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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북정맥의 끝 - 고봉산과 장명산을 가다 일산을 많은 사람들은 고양시 일산구로 느끼기 보다는 독립된 도시 일산으로 느낍니다 분당을 성남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도시 분당으로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新都市중에 최대를 자랑하기에 新都市로 느끼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일산에 신도시 분양 때부터 살면서 '한북정맥'이 일산을 지나 交河에서 끝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우리 동네 얘기도 모르며 다른 지역의 산들에 대해 산행기를 쓴다는 게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지역의 한북정맥을 샅샅이 파헤쳐 보려합니다 그러나 관련 자료가 별로 없어 자료 찾기가 쉽지 않아 또 부실한 산행기를 쓰지 않을까 염려됩니다만 최선을 다해 보려합니다한북정맥은 금강산위의 백두대간 분수령인 장바위산에서 시작하여 북한지역 다섯 분수령을 지나 휴전선을 건너 남쪽에서는 삼천봉, 광덕산등 25개의 산을 지나 交河의 장명산에서 끝납니다 등산 메니아들은 주로 화천군의 수피령에서 '한북정맥 종주'를 시작 하더군요 보통 6개월 정도 걸려 완주를 하는데 주로 휴일을 이용하기 때문일것입니다 수피령-백운산-민둥산-청계산-운악산-국사봉-사패산 도봉산을 거쳐 우이령에서 상장능선으로 내려가 솔고개를 건너 서울 각지역의 예비군 훈련장이 있는 북한산 뒷쪽 노고산을 통과해서 삼송리 '뉴코리아 골프장', 원당의 '한양칸트리 클럽'을 지나 일산의 "고봉산"으로 한북정맥은 뻗어와 교하의 "장명산"에서 끝납니다 오늘은 제가 사는 곳인 이곳 일산의'고봉산'과 교하의 장명산'을 다녀 왔습니다 일산 고봉산
신도시가 건설되 제가 이사 올때는 이곳들이 대부분 논밭이었습니다만 지금은 맨땅 찾기가 어려워 졌습니다 고봉산은 일산에서 제일 높은 산이며 봉우리에 엄청나게 큰 안테나가 있기 때문에 찾기가 매우 쉽습니다만 등산로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파트촌 사이를 뚤고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산 신도시에서 갈때는 일산교를 건너 중산지구 '산들마을 아파트' 뒤쪽으로 가는 길이 가장 빠릅니다
안곡초등학교옆 고봉산 등산로 입구 5~6년전에 와 보고 처음이라 이곳 찾는데 조금 헤맸습니다 그동안 엄청나게 아파트와 부대 시설들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안곡초등학교 뒤로 고봉산 안테나가 보입니다.
등산로로 들어 오니 완전히 도시를 벗어 나는듯 합니다
등산로 초입 고봉산 등산로는 여러 곳이 있습니다만 이곳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등산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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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이 국민은행 연수원 진달래가 피었습니다. 금년엔 처음으로 진달래꽃을 보았습니다 오늘 날씨가 무척 따뜻하다 못해 더웠습니다
일산의 옛 이름은 -한뫼- 입니다. 한문으로 풀어서 한 (一)자와 뫼(山)자 해서 일산이 되었습니다. 순수한 우리말 -한 뫼- 는 어데가고 한문으로 뜻을 붙여서 언제부터 인지는 몰라도 -일산- 이란 지명이 되었답니다. 한뫼(一山)는 하나의 산 즉 고봉산을 칭하는 지명입니다.
『하루』와 동행했습니다 일산의 모산이자 제일 높은 산인 고봉산은 높이가 208.6m로 서울의 남산(262m)보다 낮지만 한북정맥의 끝자락인 이 지역에선 가장 높은 산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루'가 같이 산행을 할 정도로 누구나 언제나 산책겸 운동 할수 있는 곳이라 여겨집니다
힘들어서 어거적 거리며 따라 오는 '하루'
고봉산 등산로에서는 좌우의 아래 일산신도시나 원당쪽을 촬영할수가 없습니다 아직 봄인데도 모두 울창한 숲으로 시야를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어 어거정거리는 우리 '하루' 고봉산은 옛부터 태미산으로 알려져 있는 산입니다. 고봉산은 높은 산봉우리 또는 봉화를 올린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고봉봉수대(高峰烽遂臺)> 삼국시대의 기록인 삼국사기에도 나오는 유명한 산으로 한강유역 일대를 두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한 접전을 벌인 군사, 교통, 전략상의 요충지였다는군요 이 산에서는 이를 증명하듯 곳곳에서 삼국시대의 토기편이 발견되고 있다합니다
고봉산 정상 바로 아래의 헬기장 고봉산 정상 부근의 헬기장에 올랐습니다 고봉산은 정상에 무지하게 큰 안테나가 있어 북한산에서도 잘 보입니다 저 안테나는 군사시설로 표기되 있습니다만 제가 듣기로는 국정원의 정보,첩보 수집용 안테나라는 설이 있습니다
고봉산 정상 저곳이 정상인데 불행이도 정상은 밟을수가 없습니다. 저 안테나 시설 밑에 많은 군사시설이 있어 통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들어 갈수 없는 저곳에 <고봉봉수대(高峰烽遂臺)>가 있다고 합니다 일산구 싸이트에서 찾아 낸 자료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고봉봉수대(高峰烽遂臺)> 형태 : 직사각형으로 돌 석축을 쌓아 놓음 규모 : 석축의 총 둘레는 약 120m, 높이는 약 5m 보존상태 : 자연돌을 쌓아 만든 봉수대로 특별히 무너진 곳 없이 보존 상태 양호함. 이 고봉 봉수대는 조선조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부터 고종 31년(1894)까지 봉수망 제 4 노선의 직봉으로 파주군 교하면의 형제봉에서 봉화를 받아 해포 봉수대, 서울의 무악(안산) 봉수대에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지금의 상태로 보아 그 규모나 구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세종 29년(1447) 5월에 제정된 규정으로 그 규모를 유급해 보면 봉수의 높이는 25척, 둘레 70척, 봉수대 아래쪽의 사면에는 30척의 규모로 여겨지고 있다. 고봉 봉수대 정상에서는 멀리 개성의 송악산, 강화의 마니산, 서울의 남산과 파주의 감악산 등이 조망되어 봉수대로서의 지리적 여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듯 하다. 봉수는 봉수대를 중심으로 봉화를 올려 그 신호로써 다음 봉화대에 전하는 제도인데 옛부터 전통적인 통신 수단 가운데 가장 신속하고 간편한 일반적인 송신 수단이라 할 수 있다
고봉산 정상의 술판 요즘 왠만한 산에는 이런 장삿꾼이 있지만 여기는 규모가 꽤 크고 손님도 많았습니다 인근 아파트촌의 쫌생이들이 여기 술마시러 오는 듯합니다
정상에 올라 할딱거리며 힘들어 쉬고 있는 '하루'
조금 쉬더니 이젠 할딱거리지는 않네요 우리 '하루'는 저의 도움없이 하산 했습니다. 오늘 일년치 운동을 다 한것같습니다. ㅎㅎ 고봉산 산행은 이것으로 마치고 장명산으로 이동합니다
한북정맥의 끝-장명산을 가다 4월6일 고봉산을 내려와 한북정맥의 끝봉우리인 장명산으로 향했습니다 한북정맥은 이제 맥을 잇지 못하고 온통 짤리고 파헤쳐져 옛모습을 찾을수는 없습니다 특히 도시화 되버리는 지역은 권투로 말하자면 스트레이트, 훅, 아퍼컷,뻐팅까지 다 맞아 시퍼렇게 멍들고 K.O.직전인듯 싶습니다. 얼굴 모습이 모두 일그러져 누가 누구인지 알아 볼수도 없을 정도로 도시화 되버렸습니다 그래도 많은 등산 마니아들은 용케도 길을 찾아 종주를 하고 있습니다 6개월 이상씩이나 걸리는 머나먼 종주를 구간 구간 끊어 걷고 또 걷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이 대단한 존재 이상의 존경스럽기까지합니다 그들의 산행기를 보면서 잃어버린 우리 옛 산하를 체험하곤 합니다 고봉산에서 장명산을 가려면 일산 신도시로 나와 옛 월마트였던 현재 이마트에서 금촌, 문산 방향으로 가야합니다일산가구공단 입구 고봉산을 지난 한북정맥은 아파트와 경의선 철도, 몇개의 확장된 도로를 거쳐 이곳 일산가구공단입구를 통과합니다 이곳 일산 가구공단 앞은 얼마전까지만해도 좁은 편도1차선의 국도였으며 약간 높은 언덕이었습니다만 그동안 개발이 되어 언덕은 간곳없고 화려한 간판들로 메워져 있습니다. 저도 이곳이 한북정맥이 지나는 곳이란걸 이제서야 알게 �습니다. 한북정맥은 이곳을 지나 아미가 골프 연습장 뒷쪽을 거쳐 장명산으로 갑니다만 오늘 저는 장명산을 가려고 차를 몰고 왔기에 바로 장명산으로 향합니다
교하 이마트 금촌방향으로 가다 보면 '교하 이마트'가 나옵니다 이 교하 이마트 다음 신호등에서 좌회전 해야만 하기에 미리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곳이 "교하 삼거리"입니다
교하 삼거리 이정표 교하 삼거리에서 교화읍사무소쪽으로 좌회전하여 직진합니다
삼거리 갈림길 이곳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직진을 하여 50m쯤 앞에서 차를 세우고 우측 오솔길을 따라 올라 가면 장명산의 앞면을 볼수 있고 여기서 우회전하여 통일동산쪽으로 가서 좌측으로 들어 가면 장명산의 뒷모습과 정상을 오를수 있습니다 우선 저는 직진을 하여50m쯤 가서 장명산의 앞 모습을 보려 합니다. 직진을 하면 처음으로 우측으로 올라 가는 차도 다닐수 있는 오솔길이 나옵니다
장명산 입구 표지판 하나 없습니다 저는 옆의 식당 아주머니에게 물어 이 길을 찾았습니다 여기 길가에 차를 세워 두고 걸어 올라 갔습니다.
오솔길에 들어 서면 보이는 광경 저 앞의 능선이 한북정맥이며 그 끝자락에 와 있는 것입니다. 사진 속에 불을 피우고 있는 분 보이시죠? 저 분을 만나서 장명산의 위치와 장명산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습니다
이 분입니다.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찍었으며 증인 채택을 했습니다 ㅎㅎ 다음은 이 분과의 대화 내용을 간략하게 알려 드림니다. 파란문 : 아저씨 장명산이 어디 있어요? 아저씨 : 어~ 장명산은 뭐할려고 그러시오? 파란문 : 한북정맥의 끝봉우리라고 해서 무슨 산인지 구경하려고요 아쩌씨 : 장명산이 그런 산이여? 파란문 : 예, 아주 의미 있는 산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한북정맥의 끝이니까요... 아저씨 : 내가 어려서 부터 여기 살았는데도 처음 듣는 얘기구먼요. 여하튼 장명산은 옛날의 장명산이 아니고 지금은 거의 없어져 버렸소 파란문 : 아니, 왜요? 산이 없어지다니... 아저씨 : 장명산은 저기 능선 뒤에 한 봉우리있는데 반토막 났거던.... 내가 어렸을 때에는 장명산에서 횟가루를 파냈어요. 거 왜 묘지에 뿌리고 담벼락에 흙과 합쳐 사용하는 하얀 횟가루.. 그러다 10여년 전 부터는 산을 부셔서 레미콘용 자갈을 채취해서 신도시 건설하는데 썼겠지... 반 이상 파먹었어. 파먹고 텅비니까 ... 이제는 그 자리에 건설패기물 쓰레기들을 가져다 뿌셔서 매립을 했는데..반쯤 메꿨어요. 지금도 건설 패기물 쓰래기 처리하고 있어요 더럽고 냄새 나서 가까이 가기도 싫어요. 해도 해도 너무 해요 별짓을 다하고 있어요. 그렇게 중요한 산이면 왜 이렇게 방치를 했을까? 내가 더 궁금하네. 일전에 시청에서 일본놈들이 박아 논 철심 뽑아 낸다고 여기 저기 찾아 다니며 한바탕 소란을 피우더니.. 그런 맥락인 모양이지? 지금은 온 산에 일본놈들이 박아 논 철심보다 더한 전신주, 아파트, 뭐 더한 것들을 우리나라 놈들이 때려 박고 있쟌수~ 파란문 : 예전에는 경치가 좋았나요? 아저씨 : 옛날에는 장명산이 매우 유명했다우~ 나도 아버지한테 들은 건데 특히 조선 시대엔 구절초가 장명산을 메우다 시피 피어나 전국의 애 못낳는 여자들이 임신에 효과가 있다고 소문이 나 장명산 구절초를 구하러 전국에서 모여 들었다고 하더군 그리고 여기가 조용하고 안락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지요. 저 옆의 곡릉천에서 고기도 잡고.... 지금은 냄새나는 더러운 땅과 강이 �다우
길을 따라 '하루'와 함게 올랐습니다 우리 '하루'는 무지 하게 걷습니다 중간 중간 물을 줬어야 했는데...집에 와서 물을 줬더니 한사발을 마시더라구요..ㅎㅎ 미련한 제가 잘못이죠 머리 나쁘면 개까지 고생 한다니까요
건설 패기물 처리 매립장 입구 아저씨가 들려 준 얘기들이 얼마큼 진실일까 ..뻥튀긴건 아닐까 약간 의심했는데 상상할수 없는 일들이 장명산 근처에서 벌어 지고 있더군요 안으로 들어 가 볼까요?
엄청난 건설 패기물 쓰래기 더미
장명산을 만나다 저 앞의 반토막 난 초라한 산이 한북정맥의 끝 봉우리 "장명산'이랍니다 대동여지도의 김정호도 다녀 가고, 산경표의 신경준도 다녀 갔을 산 - 장명산 그 장명산은 나에게 저런 모습으로 다가 왔습니다
래미콘 공장 파낸 자갈들과 건설 패기물을 처리 하여 재 활용하는 지는 몰라도 제법 큰 래미콘 공장도 있었습니다
저 장명산의 왼쪽 짤려 나간 부분이 한북정맥이 었는데 그 脈이 끊긴 것입니다 물론 13개정맥이 끊긴 곳이 한두 곳이겠습니까만은.... 한북정맥의 상징적인 이 곳이 이런 모습으로 변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습니다
장명산의 뒷쪽을 가기 위해 아까 진입했던 삼거리로 다시 나와 통일동산 쪽으로 갔습니다
조금 가면 다시 삼거리가 나오는데 직진하면 통일 동산 쪽 곡릉천 다리이고 좌측으로 가면 곡릉천 제방을 따라 장명산으로 갈수 있습니다.
조금 내려 가니 곡릉천이 제법 넓게 확 펼쳐졌습니다. 저 앞의 다리를 여러번 지난적이 있었지만 곡릉천이 이렇게 큰 하천인줄은 미쳐 느끼지 못했습니다
곡릉천 제방에 올라 장명산을 뒷쪽에서 바라 보았습니다 곡릉천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앞쪽에서 볼때 보다는 모양이 살아 있었습니다만, 상상했던것 보다 작아 山이라기 보다는 동산 정도로 느껴졌습니다 이 산의 이름이 長命山이더군요..그 이유를 자료 조사를 해 보니 아까 아저씨가 해준 이야기와 비슷하더군요 ◈ 척교 : 102m ◈ 거리(시청기준):4.0km ◈ 별명 및 본명 : 약 산 고양의 고봉산 서북맥 내령으로 와동산을 거쳐 끝머리 벌판 가운데로 우뚝서있는 이산은 산아래 곡릉천(공능천이 발음이 변해 곡릉천이 �다고 함)이 흘러 경관이 아름다우며 이산 주위로 전부 구절초가 자생, 주민들은 이를 많이 복용 수명이 연장되었다 하여 유래된 것이다 옛날 조선시대에 아이를 갖지 못하는 한 아낙이 아이 갖기를 소원한 나머지 지금은 흔적도 없는 교하면 장명산 중턱에 위치한 약수터에 올라가서 약수물에 밥을 지어 먹고 구절초 대린 물을 먹으면서 지성을 드린 후에 아이를 갖게 되자 그 소문이 한양 땅에 퍼지게 되어 아이를 갖지 못한 양반님네 부인들이 매년 음력 9월 9일 에 장명산에 내려와서 약수물에 밥을 지어 먹고 구절초 대린 물을 먹어서 아이를 갖게 된 일이 많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구절초는 여자의 냉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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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같지도 않은 정상에 그래도 올랐더니 그 동안 한북정맥을 완주한 마니아들이 自祝하기 위해 걸어 논 현수막들이 쓸쓸히 세월의 풍상을 얘기 하듯 펄럭이고 있었으며... 그 뒤로 건설 패기물 처리 시설들과 래미콘 공장시설들이 가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북정맥을 완주한 많은 등산 마니아들도 저와 같은 허무한 감상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장명산 정상 나무가지엔 숱한 고난을 무릅쓰고 한북정맥을 완주한 마니아들의 기념 리본들이 달려있었으며 멀리 한강과 오두산 통일 전망대를 향해 손짓하는듯 했습니다. 허무했습니다. 고생해서 찾아온 종점이 이런 모습이라니......
곡릉천 하구 갑문 곡릉천은 장흥계곡에서 북한산의 송추계곡에서 흘러 내려와 이곳에서 한강과 합쳐집니다. 한강 하류의 祖江이 서해의 만조 시간 때에는 강물이 불어 이곳 곡릉천 같은 곳은 역류를 함으로 갑문을 만들어 역류 현상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 交河는 이렇듯 큰 강 줄기인 한강과 임진강, 그리고 조그만 지류들이 합쳐지는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며 역사 속에서 이곳에 수도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여러번 있었을 정도로 풍수지리설에서는 알아 주는 명당 자리라고 합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
2008. 4. 2.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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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의 미아리 고개"라는 노래를 들으면 그냥 '슬픈 노래'라고만 생각하며 지나칩니다. "단장"이 뭔 말이여?하면 대충 얼버무립니다 그래도 조금 아는 척 하시는 분들은 '6.25때 파괴된 미아리 고개를 예쁘게 단장 한거지..슬픈 역사를...' '아녀 뭔 소리...단장에 있는 미아리 고개라는 뜻이여~ 미아리 고개가 있는 곳이 단장이여~' 한문 좀 안다는 분들은'짧을 短에 지팡이 杖으로 짧은 지팡이를 짚고 넘은 슬픈 미아리 고개라는 말이여~' 허~ 점점 그럴듯해지는 듯하군요 이 노랫말의 뜻을 알고 부른 신세대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아시는 분들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半夜月선생이 작사한 곡이며 이재호씨가 작곡하고 이해연씨가 부른 노래입니다 이 노랫말은 半夜月선생의 實話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라고 그의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우선 半夜月선생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半夜月선생은 1917년생이시며 아직도 살아 계십니다. '翁'이 되셨지요. 본명이 朴昌吾선생이며 우리나라 가요를 대표하시는 불세출의 음악인이라해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헤아릴수 없는 곡을 쓰셨지만 그중에서도 대표작으로는 〈산장의 여인〉·〈단장의 미아리고개〉· 〈울고넘는 박달재〉·〈산유화〉등 우리들이 아직도 노래방에서 목이 터져라 부르는 것들이 이 분의 노래입니다. 특히 半夜月선생은 가수 생활로 시작을 하셨죠. "진방남" 기억하시나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KBS 가요무대에 등장하여 노래도 부르고 대담도하고 하셨습니다. "진방남"의 대표곡 <불효자는 웁니다> 기억 나시죠?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요 ~ 다시 못 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 半夜月선생은 그의 자서전에서 일생의 恨이 세가지 였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22세때 악전고투 끝에 드디어 태평레코드사의 전속가수가 되어 일본 오사카로 녹음하러 가자마자 '모친별세'라는 전보를 받고 눈물범벅 속에 '불효자는 웁니다'를 부른게 첫번째 한이요... 두번째는 6.25전쟁때 남북이산가족으로 운명 지워진 큰누이 작은누이와의 생이별이고... 세번째 한은 바로 저 세상으로 먼저 간 딸 '수라'입니다... 세번째 恨 - 딸 '수라'에 대한 얘기 半夜月선생은 전쟁이 터지자 음악을 하는 연예인이기에 가족을 두고 먼저 피난을 떠났답니다. 그의 부인은 바로 남편의 뒤를 따라 피난에 합류하기로 했으나 어쩌다 빠져 나오지 못하고 각자 몸을 피하게 되었답니다. 애타게 찾았지만 전쟁중이라 어쩔수 없었는데 9.28 수복 때 서울에서 아내를 극적으로 만날수 있었답니다. 얼싸안고 좋아 했으나 잠깐뿐 ... "우리 딸 수라가 죽었어요. 전쟁의 북새통에 죽 한그릇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려있던 수라가 미아리 고개를 넘어 오다 자욱한 화약연기 속에 숨을 헐떡이며 죽어 갔어요. 저의 손으로 뼈만 남은 4살짜리 딸 수라를 입은 옷 그대로 호미로 땅을 파고 언덕에 묻고 넘어 왔어요" 半夜月선생은 딸의 명복을 빌고 원한을 달래 주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전공인 노래로 승화 시키려했고 아무런 죄없이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 사라져간 딸의 모습을 그리며 노랫말로 만든 것이 바로 이 노래 "단장의 미아리 고개" 라는 것입니다. 이 노랫말은 남편과 아내의 생 이별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그 저변에는 가엽게 사라진 딸 '수라'의 숨결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의 단장은 '끊을 斷, 창자 腸', 즉 창자를 끊는 아픔이라는 의미입니다. 창자가 끊어 지면 어떤 고통이 오겠습니까? 상상 할수 없는 고통 - - 미아리 고개에서 격는 이별의 아픔을 '斷腸의 미아리 고개'라 한 것입니다 "斷腸"에는 중국 고사가 있습니다. 제법 유명한 이야기이라 아시는 분들도 있으실겁니다. 중국의 진(晉:東晉, 317∼420) 나라의 환온(桓溫)이 촉(蜀) 땅을 정벌하기 위해 여러 척의 배에 군사를 나누어 싣고 양자강 중류의 협곡인 삼협(三峽)을 통과할 때 있었던 일이라합니다. 환온의 부하 하나가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붙잡아서 배에 실었답니다. 어미 원숭이가 뒤따라왔으나 물 때문에 배에는 오르지 못하고 강가에서 슬피 슬피 울부짖었답니다. 배가 출항하자 어미 원숭이는 낭떨어지 깊은 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배를 쫓아 헤엄쳐 갔답니다. 100여리 이상 나아간 뒤 강기슭에 배가 나룻터에 닿았을 때 어미 원숭이는 서슴없이 배에 뛰어올랐으나 너무나 지쳐 그대로 죽고 말았답니다. 선원들이 그 어미 원숭이의 배가 이상해 갈라 보니 너무나 애통한 나머지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답니다. 이 사실을 안 환온은 크게 노하여 원숭이 새끼를 붙잡아 배에 실은 그 부하를 매질하며 반 죽여버렸답니다. 동물도 저 토록 자식을 사랑하는데 하물며 인간이야 어디 비유하겠습니까.... 동물도 사랑하고..모두 모두 사랑 하자구요 그리고 참혹한 6.25와 같은 전쟁은 없어야 겠습니다 요즘 또 냉기류가 흐를려고 합니다. 제발 좋은게 좋으니 사이 좋게 놉시다
환장도 있지요?
*좋은소식*
살다 처음으로 남편이 꽃을 가져왔네
*나쁜소식*
근데 국화꽃만있네
*환장할소식*
장례식장 갔다가 아까워서 가져온거라네
영어로 하자면 좋은 소식은 당연히 Good !일테고
나쁜 소식은 두말 할것도 없이 Bad !
환장할 소식은 잘 표현 되는건지는 몰라도 Crazy ! 일 겁니다
환장은 바뀔換에 창자腸이라는 건 알고 계시죠?
국어사전을 찾아 보면 1.마음이나 행동 따위가 비정상적인 상태로 달라짐.
2.어떤 것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정신을 못 차리는 지경이 됨을 속되게 이르는 말. 이라고 되 있습니다.
등산에 환장한 사람들을 요즈음의 우리들은 등산마니아[mania]라고 부르며 좀 유식한척하지요
황순덕 KBS 가요무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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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妓峰
2008. 4. 2.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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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妓峰 국방의 의무를 다하긴 해야하는데 이왕 가는거.....짧고 굵게 갔다 오자고... 지금도 그렇지만 해병대는 육군보다 복무기간이 짧습니다. 당시 교련 혜택받고 하면 육군 그냥 가는것 보다 상당히 짧게 갔다 올수 있었습니다 이제 모두 국방의 의무를 육군 병장으로 다녀 온 두 아들이 군대 시절 얘기를 추억처럼 하고 다니니 저의 군대 시절도 아득히 먼 옛일 같이 느껴지기만 합니다 그래도 대한민국 남성들은 군대 얘기만 나오면 귀가 솔깃하고 자랑스럽게 무용담을 늘어 놓죠 저도 70년대 요즈음 해병대와는 좀 달랐던 "귀신 잡는 해병"이란 칭호를가진 청룡부대에서 청춘의 한 토막을 잘게 부수었기에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친구들은 당시 월남戰이 한창일때 다녀 왔으나 저는 졸업하고 가는 바람에 조금 늦은 월남戰이 끝난 무렵이었습니다 현 김포에서 백령도까지의 서부전선을 지키는 청룡부대는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주요 무대이며 저의 추억의 군시절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역 후 처음으로 여전히 그 모습이 살아 있는 곳으로 가을 여행을 떠났습니다 옛날 제가 복무 할 때엔 단순히 여단이었는데 지금은 사단으로 변해..그것두 두군대로 나뉘어... 엄청 덩치가 커진 한강 하류의 최전방 서부전선 - 해병대가 지키고 있습니다 요즘은 해병대 가려면 대학 입시처럼 엄청난 경쟁율을 뚫고 간다죠? 학력도 높아지고 세월 많이 변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인기있는 군대로 변모했는지 의아스럽습니다 옛날엔 좀 그런 그런 사람들이 해병대를 갔죠? 그래서 犬兵隊라고..ㅎㅎ "愛妓峰" 요즘은 설치를 않는 모양이지만 얼마 전까지도 북녁땅을 향해 자유와 평화를 기원하며 12월이면 설치하던 크리스마스 트리가 환하게 화려하게 밝혀지던 곳 "愛妓峰" 북한이 지척인 이곳은 여러 사연이 겹쳐진 곳이기도 합니다 병자호란때 피란을 하던 평양감사의 애첩 "愛妓"가 님을 잃어버리고 간신히 피신해 와 눈물로 님 오실 날을 기다리다 산화 해간 곳이라 그 사연이 우리 남북 분단의 사연과 너무 비슷하다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愛妓"의 이름을 따 명명한 "愛妓峰" 그곳에 삼십여년만에 올라 북한의 산하와 요즘 우리집 기쁨조 '하루'와 그 엄마가 깊어가는 이 가을에 한장의 사진을 남겼습니다![]()
애기봉에서 바라본 북한의 개풍군 손에 잡힐듯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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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성 종주
2008. 3. 3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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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성 종주 3월의 마지막 일요일 어제는 종일 비가 내려 꼼짝을 못했더니 온몸이 근질거리고 있었는데 저의 山友는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북한산성12문 종주를 하러 가서 가끔 어디 쯤이라고 중계방송을 해와 지금이라도 나갈까 망설이다가 내일 그 동안 가 보고 싶었던 "문수산성"을 가기로 하고 일본 프로 야구를 보며 쐬주 한잔 했습니다 3월30일(일) 오전11시 모처럼 차를 끌고 일산을 나섰습니다 민자 건설 일산대교가 개통되어 내일까지 무료 통행을 시켜준다니 오늘 아니면 공짜 혜택을 받을수 없어 버스를 타고 가도 불편함이 없는 문수산을 차를 갖고 나선 것입니다 공짜를 너무 밝힌다고 흉보지 마시고 이런건 기회 있을때 마다 꼭 챙기시라...결국 돈 버는 일입니다~일산대교 일산대교는 한강의 다리 중 맨 마지막 한강 하류에 새로 민자로 건설했으며 일산에서 김포로 직접 연결되어 경기 동북부및 강원 영서지방에서 인천항 쪽으로 물류이동이 쉬워졌습니다 다만 통행료가 너무 비싸게 책정�다고 통행료 내리라는 아우성 시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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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제방도로와 강화대교까지의 내륙 연결도로 올림픽대로에서 강화도 입구 강화대교까지 한강변을 따라 연결한 한강 뚝 도로입니다 국도가 정체를 빚을 때 이용하면 시간을 단축 할수있습니다..그러나 너무 믿어서는 않됩니다. 저 정도의 정보는 대부분 짱구를 돌리고 있기 때문에 어떨 땐 여기가 더 막히는 경우도 있으니 유의 하시기 바람니다
강화대교 직전 삼거리 신호 대기중
강화대교 직전 삼거리 오른쪽 "모란각" 문수산성을 찾아 가는 지형지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모란각"이라는 음식점입니다 문수산성 찾아 가기는 매우 쉽습니다.강화대교 직전 삼거리 오른쪽에 있으니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을 정도 아시다시피 "모란각"은 귀순 가수 김용이 운영하는 북한식 음식점입니다. 여기도 체인점일듯.. 이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저 입간판이 보이는 오른쪽으로 "문수산성 종주코스"로 들어 갈수 있습니다 남쪽 성벽을 타고 문수산을 오르고 다시 되 돌아 오시는 분들이 애용하는 코스이라합니다 그러나 저는 문수산성을 종주를 할 예정이므로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북쪽 코스로 해서 남쪽 코스로 종주하고 내려 올 계획이었기에 안으로 더 들어 갔습니다.
문수산 산림욕장 입구 모란각에서 100m정도 들어 가면 옛날엔 문수산성 내부였던 곳에 운동시설을 비롯한 공원시설을 조성하여 산림욕을 즐길수 있도록 가꾸어 놨습니다만 나중 내려 올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기 산림욕장으로 들어 가지 않습니다. 산림욕장 입구 저 앞쪽에 삼거리가 보이시죠? 그 삼거리에서 좌측, 즉 해안도로를 타고 2~300m를 가면....
문수산성 북문 오른쪽으로 城門이 보이는데 저곳이 공해루라고 하는 속칭 북문입니다. 저곳에서 부터 산행을 시작 하려합니다
문수산성 공해루(북문) 문수산성은 경기도 3대 산성 중에 하나랍니다. 북한산성, 남한산성, 그리고 문수산성이라고 하는 군요
문수산성 控海樓(북문) 문수산성은 조선 숙종 22년에 축성되었다네요 병인양요 때 주요 건물들은 모두 소실되었는데 최근에 많이 복원을 했다는게 이 정도 입니다 주변 환경이 열악합니다 이 나마 최근 관심이 높아졌기에 이 정도 개보수가 이루어 졌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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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해루에서 바라본 강화대교와 한강 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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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성 성곽 성벽은 최근에 개축 한듯 깨끗했으며 문수산 북동쪽으로 쭉 뻗어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저 성곽 위로 한 바퀴 돌 예정입니다
강같은 바다 건너 강화도 건너편이 강화도 갑곶진으로 다리가 없던 시절엔 육지에서 강화도로 가는 길목 나룻터 였답니다. 교통의 주요 요충지 였기에 여기에 문수산성을 쌓았으며, 수 많은 역사의 흔적들이 여기 저기 나딩구는 그런 장소가 된 것입니다. 고려시대 징기스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을 때에 여기까지 왔으나 저 강같은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1866년 (병인양요)엔 최신식 무기로 중무장한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점령하고 여기 저 강 같은 바다를 건너 문수산성으로 쳐들어 왔을 때 우리나라 군인들은 구식 무기로 맞짱뜨다 패배하고 후퇴했으나, 프랑스군의 피해도 많아 더 이상의 진군을 못하고 자기 나라로 되 돌아 갔는데.. 우리나라 조정이 국가의 중요 문서와 역사 기록등 많은 기록물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분산 배치시킨 강화도에 설치 해논 외규장각에서 프랑스 놈들이 중요 기록물 340여점을 훔쳐 갔으며 나머지 육천여점의 도서를 외규장각과 함께 불태워버렸습니다. 아무리 맞짱 뜨다 많은 피해를 입어 성질 난다해도 어찌 그럴수 있습니까? 천인공노할 일입니다. 지금 피해 보상을 해 주기는 커녕 가져 간거 돌려 달라고 해도 자기 것이라고 돌려 주지 않습니다. 장물애비 - 프랑스 개쎄이들 - 거리의 양아치들 보다 못한 잡도둑들입니다. 그러나 마냥 욕만 할게 아니라 가만히 생각 해 볼 점들도 있습니다 이 병인양요의 원인을 아십니까? 제가 가장 닮고 싶었던 역사 속의 인물 정약용선생 형제들이 처참하게 정치 보복 당한 빌미가 된것 처럼 이 병인양요도 조선의 봉건수구꼴통세력들의 천주교 탄압에서 비롯 된것입니다 대원군 조정이 프랑스 신부 9명을 학살하면서 프랑스의 보복으로 발발한것입니다 지금의 북한 ...아니 우리도 역사를 되새겨 봐야 할것입니다
동북쪽으로 뻗은 성곽 문수산성은 둘레가 5,529보이라 하는데 요즘 환산거리로는 2.4km정도 된다고 하네요 문수산의 높이가 해발 376m이지만, 실제 해발의 시작인 바로 바다에서 부터이니 내륙에 있는 산과 비교하면 제법 높은 산이라 할수 있습니다
문수산성의 북쪽 코스는 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나중에 하산할때 남쪽 코스를 갔더니 많은 사람들로 붐볐는데 그 이유를 알겠더군요 대부분 남쪽 남문 있는 곳에서 남쪽 성벽을 타고 오르고 또한 산림욕장에서 계곡을 따라 문수산 정상까지 올랐다가 다시 되돌아 가더군요 교통의 편리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기온이 제법 올라가기 시작하여 중턱에서 겉옷은 벗었습니다. 멀리 산성의 동북쪽 끝머리가 보입니다
북한 개풍군 한강 하구 하나를 놓고 남북한이 갈라져 있습니다. 멀리만 느껴지는 조선인민민주주의국이지만 이곳에서는 정말로 지척입니다 북한의 산에는 나무 한그루 찾기 어렵습니다. 얼마나 연료 사정이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한듯합니다.
북한과 얼마나 가까운 곳인지 아시겠습니까? 이해 하기 쉽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렇게만 하고 그냥 가시는 분들 너무 많아 섭해요 오늘은 그냥 안가실꺼죠? 한 말씀 남겨 주세요~~^*^
한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 - 한강이 끝나는 곳이죠 금강산과 태백산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으로 흘러 흘러 예봉산이 있는 두물머리-양수리에서 합쳐지고 제가 살고 있는 일산의 조금 위 交河에서 한강이 임진강과 합쳐져 이곳 강화도 바다로 흘러 나갑니다 우리는 여기까지를 통칭해 "한강"이라 하지만, 실제 交河에서 여기 강화 앞 바다까지는 한강하구가 아니라 조상 조(祖)를 써서 ‘조강(祖江)’이라고 불렸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앞으로 祖江으로 불러 주세요
강화대교가 보입니다
동북쪽 끝봉우리에 올랐습니다 황해와 조강이 서로 악수를 하고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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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 정상 부근은 온통 군 방어 시설들입니다. 북한이 지척인 이 곳은 당연히 전략적 요충지 임은 두말할 필요 없습니다. 김포에서 백령도까지 - 서부전선이라고 하죠? 이 서부전선은 바다와 육지가 연계된 요충지라 대한민국 해병대가 방어망을 치고 있습니다. 제가 오래전 70년대에 이곳 서부전선 중에 한곳인 통진에서 군생활을 해서 쬐끔 알지요 지금은 이 서부전선의 부대가 사단병력으로 확충되었다는군요 제가 군시절엔 해병대가 약 이만여명으로 포항의 사단과 이곳 서부전선의 청룡부대라고 하는 여단 두개만이 있었을 때입니다. 해병대는 북한과 바로 마주하고 있는 이곳 서부전선을 최전방이라 하지 않고 포항 사단을 최전방이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해병대의 주임무는 상륙작전이기 때문에 전쟁 발발시 포항의 사단이 바로 상륙전투에 임하는 부대이기에 최전방이라 했고, 이곳 여단인 청룡부대는 방어적 성격의 부대 였기 때문에 최전방이라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육군의 개념으로는 최최전방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저보고 니가 어쩌다 해병대를 갔냐고 묻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ㅎㅎ 언제 기회되면..
문수산의 북동쪽에 위치한 암문인데 기록에 의하면 비밀 통로였다고 합니다 북한산성의 위문과 흡사했습니다
암문에서 문수봉 정상으로 가는 길 곳곳에 OP가 있습니다. OP는 군대 포병에서 주로 쓰는 용어인데 관측소를 말합니다
문수산 정상 부근에서 내려다 본 산성 내부 한눈에 조망 됩니다 우측 능선이 제가 지금 올라 온 성곽이고, 가운데는 그냥 가운데 능선이며 맨좌측 강화대교있는 쪽에 조금 보이는 능선이 남쪽 성곽입니다. 가운데 능선과 맨 좌측 능선 사이가 산림욕장입니다 바로 아래 잘 보이는 곳은 해병대 유격 훈련장이었는데 아직도 사용 하는 듯 하군요. 제가 여기서 아주 옛날에 두어번 고생좀 했습니다..ㅎㅎ 그 때는 여기가 문수산성인지 뭔지 모르고 그저 입에 거품만 나는 유격장으로만 알았습니다
문수산 정상을 가려면 반드시 여기 출입구를 통과 해야만 합니다 군 작전 지역이라 출입제한을 했는데 최근에 낮시간에만 개방을 했다는 군요. 세상 많이 바꼈습니다.
해병대는 붉은 바탕에 노란 글씨를 반드시 사용합니다. 명찰까지도 이런 색을 사용합니다. 피와 땀을 상징한답니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제법 깔딱고개이더군요
문수산 정상이 보입니다
여기도 막걸리 파는 아저씨가 부지런함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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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문수산 정상 오늘은 증명 사진을 생략했습니다 해발 376m라 하지만 바로 해수면에서부터 올랐기에 제법 높은 산입니다 "한남정맥"의 끝 봉우리 "문수산 정상"입니다. 요즘 우리가 학교에서 지리시간에 배운 산맥이라는 용어 대신 백두대간이니 정맥이니 하는 용어를 특히 산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꼭 한번 짚고 넘어 가야 할 문제이라 '한남정맥"의 끝봉우리에서 같이 생각 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깊이 있게 얘기 하려면 이런 산행기 열개가 필요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간단 단순하게 저의 소견을 밝히려 하오니 그저 참고 하시기 바람니다.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들이나 저와 다른 생각을 하시는 분은 차분하게 의견개진 해 주시면 참고 하겠습니다. 대간,정간,정맥으로 우리나라 지형을 말하고싶어하시는 분들은 진정 그 의미를 알고 하시는지... 이런 용어는 옛날에 사용했던 것들인데 현대에 사용하는 것은 옛날로 돌아 가고 싶은 건지... 또 다분히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하며 애국주의, 민족주의적으로 사용 하고싶은건 아닌지... 옛것을 사용하면 좀 유식 해 보이는 듯해서인지... 멋모르고 쓰던 어떻던..... 모두 좋습니다. 대간,정간,정맥은 고려시대 도선선사에서부터 조선시대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나 신경준의 산경표를 비롯한 지형학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 전통 지형 표시 용어입니다 이것의 핵심 내용은 산과 강이 있는 외관적 모습, 즉 地形的 모습 그대로를 표기 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地理는 사실 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일본놈들이 금을 비롯한 조선의 광산물을 수탈해 가기 위해 한반도의 지질 및 광물 조사를 빈번하게 실시하였는데 그때 광물 탐사의 학술 책임자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바로 일본의 지리학자 고또분지로(小藤文次郞)였으며 그는 땅위보다는 땅 속의 지질 구조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지질학자 및 광산 기술자 등을 동원하여 땅 속 구조를 치밀하게 연구 해서 그 것을 바탕으로 지도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질구조 즉 화강암이냐 광맥이 어디로 흐르느냐등을 표기하는 山脈으로 표기 한것이며 대부분 산줄기가 끊긴것과 상관없이 지하의 이어짐을 근간으로 거의 직선으로 표기 하고 있습니다.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두고 일제의 산맥 표기를 맹비난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전통 지도는 地形的이었으며, 일제가 만든 것은 地質的이었습니다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하냐? 비난만 할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생각 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옛날엔 地形따라 각 고을의 삶과 문화가 많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地形的 표기가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현대로 갈수록 교통 도로의 발전으로 강은 교량으로 연결되고, 산은 터널로 뚤어져 地形的 각 고을의 삶과 문화가 사실상 서로의 편리한 교통 덕에 수많은 교류가 잘 이루어져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으로 통해져 특별한 의미가 없어 졌습니다. 통신이나 인터넷의 발전까지 가세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제 地形을 나타내는 전통지도들은 등산객들에게나 필요한게 되 버렸습니다. 이제 이해가 좀 되시는지요.... 수탈의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비난만 할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지질구조도 잘 알아야하겠습니다 저는 地形的 표기와 地質的 표기를 합쳐 여러 각도에서 활용 할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한남정맥 한남정맥은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부터 안성의 안성 칸트리 클럽의 뒷산 칠현산까지 '한남금북정맥'을 이루고 거기서 북서쪽으로 문수산까지 뻗은 산줄기를 '한남정맥'이라 부릅니다. 한강 남쪽의 산줄기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칠현산에서 태안반도로 뻗은 산줄기가 금북정맥입니다.금강의 북쪽 산줄기라 생각 하면 됩니다
문수산 정상
문수산 정상에서 바라 본 북한의 개풍군
문수산 정상에서 바라 본 '애기봉' 애기봉에 대해선 지난해에 �던 것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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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대학 김포대학 뒷산이 문수산이더군요
문수산성의 남서쪽으로 하산
남쪽 성벽에 있는 홍예문 김포대학에서 올라 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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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예문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 명사입니다 홍예는 '무지개'라는 뜻이며 건축학에서는 'arch'를 뜻합니다. 우리나라 성문은 숭례문을 비롯해 대부분 홍예문입니다 고유명사와 일반명사는 구분 해야 할텐데 아직도 무식한 공무원들이 있긴 있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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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성곽은 비교적 잘 개축 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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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성곽에는 시설물이나 이정표가 잘 되 있었습니다
강화 대교가 보입니다.
거의 다 하산 했습니다
저 멀리 오늘 오전에 차를 몰고 들어 올때의 '모란각'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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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욕장으로
하산 완료 산림욕장 안에는 체육시설이 잘 되 있었습니다
관리 사무실
소위 남문이라고 칭하는 취예루를 돌아 보고 오늘의 산행을 마쳤습니다 산행시간은 2시간30분 걸렸으니,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쯤 다니는 자녀를 둔 젊은 엄마 아빠가 가족과 함께 휴일의 나들이로 다녀 오기엔 좋은 곳이라 생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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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봉산 - 적갑산 - 운길산 - 수종사 산행기
2008. 3. 25.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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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봉산-적갑산-운길산 - 수종사 연계 산행 3월22일토요일 오전6시30분에 집을 나서 순두부로 아침을 해결하고 일산 백석역에서 7시9분 전철을 타고 옥수역에 8시쯤 내렸습니다3호선 옥수역 오랜 기간동안 서울에서 살았지만 옥수역에 내려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지하역이 아니기에 자연광으로 비치는 햇살과 한강변의 공기가 새삼 싱그럽게 느껴졌습니다. 오늘도 앞에 가는 山友와 '단둘이 홀로' 제법 긴 코스인 예봉산-적갑산-운길산을 다녀 오려합니다.
중앙선 옥수역 대부분의 열차가 서울역에서 출발하는데 서울의 동쪽이나 동남쪽을 갈 때는 서울역이 아닌 '용산역'에서 출발을 하죠? 그 방향으로 갈때 청량리역에서 타본적은 제법있어도, 불행이도 '용산역'에서부터 기차를 타본적이 단한번도 없었습니다. "전철 중앙선 옥수역" 이름도 매우 생소했습니다만 처음으로 한강 북로를 따라 여행하는 기분을 만끽하기위해 예봉산=운길산 산행도 산행이지만 이 중앙선 전철을 타고 한강변을 달리는 감상을 꼭 산행기에 올리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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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전철이 '팔당역'까지 얼마전 개통이 되고 나서부터 오늘 가려고하는 예봉산-운길산 등산객이 몇배가 늘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런 상황을 알고 그런 분들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떠나게 된것입니다. 최신형 전동차가 다가와 벌써부터 설레는 마음을 열어 주워 담으려 합니다
달리는 전철 안에서 - 구리 부근 한강변을 중앙선을 타고 가며 풍광을 많이 찍을려고 했는데, 찍은 사진들이 생각많큼 나오지 않아 고르고 골라 한장을 올립니다. 한강이 흐르는 강변 - 낭만적입니다 토요일 중앙선은 용산에서 덕소역까지 10분에 한대가 운행하고 있었으며 용산에서 팔당역까지는 30분에 한대가 운행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전철 3대에 한대가 팔당역까지 운행 함으로, 우리는 덕소역에서 내려 기다리다가 팔당가는 전철로 다시 갈아 탓습니다. 덕소에서 팔당역까지는 두정거장으로 5분정도...
팔당역 새로 지어진 팔당역은 규모도 크고 시설도 최신식이었습니다 뒤로 오늘 오를 '예봉산'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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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역 내부 화장실 모든 시설이 새로 지어서인지 깨끗했습니다. 특히 화장실은 호텔 수준이었습니다. 먼 곳에서 오는 산객들은 여기서 기초적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고 출발하기에 아주 좋았습니다
팔당역 팔당역은 주차장도 넓어 산꾼들의 약속 장소로도 좋은듯합니다. 뒤로 오른쪽이 예빈산(견우,직녀봉)이 보이며, 좌측 조금 보이는 능선이 예봉산입니다.
팔당역앞 - 자동차 도로 오전 9시 20분경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팔당역앞에서 동쪽, 즉 양수리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갑니다.
예봉산 등산로입구 팔당역에서 조금 올라 오면 '팔당2리' 굴다리가 나오며, 이 굴다리를 지나 큰 길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항상 등산로를 처음 찾아 들어가는 문제만 해결하면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이 사진을 봤는데도 못찾아 가는 사람은 앞으로 등산 다니지 마세요~~ 뒤로 예봉산이 보입니다.
첫번째 만나는 삼거리 굴다리에서 5분정도 올라 오면 이리 갈까 저리 갈까~하는 삼거리가 나옵니다 저 앞에 사람들 모여 있는 곳 - 초행길은 이런 삼거리가 문제이지요.
등산로 안내판 이리 갈까 저리 갈까 고민 할 필요 없습니다. 요즘 안내판 설치가 잘 되있으니까요
이정표 오른쪽은 예빈봉이나 율리봉을 거쳐 예봉산을 가는 길이니 초행이신 분들은 대부분 왼족의 예봉산 직코스를 선택해서 가더라구요.
이정표 왼쪽의 예봉산 직코스 예봉산은 전철 도착시간에 왕창 붐볐다가 30분 동안은 조용하고~ 이런 상황 반복~ㅎㅎ 당연하겠지요? 우리와 같은 전철을 탓던 사람들 한무더기는 모두 먼저 올라 갔습니다.
조금 올랐더니 같은 전철을 탓던 사람들을 금방 만났습니다. 벌써 휴식을 취하더군요. 토요일인데도 산객들이 많았습니다
오르막 시작 이제부터 숨쉴틈 없이 오르고 올라야 합니다
생각보다 경사도가 높았습니다 특히 쉬어가는 구간이 하나도 없이 오르막만 존재 했습니다. 예봉산 정상까지 이렇게 오르막이었습니다.
조금씩 오를수록 나뭇가지 사이로 한강이 조금씩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한강과 검단산 이제 제법 완벽한 제모습을 내보이기 시작하는 주변 풍광들. 이런 맛에 오르고 또 오르지요? 한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의 검단산이 예봉산과 키를 맞추어 갑니다. 검단산은 잘 아시다시피 매우 유명하며 주로 강남구, 강동구, 하남시 사람들이 애용하는 등산 코스입니다.
검단산 우측의 하남시 전경 - 멀리 강동구
계속 오르막 예봉산 정상까지는 산행기를 특별히 쓸만한게 없습니다. 오로지 오르고 또 오르고..그리곤 한강구경과 예봉산 검단산의 도토리 키재기를 감상 하는 일과 조금후 등장하게 될 두물머리의 풍광을 감상하는 일..그게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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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은 어느 산악회의 늦은 시산제를 하느려는 팀이 한팀 있었습니다 요즈음의 산악회에는 남자들 보다 여자가 더 많은 듯합니다. 세상의 모습은 자꾸만 변해 갑니다. 옛날엔 여자가 산에 다니는건..좀 그랬지요?
두물머리 동남쪽 방향으로 양수리(두물머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예봉산 정상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예봉산 정상 바로 밑에서...
예봉산 정상 드디어 정상에 다가 왔습니다. 예봉산 정상엔 많은 산꾼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 였습니다. 모든 동서남북의 조망이 가능한 곳이기도 하지만 역시 정상이다 보니 동그란 좁은 면적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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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사진은 산에 왔을때 찍는 것, 동서남북의 경치를 카메라에 담아 이 산행기를 읽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감회를 느끼도록 노력은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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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 다산 정약용선생의 詩팻말 팔당역에서 여기까지 1시간반 정도 걸렸습니다. 아마도 오르막을 오래 오르는 일은 앞으로 없을듯 합니다. 그러나 현재 11시 정도 됬지만 앞으로 약 다섯시간정도를 더 가야한다니 오르막은 차지하고 그 지루함과의 싸움을 해야 할듯하군요.
예봉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바라 본 양수리 -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오른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 금강산에서 흘러 흘러 오는 북한강과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검용소에서 발원하여 흘러 흘러 오는 남한강이 다시 바다로 손잡고 나가기 위해 모이는 곳 - 두물머리
예봉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바라 본 예빈산과 팔당호
예봉산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바라 본 하남시
예봉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바라 본 운길산 오늘 부지런히 저 운길산을 가야합니다
예봉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바라 본 적갑산 방향 적갑산을 돌아 운길산, 그리고 수종사까지 식사시간 포함해서 앞으로 약 5시간을 가야합니다.
예봉산과 적갑산 사이의 갈대밭
갈대밭에서 바라본 예봉산 - 정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올라와 장사를 하는 분들이 몇분 있었는데 대단한 집념입니다
갈대밭에서 바라본 검단산,고추봉, 용마산 이 갈대밭에서 산행 시작후 처음로 휴식을 취하며 가지고 온 과일도 먹었습니다
철문봉 갈대밭에서 서쪽 능선을 타고 조금 가니 "철문봉"이 나왔습니다 이제부터 역사 속의 인물 중에서 제가 가장 닮고 싶었던 인물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퇴계 이황선생님이시라는건 저의 글들을 읽으신 분들은 모두 아실겁니다. 제가 가장 닮고 싶고 따라 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분 - 茶山 정약용선생 이제 그 꿈을 접고 그분의 발톱사이의 때 많큼도 닮지도 못하고 가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제가 많이 아는 분이시니 산행을 하며 그분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고 싶습니다. 이곳 喆文峰은 정약전 둘째형, 정약종 셋째형, 그리고 정약용 삼형제가 청운의 꿈을 안고 젊은 시절 공부를 할때 건강관리를 위해 오르곤 했던 봉우리라 '학문의 도(文)를 밝혔다(喆)'고 喆文峰이라 한답니다. 정약용 선생이 살던 집은 저 아래 팔당호 옆이라 여기 철문봉까지 오르 내리려면 아무리 빨리 다닌다해도 5시간은 걸렸을 겁니다만 건강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진리를 일찍이 깨우쳤고 나중의 大實學者 다웁게 말로만 떠벌리는게 아니라 실천으로 이미 등산을 생활화 하셨으니 그런 큰 업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산 정약용선생도 당시로서는 대단한 장수를 하셨죠. 칠십오세까지 사셨으니..... 우리 역사 속에서 높은 관직에 오르고 좋은 역사적 평가를 받으시는 분들은 거의 모두 등산을 하셨습니다 등산을 않하면 출세가 의미 없는거죠? 밑빠진 독에 물 부어 봤자..건강은 스스로 지켜야 하는거죠 정조대왕의 가정교사였던 채제공 선생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다산 정약용선생인데 당시 여러 직위를 맡으시고 영의정까지 하신 번암 채제공 선생의 관악산 산행기인 遊冠岳山記는 무지 무지 유명합니다 당시 예순일곱살에 관악산을 종주 했기에 유명한것입니다. 여든넷에 관악산 종주 하신분이 숙종 때에 서인의 수괴 송시열과 쌍벽을 이루던 남인의 총수 허목 선생이죠. 채제공 선생이 존경한 분이 바로 허목 선생이고 허목 선생이 존경한 분이 이황선생이며 세종때의 방촌 황희 선생이죠 이 분들 모두 등산을 엄청나게 좋아 해서 황희 선생이 팔순까지 사시고, 퇴계 이황선생이 칠순, 미수 허목 선생이 여든일곱, 번암 채제공선생이 팔순까지 사셨으니 당시로는 대단한 장수이지요 앞으로 다음 산행기 쓸때 소개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약용 선생은 채제공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철문봉에서 적갑산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 저를 자주 만나는 분들은 저의 주장을 귀가 아플 정도로 많이 듣고 상당 부분 공감하는 게 있는데... '영종도 인천 국제공항'의 이름을 '정약용 국제 공항'으로 고쳐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 최고의 만물박사 -미술, 음악, 건축, 의학, 과학,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르네상스시대 당시 세계 최고라 할수 있는 사람 - 레오나르드 다빈치 - 이 사람에 대해선 더이상 설명 할 필요가 없지요? 한국의 정약용선생이 이테리의 레오나르드 다빈치와 견줄수 있는 세계 유일의 인물이라고 주장 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테리의 수도인 로마의 국제공항 이름이 '레오나르드 다빈치 공항'이기 때문에 우리도 편협한 지역 지명으로 공항 이름을 지을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붙여 '정약용 국제공항'이나 '세종 국제공항'등으로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뉴욕의 국제 공항은 '존 에프 케네디 공항', 파리는 '드골 공항', 런던은 '히드로 공항', 이미 말했듯이 로마는 '레오나르드 다빈치 공항'입니다. 모두 지역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동양 쪽에서나 지역 지명을 붙입니다. '인천 국제 공항'은 사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항인데도 인천 지역적 이미지가 짙습니다. 특히 외국인들에겐....
철문봉에서 패러글라이딩 활공장 가는 길 이제부터는 조막조막한 봉우리들을 오랐다가 내렸다를 반복해야합니다. 정약용선생이 집필한 책만해도 800여권이 넘으며, 그 책 내용들이 어떤 한 분야의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미술, 문학, 철학,...범죄수사, 심리학....과학, 기계, 건축학.... 모든 분야를 섭렵하셨으니 레오나르드 다빈치와 견주어 모자람이 없다는거죠
오히려 더 훌륭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패러글라이딩 황공장 TV에서만 봤지 이런 곳은 처음입니다. 남양주시의 공식 활공장이니 의미있는 자리인 모양이죠? 저는 '활강'인줄로 알았는데 패러글라이딩은 공중에서 뛰어 내리는 게 아니라 공중을 날기 때문에 '활공'으로 쓴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패러글라이딩 활공 start 장소 밑은 낭떨어지였습니다. 에구~ 저 같은 사람은 엄두를 못내겠습니다. 멀리 다리가 하나 보이시나요? 현재 건설중인 '서울-춘천'간 민자 고속도로라고 하더군요 앞의 아파트들이 구리시 덕소쯤이며 한강 건너편이 하남시
활공장의 휴식처 - 찻집 여러가지 파는 듯..
활공장의 찻집
뒷쪽에서 본 활공장 저 앞의 사람들 서 있는 곳 바로 앞이 낭떨어지 활공장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에서 적갑산 가는 내리막 길 오르락 내리락이 계속 됩니다 여기서 부터는 등산객을 보기가 힘들어 집니다. 대부분 중간에서 하산 했기 때문입니다
적갑산 가는 길에서 본 '운길산'이 푸르른 소나무 사이로..
또 오르막....적갑산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봉우리라 해도 그다지 크지 않고 구경거리도 별루였습니다 어디가 적갑산인지 별도 표시가 없었습니다. 대략 적갑산 부근이겠지... 다시 말해 적갑산은 조그만 봉우리 정도 였기 때문입니다
정일근 시인의 "갈림길"이라는 詩팻말 길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 너에게로 가는 길이 나에게 있었고 나에게로 가는 길이 너에게 있었다 지금 가장 멀고 험한 길을 걸어 너는 나에게로 돌아 가고 있다 나는 너에게로 돌아 가고 있다 이제 작별이지 이승에서의 길은 여기까지다 길은 가까워 질수록 멀어 지는 것이니 멀어 질수록 가까워 지는 것이니
또 걷고 걷습니다.
거의 하산 수준으로 내려가서 다시 오르고...운길산까지 계속 됩니다
곳곳에 이정표가 있고 외길이라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정표가 있는 곳엔 유명한 詩가 하나씩 걸려 있었습니다
김종해 시인의 "새는 자기 길을 안다" 하늘에 길이 있다는 것을 새들이 먼저 안다 하늘에 길을 내며 날던 새는 길을 또한 지운다 새들이 하늘 높이 길을 내지 않는 것은 그위에 별들이 가는 길이 있기때문이다
茶山 정약용선생의 생가와 기념관, 그리고 묘소가 양수대교 옆 팔당호로 툭 튀어 나온 능내리 마재 마을에 제법 규모가 크게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茶山 정약용선생을 떠올리면 전남 강진의 草堂을 생각합니다. 그곳이 곧 茶山 정약용선생의 本家같은 느낌을 받습니다만, 그곳은 생각하기도 끔찍한 유배지였씁니다. 그곳에서 18년간이라는 유배 생활을 하며 외롭게 지냈는데 왜 그토록 그곳이 더 각광 받을까요? 사실은 이곳 능내리 마재 마을이 本家이며 生家이니 이곳이 더 각광 받아야 당연한데도.... 전라남도와 강진군의 공무원들이 업무를 잘해서일까요? 아시다시피 그곳이 각광 받는 이유는 그곳에서 정약용이라는 실학자가 일생의 최대 업적을 남기기 때문이죠 500여권이 넘는 책을 그곳에서 집필하였고 사연도 많았기 때문일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일들은 정약용선생의 호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정약용선생의 호는 사암 (俟菴)이며,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인데 '겨울 내를 건너고 이웃이 두렵다는 의미'를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사암 (俟菴)은 정약용선생이 가장 좋아한 호였다고 합니다. 사암은 백세이사성인이불혹(百世以俟聖人而不惑) 즉 '뒷날의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함이 없다.' 라는 기다림의 의미가 있고, 뒷날의 성인에게도 학문적 질책을 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자신감과 떳떳함이 배어있는 가장 선생다운 호라는 것입니다 여유당(與猶堂)은 뭔 여유있게 사색을 즐기려고 지은게 아니고, 선생의 불우했던 정치적 환경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선생은 요즘 말로 하자면 사상범이었습니다. 천주교를 접했다는 이유 하나입니다. 그 이유로 유배생활 18년... 물론 정조대왕을 정점으로 한 진보 개혁파가 정조대왕의 의문의 죽음으로 보수 수구세력인 서인 벽파들로부터 처참한 정치보복을 당한 것이지만... 與猶의 與는 머뭇거릴 '여'이며, 猶는 망서릴 '유'로 즉 망설이기를 사방을 두려운 마음으로 살피듯이 조심하면서 살아가겠다는 뜻이랍니다 선생의 호로 茶山이 많이 쓰이는건 전남 강진의 유배지 뒷산이 조그마한 '茶山'이라는 地名이어서 茶山에 사는 정약용을 나타낼때 쓰셨는데 이것이 후세에 그냥 '호'로 자리 메김하고 말았습니다. 선생이 유배생활을 끝내고 여기 本家에 왔을 때는 "洌水" 정약용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엔 한강을 '洌水'라고 했기에 '洌水'에 사는 정약용을 나타 낼때 사용했는데 그의 자서전에는 '洌水' 정약용이 쓰다...라고 되 있습니다. 이렇듯 정약용선생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후세엔 모두 "茶山" 정약용이 되 버리고 말았습니다.
등산로 가운데를 소나무가 가로 막고 있어 부닥칠 위험이 있어 여기 소개 합니다 모자 눌러 쓰고 가다 저도 부닥칠뻔 했습니다. 여기뿐만 아니라 산행시엔 항시 조심해야하죠?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 하시라~~!!
생강나무 꽃 이 노오란 꽃이 뭔 꽃인지 몰라 동행한 山友에게 물었더니 글세~산수유인가? 하며 자신 없어 했습니다. 그래서 궁금하면 못참는 성격 아시죠? 그런데 제가 즐겨찾는 블로그가 있는데 얼핏 생각이 나 들렸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 꽃에 대해 설명을 잘 해 놨더라구요. 물론 산수유로 혼동 하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생강나무 꽃 [한국의 야생화]여기 클릭해서 자세히 알아 보셈 세상 사는데 블로그가 얼마나 도움을 주는지 모두 아시져? 모든 정보가 무료이고..이해하기 쉽고..
중간 중간 하산길이 있는데 그런 곳엔 산꾼들이 좀 있더군요 이곳은 잘 알아두면 혹시 빨리 하산해야 할때 이곳에서 '도곡리'로 내려 가면 바로 교통편을 이용
도곡리 하산길이 있는 곳. 이곳은 잘 알아 두세요
여기에 이 유명한 글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정약용선생의 생가가 있는 곳이라 정약용선생의 글이 많았습니다. 이글은 강진 유배지에서 쓴 글인데 사연이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하지요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략히 소개 해 드리겠습니다. 정약용선생의 어머니는 그 유명한 '어부사시사'를 지은 고산 윤선도의 6대손이며 윤두서의 손녀입니다. 정약용선생의 부인은 풍산 홍씨인데 이 부인이 정약용선생이 유배지에 있을때 '자신이 시집 올때 가지고 온 다홍치마 여섯폭'을 싸서 유배지로 보냄니다. 이 치마는 흐르는 세월 속에 낡고 색이 바래져 있었습니다. 윤씨부인이 이 치마를 보내는 이유는 가히 짐작 하시겠죠. 지금 병들어 고통스러우나 사랑하는 마음을 담고 시집 올때와 변함없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정약용선생은 이 빛바랜 치마를 짤라 4폭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남은 한폭엔 ‘매화병제도(梅花屛題圖)' 일명 ‘매조도(梅鳥圖)’라고도 하는 그림과 글을 시집간 딸에게 보냅니다. 그 매조도(梅鳥圖)에 써여 있는 글을 한글로 풀어 썬 것이 위의 시팻말입니다. 오리지날 보여 드리죠.
翩翩飛鳥 (편편비조) 펄펄 하늘을 나는 새들이 息我庭梅 (식아정매) 우리 집 뜰 앞 매화 가지에서 쉬는구나 有烈其芳 (유열기방) 꽃다운 그 향기 은은하기도 하여 惠然其來 (혜연기래) 즐거이 재잘거리려 찾아왔나보다 爰止爰棲 (원지원서) 이렇게 이르러 둥지를 틀고 樂爾家室 (낙이가실) 너희는 네 집안을 즐겁게 해 주어라 華之旣榮 (화지기영) 꽃은 이미 활짝 폈으니 有賁其實 (유분기실) 이제 토실한 열매가 많이 달리겠구나 딸에게 보낸 이 그림과 글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 되있으며 아들에게 보낸 4장의 하피첩(霞帔帖)은 문서로는 있었으나 실물이 없었는데 제작년 4월에 KBS의 TV진품명품에서 4장중 3장을 소장하고 있는 분의 출연으로 세상에 그 진면모를 나타냈었고 저는 그때 TV를 시청하고 있었는데 감정가가 1억이 나온 것으로 기억됩니다 하피첩(霞帔帖)은 노을 霞에 치마 帔로 직역하자면 노을치마이고 의역하자면..아시죠? 아내가 시집올때 입고 왔던 다홍치마가 노을빛으로 바래진 그 치마폭에 시집간 딸에게 보내는 유배지의 정약용선생의 마음을 냉철하게 담아 보내는 아빠의 마음 -- 아들에게 보낸 편지도 무지 유명하죠? 다음 산행 때 소개하죠
사거리 약수터가 있는 사거리 고개에 도달하는데 여기서도 네군데로 하산 할수 있습니다. 우리 같은 먼데서 온 산꾼들은 무조건 '수종사'까지 가야만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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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험난한 산을 다시 올라야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힘이 많이 들기 시작하더군요 산행 시작한지 4시간이상이 지났습니다.
산 하나를 넘어서 이제는 '운길산'에 다가 왔나 싶으면 다시 이름도 잘 모르는 산봉우리가 있고.. 넘으면 또 있고를 반복했습니다
양수리가 조금씩 보이는 걸로 보아 운길산이 가까워 오는 걸 느낄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수종사'라는 절이 '두물머리'를 감상하는 최적의 위치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르고...
오르고 나면 또 나타나고...
건너편 예봉산이 시야에 들어 오니 운길산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걸 느끼겠습니다
마지막 릿지를 하고.... 능선에는 암벽이라곤 거의 찾아 볼수 없고, 이곳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운길산을 오르는 마지막 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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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雲吉山에 올랐습니다 다른 산 봉우리에서는 찾기 어려운 평상도 있고.. 구름도 쉬어 간다고 운길산이라는 군요
운길산에서 바라 본 두물머리 날이 좀 어두워 지기 시작합니다
운길산에서 수종사로 내려가는 길에 이제서야 올라 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여기서 수종사는 지척 거리였습니다. 올라 오는 여자들에게 '날씬한 여자들이 여긴 뭐하러 와요!!'~~했더니 모두 기분 좋아 하더군요..ㅎㅎ
수종사가 모습을 드러 냅니다
수종사는 매우 웅장하고 수련하는 스님들이 매우 많은 큰 절인줄 알았는데 그렇게 큰 절은 아니더군요
두물머리 구경에는 최적지라고 알려져 있어 기대를 많이 했는데 이제까지 예봉산 - 적갑산 - 운길산을 돌아 오면서 여러 각도에서 봐서 그런지 새로운 감은 좀 떨어졌습니다
水鐘寺는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러 오대산 상원사에 갔다가 길목인 두물머리 근처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는데, 밤중에 어디선가 이상한 북소리가 들려 찾아 따라 올라 가 보니 어느 동굴에 물방울 덜어지는 소리가 쇠북치는 소리와 같이 들렸다고 해서 水鐘寺라 했다고 합니다
기와로 만든 담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해탈문
앞의 사적기 뒤로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세월의 풍상을 안고 우뚝 서 있습니다.
만든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水鐘寺의 내력을 기록한 사적기
'칼의 노래' 김훈 작가 아시죠? 저의 고등학교, 대학 4년 선배되시고 일산에서 같은 동네에 살고 있죠 그의 저서 '자전거 여행'에서 여기 수종사를 노래한것이 있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수종사 마당에서 산하는 크게 열린다. 산하는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 굽이치며 다가와 다시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흘러나간다. 내륙의 산악과 평야를 파행으로 흘러 온 남한강과 북한강이 눈 아래서 합쳐지고, 거기까지 강을 따라온 산맥들이 다시 여러갈래로 모이고 흩어져 하구를 향하는 대오를 갖춘다. 어디서부터 몰려오는 것인지, 산맥들의 대오는 푸르고 강성해서 하늘 밑을 가득 출렁대는데, 그 푸른 기세의 먼 변방으로 낮은 봉우리들을 거느리고 품어서 자애롭다."
"수종사 절 마당에서, '열수'강은 '열수'마을을 3면으로 휘감고 크게 굽이치면서 돌아나간다. 그 강 건너편 광주시 퇴촌면 앵자산 밑에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선각자들인 이벽(1754~1786), 권철신(1736~1801), 권일신(1751~1791), 이승훈(1756~1801), 정약종(1750~1801)이 묻혀있다. 그들은 모두 총명하고 반듯했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의 젊은 날은 서학을 통해서 새롭게 열리는 세계와 미래의 모습으로 설레었다. 그들은 평등과 보편의 신세계를 향해 개안했다. 그들의 청춘은 찬란하고 치열했다. 그리고 그들의 최후는 이단과 대역을 다스리는 형장에 으깨져 죽었거나 망나니의 칼에 베어졌고 그 사체는 거리에 버려졌다. 강물이 합쳐져서 앞으로 향하는 그 두물머리 남쪽 깊은 산속의 작은 암자에서 전환하려는 꿈과 전환되지 못하는 세계의 참극은 비롯되었다. 수종사 마당에서 합쳐지는 강물을 사이에 두고 정다산의 고향과 강 건너 퇴촌면 천진암 언저리가 한눈에 보인다. 강물에 실려오는 전환과 신생의 꿈이 아직도 그 양쪽 유적지 사이를 흐른다. 합치고, 굽이쳐서 기어이 바다로 나아간다."
수종사의 해우소는 특이합니다 신발을 벗고 해우소로 들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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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수종사의 후문으로 들어가 정문으로 나오다 보니 이제서야 수종사 일주문이 보입니다
중리 마을에 내려와서 콜택시를 불렀는데 빈차가 없다고해서 양수대교까지 걸어 가다 행운스럽게 택시 합승을 할수 있었습니다 1인당 2,500원씩 네명이서 만원내고 팔당역까지 갔습니다
중리에서 팔당역 가는 택시 안에서....
드디어 서울 가는 전철을 탓습니다. 저녁 7시가 넘었습니다. 새벽 6시30분에 집을 출발해서 순두부 한그릇 사먹고 팔당역에 도착하여 산행을 시작한 시간이 오전 9시 20분경이었으니 아홉시간반 정도 걸렸습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점심 먹는 시간도 한시간 정도 걸렸지만, 중리에 내려와서 차 기다리는 시간과 팔당역까지 오는데 차가 막혀 많이 걸려 예상보다 두시간반 정도 더 걸렸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저희들이 걸린 시간 정도는 각오 하고 가야 할 코스인듯합니다
팔당역에서 붉은 점선이 걸은 코스이며, 중리에서 초록색 점선이 택시를 탄 코스 어~휴~ 쓰기도 힘들었지만 읽느라고 고생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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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상장능선과 영봉 산행기
2008. 3. 17.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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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상장능선과 영봉 3월16일 일요일에는 북한산의 동쪽 "상장능선과 영봉을 다녀왔습니다. 상장능선으로 가려면 지하철3호선 구파발역1번출구로 나와 송추 의정부 방향 버스를 다시 타야합니다. 삼천사 입구, 북한산성 입구, 효자리, 사기막골(숨은벽코스입구)을 지나 "솔고개"에서 내리면 됩니다.솔고개 버스 정류장
솔고개 버스 정류장 우측 상장능선 입구 멀리 상장봉이 보입니다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우측으로 상장능선 가는 길이 있어 입구를 찾기가 쉽습니다. 멀리 상장봉이 보이고, 앞의 좀 낮은 능선의 봉우리가 '폐타이어봉'입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3~400m정도 들어 갑니다
워밍업 할 겨를도 없이 바로 등산을 해야합니다 상장능선은 잘 알려지지않아 산객들이 많지 않아 한적한 산행을 즐길수 있습니다. 3월의 북한산 주요 등산로는 아시다시피 초만원을 이룹니다
폐타이어봉 20여분정도 걸어 도착한 '폐타이어봉'은 폐타이어를 활용하여 군 방어참호인 벙커를 만들어 놓아 '폐타이어봉'이라 한답니다 이곳에서 두꺼운 옷들을 벗고, 물도 조금 마시며 본격적인 산행 준비를 합니다.
폐타이어봉에서 바라 본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대와 인수봉이 멀리 보입니다
폐타이어봉에서 내려다 본 송추
폐타이어봉에서 올려다 본 '상장봉' 상장능선은 저 상장봉까지만 가면 힘든 구간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장능선에는 아홉개의 봉우리가 횡으로 있어 제1봉인 상장봉에서 제9봉인 '왕관봉'까지 옆으로 오르락 내리락하며 진행하기에 한결 편합니다. 어떤 내력이나 특징이 없기 때문에 오늘 산행기는 정말 재미 없습니다.이제 시작 해 볼까요?
상장봉까지는 끝까지 오르막이라 제일 힘든 구간입니다 앞에 가는 山友를 언젠가는 소개 해 드릴겁니다만 신비주의의 달인인 제가 궁금증을 더 키워 잡아 먹어야지요...ㅎㅎ 오늘 산행이 끝날때까지 저 山友의 뒤를 따라 갑니다
중간 중간 등산객들이 벌써 부터 퍼져 앉아 한잔씩 하는 광경이 목격됩니다
제1봉 '상장봉'산행 시작 한시간여만에 상장능선의 제1봉인 상장봉이 보입니다. 좀 싱겁지요? 이런저런 고생을 하며 올라야하는데 특별한 험난한 코스 없이 무난하게 가장 힘들다는 코스를 올랐습니다.
상장봉 옆구리 상장봉을 릿지로 올라 가는 곳이 있으나 만수무강을 위해 옆구리로 우회로를 따라 봉우리 꼭대기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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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대기에 올라 내려다 보니 천길 낭떨어지
좌측 봉우리가 '여성봉'이며 그 능선이 송추남능선입니다. 가운데 능선이 오봉능선이며 우측 저 멀리 도봉산 주봉인 자운봉 신선대등이 보입니다 여성봉 뒤에 하얀 봉우리가 사패산입니다. 북한산, 도봉산, 사패산을 합쳐 북한산국립공원이라 합니다.
우스개 소리 하나 들려 드리겠습니다. 오봉과 석굴암절 사이의 '부처바위'가 보이시죠. 이 부쳐바위는 '여성봉'만 곁눈질로 훔쳐 보고 있다고 합니다. 여성봉은 절묘하게도 여성의 그곳을 쏙 빼 닮았다해서 붙여진 지도에도 나오는 공식 지명입니다. 여성의 거시기라면 '여성봉'으로 표기 할게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표기 해야죠? ㅎㅎ 하여튼 부처도 인간이었으며 남자였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할수 있겠으나 30억년을 바라 보기만하며 욕정을 눌러 수도했기에 부처가 될수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모든 욕망을 다스릴때 나온다는 설도 있지요? 믿거나 말거나...산행시 유머로 써 먹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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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봉 이 사진은 전에 갔을 때 찍어 둔 것입니다. 절묘 오묘하죠?
앞으로 가야할 제2봉부터 순서대로 있으며 맨 끝에 제9봉인 '왕관봉'이 보입니다 상장능선은 아홉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번째 봉우리 '상장봉'과 아홉번째 끝봉우리인 '왕관봉'을 제외하고는 각봉우리들의 이름도 없을 정도로 그져 그런 봉우리들입니다. 그래서 나머지 봉우리들은 그냥 지나치며 간혹 사진으로만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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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길을 뒤돌아 보며.....많이 지나 왔습니다.
산행기를 쓸땐 카메라 쥼을 당겨 촬영을 하지 않는 다는군요 왜냐하면 가지도 않은 길을 간것으로 오해 할수도 있기 때문이랍니다 오봉은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카메라 성능도 그렇고 황사도 좀 있어서 사진이 별루네요
오봉과 자운봉, 신선대등의 봉우리들이 새로운 각도에서 가깝게 다가 옵니다.
상장능선의 마지막 봉우리 '왕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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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봉우리인 '왕관봉'을 끝으로 '상장능선'은 끝납니다 왕관봉에서 육모정고개까지는 내리막 길입니다
육모정 고개 육모정 고개에는 고려대 교수였던 이창렬 박사의 추모비가 이정표처럼 우뚝 서 있습니다.
님은 산을 그렇게도 사랑하더니 끝내 여기서 산과 하나가 되다. 노산 이은상 선생이 70년대에 한국산악회장이었군요
영봉을 바라 보며..여기 육모정 고개에서 다시 영봉을 오르기 위해선 등산을 새로 시작해야합니다 지금까지 체력이 많이 떨어졌는데 다시 가파른 영봉을 오르려니 무척 힘들었습니다.
중턱쯤 올라왔습니다. 영봉 뒤로 '인수봉'이 아련히 나타 납니다.
우의동과 상계,중계,하계동의 아파트촌이 한눈에 들어 오며, 멀리 불암산이 보입니다 앞의 바위가 '코끼리 바위'인데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영봉 중턱은 몇년전 산불이 나 많은 나무들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마지막 피치를 올리고 있습니다.시간이 많이 흘러 어스럼 저녁때가 되 가고 있습니다. 특히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고 있기에 산의 이쪽편은 그림자가 짖게 깔립니다.
영봉 정산 부근에 다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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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峰 정상
靈峰 정상석
靈峰 정상석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습니다 山을 어디라 손을 대려 하느뇨 山에 들면 가득한 靈氣에 감사할지니 山의 精氣 있으매 푸른 氣運 솟고 山의 自然 있으매 맑은 물도 흘러 우리 생명 더불어 모든 生命 사노니 山이여, 靈峰이시여 萬古不變하여라 시 鄭孔采 서 農庵 鄭祥玉 靈峰命名人 尹柱廣거대한 인수봉이 가장 장엄하게 잘 보이는 곳이 바로 靈峰입니다.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보기 힘든 '암벽타기'의 최고의 코스랍니다 제가 대학 1학년때쯤 친구들과 여기 산행을 온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날 저 인수봉에 많은 산꾼들이 갑자기 불어닥친 차가운 바람으로 로프들이 엉켜 저 인수봉에 대롱대롱 매달려 저 세상으로 떠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는 이 인수봉에 오지 않았고... 정말 오랜만에 다시 이 자리에 서서 그날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숱한 산꾼들이 더 산화해 갔군요
그렇습니다 靈峰은 저 인수봉을 암벽 등반하다 다시는 돌아 오지 못하는 이들을 기리는 곳이라 붙여졌으리라 그 동안 수많은 산꾼들이 이곳을 오르다 산화해 갔습니다 그래서 인수봉이 가장 잘 보이는 이곳 영봉에 수많은 추모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140여개라네요 저승에 가서라도 마음껏 북한산을 즐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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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이은상 선생의 詩碑가 눈길을 끕니다 백운대 푸른 하늘에 그대들 산새되어 날고 인수봉 바위틈에 그대들 산꽃으로 피고 우리는 여기 올적마다 그대들 이름 부르마
영봉 주변으로 세워져 있는 추모비는 관련 당사자들에겐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국립공원이 사설 공동묘지 같은 느낌을 주어 마음이 좀 상했는데 도선사 입구에 내려와 보니 추모비 철거 계획을 알리는 팻말이 보이더군요 금년 3월말일까지 자진 철거하지 않으면 5월15일까지 강제 철거 하겠다고 하는군요 잘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다음 산행시에는 추모비들을 못 보겠네요
영봉에서 도선사, 우의동 버스 종점으로 하산하는 길은 짧고 편안했습니다.
도선사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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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래]고래사냥
2008. 3. 14.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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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동해 바다에 바람 쐬러 갔었습니다
'아침바다'라고 하는 펜션에서 2박3일 동안 머물며
그동안 꽉막혔던 가슴을 동해 바다 바람으로 시원하게 뚫어 버렸습니다
우리 집 유일한 기쁨조 강아지 '씨츄' 의 이름은 "하루"입니다.
저의 블로그를 열심히 보신 분들은 모두 아시죠
오늘 하루의 시작을 알려주고 또 하루를 즐겁게 해 준다고 '하루'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주문진의 겨울 바다에 섰을 때엔 날씨가 제법 좋았습니다
요즘 엄마가 없어 심심해 죽을 지경인 울 "하루"가 "개폼"을 잡고 엄마가 보고 싶답니다
우리 "하루"의 폼은 폼만 놓고 따지자면 고래사냥이 가능..ㅎㅎ 오로지 제 생각
누가 우리 "하루"의 폼을 "개폼"이라 하겠는가?
눈이 부셔서....울 "하루"는 확실히 스타 기질이 있어요~~눈이 부셔도 촬영이 뭔지 알어 요ㅋㅋ
이 폼을 누가 개폼이라 하겠는가?
이렇게 이쁜 개폼 봤는가
고래사냥(송창식)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 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건 모두가 돌아 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간밤에 꾸었던 꿈의 세계는
아침에 일어나면 잊혀지지만
그래로 생각나는 내 꿈 하나는
조그만 예쁜 고래 한마리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신화처럼 숨을쉬는 고래 잡으러
우리들 사랑이 깨진다 해도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는다 해도
우리들 가슴속에는 뚜렷이 있다
한마리 예쁜 고래 하나가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잡으러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잡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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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응봉 코스 산행
2008. 3. 11.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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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8일 토요일 오늘은 북한산 응봉코스를 시작으로 사모바위, 문수봉을 돌아 대남문을 거쳐 북한산성 안으로 들어가 내려 올 예정으로 11시경 일산에서 지하철3호선을 타고 나섰습니다지하철3호선 구파발역1번출구 북한산 국립공원의 서쪽에서 산행을 하려면 이곳 구파발역1번출구와 불광역2번출구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용합니다 특히 송추, 사패산 방향 산행을 하려면 이곳이 제격입니다. 일요일 이곳은 등산객들로 초만원을 이루는 곳이나 오늘이 토요일 11시반경이라 한산하기만 합니다 북한산 응봉코스를 가려면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몇정거장 가야합니다.
삼천사 입구 삼거리 구파발에서 북한산성입구 방향으로 몇정거장 가면 삼천사 입구 삼거리가 나옵니다 여기서 하차하여 우측으로 약10분정도 걸어갑니다 뒷쪽으로 북한산 주봉의 위용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산꾼들은 가슴 설레게 됩니다
삼천사 입구 삼거리에서 10분정도 큰길을 따라 올라 오면 좌측으로 삼천사 입구가 나옵니다
옛 북한산 매표소 - 현재는 주차료를 징수하고 있습니다 (대당3,000원/일)
삼천사까지 차로가 있으나 모두 이 등산로를 이용합니다
육군전투수영훈련장 삼천사 쪽으로 조금 올라 오면 이런 수영장이 하나 나옵니다. 국립공원 안에 이런 철골 시멘트로 육중하게 만들어진 군수영훈련시설이 있다는 것도 새삼스러울 것입니다 이제까지 오래토록 다녔지만 군인들이 훈련받는 광경을 목격한적이 없습니다 물론 휴일에 주로 다녀서 그런가하고 앞의 가게 주인 아저씨에게 물어 봤더니 군사정권- 즉 노태우시대 때까지는 여름에 계급이 높은 고위 장교들의 하계휴양소로 고기 구워 먹으며 놀자 판 피서지로 사용�으나 그 이후- 즉 문민정부부터는 거의 텅빈채로 방치되 있다고 합니다.
수영장에서 삼천사 올라 가는 길 앞의 하얀 자동차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응봉코스"가 시작 되므로 이 수영장을 잘 기억 해 두어야합니다. 오늘은 삼천사를 구경하고 다시 내려와 저곳에서 응봉코스로 갈 예정입니다
삼천사 - 삼천사는 서기 661년(신라 문무왕 1) 원효(元曉) 대사가 개산(開山)하였다고 합니다. 1481년(조선 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다고 하며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합니다. 저는 금수강산 삼천리에서 온줄 알았습니다
삼천사 일주문 정식 명칭이 "삼각산 적멸보궁 삼천사"라고 되 있습니다. 寂滅寶宮이라는 단어는 아무 절에서나 사용해서는 안되는 단어이지요? 寂滅寶宮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절"에서만 사용 할수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나라 5대 寂滅寶宮은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를 칭하는데 어떻게 이곳 삼천사가 寂滅寶宮이 되었는지는 ......
寂滅寶宮은 부처님상을 모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곧 부처님을 의미하므로 별도로 법당에 불상을 모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불상은 불상대로 모시고 寂滅寶宮이라 합니다. 앞뒤가 좀 맞지 않는 듯합니다. 불교 신자도 아닌 무신론자인 저는 상관 없는 일이기에 더 조사 해 보지 않았습니다
좌측이 부처님 진신사리함, 가운데 바위에 마애불상이 조각 되 있습니다. "진신사리"에 대해선 이 기회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진신사리"가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가요? 대부분 부처님 사후 화장한 뒤에 유골에서 나온 동글 동글한 결정체를 의미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뜻은 맞는데 왜 "사리"라고 하는 지는 아시는 분들이 거의 없더라구요. 사리를 한자로 쓰면 집舍자에 이로울 利입니다. "舍利" 이 한문이 위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까? 의미와 한자는 아무른 관계가 없습니다. 한문을 뜻글자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리(舍利)는 옛 인도말의 Sarira를 중국에서 표기 할때 가장 원음에 가까운 舍利(중국 발음으로 [sheli])로 音譯한것을 우리나라에서 다시 한문 舍利를 우리말 소리인 '사리'로 音譯한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리(舍利)'는 소리글자이지 뜻 글자가 아닙니다. 교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基督敎"라는 말의 "基督"도 소리글자이지 뜻글자가 아닌것과 같습니다 "基督"의 "基는 터라는 뜻이고, 督"은 살필 독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과 基督은 아무른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원어가 중국어로 音譯되고 그 중국어를 다시 한국어로 音譯하면서 탄생된 전세계에 유일한 소리 글자일 뿐이죠 아마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基督敎"라는 말이 무언지 처음 아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진신사리를 정확히 쓰려면 "眞身사리"라고 써야 정확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 합니다 우리나라 불교와 기독교의 國譯된 불경이나 성경에는 "사리"와 같은 이런 소리 글자 뜻글자 구분을 안해서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들이 무지무지하게 많이 있더군요. 종교계는 이것부터 바로 잡아 나가야 할것입니다
|보물 제657호| - 마애여래불상 삼천사의 자랑인 고려시대에 만들어 졌다는 마애여래불상입니다. 마애여래불상도 바위의 단면을 음각으로 갈거나 깍아 조각한 불상을 말하는 것이죠? 특별한 말이 아니고 조각된 그 형태를 보통명사로 표현해논 것인데, 바위단면음각조각불상이라하면 좀 쉬운가요? 왜 어려운 표현을 쓰는지..신비주의?
삼천사에서 구경을 마치고 전투수영장 쪽으로 50m정도 다시 내려와 본격적으로 "應峰능선코스"를 遊山하려합니다
등산 시작 30분이 제일 힘들다는 것은 모두 아시지요? 여기 응봉능선은 경사도가 심해 더욱 힘이 듬니다. 짧고 굵은게 특징인거죠..ㅎ
응봉 중턱에서 바라 본 삼천사, 제법 올라 왔습니다. 뒤에 용출봉, 증취봉이 보입니다
응봉 정상입니다.
응봉 정상에서 바라 본 삼천사
응봉 정상에서 바라 본 "진관사" - 진관사도 매우 유명한 절입니다 응봉 능선의 우측이 진관사 계곡이며, 좌측이 삼천사 계곡입니다 이 삼천사 계곡의 좌측이 그 유명한 "의상봉코스"입니다
사모바위로 향하는 중턱에서 암벽코스에는 대부분 우회도로가 있스니다만 없는 곳엔 이렇게 철제 손잡이를 만들어 놔서 큰 불편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해에 의상봉 코스의 용출봉 근처에서 이런 철제 손잡이를 잡고 가다 낙뢰가 떨어져 많은 사람이 죽고 부상당했습니다. 내구성은 차지 하고 식물성 로프로 바꿔야 할텐데...
지난주 불광역9번출구에서 시작하여 사모바위를 오르는 곳에 있었던 "비봉"이 보입니다. 이제 '사모바위'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사모바위 가는 중턱에서 바라 본 북한산의 상징 "백운대" "만경대""노적봉"이 보이기 사작합니다
응봉코스에는 조막조막한 암벽코스가 좀 있습니다
북한산의 뒷쪽 즉 북쪽에서 남쪽으로 산행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드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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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모바위' 정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정상을 넘어 서니 '사모바위'가 불끈 '이 대근'이 처럼 나타 납니다. 반갑지요. 지난주엔 여기까지가 산행의 정점이었습니다만 오늘은 오늘 산행의 3분의1 지점에 도달 한것 뿐입니다 험난한 문수봉 코스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모바위'의 내력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습니다 바위가 사각이긴 하지만 그래서 사모바위라고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의미라면 "네모바위"라고 해야지 "사모바위"라고 하는 건 세발낙지라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를리 없기 때문이지요. '가는발' 낙지나 '세족'낙지라고 해야하는 거 아닌가요? "그리워하는 마음" - 그런 의미로 해석 합니다...저는
사모바위에서 바라 본 비봉 어느 곳에서 보나 민족의 얼이 듬북 담겨있는 듯 하지 않습니까?
사모바위를 지나 문수봉 쪽으로 가다 보면 "승가봉"을 만납니다 좌측 아래 승가사가 보이고 가운데가 비봉 우측이 사모바위입니다 승가봉 암벽 옆구리에 자리를 잡고 오늘은 여기서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북한산 입구쪽의 김밥집들은 맛도 없고 값도 비싸서 동네에서 미리 사 옵니다 그런데 일산 백석역앞 김밥집에서 김밥 두줄을 사는데 지난주엔 이천원을 냈는데 삼천원을 내라고 하는게 아니겠습니까? 50%를 올렸습니다. 에궁~ 요즘 물가가 장난이 아니라는걸 실감하며 울며 겨자먹기로 먹는 김밥은 오늘따라 모래 씹는 듯 했습니다 참치 통조림에 쇠주도 한병 가져 왔습니다만 오늘은 오랜만에 문수봉 암벽 코스를 오를려고 쐬주 한잔 크~를 못했습니다. 끝내고 북한산성 안에서 한잔 하려합니다. 사실 쐬주 한잔~~크~를 위해 산을 오는지도 모르는데.....
승가봉 정상부근도 제법 쌕시합니다. 그리고 아름답습니다
이 通天門을 지나면 문수봉 코스로 가는 길이 나옵니다.
뒷쪽에서 본 통천문 "구멍"...ㅎ.... 북한산은 진정 금강산을 약간 축소 해 놓은 그런 명산입니다.
구멍을 빠져 나오면 펼쳐지는 문수봉 오늘은 오랜만에 암벽코스를 릿지로 오르려고 맘 먹고 왔습니다
문수봉 암벽코스 앞에 위험 경고판이 서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위험 경고판을 무시하고 이곳으로 갑니다. 암벽타기가 두려우신 분들은 좌측으로 가면 계곡으로 해서 문수봉을 오를 수 있습니다만 아름다운 경관은 포기 해야 합니다.
숨이 콱 막히게 앞을 가로 막는 문수봉 암벽
예전에..청춘 때 다니던 릿지코스로 들어 섰더니 전문가들이 버거운 전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른쪽의 좀 쉬운 코스로 옮겼더니 이게 왠일입니까!! 무지하게 많은 사람들이 궁뎅이를 머리로 받으며 오르고 있었습니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그다지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어려운 코스마다 인공 손잡이를 친절하게 설치 해 놔서 쉽게 오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잘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초보들에겐 잘한 일일거고...방귀깨나 끼는 놈들에겐 욕먹고..
이젠 문수봉 암벽 오르는게 식은 죽 먹기가 �습니다. 잘 하는 짓인지 못하는 짓인지는 차지해 놓고 왠만한 사람들은 모두 오를 수 있게 �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칭 선수인데 손잡이 잡고 오를 순 없지~하여 손잡이가 없는 옛날에 오르던 릿지 코스로 올랐습니다
이런 아슬아슬한 스릴은 느껴보지 못하신 분들은 당연히 모르시겠죠 오랜만에 하는 릿지여서 사실 속으로 겁도 많이 냈습니다..ㅎㅎ 오줌도 마렵고..
올라와 위에서, 올라 오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니 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ㅎ 좋은 길 놔두고 왜 저리 위험한 곳을 오르는지~
문수봉 정상 바로 아래 봉우리에 올라서 문수봉을 찍었습니다. 올라서 내려다 보는 것보다 아래서 바라 보는 것이 그 위용을 더 잘 느낄수 있습니다.
암벽 뿐인 문수봉에서 그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는 소나무 놔사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을 사람들이 '식물인간'이라고 표현하죠? 저는 이 표현이야 말로 가장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소나무를 보세요!!~~ 암벽 뿐인 문수봉 꼭대기 조그만 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며 꿋꿋이 하늘 향해 대자연을 노래하고 있는 저 소나무 -- 꽃 피우고 열매도 맺고 - 즉 종족 보전을 하며 - 많은 이들에게 시원한 산소를 제공하고 있는 저 소나무를 어찌 뇌사상태에 빠져있는 인간과 동일시 할수 있다는 말인가!!~~ 저 소나무가 들으면 심한 모욕감을 느끼리라~~
자연은 하나하나 그 어떤 것도 무시 되어서는 않되라~
문수봉에서 본 "보현봉"
문수봉에서 바라 본 비봉
문수사와 북한산성의 상징 "대남문"이 산성과 함께 드디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오늘은 저기 까지가 등산의 정점이 되겠기에 반갑기도 하고 아쉽기도 합니다.
문수봉 정상에 오르고 있습니다. 북한산성의 성벽이 보이기도 합니다 북한산성이 이곳으로 돌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산에는 태극기가 두군에 꽂혀 있습니다. 바로 이곳 문수봉과 백운대입니다. 그많큼 중요하고 의미있는 곳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요
문수봉 태극기 밑에서 증명사진 한장 박았습니다. 인물이 시원찬아 쬐끄마하게 축소 시켜 보일락 말락하게 올린다는게 그래도 잘 보이네요 워낙 모델이 좋아선인가? ㅎ
이제 하산길입니다 북한산성 성벽위를 걸어 내려 가고 있는데 옆으로 길을 내서 성벽을 보호 해야 할듯.. 나중에 또 거금 들여서 복구 하지 말구...닝기리
북한산성의 꽃 - 大南門 멋있죠? 저곳에서 우측 아래로 내려가면 구기터널, 이북오도청이 바로 나옵니다 좌측으로는 산성 안이 되겠습니다
대남문
대남문에서 본 백운대 - 백운대 앞에 노적봉이 있는데 사진에서는 하나로 보이네요
산성 안으로 하산을 하려 했더니 온통 눈밭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못신"을 꺼내 유용하게 사용했습니다
북한산성 안에는 유적지가 많지는 않고 조금 있습니다만, 절간을 제외하고는 모두불타고 없어져 그 흔적만 횡하니 남아 있습니다
옛 화려했던 모습들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이런 표지판만이 역사의 그늘을 비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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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에 갈대가 자라면 그곳은 집이 있었던 자리이며 그 집이 화재로 소실 �을 경우라 하죠? 대남문에서 중성문 사이에는 이렇게 갈대 밭이 드문 ㅡ드문 있습니다. 옛 행궁들이 불타 없어진 자리들인거죠
산성 안에서 바라 본 노적봉 - 노적가리 쌓아 논듯한 형상이라고 노적봉이라 한답니다 다 아시죠?
중성문 여기서 대남문까지가 북한산성 속의 행궁이 있었던 핵심 城입니다
중성문에서 대서문으로 내려 가는 길
북한산성 한가운데 이런 호화 유흥업소들이 운집해 있습니다 국립공원안에 이런 상가가 있다는게 어떻게 느껴 지십니까 국립공원 안에서 취사행위를 하면 엄청난 벌금이 부과 되고 특히 불 피우면 감옥 갑니다. 그런데 이건 뭡니까? 법은 만인에게 공평하지 않죠? 여기서 파전에 막걸리 한잔 마시면 저 아래 버스 타는데 까지 승합차로 태워다 줍니다 얄팍한 상술로 초보 산꾼들을 유혹하는거죠 저는 걷기 위해 왔는데 차타고 북한산을 내려 갈순 없다고 핑개대며 여기선 아무것도 사먹지 않고 걸어서 내려 갑니다...속으론 사실 무척 먹고 싶고 차타고 싶고..
대서문 북한산성의 정문인 대서문입니다 이 대서문을 시발점으로 하여 우측 의상봉 코스를 시작으로하여 산성의 12문을 종주하는 코스가 매우 유명합니다. 그리고 약8시간반정도 걸리는 힘든 코스이기도 합니다 또한 염초봉에서 백운대를 오르는 릿지코스는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오르기 힘들기도 합니다 저는 2번의 경험만을 자랑으로 삼고 북한산을 오르는 초보들에게 큰소리로 우쭐대기도 하죠 다음번에는 "北漢山城十二之門" 종주 코스를 오랜만에 시도 하려 합니다. 이곳의 山行記는 옛선조들에서 부터 많이 쓰여져 전해 내려 오고 있습니다 다음 산행기는 역사의 숨결을 느끼며 하는 산행이 되겠습니다 흠~ 역사 얘기 많이 쓰야겠군요..아는 것도 별루이면서..ㅎ
대서문
북한산성 입구에 내려 왔습니다 땅거미가 내려 앉기 시작했습니다 앞에 원효봉, 뒤에 노적봉 사이로 만경대가 보이며 백운대는 원효봉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날이 많이 어두워졌습니다..저녁 6시경 버스 정류장에서 보는 의상봉
오늘 산행한 코스를 요약 정리 했습니다 주황색으로 표시 된 코스가 오늘 걷고 또 걸은 코스가 되겠습니다. 이제까지의 산행로는 아기자기한 코스였습니다만, 동쪽으로 갈수록 웅장해지기 시작합니다 30억년의 풍상을 한눈으로 볼수 있는 곳....그 규모는 가히 짐작 하시리라 생각됩니다 만경대 인수봉 백운대 염초봉...........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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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여~어쩌란 말이여?
2008. 3. 7.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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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지하철등 공공 장소에서 가끔 눈이 번쩍하는 때가 있습니다 생각과 행동이 기발하다고 느끼는 장면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새로운 세대들은 생각과 행동도 새롭게 변모한다고 느껴집니다. 고정관념에 쩔어 그져 왕년만 찾아 추억 속에 뭍쳐 자신의 틀을 유지시키는데에만 여념이 없는 좀 오래된 사람들과 비교하면...역시 역사는 진보하는 거구나~~!!라고 옛날..아니 그렇게 오래 전도 아닌 근간까지도 여성들은 수동적 모양새를 하고 길을 나섰죠 다소곳하게 옷을 차려 입고 어떻게던 정숙하게 보이려는 노력이 많았던것 같습니다. 거리에서 남성들의 수작에 수동적 방어적 위치에만 서 있었던것 같은데... 윗 사진 어떻게 보이세요? 우선, 그 아이디어가 독특하지 않습니까? 새로운 패션이라고 하고 싶군요 우리 땐 상상도 할수 없었던 그런 디자인의 발상이라 여겨집니다. 앙징 맞기도하고 유머러스하기도 하고... 대범하기도 합니다. 사실 저 부위에 저런 글귀와 그림을 그리고 다니면 성적인 뭔가를 더 풍기는 듯 하기도 한데.. .. 그 곳에 역설적 발상으로 성희롱 하지 말라는 경고문을 붙이고 거리를 다닌다는게 세상 정말 많이 변하고 있는듯 합니다. 공격적으로 변모하는 여성들은 어디까지를 여성의 성역으로 할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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