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평화누리길』
『제15-2코스 인제 북면길』
미시령에서 만해마을 가는 길
미시령-용대삼거리-매바위폭포-백담사입구-여초서예관-만해마을-십이선녀탕주차장
['15코스 안내도']
<강원평화누리길 15코스>는 <원통교>에서 <미시령 정상>까지로 28km가 넘어
편의상 두번으로 나누어 진행합니다.
[실트랙 국토지리원 지도]
<강원평화누리길 15코스>는 두번으로 나누어 지난번 <15-1코스>에 이어
이번엔 <미시령>에서 <십이선녀탕> 입구인 <남교리 주차장>까지 17km를 갑니다.
지도엔 <백두대간> 마루금이 선명하게 표기되 있으니 참고 하세요.
['미시령'] 9:40
2023년 12월 3일 일요일 맑음
<복정역>에서 막힘없이 2시간10분만에 <미시령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전형적인 가을같은 겨울 날씨를 보여주는 복받은 날에
오랜만에 <미시령>을 찾으니 도로의 색깔까지도 바뀌어 더욱 신선감을 주는 <미시령>입니다.
[옛 미시령 휴게소]
<옛 미시령 휴게소>는 축소되어 현재는 <미시령탐방지원센타>가 되어 있습니다.
뒤로는 <백두대간> 마루금이 <상봉>과 <화암재>, 그리고 <신선봉>으로 이어 지는데
여기선 <상봉>과 <신선봉> 정상은 보이지 않고, <화암사>에서 올라 오는 산줄기의 암봉들만 보이는군요.
['속초' 조망]
<미시령 정상>에서 바라보는 <속초시>와 <동해>입니다.
사진 중앙에서 약간 좌측에 있는 호수가 <영랑호>이며, 약간 우측에 있는 호수가 <청초호>인데
실제 육안으로는 잘 보였으나 사진에는 사진의 한계로 흐릿하군요.
['미시령 표지석']
"미시령 彌矢嶺 해발 826m"에 대한 지명의 유래는 찾을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제가 <미시령>에 대해 연구한 내용을 언급하겠습니다.
제 개인적 의견이니 믿거나 말거나 라는거 아시죠? ㅎㅎ 그러니 그냥 재미로 읽기 바람니다.
사진에 보이는 표지석의 "미시령 彌矢嶺"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제호 했다는군요.
<백두대간 9정맥>을 종주 할때 지침서로 삼아 다니신 분들은 모두 아는 책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조선시대 "여암 신경준"선생이 우리나라 지형을 "표"로 표기한 "산경표 山經表"를 먼저 보겠습니다.
{'산경표 17페이지 백두대간 편 일부]
<금강산>→<진부령>→<미시파령>→<설악산>으로 이어지는 지명이 선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흘리령 屹里嶺>과 <설악 雪嶽> 사이에 <미시파령 彌時坡嶺>이 보이죠?
그러니까 옛날엔 <미시령>을 <미시파령>이라고 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彌時坡嶺 麟蹄北五十里 杆城南八十里 俗稱麗水坡嶺"
"미시파령 인제북오십리 간성남팔십리 속칭여수파령"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내용을 해석하면
"'미시파령'은 인제 북쪽50리, 간성 남쪽80리 지점에 있는데, 속칭 '여수파령'이라고도 한다"
"미시파령 彌時坡嶺"의 한자부터 알아 보면,
<미彌>는 불교에서 "미륵"을 의미하지만, 일반적인 의미로는 "활을 쏘아 도달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시時>는 아시다시피 "시간"을 의미하고, <파坡>는 "고개"를 의미하며 <령嶺>과 같은 의미입니다.
합쳐서 풀이해 보면, "활을 쏘아도 고개를 넘기지 못할 정도로 고개가 높고 길어 넘어 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고개"라는 의미로 저는 풀이했습니다.
현재의 "미시령 彌矢嶺"은 <미시파령 彌時坡嶺>에서 <시 時>라는 한자는 <화살 시矢>로 바뀌고
<파 坡>는 <령 嶺>과 중복이라고 빠졌습니다.
해석해 보면 "미시령 彌矢嶺"은 "활을 쏘아도 화살이 고개를 넘지 못한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결국 <신경준선생>의 <산경표>에 나오는 "미시파령 彌時坡嶺"과 현재의 "미시령 彌矢嶺"은 비슷한
의미라고 생각 됩니다. "화살을 쏘아도 넘지 못하는 높은 고개"...믿거나 말거나라는거 아시죠? ㅎㅎ
['백두대간 상봉' 조망]
<미시령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금강산>을 향해 가는 <백두대간>의 "상봉 上峰"을 조망합니다.
<파란문>이 두발로 쓴 <백두대간 산행기>는 재법 유명하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저의 카페 <홍어와 무인도>에서 찾아 한번쯤 읽어 보세요. 종주 하신 분들은 추억이 새로울겁니다.
['미시령계곡 내림길'] 9:45
<미시령> 정상에서 <강원평화누리길 15코스>를 역방향으로 진행합니다.
100m쯤 내려 가면....
[대간 샛길] 9:47
<미시령 옛길>이 휘어지는 곳에
<대간꾼>들이 "국공파"를 피해 몰래 <상봉>으로 오르는 곳을 만나는데 추억이 새롭군요. ㅎㅎ
['미시령계곡' 조망]
"미시령 계곡"을 조망하며 내려 가면...
계곡 가운데 그늘진 곳에 <도적폭포>가 있습니다.
['도솔지맥 대암산' 조망] ★사진을 클릭하면 확대 됨★
<양구>와 <돌산령><펀치볼>...그리고 <인제 서화>를 지나며 조망했던 "도솔지맥"과 "대암산"이
조망 되는데, 사진을 클릭하면 더 분명하게 볼수 있으니 클릭해 보세요.
['미시령 옛길']
<미시령 정상>에서 25분 정도 내려 가면....
['도적폭포' 입구] 10:10~10:17
<도적폭포 입구>를 만납니다.
<도적폭포>는 좌측으로 들어 갔다가 와야 합니다.
['도적폭포' 입구]
<설악산국립공원>인데도 <미시령계곡>에는 의외로 볼거리가 거의 없습니다.
<도적폭포>와 <선바위> 정도가 볼거리라고 생각되니 <설악산>의 다른 곳과 비교하면 빈약하죠.
오랜만에 여기까지 왔으니 다녀 오도록 하겠습니다.
이곳은 "국공파"를 피해 <백두대간 황철봉>으로 오르는 최단거리 등산로이기도 합니다.
200m쯤 들어 가면....
['Floating Whale 펜션.카페']
<도적폭포> 들어 가는 입구에 <"Floating Whale">이라는 펜션과 카페가 제법 큰 규모로 있더군요.
그런데 종업원이 나와 <도적폭포>로는 출입금지라고 더 이상 들어 갈수 없다고 제지하더군요.
['도적폭포' 출입금지]
잠깐만 들어가 보겠다고 우겨 들어 갔는데 철조망으로 봉쇄하여 더 이상 갈수 없어 돌아 나왔습니다.
<미시령계곡>에서 <도적폭포>까지 막아 놓으면 뭘 보러 오나....
['도척폭포'] ★ 옛날 촬영 사진 ★
<미시령계곡>에선 볼거리로는 유일하다시피 한 <도적폭포>여서 아주 옛날에 촬영한 사진을 첨부합니다.
제가 종업원이 제지해도 우겨 들어 갈려고 했던 <도적폭포>인데 그럴만 하죠?
"도적폭포"는 산적들이 <미시령>을 넘는 과객들에게서 금품을 갈취하곤 증거인멸을 하기 위해
과객들을 죽여 폭포 아래 "도적소"에 빠뜨렸다는데서 유래한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강도 살인의 현장이었다고 생각하니.....ㅠ
['미시령 옛길']
<도적폭포 입구>에서 10여분 <미시령 옛길>을 내려 가면...
['도적소 교차로'] 10:26
"도적소 교차로"를 만나는데, <미시령터널 입구>이기도 합니다.
우측에는...
['설악산 산림수련관'] 10:27
"설악산 산림수련원"이라는 시설이 있고...
['옛길'과 '새길']
<미시령터널>로 가는 새로운 길과 옛길이 나란히 가는 길을 잠시 내려 가면...
['미시령터널' 앞 굴다리] 10:29
<미시령계곡 옛길>에선 흔치 않은 음식점이 있는데 <봉평막국수집>이더군요.
5분여 더 진행하면....
['선바위' 조망] 10:34
<미시령계곡>에선 두번째 볼거리이자 마지막 볼거리인 "선바위"가 보이기 시작하고
['선바위']
"선바위"는 "서 있는 바위"라고 <선바위 立石>입니다.
서울 <인왕산>에 있는 <선바위>는 <禪바위>이고....
['선바위' 앞 카페] 10:39
<선바위> 바로 아래 건너편에는 <설악향기>라는 카페가 있더군요.
[상점과 휴게소]
<미시령터널>에서 내려 가는 길 중간에 상점과 휴게소도 보이고...
['용대삼거리' 조망] 10:57
<선바위> 앞에서 20여분 더 진행하면 <용대삼거리>에 있는 <매바위폭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10여분 더 진행하면...
['옥수1교' 앞 삼거리] 11:06
<용대삼거리> 앞에 있는 "옥수1교 앞 삼거리"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매바위폭포>를 구경하고 가려면 우측으로 200m쯤 갔다가 다시 돌아 와야 합니다.
차 타고 다닐 때 많이 봤지만 걸어서 여기까지 왔으니 당연 다녀 와야겠죠?
['매바위폭포']
"용대삼거리"는 <진부령>과 <미시령>으로 가는 길이 분기하는 곳이죠.
그래서 이곳엔 손님을 끌기 위한 특별한 "매바위 폭포"라는 인공폭포가 설치되 있습니다.
['백골병단전적비']
"백골병단 전적비"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하고, <백골병단 단장>은 <채명신 장군>이었더군요.
['매바위폭포'']
<백골병단전적비> 앞에서 <매바위폭포>를 한번 더 조망합니다.
겨울엔 빙벽타기로도 유명하죠.
['옥수1교' 앞 삼거리]
[이정표] 11:15
다시 "옥수1교 앞 삼거리"로 회귀했습니다.
이곳은 <평화의 길>과 <평화누리길>이 나뉘는 곳이기도 하더군요.
<평화의 길>은 여기서 좌측 <진부령>으로 가고, <평화누리길>은 우측 <미시령 옛길>로 가더군요.
['너와집'] 11:18
<소풍>이라는 카페인데 너와집이어서 눈길을 끌고...
['황태길']
<황태길>이라는 옛길을 진행하게 됩니다.
조금 진행해서 뒤돌아 보면...
[뒤돌아 본 '매바위'] 11:24
지나온 <용대삼거리>의 진짜 <매바위>와 <매바위폭포>를 뒤돌아보고
['백공미술관'] 11:28
이어서 "백공미술관 伯貢美術館"을 지나 갑니다.
"백공 정상림"씨가 설립한 미술전시관이라는데.....
<정상림씨>는 서울 법대 출신으로 검사 출신 법조인이었죠. 2019년에 타계.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미술품 수집가>로서 그가 수집한 미술품들을 모아 전시하는 미술관.
['내설악 응봉' 조망] 11:34 '
<백공미술관>을 지나면 <내설악 응봉>이 조망되기 시작하고...
['다릿골교'와 다릿골' 조망] 11:41
<다릿골교>를 지나면....
['황태마을'] 11:47
<황태마을> 입구를 알리는 아치를 지나는데
['용대풍력발전단지']
<용대풍력발전단지>를 흘깃 들여다 보는데, 풍력 팔랑개비는 바람이 제법 있는데도 돌지 않고
['백담사' 입구 사거리]
['46번국도' 방향 조망]
['백담사' 방향] 11:56
이어서 "백담사 입구 사거리"를 만납니다. <용대2리>이기도 합니다.
제가 몇번 들린 음식점은 <사계절집>인데 <황태구이>와 <더덕구이>가 일품이었습니다.
황태와 더덕에 바르는 양념 맛이라고 생각되는데 양념만 별도로 팔더군요.
하도 맛 있어 양념을 사와 집에서 발라 구워 먹어 본 결과 저 집에서 먹던 맛은 않나더군요.
ㅎㅎ 항상 그렇죠?
['기린]
<용대2리 마을회관> 앞 뜰에 <기린> 한마리가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모형이지만...
<내설악>에 왠 <기린>?이라고 궁금증을 갖는 분은 학구열이 있는 분일겁니다.
<기린>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파란문>의 생각으로 알려 드리면.....
"인제 麟蹄"라는 지명을 알면 금방 <기린>이 서성거리는 이유를 알것입니다.
<인麟>은 "기린"이라는 뜻이죠, 그리고 <제蹄>는 "발굽"이라는 뜻이니
<인제 麟蹄>는 "기린의 발굽"처럼 생긴 고을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궁금증이 풀렸나요? 기린이 있는 이유를...
한편 <인제대학교 백병원>의 <인제>는 이곳 <인제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요.
그건 <백인제>라는 의사가 설립한 학교와 병원이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내가평교'] 12:02
"영시천 永矢川"
<내설악>의 계곡 계곡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물이 모여 "영시암 永矢庵" 앞에서 부터 <영시천>이 되어
<백담사> 앞을 지나 이곳으로 나와 "북천 北川"과 만나는 곳입니다.
<미시령 彌矢嶺>에서도 언급 했드시 "화살 시矢"가 또 사용되는 곳이 <영시암 永矢庵>과 <영시천 永矢川>
인데, 이 지역엔 "화살 시矢"가 사용되는 곳이 제법 있습니다.
<영시암 永矢庵>은 조선 숙종 때의 대단한 인물 <김창흡>이 <인현왕후>파와 <장희빈>파의 권력투쟁
속에서 환멸을 느끼고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며 <백담사 계곡>으로 들어가 암자를
짓고 살았답니다. 그 암자의 이름을 <영시암 永矢庵>이라 했는데, "한번 쏜 화살은 되돌아 오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겠다"라는 맹서로 <영시암 永矢庵>이라 했는데,
6년간 살면서 호랑이 한테 물려 죽을 뻔 하기도 하다가 결국 다시 세상으로 나왔답니다.
제가 <미시령 彌矢嶺>의 유래를 알아보게 된 힌트가 바로 <영시암 永矢庵>이었다는 것도 첨언합니다.
['만해로']
<용대2리>부터 <십이선녀탕 입구-남교리>까지 도로는 <만해로>라고 하는군요.
30여분 진행하면...
['여초서예관'] 12:29~12:40
"여초서예관 如初書藝館"
"여초 김응현 如初金膺顯 1927~2007"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한 기념관이랍니다.
선생은 우리나라 근현대에서 최고로 꼽는 "4대 서예가 중 한분"이시죠.
['서예관 입구']
<여초서예관>은 약3,000여평의 공원에 800여평의 기념관으로 이루어져 있답니다.
['여초서예관' 전경]
['2012년 한국건축문화대상'] ['2012년 올해의 건축 BEST 7']
<여초서예관>은 선생의 작품과 유품을 전시하며 기념하고 있어 유명하지만
또한 기념관의 건축미가 돋보인다고도 무지 유명하답니다.
"2012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을 받았으니.....
['서예관' 입구]
예술적으로 건축된 서예관 입구로 들어 가면 먼저 좌측 벽에 쓰여져 있는 글귀가 눈에 들어 오는데
저 글이 뭔지만 알아도 <여초 김응현>선생의 족보에 대해 많이 알수가 있어
<파란문>이 짧은 한자 실력으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청음 김상헌 詩' '여초 글씨']
石室先生一角巾 暮年猿鶴與爲群
석실선생일각건 모년원학여위군
秋風落葉無行跡 獨上中臺臥白雲
추풍낙엽무행적 독상중대와백운
-淸陰先祖西磵詩 如初-
-청음선조서간시 여초-
석실 선생 머리 위에 일각건을 쓰고, 나이 늙어 원숭이 학과 더불어 어울렸네
가을바람 지는 낙엽 행적조차 없거니와, 홀로 중대바위에 올라 구름 속에 누웠네
먼저 이 한시를 쓰신 분부터 알아 보겠습니다.
<淸陰>선생은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 유명한 <김상헌 선생>으로 당시 <예조판서>였습니다.
당시 대표적 주화파였던 <이조판서 최명길>과 "실리와 명분"을 놓고 "싸움과 항복"을 서로 주장했는데
그때 그분이 바로 <여초 김응현>선생의 14대 선조이신 <청음 김상헌>선생이란걸 알수 있습니다.
선생이 청나라로 잡혀가며 쓴 시는 아직까지도 우리들의 가슴을 울림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 동 말 동 하여라
['여초 생애관' 입구]
<서예관>으로 들어 가면 우측에 사무실이 있고, 좌측에 "여초생애관"이 있습니다.
<생애관> 입구가 좀 허름한듯 보이지만 독특한 건축설계라고 하네요.
<여초서예관>을 가면 반드시 들려야 하는 곳이니 들어 가 보아야 합니다.
['여초 생애관']
<여초생애관>은 그렇게 너른 공간은 아니었고, 유품 몇점과 글을 쓰던 책상이 전시되 있습니다.
['여초 김응현']
"여초 김응현 如初金應顯 1927~2007"
선생은 필자인 <파란문>의 학교 대선배님이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선생생의 호인 <여초 如初>는 "처음과 같다"라는 뜻.
<휘문고>와 <고대 영문과>를 나오신 분이 <한학자>이자 "우리나라 근현대 4대 서예가"라는 것이
언바란스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책상과 유품']
선생이 글을 쓰던 책상과 유품들이 전시되 있습니다.
선생은 우리나라 "국회"의 <국회도서관>의 "정직원 제1호"로도 유명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국회의 도서관을 최초로 도서관 다운 도서관으로 만드신 분입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로 한문의 본고장인 <중국혁명박물관>에서 서예전시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왼손으로 글을 쓰도 제가 오른손으로 쓰는 것과 비교도 할수 없을 정도였다니 놀랍죠?
['로비]
<생애관>을 둘러 보고 나오면 정면에 안내소 뒤로 엘리베이트가 보입니다.
엘리베이트를 타고 2층으로 올라 가면...
['여초 작품 전시실'']
<여초 작품전시실>이 있습니다.
선생은 1996년부터 '인제군 북면 한계리'에 <구룡동천 九龍洞天>이라는 집을 짓고
자연과 벗삼아 만년의 자유로운 작품세계를 펼쳤다고 합니다.
그런 연고로 <인제군>이 이 기념관을 지었다고 합니다.
작고하기 10여년 전부터 당뇨병을 시작으로 중풍과 파킨슨병 등 합병증이 겹쳐 투병해야 했지만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결코 붓을 내려놓지 않았다고 하는데....
1999년에는 교통사고로 오른 손목에 골절상을 입게 되자 3개월 동안 왼손으로 붓을 들고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 다음해에 "좌수전 左手展"을 개최하기도 했답니다.
['율곡 이이'의 '금강산기']
"율곡선생풍악기소견 栗谷先生楓岳記所見"
선생이 쓴 작품 중에 <율곡 이이>가 <금강산>을 유람하고 쓴 기행문을 자신의 필치로 썻다고...
<풍악 楓岳>은 "가을 금강산"을 일컷죠.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을 작품화 하신걸로도 유명합니다
['한글은 세계의 빛']
['훈민정음']
선생은 한자 뿐만 아니라 "한글 서예"에도 남다른 애정을 보이셨죠.
[계단]
2층에서 내려 가는 계단도 예술적인 건축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나가는 길]
서예관을 둘러 보며 한편의 영화같은 선생의 생애를 되새겨 보며 서예관을 떠납니다.
['한국시집박물관'] 12:42
<여초서예관> 옆에는 "한국시집박물관"이 있는데 시간이 없어 그냥 지나치고
['만해마을'] 12:45~12:53 '
이어서 "만해마을"로 들어 갑니다.
<동국대학교>의 "연수원" 시설입니다.
['만해 한용운 상']
"만해 한용운 萬海韓龍雲 1879~1944"
선생의 속세명은 <한정옥 韓貞玉>이시고, 法名이 "용운龍雲"이며, 法號 즉 별명이 "만해 卍海"입니다.
승려, 독립운동가, 시인, 수필가, 소설가..........
독립선언문을 기초하셨으며 33인 중 한분.......
['만해 문학박물관 로비']
"만해문학박물관"안으로 들어 가면 로비가 있으며
박물관 안으로 들어 갑니다.
['조선청년에게']
일제강점기 하에서 신음하는 우리 청년들에게 쓴 글이 전시되 있습니다.
제가 간략하게 요약하면, 암울한 시대지만 조선 청년들은 불행아가 아니고 행운아라고 생각하며
희망을 잃지 말고 오히려 기회로 삼아 전진하라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문학박물관 전경]
모두 잘 아는 내용들이라 휭하니 둘러 보고 나갑니다.
['심우장']
선생이 서울에 거주 할때 살던 집이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 尋牛莊"이죠.
이곳 방문기는 부록으로 첨부하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세요.
['만해 평화의 종']
<만해문학박물관> 앞에는 "만해 평화의 종"이 있으며
['만해학교'와 '카페']
<만해학교>와 <카페>가 함께 있습니다.
['만해마을 정문'] 12:53
<만해마을> 정문으로 나오는데 이 門이 좀 특별한 門이더군요.
"경절문 經截門"이라고...설명은 사진 속에 있습니다.
['만해교'] 12:54
<만해마을>을 벗어 나면 <만해교>를 건너게 되는데
['만해마을' 조망]
<만해교> 다리 위에서 지나온 <만해마을>과 <북천 北川>을 조망하고
['십이선녀교' 가는 길]
<만해교>에서 10여분 진행하면...
['남교리 주차장'] 1:04
<십이선녀탕 입구>에 있는 <남교리 주차장>에서 답사를 마칩니다.
[고도표]
오늘 걸은 거리는 <도적폭포>등 몇곳을 다녀 오느라 "17km"를 걸었으며 3시간 25분이 걸렸습니다.
모기
만해 한용운
모기 너는 영웅호걸의 피를 빨고
어린아이의 피도 빨고
지조가 없는 얄미운 놈이다.
하지만 너에게 두 손 합장하고
크게 배울 것 하나는
동족의 피는 빨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파란문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