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과 파도랑 함께 걷는 해파랑길』
[해파랑길 12-11코스] 경주시구간" 답사기
연동항-오류고아라해변-송대말등대-감포항-전촌솔밭해변-
나정고운모래해변-가곡항-이견대-감은사-문무왕릉
"그리운 날에는 바람으로 살고 싶다"
누군가가 그리운 날에는
바람으로 살고 싶다.
거칠것 없고
머무름 없는 바람으로
그저 자유롭게
허허로운 내 모습을 감추고
떠나는 바람으로 살고 싶다.
나를 위해 울어 줄
단 한사람에게도
마지막 흔적조차 보이지 않고
떠날수 있는
바람으로 살고 싶다.
- 박강남 -
[해파랑길 경주구간 개념도] 클릭하면 대형화면으로 상세히 볼수 있습니다.
[ 12-11코스 네이버지도]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오류리'에 있는 "연동마을 연동항"에서 출발하여
아름다운 東海를 즐기며 "경주시국립공원 동해안"을 통과하여
'신라의 역사'가 숨쉬고 있는 "이견대-감은사-문무대왕암"까지 "18.7km"를 갑니다.
['충주휴게소'] 8:35
'경주시'로 가는 도중에 "충주휴게소"에 잠시 들렸는데, 이곳엔 함박눈이 내렸더군요.
'메뚜기 이마자락'만 하다고 하는 작은 한반도에도 지역에 따라
이렇게 날씨는 다양하다는 것을 실감할수 있었고...
['오류리 연동항'] 11:55
2018년 12월 12일 (수) 맑음
[해파랑길 경주시구간]이 시작되는 '경주시 감포읍 오류리 연동마을'의 "연동항 蓮洞港"에 도착했는데
이곳의 날씨는 조금전 "충주휴게소"와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ㅎ
바람이 약간 불었으나 맑고 쾌적한 날씨였습니다.
[펜션 밀집지역]
"연동항" 근처에는 규모가 있는 펜션들이 저마다 자태를 뽐내며 바닷가를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해안을 따라 설치된 데크를 5분여 진행하면...
['31번국도'] 12:00~12:13
[31번국도]로 나가 도로를 따라 13분 정도 진행하고
['모곡마을' '샤르사펜션'] 12:18
다시 바닷가 해안으로 나가면 "모곡마을"에 있는 "샤르샤펜션" 앞마당을 통과하는데
[해파랑길]은 이런 묘한 곳으로도 연결되 있었습니다.
['고아라해변'] 12:19
['고아라해변 관리소'] 12:22
이어서 "고아라해변"을 만납니다.
'감포읍 오류리'의 해수욕장이랍니다.
"오류리"라고 하니 '일류'는 아닌듯 느껴지는데, 한자로는 "五柳里"로 쓰고 있으니
버드나무가 많은 곳인가 봅니다만, 겨울로 치닺고 있는 겨울바다 해수욕장에서 버드나무는 볼수 없고
내년 여름을 기다리는지... 동면에 들어 갔는지 한적하기만 합니다.
['고아라해변길']
계속해서 이어지는 단장된 "고아라해변길"을 4분여 더 진행하다가
[뒤돌아 본 '고아라해변'] 12:26
지나온 "고아라해변"을 뒤돌아 보고...
['척사항'으로 넘어 가는 돌출부] 12:31~12:34
"고아라해변"이 끝나고 "척사항"으로 넘어 가는 돌출부를 잠시 통과하면...
['척사항'] 12:36
"척사항"를 만나는데 특징없는 아담한 漁港이었습니다.
"척사항"을 13분여 걸려 통과하면....
['송대말등대'] 12:49
"송대말등대"를 만납니다.
계단을 이용해 올라 가면...
['송대말항로표지등대' 조망]
"송대말등대"가 처음 있었던 곳은 기둥뿌리만 남겨두고 철거하여 뒷쪽에 새로 만들어 놨더군요.
그리고 정면 바다에 "항로표지등대"를 새로 만들어 놨습니다.
['송대말등대']
"송대말등대 松臺末燈臺"
1955년에 무인등대로 불을 밝히기 시작하여 1964년부터 유인등대로 승격시켜 운영해 오고 있다는데
현재의 이 등대는 2001년에 경주시가 관광용으로 새로 만든 등대라고 합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모형을 본따 만들었다고 하는데,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뭐가 닮았는지...
저는 아무리 비교해 봐도 어디가 닮았는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사진이 "감은사지 삼층석탑"인데 비교해 보세요 ~~
['감은사지 삼층석탑' - 국보 제112호]
['송대끝']
"송대말 松臺末"이라는 뜻은 "소나무가 울창한 바다 돌출부의 끝"이라는 것인데
이렇게 뒤에서 바라보니 그를듯하죠? ㅎ
여하튼 "감포항"에서 최고로 인기있는 '포토죤'이랍니다.
['감포항' 조망] 12:53
"송대말"에선 "감포항 甘浦港"이 전체적으로 조망되는군요.
'경주시'에선 제일 큰 항구도시라고 하는군요.
항구의 모양이 "甘"字를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래나 뭐래나...
"甘"은 '달콤하다'라는 뜻인데 여기선 완전 '상형문자'로 변신한듯...ㅎ
['노벰버리조트'] 12:56
"송대말등대"를 벗어나면 "노벰버리조트"를 지나는데, '추억을 추억하는 곳'이라고 광고하고
[골목]
이어서 "감포읍내"로 들어 가는 골목길을 만나 통과하고
[감포 사거리] 1:10
"감포읍"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감포사거리]를 만나는데 좌회전합니다.
['감포항']
'감포항'의 선박들을 구경하고...
['감포항 식당가']
"감포항" 앞 식당가인데....경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장사가 안되니 호객행위가 기승을 부려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점심식사] 1:10~2:00
이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이곳에선 '물회' 메뉴는 없고, "횟밥"이라는 메뉴가 있었습니다.
서울에선 '회덮밥'이라고 하는 메뉴와 비슷...이렇게 지역에 따라 이름은 바뀌고...
그런데 "횟밥"의 가격이 13,000원이어서 좀 비싸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매운탕이 추가로 나오더군요.
소주에 점심식사를 50분 정도 하고...
['감포1리'] 2:07
"감포항구"를 벗어나며 "감포1리 해변마을"이 이어집니다.
[뒤돌아 본 '감포항'] 2:20
"감포1리 해변마을"을 통과하여 뒤돌아 본 "감포"의 정경입니다.
"송대말등대"가 보이는군요. 제법 멋있는 풍경이죠?
['전촌리'로 넘어 가는 '용구멍' 돌출부] 2:22
'감포1리'에서 '전촌리'로 넘어 가는 길은 해안을 벗어나 능선길을 이용하도록 새로 만들어져 있는데
옛 해파랑길은 이곳 통과가 위험해 능선 정상부를 이용하도록 되 있었으며, 현재도 [네이버지도]에는
능선 정상부를 이용하도록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 데크길을 설치해서 [해파랑길]은 바꼈습니다.
[벼랑길]
해안 절경을 감상하며 통과 하도록 해안 능선데크길을 새로 만들었답니다.
해안능선 데크길이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설치되 있는데 제법 길더군요.
['용구멍' 돌출부]
돌출부가 있는데 왕복할수 있도록 데크를 설치해 놨습니다만...
이곳이 아마도 "용구멍"이 있는 돌출부인듯....
[벼랑길 데크]
벼랑길 데크를 더 진행하며
[해안풍경]
해안 풍광을 즐기고...
[군초소]
조금전 데크로 연결된 돌출부가 보이는데 군초소가 있습니다.
['용구멍']
군초소 아래에 구멍이 하나 있는데...
이 구멍이 지도에도 나와있는 "용구멍"이 아닌지....
여하튼 구멍은 틀림없죠? ㅎ
['전촌항'] 2:32
"용구멍"이 있는 돌출부를 10여분 통과하면 "전촌항 典村港"을 만납니다.
['전촌솔밭해변'] 2:35
"전촌솔밭해변"의 관리 사무소가 있는 중심지 입니다.
제법 큰 해수욕장이며 맑끔하게 단장되 있군요.
['거마상'] 2:38
"거마상 巨馬像"
"전촌솔밭해변"에는 하늘을 나는듯한 말 조형물이 있는데 이름하여 "거마상"이라고 하는군요.
마을 뒷산의 모양이 큰 말이 누워있는 형상이라고 하며, 신라시대엔 이 근처가 병마를 기르고
훈련시키는 곳이어서 이런 말 조형물을 설치했다고...
['전촌솔밭해변']
['전촌솔밭해변 관리센터'] 2:46
"전촌솔밭해변 관리센타"를 지나면....
['나정인도교'] 2:49
"나정인도교"를 만납니다.
여기서 뒤돌아 보면...
[뒤돌아 본 '전촌솔밭해변']
"전촌솔밭해변"이 전체적으로 조망됩니다.
해수욕장 다운 해수욕장으로 보입니다.
['나정인도교' 통과]
"나정인도교"
"전촌리 典村里"와 "나정리 羅亭里"의 경계에 있는 인도교랍니다.
'신라 신문왕'의 "만파식적 萬波息笛"의 모형을 본따 만들었다고...
"만파식적 萬波息笛"은 "이견대"에서 다시 알아 보겠지만, 신라의 국보로서 대마무로 만든 피리랍니다.
이 피리를 불면 나라의 근심걱정이 사라진다고...
['나정고운모래해변관리센타'] 2:51
"나정리 羅亭里"는 신라야사에 등장하는 "만파정 萬波亭"이라는 정자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어
"신라의 정자"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노래비] 2:53
"나정고운모래해변"에는 노래비가 하나 세워져 있습니다.
1970년대 유행했던 옛노래인 "바다가 육지라면" 노래비인데
2009년 7월에 사업비 3,000만원을 들여 건립했다는군요.
이 지역 향토작가 "정귀문"씨는 1969년 이른 봄 시리도록 푸른 나정리 앞 바다에서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에 마음을 실어 나르다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나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을
수평선에 그려놓고 바라보면서 ‘바다가 육지라면’이란 노래를 지었다고 회고했답니다.
그런데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출처 [농민일보]
만경창파를 원망하는 이 노래의 화자는 사랑하는 애인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다.
우연이었던가? 이때 노래를 부른 조미미(본명 조미자)와 염문설이 났던 가수 남진은
바다 건너 베트남에 파월장병으로 가 있었다. 그래서 이 노래는 베트남으로 날아가고 싶은 조미미의
당시 속내를 엮은 곡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노래의 배경지는 경북 경주시 감포읍 나정리.
용왕으로 변한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이 지키고 있는 해변으로, 노래를 작사한 정귀문의 고향이다.
그런 염문설이 공공연히 나돌았지만, '조미미씨'는 일본인 '야스다 에이키츠'와 결혼했죠.
가슴아프게도 '조미미씨'는 2012년도에 간암으로 65세의 짧다면 짧은 생을 마치고 돌아 갔습니다.
[뒤돌아 본 '나정고운모래해변'] 2:56
"나정고운모래해변"이 끝나는 곳에서 뒤돌아 본 "나정고운모래해변"과 "전촌솔밭해변"입니다.
['나정항'으로 가는 길]
"나정고운모래해변"에서 7분여 마을을 통과하면...
['나정항'] 3:03
"나정항 羅亭港"를 지나고...
['31번도로']
이어서 18분여 [31번국도]를 진행하면....
[독특한 절간] 3:21
독특한 절간을 지나는데...
벌어 먹고 사는 방법도 여러가지...ㅎ
['감포관광단지' 해변] 3:32
"감포관광단지"를 조성하고 있는 "가곡항" 근처를 통과합니다.
['대본리'로 가는 길]
다시 도로로 나가 14분여 진행하면....
['대본리'] 3:46
'감포읍 대본리'에 도착하며, 도로를 버리고 좌측 해안가 "횟집거리"로 들어 갑니다.
['대본항' 가는 길]
마을을 잠시 통과하면...
['대본항'] 3:52
"대본항 坮本港"을 만나며
['이견대' 횟집거리] 3:56
횟집거리를 지나면
['이견대'] 3:56
우측에 "이견대"가 보입니다.
여기서 바로 올라 가는 길은 없어서 직진해서 도로 위로 올라가 돌아 가야 하고
[하수처리장] 3:58
도로로 나가는 길목엔 '하수처리장'과 "참배단"이 있습니다.
['참배단']
"이견대"와 관련된 비석이 있으며 "참배단"도 보입니다.
['이견대횟집거리' 출입구] 4:00
도로로 올라 가면 [31번국도]를 만나는데, 이곳이 "이견대 횟집거리" 출입구이더군요.
이 출입구 좌측에는...
['신라 동해구 표지석']
"신라 동해구 新羅 東海口"라는 안내석과 정자가 있는데...
'신라의 도읍지'인 "서라벌"로 통하는 "대종천 大鐘川"이 '東海'와 만나는 곳이어서
이곳을 "신라 동해구 新羅 東海口"라고 한답니다.
['문무왕릉'과 '동해구' 조망]
"대종천 大鐘川"이 "경주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東海'와 만나는 "신라 동해구 新羅 東海口"입니다.
"문무대왕릉"이 절묘한 각도로 보이는군요.
['이견대' 가는 길]
먼저 우측에 있는 "이견대"를 다녀 와서 [해파랑길]은 좌측 산으로 올라 가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이견대'] 4:02~4:06
['이견대' 안내문]
"이견대 利見臺"
"30대 문무왕 文武王"의 아들인 "31대 신문왕 神文王"이 바다에 나타난 아버지 龍을 보고 나서
나라에 큰 이익이 되었다고 하는 "利見臺"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 하면 되겠습니다.
저는 안내문에 없는 "문무왕"과 그의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 그리고 "김유신"과 그의 여동생에 관한
얽히고 설킨 이야기를 잠시 후 "감은사지"에 가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문무왕릉' 조망]
'신라' 56명의 왕들 중에 유일하게 바다에 왕릉을 만든 전세계에서도 보기 어려운 왕릉이지요.
삼국 통일의 업적을 이룬 "문무왕"이 자신이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왜적들의 침입을 막겠으니
바다에 무덤을 만들라는 유언에 따라 "東海口" 앞 바다에 아들 "신문왕"이 만든 왕릉...
['해파랑길'과 지름길]
"이견대"에서 나와 다시 "동해구 쉼터"로 갑니다.
여기서 [해파랑길]은 우측 산으로 올라 가라고 합니다.
이 산 위에 역사유적이라던가 볼거리가 있으면 힘들어도 올라 가겠는데....
['해파랑길'] 4:08
"태양과 파도랑 함께 걷는 해파랑길"이라고 하면서 볼거리도 없는 산으로 갑자기 올라 가라고? ㅎ
"감은사지"로 가는 길인데 가깝고 편히 갈수 있는 도로가 있는데도 꼭 산길로 가라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16km 정도를 걸어서 다리도 아픈데 역사유적도 없는 산으로 올라 갈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하고..
[해파랑길]을 간다고 꼭 정해진 기찻길과 같은 루트를 따라 갈 필요는 없겠지요.
이런건 각자 알아서 선택하면 되겠죠? ㅎ ^*^
['대본삼거리'] 4:11
저는 직진해서 도로를 따라 진행합니다.
100m 정도 직진하면 [대본삼거리]를 통과하는데 "감은사지"를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 와 [대종교]를 건너 "봉길해변-문무왕릉"으로 가야 합니다.
['감은사 삼층석탑' 조망] 4:12
[대본삼거리]를 지나면 바로 "감은사지 삼층석탑"이 조망됩니다.
4분 정도 농로를 진행하면
['감은사' 입구] 4:16
['감은사지' 안내문]
"감은사터 感恩寺址"에 도착합니다.
이 곳에 대한 자세하고 믿을수 있는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 하면 되겠습니다.
['감은사 삼층석탑' - 국보 제112호]
"국보 제112호 감은사지 삼층석탑"입니다.
신라에 정복 당한 "금관가야국"의 왕족출신인 "김유신"
피지배국의 왕족이 신라의 핵심권력 속으로 들어 간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 많큼 어려운 일이었겠죠.
하지만 그가 신라의 권력 서열 1위까지 올라 가는 과정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요.
그 과정 중에 하나를 [삼국사기][삼국유사][화랑세기]를 참고하여 제 나름대로 각색하여 언급합니다.
"김춘추"와 "김유신", 그리고 "문무왕"의 탄생비화
때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시절...그러니까 "김춘추-김유신"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가야국'의 왕족이였지만 지금은 피지배국의 평민이 된 "김유신"은 '신라진골세력' 속으로 들어 가기 위해
교묘한 노력을 여러가지로 시도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합니다.
같은 "화랑 花郞'으로 친구 사이였던 "김춘추"와 "김유신"이었는데 "김유신'이 계략을 세웁니다.
"김춘추"를 완전히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한 "코끼기"를 시도한 것입니다.
어느날 "김유신"과 "김춘추"가 재기차기를 하는데 "김유신"이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립니다.
김춘추 : (화들짝 놀라며) 어? 내 옷고름이 찢어져 나갔쟌아 ~ C
김유신 : (옷고름을 줏으며) 아유~ 미안해. 미안해. 어서 우리 집으로 가자. 가서 옷고름을 수선해 줄께
그리하여 "김춘추"는 "김유신"의 집으로 갑니다.
"김유신"에게는 여동생이 두명 있었죠.
"보희"와 "문희"였습니다.
"보희의 꿈"을 동생 "문희"가 사는 이야기 아시나요? ㅎ
언니 "보희"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경주의 선도산'에 올라가 오줌을 싸는 꿈을 꾸었답니다.
'선도산'은 경주시내 북쪽에 있는 산인데 오줌을 얼마나 쌋는지 경주시내가 잠길 정도였답니다.
언니 "보희"는 괴상망칙한 꿈이라고 여겨 내 꿈을 사가라고 동생 "문희"에게 이야기 합니다.
보희 : 내가 괴상망칙한 꿈을 꾸었는데 어쩌면 좋아~~
문희 : 언니 무슨 꿈인데?
보희 :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글쎄 내가 '선도산'에 올라가 오즘을 쌋지 뭐야
문희 : 그런 꿈이야 흔히 있을수 있는 꿈이쟌아
보희 : 그런데 오줌을 싸도 너무 많이 쌋어 ~~ ㅠㅠ '선도산'이 무너지고 서라벌이 잠기는거야
문희 : (곰곰히 생각하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언니! 그 꿈 내가 살께~~
보희 : 정말? 그런 더럽고 망칙한 꿈을 산다고?
문희 : 응~ 내가 사고 그 꿈값을 치뤄줄께... 내가 가장 아끼는 비단치마를 줄께
(당시 비단은 중국 수입품으로 국내 생산이 안되던 때였는데, 가격은 한필에 벼30~50섬에 해당하는
값어치였다고하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가지요?)
보희 : 아휴 다행이다. 내 꿈 얼렁 가지고 가라 ~
이 꿈을 파는 바람에 "보희"와 "문희"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금당터']
"금당터"에 대한 자세한 안내는 위의 안내문을 참고하시고
재기차기 하다가 찢어진 옷고름을 수선하기 위해 "김춘추"와 함께 "김유신" 집으로 간 얘기로 돌아 갑니다.
"김춘추"와 함께 자신의 집에 도착한 "김유신"은 자기의 여동생인 "보희"의 방으로 들여 보내 옷고름 수선을
하려고 했으나 "보희"는 때마침 감기인지 몸살인지 병이나 옷고름 수선을 할수 없었습니다.
"김춘추"의 옷고름을 수선할 사람은 "언니의 오줌 꿈"을 산 동생 "문희"에게로 돌아 갔습니다.
"문희"의 방으로 들어간 "김춘추"는 옷고름을 수선하려면 옷을 벗어야했고......
"김유신"은 그 자리를 모른체 벗어나가고....
그리하여 두 청춘남녀의 운명적인 정사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 ^*^
그날로 "문희"는 임신을 하게 되는데...
그 당시 "김춘추"는 이미 결혼을 한 유부남이었는데, "보량"이라는 와이프와의 사이에 딸도 한명 있었고,
"보량"이라는 와이프는 키가 크고 날씬한 미인이었다고 하는군요. 그래서인지 "김춘추"는 "보량"을
무척 사랑해서 "보희"와의 관계를 숨기고 모른체 하며 쉬쉬했답니다.
"문희"의 배는 점점 불러 가는데도 임신을 시킨 "김춘추"는 모른체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김유신"은 신라 최대의 불쑈를 준비하며 "김춘추"의 코를 낄려고 작전을 꾸밉니다.
"김춘추"가 자기 집 근처를 지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자기 집 마당에 장작더미를 쌓아 놓고 동생 "문희"를 장작더미 위에 꿇어 앉히고 집주변을 돌아 다니며
"누가 내 동생을 임신 시켰느냐 ! 나와라~~"
"안 나오면 내동생을 불태워 죽이겠다 ~"라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그래도 나오지 않자 "김유신"은 장작에 불을 붙였습니다.
"문희"가 불에 타 죽을 운명에 놓이자, 그때서야 "김춘추"가 "김유신"의 집에 뛰어 들어 오며
"내가 임신 시켰으니 제발 '문희'를 살려달라"라고 애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며칠후 "김춘추"와 "문희"는 '포석정'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이리하여 "문희"는 "김춘추"의 세컨드가 되고, "김춘추"에겐 "김유신"이 처남이 된것이었습니다.
얼마후 "김춘추"의 본처인 "보량"이 둘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그만 죽어버리고 맙니다. 뭔 드라마 각본처럼...
그 이후 "김춘추"는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에 등극하고,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는 왕비가 되었지요.
옷고름을 수선해 주던 그날 혼전 정사에서 잉태된 아이가 바로 후에 삼국통일을 완성하는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이 되는 것입니다. "태종 무열왕-김춘추"의 장남이며, "김유신"의 외조카.
"문희"의 운명인지, "김유신"의 책략이 맞아떨어진 것인지...
어떻던 '가야국' 출신인 그들은 신라의 왕비가 되고, "김유신"은 왕에 못지 않은 왕의 반열에 오르며
최고 실권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오줌싸는 꿈을 판 첫째 여동생 "보희"도 "김춘추"의 세칸드가 되며
자매가 한명의 남편을 모시게 되었으니 "김춘추"는 완전 "김유신" 동생들 품에서 살게되었지요.
['문무왕릉' 방향 조망]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태종 무열왕-김춘추" 사이에서 탄생한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이루고 신라를 최고의 반석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의 아들 "제31대 신문왕"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동해구" 바다 바위섬에 왕릉을 조성하고
아버지가 바다와 통행하며 쉴수 있는 절간을 완성하였고, 그 절간의 이름을 "感恩寺"라 칭하며
신라 최대의 석탑을 쌓아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를 드렸답니다.
[뒤돌아 본 '감은사 삼층석탑'] 4:23
"感恩寺"를 떠나며 아쉬워 뒤돌아 보고...
['대본삼거리'] 4:28
[대본삼거리]로 다시 돌아가
['대종교']
[대종교]를 건너 "대왕암"으로 진행합니다.
['대종천']
[삼국유사] 기록에는 "에밀레종"이라고 하는 [성덕대왕신종] 보다 4배가 넘는 어마어마하게 큰 종을 만들어
"황룡사"에 두었는데, 고려시대 몽고군이 침략했을때 "황룡사"는 불타 없어졌다지만,
종은 어찌되었는지 기록도 없고 종도 없어져, 몽고군이 약탈해 이 개천을 통해 수송하다가
용이 된 "문무왕"에 가로막혀 이곳 개천 하구인 "동해구"에 빠뜨렸다고 [대종천]이란 이름을 갖게되었다고...
['이견대' 조망] 4:36
"문무대왕"의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를 배알하며 이익을 얻었다는 "이견대"가 건너편에 조망됩니다.
['문무왕릉' 조망]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 사이에서 혼전 정사로 태어난 "문무대왕"은
삼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하고 병으로 죽었는데 그 당시의 상황은 [삼국사기]에 기록되 있습니다.
秋七月一日 王薨 諡曰文武
君臣以遺言葬東海口 大石上
俗傳王化爲龍 仍指其石爲大王石
가을 칠월일일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문무'라 하고
군신이 유언에 따라 동해구의 큰바위 위에 장사하였다.
세속에 전하는 바로는 왕이 용으로 화하였다 하고 그 바위를 '대왕석'이라 한다.
['문무대왕릉' 안내문]
자세한 공식적인 안내는 안내문을 참고하세요~
[구글어스로 보는 '문무왕릉'-'이견대'-'감은사']
"문무대왕릉-대종천-감은사-이견대"의 위치와 "東海口"를 구글어스로 확인하고
제가 진행했던 실트랙을 표기했습니다.
그 옛날엔 바닷물의 수위가 높아 "감은사"까지 바닷물이 들어 갔다고 합니다.
지금은 수위도 낮아져 "대종천"을 간척하여 논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봉길해변 주차장'] 4:40
[봉길해변 奉吉海邊]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산악회 버스를 타고 귀경했습니다.
[구글어스]
오늘 걸은 거리는 "18.7km"였으며, 4시간 55분이 걸렸습니다.
(점심 식사시간 50분 포함)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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