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보 답사』
인왕산 자락길 역사탐방
경복궁역1번출구-사직단-단군성전-황학정-등과정터-택견수련터-세종대왕과 인왕산-
수성동계곡-사모정-석굴암-무무대-시인의 언덕-윤동주문학관-창의문-부암동주민센타-
무계원-현진건집터-안평대군집터-윤웅렬별장-석파정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水聲洞'이라는 진경산수화의 실재 배경]
[구글어스]
"한양성"의 "서촌 西村"의 울타리가 되는 "인왕산 자락길"을 갑니다.
공식적인 거리는 [사직단입구]에서 [윤동주문학관]까지 "3.2km"라고 합니다.
공식적인 거리는 너무 짧아 저는 [석굴암]을 왕복하고, [창의문] 밖 "부암동"과 [석파정]을 들려
진행한 거리는 "7.3km"로 3시간 30분이 걸렸습니다.
['3호선 경복궁역 1번출구'] 11:45
2019년 8월 17일 (토) 약간 흐림
한 여름 한달여 푹 쉬고 다시 길을 나섭니다.
[3호선 경복궁역 1번출구]에서 [인왕산 자락길] 답사를 시작합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다웁게 길안내는 잘 되있어 큰 불편함이 없습니다만,
그래도 미리 예습을 하고 가야 길찾기에 도움이 된다는 건 상식이죠.
그러면 빠짐없이 더 많은 곳과 더 많은 역사의 현장들을 볼수 있겠지요.
['사직공원' 방향]
[사직단]이 있는 "사직공원" 방향으로 진행해서...
['사직공원' 정문] 11:51
"사직공원" 정문으로 들어가면
['사직단' 좌우갈림길]
가운데 "사직단"이 있는데 좌우로 둘레길이 나 있습니다.
현재 [사직공원]은 보수공사 중에 있어 "단군성전"으로 바로 가는 길이 차단되 있더군요.
"단군성전"으로 먼저 가는 [인왕산자락길]은 좌측길이 편리합니다.
['사직단']
[안내문]
"사직단 社稷壇"은 들어 갈수 없고 정문 문살 사이로 들여다 봐야 합니다.
농경사회에서 최고의 선은 농사가 잘 되어야하는 것이니
'조선왕조'가 백성을 위해 제례를 올리며 "풍년"을 기원하는 제단입니다.
국가가 "토지의 신 - 社"와 "곡식의 신 - 稷"에 풍년을 기원하는 것이죠.
['인왕산길'] 11:55
[사직공원]에서 [단군성전]으로 직접가는 길이 있습니다만, 현재 [사직공원] 보수공사 중으로
길을 막아 놨더군요. 그래서 [사직공원] 서쪽 샛문으로 나가 [인왕산로]를 이용해 잠시 올라 갑니다.
['단군성전' 앞 사거리] 11:57
그러면 [단군성전] 정문 앞 사거리를 만나는데
좌측으로 가면 "권률장군 생가터"와 "한양성 순성길"로 갈수 있으며
[인왕산자락길]은 [단군성전]을 둘러보고 나와 직진합니다.
['단군성전']
['단군']
"단군성전"과 "단군상 檀君像"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단군' 중에서 "단군왕검"을 시조로 여기는데
모두 잘 알다시피 "단군왕검"은 "천제 환인"의 손자이고, "환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웅녀"이죠.
['단군성전' 지나 삼거리] 12:00
[단군성전]을 나와 [인왕스카이웨이]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가면 삼거리를 만나는데
"황학정"을 들려 보려면 우측 길로 조금 내려 가야 합니다.
['황학정' 정문] 12:02
"황학정" 정문에 도착하면 "국궁전시관"이 보이는데 전시관으로 올라 가면
['국궁전시관' 입구] 12:03~12:06
입장료를 받더군요. 경로는 무료입니다만....
[국궁]
['신기전']
다연발 로켓 활인 "신기전" 모형이 눈길을 좀 끌 뿐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입장료 내고 들어 갈 필요 없겠고...
['황학전'] 12:07
[안내문]
[국궁전시관]을 나와 조금 더 올라 가면 "황학정 黃鶴亭"을 만납니다.
"황학정 黃鶴亭"은 "경희궁"(옛 서울고 자리)"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이전했다는군요.
이곳은 잠시후 확인하겠지만 "등과정 登科亭"이라는 활쏘기 연습장이 있던 곳이라고하는데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면 되겠고....
신식무기가 난무하던 구한말에 "고종"이 활쏘기를 무척 좋아했다는 것이 의외로 다가 옵니다.
[궁사들]
오늘도 활쏘기 연습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더군요.
['등과정 터' 가는 길]
"황학정" 우측 뒤에 [인왕산스카이웨이]로 직접 올라 가는 계단 길이 있는데
이 계단을 올라 가면....
['등과정 각자'와 터] 12:11
"등과정 登科亭"이 있었던 터를 알리는 안내석과 바위에 세겨진 각자를 볼수 있습니다.
"황학정"을 통과하여 다시 [인왕스카이웨이]로 올라 와 50m 쯤 진행하면...
['인왕산 숲길' 갈림길] 12:13
"인왕산숲길" 출발지점을 만납니다.
[인왕산숲길]과 [인왕산자락길]은 조금 다름니다만.....
[인왕산자락길]은 직진하라고 알리고 있으며, [인왕산숲길]은 우측으로 올라 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직접 걸어 본 결과 여기선 [인왕산숲길]을 이용하는게 절대적으로 좋았으니
이 답사기를 보고 앞으로 가실 후답자들은 꼭 참고하시길....
직진해서 가는 [인왕산자락길]은 도로만 있을 뿐 볼게 없습니다.
그리고 [인왕산숲길]로 진행해 보니 또한 [인왕산자락길] 표시도 있더군요.
그래서 결론은 [인왕산숲길]과 [자락길]은 혼용하는게 좋겠고 [인왕산숲길]이 더 좋다고 추천합니다.
★ 입구 계단을 올라 가서 반드시 우측으로 가야 합니다. 혼돈하기쉬우니 주의 ★
['인왕산 숲길' 안내석]
저는 이곳에서 [인왕산숲길]을 이용하여 [수성동계곡]까지 가고
너무 짧은 거리여서 "인왕산 정상" 부근에 있는 "석굴암"을 다녀와 [인왕산자락길]로 갈 예정입니다.
['인왕산자연공원 체육시설'] 12:17~12:19
['택견' 수련터']
['택견'과 '송덕기선생' 안내문]
[인왕산숲길] 입구에서 우측으로 잠시 올라 가면 "인왕산자연공원체육시설"이 있고
"송덕기선생"이 수련했다는 "택견수련터"가 있습니다.
['인왕산' 조망]
[택견수련터]에서 [인왕산] 정상을 조망하고
['수성동계곡' 가는 길] 12:19
[내림길]
이정표의 안내를 따라 [수성동계곡]으로 내려 갑니다.
'인왕산'이라는 조그마한 돌산에 이런 숲길이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였는데
길도 정비를 잘해놔서 걷기에 띵호아~!
5분 정도 내림길을 진행하면....
[쉼터 - '누상동갈림길'] 12:24
쉼터정자와 화장실이 있는 삼거리에 도착하는데 [누상동갈림길]이었습니다.
우측 바로 아랫동네에 [배화여고-대학]이 있죠.
['인왕산 숲길']
['북악산(백악산) 조망]
다시 산자락 숲길을 10여분 진행하면....
[계단 오름길]
[전망대 앞 갈림길] 12:33
이정표가 있는 전망대 앞 삼거리를 만나는데....
[인왕산자락길]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데 여기선 반드시 [수성동계곡] 방향으로 내려 가는게 좋겠고
[전망대] 12:33~12:37
['세종대왕'과 '인왕산']
이 전망대는 "세종대왕과 인왕산"이라는 안내판이 있는 전망대였는데 조망은 시원치 않았습니다.
[세종대왕]은 "서촌" 현재의 '종로구 통인동 통인시장' 근처에서 탄생하여 자랏죠.
우측 난간에 [인왕산자락길]이 이쪽으로도 연결된다는 이정표가 표기되 있습니다.
[계단 내림길]]
계단 내림길을 4분여 내려가면....
['인왕산 자락길' 안내도] 12:41
['인왕산 자락길' 안내도]
[현위치에서 '수성동계곡' 통과 방법]
[인왕산자락길 안내도]가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조금전 [인왕산숲길 입구]에서 안내하는 [자락길]이 [숲길]과 혼용되고 있다는 걸 알수 있습니다.
여기선 오히려 [숲길]이 [자락길]이라고 분명히 표시하고 있으니 어떻게 된건지 ...ㅎㅎ
여기서부터 "수성동계곡"이 시작되더군요.
저는 [수성동계곡]을 둘러 보고 [석굴암]으로 올라 갈 예정입니다.
['사모정' 조망] 12:42
계곡에 도착하면 건너편에 "사모정"이라고 하는 정자가 보이는데
여기선 우측으로 계곡따라 내려 가야 합니다.
[계곡]
[수성동계곡]은 조그마한 '인왕산'이라는 돌산에 있는 계곡이라 비가 많이 오는 여름철에만 물이 흐른답니다.
요즘 비가 제법 내려 계곡엔 맑은 물이 흐르고, 때를 놓치지 않고 피서객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습니다.
['기린교'] 12:43
이어서 "겸재 정선 선생"의 진경산수화 "수성동"에도 등장하는 "기린교 麒麟橋"를 만납니다.
동물 '기린'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역사적으로도 돌다리 연구에 중요한 다리라고 보호되고 있군요.
['옥인동'] 12:44~12:47
"기린교 麒麟橋"를 지나면 [수성동계곡]은 사라지고, '종로구 옥인동' 주택가가 밀집해 있습니다.
이 계곡 위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인 "옥인아파트"가 건설되었는데, 서울시가 이 아파트를 매입하여
"겸재 정선 선생"의 진경산수화 "수성동"을 참고하여 2011년에 완벽 복원하였다는군요.
['수성동계곡' 조망]
서울시에 의해 완벽 복원된 "수성동 계곡 水聲洞溪谷"입니다.
'네이버지도'엔 현재도 이곳이 '옥인아파트'라고 아파트 건물이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놀라울 뿐.... 여하튼 복원해 주어서 옛 정취를 맛 볼수 있게 해준 당국에 감사를 드리며
"겸재 정선 선생"이 진경산수화 "수성동"를 그리던 시절로 뒤돌아 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한양'의 '서촌', 즉 '인왕산' 자락 계곡에는
사대부등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글짓기 詩社'가 일반 평민-중민들에게서도 시현되는 곳이었답니다
이런 형태를 "위항문학 委巷文學"이라고 하죠.
"위항문학"을 탄생시킨 주역들 중 한분인 "박윤묵 선생"의 글로 "수성동 계곡 水聲洞溪谷"을 설명하겠습니다.
'박윤묵'의 <존재집(存齋集)> 23권 - 遊水聲洞記에서 인용합니다.
洞多水。以水聲名。迺西山之口也。庚午夏。大雨數十日。川渠漲溢。平地水深三尺。余朝起跣足着屐。
衣雨衣携一壺酒。與數三同志者入洞。至石橋邊。上下一望。應接殆不能暇。溪澗之勝。泉瀑之壯。
怳與舊日 觀大有異焉。凡西山之水。或橫流或倒流。或折而復流。或掛匹練。或噴亂珠。或飛於絶壁之上。
或灑於松 翠之間。百谷千流。不一其狀。皆到水聲之洞然後。始成一大流。裂山倒壑。衝崖轉石。
如万馬之爭騰。如疾雷之暴發。其勢不可遏也。其深不可測也。其中霏霏如也蕩蕩如也。時飛沫濺衣。
凉意逼骨。魂淸神爽。情逸意蕩。浩然如與造物者。遊於物之外也。遂大醉樂極。散髮長歌。
歌曰西山之上雨床床兮。西山之下水 湯湯兮。惟此水是吾鄕兮。徜徉不忍去。物與我而俱相忘兮。
歌闋相顧而起。天忽開霽。西日已在山。
수성동(水聲洞)은 물이 많아 물소리라는 뜻의 수성으로 이름이 붙었는데 곧 인왕산 입구다.
경오년(1810) 여름 큰 비가 수십 일이나 내려 개울물이 불어 평지에도 물이 세 자 깊이나 되었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 맨발로 나막신을 신고 우의를 입고서 술 한 병을 들고 몇 명의 동지들과 수성동으로
들어갔다. 돌다리 가에 이르니 아래 위쪽의 풍경을 바라보느라 다른 데 정신을 팔 겨를이 없었다.
개울이 빼어나고 폭포가 장대하여 예전에 보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대개 인왕산의 물은 옆으로 흐르기도 하고 거꾸로 흐르기도 하며 꺾어졌다 다시 흐르기도 한다.
벼랑에 명주 한 폭을 걸어놓은 듯한 곳도 있고 수많은 구슬을 뿜어내는 듯한 곳도 있다.
가파른 절벽 위에서 나는 듯 떨어지기도 하고 푸른 솔숲 사이를 씻어내듯 흐르기도 한다.
백 개의 골짜기와 천 개의 개울이 하나도 똑같은 형상을 한 곳이 없다.
이 모든 물이 수성동에 이르게 된 다음에야 하나의 큰 물길을 이룬다. 산을 찢을 듯, 골짜기를 뒤집을 듯,
벼랑을 치고 바위를 굴리면서 흐르니 마치 만 마리 말들이 다투어 뛰어오르는 듯하고 우레가
폭발하는 듯하다. 그 기세는 막을 수가 없고 그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으며, 그 가운데는 눈비가 퍼붓는 듯,
자욱하고 넘실거린다. 때때로 날리는 포말이 옷을 적시면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들어와 혼이 맑아지고
정신이 시원해지며 마음이 편안하고 뜻이 통쾌해진다. 호탕하여 조물주와 더불어 이 세상 바깥으로
노니는 듯하다. 마침내 술에 만취하여 즐거움이 극에 달하였다.
이에 갓을 벗어 머리를 풀어헤치고 길게 노래하노라.
인왕산 위에 비가 쏴하고 내리면 인왕산 아래에 물이 콸콸 흐른다네.이 물이 있는 곳 바로 나의 고향이라
머뭇머뭇 차마 떠나지 못한다네.내 풍경과 함께 때를 씻고 나서노래 부르고 돌아보면서 일어나니'하늘은
홀연 맑게 개고 해는 하마 서산에 걸렸네
[이곳 안내문에 있는 '수성동' 파란문 촬영본]
['간송미술관' 소장 '수성동' 촬영본]
['수성동' 안내문]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진경산수화 "수성동"입니다.
"겸재 선생"이 72세에 그린 "장동팔경첩"에 있는 그림으로 국보로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답니다.
복원된 "수성동계곡"과 이 그림을 비교해 보면 그 가치를 느낄수 있군요.
"기린교"가 특히 눈에 들어 오는데....
['기린교']
"기린교"
<동국여지비고>와 <한양도성도>에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는데
<한경지략>에는 麟麒橋라고 기록되어 있답니다.
정선의 그림인 <水聲洞>에 암벽 사이로 계곡이 흐르고 그 위에 다리가 하나 놓여있는데 이것이 기린교라고
백과사전에도 나와 있습니다.
다리 밑 계곡이 깊습니다.
['옥인동'] 12:47
복원된 "수성동계곡" 전망소 아래엔 '옥인동' 주택들이 밀집해 있어 복원하지 않았다면...
계곡을 복개해 '청계천'으로 흘러 가는 계곡물과 계곡은 사라졌습니다.
['수성동계곡' 우측길]
계곡 전망대에서 다시 '인왕산' 방향으로 계곡따라 올라 갑니다.
복원되기 전인 2011년까지 이 계곡 좌우엔 "옥인아파트"가 늘어서 있었답니다.
"와우아파트"보다도 먼저 지어졌다는 "옥인아파트"....와르르 무너진 부실시공의 대명사 "와우아파트"...
군사정권 시절의 얘기이지만 엊그제 같기만 한데, 복원된 "수성동계곡"을 보니 '상전벽해'가 아니라
'벽해상전'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너무나 완벽하게 복원되었죠?
['사모정'] 12:50
['수성동계곡'과 '안평대군']
'수성동계곡'과 '안평대군'에 대해선 안내문에 자세히 쓰여있습니다.
['인왕산' 조망]
계속해서 '인왕산' 정상을 바라보며 복원된 "옥인아파트" 자리를 진행하면...
[갈림길] 12:54
갈림길을 만납니다.
저는 [인왕산 석굴암]을 다녀 오기 위해 좌측 [인왕산자락길]로 올라 갔습니다만...
[인왕산 석굴암]을 보고 싶지 않은 분들은 우측 [인왕산숲길]으로 가시길 추천합니다.
좌측으로 3분여 올라 가면...
['인왕스카이웨이' 합류] 12:57
[인왕산스카이웨이]를 다시 만납니다.
[자락길]을 따라 잠시 진행하면...
['석굴암' 입구]
['석굴암' 입구] 1:02
[인왕산 석굴암]으로 올라 가는 입구를 만납니다.
미리 알려 드리면, [석굴암]으로 오르는데 13분이 걸렸으니 참고 하시고...
['만수천' 갈림길]
입구에서 잠시 올라 가면 [만수천 갈림길]을 지나고...
다시 급경사 돌계단을 잠시 올라 가면...
['석굴암약수터' 운동시설] 1:06
운동시설이 있는 "석굴암약수터"를 만납니다.
약수터는 좌측에 있는데 생략하고 직진해서 급경사 계단을 올라 갑니다.
[계단 오름길]
[급경사 오름길]
[석굴암] 오르는 길은 엄청 급경사입니다.
200m 급경사 오름길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ㅎㅎ
그래도 거리가 비교적 짧아 다행...
['석굴암' 전경] 1:14~1:31 (17분간 조망 휴식)
"인왕산 석굴암"
글자 그대로 石窟에 불상을 모셔 놓은 암자였습니다.
오래 전부터 한번 방문하고 싶었는데, 그 이유는 잠시후 보게 될 바위 때문입니다.
['석굴암'
['석굴암' 내부]
비좁은 석굴에 들어가 소원을 비는 분들이 의외로 몇명 있더군요.
이런 공기도 탁하고 더러운 굴 속에 들어가 소원을 빌지 말고
나가서 인생 목표를 향해 뛰는게 어떨지....
['경복궁' 조망]
[인왕산 석굴암]에서 바라보는 [경복궁]과 [청와대]입니다.
무척 가깝다는걸 알수 있는데...
제가 여기를 오른 이유는 유명한 "치마바위"와 "병풍바위"를 보기 위해서 입니다.
여기서 좌측을 바라보면...
['치마바위' 조망처]
소나무가 있는 바위가 보이는데 저곳에서 "치마바위"와 "병풍바위"를 볼수 있습니다.
[치마바위 조망처]라고 할수 있는 곳이니 가서 "치마바위"를 조망합니다.
['인왕산' 정상과 '치마바위' '병풍바위' 조망]
[인왕산 정상]이 보이며, 정상을 떠바치고 있는 바위가 보이는데
빨간색선으로 표기한 바위가 "치마바위"이며
파란색선으로 표기한 바위는 "병풍바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바위는 슬픈 역사를 간직한 바위들이라 바위에 얽힌 이야기들을 좀 더 자세히 기술하겠습니다.
['치마바위']
"치마바위의 전설"
제가 그동안 [인왕산]을 산행 할때 몇번 언급한 "중종"과 "단경왕후"의 사랑 이야기가 서려 있는 바위이니
한번 더 그 얘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12살의 나이에 "진성대군"에게 시집가 애뜻한 정을 나누었던 소녀.
그 "진성대군"이 하루 아침에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중종반정'으로 왕이 되고...
그녀는 졸지에 왕비가 되고...
조선 제 11대 왕 "중종"-그가 바로 그 소녀의 서방인 "진성대군"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녀는 연산군 아래에서 좌의정을 지내던 "신수근 愼守勤"의 딸이었으니
운명은 이렇듯 기묘하게 찰라에 의해 바뀌고....
박원종을 비롯한 반정 세력들은 왕비가 연산군의 와이프-거창신씨의 외질녀이기에
"중종"의 정비인 "단경왕후"를 왕비로 남겨 둘수가 없었지요. 후환이 두려워....
그래서 꼭두각시 얼굴마담 '중종'을 족쳐서 "단경왕후"를 폐위 시키고 새로운 왕비들을
급하게 옹립합니다.
새로 뽑은 왕비들 중..그 유명한 "문정왕후"..등에서 부터 우리나라 역사에서 지울수 없는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적 전란으로 가는 불씨가 태동 됩니다.
"중종"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반정 세력들에게 꼼짝도 못하고
강제적으로 사랑하는 "단경왕후"를 눈물로 떠나 보낼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중종"은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그녀가 보고 싶어 경복궁 경회루 앞에 나와
그녀가 산다는 "인왕산"방향을 바라보며 그리움의 눈물을 흘렸다고 하지요.
폐서인이 되어 쌩과부로 홀로 '서촌'에 사는 '단경왕후'는 그 사실을 소문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녀는 궁궐에서 입던 자신의 다홍치마를 저 인왕산 바위에 걸쳐 놓아 자신의 입지를
알리곤 하였답니다. 왕이여~~ 날 보러 와요~ 나 ! 여기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이후 단 한번도 다시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
바라만 볼수 밖에 없는 사랑... 치마처럼 생기기도 한 바위이지만 치마를 걸어두어 붙여진 이름인
"치마바위"에 얽힌 "경회루의 중종"과 "치마바위의 단경왕후"의 슬픈 사랑의 내력이랍니다.
['청와대' '경복궁' 조망]
여기서 바라보는 [청와대]와 [경복궁]입니다.
무척 가깝죠?
['병풍바위']
[치마바위] 옆에는 "병풍바위"라고 하는 바위가 보입니다.
바위 단면에는 여러번에 걸쳐 지워진 큰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던 흔적들이 지금도 보이는데...
일제 강점기시대에 조선총독부 총독이던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朝鮮總督 南次郞)"가 새긴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이라는 글입니다.
그 내용은 조선 청년들을 선동하는 것이랍니다.
다음 사진은 <시사저널 2010년9월13일자>에 게재된 사진인데,
1950년에 1차로 글을 지우고 촬영한 사진이랍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시사저널 1556호-여기 클릭"
요즘도 쪽바리들의 경제보복, 과거사 무반성 등으로 만행을 저지르고 있어서
일제 강점기 시절의 만행 중 하나를 알려 드리고 싶어 급경사 오르막을 올랐던 것입니다.
잊지 맙시다. 쪽바리들의 만행을....
[내림길]
['인왕스카이웨이' 조망]
"중종과 단경왕후의 사랑 이야기"와 쪽바리들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올랐던 [인왕산 석굴암]에서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하산합니다. 내려 갈때엔 9분 걸리더군요.
[인왕산스카이웨이]와 [수성동계곡]이 보입니다.
[계단 내림길]
[헤드폰 스님]
헤드폰을 끼고 슬리프를 신고 하산하는 현대식 스님이 좀 야릇하게 보이고....
['석굴암 출입구'] 1:40
9분여 만에 [석굴암] 입구를 나가면...
['인왕스카이웨이']
[인왕스카이웨이]가 다시 이어지고
['무무대' 입구] 1:44~1:47
['무무대']
이어서 "무무대 無無臺"라는 전망대를 만나 조망을 합니다.
"아무것도 없구나
오직 아름다운 것만 있을 뿐..."
['수성동계곡' 조망]
우측 아래엔 새로운 각도로 "수성동계곡"이 보이고
['서촌'과 '남산' 조망]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의 마을 "서촌"이 펼쳐지며, '한양도성'의 남쪽 산인 "남산"이 조망됩니다.
['청와대'와 '백악산' 조망]
동쪽으로는 '청운동'과 "백악산" 그리고 "청와대"가 지척에 보입니다.
바로 아래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살던 집이 있지요.
며칠전 뉴스에 "정몽구"에게 상속된 집을 다시 그의 아들인 "정의선"에게 상속했다고....
['인왕스카이웨이']
[무무대]에서 다시 [인왕산스카이웨이]를 12분여 진행하면....
['시인의 언덕' 정자] 1:59
['시인의 언덕'] 2:00
"시인의 언덕"이라는 곳을 지나는데,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며 만들었다고...
"윤동주 시인"은 '중국 길림성'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로 유학을 왔죠.
그리고 지금의 '연세대 문과'에 진학하고 학교를 다니기 위해 서울에서 하숙생활을 했지요.
하숙집이 이 아랫쪽 '누상동'에 있어서 가끔 '인왕산'에 올랐나 봅니다.
하숙샐활을 하던 학창시절에 현재까지 알려진 대부분의 詩를 지었죠.
너무나 짧은 29세의 나이로 요절했으니 안타까움만 남기고 별나라로 갔습니다.
이곳 "시인의 언덕"엔 그의 대표작 중에 하나인 "서시 序詩" 詩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 안내문에 있는 '장안연우' 파란문 촬영본]
['간송미술관' 소장 '장안연우' 촬영본]
또한 이곳 "시인의 언덕"엔 "겸재 정선선생"이 그린 "장안연우(長安烟雨)"라는 그림판도 있습니다.
장안연우(長安烟雨), 1741~42년경,
지본수묵, 30.0 x 39.9 cm,
간송미술관 소장
봄을 재촉하는 이슬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서울 장안을 이곳 쯤에 해당하는 북악산 서쪽 기슭에 올라가 내려다본 정경이랍니다.
연무(煙霧)가 낮게 드리워 산 위에서는 먼 경치가 모두 보이는 그런 날이었던 모양으로,
남산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멀리는 관악산 우면산 청계산 등의 연봉들이 아련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겸재 선생"이 전반의 생을 보냈던 북악산 서쪽 산자락과 후반의 생을 산 인왕산 동쪽 산자락이 마주치며
이루어 놓은 장동(壯洞) 일대의 빼어난 경관을 눈앞에 깔면서 나머지 부분들은 연하(煙霞)에 잠기게
하여 시계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꿈속의 도시인 듯 환상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킨 서울 장안의 진경이라고...
['장동팔경첩'을 그린 위치도]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경교명승첩 (京郊名勝帖)"-"장동팔경첩"의 위치도 입니다.
백과사전 인용합니다.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 각 폭은 세로 20.8~31㎝, 가로 16.8~41㎝. 간송미술관 소장.
1권으로 되어 있었으나 1802년 2권으로 개첩되었다.
상첩에는 정선이 양천(陽川-지금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등촌동 일대) 현령으로 재임하던
1740~41년에 친구 이병연(李秉淵)과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자는 약속을 위해 그렸던 양천팔경을
비롯하여 한강과 남한강변의 명승도들이 수록되어 있다.
하첩은 상첩보다 10여 년 뒤에 그려진 것으로, 서울 주변의 실경도들과 함께 타계한 이병연을
회상하며 양천에 있을 때 그로부터 받은 시찰(詩札)을 화제로 한 그림들이 실려 있다.
상·하첩에 모두 33점이 수록되어 있으며 파묵(破墨)·발묵(潑墨)·훈염법(暈染法)에 토대를 두고 발전된
그의 60대 후반에서 70대 중반의 독창적인 진경산수의 특색과 변모의 과정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시인의 언덕' 전망대]
['윤동주문학관' 갈림길] 2:03
"시인의 언덕 전망대"를 지나면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을 만나는데
직진하면 "창의문"으로 갑니다만, "윤동주문학관"을 들리려면 우측으로 내려 가는게 좋더군요.
우측으로 30m쯤 내려 가면...
['윤동주문학관' 조망]
[윤동주문학관]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파라솔이 있는 곳은 카페입니다.
[카페 '별뜨락'] 2:05~2:23
날씨도 덥고해서 먼저 "별뜨락"이라고 하는 노천 카페를 먼저 들려 시원한 팥빙수 한그릇 먹었는데
6,000원으로 값도 착하고 맛도 있었습니다. 20여분 휴식을 취하고
['윤동주문학관'] 2:23~2:32
"윤동주문학관"으로 들어 갑니다.
이 문학관은 예전에 '청운동 배수장'이었는데, 저수조를 개조하여 문학관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윤동주 시인"이 활동하던 시대에 함께 활동한 文人들의 요즘 문학관을 가보면 어마어마 한데
제가 다녀본 문학관 중에선 가장 소규모 문학관이며 가장 허름한 문학관 건물이어서 더욱 가슴 아팟습니다.
"윤동주문학관"은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제1전시실]엔 그의 유고와 생애를 알리는 사진들이 있었는데 열평 남짓 너무 비좁아 발 디딜 틈도 없고
특히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짧은 생애여서 전시 할만한 유물들도 없겠지만 너무 비좁아 그의 짧은 인생을 보는듯...
['윤동주문학관 제2전시실']
여기가 [제2전시실]입니다.
예전에 배수장의 '저수조'였답니다. 지금이야 수돗물이 집집마다 송수되어 이런 배수장이 필요 없어서
문학관으로 꾸몃다고하는데 무얼 형상화 한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 감옥에서 옥사한 "윤동주 시인"을 생각케 하는군요.
그리고 앞에 있는 철문 안이 [제3전시실]인데 "윤동주"에 대한 영상물을 상영하는 곳이더군요.
윗층이 조금 전 팥빙수를 먹었던 카페 "별뜨락"
['청운동'과 '남산' 조망]
"윤동주문학관"에서 '청운동'과 남산을 조망하고...
조금 전 "겸재 정선선생"이 그린 [장안연우]라는 그림의 '남산'과 비교해 봅니다.
여기서 좌측을 보면...
['자하문고개'] 2:32
[자하문고개]가 있습니다.
이 아래로 [자하문터널]이 뚫려 한산해 졌지만 제가 학창시절엔 [세검정-평창동]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 가야해서 엄청 복잡했던 고개 였습니다.
[1.21사태] 때에 일등 공신이었던 "최규식 종로경찰서장"과 "정종수 경사 순직비"가 있습니다.
건너가서 좌측 [창의문]으로 올라 갑니다.
['창의문' 입구 - '청계천 발원지'] 2:33
[창의문 입구]에는 "청계천 발원지"라는 표지석이 설치되 있는데
[한양성] 안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유일한 개천이 "청계천"이죠.
['창의문']
"창의문 彰義門"
'한양성'엔 四大門과 四小門이 있었죠.
이 문은 "서대문(돈의문)"과 "북대문(숙정문)" 사이에 있는 "북소문"에 해당합니다만
"북소문"이라 하지 않고 "자하문 紫霞門"이라고 부르죠.
'노을빗 물드는 서쪽 문'이라는 의미.
우측길은 [한양성 순성길]의 [북악산 입구]이죠.
여기 들어 가려면 반드시 신분증이 있어야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창의문"]
인왕산 자락과 북악산 자락이 서로 마주치는 골짜기 능선 위에 날아갈듯이 지어진 문루와 성문,
그 좌우 인왕산과 북악산 능선을 따라 날개를 펼치듯 뻗어나간 성벽. 마치 날개를 퍼덕이며
내려 앉은 한 마리의 독수리 같은 형상이라고 합니다.
'청운동 계곡'이 어떠했었는지 느낄수 있군요.
['창의문'] 2:35
[안내문]
"인조반정"의 쿠데타 세력들이 거사에 성공하고 '세검정'에서 피뭍은 칼을 씻고
이 문을 통과했다니 이 문의 이름 "彰義"의 의미가 홰손된 것은 아닐까
['빙수집'] 2:40
"창의문(자하문)"을 통과하여 [세검정] 방향으로 조금 내려 가니 길가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뭔일인가 보니 "부빙-부암동 빙수집"이라는 빙수집에 들어 가기 위해 이 여름 뙤양볕에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계절 운영하는 빙수집으로 명성이 자자한듯...
['부암동 주민센타' 조망]
[무계원]으로 가기 위해 빙수집에서 조금 더 내려 가면
길 건너편에 "부암동주민센타"가 보입니다.
주민센타 앞으로 가서
['부암동 주민센타' 우측 골목] 2:43
"부암동주민센타" 우측 골목으로 올라 갑니다.
50m 쯤 올라 가면...
[삼거리] 2:46
이렇게 생긴 삼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에 [무계원]이 있더군요.
['무계원'] 2:47~2:50
[안내문]
"무계원 武溪園"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살던 집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안평대군]이 꿈을 꾼 중국의 '무릉도원'과 비슷해 화가 "안견"에게 [몽유도유도]를
3일만에 그리게 한곳이며 정자를 짓고 활쏘기를 하던 유서 깊은 곳이랍니다.
다만 이 한옥들은 '종로구 익선동'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등록 음식점1호인 "오진암"을
헐면서 자재를 이송해와 이곳에 복원했답니다.
그러니까 이 한옥은 "오진암"이라는 기생집이었던거죠.
[남북 7.4공동선언문] 작성의 밀실이기도했으며 북한 관리들을 접대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제가 학창시절까지 살았던 집이 '종로구 익선동'의 "오진암" 건너편 한옥이어서 잘 알고 있죠.
제가 살던 한옥도 허물어지고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더군요.
[정문]
['행랑채-안채-사랑채']
지금은 "부암동"의 전통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답니다.
안에서는 국악 강습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안채']
['사랑채']
['뒷마당']
국악 전수를 하는 소리가 들리는 "무계원"을 횅하니 둘러 보고....
['현진건 집터'] 2:51~2:55
[무계원]에서 조금 올라 가면 "현진건 집터"라는 표지석을 만납니다.
"현진건"이라고 하면 무슨 작품이 떠 오르나요?
저는 먼저 [운수 좋은 날]이 떠 오릅니다. 운수 더럽게 없는 날의 반어법을 구사한 [운수 좋은 날].
"현진건선생"은 소설가 이전에 언론인이었죠. 보성고보를 다니다 일본 도쿄의 '세이죠학교'를 다니다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 호강대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귀국해서 조선일보에 들어 갔다가 동아일보로 옮겨
10여년을 사회부 부장으로 근무했죠. 이 때에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손기정선수"의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을 발행하는 [일장기말소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살이를 하고 직장 짤리고...
일본을 철저히 배격한 반일 저항가 "현진건"은 그 후 비참한 삶을 살게 되죠.
시골에 내려가 닭을 키우다 망하고...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면 편안히 살게 해 주겠다는 일본의 회유를
끝까지 거부하였기에 가난 속에서 살았답니다.
운수 더럽게 없는 "운수 좋은 날"이 탄생되는 배경이기도 하지요.
춘원 이광수, 김동인, 주요한등 친일 문학인들을 경멸하고, 홍난파, 김동진등 친일 음악인들을 배척하며
가난해도 친일은 할수 없다는 그의 항일정신은 더럽게 운수 없는 "운수 좋은 날"이 되고 맙니다.
양계업을 하며 쓴 소설들도 가난을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하고 43세의 짧은 생을 살고
한 줌의 재가 되어 한강에 부려진 "현진건"...그래서 무덤도 없답니다.
토착왜구들이 들끓는 요즘에 귀감이 되는 분이라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 온것입니다.
['현진건 집터'와 '안평대군 집터'] 2:57
[무계원]에서부터 이곳 "현진건 집터"까지의 주변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살던 집터라고
하는데 육중하고 높은 담벼락과 철문으로 넘 볼수가 없었습니다.
[안평대군]은 형인 [수양대군]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는 것에 반대해 형으로 부터 죽임을 당했죠.
[현진건]은 이곳에서 집필 작업을 하며 말년을 보내다가 생을 마감 했답니다.
서울시에서 이 땅을 매입하여 기념관이라도 지을려고 했지만 땅 주인의 거부로 못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더군요.
[골목]
[현진건 집터]에서 골목을 따라 조금 더 올라 가면...
['반계 윤웅렬 별장']
[안내문]
"반계 윤웅령 별장"이라는 안내판을 만납니다.
안내판에는 '개화파 지식인 윤치호'의 아버지가 "반계 윤웅렬"이라고 소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윤웅렬"은 구한말 군부대신 등을 지낸 무관이었으며, 1910년 10월 한일 합방 조약 이후
일본 제국 남작(男爵)의 작위를 받고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공채 2만 5천원을 하사받은 친일파이죠.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시기 바람니다.
[내부 촬영]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개인 소유로 안으로 들어 갈수는 없어서 담 너머 촬영을 했습니다.
[내부 촬영]
독특한 건물은 서양식 벽돌 2층 건물이라는데 밖에선 조금 보이더군요.
이 집은 "이건창호"의 회장이 매입하여 보수공사를 하고 한옥의 변천사를 연구 했다나 뭐래나
[내림길] 3:02
[윤웅렬 별장]을 담너머 구경하고 내려 갑니다.
['세검정' 가는 길] 3:10
[부암동주민센타]를 지나 [세검정] 방향으로 조금 내려 가면...
['서울미술관']
"석파정 서울미술관"을 만납니다.
여기서 좌측을 보면...
['삼계동' 입구] 3:11
['삼계동' 정문]
"三溪洞"이라는 현판이 붙은 대문이 보입니다.
이 문은 잠겨 있어 들어 갈수 없고...
['대원군 별서' 조망]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고....
['석파정' 입구] 3:14
'대원군' 이후 [석파정]은 왕실 후예들에게 차례로 대물림되었는데 한국전쟁 뒤로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던 [콜롬바 고아원]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개인 소유(오리온그룹회장)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술관과 함께 입장료를 받고 출입시키고 있는데, 입장료가 만만치 않습니다.
결국 개인 소유로 돌아가 값을 지불해야만 구경할수 있어 씁쓸했습니다.
['대원군 별서']
석파정은 원래 철종 때 영의정까지 지낸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의 별서였답니다.
"별서"와 "별장"은 좀 다른 의미믈 가지고 있지요.
'별장'은 가끔 들려 쉬는 곳이고, '별서'는 자주 기거하는 곳이죠.
"김흥근"이 누구입니까. '김조순-김좌근-김병근"등으로 이어지는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막장드라마가
[철종] 대의 영의정까지 지내는 "김흥근"입니다. 이 놈은 하도 부정부패가 심해 유배도 가기도 했으나
다시 오뚜기처럼 일어나 세도정치를 이어간 놈이죠.
"김흥근'이 집을 지을 그 때엔
집 뒤에 '三溪洞'이라고 새긴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로 불렸다 합니다.
그러다가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그의 소유가 되었으며 이름마저 "석파정"으로 바뀌었다고...
그렇게 이름붙인 까닭은 앞산이 모두 바위[石] 언덕[坡]이기 때문이며,
'石坡'라는 대원군의 아호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라 합니다.
일설에는 석파정의 소유가 바뀔 때 대원군이 빼앗았다는 말이 전하는데,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전하기에 그 글을 인용합니다.
'김흥근'은 북문 밖 삼계동에 별장이 있었는데, 장안의 으뜸가는 명원(名園)이었다.
대원군이 그 별장을 팔라고 하였으나 흥근은 거절했다.
대원군은 다시 청하길 '하루만 놀이에 빌려달라'고 했다.
그 무렵 별장이나 정자를 가진 사람은 남들이 놀이에 빌려달라고 하면 부득불 허락하는 것이 한양의
풍습이어서 흥근은 마지못해 허락했다. 대원군은 마침내 임금께 한번 행차하기를 권해 (임금을) 모시고 갔다.
흥근은 임금께서 임했던 곳을 신하의 의리로는 감히 다시 쓸 수 없다 하여 다시는 삼계동에 가지 않았으므로
[삼계동정사]는 마침내 대원군의 소유가 되었다.”
['巢水雲簾菴(소수운렴암)']
[안내문]
커다란 바위 단면에는 "巢水雲簾菴’(소수운렴암)"이라는 각자가 있습니다.
그 뜻은 "구름 발 드리운 물 위의 암자"라는 뜻이랍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의 글씨라고 하는군요.
['삼계동' 각자]
[안내문]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
[안내문]
특이한 건물은 집 왼편 계곡 위에 걸쳐진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라는 누각인데
일반적으로 "석파정 石派亭"이라고 불리워지는 樓라고 합니다.
[유수성중관풍루 流水聲中觀楓樓]의 뜻은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단풍을 바라보는 누각"이라는데
지붕에 기와 대신 동판을 덮었습니다
['너럭바위']
[안내문]
'코끼리바위'라고도 부른다는 "너럭바위"
['서울미술관' 앞 조형물]
미술관 앞 조형물을 끝으로 [인왕산자락길]을 마침니다.
[구글어스]
[고도표]
오늘 걸은 거리는 7.3km 정도 였으며, 3시간반이 걸렸습니다.
[석굴암]을 다녀오지 않는다면 가족과 함께 즐길수 있는 코스라고 생각됩니다.
서울에 이런 풍광을 가진 계곡 숲길이 있다는데에 감명 받았으며
제가 추천하는 코스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