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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보 답사』 서울 서촌 역사유적탐방 경복궁역1번출구-필운대-홍건익가옥-노천명살던곳-이상범가옥-백호정-통인시장- 송석원터-자수궁터-박노수가옥-윤동주하숙집-수성동계곡-우당기념관-선희궁- 후천 각자-백세청풍 각자-송강 정철 탄생지-청송당-겸재 정선 집터-무궁화동산- 육상궁-세종대왕 탄신지-이상의 집-백송터-보안여관-창의궁터-경복궁역3번출입구 ['필운대' - '백사 이항복 선생' 집터] [탐방코스] "경복궁"을 기준으로 "경복궁"의 西쪽, 즉 "경복궁"에서 "인왕산" 사이에 있는 마을을 "서촌 西村"이라 하고 "경복궁"에서 "창덕궁" 사이의 동쪽 마을을 "북촌 北村"이라 한답니다. 조선조 당파싸움이 치열했던 시절 각 "당파 黨派"들이 당파별로 뭉쳐 살았는데, "西人"이라는 당파가 많이 모여 살던 곳이 "서촌 西村"이어서 그들을 "西人"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청계천 광통교"를 기준으로 "청계천" 북쪽, "경복궁" 서쪽 마을을 "웃대"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청계천 광통교"의 남쪽을 "아랫대"라고 불렀다고 하는군요. 그러니까 "서촌 西村""웃대"와 같은 지명이 된다고 합니다. 오늘은 "서촌 西村 - 웃대"의 역사유적과 이곳저곳을 탐방하려고 합니다. ['3호선 경복궁역 1번출구'] 11:33

2019년 9월 3일 (화) 흐림 [3호선 경복궁역 1번출구]에서 답사를 시작합니다. 구름이 드리운 날씨로 따가운 햇살은 피할수 있었습니다. ['사직공원' 방향]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를 나가 [사직공원]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면 "백사 이항복 집터-필운대"까지 630m라고 이정표가 알려 줍니다. 먼저 [필운대]를 찾아 갑니다. ['사직공원' 앞 삼거리] "사직공원" 앞 삼거리에서 "배화여대" 방향인 우측길로 진행하면 ['사직파출소'] ['매동초' 앞 삼거리] 11:40 [사직파출소]를 지나 다시 삼거리를 만나는데, [매동초등학교] 방향으로 직진합니다. ★ '황학정'과 '등과정'을 다녀 오려면 여기서 좌측길로 가서 구경하고 여기로 돌아 와야합니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인왕산 자락길-황학정 등과정" 여기 클릭 ['매동초등학교'] 6~70년대 서울 5대 국민학교 중에 한곳이었던 "매동초등학교" 정문을 지나면 ['배화여중고' 정문] :42 "배화여중고" 정문을 만나고, 학교 안으로 직진해 들어 갑니다. [북악산]이 조망되며 [서촌]의 위치가 가늠되고 [필운대]의 위치도 짐작 할수 있습니다. ['배화여고 생활관'] [배화학당]은 미국인 선교사 "캠벨"이 설립한 학교로서 선교 목적과 여성 계몽을 위해 설립되었다는군요. "배화여고 생활관"은 [등록문화재 제93호]로서 1916년에 건립되어 선교사들의 주택으로 이용되다가 배화여고의 생활관, 동창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배화여고' 본관 앞] [생활관]을 지나면 "배화여고 본관-캠벨기념관"을 만납니다. "배화여고"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대표 여고 중에 하나이죠. 특히 "육영수 여사"가 이 학교를 졸업해서 더욱 유명하답니다. "육여사"는 [옥천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배화여고]를 나와 [옥천여중]에서 교사 생활을 했죠. 6.25가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유부남이었던 [육군 중령 박정희]를 만나 사랑을 꽃피우다가 [육여사] 집안에서 강력한 결혼반대에 부딪치자 사랑을 위해 [육여사]는[박중령]의 근무지인 대구로 가출까지 해서 결국 결혼하고 후에 영부인까지 되었지요. 당시 박중령은 부인이었던 [김호남여사]와 이혼하고 결혼한것으로 알려져있지요 [옥천 육영수생가]에 가보니 결혼식은 [대구]의 어느 성당에서 올렸더군요. 미션스쿨인 [배화여고]를 나왔으니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는건 당연한듯 보이지만 결혼 후부터 "육여사"는 열열한 불교 신자로 [북한산 도선사]에서 "대덕화 大德花"라는 佛名까지 받았죠. 그런데 큰딸인 "박근혜 전대통령"은 성당에 다녔고... 이나저나 "필운대 弼雲臺"는 정면에 보이는 교실 건물 좌측 뒤로 가야했습니다. [교실건물 뒤] 11 :45~11:50 교실 건물 좌측 뒤로 돌아 가면 [필운대] 가 있는데...초라합니다. ['필운대' 각자] ['필운대'] "필운대 弼雲臺"- "백사 이항복선생 집터" 선생은 [오성과 한음]에서 "오성"으로 더 알려져 있지만, 호는 "백사 白沙", "필운 弼雲"이지요. [임진왜란] 전란 중에 [선조]가 어명을 거역한 죄로 [이순신장군]을 사형을 시키려 하자 "한명의 병사도 아쉬운 전란 중에 삼도수군통제사를 처형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라며 [이순신장군]을 살려 전쟁에서 이기게 한 장본인이 "백사 이항복 선생"이죠. "유성룡 선생"과 함께... '병조판서'를 다섯번이나 연임하며, 외교전에서도 외교관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명나라'의 지원을 이끌어 내고, 세자 [광해군]과 분임조를 이뤄 전란을 수습한 [임진왜란]의 일등공신 중에 한분이죠. 당시 지금의 국방장관 격인 도원수 "권률장군"의 사위로도 잘 알려져 있습죠. 하지만 [인목대비] 폐위와 그의 아들 [영창대군]의 죽임에 목숨을 걸고 반대하다가 강경 대북파의 보복을 받고 '북청'으로 유배를 가서 몇달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강원도'와 '함경도'의 경계가 되는 "철령"을 넘어 유배를 가는 도중에 읊은 詩...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리. '왕비'를 폐하고 '세자'를 죽이는 나라의 인륜 도덕이 무너졌다고 한탄하며 나라를 걱정하는 이 詩 속에 영의정까지 지낸 "백사 이항복 선생"의 정치철학이 담겨있다고 생각됩니다. 바른 말하는 인재들은 대부분 유배를 갔으니 우리의 역사를 한탄하며 되돌아 봅니다. ['이유원' '박효관'의 글] "弼雲臺"가 새겨진 바위 옆 바위에는 "이항복 선생"의 후손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감회를 적은 글이 있습니다. 좌측 글이 "이유원"이 1873년에 적은 글인데 "我祖舊居後裔尋, 蒼松石壁白雲深. 遺風不盡百年久, 父老衣冠古亦今 癸酉月城李裕元題 白沙先生弼雲臺"이고 우측 글은 "동추 박효관" 외 9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옛집 복원과 관련된 '銘文'이랍니다. 이나저나 이 곳은 "인왕산 자락"에서도 뛰어난 경관이 조망되는 아름다운 곳이어서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림까지 그린 곳입니다. "弼雲臺"라는 그 진경산수화를 감상해 볼까요? ['겸재 정선 선생'이 영조 27년(1751)에 그린 "필운대" - 간송미술관 소장] [弼雲臺]라는 각자를 새긴 바위가 보이는데 현재의 바위와 비교해 보면 짐작이 가고 바위 앞에 "이항복선생"의 자택이 고저녁하게 있습니다.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자연 속의 자택으로 경치가 뛰어나죠? 또한 [경복궁]에서 가까워 출퇴근하기도 좋았겠고... 하지만 [弼雲臺]는 현재 학교 건물에 포위 당해 후미진 곳에 방치되고 있어 아름다웠던 그 옛날은 그저 옛날로 멀어져 갔습니다만, "겸재 선생"의 그림으로라도 그 옛날을 회상 할수 있어 불행 중 다행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배화여고' 정문] 11:54 [배화여고]의 건물에 포위되어 후미진 음지에 쓸쓸히 남아 있는 "필운대 弼雲臺"- "백사 이항복선생 집터"를 돌아 보고 다소 씁씁한 마음으로 학교 정문을 나와 좌측 골목으로 잠시 내려 가면... ['홍건익 가옥' 가는 길] ['홍건익 가옥' 입구] 11:57~12:02 [wednesday]라는 커피점 옆 골목에 "홍건익 가옥"이 보입니다. ['홍건익 가옥' 대문] [안내문] "홍건익 가옥"은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한옥 중에서 일각문, 우물, 빙고까지 갖추고 있는 집은 이 집이 유일하답니다. 그래서 [민속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지역 주민들의 문화생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안채] 200평이 넘는 매우 큰 한옥으로 당시 "역관 譯官"의 지위와 경제적 풍요함을 엿볼수 있습니다. ['일각문'과 우물] ['별채 와 후원] "통역관"이라는 전문직이 새로운 지위로 격상하며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는 걸 알수 있습니다. 즉, 전문직 등이 중산층과 상류층으로 옮겨 가는 새로운 시대였다는 걸 알수 있습니다. ['홍건익 가옥'에서 '필운대로' 가는 길] 12:02 [홍건익 가옥]을 나와 [필운대로]로 나가 좌회전 하면... ['환경연합' 앞 삼거리] 12:04 "환경연합"이 있는 삼거리에 도착합니다. 여기선 "시인 노천명"이 살던 집을 찾아 가야하는데 앞에 표기 한 곳이지만 찾기가 만만치 않더군요. ['환경연합'] "환경연합"은 예상보다 초라한 작은 건물에 있군요. 1층에는 우유대리점 같은 가게가 입주해 있는데... 다른 곳에 또 업무시설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규모의 사무실로 우리나라 환경을 지키는 파숫꾼 역활을 할수 있을지 괜히 걱정이 되는군요. ['노천명 가옥' 입구] ['노천명 가옥'] 12:07 [노천명이 살던 집]은 [환경연합 삼거리]에서 직진하여 첫번째 우측 골목으로 들어 갑니다. 집을 헐고 새로 짓는 공사가 한창이라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확한 주소는 '종로구 필운대로 26-21' 입니다. "노천명 시인"에 대해선 제가 2010년에 쓴 다음 글을 참고 하면 되겠습니다.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여기 클릭 ['청운 카센타'] 12:10~12:25 ['이상범 가옥' 입구] ['천경자 화백' 살던 집] [노천명 시인의 집] 골목을 다시 돌아 나와 북쪽으로 조금 가면 좌측에 [청운자동차공업사]란는 카센타가 있는데, 카센타 바로 전 좌측 골목으로 들어 갑니다. 이 비좁은 골목에 한국 화단의 거목 화백들이 살았답니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 탈바꿈한 좌측 집이 [천경자화백]이 7여년 살던 집이라 하고 골목 끝집이 [이상백화백]이 살던 집이랍니다. [천경자 화백]이 이곳에 살때 [이상범 화백]과 무척 가깝게 지냈다고 하는군요. [천경자 화백]은 유명한 [미인도]의 진위 여부를 놓고 법정 공방까지 벌이다가 미국으로 이민 갔고 거기서 2015년에 생을 마감 했답니다. [천경자 화백]은 문학에도 소질이 있어 18권의 수필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두분 다 한국화를 새로운 각도에서 발전시킨 우리나라 한국화의 거목들이시죠. ['이상범 가옥' 대문] [안내문] "청전 이상범" 화백은 앞에서도 언급 했드시 우리나라 한국화의 거목이시죠. 이곳에서 43년간 살며 이곳을 "靑田畵室"이라 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잠시 후 들리게 될 "박노수 화백"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동아일보'에 재직 할 때엔 여러 연재 소설들의 모든 삽화를 그리셨죠. 그런 와중에 특히 [손기정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사진에 일장기를 태극기 모양으로 바꿔 그려 넣어 즉 [손기정 일장기 말살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했는데 그후에는 일제에 협조해 친일행위를 한게 오점으로 남아 무척 아쉽습니다. [안채] [대청마루와 안방] 안채는 뒤에 있는 [배화여중] 담장을 맞대고 있는데 예상보다 매우 큰 규모의 전통 한옥이었습니다. [사랑방] 선생의 거실과 사랑방, 그리고 화실은 칸칸 나란히 길게 뻗어 있는데 큰 규모였습니다. [화실] 끝에 있는 방이 작품활동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었답니다. 선생은 산수화 뿐만 아니라 [이순신장군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지요. 85세까지 사셨으니 당시로는 매우 장수하셨고... [마당 장독대] 마당 장독대 뒤의 벽화는 [천경자 화백]이 그려준 것으로 벽화를 만들었다는데 6.25 때에 폭파 당해 온전히 보존되지 못했다나 뭐래나... ['필운대로' 사거리] 12:27 [이상범 가옥]을 나와 [필운대로]로 다시 나가면 북쪽으로 첫번째 사거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방향을 바꿔 서쪽으로 진행하면... ['배화여대' 후문 방향] 12:30 [배화여대 후문] 방향 골목을 따라 가다가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바꿔서 ['누상동' 빌라촌] 옛 지도엔 이 근처에 [樓閣]이 있었는데 그 '누각'을 기준으로 윗쪽이 [누상동]이 되고 아랫쪽이 [누하동]이 되었답니다. [누상동] 빌라촌 골목을 5분여 진행하면... ['GS25 편의점' 앞] 12:35 [GS 25 편의점]이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좌회전하고 [삼거리] 12:36 이어서 바로 다시 삼거리를 만나는데 우회전해서,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시 좌회전하면.. ['백호정' 가는 골목] 골목이 이어지는데 끝에 [백호정]이 보입니다. ★ [백호정]을 들리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 나와 우측으로 [일세암]으로 가야 합니다.★ ['백호정'] 12:38~12:42 [안내문] "백호정 白虎亭"은 [인왕산] 근처에 있는 다섯개의 활터 중에 하나였답니다. 현재는 [배화여대] 담장 축대 밑에 초라하게 흔적만 있습니다만... ['백호정' 암벽] ['백호정' 각자] 무술을 연마하던 흰 호랑이 같은 영웅호걸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각자가 새겨진 바위는 [배화여대] 담장을 떠바치는 축대 역활을 하고 있을 뿐... ['일세암' 가는 길] [백호정] 골목 입구로 다시 나와 좌회전하면 이런 계단을 올라 가게 되는데 계단을 올라 가면... ['인왕산 자락길' 등산로 입구] 좌측에 [인왕산 자락길 등산로] 계단이 보입니다. ['일세암' 각자] 계단 입구로 가면 여름철엔 수풀에 덮여 잘 보이지 않지만, "一洗巖"이라는 각자가 보입니다. 어떤 사연을 안고 있는지는 알수 없지만...여기에 오르면 한방으로 이 세상 모든 더러운 것들을 씻어버리는 그런 바위라는 뜻이겠죠? 이 위에 [인왕산 자락길]의 [택견수련장]이 있었습니다. ['필운대로'] 1:00 [일세암]에서 10여분 걸려 다시 [필운대로]로 나와서 북쪽으로 진행합니다. 100m쯤 전진하면... ['통인시장 후문' 사거리] 1:03 "통인시장 후문"이 있는 사거리에 도착합니다. 보이는 정자는 "세종마루"라는 정자더군요. 이곳은 [수성동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과 정면 [옥인동]등에서 내려오는 개천이 만나는 곳인데 모두 복개공사를 해서 [청계천] 상류지역 풍광을 전혀 느낄수 없습니다. 특히 이곳부터 좌측은 친일매국노 [윤덕영]이 초호화 주택을 짓고 살았던 [벽수산장]이 있던 곳이며 우측은 나라를 팔아 먹는데 일등을 한 찢어 발기고 싶은 [이완용]의 집이 있던 곳입니다. 몇만평이 넘는 초호화 저택이었는데 잠시후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여기서 직진하여 [송석원터]와 [자수궁터]를 둘러 보고 돌아와 좌측길로 가야 [박노수가옥]과 [윤동주하숙집]을 갈수 있습니다. ['통인시장' 후문] [경복궁] 옆 사대부 집안들과 신흥 중인들이 많이 살았던 "서촌"의 먹거리를 제공해 온 "통인시장"입니다. 일제강점기시대엔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에 근무하는 쪽바리들이 많이 이용했답니다. 현재는 엽전을 구매해서 음식을 사먹는 시장으로 좀 유명하죠. '기름떡볶이'가 맛있다고 알려져 있죠? 저는 별루던데....ㅎ ['효자베이커리'] [통인시장 후문]을 지나면 [효자베이커리]라는 빵집이 있는데 청와대에 빵을 납품하는 빵집이라고 제법 유명하죠. 100m쯤 직진하면... ['송석원' 터] 1:07 이 주변이 모두 "송석원"이었다고 알리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송석원"에 대해선 잠시후 "벽수산장 터"가 있는 "내외주가" 근처에 가서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여기서 앞에 보이는 [군인아파트]로 가면... ['자수궁' 터] 1:09~1:11 [군인아파트] 정문에 "자수궁터 慈壽宮址"라고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 있습니다. "자수궁 慈壽宮"은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이며 [조선왕조 첫 왕비]인 "신덕왕후"의 첫째 아들인 "무안대군 방번"이 살던 집이라 합니다. 모두 잘 아시다시피 이복형인 [태종 이방원]이 한테 무참히 살해 당했죠. [조선왕조 최초의 세자]인 둘째 아들 "의안대군 방석"도 살해 당했는데 역사책에는 [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하죠. 그 이후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이 아버지의 후궁들이 이곳에 살수 있도록 배려해 줬는데 그 이후 궁궐에서 나온 후궁들이 속세를 벗어나 불교에 귀의해 비구니로 살던 곳이기도 하답니다. ['군인아파트' 어린이 놀이터] "자수궁터 慈壽宮址" 였던 이곳 [군인아파트] 근처엔 "겸재 정선 선생"이 살던 집이 있었었답니다. 태어나 살던 집은 잠시후 들리게 될 [경복고등학교] 교내 쯤으로 추정된다는데, 52세 즈음에 이리로 이사를 와서 84세가 될때까지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 그린 "독서여가 讀書餘暇"라는 그림을 보면 현재의 [군인아파트]에 있는 향나무와 비슷해 보입니다. "독서여가 讀書餘暇"라는 그림은 "겸재 정선선생"이 자기 집에서 책을 읽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겸재 선생'이 65세때 그렸다는 "독서여가 讀書餘暇"입니다] 그림으로 명성을 얻으니 돈도 많이 벌어 풍요스런 생활을 하며 여유로운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윗 사진의 [군인아파트] 놀이터의 향나무랑 이 그림 속 향나무가 비슷하지 않나요? 선생의 호가 "겸재 謙齋"인데 그 뜻이 너무 좋습니다. "항상 겸손하고 몸과 마을을 깨끗하게하여 부정을 타지 않게 한다"라는 뜻이니... ['인곡유거'] ['수성구지'] [군인아파트] 놀이터엔 "겸재 선생"이 그린 "인곡유거"와 "수성구지"라는 그림 안내판이 있습니다. 이 그림들은 이곳 "자수궁터" 근처에 살면서 그린 그림이라고 하는데 당시 이 지역의 풍광이 어떠했는지 알수 있군요. [삼거리] 1:12 ['내외주가' 가는 골목] [자수궁터]였다는 [군인아파트]를 나오면 북쪽으로 삼거리가 바로 있습니다. 요기서 "송석원"의 각자가 있었다는 곳으로 가려면 좌측으로 들어가 첫번째 삼거리에서 우측 골목 "내외주가" 방향으로 가야하더군요. 4~50m 골목으로 들어 가면... ['윤덕영 집' 삼거리] 1:14 첫번째 삼거리를 만나는데, 좌측 골목이 천인공노 할 친일앞잡이 "윤덕영"이 일본 천황으로부터 하사 받은 돈으로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리워지던 "벽수산장"을 짓고 살던 집으로 들어가는 길인데 정문은 어디인지 확실치 않고 이 골목은 그 쌔끼의 첩이 드나 들던 문이라고 합니다. 먼저 골목으로 들어가 보고 다시 나와 앞에 보이는 [내외주가]로 갑니다. ['윤덕영집' 입구] [정문 입석] [돌계단 흔적] "윤덕영"이의 첩이 살던 집도 [벽수산장]의 일부인데 돌계단으로 입구를 만들고 아직 흔적이 남아 있는 한옥이 입맛을 씁쓸하게 합니다. 이렇게 설명을 해 가지고는 이해하기가 어려우니 웹써핑을 해서 구한 사진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벽수산장'과 '박노수 가옥'] 이 사진이 가장 오래된 "윤덕영"의 집 "벽수산장 碧樹山莊" 사진인데 옛 "송석원터"에 프랑스식 城같은 대 저택을 지었습니다. 당시 주택이라고는 상상 할수 없을 정도의 저택이죠? 사진의 앞 부분에 있는 [박노수 가옥]은 원래 "윤덕영"이 자기 딸에게 지어준 집인데 [박노수 화백]이 1973년에 인수해 살다가 국가에 헌납해서 현재는 [박노수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다는데 잠시후 들릴 예정입니다. [벽수산장]은 옛 [송석원] 자리에 지었다는데, 먼저 [단원 김홍도]가 그린 [송석원]을 보여 드리면 그림 속 바위에 [松石園]이라는 각자가 보이죠? 안 보이면 잘 찾아 보세요. 있습니다. ㅎ 이런 명당 자리에 친일매국노인 "윤덕영"이 나라를 팔아 먹고 일본천황으로 부터 받은 하사금으로 "한양의 아방궁"을 지었으니 어찌 천인공노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조금 더 근대 사진을 보여 드리면... [1947년경 사진] [이 사진은 1960년경 미국놈이 촬영한 사진인데 더 리얼하죠?] [ 이 사진은 어느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캡쳐한 것인데 1960년대인듯...] 시대 별로 주변 마을 모습이 바뀐걸 알수 있습니다. [백악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일제시대에 일본놈들이 만든 지도 랍니다] "윤덕영"의 집 "벽수산장"과 "이완용"이의 집이 표기되 있는데 "윤덕영"의 "벽수산장은 '옥인동'의 57%인 16,628평이었다고 하고 "이완용"의 집은 [통인시장] 북쪽에 약4,000여평에 저택을 지었답니다. 우리나라를 팔아 먹은 돈으로... 지도의 가운데 [순화병원 順化病院]이 조금전에 들렸던 [자수궁터=겸재선생 집터]입니다. 지도 윗쪽에 [재생원]이라고 표기된 곳이 잠시후 들리게 될 "서울농학교"-"선희궁터"입니다. 천년 만년을 살것같던 그런 "윤덕영"도 1940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많은 재산 물려줄 친아들도 없던 그는 양아들 "윤강로"를 들였는데 그도 시원치 않아 [벽수산장]은 1945년에는 미쓰이(三井)광산주식회사로 넘어가고 해방 후에는 적산가옥이 되었답니다. 그 후 [덕수병원]으로 넘어가고 한국전쟁 때는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조선인민공화국 청사]로 쓰이다가 미군이 점령하자 미군의 숙소로 사용되다가 유엔기구인 [언커크(UNCURK)-국제연합 한국통일 부흥위원회] 청사로 사용되었답니다. 그러던 건물이 제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인 1966년에 대 화재가 일어나 폭삭 주저앉고 이어 1973년에는 영영 해체되고 말았답니다. 나라를 팔아 먹고 지은 '한양의 아방궁'은 영원할것 같았지만 또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답니다. ['내외주가'] "송석원 松石園"이라는 각자의 흔적이 있다는 "내외주가"라고 하는 전통주 술집을 찾아 갔습니다. 때마침 주인아주머니인지 종업원인지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나와 몇가지 물어보고 내부 사진 촬영을 허락 받아 사진 촬영을 했습니다. 파란문 : 여기에 "송석원 松石園"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는 곳이라 해서 찾아 왔습니다. 아주머니 : "송석원 松石園"이라는 각자가 있었다고 하는 안내판은 있습니다만, 각자는 모두 지워버렸는지 그런 글자는 찾아 볼수 없습니다. 파란문 : 아 그래요? 그런 흔적은 아쉽게도 이젠 찾아 볼순 없군요. 아주머니 : 네 파란문 : 그런데 "내외주가"는 뭐하는 곳이에요? 아주머니 : 전통주를 판매하는 술집이에요. 파란문 : 전통주라면 막걸리 소주 등 이런걸 의미합니까? 아주머니 : 뭐 그런 것도 있지만 우리가 진짜 전통 방식으로 빚은 전통주를 주로 팔아요. 파란문 : 그러면 이렇게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이런 주택가 골목에 대문을 닫고 있는데 찾아 오는 손님이 있을까...영업이 될까 뭐 이런 생각이 드는데...ㅎ 아주머니 : 여기는 모두 예약을 하고 찾아 오는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술집입니다. 파란문 : 아 그렇군요. 집 내부에 있다는 "송석원" 각자를 촬영 할수 있나요? 아주머니 : 사진 촬영은 할수 있도록 해 드릴수 있는데 그런 각자는 지워지고 없고 안내판만 있어요. 파란문 : 여하튼 감사 합니다. ['송석원' 각자 흔적] "내외주가"라는 전통주 술집 앞마당입니다. 그리고 뒤 바위 단면에 "벽수산장 碧樹山莊""송석원 松石園"이라는 각자가 지워진듯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 그 위에 그런 각자가 있었었다는 안내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송석원 松石園"이라는 글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썻답니다. 이 근처에 "벽수산장 碧樹山莊"이라는 대 저택을 짓고 술을 마셧을 "윤덕영"이의 사진을 보여 드리면... ['윤덕영'] "내외주가"의 현 마당은 흙으로 돋아 놔 계곡이 없어 졌지만, 이 사진을 보면 당시엔 맑은 물이 흐르는 정원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碧樹山莊"과 바로 옆에 좀 희미하지만 뚜렸이 볼수 있는 "松石園"이라는 각자가 선명합니다. "윤덕영 尹德榮 1873~1940" 이 개쌔끼는 누구인가 "이완용"이와 함께 나라를 팔아 먹은 친일파 중에 최고 친일매국노이죠. 이 새끼는 "순종"의 왕비인 "순정효황후"의 백부, 그러니까 큰아버지가 되죠. "윤덕영"과 "순정효황후" 사이에서 벌어진 유명한 일화가 있죠. 나라를 팔아 먹을 때 옥쇄를 찍어야 하는데, 이 때 옥쇄를 "순정효황후"가 치마 속에 감추고 주지 않자 이 새끼는 아무리 조카라 하지만 황후인데 황후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옥쇄를 빼앗아 [한일합방문서]에 도장을 찍게 한 천인공노 할 핵심 친일매국노이죠. 그외에도 "고종"을 겁박하여 일본천황을 알현하게 한다거나 헤아릴수 없는 반민족 행위를 했죠. 친일의 하일라이트는 "윤덕영"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것인데 아직도 그런 소문은 유효하답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일본 하사금으로 "벽수산장 碧樹山莊"이라는 대 저택을 짓고 천년만년 살고자 했지만 이 저택을 짓고 고작 5년 정도 살다가 죽었으니 죽어서도 배알이 꼴렸을 것입니다. ['통인신장 후문' 사거리] 1:30 아직도 친일 토착왜구들이 판치는 '윤덕영'이 같은 쓰레기의 후예들... 아직도 그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아쉬움을 뒤로 하며 다시 "통인시장" 후문 사거리로 돌아 와 우측'옥인동' 골목으로 들어 갑니다. ['옥인동' 골목] 山水가 좋았던 옛 "인왕산" 자락의 "玉仁洞天"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찾을수 없고... ['박노수 가옥' 입구] 1:33~1:36 [통인시장 후문]에서 50m 정도 '옥인동' 골목을 진행하면 [박노수 가옥] 입구를 만납니다. [윤동주 하숙집]은 가까운 곳에 있는데, 먼저 [박노수 가옥]부터 구경합니다. ['박노수 가옥' 정문] [안내문]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공사 때문에 휴관을 하고 있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 했드시 이 가옥은 "윤덕영"이 자기 딸에게 지어준 저택이랍니다. 1938년에 지은 "윤덕영이 딸 집"인데 1973년에 "박노수 화백"이 인수해 40여년간 살다가 죽기 전에 자신의 작품 1,000여점과 이 집을 [종로구청]에 헌납하여, [종로구청]에서 수리하여 "박노수미술관"으로 활용하는 문화공간이 되었답니다. ['박노수 가옥'] 집 안으로 들어 갈수는 없어 밖에서 "윤덕영의 딸 집""박노수화백"에 의해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현장을 의미있게 바라봅니다. 시간 나는대로 내부를 둘러보기 위해 한번 더 와야 겠습니다. "박노수화백"은 "이상범화백"의 제자라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모두 우리나라 한국화의 1세대 작가들이죠. 또한 "박노수화백"은 배우 '이민정'의 외할아버지라는거 아세요? ㅎ ['윤동주 하숙집' 조망] 1:40 ['윤동주 하숙집'] [안내문] [박노수미술관]을 나와 '옥인동' 골목을 조금 더 올라 가면 "윤동주 하숙집"을 만납니다. 모르고 가면 지나치기 쉽습니다. "윤동주"에 대해선 지난번 [인왕산자락길] 답사기에서 안급한바 있습니다만 그의 생애가 너무 짧아 다시 한번더 언급해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윤동주"는 '중국 길림성'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로 유학을 왔죠. 그리고 지금의 '연세대 문과'에 진학하고 학교를 다니기 위해 서울에서 하숙생활을 했지요. 그 하숙집이 이 집이랍니다. 이 집은 자기가 존경하던 소설가 "김송"이 살던 집인데 친구 "장병욱"과 함께 하숙을 했답니다. 여기서의 하숙생활은 고작 3개월 정도였답니다.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등 지금까지 우리가 아끼는 대표작들은 이 때에 쓰였답니다. 그이 인생이 불과 29년이었으니 여기서의 3개월 하숙생활은 어쩌면 긴 시간이었다고도 할수 있으니 어찌 그 슬픔을 다 표현 할수 있겠나요. 너무나 짧은 29세의 나이로 1945년 2월 광복을 보지도 못하고 일본의 감옥에서 안타까움만 남기고 별나라로 갔습니다. 제가 2014년에 쓴 글은 꼭 읽어 보시길 바람니다. "그리운 얼굴 - 윤동주" 여기 클릭 ['옥인교회' 앞] 1:44 [윤동주하숙집]을 지나 조금 더 올라 가면 [옥인교회]를 만나는데 [인왕산]과 [수성동계곡]이 보입니다. [수성동계곡] 갔다가 돌아와 여기서 [옥인교회] 옆으로 가야 합니다. [복원한 '수성동 계곡'] 1:45~1:49 ['수성동 계곡'] ['수성동 계곡'과 '옥인아파트'] '옥인시민아파트'등 난개발로 사라졌던 "수성동계곡"을 복원해 놓은 현장입니다. 지난번 [인왕산자락길]을 할때 왔었던 곳이죠. 물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계곡이라고 "水聲洞"이라 했다는데 "겸재 정선선생"이 그린 "水聲洞"이라는 그림을 참고하면 그 당시 모습과 복원된 현재의 모습을 비교할수 있습니다. ['겸재 정선선생'이 영조27년(1751)에 그린 "수성동" - 간송미술관 소장] ☆ 서울 서촌 역사유적 탐방기 2부 ☆로 계속됩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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