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삼십대의 미혼 아가씨와 오십대 말의 기획예산처장관을 거쳐 청와대 정책기획실장이 된
중년의 미남 고관대작 사이에서 오고 갔다는 이메일 연애편지.....
호기심은 이루 헤아릴수 없이 온세상에 울려 퍼지며 읽혀 내려져갔습니다
처음 이 편지를 읽을 때 내 마음 속은 이미 불륜의 요지경을 뒤집어 쓰고 접근했으리라~
남의 불륜을 훔쳐보는 재미...관음증이라 하던가...나만 그렇겠지요? ㅎ
쓰여진 단어 하나 하나에 어떻게던 동물적 애로티시즘을 접목시키며,
가능한한 상상력을 넓여 이제는 길거리의 껌때기 구경보다 훨신 쉬운 '야동'의 세계속으로
그들의 '관계'를 그들이 아닌 내가 '관계'를 만들어 가며 읽어 갔는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른 것들 보다 그 '관계'에 실질적인 관심이 더 많은게 아닐까요.
'학력위조와 그 행사', 그로인한 '공무집행방해'...이런것들이 죄명일텐데...
나라는 인간부터도 그렇겠지만 덩달아 거의 모든 언론매체, 방송매체들까지도 그 죄명보다는
'신정아의 벗은 나체'가 더 궁금하고, 그들의 '관계'를 더 적나라하게 파헤쳐
더 많은 독자들에게 알려 주는데 치중한게 아닐까요. 그러면 돈도 벌고 재미도 느끼고..
도랑치고 가재잡고..뽕도 따고 님도 보고...일거양득을 노렸으리라...

역시 대단한 대~한민국!!~
구속만이 살길인 세계 최하위 수사실력의 검찰...
생각은 없고 글자만 보고 하는 판결 ....
내용은 없고 껍데기만 보고 보도하는 언론.................
개인은 없고 조직과 패거리만 살아가는 사회...........
나도 그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며칠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신정아가 변양균에게 썼다는 그 편지가 제법 멋지게..
어쩌면 차원이 있는 그런 편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꼼꼼히 읽어 보았습니다



당신은 전설 속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여걸 유디트 손에 죽은 홀로페르네스처럼 나에게 성적으로
유혹당해 죽음에 가까운 정사를 한번 했으면 하셨지만 저는 빈 시내 남쪽에 있는 바로크 궁전
벨베데레에 소장된 클림트 그림 키스처럼 두 남녀가 꼭 껴안고 성적 교감의 여명을 틀며 시작하는
정사를 당신과 꿈꾸고 있어요.

에로티시즘이 순간적인 육체의 환락이 아니라 영원으로 진입하는 일종의 관문처럼 순간적인 정사의
덧없음을 초월해 욕망의 숭고한 충족에 이르도록 노력한 클림트처럼 숭고한 에로티시즘의 미학을
당신과 나누고 싶어요.
곱슬머리의 남자가 꼭 껴안은 여자의 더 없이 행복한 표정, 오르가즘 직전의 환희가 표현된 얼굴의
그 그림을 보면 저도 언젠가 그런 정사를 하리라 했죠.
그 남자가 내게 당신으로 다가왔다는 걸 저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죠.

지난 가을 저의 미술관에 들렀던 당신을 본 순간 저는 부끄럽지만 클림트의 그림을 떠올렸죠.
그림속의 곱슬머리는 부드럽게 컬이 져서 넘어간 당신의 희끗한 머리로 대체되었고 나는 속옷을
입지 않고 화려한 노란 무늬의 긴원피스만 겉옷으로 걸치고 있었죠.

당신은 당시 중국현대작가 초대전을 관심있게 둘러 보셨죠.
내게 다가와 왕청의 작품에 대해 물어왔을 때 저는 알몸을 내 보인 듯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어요.
이런 상상이 아니더라도 당신의 충분한 성적매력을 지닌 남성이었죠.

두번째 만남에서 당신이 남한강을 따라 드라이브만 하고 저를 저의 집 앞에 내려주셨을 ??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르셨을 거에요.
키스라도 없었더라면 저는체면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당신을 나의 아파트로 유인하여
죽음에 가까운 정사를 펼쳤을지도 몰라요.
저는 너무 뜨거워져 있었거든요.

키스?
뭐랄까 당신의 키스에서 저는 오월에 청보리가 익어가는 맛을 느꼈어요.
청보리 말이죠.
풋풋한 풀 내음과 알곡이 영글 때 풋알들이 껍질에 밀착되어 밀도가 촘촘해지는 질감 그 모든 것이
당신의 키스 속에 있었죠.
고백하지만 제가 예일에 다닐때 조금 사귀었던 의대생인 스티븐과도 나누지 못한 영적인 키스였어요
당신도 그러셨잖아요. 정아는 자그마한 체구로 그곳 친구들에게 인기가 짱이었을거라구요.
스티븐은 아버지가 상원이었는데 저를 무척 좋아했죠.
결혼도 생각했었지만 후후.
그랬더라면 당신과 나누고 싶은 숭고한 에로티시즘의 미학을 이룰 수 없겠죠.
당신과 나는 앞으로 긴 길을 걸어갈 거에요.
당신이 그 옷을 입으려 하실지 모르지만 첫 정사를 저는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어요.

클림트에 나오는 남자가 입었던 황금색 가운 그리고 저는 비슷한 패턴의 쉬폰 실크 원피스를
준비하고 있어요.
그 키스 씬으로 시작해서 클림트의 유디트1으로 끝나는 섹스 말이죠.

have nice day
당신의 신다르크로부터.(저를 신데렐라라고 부르지 마세요 꼭요).




이 편지는 처음에 읽을때 매우 자극적으로 느껴 졌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맨 처음에 얘기했듯이
"쓰여진 단어 하나 하나에 어떻게던 동물적 애로티시즘을 접목시키며,
가능한한 상상력을 넓여 이제는 길거리의 껌때기 구경보다 훨신 쉬운 '야동'의 세계속으로
그들의 '관계'를 그들이 아닌 내가 '관계'를 만들어 가며 읽어 갔는지도 모릅니다"
이 표현 그대로입니다

이 편지를 옆지기에게 보여 줬습니다. 제법 놀랍다는 표현을 섞어서..
그 편지를 본 옆지기는 뭐가 그리 놀랍고 야한가요?라고 오히려 반문했습니다
.."젊은 미혼의 아가씨가 그런 연애편지 쓰는게 정상이지..어찌 이상한 방향으로만 생각해요?"
반응이 다소 놀라워 목소리를 더 높이며...
.."아니, 미혼의 아가씨가 육십이 다되가는 남자에게 '죽음에 가까운 정사'를 하고 싶다느니..
..'오월의 청보리 익어가는 맛을 느끼는 키스'를 하고 싶다느니.. 클림트의 그림 '키스'를
..인용하며 그렇고 싶다느니...이런게 어찌 야하지 않다는 말이야?"
한심스럽다는듯한 어투로....
.."사랑하는 이로부터 받고 싶은 것들을 나열한것 뿐인데...자세한건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면 당연한 여자들의 희망사항이라구...'클림트'의 작품 '키스'처럼 멋진 키스를
..한다는건 얼마나 아름다운 거예요? 사랑하는 이에게 뭔 말을 못해요? 진정한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진정한 것인지 아닌지를 따질만한 자료도 없쟌아요"

어이쿠~ 뜨끔했습니다. 왜 뜨끔했는지는 모두 알겠지요.. 이 부족한 인간을 질책하는 소리일꺼라~
남의 사랑은 불륜으로 보고 싶어하며 자기의 불륜은 로맨스로 포장하려고 하는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른 점이 없는 속물임을 드러내는 것 같아 사실 무안스러웠습니다
남의 얘기를 너무 쉽게 말하고 돌아 다니지 말라고 그러네요..허~참





어렵사리 찾아 낸 '클림트'의 '키스'라는 작품을 보여드림니다
오스트리아의 작가인데 우리나라의 대원군 시절에 살다 간 '구스타프 클림트'는
관능미 넘치는 그림을 많이 그렸답니다.
역시 그림을 전공했다고 스스로 말하고 싶었던 그녀가 너무도 그리워하던 '키스'는
이 유명한 그림 'The Kiss '가 모델이었는가 봅니다.
그녀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키스'



구스타프 클림트의 "The Kiss"




그녀가 꿈꾸었던 정사는 스스로 밝힌
"위의 '키스' 씬으로 시작해서 클림트의 '유디트1'으로 끝나는 섹스"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디트 1'을 보여드림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Judith I"( 유디트)


참고로 이 그림에 대해 조사한 설명을 첨부 시켜드리오니 그 감상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이 그림은 캔버스에 그린 유화이며 크기는 153x133cm이라합니다.
정식 명칭은 《Judith I》이며 오스트리아 미술관(Osterreichische Galerie, Vienna)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 군요.

약간은 마른 듯한 몸매에 입은 반쯤 벌리고 고혹적인 눈을 가진 여인으로 보입니다.
한쪽 가슴을 완전히 드러내 첫눈에 보아도 퇴폐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 않나요?
보석으로 번쩍이는 목의 장식은 성의 황홀과 죽음을 연상시킨답니다.
배경은 황금으로 된 나무 그림이 있으며 그림의 맨 위에는 'Judith'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는군요.

클림트는 충성스런 여인 유디트를 성적 매력을 강조한 요부로 그렸답니다.
환상적인 동시에 몽환적이면서도 인간 내면을 어딘가 추상화시킨 느낌을 준답니다.
클림트가 살아 있는 동안 이 그림은 《살로메 salome》로 알려져있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서에서 충성스러운 승리의 여인을, 헤롯왕을 유혹하여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자른
살로메와 같은 요부로 그려놓았기 때문이람니다.
그래서 클림트가 살았던 동안 사람들은 그림의 인물이 유디트라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때문에 《살로메》라고 불렀다고합니다.

'유디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태인 과부로 아시리아군(軍)에 포위되었던
페르시아의 마을을 구하기 위해, 적장인 호로페르네스에게 접근했던 여인이었습니다.
호로페르네스는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연회에 초대했답니다. 연회가 끝나고 단둘이
있게 되자 유디트는 호로페르네스를 술 취하게 하고 그의 목을 잘라 포대에
넣어서 페르시아로 가져왔다고합니다.
유태인들은 유디트를 충성스럽고 고귀한 여성으로 여기고있답니다.
우리나라의 '논개'와 비슷한 여인으로 보면 될듯합니다.


그녀의 학력위조를 비방하는 것은 그래도 좀 괜찮겠지만..
사실 이문제도 아시다시피 우리 사회의 썩어빠진 학력제일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녀의 개인적인 사랑이야기야 누가 비난 할수 있겠습니까?
사실 하나 하나 우리 스스로 꼼꼼히 생각해 보아야할 중요한 사안들입니다.

남의 얘기라고 너무 쉽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신정아가 꿈 꾸었던 "키스"와 "정사"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위의 그림과 같았습니다.
우리 모든 인간들은 어떤가요?
우리가 그녀와 다르다고 말할수 있는 부분이 쬐끔이라도 있는가요?



728x90

'홍어와 무인도 > 살며 느끼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한 눈물과 입맞춤"  (0) 2008.02.02
간통과 로마제국의 멸망  (0) 2008.02.01
동자승 사진을 보며...  (0) 2008.01.28
忘憂里  (0) 2008.01.25
관동팔경수일경 청간정을 가다  (0) 2008.01.20
728x90

이 나이 쯤이 아니라해도 운동의 필요성이야 모두 실감하고 있듯이
나도 꼭 한가지 운동을 매일 규칙적으로 해야겠다고 맘먹고 실천해 온지 십여년이 된다.
등산은 알려진것많큼 다니지 못하는데, 수영 많큼은 새벽 5시반에 일어나 꼭 하러 다닌다
등산은 알게 모르게 금수강산을 누비는 우리 동기들이 꽤있어 한편으로 그들이 부럽기도하다.

등산을 매우 좋아하는 듯한 박대현도사가 경기오악을 두루 정복하며,
遊山 도중에 만난 白沙 이항복과 蓬萊 양사언의 詩碑를 촬영해 와 친절하게도 우리 홈피에 올려주어
아득히 멀어졌던 그들의 세계속으로 잠시나마 여행할수 있어 너무도 고마웠다
그 詩碑중에 蓬萊 楊士彦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쬐끔 아는 이야기라 아는 척을 좀 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 시조가 양사언의 시조라는 사실을 여기서 알게 된 분들도 많을터..
楊士彦에 대해 조금더 덧붙이고

오늘의 주제인 "楊士彦과 그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고져한다.
楊士彦은 만호 한석봉과 추사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 3대 名書藝家이자 文人이란건 이미 알려드렸다.

楊士彦의 호가 蓬萊(봉래)인데 왜인가하면 楊士彦이 관직에 올라 지금의 철원사또로 부임하게되고

자연히 지척에 있는 금강산을 자주 찾아 금강산의 매력에 흠뻑 젖어 살게 되었단다.
여름 금강산을 蓬萊(봉래)山이라 함은 모두 알터 그래서 호를 蓬萊(봉래)라 하였단다
금강산을 노래하고 그린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만은 얼마나 금강산을 사랑했으면
자기의 호를 蓬萊라 했겠는가...나도 이번 가을엔 금강산을 꼭 가보고싶다..

우리 선조들 뿐 아니라 현세에 이르기 까지 위대한 인물들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까지도 대부분 그들 어머니의 恩功이 뒤에 숨어 있고,

이러한 모성애의 恩攻으로 훌륭한 인물은 더욱 훌륭한 인물로 재탄생 되어질수 있었으리라...
우리들도 익히 알고 있는 栗谷과 신사임당. 만호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 모르는 분들이 없을것이다.

아들을 훌륭하게 키운 대표적 한민족의 어머니이리라.
그러나 "양사언과 그의 어머니"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흔치않다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펜을 끄내 들고 오백여년전으로 돌아가 양사언의 어머니 이야기를 우리 동기들에게 알려 주려한다.

하도 오래전에 읽은 여러권의 책내용이 기억에 가물거리지만
짤막하게 주요부분만 추려 이 글을 쓴다.

양사언의 아버지 ’양 민이 전라도 영광의 사또로 부임해 내려가는

꽃피는 삼월의 어느날 어느 촌고을을 지날즈음,

전날 부임 축하연으로 술에 쩔어 밥을 먹지 못해 배가 무척 고파서 밥을 먹고 가기로 했단다.

그러나 농번기에 집에 사람들이 있을리 없었다.

이집 저집 둘러 보는중에 어느 한 집에서 한 소녀가 공손하게 나와 식사 대접을 하겠노라고 아뢴다.

그리곤 신관 사또가 거리에서 식사를 할수있겠냐고하며 안으로 모시고 부지런히 진지를 지어 올린다.

하는 태도나 말솜씨가 어찌나 어른스러우며 예의 바른지 사또는 너무나 기특하게 여긴다
조반을 잘 얻어 먹은 젊은 신관 사또 ’양 민’은 고마움에 보답을 하게 되는데.....
신관 사또 ’양 민’은 소매에서 자기가 매우 아끼는 부채 靑扇, 紅扇 두자루를 꺼내 소녀에게 준다.
그냥 전달하기는 멋쩍어 농담을 섞어
"이는 고마움으로 내가 너에게 채단 대신 주는 것이니 어서 받으라..."
참고로 ’채단’이라함은 결혼전에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보내는 청색홍색의 옷감들이 아닌가...
깜짝 놀란 소녀는 안방으로 뛰어가 장롱을 뒤져 급히 홍보를 가지고 와 깔고 靑扇, 紅扇 을 내려 놓으라고 한다.

어리둥절한 사또는 왜그러냐고 묻는다.
"폐백에 바치는 채단을 어찌 맨손으로 받을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두자루의 부채는 홍보 위에 놓여졌고 소녀는 잘 싸서 안방으로 가지고 들어 갔다

세월이 흘렀다

사또 ’양 민’이 이런 저런 업무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날
한 노인이 사또를 뵙자고 찾아 왔다
"몇년전 부임할때 시골집에 들려 아침 식사를 하고 어느 소녀에게 靑扇 紅扇 두자루를 주고 간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사또는 조금 생각하다가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리고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하며
아직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노인은 이제서야 의문이 풀렸다는듯 고개를 끄떡이며 다시 말한다.
"그러셨군요. 그 여식이 과년한 제 딸년인데 그이후로 시집을 보내려해도 어느곳으로도 시집을안가겠다고 해서

영문을 몰라 이렇게 찾아뵙게 됫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양 민’사또의 머리 속엔 어떤 느낌이 스쳐 지났는지 모두 느끼리라
"그 정성이 지극하거늘 내 어찌 그냥 모른척할수 있겠소. 날짜를 잡아 그녀를 내 아내로 맞겠소"
식사 한끼 얻어 먹고 대가로 부채 두자루 선물 했으면 밥값으로 충분 할텐데,

졸지에 아내로 까지 마지하게 됫으니 운명의 장난인가, 신의 축복인가!~
어디 삼류 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는 실제 이야기이다
이 소녀가 바로 후에 楊士彦의 어머니가 된다.

중요한 이야기는 여기서 부터 시작된다.
사또 ’양 민’은 정실부인이 있었고

이 부인과의 사이에 ’양사준’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후처, 즉 소실인 이 소녀와의 사이에 楊士彦과 양사기, 두 아들이 탄생한다.
사준, 사언, 사기,이 삼형제는 자라며 매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 났으며 풍체도 좋아
주변으로 부터 칭송이 끊이질 않았다고 하며, 형제애가 깊어 중국의 ’소순, 소식, 소철’ 삼형제와 비교되기도 했다는구려..

정실부인이 죽고 모든 살림살이를 후처인 양사언의 어머니가 도맡아 하게 되고
아들들을 훌륭하게 키웠다. 그러나 아들들이 아무리 훌륭하면 뭣하냐 서자들인데...
이 소실부인의 서러움과 한탄은 적자가 아닌 서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실부인의 꿈은 자기 아들들의 머리에서 서자의 딱지를 떼 내는 일이었다

남편 ’양 민’이 죽고 장례날에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양씨 가문에 들어와 아들을 낳았으며, 그 아들이 재주있고 총명하며 풍체도 있거늘
첩이 낳았다는 것만으로 우리나라 풍습은 그들에게서 서자의 너울을 벗겨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장손인 적자 양사준에게
"내가 죽은 후라도 양사언과 양사기 두 형제에게 서자가 아닌 적자로 친형제로 불러주기 바란다.

영감님이 죽은 날 내가 같이 죽으면 사람들이 후에 복제가 혼돈하여 누가 누군지 모르게 될것이니....."

그리고 바로 양사언의 어머니는 가슴에 품고 있던 단검을 꺼내 자결을 하고 만다.
아들들이 그녀를 부둥겨 안았을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아들로부터 서자의 멍에를 풀어주고 떳떳한 한 인간으로

이 세상을 살아 가게 하고싶었던 여인
죽음으로써 부조리한 사회 병리현상인 인간 차별화를 타파하고 싶었었던

선구자적인 新女性
이 어머니의 죽음은 楊士彦이 더욱 훌륭한 文人이 되는데 자양분이 되었으리라
楊士彦은 후에 장원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게 된다.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 유명한 楊士彦의 "飛"


우리는 이런 글씨를 보면 글씨보다 이거 무지 비싸겠는데?하며 값으로 따질려한다..ㅎ
실제 이 글 원본은 몇억한단다..코ㅔㄱ
서예하는 사람들은 이런 글씨를 보면 온몸에 닭살이 돋으며 무한한 미지의 세계로 빠져 든다고...




楊士彦 五言詩

이 작품은 그의 장기인 초서가 유감없이 드러난 것으로 활달 분방한 필세가 잘 나타나 있고, [봉래산인(蓬萊散人)].[양사언인(楊士彦印)]의 도장 2과(顆)가 찍혀 있다고.
내가 볼쩍엔 낙서같은데...ㅎ 무지무지 훌륭한 작품이라고 하더라

霜餘水反壑 서리 내린 뒤 물은 계곡으로 흘러 들어가고
風落木歸山 바람에 진 나무도 산으로 가누나
歲華晩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昆蟲皆閉關 벌레도 모두 숨어 움추리는도다.


728x90
728x90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천삼백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불교를 국교로하여 佛國을 세우려했던 新羅시대때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있는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으로 너무나 유명하신
혜초스님이 불교를 배우기 위해 당시로는 거의 불가능한 머나먼 인도의 다섯나라를 여행하고 ...
원효스님과 義湘스님은 다소 가까운 당나라로 불교를 배우러 지금말로 하자면 유학을 떠납니다
신라 진평왕때의 이야기입니다.
원효와 義湘이 의주, 압록강을 지나 요동반도 쯤 갔을때,
당나라 수비병들에게 붙잡혀 감옥살이를 하게됩니다. 죄명은 간첩죄였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우리의 삼국을 독립국으로 보지 않고 자기들의 속국으로 보았는데,
삼국중 특히 고구려가 당나라에 맞짱뜨고 있을 때여서 국경수비가 삼엄했을 때였다고 합니다.
몇달간의 옥살이 끝에 간신히 탈출한 원효와 의상은 고향인 신라로 돌아 옵니다.
1차 유학길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끝낼 인물들이 아닌건 다 아시죠?
학구열에 불타는 원효와 義湘은 기필코 더많은 것을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2차 유학길에 오릅니다.

지난 1차 유학길은 陸路를 이용하는 바람에 곤혹스런 감옥살이를 했으므로 이번에 뱃길을
이용하기로 하고 지금의 수원을 지나 남양반도의 남양을 거쳐
지금의 송산 사강쯤(여기서 옛날에 내가 영어 선생을 한적이 있음) 갔을때 밤이 어두워져
어느 공동묘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는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기에 모두들 아시고 계시죠?
그리고 원효가 잠자다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해골 바가지에 시체 썩은 물을
마신 것을 알고 토하고 난리법석을 떨지요?.
그러나 이 하나의 헤프닝이 원효에겐 "해탈"의 경지에 다다르게 하고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사는 집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죠?

즉,'세상만사 마음 먹기 달렸을 뿐'이라는 의미의 말이겠죠.
그러면서 "무엇을 구하고 어디에 가서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는 있으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라고 반문하며 원효는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義湘은 한번 먹은 마음 변할수 있겠는가..꼭 많은 것을 배워 돌아 오겠다는 의지를
꺽지않고 홀로 배를 타고 유학길에 오릅니다.

그리고 지금의 산동반도의 양주에 도착하게 되는데 지금의 봉래시 등주(登州)가 됩니다.
당시엔 바닷길이 우리나라의 남양반도(끝의 마산포)와 중국의 산동반도가 가장 가까워 그 길을 많이 이용했다합니다.
배멀미에 감기 몸살까지 겹친 義湘은 심신이 매우 피로했을 것입니다.
머나먼 낯선 중국에서 비실거리는 외국인 '義湘'을 한눈에 범상치 않은 사람으로 알아 차린
중국인은 양주(揚州)의 주장(州將)인 유지인(劉至仁)이라는 벼슬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단번에 자기 관사로 모시고 의상을 간호해 줬습니다.
나중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사이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눈엔 똥만 보이나 부처의 눈에는 모든중생이 부처로 보인다는 대화말입니다.

유지인(劉至仁)의 눈에 義湘이 부처로 보였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실치 않으나 아마 틀림없이
부처로 보였을꺼라 확신합니다.
실질적으로 극진한 간호를 직접 맡은 이가 바로 이 '부석사의 밤'의 가사에도 등장하는
"선묘(善妙)"라는 아가씨였으며 양주(揚州)의 주장(州將)인 유지인(劉至仁)의 딸이었던 것입니다.
善妙낭자는 극진히 의상을 간호하며 범상치 않은 훌륭한 의상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엔 국경도 없다'라는 말이 오천년 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으로 사용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러나 佛子의 길을 걷는 義湘에겐 사랑은 한낱 사치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義湘은 善妙낭자의 사랑을 받아 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상해 근처의 종남산의 지상사(至相寺)에 가서 지엄(智儼)스님과 함께
화엄경(華嚴經)을 모체로 화엄학(華嚴學)을 탐구하고 우리나라에 돌아와
불교의 한 종파인 화엄종(華嚴宗)을 開宗하게 되며 시발점이 되는 장소가
바로 "부석사"인 것입니다

여기서 저의 개인적 여담 하나 들려 드릴까합니다
원효와 義湘의 인간 내면의 세계를 제 개인적 각도에서 바라 보았는데 그냥 흘려 들어 주세요.

남양반도 무덤에서 해골 바가지에 담긴 시체 썩은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깨달았다고
일방적 선언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 간 원효.....이 원효를 조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그의 사생활 몇가지를 아는대로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원효가 유학을 포기한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1차 유학 길에서 간첩으로 오인 받아
요동에서 감옥살이까지 하며 고생해서 실제 마음 속으로는 유학을 갈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義湘은 기필코 간다고 하니 가지 않을 명분을 찾아야 했는데
그것이 해골물 사건의 "깨달음"으로 술수를 쓴게 아닌가하는 개인적 의구심이 듭니다.
이 말의 의미는 어떻게 들리세여? "무엇을 구하고 어디에 가서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는 있으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
아리송송하지만 저 같은 범생은 그저 핑개를 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유명한 원효의 "깨달음"이 유학 기피용 술수?
원효 좋아 하시는 분들이 들으면 저를 혼낼려 할텐데...ㅎㅎㅎ..
그냥 개인적 생각쯤으로 받아 드려 주소서..

아시는 분들은 아시는 얘기입니다만, 원효는 자유분방한 사람이었습니다.
性(SEX)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의상과는 완전히 분별되는 사람이었지요?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유명한 얘기를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알려 드립니다.
태종무열왕의 둘째딸 요석공주를 시쳇말로 따먹은 사건은 유명타 못해 음담패설로 술집에서의
한잔 할때의 단골 메뉴이지요?
원효는 요석궁에서 독수공방하고 있는 요석공주를 따먹기 위해 여기저기에 소문을 내고 다닙니다.
요즘 개그콘써트의 유행어식으로 말 하자면
"도끼가 도끼 다울려면, 도끼 구멍에 도끼 자루를 끼워야 도끼지~~, 도끼 자루 없는 도끼가 도끼인가?" 라고

일찍이 홀로 된 요석공주를 빗대어 떠들고 다니죠.
무열왕이 무슨 의미인가를 알고 홀로된 요석공주를 위해 당대의 큰스님으로 명성이 어느 정도 있던 원효를 불러 요석궁으로 들여 보내는데,

원효는 어떻게던 요석공주를 따먹을려고 일부러 비를 맞고 옷을 적셔서 들어 갑니다. 들어 가선 당연히 젓은 옷을 벗고 ....히히히히......
이 전술은 대성공을 거두어 한방으로 요석공주와 원효 사이에 아들이 하나 탄생합니다.
바로 신라시대에 최고의 학자이며 어려운 한문을 쉽게 누구나 쓸수 있도록 만든 "이두문자"의
창시자 "설총"이지요. 참고로 원효의 원래 이름은 '설 서당'이었습니다.
중이 간통을 한다는건 불교에선 있어선 안되는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원효는 스스로 양아치라 칭하며

그후 저잣거리로 나가 서민들의 佛心을 키우는데 매진합니다.

대승불교를 실천하는것이죠.
여하튼 당시엔 왕실을 주축으로 하는 귀족불교와 일반서민들을 상대로 하는 대승불교가 있었다고
하는데 義湘은 정통성있는 귀족불교 쪽이라 할수 있고, 원효는 서민불교라 할수 있겠지요.
저의 윗글들만 읽으면 원효는 땡중처럼 보일려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업적은 어마어마하죠?
많은 집필 활동을 하여 지금까지 그의 불교철학은 유구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다시 義湘과 선묘낭자의 이야기로 돌아 갑니다
상해 근처의 종남산의 지상사(至相寺)에서 공부를 시작한지 몇년만에 화엄학을 설파하고
귀국길에 오르게 됩니다.
몇년전, 배멀미 감기 몸살로 초죽음이 되있던 자기를 사랑이 함께하는 지극정성으로
간호해준 선묘낭자를 마지막으로 만나 감사의 말이라도 전해 주고 떠나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양주의 '선묘낭자'의 집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 그들에게 다가왔을까요
불행이도 '선묘낭자'는 집에 없었고, 신라로 떠나는 여객선은 기다려주지 않고......
그 사실을 안 '선묘낭자'가 죽을 힘을 다해 뛰어와 부두에 섰을때에는 이미 그 배는 두둥실
망망 황해 바다로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님을 떠나 보내는 선묘낭자의 마음을 헤아려 보지 않아도 얼마던지 헤아릴수 있겠지요.
님이 떠나 가실 날에 드릴려고 몇년동안 정성으로 만든 법복과 행장을 싼 보자기를
떠나는 배를 향해 던집니다. 그 순간 바다에 일진광풍이 불어 그 선물보자기가 '義湘'에게로
전달되어집니다. 따뜻한 선묘낭자의 마음을 하늘도 알아 주었기 때문이겠지요.
'義湘圖'의 권 말미 畵記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의상도'에 대해 아래에 자세한 설명 올리겠습니다)
“재가(在家)의 애심(愛心)은 용맹한 신심(信心)을 일으켰다. 공경에 의하여 사랑을 이루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님과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 '선묘낭자'는 바다로 뛰어 듭니다.
"저는 내세를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바로 지금 현재의 몸으로 법사의 대원을 돕는 몸이 되게 하소서’라며

바다에 뛰어들어 용으로 변하여 배를 수호합니다.
그녀는 참으로 솔직하면서도 대담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감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그림이 그 때의 그 광경입니다. 이 그림 어렵게 구했습니다. 별도 설명드리겠습니다.




龍으로 변한 선묘낭자는 義湘대사가 탄 배를 호위하며 그리운 고국 신라까지 안전하게 갑니다.
그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 와 우리가 지금 볼수 있습니다.





순서가 바뀌었습니다만 의상이 중국에 도착해 처음으로 머물렀던 산동반도 양주(揚州)의
주장(州將)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서 선묘낭자가 의상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선묘낭자의 모습입니다.

예쁘게 생겼어요? 별루라고요? 인물을 보지 말고 마음을 보세요. ㅎㅎ 당시의 미인상은 이랬나 봅니다


여기서 윗 그림들에 대해 설명을 하고 넘어 가야겠습니다.
일본 교토의 명승지 고산사에는 ‘화엄종조사회전(일명 화엄연기華嚴緣起)’이라는
긴 두루마리 그림(에마키繪卷)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위 그림 입니다.
이 그림과 글은 일본의 명혜(明慧·묘에쇼닌 1173~1232) 스님이 작성한 것으로
이는 사찰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자 일본의 國寶입니다.
이 그림(에마키)에는 위에서 설명한 신라시대 두 명승 義湘과 원효의 전기가 그림설명(詞書)과 더불어 에피소드 형식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원래 6권의 그림으로 되있었는데 2권은 홰손되고 4권만이 남아 國寶로 지정되어 전해 내려 오고 있습니다.
이런 국보가 일본에 있는 이유는 원효와 義湘의 화엄종이 일본 불교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 알수있는 지랫대입니다. 자랑스럽죠?
실제로 의상과 원효는 우리나라에서 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한지도 모릅니다.
일본 불교의 중심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또한,일본이 우리와 틀린 것은 남의 나라 일이라해도 숭고한 사랑과 사상은 깊이있게 연구해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는 점입니다.
그 많큼은 되지 않지만 물론 우리나라에도 기록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잘 아시는 고려시대의 일연(1206~1289) 스님이 1282년경에 쓴 <삼국유사>의 ‘의상전교(義湘傳敎)에 나와 있습니다.
또한 중국에도 기록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송나라의 찬녕(919~1002)이 982년부터 988년에 걸쳐 편찬한 <송고승전>의 ‘당신라국의상전'에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이야기에 대한 기록을 요약하자면
송나라의 찬녕(919~1002)이 982년부터 988년에 걸쳐 편찬한 <송고승전>의 ‘당신라국의상전’과
고려의 일연(1206~1289) 스님이 1282년경에 쓴 <삼국유사>의 ‘의상전교(義湘傳敎)'와
일본의 명혜(明慧·1173~1232) 스님이 1228년경에 쓴 <화엄종조사회전>(일명‘화엄연기' 日本國寶)
이 있습니다..

신라로 돌아 온 義湘은 화엄학을 전파할 사찰을 지어야했습니다
전국의 여러 곳을 다녀 보았으나 가장 적합한 곳이 지금의 부석사 자리라고 판단합니다.
공사를 시작하려는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건축반대 데모대들이 머리에 '결사반대'붉은 띠를
두르고 모여들어 홰방을 놓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요즘 말로 하자면 님비(not in my back yard의 약자로 자기 집 근처에서는 않된다는 이기주의자들)집단들인데

보수 수구 세력들로서 토속신앙등 타종교 집단들이었습니다.
날로 격화되는 데모대들로 공사를 할수 없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義湘대사를 사랑하여 국경을 초월하고 만경창파에 몸을 던져 龍이 된 선묘낭자는
사랑하는 님 곁에서 언제나 맴돌고 있었는데...
반대를 위한 반대를 명분없이 하는 데모대를 혼내서 님의 뜻을 이루도록 해 줄수 밖에 없었을 겄입니다.
그래서 선묘낭자는 어마어마한 바위로 변신하여 데모대 위로 위협사격을 가했습니다.
얼마나 놀랬는지 혼비백산한 데모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고 말았답니다.
義湘이 이 절을 부석사로 이름 지은 것도 바위가 하늘로 떠 올랐다는데에서 뜰浮 돌石자를 쓰서
浮石寺라 했다는건 모두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또한 선묘낭자는 울진 불영계곡의 불영사를 지을 때에도 연못의 큰 나무를 들어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 오고 있으며,
우리나라엔 짝퉁 浮石寺도 몇곳 있읍니다.
충청도 서산과 서울 근교에도 똑같은 이름과 내력의 부석사가 현존하고 있습니다.
서산 쪽에 가실 일이 있으시면 꼭 한번 들려 보세요.

의상은 부석사를 짓고 화엄학의 전파에 매진합니다
양양의 낙산사, 동래의 범어사, 지리산의 화엄사, 울진의 불영사가 의상대사의 혼이 담긴
대표적인 사찰입니다.


부석사를 완공하고 나서 제자들에게 화엄학을 설법하고 있는 의상대사의 모습이
일본의 國寶로 지정 되어 있으니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외쳐도 되겠지요?







728x90

'홍어와 무인도 > 역사의 숨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천의 성냥공장  (0) 2013.01.04
마라톤 이야기  (0) 2008.02.02
황희정승과 반구정   (0) 2008.02.02
얼마나 아세요?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0) 2008.01.20
양사언과 그의 어머니  (0) 2008.01.1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