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역사 현장을 찾아서』 청계천 나들이 종각-청계광장-모전교-광통교-수표교-관수교-새벽다리- 마전교-동대문광장시장-오간수교-동대문문화역사공원

청계천 편의시설 지도. 계단 진출입로. 경시진출입로. 화장실 위치를 나타낸 표. 화장실의 자세한 내용은 버튼클릭 시 하단에 표기됨. 
						위에서부터 청계광장을 시작으로 모전교, 광통교, 광교, 장통교, 삼일교, 수표교, 관수교, 세운교, 배오개다리, 새벽다리, 마전교, 나래교, 버들다리, 오간수교, 맑은내다리, 다산교, 영도교, 황학교, 비우당교, 무학교, 두물다리, 고산자교. 세운교 쪽에 세운상가 새벽다리 쪽에 광장시장. 나래교와 버들다리 사이에 평화시장. 맑은내다리와 다산교 사이에 신발도매상가, 비우당교와 무학교 사이에 청계천문화관, 터널분수, 존치교각. 고산자교 밑으로 버들습지가 위치해 있음.
						그 외 지도에 표시 : 시청, 을지로입구. 을지로2가, 을지로3가, 을지로4가, 을지로5가, 훈련원공원, 동대문운동장, 흥인사거리, 종로1가, 보신각, 종로2가, 탑골공원, 종로3가, 종묘, 종로4가, 종로5가, 흥인지문, 동대문성곽공원, 동묘앞역사거리, 실설동로터리
						계단진출입로 : 모전교(2개), 광통교(1개), 광교(1개), 장통교(3개), 수표교(2개), 관수교(1개), 배오개다리(1개), 새벽다리(1개), 마전교(2개), 나래교(1개), 버들다리(1개), 오간수교(4개), 다산교(1개), 영도교(1개), 황확교(1개), 비우당교(1개), 무학교(1개), 두물다리(1개), 고산자교(3개)
						경사진출입로 : 모전교(1개), 세운교(1개), 버들다리(1개), 다산교(1개), 비우당교(1개), 두물다리(1개), 고산자교(1개)
						인라인, 자전거 진입금지. 낚시금지, 수영금지, 음주 및 소란행위 금지, 쓰레기 투기 금지, 노상방료 금지, 애완동물 출입금지, 야영 및 취사 금지 [청계천 주요시설]


복원사업관련 사항

  • 공사기간 : 2년 3개월(2003년 7월 1일 ~ 2005년 9월 30일)
  • 공사인원 : 694,000여명
  • 공사장비 : 135,000여대

복원된 청계천 다리

다리 총 22개

  • 보도교 : 광통교, 장통교, 수표교(임시보도교), 새벽다리, 나래교, 맑은내다리, 두물다리
  • 차도교 : 모전교, 광교, 삼일교, 관수교, 세운교, 배오개다리, 마전교, 버들다리, 오간수교, 다산교, 영도교, 황학교, 비우당교, 무학교, 고산자교
  • 첫번째 다리 : 모전교
  • 마지막 다리 : 고산자교
  • 가장 긴 다리 : 19번째 다리 비우당교 46.6m
  • 가장 짧은 다리 : 2번째 다리 광통교 12m
  • 청계천 다리간격(도면거리)
    청계광장~모전교 : 150m 모전교~광통교 : 157m 광통교~광교 : 153m 광교~장통교 : 262m 장통교~삼일교 : 176m	삼일교~수표교 : 222m 수표교~관수교 : 200m 관수교~세운교 : 262m 세운교~배오개다리 : 233m 배오개다리~새벽다리 : 203m 새벽다리~마전교 : 168m 마전교~나래교 : 222m 나래교~버들다리 : 185m 버들다리~오간수교 : 269m 오간수교~맑은내다리 : 245m 맑은내다리~다산교 : 301m 다산교~영도교 : 311m 영도교~황학교 : 413m 황학교~비우당교 : 305m 비우당교~무학교 : 344m 무학교~두물다리 : 315m 두물다리~고산자교 : 437m 고산자교~신답철교 : 307m

['종각역' 5번출입구]

2018년 4월 18일 (수) 맑음 [지하철1호선 종각역 5번출구]로 나가면서 [청계천 나들이]를 시작합니다. 이곳은 옛날에 "황성신문사"가 있었던 자리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보신각'] 건너편에 있는 "보신각"을 흘깃 보고 ['서린동'] '서린동'을 통과하여 [청계천]이 흐르는 세종로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광통교'에서 '모전교' 조망] [청계천]의 두번째 다리인 "광통교" 위에서 첫번째 다리인 "모전교"를 바라보고 [청계광장]으로 올라 갑니다. ['청계광장'앞 청계천 출발지] '세종로'에 조성된 "청계광장"과 청계천의 시작을 알리는 분수와 폭포가 우릴 반깁니다. 분수는 '캔들'모양 분수이고 4m 아래로 떨어지는 2단 폭포가 제법 멋을 더합니다. 폭포 양 옆에는 전국에서 돌을 가져와 8도석으로 제작된 "팔석담"을 깔았다고 하는군요. 밤에 오면 휘황 찬란한 조명으로 더욱 아름답더군요. 얼마 전 '청계천 등불축제' 할때 촬영한 사진 보여 드리면... [분수에서 청계천 조망] '캔들 모양' 폭포 뒤에서 진행방향을 바라보고 [청계천]으로 내려가 유람을 시작합니다. ['모전교'] "모전교 隅廛橋"는 [청계천]의 첫번째 다리랍니다. "모전교"는 다리 근처 길모퉁이에 과일을 파는 과전(果廛)이 있었는데, 그 과일가게 이름이 '모전[隅廛]'이어서 그 "모전" 부근에 있는 다리라고 "모전교"가 되었답니다. 깊은 뜻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과일가게' 이름에서 유래하는군요. ㅎㅎ [가장 넓은 곳] 공원화 된 [청계천]에선 가장 넓은 곳인데...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는데, 주로 버들치와 피라미, 잉어등이 살고 있더군요. ['광통교'] ['광통교' 하부] [청계천]의 두번째 다리인 "광통교 廣通橋"는 지금의 '보신각'이 있는 종로 네거리에서 을지로 네거리 방향으로 나아가다가 청계천에 있던 다리인데 조선시대 "광통방 廣通坊" 근처에 있던 큰 다리였으므로 "대광통교 大廣通橋", 또는 "광교 廣橋"라 했답니다. "광통방 廣通坊"은 조선시대 초기 도성인 한성부를 나누어 관할하던 관청 11개 중에 하나였답니다. 지금의 '洞'사무소와 비슷한 업무를 하던 관청이었다고하면 이해가 쉽죠? ['광통교'의 '신장석'] ['광통교' 다리에 얽힌 사연] "광통교" 다리에 얽힌 사연은 위의 안내문을 참고 하시고...제가 추가로 더 상세히 알려 드림니다. "태조 이성계"의 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는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하고 왕위에 오르기 한해 전에 죽어 왕비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정종" "태종 이방원"등 6남2녀를 낳았죠. 조선의 초대 왕비는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 차지가 되었고 두 아들을 낳았는데 "방석"과 "방번"이 그들이죠.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를 무지 사랑하였다는 것은 너무 알려져 있죠? 그래서 본처인 "신의왕후"에게서 낳은 아들들을 팽개치고, "신덕왕후"에게서 낳은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죠. 비극의 시작 이었습니다.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도 일찍 죽자 "태조 이성계"는 [덕수궁] 근처에 릉을 조성하였죠. 城 안에 릉을 조성하지 않는게 일반적인데 얼마나 애통했으면 사랑의 표시로 특별히 사대문 안에 조선왕조 유일의 릉을 조성하고 "정릉"이라고 호칭하며 원찰까지 세워 추모할 정도 였겠습니까. "태조 이성계"는 매일 "신덕왕후 릉"에 행차하는게 하루 일과 중에 하나였다고 할 정도였으니... "이성계의 본처"인 "신의왕후"의 다섯번째 아들인 "이방원"이는 이미 세자로 책봉되 있던 이복 동생 "방석"을 죽이고...자기 친 형제들까지 죽이며... 소위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권을 장악하고, 계모인 "신덕왕후"의 릉을 파헤쳐 없애버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선왕 아버지의 부인인데 어찌 그럴수있냐고 신하들이 만류해서 성밖으로 이장을 했지요. 그러니까 "신덕왕후의 릉"인 "정릉 貞陵"은 원래 '덕수궁' 근처에 있어서 동네 이름이 "정동"이 되었고, 이장 한 후 그 동네의 이름은 "정릉동"이 되었습니다. "태종 이방원"이 자신의 계모인 "신덕왕후"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알수 있는 또 하나의 역사유물을 이곳 "광통교"에서 만나게 되니 그 슬픈 역사가 아른거리는군요. "신장석"으로 만든 "광통교" 정권을 장악한 이방원이 자신의 계모인 "신덕왕후"의 묘를 옮기는 과정에서 묘에 사용되었던 돌들, 즉 "신장석"을 백성들이 밟고 다니도록 제일 번화한 다리인 이 "광통교" 다리로 옮겨 다리 일부로 사용했으니 얼마나 "신덕왕후"를 미워했는지 알수 있습죠. 권력이 뭔지...예나 지금이나 그 권력을 향한 인간들의 욕망은 한결같습니다. 권력 앞에선 부모형제도 없으니... ['광교'] 현재 있는 "광교"는 현대에 만들어진 다리이고, 오리지날은 조금 전의 "광통교"가 "광교" ['수표교'] "수표교 水標橋"는 복원을 하지 않고 있어 아쉬움이 좀 있군요. 오리지날 "수표교"는 현재 [장충단공원]에 가 있죠? 1959년에 청계천 복개공사를 할때 이전. 제가 [장충단공원]을 찾았을 때 촬영한 사진을 첨부 합니다. [수표교] "수표교 水標橋"는 조선 세종 2년(1420)에 세운 다리로, 당시에는 다리 근처에 소시장(牛市場)이 있었다 하여 '마전교'라 불리웠답니다. 세종 23년(1441) 수표(水標) [보물 제838호]를 만들어 이 다리 옆에 세우고 청계천의 물 높이를 재어 홍수에 대비하도록 하였고, 영조 36년(1760)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경(庚)·진(辰)·지(地)·평(平)’이라는 글씨를 새겨두어 4단계의 물 높이를 측정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水標橋"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청계천을 건너는 다리로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홍수 조절을 위한 알림판 역활도 하였답니다 다리에 설치되 있던 "水標"는 다리를 [장충단공원]으로 옮길 때 함께 옮겨갔다가 1973년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관수교'] ['관수문'] "관수교 觀水橋"는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옛 교량 명칭이라고 ['세운교'] "세운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인 "세운상가"에 놓여 있는 다리 ['마전교'] "마전교 馬廛橋" 이 근처에 소와 말을 거래하는 시장인 마전 馬廛이 있었다고... ['나래교'와 동대문종합시장' 앞] "동대문종합시장" 건물이 보이길래 시장 안으로 들어가 추억의 빈대떡과 막걸리를 한잔 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ㅎㅎ ['동대문 광장시장'] ['박가네' 빈대떡집] ['빈대떡'과 '막걸리'] 그래서 "동대문 광장시장" 안으로 들어가 울 칭구가 제일 맛있다고 칭송하는 빈대떡집에 들어가 빈대떡에 막걸리를 즐겼는데, 먹다 보니 막걸리 여섯병을 둘이서 마셨네요. ㅎㅎ 오랜만에 막걸리로 취하고...ㅎ 빈대떡은 한장에 4,000원이었습니다. 빈대떡 두장씩 먹고 두장씩 포장해 왔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또 한잔 더 하지 않을수 없었고...ㅋㅋ [촬영 중] 맛집 촬영도 하고 있었고 ['전태일다리(버들다리)'] "광장시장"에서 나와 다시 [청계천]을 걸어서 "전태일다리 (버들다리)"를 지나고 ['오간수교'] 다섯 칸의 홍예모양 水門이 있다고 "오간수교"라고 하는데 『한양 城』에 있는 유일한 水門이 있는 다리. ['오간수교' 위] [청계천] 개천변에서 "오간수교" 위로 올라 가며 [청계천] 답사를 마치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들어 갑니다. [뒤돌아 본 '동대문'] 공원으로 들어 가기 전에 뒤돌아 보면 [보물1호]인 "흥인지문-동대문"이 조망되고 [옛 '동대문야구장' 터] [동대문야구장]이 있던 자리는 역사문화공원으로 완전 탈바꿈했습니다. [성문] [동대문운동장]을 발굴하다가 나온 『한양 城』의 성곽과 성문이 복원되 있고...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너무 큰 규묘여서 구경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듯하여 다음에 시간 날때 둘러보기로 하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앞]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귀가했습니다. [광장시장]에서 산 빈대떡을 들고....ㅎ ^*^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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