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와 둘레길』
[파주] 마장호수 흔들다리
안고령-마장호수둘레길-전망대-흔들다리-마장호수댐-마장호수둘레길-안고령
[지형도]
[구글어스]
"마장호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기산리'에 있는 중형급 저수지입니다.
한편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기산리'와 조금 맞닿아 있기도 하더군요.
약60,000평 규모로 2000년에 농업용 저수지로 건립되었는데,
최근 '파주시'가 도심형 테마파크로 재탄생시켰다는군요,
['양주역 1번출구']
2019년 10월 16일 (수) 맑음
[마장호수]로 가는 방법은 여럿 있겠습니다만, 저는 교통 편의상 [양주역]으로 전철을 타고 가서
[양주역1번출구]에서 출발하는 [18번] 양주시 공영버스를 이용했습니다.
이 버스는 [마장호수]의 동쪽끝 지점인 '양주시 백석읍 기산리 안고령'으로 가는 버스입니다.
버스는 운행간격이 길어 버스 시간을 잘 맞추어 [양주역]에 가야 하는데....
['18번 시간표'] [주말 승차장]
2019년 10월 현재 [18번공영버스] 시간표입니다.
저는 10시 50분 출발 버스를 타고 갔다가, 올때는 1시 40분 버스를 이용했습니다.
주말에 가실 분들은 꼭 알고 가야하는 사항이 있었는데
주말엔 [양주역] 부근 교통이 혼잡해서 타는 곳이 [1번출구]가 아니고
윗 사진 [주말승차장] 안내도에 표기된 "주내농협" 앞이라고 하니 유의해야 겠습니다.
그리고 주말엔 손님이 많아 줄을 서야 한다고하니 조금 일찍 가서 줄을 서 앉아 가야겠죠? ㅎ
['파주시 광탄면 기산리'로 가는 방법과 시간표]
[마장호수]로 가는 교통편은 다양하더군요.
'파주시'를 통과해서 가는 방법이 나열되 있으며 [마장호수댐] 아랫쪽 주차장으로 가는 방법입니다.
자기에게 편리한 버스를 이용하면 되겠습니다.
['안고령' '18번버스종점']
[양주역]에서 약35분이 걸려 [마장호수]의 동쪽끝 지점이며
이 버스의 종점인 '양주시 백석읍 기산리 안고령'에 도착했습니다.
[안내도]
버스 종점엔 [현위치]를 알려주는 안내도가 있으며...
['마장호수둘레길' 입구]
[18번 종점] 바로 뒤에 [마장호수둘레길] 입구가 있어 매우 편리했으며
[마장호수 전망대]까지 "270m"라고 알려 주는 이정표가 길안내를 해 줍니다.
멀지 않죠?
[뒤돌아 본 '안고령']
데크길로 접어 들어 뒤돌아 본 [18번종점] 주변 풍경이고...
"안고령"이라는 마을은 "고령산" 12계곡 가운데 제일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데크]
['파주시 마장호수' 입구]
[마장호수둘레길]은 100% 데크길로 만들어져 있어 길 잃을 염려없고 위험하지도 않아
가족 나드리로 적합해 주말이면 북새통을 이룬다고 하더군요.
데크길을 100m 정도 진행하면 '파주시'와 '양주시'의 市界를 만나며
[마장호수]는 '파주시'에 의해 건립되고 운영되는 테마파크라는걸 알수 있게 안내판도 설치해 놨습니다.
[호수둘레길]
호수가 호수 다웁게 넓어지는 호수로 들어 가면...
['마장호수 전망대'와 '흔들다리' 조망]
쨔~~ㄴ
[마장호수]가 자랑하는 "흔들다리"가 보이기 시작 합니다.
다른 지역에 있는 다리들은 대부분 "출렁다리"라고 하는데, 여기는 "흔들다리"라고 하더군요.
[전망대와 흔들다리]
['감사교육원'과 '팔일봉' 조망]
[흔들다리]에 가까이 다가 가며 [흔들다리]를 전체적으로 촬영하는데...
우측 [팔일봉] 아래 계곡엔 [감사교육원]이 있었습니다.
['마장호수 흔들다리']
[흔들다리] 밑에서 [흔들다리]를 올려다 보고...
['흔들다리' 밑 쉼터]
[흔들다리] 밑에는 쉼터가 있으며
[전망대 조망]
[흔들다리]를 건너는 입구가 있는 곳에 [전망대]가 있어서 올라 가야 합니다.
잠시 올라 가면...
[전망대]
[전망대]가 있는데 cafe와 편의점등이 영업을 하고 있더군요,
['흔들다리' 입구]
이제 [흔들다리]를 건너기 위해 [흔들다리] 입구로 내려 갑니다.
평일이어서 내방객이 적어 좋았습니다.
가을이 깊어 가는 주말엔 발 디딜틈이 없으리라 ~~ㅎ
['흔들다리']
['흔들다리' 안내문]
길이 220m의 국내 최장 흔들다리라고 합니다만,
최근 '충남 예산'의 "예당호 출렁다리"가 무려 402m 길이로 만들어 졌다고 하니
이제 [마장호수 흔들다리]는 왕관을 물려 주었겠지요.
['흔들다리'와 '팔일봉']
"팔일봉 八日峰 463m"
8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산에서 해를 맞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다른 말로는 거룻봉이라고도 했는데 산등성이 생김새가 마치 거룻배와 같다고도 하며
봉화를 올리던 봉화터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군요.
저는 2009년 2월에 [한북 감악지맥]을 종주 할때에 한번 올라간적이 있습니다.
[팔일봉]과 [감악지맥]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은 다음 저의 산행기를 참고 하세요.
"한북감악지맥1구간 산행기"
['마장호수 댐' 방향 조망]
[흔들다리] 중간에서 [마장호수댐] 방향을 조망합니다.
댐 뒤로 [한북 오두지맥]이 지나는 [박달산 363m]이 조망됩니다.
[박달산]이나 [한북 오두지맥]에 관심 있으신 분은 제가 2013년 10월에 쓴 산행기를 참고하세요.
"오두지맥 鰲頭枝脈 산행기"
['안고령' 방향 조망]
출발지였던 [안고령] 방향을 바라보니 [한북정맥] 마루금이 지나는 "한강봉"이 조망됩니다.
[감악지맥]이 저 [한강봉]에서 분기하여 북쪽 [감악산] 방향으로 뻗어 있습니다.
['고령산-개명산' 조망]
남쪽 방향으로는 [한북 오두지맥] 마루금이 지나는 [고령산 앵무봉 621.1m]과 [개명산 559.9m]가 보이는데
[개명산]엔 미사일 부대가 점령하고 있어 [오두지맥]을 종주 할때 우회한 기억도 나는군요.
['흔들다리' 출구]
[흔들다리]를 건너 건너편 출구에 도착하여
[뒤돌아본 '전망대']
지나온 [흔ㄴ들다리]를 뒤돌아 보고
['마장호댐' 가는 길]
[마장호수댐]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계단을 내려 가서
[호수 북쪽 둘레길]
[마장호수]의 북쪽 둘레길을 진행하며 조망을 하면...
['전망대'와 '고령산-개명산' 조망]
[흔들다리]와 [전망대]가 새로운 각도로 조망되며
[고령산]과 [개명산] 사이 계곡엔 "보광사"라는 유명한 절이 있죠.
[조선 21대 왕 영조(英祖, 1694~1776)]가 자신의 어머니 명복을 비는 "기복사(祈福寺)"로 정하고
어머니 무덤인 "소령원"의 원찰로 삼은 절이니 유명하지 않을수 없죠.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 "숙빈 최씨"....그녀의 아들이 조선의 왕이 되고...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이에서 각 정파가 치열한 권력싸움을 하던 시대에
'인현왕후'의 몸종 역활을 하던 '무수리 최씨'가 "숙종"의 눈에 들어 성은을 입어 아들을 낳고...
'장희빈'이 낳은 아들 "경종"이 후사없이 일찍 죽어 이복동생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영조"였죠.
왕비는 [종묘]에 영정과 신위가 배향되지만 후궁은 일반 묘로 갔지요.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컴플렉스에 시달렸던 "영조"는 어머니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우렸다는거 모두 아실겁니다.
그 대표적인게 저 [보광사]에 어머니의 영정과 위폐를 모시는 "어실각 御室閣"을 세우고
매년 백중날 절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답니다.
'숭유억불' 정책을 스스로 거스르며....
조선의 종교인 "유교 儒敎"의 결정적 단점 하나 알려 드릴까요?
다른 종교들은 죽음 이후의 세상을 보장해 줍니다. 환생 부활이라던가 천당...극락세계..등등
하지만 "유교"는 현세를 살아 가는 현명한 방법만을 알려 주고, 死後에 대해선 보장해 주는게 없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실은 강력한 '숭유억불' 정책 속에서도 死後世界를 보장해 준다는 불교를 몰래 믿었던거죠.
그렇게하여 조선의 왕족들이 모두 극락세계로 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왕조는 무너지고...
['마장댐'과 '박달산' 조망]
[마장댐]과 [박달산]을 바라보며 진행합니다.
[둘레길]
이곳 구석진 곳에 엄청 큰 잉어들이 많더군요.
['마장호수댐']
[마장호수댐] 상부에 도착해서 댐을 바라보고
['마장호수댐' 하부]
[마장호수댐] 하부도 조망합니다.
댐의 높이가 상당하단걸 알수 있습니다.
이건 '파주시'를 통과해 [마장호수]로 가면 이 댐을 걸어 올라야 한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제가 [양주역]에서 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ㅎㅎ
['마장호수' 전경]
댐 중간에서 [마장호수]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파주시 기산리']
'파주시 광탄면 기산리' 버스 종점도 내려다 봅니다.
[주차장]
댐을 건너면 승용차를 위한 주차장이 있고
[저수지 수문 조망]
마장호수] 수문도 확인합니다.
[호수 남쪽 둘레길]
그리곤 둘레길 남쪽을 진행하면...
['House of Coffee']
커피를 파는 카페들도 만날수 있고
['수상레져' 타는 곳]
[카누]와 [카약]을 탈수 있는 수상레저 선착장도 만납니다.
30분에 15,000원이면 시내에서 택시타는 요금보다 싸지요?
['흔들다리' 밑 쉼터]
다시 [흔들다리] 밑에 있는 쉼터에 도착하여
['흔들다리' 밑 통과]
[흔들다리] 밑을 통과하여 둘레길을 진행합니다.
[정자]
'양주시 백석읍 기산리 안고령'에 가까이 다가갈 즈음
건너편에 정자가 하나 보이고...
['안고령' 버스종점 조망]
이어서 출발지였던 "안고령 버스종점"에 도착합니다.
['안고령' 버스 종점]
다음 버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버스종점 앞에 있는 음식점에 들어가 점심식사를 하고 ....
1시 40분에 출발하는 [18번 공영버스]를 타고 [양주역]으로 가서 전철로 환승하여 귀가했습니다.
[구글어스]
걸은 거리는 약5km였으며 1시간 20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예상보다 짧은 거리였으며 걸린 시간도 짧았습니다.
걸리는 시간이야 카페에 들어가 커피도 한잔하고 여유있게 걸으면 더 걸리니 그런건 개인 취향.
단풍이 물드는 시절에 가면 더욱 운치 있는 나드리가 되겠더군요.
"京畿五嶽을 찾아서"
"감악산" 산행기
출렁다리-법륜사-숯가마터-묵은밭-악귀봉-장군봉-임꺽정봉-감악산 정상-
팔각전망대-까치봉-운계전망대-운계폭포-법륜사-출렁다리-출렁다리 입구
樹欲靜而風不止(수욕정이풍부지)
子欲養而親不待(자욕양이친부대)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논어" 중에서>
[구글어스]
이번 "감악산" 산행코스는 "출렁다리 입구"에서 출발하여 "출렁다리"를 건너
"법륜사-묵은밭-만남의 숲-악귀봉-장군봉-임꺽정봉"을 경유하여 "감악산 정상"에 오르고
"까치봉"이 있는 "운계능선"을 따라 하산하여, "운계전망대"와 "운계폭포"를 통과하여
원점 회귀하는 GPS 측정거리 약7km를 갑니다.
['출렁다리' 입구] 12:06
2016년 11월 20일 (일) 맑음
"감악산"에 새로 "출렁다리"가 완공되었다는 소식을 이미 접하고 있었으나 오늘에서야 길을 나섯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적성 감악산"을 가는 방법은 쉽지만 거리가 다소 멀어 시간이 제법 많이 걸리더군요.
전철 [1호선]을 타고 [양주역]등에서 [25번 시내버스]로 환승하기만 하면 됩니다.
[25번버스]는 15분~20분 배차 간격이라 자주 다니는데, 그런데 [25번 시내버스]에 대해 한가지 팁을 드리면,
평일은 괜찮겠지만 휴일에 [양주역]에서 [25번시내버스]를 타면 복잡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25번]은 [의정부역]-[가능역]-[녹양역]에서도 정차하니 미리 환승하면 앉아서 갈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감악산" 주등산로 입구는 "출렁다리"가 생기기 전까지는 [법륜사 입구]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법륜사 입구] 다음 정류장인 "출렁다리입구"에서 내려야 하니 유의 해야 겠습니다.
"출렁다리입구"에는 [문산-연천간 도로공사]가 진행 중에 있는데 곧 완공될듯 합니다.
[주차장과 화장실]
평일엔 한산하다고 하는데 휴일엔 많은 탐방객들로 무지 붐비는 명소가 되었더군요.
매우 큰 주차장이 준비되 있습니다만, 이미 만차로 주차할 곳이 없더군요.
앞으로 휴일에 가실 분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게 좋겠습니다. 주차 할 곳이 없으니까요.
아니면 새벽에 가시던지...ㅎㅎ
[들머리] 12:10
"감악산"과는 관계없는 조그만 봉우리로 먼저 올라 가야 "출렁다리"로 갈수 있더군요.
입구에는 화장실과 산행안내도가 있으며 오름길 초입에는 데크시설을 해 놨습니다.
[안내도]
먼저 안내도를 숙지하고 출발합니다.
"감악산"에는 [둘레길]을 새로 만들었군요. 언제 시간 나는데로 답사 할까 합니다.
다섯구간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아직 모든 구간이 개통 되지는 않은듯....
[뒤돌아 본 입구]
계단을 오르며 출렁다리 입구를 뒤돌아 보고
[오름길]
약간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는데....
12시가 넘었으니 벌써 하산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6분 정도 오르면...
[줄서기] 12:16~12:28
앗 ! ~
12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출렁다리"를 건너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줄이 엄청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탐방객들이 많을줄은 예상 못했는데...^.^
등산객들도 많았습니다만, 가족들과 함께 "출렁다리"를 구경 온 행락객들도 무척 많았습니다.
['출렁다리' 입구]
지루하게 12분 정도 줄을 서서 "출렁다리"로 올라 갑니다.
['출렁다리' 전경] 12:28
"감악산 출렁다리"
우리나라 산악 현수교로는 제일 긴 다리라고 하는데... 폭 1.5m, 길이 150m라고 하는군요.
케이블 사슬 40㎜ 4가닥이 위아래로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7.0 진도에도 끄떡없도록 시공되었다고하며
성인 900명이 한꺼번에 뛰어도 끄떡없다고 하는데, 보시는바와 같이 무척 많은 사람들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걸어 보니까 사람이 너무 많아서인지는 몰라도 진짜 제법 흔들려서 약간의 위압감이
느껴지고 겁 많은 여자들은 약간의 현기증을 호소하기도 하더군요.
['출렁다리'에서 조망]
"출렁다리"에서 오늘 진행할 "감악산 등산코스"를 조망합니다.
"법륜사"를 통과하여 게곡을 따라 오르다가 우측 능선으로 올라 "악귀봉" "장군봉"과 "임꺽정봉"을
경유하여 "감악산 정상"을 오르고 좌측 능선인 "운계능선"을 따라 "운계전망대"로 하산 할 예정입니다.
['법륜사' 입구 조망]
이런 다리는 주로 험준한 산의 계곡을 가로 지르며 빼어난 경관을 구경하기 위해 만드는데
이곳 출렁다리는 그런 경관은 많이 모자르는듯....
"출렁다리"가 생기기 전의 "감악산등산로입구"인 [법륜사입구]가 보일뿐...ㅎ
이 길은 "설마치 薛馬馳고개", 또는 "어룡 御龍고개"라고도 하는데
"薛馬馳고개"는 "설인귀"가 말을 타며 무술훈련을 한 고개라는데에서 유래한다고 하며
"御龍고개"는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전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 항복하러
'경주'에서 이 고개를 넘어, '고랑포'를 지나 '개성'으로 갔다고 하는데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경순왕'이 항복하러 가며 禮物을 수레에 싣고 갔는데 그 수레의 행렬이 십리를 넘었다고 합니다.
[뒤돌아 본 '출렁다리'] 12:35
사람이 많아서 150m 출렁다리를 건너는데 6분 정도 걸렸습니다.
다리를 건너와 뒤돌아 본 "출렁다리"입니다.
이것도 명소라고 무척 많은 탐방객들이 몰려 왔죠? ^.^
['법륜사' 진출입로 만남] 12:36
"출렁다리"를 통과해 나가면 "법륜사" 진출입 도로를 만나서 도로 따라 올라 갑니다.
['감악산둘레길 청산계곡길' 입구] 12:38
도로를 따라 조금 진행하면 [감악산둘레길-청산계곡길]의 들머리를 지나는데
다음에 답사해 보기로 하고 "법륜사"로 진행합니다.
['법륜사']
"법륜사"는 일반적인 절간이라 그냥 지나칩니다.
"출렁다리" 개통으로 가장 많은 혜택을 본 듯...
[등산로 입구] 12:44
2008년도와 2009년도에 다녀 간적이 있는 "감악산"입니다만,
비교 할수 없을 정도로 많은 탐방객들이 찾고 있으며, 등산로도 넓어지고 관리도 잘 되고 있었습니다.
[계곡 오름길]
10여분 완만한 계곡 오름길을 오르면....
['숯가마터'] 12:55
"숯가마터"라고 하는 곳을 만나는데 쉼터가 조성되 있고
"숯가마터"는 웅덩이 마냥 볼품없이 복원해 놨군요.
[오름길]
"숯가마터 쉼터"에서 다시 7분여 완만한 오믈길을 오르면...
['묵은밭'-'까치봉갈림길'] 1:02
이정표가 있는 "묵은밭 삼거리"를 지나는데...
옛날 이곳에 밭이 있었나 봅니다.
여기서 좌측 능선으로 오르면 "까치봉"을 경유하여 "감악산 정상"으로 갈수 있으나
저는 직진하여 조금 더 올라 가 우측 "악귀봉-장군봉-임꺽정봉" 능선으로 오를 예정입니다.
다시 직진하여 7분여 올라 가면...
['만남의 숲'-'임꺽정봉갈림길'] 1:09~1:12
이정표가 세개나 설치된 "만남의 숲"이라고 하는 쉼터를 만납니다.
직진하면 "감악산" 정상석이 있는 정상으로 조금 빨리 갈수 있습니다만,
진짜 "감악산"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봉우리들은 우측 "악귀봉-장군봉-임꺽정봉"이므로
여기서 우측 [임꺽정봉 →] 방향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임꺽정봉' 가는 길] 1:13
[만남의 숲]에서 우측으로 조그만 계곡을 건너서...
[된비알]
제법 가파른 된비알을 20여분 오르면...
[전망봉우리] 1:34
소나무와 조화를 이루는 암봉에 오르는데...
['악귀봉' 조망]
올라야 할 "악귀봉"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안부 갈림길] 1:35
"악귀봉"으로 가기 전에 안부가 하나 있는데, 계곡길을 이용해 "법륜사"로 통하는 삼거리이고...
[오름길]
다시 가파른 오름길을 10여분 오르면....
['악귀봉' 정상] 1:44~1:47
"악귀봉" 정상에 도착합니다.
이 봉우리는 제가 2009년도에 "감악지맥"을 종주 할때 지난적이 있는 봉우리로서
지맥이 방향을 바꾸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조망을 하면...
[지나온 길 조망]
먼저 서쪽으로 지나온 길을 조망합니다.
사진에는 "출렁다리"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만, 실제로는 잘 보였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뒤로 "파주시 적성읍내"와 "파평산"이 조망되는군요.
화석정-임진각-도라산-개성공단-천마산-오관산-송악산등이 조망되는 곳인데
연무로 잘 보이지 않아 아쉽군요.
['감악지맥' 조망]
남쪽방향으로는 "감악지맥"이 뻗어가며 "한북정맥"의 "한강봉"으로 가고 있는데 연무로 잘 보이지 않아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겟습니다.
여하튼 희미하게 보이는 높은 산이 "불곡산" "도봉산" "북한산"인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장군봉'-'임꺽정봉'-'감악산정상' 조망]
동쪽방향으로는 "감악산의 하일라이트"인 "장군봉-임꺽정봉-감악산정상"이 펼쳐지고...
[암벽]
"악귀봉"과 "장군봉" 사이에는 또 하나의 봉우리가 있는데 이름은 없는듯합니다만...잘 모르겠습니다.
[석문] 1:53
"악귀봉"을 내려가서 다음 봉우리로 오르는 중간에 "석문 石門" 옆을 지나는데
관심 있는 분들은 나가서 "석문"을 통과해 보기도 하더군요.
[뒤돌아 본 '악귀봉']
"악귀봉"과 "장군봉" 사이에 있는 암봉에 올라 뒤돌아 본 "악귀봉"입니다.
"감악지맥"은 저 봉우리에서 좌측 , 즉 남쪽방향으로 산줄기가 가파르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장군봉' 오르는 길] 1:58
이제 올라야 할 "장군봉"을 조망합니다.
"장군봉"은 거대한 바위 덩어리로 만들어진 "감악산"의 대표 봉우리로서 "임꺽정봉"과 함께
"京畿五嶽"에 들게 되는 결정적 경관을 제공하고 있는 봉우리여서 "장군봉과 "임꺽정봉"을 탐방하지
않고선 "감악산"을 다녀 왔다고 할수 없을 정도입니다.
"장군봉"으로 오르는 암벽엔 계단을 설치하여 어렵지 않게 오를수 있는데
가파르지만 짧아 3분 정도만 낑낑대면 되겠습니다.
['임꺽정봉' 조망]
"장군봉"을 오르며 조망하는 "임꺽정봉"입니다.
특히 바로 앞에 보이는 "장군봉"의 암벽은 "병풍바위"라고도 불리워지는데
또한 사람 얼굴을 닮았다고 "얼굴바위"라고도 하더군요.
"임꺽정봉" 중턱에 있는 "남선굴"에 대해선 "임꺽정봉"에 가서 안내문을 보면 되겠습니다.
['장군봉' 정상] 2:03
"장군봉" 정상에 오르면 "임꺽정봉"이 키높이를 함께하고
['감악산정상' 조망]
북동쪽으로 "감악산 정상"이 조망됩니다.
"감악산 정상"에는 거대한 "DMB방송 전파송출 안테가"가 있어 주변 어디에서나 알아 볼수 있습니다.
[안부] 2:11
"장군봉"에서 8분 정도 진행하면 "임꺽정봉" 안부에 도착합니다.
우측 "임꺽정봉"을 갔다가 다시 돌아와 좌측으로 가야 정상으로 갈수 있습니다.
우측으로 잠깐만 오르면 "임꺽정봉"입니다.
['임꺽정봉'] 2:12~2:18
[안내문]
"임꺽정봉 676.3m"
조선왕조 "중종"의 세번째 부인인 "문정왕후"는 자기 남편 "중종"이 죽자 병약한 어린 아들을
조선 제13대 왕 "명종"을 만들고 어린 아들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며 '을사사화'로 반대파들을 무참히
제거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며 독재체재를 구축하면서 부정부패는 극에 다달았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 흉년도 계속되어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지경에 이러렀습니다.
이때에 등장하는 도둑놈, 大盜......바로 "임꺽정"이었습니다.
"임꺽정 林巨正"은 이 근처 '양주의 불곡산' 아래에서 태어나 경기 황해도 지방에서
관가를 습격하여 곡물을 빼앗아 일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며 도둑놈이면서도 백성들의 영웅이 되었죠.
도둑놈이 영웅이 되는 시대였으니 "문정왕후"의 독재와 혹세무민의 세도가 어떠했는지 알만하죠
곳곳에 "암닭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대자보가 붙고....그런 속담이 탄생되기도 했으니....
요즘 "닭그네"와 비교된다는 느낌도 ...ㅎ
그래도 그때는 "임꺽정"이라는 도둑놈이 의적- 백성들의 영웅이 되었지만
요즘 도둑놈들 "순시리"등은 대통령을 등에 업고 사리사욕만 챙기는 '진짜 나쁜 도둑놈'들...ㅎ
이 봉우리 중턱에는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굴이 있는데 "임꺽정"이 관군에 쫒겨서 숨은 굴이라고,
또한 고려말 '남을진'이라는 사람이 '이성계 쿠데타정권'과 타협 할수 없다고 세상과 등지고 굴 속에서
살다 갔다고 "남선굴 南仙窟"이라고도 알려져 있답니다.
['임꺽정봉' 정상]
"임꺽정봉 정상석"은 "임꺽정봉"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수 있지요?
제일 높은 곳에 올라 조망을 합니다.
[지나온 '장군봉' 조망]
먼저 지나온 "악귀봉"과 "장군봉"을 뒤돌아 보고...
[남쪽방향 조망]
남쪽방향으로는 '양주시 남면 신산리'와 '동두천시'가 조망되며 "칠봉산"도 조망되는군요.
"칠봉산" 뒤로 연무 때문에 희미하게 보이는 산들이 "불곡산" "도봉산"등입니다.
['감악산정상' 조망]
"임꺽정봉"에서 "감악산 정상" 방향을 바라보며 진행합니다.
[ 내림길] 2:20
계단을 이용하여 "임꺽정봉"을 내려 가면...
[안부 사거리] 2:25
이정표가 있는 안부 사거리를 만나는데...
좌측 계곡길이 [법륜사]에서 오르는 계곡등산로로서 가장 쉽게 정상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계곡길은 빠르기는 할지언정 그렇다고 특별히 힘이 덜 드는건 아니니, 구경거리가 없는 계곡길보다는
제가 이용하는 길이 "감악산"을 알고 즐기는데 더욱 도움이 되니 능선길을 이용하는게 좋겠습니다.
직진해서 조금 올라 가면
['고릴라바위'] 2:27
"고릴라바위"를 지납니다.
'고릴라'를 닮았나요? ㅎ
[사각정자]
"고릴라바위" 위에는 사각정자 쉼터가 있고
[정상 오름길]
이어서 계단을 잠시 오르면...
['감악산 정상'] 2:30~2:50
"감악산 정상"에 도착합니다.
정상에는 넓은 헬기장이 있고 '산상주점'도 성업 중에 있으며
정상석과 "감악산 碑"가 있습니다.
철조망 뒤로는 군부대 초소와 "KBS DMB방송 전파송출 안테나"가 위용을 자랑하며 솟아 있습니다.
저 안테나 때문에 이 주변, 즉 '파주-양주-동두천-연천'에서는 어디가 "감악산"인지 알수 있습니다.
저 시설에 근무하는 사람들 때문에 자동차가 정상까지 업무용 출퇴근용 차량들이 다니고 있더군요.
"경기오악" 중에 하나인 "감악산"이 저런 시설로 자연 경관이 파괴되고 있어 아쉽습니다.
['감악산비']
[안내문]
"감악산 柑嶽山 675m"
"감악산"은 '감색 紺. 큰산嶽'으로 쓰며 "京畿五岳"중에 하나이지요.
그리고 이곳에선 "京畿五岳", 즉 '서울의 관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 '개성의 송악산'이
맑은 날에는 모두 보인다는 '파주의 감악산'입니다.
"감악산" 정상은 現代와 古代가 공존하고 있는듯 풍상에 마모되어 글자를 알수 없는 비석과
차세대 방송이라는 DMB방송 전파송출 안테나시설이 함께 솟아 있습니다.
보이는 비석은 세월의 풍상에 비석의 표면은 모두 마모되어 글자를 젼혀 알수 없어서
안내판에 추측으로만 이 비석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설인귀 제단"이라는 설과 "진흥왕 순수비"라는 설 두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설인귀"는 당나라 태종때 요즘 말로 하자면 쫄병으로 군대에 입대해서 사령관이 되는 입지전적 인물로
유명하고 드라마 "연개소문"등에도 많이 등장했던 인물이지요.
"설인귀"는 이 지역에서 태어난 우리나라 사람인데 당나라 군대에 입대해 승승장구해서 사령관이되고
주로 우리 고구려를 침략하는 앞잡이 역할을 하였으며, 결국 고구려를 멸망 시키는 핵심 장군이 되었지요.
"진흥왕 순수비"라는 설은 모양이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와 매우 흡사하다는데서 유래하였답니다
그러나 모두 추정만 할 뿐 정확한 사실은 모르고 있답니다.
[동쪽방향 조망]
먼저 동쪽방향을 조망합니다.
"감악지맥"은 앞에 보이는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 봉우리를 지나 "간파고개"로 내려 가서
건너편 "마차산"으로 갑니다. 그리곤 좌측 산줄기를 따라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도감포"로 가서
그 맥을 다합니다. 제가 쓴 "감악지맥 산행기"가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찾아 읽어 보세요.
"마차산" 뒤로는 "소요산"이 보이며 "왕방지맥"도 보입니다.
"국사봉"에서 바라보는 "감악산" 사진을 보여 드릴까요?
['국사봉'에서 바라보는 '감악산'] 자료사진-
2015년 6월 17일에 "왕방지맥"을 종주하며 찰영한 사진
"왕방지맥"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들은 제가 두발로 쓴 "왕방지맥 산행기"를 찾아 읽어 보세요.
[동남쪽방향 조망]
조금 더 우측 동남쪽으로는 '동두천시가지'와 "해룡산" "칠봉산"까지 조망됩니다.
[내림길]
"감악산 정상"에서 빵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휴식과 조망을 마치고 하산합니다.
하산은 "까치봉"이 있는 "운계능선"을 이용해 내려 갑니다.
정상에서 50m쯤 내려 가면....
[전망대] 2:51
'팔각전망대'를 만나 조망을 합니다.
['개성' 방향 조망]
맑은 날엔 개성과 "송악산-오관산-천마산"이 훤히 보이는 곳인데 오늘은 연무로 거의 보이지 않는군요.
앞 좌측에 펼쳐진 읍내가 "적성"이며 城이 있었다고 積城입니다. 그 앞으로 임진강이 흐르고 있고..
임진강 주변에는 고구려시대와 고려시대의 수많은 城이 있으나 발굴되지 못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가는 '고랑포'가 보입니다.
"고랑포"는 예전에 영남지방에서부터 개성으로 가는 핵심 교통로였다고 합니다.
앞에서도 언급 했습니다만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하러 갔던 길이기도 하지요.
항복 예물을 실은 마차 행렬이 십리를 넘었다고 하니 가늠해 보시길...
"적성"과 고랑포" 부근은 교통의 요지여서
일제강점기시대까지만 해도 "화신백화점 분점"이 이곳에 있었다고하니 그 옛 명성을 짐작할수 있죠?
그러나 6.25는 그러한 영화를 송두리째 앗아 가 버리고 싸늘한 휴전선 철조망이 앞을 가로 막고 있습니다.
연무만 없으면 '도라산'은 잘 보이는데 연무 때문에 오늘은 보이지 않는군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향 '서라벌'로 돌아 가지 못하고 뭍힌 곳이 "고랑포"이기도 합니다
그는 죽어서도 그의 고향인 '경주'로는 돌아 가지 못하고 '임진강' 나루인 "고랑포" 위에 뭍혀
6.25의 총탄 여섯발까지 비석에 새기며 아직까지도 쓸쓸히 타향땅에 누워 잠자고 있습니다.
신라의 왕 56명 중에 유일하게 경주 이외의 북녁땅에 뭍혀있는 것입니다.
['파평산' 조망]
가파른 계단을 내려 가며 서쪽 정면으로는 "파평산"이 조망됩니다.
"파평산" 정상에도 군부대가 있어 구별하기 쉽지요.
조선 왕조를 쥐락펴락 했던 "파평윤씨"들의 '관향 貫鄕'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임꺽정봉"에서도 언급한바 있는 "중종"의 셋째 와이프이자 "명종"의 어머니였던 "문정왕후"가
"파평 윤씨"이죠. 남동생 둘이 서로 권력 다툼을 하자 바로 아래 동생인 "윤원로"를 죽여버리고
그 아래 동생인 "윤원형"의 손을 들어준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로 권력에로의 집착은
"피보다 진한 권력"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린 여자...요즘도 비교되는 여자가 있죠? ㅎ
그래서 "임꺽정" 같은 도둑놈들이 백성들의 영웅이 되는 시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비선실세"나 "문고리삼인방"들이 판을 치는 시대? ㅎ
['까치봉' 조망]
계속 고도를 낮추면 "까치봉"이 조망되고
['까치봉' 정상] 3:00
"까치봉" 정상에 도착합니다.
까치 모양으로 보이나요? ㅎ
['까치봉' 정상 모습]
까치봉 정상을 휭하니 지나면...
[내림길]
계속 가파른 내림길이 이어지는데 "출렁다리"가 살짝 보입니다.
앞에 제가 흰색으로 화살표 표기한 봉우리 보이지요?
저곳이 이정표도 없는 삼거리인데 좌측으로 내려 가야 "운계전망대"로 바로 갈수 있으니
유의해야 하는 곳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가면 좋습니다.
가파른 내림길을 25분 정도 내려 가면....
['묵은밭' 갈림길] 3:25
[법륜사]로 가장 빨리 가장 쉽게 내려 갈수 있는 "묵은밭 삼거리"로 갈수 있는 안부에 도착하는데
대부분의 산객들은 여기서 좌측 계곡으로 내려 갑니다만, "운계전망대"를 들려 [법륜사]로 가려면
'운계능선'을 따라 계속 직진하는게 좋더군요.
['운계능선']
"묵은밭"으로 내려 가는 삼거리를 지나면 사람들은 거의 없어 집니다.
완만한 내림길인 "운계능선"을 따라 10여분 진행하면...
[삼거리] 3:36
이정표가 없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조금전 "까치봉"에서 유의해야 하는 삼거리라고 언급 했던 그 삼거리입니다.
직진길이 훨신 더 넓고 선명합니다만, 좌측으로 가는게 지름길이더군요.
[내림길]
가파른 내림길을 15분 정도 내려 가면...
[사거리] 3:53~4:00
이정표가 있는 사거리를 만나는데
직진해서 "운계전망대"를 들렸다가 다시 돌아와 좌측 [법륜사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전망대는 3~40m쯤 앞에 있으니 가깝습니다.
['운계전망대']
"운계전망대"인데 관광객들의 감악산 정상이기도 하답니다. ㅎ
관광객들은 그래도 여기까지는 올랐다가 가야 후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는군요.
나가서 조망을 하면...
['출렁다리' 조망]
"감악산 출렁다리"가 새로운 각도에서 조망되는 곳입니다.
그 뒤로 [문산-연천]을 잇는 도로가 완공을 앞두고 마지막 공사를 하고 있더군요.
['운계폭포' 방향 조망]
좌측 동쪽으로는 [운계폭포] [법륜사]가 계곡에 숨어 있고
올랐던 "악귀봉-장군봉"이 조망됩니다.
['운계폭포'로 내려 가는 길] 4:01
"운계전망대"에서 조망을 마치고 [법륜사] [운계폭포]로 내려 가는 길입니다.
잠시 내려 가면...
['운계폭포' 전망대] 4:04
"운계폭포"를 조망할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되 있고
['운계폭포']
"감악산"의 深部라고 하는 "운계폭포"를 조망하고
[법륜사] 진출입도로를 따라 내려 가면....
['출렁다리' 출입구 삼거리] 4:10
"출렁다리" 출입구를 다시 만나 "출렁다리"로 갑니다.
['출렁다리']
올때 보단 사람들이 많이 줄었군요. 하기사 오후 4시가 넘었으니...
[뒤돌아 본 '운계전망대']
"출렁다리" 위에서 조금전에 들렸던 "운계전망대"와 [법륜사], 그리고 '감악산 정상부'를 뒤돌아 봅니다.
오늘 그런대로 즐거운 산행이었습니다.
['출렁다리' 들날머리]
"출렁다리 입구" 주차장으로 내려 가서
['출렁다리' 출입구] 4:22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가 [25번버스]를 타고 [양주역]에서 내려 전철로 환승하여 귀가했습니다.
갈때는 [양주역]에서 환승하는게 더 좋겠죠? 올때와 반대이니...ㅎ.
[구글어스]
오늘 걸은 거리는 오룩스 GPS로 측정하였는데 약7km였으며, 4시간 10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일요일엔 "감악산 출렁다리"가 방문객들로 매우 혼잡하니 참고하세요~~
집에서 오전 8시경에 출발했는데도 거리가 멀어 12시가 넘어 산행을 시작하게되서 좀 그렇지만
오늘 산행코스는 거리도 적당하고 난이도도 조금 있는 "경기오악"에 속하는 산이어서 좋았고
특히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많은 산이어서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시간 나시는 분들은 한번쯤 다녀 오시길 추천 합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遊山者不可以無錄 而有錄之有益於遊山也
유산자불가이무록 이유록지유익어유산야
산을 즐기는자 기록이 없어서는 아니되고,
기록이 있음은 산을 즐기는데 유익하다
-"퇴계 이황 선생님"의 말씀-
『한양성 순례산』
서울 인왕산 기차바위-선바위
세검정삼거리-홍지문앞-탕춘대성-기차바위-인왕산정상-범바위-선바위-독립문역
[산행코스]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에 있는 "세검정삼거리"에서 출발하여
"기차바위-인왕산정상"를 오르고 "선바위-인왕사-독립문역"으로 하산합니다.
['세검정삼거리']
2019년 9월 18일 (수) 맑음
버스를 타고 "세검정삼거리-상명대입구"에 내려 산행을 시작합니다.
"홍지문 방향"으로 조금 내려 가면...
['홍지문' 앞]
"홍지문 방향" 앞에 데크로 만들어진 등산로 입구가 있습니다.
등산로 입구로 가면...
[등산로 입구]
[등산안내도]
"인왕산 기차바위"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가 안내도와 함께 산객들을 반겨줍니다.
['홍지문' 조망]
등산로로 조금 올라 가 뒤돌아 본 "홍지문 弘智門"입니다.
이 門은 "탕춘대성 蕩春臺城"에 있는 유일한 대문으로 [숙종] 대에 축조되었으나
1921년 대홍수 때에 완전 파괴되어 방치되다가 1977년에 [박정희대통령] 대에 다시 복원되었는데
현재 있는 현판은 [박정희대통령]이 쓴 글씨라 합니다.
[데크 계단]
['탕춘대성' 성곽]
처음엔 "탕춘대성 蕩春臺城" 城郭을 따라 제법 가파른 데크 계단과 오름길이 이어집니다.
10여분 오르면...
[정상 조망]
능선 봉우리에 오르며 [인왕산 정상]이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백련산' 조망]
서쪽이 조망되는데 [서울내부순환고속도로]와 '홍제동' '홍은동'등이 보이며
그 뒤로 [백련산]이 조망됩니다.
조만간 [안산]에서 출발하여 [백련산]을 돌아 조금전 [홍지문]까지 답사를 해 볼 예정입니다.
['족두리봉' 조망]
북서쪽으로는 [북한산 서부능선]에 있는 [족두리봉]이 보이고
['북한산 비봉능선' 조망]
북쪽으로는 [북한산 비봉능선]의 연봉들이 그림처럼 조망됩니다.
['부암동' 갈림길]
이어서 [부암동]에서 오르는 등산로와 합류하는 삼거리를 만나고
[토치카]
이젠 흉물처럼 남아 있는 군 토치카가 폐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청와대를 주로 지키기 위해 [1.21사태] 이후 만들어진 것들이겠죠.
이 토치카 뒷봉우리엔 군부대가 있어 우회로를 만들어 놧더군요.
[데크길]
토치카 뒷 봉우리를 우회하는 데크길을 이용해 돌아 가면...
[사거리]
이정표가 있는 사거리를 만나는데, 이곳도 [부암동]과 연결되는 등산로 갈림길이었습니다.
[암반]
암반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소나무 숲길]
시원한 가을바람과 솔향이 풍기는 능선을 지나면...
[전망대]
['인천 계양산' 조망]
전망대가 설치된 봉우리에 올라 서쪽을 조망하고...
'인천 계양산'까지 보이는군요.
[릿찌]
이어서 평범한 암반을 오르면
[사거리]
다시 이정표가 있는 사거리를 만나는데, 우측 [홍제동]에서 가파르게 오르는 등산로가 있고
좌측은 [부암동]과 연결되는 등산로가 있었습니다.
['인왕산-안산' 정상 조망]
이어서 [인왕산 정상]과 [안산 정상]이 함께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300m봉']
'300m급 봉우리'에 올라 서면...
['기차바위' 조망]
드디어 "기차바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기차바위']
"인왕산 기차바위 - '314.1m봉'"
어찌하여 이 바위를 '기차바위'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위가 기차를 닮은게 아니라 바위에 안전 로프를 설치한게 철로처럼 보여서 그렇게 부르는듯 한데
그렇다면 "기차철로바위"라고 해야하지 않을까...ㅎㅎ 그냥 넘어 갑니다.
['부암동' 조망]
"인왕산 기차바위 - '314.1m봉'"에선 반드시 [부암동] [평창동] 방향을 조망하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도 알고 가야 우리 역사의 뒤안길을 조금이라도 음미 할수 있더군요.
먼저 제가 "무계원 武溪園"으로 표기한 곳을 꼭 알고 가야합니다.
[무계원]에 대해선 제가 얼마전 "인왕산자락길"을 걸으며 답사기에 언급한바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3남인 [안평대군]이 살던 집으로 이 '인왕산 부암동 계곡'이 꿈 속에서 본 중국의
[무릉도원]이 연상 될 정도라고, 이 곳을 그 줄임말로 "무계원 武溪園"이라 하고
당시 최고의 화가인 "안견 선생"에게 꿈속에서 본 중국의 "무릉도원"을 설명 하고
"안견 선생"은 그 설명을 참고하며 3일만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이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 "랍니다.
아쉽게도 이 그림은 일제강점기시대에 쪽바리가 밀반출하여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에 보관되 있어
우리나라 그림을 우리나라에선 볼수 없답니다. 그래서 제가 웹써핑을 해서 그림을 보여 드림니다
촬영 해온 사진으로나마 감상하시고, 이 그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그림 아래 첨부한 TV 영상을 참고하세요
['안견 선생'이 그린 천하명작이라는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 "입니다]
이 그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아래 첨부한 TV 영상을 참고하세요. 유익합니다.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 " 여기 클릭
다음은 "석파정"입니다.
"석파 흥선 대원군 이하응 石坡 興宣大院君 李昰應"의 별서였던 곳이죠.
대원군은 자신의 호를 "석파 石坡"라고 지었는데 "坡"는 "고개"라는 뜻으로 이곳 "기차바위" 부근의
바위 형상을 "석파 石坡"로 보고 자신의 호로 사용했다고 할 정도로 이곳 "인왕산 기차바위"는
아름다웠다고... 지금은 달동네가 계곡을 점령하고 있어 그런 경치는 가늠이 잘 않되지만...
자세한 사항은 "[서울] 인왕산 자락길 역사탐방" 여기 클릭
['청운동' 조망]
"기차바위"에 오르니 '서울시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먼저 "백악산"과 [청와대] [경복궁]이 눈에 들어 오며, "서촌"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서울 주변 산들이 보입니다.
['남산' 조망]
남쪽으로는 "목멱산(남산)"이 서울 중심부에 솟아있고
['311.7m봉' 조망]
이제 [탕춘대성]이 [한양성]에 합류하는 "311.7m봉"이 다가오고
['311.7m봉'- '한양성']
[탕춘대성]이 [한양성]에 합류하는 "311.7m봉"에 도착하여 [한양성]으로 올라 가서
[뒤돌아 본 '기차바위']
지나온 "기차바위"가 있는 "314.2m봉"을 뒤돌아 봅니다.
['서울 종로구-중구' 조망]
이젠 서울시내 "종로구-중구"가 전체적으로 조망됩니다.
조선시대 "한양성 漢陽城" 城안의 전체지역이 한눈에 조망되는군요.
지금의 시점에서 이렇게 조망하니 "한양성 漢陽城"의 규모가 그다지 크지는 않은듯...
[정상 오르는 길]
[인왕산 정상]으로 올라 가면...
['인왕산' 정상]
"인왕산 仁王山 339.9m"
"仁王"은 한자 뜻대로 하면 "어진 임금"이라는 뜻이겠지만 원래 불교 용어이죠.
「반야경」에선 "부처"를 "인왕여래"라 하고,
우리가 절간에 들어 갈때 절간입구에 절간을 지키는 우락부락 무시무시하게 생긴 "力士" 네명이 있죠.
저는 이 力士들을 "부처및 절간 경호원"이라고 부릅니다만...ㅎ
그 중에 "금강역사"를 일반적으로 "仁王"이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기차바위' 조망]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지나온 [기차바위]...
그 뒤로 [평창동]과 [북한산]이 그림같은데...
[평창동 平倉洞]은 조선시대 군사들의 군량미를 비축하는 창고인 "평창 平倉"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죠.
[서울 조망]
오늘 비교적 날씨가 좋아 멀리 [예봉산] [검단산] [남한산성]까지 보이는군요.
바로 아래엔 "서촌 西村"과 [청와대][경복궁]이 전체적으로 보입니다.
[강남 방향 조망]
남쪽으로는 '수원'의 "광교산"까지 보이고
['범봉' 조망]
[인왕산 정상]에서 조망을 마치고 한양성 성곽을 따라 하산 힙니다.
['범봉']
'인왕산 호랑이'를 상징하는 "범봉"을 지나면
['선바위' 통로]
[한양성곽]을 인위적으로 뚫어 [선바위]로 바로 갈수 있도록 만들어 놨습니다.
통로를 넘어 [선바위] 방향으로 나가면...
[기도처]
[인왕산 선바위] 근처는 토속신앙의 기도처로 아직까지도 이용되고 있습니다.
곳곳에 촛불을 밝히고 기도하는 곳이 아직까지도 여러군데에 있더군요.
[군부대 조망]
지나온 [범봉] 근처 군부대를 올려 다 보면 곧 굴러 떨어 질듯한 바위가 스릴감을 주고..
수락산에 있는 [배낭바위]와 비슷한데
['선바위' 조망]
아랫쪽엔 [인왕사 선바위]가 조망되는데, 먼저 우측 [조망바위]라고 표기한 바위로 가면...
[기도처]
곳곳에 토속신앙 기도처가 촛불을 대낮에도 밝히고 있고
['모자바위' 조망]
뒤돌아 본 "모자바위 母子岩"인데,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무척 다르게 보입니다.
['남산' 조망]
전망바위로 가면 [남산]을 덤으로 조망하고
[무속신앙]
젊은 사람들인데...뭐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무속 신앙 행위를 하고 있는거라고 말하더군요. '오방기'를 나부끼며 중얼거리고...
['무악재 하늘다리' 조망]
[인왕산]과 [안산]을 연결하는 "무악재 하늘다리"가 건설되 있습니다.
언제 다리를 건너봐야 할텐데...
['서대문 독립공원' 조망]
['서대문 형무소']
일제 침탈 강압의 상징같은 "서대문 형무소"는 여기서 바라보니 아파트에 포위되 있는듯...
['모자바위' 조망]
한번 더 "모자바위 母子岩"를 뒤돌아 보고
['선바위' 조망]
바로 아래에 있는 "선바위 禪巖"를 조망합니다.
뒤에서 [선바위]를 바라보면 예전부터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나란히 서 있는 모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전설은 "태조 이성계"와 그의 부인인 "신덕왕후"의 형상이라고도 한다고...
['선바위' 가는 길]
조망바위에서 [선바위] 정면으로 가면...
['선바위' 입구]
['선바위']
"선바위 禪巖"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가 그린 "절규"라는 그림이 먼저 떠오릅니다.
불안이나 절망에 동화되는 감정을 극대화하여 표현했다는 "뭉크의 절규"
가난하고 힘든 인생을 살아 가는 절망적인 백성들의 염원이 이 바위를 "토속신앙"의 상징으로 만들고
이 바위를 향해 이루어질수 없는 희망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지역에 이런 형태의 바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무척 의아합니다.
조선 개국 당시 "유교"를 주장하는 "정도전"과 "불교"를 주장하는 "무학대사"가 사활을 걸고
[선바위]를 [한양성] 안에 둘것인지 밖에 둘것인지를 두고 무지무지 싸웠다죠.
결국 "유교의 정도전"의 승리로 돌아가 [선바위]는 [한양성] 밖으로 밀려났답니다.
[기도]
이런 귀괴한 바위를 찾아 기도하는건 자유이지만...
왜 이런 미신적 토속신앙에 기대며 구원을 바라는지 안타깝습니다.
이런 시간에 아르바이트라도 더 해서 돈을 버시지...
일은 않하고 神으로부터 富와 건강 행복을 꽁짜로 얻을려고하는건 아닌지...
['국사당' 조망]
바로 아래엔 "국사당"이 보입니다.
['국사당']
이 "국사당 國師堂"은 '남산'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시절에 쪽바리들이 이리로 옮겼다고
['인왕사']
[dkssoans]
"인왕사 仁王寺"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 하면 되겠습니다.
[내림길]
"인왕사 仁王寺"는 계곡 주변에 몇개의 건물이 산재해 있어 절간인지 주택인지 모를 정도로
어수선 했습니다.
[일주문]
절간에서 일주문만 그럴듯한데...[인왕사 일주문]을 나서면...
['하늘다리'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을 만나는데, 우측으로 가면 [무악재 하늘다리]로 갈수 있더군요.
['무악동' 골목]
[독립문초등학교]가 있는 추억의 골목길을 내려 가면....
['독립문']
"독립문"을 만나고
['독립문역']
[독립문역]에서 산행을 마침니다.
[무악동] 주변은 재개발로 맑끔하게 변했군요. 에전엔 서민들이 주로 살던 달동네였는데...
[탐방코스]
[고도표]
그동안 진행해온 [인왕산]과 [서촌]등 [경복궁]의 서쪽을 오늘로서 대부분 탐방했습니다.
오늘 걸은 거리는 약5.2km로 비교적 짧았지만, 제법 오르내림이 있는 코스였습니다.
걸은 시간은 2시간이었으며, 휴식및 조망 시간은 2시간반으로 총 4시간반이 걸렸습니다.
이것저것 둘러보고 감상하며 여행을 한것이죠. 정말 의미있었습니다.
외국으로 여행 가기 전에 먼저 우리나라의 자연경관과 역사유적을 여행하는건 어떨까요...
『서울 도보 답사』
서울 서촌 역사유적탐방
경복궁역1번출구-필운대-홍건익가옥-노천명살던곳-이상범가옥-백호정-통인시장-
송석원터-자수궁터-박노수가옥-윤동주하숙집-수성동계곡-우당기념관-선희궁-
후천 각자-백세청풍 각자-송강 정철 탄생지-청송당-겸재 정선 집터-무궁화동산-
육상궁-세종대왕 탄신지-이상의 집-백송터-보안여관-창의궁터-경복궁역3번출입구
['겸재 정선선생'이 영조27년(1751)에 그린 "수성동" - 간송미술관 소장]
-- 서울 서촌 역사유적 탐방기 2부 --
['옥인교회' 앞] 1:44
[수성동계곡]에서 다시 [옥인교회]로 내려와 우측으로 가면
['인왕산 불국사'] 1:51
"인왕산 불국사 仁王山 佛國寺"가 있는데 '경주 불국사'와는 비교 할수도 없을 정도...
"仁王"은 한자 뜻대로 하면 "어진 임금"이라는 뜻이겠지만
원래 불교 용어이죠. 「반야경」에선 "부처"를 "인왕여래"라 하고,
우리가 절간에 들어 갈때 절간입구에 부처를 수호하는 우락부락 무시무시하게 생긴 "力士" 네명이 있죠.
저는 이 力士들을 "부처 경호원"이라고 부릅니다만...ㅎ
그 중에 "금강역사"를 일반적으로 "仁王"이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GS남촌리더쉽센타'] 1:56
[불국사]에서 5분여 골목을 통과하면 다시 [필운대로]를 만나고 "GS남촌리더쉽센타"를 만납니다.
"남촌 南村"은 'GS그룹' 현 회장인 "허창수회장"의 아버지인 "고 허준구회장"의 호이죠.
['우당기념관' 앞 '서울맹학교'와 '서울농학교'] 1:59
[GS남촌리더쉽센타]를 지나면 "우당기념관"과 "서울맹학교" "서울농학교"를 만납니다.
먼저 "우당기념관"으로 들어 갑니다.
['우당기념관'] 2:00~2:02
"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관"
기념관은 예상보다 규모가 작았습니다.
친일매국노들의 저택과 비교하지 않을수 없는데,
나라를 팔아 먹은 놈들의 저택이 어떠했는지 『1부』에서 [윤덕영의 벽수산장]에서 보았죠?
그래도 이런 독립운동가들의 기념관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습니다.
안으로 들어 가면...
['우당 이회영선생']
[안내문]
"우당 이회영 友堂 李會榮 1867~1932"
저는 우리나라 최고의 독립군을 뽑으라면 선생을 뽑습니다.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기자 어마어마했던 사유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을 갔죠.
"나라가 없어졌는데 그깟 재산이 뭔 의미가 있는가 !"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사회 지도층이 먼저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모범을 보여 주신 분이죠.
6명의 형제가 모두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한 "용감한 6형제"로도 유명하죠. 또한 그 친척 40명도 함께...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역사자료]
['우당역사교실']
기념관에는 기념 할만한 유물이 보이지 않고 명성에 비해 내부 시설은 초라했습니다.
특별히 기념 할만한 것들은 볼수 없었고, '청소년역사 교실'이 기념관 내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습니다.
"한번의 죽음으로 천년을 살다."
천년 만년을 살려고 비겁한 친일을 한 반민족행위자들은 죽어서 천년을 욕 먹지만
정의를 실현하려고 목숨을 던진 애국지사들은 천년만년 칭송받지요.
요즘까지도 독립운동가들을 폄홰하려는 반민족행위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회영선생"은 "백사 이항복선생"의 후손으로 "경주 이씨" 가문이랍니다.
['서울맹학교']
[우당기념관]을 나와 [서울맹학교]를 지나 옆에 붙어 잇는 [서울농학교]로 갑니다.
['서울농학교'] 2:04
[서울농학교] 정문에 도착합니다.
평일 수업시간이어서 경비에게 출입허가를 얻어 "선희궁"을 답사하러 들어 갑니다.
정문에 들어서니 먼저 [백악산]이 정면에 멋지게 조망됩니다.
"서울 농학교" 자리는 원래 "선희궁"이라는 사당이 있던 곳이랍니다.
그 터가 일제시대에 "제생원(濟生院) 맹아부"가 되면서 [선희궁 터]에는
빈 사당 건물만 남겨 두고 "서울농학교"로 변모되었더군요.
직진해서 첫번째 교실 건물 뒤에서 좌회전 하면...
['선희궁' 조망]
['선희궁 正堂'] 2:07
[안내문]
"선희궁 宣禧宮"은 한마디로 "사도세자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사당"입니다.
그러니까 "영빈 이씨"는 [정조대왕]의 친할머니가 되는데....
"영빈 이씨"는 [영조]의 후궁으로 아들이 없었던 [영조]에게 첫 아들을 낳아 드렸는데 그가 [사도세자]이죠
그런데 격렬한 당파싸움 속에서 남편을 택 할것인가, 아니면 아들을 택 할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아들을 버리고 남편 [영조]의 편에 붙어 자식을 뒤주에 갖혀 죽게하는데 결정적 역활을 한 엄마.
자식보다 권력을 택한 "매정한 모정"의 대명사가 되었죠.
[정조]에게는 자기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 몬 장본인이 바로 자기 친할머니가 되는 셈이죠.
그래서 [정조]는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거의 매년 봄에 이곳을 찾아
"선희궁" 뒤에 있었다는 "세심대 洗心臺"에 올라 여러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답니다.
['선희둥' 옆 계단]
['세심정' 정자 쉼터]
[선희궁 정당] 좌측 옆에 있는 계단을 잠시 올라 가면
[세심정]이라는 사각 정자가 하나 있는데 "서울농학교 학생"들을 위해 지은 것이겠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을수 없는 [정조대왕]이 거의 매년 찾았다는 "洗心臺"를 연상케 합니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 가면...
['후천' 앞 정자]
['후천 后泉' 각자] 2:14
두번째 정자를 만나고 정자 뒤에 "후천 后泉"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정조실록]에는 "洗心臺"가 [선희궁] 북쪽 동산 뒤 100여보 가량 되는 곳에 있다고 기록되 있는데
그곳은 곧 이 "후천 后泉"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샘터 위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후천 后泉"의 뜻이 임금이나 왕비의 샘터라는 뜻이니
[정조]는 이 샘터 위 "洗心臺"에 올라 이 샘물을 마시며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과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선희궁]의 할머니에 대한 생각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우당기념관' 앞] 2:23
[선희궁]과 [세심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후천]을 둘러 보고 [서울농학교] 교문을 나서서
다시 [우당기념관]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이 지역이 [신교동]인데 [청운동]으로 넘어가 [정주영회장집]과 [백세청풍] 각자를 답사하기 위함입니다.
직진성 우측길로 올라 가면....
['신교동'에서 '청운동'으로 넘어 가는 골목]
자동차가 다니는 차도는 사라지고 계단 골목길이 나오더군요.
[신교동]에서 [청운동]으로 넘어 가는 길이 있는지 의심하며 10여분 계단 골목을 진행하면...
['신교동'과 '청운동'의 경계] 2:34
고갯마루에 도착하는데 [인왕산등산로]도 있는 [신교동]과 [청운동]의 경계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선희궁] 뒤에 있는 [후천]이라는 곳 근처라는 것도 알수 있었습니다.
['故 정주영회장 자택' 조망]
['故 정주영회장 자택' 정문] 2:39
고갯마루를 지나면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살던 집이 조금 보입니다.
계곡으로 내려가면 "ㄱ"자로 골목이 꺽이는 곳에 [정회장 살던 집 정문]이 있는데...
얼마 전 신문에 [정주영회장]이 장남인 [정몽구]에게 상속 한것인데
기억하시나요? 당시 '왕자의 난'으로 상속 받은 거....[정몽구회장]이
최근에 자신의 아들인 [정의선 부회장]에게 다시 상속했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그러니까 이 집의 상속은 [現代家]의 적통을 잇는 상징이라고 할수 있다는군요.
구한말까지만 해도 이곳은 "청풍계 淸風溪"라는 엄청 아름다운 계곡이었답니다.
"겸재 정선선생"이 영조6년(1730)에 이 지역을 그린 "청풍계"라는 그림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영조5년' (1730년)에 "겸재 정선선생'이 이 지역을 그린 "청풍계"라는 그림입니다.]
[정주영회장]이 이런 내력을 알고 이곳에 거처를 마련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잠시후 보게 될 [백세청풍 百世淸風]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이 계곡의 최상단에 자택을 지은 것은
분명 특별한 사연이 있었을거라고 생각됩니다.
[정회장 집]의 정문에서 뒤돌아 서면....
['청운동 골목]
'청운동 골목'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이 골목은 예전에 위에서 언급한 "청풍계 淸風溪"라는 경치 좋고 물맑고 공기 좋은 계곡이었답니다.
이곳 "청풍계"와 '자하문' 주변의 "백운동"을 합쳐 "청운동"이라는 지명이 탄생되었다고 하니
그 옛날 "인왕산 자락"의 아름다운 경관이 어림 짐작됩니다.
이 골목을 50m 정도 조금 내려 가면....
['百世淸風' 각자] 2:42
[청운현대아파트]가 있는데 아파트 바로 전 좌측 어느 집 담장 안에
위에서 언급한 "청풍계"라는 것을 알려 주는 "百世淸風"이라는 刻字가 있습니다.
이 刻字는 '인조' 때에 우의정까지 지낸 "김상용"선생이 이 근처에 살며 이 "청풍계"라는 계곡의
아름다움믈 노래하며 새긴 글이라 합니다. "오랜 세월 세대를 두고 맑은 바람이 부는 곳"이란 뜻이겠죠?
"김상용"선생은 [병자호란]시 주전파로 유명한 "김상헌"의 형이죠.
치욕의 [병자호란] 패전 후 "김상헌"은 포로로 잡혀갔고, 형인 "김상용"은 화약으로 자폭하며 자살했죠.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고 자살했습니다.
['청운현대아파트' 앞]
[청운현대아파트]를 지나 [자하문로]로 내려가면....
['청운초등학교' 앞]
['송강 정철선생' 탄신지] 2:54
"청운초등학교"를 만나며,
학교 교문 앞에는 "송강 정철 탄신지" 표지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國文學史에 우뚝 솟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한글로 쓴 詩歌 중에선 가장 아름답다는 "관동별곡"과 "사미인곡"등을 남겼죠.
하지만 이런 글의 목적이 임금에게 아부하는 것이어서 무척 아쉽습니다.
아부의 정도가 어느 정도 였느냐하면 "손금이 없는 놈"이라고까지 손바닥을 비벼댓다고 비아냥 할 정도
였으니 알만 하죠. 그렇게 손바닥을 비벼 우의정까지 올라 가 "정여립의 난"의 수사 책임자가 되고
"정여립의 난"을 상당부분 조작하여 정치적 반대파인 "동인"들을 몰살 시킬 정도로 약1,000여명을 죽이거나
귀양보낸 "기축옥사"의 장본인이 되었던거죠.
그러한 그도 반대파들의 집요한 공세에 이기지 못하고 파직과 귀양, 복직과 파직을 거듭하다가
'임진왜란'을 피해 강화도에 숨어 있다가 그곳에서 권력무상을 느끼며 병으로 죽었습니다.
말빨 글빨에서는 그를 이길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말과 글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정철"이지만
끊임없는 권력욕이 그를 파멸의 길로 인도했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창의문' 방향]
[청운초등학교] 정문에서 [자하문로]를 건너 다시 북쪽 [경기상고]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청송당]이라는 유적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경기상고' 교문] 3:02
"경기상고" 정문에는 이정표가 "청송당"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수위실에 들려 출입허가를 받고 [경기상고] 본관 앞으로 올라 갑니다.
['북악산'과 '청송당']
[경기상고] 정문을 들어 서서 바라보는 [북악산(백악산)]과 [청송당]의 위치입니다.
콘크리트 건물이 없었던 옛날엔 이 지역이 "백운동"이라는 아름다운 계곡이었다는 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정주영회장 집] 앞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청풍계"와 "백운동"을 합쳐 "청운동"이 되었다는 것이
실감 납니다.
[본관 앞 소나무]
본관 앞으로 올라 가니 본관은 보수공사 중에 있고
본관 앞에는 老松巨樹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이 老巨松들은 이 학교 안에 "청송당"이 있었다는 것을 더욱 실감나게 해 주는데
"청송당"이라 하니 푸른 소나무를 의미하는 "靑松堂"이겟거니... 생각했는데,
그런 뜻이 아니라 "소나무 소리를 듣는다"는 뜻의 "聽松堂"이었습니다.
[청송당]의 흔적을 찾아 가야 하는데 어디에 있는지 몰라 물어 물어 갔습니다.
이 소나무 길을 직진해 가면...
['청운중학교']
담 하나 사이에 두고 "청운중학교"가 있습니다.
"청운중학교"는 옛날에 "경기상업중학교"였는데 이름을 바꿨답니다.
제 친구들 중에 "청운중학교" 출신이 몇 있는데...ㅎ
[교실 뒤]
[계단]
길을 물어 교실 뒤 계단으로 올라 가면....
['청송당' 터] 3:11
['聽松堂 遺址']
"청송당 聽松堂"
안내표지석에 "조광조"의 제자로 대학자 '청송 성수침'이 두문불출하며 공부했던 독서당터"라고 합니다.
"청송 성수침 聽松 成守琛" 선생이 누구인지 먼저 알아 보겠습니다.
"율곡 이이"와 절친한 친구이자 대학자로 알려진 "우계 성혼 牛溪 成渾"선생의 아버지이죠.
[조선왕조]가 개국하고 일정시간이 흐르자 정치집단들이 나타나 당파 싸움을 벌이죠.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와 신진세력 [사림파]가 대립을 시작했습니다만, [4대사화]를 통해 [사림파]가
처참하게 당하며 멸망의 길을 걷다가, [훈구파]에 위협을 느낀 [선조]가 [사림파]를 등용하기 시작했죠.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등이 [사림파]의 대를 이어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고,
개혁세력의 거장인 "정암 조광조"와 그의 제자 "청송 성수침"선생으로 이어진 [사림파]의 후예이니
이들을 [사림파] 중에서도 이들이 "西村"에 산다고 "서인 西人"이라 하게 되었는데,
그 "西人들의 聖地"가 바로 "성혼선생"의 아버지가 세운 "청송당 聽松堂"이 되는 것이니
그 의미는 크다 할수 있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근처에서 태어나 살았던 "겸재 정선 선생"이 진경산수화로 "청송당"을 남겼습니다.
['영조31년(1755)'에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청송당"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당시 "청송당 聽松堂"의 모양과 주변의 경치를 알수 있습니다.
"겸재선생"에게 허리 굽혀 절을 올리지 않을수 없습니다.
선생 덕에 [사림파] 중에서도 [서인]들의 聖地라 할수 있는 "청송당"과 그 주변을 느끼게 해 주셨으니
['남산' 조망]
[청송당] 누각이 있었다는 곳에서 다시 [경기상고] 본관 앞으로 나와 '서울시내'를 조망합니다.
빌딩들에 가려 남산도 잘 보이지 않고, 남산 서울타워만 보이는군요.
['청운초등학교' 앞] 3:21
[경기상고] 안에 있는 [청송당터]를 둘러 보고 다시 [청운초등학교] 앞으로 돌아와
좌측 [경복고등학교]로 발길을 옮깁니다.
[겸재 정선선생 집터]를 찾아 가기 위해서 입니다.
['궁정동' 방향]
[궁정동] 방향으로 좌회전 해서 다시 [경복고] 정문 방향으로 좌회전 하면...
['경복고등학교' 교문] 3:32~3:43
['효자유지' 위치]
"경복고등학교" 정문을 오랜만에 만나는데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는듯 합니다.
수위에게 출입허가를 받아 안으로 들어 가면 좌측은 운동장이고 우측 시계탑이 보이는 곳으로 올라 가는데
먼저 시계탑이 있는 곳에 "효자유지"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효자유지']
"효자유지 孝子遺址"
조선 선조 때 학자 "조원 趙瑗"의 아들 "希正・希哲 형제가 효자로 이름 나
나라에서 이들에게 내린 정문이 효자동 100번지에 있어 이 마을을 '효곡'이라고 한 데서
"효자동"이라는 지명이 탄생되었답니다.
['경복고 본관' 앞]
['겸재 정선 선생 집터']
"겸재 정선 謙齋 鄭敾"
[경복고등학교] 본관 앞에는 "겸재 정선 謙齋 鄭敾"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집터가 있습니다.
중국 그림을 모방만 하던 "실경산수화" 시대를 뛰어 넘어 새로운 화법인 "진경산수화 眞景山水畵"를
탄생시키며 발전시킨 그를 저는 "한국화의 시조"라고도 표현 하고 싶습니다.
일본놈들까지도 "신조선 산수화 新朝鮮山水畵"라고 극찬을 했으니까요.
"금강산을 사랑한 화가- 謙齋 鄭敾"
그가 그린 국보로 지정된 "금강산전도"라던가 "단발령망금강산"등 수많은 금강산 그림이 있는데
당시 사회의 경제발전이 이뤄지며 "금강산관광" 붐이 일었다고 하네요.
중국놈들은 태어나 '금강산관광' 가는게 소원이라고 할 정도 였다니 당시 '금강산관광 열풍'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엄청나게 불어 닦쳤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습니다.
잘 팔리는 그림을 그려야 돈이 되니 그런저런 연유로 "겸재선생"은 '금강산'을 자주 찾아
'금강산'을 소재로 하는 많은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는군요.
그림 주문이 너무 많이 몰려와 제자들까지 동원해 조수로 활용 했을 정도...
그래서 "겸재선생"의 그림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고... 그림이 잘 팔리니 짝퉁들도 무지 나오고...
여기서 태어나 52세까지 사시고 조금전에 찾아봤던 "자수궁 터" 근처로 이사를 하고 84세까지 장수하셨죠.
선생은 후진도 많이 양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단원 김홍도", "심사정" "김희겸"등이 그의 제자이죠.
선생은 정식 과거시험을 통해서 관직에 나가지 않고 추천으로 관직에 나가 현감 등을 하고
최종 "종2품의 동지중추부사"까지 올랐으니, 화가로서만 아니라 관직도 고위직까지 올랐습니다.
['궁정교회' 앞] 3:44
[경복고등학교]를 나와 [청와대] 방향으로 가면 먼저 [궁정동]을 만나는데 [궁정교회]가 먼저 보입니다.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엄청 많더군요. [청와대]를 구경 온 것으로 보이는데 "시진핑"이 한국관광 규제를
해제했나? 빨리 완전 해제 되어야 하고, 일본 관광문제도 조속히 해결되길 바람니다.
서로 도우며 잘 먹고 잘 사는게 서로에게도 좋지요.
['무궁화동산'] 3:45
"무궁화동산"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서 5대,6대 7대,8대,9대까지 장기집권한 "박정희 대통령"
10.26...중정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살해 당한 곳이 이곳 "궁정동 안가"였죠.
[김영삼대통령]이 그 무시무시햇던 안가를 없애고 "무궁화동산"으로 조성했지요.
['김상헌 선생' 詩碑]
[병자호란]시 주전파였던 "예조판서 김상헌"이 포로로 잡혀가며 쓴 유명한 詩가
詩碑로 세워져 있더군요.
1636년12월 겨울
남한산성에는 '인조'라는 쪼다리 임금이 있었고,
체찰사로서 난국의 해결을 시간에 맡기는 양다리의 명수 영의정 '김류'가 있었고,
의로움과 충성심으로 절대 굴복은 없다고~
오로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 예판 '김상헌'이 있었고,
매국의 오명을 뒤집어 쓰더라도 임금이 살길은 화친이라고
말이 화친이지 실제는 항복이라는 말을 비틀어 화친이라고 말 하는
이판 '최명길'이 있었습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조금 전에 들렸던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이 살던 "청풍계"의 "百世淸風"과
[병자호란]의 치욕을 안고 폭약으로 자살한 "김상용"과 그의 동생 "김상헌"이 모두 이 "서촌"에 살았답니다.
['청와대 사랑채'] 3:50
[무궁화동산]을 직진해 나가면 [청와대]앞에는 "청와대 사랑채"가 있는데 예전에 방문한바 있어 생략하고
뒤돌아 보면...
['육상궁']
"육상궁 毓祥宮"이 [청와대]에 붙어 있습니다.
[육상궁]은 [영조]의 친어머니인 무술이 출신 "숙빈 최씨"를 모신 사당이죠.
비천한 무술이 출신의 어머니...그 어머니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영조]가 무수히 노력한 흔적들입니다.
['민주노총' 농성]
[청와대 사랑채]에서 [효자동]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니 [민주노총 농성자]들이 길을 점령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청와대]를 향해 아우성 치고 있었는데...
['자하문로'] 3:54
이제 [자하문로]로 나가 [광화문]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조금 내려 가면...
['세종대왕 탄신지' 조망]
['세종대왕 탄신지'] 4:05
우측 건너편에 [독일안경마트] 안경점이 보입니다.
그 안경점 앞에 "세종대왕 탄시지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이 동네를 "서촌"이라고 하는 것도 싫고, "웃대"라고 하는 것도 싫고
우리 민족의 유일무이한 聖君인 "세종대왕"이 탄신하신 곳이니 "세종마을"로 불러 달라고 해서
지금은 공식적으로 "서촌"을 "세종마을"로 표기하고 있답니다.
"세종대왕"에 대해선 언급이 필요 없고...
['이상의 집' 가는 길]
[세종대왕 탄신지 표지석]에서 내려 가다가 첫번째 삼거리 [우리은행 효자동지점]이 있는 곳에서
우측 골목으로 들어 가면...
['이상의 집'] 4:12~4:20
['이상의 집']
[안내문]
"이상의 집"이 있습니다.
20여년간 이 집에서 살았다는데, 그가 27세에 죽었으니 이 집에서 살다 죽었다고 해도 될 정도이죠.
당시 유명 작가들이 많이 일찍 죽었는데, 대표적 인물이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 "날개"의 "이상",
"봄 봄"의 "김유정"등이었습니다. 너무 아쉽습니다. "김유정"은 "윤동주"와 같이 29세에 죽었죠.
이 세사람은 친하기도 했는데, '이상'과는 함께 죽을 병(폐병)을 앓아 같이 자살 하자고도 했죠
이 세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은 모두 기생을 사랑하기도 했고요... ㅎ
'이효석'은 '왕수복'을....
'이상'은 '금홍이'를....
'김유정'은 '박녹주'를....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봉평효석문화제-이효석" 여기 클릭"'ITX 청춘열차'를 타고 가는 '김유정문학촌'과 '금병산' 여기 클릭
[내부]
"김해경"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서 남아 있는 유물이 많지 않겠죠.
좁은 공간에 안내원만 한분이 방문객을 맞고 있었는데
커피 한잔 주더군요. 고맙게 잘 마시고
['이상 흉상']
요즘으로 하자면 '서울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건축기사가 되어 조선총독부 건축기사로 근무하다가
폐결핵을 앓아 요양하러 '황해도 배천온천'에 갔다가 운명의 여인 "금홍이"라는 기생을 만나고....
서울로 '금홍이'와 함께 와 '금홍이'를 마담을 앉히고 "제비다방"을 열었죠....망하고...
또 "69"라고 하는 당시로는 금기어를 상호로 하는 "69 다방"을 오픈했으나...또 망하고...
[철문]
[다락방 올라 가는 계단]
[날개]에 나타나는 주인공 '이상'의 다락방으로 올라 가는 통로를 상징적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안채 조망]
아내 '금홍이'가 영업활동(매춘)을 마치고 돌아 오는 모습을 어두운 다락방에서 숨어 살펴 보았을
"이상"의 그 느낌을 형상화 한듯한 다락방 조망처를 만들어 놨습니다.
너무 잘 알려진 "이상"에 대한 이야기여서 생략하고...
['경복궁역 버스정류장']
다시 [자하문로]로 나가면, 건너편에 [경복궁역버스정류장]이 보입니다.
저 버스정류장 뒷골목에 [통의동 백송터]와 [추사 김정희선생 살던 집]이 있습니다.
☆ 앞에 보이는 지역, 즉 [경복궁] 옆 지역인 "통의동"이 옛날엔 "창의궁"이라는 궁이 있었는데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궁이고, [영조]가 왕위에 등극 한 후에는 [추사 김정희]의
할아버지가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결혼해 살게되어 자연히 [김정희]도 이곳에서 탄생했답니다.
유서 깊은 "창의궁"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동양척식회사]가 들어서서 조선의 자원을 수탈하는
본부가 되었답니다. [경복궁]에는 [조선총독부]가 건립되고 여기는 [동양척식회사]가 점령하고
['스타벅스' 옆 골목] 4:24
[경복궁역버스정류장] 옆에 [스타벅스]가 있고, [스타벅스] 옆 골목으로 조금 들어 가면...
['코피티암' 옆 골목] 4:25
좌측 [코피티암]이라는 커피점 옆으로 골목이 이어집니다.
이 골목을 진행하면...
['통의동 백송터'] 4:26~4:28
[안내문]
"통의동 백송터"를 만납니다.
백송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하면 되는데, 중요한 것은 이곳이 [추사 김정희선생]이 살던 집터라는건데
앞에서도 언급했드시 [추사 김정희]가 태어나 자란 집은 [창의궁]이었는데 이곳 [통인동]의 상당 지역을
차지 햇으니 이곳도 [김정희]의 집이 있었던 주변이라고 할수도 있겠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 살던 곳]
백송 앞 집 벽에 "완당 김정희 선생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호를 "완당"이라고도 하고 "추사"라고도 한 [김정희선생]인데,
선생의 할아버지 "김한신"의 고향은 '충남 예산'이지요.
그러니까 할아버지 "김한신"이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결혼해서 살게 한 집이
[영조] 자신이 살던 {창의궁}을 물려 주어 살았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드시
[추사 김정희선생]이 이곳에 살때 북한산을 무척 자주 올랐는데, 이때에 "북한산진흥왕순수비"를 찾아냈죠.
그리고 연구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경복궁 영추문'] 4:30
[백송터]에서 [경복궁] 방향으로 골목을 나가면 "경복궁 영추문"을 만나고
[청와대]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가면...
['보안여관'] 4:32
"보안여관"을 만납니다. 단순한 오래된 여관인데 왜 찾았냐구요? ㅎ
1930년에 지어진 여관인데 당시 많은 문학인들이 이 여관에 툭숙하며 창작활동을 했다네요.
대표적 작가들 중에 '서정주' '김동리'등이 장기 투숙하며 『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했다네요.
2006년 문을 닫고 철거 위기에 놓였던 건물을 일맥문화재단과 메타로그에서 인수해서
옛 흔적을 그대로 살려 2007년부터 전시장으로 운영 중이랍다.
제가 찾았을 때엔 내부 리모델링을 하고 있어 들어 갈수가 없었습니다.
['경복궁 영추문']
[보안여관]에서 다시 [영추문]으로 내려 가면....
['창의궁 터'] 4:35
"창의궁 터 彰義宮址"라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연잉군' 시절에 살던 궁이었답니다. 이런 집을 "잠저"라고 하죠.
[영조]의 어머니인 무술이 출신 "숙빈 최씨"가 여기서 49세를 일기로 죽었답니다.
그리고 앞에서 [백송터]에서도 언급했드시, [영조]가 왕위에 오르고 난후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정빈 이씨"에게서 태어난 "화순옹주"를 [영조]는 사위로 [김정희]의 할아버지인 [김한신]을 맞아드리고
결혼시켜 이 [창의궁]에서 살게 했죠. 그런데 [김한신]이 일찍 죽자 [화순옹주]도 따라 자살해 버리지요.
이런 부인을 "열녀"라고 하는데 조선왕조에서 왕족 출신 "열녀"는 오직 [화순옹주] 뿐이랍니다.
하지만 [영조]에게는 무지무지 불효한 딸이 되어 [화순옹주]의 장례식장에도 가지 않았다는거 아닙니까.
"열녀"가 된 [화순옹주]와 그녀의 후손인 [김정희]가 [창의궁]에서 살게 된 연유가 되겠습니다.
['경복궁역번 출입구'] 4:40
"西村"의 골목 골목을 누비며 조선왕조의 역사 흔적과 근현대의 유적지를 찾아 보았습니다.
서울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으면서도 그것도 바로 [운현궁] 앞 [ 익선동]에서 살며 학교를 다녔으면서도
"西村"의 이곳저곳을 이제서야 탐방한것을 엄청 후회하며 앞으로 몇차례 더 탐방해야 하겠습니다.
정말 의미있는 하루였습니다.
[탐방코스]
오늘 걸은 거리는 13.6km였으며 5시간 10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모든 분들에게 탐방을 추천합니다.
『서울 도보 답사』
서울 서촌 역사유적탐방
경복궁역1번출구-필운대-홍건익가옥-노천명살던곳-이상범가옥-백호정-통인시장-
송석원터-자수궁터-박노수가옥-윤동주하숙집-수성동계곡-우당기념관-선희궁-
후천 각자-백세청풍 각자-송강 정철 탄생지-청송당-겸재 정선 집터-무궁화동산-
육상궁-세종대왕 탄신지-이상의 집-백송터-보안여관-창의궁터-경복궁역3번출입구
['필운대' - '백사 이항복 선생' 집터]
[탐방코스]
"경복궁"을 기준으로 "경복궁"의 西쪽, 즉 "경복궁"에서 "인왕산" 사이에 있는 마을을 "서촌 西村"이라 하고
"경복궁"에서 "창덕궁" 사이의 동쪽 마을을 "북촌 北村"이라 한답니다.
조선조 당파싸움이 치열했던 시절 각 "당파 黨派"들이 당파별로 뭉쳐 살았는데,
"西人"이라는 당파가 많이 모여 살던 곳이 "서촌 西村"이어서 그들을 "西人"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청계천 광통교"를 기준으로 "청계천" 북쪽, "경복궁" 서쪽 마을을 "웃대"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청계천 광통교"의 남쪽을 "아랫대"라고 불렀다고 하는군요.
그러니까 "서촌 西村"은 "웃대"와 같은 지명이 된다고 합니다.
오늘은 "서촌 西村 - 웃대"의 역사유적과 이곳저곳을 탐방하려고 합니다.
['3호선 경복궁역 1번출구'] 11:33
2019년 9월 3일 (화) 흐림
[3호선 경복궁역 1번출구]에서 답사를 시작합니다.
구름이 드리운 날씨로 따가운 햇살은 피할수 있었습니다.
['사직공원' 방향]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를 나가 [사직공원]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면
"백사 이항복 집터-필운대"까지 630m라고 이정표가 알려 줍니다.
먼저 [필운대]를 찾아 갑니다.
['사직공원' 앞 삼거리]
"사직공원" 앞 삼거리에서 "배화여대" 방향인 우측길로 진행하면
['사직파출소']
['매동초' 앞 삼거리] 11:40
[사직파출소]를 지나 다시 삼거리를 만나는데, [매동초등학교] 방향으로 직진합니다.
★ '황학정'과 '등과정'을 다녀 오려면 여기서 좌측길로 가서 구경하고 여기로 돌아 와야합니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인왕산 자락길-황학정 등과정" 여기 클릭
['매동초등학교']
6~70년대 서울 5대 국민학교 중에 한곳이었던 "매동초등학교" 정문을 지나면
['배화여중고' 정문] :42
"배화여중고" 정문을 만나고, 학교 안으로 직진해 들어 갑니다.
[북악산]이 조망되며 [서촌]의 위치가 가늠되고 [필운대]의 위치도 짐작 할수 있습니다.
['배화여고 생활관']
[배화학당]은 미국인 선교사 "캠벨"이 설립한 학교로서 선교 목적과 여성 계몽을 위해 설립되었다는군요.
"배화여고 생활관"은 [등록문화재 제93호]로서 1916년에 건립되어 선교사들의 주택으로 이용되다가
배화여고의 생활관, 동창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배화여고' 본관 앞]
[생활관]을 지나면 "배화여고 본관-캠벨기념관"을 만납니다.
"배화여고"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대표 여고 중에 하나이죠.
특히 "육영수 여사"가 이 학교를 졸업해서 더욱 유명하답니다.
"육여사"는 [옥천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배화여고]를 나와 [옥천여중]에서 교사 생활을 했죠.
6.25가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유부남이었던 [육군 중령 박정희]를 만나 사랑을 꽃피우다가
[육여사] 집안에서 강력한 결혼반대에 부딪치자 사랑을 위해 [육여사]는[박중령]의 근무지인 대구로
가출까지 해서 결국 결혼하고 후에 영부인까지 되었지요.
당시 박중령은 부인이었던 [김호남여사]와 이혼하고 결혼한것으로 알려져있지요
[옥천 육영수생가]에 가보니 결혼식은 [대구]의 어느 성당에서 올렸더군요.
미션스쿨인 [배화여고]를 나왔으니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는건 당연한듯 보이지만
결혼 후부터 "육여사"는 열열한 불교 신자로 [북한산 도선사]에서 "대덕화 大德花"라는 佛名까지 받았죠.
그런데 큰딸인 "박근혜 전대통령"은 성당에 다녔고...
이나저나 "필운대 弼雲臺"는 정면에 보이는 교실 건물 좌측 뒤로 가야했습니다.
[교실건물 뒤] 11 :45~11:50
교실 건물 좌측 뒤로 돌아 가면 [필운대] 가 있는데...초라합니다.
['필운대' 각자]
['필운대']
"필운대 弼雲臺"- "백사 이항복선생 집터"
선생은 [오성과 한음]에서 "오성"으로 더 알려져 있지만, 호는 "백사 白沙", "필운 弼雲"이지요.
[임진왜란] 전란 중에 [선조]가 어명을 거역한 죄로 [이순신장군]을 사형을 시키려 하자
"한명의 병사도 아쉬운 전란 중에 삼도수군통제사를 처형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라며
[이순신장군]을 살려 전쟁에서 이기게 한 장본인이 "백사 이항복 선생"이죠. "유성룡 선생"과 함께...
'병조판서'를 다섯번이나 연임하며, 외교전에서도 외교관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명나라'의
지원을 이끌어 내고, 세자 [광해군]과 분임조를 이뤄 전란을 수습한 [임진왜란]의 일등공신 중에 한분이죠.
당시 지금의 국방장관 격인 도원수 "권률장군"의 사위로도 잘 알려져 있습죠.
하지만 [인목대비] 폐위와 그의 아들 [영창대군]의 죽임에 목숨을 걸고 반대하다가
강경 대북파의 보복을 받고 '북청'으로 유배를 가서 몇달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강원도'와 '함경도'의 경계가 되는 "철령"을 넘어 유배를 가는 도중에 읊은 詩...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리.
'왕비'를 폐하고 '세자'를 죽이는 나라의 인륜 도덕이 무너졌다고 한탄하며 나라를 걱정하는
이 詩 속에 영의정까지 지낸 "백사 이항복 선생"의 정치철학이 담겨있다고 생각됩니다.
바른 말하는 인재들은 대부분 유배를 갔으니 우리의 역사를 한탄하며 되돌아 봅니다.
['이유원' '박효관'의 글]
"弼雲臺"가 새겨진 바위 옆 바위에는 "이항복 선생"의 후손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감회를 적은 글이 있습니다.
좌측 글이 "이유원"이 1873년에 적은 글인데
"我祖舊居後裔尋, 蒼松石壁白雲深. 遺風不盡百年久, 父老衣冠古亦今
癸酉月城李裕元題 白沙先生弼雲臺"이고
우측 글은 "동추 박효관" 외 9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옛집 복원과 관련된 '銘文'이랍니다.
이나저나 이 곳은 "인왕산 자락"에서도 뛰어난 경관이 조망되는 아름다운 곳이어서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림까지 그린 곳입니다. "弼雲臺"라는 그 진경산수화를 감상해 볼까요?
['겸재 정선 선생'이 영조 27년(1751)에 그린 "필운대" - 간송미술관 소장]
[弼雲臺]라는 각자를 새긴 바위가 보이는데 현재의 바위와 비교해 보면 짐작이 가고
바위 앞에 "이항복선생"의 자택이 고저녁하게 있습니다.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자연 속의 자택으로 경치가 뛰어나죠?
또한 [경복궁]에서 가까워 출퇴근하기도 좋았겠고...
하지만 [弼雲臺]는 현재 학교 건물에 포위 당해 후미진 곳에 방치되고 있어
아름다웠던 그 옛날은 그저 옛날로 멀어져 갔습니다만, "겸재 선생"의 그림으로라도
그 옛날을 회상 할수 있어 불행 중 다행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배화여고' 정문] 11:54
[배화여고]의 건물에 포위되어 후미진 음지에 쓸쓸히 남아 있는
"필운대 弼雲臺"- "백사 이항복선생 집터"를 돌아 보고
다소 씁씁한 마음으로 학교 정문을 나와 좌측 골목으로 잠시 내려 가면...
['홍건익 가옥' 가는 길]
['홍건익 가옥' 입구] 11:57~12:02
[wednesday]라는 커피점 옆 골목에 "홍건익 가옥"이 보입니다.
['홍건익 가옥' 대문]
[안내문]
"홍건익 가옥"은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한옥 중에서
일각문, 우물, 빙고까지 갖추고 있는 집은 이 집이 유일하답니다.
그래서 [민속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지역 주민들의 문화생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안채]
200평이 넘는 매우 큰 한옥으로 당시 "역관 譯官"의 지위와 경제적 풍요함을 엿볼수 있습니다.
['일각문'과 우물]
['별채 와 후원]
"통역관"이라는 전문직이 새로운 지위로 격상하며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는 걸 알수 있습니다.
즉, 전문직 등이 중산층과 상류층으로 옮겨 가는 새로운 시대였다는 걸 알수 있습니다.
['홍건익 가옥'에서 '필운대로' 가는 길] 12:02
[홍건익 가옥]을 나와 [필운대로]로 나가 좌회전 하면...
['환경연합' 앞 삼거리] 12:04
"환경연합"이 있는 삼거리에 도착합니다.
여기선 "시인 노천명"이 살던 집을 찾아 가야하는데 앞에 표기 한 곳이지만 찾기가 만만치 않더군요.
['환경연합']
"환경연합"은 예상보다 초라한 작은 건물에 있군요.
1층에는 우유대리점 같은 가게가 입주해 있는데...
다른 곳에 또 업무시설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규모의 사무실로
우리나라 환경을 지키는 파숫꾼 역활을 할수 있을지 괜히 걱정이 되는군요.
['노천명 가옥' 입구]
['노천명 가옥'] 12:07
[노천명이 살던 집]은 [환경연합 삼거리]에서 직진하여 첫번째 우측 골목으로 들어 갑니다.
집을 헐고 새로 짓는 공사가 한창이라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확한 주소는 '종로구 필운대로 26-21' 입니다.
"노천명 시인"에 대해선 제가 2010년에 쓴 다음 글을 참고 하면 되겠습니다.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여기 클릭
['청운 카센타'] 12:10~12:25
['이상범 가옥' 입구]
['천경자 화백' 살던 집]
[노천명 시인의 집] 골목을 다시 돌아 나와 북쪽으로 조금 가면 좌측에 [청운자동차공업사]란는 카센타가
있는데, 카센타 바로 전 좌측 골목으로 들어 갑니다.
이 비좁은 골목에 한국 화단의 거목 화백들이 살았답니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 탈바꿈한 좌측 집이 [천경자화백]이 7여년 살던 집이라 하고
골목 끝집이 [이상백화백]이 살던 집이랍니다.
[천경자 화백]이 이곳에 살때 [이상범 화백]과 무척 가깝게 지냈다고 하는군요.
[천경자 화백]은 유명한 [미인도]의 진위 여부를 놓고 법정 공방까지 벌이다가
미국으로 이민 갔고 거기서 2015년에 생을 마감 했답니다.
[천경자 화백]은 문학에도 소질이 있어 18권의 수필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두분 다 한국화를 새로운 각도에서 발전시킨 우리나라 한국화의 거목들이시죠.
['이상범 가옥' 대문]
[안내문]
"청전 이상범" 화백은 앞에서도 언급 했드시 우리나라 한국화의 거목이시죠.
이곳에서 43년간 살며 이곳을 "靑田畵室"이라 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잠시 후 들리게 될 "박노수 화백"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동아일보'에 재직 할 때엔 여러 연재 소설들의 모든 삽화를 그리셨죠. 그런 와중에 특히
[손기정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사진에 일장기를 태극기 모양으로 바꿔 그려 넣어
즉 [손기정 일장기 말살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했는데
그후에는 일제에 협조해 친일행위를 한게 오점으로 남아 무척 아쉽습니다.
[안채]
[대청마루와 안방]
안채는 뒤에 있는 [배화여중] 담장을 맞대고 있는데
예상보다 매우 큰 규모의 전통 한옥이었습니다.
[사랑방]
선생의 거실과 사랑방, 그리고 화실은 칸칸 나란히 길게 뻗어 있는데 큰 규모였습니다.
[화실]
끝에 있는 방이 작품활동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었답니다.
선생은 산수화 뿐만 아니라 [이순신장군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지요.
85세까지 사셨으니 당시로는 매우 장수하셨고...
[마당 장독대]
마당 장독대 뒤의 벽화는 [천경자 화백]이 그려준 것으로 벽화를 만들었다는데
6.25 때에 폭파 당해 온전히 보존되지 못했다나 뭐래나...
['필운대로' 사거리] 12:27
[이상범 가옥]을 나와 [필운대로]로 다시 나가면 북쪽으로 첫번째 사거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방향을 바꿔 서쪽으로 진행하면...
['배화여대' 후문 방향] 12:30
[배화여대 후문] 방향 골목을 따라 가다가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바꿔서
['누상동' 빌라촌]
옛 지도엔 이 근처에 [樓閣]이 있었는데 그 '누각'을 기준으로 윗쪽이 [누상동]이 되고
아랫쪽이 [누하동]이 되었답니다.
[누상동] 빌라촌 골목을 5분여 진행하면...
['GS25 편의점' 앞] 12:35
[GS 25 편의점]이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좌회전하고
[삼거리] 12:36
이어서 바로 다시 삼거리를 만나는데 우회전해서,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시 좌회전하면..
['백호정' 가는 골목]
골목이 이어지는데 끝에 [백호정]이 보입니다.
★ [백호정]을 들리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 나와 우측으로 [일세암]으로 가야 합니다.★
['백호정'] 12:38~12:42
[안내문]
"백호정 白虎亭"은 [인왕산] 근처에 있는 다섯개의 활터 중에 하나였답니다.
현재는 [배화여대] 담장 축대 밑에 초라하게 흔적만 있습니다만...
['백호정' 암벽]
['백호정' 각자]
무술을 연마하던 흰 호랑이 같은 영웅호걸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각자가 새겨진 바위는 [배화여대] 담장을 떠바치는 축대 역활을 하고 있을 뿐...
['일세암' 가는 길]
[백호정] 골목 입구로 다시 나와 좌회전하면 이런 계단을 올라 가게 되는데
계단을 올라 가면...
['인왕산 자락길' 등산로 입구]
좌측에 [인왕산 자락길 등산로] 계단이 보입니다.
['일세암' 각자]
계단 입구로 가면 여름철엔 수풀에 덮여 잘 보이지 않지만, "一洗巖"이라는 각자가 보입니다.
어떤 사연을 안고 있는지는 알수 없지만...여기에 오르면
한방으로 이 세상 모든 더러운 것들을 씻어버리는 그런 바위라는 뜻이겠죠?
이 위에 [인왕산 자락길]의 [택견수련장]이 있었습니다.
['필운대로'] 1:00
[일세암]에서 10여분 걸려 다시 [필운대로]로 나와서 북쪽으로 진행합니다.
100m쯤 전진하면...
['통인시장 후문' 사거리] 1:03
"통인시장 후문"이 있는 사거리에 도착합니다. 보이는 정자는 "세종마루"라는 정자더군요.
이곳은 [수성동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과 정면 [옥인동]등에서 내려오는 개천이 만나는 곳인데
모두 복개공사를 해서 [청계천] 상류지역 풍광을 전혀 느낄수 없습니다.
특히 이곳부터 좌측은 친일매국노 [윤덕영]이 초호화 주택을 짓고 살았던 [벽수산장]이 있던 곳이며
우측은 나라를 팔아 먹는데 일등을 한 찢어 발기고 싶은 [이완용]의 집이 있던 곳입니다.
몇만평이 넘는 초호화 저택이었는데 잠시후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여기서 직진하여 [송석원터]와 [자수궁터]를 둘러 보고 돌아와 좌측길로 가야 [박노수가옥]과
[윤동주하숙집]을 갈수 있습니다.
['통인시장' 후문]
[경복궁] 옆 사대부 집안들과 신흥 중인들이 많이 살았던 "서촌"의 먹거리를 제공해 온 "통인시장"입니다.
일제강점기시대엔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에 근무하는 쪽바리들이 많이 이용했답니다.
현재는 엽전을 구매해서 음식을 사먹는 시장으로 좀 유명하죠.
'기름떡볶이'가 맛있다고 알려져 있죠? 저는 별루던데....ㅎ
['효자베이커리']
[통인시장 후문]을 지나면 [효자베이커리]라는 빵집이 있는데
청와대에 빵을 납품하는 빵집이라고 제법 유명하죠.
100m쯤 직진하면...
['송석원' 터] 1:07
이 주변이 모두 "송석원"이었다고 알리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송석원"에 대해선 잠시후 "벽수산장 터"가 있는 "내외주가" 근처에 가서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여기서 앞에 보이는 [군인아파트]로 가면...
['자수궁' 터] 1:09~1:11
[군인아파트] 정문에 "자수궁터 慈壽宮址"라고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 있습니다.
"자수궁 慈壽宮"은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이며 [조선왕조 첫 왕비]인 "신덕왕후"의 첫째 아들인
"무안대군 방번"이 살던 집이라 합니다.
모두 잘 아시다시피 이복형인 [태종 이방원]이 한테 무참히 살해 당했죠.
[조선왕조 최초의 세자]인 둘째 아들 "의안대군 방석"도 살해 당했는데
역사책에는 [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하죠.
그 이후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이 아버지의 후궁들이 이곳에 살수 있도록 배려해 줬는데
그 이후 궁궐에서 나온 후궁들이 속세를 벗어나 불교에 귀의해 비구니로 살던 곳이기도 하답니다.
['군인아파트' 어린이 놀이터]
"자수궁터 慈壽宮址" 였던 이곳 [군인아파트] 근처엔 "겸재 정선 선생"이 살던 집이 있었었답니다.
태어나 살던 집은 잠시후 들리게 될 [경복고등학교] 교내 쯤으로 추정된다는데,
52세 즈음에 이리로 이사를 와서 84세가 될때까지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 그린 "독서여가 讀書餘暇"라는 그림을 보면 현재의 [군인아파트]에 있는 향나무와 비슷해 보입니다.
"독서여가 讀書餘暇"라는 그림은 "겸재 정선선생"이 자기 집에서 책을 읽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겸재 선생'이 65세때 그렸다는 "독서여가 讀書餘暇"입니다]
그림으로 명성을 얻으니 돈도 많이 벌어 풍요스런 생활을 하며 여유로운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윗 사진의 [군인아파트] 놀이터의 향나무랑 이 그림 속 향나무가 비슷하지 않나요?
선생의 호가 "겸재 謙齋"인데 그 뜻이 너무 좋습니다.
"항상 겸손하고 몸과 마을을 깨끗하게하여 부정을 타지 않게 한다"라는 뜻이니...
['인곡유거']
['수성구지']
[군인아파트] 놀이터엔 "겸재 선생"이 그린 "인곡유거"와 "수성구지"라는 그림 안내판이 있습니다.
이 그림들은 이곳 "자수궁터" 근처에 살면서 그린 그림이라고 하는데
당시 이 지역의 풍광이 어떠했는지 알수 있군요.
[삼거리] 1:12
['내외주가' 가는 골목]
[자수궁터]였다는 [군인아파트]를 나오면 북쪽으로 삼거리가 바로 있습니다.
요기서 "송석원"의 각자가 있었다는 곳으로 가려면
좌측으로 들어가 첫번째 삼거리에서 우측 골목 "내외주가" 방향으로 가야하더군요.
4~50m 골목으로 들어 가면...
['윤덕영 집' 삼거리] 1:14
첫번째 삼거리를 만나는데, 좌측 골목이 천인공노 할 친일앞잡이 "윤덕영"이 일본 천황으로부터
하사 받은 돈으로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리워지던 "벽수산장"을 짓고 살던 집으로 들어가는 길인데
정문은 어디인지 확실치 않고 이 골목은 그 쌔끼의 첩이 드나 들던 문이라고 합니다.
먼저 골목으로 들어가 보고 다시 나와 앞에 보이는 [내외주가]로 갑니다.
['윤덕영집' 입구]
[정문 입석]
[돌계단 흔적]
"윤덕영"이의 첩이 살던 집도 [벽수산장]의 일부인데 돌계단으로 입구를 만들고
아직 흔적이 남아 있는 한옥이 입맛을 씁쓸하게 합니다.
이렇게 설명을 해 가지고는 이해하기가 어려우니 웹써핑을 해서 구한 사진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벽수산장'과 '박노수 가옥']
이 사진이 가장 오래된 "윤덕영"의 집 "벽수산장 碧樹山莊" 사진인데
옛 "송석원터"에 프랑스식 城같은 대 저택을 지었습니다. 당시 주택이라고는 상상 할수 없을 정도의 저택이죠?
사진의 앞 부분에 있는 [박노수 가옥]은 원래 "윤덕영"이 자기 딸에게 지어준 집인데
[박노수 화백]이 1973년에 인수해 살다가 국가에 헌납해서 현재는 [박노수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다는데
잠시후 들릴 예정입니다.
[벽수산장]은 옛 [송석원] 자리에 지었다는데, 먼저 [단원 김홍도]가 그린 [송석원]을 보여 드리면
그림 속 바위에 [松石園]이라는 각자가 보이죠? 안 보이면 잘 찾아 보세요. 있습니다. ㅎ
이런 명당 자리에 친일매국노인 "윤덕영"이 나라를 팔아 먹고 일본천황으로 부터 받은 하사금으로
"한양의 아방궁"을 지었으니 어찌 천인공노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조금 더 근대 사진을 보여 드리면...
[1947년경 사진]
[이 사진은 1960년경 미국놈이 촬영한 사진인데 더 리얼하죠?]
[ 이 사진은 어느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캡쳐한 것인데 1960년대인듯...]
시대 별로 주변 마을 모습이 바뀐걸 알수 있습니다.
[백악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일제시대에 일본놈들이 만든 지도 랍니다]
"윤덕영"의 집 "벽수산장"과 "이완용"이의 집이 표기되 있는데
"윤덕영"의 "벽수산장은 '옥인동'의 57%인 16,628평이었다고 하고
"이완용"의 집은 [통인시장] 북쪽에 약4,000여평에 저택을 지었답니다.
우리나라를 팔아 먹은 돈으로...
지도의 가운데 [순화병원 順化病院]이 조금전에 들렸던 [자수궁터=겸재선생 집터]입니다.
지도 윗쪽에 [재생원]이라고 표기된 곳이 잠시후 들리게 될 "서울농학교"-"선희궁터"입니다.
천년 만년을 살것같던 그런 "윤덕영"도 1940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많은 재산 물려줄 친아들도 없던 그는 양아들 "윤강로"를 들였는데 그도 시원치 않아
[벽수산장]은 1945년에는 미쓰이(三井)광산주식회사로 넘어가고 해방 후에는 적산가옥이 되었답니다.
그 후 [덕수병원]으로 넘어가고 한국전쟁 때는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조선인민공화국 청사]로
쓰이다가 미군이 점령하자 미군의 숙소로 사용되다가
유엔기구인 [언커크(UNCURK)-국제연합 한국통일 부흥위원회] 청사로 사용되었답니다.
그러던 건물이 제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인 1966년에 대 화재가 일어나 폭삭 주저앉고
이어 1973년에는 영영 해체되고 말았답니다.
나라를 팔아 먹고 지은 '한양의 아방궁'은 영원할것 같았지만 또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답니다.
['내외주가']
"송석원 松石園"이라는 각자의 흔적이 있다는 "내외주가"라고 하는 전통주 술집을 찾아 갔습니다.
때마침 주인아주머니인지 종업원인지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나와 몇가지 물어보고
내부 사진 촬영을 허락 받아 사진 촬영을 했습니다.
파란문 : 여기에 "송석원 松石園"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는 곳이라 해서 찾아 왔습니다.
아주머니 : "송석원 松石園"이라는 각자가 있었다고 하는 안내판은 있습니다만, 각자는 모두 지워버렸는지
그런 글자는 찾아 볼수 없습니다.
파란문 : 아 그래요? 그런 흔적은 아쉽게도 이젠 찾아 볼순 없군요.
아주머니 : 네
파란문 : 그런데 "내외주가"는 뭐하는 곳이에요?
아주머니 : 전통주를 판매하는 술집이에요.
파란문 : 전통주라면 막걸리 소주 등 이런걸 의미합니까?
아주머니 : 뭐 그런 것도 있지만 우리가 진짜 전통 방식으로 빚은 전통주를 주로 팔아요.
파란문 : 그러면 이렇게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이런 주택가 골목에 대문을 닫고 있는데
찾아 오는 손님이 있을까...영업이 될까 뭐 이런 생각이 드는데...ㅎ
아주머니 : 여기는 모두 예약을 하고 찾아 오는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술집입니다.
파란문 : 아 그렇군요. 집 내부에 있다는 "송석원" 각자를 촬영 할수 있나요?
아주머니 : 사진 촬영은 할수 있도록 해 드릴수 있는데 그런 각자는 지워지고 없고 안내판만 있어요.
파란문 : 여하튼 감사 합니다.
['송석원' 각자 흔적]
"내외주가"라는 전통주 술집 앞마당입니다.
그리고 뒤 바위 단면에 "벽수산장 碧樹山莊"과 "송석원 松石園"이라는 각자가 지워진듯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 그 위에 그런 각자가 있었었다는 안내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송석원 松石園"이라는 글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썻답니다.
이 근처에 "벽수산장 碧樹山莊"이라는 대 저택을 짓고 술을 마셧을 "윤덕영"이의 사진을 보여 드리면...
['윤덕영']
"내외주가"의 현 마당은 흙으로 돋아 놔 계곡이 없어 졌지만,
이 사진을 보면 당시엔 맑은 물이 흐르는 정원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碧樹山莊"과 바로 옆에 좀 희미하지만 뚜렸이 볼수 있는 "松石園"이라는 각자가 선명합니다.
"윤덕영 尹德榮 1873~1940" 이 개쌔끼는 누구인가
"이완용"이와 함께 나라를 팔아 먹은 친일파 중에 최고 친일매국노이죠.
이 새끼는 "순종"의 왕비인 "순정효황후"의 백부, 그러니까 큰아버지가 되죠.
"윤덕영"과 "순정효황후" 사이에서 벌어진 유명한 일화가 있죠.
나라를 팔아 먹을 때 옥쇄를 찍어야 하는데, 이 때 옥쇄를 "순정효황후"가 치마 속에 감추고 주지 않자
이 새끼는 아무리 조카라 하지만 황후인데 황후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옥쇄를 빼앗아
[한일합방문서]에 도장을 찍게 한 천인공노 할 핵심 친일매국노이죠.
그외에도 "고종"을 겁박하여 일본천황을 알현하게 한다거나 헤아릴수 없는 반민족 행위를 했죠.
친일의 하일라이트는 "윤덕영"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것인데 아직도 그런 소문은 유효하답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일본 하사금으로 "벽수산장 碧樹山莊"이라는 대 저택을 짓고 천년만년 살고자 했지만
이 저택을 짓고 고작 5년 정도 살다가 죽었으니 죽어서도 배알이 꼴렸을 것입니다.
['통인신장 후문' 사거리] 1:30
아직도 친일 토착왜구들이 판치는 '윤덕영'이 같은 쓰레기의 후예들...
아직도 그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아쉬움을 뒤로 하며
다시 "통인시장" 후문 사거리로 돌아 와 우측'옥인동' 골목으로 들어 갑니다.
['옥인동' 골목]
山水가 좋았던 옛 "인왕산" 자락의 "玉仁洞天"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찾을수 없고...
['박노수 가옥' 입구] 1:33~1:36
[통인시장 후문]에서 50m 정도 '옥인동' 골목을 진행하면
[박노수 가옥] 입구를 만납니다.
[윤동주 하숙집]은 가까운 곳에 있는데, 먼저 [박노수 가옥]부터 구경합니다.
['박노수 가옥' 정문]
[안내문]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공사 때문에 휴관을 하고 있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 했드시 이 가옥은 "윤덕영"이 자기 딸에게 지어준 저택이랍니다.
1938년에 지은 "윤덕영이 딸 집"인데 1973년에 "박노수 화백"이 인수해 40여년간 살다가
죽기 전에 자신의 작품 1,000여점과 이 집을 [종로구청]에 헌납하여, [종로구청]에서 수리하여
"박노수미술관"으로 활용하는 문화공간이 되었답니다.
['박노수 가옥']
집 안으로 들어 갈수는 없어 밖에서 "윤덕영의 딸 집"이 "박노수화백"에 의해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현장을 의미있게 바라봅니다.
시간 나는대로 내부를 둘러보기 위해 한번 더 와야 겠습니다.
"박노수화백"은 "이상범화백"의 제자라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모두 우리나라 한국화의 1세대 작가들이죠.
또한 "박노수화백"은 배우 '이민정'의 외할아버지라는거 아세요? ㅎ
['윤동주 하숙집' 조망] 1:40
['윤동주 하숙집']
[안내문]
[박노수미술관]을 나와 '옥인동' 골목을 조금 더 올라 가면
"윤동주 하숙집"을 만납니다. 모르고 가면 지나치기 쉽습니다.
"윤동주"에 대해선 지난번 [인왕산자락길] 답사기에서 안급한바 있습니다만
그의 생애가 너무 짧아 다시 한번더 언급해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윤동주"는 '중국 길림성'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로 유학을 왔죠.
그리고 지금의 '연세대 문과'에 진학하고 학교를 다니기 위해 서울에서 하숙생활을 했지요.
그 하숙집이 이 집이랍니다.
이 집은 자기가 존경하던 소설가 "김송"이 살던 집인데 친구 "장병욱"과 함께 하숙을 했답니다.
여기서의 하숙생활은 고작 3개월 정도였답니다.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등 지금까지 우리가 아끼는 대표작들은 이 때에 쓰였답니다.
그이 인생이 불과 29년이었으니 여기서의 3개월 하숙생활은 어쩌면 긴 시간이었다고도 할수 있으니
어찌 그 슬픔을 다 표현 할수 있겠나요.
너무나 짧은 29세의 나이로 1945년 2월 광복을 보지도 못하고
일본의 감옥에서 안타까움만 남기고 별나라로 갔습니다.
제가 2014년에 쓴 글은 꼭 읽어 보시길 바람니다.
"그리운 얼굴 - 윤동주" 여기 클릭
['옥인교회' 앞] 1:44
[윤동주하숙집]을 지나 조금 더 올라 가면 [옥인교회]를 만나는데
[인왕산]과 [수성동계곡]이 보입니다.
[수성동계곡] 갔다가 돌아와 여기서 [옥인교회] 옆으로 가야 합니다.
[복원한 '수성동 계곡'] 1:45~1:49
['수성동 계곡']
['수성동 계곡'과 '옥인아파트']
'옥인시민아파트'등 난개발로 사라졌던 "수성동계곡"을 복원해 놓은 현장입니다.
지난번 [인왕산자락길]을 할때 왔었던 곳이죠.
물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계곡이라고 "水聲洞"이라 했다는데
"겸재 정선선생"이 그린 "水聲洞"이라는 그림을 참고하면 그 당시 모습과 복원된 현재의 모습을
비교할수 있습니다.
['겸재 정선선생'이 영조27년(1751)에 그린 "수성동" - 간송미술관 소장]
☆ 서울 서촌 역사유적 탐방기 2부 ☆로 계속됩니다
『동물원과 산림욕길』
[서울대공원] 산림욕장길 답사기
대공원역2번출구-서울대공원-동물원입구-호주관-들머리-산불초소-선녀못-아카시숲-얼음골-
전망대-저수지갈림길-독서숲-밤나무숲-소나무숲-북문-동물원출구-대공원역2번출입구
[구글어스]
[4호선 대공원역]에서 출발하여 "서울 대공원 동물원"을 감싸고 있는 "청계산"의 산허릿길을 한바퀴
돌아 오는 코스로서 거리는 11.8km였으며 산림욕과 산행을 함께하는 건강산행길이었습니다.
['4호선 대공원역 2번 출입구'] 12:13
2019년 8월 28일 (수) 흐림후 맑음
일제강점기 시대에 쪽바리들이 우리나라 왕궁을 놀이터로 만든 [창경궁].
[창경궁]에 벚꽃을 심고 '동물원' 유락시설등 놀이터로 만들어 민족정신을 짓밟아버리려고 했지요.
제가 학창시절까지도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불리워졌고, 왜 그렇게 부르는지 그 이유도 모르며
겨울이면 스케이트 타러 다니고 봄엔 벚꽃놀이와 희귀 동물들 구경하러 갔었었습니다.
각급학교들의 소풍 가는 곳으로도 유명했으며 지방 학교들은 수학여행을 [창경원]으로 갈 정도였으니...
1984년 개장한 [서울대공원]은 [창경궁] 복원 사업으로 [창경궁]에 있던 동물들과 놀이시설을
현재의 '경기도 과천'으로 이전하였는데, 불행이도 저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탐방하지 못해서
요즘 쪽바리들의 적반하장식 무역보복에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흔적들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는데
지난 [인왕산 자락길]에 이어 [창경원]의 동물과 놀이시설을 이전해 놓은 [서울대공원]을 찾아 갑니다.
['서울대공원 입구']
[4호선 대공원역 2번출구]를 나서면 "서울 대공원"이 펼쳐집니다.
워낙 규모가 커서 사전에 열심히 예습을 하고 왔지만...그래도 큰 규모에 내심 놀랐습니다.
자부심을 가져도 될듯...
한편 [서울 대공원]이 '경기도 과천시'에 있다는 것이 명칭이 쪼끔 거시기합니다만...ㅎ
[공원종합안내소-식물원휴게소] 2:17
직진해 들어 가면 정중앙에 버티고 있는
[공원종합안내소]와 휴게소가 있다는 건물 우측으로 "동물원"으로 가는 길은 이어집니다.
[동물원]까지는 또 많은 거리를 걸어야 해서 일반관람객들을 위해 '코끼리열차'를 운행하고 있었고...
우측으로 4분여 가면...
['스카이리프트' 타는곳] 12:21
걸어서 관람하기엔 너무 큰 규모여서 동물원 상부까지 리프트를 운행하고 있었습니다.
동물원 상부까지 리프트를 타고가 구경하며 내려 오도록 하고 있는데 요금이 11,000원이라 좀 비싼 느낌
[리프트 통과]
오늘 제가 탐방하려고 하는 "산림욕장길"은 [스카이리프트]를 지나 [기린나라]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동물원]으로 가는 길은 이 길이 가장 빠른 길이었습니다.
[동물원 가는 길]
걸어서 [동물원]으로 가는 길은 제법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리프트와 [코끼리열차]를 운행해서 수익을 올리고 있는듯...
['청계산' 조망]
[서울대공원]은 [과천청계저수지]를 가운데 두고 만들어졌더군요.
[코끼리열차]가 앞으로 가고 있습니다. 짧은 거리를 가는데 시내버스요금보다 비싼 1,500원.
[과천 청계저수지]를 건너는 다리를 지나면 정면에 조망되는 "청계산".
여기서 조망해야 제대로 된 '청계산'을 조망 할수 있는듯 하군요.
고려말 '이성계'에 의해 폐망하는 고려를 아쉬워하며 신군부의 온갖 회유에도 굽힘없이
저 "청계산"에 올라 은둔하며 나라를 염려 했다는 "조견 선생"....
저는 [대공원]을 돌며 강점기시대의 [창경원] 그림자를 지우고 발전하는 우리나라를 구경하려 합니다.
[동물원 입구] 12:30~2:40
[대공원역]에서 17분이 걸려 "동물원" 정문에 도착했습니다.
[산림욕장길]은 입장권을 사서 [동물원] 안으로 들어 가야 하더군요.
입장요금이 성인은 5,000원인데, [동물원]을 관람하지 않고 [산림욕장길]만 걸어도 입장권을 사서
[동물원] 안으로 들어 가야 한다는게 조금 그렇습니다. 경노는 무료 입장이더군요.
[서울대공원이 추천하는 '추천관람코스']
제대로 관람하려면 며칠 걸릴듯...
[동물원 정문]
입장권을 내고 정문을 통과하여 우측으로 갑니다.
[우측 동물원 순환길]
정문을 들어 가면 우측에는 '유모차 대여'등 고객써비스센타가 있고...
['아프리카 모험'] 12:43
이어서 먼저 [아프리카관]이 먼저 시작됩니다.
[서울대공원]은 [동물원] [식물원] [테마공원]등으로 조성되 있더군요.
[동물원] 중엔 '아프리카관'이 제일 큰듯
[갈림길] 12:44
이어서 갈림길을 만나는데, 직진성 좌측길은 [동물원]을 관람하는 동물원길이고
[산림욕장길]은 우측으로 가라고 안내합니다.
['산림욕장' 가는 길]
[산림욕장 가는 길]로 잠시 진행하면...
[갈림길] 12:45
다시 갈림길을 만나는데 안내하는대로 우측으로 조금 갑니다.
['호주관' 앞] 12:47
그러면 "동물원 호주관" 에 도착하는데 건너편 [화장실] 옆에 [산림욕장길 들머리]가 보입니다.
[철문]
그런데 [동물원]에서 밖으로 나가는 철문은 닫혀있습니다.
철문 앞으로 다가가니, [안내문]이 붙어 있습니다.
"손잡이를 당겨 열어 나가고, 나간 후에는 잘 닫으라고..." ㅎ
이렇게 하는 이유는 혹시라도 동물들이 밖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런 방법을 쓰는듯 합니다.
모르고 가면 철문 밖으로 못 나가겠지요? ㅎ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화장실] 옆으로 가면...
['산림욕장길' 들머리] 12:49
"서울대공원 산림욕장길 들머리"는 이곳이라고 알려 줍니다.
[현위치 안내도]
안내도에선 총 길이가 7km로 150분이 걸린다고 알려 줍니다.
제가 [대공원역]에서부터 [산림욕장길]을 걷고 [대공원역]으로 원점회귀하는데 11.8km에 4시간 5분이
걸렸으니 [산림욕장길]만 계산한다해도 150분으로는 힘겨울듯 합니다.
그러면 저와 함께 [서울대공원 산림욕장길]을 탐방해 볼까요?
[갈림길] 12:52
들머리에서 50여m 오름길을 오르면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주는 이정표도 없습니다.
저는 새로 만들어진 우측 데크길로 진행했는데, 경사는 완만했으나 대신 거리가 조금 멀더군요.
후답자들은 여기서 좌측 길을 이용하라고 추천합니다.
올라 가면 다시 우측길과 금방 만나는데 시간이 단축되더군요.
돈 들여서 데크길을 새로 만든 이유를 저는 모르겠는데... 모두 그 이유를 아신다구요? ㅎㅎ
[계단 오름길]
[오름길]
꼭 필요하지도 않은듯한 데크길을 새로 만들었지만 금방 다시 기존 길과 만나 잠시 올라 갑니다.
진입로인 이 길이 [대공원 산림욕장길]에선 유일한 급경사 오름길이 되겠습니다. ㅎ
[쉼터] 12:58
[감시초소] 1:00
들머리에서 8분 정도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힘든 코스는 끝나고...ㅎ
쉼터와 [감시초소]를 만납니다. 초소는 산불이라던가, 특히 동물들의 탈출이라던가
외부 침입자들을 감시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아 사용한지 오래된듯...
[숲길]
지금부턴 산허릿길이 계속됩니다.
약간의 오르내림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평지성...조금 비유하자면 빨래판 정도의 오르내림이 있는
"청계산 허리길"이 이어졌습니다.
[감시초소]에서 7분여 진행하면...
['못골산막'] 1:07~1:09
"못골산막"이라는 사각정자 쉼터가 있는 "선녀못이 있는 숲"에 도착합니다.
[나무꾼 지게]
['선녀못'이 있는 숲' 안내판]
'선녀와 나무꾼'을 연상케하는 조형물을 설치하고 안내판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산허릿길]
다시 산허리길을 진행합니다.
길은 외줄기이고 멍석까지 깔아놔서 길 잃을 염려는 없습니다.
[선녀못]에서 7분여 진행하면...
['아까시나무숲'] 1:16~1:21
"아까시나무숲"이라는 곳에 도착하는데
[산림욕장길]에 있는 쉼터 중에선 가장 아름답게 꾸민 쉼터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5분 정도 휴식을 취하고
[오르내림길]
오르내림을 잠시 하며 진행하면...
[간이 쉼터] 1:23~1:25
간이 쉼터를 만나는데 산객 한분이 좀 도와 달라고 합니다.
배낭의 망사 부위가 자크에 끼어 배낭을 벗을수가 없더군요. ㅎㅎ
도와 드리니 사탕 몇알을 주시고...
['자연과 함께하는 굴'-'송촌산막'] 1:29~1:32
이어서 "자연과 함께하는 숲-송촌산막"이라는 쉼터를 만납니다.
[약수터]
여기엔 약수터도 있는데 수질검사 결과 "합격" 판정을 받았더군요.
두 바가지 마시고
[산림욕 숲길]
다시 13분여 산림욕장길을 진행하면....
['얼음골 숲'] 1:45
[안내판]
"얼음골 숲"이라는 쉼터를 지납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데크 오름길] 1:47
이어서 고도를 조금 높이며 데크 계단을 잠시 오르면...
[사각 정자] 1:50
사각 정자를 지나 갑니다.
[전망대] 1:54~1:57
이어서 오늘 [산림욕장길]의 하일라이트인 "산림욕장 전망대"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산림욕장길]에서 유일하게 조망이 트이는 곳이었으니 조망을 하고 갑니다.
['과천 매봉' 조망]
먼저 지나온 남서쪽을 바라보면 "과천 매봉"이 조망되고
['관악산' 조망]
서쪽으로는 "관악산"이
북쪽으로는 "남태령"과 "우면산"이 조망되며
아래엔 [동물원]이 보입니다.
다음번엔 "동물원 둘레길"을 답사하려고 합니다.
['우면산' '옥녀봉' 조망]
북동쪽 방향인 우측엔 "청계산 옥녀봉"도 보이는군요.
['청계산' 조망]
동쪽으로는 "청계산"의 최고봉인 "망경대"가 조망됩니다.
[멍석길]
조망을 마치고 양탄자가 깔린 산허리길을 4분 정도 진행하면...
['생각하는 숲'] 2:01
"생각하는 숲"이라는 쉼터를 지나는데
['낙화']
제가 좋아해서 몇번 산행기에 인용했던 "낙화"라는 詩를 만나고....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산허리길]
계속해서 산허리길을 2분여 진행하면....
['쉬어가는 숲'] 2:13
['청계산막'과 역수터]
"쉬어가는 숲-청계산막"을 만납니다.
여기도 수질검사에 합격한 약수터가 있어 한바가지 마시고 갑니다.
[오르내림길]
15분여 산림욕길을 진행하면...
['청계산 정상' 밑 계곡] 2:28
"청계산 망경대" 아랫쪽에 있는 지점에 도착하는데, 등산객들이 몰래 내려 오는 소리가 들림니다.
['조절저수지' 갈림길] 2:30
이어서 "조절저수지 갈림길"을 만납니다.
[산림욕장길]의 중간 정도 되는 곳인데, [동물원]을 구경하며 하산 하실 분들은 여기서
좌측 [조절저수지]로 내려 가면 되겠습니다. 지도 참고
[산허리길]
산허리길인 [산림욕장길]을 계속해서 진행합니다.
6분여 진행하면...
['망경산막'] 2:36
"망경산막"이라는 사각정자를 지나 갑니다.
아마도 "望京"으로 쓸텐데...'서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독서하는 숲'] 2:38
이어서 "독서하는 숲"을 만나는데 땀흘리고 올라 여기서 책을 읽으면...
읽혀지지도 않겠지만 읽더라도 졸려 잠들지 않을까 ㅎ
[숲길]
계속해서 숲길을 10여분 진행하면...
[쉼터] 2:47
이름없는 쉼터를 지나고
[밤나무 숲길]
밤나무가 많은 숲길을 8분여 더 진행하면...
['밤나무 숲'-'밤골산막'] 2:55~3:07
"밤나무 숲-밤골산막"이라는 곳에 도착하는데 주변에 조경이 잘되 있었습니다.
특히 습지 생물과 식물들이 자생하는 곳이라고...
여기서 12분 정도 휴식을 취하고
['맹수사' 갈림길]
[밤골산막]에선 [동물원]의 [맹수사]로 내려 갈수 있더군요.
[맹수사]라고 해서 저는 처음엔 절간이 공원 안에 있나? 라고 생각했는데
[맹수사]는 동물 중에서 맹수들을 사육하는 곳을 의미하더군요. ㅎ
[숲길]
다시 숲길을 잠시 진행하면...
[감시초소] 3:10
감시초소를 지나는데 일정 간격으로 감시초소는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관악산' 조망]
여기선 모처럼 하늘이 보이며 "관악산"까지
['사귐의 숲'] 3:12
산골짜기에서 "사귐의 숲"이라...ㅎ
[갈림길] 3:16~3:21
길조심을 해야하는 갈림길을 만납니다.
여기선 우측 [소나무숲]으로 진행해야하는데, 저는 무심결에 직진해서 잠시 알바를 했습니다.
직진길도 선명하고 뚜렸했으며 [동물원]으로 바로 내려 가는 길이더군요.
5분여 내림길을 내려 갔다가 다시 올라와 우측으로 진행했습니다.
[숲길]
다시 숲길을 3분여 진행하면...
[감시초소] 3:34
감시초소를 지나고
['소나무숲'] 3:35
이어서 "소나무숲"이라는 곳을 지나면
[계단 내림길] 3:39
제법 긴 계단 내림길이 이어지다가
[울타리 샛문] 3:42
철조망 울타리 샛문을 통과하고
[계단 내림길]
다시 계단 내림길을 내려 가면...
[동물원 순환로] 3:44
[산림욕장길]의 시종점을 만나며 [산림욕장길]은 끝납니다.
이곳엔 [산림욕장길 안내도]가 설치되 있는데
[현위치 안내도]
현위치를 알리고 있는 "서울대공원 산림욕장길 안내도"를 확인하고
[동물원순환로 차단문]
[동물원 순환로]로 가면 철문이 굳게 닫혀있습니다.
동물들의 무단 탈출을 막기 위함이겠지요.
나갈 곳이 없으니 그래도 철문 앞으로 가면...
[철문 통과] 3:46
출발 할때와 마찬가지로 철문을 열고 들어 가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동물원]을 나갈땐 당겨 열고, 들어 갈땐 밀어 열고...그래야 동물들의 탈출을 막을수 있겠죠.
문을 통과하여 동물원 안으로 들어 가면...
[화장실] 3:48~3:55
화장실이 나타나는데, 여기서 땀을 좀 씻고 내려 갑니다.
[리프트]
[북문 리프트 승강장]
화장실이 있는 건물 앞으로 나가면 [동물원 북문 리프트 승강장]이 있더군요.
그러니까 리프트는 두 구간으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는데, 공원입구 [스카이 리프트승강장]에서
여기까지 오는 구간과 여기서 다시 동물원 상부까지 올라 가는 리프트 승강장, 즉 2구간이 있더군요.
두 구간을 모두 탈때에 11,000원/성인
[동물원 북문] 3:57
[동물원 북문(출구)] 앞을 지나면...
['과천 매봉' 조망]
[과천 매봉]이 조망되는데 이곳이 [산림욕장길]로 들어 갈때 통과했던 [동물원 정문]이었습니다.
[동물원 정문]과 [동물원 북문 (출구)]가 바로 옆에 함께 있군요.
['청계산' 조망]
[동물원 정문]에서 "청계산"을 조망하고
[동물원 정문] 4:00
[동물원 정문]을 통과하여 나가면...
['관악산' 조망]
"관악산"을 바라보며 지하철역으로 갑니다.
['스카이리프트' 승강장] 4:11
[스카이리프트] 1구간 타는 곳을 지나 5분여 진행하면...
['대공원역 2번출입구'] 4:16
출발지였던 [대공원역 2번 출입구]에 도착하며 산행을 마침니다.
[구글어스]
[고도표]
스마트폰 GPS 측정이 반드시 정확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참고할만 합니다.
그래서 전 GPS 전용기기와 스마트폰등 가지고 다니는 GPS 세개의 평균값으로 거리를 측정하는데
11.8km 였으며 4시간 5분이 걸렸습니다.
[서울대공원 산림욕장길]은 입장료를 5,000원 내야하는 부담이 있고 (경노 무료)
들머리를 찾아 가는 길이 좀 어렵다는 흠이 있으나
길은 잘 조성되어 있고 평이하여 걷기 편한 길이었습니다. 추천합니다.
다음엔 [서울대공원 동물원 둘레길]을 탐방하며 동물들을 구경하는 나들이를 해 보렵니다.
『서울 도보 답사』
인왕산 자락길 역사탐방
경복궁역1번출구-사직단-단군성전-황학정-등과정터-택견수련터-세종대왕과 인왕산-
수성동계곡-사모정-석굴암-무무대-시인의 언덕-윤동주문학관-창의문-부암동주민센타-
무계원-현진건집터-안평대군집터-윤웅렬별장-석파정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水聲洞'이라는 진경산수화의 실재 배경]
[구글어스]
"한양성"의 "서촌 西村"의 울타리가 되는 "인왕산 자락길"을 갑니다.
공식적인 거리는 [사직단입구]에서 [윤동주문학관]까지 "3.2km"라고 합니다.
공식적인 거리는 너무 짧아 저는 [석굴암]을 왕복하고, [창의문] 밖 "부암동"과 [석파정]을 들려
진행한 거리는 "7.3km"로 3시간 30분이 걸렸습니다.
['3호선 경복궁역 1번출구'] 11:45
2019년 8월 17일 (토) 약간 흐림
한 여름 한달여 푹 쉬고 다시 길을 나섭니다.
[3호선 경복궁역 1번출구]에서 [인왕산 자락길] 답사를 시작합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다웁게 길안내는 잘 되있어 큰 불편함이 없습니다만,
그래도 미리 예습을 하고 가야 길찾기에 도움이 된다는 건 상식이죠.
그러면 빠짐없이 더 많은 곳과 더 많은 역사의 현장들을 볼수 있겠지요.
['사직공원' 방향]
[사직단]이 있는 "사직공원" 방향으로 진행해서...
['사직공원' 정문] 11:51
"사직공원" 정문으로 들어가면
['사직단' 좌우갈림길]
가운데 "사직단"이 있는데 좌우로 둘레길이 나 있습니다.
현재 [사직공원]은 보수공사 중에 있어 "단군성전"으로 바로 가는 길이 차단되 있더군요.
"단군성전"으로 먼저 가는 [인왕산자락길]은 좌측길이 편리합니다.
['사직단']
[안내문]
"사직단 社稷壇"은 들어 갈수 없고 정문 문살 사이로 들여다 봐야 합니다.
농경사회에서 최고의 선은 농사가 잘 되어야하는 것이니
'조선왕조'가 백성을 위해 제례를 올리며 "풍년"을 기원하는 제단입니다.
국가가 "토지의 신 - 社"와 "곡식의 신 - 稷"에 풍년을 기원하는 것이죠.
['인왕산길'] 11:55
[사직공원]에서 [단군성전]으로 직접가는 길이 있습니다만, 현재 [사직공원] 보수공사 중으로
길을 막아 놨더군요. 그래서 [사직공원] 서쪽 샛문으로 나가 [인왕산로]를 이용해 잠시 올라 갑니다.
['단군성전' 앞 사거리] 11:57
그러면 [단군성전] 정문 앞 사거리를 만나는데
좌측으로 가면 "권률장군 생가터"와 "한양성 순성길"로 갈수 있으며
[인왕산자락길]은 [단군성전]을 둘러보고 나와 직진합니다.
['단군성전']
['단군']
"단군성전"과 "단군상 檀君像"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단군' 중에서 "단군왕검"을 시조로 여기는데
모두 잘 알다시피 "단군왕검"은 "천제 환인"의 손자이고, "환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웅녀"이죠.
['단군성전' 지나 삼거리] 12:00
[단군성전]을 나와 [인왕스카이웨이]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가면 삼거리를 만나는데
"황학정"을 들려 보려면 우측 길로 조금 내려 가야 합니다.
['황학정' 정문] 12:02
"황학정" 정문에 도착하면 "국궁전시관"이 보이는데 전시관으로 올라 가면
['국궁전시관' 입구] 12:03~12:06
입장료를 받더군요. 경로는 무료입니다만....
[국궁]
['신기전']
다연발 로켓 활인 "신기전" 모형이 눈길을 좀 끌 뿐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입장료 내고 들어 갈 필요 없겠고...
['황학전'] 12:07
[안내문]
[국궁전시관]을 나와 조금 더 올라 가면 "황학정 黃鶴亭"을 만납니다.
"황학정 黃鶴亭"은 "경희궁"(옛 서울고 자리)"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이전했다는군요.
이곳은 잠시후 확인하겠지만 "등과정 登科亭"이라는 활쏘기 연습장이 있던 곳이라고하는데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면 되겠고....
신식무기가 난무하던 구한말에 "고종"이 활쏘기를 무척 좋아했다는 것이 의외로 다가 옵니다.
[궁사들]
오늘도 활쏘기 연습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더군요.
['등과정 터' 가는 길]
"황학정" 우측 뒤에 [인왕산스카이웨이]로 직접 올라 가는 계단 길이 있는데
이 계단을 올라 가면....
['등과정 각자'와 터] 12:11
"등과정 登科亭"이 있었던 터를 알리는 안내석과 바위에 세겨진 각자를 볼수 있습니다.
"황학정"을 통과하여 다시 [인왕스카이웨이]로 올라 와 50m 쯤 진행하면...
['인왕산 숲길' 갈림길] 12:13
"인왕산숲길" 출발지점을 만납니다.
[인왕산숲길]과 [인왕산자락길]은 조금 다름니다만.....
[인왕산자락길]은 직진하라고 알리고 있으며, [인왕산숲길]은 우측으로 올라 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직접 걸어 본 결과 여기선 [인왕산숲길]을 이용하는게 절대적으로 좋았으니
이 답사기를 보고 앞으로 가실 후답자들은 꼭 참고하시길....
직진해서 가는 [인왕산자락길]은 도로만 있을 뿐 볼게 없습니다.
그리고 [인왕산숲길]로 진행해 보니 또한 [인왕산자락길] 표시도 있더군요.
그래서 결론은 [인왕산숲길]과 [자락길]은 혼용하는게 좋겠고 [인왕산숲길]이 더 좋다고 추천합니다.
★ 입구 계단을 올라 가서 반드시 우측으로 가야 합니다. 혼돈하기쉬우니 주의 ★
['인왕산 숲길' 안내석]
저는 이곳에서 [인왕산숲길]을 이용하여 [수성동계곡]까지 가고
너무 짧은 거리여서 "인왕산 정상" 부근에 있는 "석굴암"을 다녀와 [인왕산자락길]로 갈 예정입니다.
['인왕산자연공원 체육시설'] 12:17~12:19
['택견' 수련터']
['택견'과 '송덕기선생' 안내문]
[인왕산숲길] 입구에서 우측으로 잠시 올라 가면 "인왕산자연공원체육시설"이 있고
"송덕기선생"이 수련했다는 "택견수련터"가 있습니다.
['인왕산' 조망]
[택견수련터]에서 [인왕산] 정상을 조망하고
['수성동계곡' 가는 길] 12:19
[내림길]
이정표의 안내를 따라 [수성동계곡]으로 내려 갑니다.
'인왕산'이라는 조그마한 돌산에 이런 숲길이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였는데
길도 정비를 잘해놔서 걷기에 띵호아~!
5분 정도 내림길을 진행하면....
[쉼터 - '누상동갈림길'] 12:24
쉼터정자와 화장실이 있는 삼거리에 도착하는데 [누상동갈림길]이었습니다.
우측 바로 아랫동네에 [배화여고-대학]이 있죠.
['인왕산 숲길']
['북악산(백악산) 조망]
다시 산자락 숲길을 10여분 진행하면....
[계단 오름길]
[전망대 앞 갈림길] 12:33
이정표가 있는 전망대 앞 삼거리를 만나는데....
[인왕산자락길]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데 여기선 반드시 [수성동계곡] 방향으로 내려 가는게 좋겠고
[전망대] 12:33~12:37
['세종대왕'과 '인왕산']
이 전망대는 "세종대왕과 인왕산"이라는 안내판이 있는 전망대였는데 조망은 시원치 않았습니다.
[세종대왕]은 "서촌" 현재의 '종로구 통인동 통인시장' 근처에서 탄생하여 자랏죠.
우측 난간에 [인왕산자락길]이 이쪽으로도 연결된다는 이정표가 표기되 있습니다.
[계단 내림길]]
계단 내림길을 4분여 내려가면....
['인왕산 자락길' 안내도] 12:41
['인왕산 자락길' 안내도]
[현위치에서 '수성동계곡' 통과 방법]
[인왕산자락길 안내도]가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조금전 [인왕산숲길 입구]에서 안내하는 [자락길]이 [숲길]과 혼용되고 있다는 걸 알수 있습니다.
여기선 오히려 [숲길]이 [자락길]이라고 분명히 표시하고 있으니 어떻게 된건지 ...ㅎㅎ
여기서부터 "수성동계곡"이 시작되더군요.
저는 [수성동계곡]을 둘러 보고 [석굴암]으로 올라 갈 예정입니다.
['사모정' 조망] 12:42
계곡에 도착하면 건너편에 "사모정"이라고 하는 정자가 보이는데
여기선 우측으로 계곡따라 내려 가야 합니다.
[계곡]
[수성동계곡]은 조그마한 '인왕산'이라는 돌산에 있는 계곡이라 비가 많이 오는 여름철에만 물이 흐른답니다.
요즘 비가 제법 내려 계곡엔 맑은 물이 흐르고, 때를 놓치지 않고 피서객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습니다.
['기린교'] 12:43
이어서 "겸재 정선 선생"의 진경산수화 "수성동"에도 등장하는 "기린교 麒麟橋"를 만납니다.
동물 '기린'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역사적으로도 돌다리 연구에 중요한 다리라고 보호되고 있군요.
['옥인동'] 12:44~12:47
"기린교 麒麟橋"를 지나면 [수성동계곡]은 사라지고, '종로구 옥인동' 주택가가 밀집해 있습니다.
이 계곡 위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인 "옥인아파트"가 건설되었는데, 서울시가 이 아파트를 매입하여
"겸재 정선 선생"의 진경산수화 "수성동"을 참고하여 2011년에 완벽 복원하였다는군요.
['수성동계곡' 조망]
서울시에 의해 완벽 복원된 "수성동 계곡 水聲洞溪谷"입니다.
'네이버지도'엔 현재도 이곳이 '옥인아파트'라고 아파트 건물이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놀라울 뿐.... 여하튼 복원해 주어서 옛 정취를 맛 볼수 있게 해준 당국에 감사를 드리며
"겸재 정선 선생"이 진경산수화 "수성동"를 그리던 시절로 뒤돌아 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한양'의 '서촌', 즉 '인왕산' 자락 계곡에는
사대부등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글짓기 詩社'가 일반 평민-중민들에게서도 시현되는 곳이었답니다
이런 형태를 "위항문학 委巷文學"이라고 하죠.
"위항문학"을 탄생시킨 주역들 중 한분인 "박윤묵 선생"의 글로 "수성동 계곡 水聲洞溪谷"을 설명하겠습니다.
'박윤묵'의 <존재집(存齋集)> 23권 - 遊水聲洞記에서 인용합니다.
洞多水。以水聲名。迺西山之口也。庚午夏。大雨數十日。川渠漲溢。平地水深三尺。余朝起跣足着屐。
衣雨衣携一壺酒。與數三同志者入洞。至石橋邊。上下一望。應接殆不能暇。溪澗之勝。泉瀑之壯。
怳與舊日 觀大有異焉。凡西山之水。或橫流或倒流。或折而復流。或掛匹練。或噴亂珠。或飛於絶壁之上。
或灑於松 翠之間。百谷千流。不一其狀。皆到水聲之洞然後。始成一大流。裂山倒壑。衝崖轉石。
如万馬之爭騰。如疾雷之暴發。其勢不可遏也。其深不可測也。其中霏霏如也蕩蕩如也。時飛沫濺衣。
凉意逼骨。魂淸神爽。情逸意蕩。浩然如與造物者。遊於物之外也。遂大醉樂極。散髮長歌。
歌曰西山之上雨床床兮。西山之下水 湯湯兮。惟此水是吾鄕兮。徜徉不忍去。物與我而俱相忘兮。
歌闋相顧而起。天忽開霽。西日已在山。
수성동(水聲洞)은 물이 많아 물소리라는 뜻의 수성으로 이름이 붙었는데 곧 인왕산 입구다.
경오년(1810) 여름 큰 비가 수십 일이나 내려 개울물이 불어 평지에도 물이 세 자 깊이나 되었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 맨발로 나막신을 신고 우의를 입고서 술 한 병을 들고 몇 명의 동지들과 수성동으로
들어갔다. 돌다리 가에 이르니 아래 위쪽의 풍경을 바라보느라 다른 데 정신을 팔 겨를이 없었다.
개울이 빼어나고 폭포가 장대하여 예전에 보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대개 인왕산의 물은 옆으로 흐르기도 하고 거꾸로 흐르기도 하며 꺾어졌다 다시 흐르기도 한다.
벼랑에 명주 한 폭을 걸어놓은 듯한 곳도 있고 수많은 구슬을 뿜어내는 듯한 곳도 있다.
가파른 절벽 위에서 나는 듯 떨어지기도 하고 푸른 솔숲 사이를 씻어내듯 흐르기도 한다.
백 개의 골짜기와 천 개의 개울이 하나도 똑같은 형상을 한 곳이 없다.
이 모든 물이 수성동에 이르게 된 다음에야 하나의 큰 물길을 이룬다. 산을 찢을 듯, 골짜기를 뒤집을 듯,
벼랑을 치고 바위를 굴리면서 흐르니 마치 만 마리 말들이 다투어 뛰어오르는 듯하고 우레가
폭발하는 듯하다. 그 기세는 막을 수가 없고 그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으며, 그 가운데는 눈비가 퍼붓는 듯,
자욱하고 넘실거린다. 때때로 날리는 포말이 옷을 적시면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들어와 혼이 맑아지고
정신이 시원해지며 마음이 편안하고 뜻이 통쾌해진다. 호탕하여 조물주와 더불어 이 세상 바깥으로
노니는 듯하다. 마침내 술에 만취하여 즐거움이 극에 달하였다.
이에 갓을 벗어 머리를 풀어헤치고 길게 노래하노라.
인왕산 위에 비가 쏴하고 내리면 인왕산 아래에 물이 콸콸 흐른다네.이 물이 있는 곳 바로 나의 고향이라
머뭇머뭇 차마 떠나지 못한다네.내 풍경과 함께 때를 씻고 나서노래 부르고 돌아보면서 일어나니'하늘은
홀연 맑게 개고 해는 하마 서산에 걸렸네
[이곳 안내문에 있는 '수성동' 파란문 촬영본]
['간송미술관' 소장 '수성동' 촬영본]
['수성동' 안내문]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진경산수화 "수성동"입니다.
"겸재 선생"이 72세에 그린 "장동팔경첩"에 있는 그림으로 국보로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답니다.
복원된 "수성동계곡"과 이 그림을 비교해 보면 그 가치를 느낄수 있군요.
"기린교"가 특히 눈에 들어 오는데....
['기린교']
"기린교"
<동국여지비고>와 <한양도성도>에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는데
<한경지략>에는 麟麒橋라고 기록되어 있답니다.
정선의 그림인 <水聲洞>에 암벽 사이로 계곡이 흐르고 그 위에 다리가 하나 놓여있는데 이것이 기린교라고
백과사전에도 나와 있습니다.
다리 밑 계곡이 깊습니다.
['옥인동'] 12:47
복원된 "수성동계곡" 전망소 아래엔 '옥인동' 주택들이 밀집해 있어 복원하지 않았다면...
계곡을 복개해 '청계천'으로 흘러 가는 계곡물과 계곡은 사라졌습니다.
['수성동계곡' 우측길]
계곡 전망대에서 다시 '인왕산' 방향으로 계곡따라 올라 갑니다.
복원되기 전인 2011년까지 이 계곡 좌우엔 "옥인아파트"가 늘어서 있었답니다.
"와우아파트"보다도 먼저 지어졌다는 "옥인아파트"....와르르 무너진 부실시공의 대명사 "와우아파트"...
군사정권 시절의 얘기이지만 엊그제 같기만 한데, 복원된 "수성동계곡"을 보니 '상전벽해'가 아니라
'벽해상전'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너무나 완벽하게 복원되었죠?
['사모정'] 12:50
['수성동계곡'과 '안평대군']
'수성동계곡'과 '안평대군'에 대해선 안내문에 자세히 쓰여있습니다.
['인왕산' 조망]
계속해서 '인왕산' 정상을 바라보며 복원된 "옥인아파트" 자리를 진행하면...
[갈림길] 12:54
갈림길을 만납니다.
저는 [인왕산 석굴암]을 다녀 오기 위해 좌측 [인왕산자락길]로 올라 갔습니다만...
[인왕산 석굴암]을 보고 싶지 않은 분들은 우측 [인왕산숲길]으로 가시길 추천합니다.
좌측으로 3분여 올라 가면...
['인왕스카이웨이' 합류] 12:57
[인왕산스카이웨이]를 다시 만납니다.
[자락길]을 따라 잠시 진행하면...
['석굴암' 입구]
['석굴암' 입구] 1:02
[인왕산 석굴암]으로 올라 가는 입구를 만납니다.
미리 알려 드리면, [석굴암]으로 오르는데 13분이 걸렸으니 참고 하시고...
['만수천' 갈림길]
입구에서 잠시 올라 가면 [만수천 갈림길]을 지나고...
다시 급경사 돌계단을 잠시 올라 가면...
['석굴암약수터' 운동시설] 1:06
운동시설이 있는 "석굴암약수터"를 만납니다.
약수터는 좌측에 있는데 생략하고 직진해서 급경사 계단을 올라 갑니다.
[계단 오름길]
[급경사 오름길]
[석굴암] 오르는 길은 엄청 급경사입니다.
200m 급경사 오름길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ㅎㅎ
그래도 거리가 비교적 짧아 다행...
['석굴암' 전경] 1:14~1:31 (17분간 조망 휴식)
"인왕산 석굴암"
글자 그대로 石窟에 불상을 모셔 놓은 암자였습니다.
오래 전부터 한번 방문하고 싶었는데, 그 이유는 잠시후 보게 될 바위 때문입니다.
['석굴암'
['석굴암' 내부]
비좁은 석굴에 들어가 소원을 비는 분들이 의외로 몇명 있더군요.
이런 공기도 탁하고 더러운 굴 속에 들어가 소원을 빌지 말고
나가서 인생 목표를 향해 뛰는게 어떨지....
['경복궁' 조망]
[인왕산 석굴암]에서 바라보는 [경복궁]과 [청와대]입니다.
무척 가깝다는걸 알수 있는데...
제가 여기를 오른 이유는 유명한 "치마바위"와 "병풍바위"를 보기 위해서 입니다.
여기서 좌측을 바라보면...
['치마바위' 조망처]
소나무가 있는 바위가 보이는데 저곳에서 "치마바위"와 "병풍바위"를 볼수 있습니다.
[치마바위 조망처]라고 할수 있는 곳이니 가서 "치마바위"를 조망합니다.
['인왕산' 정상과 '치마바위' '병풍바위' 조망]
[인왕산 정상]이 보이며, 정상을 떠바치고 있는 바위가 보이는데
빨간색선으로 표기한 바위가 "치마바위"이며
파란색선으로 표기한 바위는 "병풍바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바위는 슬픈 역사를 간직한 바위들이라 바위에 얽힌 이야기들을 좀 더 자세히 기술하겠습니다.
['치마바위']
"치마바위의 전설"
제가 그동안 [인왕산]을 산행 할때 몇번 언급한 "중종"과 "단경왕후"의 사랑 이야기가 서려 있는 바위이니
한번 더 그 얘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12살의 나이에 "진성대군"에게 시집가 애뜻한 정을 나누었던 소녀.
그 "진성대군"이 하루 아침에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중종반정'으로 왕이 되고...
그녀는 졸지에 왕비가 되고...
조선 제 11대 왕 "중종"-그가 바로 그 소녀의 서방인 "진성대군"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녀는 연산군 아래에서 좌의정을 지내던 "신수근 愼守勤"의 딸이었으니
운명은 이렇듯 기묘하게 찰라에 의해 바뀌고....
박원종을 비롯한 반정 세력들은 왕비가 연산군의 와이프-거창신씨의 외질녀이기에
"중종"의 정비인 "단경왕후"를 왕비로 남겨 둘수가 없었지요. 후환이 두려워....
그래서 꼭두각시 얼굴마담 '중종'을 족쳐서 "단경왕후"를 폐위 시키고 새로운 왕비들을
급하게 옹립합니다.
새로 뽑은 왕비들 중..그 유명한 "문정왕후"..등에서 부터 우리나라 역사에서 지울수 없는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적 전란으로 가는 불씨가 태동 됩니다.
"중종"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반정 세력들에게 꼼짝도 못하고
강제적으로 사랑하는 "단경왕후"를 눈물로 떠나 보낼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중종"은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그녀가 보고 싶어 경복궁 경회루 앞에 나와
그녀가 산다는 "인왕산"방향을 바라보며 그리움의 눈물을 흘렸다고 하지요.
폐서인이 되어 쌩과부로 홀로 '서촌'에 사는 '단경왕후'는 그 사실을 소문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녀는 궁궐에서 입던 자신의 다홍치마를 저 인왕산 바위에 걸쳐 놓아 자신의 입지를
알리곤 하였답니다. 왕이여~~ 날 보러 와요~ 나 ! 여기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이후 단 한번도 다시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
바라만 볼수 밖에 없는 사랑... 치마처럼 생기기도 한 바위이지만 치마를 걸어두어 붙여진 이름인
"치마바위"에 얽힌 "경회루의 중종"과 "치마바위의 단경왕후"의 슬픈 사랑의 내력이랍니다.
['청와대' '경복궁' 조망]
여기서 바라보는 [청와대]와 [경복궁]입니다.
무척 가깝죠?
['병풍바위']
[치마바위] 옆에는 "병풍바위"라고 하는 바위가 보입니다.
바위 단면에는 여러번에 걸쳐 지워진 큰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던 흔적들이 지금도 보이는데...
일제 강점기시대에 조선총독부 총독이던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朝鮮總督 南次郞)"가 새긴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이라는 글입니다.
그 내용은 조선 청년들을 선동하는 것이랍니다.
다음 사진은 <시사저널 2010년9월13일자>에 게재된 사진인데,
1950년에 1차로 글을 지우고 촬영한 사진이랍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시사저널 1556호-여기 클릭"
요즘도 쪽바리들의 경제보복, 과거사 무반성 등으로 만행을 저지르고 있어서
일제 강점기 시절의 만행 중 하나를 알려 드리고 싶어 급경사 오르막을 올랐던 것입니다.
잊지 맙시다. 쪽바리들의 만행을....
[내림길]
['인왕스카이웨이' 조망]
"중종과 단경왕후의 사랑 이야기"와 쪽바리들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올랐던 [인왕산 석굴암]에서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하산합니다. 내려 갈때엔 9분 걸리더군요.
[인왕산스카이웨이]와 [수성동계곡]이 보입니다.
[계단 내림길]
[헤드폰 스님]
헤드폰을 끼고 슬리프를 신고 하산하는 현대식 스님이 좀 야릇하게 보이고....
['석굴암 출입구'] 1:40
9분여 만에 [석굴암] 입구를 나가면...
['인왕스카이웨이']
[인왕스카이웨이]가 다시 이어지고
['무무대' 입구] 1:44~1:47
['무무대']
이어서 "무무대 無無臺"라는 전망대를 만나 조망을 합니다.
"아무것도 없구나
오직 아름다운 것만 있을 뿐..."
['수성동계곡' 조망]
우측 아래엔 새로운 각도로 "수성동계곡"이 보이고
['서촌'과 '남산' 조망]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의 마을 "서촌"이 펼쳐지며, '한양도성'의 남쪽 산인 "남산"이 조망됩니다.
['청와대'와 '백악산' 조망]
동쪽으로는 '청운동'과 "백악산" 그리고 "청와대"가 지척에 보입니다.
바로 아래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살던 집이 있지요.
며칠전 뉴스에 "정몽구"에게 상속된 집을 다시 그의 아들인 "정의선"에게 상속했다고....
['인왕스카이웨이']
[무무대]에서 다시 [인왕산스카이웨이]를 12분여 진행하면....
['시인의 언덕' 정자] 1:59
['시인의 언덕'] 2:00
"시인의 언덕"이라는 곳을 지나는데,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며 만들었다고...
"윤동주 시인"은 '중국 길림성'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로 유학을 왔죠.
그리고 지금의 '연세대 문과'에 진학하고 학교를 다니기 위해 서울에서 하숙생활을 했지요.
하숙집이 이 아랫쪽 '누상동'에 있어서 가끔 '인왕산'에 올랐나 봅니다.
하숙샐활을 하던 학창시절에 현재까지 알려진 대부분의 詩를 지었죠.
너무나 짧은 29세의 나이로 요절했으니 안타까움만 남기고 별나라로 갔습니다.
이곳 "시인의 언덕"엔 그의 대표작 중에 하나인 "서시 序詩" 詩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 안내문에 있는 '장안연우' 파란문 촬영본]
['간송미술관' 소장 '장안연우' 촬영본]
또한 이곳 "시인의 언덕"엔 "겸재 정선선생"이 그린 "장안연우(長安烟雨)"라는 그림판도 있습니다.
장안연우(長安烟雨), 1741~42년경,
지본수묵, 30.0 x 39.9 cm,
간송미술관 소장
봄을 재촉하는 이슬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서울 장안을 이곳 쯤에 해당하는 북악산 서쪽 기슭에 올라가 내려다본 정경이랍니다.
연무(煙霧)가 낮게 드리워 산 위에서는 먼 경치가 모두 보이는 그런 날이었던 모양으로,
남산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멀리는 관악산 우면산 청계산 등의 연봉들이 아련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겸재 선생"이 전반의 생을 보냈던 북악산 서쪽 산자락과 후반의 생을 산 인왕산 동쪽 산자락이 마주치며
이루어 놓은 장동(壯洞) 일대의 빼어난 경관을 눈앞에 깔면서 나머지 부분들은 연하(煙霞)에 잠기게
하여 시계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꿈속의 도시인 듯 환상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킨 서울 장안의 진경이라고...
['장동팔경첩'을 그린 위치도]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경교명승첩 (京郊名勝帖)"-"장동팔경첩"의 위치도 입니다.
백과사전 인용합니다.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 각 폭은 세로 20.8~31㎝, 가로 16.8~41㎝. 간송미술관 소장.
1권으로 되어 있었으나 1802년 2권으로 개첩되었다.
상첩에는 정선이 양천(陽川-지금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등촌동 일대) 현령으로 재임하던
1740~41년에 친구 이병연(李秉淵)과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자는 약속을 위해 그렸던 양천팔경을
비롯하여 한강과 남한강변의 명승도들이 수록되어 있다.
하첩은 상첩보다 10여 년 뒤에 그려진 것으로, 서울 주변의 실경도들과 함께 타계한 이병연을
회상하며 양천에 있을 때 그로부터 받은 시찰(詩札)을 화제로 한 그림들이 실려 있다.
상·하첩에 모두 33점이 수록되어 있으며 파묵(破墨)·발묵(潑墨)·훈염법(暈染法)에 토대를 두고 발전된
그의 60대 후반에서 70대 중반의 독창적인 진경산수의 특색과 변모의 과정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시인의 언덕' 전망대]
['윤동주문학관' 갈림길] 2:03
"시인의 언덕 전망대"를 지나면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을 만나는데
직진하면 "창의문"으로 갑니다만, "윤동주문학관"을 들리려면 우측으로 내려 가는게 좋더군요.
우측으로 30m쯤 내려 가면...
['윤동주문학관' 조망]
[윤동주문학관]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파라솔이 있는 곳은 카페입니다.
[카페 '별뜨락'] 2:05~2:23
날씨도 덥고해서 먼저 "별뜨락"이라고 하는 노천 카페를 먼저 들려 시원한 팥빙수 한그릇 먹었는데
6,000원으로 값도 착하고 맛도 있었습니다. 20여분 휴식을 취하고
['윤동주문학관'] 2:23~2:32
"윤동주문학관"으로 들어 갑니다.
이 문학관은 예전에 '청운동 배수장'이었는데, 저수조를 개조하여 문학관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윤동주 시인"이 활동하던 시대에 함께 활동한 文人들의 요즘 문학관을 가보면 어마어마 한데
제가 다녀본 문학관 중에선 가장 소규모 문학관이며 가장 허름한 문학관 건물이어서 더욱 가슴 아팟습니다.
"윤동주문학관"은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제1전시실]엔 그의 유고와 생애를 알리는 사진들이 있었는데 열평 남짓 너무 비좁아 발 디딜 틈도 없고
특히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짧은 생애여서 전시 할만한 유물들도 없겠지만 너무 비좁아 그의 짧은 인생을 보는듯...
['윤동주문학관 제2전시실']
여기가 [제2전시실]입니다.
예전에 배수장의 '저수조'였답니다. 지금이야 수돗물이 집집마다 송수되어 이런 배수장이 필요 없어서
문학관으로 꾸몃다고하는데 무얼 형상화 한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 감옥에서 옥사한 "윤동주 시인"을 생각케 하는군요.
그리고 앞에 있는 철문 안이 [제3전시실]인데 "윤동주"에 대한 영상물을 상영하는 곳이더군요.
윗층이 조금 전 팥빙수를 먹었던 카페 "별뜨락"
['청운동'과 '남산' 조망]
"윤동주문학관"에서 '청운동'과 남산을 조망하고...
조금 전 "겸재 정선선생"이 그린 [장안연우]라는 그림의 '남산'과 비교해 봅니다.
여기서 좌측을 보면...
['자하문고개'] 2:32
[자하문고개]가 있습니다.
이 아래로 [자하문터널]이 뚫려 한산해 졌지만 제가 학창시절엔 [세검정-평창동]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 가야해서 엄청 복잡했던 고개 였습니다.
[1.21사태] 때에 일등 공신이었던 "최규식 종로경찰서장"과 "정종수 경사 순직비"가 있습니다.
건너가서 좌측 [창의문]으로 올라 갑니다.
['창의문' 입구 - '청계천 발원지'] 2:33
[창의문 입구]에는 "청계천 발원지"라는 표지석이 설치되 있는데
[한양성] 안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유일한 개천이 "청계천"이죠.
['창의문']
"창의문 彰義門"
'한양성'엔 四大門과 四小門이 있었죠.
이 문은 "서대문(돈의문)"과 "북대문(숙정문)" 사이에 있는 "북소문"에 해당합니다만
"북소문"이라 하지 않고 "자하문 紫霞門"이라고 부르죠.
'노을빗 물드는 서쪽 문'이라는 의미.
우측길은 [한양성 순성길]의 [북악산 입구]이죠.
여기 들어 가려면 반드시 신분증이 있어야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창의문"]
인왕산 자락과 북악산 자락이 서로 마주치는 골짜기 능선 위에 날아갈듯이 지어진 문루와 성문,
그 좌우 인왕산과 북악산 능선을 따라 날개를 펼치듯 뻗어나간 성벽. 마치 날개를 퍼덕이며
내려 앉은 한 마리의 독수리 같은 형상이라고 합니다.
'청운동 계곡'이 어떠했었는지 느낄수 있군요.
['창의문'] 2:35
[안내문]
"인조반정"의 쿠데타 세력들이 거사에 성공하고 '세검정'에서 피뭍은 칼을 씻고
이 문을 통과했다니 이 문의 이름 "彰義"의 의미가 홰손된 것은 아닐까
['빙수집'] 2:40
"창의문(자하문)"을 통과하여 [세검정] 방향으로 조금 내려 가니 길가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뭔일인가 보니 "부빙-부암동 빙수집"이라는 빙수집에 들어 가기 위해 이 여름 뙤양볕에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계절 운영하는 빙수집으로 명성이 자자한듯...
['부암동 주민센타' 조망]
[무계원]으로 가기 위해 빙수집에서 조금 더 내려 가면
길 건너편에 "부암동주민센타"가 보입니다.
주민센타 앞으로 가서
['부암동 주민센타' 우측 골목] 2:43
"부암동주민센타" 우측 골목으로 올라 갑니다.
50m 쯤 올라 가면...
[삼거리] 2:46
이렇게 생긴 삼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에 [무계원]이 있더군요.
['무계원'] 2:47~2:50
[안내문]
"무계원 武溪園"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살던 집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안평대군]이 꿈을 꾼 중국의 '무릉도원'과 비슷해 화가 "안견"에게 [몽유도유도]를
3일만에 그리게 한곳이며 정자를 짓고 활쏘기를 하던 유서 깊은 곳이랍니다.
다만 이 한옥들은 '종로구 익선동'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등록 음식점1호인 "오진암"을
헐면서 자재를 이송해와 이곳에 복원했답니다.
그러니까 이 한옥은 "오진암"이라는 기생집이었던거죠.
[남북 7.4공동선언문] 작성의 밀실이기도했으며 북한 관리들을 접대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제가 학창시절까지 살았던 집이 '종로구 익선동'의 "오진암" 건너편 한옥이어서 잘 알고 있죠.
제가 살던 한옥도 허물어지고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더군요.
[정문]
['행랑채-안채-사랑채']
지금은 "부암동"의 전통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답니다.
안에서는 국악 강습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안채']
['사랑채']
['뒷마당']
국악 전수를 하는 소리가 들리는 "무계원"을 횅하니 둘러 보고....
['현진건 집터'] 2:51~2:55
[무계원]에서 조금 올라 가면 "현진건 집터"라는 표지석을 만납니다.
"현진건"이라고 하면 무슨 작품이 떠 오르나요?
저는 먼저 [운수 좋은 날]이 떠 오릅니다. 운수 더럽게 없는 날의 반어법을 구사한 [운수 좋은 날].
"현진건선생"은 소설가 이전에 언론인이었죠. 보성고보를 다니다 일본 도쿄의 '세이죠학교'를 다니다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 호강대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귀국해서 조선일보에 들어 갔다가 동아일보로 옮겨
10여년을 사회부 부장으로 근무했죠. 이 때에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손기정선수"의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을 발행하는 [일장기말소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살이를 하고 직장 짤리고...
일본을 철저히 배격한 반일 저항가 "현진건"은 그 후 비참한 삶을 살게 되죠.
시골에 내려가 닭을 키우다 망하고...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면 편안히 살게 해 주겠다는 일본의 회유를
끝까지 거부하였기에 가난 속에서 살았답니다.
운수 더럽게 없는 "운수 좋은 날"이 탄생되는 배경이기도 하지요.
춘원 이광수, 김동인, 주요한등 친일 문학인들을 경멸하고, 홍난파, 김동진등 친일 음악인들을 배척하며
가난해도 친일은 할수 없다는 그의 항일정신은 더럽게 운수 없는 "운수 좋은 날"이 되고 맙니다.
양계업을 하며 쓴 소설들도 가난을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하고 43세의 짧은 생을 살고
한 줌의 재가 되어 한강에 부려진 "현진건"...그래서 무덤도 없답니다.
토착왜구들이 들끓는 요즘에 귀감이 되는 분이라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 온것입니다.
['현진건 집터'와 '안평대군 집터'] 2:57
[무계원]에서부터 이곳 "현진건 집터"까지의 주변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살던 집터라고
하는데 육중하고 높은 담벼락과 철문으로 넘 볼수가 없었습니다.
[안평대군]은 형인 [수양대군]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는 것에 반대해 형으로 부터 죽임을 당했죠.
[현진건]은 이곳에서 집필 작업을 하며 말년을 보내다가 생을 마감 했답니다.
서울시에서 이 땅을 매입하여 기념관이라도 지을려고 했지만 땅 주인의 거부로 못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더군요.
[골목]
[현진건 집터]에서 골목을 따라 조금 더 올라 가면...
['반계 윤웅렬 별장']
[안내문]
"반계 윤웅령 별장"이라는 안내판을 만납니다.
안내판에는 '개화파 지식인 윤치호'의 아버지가 "반계 윤웅렬"이라고 소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윤웅렬"은 구한말 군부대신 등을 지낸 무관이었으며, 1910년 10월 한일 합방 조약 이후
일본 제국 남작(男爵)의 작위를 받고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공채 2만 5천원을 하사받은 친일파이죠.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시기 바람니다.
[내부 촬영]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개인 소유로 안으로 들어 갈수는 없어서 담 너머 촬영을 했습니다.
[내부 촬영]
독특한 건물은 서양식 벽돌 2층 건물이라는데 밖에선 조금 보이더군요.
이 집은 "이건창호"의 회장이 매입하여 보수공사를 하고 한옥의 변천사를 연구 했다나 뭐래나
[내림길] 3:02
[윤웅렬 별장]을 담너머 구경하고 내려 갑니다.
['세검정' 가는 길] 3:10
[부암동주민센타]를 지나 [세검정] 방향으로 조금 내려 가면...
['서울미술관']
"석파정 서울미술관"을 만납니다.
여기서 좌측을 보면...
['삼계동' 입구] 3:11
['삼계동' 정문]
"三溪洞"이라는 현판이 붙은 대문이 보입니다.
이 문은 잠겨 있어 들어 갈수 없고...
['대원군 별서' 조망]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고....
['석파정' 입구] 3:14
'대원군' 이후 [석파정]은 왕실 후예들에게 차례로 대물림되었는데 한국전쟁 뒤로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던 [콜롬바 고아원]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개인 소유(오리온그룹회장)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술관과 함께 입장료를 받고 출입시키고 있는데, 입장료가 만만치 않습니다.
결국 개인 소유로 돌아가 값을 지불해야만 구경할수 있어 씁쓸했습니다.
['대원군 별서']
석파정은 원래 철종 때 영의정까지 지낸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의 별서였답니다.
"별서"와 "별장"은 좀 다른 의미믈 가지고 있지요.
'별장'은 가끔 들려 쉬는 곳이고, '별서'는 자주 기거하는 곳이죠.
"김흥근"이 누구입니까. '김조순-김좌근-김병근"등으로 이어지는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막장드라마가
[철종] 대의 영의정까지 지내는 "김흥근"입니다. 이 놈은 하도 부정부패가 심해 유배도 가기도 했으나
다시 오뚜기처럼 일어나 세도정치를 이어간 놈이죠.
"김흥근'이 집을 지을 그 때엔
집 뒤에 '三溪洞'이라고 새긴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로 불렸다 합니다.
그러다가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그의 소유가 되었으며 이름마저 "석파정"으로 바뀌었다고...
그렇게 이름붙인 까닭은 앞산이 모두 바위[石] 언덕[坡]이기 때문이며,
'石坡'라는 대원군의 아호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라 합니다.
일설에는 석파정의 소유가 바뀔 때 대원군이 빼앗았다는 말이 전하는데,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전하기에 그 글을 인용합니다.
'김흥근'은 북문 밖 삼계동에 별장이 있었는데, 장안의 으뜸가는 명원(名園)이었다.
대원군이 그 별장을 팔라고 하였으나 흥근은 거절했다.
대원군은 다시 청하길 '하루만 놀이에 빌려달라'고 했다.
그 무렵 별장이나 정자를 가진 사람은 남들이 놀이에 빌려달라고 하면 부득불 허락하는 것이 한양의
풍습이어서 흥근은 마지못해 허락했다. 대원군은 마침내 임금께 한번 행차하기를 권해 (임금을) 모시고 갔다.
흥근은 임금께서 임했던 곳을 신하의 의리로는 감히 다시 쓸 수 없다 하여 다시는 삼계동에 가지 않았으므로
[삼계동정사]는 마침내 대원군의 소유가 되었다.”
['巢水雲簾菴(소수운렴암)']
[안내문]
커다란 바위 단면에는 "巢水雲簾菴’(소수운렴암)"이라는 각자가 있습니다.
그 뜻은 "구름 발 드리운 물 위의 암자"라는 뜻이랍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의 글씨라고 하는군요.
['삼계동' 각자]
[안내문]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
[안내문]
특이한 건물은 집 왼편 계곡 위에 걸쳐진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라는 누각인데
일반적으로 "석파정 石派亭"이라고 불리워지는 樓라고 합니다.
[유수성중관풍루 流水聲中觀楓樓]의 뜻은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단풍을 바라보는 누각"이라는데
지붕에 기와 대신 동판을 덮었습니다
['너럭바위']
[안내문]
'코끼리바위'라고도 부른다는 "너럭바위"
['서울미술관' 앞 조형물]
미술관 앞 조형물을 끝으로 [인왕산자락길]을 마침니다.
[구글어스]
[고도표]
오늘 걸은 거리는 7.3km 정도 였으며, 3시간반이 걸렸습니다.
[석굴암]을 다녀오지 않는다면 가족과 함께 즐길수 있는 코스라고 생각됩니다.
서울에 이런 풍광을 가진 계곡 숲길이 있다는데에 감명 받았으며
제가 추천하는 코스가 되겠습니다.
2019년 7월 19일 (금) 맑음
'서대문구 연희동' 근처에서 "안산 자락길"을 가는 코스를 자주 이용하고 있다는
친구의 부름을 받고 제법 더운 날에 길을 나섯습니다.
[지하철2호선 홍대입구역]에서 내려 [동교동삼거리 버스정류장]에서 [153번 버스]를 타고
"서대문자연사박물관 버스정류장"에 내려 답사를 시작합니다.
['한국고려인삼']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입구']
[한국고려인삼]이라는 외국인 상대 인삼판매점이 있는 골목으로 올라 갑니다.
이 길은 "서대문자연사박물관"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더군요.
100m 정도 올라 가면...
['서대문자연사박물관'] 2:10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을 만납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학교나 개인이 아닌, 지방 자치 단체에서 직접 계획하고 만든 자연사박물관이랍니다.
지구의 탄생에서부터 생존했던 공룡등 동식물들과 우주에 대한 학습프로그램이 있다는군요.
['연북중' 앞 ] 2:13
이어서 [연북중학교] 후문 앞을 지나며 자락길은 시작됩니다.
[운동시설] 2:23
주민들의 건강생활시설들이 곳곳에 설치되 있었습니다.
['안산자락길' 안내도]
"안산 자락길"은 "안산 鞍山"의 허릿길을 한바퀴 빙 도는 평지성 둘레길이더군요.
거리는 "7km"
[전망대1] 2:25
잠시 진행하면 첫번째 전망대를 만나는데 [지하철3호선 홍제역] 방향에 있어서
[북한산]이 새로운 각도로 조망되었는데
['북한산' 조망]
기온은 높으나 습도가 낮아 가시거리는 [북한산]까지 시원하게 열립니다.
여름철에 이런 하늘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행운
[데크길]
[안산 자락길]은 이렇게 데크를 설치해서 걷기 편하며, 길을 잃을 염려도 없어서 좋더군요.
[전망대1]에서 5분여 데크길을 진행하면...
['흔들바위'] 2:30
"흔들바위"라고 알리는 바위를 만나는데...글쎄 흔들거릴듯한 바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친구의 설명으로는 윗 바위가 원래 흔들바위 였는데 사람들이 흔들어 넘어뜨렸다나 뭐래나 ㅎ
['너와집 쉼터' 입구] 2:33
"너와집"은 자락길 데크를 약간 벗어나 있어서 관심가지고 가야 볼수 있더군요.
데크길에는 안내판까지 없어서 모르면 그냥 지나칠수 밖에 없는데 저는 친구의 안내로 올라 가
구경하고 다시 내려 왔습니다.
['너와집 쉼터']
[너와집]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 이런 너와집이 있다는 것도 좀 생소한데...
사람이 거주하는듯 하더군요.
[쉼터] 2:43
몇군데 광장같은 쉼터를 만들어 놨고
[자락길]
계속 데크길을 진행하면...
[전망대2] 2:46
두번째 전망대를 만나는데 [무악재] 근처에 있는 전망데크였습니다.
조망을 하면...
['북한산' 조망]
'홍제동' 방향 아파트들과 "북한산"의 [서부능선-비봉능선]이 조망됩니다.
['인왕산' 조망]
건녀편에는 "인왕산"이 지척에 있는데
[인왕산]과 [안산] 사이의 고개가 "무악재"란건 모두 알지만...
[안산]과 [인왕산] 사이가 "말의 등"처럼 생겼다고 "안부 鞍部"라고 했으며
조선시대 풍수지리설에 의해 "모악재 母嶽재"라고 했다는데,
[북한산]의 본명인 "삼각산"에서 [인수봉]이 [백운대]의 등에 엎혀있는 어린이 같다고
"부아산 負兒山"이라고 했으며 고지도에는 [삼각산]의 별칭이 [부아산]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풍수지리의 대칭으로 이곳 고개를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다는 "모악재 母嶽재"라고 했다는데
세월이 흐르며 음운변화로 [무악재]가 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더군요.
[자락길]
다시 10여분 자락길 데크를 걸으면...
['북카페 쉼터'] 2:56
다양한 형태의 쉼터들도 있고
['서대문형무소터' 조망]
일제 강점기 시대의 유물인 '서대문형무소'등이 있는 "서대문독립공원"이 조망됩니다.
['남산' 조망]
"목멱산"이라는 본명을 두고 일반명사인 "남산"으로 쓰는 "목멱산"이 가까이 보이고
뒤엔 '잠실'에 있는 [롯데월드타워]까지 보이는데, 그 뒤엔 [병자호란]의 아픔을 간직한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과 [검단산]이 조망됩니다.
[경복궁]에서 [남한산성]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커피점] 3:23
장애인이 운영한다는 트럭 커피점도 자락길에서 볼수 있군요.
커피 한잔 사 드릴까?라고 생각했는데....덥다는 핑개로 또 못사드리고...ㅠ
화장실만 들렸다가 계속 자락길을 진행합니다. 10여분 진행하면....
['서대문' 방향 갈림길] 3:37
[안산 자락길]에서 가장 남쪽 끝에 있는 삼거리에 도착하는데...
직진하면 [서대문로타리] 방향으로 가는듯 했고, [자락길]은 우측으로 360도 꺽어 올라 갑니다.
[전망대3] 3:38
세번째 전망대에 도착하면 "안산 정상"이 키높이를 맞추며 조망됩니다.
"안산 鞍山"은 東峰과 西峰으로 이루어져 "말 등 안장"과 같이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여기서 조망하니 그 이름이 생긴 이유를 확실히 알겠습니다.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 전국 각지로 연결되는 통신망의 "시종점"이 되는 봉수대가 있었던 곳이죠.
요즘으로 치면 [초고속통신망]의 본거지라 할수 있으며, 전국각지에서 올라 오는 정보가
바로 [경복궁]으로 전달되는 곳이었으니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가희 짐작할수 있습니다.
[부산 오륙도] 앞 [장산봉]에서부터 30여분이면 이곳까지 연락되었다고 하니
당시로는 [초고속5G]였다고 할수 있는 봉수체계였답니다.
['인왕산' '백악산' 조망]
['청와대' 조망]
['서울시 종로구' 조망]
새로운 각도로 서울을 조망하고
['능안정'] 3:44~3:53
['능안정' 유래]
"능안정 陵安亭"에 올라 좀 쉬어 갑니다.
[운동시설] 3:54
운동시설이 있는 쉼터를 지나면
['안산' 정상 방향]
[안산 정상]의 서남쪽으로 돌아 가는데, 이름이 있을 듯한 바위가 보이고
[약수터 쉼터] 4:08~4:23
[약수터]
이어서 약수터 쉼터를 만납니다.
['메타세콰이어숲']
['숲속무대'] 4:28
['메타세콰이어숲']
약수터를 지나면 [메타세콰이어숲길]이 이어지며
중간에 필요 이상으로 매우 너른 쉼터도 있고
['연북중' 앞] 4:42
2시간반 정도 걸려 [안산 자락길]을 돌아 다시 [연북중학교 후문]으로 와서
['서대문자연사박물관' 버스정류장] 4:48
['서대문자연사박물관'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신촌로터리]로 나가
['신촌' 갈비집에서 뒷풀이]
친구가 다니는 오랜 단골집인 [소갈비집]에서 그나하게 한잔하고 돌아 왔습니다.
[구글어스]
공식적으로 알려주는 거리는 7km입니다만, 버스정류장에서부터는 8.5km였습니다.
쉬엄쉬엄 걸으니 2시간반이 걸렸습니다.
『서울둘레길』
제3코스 고덕산구간 재답사기
암사역-암사선사유적지-아리수정수장-고덕산-샘터공원-방죽궁원-명일공원-일자산입구
“세계적 도시 서울”
자랑스러워 해도 될 세계적 도시 - 서울
그 도시를 한바퀴 도는 "서울둘레길"
다시 가 보는 "고덕산 구간"
['국토지리원e맵']
[구글맵]
[구글어스]
[서울둘레길]이 완전 개통되기 전 2013년도에 예정코스를 답사해 본 적이 있으나
당시 [암사-구리대교]를 건설중에 있어서 길이 없어 현재의 코스로 답사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완전 개통된 길을 걸어 보기위해 다시 길을 나섯습니다.
"암사역"에서 출발하여 "고덕산 정상"을 오르고 "명일동 일자산입구"까지 약8km를 진행합니다.
['암사역 4번출입구']
['암사선사유적지' 방향] 10:50
2019년 5월 13일 (일) 맑음
[서울둘레길3코스]는 [광나루역]에서 출발하지만, 2013년도에 [광나루역]에서 [암사선사유적지]까지
답사 한바있어서 "암사역4번출구"에서 출발합니다.
직진해서 200m 정도 진행하면...
['선사사거리'] 10:54
"선사사거리"를 만납니다.
이곳은 [광나루역]에서 오는 [서울둘레길3코스]가 지나는 곳이어서, 여기서 [서울둘레길]과 정식으로
합류하여 진행합니다.
['암사동 주변' 지명의 유래]
[암사동] 주변 동네의 지명의 유래를 참고하고 조금 더 직진하면...
['암사동 선사유적지 주차장']
['암사동 선사유적지 정문'] 11:01
"암사동 선사유적지"를 만납니다.
지난번에 들어가 보았기에 이번엔 생략하고 진행합니다.
[선사유적지 울타리]
선사유적지 울타리를 따라 진행하면...
['유적지 내부' 조망]
선사유적지 내부도 들여다 보고
[유적지 울타리]
선사유적지 울타리를 따라 울타리가 끝나는 곳까지 진행하면...
[선사유적지 끝지점]
['서원마을' 로타리] 11:08
선사유적지가 끝나는 지점에 "서원마을 입구" 로타리가 있습니다.
계속 직진해 100m 정도 진행하면...
[갈림길] 11:10
포장도로가 우측으로 휘어져 가는 곳에 이정표가 있으며 직진하라고 알려 줍니다.
직진방향엔 [구리-암사대교] 날개부분 굴다리가 있습니다.
[구리-암사대교]가 완공되기 전 공사중이었을 때에는 여기서 우측으로 빙 돌아 [고덕산]으로 갔었습니다.
우측을 바라보면...
[옛 서울둘레길]
[서원마을] 뒷산으로 올라가 길을 개척하며 진행했었지요.
2013년 당시 진행한 길을 참고로 알아 보면...
['옛 서울둘레길' 구글어스]
['현 서울둘레길' 구글어스]
2013년도엔 길이 없어 [암사아리수정수장]을 빙 돌아 갔었는데
지금은 간단하게 [고덕산]으로 갈수 있어 편리해졌습니다.
"옛 답사기"를 참고하실 분들은 아래 클릭 -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낌니다. ㅎ
[서울둘레길 고덕산구간 답사기] http://cafe.daum.net/paraanmoon/MjWt/6
['8호선' 연장공사]
['8호선 연장-별내선 연결' 공사중] 11:16
[구리-암사대교] 날개 굴다리를 직진해 통과하면
[별내선(8호선연장구간)] 공사현장을 지나고
[갈림길]
이어서 언덕을 하나 넘어가는 갈림길을 만나는데
[올림픽대로]에 갓길이 없어 언덕을 넘어가라고 길을 만들어 놨군요.
['아차산-망우산' 조망]
언덕으로 올라 가면 '한강'과 [아차산] [망우산]이 조망되고
['구리시' 조망]
[구리시]도 조망됩니다.
['암사아리수정수센타' 입구] 11:21
언덕을 내려 가면 "암사아리수정수센타" 후문 입구를 만나는데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암사아리수정수센타' 후문]
"암사아리수정수센타" 후문 앞에서 [서울둘레길]은 좌측으로 안내됩니다.
['고덕산' 들머리] 11:24
정수센타 후문 앞에 있는 "고덕산 들머리"입니다.
등산로로 조금 올라 가면...
['암사아리수정수센타']
"암사아리수정수센타" 본관이 보이고...
[오름길]
[합류지점] 11:28
완만한 오름길을 4분 정도 올라 가면 우측에서 오는 길과 만나는데
[옛 둘레길]이 [암사정수장]을 한바퀴 빙 돌아 오는 길입니다.
이젠 간단하게 "고덕산'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정상 삼거리] 11:29
이어서 바로 [고덕산 정상 삼거리]를 만나는데
좌측에 있는 [고덕산 정상]을 다녀와 우측으로 가야 합니다.
['고덕산' 정상부]
삼거리에서 좌측 계단을 잠깐 오르면...
['고덕산 정상'] 11:30
"고덕산 高德山 85.4m"
고려의 충신 "석탄 이양중 石灘 李養中"이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며
이곳 산자락에서 은둔생활을 하여 그의 큰 덕성을 보고 기리며 산이름을 "高德山"이라 했다는군요.
['강동대교' 조망]
[강동대교]와 [구리시] 방향이 조망됩니다.
[내림길]
[갈림길]
[사거리]
[서울둘레길] 길안내는 거의 완벽합니다.
[고덕산] 정상에서 능선으로 연결된 산길을 20여분 진행하면...
[고개] 11:52
[봉우리]
고개 사거리를 통과하여 조그만 봉우리를 8분여 지나고
['아리수로'] 12:00
이어서 [아리수로]라고 하는 [암사동]에서 [강일동]으로 통하는 도로를 만납니다.
여기서 앞에 [샘터공원]이라고 표기한 숲으로 갑니다.
['포천-서울-세종 고속도로' 공사중]
[포천]에서 [구리]까지는 이미 개통된 고속도로를 [세종시]까지 연결하는 고속도로 건설공사가 진행중
['샘터공원삼거리']
"샘터근린공원삼거리"에서 공원으로 들어 갑니다.
['샘터공원' 입구] 12:07
"샘처근린공원 입구"에는 배드민튼장 건물이 있는데 건물 앞으로 공원길이 있습니다.
[오름길]
[봉우리 정상]
[쉼터및 운동시설]
"샘터근린공원"을 6분여 통과하면...
['고덕보도육교'] 12:13
"고덕보도육교"를 만나는데 여기까지가 [샘터근린공원]이고
육교를 건너면 "방죽근린공원"이 시작됩니다.
[오름길]
"방죽근린공원"을 3분 정도 올라 가면...
['무장애숲길' 앞] 12:16
이정표가 우측으로 가라고 알리는 곳을 만나는데
이정표 뒤에 [무장애숲길]이 있습니다.
제가 2013년도에 왔을때 공사중이었는데 완공되었군요.
무장애숲길을 이용해도 잠시후 [둘레길]과 만납니다.
[무장애숲길]
무장애숲길을 5분여 편하게 진행하면...
[사거리] 12:21
이정표가 있는 사거리를 만나는데
[서울둘레길]은 여기서 좌회전합니다.
['방죽공원 소운동장'] 12:23
[방죽근린공원 소운동장]을 만나는데 운동회를 하고 있군요.
운동장을 우측으로 돌아 나가면...
['고덕로'] 12:27
[고덕로]를 만납니다.
우측엔 [고덕평생학습관]과 [온조대왕체육관]이 있습니다.
[고덕로]를 건너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고덕역-이마트' 방향]
[고덕역]과 [이마트 명일점]으로 가는 길을 진행하고
[인공폭포]
'인공폭포'가 있는 사거리에 도착하면...
['이마트 명일점'] 12:30
[이마트 명일점]이 있는데 [서울둘레길]은 좌측으로 연결됩니다.
['명일공원' 들머리]
"명일근린공원 입구"입니다.
[서울둘레길]은 [강동그린웨이]와 함께 갑니다.
['명일산책길']
[숲길]
[봉우리 정상부]
"명일근린공원"을 13분여 진행하면...
['중앙하이츠아파트' 앞 사거리] 12:43
[중앙하이츠아파트] 앞 사거리를 지나고
['한영고' 앞 육교] 12:57
이어서 [한영고 앞 육교]를 통과합니다.
[동쪽 '강동고' 조망]
[서쪽 '한영중.고' 조망]
육교 위에서 동쪽과 서쪽을 조망하는데, [강동고등학교]와 [한영중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오름길]
[운동시설]
[숲길]
[내림길]
계속해서 [명일근린공원]을 10여분 진행하면...
['명일공원' 날머리] 1:12
[명일근린공원 날머리]에 도착하는데 직진합니다.
[꽃집]
꽃집들을 지나면
['천호대로'] 1:16
[천호대로]를 만나며 [서울둘레길 일자산]으로 가는 이정표가 길안내를 합니다.
오늘은 [서울둘레길]이 개통되기 전에 다녀간 [고덕산구간]을 답사하기 위해 왔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답사를 하고 마칩니다.
걸은 거리는 약8km로 2시간 20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2018년 4월 18일 (수) 맑음
[지하철1호선 종각역 5번출구]로 나가면서 [청계천 나들이]를 시작합니다.
이곳은 옛날에 "황성신문사"가 있었던 자리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보신각']
건너편에 있는 "보신각"을 흘깃 보고
['서린동']
'서린동'을 통과하여 [청계천]이 흐르는 세종로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광통교'에서 '모전교' 조망]
[청계천]의 두번째 다리인 "광통교" 위에서 첫번째 다리인 "모전교"를 바라보고
[청계광장]으로 올라 갑니다.
['청계광장'앞 청계천 출발지]
'세종로'에 조성된 "청계광장"과 청계천의 시작을 알리는 분수와 폭포가 우릴 반깁니다.
분수는 '캔들'모양 분수이고 4m 아래로 떨어지는 2단 폭포가 제법 멋을 더합니다.
폭포 양 옆에는 전국에서 돌을 가져와 8도석으로 제작된 "팔석담"을 깔았다고 하는군요.
밤에 오면 휘황 찬란한 조명으로 더욱 아름답더군요.
얼마 전 '청계천 등불축제' 할때 촬영한 사진 보여 드리면...
[분수에서 청계천 조망]
'캔들 모양' 폭포 뒤에서 진행방향을 바라보고
[청계천]으로 내려가 유람을 시작합니다.
['모전교']
"모전교 隅廛橋"는 [청계천]의 첫번째 다리랍니다.
"모전교"는 다리 근처 길모퉁이에 과일을 파는 과전(果廛)이 있었는데, 그 과일가게 이름이
'모전[隅廛]'이어서 그 "모전" 부근에 있는 다리라고 "모전교"가 되었답니다.
깊은 뜻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과일가게' 이름에서 유래하는군요. ㅎㅎ
[가장 넓은 곳]
공원화 된 [청계천]에선 가장 넓은 곳인데...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는데, 주로 버들치와 피라미, 잉어등이 살고 있더군요.
['광통교']
['광통교' 하부]
[청계천]의 두번째 다리인 "광통교 廣通橋"는
지금의 '보신각'이 있는 종로 네거리에서 을지로 네거리 방향으로 나아가다가 청계천에 있던 다리인데
조선시대 "광통방 廣通坊" 근처에 있던 큰 다리였으므로 "대광통교 大廣通橋", 또는 "광교 廣橋"라 했답니다.
"광통방 廣通坊"은 조선시대 초기 도성인 한성부를 나누어 관할하던 관청 11개 중에 하나였답니다.
지금의 '洞'사무소와 비슷한 업무를 하던 관청이었다고하면 이해가 쉽죠?
['광통교'의 '신장석']
['광통교' 다리에 얽힌 사연]
"광통교" 다리에 얽힌 사연은 위의 안내문을 참고 하시고...제가 추가로 더 상세히 알려 드림니다.
"태조 이성계"의 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는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하고 왕위에
오르기 한해 전에 죽어 왕비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정종" "태종 이방원"등 6남2녀를 낳았죠.
조선의 초대 왕비는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 차지가 되었고 두 아들을 낳았는데
"방석"과 "방번"이 그들이죠.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를 무지 사랑하였다는 것은 너무 알려져 있죠?
그래서 본처인 "신의왕후"에게서 낳은 아들들을 팽개치고, "신덕왕후"에게서 낳은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죠.
비극의 시작 이었습니다.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도 일찍 죽자 "태조 이성계"는 [덕수궁] 근처에 릉을 조성하였죠.
城 안에 릉을 조성하지 않는게 일반적인데 얼마나 애통했으면 사랑의 표시로 특별히 사대문 안에
조선왕조 유일의 릉을 조성하고 "정릉"이라고 호칭하며 원찰까지 세워 추모할 정도 였겠습니까.
"태조 이성계"는 매일 "신덕왕후 릉"에 행차하는게 하루 일과 중에 하나였다고 할 정도였으니...
"이성계의 본처"인 "신의왕후"의 다섯번째 아들인 "이방원"이는
이미 세자로 책봉되 있던 이복 동생 "방석"을 죽이고...자기 친 형제들까지 죽이며...
소위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권을 장악하고, 계모인 "신덕왕후"의 릉을 파헤쳐 없애버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선왕 아버지의 부인인데 어찌 그럴수있냐고 신하들이 만류해서 성밖으로 이장을 했지요.
그러니까 "신덕왕후의 릉"인 "정릉 貞陵"은 원래 '덕수궁' 근처에 있어서 동네 이름이 "정동"이 되었고,
이장 한 후 그 동네의 이름은 "정릉동"이 되었습니다.
"태종 이방원"이 자신의 계모인 "신덕왕후"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알수 있는 또 하나의 역사유물을
이곳 "광통교"에서 만나게 되니 그 슬픈 역사가 아른거리는군요.
"신장석"으로 만든 "광통교"
정권을 장악한 이방원이 자신의 계모인 "신덕왕후"의 묘를 옮기는 과정에서 묘에 사용되었던 돌들,
즉 "신장석"을 백성들이 밟고 다니도록 제일 번화한 다리인 이 "광통교" 다리로 옮겨 다리 일부로 사용했으니
얼마나 "신덕왕후"를 미워했는지 알수 있습죠.
권력이 뭔지...예나 지금이나 그 권력을 향한 인간들의 욕망은 한결같습니다.
권력 앞에선 부모형제도 없으니...
['광교']
현재 있는 "광교"는 현대에 만들어진 다리이고, 오리지날은 조금 전의 "광통교"가 "광교"
['수표교']
"수표교 水標橋"는 복원을 하지 않고 있어 아쉬움이 좀 있군요.
오리지날 "수표교"는 현재 [장충단공원]에 가 있죠?
1959년에 청계천 복개공사를 할때 이전.
제가 [장충단공원]을 찾았을 때 촬영한 사진을 첨부 합니다.
[수표교]
"수표교 水標橋"는 조선 세종 2년(1420)에 세운 다리로,
당시에는 다리 근처에 소시장(牛市場)이 있었다 하여 '마전교'라 불리웠답니다.
세종 23년(1441) 수표(水標) [보물 제838호]를 만들어 이 다리 옆에 세우고
청계천의 물 높이를 재어 홍수에 대비하도록 하였고,
영조 36년(1760)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경(庚)·진(辰)·지(地)·평(平)’이라는 글씨를
새겨두어 4단계의 물 높이를 측정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水標橋"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청계천을 건너는 다리로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홍수 조절을 위한 알림판 역활도 하였답니다
다리에 설치되 있던 "水標"는 다리를 [장충단공원]으로 옮길 때 함께 옮겨갔다가
1973년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관수교']
['관수문']
"관수교 觀水橋"는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옛 교량 명칭이라고
['세운교']
"세운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인 "세운상가"에 놓여 있는 다리
['마전교']
"마전교 馬廛橋"
이 근처에 소와 말을 거래하는 시장인 마전 馬廛이 있었다고...
['나래교'와 동대문종합시장' 앞]
"동대문종합시장" 건물이 보이길래
시장 안으로 들어가 추억의 빈대떡과 막걸리를 한잔 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ㅎㅎ
['동대문 광장시장']
['박가네' 빈대떡집]
['빈대떡'과 '막걸리']
그래서 "동대문 광장시장" 안으로 들어가 울 칭구가 제일 맛있다고 칭송하는 빈대떡집에 들어가
빈대떡에 막걸리를 즐겼는데, 먹다 보니 막걸리 여섯병을 둘이서 마셨네요. ㅎㅎ
오랜만에 막걸리로 취하고...ㅎ
빈대떡은 한장에 4,000원이었습니다. 빈대떡 두장씩 먹고 두장씩 포장해 왔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또 한잔 더 하지 않을수 없었고...ㅋㅋ
[촬영 중]
맛집 촬영도 하고 있었고
['전태일다리(버들다리)']
"광장시장"에서 나와 다시 [청계천]을 걸어서 "전태일다리 (버들다리)"를 지나고
['오간수교']
다섯 칸의 홍예모양 水門이 있다고 "오간수교"라고 하는데
『한양 城』에 있는 유일한 水門이 있는 다리.
['오간수교' 위]
[청계천] 개천변에서 "오간수교" 위로 올라 가며 [청계천] 답사를 마치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들어 갑니다.
[뒤돌아 본 '동대문']
공원으로 들어 가기 전에 뒤돌아 보면 [보물1호]인 "흥인지문-동대문"이 조망되고
[옛 '동대문야구장' 터]
[동대문야구장]이 있던 자리는 역사문화공원으로 완전 탈바꿈했습니다.
[성문]
[동대문운동장]을 발굴하다가 나온 『한양 城』의 성곽과 성문이 복원되 있고...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너무 큰 규묘여서 구경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듯하여
다음에 시간 날때 둘러보기로 하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앞]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귀가했습니다.
[광장시장]에서 산 빈대떡을 들고....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