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역사 현장을 찾아서』  
        덕수궁-경복궁-운현궁 역사탐방  
             남대문-시청전망대-덕수궁-세종로-경복궁-청와대-삼청공원-계동골목-운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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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대문]에서 출발하여 [덕수궁]을 둘러 보고 [세종로]를 지나 [경복궁]으로 갑니다.
  그리고 [청와대] 앞길을 지나 [삼청동]과 [가회동] [계동골목]을 통과하여
  [운현궁]과 [교동초등학교]를 둘러 보고
  [낙원동 옛날 아구찜집]에서 뒷풀이를 하는 GPS 측정으로 8.6km를 갑니다.

  [숭례문]

  2018년 4월 11일 (수) 맑음
  직행버스를 타고 [남대문]에 내려 [시청] 앞으로 갑니다.


  [시청 방향 조망]

  [남대문] 앞 횡단보도를 건너며 바라 보는 [시청] 방향입니다.
  황사 예보가 있었습니다만, 다행이 날씨는 매우 좋았습니다.


  [시청]

  [지하철2호선 시청역 1번 출입구]가 있는 [서소문동] 입구는 횡단보도가 만들어 졌군요.
  전에는 지하전철역으로 내려가 건너야 했는데 좀 편해졌습니다.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        오후 1시 15분

  오늘 역사탐방의 첫번째 궁궐인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입니다.
  그런데 [덕수궁]을 들어 가기 전에 꼭 들려 보고 가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좌측 [덕수궁 돌담길]인 [정동길]로 먼저 갑니다.


  ['덕수궁' 돌담길]

  예전엔 법조타운이었던 [정동길-덕수궁돌담길]로 조금 올라 가면...


  ['정동전망대'가 있는 건물]

  좌측에 "서울특별시청 서소문청사 1동"이 있습니다.
  입구에 "정동전망대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있는데 모르고 가면 뭐가 뭔지 보이지 않겠지만 
  이 답사기를 보고 이제 알았으니 앞으로 가실 분들의 눈에는 조금만 더 관심 가지면 잘 보일겁니다. ㅎㅎ
  이 건물의 13층에 시청이 운영하는 전망대가 있는데, [덕수궁]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명당자리 전망대이니
  다음에 가실 분들은 꼭 들려 보고 가시길 강추합니다. 
  누구나 들어 갈수 있으며 무료입니다.


  ['정동전망대']

  전망대로 오르는 승강기를 타고 13층에 오르면 커피 향기가 물씬 풍기는 전망대에 도착합니다.
  전망대에선 커피와 음료를 팔고 있으니까요...


  ['고종'과 커피]

  전망대 앞면 벽에는 커피를 남달리 사랑한 [고종황제]에 대한 이야기 안내문이 있습니다.
  커피의 쌉스럼한 맛에서 멸망해 가는 대한제국의 아픔을 카타르시스적으로 위안을 받았으리...


  ['덕수궁 중화전' 조망]

  조망을 합니다.  햐 ~~ 막힘없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역사의 현장 ~
  [덕수궁]의 本殿인 "중화전 中和殿""석조전"이 조망되고
  빌딩들이 現代와 古代를 넘나들며, 수많은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듯...
  권력과 금력...미움과 사랑...침략과 저항...
  '한양성'을 자연적으로 만들고 있는 山群들이 '서울'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군요


  ['덕수궁 함녕전' 조망]

  북쪽으로는 '옛 국회의사당'이었던 '현 서울시의회'와 '성공회' '영국대사관'등이
  [덕수궁]을 중심으로 그 둘레에 위치해 있고, 
  "북악산"과 "북한산"이 조선왕조의 중심부인 "경복궁"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서울시청' 조망]

  약간 우측 동북쪽으로는 "서울시청 본관"이 마천루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존재감을 나타내고...
  조망을 마치고  [정동전망대]를 내려가 [덕수궁]으로 갑니다.


  ['대한문']

  "덕수궁 대한문  德壽宮 大漢門"
  현재는 [덕수궁]의 정문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원래는 [덕수궁]의 東門이었으며...
  원래 이름은 "대안문 大安門"이었다는군요.
  정문은 현재 주변 도시개발로 없어졌는데 [중화문] 앞 남쪽 정면에 있었다는군요.
  저는 이 대문의 이름을 볼때마다 
  "大漢門""한나라 漢" 대신에 "우리나라 韓"을 사용 할때도 되지 않았을까...라고
  괜한 생각을 해 봅니다. 근데 저 혼자만의 괜한 생각일 뿐일까요? ㅎ


  ['중화문' 가는 길]

  벚꽃이 군데군데 피어있는 궁궐길을 따라 먼저 [중화문]으로 갑니다.
  봄꽃이 화려 할줄 알았는데 예상보단 봄꽃이 많지는 않군요.
  그래도 "한양성"의 5대 궁궐 중에 하나이니 풍기는 정취는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중화문'과 '중화전']

  이 왕궁터는 원래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이자, 조선왕조 최초의 왕비인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이 있던 곳이었답니다. 그후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신덕왕후"를 원수같이
  미워해 그녀의 무덤인 '정릉'을 파헤쳐 지금의 '성북동'의 "정릉"으로 강제 이장을 시켰지요.
  그후 이 터에는 "조선 제9대왕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 月山大君"의 私家가 지어졌었답니다.
  세월은 또 흘러....
  조선왕조에서 최고의 쪼다리 왕인 "선조"가 '임진왜란'이 발발하니 쪽바리들을 피해 '의주'로 도망갔다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 오니 '경복궁'은 모두 불타 없어져 갈곳이 없게되자 "선조"가 이곳에 머물게 되었고
  결국 이곳에서 죽었지요. 그러니까 "선조"가 치졸한 인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지요.
  또한 "선조"가 저 세상으로 가자 왕위에 오르는 "광해군"이 왕위계승식을 거행한 곳이기도 하답니다.
  이후 이 궁은 "경운궁 慶運宮 "으로 불리워지게 되고, "광해군"은 [창덕궁]을 새로 완성하여 이사를 갔답니다.
  그리고 "광해군"의 최대의 정적이었던 "선조의 계비-인목대비"를 이곳에 유폐시킨 곳으로 유명한데...
  "인목대비"는 사실 "광해군"의 새엄마가 되지요? "광해군"보다 나이 어린 새엄마...ㅎ
  하지만 절치부심 "인목대비"는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무너뜨리고 쿠데타에 성공하여 복수를 했지요.
  역사적으로 잘한 복수인지는 몰라도...ㅎ


  ['중화전']

  ['중화전' 내부]

  [대한제국] 마지막 역사를 쓴 현장...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日本 쪽바리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며 우리나라를 접수하려 했지요.
  한마디로 "명성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라고 하는 비극이 발생하고 
  생명의 위협을 계속 받은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
  그후 '러시아대사관'에서 돌아와 머문 곳이 이곳 "덕수궁"이지요.
  이때에 "고종의 만수무강을 빈다"라는 의미로 "덕수궁 德壽宮"이라 개명을 했답니다.
  그리고 "고종"도 "덕수궁 함령전"에서 승하하였지요.
  그렇게 그렇게 "조선왕조"는 멸망해 갔습니다.


  ['광명문']

  "광명문 光明門"
  "함녕전"의 정문이었다는데 현재 [국보 제229호 자격루]와 [보물 제1460호 흥천사명 동종],
  다연발 활인 [신기전]이 전시되 있습니다.


  ['석조전 서관']

  "석조전 서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현대식 건물로 1936년에 완공했다는군요.
  제가 중학교 시절 미술실기대회가 '덕수궁'에서 열렸는데...그때 특상을 받아 저곳에 전시된적도...ㅎ


  ['석조전']

  "석조전"
  1900년에 기공하여 1910년에 완공한 유럽풍의 석조 건축물로서 우리나라 근대사의 현장이지요.
  "고종"이 고관대신과 외국사절들을 만나 회의를 하는 용도로 사용하다가
  해방이 되고 난 후엔 1946~1947 사이에 "미.소 공동위원회"의 사무실로 사용했답니다.
  그후엔 "유엔 한국위원단"이 1948~1950년까지 사무실로 사용했답니다.
  현재는 2014년에 개관한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사용.


  ['중명전 重明殿']
 
  "중명전"은 "석조전" 좌측 [덕수궁] 담장 밖에 있는데...그래서 사람들이 잘 못가보는 곳이죠.
  이나저나 이 건물은 우리들에겐 근대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역사 현장입니다.
  생각키도 싫은 바로 그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이 1905년에 체결된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그 역사의 잔재들이 남아 우리나라를 주무르고 있지는 않은지...


  ['왕궁 수문장교대식']

  [덕수궁]을 대충 둘러보고 있는데 "왕궁 수문장교대식"을 하러 나가는 행렬이 지나가서
  교대식을 보기 위해 따라 나갑니다.


  ['왕궁 수문장 교대식']

  "왕궁 수문장교대식"은 "대한문"에서 오후2시에 10여분간 열리더군요.


  ['세종로']

  ['세종로' 사거리]
 
  [덕수궁]을 탐방하고 [경복궁]으로 향합니다.
  "세종로"를 통과하여


  ['세월호 기억의 문']
 
  "세월호 기억의 문"을 잠시 보고...


  ['이순신장군 동상']
 
  "충무공 이순신장군 동상"을 지나면...


  ['세종대왕 동상']

  "세종대왕 동상"을 만나고


  ['광화문 광장']

  계속 "광화문 광장"이 펼쳐집니다.
  '조선왕조'의 중심이 되는 "경복궁"과 "한양도성"을 감싸며 호위하고 있는 "북악산"등 산군들이
  성곽을 이루며


  [뒤돌아 본 '광화문 광장']

  "광화문" 앞으로 가서 뒤돌아 본 "광화문 광장"입니다.
  국정농단세력들을 무너뜨린 '촛불집회'가 열렸던 곳이죠.

            
              ['광화문']

             "광화문 光化門"은 "경복궁"의 정문인데 역사의 굴곡 속에서 시련도 많았지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은 떼어내고 
             현재는 2010년 임태영의 원본 글씨를 살려 내걸었다는 새 현판입니다만
             이것도 균열과 색상 시비 등 숱한 부실 시비 끝에 재교체가 결정돼, 
             내년에 다시 떼어질 처지에 놓였답니다.


  ['경복궁']                  

  "광화문"을 들어서면 "근정문"이 나타나는데, 여기까지는 누구나 출입이 가능하지만
  앞에 보이는 "근정문"을 통과하려면 입장료를 내야 합니다. 어른 3,000원.
  내외국인 할것없이 한복 입은 사람과 어린이 65세 이상은 무료


  ['경복궁' 안내문]

  궁의 명칭은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라는 뜻인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景福宮 경복궁 」이라고 지었답니다.
  그런데 저는 "경 景"이라는 글자에 유의 합니다. 이 한자는 원래 "경치"를 뜻하지만...
  "경 景"을 파자해 보면
  "서울 京" 위에 "태양 日"이 위에서 비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양이 서울을 따뜻하게 비추는 복된 宮"이라는 뜻으로 해석해 봅니다. 
  그럴듯 하죠? ㅎㅎ


  ['근정문']

  입장료를 징수하는 "근정문"에는 한복을 입은 내외국인이 많았는데,
  한복을 입으면 무료입장이기 때문이겠죠?  ㅎㅎ
  [경복궁] 근처 한복집에서 빌려 입고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근정전']

  "근정전 勤政殿" 국보 제223호"
  "경복궁"의 本殿이지요. 설명이 필요없고...
  그런데 조선왕조 27명의 왕들 중에 이곳을 왕궁으로 사용한 왕은 많지 않더군요. 6~7명
  화재와 전란등으로 오랜 기간 폐허가 되었기도 하고, 기운이 좋지 않다고 기피한 왕들이 대부분..
  대부분 "창덕궁"을 왕궁으로 이용했지요. 그래서 쪽바리들이 "秘園"이라고 왜곡시키기도했고...


  ['근정전 어좌']

  임금이 앉는 "어좌 御座"와 뒤에는 "일월오봉도 日月五峰圖"가 그려져 있습니다.


  ['근정전'에서 뒤돌아 본 '근정문']
 
  "근정전"에서 뒤돌아 본 광경입니다.
  正一品에서부터 正九品까지 도열해 어명을 받들던 신하들의 모습은 간데없고
  수많은 내외국인 관람객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습니다.




  ['경회루']

  "경회루 慶會樓 국보 제224호"
  "慶會樓"는 "태종 이방원"이가 개성에서 다시 환도하여 만든 누각인데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사신을 접대하도록 하였으며, 
  파낸 흙으로는 "교태전" 뒤편에 "아미산(蛾眉山)"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경회루"를 방문하면 "중종"과 "단경왕후"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먼저 생각 납니다.
  "인왕산 치마바위"에 얽힌 사랑이야기....
  "인왕산" 정상 아래에 유명한 "치마바위의 전설"이 있는 암벽이 있는데
  이름하여 "치마바위"
  이 바위에 서려있는 "중종"과 "단경왕후"의 사랑 얘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12살의 나이에 "진성대군"에게 시집가 애뜻한 정을 나누었던 소녀.
  그 "진성대군"이 하루 아침에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중종반정'으로 왕이 되고...
  그녀는 졸지에 왕비가 되고...
  조선 제 11대 왕 "중종"-그가 바로 그 소녀의 서방인 "진성대군"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녀는 연산군 아래에서 좌의정을 지내던 "신수근 愼守勤"의 딸이었으니
  운명은 이렇듯 기묘하게 찰라에 의해 바뀌고....
  박원종을 비롯한 반정 세력들은 왕비가 연산군의 와이프-거창신씨의 외질녀이기에 
  "중종"의 정비인 "단경왕후"가 된 왕비로 남겨 둘수가 없었지요. 후환이 두려워....
  그래서 꼭두각시 얼굴마담 '중종'을 족쳐서 "단경왕후"를 폐위 시키고 새로운 왕비들을
  급하게 옹립합니다. 
  새로 뽑은 왕비들 중..그 유명한 "문정왕후"..등에서 부터 우리나라 역사에서 지울수 없는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적 전란으로 가는 불씨가 태동 됩니다.
  "중종"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반정 세력들에게 꼼짝도 못하고 
  강제적으로 사랑하는 "단경왕후"를 눈물로 떠나 보낼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중종"은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그녀가 보고 싶어 경복궁 경회루 앞에 나와
  그녀가 산다는 "인왕산"방향을 바라보며 그리움의 눈물을 흘렸다고 하지요.
  폐서인이 되어 쌩과부로 홀로 사는 '단경왕후'는 그 사실을 소문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녀는 궁궐에서 입던 자신의 다홍치마를 인왕산 바위에 걸쳐 놓아 자신의 입지를
  알리곤 하였답니다. 왕이여~~ 날 보러 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이후 단 한번도 다시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
  바라만 볼수 밖에 없는 사랑......"경회루"와 "치마바위"의 내력입니다


  [한복 입은 외국인들]

  외국인들이 한복을 입으니 예전엔 생소했지만 요즘은 그렇게 생소하지는 않습니다.
  이 외국인들은 한복이 너무 예쁘다고 칭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한컷 촬영하여 올렸습니다. 어때요? ㅎㅎ


  [다양한 외국인들]

  외국인들이 무척 많았는데 다양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경복궁'의 북쪽 지역]

  "경회루"를 지나 [경복궁]의 북쪽 뒷문이라 할수 있는 "신무문 神武門"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 길 우측에는 ...


  ['향원정']

  "향원정 香遠亭"이 있는데 보수공사 중에 있었습니다.
  "향원정 香遠亭"과 "건청궁 乾淸宮"은 "고종"이 "명성황후"와 살기위해 "고종"이 건립한 것이랍니다.
  그러니까 [경복궁]에서 가장 늦게 그러니까 가장 최근에 건립된 시설인거죠.
  '멀리 멀리까지 향기가 퍼지라'고 지은 이름이 "향원정 香遠亭"이고...
  "향원정"과 "건청궁" 사이에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 이름이 "취향교 醉香橋"로서 '향기에 취한다'는 뜻이라고...


  ['건청궁']

  "건청궁 乾淸宮"
  "경복궁"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다른 宮입니다.
  "고종"이 신하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사비를 들여 지은 宮이라지요.
  그리고 여기서 "명성황후"와 10여년을 기거하며 격동의 구한말 시대를 보냈답니다.
  불행이도 쪽바리들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까지 점령하여 속국으로 만들기 시작했지요.
  그 일환으로 일본에 가장 반대했던 "명성황후"부터 없애버리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름하여 "을미사변".
  "을미사변"의 현장이 바로 이곳 "건청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건청궁' 안내문]

  "건청궁 乾淸宮"에 대한 공식적인 안내는 안내문을 참고하세요.


  ['함광문 含光門']
 
  "건청궁 乾淸宮" 안으로 들어 가면 안채로 들어 가는 門인 "함광문 含光門"을 통과합니다.
  "맑은 하늘"이라는 의미의 "乾淸"과 "빛 흠뻑 드는 곳"이라는 "含光"은 일맥상통하는듯...


  ['곤령합 坤寧閤'과 '옥호루 玉壺樓']
    
     ['곤령합 坤寧閤'과 '옥호루 玉壺樓'의 원래 모습]

  [측면에서 촬영한 '곤령합 坤寧閤'과 '옥호루 玉壺樓']

  "'곤령합 坤寧閤'과 '옥호루 玉壺樓'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소였답니다.
  슬픈 역사 [을미사변] 때에 "고종"이 일본 낭인들에게 수염을 쥐어 뜯기고
  "명성황후"가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 나와 처참하게 시해 당한 곳입니다.
  "명성황후"가 낭인들에게 끌려 나올때 극렬히 반항하며 문을 잡고 버티다가 손톱 손가락이 문틈에 끼어
  빠지고 부러졌다고 할 정도로 그날의 치욕을 다시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그리곤...


  [부속건물]
 
  "옥호루" 옆에 있는 마당에서 "명성황후"는 처참하게 칼에 찔려 죽임을 당하고
  앞에 보이는 샛문으로 끌려 나가


  [녹산]
 
  사진에서 보는 "녹산"이라고 하는 "옥호루" 바로 옆 동산에서 시신을 토막내어 불에 태웠졌답니다.
  그래서 "명성황후"는 시신이 없지요.
  제가 오래전 [水原 西湖]를 거닐며 쓴 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을미사변]의 이면을 들여다 보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우장춘 박사"는 水原 西湖를 바라보며 잠자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잊지 말아야 할 치욕의 역사를 이번 기회에 한번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을미사변" 아시죠?  쪽바리들이 우리나라 국모인 "명성왕후"를 시해한 사건.
  "명성왕후" 시해 사건은 쪽바리 낭인들이 한짓이라고 모두 믿고 있지요?
  물론 직접 칼을 휘둘러 "명성왕후"를 죽인 놈들은 쪽바리들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권력의 중심부인 경복궁에 침입하여 왕후의 침전으로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들어 가서
  칼을 휘두를수 있기 위해선 경복궁을 지키는 우리나라 경비군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경복궁 대문을 활작 열어주고 고종황제와 민비의 침전으로 길을 안내한 장본인이 
  우리나라 경복궁 경비 제2대대장이었던 천인공로할 인간 친일파 "우범선"이었습니다.
  그런 천인공로할 짓을 한 민족의 반역자인 "우범선"의 큰아들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제가 "우장춘 박사"라면 믿으실겁니까? ㅎ


  ['건청궁'에서 '신무문'으로 가는 길]
 
  "건청궁"에서 "청와대"로 나가는 門인 "신무문"으로 가는 길입니다.
 
  "명성왕후"를 실제 시해한 핵심 조선 친일파 인간은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인 "우범선"이었습니다.
  "을미사변"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에서 숨어 살던 "우범선"은 일본인 여자 "사카이(酒井ナカ")와 결혼하여
  "우장춘 박사"를 낳고, "고영근"이라는 애국심에 불타는 "고종"의 자객에 의해 살해 당해 죽었습니다.
  "고종"이 천하의 역적 "우범선"이 많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이려 했는데 결국 복수를 한것이죠.
  일본인 어머니에 의해 가난하고 어렵게 자란 "우장춘"은 동경제국대학에서 "種의 합성"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세계적 育種學者가 되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한국국적으로 일본 속에서 살고 있을 즈음 해방이 되고...
  1950년 '이승만 정권'은 한국말 한마디도 못하는 "우장춘박사"를 엄청난 돈을 들여 초빙하여 
  그가 사망하던 1959년까지 만 9년 5개월간 우리나라 농업과학연구소 초대 연구소장으로 취임시키고
  우리나라 땅에 맞는 종자의 개발에 박차를 가해 농업 발전에 혁혁한 공적을 쌓게 했습니다.
  아버지가 천인공노할 역적이었다고 연좌제로 아들까지 싸잡아 응징 할수 없는 대표적 父子관계 - - -
  을미사변의 주범 중에 한명인 친일파 "우범선"과 우리나라 농업발전의 선구자인 "우장춘박사"입니다.


  ['집옥재']

  ['집옥재' 안내문]      

  "건청궁"의 서쪽으로 나가면 "집옥재 集玉齋"가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시고...


  ['신무문 神武門']

  "신무문 神武門"
  "경복궁"의 북쪽 뒷문으로 "청와대"로 통하는 문입니다.


  ['신무문'에서 바라보는 '청와대']
 
  "神武門"에서 정면으로 "청와대"가 보입니다.
  예전 '전두환정권' 시절에 [장세동의 30 경비단]이 주둔하면서 들락거렸을 문이겠군요.


  ['신무문']

  "경복궁" 밖으로 나와 뒤돌아 본 "신무문 神武門"입니다.


  [효자동 방향]

  "신무문"에서 먼저 좌측에 있는 "청와대 사랑방"을 구경하고 다시 돌아와 [삼청동]으로 갈 예정입니다.
  [효자동] 방향으로 청와대 앞길을 따라 잠시 내려 가면...


  ['청와대' 입구 광장]

  [효자동]에서 "청와대"로 들어 가는 입구에 광장이 있고
  광장 남쪽에는


  ['청와대 사랑채']                  

  "청와대 사랑채"가 있습니다.
  예전엔 안가들이 있던 곳에 이런 사랑채가 건립되었다네요.
  누구나 들어 갈수 있으며 무료이더군요.


  [1층 로비]

  사랑채 1층 로비 모습이고


  ['청와대관']

  "청와대"와 관련된 몇몇 테마관이 있었습니다.


  ['민주화운동 자료']

  그 동안 있었던 민주화운동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되 있었고


  ['문재인 대통령 집무실' 모형]

  2층엔 현 "문재인 대통령" 집무 책상이 설치되 있어 책상에 앉아 사진도 촬영 할수 있더군요.
  누구나 대통령 책상에 앉을수 있으니 "나도 대통령" 흉내를 낼수 있고...ㅎㅎ


  [역대 대통령]
 
  역대 대통령들의 사진과 프로필이 걸려 있는 곳도 있고
  기타 다양한 시설들이 있었습니다. 대략 둘러 보고


  [2층 로비에서 조망]

  2층 로비로 나가니 조망이 좋았습니다.


  [수학여행 학생들]

  "청와대"로 수학여행 오는 학생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풍경은 볼수 없었지요?
  관저에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싫어한 '잠자는 공주'가 있었으니...ㅎ


  [청와대 정문]

  "청와대 사랑방"을 둘러 보고
  다시 "청와대 정문"으로 돌아와 [삼청동]으로 넘어 갑니다.


  ['청와대 위민관']

  "청와대 비서실" "위민관"등이 있는 건물 앞을 통과하면...


  ['청와대 삼청동 방향 출입구']

  [삼청동] 방향 "청와대 출입문"을 나서고


  ['춘추문']

  이어서 "춘추문"이 보이는데, "청와대 관저" 출입문이랍니다.
  [최순실]이가 '보안손님'으로 관저에 들락거린 문이겠죠? ㅎ


  ['국무총리 공관']

  이어서 "국무총리 공관"이 있고


  ['삼청동']
 
  [삼청동] 거리로 나가게 됩니다.
  [삼청터널]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가면...


  ['삼청공원' 입구]

  "삼청공원"입구가 있습니다.
  원래 공원에 들어가 벚꽃구경을 할려고 했는데 간밤에 강풍으로 꽃닢이 많이 떨어져 볼품이 없더군요.
  그래서 그냥 패스


  ['감사원']
 
  이어서 "감사원"을 지나면

 
  ['중앙고등학교']

  "중앙고등학교" 정문을 지나고


  ['가회동' - '북촌한옥마을']
 
  이어서 옛날 사대부들이 많이 살던 [가회동]을 잠시 통과하여, 
  길 중간쯤에서 좌측 [계동] 골목으로 넘어 갑니다.


  ['계동 골목']  

  [계동골목]은 저에겐 학창시절 오르내리던 추억의 골목입니다.



  ['현대그룹 사옥' - '옛 휘문고 자리']
 
  제가 다녔던 "휘문중고등학교" 자리에 "현대그룹 사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다니던 학교 교실과 운동장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모교를 찾으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운현궁']
 
  [계동사거리]에서 [종로2가] 방향으로 조금 내려 가면 
  "운현궁 雲峴宮" 을 만납니다. 
  "大院位大監 흥선군 이하응"이 기거하던 실질적 왕궁이었지요.
  그래서 宮이라고 할수 없는 私家를 왕이 기거하는 宮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되지요.
  "김동인(金東仁)"선생이 지은 장편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의 주무대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에선 "대원군'을 영웅적으로 묘사하고 있죠?
  "운현궁"에는 누구나 들어 갈수 있으며 입장료는 전에는 받았는데 이젠 무료로 바뀌었더군요.


  ['노안당 老安堂']
                   
                      ['노안당 안내문']

                     안내문을 참고 하시고...


  ['蘭을 치고 있는 '흥선대원군']

  "노안당" 안에는 "대원위대감 흥선군 이하응"이 蘭을 치고 있는 모습을 재현해 놨습니다.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나이어린 아들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을 했던 곳입니다. 
  제국주의가 발호하는 국제 정세에서 외침을 막고자 나라를 틀어막았던 '쇄국정책'을 펼쳤으며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던 '서원 철폐령'을 내렸던 곳입니다. 
  왕권 강화를 위한 '비변사 폐지', 안동김씨 세력 숙청 등등 대원군 정책 대부분이 이곳에서 수립되었다죠.


  ['노락당 老樂堂']

  "노락당 老樂堂"은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명성왕후"가 1866년(고종3년) 삼간택이 끝난 후 왕비 수업을 받던 곳이기도하고,
  "고종"과 "명성황후"의 결혼식인 가례가 행해진 곳이기도 한 유서깊은 곳이죠.
  당시 "고종"의 나이가 13살로 이름은 '이명복'이었고...
  왕이 가례를 왕궁이 아닌 私家에서 올린다는건 있을수 없는 일이었지만...
  "'노락당'이 높아 하늘과의 사이가 한자 다섯치 밖에 안된다."는 말을 들을 만큼,
  당시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듯 했다는 것을 가례에서도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명성왕후' 축하 방문]
       
 
  "부대부인 府大夫人"은 "여흥 민씨"로 "대원군"의 부인이지요.
  그러니까 "고종"의 어머니가 되며..또한 천주교를 믿은 광신도로서 세례까지 받은 여인이었지요.
  천주교 말살정책을 펴는 남편 대원군과 완전 대비되는 여인이었는데 
  남편에 대한 그녀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어느 정도 느낄수있습니다.
  "부대부인 府大夫人"은 "민자경"이라는 소녀를 며느리로 간택하는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가 된 자신의 11촌 아저씨인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천거, 왕비로 책봉하게
  하였는데 그녀가 바로 16살 소녀 "민자경"으로 "명성황후"가 되었지요. 
  권력에 문외한으로 여겨 선택한 "16살 소녀 민자경"이 "대원군"의 최대 정적이 될줄이야... 햐 ~
  그리하여 조선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권력 다툼으로 멸망의 길을 가게 되었지요.
  아 ~~ !  역사란 무었인가....


  ['철종비'의 '조대비' 알현]

  '강화도령' "철종"의 왕비가 당시 권력 서열 1위의 "순조의 비"였던 "조대비"를 알현하는 광경을 재현 했는데
  입고 있는 '당의'가 무척 화려합니다.


  ['이로당 二老堂']
       
                 ['이로당 안내문']  

             "이로당 二老堂"을 둘러 보고 "운현궁"을 나서서
             [종로2가] 방향으로 조금 내려 가면...


  ['교동초등학교']

  "서울교동초등학교"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로서 필자인 "파란문"의 모교가 됩니다.
  "윤보선대통령"을 배출하고...코미디언 '구봉서씨'도 '교동 출신...ㅎ
  "이름 모를 소녀"를 작사 작곡하고 직접 부른 "김정호"와 저는 동기 동창입니다. ㅎ
  제가 이 학교를 다닐때엔 한 학년이 열몇반으로 학급당 육십명이 넘었고, 
  거기다가 오전반 오후반으로 2부제 수업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학생수가 총 5~6천명?
  당시엔 국민학교도 유명 국민학교를 들어 가려면 요즘 유명 대학 들어가는 것과 같았죠.
  겨울엔 책보따리에 땔감 나무를 몇개씩 넣어 가기도 했지요...
  그래서 겨울이면 난로에서 나는 연기로 온 동네..'운현궁'까지 뒤덮기도 했으니...
  그때엔 '운현궁'과 '창덕궁'에 왕족들이 실제 살고 있던 때였습니다.
  벌써 옛날이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학군이었고 사대부와 부자들이 살던 "운현궁" 근처 사람들은 대부분 '강남'으로
  이사 가고, 현재 [교동초등학교]는 학생이 줄고 줄어 전체 학년학급이 서너 학급 뿐이라니
  격세지감을 느낌니다.  남는 교실들은 '경운학교'라는 장애인 학교로 사용한다고...


  ['종로3가역']

  [낙원동 옛날 아구찜]에서 소주를 곁들여 뒷풀이를 하고
  [종로3가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귀가 했습니다.
  오늘 걸은 거리는 8.6km였으나 이곳 저곳 구경하느라 시간은 3시간반이나 걸렸습니다.
  아는 많큼 보인다는 말이 있드시, 역사에 대해 예습을 하고 가야 보이는 역사탐방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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