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보 답사』
서울 서촌 역사유적탐방
경복궁역1번출구-필운대-홍건익가옥-노천명살던곳-이상범가옥-백호정-통인시장-
송석원터-자수궁터-박노수가옥-윤동주하숙집-수성동계곡-우당기념관-선희궁-
후천 각자-백세청풍 각자-송강 정철 탄생지-청송당-겸재 정선 집터-무궁화동산-
육상궁-세종대왕 탄신지-이상의 집-백송터-보안여관-창의궁터-경복궁역3번출입구
['겸재 정선선생'이 영조27년(1751)에 그린 "수성동" - 간송미술관 소장]
-- 서울 서촌 역사유적 탐방기 2부 --
['옥인교회' 앞] 1:44
[수성동계곡]에서 다시 [옥인교회]로 내려와 우측으로 가면
['인왕산 불국사'] 1:51
"인왕산 불국사 仁王山 佛國寺"가 있는데 '경주 불국사'와는 비교 할수도 없을 정도...
"仁王"은 한자 뜻대로 하면 "어진 임금"이라는 뜻이겠지만
원래 불교 용어이죠. 「반야경」에선 "부처"를 "인왕여래"라 하고,
우리가 절간에 들어 갈때 절간입구에 부처를 수호하는 우락부락 무시무시하게 생긴 "力士" 네명이 있죠.
저는 이 力士들을 "부처 경호원"이라고 부릅니다만...ㅎ
그 중에 "금강역사"를 일반적으로 "仁王"이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GS남촌리더쉽센타'] 1:56
[불국사]에서 5분여 골목을 통과하면 다시 [필운대로]를 만나고 "GS남촌리더쉽센타"를 만납니다.
"남촌 南村"은 'GS그룹' 현 회장인 "허창수회장"의 아버지인 "고 허준구회장"의 호이죠.
['우당기념관' 앞 '서울맹학교'와 '서울농학교'] 1:59
[GS남촌리더쉽센타]를 지나면 "우당기념관"과 "서울맹학교" "서울농학교"를 만납니다.
먼저 "우당기념관"으로 들어 갑니다.
['우당기념관'] 2:00~2:02
"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관"
기념관은 예상보다 규모가 작았습니다.
친일매국노들의 저택과 비교하지 않을수 없는데,
나라를 팔아 먹은 놈들의 저택이 어떠했는지 『1부』에서 [윤덕영의 벽수산장]에서 보았죠?
그래도 이런 독립운동가들의 기념관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습니다.
안으로 들어 가면...
['우당 이회영선생']
[안내문]
"우당 이회영 友堂 李會榮 1867~1932"
저는 우리나라 최고의 독립군을 뽑으라면 선생을 뽑습니다.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기자 어마어마했던 사유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을 갔죠.
"나라가 없어졌는데 그깟 재산이 뭔 의미가 있는가 !"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사회 지도층이 먼저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모범을 보여 주신 분이죠.
6명의 형제가 모두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한 "용감한 6형제"로도 유명하죠. 또한 그 친척 40명도 함께...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역사자료]
['우당역사교실']
기념관에는 기념 할만한 유물이 보이지 않고 명성에 비해 내부 시설은 초라했습니다.
특별히 기념 할만한 것들은 볼수 없었고, '청소년역사 교실'이 기념관 내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습니다.
"한번의 죽음으로 천년을 살다."
천년 만년을 살려고 비겁한 친일을 한 반민족행위자들은 죽어서 천년을 욕 먹지만
정의를 실현하려고 목숨을 던진 애국지사들은 천년만년 칭송받지요.
요즘까지도 독립운동가들을 폄홰하려는 반민족행위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회영선생"은 "백사 이항복선생"의 후손으로 "경주 이씨" 가문이랍니다.
['서울맹학교']
[우당기념관]을 나와 [서울맹학교]를 지나 옆에 붙어 잇는 [서울농학교]로 갑니다.
['서울농학교'] 2:04
[서울농학교] 정문에 도착합니다.
평일 수업시간이어서 경비에게 출입허가를 얻어 "선희궁"을 답사하러 들어 갑니다.
정문에 들어서니 먼저 [백악산]이 정면에 멋지게 조망됩니다.
"서울 농학교" 자리는 원래 "선희궁"이라는 사당이 있던 곳이랍니다.
그 터가 일제시대에 "제생원(濟生院) 맹아부"가 되면서 [선희궁 터]에는
빈 사당 건물만 남겨 두고 "서울농학교"로 변모되었더군요.
직진해서 첫번째 교실 건물 뒤에서 좌회전 하면...
['선희궁' 조망]
['선희궁 正堂'] 2:07
[안내문]
"선희궁 宣禧宮"은 한마디로 "사도세자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사당"입니다.
그러니까 "영빈 이씨"는 [정조대왕]의 친할머니가 되는데....
"영빈 이씨"는 [영조]의 후궁으로 아들이 없었던 [영조]에게 첫 아들을 낳아 드렸는데 그가 [사도세자]이죠
그런데 격렬한 당파싸움 속에서 남편을 택 할것인가, 아니면 아들을 택 할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아들을 버리고 남편 [영조]의 편에 붙어 자식을 뒤주에 갖혀 죽게하는데 결정적 역활을 한 엄마.
자식보다 권력을 택한 "매정한 모정"의 대명사가 되었죠.
[정조]에게는 자기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 몬 장본인이 바로 자기 친할머니가 되는 셈이죠.
그래서 [정조]는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거의 매년 봄에 이곳을 찾아
"선희궁" 뒤에 있었다는 "세심대 洗心臺"에 올라 여러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답니다.
['선희둥' 옆 계단]
['세심정' 정자 쉼터]
[선희궁 정당] 좌측 옆에 있는 계단을 잠시 올라 가면
[세심정]이라는 사각 정자가 하나 있는데 "서울농학교 학생"들을 위해 지은 것이겠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을수 없는 [정조대왕]이 거의 매년 찾았다는 "洗心臺"를 연상케 합니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 가면...
['후천' 앞 정자]
['후천 后泉' 각자] 2:14
두번째 정자를 만나고 정자 뒤에 "후천 后泉"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정조실록]에는 "洗心臺"가 [선희궁] 북쪽 동산 뒤 100여보 가량 되는 곳에 있다고 기록되 있는데
그곳은 곧 이 "후천 后泉"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샘터 위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후천 后泉"의 뜻이 임금이나 왕비의 샘터라는 뜻이니
[정조]는 이 샘터 위 "洗心臺"에 올라 이 샘물을 마시며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과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선희궁]의 할머니에 대한 생각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우당기념관' 앞] 2:23
[선희궁]과 [세심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후천]을 둘러 보고 [서울농학교] 교문을 나서서
다시 [우당기념관]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이 지역이 [신교동]인데 [청운동]으로 넘어가 [정주영회장집]과 [백세청풍] 각자를 답사하기 위함입니다.
직진성 우측길로 올라 가면....
['신교동'에서 '청운동'으로 넘어 가는 골목]
자동차가 다니는 차도는 사라지고 계단 골목길이 나오더군요.
[신교동]에서 [청운동]으로 넘어 가는 길이 있는지 의심하며 10여분 계단 골목을 진행하면...
['신교동'과 '청운동'의 경계] 2:34
고갯마루에 도착하는데 [인왕산등산로]도 있는 [신교동]과 [청운동]의 경계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선희궁] 뒤에 있는 [후천]이라는 곳 근처라는 것도 알수 있었습니다.
['故 정주영회장 자택' 조망]
['故 정주영회장 자택' 정문] 2:39
고갯마루를 지나면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살던 집이 조금 보입니다.
계곡으로 내려가면 "ㄱ"자로 골목이 꺽이는 곳에 [정회장 살던 집 정문]이 있는데...
얼마 전 신문에 [정주영회장]이 장남인 [정몽구]에게 상속 한것인데
기억하시나요? 당시 '왕자의 난'으로 상속 받은 거....[정몽구회장]이
최근에 자신의 아들인 [정의선 부회장]에게 다시 상속했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그러니까 이 집의 상속은 [現代家]의 적통을 잇는 상징이라고 할수 있다는군요.
구한말까지만 해도 이곳은 "청풍계 淸風溪"라는 엄청 아름다운 계곡이었답니다.
"겸재 정선선생"이 영조6년(1730)에 이 지역을 그린 "청풍계"라는 그림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영조5년' (1730년)에 "겸재 정선선생'이 이 지역을 그린 "청풍계"라는 그림입니다.]
[정주영회장]이 이런 내력을 알고 이곳에 거처를 마련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잠시후 보게 될 [백세청풍 百世淸風]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이 계곡의 최상단에 자택을 지은 것은
분명 특별한 사연이 있었을거라고 생각됩니다.
[정회장 집]의 정문에서 뒤돌아 서면....
['청운동 골목]
'청운동 골목'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이 골목은 예전에 위에서 언급한 "청풍계 淸風溪"라는 경치 좋고 물맑고 공기 좋은 계곡이었답니다.
이곳 "청풍계"와 '자하문' 주변의 "백운동"을 합쳐 "청운동"이라는 지명이 탄생되었다고 하니
그 옛날 "인왕산 자락"의 아름다운 경관이 어림 짐작됩니다.
이 골목을 50m 정도 조금 내려 가면....
['百世淸風' 각자] 2:42
[청운현대아파트]가 있는데 아파트 바로 전 좌측 어느 집 담장 안에
위에서 언급한 "청풍계"라는 것을 알려 주는 "百世淸風"이라는 刻字가 있습니다.
이 刻字는 '인조' 때에 우의정까지 지낸 "김상용"선생이 이 근처에 살며 이 "청풍계"라는 계곡의
아름다움믈 노래하며 새긴 글이라 합니다. "오랜 세월 세대를 두고 맑은 바람이 부는 곳"이란 뜻이겠죠?
"김상용"선생은 [병자호란]시 주전파로 유명한 "김상헌"의 형이죠.
치욕의 [병자호란] 패전 후 "김상헌"은 포로로 잡혀갔고, 형인 "김상용"은 화약으로 자폭하며 자살했죠.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고 자살했습니다.
['청운현대아파트' 앞]
[청운현대아파트]를 지나 [자하문로]로 내려가면....
['청운초등학교' 앞]
['송강 정철선생' 탄신지] 2:54
"청운초등학교"를 만나며,
학교 교문 앞에는 "송강 정철 탄신지" 표지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國文學史에 우뚝 솟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한글로 쓴 詩歌 중에선 가장 아름답다는 "관동별곡"과 "사미인곡"등을 남겼죠.
하지만 이런 글의 목적이 임금에게 아부하는 것이어서 무척 아쉽습니다.
아부의 정도가 어느 정도 였느냐하면 "손금이 없는 놈"이라고까지 손바닥을 비벼댓다고 비아냥 할 정도
였으니 알만 하죠. 그렇게 손바닥을 비벼 우의정까지 올라 가 "정여립의 난"의 수사 책임자가 되고
"정여립의 난"을 상당부분 조작하여 정치적 반대파인 "동인"들을 몰살 시킬 정도로 약1,000여명을 죽이거나
귀양보낸 "기축옥사"의 장본인이 되었던거죠.
그러한 그도 반대파들의 집요한 공세에 이기지 못하고 파직과 귀양, 복직과 파직을 거듭하다가
'임진왜란'을 피해 강화도에 숨어 있다가 그곳에서 권력무상을 느끼며 병으로 죽었습니다.
말빨 글빨에서는 그를 이길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말과 글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정철"이지만
끊임없는 권력욕이 그를 파멸의 길로 인도했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창의문' 방향]
[청운초등학교] 정문에서 [자하문로]를 건너 다시 북쪽 [경기상고]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청송당]이라는 유적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경기상고' 교문] 3:02
"경기상고" 정문에는 이정표가 "청송당"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수위실에 들려 출입허가를 받고 [경기상고] 본관 앞으로 올라 갑니다.
['북악산'과 '청송당']
[경기상고] 정문을 들어 서서 바라보는 [북악산(백악산)]과 [청송당]의 위치입니다.
콘크리트 건물이 없었던 옛날엔 이 지역이 "백운동"이라는 아름다운 계곡이었다는 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정주영회장 집] 앞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청풍계"와 "백운동"을 합쳐 "청운동"이 되었다는 것이
실감 납니다.
[본관 앞 소나무]
본관 앞으로 올라 가니 본관은 보수공사 중에 있고
본관 앞에는 老松巨樹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이 老巨松들은 이 학교 안에 "청송당"이 있었다는 것을 더욱 실감나게 해 주는데
"청송당"이라 하니 푸른 소나무를 의미하는 "靑松堂"이겟거니... 생각했는데,
그런 뜻이 아니라 "소나무 소리를 듣는다"는 뜻의 "聽松堂"이었습니다.
[청송당]의 흔적을 찾아 가야 하는데 어디에 있는지 몰라 물어 물어 갔습니다.
이 소나무 길을 직진해 가면...
['청운중학교']
담 하나 사이에 두고 "청운중학교"가 있습니다.
"청운중학교"는 옛날에 "경기상업중학교"였는데 이름을 바꿨답니다.
제 친구들 중에 "청운중학교" 출신이 몇 있는데...ㅎ
[교실 뒤]
[계단]
길을 물어 교실 뒤 계단으로 올라 가면....
['청송당' 터] 3:11
['聽松堂 遺址']
"청송당 聽松堂"
안내표지석에 "조광조"의 제자로 대학자 '청송 성수침'이 두문불출하며 공부했던 독서당터"라고 합니다.
"청송 성수침 聽松 成守琛" 선생이 누구인지 먼저 알아 보겠습니다.
"율곡 이이"와 절친한 친구이자 대학자로 알려진 "우계 성혼 牛溪 成渾"선생의 아버지이죠.
[조선왕조]가 개국하고 일정시간이 흐르자 정치집단들이 나타나 당파 싸움을 벌이죠.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와 신진세력 [사림파]가 대립을 시작했습니다만, [4대사화]를 통해 [사림파]가
처참하게 당하며 멸망의 길을 걷다가, [훈구파]에 위협을 느낀 [선조]가 [사림파]를 등용하기 시작했죠.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등이 [사림파]의 대를 이어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고,
개혁세력의 거장인 "정암 조광조"와 그의 제자 "청송 성수침"선생으로 이어진 [사림파]의 후예이니
이들을 [사림파] 중에서도 이들이 "西村"에 산다고 "서인 西人"이라 하게 되었는데,
그 "西人들의 聖地"가 바로 "성혼선생"의 아버지가 세운 "청송당 聽松堂"이 되는 것이니
그 의미는 크다 할수 있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근처에서 태어나 살았던 "겸재 정선 선생"이 진경산수화로 "청송당"을 남겼습니다.
['영조31년(1755)'에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청송당"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당시 "청송당 聽松堂"의 모양과 주변의 경치를 알수 있습니다.
"겸재선생"에게 허리 굽혀 절을 올리지 않을수 없습니다.
선생 덕에 [사림파] 중에서도 [서인]들의 聖地라 할수 있는 "청송당"과 그 주변을 느끼게 해 주셨으니
['남산' 조망]
[청송당] 누각이 있었다는 곳에서 다시 [경기상고] 본관 앞으로 나와 '서울시내'를 조망합니다.
빌딩들에 가려 남산도 잘 보이지 않고, 남산 서울타워만 보이는군요.
['청운초등학교' 앞] 3:21
[경기상고] 안에 있는 [청송당터]를 둘러 보고 다시 [청운초등학교] 앞으로 돌아와
좌측 [경복고등학교]로 발길을 옮깁니다.
[겸재 정선선생 집터]를 찾아 가기 위해서 입니다.
['궁정동' 방향]
[궁정동] 방향으로 좌회전 해서 다시 [경복고] 정문 방향으로 좌회전 하면...
['경복고등학교' 교문] 3:32~3:43
['효자유지' 위치]
"경복고등학교" 정문을 오랜만에 만나는데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는듯 합니다.
수위에게 출입허가를 받아 안으로 들어 가면 좌측은 운동장이고 우측 시계탑이 보이는 곳으로 올라 가는데
먼저 시계탑이 있는 곳에 "효자유지"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효자유지']
"효자유지 孝子遺址"
조선 선조 때 학자 "조원 趙瑗"의 아들 "希正・希哲 형제가 효자로 이름 나
나라에서 이들에게 내린 정문이 효자동 100번지에 있어 이 마을을 '효곡'이라고 한 데서
"효자동"이라는 지명이 탄생되었답니다.
['경복고 본관' 앞]
['겸재 정선 선생 집터']
"겸재 정선 謙齋 鄭敾"
[경복고등학교] 본관 앞에는 "겸재 정선 謙齋 鄭敾"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집터가 있습니다.
중국 그림을 모방만 하던 "실경산수화" 시대를 뛰어 넘어 새로운 화법인 "진경산수화 眞景山水畵"를
탄생시키며 발전시킨 그를 저는 "한국화의 시조"라고도 표현 하고 싶습니다.
일본놈들까지도 "신조선 산수화 新朝鮮山水畵"라고 극찬을 했으니까요.
"금강산을 사랑한 화가- 謙齋 鄭敾"
그가 그린 국보로 지정된 "금강산전도"라던가 "단발령망금강산"등 수많은 금강산 그림이 있는데
당시 사회의 경제발전이 이뤄지며 "금강산관광" 붐이 일었다고 하네요.
중국놈들은 태어나 '금강산관광' 가는게 소원이라고 할 정도 였다니 당시 '금강산관광 열풍'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엄청나게 불어 닦쳤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습니다.
잘 팔리는 그림을 그려야 돈이 되니 그런저런 연유로 "겸재선생"은 '금강산'을 자주 찾아
'금강산'을 소재로 하는 많은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는군요.
그림 주문이 너무 많이 몰려와 제자들까지 동원해 조수로 활용 했을 정도...
그래서 "겸재선생"의 그림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고... 그림이 잘 팔리니 짝퉁들도 무지 나오고...
여기서 태어나 52세까지 사시고 조금전에 찾아봤던 "자수궁 터" 근처로 이사를 하고 84세까지 장수하셨죠.
선생은 후진도 많이 양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단원 김홍도", "심사정" "김희겸"등이 그의 제자이죠.
선생은 정식 과거시험을 통해서 관직에 나가지 않고 추천으로 관직에 나가 현감 등을 하고
최종 "종2품의 동지중추부사"까지 올랐으니, 화가로서만 아니라 관직도 고위직까지 올랐습니다.
['궁정교회' 앞] 3:44
[경복고등학교]를 나와 [청와대] 방향으로 가면 먼저 [궁정동]을 만나는데 [궁정교회]가 먼저 보입니다.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엄청 많더군요. [청와대]를 구경 온 것으로 보이는데 "시진핑"이 한국관광 규제를
해제했나? 빨리 완전 해제 되어야 하고, 일본 관광문제도 조속히 해결되길 바람니다.
서로 도우며 잘 먹고 잘 사는게 서로에게도 좋지요.
['무궁화동산'] 3:45
"무궁화동산"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서 5대,6대 7대,8대,9대까지 장기집권한 "박정희 대통령"
10.26...중정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살해 당한 곳이 이곳 "궁정동 안가"였죠.
[김영삼대통령]이 그 무시무시햇던 안가를 없애고 "무궁화동산"으로 조성했지요.
['김상헌 선생' 詩碑]
[병자호란]시 주전파였던 "예조판서 김상헌"이 포로로 잡혀가며 쓴 유명한 詩가
詩碑로 세워져 있더군요.
1636년12월 겨울
남한산성에는 '인조'라는 쪼다리 임금이 있었고,
체찰사로서 난국의 해결을 시간에 맡기는 양다리의 명수 영의정 '김류'가 있었고,
의로움과 충성심으로 절대 굴복은 없다고~
오로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 예판 '김상헌'이 있었고,
매국의 오명을 뒤집어 쓰더라도 임금이 살길은 화친이라고
말이 화친이지 실제는 항복이라는 말을 비틀어 화친이라고 말 하는
이판 '최명길'이 있었습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조금 전에 들렸던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이 살던 "청풍계"의 "百世淸風"과
[병자호란]의 치욕을 안고 폭약으로 자살한 "김상용"과 그의 동생 "김상헌"이 모두 이 "서촌"에 살았답니다.
['청와대 사랑채'] 3:50
[무궁화동산]을 직진해 나가면 [청와대]앞에는 "청와대 사랑채"가 있는데 예전에 방문한바 있어 생략하고
뒤돌아 보면...
['육상궁']
"육상궁 毓祥宮"이 [청와대]에 붙어 있습니다.
[육상궁]은 [영조]의 친어머니인 무술이 출신 "숙빈 최씨"를 모신 사당이죠.
비천한 무술이 출신의 어머니...그 어머니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영조]가 무수히 노력한 흔적들입니다.
['민주노총' 농성]
[청와대 사랑채]에서 [효자동]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니 [민주노총 농성자]들이 길을 점령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청와대]를 향해 아우성 치고 있었는데...
['자하문로'] 3:54
이제 [자하문로]로 나가 [광화문]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조금 내려 가면...
['세종대왕 탄신지' 조망]
['세종대왕 탄신지'] 4:05
우측 건너편에 [독일안경마트] 안경점이 보입니다.
그 안경점 앞에 "세종대왕 탄시지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이 동네를 "서촌"이라고 하는 것도 싫고, "웃대"라고 하는 것도 싫고
우리 민족의 유일무이한 聖君인 "세종대왕"이 탄신하신 곳이니 "세종마을"로 불러 달라고 해서
지금은 공식적으로 "서촌"을 "세종마을"로 표기하고 있답니다.
"세종대왕"에 대해선 언급이 필요 없고...
['이상의 집' 가는 길]
[세종대왕 탄신지 표지석]에서 내려 가다가 첫번째 삼거리 [우리은행 효자동지점]이 있는 곳에서
우측 골목으로 들어 가면...
['이상의 집'] 4:12~4:20
['이상의 집']
[안내문]
"이상의 집"이 있습니다.
20여년간 이 집에서 살았다는데, 그가 27세에 죽었으니 이 집에서 살다 죽었다고 해도 될 정도이죠.
당시 유명 작가들이 많이 일찍 죽었는데, 대표적 인물이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 "날개"의 "이상",
"봄 봄"의 "김유정"등이었습니다. 너무 아쉽습니다. "김유정"은 "윤동주"와 같이 29세에 죽었죠.
이 세사람은 친하기도 했는데, '이상'과는 함께 죽을 병(폐병)을 앓아 같이 자살 하자고도 했죠
이 세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은 모두 기생을 사랑하기도 했고요... ㅎ
'이효석'은 '왕수복'을....
'이상'은 '금홍이'를....
'김유정'은 '박녹주'를....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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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X 청춘열차'를 타고 가는 '김유정문학촌'과 '금병산' 여기 클릭
[내부]
"김해경"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서 남아 있는 유물이 많지 않겠죠.
좁은 공간에 안내원만 한분이 방문객을 맞고 있었는데
커피 한잔 주더군요. 고맙게 잘 마시고
['이상 흉상']
요즘으로 하자면 '서울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건축기사가 되어 조선총독부 건축기사로 근무하다가
폐결핵을 앓아 요양하러 '황해도 배천온천'에 갔다가 운명의 여인 "금홍이"라는 기생을 만나고....
서울로 '금홍이'와 함께 와 '금홍이'를 마담을 앉히고 "제비다방"을 열었죠....망하고...
또 "69"라고 하는 당시로는 금기어를 상호로 하는 "69 다방"을 오픈했으나...또 망하고...
[철문]
[다락방 올라 가는 계단]
[날개]에 나타나는 주인공 '이상'의 다락방으로 올라 가는 통로를 상징적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안채 조망]
아내 '금홍이'가 영업활동(매춘)을 마치고 돌아 오는 모습을 어두운 다락방에서 숨어 살펴 보았을
"이상"의 그 느낌을 형상화 한듯한 다락방 조망처를 만들어 놨습니다.
너무 잘 알려진 "이상"에 대한 이야기여서 생략하고...
['경복궁역 버스정류장']
다시 [자하문로]로 나가면, 건너편에 [경복궁역버스정류장]이 보입니다.
저 버스정류장 뒷골목에 [통의동 백송터]와 [추사 김정희선생 살던 집]이 있습니다.
☆ 앞에 보이는 지역, 즉 [경복궁] 옆 지역인 "통의동"이 옛날엔 "창의궁"이라는 궁이 있었는데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궁이고, [영조]가 왕위에 등극 한 후에는 [추사 김정희]의
할아버지가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결혼해 살게되어 자연히 [김정희]도 이곳에서 탄생했답니다.
유서 깊은 "창의궁"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동양척식회사]가 들어서서 조선의 자원을 수탈하는
본부가 되었답니다. [경복궁]에는 [조선총독부]가 건립되고 여기는 [동양척식회사]가 점령하고
['스타벅스' 옆 골목] 4:24
[경복궁역버스정류장] 옆에 [스타벅스]가 있고, [스타벅스] 옆 골목으로 조금 들어 가면...
['코피티암' 옆 골목] 4:25
좌측 [코피티암]이라는 커피점 옆으로 골목이 이어집니다.
이 골목을 진행하면...
['통의동 백송터'] 4:26~4:28
[안내문]
"통의동 백송터"를 만납니다.
백송에 대해선 안내문을 참고하면 되는데, 중요한 것은 이곳이 [추사 김정희선생]이 살던 집터라는건데
앞에서도 언급했드시 [추사 김정희]가 태어나 자란 집은 [창의궁]이었는데 이곳 [통인동]의 상당 지역을
차지 햇으니 이곳도 [김정희]의 집이 있었던 주변이라고 할수도 있겠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 살던 곳]
백송 앞 집 벽에 "완당 김정희 선생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호를 "완당"이라고도 하고 "추사"라고도 한 [김정희선생]인데,
선생의 할아버지 "김한신"의 고향은 '충남 예산'이지요.
그러니까 할아버지 "김한신"이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결혼해서 살게 한 집이
[영조] 자신이 살던 {창의궁}을 물려 주어 살았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드시
[추사 김정희선생]이 이곳에 살때 북한산을 무척 자주 올랐는데, 이때에 "북한산진흥왕순수비"를 찾아냈죠.
그리고 연구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경복궁 영추문'] 4:30
[백송터]에서 [경복궁] 방향으로 골목을 나가면 "경복궁 영추문"을 만나고
[청와대]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가면...
['보안여관'] 4:32
"보안여관"을 만납니다. 단순한 오래된 여관인데 왜 찾았냐구요? ㅎ
1930년에 지어진 여관인데 당시 많은 문학인들이 이 여관에 툭숙하며 창작활동을 했다네요.
대표적 작가들 중에 '서정주' '김동리'등이 장기 투숙하며 『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했다네요.
2006년 문을 닫고 철거 위기에 놓였던 건물을 일맥문화재단과 메타로그에서 인수해서
옛 흔적을 그대로 살려 2007년부터 전시장으로 운영 중이랍다.
제가 찾았을 때엔 내부 리모델링을 하고 있어 들어 갈수가 없었습니다.
['경복궁 영추문']
[보안여관]에서 다시 [영추문]으로 내려 가면....
['창의궁 터'] 4:35
"창의궁 터 彰義宮址"라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연잉군' 시절에 살던 궁이었답니다. 이런 집을 "잠저"라고 하죠.
[영조]의 어머니인 무술이 출신 "숙빈 최씨"가 여기서 49세를 일기로 죽었답니다.
그리고 앞에서 [백송터]에서도 언급했드시, [영조]가 왕위에 오르고 난후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정빈 이씨"에게서 태어난 "화순옹주"를 [영조]는 사위로 [김정희]의 할아버지인 [김한신]을 맞아드리고
결혼시켜 이 [창의궁]에서 살게 했죠. 그런데 [김한신]이 일찍 죽자 [화순옹주]도 따라 자살해 버리지요.
이런 부인을 "열녀"라고 하는데 조선왕조에서 왕족 출신 "열녀"는 오직 [화순옹주] 뿐이랍니다.
하지만 [영조]에게는 무지무지 불효한 딸이 되어 [화순옹주]의 장례식장에도 가지 않았다는거 아닙니까.
"열녀"가 된 [화순옹주]와 그녀의 후손인 [김정희]가 [창의궁]에서 살게 된 연유가 되겠습니다.
['경복궁역번 출입구'] 4:40
"西村"의 골목 골목을 누비며 조선왕조의 역사 흔적과 근현대의 유적지를 찾아 보았습니다.
서울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으면서도 그것도 바로 [운현궁] 앞 [ 익선동]에서 살며 학교를 다녔으면서도
"西村"의 이곳저곳을 이제서야 탐방한것을 엄청 후회하며 앞으로 몇차례 더 탐방해야 하겠습니다.
정말 의미있는 하루였습니다.
[탐방코스]
오늘 걸은 거리는 13.6km였으며 5시간 10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모든 분들에게 탐방을 추천합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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