금단이 고개'를 지나 南쪽으로 "鐵馬山"이 우뚝 솟아있습니다
     鐵鑛石이 많이 나올것 같다고 붙여졌다고 하며,
     산꼭대기에 있는 바위가 말머리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서리산]
     '천마지맥' 옆으로 함께 뻗어 가는 "축령지맥"의 "서리산"이 구름 속에서
     삐쭉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鐵馬山 오르는 길]
     鐵馬山은 南峰과 北峰이 있는데 北峰이 780.8m로서 南峰710m보다 더 높습니다.
     鐵馬山 北峰 오르는 길이 급경사로 힘든 코스입니다.
     하지만 수동골 '비월교'에서 '금단이 고개'를 지나 "철마산 북봉"까지만 오르면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오르막은 대략 오르는 결과이더군요.
     
     [鐵馬山 오르는 길에서 뒤 돌아 본 "천마지맥1구간"]
     이 한장의 사진 - 정말 값어치 있는 사진입니다.
     사진의 가운데-약간의 구름을 이고있는 산이 "鑄錦山"입니다.
     사진의 좌측 뒤에 약간의 구름이 있는 산이 한북정맥의 "수원산"입니다.
     그리고 매우 유명한 산인 "雲岳山"이  "鑄錦山" 우측 뒤에 살짝 얼굴을 보여줍니다
     "鑄錦山" 옆 "雲岳山"앞에 있는 조그만 산이 "개주산"입니다
     
     [鑄錦山. 雲岳山. 개주산]
     산행기를 쓸때 줌인한 사진은 거리를 혼돈 시킬수 있어 잘 올리지 않습니다만,
     이 경우는 의미가 있을 것같아 줌인한 사진을 올립니다
     "鑄錦山. 雲岳山. 개주산"
     京畿五岳에 들어 가는 雲岳山의 위용이 느껴집니다.
     이름 다웁게 雲岳山은 오늘도 구름을 이고 있습니다.
     
     ["축령지맥"의 '서리산과 축령산']
     "天摩枝脈"의 鑄錦山에서 분기하여 청평댐이 있는 "한강"에 머리를 쳐박는 "축령지맥"
     鑄錦山-불기산-서리산-축령산-깃대봉
     그 가운데 "서리산과 축령산"이 神靈스럽게 자태를 뽑냅니다
     
     [鐵馬山 오르는 길에서 바라 보는 "불암산. 수락산. 삼각산, 도봉산"]
     이 사진도 정말 빼 놓을수 없는 광경입니다
     앞에 보이는 마을이 남양주시 진접읍 진벌리입니다
     그 뒤로 사진의 맨 끝에 "三角山(北漢山)"과 "道峰山"이 어렴푸시 보이고
     바로 그 앞에 "불암산"과 "수락산"이 보입니다
     
     [삼각산. 수락산. 도봉산]
     이 경치도 줌인했습니다.
     가운데 "수락산". 그 뒤로 "三角山(北漢山)"과 "道峰山"
     
     [鐵馬山 오르는 길의 진달래]
     산의 높이가 780m가 되니 정상부근엔 아직도 진달래가 지천에 깔려있습니다
     
     [남양주시 진접읍 진벌리]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 높은 산인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 삼각산  네개가 보이는군요.
     인왕산과 작은 산인 "목멱산(남산)과 안산"은 보이지 않습니다
     동대문 옆에 '낙산'도 있지요
     
     [鐵馬山 오르는 길]
     775m봉을 힘겹게 오르면 鐵馬山 北峰이 성큼 다가 옵니다
     
     [鐵馬山 오르는 길]
     鐵馬山 北峰 바로 못미쳐 있는 775m봉을 올랐습니다.
     휴~ 이제 한숨 돌림니다
     
     [鐵馬山 北峰]
     鐵馬山 北峰이 드디어 보입니다   
     鐵馬山은 南峰과 北峰, 두개의 큰 봉우리와 6~7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로 이루어진
     길게 뻗어 누워있는 듯한 큰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더군요
     
     [鐵馬山 北峰 정상]
     鐵馬山 北峰 정상에는 정상석도 없고 어떠한 안내도 없어
     그냥 지나치면 鐵馬山 北峰 정상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헬기장과 탁트인 조망이 힘겹게 오른 산객들을 위로해 줍니다
     鐵馬山은 北峰이 780.8m로서 南峰 710m보다 높습니다
     
     [鐵馬山 北峰 정상에서 바라 본 "축령지맥 서리산과 축령산"]
     "축령산"은 한자로 祝靈山이라고 씁니다.
     신령한 기운이 충만한 산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879m의 높은 산으로서, 고려말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 사냥 왔다가 
     한 마리의 짐승도 잡지 못하고 돌아온 후, 몰이꾼들의 말이 
     "이산은 신령하니 산제를 올려야 한다"고 하여 
     이튿날 산정상에서 제를 지낸 후 사냥을 하고 사냥을 많이 했다는 사실에서 기원한다고 합니다. 
     "서리산"은 글자 그대로 일년 내내 서리가 서려있는 산이라고 "서리산"이랍니다
     832m 높이로서 산 북서쪽이 급경사로 이루어져 항상 응달이 져 서리가 내려도 
     쉽게 녹지않아 늘 서리가 있는 것 같아 보여 서리산이라 칭하게 되었답니다
     
     [鐵馬山 北峰 정상에서 바라 본 가야할 "天摩枝脈"]
     가야할 天摩枝脈이 용트림을 하고 있는듯 길게 뻗어 있습니다
     가운데 天摩山이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가 되겠습니다
     가까운듯 보이는 天摩山까지 앞으로 4시간반이 걸려 갑니다.
     왜냐하면 직선 거리가 아니고 커다란"S"자를 그리며 가기 때문에 거리가 엄청 깁니다
     
     [鐵馬山 北峰 정상에서 바라 본 "용문산"]
     멀리 '명지지맥의 끝 호명산' 뒤로 구름을 이고있는 "용문산"까지 조망됩니다.
     오늘은 가시거리가 길어 주변의 많은 산들을 조망하는 덤을 얻었습니다
     
     [鐵馬山 北峰 주변 경치]
     鐵馬山과 天摩山에는 赤松이 제법 많이 자라고 있으며 수령이 오래된것들이 많았습니다
  
     [진벌리. 팔야리 갈림길]
     鐵馬山北峰에서 조금 내려오면 진벌리와 팔야리로 가는 갈림길이 나옵니다
     팔야리는 "八夜里"로서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 가있다가 무학대사의 간청으로
     한양으로 돌아 오는 도중에 이곳에서 여덟밤을 묵었다고 "八夜里"가 되었다고합니다
     天摩山과 鐵馬山 주변에는 태조 이성계와 수양대군 세조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남양주시 수동면 수산리]
     水東골이 내려다 보이는 바위.....
     
     [760m봉 헬기장]
     鐵馬山北峰에서 南峰까지도 거리가있습니다.
     많은 봉우리를 넘고 넘어야 갈수 있습니다.
     유머 하나 소개해 드릴까요?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그냥 재미로 읽어 보며 산행을 하자꾸여
     영어에 관한 실수담이람니다
     본인 중1때 영어 교과서 한줄씩 읽는 순서 때,
     "HI, JANE" 을  "하이, 자네" 라고 읽어 쪽팔렸던 적있었소..
     그 뿐만이 아니라 프로야구단 해태(HAITAI)를 "하이타이"로 읽었어요 
     또한 Slazenger를 '쓰러진거'라고 읽어 매도 많이 맞았지요. ㅎㅎ
     어떤 고등학생이 학교에서 "POLO" 티셔츠 입고 갔다가
     수학선생님에게 "포로" 취급 당한적 있소.
     그 후론 셈에 약하답니다 
     
     [鐵馬山 北峰에서 南峰 가는 길]
     내 친구 술마시구 호프집 가더니 자신있게 주문 합디다.
     여기 "오비레이저"루 세병 주세요!!~........ Lager=레이저........ㅋㅋ
     우린 뒤집어 졌다오!! 
     
     [鐵馬山 北峰에서 南峰 가는 길]
     자동차안에 보면 A/C (에어컨) 버튼을 
     내친구넘이 "에프터 서비스"라고 하네요....
     그거 누르면 a/s 맨이 온다구하더군여....ㅎㅎ
     
     [鐵馬山 北峰에서 南峰 가는 길에서 바라 본 '진벌리'] 
     아름다운 경치입니다.
     
     [729m봉]
     요즘 UCC가 폭발적으로 유행하면서 어딜가나 개인카메라와 
     CCTV가 감시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어느 남자가 神을 만났는데 神이 한가하게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요즘 神께서 한가해지신것 같습니다?"하고 말하자, 神이 대답했습니다. 
     "요즘은 니들끼리 서로 다 보고 있으니 내가 쫓아다니며 자세히 볼 일이 없어졌어..." 
     그 남자가 이번엔 악마를 만났는데 神과는 달리 악마는 모니터를 보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뭘 하는데 그렇게 정신없느냐고 묻자... 
     악마가 대답했습니다. 
     악마 왈  
     "말 시키지마. 요즘 악플 다느라 바쁘다고!" 
     
     [鐵馬山 北峰에서 南峰 가는 길]
     
     [天摩山]
      커다란 "S"자 모양을 한 "천마지맥"의 중심부 "天摩山"이 보입니다.
               
               [진벌리 갈림길]
               鐵馬山은 우리나라 國軍의 鐵馬部隊의 본거지랍니다
               그래서인지 山岳行軍路 표지가있습니다
     
     [鐵馬山 北峰에서 南峰 가는 길]
     남양주에는 조선왕조의 왕릉이 많이 있습니다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7대왕인  수양대군 세조의 무덤이 "광릉光陵"이지요
     세조의 와이프 "정희왕후"도 함께 뭍혀있는데, 이 여자가 조선왕조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여자 대장부였지요.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형님인 문종의 장남인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되었지요
     세종대왕이 죽으며 이런 일이 발생할것을 이미 우려해서 후사를 단단히 부탁하고 갔는데도
     수양대군은 무자비하게 조카를 죽였습니다.
     조카인 "단종"의 편에 서서 충성을 다한 "사육신"이 지금의 용산역 뒤 "새남터"에서
     사형을 당하고 한강 건너 노량진에 뭍쳤지요
     
     [天摩枝脈과 天摩山]
     이제 "天摩枝脈"의 天摩山은 좌측으로 보입니다.
     
     [鐵馬山 南峰 가는 길]
     남양주에는 조선 제 15대 왕인 "광해군"의 무덤도 있습니다
     제 산행기에 宣祖는 아주 쪼다리 나쁜 놈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제 산행기를 읽으시는 분들 중에 宣祖를 너무 씹지 말라고 하는 분도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도져히 왕이 될수 없는 족보에서 왕이 된 宣祖는 "임진왜란"이라는 戰火를 백성에게
     안겼고, 자신은 도망 갔다가 오고.... 아들인 "광해군"보다 9살이 적은 19살짜리 "인목왕후"를
     51세에 새로 계비로 맞아 들여 '영창대군'을 낳아 후에 '인조'세력들의 쿠데타 구실을 주었으니
     그리고 다시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의 비극을 잉태했으니 어찌 제가 宣祖를 씹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광해군은 자신보다 9살 아래인 엄마(계모)를 대왕대비로 모시며 살았답니다
     宣祖는 양주시에있는 "목릉"에 첫째부인 의인왕후와 둘째부인 인목대비와 함께 잠들고 있습니다
     
     [鐵馬山 南峰 정상]
     鐵馬山 南峰 정상이 보입니다.
     
     [鐵馬山 南峰 정상]
     12시 25분경에 도착했으니 '비월교'에서 2시간 40분이 걸렸습니다
     鐵馬山 南峰 정상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鐵馬部隊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표하는 글이 있습니다
     다른 특별한 것은 없었고, 정상석도 없었습니다
     
     [남양주시 오남읍과 멀리 '북한산'이 보이는 정경]
     수락산. 불암산. 도봉산. 북한산이 보이는 경치는 일품입니다.
     
     [鐵馬山 南峰 정상에서 발 보는 한북정맥 수원산]
     "천마지맥"을 분기하는 한북정맥 '수원산'이 멀리 조망됩니다
  
     [鐵馬山 南峰 정상]
     鐵馬山 南峰 정상은 태극기가 있는 곳에서 조금 옆에 있는 봉우리로서 
     삼각점으로 표시되 있습니다
       
     [天摩山]
     앞으로 가야할 "천마지맥"이 길게 뻗어 있습니다.
     좌측의 높은 산이 "天摩山"이고, 멀리 스키 슬루프가 보이는 산이 "백봉"이며
     그 산 아래 "마치고개"까지 가야합니다.
     앞으로도 6시간 30분 이상을 걸어야 합니다
  
     [674m봉 가는 길]
      철마산과 천마산 사이에는 웅장한 댐같은 산줄기가 천마지맥을 잇고 있습니다
     
     [天摩山]
     天摩山이 점점 다가 옵니다
  
     [天摩枝脈]
     철마산에서 천마산으로 가는 중간에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과라리 고개]
     처음으로 고개 다운 고개가 나왔습니다
     "과라리고개"
     과라리의 의미는 알수 없었고, 다만 이 고개 아랫쪽 마을 이름이 "과라리"였습니다.
     
     [과라리 고개]
     "과라리고개"에는 돌무덤을 만들어 놨으며, 
     작자를 알수 없는 "과라리 아리랑"이라는 글을 볼수 있습니다
          
          [과라리 아리랑]
          이 고개를 넘어 다니던 사람이 고갯길에 앉아 느낀 감상을 적은듯한데
          ..........감상은 각자의 몫입니다
     
     [지나 온 "鐵馬山 南峰과 北峰"]
      '과라리고개'를 지나 이름을 알수 없는 봉우리를 오르며 뒤 돌아 보았습니다.
      지나 온 "鐵馬山 南峰과 北峰"이 긴 능선을 만들고 있는 것이 확연히 보입니다.
      좌측 봉우리가 鐵馬山 南峰이고 우측 봉우리가 鐵馬山 北峰입니다.
          
          [과라리 고개에서 天摩山 가는 길]
           된비알을 힘겹게 오릅니다.
           사진에는 경사가 별루인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경사가 심합니다
     
     [天摩山 산길에서 만난 여대생들]
     '과라리고개'를 지나 봉우리 몇개를 넘었는데, 운동화 차림의 여대생 둘이
     길을 물었습니다. 천마지맥길에는 등산객이 많지 않기 때문에 길을 잃으면
     물어 볼 사람 만나기도 힘든데 이 아가씨들 길을 잃고 알바를 하고 있었습니다
     "보광사"로 내려 가야 한다는데, 지도를 보니 "보광사"는 천마산 정상 바로 밑에 있었습니다
     천마산 바로 아래 "배랭이고개"에서 하산해야하는데.......
     그러므로 이 여대생들은 약 1시간 정도를 지나 온것입니다.
     그래서 알바를 2시간 정도를 하고 뒤돌아가 "배랭이고개"에서 
     "보광사"로 내려 보냈는데 잘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여대생들은 관광학과를 다닌다는데 과제물이 등산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앞으로 관광 가이드를 잘 하려면 체력도 튼튼히 키워야겠지요? ㅎㅎ
     고생을 많이 했을텐데....다리는 괜찮은가? ㅎㅎ
     
     [天摩山 가는 길]
     '과라리고개'에서 '배랭이고개'까지도 무척 먼 거리였습니다
     이 여대생들 산행 경험도 전혀 없이 이 산속을 2시간 이상 헤멧으니 그 심정 알만합니다
     아차산 정도로 알고 천마산을 왔다는데...
     그래서 제가 '아차산'은 "아차" 실수해서 나온 쬐끄만 산이이다~라고 했더니
     천마산에 비교하면 정말 그런것 같다고 ..ㅎㅎ
     
     [배랭이 고개]
     "배랭이고개"도 별 특징없는 고개였습니다
     천마산 일반등산 코스입니다.
     
     [배랭이 고개]
     "배랭이고개"에서 여대생들을 화도읍 가곡리 '보광사' 방향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잘 갔는지 여부를 알려 준다더니 아직 소식이 없군요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요?
  
     [天摩山 '보구니 바위' 오르는 길]
     '배랭이고개'에서 급경사 오르막을 오르는 "보구니 바위" 가는 길입니다
     
     [보구니 바위]
     "보구니"는 "바구니"의 경기도 지방 사투리라고 국어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가까이서는 이 바위가 "바구니 모양"인지 알수 없습니다
     
     [보구니 바위]
     
     [보구니 바위 이정표]
     
     [보구니 바위]
     "보구니 바위"를 지나 와서 뒤돌아 보니 "바구니" 처럼 보이는 듯하군요.
     사실 이런 바위 이름은 꿈보다 해몽이니....
     
     [보구니 바위에서 뒤 돌아 본 "천마지맥"]
     지나온 철마산 북봉과 남봉 능선이 선명하게 보이며
     철마산과 천마산을 잇는 댐 같은 능선이 城을 이루고 있습니다
     
     ["멸도봉"에서 바라 보는 天摩山 정상]
     천마산 바로 앞에 있는 봉우리가 "멸도봉"이더군요
     멸도봉에서 바라 보는천마산 정상
     
     [梧南邑 과라리, 팔현리]
     '멸도봉'에서 바라 보는 梧南邑 과라리, 八賢里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이 아련히 보입니다
     
     [멸도봉에서 바라 보는 天摩山 정상]
     서울 청량리에서 중량교를 지나면 "망우리 고개"를 넘어 구리시, 남양주시로 올수있습니다
     "紅衣天降將軍 忘憂堂 郭再祐 將軍" 이야기를 진양기맥5구간 산행기에 썼는데
     郭再祐 將軍의 호가 忘憂堂이라고 그 의미를 알려 드린바 있는데.....
     오늘은 제가 오래전에 쓴 글인 望憂里라는 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天摩山 정상 가는 길] 

          忘憂里
                       파란문 
     모든 사람 사는 일에는 걱정이 있게 마련이다
     만약 모든 사람 사는 일에 걱정이 없다면...
     그건 사람 사는 일이라 말하지 않는다
     청량리 지나 중량교...그리고 망우리가 나온다
     조선 왕조의 시조 이성계는 서울에 도읍을 정한 후
     자신의 묘자리를 물색하게 했다.
     무학대사와 하륜으로 부터 받은 음택(陰宅)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東九陵인 자기의 묏자리를 이쪽 산위에서 바라 보며
     "이제야 모든 근심을 잊었다"하여 망우리라 하였는데 
     그곳이 지금 망우리 공동묘지가 되었다.
    현재의 망우리는 수도 서울의 공공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葬地이다
     그러나 그 망우리는 그 면적을 다해 
     지금은 더 이상 그곳에 누울래야 누울수 없다
  
      
      [天摩山 정상 가는 암릉길] 

     망우리(望憂里)
     그 뜻이 얼마나 좋은지도 모르고
     사람이 죽어 뭍치는 곳 정도로 안다
     망우리 -- 모든 근심 걱정을 잊게 해 주는 곳 --
     정말 선조들은 선견지명이 있어 산 이름도 잘 지었다
     그렇다! 망우리에 들어 누우면 
     이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을 잊어버리게된다
     까마귀 우는 소리..아귀다툼 짖꺼리는 소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리 오래 잠을 자도 아무도 깨우지 않는다
     자연의 품 안에서 아무런 근심 걱정없이 흙으로 변한다
     그 곳에 빨리 가고 싶으신가여~~~
     아무도 빨리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天摩山 정상 바로 아래 쉼터]

     근심 걱정 없이 산다는게 살아 있다는 얘긴가?
     망우리 공동 묘지에 들어 누워 있다는 얘기 아닌가?
     근심 걱정을 가지고 사는게 얼마나 인간적 삶인가!~~
     근심 걱정을 두려워하지마라
     근심 걱정!~
     그것이 곧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근심 걱정을 사랑할줄 알아야한다
  
     
     [天摩山에서 내려다 본 '마석'과 "백봉"]
     天摩枝脈 3구간인 "백봉"이 보입니다.
     앞으로도 3시간 정도를 더 걸어야 "마치고개"까지 갈수있습니다
     6시간 정도 왔군요
     
     [天摩山 정상 오르는 암릉구간]
     天摩山 정상부근은 모두 암릉이었습니다
     그리고 山勢는 칼처럼 얇았습니다
     
     [天摩山 정상 오르는 암릉구간]
     天摩山 정상부근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칼날 위를 걷는 기분입니다
     
     [天摩山 정상]
     오후 4시가 넘어 天摩山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비좁은 칼날같은 꼭대기에 올라 갑니다.
     
     [天摩山 정상에서 뒤 돌아 본 天摩枝脈] 
     우선 제일 중요하다고 할수 있는 天摩枝脈의 산줄기를 뒤 돌아 봤습니다
     鑄錦山, 鐵馬山南峰, 鐵馬山北峰, 산줄기가 살아서 움직이듯 꿈틀대는 듯합니다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많이 걸었습니다.
     특히 雲岳山이 멀리서 손짓합니다
       
     [天摩山 정상]
     天摩山 정상은 칼날같은 얇은 비좁은 공간위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습니다
     天摩山어루만질 摩를 쓰는 山인데
     일반인들은 대부분 天馬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天摩山은 태조 이성계의 전설이 만들어 놓은 산 이름이라 합니다.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돌아 오는 길에  "산이 하늘을 어루 만질듯 높고 웅장하여 
    하늘에 닿을 듯 하다"하여 “天摩山”이라 하게되었다고합니다
     
      [天摩山 정상에서 내려다 본 화도읍 가곡리]
     가곡리(嘉谷里)(가오실, 가곡)는
     지형이 가오리처럼 생겼으므로 '가오실' 또는 '가곡'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天摩山 정상석]
     天摩山이라는 이름 치고는 정상석이 초라했습니다
     또한 이곳 天摩山과 백봉 사이의 "마치고개" 일대에서 조선 명종시대의
     소위 의적이라고 불리운 도둑놈 "임꺽정"이가 활동을 한 곳이기도 합니다
     임꺽정이 도둑질 하기 좋은 고개가 있고, 숨기 쉬운 천마산이 있어서 이곳에서
     자주 활동을했다지요. 물론 주로 관가의 재물을 훔쳤다죠? 
     그리고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天摩山 정상에 있는 남양주시 관광 안내도]
  
     [天摩山 하산]
     
     [마치고개와 호평동 갈림길]
     천마산 정상에서 조금 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곳이 매우 중요합니다
     앞에 보이는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호평동' 방향으로 가면 "마치고개"로 갈수 없습니다.
     앞 갈림길에서 직진해야하는데 낭떨어지로 길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도 직진해서 낭떨어지로 내려 가면 길이 잘 나있습니다
     바로 앞에 "천마산 스키장"의 "스키 슬루프"가 보이고,
     건너편 "백봉" 산 중턱에는 "서울 리조트"의 "스키 슬루프"가 보입니다
     
     [이정표]
     우리도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 알바를 조금하고 되돌아와 "마치고개"로 갔습니다
  
     [급경사 하산길]
     天摩山을 하산하는 코스는 급경사입니다.
     
     [급경사 하산길]
     
     석양 나그네들
     산이 좋아 하루 종일 산속을 헤메는 사람들
     
     [501m봉]
     "마치고개"까지도 많은 봉우리를 넘습니다
     
     [마치터널 뒤 천마지맥3구간 "백봉"과 '서울리조트 스키 슬루프']
     
     [뒤 돌아 본 天摩山]
     天摩山 정상은 점점 멀어지고....
     
     [405m봉 - 전망대 봉우리]
     마치고개와 호평동이 훤하게 조망되는 전망대 봉우리에 왔습니다
     이제 99% 걸었습니다.
     태양은 서산으로 넘어 가고.....
     
     [405m봉 - 전망대 봉우리에서 바라 본 "백봉"과 '서울리조트 스키 슬루프']
     건너편 "백봉"의 서울 리조트 스키 슬루프가 가까이 보입니다.
     아래에는 "마치고개"가 현대화 되어 고개와 터널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天摩枝脈 3區間이 저 건너편 "백봉"으로 갑니다.
     5월10일(일)에 지하철 청량리역 4번 출구에서 만나
     330-1번 좌석버스를 타고 다시 이곳 마치고개로 올것입니다
     
     [405m봉 - 전망대 봉우리에서 바라 본 "호평주공아파트"]
     남양주시 "호평지구 주공아파트 타운"이 공사중인 전철역을 앞에 두고
     석양에 물들어 가고있습니다. 
     전철이 개통되면 천마산은 더욱 각광받는 등산코스가 될것입니다
     멀리 한강이 굽이쳐 흐르는군요
     
     [405m봉 - 전망대 봉우리에서 바라 본 "호평주공아파트"와 멀리 북한산이 보이는 풍경]
     
     [마치 고개]
     46번 국도가 새로이 건설되 "마석터널"과 "마치터널", "마치고개"로 나뉘어
     각기 교통을 편리하게 하고 있습니다
     
     [천마산 스키장 슬루프]
     전망대봉에서 조금 가니 "천마산 스키장" 슬루프가 바로 옆에 있습니다.
     "천마산스키장"의 이름이 "스타힐리조트스키장"으로 바뀌었군요
     
     [천마산 스키장 슬루프와 "천마산"]
     "스타힐리조트스키장"의 휴게소가 여름으로 가는 봄날엔 문을 닫고 썰렁하게 있습니다만
     겨울에는 스키 디딜틈이 없이 복잡한 곳이지요.
     오래전에 저도 와이프랑 애들 데리고 자주 찾던 곳인데 스키장이 '천마산 기슭'에 있는게
     아니고 405m 전망대봉과 356m봉 사이에 슬루프가 있군요.
     여기서 와이프가 야간 스키 타다가 어떤 남자와 부닥쳐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적이 있는데...ㅎㅎ
     
     [천마산 스키장 옆구리를 돌아 하산]
     
     [마지막 헬기장]
     '마치고개' 바로 위 헬기장에 도착하니 오후 6시 45분이었습니다
     
     [마치 고개]
     "마치고개"는 옛 문헌을 보면 '마치현(磨峙峴)','마치(馬峙)','마치(摩峙)'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고개]
     "마석고개"는 磨石으로 맷돌이라는 뜻입니다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맷돌이 많이 생산되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네요
     
     [뒷풀이]
     호평동 주공아파트 입구에 있는 "왕십리곱창"에 도착하니 오후 7시 10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뒷풀이를 하고 天摩枝脈2區間 산행을 마칩니다
     총산행 시간 : 9시간 25분
     총산행 거리 : 약 20km (비월교에서 호평동 왕십리곱창까지)
    
    [산행 개념도]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애증의 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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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기맥 5구간] 자굴산-한우산-산성산 산행기 4월 11일(토) 경남 의령군과 합천군에 걸쳐있는 자굴산 - 한우산 - 산성산을 종주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봄향기 흩날리는 고속도로를 달려 갑니다 ["금산" 휴게소] 대전-통영 고속도로에 있는 "금산 휴게소"에서 아침 식사를 하였습니다 인삼의 고장 다웁게 인삼제품을 파는 코너가 많았고... ["금산" 휴게소] 금산 휴게소에는 에스컬레이트가 설치되있어 휴게소로는 좀 독특했습니다 아랫층에는 전통식당과 분수대등 휴게시설이 시골 풍경과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금산 휴게소를 가면 아랫층도 한번 내려가 보세요 [머릿재] 대전-통영 고속도로를 타고 '단성 I.C.'로 나와 경상남도 진주시와 의령군의 경계인 "머릿재"에 10시 10분에 도착했습니다 '진양기맥 5구간'의 산행 들머리입니다 [머릿재] "머릿재"는 의령군 七谷面에서 大義面으로 넘어 가는 고갯길입니다 [구글어스 산행괘적도] 편리한 시대 - 위성의 신호를 받아 우리가 걷고 있는 곳을 표시해 주는 GPS 산행 괘적도입니다 [진양기맥 5구간 산행 들머리] "머릿재"는 頭峴을 우리말로 풀어 쓴것이라 하는데 여암 신경준선생이 쓴 "산경표"에는 豆峴으로 나와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우리마라 地名을 새로이 지정할때 아마도 같은 발음이라고 오리지날 고개 이름을 콩 豆에서 머리 頭로 잘못 표기하고 순수 우리말로 고쳐 쓸때 다시 머리 頭를 그대로 "머릿재"로 표기하게 된듯합니다 이런 경우는 우리나라 전국에서 흔히 볼수있는 것들이지만 이제는 다시 바로 잡아야 하는데 지방자치 단체들이 앞장서서 해야 할 일로 사료됩니다 [머릿재] 산행 들머리로 올라와 "머릿재"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머릿재" 건너편 진주시를 뒤로하고 의령군으로 갑니다 [머릿재] 의령군 칠곡면이 내려다 보입니다. 지금부터 그 유명한 "호암 이병철"씨가 태어나 자라고 때돈을 버는 밑거름이 된 "정미소"를 경영했던 곳 - 의령 宜寧땅을 밟으며 산행을 시작합니다 [된비알] "머릿재"에서 "좌골재"까지는 野山이 몇개 있으며 1시간 45분이 걸렸으니 워밍업으로 제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산행을 시작할때는 힘이 듭니다 [자굴산] 427m봉을 오르니 왼쪽으로 "자굴산"이 아득히 보입니다 오늘 진양기맥 5구간의 하일라이트 山입니다 "자굴산"은 의령의 진산이며, 높이가 거의 900m가 되는 높은 산입니다 조그만 안부를 지나고 봄냄새 풍기는 산길을 유유자적하며 걷습니다. "머릿재"에서 "좌골재"까지에는 높은 봉우리가 세개 있습니다만 대체적으로 평범한 산행길입니다 진주, 의령 지방은 이미 진달래는 지기도 했겠지만 이 구간에는 꽃 구경하기가 어렵고 울창한 소나무 숲이 우리를 반깁니다 [좌골재 가는 길] 오늘은 우리나라 경제 이야기에서 빼 놓을수 없는 인물 - "호암 이병철선생""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장군"에 대해 생각해 보며 산행을 하겠습니다 이병철선생에 대해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이가 없겠지만..... [자굴산] 384m봉, 500.9m봉 을 차례로 오르니 "자굴산'이 점점 더 가까이 오는 듯 합니다 湖巖 李秉喆先生 대한민국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인이 부러워한 "돈 병철"로 대변 되었던 李秉喆先生. 李秉喆先生은 1910년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부친 이찬우공과 모친 안동 권씨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선비의 집안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병철 선생은 강직한 가풍속에서 비교적 유복한 소년시절을 보냈다고합니다 [좌골재] 의령군 칠곡면과 저수지가 보이는 풍경 - 아름답습니다 이병철선생은 정규 학교를 온전히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진주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서울로 전학와서, 서울 수송국민학교를 다니고, 중동중학교 2년 중퇴, 일본 와세다대학으로 유학도 갔으나 졸업까지는 못한 걸로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돈병철"이 되고 난 이후엔 명예박사학위는 대학들이 서로 주려고 했습니다 에구~ 인간 대접 받을려면 돈 벌고 잘되고 봐야지요. 특히 돈을 많이 벌고 봐야합니다 [좌골재] 의령에서 합천으로 넘어 가는 1013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이 "좌골재"입니다 이런 저런 지도에 "좌골티재"로 표기 되있습니다. "티"가 "재, 고개"라는 말이지요. 같은 말을 두번 사용하는 것이니 "역전앞"과 같은 것입니다. '좌골고개'. '좌골재', '좌골티', 좌골치'등으로 표기해야합니다 [자굴산] '좌골재'에 오니 자굴산'이 그 일부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병철선생은 의령에서 '정미소' 사업으로 재벌의 꿈을 키우기 시작하지요 옛날엔 시골에서 정미소와, 누에고치로 실을 뽑는 '제사공장'이 기계가 돌아 가는 유일한 "공장"이었지요. "제사공장"이 製絲工場이라는 건 나중에 알게 됫습니다만..... [좌골재] '좌골재'와 건너편 '자굴산'으로 오르는 등로가 보입니다. 이병철선생은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쌀가마를 운반하는 것에서 부터 運輸業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 갑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벌써 부동산을 알고 부동산 사업도 하지요. 그리고는 무역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의령은 좁아서 대구로 진출하고 "삼성상회"를 대구에 설립하며 본격적인 돈벌이에 나섭니다 [좌골재] 우리를 "머릿재"에 내려 놓았던 버스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삼성상회'로 돈을 벌어 대구에서 "조선양조"를 인수하며 최초로 제조업에 뛰어듭니다. '조선양조'가 실질적인 "삼성그룹"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조선양조'에서는 막걸리, 청주, 소주는 물론 사이다까지 만들어 팔았습니다 6.25 전쟁통에 피난민으로 '조선양조'의 술은 더 잘 팔렸답니다 [좌골재] 의령군 칠곡면에서 대의면으로 넘어 가는 1013번 지방도의 고갯길입니다 해방이 되자 부산에 설립한 "삼성물산"을 넓은 서울로 사업장을 옮김니다 그리고 1948년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지요 홍콩과의 직교역을 하며 무역이라는 글자를 조선엽전들에게 알려 줍니다. 하지만 6.25라는 복병을 만나 재산을 상당량 날려버림니다 [GPS 산행 괘적도] [자굴산 산행 들머리] 자굴산 들머리에는 오늘 따라 '산불예방'을 위한 통제관이 나와 입산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령군청에 가 입산허가를 받아 자굴산을 올랐습니다. 여기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뒤 돌아 본 좌골재]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가난한 나라 백성의 입맛을 달콤하게 만들며 돈을 벌기 시작하고 영국 신사들이 입는 양모로 만드는 신사복지 "골덴텍스" 기억하시나요? "골덴텍스"로 만든 양복을 입는게 출세의 상징 같았던 때를 연세가 조금이라도 되는 분들은 아련한 추억으로 떠 오를 것입니다. 저도 울 아버지가 제가 모 대학에 합격했다고 기뻐하면서 맞춰준 양복이 "골덴텍스"로 만든 쪼끼가 있는 양복이었답니다. 많은 친구들이 부러워했습죠. ㅎㅎ 제일모직의 "골덴텍스"가 성공하자 뒤따라 경남모직, 한국모방, 대한모방 ...기억 나시죠? [자굴산 오르는 등로] 이병철선생이 6.25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사업자금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전쟁이 터지자 그 동안 번 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부산에서 주류도매업을 하고 있던 사람에게 맡기기로 하고 궤짝 두 개에 3억원 가량의 돈을 담고 서류뭉치로 위장해 조선양조의 자동차에 실어 보냅니다. 당시 3억원이면 어마 어마한 돈이지요. 그런데 그 차는 부산에 도착하지 못하고 돈 궤짝과 함께 행방불명이 되었답니다. 전쟁 통에 알아볼 길이 없는 직원들은 돈 찾기를 포기하고 말았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운전기사가 돌아 옵니다. 짜~잔~ 클린트 이스트 우드처럼... 그는 경북 영천에서 미군에게 강제 징집되었고 급한 김에 길가의 정미소에 돈 궤짝을 감춰두었던 것입니다. 직원들은 운전기사와 함께 영천의 궤짝을 숨겨두었다는 정미소로 달려갔으나 정미소는 불에 타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답니다. 않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지만, 되는 놈은 죽은 고목나무에서도 꽃을 피우는 법. 잿더미를 헤치자 다행스럽게도 궤짝은 타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고 궤짝 안의 돈도 그대로 있었답니다. 나하고는 왜이리 반대일까~ 닝기리~ 전쟁 통에 사업자금을 모두 잃어버린 호암선생은 이 돈으로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설립할 수가 있었답니다. [자굴산] 자굴산이 다가 옵니다. "이병철선생의 매년 정초 사업 구상" 이병철선생은 매년 정초가 되면 사업구상을 하러 일본 동경으로 간것 기억나시죠? 가난하고 별 볼일없는 우리나라에선 새로운 구상을 할 건덕지가 없어서 선진국 일본으로 가 일본의 TV와 언론매체들을 통해 정보를 얻고 세계의 변화하는 경제상황을 느끼며 사업구상을 한것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 오면 새로운 사업이 하나씩 시작되었지요 [594m봉 오르는 길] '좌골재'에서 '594m봉'까지 심한 된비알입니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었습니다, '594m봉' 근처에 오르니 바위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594m봉] '594m봉'에 올랐습니다. 자굴산 정상이 가까워 옵니다 여기서부터는 완만한 경사이므로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오를수 있습니다 독립투사 김좌진장군의 아들 "김두한" 깡패에서 국회의원이 되고, 그의 딸 '김을동여사'도 국회의원이 되었지요 '김두한 의원'이 국회에서 국무총리석으로 똥물을 투척한 사건 기억하시나요? 기억하실겁니다. 당시 국무총리가 '정일권'씨였고, '장기영' 부총리등 각료들이 똥물을 뒤집어 썻지요 이 똥물은 종로2가에 있는 "파고다공원(탑골공원)" 공중변소에서 퍼 온것이라 더 유명했죠 수많은 국민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 1966년의 國會汚物投擲事件 그런데 왜? 똥물을 국회에 퍼 부었는지는 아십니까? [암릉구간] 594m봉에서 자굴산 정상까지는 암릉구간이었습니다. "한국비료공장'과 "사카린 밀수 사건" 삼성 재벌의 한국비료주식회사가 건설 자재를 가장해서 사카린을 밀수했다는 것이 1966년 9월 15일 경향신문을 통해 폭로되면서 언론계와 정치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전쟁의 폐허에서 경제발전을 하려는 가난한 대한민국에 밀수는 민족적 범죄였습니다. "국산품 애용"이라는 캐치프레이저로 군사 쿠데타 정권이라는 오명을 경제발전으로 덮으려했던 개발독재정권 박정희 대통령의 이미지에 똥칠을 하는 반민족적 범죄였지요 그러나 "사카린 밀수사건"은 한달 뒤 벌금 좀 물고 유야무야되자 당시 야당 국회의원이었던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원이 더러운 놈들에게 국회에서 똥물을 퍼붓게되는 것입니다. "에라잇!~ 똥물보다 못한 놈들아!!~~ 똥이나 쳐 먹어라~!!" 요즘도 똥물을 쳐 먹을 놈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암릉구간] 당시 김두한의원이 똥물을 투척하면 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밀수 사건을 두둔하는 장관들은 나의 '피고들'이다!!~" "사카린 좋아하는 피고인들에게 사카린을 선사한다"는 말과 함께 파고다공원 공중변소에서 퍼온 똥물을 국무위원들을 향해 투척한 것입니다. 그 이후 국회에는 석달 이상 똥냄새가 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카린 밀수 사건'은 이병철씨가 '한국비료주식회사'의 주식 51%를 국가에 헌납하는 것으로 종결됩니다. 군사정권과 야합을 한것이지요 그래서 좋은 일 많이 한 '호암 이병철선생'이 죽을 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 치욕스런 이미지가 바로 '사카린 밀수'와 같은 방법으로 富를 국민들로부터 착취했다는 멍에를 쓴것이었습니다 [GPS 산행 괘적도] [바람덤] 오늘 산행 중에 처음으로 모양새가 있는 암릉이 나왔는데 바로 "바람덤"이었습니다 "바람덤"의 이 무슨 뜻인지 경상남도 지역 이외의 지역 사람들은 모를것입니다 은 경남지방 특히 경남 내륙지방의 사투리로 바위라는 말입니다 제가 경남 함양이 고향이라 이것은 확실히 압니다. ㅎㅎ [바람덤] 특히 이곳은 "자굴산 주 등산로"로서 칠곡면 내조리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좌굴재'에서 올라 오는 등산로가 만나는 삼거리입니다 [바람덤] "바람덤"은 바람이 바위 사이로 많이 분다고 붙여진 이름인듯합니다. 실제로 이곳에 서니 시원한 바람이 의령으로 부터 많이 불어 옵니다. 펼쳐지는 경치도 아름다웠습니다 이제 "바람덤"의 의미를 확실히 아시겠지요? 이곳 "바람덕"을 설명한 사람은 모든 인터넷에서 "파란문" 밖에 없습니다. ㅎㅎ [바람덤 이정표] "바람덤"에 오면 정상까지 약 15분 정도면 갈수 있더군요. '절터샘'에는 石間水가 흘러 나온다는데.... [바람덤에 올라 내려다 본 지나온 504m봉] 우리나라 근대사에 경제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사람을 세 사람 꼽으라면 삼성그룹 "이병철씨" 현대그룹 "정주영씨" 대우그룹 "김우중씨"를 꼽는데 반대 하시는 분은 없겠지요. 그들이 활동하던 시절에 "대한민국 주식회사"에 고급직원을 배치하라고 한다면 '경리부장 이병철', '공장장 정주영', '무역부장 김우중'이 제격이다"라고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바람덤에서 내려다 본 내조리 小溜池] 그 많은 재산과 돈을 단 한푼도 못가지고 떠난 이병철씨와 정주영씨, 아직 살아 남은 김우중씨는 12조원이 넘는 빚을 지고 조용히 숨어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것을 두고 人生無常이라고 하지요? 너무 욕심 내지 말고 삽시다. 갈때 주머니 없는 수의 입고 한푼도 못가지고 떠나갑니다. [바람덤에서 바라보는 "한우산"과 "자굴산순환관광도로"] 의령군에서 어마 어마한 자금을 들여 "자굴산순환관광도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의령읍에서 자굴산과 한우산을 직접 오를수 있도록 도로를 만들어 포장했다고합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 와야 할텐데 도로에서 자동차 구경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가례면에서 오르는 자굴산 능선 등산로] 자굴산의 주 등산로인 써래봉 능선입니다. 이 능선은 조금있다가 만납니다 [산행 괘적도] [써래봉 갈림길] 자굴산 주 등산로인 써래봉 능선에서 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입니다 자굴산 정상에는 그늘이 없어 여기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이병철회장의 세가지 불가사의가 있었지요. "미풍이 미원을 못 꺽는 것" "자식 마음대로 못하는것" "골프 뜻대로 않되는 것" 이외에도 "백설표 식용유가 해표 식용유를 못 이기는 것"이 있었고 "중앙일보가 동아일보를 넘지 못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써래봉 갈림길] 조선초 단종 복위 운동으로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육신" 그 "사육신" 중에 박팽년이 있지요? 그 박팽년의 후손인 "박두을 여사"와 이병철회장이 결혼하여 이건희씨를 낳았으니 자식 농사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는데..... 이병철회장의 가업 계승은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이와 비슷하지요? 태종 이방원이는 장남 양녕대군에게 왕권을 물려 주려고 세자 책봉까지 했지만 여러 이유로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지요. 그리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세종대왕"이 되었습니다 이병철회장도 장남 이맹희씨에게 물려 주려했으나 능력이 없다고 셋째 아들인 이건희씨에게 삼성그룹을 넘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셋째 아들 이건희씨는 삼성그룹을 세계 제1의 IT기업으로 발전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건희씨의 후계자 '이재용'이는 좀 아닌것 같은데..... [자굴산 정상 가는 길] 써래봉 갈림길에서 정상까지는 잠깐이면 갑니다 여기서 부터 일반 산객들을 많이 만날수 있었습니다 [자굴산 정상 가는 길] 좌굴재에서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렸으며 머릿재에서 3시간 15분 정도 걸렸습니다 [자굴산 정상] 자굴산 정상은 매우 넓은 공간이 있으며, 의령에서 직접 오른 산객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사방이 확 터여 조망하기에 좋았습니다만, 오늘은 운무로 가시거리가 짧아 지리산 천왕봉과 황매산, 집현산등을 조망할수 없었습니다. 이제 언제 다시 온다고..에구 아쉬웠습니다 [자굴산 정상] "자굴산"을 한자로 표기해야하는데 컴퓨터 자판에는 없는 한자이라 쓸수가 없네요 "자"는 門 속에 者가 들어가 있는 글자인데 , 성곽의 망루를 뜻한다고합니다 "굴"은 山변에 屈이 합쳐진 글자인데 산 우뚝 솟을 "굴"이라합니다 이것은 제가 인터넷에 올리려고 어렵게 찾아 온 闍崛山 漢文입니다 [자굴산 정상석과 이정표] 여암 신경준선생이 쓴 "산경표"에는 "자굴산 闍崛山"이라는 산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산경표'에는 혼굴산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혼"의 한자가 또 컴퓨터에는 없습니다 "혼"의 한자는 門 속에 昏이라는 한자가 들어가 있습니다 "자굴산 闍崛山"의 "자闍"와 매우 유사하지요? 혼굴산 의 "굴"은 "자굴산 闍崛山"의 "굴" 山변에 屈과 같습니다 틀림없이 한문을 잘 모르는 사람이 혼굴산을 자굴산으로 잘못 표기했을 가능성이 큼니다 여암 신경준선생의 산경표를 한번이라도 들여다 보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자굴산 안내] 어느 누가 이 산 이름을 "자굴산 闍崛山"이라고 지었는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옛 선인들이 "혼굴산"이라고 한것을 자기 마음대로 이름을 바꾼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설명을 어떻게 느껴야 할지 묘한 생각이 듭니다 [자굴산 정상에서 바라 보는 '의령읍'] 여암 신경준선생의 "산경표"에는 지금 우리가 임의로 "진양기맥"이라고 하는 산줄기를 다음과 같이 표기해 놨습니다. 간단합니다 鳳凰山 - 月峯 - 金遠山 - 旗白山 -鳥嶺 - 官述峙 - 鳥谷嶺 - 鳥谷山 - 密岾 -黃梅山 葛項山 - 馬壯山 - 花旨山 - "혼굴산" - 德山 - 豆峴 - 道峴 - 集賢山 - 廣濟山 - 飛鳳山 이렇게 간단 단순하게 표기해 놨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다니는 소위 "진양기맥"이라는 산줄기가 맞는 것인지 틀리는 것인지 확실히 알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 해석 하는 사람마다 약간씩 제각각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알수 없는 산이름과 고개도 있습니다. 모두 유추 해석해서 주로 각 고을 경계선을 따라 다닌다고 할수 있습니다. [자굴산 정상에서 바라 보는 '한우산'] '진양기맥' 마루금이 지나는 한우산과 산성산이 조망됩니다 산경표에 나오는 산이름과 현재 지도상에 나오는 이름을 중요한 것들만 대조해 보겠습니다 산경표에 鳳凰山이라고 되있는 산이 현재는 南德裕山입니다 月峯月峰山이고 金遠山은 현재도 같은 이름인 金遠山입니다 旗白山은 현재는 箕白山으로 旗 → 箕로 바뀌어있습니다 鳥嶺은 안의에서 거창 넘어 가는 고개 초동리에 새재 마을이 있습니다 안의가 제 고향이라 잘압니다 [자굴산 하산] 자굴산에서 하산 하는 길에는 진달래가 아직도 활짝 피어 있으며 많은 산객들의 표지기가 매달려 있어 보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자굴산 정상에서 '쇠목재' 가는 길] 관술치(官述峙)는 삼각점이 있는 관술령(官述嶺 :606.1m)이고 조곡령(鳥谷嶺)으로 표기되었다가 뒷장에서 조곡산((鳥谷山)으로 나오는 지명은 지형도에는 비슷한 이름이 보이지 않으나 함양에서 거창으로 넘어가는 '춘전재'와 그 동쪽으로 올라간 덕갈산으로 생각되어집니다 밀점(密岾)은 거창에서 산청으로 넘어가는 1006 지방도 고개가 '밀치(密峙)'로 표기되어 있어 혼돈되지 않습니다 황매산(黃梅山)은 지금의 이름과 변함 없이 같습니다. [의령군 가례면 갑을리] 이 마을이 매우 유명한 마을입니다. "가례면 甲乙里" 자굴산과 '우봉분맥'이 감싸고 안고 있는 듯한 甲乙里는 아무리 쎈 태풍이 불어와도 안전할듯합니다 [자굴산 정상에서 '쇠목재'로 하산 하는 계단] 경상남도 중앙에 자리한 '의령군'은 사실 크게 자랑할만한 産業이나 농업이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인물은 많이 배출했다고 자랑이 대단한데 대표적인 인물이 "紅依將軍 곽재우"와 "이병철회장"이랍니다. 이병철회장에 대해선 앞에서 아는대로 알려드렸으니 "곽재우 장군"에 대해 나름대로 조명해 보겠습니다. [의령군 가례면 갑을리] 진주 남강댐에서 내려 오는 강이 의령읍 앞으로 흘러 삼랑진으로 가서 북쪽에서 내려오는 낙동강과 합쳐져 남해 바다로 흘러 갑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에 "남강"은 일본군 병력과 군량미등을 운반하는 중요한 運送路였습니다 의병인 곽재우를 '임진왜란 3대 名將" 중에 한사람으로 만들게 되는 바탕이 "남강"이라고하는 일본군 運送路가 있어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곽재우 의병은 "남강"을 통행하는 일본군들을 주로 무찔렀으니까요. [진양기맥 마루금] 자굴산과 한우산을 연결하는 진양기맥 마루금이 선명합니다 곽재우(郭再祐) 임진왜란을 떠 올리면 누가 생각납니까? 아마도 모두 불멸의 이순신 장군이 떠 오를것입니다 23전 23승. 不敗의 신화를 만들어 낸 "이순신장군" - 두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 海戰歷史에 최고의 勝戰을 이룬 불가사의한 인물이지요. "이순신장군" 위대합니다. 그러나...... [자굴산에서 한우산으로 가는 마루금] "임진왜란 3대 명장"에는 이순신장군 뿐만 아니라 일본 쪽바리들로부터 직접 "紅衣天降將軍"이라는 칭호를 받은 忘憂堂 郭再祐 將軍이 있습니다 또한 전라도 광주지방에서 맹활약한 "감덕령 장군"도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은 한결같이 오로지 求國의 一念으로 적과 싸웠는데 조선 왕조에서 최고 의심 많은 쪼다리 王인 "宣祖"로부터 그 功을 높이 평가 받기는 커녕 오히려 핍박을 받아 죽임을 당하거나 옥고를 치뤄야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두번의 옥고와 백의종군을 하고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김덕령 장군은 감옥에서 처참한 고문으로 옥사했습니다(제가 쓴 '무등산 산행기'를 찾아 읽어보세요) 곽재우장군은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이곳 의령의 "望憂堂"에서 生食을 하며 조용히 은거하며 살다 갔습니다. "임진왜란 3대 명장"은 이렇듯 쓸쓸한 최후를 보냈습니다 [자굴산에서 한우산으로 가는 마루금] 郭再祐 將軍을 우리는 紅依將軍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곽재우장군이 전쟁을 할때에 '붉은 옷'을 입고 싸웠다고 붙여진 별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곽재우장군이 '붉은 옷'을 입게 되는 동기를 알려 주고 있는 기록이 있어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조선 야사 이야기에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野史이기에 그냥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를 어느 누군가가 이야기 책으로 만들어 재미로 읽도록 한것이기에 믿어도 그만 않믿어도 그만인 그런 이야기 임을 미리 알려드림니다 그리고 필자인 '파란문'이 이해하기 쉽고 재미가 가미될수 있도록 조금 꾸몄으니 오해 없으시기 바라니다 [쇠목재] 조선 선조시대 어느날..... 郭再祐는 문경에서부터 밤새 호랑이를 잡으려 좇아서나 한없이 따라 갔습니다. 그러나 불현듯 호랑이가어느 굴속으로 들어가 버리자 郭再祐는 남감해 졌습니다. 지금 까지 좇아 온것이 아쉬어 굴 속을 이리저리 살펴 보았으나 워낙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잘못하면 호랑이에게 당할까싶어 더이상 굴속을 들어갈수도 없었습니다. "아 이썅~ 밤새 이곳까지 쫒아 왔는데 그냥 가야 한단 말인가?" 郭再祐는 아쉬움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우선 급한 것은 산을 내려가 고단한 몸을 쉴곳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곽재우는 거져 호랑이를 좇아 정신없이 이곳까지 달려왔기 때문에 여기가 어디인지도 알 수도 없었답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산을 내려가던 곽재우는 산골짝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를 발견하고 무작정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자굴산에서 한우산으로 가는 사이에 있는 '쇠목재' 가는 길] 다 쓰러저가는 초가집에서는 아침 밥을 짓는지 여전히 매운 연기가 눈을 찔렀습니다. "여보시오 주인장 계시요?" 잠시후 부엌에서 하얀 소복을 입은 처자가 나오더니 조심스럽게 밖을 살피며 물었습니다. "누구세요?" "밖에 누가 오셨는가?" 처자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몸집이 거대한 사내가 나오며 말했습니다. 곽재우는 사내가 범상치 않음을 한눈에 알아 차렸습니다. 그는 사내에게 지난 밤 일을 설명하고는 잠시 쉬기를 청하였습니다. "그 호랑이가 문경에서 이곳 울진까지 좇아 오다니 형씨의 재주가 비상 하구려." 사내의 말에 곽재우는 잠시 아연질색했습니다. 조금은 뻥이 있겠지만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울진까지 왔던 것입니다. "그놈은 원래 중국 산동성의 태산에서 살다가 이곳까지 온 백년묵은 백호지요." 그 사내는 원래 중국 사람으로 자신의 아비가 유명한 포수였는데 그만 백호에게 목숨을 잃었답니다. 그래서 선친의 원수를 갚고자 백호를 잡으러 좇아다니다가 백호가 울진에 있는 이 산속의 동굴에 자리를 잡자, 그 또한 산골짝에 집을 지어 그 놈을 잡기 위해 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산행 괘적도] [쇠목재] '자굴산'과 '한우산' 사이에 잇는 "쇠목재"에 왔습니다 사내는 그동안 수차례 백호와 겨루었으나 서로의 힘이 비슷하여 어느 한쪽도 승부가 나지 않아 지금까지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었답니다. 사내는 말을 마치자 불현듯 곽재우에게 도와달라고 청했습니다. 곽재우는 겸손하게 사내의 청을 사양 하였습니다. "허허 형씨같은 분도 이기지 못하는 백호를 어찌 제가 상대할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저 내가 백호와 싸우고 있을 때 바위 뒤에 숨어 있다가 한번만 큰소리로 호통을 쳐주시면 됩니다." 곽재우는 사내의 부탁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쇠목재] "쇠목재"는 '자굴산' 등산로 입구이기도 하기 때문에 등산객과 관광객을 위한 펴의시설의 대명사 화장실을 잘 지어 놨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길을 넓히고 포장을 해서인지 깨끗했습니다 두 사람은 아침을 먹고 백호가 있는 동굴로 갔습니다. 곽재우는 바위뒤에 숨어서 사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잠시후 굴 속에서 거대한 몸집의 백호가 성큼 뛰쳐나오더니 사정없이 사내를 향해 덤벼들었습니다. 사내는 연신 창을 휘둘러 댔고 백호는 날렵하게 몸을 굴려 자신을 찌르는 창을 잇발로 물고 흔들어 댔습니다. 곽재우는 바위뒤에서 호통 칠 생각조차 까맣게 잊고 싸우는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잠시후 백호가 지쳤는지 어슬렁 어슬렁 굴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사내는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습니다. 곽재우는 그때서야 사내가 부탁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곽재우는 사내에게 달려갔습니다. "미안하오! 내가 그만 싸우는 모습에 정신이 팔려 호통 치는것을 잊었소." 그 말을 들은 사내가 신경질을 낼줄 알았는데 점잖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괜찮소. 그러나 내일은 꼭 호통치는 것을 잊지 마시오." [쇠목재 정상에 있는 '에코브릿지'] 다음날 곽재우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사내와 백호가 싸우는 싸움을 지켜 보았습니다. 싸움이 어느정도 진척될 무렵 곽재우는 바위뒤에서 뛰쳐나와 백호에게 큰 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네 이놈~!!!" 그러자 백호는 곽재우에게 시선을 돌렸습니다. 사내는 이 기회를 놓치지않고 창으로 힘껏 백호의 뒷통수를 찔렀습니다. 백호가 괴로워 몸을 뒤트는 사이 사내가 백호의 목에 한번더 일격을 가하자 백호는 그대로 나가 떨어졌습니다. "이제야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되었소 이모두가 형씨의덕이오.!!" 사내는 곽재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처자를 옆에 앉히고 말했습니다. "형씨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수 있었겠소? 사실 이 아이의 모친도 백호한테 목숨을 잃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나와 함께 지내게 되었소이다. 이 아이가 자신의 원수를 갚아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평생 형씨를 모시고져 하니 거절 하지말고 거두어주길 바라오. 그럼 난 이만 갈 길을 가야겠소." 곽재우는 사내에게 이름이라도 알려 달라고 하였으나 그는 다시 보게 될것이라는 말만 남기고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습니다. [자굴산 입구 안내석] 곽재우는 처자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왔습니다. 호랑이 잡으러 갔다가 예쁜 아가씨를 얻어 왔군요. 오히려 더 좋은거 아닌가요? 그후 몇년이 지나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곽재우는 의병을 일으켜 함안에서 적군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의병으로 나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농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전경험도 없거니와 군사 훈련도 받지않아 왜병들과 싸우기는 역 부족이었습니다. 곽재우가 더이상 왜병과 대적하기에는 무리일 것이라 생각하고 후퇴 명령을 내리려 할 때였습니다. 갑자기 '붉은 옷'을 입은 장수가 어디선가 말을 타고 나타나더니 왜병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습니다. '클린트 이스트 우드'가 황야의 무법자들을 연발 따발총으로 쑥대밭을 만들때처럼 왜병들의 목이 가랑잎처럼 하나 둘 땅에 떨어졌습니다 [쇠목재 정상에 있는 '에코브릿지' 위로 건너 갑니다] 그 전투로 인해 왜병들은 사기가 땅에 떨어져 결국은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붉은 옷'의 장수는 후퇴하는 것을 보고서는 곽재우에게 다가왔습니다. "오래만이구려" 곽재우는 목소리가 귀에 익어 자세히 보았더니 백호를 잡았던 그 사내였던 것이었습니다. "아니.... 이게 뉘시오..!! 참으로 오래만이외다,"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아무 말없이 자신의 옷을 벗어 곽재우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을 왜 내게 주시오?" "이것을 입고 전쟁을 치러면 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외다." 사내는 그렇게 말한 다음 곽재우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또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후 곽재우는 사내가준 '붉은 옷'을 입고 전투에 나가면 매번 승리했습니다. 그 뒤 사람들은 곽재우를 일러 "紅依將軍 홍의장군"이라 부르게되었답니다. 그는 임진왜란이 끝나자 나라에서 부르는 것도 사양하고 자신의 식솔을 데리고 의령으로 가서 그곳에 "望憂堂"을 지어 거취하며 초야에 뭍혀 여생을 보냈습니다. - 끝 - [쇠목재 정상에 있는 쉼터 정자] 의령군은 자굴산과 한우산을 관광지화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우리는 듯합니다 곳곳에 편의 시설을 만들고, 관광객과 등산객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 주어야 할텐데...... 아직까지는 '쇠목재'에서 차량과 사람들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우산 오르는 된비알] '쇠목재'에서 한우산 방향으로 오르는 곳이 가파른 급경사 지역이었습니다 [마당바위에서 내려다 본 '갑을리'방향 "자굴산관광순환도로"] "紅衣天降將軍"이라는 칭호를 받은 忘憂堂 郭再祐 將軍에겐 몇가지 특별한 일화가 있습니다. 첫번째가 과거에 2등으로 급제하였으나 의심 많은 쪼다王 "宣祖"가 내용이 너무 비판적이라고 합격을 취소하는 사건이 벌어졌었지요. 아 무슨 X같은 경우입니까? 요즘 같았으면 王이 탄핵을 받을 일이었지만 당시엔 御命이 헌법이었으니 어쩔수 없었지요 그 일로 郭再祐는 다시는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고, 낙담한 郭再祐는 고향에서 백수 생활을 하며 술을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답니다 [마당바위에서 바라 본 '쇠목재'와 자굴산]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不敗神話를 만들었다면 육지에선 유일하게 "의병대장 郭再祐"만이 백전백승을 하였습니다 이 부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강조하고 싶습니다. "의병"으로서 단 한번도 敗하지 않은 유일한 將軍이 郭再祐인데 많은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적군인 일본놈들에게서 "紅衣天降將軍"이라는 칭호를 받은 忘憂堂 郭再祐 將軍입니다 [마당바위에서 내려다 본 '대의면 신전리'방향 "자굴산관광순환도로"] 세번째 일화 임진왜란이 끝나고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宣祖"가 벼슬을 내립니다 과거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한 자신을 직권으로 낙방시킨 "宣祖"가 내리는 벼슬을 郭再祐가 받겠습니까? "쪼다리 王인 너나 잘 먹고 잘살아라~!! 난 니가 주는 벼슬은 싫다!" 무려 29번이나 벼슬을 내렸는데 모두 거절한것으로도 유명하지요. 열 받은 宣祖가 곽재우를 귀양까지 보내 3년 동안 귀양살이를 시켜도 벼슬을 받지 않았습니다 벼슬의 내용 중에는 많은 높은 벼슬이 있었습니다만, 이순신장군이 맡았던 "삼도수군통제사"라는 벼슬까지도 있었습니다 [페러글라이딩] 의령군 공식 페러글라이딩 활공장이 이곳에 있더군요. 페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사람이 부릅습니다. [우봉지맥 갈림길] "진양기맥"에서 분기하는 "우봉지맥"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많은 진양기맥 종주자들이 '우봉지맥'으로 가 알바를 한다는군요. [우봉지맥 갈림길] 이곳에서 알바를 하는 종주자들은 대부분 北에서 南으로 종주하는 사람들이겠지요 갈림길 표지판이 있으니 "우봉지맥"으로 가지 마시고 우측 '진양기맥'으로 가세요~ [한우산 오르는 길] "한우산" 오르는 길은 평이합니다. 무슨 O.K목장을 가는듯합니다 [한우산을 오르며 뒤돌아 본 지나온 길] 서울의 공동묘지 - 망우리 망우리에 대한 글을 예전에 쓴적이 있는데..... 망우리는 그뜻이 공동묘지로 느껴질 정도로 죽음 같은 것을 연상시킴니다 하지만 '망우리'는 무척 의미있는 뜻이지요 "望憂里"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잊게 해 주는 곳입니다 그곳에 누워 잠들면 아무도 깨우지 않습니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꽃잎도 보이지 않고 까마귀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더러운 아웅다웅 싸우며 살겠다고 부르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잊어버리고 편히 누워 한줌의 흙으로 변해 갑니다 [한우산 오르는 길에서 뒤 돌아 본 '쇠목재'와 '자굴산'] 제가 새삼스럽게 한우산을 오르며 "望憂里"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紅衣天降將軍"이라는 칭호를 받은 郭再祐 將軍의 호가 "望憂堂"입니다 자신의 아호를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수 없는 "望憂堂"이라고 지었으니 그는 그 당시의 정치,경제,사회현상이 얼마나 잊어버리고 싶도록 더럽게 느껴지는 세상이었는지 그의 처신에서도 가늠해 볼수 있겠습니다 어명을 여겨 귀양을 갈 지언정 29번의 벼슬도 사양하고, 生家를 "望憂堂"이라고 이름짓고 자신의 호 까지도 "望憂堂"이라고 칭하며 조용히 살다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공격해 왔을 때 정규군이 무참히 패배 할때에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우리나라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백전백승의 전공을 세우며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한우산 주차장에서 바라 본 "찰비골"] '한우산'은 韓牛山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소와 관계있는게 아니냐고 뭍습니다만 한 여름에도 찬 비가 내린다고 차가울 寒비 雨를 사용하여 寒雨山입니다 寒雨山에서 흘러 내리는 차가운 물이 계곡을 이룬다고 "찰비계곡"이라 한답니다 이 계곡에서는 여름에도 계곡물에 5분 이상 발을 담구고 있지 못한다고 하니 여름철 최고의 피서지라고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한우산 오르는 길에서 뒤 돌아 본 '한우산 주차장'] '우봉지맥'이 분기하여 나가는 산줄기가 뚜렷이 보입니다 [한우산 정상] 한우산 정상으로 유유히 올라 갑니다 [한우산 정상석] 836m - 상당히 높은 산인데도 높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아마도 山勢가 둥글고 나무나 암릉이 없어서 그런 느낌이 드는듯합니다 차가울 寒비 雨가 합쳐진 寒雨山입니다 자굴산이 의령의 형님산이고, 한우산이 동생산이라 하는군요 [한우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진양기맥 마루금] 지나온 마루금 좌측으로도 "자굴산관광도로"가 깨끗하게 포장되어 벽계리 까지 뻗어 있습니다. 한우산과 자굴산은 이제 쉽게 오를수 있게 되었답니다 [한우산 정상에서 바라 본 '자굴산'] 자굴산이 897m이고 한우산이 836m이니 자굴산이 61m 더 높군요 [한우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대의면 신전리'방향 ] 평온한 산골 마을이 산줄기를 병풍 삼아 길게 뻗어 있습니다 [한우산 정상에서 바라 본 '산성산'] 진양기맥 마루금이 지나는 '산성산'입니다 오늘 산행은 여기까지 하고 버스를 타고 하산합니다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에서 올려다 본 '산성산'] 한우산에서 내려와 의령군에서 합천군으로 들어 왔습니다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에서 바라 보는 산성산이 岩山으로 보입니다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에서 올려다 본 '산성산']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 마을] 쌍백면 외초리는 고향의 멋을 한껏 풍기고 있습니다 깨끗하게 정리 정돈이 된 산골 마을입니다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 마을 지킴목] 언제 다시 와 볼려나~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를...... 이곳에서 뒷풀이를 하고 서울로 떠났습니다 [서울백두클럽 회장님과 외초리 이장님] 이 마을을 그냥 지나가는 산객들이라하더라도 우리 마을을 찾아 주어 반갑다고 이장님이 나와 반겨 주었습니다 산행기에 우리 외초리 마을을 잘 소개해 달라고 했는데 제가 아는 자료가 없어 사진 몇장 올렸습니다. 이장님 연세가 1945년생이라니 나이에 비해 무척 젊게 보이시죠? 감사합니다. 이장님~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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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북천마지맥1구간] 명덕삼거리-서파고개-주금산-금단이고개 漢北正脈 雲岳山에서 수원산 사이의 "굴고개" 올라 가는 "명덕삼거리"에서 鑄錦山(814m)-鐵馬山北峰(787m)-鐵馬山南峰(711m )-天摩山(810m)- 백봉(587m)-적갑산(561m)-예봉산(683m)-율리봉(597m)-예빈산(590m)- 능내리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입니다 [天摩枝脈] 매월 둘째주와 넷째주 일요일에 4구간으로 나눠 종주할 예정입니다 [한북천마지맥1구간] 오늘은 제1구간으로서 "명덕삼거리"에서 서파사거리를 건너 주금산을 오르고 "금단이고개"에서 비월교로 하산할 예정입니다 [포천 서파 사거리] 4월12일(일) 오전 8시20분 상봉터미날에서 사창리행 직행버스를 타고 "천마지맥" 마루금이 지나는 포천 "서파고개"에 9시15분쯤 내렸습니다 버스 요금은 3,900원이었고 약55분 걸렸습니다 오늘부터 "천마지맥"을 시작합니다. 天摩枝脈이 분기하는 漢南正脈 명덕삼거리를 찾아 가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앞에 보이는 "서파 입체교차로" 지하차도로 들어가 좌측으로 "포천시청방향"으로 약10분정도 올라 가면 됩니다 [포천 서파 사거리] 저희는 漢南正脈 명덕삼거리를 직접 마루금을 따라 갔다가 되돌아 오려고합니다 길 건너편 "죽여주는 동동주 비빔밥집"(무지무지 유명한 비빔밥집입니다) 옆 골목으로 올라 가면되는데 그 길이 "천마지맥 마루금"입니다. 비빔밥집 뒤로 한북정맥 수원산이 보입니다 [천마지맥 분기점-명덕 삼거리 가는 길] '죽여주는 동동주 비빔밥집' 뒤에 산줄기가 보이시죠? 그 산줄기가 천마지맥 마루금이 지나는 산줄기입니다 [천마지맥 분기점-명덕 삼거리 가는 길] 서파입체교차로 지하차도를 지나 올라 가는길 보다 이길이 더 빠르고 오리지날 길입니다 [천마지맥 분기점-명덕 삼거리 가는 길] 民家를 지나면 바로 마루금입니다. "명덕삼거리까지는 약 10분정도 걸립니다 가는 길의 사진은 여기까지 보여드리고 올때 나머지 사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천마지맥"은 여기 길만 알면 나머지는 고속도로입니다 [명덕삼거리] 약10분이 걸려서 "명덕삼거리"에 왔습니다 실제 와서 보니 삼거리가 아니고 사거리였습니다 바로 앞 이정표가 서있는 옆 산줄기가 "한북정맥 운악산"에서 오는 마루금이며 명덕사거리를 대각선으로 건너 "한북정맥 수원산"으로 이어집니다 "천마지맥"은 이 "한북정맥"에서 좌측으로 분기하여 팔당댐까지 내리 뻗어있습니다 [한북정맥 운악산구간 날머리] 한북정맥의 운악산에서 오는 마루금이 명덕삼거리로 나오는 "날머리"입니다 한북정맥을 종주한 산객들은 모두 여기를 통과 했을 것입니다 [명덕삼거리] 한북정맥의 운악산에서 오는 마루금이 수원산으로 가려면 이 사거리를 대각선으로 건너 앞에 보이는 산으로 올라 가야합니다 "천마지맥"은 좌측 산줄기입니다 [한북정맥 수원산 가는 들머리] [굴고개 가는 길] [천마지맥 분기점] 천마지맥은 서쪽으로 난 좁은 길로 약 20m정도 들어 가면 좌측에 보이는 전봇대 뒤로 올라 가면 됩니다 [천마지맥 들머리] 전봇대 옆 "천마지맥" 들머리 9시 40분에 기나긴 "天馬枝脈"을 start합니다 [서파 사거리로 가는 마루금] 마루금은 비교적 확연하게 잘 나 있습니다 이제 이 길을 따라 다시 서파 사거리로 돌아 가면 됩니다 [서파 사거리로 돌아 가는 마루금] 올라 올때 사진이 여기 무덤 바로 직전까지의 사진이 있습니다. 무덤에서 좌측 능선을 따라 가면 올라 올때 마루금입니다 마루금을 버리고 오른쪽 마을길로 갑니다 [서파 사거리로 돌아 가는 마루금] 올라 올때 마루금을 버리고 마을길로 서파 사거리 건널목으로 갑니다. 시간 단축을 위해서.... [서파 사거리] 서파 사거리 '죽이는 동동주 비빔밥집'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서파 사거리] 횡단보도 건너편으로 바로 진입하면 오늘 길찾기는 끝나고 오로지 외길을 따라 길잃을 염려 없이 계속 걷기만 하면 됩니다 [천마지맥 주금산 가는 길] 오늘 '천마지맥 1구간 산행기'는 간단합니다 걸어야 할 거리는 약17km이지만 길안내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 얘깃꺼리도 없고 구경꺼리도 없어 단순 할수 밖에 없으니 산행기를 쓰는 필자 '파란문'은 편하고, 애독자 여러분들은 재미없을 것입니다 ㅎㅎ [천마지맥 주금산 가는 길] 구경꺼리 거의 없는 산길을 외롭게, 혹은 호젓하게 7시간 30분을 걷습니다 열심히 걷는 일 이외에는 별로 할일이 없으니.....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할까 고심 중입니다. ㅎㅎ [천마지맥 주금산 가는 길] 천마지맥은 다른 곳의 지맥과 달리 서울 근교에 있어 접근성이 좋아 많은 산객들이 다녀 갔기에 길이 잘 뚤려있습니다 [개주산] 서파사거리에서 30~40분 걸으면 좌측으로 시커먼 산봉우리가 하나 나타납니다 "개주산"이라고하는 이름이 조금 괴상한 산이 시꺼먼스로 보입니다. 높이가 675m이며 앞으로 계속 개주산을 옆에 끼고 전진합니다 [천마지맥 주금산 가는 길] 길을 횟갈리게하는 안부는 없습니다. 조그만 안부를 몇개 지나칠 뿐입니다. 모두 직진하면됩니다 [천마지맥 주금산 가는 길] 이런 枝脈 마루금에는 일반등산객이 찾지 않기 때문에 엄청나게 조용합니다 조용한 산행을 좋아하는 산꾼들이 주로 枝脈 을 다닙니다 [임도] 처음으로 새로운 길을 만나는데 '林道'입니다. 낙옆만 밟고가다가 새로운 것이란게 조금 넓은 '林道'입니다. ㅎ [임도] 林道'를 따라 한동안 걷습니다 [임도 갈림길] 처음으로 유의하여야할 갈림길이 나옵니다 새로운 임도를 만나는데 임도를 버리고 가운데 산길로 직진하여 나아 가야합니다 [헬기장] 처음으로 헬기장이 나옵니다. 헬기장을 지나면 암릉구간이 이어집니다. 조금 경치가 좋아질려고합니다. [한북정맥 수원산 구간] 헬기장을 지나면 산마루에 올라섯다는 걸 의미하기에 좌우를 조금씩 조망 할수 있습니다 우측으로는 "한북정맥"의 "수원산"이 잘 조망됩니다만, 날씨가 좀 않좋아 흐릿하게 사진이 나오는군요. 아랫쪽 마을이 포천시 내촌입니다 [주금산이 아득히 보입니다] 이곳에서만 천마지맥 주금산까지의 산줄기가 조망됩니다 사진에서는 역시 흐릿합니다만 실제는 "주금산"까지 볼수있습니다 [583m봉] 수많은 봉우리를 넘습니다만 제법 높은 봉우리인 583m봉에 오릅니다 [583m봉] 10시 40분경에 도착했습니다. 아직까지 한번도 쉬지않았습니다. 이곳에서 한숨 돌리고.... [개주산] 멀리만 보이던 "개주산"이 이젠 바로 옆에 와 있습니다 많이 온것입니다. '개주산' 뒤로 "서리산"이 전설처럼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잇습니다 [무명봉] [642m봉] '개주산' 갈림길이 있는 642m봉을 오릅니다. 이곳에도 "防火線"을 만들어 놨는데, 실효성 없이 만들어 놨군요 최소한 각흘산에 있는 防火線 정도는 되어야 산불을 어느 정도 차단할수 있을것입니다 [642봉에서 내려다 보는 내촌] [642봉에서 바라 보는 개주산] [642봉에서 바라 보는 694봉과 "주금산" 정상] 이제 오늘 산행의 하일라이트인 "주금산" 정상이 가까워졌습니다 뒷쪽에 보이는 산이 "주금산"입니다. "주금산"이라니까 발음적으로는 '주검' 같은 뉘앙스가 풍기는군요. 그러나 "주금산"은 鑄錦山으로 비단산으로 불리워진답니다 여하튼 힘들게 왔습니다 [개주산 갈림길] "防火線"이 끝나는 지점이 "개주산 갈림길"입니다 좌측이 개주산으로 가고 우측이 주금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11시 45분경에 이곳을 통과합니다 [개주산 갈림길에서 바라 보는 694봉과 주금산 정상] '주금산'정상이 더 가까워 옵니다 [사기막골 갈림길] 684m봉을 넘으면 "사기막골 등산로" 갈림길을 만납니다 여기서부터 주금산 일반 등산코스"입니다 [사기막골 갈림길] 베어스타운 옆 사기막골에서 올라 오는 등산로와 만나는 곳입니다. 대부분의 '주금산' 일반등산객들이 이용하는 곳이라 생각하면됩니다 [암릉구간] '주금산'을 肉山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정상부는 岩山이더군요 [점심식사] 685m봉을 넘어 가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주금산 정상 바로 못미쳐서 점심식사를 한것입니다 12시 20분경입니다 [정상을 향하여] 식사를 하고 오르막을 오르면 힘이 더 듬니다 그러나 정상을 코 앞에 두고 오르니 한결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베어스타운 갈림길] 정상을 코 앞에 두고 "베어스타운"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만나는 곳입니다. [베어스타운 갈림길] 정상까지 90m남았다고 하는군요. 정상이 보입니다 [주금산 정상] 드디어 "주금산"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주금산 정상] 1시 10분에 도착했으니, 서파 사거리에서 명덕삼거리를 갔다가 여기까지 오는데 3시간 40분이 걸렸습니다 鑄錦山 정상은 제법 넓은 공간에 정상석이 독특한 모양을 하고 힘겹게 오른이들을 반기고 있습니다 [주금산 정상석] 는 쇳물을 부어 용기를 만든다는 의미이고, 은 '비단'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산 아래 동네이름이 "비금리"로 "선비들이 놀러와 거문고를 숨겨 놓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합니다. 가야금은 한자로 伽倻琴이라고 쓰는데 비단 錦가야금 琴은 틀리는데... 가야금과 거문고의 차이점 아세요? 단순비교를 하면 가야금은 12줄이고 거문고는 6줄이죠. ㅎㅎ [주금산 정상 이정표] [등상코스 안내도] [정상 헬기장] 정상에서 철마산 방향으로 넓은 헬기장이 있습니다. 주금산 정상에는 헬기장이 두군데나 있더군요. [주금산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베어스타운] 오른쪽 계곡이 포천시 내촌에 있는 "베어스타운"입니다 [독바위] 鑄錦山 정상 우측에 鑄錦山을 대표하는 봉우리인 "독바위"가 우뚝 솟아있습니다 禿은 '대머리'라는 뜻이지요 서울 금천구에 '독산동'이라고 있지요. 요즘 그곳에 가면 미국 수입 쇠고기가 100g당 1,000원에 살수있는 푸줏간이 움집해 있습죠. 그 '독산동'이 禿山洞'입니다 [주금산 헬기장에서 바라 보는 불기산 서리산 축령산] 주금산에서 분기하는 축령분맥이 확연하게 산줄기를 보여줍니다 '축령산' 뒤에 아스라이 보이는 산이 명지지맥의 끝 청평 호명산의 건너편에 있던 깃대봉 사진의 우측 마을이 수동면입니다 수동면의 계곡을 통칭해서 "수동골"이라고 알려져있지요? 여름엔 많은 피서객들이 찾는 곳입니다 그러나 지난 1998년도 폭우로 홍수가 나 '수동골'이 완전히 초토화 되었지요 아름답던 '수동골'이 自然美를 많이 잃고, 시멘트 콩크리트들로 보수되었더군요. [주금산 헬기장에서 바라 보는 주금산 정상과 "운악산", "개주산"] 간신히 "雲岳山" 사진 한장 건졌습니다 앞 좌측이 "주금산 정상부"이고 가운데 있는 산이 "개주산"이며 가운데 멀리 한북정맥"雲岳山"이 보입니다. '개주산' 오른편에 "가평베네스트 C.C."가 보입니다. 제가 자주 다니던 골프장이지요 [군 방카] [주금산 팔각정] '주금산 팔각정'은 정상에 있지않고 바람이 덜부는 곳에 세워져있습니다 [팔각정에서 바라 보는 독바위] 포천시 문화원이 설명하는 지명의 유래에서 이 바위는, 옛 사람들이 德의 상징이라 하여 德岩(덕바위)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근처에서 보면, 기이하면서도 웅장하게 생겼지만, 친근감을 주어 무엇인가 의지하고 싶은 심정이 생긴다고 하여 德이 있는 바위라고 지어졌다고합니다 달리 독바위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바위의 형상이 먼 곳에서 보면 흡사 독(甕)과 같이 생겼기 때문이랍니다. 또한 禿바위라고도 하는데 禿은 '대머리'라는 뜻이지요? 서울 금천구에 '독산동'이라고 있지요. 요즘 그곳에 가면 미국 수입 쇠고기가 100g당 1,000원에 살수있는 푸줏간이 움집해 있습죠. 그 '독산동'이 禿山洞'입니다 [팔각정 옆 헬기장] "천마지맥 2구간"에 가야할 "철마산과 "천마산"이 보입니다 [헬기장에서 바라 본 독바위] 독바위에 머리카락이 조금 나 있네요. ㅎㅎ [헬기장에서 바라 보는 가야할 철마산 북봉 아래 금단이고개] 오늘 가야할 산행 구간의 끝이 "금단이 고개"인데 "금단이 고개"는 앞에 보이는 "철마산 북봉" 바로 앞에 있습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이제까지 온 길 많큼 남았습니다. [헬기장 아래에서 휴식] 오늘은 선두가 앞에서 후미를 기다려 주었습니다 '서울백두클럽' 횐님들이 서로 배려하는 분위기가 무러익어 가고 있습니다 [주금산 하산] 주금산을 내려 갑니다. 앞으로도 많은 봉우리를 오르내려야 금단이고개까지 갈수 있습니다 [비금리 하산 갈림길] 일반등산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주금산 등산로 "비금리 방향"으로 가는 안부입니다 [비금리 하산 이정표] 비금산을 찾은 일반 산객들은 모두 이곳에서 하산합니다만 우리는 枝脈을 감으로 계속 '철마산' 방향으로 가야합니다 걷고....또 걷고.... [주금산 정상] 주금산 정상은 점점 멀어집니다 [650m봉] 650m봉우리에서 휴식을 취하고 주변 경관을 감상합니다 이제 큰 봉우리는 대부분 넘었습니다. [광릉 C.C.] 650m봉우리에서 우측으로 "광릉 C.C.가 잘 보입니다. "광릉C.C."가 있는 곳이 "팔야리 八夜里"라는 곳인데,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 있다가 귀환하는 도중 이곳에서 여덟 밤을 묵고 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천마지맥 2구간] 가운데 시커먼 산이 "철마산 북봉"이고 그 뒤 제일 먼곳에 있는 산이 "천마산"입니다 다음 구간은 오늘보다 더 높은 산을 더 많이 넘어야합니다 하지만 오늘 구간은 이제 끝나 갑니다 [주금산 정상] 주금산 정상은 완전히 멀어져 갑니다 "광릉"은 세조의 무덤이지요? [헬기장] 1구간 마지막 헬기장입니다. 이곳에서 주금산을 찾은 산객들을 만났는데 지맥을 종주하는 중이라고 하니까, 지맥이 뭐냐고 물어 보는 초보산객들이었습니다 백두대간, 정맥의 새끼 산줄기라니까 이해하기 쉽다고...깔깔깔 웃었습니다 '서울백두클럽 카페'와 '홍어와 무인도'를 방문하겠다고 했는데....왔으면 손 들어요! ㅎㅎ [금단이 고개 가는 길] "철마산"이 다가 옵니다. 금단이 고개도 다가 옵니다 [금단이 고개] 이름이 그럴듯하여 대단한 고개인줄 알았더니 그렇고 그런 고갯길 '천마지맥 1구간' 마루금 종점입니다 3시 30분경에 도착했습니다 [금단이 고개 이정표] '금단이 고개'에서 오른쪽은 광릉내 팔야리로 내려 가는 길이고, 좌측으로는 수동면 금단계곡으로 '비월교'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좌측 '금단계곡' - '비월교'료 내려 갑니다. 다만 다음 제2구간 들머리가 될 이곳 '금단이고개'는 광릉내에서 오를려고 했는데 거리가 길고 엄청 괴롭다고하네요. 그래사 다시 '비월교'에서 오를 예정 [금단계곡 하산] [금단계곡] [금단계곡] 금단계곡에서 차가운 맑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씻고, 휴식을 취하고.... [금단계곡] [비월교] 오늘 산행의 마지막 [비월교 산행 날머리] 이곳에서 330-1번 청량리에서 비금리까지 다니는 좌석버스를 타고 상봉터미날에서 내려 회식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총 이동거리 16.3km 전체 이동시간은 7시간 26분 전체 평균 이동속도는 2,2km [산행 개념도] 다음 제2구간에서 다시 만나요~~!!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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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南山 벚꽃 축제 잔인한 달이라고하는 4월 어두운 겨울에서 벗어나 화려하게 너무나 화창하게 다가오는 4월 그래서 잔인하다고까지 했겠는가 무척이나 오랜만에 서울 南山에 나들이를 했습니다. 그것도 옆지기와 함께..... 벚꽃, 개나리꽃이 허드러지게 핀 南山을 한바귀 빙 돌고 왔습니다 [장충체육관 앞 사거리] 4월11일 토요일 오후 2시 지하철3호선 동국대역으로 나와 장충체육관과 장충단공원이 있는 장충동 4거리에 섯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南山을 오르며, 처음으로 "제2회 남산벚꽃축제" 구경을 하러 나온것입니다 그것도 와이프와 함께..... [장충체육관 앞 사거리에서 바라 본 '남산타워'] "여의도 벚꽃놀이"는 자주 갔었습니다만 南山에 벚꽃구경하러는 처음입니다. 어느 학교 선생님이 11일(금)에 구경갔다온 안내를 보고 기회를 잡았습니다 [장충체육관 앞 사거리에 있는 돼지 조각상] 특히 등잔불 밑이 어둡다고... 서울에 살면서 남산을 올라 본 사람들은 오랜만에 한번 정도씩이거나 아예 올라 보지 못한 분들도 무척 많을거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홍어와 무인도" 애독자분들을 위해서라도 '파란문'이 한번 다녀와 못가본 분들에게 간접 경험이라도 시켜 드리고쟈 직접 나섰습니다. 저 착하죠? ㅎㅎ [장춘단 공원 입구] 장춘동 냉면을 한그릇 사먹고 오후 2시 30분에 남산을 오릅니다 저는 "장충단공원"에는 처음입니다. 차를 타고 지나 치기만 했지 직접 들어가기는 처음입니다. 우리가 가볼 곳이 얼마나 많은지,,, [수표교] 장충단공원 입구에는 "水標橋"가 멋진 위용을 자랑하며 놓여있습니다 이 다리는 돌다리로서 원래는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발전하는 서울이라는 미명아래 회색빛 콘크리트로 서울을 뒤덮는 1959년에 늘어나는 자동차길을 만들기 위해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답니다. 청계천 - 원래 淸溪川으로 맑은 물이 흐른다고 붙여진 이름이지만 당시 '청계천'은 하수구를 의미 할 정도로 서울의 모든 생활하수가 흘러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청계천을 콘크리트로 복개하고 차량통행에 도움을 주고 악취를 감추었습니다 "水標橋"는 조선 세종 2년(1420)에 세운 다리로, 당시에는 이곳에 소시장(牛市場)이 있었다 하여 ‘마전교’라 불리웠답니다. 세종 23년(1441) 수표(水標)(보물 제838호)를 만들어 이 다리 옆에 세우고 청계천의 물높이를 재어 홍수에 대비하도록 하였고, 영조 36년(1760)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경(庚)·진(辰)·지(地)·평(平)’이라는 글씨를 새겨두어 4단계의 물높이를 측정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水標橋"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청계천을 건너는 다리로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홍수 조절을 위한 알림판 역활도 하였답니다 다리에 설치되 있던 "水標"는 다리를 이곳으로 옮길 때 함께 옮겨왔다가 1973년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奬忠壇址] 장충단공원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아시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外勢의 침략으로 패망해 가는 조선왕조의 피맺힌 恨을 토로하며 日本 침략자들에 대항해 피흘리며 죽어간 애국충절의 魂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제단"입니다 특히 을미사변, 즉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에 목숨 바치며 싸우다 죽어 간 시위대장 홍계훈, 염도희, 이경호 열사들을 제사 지내는 곳이었답니다 애국충절의 魂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제단"인 奬忠壇은 6.25전쟁의 화마에 전소되고 이곳에 奬忠壇이 있었다고 알리는 奬忠壇址碑만이 홀로 서 있습니다 [奬忠壇址 표지석] [奬忠壇碑] 한자로 된 `獎忠壇'의 세 글자는 고종황제의 어필이라고 합니다. 비(碑) 뒷면에는 충정공 민영환이 글을 짓고 직접 쓴 143자의 비문이 음각돼 있습니다. 그 내용 중 일부를 보면 “군인으로서 어려움에 당면해서 죽은 사람이 많으니 슬프다. 그 서릿발, 눈보라에도 늠름하고 당당했던 뛰어난 절개는 밝기가 해.별과 같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奬忠壇碑 설명] [奬忠壇 公園] 奬忠壇 公園에 오니 전설적 가수 "배호"가 부른 "안개낀 장충단 공원"이 생각 납니다. "대전 부르스"를 작사하신 '최치수선생'이 작사하시고, 배상태씨가 작곡한 "안개낀 장충단 공원" 이 노래는 단순한 연민의 노래가 아니고 日本 침략자들에 대항해 피흘리며 죽어간 애국충절의 魂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단순한 유행가로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그 이유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奬忠壇 公園 롤러스케이트장과 동국대학교 건물] 배호의 본명은 '배만금'이며, 1942.4.24.중국 산동성 제남시에서 부친 배국민 독립투사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독립투사의 아들입니다. 부친의 별세와 6.25 전쟁으로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다 겨우 중학교2년을 다니고 맙니다 다행히 당시 밴드마스타였던 외삼촌 '김광빈'으로부터 드럼을 배워 '김광빈악단'의 드러머로 음악계에 입문하여 전설적 가수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그의 노래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지요? 모두 잘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1971년 11월 11일 그를 괴롭히던 신장병으로 '스타'가 유명을 달리하고 사라졌습니다 아직 살아 있다면 67세밖에 않되는 나이인데 39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가 지난날의 추억을 그리워하며 슬픈사연이 깃든 애상의 표현으로 노래한 것은 어쩌면 배호 자신의 운명 같은 가련함을 추억속에 그려보며 구슬프고 애달프고 절절하게 숨넘어 가는 목소리로 불러진 노래들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안개낀 장충단 공원"은 독립투사인 아버지를 많이 생각하며 불렀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별한 연인을 생각하며 부르는 노래로 알고 있으나 잘 음미해 보시기 바람니다 안개낀 장충단공원 최치수 작사/ 배상태 작곡/배호 노래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 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번 어루만지며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쥐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 사람이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 있는데 외로움을 달래 가면서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이준 열사 동상] [이준 열사 프로필] [동국대 정문과 南山 올라 가는 길] '장충단공원'에서 남산으로 올라 가려면 동국대학교 정문 바로 옆으로 난 계단으로 가면 됩니다 사진의 우측이 동국대 정문이고, 좌측이 남산 올라 가는 계단길입니다 [南山 올라 가는 길] 首都 서울의 중심공원 다웁게 모든 시설이 깨끗하게 잘 정비되 있습니다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비] 최현배선생은 우리나라 한글을 반석 위에 올려 놓으신 분이죠 근현대에 와서는 한글=세종대왕이 아니라 한글=최현배라고 할 정도이지요 [외솔 최현배 선생의 詩] [南山 올라 가는 길] 허드러지게 핀 벚꽃 아름답습니까? 물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奬忠壇 公園의 벚꽃은 생각해 봐야할 점이 있습니다. 일본 쪽바리들이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식민지를 만들었을 때 信念있는 테러리스트 안중근의사는 일본 총독 "이또 히로부미 伊藤博文"를 살해합니다. 열 받은 쪽바리들은 "애국충절의 충신들을 招魂하는 제단인 奬忠壇"에서 제사를 금지하고 이곳 奬忠壇을 놀이公園으로 만들어 버렸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박문사 博文詞"라고 하는 신사를 만들고 "伊藤博文 이또 히로부미"의 넋을 달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벚꽃나무를 심었답니다 [南山 올라 가는 길에서 뒤 돌아 본 '신라호텔'] "伊藤博文"의 넋을 기리기 위한 "박문사 博文詞"는 해방과 함께 부셔졌지만 아직도 벚꽃나무는 남아 봄이면 허드러지게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제가 이 벚꽃길을 걸으면서도 기분이 별로 좋지 못한 사연을 이해 하시겠습니까? 벗꽃 그 자체야 나무랄수 없이 아름답지만 역사를 쬐끔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이곳의 벚꽃이 오히려 반감을 가질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南山 올라 가는 길 옆 동국대학교] [南山 순환로] 동국대 정문에서 계단을 따라 오르면 "남산순환도로"를 만납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올라 가야합니다 저는 내려 갔다가 다시 올라왔습니다. 여기서도 저의 주특기인 알바를 했습니다. ㅎㅎ [南山 순환로] 아래쪽으로 내려 가는 길. 계속 가면 케이블카 타는 곳이 나옵니다. 걸어서 남산 정상을 가려면 왼쪽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기억해 두시기 바람니다 [南山 순환로에서 바라 본 '남산타워] 벚꽃은 奬忠壇 公園이 있는 南山의 동쪽에만 집중적으로 피어있습니다. 그 이유는 알려 드린바와 같습니다. 남산타워가 보이는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石虎亭] "石虎亭"이라고 하는 활쏘는 활터가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國弓을 즐기고 있더군요. [石虎亭] 화살이 꽂히는 과녁이 상당히 멀리 있습니다. "국립극장"의 위용도 함께 볼수있군요 [石虎亭 안내] [南山 순환로] 석호정을 지나 계속 올라 갑니다 나름대로 벚꽃 구경도 하며.... [南山벚꽃축제] 南山벚꽃축제장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음악회를 하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구경은 못했습니다 [南山 순환로] [南山 정상으로 가는 버스] 순환로를 따라 가면 국립극장쪽에서 올라 오는 南山車路를 만납니다. 남산 오르는데도 버스를 타고 오르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버스는 만원이었습니다 [南山타워로 올라 가는 길] 저는 걸어서 올라 갑니다 자칭 등산 좀 한다는 인간이 남산을 버스로 오르면 되겠습니까? ㅎㅎ 걸어서도 20여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걸어 가야 이것 저것 구경을 더 많이 할수 있습니다 [漢陽城廓] 조금 걸어 올라 가면 漢陽城廓을 만납니다 [漢陽城廓 탐방로] 우측으로 '漢陽城廓 탐방로'가 잘 설치되 있습니다 車路를 버리고 '漢陽城廓 탐방로'로 오릅니다 漢陽城廓 탐방로는 계단의 길이가 250m로 상당한 된비알이니 천천히 걸어 오르시길... [漢陽城廓 탐방로] 서울이라는 이름이 탄생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제가 "여성봉-오봉-도봉산-우의암 산행기"에서 한번 쓴적이 있습니다 南山의 漢陽城을 보니 다시 한번 더 얘기를 하지 않을수가 없군요 고등학교 국어(고문)시간에 "서울"에 대한 어원을 배웠을 것입니다 서라벌>셔블>서울로 음운변화가 있었다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아무런 반론없이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아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이 주로 서라벌>셔블>서울은 터무니 없는 말도 않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漢陽城廓 탐방로] 서라벌>셔블>서울의 서벌은 한자로 徐伐로 사용했다고도 합니다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이 현재 우리나라의 '서울'이라는 것이 위치상으로도 문제가 있고 음운변화로도 문제가 있다고 하는 목소리가 큽니다 정말로 서울은 서라벌>셔블>서울의 음운변화를 거치며 탄생된 것일까? 저와 함께 추적 해 볼까요? [漢陽城廓 탐방로] "서울"에 대한 명칭에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첫째가 우리가 이미 학교 때 배운 서라벌>셔블>서울이라는 것이고.... [南山 山嶽會] 이곳은 남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체력단련장과 친목 모임터인듯합니다 1884년에 일어 난 갑신정변과 그 이후 外勢들의 침탈 음모들이 난무하는 세상을 거치고 결국 1910년 나라를 빼앗긴 한일합방 이후에는 이런 비참한 說도 있었습니다. "서러워 울고있는 도시니까 서울로 부른다..." 이 說은 백성들의 입에서 나온 한탄의 말이겠지만 이 또한 하나의 說입니다 [南山 山嶽會 亭子뒤 '남산타워' 가는 산길] "서울"이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정식 명칭으로 사용한것은 해방후 1946년 8월 16일 미국군정하에서 미국식 직제 개편으로 경성부→서울특별자유시로 경기도에서 분리되면서 '서울'이라는 이름이 새로이 탄생 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조선 개국과 동시에 한성-한양이라 불리워져 왔고 일제 강점기 시대엔 "경성"으로 명명되어 왔습니다. [南山 山嶽會 亭子뒤 '남산타워' 가는 산길] "서울"에 대해 제가 여러 참고 문헌들을 읽어보고 그 중에서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학설을 지금 부터 간단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특히 백승현씨가 쓴 '어디서 마음을 구하랴'라는 책을 주로 참고하여 알려 드리도록하겠습니다 [南山에서 두번째 높은 봉우리 정상] 서울은 왜 한자가 없을까? 서울은 한문상의 표기가 없고 대신에 한양(漢陽) 또는 漢城으로 되어 있습니다 서울은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천도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조선 건국과 함께 탄생된 도시가 오늘의 '서울'이 되었는데 탄생 될때의 이름이 漢陽이고 한양의 외곽에 城을 쌓고 난 다음에 漢城으로도 불리워졌습니다 그래서 서울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찾을려면 漢陽의 탄생 과정을 추적해 보아야합니다 [南山타워로 올라 가는 길] "漢陽城廓 탐방로"와 "산길을 따라 봉우리를 넘으면 다시 남산순환차로와 만납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한 다음 궁궐을 짓고 도성을 쌓으려 할 때 그 성곽을 쌓는 기준선을 어떻게 잡아야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더하고 있던 어느 날 태조 이성계가 삼봉 정도전, 무학대사와 함께 협의를 하고 있는데 큰 눈이 내렸답니다 눈이 한양을 둘러 싸고 있는 산능선을 따라, 능선 밖에는 눈이 많이 쌓여있고, 능선 안쪽에는 눈이 조금 쌓여졌답니다 그 상황을 눈여겨 살펴본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 무학대사는 성곽을 쌓을 윤곽을 그리고 눈이 많이 쌓인 곳과 적게 쌓인 곳의 경계선을 따라 도성을 쌓게 했다고 합니다 한양과 한양 밖에 내린 눈이 경계선을 그어 준 것입니다 [南山타워로 올라 가는 길]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린 곳과의 경계선을 따라 쌓은 都城은 산의 능선을 따라 북악산-인왕산-남산-동대문에 있는 낙산을 연결하는 것으로 둘레가 40리에 이르렀습니다 즉 한양성곽은 "눈 雪" 경계선을 따라 건설된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이 "한양의 울타리"를 만들었다고하여 눈雪자를 써서 '설울'이라고 불렀습니다. 서울은 도성으로 한 때 설성雪城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다시 '설울'로 불리워 지면서 '설울'의 "ㄹ" 복음이 묵음화 되면서 서울로 발음 되어진 것이랍니다 요약하자면 서울은 雪울타리 →雪울 → 설울 →서울로 된 것이라 합니다 저는 이 이론이 가장 신빙성 있다고 생각 되며 또한 이것은 각종 기록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漢陽城廓] 다시 漢陽城廓을 들어 서면 남산의 정상부에 오게 되는 것입니다. [南山타워] [南山타워] [현 위치 안내도] 남산 주차장에 있는 현 위치 안내도 [南山타워 주차장] 버스를 타고 내려 가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끝도 없습니다. 걸어가면 건강에도 좋고 시간도 오히려 절약되고 경제적인데... [버스 운행 정보] 걸어서 남산 오르기도 힘드시는 분들을 위해 버스 운행 정보를 알려 드림니다 [주차장 매점과 중국식당] 마실 것을 아무것도 준비해 오지 않아서 마실것을 사러 매점에 들어 갔는데 매점은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모두 저와 같은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어 캔맥주와 음료수 사는데 10분이 걸렸습니다 앞으로 남산을 오르실 분들은 베낭에 미리 음식물을 준비해 오시기 바람니다. 저도 앞으로 온다면 반드시 베낭을 메고 음식물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옆의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파는데 4,500원이더군요 [캔맥주 한잔] 와이프는 맥주, 특히 카스를 무척 좋아합니다. 술꾼인 저는 음료수 마시고 와이프는 맥주 한캔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습니다 앞모습은 보여 드리지 않습니다. ㅎㅎ [일본 관광객] 관광버스를 타고 단체로 오는 행렬은 거의 모두 일본사람들이었습니다 여하튼 반가운 일입니다 [南山 정상부] 人山人海를 이룹니다 [南山 '팔각정'앞 농악 공연] 흥겨운 농악을 공연하고 있었습니다. 운이 좋았지요. 2시에서 3시 사이에 하는듯... [南山 '팔각정'] 南山의 本名은 목멱산(木覓山)입니다 覓은 '찾을 "멱"이더군요 木覓山은 높이가 262m로 목멱산·인경산·마뫼 등으로도 불렸으며, 기반암은 화강암이랍니다.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 북쪽의 북악산과 함께 서울의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으며 漢陽城廓의 중요지입니다 [南山 '팔각정'안에서 바라본 '농악대 공연장'] [南山타워 앞] [서울 N 타워] [서울 N 타워] [서울타워 매표소] [서울타워 요금표] 서울타워에 들어 가는데 입장료를 내야하더군요. 입장료가 무려 어른 한사람당 7,000원이더군요 전망대까지 엘리베이터 타는 요금이 7,000원이면 좀 쎄지요? 그리고 점심식사는 26,000원/1인, 저녁은 38,000원/1인 합니다 휴~ 돈없으면 들어 가 보기도 어려운데, 다행히 워낙 복잡해서 매표 매진이 되어 돈을 쓸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다행이죠? ㅎㅎ [南山烽燧臺] [南山烽燧臺 설명] [南山烽燧臺에서 바라 본 서울시내] [南山烽燧臺에서 바라 본 서울시내] 바로 앞 건물이 '케이블카' 타는 곳입니다. 좌측 산이 "인왕산"이고, 가운데가 "북악산", 그 뒤에 어렴푸시 보이는 "북한산" [케이블카를 타려는 사람들의 행렬] 참을성이 많으신 분들만 '케이블카'를 타세요. 무지 오래 기다려야합니다 걷지 못하는 분들과 함께.... [팔각정과 서울타워] 節彼南山霄漢連 扶輿磅礴見千年 如雲如蓋葱蘢氣 散作陽和布四埏 높다란 저 남산은 은하수와 연했는데 아름다운 기운 충만하여 천 년을 보겠네 구름 같고 일산 같은 숲의 무성한 기운이 화창한 봄기운으로 화하여 사방에 퍼지누나 [케이블 카] [하산하는 길에 있는 '전망대'] [전망대에서 바라 본 서울] 서울의 대표 산인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조망됩니다 [전망대에서 바라 본 서울] [남산 순환차로] 남산에서 계단을 내려 오면 남산순환차로를 만납니다 [상행 케이블카 타는 곳] 이곳에도 남산으로 올라 가려는 사람들이 케이블카를 타려고 줄을 길게 서 있습니다 [남산 케이블 카] 멋진 사진으로 케이블카를 탓다고 대리 만족하시기 바람니다 ㅎㅎ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올려다 본 남산] 충무로 "지하철 명동역"에서 남산을 올려다 봤습니다 [明洞] 우엑!!~~ 명동을 지나 가려고했더니 발 붙일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1921년 대공황 이후 최고의 불경기라고하는데 明洞은 예외인가 봅니다 [明洞] 요즈음 明洞에는 일본 관광객들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하네요 현수막도 일본어 투성이었습니다. 불황에 조금은 다행이라 여겨집니다 [두산빌딩 지하 '맥스 생맥주'] 와이프가 가자고한 을지로입구 두산빌딩 지하에 있는 "맥스 생맥주집"에서 훈제 닭고기와 생맥주를 먹으며 모처럼 데이트를 했답니다 화사한 봄날에 나들이 한번 못하신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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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谷山 山行記 양주시청-제1보루-제2보루-불곡산 상봉-상투봉- 임꺽정봉-약수터-대교아파트 [불곡산 산행 지도] 불곡산 종주는 양주시청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양주시청의 왼쪽 "양주시의회" 건물에서 시작하는 코스와 양주시청 동두천쪽 끝지점에서 시작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양주역] 4월5일(일) 오전 10시 30분에 양주역에 도착했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山友와 만나 佛谷山 산행을 시작합니다 양주역에서 불곡산 산행 들머리인 "양주시청"까지는 1-2km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산객들이 양주역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양주시청"이나 "백화암", "대교아파트"등 산행 들머리로 가더군요 [양주역에서 바라 보는 불곡산] 멀리 佛谷山이 토끼 귀 모양을 하고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있습니다. 오늘도 약간의 안개가 끼어 시야가 흐릿해 사진이 선명하지 못합니다 [양주시청 가는 3번 국도] 우리는 양주역에서 걸어서 "양주시청"까지 이동합니다. 산행 들머리까지 약 15분 정도 걸으면 됩니다 동두천에서 의정부-서울 잠실-성남 갈마터널을 지나 이천-장호연-충주-문경새재-상주- 김천-거창-안의-산청-진주-삼천포로 빠지는 "3번국도"가 지나고 있습니다 [양주시청 가는 '3번국도'에서 바라 본 '불곡산'] 佛谷山 산행 산줄기가 뻗어 있습니다. 우측 "양주시청" 뒷산으로 올라 저 멀리 "토끼 귀"처럼 생긴 불곡산으로 갑니다 [양주시청] 이곳에서 등산로 입구는 양주시청에서 좌측 "양주시의회" 뒷길로 올라도 되고, 동두천 쪽으로 올라가 양주시청이 끝나는 지점의 등산로 입구로 올라도 됩니다. 우리는 동두천 쪽 양주시청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들머리로 갑니다 참고로 대부분의 산객들은 "양주시의회" 뒷길로 오르더군요. 어느 쪽으로 가나 결국 다시 곧 만납니다 [산행 들머리] 동두천 방향 양주시청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산행 들머리에 왔습니다 [불곡산 등산 안내도] 불곡산 등산로는 여기까지만 안내하면 더 이상 안내해 드릴 필요가 없이 간단합니다 능선을 따라 오직 하나의 길 밖에 없으니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전혀 없습니다 [등산로 입구] 등산로에 접어 들어 뒤 돌아 보았습니다. 이 산행기만 읽으면 불곡산은 혼자서도 얼마던지 갈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일사천리입니다. 오로지 외길 11시 정각에 산행을 시작합니다 [양주시청 뒤를 돌아 가서 만나는 등산로] 양주시청 뒤를 돌아 가면 "양주시의회"에서 올라 오는 등로와 만납니다 [등산로] 등산로로 접어 들면 "양주시의회"에서 올라 오는 산객들과 만나므로 산객들의 수가 부쩍 늘어 납니다 [불곡산 제1보루] 약25분 정도 오르면 불곡산의 자랑 보루堡壘가 나옵니다 불곡산 9개의 보루堡壘중에 "제1보루"입니다 [불곡산 보루에 대한 안내판] 佛谷山 보루(堡壘)에 대한 안내가 있습니다 佛谷山에는 9개의 보루(堡壘)가 있는데 오늘 산행하는 코스에서는 6개를 볼수 있습니다 보루(堡壘)는 山城의 일종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최후의 보루"라고 할때의 그 '보루'입니다 사전적 의미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돌이나 콘크리트 따위로 튼튼하게 쌓은 구축물" [불곡산 제1보루] 불곡산 보루는 작은 산성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보루의 흔적을 찾기도 어려울 정도로 무너졌습니다 [불곡산 제1보루 봉우리] 양주시청에서 오르면 처음으로 오르는 봉우리가 "제1보루 봉우리"입니다 240.6m봉우리이며 양주시청에서 약 25분 정도 걸렸습니다 [불곡산 제1보루 봉우리에서 바라 보는 불곡산 정상] 제1보루봉에 오르니 佛谷山 정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佛谷山 정상인 "상봉"과 "임꺽정봉"은 "토끼 귀"인지 "고양이 귀"인지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상이 어디인지 얼마나 왔는지 알아보기 쉽습니다 "상봉"과 "임꺽정봉"이 하나의 이정표 역활을 하기때문이죠 [불곡산 제1보루 봉우리에서 제2보루로 가며 바라 보는 불곡산 정상] 제1보루봉에서 제2보루봉으로 가면서 '불곡산정상'을 바라봅니다 점점 정상이 다가 옵니다 [제2보루봉 오르는 등로] 佛谷山은 주말 나들이 산행으로 적합한 코스라고 생각됩니다 登路가 완만하고, 길지 않아 오르기 쉽습니다 물론 정상부근에는 암벽코스가 많습니다만, 그곳엔 또 우회로가 있으니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2보루봉 오르는 등로 중간에 있는 "마당바위"에서 뒤 돌아 본 제1보루] 넓직한 마당바위는 대부분의 산에 있습니다. 佛谷山 제1보루봉을 뒤 돌아 봅니다 [제2보루] 佛谷山 '보루'는 고구려시대에 축조된것으로 보고 있다니 무척 오래된 山城이지요 그래서 이곳 '보루'는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져있어 설명이 없으면 단순히 지나칠수밖에 없습니다 [제2보루 봉우리 정상] 제2보루 정상에 왔습니다 여기까지 약40분 걸렸습니다 오늘 날씨가 제법 더워서 여기서 겉옷을 벗고 휴식을 취했습니다 [불곡산 제2보루 봉우리에서 바라 보는 불곡산 정상] 활짝 핀 진달래꽃 사이로 정상은 점점 더 다가 오고 있습니다 [양주 별산대놀이 공연장에서 올라 오는 등로와 만나는 삼거리] 불곡산 옆구리 '양주별산대 공연장'에서 올라 오는 삼거리를 만나고... [송전 철탑] 엄청난 규모의 송전철탑을 지나면.... [임꺽정 생가터에서 올라 오는 등로와 만나는 삼거리 헬기장] 헬기장을 만나는데 '임꺽정 생가'에서 올라 오는 등로와 만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아이스키끼'를 사먹었는데 무척 맛있더군요 [임꺽정 생가터에서 올라 오는 등로와 만나는 삼거리 헬기장] [헬기장에서 바라본 제5보루] 앞으로 넘어야할 봉우리인 제5보루봉이 앞을 가로 막고 있습니다 佛谷山 제3보루와 제4보루는 주능선에 있지 않아 볼수없습니다. 주능선에서 만나는 보루는 제1.2.5.6.7.8보루 여섯개입니다 [백화암에 올라 오는 등로와 만나는 삼거리] 불곡산 옆구리 '백화암"에서 올라 오는 등로와 만나는 삼거리입니다 이곳에서 오르는 산객들도 많았습니다. 이곳으로 오르면 약30분이면 올라 올수 있겠더군요 [백화암] "백화암"의 원래 이름이 "佛谷寺"였답니다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개산했다는군요 [제5보루 오르는 길] 佛谷山 堡壘중에서 가장 옛날 원래 모양새를 그대로 갖추고 있는 堡壘가 제5堡壘인듯합니다 적당한 경사를 따라 오릅니다 [제5보루] 제5보루 안내판이 나오고.... [제5보루] 제5보루 봉우리에 오르는 길엔 철계단을 설치해 놨습니다 구경거리가 많아 집니다 [제5보루] 老松과 어우러진 경치가 아름답습니다 [제5보루] 堡壘다운 면모를 제5堡壘에서 느낌니다 [제5보루] 제5堡壘 봉우리는 소나무로 뒤덮혔습니다 [제5보루 봉우리에서 바라보는 불곡산 정상 "상봉"] 佛谷山 정상이 이제서야 본 모습을 드러냅니다 佛谷山 정상의 이름은 "상봉"이라고 하더군요 [제5보루에서 가며 올려다 보는 불곡산 정상 "상봉"] [불곡산 "상봉" 오르기 바로 전에서 바라 본 "임꺽정봉] 멀리 "임꺽정봉"이 보입니다 [불곡산 "상봉" 오르기 바로 전에 있는 술집] 행상이라기 보다는 酒店이라 할 정도로 규모를 갖추고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불곡산 정상인 "상봉"은 암릉으로 다소 위험합니다. 암벽타기에 겁을 먹는 사람들은 여기서 좌측으로 편안한 우회로가 있으니 이용하시길... [불곡산 "상봉" 오르는 길] "상봉"은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친절하게 계단을 만들어 놨기에 누구나 오를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은 위험하니 자신 없으신 분들은 조금전 우회길로 우회하면됩니다 우회길은 아까 酒店이 있는 곳에 좌측으로 이정표가 있습니다 [불곡산 "상봉" 오르는 암벽 위에 있는 기암괴석] 하지만 佛谷山에 와서 정상인 "상봉"과 "임꺽정봉"을 오르지 않는다면 佛谷山에 올 필요가 없겠지요 [불곡산 "상봉"에서 뒤 돌아 본 지나온 능선] 양주시청에서부터 올라온 봉우리 세개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제1보루봉, 제2보루봉, 제5보루봉이 나란히 능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나온 송전철탑도 보이고요~ [불곡산 "상봉"정상 오르는 길] 남녀노소 누구나 오르내림니다 [불곡산 "상봉"정상 오르는 길] 오르는 일보다 내려 오는게 문제입니다. 내려 오는 길은 "상봉"에서 다시 이리로 오지 않고 바로 서쪽으로 넘어 갑니다 그곳이 로프를 타고 내려가야하는 코스가 있으니 자신 없으신 분들은 여기서 아까 酒店있는 곳으로 되돌아 가 우회로를 이용해 "임꺽정봉"으로 가시기 바람니다 [불곡산 "상봉"정상] 드디어 오늘 산행의 하일라이트 "불곡산 정상 "상봉"에 올랐습니다 정상부는 매우 협소하고 암벽으로 이루어져있어 통행이 불편합니다 [불곡산 "상봉"정상석] 불곡산에서 제일 높은 곳 470.7m "상봉"입니다. 그런데 정상석과 정상목에 표시된 불곡산의 높이가 서로 다르게 쓰여있군요 정상목에는 468.3m라고 한듯합니다 모든 지도에는 470.7m라고 표시되있습니다 [불곡산 "상봉"정상에서 바라 본 "임꺽정봉"] 임꺽정봉이 시원하게 조망됩니다 가운데 조그만 능선 봉우리가 "상투봉"입니다. [불곡산 "상봉"에서 하산 하는 길] 이 로프를 타고 내려 가지 못하면 또 우회로가 있더군요. 조금만 정신집중하면 "상봉"에 오를수 있으니 너무 겁 먹지 마세요 [불곡산 "상봉"에서 하산 하는 길] 직벽 하산코스는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회로가 있으니 우회로를 이용하시기 바람니다. 저의 山友도 모두 우회길로 "불곡산 상봉" 정상을 밟고 내려왔습니다 [불곡산 "상봉"에서 하산 하는 길] 물론 깡다구있는 여자분들은 로프를 타고 내려 옵니다 [불곡산 "상봉"에서 하산 하는 길에서 바라 본 "상투봉"] "상봉"에서 조금 내려오면 "상투봉"이 자기도 불곡산의 한 봉우리라고 알려줍니다 중간에 이런 봉우리는 "상봉"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는데 내려 오니 제법 높은 봉우리입니다 [불곡산 "상봉"에서 "상투봉"으로 가는 길] ["상투봉"으로 가는 길에서 뒤 돌아 본 불곡산 "상봉"] 암벽 사이로 내려왔는데, 겁이 많은 분들은 오른쪽 우회로로 내려 오면 안전합니다 ["상투봉"의 아름다운 모습] "상투봉"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 옵니다 ["상투봉"과 "임꺽정봉" 우회길 갈림길] "상투봉"도 암릉구간이기에 위험해서 여기서 좌측으로 우회로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다녀 본 결과 그다지 위험하지 않더군요. "상투봉"은 꼭 올라야 할 봉우리로서 경치가 매우 좋았으니 꼭 올라 보시길... ["상투봉"을 오르면서 뒤 돌아 본 불곡산 "상봉"] 북한 괴뢰군들이 우리 관광객에게 총을 쏘아 죽이는 "금강산"에 비싼 입장료와 관광비 내고 구경 가시렵니까? 쓰나미, 지진, 테러, 바가지, 총기난사하는 외국으로 비싼 비용 들이며 구경가시렵니까? 그런곳에 가기전에 먼저 우리나라의 錦繡江山부터 모두 섭렵하시고 부족하면 외국으로 떠나십시요 佛谷山만 해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상투봉"을 오르는 암벽에 있는 하마 모양의 기암괴석] 바다 거북들이 짝짓기 하남? ["상투봉" 정상] 드디어 "상투봉 정상"이 모습을 드러 냅니다 생각보다 간단하게 오릅니다 "상투봉"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게 살포시 살짝 얼굴을 내미는 모습이 새악씨가 수줍어하는 듯 합니다 ["상투봉" 정상석] 이곳에도 정상석과 정상목의 높이 표기가 다릅니다. 뭔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특이합니다 ["상투봉"에서 뒤돌아 본 "상봉"] 멋쪄부려~ ["상투봉"에서 바라 본 "임꺽정봉"] 여기서부터 "임꺽정봉"까지의 암릉구간이 설악산 "공룡능선" 축소판 같았습니다 암릉구간을 다니기 시작하면 그 묘미에 흠뻑 빠지기 쉽습니다 ["상투봉"과 "임꺽정봉" 사이의 암릉능선] 외국유학을 떠나는 학생들이 무지 무지 많습니다 그런데 "외국유학"이란 말의 뜻이 뭡니까? 우리나라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제 우리나라에선 더이상 배울게 없을때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외국으로 공부하러 가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요즘 외국 유학 가는 애들.... "외국유학"의 의미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의미로 외국으로 가지요? 공부를 하지않아 우리나라에선 공부를 따라 갈수 없어 진학을 할수 없으니 일종의 현실도피 행각을 아까운 외화를 낭비하며 외국으로 외국으로 갑니다 거기라도 가서 잘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 나간다고 새지 않나요? ["상투봉" 내려 가는 길] 관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의 명승고적을 모두 다녀 보고 모자르면 외국으로 떠나야지요 서울 남산도 올라보지 못한 사람들이 어느나라 어느 곳을 따지는데 눈뜨고 못보겠더군요 ["상투봉" 내려 가는 길에서 바라 본 "도락산"] "불곡산"-"도락산" 연계 산행을 하면 좋겠더군요. "漢北正脈"이 저 "도락산'을 지나와 이곳의 임꺽정봉을 지나 호명산, 한강봉, 첼봉,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 상장능선, 노고산, 고봉산, 파주의 장명산으로 이어 집니다 ["상투봉" 내려 가는 길] 사진에는 매우 어려운듯 보입니다만 간단한 릿지 산행을 불곡산에서 즐길수 있습니다 ["임꺽정봉 능선에 있는 기암괴석] "임꺽정 林巨正" 佛谷山 임꺽정봉이 다가 오니 임꺽정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을수가 없군요 우리나라 성인 국민치고 "임꺽정" 모르는 분은 않계실겁니다 그러나 '임꺽정'은 의적 정도로만 알고 그 더 이상은 잘 모르시는 분들이 또한 대부분일것입니다 오늘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번 등장하는 실존인물 "임꺽정"을 도둑놈 "임꺽정"에서 새로운 각도로 그의 삶을 재조명한 위대한 작가 "홍명희 선생"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大河歷史小說 - "임꺽정 林巨正"을 토대로 요약해볼까합니다. 아시는 분들은 더 이상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리고 주관적 생각이 많이 포함되므로 반론이 있을수 있는데, 저와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다른 곳에 자신의 생각을 밝히시기 바람니다 여기는 저의 블로그이거던요~~ㅎㅎ ["임꺽정봉" 가는 안부에서 뒤돌아 줌인한 "상투봉"의 "상투"] 이제서야 왜 "상투봉"인지 알수 있었습니다 상투를 틀어놨군요. ㅎㅎ 보는 사람에 따라선 男根을 닮았다고도 하더군요. 개눈엔 X만 보이죠 ["임꺽정봉" 오르는 길]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선생이 쓴 大河歷史小說 - "임꺽정 林巨正"이라는 소설을 이야기 하기 전에 역사 속의 "임꺽정"을 우선 추적해 보겠습니다. "임꺽정"은 조선 명종때의 인물이지요 그러니 조선왕조실록의 "명종 실록 25권 14년 3월 기해"에 나오는 얘기를 먼저 알려드림니다 명종시대의 시대 상황을 극명하게 알려 주는 어느 사신의 상소입니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지금 재상들의 탐오가 풍습을 이루어 끝이 없기 때문에 수령은 백성의 피와 땀을 짜내어 권세가를 섬기고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너도나도 스스로 죽음의 구덩이에 몸을 던져 요행과 겁탈을 일삼으니, 이 어찌 백성의 본성이겠는가? 진실로 조정이 청명하여 재물만을 좋아하지 않고 어진 사람을 가려서 수령으로 임명한다면, 칼을 잡은 도적이 송아지를 사서 농촌으로 돌아갈 것이니 어찌 이토록 거리낌없이 사람을 죽이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고 도적을 뒤쫓아 잡기만 한다면, 아마 잡는 대로 또 일어나 장차 다 잡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가렴주구'란 관리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이용해 금품갈취를 하는 행위를 말하지요 윗글은 정치기강에서부터 사회혼란까지 총체적 개판이었던 명종시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상소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혜성과 같이 등장하는 도둑놈이 있었지요 "임꺽정" 명종실록에는 임거질정(林巨叱正)으로 나와있습니다 ["임꺽정봉" 오르는 길] "임꺽정봉" 오르는 사면이 오늘 산행의 최고 재미입니다. 바위 하나 하나 생각하며 오르면 무척 재미있습니다 임꺽정은 16세기 중엽(명종때) 이곳 양주의 불곡산 '임꺽정봉' 아래 계곡에서 백정으로 태어나 가렴주구,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못이겨 도적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명종조는 을사사화 등으로 중앙 정치가 문란해져 지방 통치가 소홀한 틈을 타고 관리들에 의한 농민 수탈이 극성을 부리던 때이고, 관수 관급제의 실시로 관료들의 토지 소유욕이 증가하여 농장이 확대되는 속에서 농민들이 몰락하던 때였으며,왕실과 관료들의 사치가 날로 심해지고 방납 등의 폐단으로 공물의 양은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나던 때였으며, 각종 부역과 군역에 시달려 농민들이 이를 피하기 위해 고향을 등지기 일쑤인 때였기에 “백리 사이에 밥 짓는 연기가 보이지 않는다”라고 할 정도로 농민의 생활은 피폐하였답니다. 즉, 당시의 사회 경제적인 모순이 심화되면서 몰락한 농민과 유랑민들을 배경으로 도적은 들끓을 수밖에 없었고 그 중 대표적 인물이 "임꺽정"이라는 도둑놈이었는데, "홍길동",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유명하다는건 모두 아는 바와 같습니다 ["임꺽정봉" 오르는 길] 근처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도둑놈 "임꺽정"을 재조명한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선생을 간략히 얘기해 드려야 겠습니다 '홍명희'선생은 대단한 가문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시대에 항일운동을 극렬하게 한 애국독립지사입니다. 그리고 휘문고등학교 교사(당시 휘문의숙), 연세대 교수(당시 연희전문), 오산고보 교장, 時代日報 사장,....... 그리고 불후의 명작 "임꺽정전"을 쓴 작가. 이러한 출중한 인물인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선생을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은 해방과 동시에 北으로 월북했기 때문입니다. ["임꺽정봉" 오르는 길] 북한에서의 홍명희선생의 지위는 하늘을 찌를듯했답니다. 김일성주석과 아주 각별한 사이로 북한에서 과학원장, 부수상까지 지냈습니다 홍명희선생의 아들 "홍기문"은 북한에서 "이조실록"을 완역한 유명 국학자이고, 둘째 아들 "홍기무"도 북한 사회과학원 소장을 역임했다고합니다. 손자인 "홍석형"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함경북도당 책임비서이고 손자 "홍석중"은 ‘황진이’를 쓴 소설가입니다. ["임꺽정봉" 오르는 길] 기암괴석으로 "임꺽정"의 위용을 알리고 있는듯합니다 소설 "임꺽정"의 문학사적 의의 첫째, 당시 사회 변동의 전모를 그림으로써 역사소설의 독특한 성격을 강력하게 반영하고 있답니다. 둘째,<임꺽정>은 방대한 분량의 장편 소설로서 인물 설정과 세부 묘사가 1930년대의 다른 소설과는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답니다. 셋째, 조선 시대 민중들의 삶에 대한 의식과 정조를 일관되게 형상화한 작품이랍니다. 넷째, 상류층 사회의 타락에 대한 반성과 하층 사회의 변혁 의지를 통한, 사회 개혁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는 작가의 민중 의식이 드러난 작품이라고하는군요. 이러한 사실은 1930년대에 성행한 한국 역사 소설을 현실 도피나 비유적 장치, 복고주의로만 특징지을 수 없는 근거가 되기도 한답니다. 또한, 이 작품의 리얼리즘 정신은 1970년대에 들어서 <장길산>이나 <객주> 등의 장편 역사 소설로 계승되었다고하는군요. ["임꺽정봉" 오르는 길] 소설 "임꺽정" 핵심정리 갈래 : 장편 소설. 대하 소설. 역사 소설 배경 : 시간(조선 명종 때). 공간(황해도 청석골) 성격 : 저항적. 민중적. 토속적 시점 : 작가 관찰자 시점 표현 : 이야기를 구연하는 형식으로 사건을 진솔함 구성 : 봉단편,피장편,양반편,의형제편,화적편 등 5편으로 구성 발단 - 임꺽정의 출생과 성장 과정 전개 - 전국을 유랑하던 임꺽정은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을 보고 도적이 됨 위기 - 서림이 관군에게 잡히는 바람에 꺽정의 무리가 위기를 맞음 절정 - 꺽정은 소굴을 분산하고 관군과 싸워 승리함 결말 - 미완 제재 : 임꺽정의 난 주제 : 모순된 사회에 대한 비판과 저항 출전 : <조선일보> ["임꺽정봉"을 오르며 뒤 돌아 본 "상투봉"과 "상봉"] 지나온 상봉과 상투봉 능선이 그림 같습니다 대하역사소설 "임꺽정전"은 벽초 홍명희선생이 1928부터 1939까지 10여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연재소설입니다. 그러나 그는 북으로 간 다음 그 소설을 끝까지 쓰지않고 미완으로 남겨 놨습니다 그래서 소설 속에는 '임꺽정'의 결말부분과 최후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임꺽정'의 사형은 진짜 역사를 알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임꺽정봉" 오르는 길에 있는 조각품] 물개가 소리치고 있는듯합니다. "나좀 어떻세 해죠~~" 옆에 있는 넘이 "좀 참어~" "않돼!~ 급하다구~" ["임꺽정봉"] 드디어 "임꺽정봉"이 실체를 드러냅니다. ["임꺽정봉" 오르는 길] [제8보루 - 임꺽정봉] 임꺽정봉이 불곡산 제8보루였습니다 천연의 요새입니다 ["임꺽정봉" 정상부에서 뒤 돌아 본 지나온 "상봉"과 "상투봉" 능선] ["임꺽정봉"에서 바라 본 "호명산", "홍복산", "은봉산", "한강봉"] 임꺽정봉은 "漢北正脈"이 지나는 마루금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漢北正脈"은 앞에 보이는 "호명산"을 지나, "한강봉"으로 달려 갑니다 그리곤 "첼봉"과 사패산 도봉산을 지나고, 북한산 '상장능선'을 지나 일산의 고봉산으로 가 파주의 장명산에서 끝냅니다 지난달에는 "漢北正脈"의 "감악지맥", 즉 한강봉-은봉산-팔일봉-감악산=마차산-도감포까지를 완주했었지요. 여기서 보니 그 지맥이 확연히 보입니다 [불곡산 "임꺽정봉" 정상] "임꺽정봉"에 올랐습니다 제법 넓은 공간이 있습니다 [불곡산 "임꺽정봉" 정상] 무선햄을 할수 있는 시설 안테나와 돌탑, "임꺽정 안내판"도 있습니다 [불곡산 "임꺽정봉" 정상] "임꺽정봉"은 이 근처 "감악산'에도 있지요 "감악산 임꺽정봉"은 임꺽정이 관군에 쫏겨 피신 했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고 "불곡산 임꺽정봉"은 임꺽정의 生家가 이 봉우리 아래에 있어 붙여진듯 하군요 [불곡산 "임꺽정봉" 정상석] 이곳에도 정상석과 정상목의 높이 표기가 다름니다. 뭔 이유가 있으니 이렇게 했겠지요. 단순히 실수로 보기에는 너무 일관성이 있으니.... [불곡산 "임꺽정봉" 정상의 전망 벤치] 최고의 전망 벤치까지 만들어 놔서 가슴이 확 터입니다. 도봉산과 북한산이 잘 조망된다고하는데 오늘은 안개로 보이지 않습니다 [불곡산 "임꺽정봉" 정상에서 바라 보는 제9보루] 앞으로 내려 갈 코스입니다 [불곡산 "임꺽정봉" 정상에서 바라 보는 "도락산"과 "백석읍 방성리 저수지"] "漢北正脈"은 저 도락산을 돌아 이곳 불곡산 임꺽정봉으로 옴니다 [불곡산 "임꺽정봉" 정상에서 하산하는 길] [불곡산 "임꺽정봉" 정상에서 하산하는 길] [불곡산 "임꺽정봉" 정상에서 하산하는 길에 있는 암봉 전망대] [뒤 돌아 본 불곡산 "임꺽정봉" 정상] [불곡산 제9보루] [불곡산 "임꺽정봉" 정상에서 하산하는 계단] [불곡산 "임꺽정봉" 정상에서 하산하는 계단] 불과 얼마 전까지만해도 이곳엔 밧줄을 타고 내려왔어야 했다고 합니다. 아직도 계단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지만, 다닐만합니다. [대교아파트로 하산 하는 갈림길] [제9보루] 불곡산 제9보루는 군부대가 점령하고 있어 더 이상 출입할수 없습니다 ["임꺽정봉"] 마지막 조망대에서 뒤 돌아 본 "임꺽정봉" ["임꺽정봉"에서 "대교아파트"로 하산 하는 길] [약수터] 약숫물이 제법 시원하더군요 [약수터에서 뒤 돌아 본 "임꺽정봉"] 大東詩選2卷에 '이무적'이 쓴 詩 한수 들려드림니다 조선 명종시대에 읊은 한서린 詩입니다 유랑하는 백성 - 이무적 - 백성들 살기 어려워라 백성들 살기 어려워라 해마다 흉년 들어 먹을 것 없으니 너를 도와 주고 싶은 내 마음 간절하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구나 백성들 살기 어려워라 백성들 살기 어려워라 날이 추워도 입을 것이 없으니 저들은 너를 건져 줄 힘이 있건만 너를 도와 줄 마음이 없구나 현재 이 시대도 조선 명종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백성을 위하는 정치 世道政治가 펼쳐져야 하는데 자신의 정치적 세력만 키울려는 勢道政治가 왕왕거리고 있는듯합니다 백성을 위하는 정치 世道政治가 펼쳐지길 고대하며 "林巨正"을 생각해 봅니다 ["대교아파트"로 하산 하는 길] 하산길이 너무 좋았습니다. 아주 완만한 경사로 걷기에 편하고 거리도 짧아 약 30여분만에 하산 할수 있었습니다 [임꺽정 생가 터] 자료사진 "임꺽정 생가"에는 아무것도 없고 생가였다는 표지석만 있다고 합니다 이곳은 가보지 못하고 자료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아~ 새로운 임꺽정은 아직도 소식이 없는가! 그를 기다리는 민중이 지천에 깔렸는데.... ["대교아파트"로 하산 하는 길] 초보산객들 모시고 꼭 다시 오고 싶은 산으로 기억하며 봄날에 찾은 불곡산에서 옛날의 임꺽정과 놀다 갑니다 ["대교아파트"로 하산 하는 길] [산행 날머리 - 대교 아파트 앞] 3시 정각에 이곳에 도착했으니 불곡산 종주 하는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4시간이었습니다 산행 날머리 앞에는 "대교아파트"가 우뚝 서있어 길안내를 잘하고 있습니다. 건너편 대교아파트앞에서 의정부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갑니다 함께한 山友와 "의정부 명물거리"에서 "부대찌개"와 소주로 오늘 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오늘 산행 개념도]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Daveed - Ta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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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광화문 거리에서 봄바람 치고는 을씨년스런 그런 바람이 불던 날 광화문 로터리로 나의 발걸음은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지만 나를 알고 나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나에게는 황량한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로 무덤덤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마음 속으로 큰 소리로 외치며 자랑했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나를 반겨줄 사람들이 무지 많이 있다~~!!" "바로 저 모퉁이를 돌아 가면 술상을 차려 놓고 어서 오라고하는..." "산 날보다 살 날이 아무리 적게 남았다고 해도 외롭지 않다고..."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광화문 피맛골]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 뒤 "피맛골" '서란낙지', '열차집', '참새집'으로 대변되는 "피맛골"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분들이면 최소 한번은 가 보았을 뒷골목 참으로 오랜만에 이 곳을 찾아왔습니다 [광화문 피맛골] 요즈음은 봉급쟁이들이 퇴근후에 직장생활의 스트레스를 푸는 곳이라지만 나이가 지긋한 중장년층이 추억에 젖어 찾아 와 족발이건 파전이건 괴상한 냄새나는 어리굴젖에 찍어 한잔 술을 하는 곳 이 추억의 "피맛골"도 곧 헐리고 현대식 고층 빌딩이 들어 선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칭구들이 이곳에서 한잔하자고 를 쳤습니다 제가 모처럼 이곳에 온 이유를 이제 아시겠나요? 스산한 봄바람이 불어도 거리의 사람들이 무표정하게 나를 그냥 지나쳐도 제가 즐거운 마음으로 이 골목길을 걷는 이유를 아시겠나요 [청일집] 오늘 장소는 "청일집"이었습니다 '열차집'이나 '참새집'이 더 알려져 있지만 그곳은 장소가 협소해 20여명이 한자리에 앉을수 있는 "청일집"으로 정한듯합니다 무쟈게 똑똑한 칭구들이니까요 자꾸 가는 세월을 이겨보려고 酒님을 멀리하는 칭구들이 늘어나지만 오늘 많큼은 지난 세월 속으로 파뭍혀 기나긴 여행을 하려니 오고 가는 술잔이 모두 건강酒로 느껴 집니다 머리카락 색깔도 퇴색되 가지만.. 머리카락도 자꾸 바람에 날려 사라져 가버리지만..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고....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그래서 만나면 언제나 즐거운 사람들......親舊 62회 총무님이 요즈음 홈페이지를 새롭게 단장한다고 바쁜 시간 더 바쁘게 보낸다는데 오늘 만남의 장을 더 즐겁게 만들어 주려고 공식적 행사 시작을 알립니다 [酒宴] [酒宴] "우리가 최고에요!!~~" 언제나 소년 같은......그리고 언제나 자랑스런.... [건배] "진달래" 진정으로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 !! 조국과 민족의 영원한 발전을 "위~하여" 오늘 에서 전에는 별로 없던 자랑들이 있었습니다. "나 몇일 전에 손자 봤다~!" "와우~ 축하~ 축하~" "나는 몇달 전에 손자봤다~" "나는 손자 돌잔치 한지가 언제인데~~" 쏟아져 나오는 손자 손녀 자랑이 청일집 2층을 덜썩거리게 했습니다 멀리 대전에서 KTX타고 벙개에 참여한 열성파 교감선생님 술 마시고 또 내려 간답니다. 술값보다 차비가 몇배 더 나가지만 칭구를 만나고 가는 마음에 즐거움이 가득 쌓여 전혀 손해가 아니라고.... [酒宴] 밤은 점점 더 깊어 가고 있는데 酒宴은 끝날줄을 모릅니다 뭔 할 얘기들이 그렇게 많은지....그래도 해도 해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전임 회장과 분당지부장] 전임 회장과 오늘 모임을 주선한 분당지부장이 참석해 준 칭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합니다. 감사를 드려야 할 사람들은 우리들인데도.... 이런 모임에서 만나기 어려운 "도사님"이 남부지부장이란 감투(?)를 하나 쓰고 출세했다고 자랑합니다 동심으로 돌아 가 광화문 뒷골목을 온통 접수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광화문 피맛골을 완전히 점령했습니다 고삐리로 만나 40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어기지 못하고 붙어있는 세포조직들은 자꾸 쪼구라 들며 밑으로 쳐집니다 머리카락 갯수도 색깔도 벌레먹은 떡갈나무잎 같아 집니다 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고삐리입니다 길은 떠나기 위해 있는게 아닙니다 돌아 오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시간도 흘러 가버리는게 아닙니다 새로운 만남을 위해 다가 오는 것입니다 헤어지기 아쉽지만 새로운 만남을 위해..... [종각 사거리] 돌아서는 발길이 무거워지고 아쉬움으로 가득한 마음 한켠에는 그래도 한아름 선물을 받아 든 소년같이 즐거워 흥얼거리는 "애증의 강"을 부르며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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