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교 111주년 기념  
   "휘문문화예술축제" 
일시 : 2017년 2월 18일 (토) 오후 2시 30분
장소 : 국립극장 청소년 하늘극장
            
[국립극장] 2017년 2월 18일 (토) '개교100주년' 기념식 했던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개교111주년'이라니 세월은 가는 세월 선배들보다 오는 세월 젊은이들에게 힘을 더 실어 주는듯하군요. 국립극장을 지나쳐 다니긴 했어도 직접 들어가 보는건 처음이니... 그동안 좀 품위있는 문화생활은 못하고 살았다는걸 알수 있죠?. ㅎ [리셉션장] 문화예술축제를 시작하기 전에 라운지에서 리셉션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축하 화환은 사학의 명문들이 보내 주었는데 특히 눈길을 끄는 학교는 "숙명여고" "진명여고"등 여학교들이었습니다. "숙명여고"와 "진명여고"는 회장단이 직접 참관도 했더군요. 단지 조금 의아한 학교는 "풍문여고"와 "창덕여고"가 눈에 띄지 않더군요. ㅎㅎ [리셉션장 - 부페] 수백명의 무지 많은 교우들이 참석했는데 모두에게 부페를 제공하고 있어서... 역시 부자 학교는 틀리다는 것을 알수 있죠? ㅎ [국립극장 청소년하늘극장] 한시간 가량 식사를 하고 공연장으로 이동합니다. 공연은 [국립극장 청소년 하늘극장]에서 열렸습니다. ['난타 공연' - 67회 송승환] 공연은 "67회 송승환"이가 대표로 있는 "난타"팀의 공연으로 시작되었고... '송승환'이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의 개막 총감독을 맡아 분주히 일하고 있다는데 '최순실'이하고는 아무 관계 없으니 평창올림픽에 많은 관심 부탁한다고..ㅎ ['휘브라더스' - 67회] '67회 졸업생들의 모임인 "휘브라더스"의 합창으로 이어지고... 1부 사회는 선배님인 '55회 차인태 아나운서"가 맡아 주었는데 여전히 명불허전 ['전미례재즈무용단' 공연] 축하무대는 2부로 이어졌습니다. 2부 사회는 '78회 이형걸 KBS 아나운서'와 '울산여고' 출신이라는 '이은영 YTN 아나운서'가 맡아 주었습니다. '울산여고' 출신이 '휘문111주년기념예술제'에서 사회를 보게되 무척 기쁘다고..ㅎ 계속해서 "전미례재즈무용단"의 무용 공연도 있었고 [걸그룹 '워너비' 공연] 요즘 인기 걸그룹이라나 뭐래나...ㅎ 걸그룹 "워너비"의 무대 ['권인하' 공연 - 70회] 가수 "권인하"의 무대가 이어졌는데, '권인하'는 휘문중학교 70회 졸업인데 뺑뺑이 돌리기로 고등학교는 '배재고'로 갔다고... ['장은숙' 공연] '다 함께 춤을 추워요~ ♬' 가수 "장은숙"의 공연도 돋 보였고... ['이용' 공연 - 67회] 오늘 '개교111주년기념공연'의 하일라이트는 뭐니뭐니 해도 가수 "이용"의 무대였습니다. '이용'은 입학 할땐 전교 8등이었는데, 졸업할때는 600여명 중에 580등이었데나 뭐래나.., '이용'이도 벌써 환갑 언저리인데도 교우들을 위해 좀 웃겼습니다. 오늘 출연료도 없이 축하하러 왔다고 앵콜까지 받으며 흥을 돋구며 애써주었고 ['재학생-졸업생' 축하무대]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함께 영원한 휘문인 "정지용선생"의 "향수"를 부르고.... 이어서 "휘문응원가"와 구호 [W H I M O O N 휘문 휘문 빅토리 야 ! ~]로 [111주년 기념 휘문문화예술제]는 막을 내렸습니다. 모처럼 찾은 장충동이어서 동창생들 20여명은 추억의 [장충동 족발집]으로 가서 밤 늦도록 한잔하며 다가오는 봄노래를 불렀습니다 모처럼 부부동반으로 모교 '개교111주년기념 휘문문화예술제'를 참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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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이라는 여행*

                잘 난 청춘도 못난 청춘도 
                스쳐가는 바람 앞에 머물지 못하며 
                못난 인생도 저 잘 난 인생도 
                흘러가는 저 구름과 같을진대,
                어느 날 세상 스쳐 가다가 
                또 그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가는 생을 두고 
                무엇이 청춘이고 그 무엇이 인생이라고 따로 말을 하리까?     
[낙동정맥 영남알프스 고헌산-가지산을 넘어가며 - 조선일보 C기자가 촬영해준 파란문 사진]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홍어와 무인도☆
그쟈 - 최백호

권범철 kart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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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혜담화해례본' '나랏말씀이 내 담화와 달라 문자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쎼 이런 젼챠로 셩냔 국민이 질문을 니르고져하여도 ‘혼'이 업써서 못하늬 이 내 ‘순수한’마음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니라 내 이를 침통히 여거 구분니십초의 담화문을 새로 내노으나 이번에도 국민과 서로 사맛디 아니하였다" '니러려고 대통령 되었나, 자괴감에 홀뻬이셔라'

 
 
 
 
 
 
 
 


  
   "이근영교우"를 찾아서 
            
['이근영교우' 산장] 2016년 10월 14일 (금) 더워서 죽는줄 알았던 그 광란의 여름도 세월 앞에선 맥을 못추게 하는 깊어 가는 가을에 까까머리 학창시절 이후엔 한번도 만나지 못한 동기동창생을 찾아 길을 나섯습니다. '강원도 홍천군 남면'에 있는 "갈기산" 어느 산속으로 네비게이션에 의지해 찾아 가니 아담하다고 해야 할지 우람하다고 해야 할지 그림같은 멋진 산장이 눈앞에 가을을 덤북 안고 다가 왔습니다. "너 나 알아 보겠냐?" "누군데?" "나... 율영이" "나...근영이" "그럼 이름이야 깨끗하게 기억하지..근데 길에서 만나면 어케 알아 보겠냐?" "그러게말이야" "세월이 너무 흘렀지?" ['근영이네 애완견'] '근영이네 별장'에는 우리 "하루" 생각이 나게하는 "코카스 파니엘" 두마리가 손님들을 무지무지 반기고... [거실] 먼저 거실로 들어가 집 구경부터 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벽난로가 영화 속에나 나오는 청춘들의 산장 느낌을 주고 [펜트하우스] 2층으로 올라 가니 성인 잡지 "펜트하우스"의 침실과 똑 같은 부부 침실이 부러움을 자아내게 하고 [바베큐] 바로 바베큐 파티로 들어 갑니다. 구수한 숯불향기가 알룩달룩한 미니스컷트로 갈아 입는 "갈기산" 자락에 젖어 듭니다. [등심] 10cm 두게의 홍천 한우 등심이 지글지글... [회포를 풀다] 12시경인데 벌써부터 퍼 마시기 시작합니다. 에구 '파란문'의 주특기가 퍼마시는 것이니 어쩌겠습니까? ㅎ 46년의 세월을 더덤을려면 얼마나 많은 얘기들이 오가야 하겠습니까 이야기하다가...퍼마시다가...웃다가...다시 퍼마시다가...얘기하다가...ㅎ 사람 사는 얘기가 대부분 거기서 거기라 자세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아도 아실겁니다. 나머지 얘긴 상상에 맞기겠습니다. 오늘은 '이성엽교우'와 '홍성노교우'가 함께 했습니다. [안주를 먹여 주다] 고교 졸업후...아니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근영이'가 먹여 주는 안주... 제가 퍼 마시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에휴~~ ㅎ '근영이'는 3급 기술직으로 건설부에 들어가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하다가 독립하여 주택건설업에 종사하다가 과로로 15년 전에 중풍에 걸려 쓰러졌답니다. 정신이 돌아 왔을때엔 6개월이 지난 후였다니 흔히 하는 말이지만 진짜로 "죽었다가 살았다"고 합니다. 꾸준히 재활에 주력하여 지금은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했다는군요. 술도 조금 할 정도라는데... 그런데 오늘은 기분이 너무 업~되었는지 제법 많이 마시는 듯 했습니다.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거실로 옮겨 저녁 식사와 함께 또 퍼 마시고... ['이근영'과 부인 '신윤순교감선생님] '근영이'가 15년 전에 쓰러졌으니 너무 일찍 장애인이 되어버린거죠. 그래서 그동안 우리들 앞에 나타날수가 없었던 것이었겠죠. 그런 '근영이'를 어려움 모두 극복하고 이렇게 살아 있도록 만들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친수씨 임에 틀림없겠습니다. 친수씨는 교직생활을 오래 하였는데 모 고등학교 교감선생님까지 역임하고 정년 퇴임 하였답니다 근영이가 "나 와이프 아니었으면 오늘 니네들 만나지도 못했었을꺼야~" 밤은 깊어 가고 있었고 더불어 가을도 더욱 울긋불긋 깊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투병하느라 그리웠을 친구들...동창생들... 이젠 맘 놓고 만날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가! 그래 앞으론 자주 만나고 못다한 회포를 더 풀자구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두말할 필요도 없고... '근영이'와 친수씨 즐겁고 아름다운 하루였어요...고마웠어요 늘 행복 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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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가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2009년 때 모습]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저와 함께 한 우리 "하루"가 저를 떠나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지금까지 18년 동안 저의 기쁨조였던 "하루"...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를 미워하거나 시기하거나 배반하지 않았고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갑게 즐겁게 맞아 주었습니다. 언제나 예쁜 모습으로 꼬리치며 애교를 떨며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인간들 보다도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수 있는 최고의 인간으로 대해 주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즐겁게~"라는 취지에서 "하루"라고 이름 지은지 18년. 사람 나이로 치자면 백살을 훌쩍 넘어서는 장수를 하며 그는 자기 이름이 "하루"임에 자긍심을 가진듯 하루 하루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2008년 3월 주문진 바닷가에서] 사진 촬영을 하려고 하면 '개폼'도 스스로 잡던 "하루" [2008년 4월 '애기봉'에서] 세월도 빠릅니다. 엄마도 이때는 제법 젊었었군요 "하루"와 함께 젊음도 갔습니다. [2010년 '졸업40주년 행사장'에서] 人生이던 犬生이던 살다 사라지는 것은 불변의 진리 [2014년 가을...그러니까 2년전 아파트에서] 정말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다 갔습니다. 병원 한번 간적없고 야단 맞을 짓 한번 한적 없었습니다. [2016년 8월말- 한달전 촬영한 동영상] "하루"는 세상을 떠나기 한달 전까지도 "우리"와 함께 건강하게 잘 놀았습니다. 두 놈 다 암놈들이지만 시집도 못가 항시 저렇게 암놈끼리 둘이서 놀았습니다. 열여덟살이나 되었으니 이빨이 다 빠지고 백내장이 와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잘먹고 잘 놀며, 반드시 화장실 가서 용변을 보곤하더니.... 그런데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부터 갑자기 먹지를 않았습니다. 모든 견공들과 같은 과정을 밟으며 저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암시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 영원히 잠들다] 2016년 9월 15일 오전 5시에 영면했습니다. 모처럼 가족들이 모두 모인 추석날 새벽이었습니다. "하루"는 우리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일때까지 억척스럽게 기다린듯 합니다. 모두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모두에게 인사를 하며 떠나고 싶었나 봅니다. "함께해서 즐거웠어요~ 정말 고마워요!~" 라고 하며.... "하루"는 그렇게 우리 가족 모두를 뒤로 하고 엄마 품에 포근히 안겨 돌아 오지 못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남아 있는 우리 가족은 모두 슬픔에 잠기는데 우리들 곁을 떠나는 "하루"는 너무나 편안한 모습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아빠 엄마 만나 행복했다고....고맙다고 하면서.... ['우리'와 '둥이'] 많은 날들을 함께 재미있게 놀았던 "우리"와 "둥이"의 배웅을 받으며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뒤로 하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제가 해 줄수 있는 것은 없고... 태극기로 감싸서 보내며 훗날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습니다. "하루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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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다에 가고 싶다~ 기록적인 무더위가 우리 강산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요즘 전기요금 누진제 무서워 에어컨도 못켜고 사는 대부분의 서민들 정치꾼들이 이런 여론을 의식한듯 한시적으로 전기요금을 깍아 준다고 하는데 자기가 자기 돈으로 불쌍한 사람들에게 선심 쓰는듯 합니다만... 아무리 깍아 줘도 에어컨 없어서 사용 못하는 서민들에겐 그림의 떡이고 에어컨 있어도 전기요금 아까워 깍아주더라도 에어컨 사용 안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결국 누진제에도 두려움 없는 가진자들만 누진제와 관계없이 얼씨구~ 에어컨 펑펑켜고 사는데... 전기요금 깍아주면 결국 또 전기 많이 쓰는 그들 가진자들에게만 혜택이 돌아 가는 꼴이 되지요? '흙수저' - 없는 사람들은 이래도 저래도 더워 못살고 '금수저' - 가진자들은 이래도 저래도 관계없이 시원하게 사는데 거기에 전기요금까지 추가로 혜택 보니 결국은 가진자들의 세상~ 억울하면 돈 벌어라~~? 이 세상은 '富의 대물림'으로 힘쎈 가진자들이 그렇게는 안돼도록 구조적으로 만들고 있어 개천에서 용 나기 전엔 불가능 이번 '8.15특사'엔 수천억씩 해먹은 재벌들이 사면된다는데... 그런 '금수저'들은 뭔짓을 해도 살아 남고... 그래서 ... 속상하고 더위에 지쳐 계실 횐님들에게 '파란문'이 선물을 하나 드릴려고 하는데 ...ㅎ 선물이 될려는지... 피서도 못가고, 에어컨도 못켜고 더위와 쌈박질을 하고 사시는 분들에게 마음으로나마 시원해 지시라고 남태평양 어느 시원한 청정 바닷가로 진주조개잡이를 떠날수 있게 해 드림니다. ㅎ ^.^ 어여 빨리 뱅기 타고 날아 가세요~ 그냥 맘으로만 날라 가도 됩니다.~ ㅎ 별다른 세상사는 생각은 버리시고 오로지 樂園으로 생각하시고 떠나세요. 다만 이런곳도 며칠만 있어야지 오래 살면 한 인생 너무 짧아 여기저기 못가 아깝습니다. 다른 곳에도 파라다이스는 많으니까요. ㅎ 넘 부러워 마시란 얘깁니당~ 넘넘 시원해 쉬기만하면 심심하니 스킨스쿠버 다이빙도 해 보세요~ '진주조개'도 찾으시고... 어여쁜 여인도 만나시고...진짜 진주조개 ㅎ 모든 근심 걱정일랑 벗어 던지고 황홀한 천국의 꿈을 꾸세요~ "나는 행복하다!~" 너무 더워 잠시 '파랑새의 꿈'을 꿔 봤습니다. 곧 가을이 다가 온답니다. 그리고 낙엽은 또 지고...눈 내리는 겨울로 갈겁니다. 여름도 잠깐이겠죠? ㅎ 제가 잘 사용하는 말을 끝으로 전해 드리며 건강한 여름 나시길 기원합니다. "여름엔 춥지 않아 좋고..." "겨울엔 덥지 않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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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특별 기고] 소설가 김훈

세월호 내버리고 가면 우리는 또 같은 자리서 빠져 죽어 …
사실의 힘에 의해 슬픔과 분노, 희망의 동력으로 바뀌기를

 

[중앙일보] 입력 2015.01.01 00:09 / 수정 2015.01.01 00:12

 

지난해 12월 30일 평소 자전거를 타곤 하는 경기도 파주 공릉천을 찾은 소설가 김훈.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나는 본래 어둡고 오활하여, 폐구(閉口)로 겨우 일신을 지탱하고 있다.

더구나 궁벽한 갯가에 엎드린 지 오래니 세상사를 입 벌려 말할 만한 식견이 있을 리 없고,

이러한 말조차 아니함만 못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하되, 잔잔한 바다에서 큰 배가 갑자기 가라앉아 무죄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한 사태가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지 못하고,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몸을 차고 어두운 물 밑에 버려둔 채 새해를 맞으려니 슬프고 기막혀서 겨우 몇 줄 적는다.

단원고 2학년 여학생 김유민양은 배가 가라앉은 지 8일 후에 사체로 인양되었다. 라디오 뉴스에서 들었다.

유민이 아버지 김영오씨는 팽목항 시신 검안소에서 딸의 죽음을 확인하고 살았을 적의 몸을 인수했다.

유민이 소지품에서 학생증과 명찰, 그리고 물에 젖은 1만원짜리 지폐 6장이 나왔다.

김영오씨는 젖어서 돌아온 6만원을 쥐고 펑펑 울었다.

(유민 아빠 김영오 지음 『못난 아빠』 중에서) 이 6만원은 김영오씨가 수학여행 가는 딸에게 준 용돈이다.

유민이네 집안 사정을 보건대, 6만원은 유민이가 받은 용돈 중에서 가장 많은 돈이었을 것이다.

이 6만원은 물에 젖어서 돌아왔다.

아 6만원, 이 세상에 이 6만원처럼 슬프고 참혹한 돈이 또 있겠는가.

이 6만원을 지갑에 넣고 수학여행 가는 유민이는 어떤 설계를 했던 것일까.

열일곱 살 난 여학생은 무엇을 사고 싶었을까. 얼마나 간절한 꿈들이 유민이의 6만원 속에 담겨 있던 것인가.

유민이가 가지고 싶었던 것들. 아버지, 엄마, 동생에게 사다 주려 했던 선물은 무엇이었을까.

6만원은 유민이의 꿈을 위한 구매력에 쓰이지 못하고 바닷물에 젖어서 아버지에게 되돌아왔다.

300명이 넘게 죽었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몸이 물 밑에 잠겨 있지만

나는 이 많은 죽음과 미귀(未歸)를 집단으로 한꺼번에 슬퍼할 수는 없고 각각의 죽음을 개별적으로 애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민이의 6만원, 물에 젖은 1만원짜리 6장의 귀환을 통절히 슬퍼한다.

아 6만원. 유민이의 마음속에서 6만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셀 수 없이 많았고,

유민이가 갖고 싶었던 것은 사소할수록 간절했을 것이다.

이것을 살까, 저것을 살까 망설일 때 그 후보 리스트에 오른 물건까지를 합산한다면 이 6만원이 갖는 구매력의 예상치,

실현되지 못한 구매력은 몇 배로 늘어난다. 유민이의 선택에서 최종적으로 탈락되었다고 해서 그 탈락된 꿈이 무효인 것은 아니다

배는 수학 여행지에 닿지 못했다. 죽은 많은 아이들의 용돈도 다들 물에 젖어서 돌아왔을 것이므로 그 많은 꿈들은

슬픔과 분노로 바뀌어 바다를 덮는다. 유민이의 지갑에서 돌아온 6만원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국가재난 컨트롤타워에 성금으로 보내야 하는가를 생각하다가 생각을 그만두었다.

내가 젊은 날 육군에서 힘들 때 엄마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어렵고 힘들 때는 너보다 더 어려운 이 어미를 생각해라, 라고

적혀 있었다. 고지의 겨울은 맹수에게 물어뜯기는 듯이 추웠다. 엄마의 편지를 받던 날 밤에 나는 보초를 서면서 고난을

따스함으로 바꾸어놓는 엄마의 온도와 엄마의 눈물의 힘을 생각했고 자라나는 고비에서 치솟는 반항기로 엄마를 속 썩인

패악을 뉘우치면서 가슴이 아팠다. 유민이의 6만원에도 내 엄마의 편지처럼, 크고 깊은 슬픔의 힘이 저장되어 있어

세상의 불의와 세상의 더러움을 밀쳐낼 수 있으며, 말을 알아듣고 사물을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켜줄

테지만 그렇게 말해 봐도 산 자들의 말일 뿐, 젖어서 돌아온 6만원을 위로할 수는 없다.

배 안을 수색하는 잠수사들의 말에 따르면, 아이들이 담요를 둘둘 말아서 배 안의 창문 틈마다 모두 막아놓았다고 한다.

아이들은 그렇게 버둥거리다가 최후를 맞았다. 골든타임도 에어포켓도 컨트롤타워도 다가오는 인기척도,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화가 유근택의 ‘어떤 실내’

어지러운 방 한가운데 노란색 사다리들이 떠 있다. 행복한 세상으로 가는 구원의 통로로 읽힌다.

2012, 한지에 수묵 색채, 146X127㎝.


글을 쓰면서 읽은 책을 들이대는 것은 게으르고 졸렬한 수작일 테지만

나는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별수 없이 책을 들먹인다.

조선 성종 때 관인 최부(崔溥·1454 ~1504)는 제주도에 공무 출장 갔다가 부친상을 당해 배를 타고 육지로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났다. 그는 15일 동안 바다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중국 해안에 표착했고 북경을 거쳐 6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는 바다와 대륙에서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사나운 바다에서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은 이렇다.

“한 채의 이불을 찢어 여러 번 둘러 동여매고 횡목(橫木)에 그것을 묶어서 죽은 후에도 시신이 배와 함께 오래도록 서로

멀어지지 않도록 하고자 했다.”(『표해록』 최부 지음, 서인범·주성지 옮김, 한길사, 2004, 62쪽)

최부는 이불을 찢어서 배 기둥에 몸을 묶었고 유민이네 학교 아이들은 담요를 말아서 창문 틈을 막았다.

그 마지막 정황에서 인간의 모습은 비슷하지만 세월호는 풍랑에 깨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침몰했다.

차오르는 물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담요를 말아서 창문 틈을 막았는데, 아직 살아 있는 몸의 동작이 생명을 향해 그렇게

작동되어지는 과정의 무서움을 최부의 글을 통해 겨우 짐작한다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세월호는 풍랑에 깨지지 않고 스스로

침몰했다. 큰 배가 스스로 뒤집혀서 가라앉게 되는 배후에는 대체 얼만큼 악과 비리가 축적되어 있는 것인지,

그리고 담요를 말아서 창문 틈을 막다가 죽은 아이들과 정치적·행정적 시스템과의 그 참혹한 단절은 어찌 된 영문인지를

나는 알 수가 없다. 최부가 표류했던 조선 성종 시대의 동지나 바다는 물결이 사나웠고 세월호가 항해하던 박근혜 대통령 시절의

진도 연안 여객선 수로는 물결이 높지 않았는데, 그 인기척 없는 적막강산의 풍경은 흥망과 건국, 전쟁과 재건을 거쳐온 600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어찌 그리 똑같은지, 내가 얼마 전에 진도 팽목항에 가서 눈물도 말라버린 유가족들과 함께 바다를

바라보니 부르는 소리는 수평선 너머로 퍼져 가는데 배 빠진 자리는 흔적이 없고, 바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國破浪花飛 (국파랑화비)
 海暮號哭散 (해모호곡산)
 나라는 깨지고 물보라 날리니
 바다는 저물고 곡소리 퍼진다.
 <두보(杜甫)를 흉내 내 지음>

장한철(張漢喆·1744 ~?)은 조선 영조 연간의 제주도 선비다.

26세 때 서울 가서 과거를 보려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났다.

그는 오키나와까지 떠밀려갔다가 중국 상선을 얻어 타고 2개월 만에 돌아왔다.

29명 중에서 22명이 물에 빠져 죽었고, 살아서 돌아온 자들도 곧 병들어 죽었다.

부서진 배가 파도에 치솟고 잠기면서 장한철에게 죽음이 다가오는데, 임박한 죽음 앞에서도 인간은 삶을 기약한다.

그때 장한철의 각오는 다음과 같다.

"만일 내가 살아서 돌아간다면 응당 글 읽는 일을 던져버리고 집 밖의 일도 벗어버리고 몇 고랑 안 되는 밭을 몸소 갈면서

쌍오당(둘째 아버지의 아호)의 여생을 효성스럽게 받들련다.”

(『표해록』 장한철 지음, 김지홍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09, 68쪽)

임박한 죽음 앞에서 장한철은 삶의 쇄신을 각오하는데, 쇄신의 골자는 책을 버리고 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언어와 관념의 세계를 버리고 몸과 대지가 부딪치고 엉키는 직접성의 세계에 삶을 재건할 것을 기약한다.

세월호가 기울고 뒤집히고 가라앉을 때 배에 갇힌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러한 방식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고유한 원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 물이 차오르는구나, 이제 죽어야겠다, 라면서 죽은 사람이 있을 것인가.

세월호에서 죽은 그 많은 사람들도 장한철처럼 죽음 앞에서 삶의 쇄신을 기약했을 것인데, 그들의 마음속에서 울음으로

끓어오르던 새로운 삶에 대한 각오와 동경, 지나간 삶에 대한 회한과 뉘우침, 이루어야 할 소망과 사랑과 평화와 친절, 만남과

그리움, 손 붙잡기, 끌어안기 쓰다듬기….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팽목항에서 나는 기막혔고 분했다.

장한철의 그 일생일대의 각오는 오래가지 못했다. 살아서 돌아온 그는 다시 글의 세계로 돌아갔다.

풍랑 치는 바다에서의 생각과 흔들리지 않는 땅 위에서의 생각은 전혀 다른 모양이다. 장한철은 살아온 지 두어 달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과거에 응시했고, 떨어졌다. 낙방한 그가 다시 배를 타고 제주 바다를 건너 고향으로 돌아갈 때

책과 밭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장한철은 살아서 돌아왔으므로 그의 마지막 각오와 소망을 번복할 수 있었겠지만,

세월호에 갇혀 죽은 사람들은 돌아와서 번복할 수 없을 것이므로 그들의 마지막 소망은 영원히 유효하다.

그 유효한 소망들이 바다와 육지 위에서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 떠돌고 있지만, 소망들은 유효하다.

세월호는 화물을 너무 많이 실었고, 선체를 불법으로 증축했고, 배의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평형수를 빼냈고,

갑판 위의 화물을 단단히 묶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흔들릴 때 복원력을 상실하고 한쪽으로 쏠려서 침몰한 것이라고

검찰은 수사결과를 밝혔다. 검찰은 이 부분을 아주 자세히 설명했다.

검찰의 말은, 한마디로, 세월호는 물리법칙을 위반했기 때문에 침몰했다는 것인데,

지구 중력의 자장 안에서 물리법칙을 위반하고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세월호는 가라앉을 만해서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나는 오래전에 졸작소설 『칼의 노래』를 쓰느라고 선박과 항해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었다.

내가 읽은 책들은 들이댈 만한 것도 아니고 내가 쓰려는 소설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바다의 질감과 선박의 작동원리를 전혀 모르고서는 글을 쓸 용기를 낼 수 없었다.

백면서생이 배의 작동원리를 말하는 것은 꼴 같지 않지만 무릅쓰고 가려 한다.

20세기의 대형 선박은 모두 쇠로 만든다. 쇠가 어떻게 물에 뜨는가. 쇠건 바위건 나무토막이건 같은 용적의 물보다 가벼우면 뜨고,

무거우면 가라앉는다. 이 세상의 모든 배를 지칭하는 영어 보통명사는 베슬(vessel)인데 그릇이라는 뜻이다.

그 자체에 용적을 포함하고 있는 운송수단이라는 말이다. 수만t의 쇳덩어리는 베슬을 이룸으로써 가라앉으려는 중력과 띄우려는

부력이 길항(拮抗)하면서 물에 뜬다. 이것은 소금쟁이가 물에 빠지지 않는 이치와는 전혀 다르다. 이 길항의 원리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나오는 신석기 사내들의 고래잡이용 보트(내가 좋아하는 그림!)나 생환율이 50%에 불과했던 16세기 포르투갈·스페인

네덜란드의 범선이나 명량해전, 노량해전, 한산해전, 옥포해전에서 이긴 이순신 함대의 판옥전선이나 두 동강 난 천안함이나

방위 예산 떼어먹은 통영함이나 멀쩡히 가다가 가라앉은 세월호나 다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예외는 없고 예외는 곧 죽음이다.

무게중심과 부력중심이 서로를 피하고 또 달래가면서 기우는 배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데 이 양극단의 모순이 한순간의 물리현상

속에서 통합됨으로써 배는 롤링하면서 전진한다. 그러나 배가 옆으로 기울 때 이 경사각도가 모순을 통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가면 복원력은 순간에 소멸하고 배는 뒤집혀서 침몰한다. 배는 유(柔)로서 강(剛)을 다스리며, 유와 강의 종합으로써

롤링하고 피칭하는데, 배가 롤링과 피칭 없이 뻣뻣하게 파도를 대하면 배는 바로 깨지거나 침몰한다.

이순신 함대의 배도 그렇지만 전통적인 한선(韓船)은 연안 항해용이기 때문에 바닥이 평평해서 큰 파도를 만났을 때는 복원력이

약하다. 그래서 한선은 무거운 화물을 배 밑바닥에 싣고, 화물이 모자랄 때는 바위를 실어 무게중심을 낮춘다.

목포해양박물관에 전시된 신안 보물선도 모든 화물을 배 밑창에 싣고 있다. 이것은 아무런 비밀도 아니고 전문지식도 아니다.

고대 이집트의 갈대배에서부터 적용되던 원리다.

세월호는 이 모든 원리와 인류의 축적된 경험을 거꾸로 했다. 그러니 어찌 살기를 바라겠는가.

갑판에 과적을 함으로써 무게중심을 위로 끌어올렸고, 배 밑창의 평형수를 빼버려서 배의 중심을 허깨비로 만들었다.

이것이 침몰의 원인인가. 이것은 원인이라기보다는 침몰 그 자체다.

이것이 침몰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배가 뒤집혀지니까 가라앉았다는 말과 같다. 이것은 동어반복이다.

세월호 침몰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화물을 단단히 묶지 않았다는 것이다. 검찰이 그렇게 말했다.

기울어진 세월호의 사진을 보면 갑판 위에는 컨테이너고 승용차고 아무것도 없이 빗자루로 쓸어낸 것처럼 깔끔하다.

배가 기울 때, 화물들이 한쪽으로 쏠려 물속으로 휩쓸려 내려간 것이다. 화물을 단단히 묶지 않았다는 수사결과는 맞는 말이다.

화물을 단단히 묶는 것을 고박(固縛)이라고 하고, 원양선원들의 전문 용어로는 래싱(lashing)이라고 하는데, 다 같은 말이다.

이것도 별것이 아니다. 지게꾼이 옹기를 묶을 때, 1.5t 픽업트럭 기사가 적재함의 짐을 묶을 때, 퀵서비스 오토바이 기사가

뒷자리의 박스를 묶을 때 그리고 앞에서 썼듯이 조선 성종 때 바다에서 죽음을 맞는 최부가 이불을 찢어서 몸을 선체에 묶을 때,

이 모든 동작이 래싱이다. 래싱은 흔들리면서 길을 가는 모든 자들의 기본동작이다. 별것이 아니지만, 이탈자는 살길이 없다.

그래서 원양을 항해하는 선박의 갑판원들은 쉴 새 없이 갑판을 순찰하면서 컨테이너를 묶는 쇠줄(래싱바)을 스패너로 조인다.

이것이 갑판원의 기본 업무다. 컨테이너는 선체와 밀착되어 롤링과 피칭을 함께 해야 하며, 컨테이너가 정위치를 이탈해 한쪽으로

쏠리면 그 기세로 배 전체를 끌고 쓰러져서 살길은 없어진다. 운동은 복원되지 않는다.

세월호는 등짐 지는 지게문만큼도 래싱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월호가 래싱을 엉터리로 해서 침몰했다는 말도 또 다른 동어반복이다.

비를 맞으니까 옷이 젖었고, 밥을 굶었더니 배가 고프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세월호는 왜 기울었고 왜 뒤집혔는가.

2014년 4월 16일의 참사 이후로 사태를 바라보는 이 사회의 시각은 발작적인 분열을 일으키며 파탄되었다.

슬픔과 분노를 온전히 간직해서 미래를 지향하는 동력으로 가동시켜야 한다는 시각과

그 슬픔과 분노를 매우 퇴행적인 소모적인 것으로 여겨 혐오하는 시각이 교차했다.

거칠게 말하자면 4월, 5월까지는 전자의 시각이 우세했으나 6월 4일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적지 않은 재미를 보고,

이어 7월 30일 재·보선에서 여당이 압승하자, 후자의 시각이 주류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슬픔과 분노에 오랫동안 매달려 있는 것은 경제 살리기에 해롭다는 것이 그 혐오감의 주된 논리였다.

세월호에서 놓친 골든타임이 경제회복의 골든타임으로 살아났고 거기에 이념의 날라리들이 들러붙기 시작했다.

사실 4·16참사 이후에 경기는 장기 침체에 빠졌고, 정부의 부양책은 힘을 쓰지 못했다.

모두들 슬프고 분하면 경기는 침체되는 것이니까. 슬픔과 분노가 경기침체의 원인이라는 말도 결국은 동어반복이다.

어찌 헌 옷을 벗듯이, 헌신짝을 벗어버리듯이 마음의 일을 벗어 던질 수 있을 것인가.

돈 많고 권세 높은 자들이 큰 죄를 저질러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형량을 줄여서 선고하고, 형기 중에도 특별사면,

일반사면, 집행정지, 가석방, 병보석으로 풀어주는 무법천지를 나는 자유당 때부터 보아왔고 자유당은 지금도 특별사면 중이다.

죄형법정주의는 무너졌고 경제는 합리적이고 규범적인 토대를 상실했다. 재벌의 불법을 용인해야 경제가 살아나고,

정당한 슬픔과 분노를 벗어 던져야만 먹고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말은 시장의 논리도 아니고 분배의 정의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속임수일 뿐이다.

법치주의가 살아 있어도 법이 밥을 먹여줄 리는 없고, 밥은 각자 알아서 벌어먹어야 하는 것인데,

법치주의를 포기해야만 밥을 벌어먹기가 수월해진다면 이 가엾은 중생들의 밥은 얼마나 굴욕적인 것인가.

나는 수감 중인 대기업 총수에 대한 가석방 결정이 법무장관의 ‘고유권한’이라는 언설에 반대한다.

장관이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의 고유권한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사금(尼師今)이 아니고 마립간(麻立干)이 아닐진대, 어찌 직무에 따른 권한이 그 직위에 ‘고유’하게 귀속될 수가 있겠는가.

장관은 다만 그 가석방이 법치주의의 원칙과 절차에 비추어 정당한 것인가 아닌가를 공적으로 판단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저 사람을 풀어주면 이 나라가 얼마큼 더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인가는 법무장관이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장관의 판단의 준거가 될 수 없다. 자유당 때부터 지금까지 전개된 무법천지의 관례도 장관이 참조할 전례가 되지 못한다.

저 사람을 지금 풀어주면 이 나라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이 무너져 내리며, 후세의 더 큰 무너짐을 어찌 감당할 것이며,

어떠한 앞날이 닥쳐올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장관의 일이기를 나는 바란다.

지금, 그날 벌어 그날 먹거나 한 달 벌어서 한 달을 먹거나, 사람들은 먹고살기의 지옥을 헤매고 있다.

이 겨울에 살기 위한 아무런 방편도 마련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중생고(衆生苦)가 수감 중인 대기업 총수의 석방 주장을 정당화하고 세월호의 슬픔과 분노에 대해 침묵을 요구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은 기막힌 일이지만, 기막히게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해서 4·16의 슬픔과 분노는 전혀 정치적인 것이아니었지만

결국은 정치의 악다구니 속으로 편입되었고,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편으로 갈라져서 치고받게 되었는데,

세종로에서 단식을 이어가던 유가족들 옆에서 먹성 좋아 보이는 청년들이 통닭과 짜장면을 먹어대고,

또 국회의원 명함을 내미는 웬 여성의원이 대리운전기사를 폭행하는 짓에 연루됨으로써 이 악다구니와 악다구니에 편승하는

또 다른 악다구니들이 온 나라에 넘쳤다. 슬픔과 분노의 온전한 모습은 파괴되었고 유민이의 젖은 6만원의 의미는 실종되었다.

그 슬픔과 분노는 특별히 재수가 없어서 끔찍한 재앙을 당한 소수자의 불운으로 자리 매겨졌다.

그 소수의 고통을 사회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다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고 다수가 먹고사는 일이 해로운 결과가 된다고

힘센 목청을 가진 언설의 기관들이 힘을 합쳐서 소리 질렀다. 소리 질러서 낙인찍었고,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그렇게 해서 4·16의 슬픔과 분노는 특별히 재수 없어서 재난을 당한 소수자의 것, 우는 자들만의 것, 루저들만의 것으로 밀려났다.

세월호가 침몰한 사건과 그 모든 배후의 문제를 다 합쳐서 세월호 제1사태라고 한다면,

제1사태 직후부터 이 나라의 통치구조 전체가 보여준 붕괴와 파행은 세월호 제2사태다. 이것은 또 다른 난파선이다.

제1사태와 제2사태는 양태는 다르지만 뿌리가 같아서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지 구분할 수 없는데,

과거의 제2사태가 오늘의 제1사태로 터져 나오고, 오늘의 제2사태가 미래의 제1사태를 예비하고 있다.

세월호 이준석 선장과 선원들은 제1사태 때 승객과 배를 버리고 먼저 탈출했다. 이준석 선장은 36년 형을 받았다.

세월호 제2사태에서도 많은 책임 있는 자들이 난파선을 버리고 탈출했거나, 탈출을 시도했고 이준석을 욕함으로써 자신들의

탈출의 오욕을 희석시키고 있다. 이 난파선은 아직도 표류 중이다.

세월호특별법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고통과 슬픔을 향해 얼만큼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지, 어느 정도에서 발을 빼야 하는지를 놓고

다투다가 여야 합의는 거듭 난파되었고 야당의 리더십은 침몰했다.

대통령은 사건 당일 인명구조에 최선을 다하라고, 일곱 시간 동안 일곱 번이나 각급 지휘관에게 명령을 내렸다고 비서실장이 밝혔다.

그런데 현장의 구조 인력은 기우는 배에 접근하지 않았고, 해경 책임자는 구조 인력 투입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대통령의 명령은 대체 무엇인가. 명령이란, 복종되고 실현되기를 강요하는 의사 표시다.

대통령의 직무는 언어의 형식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그 명령이 요구하고 있는 내용을 현실로 바꾸어놓는 것이다.

명령은 직무의 발동이고 실현은 직무의 완수다. 이것이 대통령과 9급의 차이일 것이다.

명령을 일곱 번 내렸다고 해서 대통령의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니다.

명령은 허공으로 흩어졌는지, 대통령의 명령이 구중궁궐에 갇힌 대왕대비의 신음처럼 대궐 담 밖을 넘지 못한 꼴이니,

그 나머지 일들은 기력이 없어서 더 말하지 못한다.

연초에는 세월호특별법에 따른 위원회가 결성되어 진상조사, 재난 예방과 대처, 희생자 위로 등의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세월호 사태는 제3의 국면으로 접어드는 셈이다. 위원회는 법이 정한 바에 따라 한시적인 기구가 되었지만,

이 같은 일에는 시한이 없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를 도려내고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세월호를 내버리고 가면 우리는 또 같은 자리에서 물에 빠져 죽는다. 우리는 새로 생기는 위원회를 앞세워서,

세월호를 끝까지 끌고 가야 한다. 위원회가 동어반복으로 사태를 설명하지 말고 그 배후의 일상화된 모든 악과 비리,

무능과 무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공생관계를 밝히는 거대한 사실적 벽화를 그려주기 바란다.

그리고 유민이의 젖은 6만원의 꿈에 보답해주기 바란다. 나는 사실 안에 정의가 내포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사실의 힘에 의해 슬픔과 분노가 미래를 향한 희망의 동력으로 바뀌기를 바란다.

바르고 착한 마음을 가진 많은 유능한 인사들이 이 위원회에 참여해주기를 나는 바란다.

삶을 쇄신하는 일은 여전히 가능하다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

출처 : 홍어와 무인도
글쓴이 : 파란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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