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도립공원 하남위례둘레길"
 "이성산-금암산-연주봉-남한산-벌봉-객산"산행기 2부
     덕풍골-사리고개-이성산-향여교개-금암산-연주봉-남한산성북문-
     봉암상-벌봉-막은데미고개-사미고개-객산-매봉-샘재
    "하남위례둘레길을 찾아서" 
        '병자호란'의 아픈 역사가 남아 있는 "법화골"
        그 "법화골"을 에워싸고 있는 '하남'의 산줄기를 찾아 갑니다.

      -  - - 산행기 2부 - - -

  
  ['위례둘레길' 위치 구글어스]

  지난 [1부 산행기]에 이어서 [2부 산행기]를 시작합니다.
  오늘은 "남한산성 종로"에서 출발하여 "봉암성"을 지나 "샘재"로 하산하는 코스가 되겠습니다.
  거리는 GPS 측정으로 10.7km 였습니다.


  [지하철8호선 '산성역2번출구' 버스정류장]       11:13

  2014년 8월 26일 (화) 맑음 
  모처럼 안개가 없는 맑은 날인듯하여 부랴부랴 보따리를 꾸려 길을 나섯습니다.
  지난번 예기치 못한 사유로 절반의 산행만을 한 "위례둘레길"의 나머지 구간을 다녀오기 위해
  이번엔 [지하철8호선]을 타고 [산성역 2번출구]로 나가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52번시내버스]로 환승하여 "남한산성" 안으로 올라 갔습니다.


  [남한산성 종로 로타리]     11:30

  [52번버스]는 약10여분 정도 걸려 "남한산성 종로" 종점에 도착했습니다.
  "종로 鐘路"는 이곳에 산성을 총괄 연락하는 "종각 鐘閣"이 있었다고 "종로"라 한답니다.
  간단하게 산행 준비를 하고 우측 "북문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다소 늦은 시각에 출발을 하는군요.
  "남한산성 南漢山城"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경기도남한산성도립공원'은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고 합니다.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남한산성'에서 맞으며 치욕의 역사를 쓴 곳이기도 합니다.
  '남한산성'의 규모는 
  본성이 9.05km, 옹성이 2.71km로서 총 11.76km라고 합니다.
  경기도의 3大 山城 중에 하나로 "북한산성" "문수산성"과 함께 
  한양을 수호하는 山城이었습니다. 지금은 관광지? ㅎ
  '인조 15년, 1637년 1월 30일'
  저 앞에 보이는 "행궁"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왕인 "조선 제16대왕 인조"는 
  '남염의'라는 색 바랜 평민들이 입는 옷을 입고, 계급장 모두 떼고, 
  시종 50명과 왕세자 '소현세자'를 대동하고, 백마를 타고 나와  "서문"으로 나갔습니다.
  왜냐구요?  "누루하찌"에게 항복하러...
  조선왕조실록 "仁祖實錄"에는 그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인조 15년, 1637년 1월 30일'의 "仁祖實錄" 원본 번역문입니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성 밖에 와서 왕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왕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중략)
  삼전도에 내려가「왕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북문' 가는 길]     11:33

  "북문" 가는 길입니다.
  가는 길은 평지성이며 5분 정도 걸리는 매우 가까운 곳에 "북문"은 있습니다.
  앞에 보이는 산 우측에 있습니다.


  [北門-全勝門]     11:38

  "北門 - 全勝門"
  [위례둘레길]의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고골-법화골"로 통하는 성문입니다.
  '병자호란' 당시 이 문을 통해 300명의 정예부대가 '청나라' 10만대군을 처부수러
  내려 갔다는데 조금 있다가 자세한 내용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북문]

  300명으로 10만 대군에 대항하러 나갔다는 그 자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이순신장군'은 자기가 불리하면 절대 싸우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싸워 모두 이겼습니다.
  지난 역사를 생각하면 씁쓰름하기만 합니다.


  [남한산성 본성 성곽길]

  이제부터 "봉암성 암문"까지 '남한산성 본성 성곽'을 따라 진행 합니다.
  25분 정도 걸리더군요.


  ['1부' 산행코스]                        

  지난 1부 산행코스인 "이성산-금암산-연주봉"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한눈에 들어 오며
  "아차산-망우산-불암산-수락산-도봉산-북한산"으로 이어지는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아득히 "북한산 백운대-인수봉-만경대"와 "도봉산"이 새롭게 보입니다.


  ['고골' (법화골)]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기습 공격한 "고골-법화골"이 앞에 펼쳐집니다.
  10만 대군이 포위하고 있는데 300명이 내려가 기습공격을 해? 
  당시엔 겨울이어서 앙상한 나무가지로 시야가 트여 성문으로 누가 들락거리는지도 철저하게
  감시 당하고 있었고, 당시에도 망원경이 있어 동태파악이 확실이 되었는데도
  성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수는 없으니 뭔 껀수를 만들려고 한게 '바위에 계란 던지기'였습니다.
  조선군의 동태를 훤하게 파악하고 있던 청나라군은 앞에 보이는 계곡에 없는듯 숨어 있다가
  아무도 없는 계곡에 어리둥절하여 철수하는 조선군 300명을 단 한명도 남기지 않고 전멸시키고
  말았는데, 이를 "법화골전투"라 하고,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로 참패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후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북문'을 개축하고 
  그때의 참패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전승문 全勝門"이라 개명 하였답니다.
  그날의 상황은 "인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 있습니다.
  '인조 14년 병자년 (1636년 12월 29일)' 
  이날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체찰사 김류가 성위에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올라 오라고 전령하였다.
  그 때 갑자기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申誠立)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待罪)하니,
  왕이 위유(慰諭)하였다.


  ['북문'방향 조망]

  '수어장대'와 '북문' 사이 성 안에 "행궁"이 있습니다.
  조금 있다가 오를 "봉암성"의 "벌봉"근처가 앞에 보이는 "청량산" 보다 높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은 "벌봉"을 먼저 점령하여 저 앞 행궁을 향하여 '화포'를 쏘았습니다
  '인조실록'에는 포탄이 행궁까지 날라와 행궁에 타격을 가하여 항복하지 않을수 없었다고...


  ['봉암성' 방향]

  조금 있다가 답사할 "봉암성"이 보입니다.
  저곳에서 화포를 무자비하게 발사했다는 것 아닙니까.
  '남한산성'으로 접근하기가 가장 쉽다는 능선이 "객산"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오늘 진행할 능선이며,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이 이용한 능선이 되겠습니다.


  [제4암문]        11:58

  "북문"에서 성곽을 따라 20여분 진행하면 첫번째로 "암문"을 만나는데
  [제4암문-북암문]이라고 합니다.


  [제2군포지]

  '암문'은 비밀통로'를 의미함으로, '암문' 근처엔 요즘 말로하자면 '초소'인 "군포지"가
  있었답니다. 이곳에는 [제2군포]가 있었던 곳이라 합니다.


  ['봉암성암문' 오름길]

  [제4암문]에서 [제3암문-봉암성암문]으로 오르는 길은 급경사 오르막입니다.
  오늘 코스에서 가장 힘든 곳입니다. ㅎㅎ 7분 정도 오르면...


  [제3암문]        12:06~12:11

  [제3암문-봉암성암문]이 나옵니다.


  ['봉암성암문']

  [제3암문-봉암성암문]은 암문으로는 제법 규모가 있는 암문입니다.
  그 이유는 "봉암성"으로 통하는 유일한 門이기 때문일것입니다.


  ['봉암성' 가는 길]

  "봉암성"으로 가려면 성밖으로 나가야 하며...
  성밖으로 나가 우측으로 50여m 진행하면...


  ['봉암성문']       12:13

  "남한산성 본성"에 빌붙어 있는 "봉암성 성문"을 만나고...


  ['봉암성' 안]

  "봉암성" 안으로 들어 가면 성곽이 홀쭉하게 나란히 축성되 있습니다.


  [뒤돌아 본 '동장대터'와 '봉암성문']

  "봉암성" 안으로 조금 들어가 뒤돌아 보면
  "남한산성 본성"과 "봉암성"의 관계를 알수 있습니다.
  "봉암성"은 오로지 "남한산성 본성"을 지키기 위한 보조 城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봉암성"이 함락되어도 본성으로 들어 갈수 없도록 설계하였답니다.
  그리고 "여장 女墻"이라고 표기한것 보이시죠?
  "여장"은 성곽 위에 다시 성곽을 쌓은 것을 말한답니다.
  본성을 지키기 위해 다시 "여장"을 쌓은 것이겠지요?
  조금전 "북문"을 지날때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이 "벌봉" 근처에서 화포를 쏘아 '산성 안'이
  치명적 피해를 입어 항복하게 되었다고 알려 드렸죠?
  그래서 병자호란 이후 '숙종' 때에 이 "봉암성"을 새로 축조했다는 것입니다.
  이나저나 "봉암성"은 아직 복원을 하지 않아 허물어진채로 방치되있습니다.


  ['검단산-망덕산-두리봉' 조망]

  "봉암성"에서 남쪽을 조망합니다.
  며칠후 답사할 예정인 "남한산성-검단산-망덕산-두리봉-군두레봉" 산줄기가 조망됩니다.


  ['노적산-약사산-약수산-한봉' 조망]

  그러니까 '광주방향'에서 오르는 "남한산성 입구"인 "광지원"에서 출발하여
  "노적산-약사산-약수산-한봉-남한산성 동문-남장대터-검단산-망덕산-두리봉-군두레봉-
  청룡산-광지원"으로 원점 회귀하는 코스를 가려고 합니다.


  ['남한산' 조망]

  "봉암성"은 우측 끝이 "남한산"이고, 좌측 끝은 "벌봉"입니다.
  "봉암성"의 규모가 매우 작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앞에 보이는 '남한산'과 좌측에 있어 보이지는 않는 '벌봉'에서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이 '화포'로 '남한산성'을 포격 했다는 것입니다.


  [삼거리]         12:23

  50여m 성곽을 따라 들어 가면 첫번째 삼거리를 만납니다.
  [위례둘레길] 이정표는 좌측으로 안내하고 있고, "벌봉"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만
  앞에 보이는 "남한산 정상"을 밟고 "벌봉"으로 가겠습니다.


  ['봉암성' 외동장대지]

  "봉암성"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외동장대"가 있었다는 곳입니다.
  우측 "남한산 정상"을 오르고 앞에 보이는 성곽을 따라 좌측으로 진행하여 "벌봉"으로
  가겠습니다. 우측으로 50여m 진행하면....


  ['봉암성' 동쪽 끝]       12:28

  "봉암성 성곽"이 끝나는 곳이 나옵니다.
  직진하여 우측으로 가면 "한봉"으로 이어지는 "외성 外城"으로 가고,
  직진하여 다시 직진하면 "검단지맥 은고개"로 가는 길입니다.
  이길은 이미 답사한적이 있습니다. 제가 쓴 "검단지맥 산행기"를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곳에서 "남한산 정상"은 좌측으로 올라가 뒤로 5m정도 후진하면 됩니다.


  ['남한산' 정상]      12:28

  북쪽을 향하고 있는 "봉암성 성곽"에 "남한산 정상"이 있습니다.
  "남한산 522.1m"
  '남한산성 본성'에서 가장 높은 산인 "청량산"의 높이가 "497.1m"이니 비교되지요?
  다음 사진을 보면...


  [ 서쪽 '봉암성문-동장대터-관악산' 조망]

  "남한산성 본성"위 "동장대터"가 보이며 "봉암성문"도 보입니다.
  여기서 '화포'를 쏘면 "남한산성 본성" 안에 무차별적으로 떨어지겠죠?
  앞에서도 언급했드시 그래서 이곳에 本城을 지키는 보조성인 "봉암성"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진은 줌인한 사진이 절대 아닌데도 "관악산"이 우람하게 가까이 있는듯 조망되는데 
  여기서 이렇게 가까이 조망 될줄은 예전엔 미쳐 몰랐습니다.


  [ 동쪽 '검단산-고추봉-용마산' 조망]

  동쪽으로는 "검단지맥"의 하일라이트인 "검단산-고추봉-용마산"이 조망되는데
  여기서 직진해 내려 가면 "은고개"로 가서 "검단산"으로 이어 집니다.
  이 "검단지맥 코스"는 제가 쓴 "검단지맥 남한산성구간"을 참고 하시면 되겠습니다.


  [암문]

  북쪽으로 30여m 성곽을 따라 가면 폐허가 된 암문을 지나는데...


  [뒤돌아 본 '남한산 정상']

  암문에서 뒤돌아 보면 "남한산 정상"을 다시 확힌 할수 있습니다.


  [허물어진 성곽]

  북쪽 방향으로 진행하면 허물어진 성곽을 볼수 있고...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벌봉'으로 이어지는 '봉암성' 성곽]

  "벌봉"으로 이어지는 "봉암성 성곽"의 위용을 잘 볼수 있습니다.


  ['외동장대터']       12:36

  "병자호란"은 왜 일어났을까?
  조선왕조 왕들중 최고로 의심이 많았던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한양과 백성을 버리고
  개피를 보며 저만 살겠다고 임진강을 건너 북으로 북으로 도망을 가고......
  전란이 끝나고는 오로지 '明나라'에만 충성을 다해 왕권만 유지 하려한 '선조'였습니다.
  당시 중국의 상황은 '후금'이 세력을 키워 '明'을 위협하고 있었는데도 ....
  그런 과정에서 사림파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이러한 국제정세를 잘 파악하고 양다리 외교를 펼쳐 '후금'과 '명나라'를 함께 아우러는
  외교정책을 시행하며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정권을 잃어버리고 와신상담 권력을 되찾을려는 수구꼴통세력들인 '훈구파'들이
  이러한 광해군의 외교정책을(물론 다른 꼬투리들도 있지만) '외교정책'을 꼬투리로 잡아 
  '쿠데타-인조반정'을 일으켜 불법으로 정권을 잡고는 이들은 오로지 '明나라'만 섬겼습니다.
  그 결과가 '병자호란'인데...
  후금의 '누루하찌'가 '明'을 초토화 시키며 '靑나라'를 세우는 시대가 도래하니
  '明나라'에게만 외교를 고집했던 '인조'와 수구꼴통세력들은 하루 아침에 
  청태종으로부터 보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지요.


  ['벌봉' 조망]

  "벌봉"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明나라'를 처부수고 '靑나라'를 세운 '누루하찌'는 '明나라만 섬긴 조선'을 보복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니, 쪼다리 왕 '인조'는 이곳 '남한산성'으로 도망을 쳤던것이죠.
  뛰어 봐야 메뚜기 인데...
  쿠데타로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수구꼴통세력들은 저만 살겠다고 대부분 도망쳐 흩어지고
  숨어 살며 목숨을 부지하고...다시 호시탐탐 정권을 잡을 궁리만 하며...
  '인조'만이 개피를 보게 되었지요.


  ['벌봉' 오르는 길]

  '인조'라는 인간에 대해서도 정치권력의 무상함을 곱씹게 합니다.
  병자호란 패배로 삼전도에서 '삼배고구두례'를 하며 항복을 하고, 
  자신의 장남인 '소현세자'를 인질로 청나라로 보내죠?
  '인조'가 한 치욕의 항복식은 "삼배구고두례 三拜九叩頭禮"라는 방식으로 했는데
     첫번째 절 : 이마를 땅에 세번 대고,
     두번째 절 : 이마를 땅에 세번 찧으며,
     세번째 절 : 이마를 땅에 세번 박는 방법이었습니다.
  치욕의 '三拜九叩頭禮'를 하는 '인조'는 마빡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청태종은 머리 박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소리가 날때까지 '꼰아박아 실시'를 하였던 것입니다.
  요즘 이슈회되는 군대 '김일병사건'이 생각납니다. 에휴~
  그 이후 '청나라'가 '명나라'를 완전 접수하고는 '소현세자'를 풀어 주었습니다.
  8년정도 인질로 잡혀있었던 '소현세자'는 그곳에서 진보된 서양문물과 학문을 접하고
  돌아 올때 그런 서적과 문물을 많이 가지고 들어와 조선을 개혁하려고 했습니다.
  '청나라'에게 개피를 본 '인조'는 '청나라'에 대한 감정이 좋을리 없었는데다가
  다시 수구꼴통세력들의 득세로 그러한 '소현세자'를 엄청 못마땅해했습니다.
  수구꼴통세력들은 '변화와 개혁'을 제일 싫어하죠?  자신들이 '변화와 개혁의 대상'이니까...
  우리나라는 오천년 역사 동안 수구세력들로 부터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변화와 개혁을 감행하려하는 '소현세자'에게 이상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감기가 든듯했는데 주치의가 '학질'이라고 진단을 하고 침을 세방 놓습니다.
  그리고 3일후 '소현세자'는 갑자기 죽어버렸습니다. 의문사!
  '소현세자'가 죽고난 그 이후의 '인조'와 수구세력들의 행동을 보면 '독살-암살'이라는 추리가 
  충분히 가능합니다. 왜냐구요?
 '인조'는 자기의 장남인 '소현세자'가 세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평민의 장례절차'를 밟고,
  참관인원을 종실로 규정하고, 침을 놓았던 담당어의를 처벌하라는 논의 자체를 금지했습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와이프, 즉 자신의 며느리인 세자빈을 사약을 내려 죽였습니다.
  그뿐입니까? 자신의 손자인 '소현세자'의 아들 셋까지 모두 제주도로 귀양 보내 죽게하고...
  여러분!~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초등학생이 생각해도 '인조'와 수구세력들에 의해 암살 당했다고 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도 '변화와 개혁'을 주장하면 그런 사람은 결국 어떻게 되던가요? 의문을 던집니다.

             
                 ['봉암신성신축비']       12:41

  '숙종 12년'에 '봉암성'을 신축했다는 비문이 있는 바위를 지나 갑니다.
  '병자호란' 이전에 쌓았어야  효과를 볼수 있었을텐데,
  '死後藥方文','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는 속담이 가장 적절하게 맞아 떨어지는 城입니다.
  엄청난 돈과 노력을 들여 城을 쌓았습니다만, 그 이후 한번도 사용된적이 없었습니다.
  쪼다리 '인조'같은 왕들을 위해 죄없는 백성들만 개고생하였던 것이지요.
  城을 쌓을 것이 아니라 '외교정책'을 잘 썼어야 했던 것입니다. 
  현재는 어떠한가? 외교정책을 잘하고 있는지 언제나 다양한 시각에서 감시해야합니다.
  수구정치권력들의 문제가 아니라 피해는 언제나 국민들에게 오는 것이니 ...


  ['벌봉' 정상부]       12:43

  성곽을 따라 진행하는 코스로 가야 "봉암 蜂岩"을 볼수 있고, 일반등산로로 가면 볼수 없습니다
  바위가 갈라져 벌의 날개 같아보이는 '벌봉 정상부'의 "벌바위"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는 전체적 '벌봉'의 모양을 가늠할수 없군요.
  산 아래 멀리서 봐야 '벌' 모양으로 보인다고 하는데 요즘은 여름철이라 ...


  ['벌봉' 정상]       12:45

  '벌봉' 정상의 모습입니다.
  기대치에 못 미치는 벌봉 정상에서 잠시 상념에 잠겼다가 바로 내려 갑니다.


  ['벌봉' 조망]      12:48

  안내판이 있는 '벌봉' 아래로 내려 가서 올려다 봅니다.
  여름철이라 무성한 수풀로 '벌봉'의 형상을 헤아리기 어렵군요.
  그런데 "벌봉"에 대한 안내판의 설명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암문 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벌처럼 생겼다하여 벌봉이라 한다"
  '바위가 벌 모양'이라면 "벌봉"이 아니라 "벌바위 - 봉암 蜂岩"이라고 해야하지 않나요?
  그리고 "벌바위-봉암 蜂岩"이 있는 산봉우리는 "벌바위봉-봉암봉 蜂岩峰"이라 해야 하고...
  이곳에 축성한 城의 이름은 분명히 "봉암성 蜂岩城"이라고 하고 있으니
  안내판의 설명은 어딘가 이상한듯합니다. 나만 그런가? ㅎ


  [현위치]

  현위치를 확인하고...
  10여m 북쪽으로 내려 가면...


  ['벌봉' 앞 주등산로 삼거리]       12:49

  "벌봉앞" 이정표가 서있는 삼거리를 만나서 우측으로 진행합니다.


  ['제13암문' 조망]

  삼거리에서 우측을 바라보면 [제13암문]이 보입니다.


  ['제13암문']       12:50

  [제13암문]
  "봉암성"의 복쪽 끝에 있는 암문으로서 이제부터 이 암문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곤 "위례둘레길(샘재)→" 방향으로만 가면 길찾기는 끝!~
  "샘재"까지 6.8km라고 알려 줍니다.
  좌측 '고골'계곡으로 내려 가면 음식점들이 많은가 보군요. 계속 먹고 가라고 안내를 하는듯..


  ['제13암문']

  [제13암문]을 통과해 나가 5분정도 진행하면....


  ['가지울' 갈림목]        12:55

  "가지울 갈림목"을 지나고...
  마을 골짜기 모양이 "나뭇가지 모양"이라고 "가지울"이라 한다는 설명....
  100m쯤 더 내려 가면...


  ['법화골' 갈림목]        12:58

  "법화골 갈림목"을 지납니다.
  '북문'을 지날때 "법화골 전투"에 대해 이미 언급 했기에 생략하고....
  '병자호란' 때엔 "누루하찌"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우리나라로 쳐들어 온게 아니고
  자기 매부인 "양고리"등의 장수들을 시켜 침공한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양고리"가 이곳 "법화골"에서 죽는 바람에 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법화암"이라는
  암자를 지은데서 지명의 유래가 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여기서 4분 정도 다시 내려 가면.... 


  ['제2토루' 갈림목]       1:02
 
  "제2토루" 갈림목을 지나고....



  ['토루']

  등산로는 매우 좋습니다.
  "토루"에 대해선 안내판을 참고 하시고...


  ['토성']

  "봉암성" 밖에서 "봉암성"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완만하고 다니기 쉽군요.
  그래서 "토루" "토성"등 외곽 방어시설을 城밖까지 설치를 해 놨었군요.
  여하튼 이 지역이 "남한산성"의 최대 취약지역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바람재']         1:11

  산행길도 좋고 이정표와 안내판이 잘 설치되 있습니다.
  "바람재"에 바람은 별루였습니다...ㅎ


  [' 전망바위' 갈림목]       1:13

  "전망바위 갈림목"을 만나는데....
  "전망바위" 까지 0.1km라고 해서 다녀 오기로 합니다.
  실제로는 50m도 않되는 가까운 곳에 "전망바위"가 있었으니 다녀 가시길...


  [전망바위]

  "전망바위"는 이런 모양을 하고 있으며...


  ['검단산-고추봉-용마산' 조망]

  건너편 "검단산-고추봉(두리봉)-용마산"이 조망되었습니다.
  아래 계곡은 '하남시 산곡동'으로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습니다.


  ['제1토루' 갈림목]      1:16

  "전망바위"에서 되돌아 나와 잠시 진행하면 [제1토루]를 지나고..
  다시 6분 정도 숲길을 눌루날라 진행하면...


  ['상사창동' 갈림목]       1:22

  "상사창동 갈림목"을 지나 갑니다.
  앞에서도 언급 했드시 계속 "위례둘레길(샘재)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사창동 司倉洞"은 "국가 창고"가 있던 마을이라고 하고...
  '사창동'을 단순 발음으로만 하면 동네 이름으로는 적합치 않은듯 합니다만...
  본뜻이 "국가 창고"라고하니 그냥 넘어 갑니다. '화천군'에 '사창리'라고 있죠?
  그곳도 같은 의미


  ['갈라진 이빨바위']        1:24

  이름 붙이기 나름....
  '갈라진 이빨'이라고 하는 이빨은 난생 처음 봅니다.
  실제로 '갈라진 이빨' 보신분 계세요?  부셔지거나 깨진 이빨이라면 몰라도...


  ['새바위-개구리바위' 갈림길]        1:25

  '갈라진 이빨'을 지나자마자 친절한 안내판이 있는 갈림길이 나옵니다.
  좌측길로 가면 "개구리바위"를 볼수 있고, 우측길로 가면 "새바위"를 볼수 있답니다.
  어느 길로 가나 다시 만나더군요. 그러니 선택은 자기 마음대로 하면되는데...
  좌측길은 능선길이고, 우측길은 산옆구리를 돌아가는 일반등산로 였습니다.


  [새바위]        1:27

  [새바위]

  지난번 "금암산 정상" 오르는 곳에도 "아기새와 어미새 바위"가 있었죠?
  여기는 "참새 모양 바위"인듯... 병아리를 닮았나?


  ['새바위' 아래]        1:29

  "새바위 아래 갈림목"을 지나면...


  ['새바위'-'개구리바위' 갈림길]        1:32

  "새바위"가 있는 산옆구리길과 "개구리바위"가 있는 능선길이 다시 만나는 곳을 지나고...
  후답자들께선 "새바위"는 여기서 봤으니 "개구리바위"로 가 보세요~ㅎ
  그리고 사진 찍어서 여기 "홍어와 무인도"에도 올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ㅎ


  [ 위례둘레길]

  길찾기는 '식은 죽 먹기' 입니다.  
  리본도 100M간격으로 메달려 있고, 이정표도 필요한 곳에 반드시 있더군요.
  몇군데 빼고...ㅎㅎ


  ['하사창동' 갈림목]        1:42

  "샘재 방향"으로만 진행하면 됩니다.


  [이정표 없는 갈림길]       1:50

  그런데 이정표 없는 갈림길이 나옵니다. ㅎ
  좌측 넓고 선명한 길로 가면 되겠습니다.


  [내림길]

  넓고 선명한 길만 따라 가면 됩니다.
  잠시 내려 가면...


  ['막은데미고개']        1:51

  "막은데미고개"를 지나 갑니다.
  지명의 유래는 안내판을 참고 하시고...


  [오름길]

  "막은데미고개"에서 3분 정도 완만한 오름길을 오르면...


  [송전탑]        1:58

  송전탑을 지나고...


  [쉼터]        1:59~2:10

  쉼터가 있는 조그만 봉우리에 오릅니다.
  여기서 10여분 휴식을 취하며, 점심을 먹고...


  [송전탑]      2:13

  다시 송전탑 하나를 더 지나 조그만 봉우리로 올라 가면...


  ['243.8m봉' 정상 쉼터]      2:15

  "243.8m봉"에 오릅니다.
  특별한건 없어서 그냥 통과하고...

 
  [내림길]

  내림길을 8분여 내려 가면...


  ['사미고개']       2:21~2:24

  제법 모양이 있는 "사미고개"를 만납니다.


  ['사미고개']

  "사미고개"는 좌측 '하사창동'과 우측 '하산곡동'을 잇는 고개라고 하며
  "객산"과 "남한산성"을 잇는 능선에서 가장 낮은 곳이랍니다.


  ['골말' 방향]

  "사미고개"에서 좌측 "하사창동-골말" 방향을 바라보고...


  ['산곡초등학교' 방향]

  "사미고개"에서 우측 "하산곡동"에 있다는 "산곡초등학교" 방향도 바라보고


  [묘지]        2:25

  "사미고개"에서 직진해서 50m정도 올라 가면 묘지를 만나는데
  조망이 트이는 곳입니다.


  [지나온 길 조망]

  "남한산" "봉암성"에서부터 이어지는 능선길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이런 곳에서 조망을 놓치면 않되겠지요?


  ['북문' 방향 조망]

  서쪽으로 방향을 약간 더 바꾸면
  "남한산성 연주봉"도 조망됩니다.
  "연주봉-북문-벌봉"으로 이어지는 남한산성 앞 계곡이 "고골-법화골"이란게 실감나고


  ['사미고개 위' 갈림목]

  묘지를 지나면 "사미고개 위 갈림목"을 지나며...


  ['객산' 오름길]

  10여분 완만한 오름길을 오르면...


  ['객산' 정상부]

  "객산" 정상이 보입니다.


  ['객산' 정상]       2:40~2:49

  "객산 客山 292.1m"
  국토지리원 지도에는 292.1m 높이로 나오며 정상 삼각점 표시에도 292.1m로 표기되 있는데
  안내판에는 301m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지명의 유래는 안내판을 참고 하시고...
  조망이 좋은 "객산"이었습니다.
  동서남북 조망을 하면...


  ['골말' 조망]

  먼저 북서쪽 산 애래를 조망하면 '하남시 교산동' 부근이 가까이 조망됩니다.


  ['이성산' 방향 조망]

  머리를 들어 북서쪽을 바라보면...
  [1부]에서 출발했던 "덕풍동-이성산"이 건너편에 보이며 
  그 사이에 "중부고속도로"와 "서울외곽고속도로"가 분기하는 [하남 J.C]가  보입니다.
  특별한것은 그 뒤로 "북한산 백운대-인수봉"과 "도봉산".."수락산-불암산"까지 조망되는군요


  ['하남시' 방향 조망]

  북쪽으로는 "하남시"가 펼쳐지며...
  바로 앞에 진행해야할 "산불감시초소봉-매봉-샘재" 가는 능선이 보입니다.


  ['검담산' 조망]

  동쪽으로는 "검단산"이 계속 따라 다니고...


  [내림길]

  "객산" 정상에서 우측으로 내려 가야하니 길조심해야 하겠더군요
  잠시 내려 가면...


  ['객산' 갈림목]      2:53

  "객산 갈림목"을 만나는데 좌측으로 90도 꺽어 내려 갑니다.


  [내림길]

  로프가 쳐진 내림길을 3분여 내려 가면...


  ['선법사' 갈림목]       2:56

  "선법사 갈림목"을 지나고...


  [소나무 숲길]

  소나무 숲길을 4분여 진행하면...


  [소나무숲 전망대]       3:00~3:15

  "소나무숲"이라는 안내판이 있는 곳에 평상이 있는데 조망소였습니다.
  여기서 조망을 하며 5분여 휴식을 취하고...


  ['예봉산' 조망]

  "팔당대교"와 "예봉산-적갑산"이 조망됩니다. 아름답습니다.
  "하남"이나 "강남"은 같은 뜻이죠?
  "河南" "江南"이니 의미는 같습니다. 그런데 땅값은 완전 천양지차? ㅎㅎ

 
  [주변 지리]

  이 주변 지리를 구글어스를 이용하여 일목요연하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언급되 있는 산들은 모두 답사한적이 있으며, 모두 산행기가 있습니다.


  [소나무 숲길]

  조망과 휴식을 취하고 5분 정도 소나무 숲길을 거닐면....


  ['마루공원' 갈림목]       3:20

  "마루공원 갈림목"을 지나는데
  우측으로 내려 가면 가까운 곳에 "마루공원"과 "등기소"가 있답니다.
  그러니까 "하남시"의 중심부로 내려 가고 있는 것입니다.


  [거북바위]       3:22

  '거북이'인지...'거북이' 두마리가 짝짓기를 하는 것인지...
  여튼 감상은 쟈유....ㅎ


  ['안샘재' 갈림목]        3:26

  "안샘재 갈림목"을 지나는데 "샘재"가 다가 오고 있다는 것을 감지 할수 있고..
  조금 올라 가면...


  ['184.3m봉'-산불감시초소봉]        3:28~3:32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184.3m봉"에 오릅니다.
  이 봉우리도 조망이 좋았습니다.
  동서남북을 조망하면...


  ['검담산' 조망]

  먼저 동쪽에는 계속 "검단산"이 모양새를 바꾸며 따라 다니고...


  ['은고개' 조망]

  남동쪽으로는 "검단지맥"이 지나는 "은고개"가 조망됩니다.
  "은고개"가 '하남시'와 '광주시'의 경계가 되겠습니다.
  '하남시 산곡동' 가운데로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습니다.


  [뒤돌아 본 '객산']

  뒤돌아 남쪽을 보니 지나온 "객산"이 머리를 삐쭉 내밀고 있고...


  ['연주봉-금암산' 조망]

  남서쪽으로는 지금까지 수없이 언급했던 "연주봉"과 "금암산"이 누워있고


  ['제2롯데월드' 조망]

  서쪽으로는 공사중인 "제2롯데월드"가 조망됩니다.

 
  [숲길]

  3분 정도 고도를 조금씩 낮추며 내려 가면...


  ['바깥샘재' 갈림목]       3:35

  "바깥샘재 갈림목"을 지나고...
  다시 4분 정도 진행하면...


  ['매봉' 앞]        3:39

  "매봉 앞"이라는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매봉"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어서 "매봉"을 올랐다가 갑니다.
  그리고 "매봉"에서 좌측길로 내려 가면 이길과 다시 합류하더군요


  ['매봉' 정상]       3:41

  "매봉 128.1m"
  보시는바와 같이 "매봉"은 산봉우리라고 할수 없을 정도이고
  잡풀을 헤치고 삼각점을 간신히 찾아 촬영했습니다.
  국토지리원 지도에는 "쥐봉"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숲길]

  "매봉"을 내려가 다시 일반등산로와 합류하여 잠시 진행하면...


  ['샘재' 갈림목]        3:45

  '중부고속도로'의 굉음이 소란스런 곳에 도착하면
  좌측으로 내려 가라는 "샘재 갈림목"을 지납니다.


  [계단]        3:47

  그러면 '중부고속도로'가 앞을 가로 막으며 계단이 좌측으로 길안내를 합니다.


  ['중부고속도로'와 '샘재']

  등산로 출입구가 있는 "샘재"에 도착했습니다.
  '중부고속도로'가 8차선으로 "샘재" 위를 질주하고 있고...


  ['이성산'과 '덕풍동' 조망]

  [1부] 출발지였던 "덕풍1동"의 아파트들이 보이며
  "이성산성-이성산"도 가까이 조망됩니다.
  '중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 휴게소'도 앞에 보이는군요.


  ['샘재' 들날머리]     3:49

  "샘재 날머리"에 도착하니 "여기서부터는 시청 가는 길"이라고 안내 합니다.


  ['중부고속도로' 굴다리 통과]

  '중부고속도로 굴다리'를 통과해 갑니다.


  ['43번국도' 삼거리 가는 길]

  [43번국도]가 지나는 삼거리로 나가면...


  [삼거리-버스정류장]       3:56

  삼거리 건너편엔 "마방집"이라는 음식점이 있고 
  버스정류장은 길건너 우측에 [마방집.동경주]라는 정류장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13번시내버스]를 타고 "천호역"으로 가야 했는데 먼저 오는 [16번버스]를 탓더니
  '하남시' 아파트단지라는 단지는 다 들리며 "천호역"으로 갔습니다.
  후답자들은 반드시 [13번] 또는 [13-1번] 버스를 타시기 바람니다.

    
  [구글어스]

  1636년 12월 겨울
  이 남한산성에는 '인조'라는 쪼다리 임금이 있었고,
  체찰사로서 난국의 해결을 시간에 맡기는 양다리의 명수 영의정 '김류'가 있었고,
  의로움과 충성심으로 절대 굴복은 없다고~
  오로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  예조판서 '김상헌'이 있었고,
  매국의 오명을 뒤집어 쓰더라도 임금이 살길은 화친이라고
  말이 화친이지 실제는 항복이라는 말을 비틀어 화친이라고 말 하는 
  이조판서 '최명길'이 있었습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옥신각신 말싸움만 하다가 앞에 보이는 남한산성 西門을 통해 '삼전도'로 내려가 항복을 하며
  그들은 결국 대한민국 역사에 도리킬수 없는 오점을 남기며 
  얼마나 더 오래 살지도 모를 목숨을 부지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저의 학교 선배 '김훈'의 역사소설 '남한산성'에서 인용합니다.
    (이조판서)최명길이 말했다.
      "제발 예판(예조판서)은 길, 길 하지 마시오. 
       길이란 땅바닥에 있는 것이오. 가면 길이고 
       가지 않으면 땅바닥인 것이오." 
    (예조판서)김상헌이 목청을 높였다.
       "내 말이 그 말이오. 갈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니란 말이오"
  항복을 하자는 '이조판서 최명길'과 끝까지 싸우자는 '예조판서 김상헌'이
 옥신각신하는 장면입니다.
  "싸우고 지키지 않으면 화친할 길은 마침내 없다"며 斥和論을 주장한 예조판서 '김상헌'과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라며 主和論을 내세운 이조판서 '최명길'.
  여러분은 누구의 손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했던 '예판 김상헌'은 '소현세자'와 함께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가 포로로 잡혀 가며 지은 유명한 詩가 있지요?

          가노라 三角山아 다시 보쟈 漢江水야 
          古國山川을 떠나고쟈 하랴마는 
          時節이 하 殊常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항복하자고 주장했던 '이조판서 최명길'은 한양에 살아 남았습니다.
  후에 '최명길'이 지은 시도 제법 유명합니다. 후회의 시이죠
  상황 끝난후 하는 후회의 글이야 저도 쓸수 있습죠. ㅎㅎ
  그래도 후회의 시는 한수 썻군요.

           鼓角喧空海接天(고각훤공해접천) 
           五千兵甲載樓船(오천병갑재루선) 
           山城不死皆臣罪(산성불사개신죄) 
           泣向春風拜杜鵑(읍향춘풍배두견) 
           고각소리는 공중을 흔들고 바다물결은 하늘에 닿았는데
           오천여 甲兵을 樓船에 싣는구나.
           남한산성에서 죽지 못한 것이 모두 신하의 허물이니
           울면서 봄바람을 향하여 두견새에 절하노라


  [고도표]

  [1부 코스]의 거리가 "10.4km"였으며, [2부코스]는 "10.7km"였습니다. 합해서 "21.1km"
  오늘 걸린 시간은 4시간 20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여기클릭


     "남한산성도립공원 하남위례둘레길"
  "이성산-금암산-연주봉-남한산-벌봉-객산"산행기 
     덕풍골-사리고개-이성산-향여교개-금암산-연주봉-남한산성북문-
     봉암성-벌봉-막은데미고개-사미고개-객산-매봉-샘재
    "하남위례둘레길을 찾아서" 
        '병자호란'의 아픈 역사가 남아 있는 "법화골"
        그 "법화골"을 에워싸고 있는 '하남'의 산줄기를 찾아 갑니다.

      -  - - 산행기 1부 - - -


  ['위례둘레길' 위치 구글어스]

  '경기도 하남시 덕풍동'에 있는 "덕풍1동주민센타"에서 출발하여 
  "이성산-금암산"을 경유하여 "남한산성 연주봉옹성-북문"을 오르고
  "봉암성"을 거쳐 "벌봉-객산-매봉"이 있는 산줄기로 내려가 
  '하남시 천현동'에 있는 "샘재"에서 산행을 마치는 코스로 갑니다.


  [천호역 6번 출구]

  2014년 8월 15일 (금) 맑음 연무 
  지하철을 타고 "천호역 6번 출구"로 나가 버스정류장에서 [112-5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남시 덕풍1동 주민센타 앞-덕풍쌍용아파트' 정류장으로 갑니다.


  ['덕풍1동주민센타'-'덕풍쌍룡아파트'앞]      9:40~9:47

  "하남시 덕풍동 주민센타-덕풍쌍용아파트 앞" 버스 정류장에 내려
  간단하게 산행 준비를 하고 출발합니다.
  진행 방향으로 150m쯤 가면....


  [삼거리]

  삼거리를 만나는데 좌측 길로 진행합니다.
  5~60m쯤 들어 가면...


  [성민교회 앞]      9:50

  "성민교회"를 만나며, 앞에는 "중부고속도로"와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만나고 헤어지는
  "하남 J.C."의 날개부분 고속도로의 굴다리가 있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처음으로 "위례둘레길 이정표"가 산객들을 반깁니다.
  "덕풍배드민트장 방향"으로 5분정도 골목길을 올라 가면...


  ['덕풍배드민튼장' 앞]      9:55

  "덕풍배드민튼장 앞" 이정표가 우측으로 길안내를 하는 곳을 지나 갑니다.
  좌측엔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습니다.


  [덕풍배드민튼장]

  "덕풍동배드민튼장" 안으로 들어가 우측 정자가 있는 곳으로 가면...

 
  ['배드민튼장' 뒷문]                               [산길]

  "배드민튼장 뒷문"이 나오며, 뒷문으로 나가 산길을 따라 좌측으로 진행하면
  오늘 길찾기는 끝~  ㅎ


  [배드민튼장갈림목]       10:01

  뒷문으로 나가 잠시 진행하면 삼거리를 만나는데 "배드민튼장 갈림목"이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남한산성"까지 이렇게 넓고 선명한 등산로가 이어집니다.


  [숲길]

  숲길을 3분 정도 진행하면....


  [덕풍골 쉼터]        10:04

  "덕풍골쉼터"를 만나는데 주민들이 운동하러 많이 나와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이 산봉우리를 "덕풍산"이라고 부른다는군요.
  여기엔 이정표가 있으니 이정표 앞으로 가서 "이성산성 방향"으로 직진하면 되겠습니다.


  [내림길]

  "덕풍골 쉼터"에서 숲길을 잠시 내려 가면...


  [육교 건설중]      10:10

  "사리고개"
  '중부고속도로'와 '서울외곽고속도로'가 만나고 헤어지는 "하남 JC"에
  육교를 건설중에 있습니다. 9월중에 완공 된다고...
  이곳이 예전엔 "사리고개"라고 하는 곳이었답니다.
  이 주변 지리를 확실히 알아보기 위해 다음 사진을 보면...


  [주변 지리]

  "덕풍1동주민센타" 버스정류장에서 "사리고개"를 지나 "이성산"으로 가는 길을
  '네이버 지도'로 보고 있습니다.
  이곳이 어디인지 이제 확실히 이해가 되는지요. ㅎ


  [중부고속도로 횡단하는 방법]

  육교가 아직 완공되지 않아서 고속도로 굴다리를 이용해야 합니다.
  굴다리를 통과해 건너편 "이성산성 입구"로 가면 되겠습니다.


  ['이성산성' 가는 길]       10:17

  고속도로를 통과하면 "이성산성 가는 길 입구"가 나타납니다.
  이곳이 "사리고개"였다는 안내판을 읽어 보고 계단을 잠시 오르면...


  [사리고개 석불 앞]

  건설중인 육교를 만나는 곳을 통과합니다.
  9월 이후에 가시는 분들은 편하게 고속도로를 건너 "이성산성"으로 갈수 있겠군요.
  등산 다니는 산객들이 편한게 좋은것만은 아니겠지만...
  건강이나 체력이 약하신 분들에겐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건설중인 '사리고개 육교']

  마무리 작업 중인 육교와 "하남JC"를 조망하고 우측을 보면...


  [사리고개 석불]

  "사리고개 석불"을 모시는 곳이 있습니다.
  슬쩍 들여다 보고 계단을 조금 올라 가면...


  [갈림길]       10:23

  갈림길을 만나는데 이정표가 보이지 않아서 두리번 거렸는데
  우측 나무에 "둘레길" 안나퍈이 걸려 있더군요.

 
  ['152.9m봉' 오름길]]

  7분 정도 완만한 오름길을 오르면...


  ['152.9m봉' 정상]       10:30

  삼각점이 있는 "152.9m봉"에 오릅니다.


  [숲길]

  "152.9m봉"을 내려가 6분여 숲길을 진행하면...


  [거북바위]       10:36

  "거북바위"라고 알리는 바위를 지나고...
  '거북이'를 닮았는지 '강아지'를 닮았는지 '돌고래'를 닮았는지
  각자 보이는대로 감상하면 되겠고...


  [약수터 갈림목]      10:38

  바로 돌탑 두개가 있는  "약수터갈림목"이라는 곳을 지나 올라 갑니다.
  앞에 보이는 둔덕이 "이성산성 동문"이 있었던 곳이랍니다.


  [이성산성 동문지]

  이제 "이성산성 二聖山城" 안으로 들어 갑니다.
  위에 보이는 소나무가 있는 곳으로 올라 가면...


  [이성산성 동문지 위]      10:40~10:48

  쉼터가 있고 "이성산성 동문지" 안내판도 있더군요.
  이곳에서 조망과 휴식을 8분 정도 합니다.


  ['이성산성 동문지'에서 조망]

  좌측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하남 만남의 광장 휴게소"도 보입니다.
  앞에는 '하남시 춘궁동 천현동 교산동'등이 조망되며, 그 뒤로 오늘 하산 할때 지나갈
  "객산"과 "매봉"의 산줄기가 보입니다.
  그 뒤로는 '하남의 검단산"이 연무 속에 솟아있습니다.


  [ 이성산성]      10:48

  "二聖山城"은 광주시 향토유적 제1호라고 하는군요.
  '이성산성' 안으로 들어 갑니다.
  잠시 가면...


  [이성산성 창고 건물지]      10:49~10:51

  옛날에 창고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장방형 건물지"를 지나고...


  [ '이성산' 정상 가는 길]

  "이성산 정상" 방향으로 올라 갑니다.


  [오름길]

  4분 정도 오르면...


  [이성산 정상]       10:55

  "이성산 二聖山  208.1m"
  정상석은 보이지 않았으며 산불감시초소만 정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다소 실망스런 "이성산 정상"이었습니다.
  '백제의 왕자' 두명이 이 산에서 거주하였다고 "二聖山"이라고 한다는 설이 있다는군요.
  저는 이제까지 백제의 왕자 중에 聖人이랄수 있는 왕자가 있었다는 얘기는 못들어 봤는데
  '강원도 정선 구절리'에 있는 "노추산 1,322m"에 가면 "이성대 二聖臺"라는 누각이 있지요.
  '공자님'과 '맹자님' 두 聖人을 흠모하여 모시는 곳이라 "二聖臺"라고 합니다.
  "노추산"이라는 이름도 "노 魯나라"의 "공자 孔子"와 "추 鄒나라"의 "맹자 孟子"에서 따왔다고
  이해가 가는 설명이 있었는데...
  그런데 이곳은 "백제의 왕자 두명"이 거주했다는 설로 "二聖山"이라 한다는 것은 설명이
  않되거나 부족한듯 합니다.


  [내림길]

  '이성산 정상'에서 잠시 내려 가면...


  [남문지 갈림목]       11:00

  "이성산성 남문지 갈림목"을 지나 갑니다.
  '이성산성'이 끝나고 성밖으로 나가는 곳인가 봅니다.
  좌측으로 내려 가면 "춘궁동 春宮洞"이랍니다.


  [내림길]

  4분 정도 내림길을 더 내려 가면...


  [동사지 갈림목]       11:04

  "동사지 갈림목"을 지나는데...
  "위례역사길"은 좌측으로 간다고 알리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위례둘레길"과 "위례역사길"이 있군요.


  ['향여고개'로 가는 길]

  "이성산"을 내려 가면 도로를 만나며 "향여고개"로 내려 갑니다.


  ['금암산' 방향 조망]

  "향여고개" 건너편에는 올라야 할 "금암산"의 전위봉이 보이고...


  [향여고개]

  "향여고개"에는 동물이동통로를 만들어 놨군요.
  이 도로는 '서울 잠실 올림픽공원'방향에서 '하남 춘궁동'방향으로 넘나드는 도로


  [향여고개]       11:11

  "향여고개"
  '이성산'과 '금암산'을 잇는 동물이동통로 위를 지나 갑니다.
  이 고개 근처에 옛날엔 '향교'가 있었다고 "향교고개"라고도 한답니다.
  여기서부터 "남한산성 가는 길"이 시작됩니다.


  [계단 오름길]

  계단을 잠시 오르면...


  [뒤돌아 본 '이성산']      11:13

  도로 절개지 상단부에 올라 뒤돌아 보면 "이성산 정상"이 조망됩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        11:13~11:25

  "향여고개" 위 조그만 봉우리에서 '피리 부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스스로 초보라고하는데 잘 부는지 못부는지는 모르겠고 여튼 한곡 들려 주어 들어며
  좀 쉬었다 갑니다.


  ['광암정수장' 갈림목]       11:29

  "광암정수장 갈림목"을 지나고...


  [숲길]

  5분 정도 숲길을 걸으면...


  [금암산 고분]        11:34

  "금암산 고분 金巖山 古墳"을 만납니다.
  신라시대 고분이라하며 이 근처에 이런 고분 29개가 있다고 합니다.

 
  ['180.8m봉' 가는 길]
 
  10여분 숲길을 진행하면...


  ['180.8m봉']       11:44

  "180.8m봉"에 오릅니다.
  조금 더 가면...


  ['서울외곽고속도 광암터널' 위]        11:45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지나는 "광암터널" 위를 지나 가고...
  자동차들의 질주하는 소음이 요란했습니다.


  [큰바위 얼굴]        11:46

  "큰바위얼굴"이라고 알리는 바위를 지나는데...
  저는 여러 각도에서 살펴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더군요. ㅎㅎ


  [덜미재]       11:50

  "덜미재"를 지나고...

 
  ['금암산' 가는 길]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은 "228,6m봉"과 "274.3m봉"을 10여분 지나가면


  ['금암산' 조망]        12:00

  "금암산 정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름길]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8분여 오르면...


  [어미새 아기새 바위]       12:08

  "어미새와 아기새 바위"가 있는 곳에 오릅니다.


  [어미새와 아기새 바위]

  "어미새와 아기새"를 닮았는지는 각자 자세히 감상하시고...


  [범바위]  

  "어미새와 아기새 바위"를 "범바위"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범을 닮아서 "범바위"라고 하는게 아니라 이 바위 아래 굴이 있는데 그 굴 속에서
  호랑이가 살았다고 "범바위"라고 한다는군요. ㅎ


  ['금암산' 오름길]

  10m정도를 올라 가면....


  ['금암산' 정상]       12:11~12:29

  "금암산 金岩山 321.2m" 정상에 올랐습니다.
  안내판에는 "금암산" 지명의 유래가 "바위가 많을 뿐 아니라 바위 색깔이 비단색을 띄고 있어
  '금암산'이라고 한다"라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설명입니다.
  "바위가 비단색을 띄어 금암산"이라고 했다면 한자로 "비단 금錦"을 사용하여
  "錦岩山"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이 산의 정식 이름은 "金岩山"이라고 공식적으로 표기하고 있으니 이상합니다.


  ['서하남IC'방향 조망]

  "금암산 정상"에서 조망을 합니다.
  먼저 북서쪽을 바라보면 바로 아래 "광암정수장"이 보이고 '외곽순환고속도로'의 
  "서하남I.C."가 보입니다.


  ['잠실'방향 조망]

  서쪽으로는 잠실이 펼쳐지며 건설 중인 "롯데제2월드"가 조망되는군요.


  ['연주봉' 조망]

  남쪽으로는 올라야 할 "남한산성"의 "연주봉옹성"이 있는 "연주봉"이 보이고...


  ['법화골'과 남한산성]

  동남쪽으로는 "법화골"이 '남한산성'과 '봉암성' '벌봉' 산줄기에 둘러 싸여 있습니다.


  ['흔들바위' 앞 쉼터]      12:30

  "금암산 정상" 아래에는 "흔들바위 앞 쉼터"가 있고...


  [흔들바위]

  "흔들바위" 근처로는 접근 할수가 없을 정도로 아랫쪽에 있었습니다.


  [암릉]

  "금암산" 정상부를 통과하여 내려 갑니다.


  [내림길]

  정상에서 7분여 내려 가면...


  [참샘골 갈림목]       12:36

  "참샘골 갈림목"을 지나고...
  다시 10여분 진행하면...


  [널문이 고개]      12:45

  "널문이 고개"를 지나 갑니다.


  [소나무숲]       12:49

  "소나무숲"이라는 봉우리를 넘어 가면...


  [소나무숲길]

  울창한 '리기다소나무숲'을 지나가고...

                
                   [ 연리목]       12:52

  실제 '연리목 連理木'인지 구별키 어려운 연리목을 지나면...


  [골프장 갈림목]

  "골프장 갈림목"이 나옵니다.
  골프장은 "캐슬렉스GC"인데 옛 이름은 "동서울CC"였습니다.
  여기서부터 "마천역"에서 이어지는 '남한산성 등산로'가 활기를 띄는 곳이더군요.


  [쉼터]      12:53~2:50

  "골프장 갈림목"에는 쉼터와 산상주점이 있는데


  [산에서 만난 사람들]

  이곳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다가 "옥천 출신 산객들"을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는데
  무려 2시간이 언제 지나 갔는지 모르게 지나 갔더라구요. ㅎㅎ
  여기서 2시간을 주저 앉는 바람에 이번 코스를 두번으로 나눠 진행 하게 되었습니다. ㅎ
  "홍어와 무인도"를 찾아 왔는지 모르겠군요.
  여튼 즐거웠습니다.

 
  [오름길]

  "골프장 갈림목"에서 '남한산성'으로 오르기 시작합니다.
  20여분 오름짓을 하면...


  [남한산성 가는 길]

  편안한 능선길을 지나고...


  [성불사 갈림목]       3:10

  "성불사 갈림목"을 통과합니다.
  2시간 이상 함께 시간을 보냈던 "옥천분들"은 여기서 하산하고...


  [뒤돌아 본 '금암산-이성산']

  지나온 산줄기를 뒤돌아 봅니다.
  '덕풍골'에서 '사리고개'를 지나 '이성산-금암산'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조망됩니다.

 
  ['연주봉' 가는 길]

  "연주봉"을 향해 완만한 산행로를 7분여 진행하면...


  ['연주봉' 오름길]

  "연주봉"으로 오르는 오름길이 나오며...
  잠시 오르면


  ['연주봉'-'서문' 갈림길]       3:17

  "연주봉 정상"으로 오르는 갈림길이 나옵니다.
  우측으로 가면 "남한산성 서문" 방향으로 가고
  좌측으로 오르면 "연주봉 정상"으로 갑니다.


  ['연주봉' 정상]        3:19

  "연주봉 정상"입니다.
  정상에는 보시는 바와 같이 "남한산성 연주봉 옹성"이 있습니다.


  ['연주봉옹성']

  "연주봉 옹성"은 본성인 "남한산성"의 외곽을 조망하며 방어를 하기 위한 곁가지 城입니다.
  성곽 좌측길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잠시 진행하며


  ['연주봉옹성']

  뒤돌아 보면 "연주봉 정상"에 있는 "옹성 망루"가 잘 보입니다.


  [남한산성]

  "옹성"이 "남한산성 본성"과 만나는 곳으로 갑니다.
  "옹성" 안으로 들어 가는 길은 "옹성" 끝 본성 옆에 뚫려있습니다.


  ['연주봉옹성 암문']        3:23

  암문을 통과하여 '남한산성' 안으로 들어 가고...


  ['연주봉옹성 암문' 앞]

  성 안으로 들어가 좌측 방향, 즉 동쪽 방향으로 진행 합니다.



  ['북문' 가는 길]

  "남한산성" 성곽을 따라 "북문"으로 갑니다.
  10여분 진행 하면...


  ['북장대터']       3:33

  "북장대"가 있었다는 북장대터를 지나고...


  ['동장대터'방향 조망]

  이어지는 "동장대터"가 있는 봉우리와 "봉암성" "벌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조망합니다
  5분 정도 더 진행하면...


  ['북문'-'전승문']      3:38

  "北門 - 全勝門"에 도착합니다.
  오늘 산행코스의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법화골"로 내려 가려면 이 북문을 이용하면 됩니다.


  ['북문'-'전승문']

  오늘 "벌봉-객산-매봉-샘재"까지 진행 하려고 했으나
  "캐슬랙스 GC 갈림목 쉼터"에서 2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너무 늦어 여기서 산행을 끝내고
  조속한 시일 내에 다시 이곳으로 와 나며지 구간을 진행 해야 겠습니다.

 
  ['종로'로 내려 가는 길]

  버스를 탈수 있는 '남한산성' "종로"로 내려 갑니다.
  10여분 내려 가면...


  [종로]       3:48

  '남한산성' 안에서 가장 번화한 "종로"에 도착합니다.
  버스 정류장은 이곳에 있습니다.


  [남한산성 행궁]

  새로 단장을 하고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남한산성'의 "행궁"이 "수어장대" 아래에 있습니다.
  행궁을 관람하는데 입장료 2,000원을 받아 생략하고


  [버스종점]       3:53

  버스 종점으로 가서  옆에 있는 음식점으로 갑니다.

 
  [식사와 한잔]    3:55~5:55

  다시 2시간 동안 한잔 하고 늦은 시간에 귀가 했습니다. ㅎㅎ


  [구글어스]

  "덕풍1동주민센타"에서 이곳 "남한산성 종로"까지 GPS로 측정한 거리는 10.4km였습니다.
  걸린 시간은 총6시간이었으나, 
  '캐슬랙스 골프장 갈림목 쉼터'에서의 2시간을 빼면 4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 - - 2부로 이어 집니다. - - -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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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마루' 5월 정기산행 南漢山城 둘러보기 남문-영춘정-수어장대-서문-연주봉옹성- 북장대터-북문-군포지-女墻-동장대터- 장경사-동문-남한산성역사관 산을 좋아 한다면서 산에 대해 말해 보라면 사실 할말이 별루입니다 산을 말하고 ...노래하고...음미하려 하지 말자 그저 열심히 다니다 또 그러다 보면 언제인가 나도 산을 말하고...노래하고...음미하는 때도 있겠지 바람따라 구름따라 세월따라 흘러 가는 산행길 [남한산성 안내도] "남한산성 南漢山城"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경기도남한산성도립공원'은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고 합니다.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남한산성'에서 맞으며 치욕의 역사를 쓴 곳이기도 하죠 [至和門 (南門) 앞] 2012년 5월 20일 (일) 맑음 고교 동기동창 12명이 의기투합하여 푸르런 5월을 맛보러 길을 나섯습니다. 이왕 가는 봄나들이니 그렇게 힘들지도 않고 느낄만한 것도 많은 '남한산성'으로 등산겸 나들이겸 겸사겸사 하루를 함께 즐기기로 뭉친것입니다. 자꾸 가는 세월을 탓하기만 할것이 아니라 이렇게 걸을수 있을 때를 잘 활용하자고..... 그런데 사진 찍는다니까 초장부터 너무 무게 잡지요? ㅎ ['지화문' 위에서 성문 밖 조망] '남한산성'에서 규모가 가장 큰 문이고, 현재까지 보존이 가장 잘되있다는 "지화문 至和門" 싸움 보다는 화합을 더 내세우는 의미 인듯한데, 사람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일반적으로 부르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일반명사 "남문 南門"으로 더 불리워지는 城門입니다. 그 城門에 올라 城밖을 내려다 봅니다. 예전엔 이곳으로 자동차가 다녔었는데, 지금은 옆에 터널을 뚫어 우회 시키고 이곳은 잘 가꾸어 공원화 하였는데 오래 전에 했다니 저도 오래 된 사람인가 봅니다. 城門이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도록 나무를 심어 가렸다는데 360년이 넘은 나무들이 그 생명력을 부지하는데 인간들의 도움을 받고 있어 지난 하세월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영춘정'으로 올라 가는 길] 지하철8호선 "남한산성입구역 1번출구"에서 만나 조금 올라 가 "상원초등학교" 버스 정류장에서 [9번시내버스]를 타고 남한산성 남문까지 올라 가 종주를 시작했으니 등산은 빼고 성곽둘레길을 종주 했으니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만하게 볼 코스는 아니었다는 것을 첨언해 둡니다. '南漢山城'은 복원이 잘되어 옛 본 모습보다 더 멋있어 졌답니다. 오늘 '남한산성 종주'에서 오르막이 가장 심한 구간을 올라 갑니다. 오르막 구간이라 해 봤자 몇백m이지만..... [영춘정] "영춘정 迎春亭"은 南門 아래에 있던것을 옮겨 온 것이라 합니다. 차갑고 어두운 겨울 같은 전쟁에서 어서 빨리 봄이 오기를 기대하는 곳이었을까 아마도 그들은 어서 빨리 봄이 오기를 학수고대 했을 것입니다. ['영춘정'에서 바라보는 '검단산'] '검단지맥'과 '성남市界'가 뻗어 가는 산줄기가 '검단산'으로 이어 지고 있습니다. [암문] '수어장대' 뒷쪽 성곽에는 '암문 暗門'이 있군요. 비밀통로였던 곳이죠? 남한산성에는 16개의 암문이 있다고 합니다. 현재 일반인들의 통행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城 안팎] 城안팎을 동시에 볼수 있는 곳이 많이 있었습니다. [守禦將臺] '수어장대'가 있는 산봉우리의 이름은 '남한산성'의 주봉인 "청량산 497.9m". 가장 높은 곳에 "수어장대 守禦將臺"가 자리잡고 '남한산성'을 호령하고 있습니다 '남한산성'에서 최고의 볼거리이기도 하지요. [守禦將臺 정문] '남한산성'을 대표하는 '守禦將臺'로 들어 가는 정문은 정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어 '옆문'처럼 느껴 졌습니다. [將臺] '南漢山城'에는 4개의 將臺, '東將臺' '南將臺' '北將臺' '西將臺'가 있었는데 그 중에 "서장대 西將臺""守禦將臺"이랍니다. 將臺는 요즘말로 최고사령관이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곳이라죠? [守禦將臺] 저는 처음에 '수어장대'는 '어御'를 사용하여 임금을 수호하는 '守御將臺'인줄 알았는데, '어 禦'를 쓰는군요. '어 禦'는 '수 守'와 같은 의미로 '수비하다' '방어하다'라는 뜻이죠. 겹겹이 수비한다는 뜻으로 '守禦'라고 한듯합니다. 에구~수많은 세월 동안 뭘 수비했는지 한탄만 나옵니다만, 사람들은 그날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즐거운 나들이를 하고 있습니다. 4개의 장대 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대라는데 '경기도유형문화재1호'랍니다. [守禦將臺 기념사진] 국민학교 때 소풍 와 보고 처음 와 본다는 분들....ㅎㅎ 오래 된 사람들. 요즘 초딩들은 외국으로 간다지요? 감회가 새롭습니다. [守禦將臺 앞마당] '守禦將臺'에서 山城 안이 훤히 내려다 보일줄 알았는데 자연보호로 울창해진 나무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無忘樓] [無忘樓 안내] [리승만대통령 행차 기념 식수비] '守禦將臺' 옆에는 전각이 하나 있는데 "무망루 無忘樓"라는 편액을 일반인들도 볼수 있게 전시 해 놓은 곳이었습니다. 내용은 윗 사진을 참고하시고... 그 옆에는 "리대통령행차기념식수-단기4286년9월6일"이라는 식수비가 세워져 있는데, 저에겐 아이로니컬한 느낌이 듭니다....... 왜냐구요? '인조'와 '리승만대통령'...공통점이 있는 분들이라서...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도망친 고려의 '고종'. 임진년에 쪽바리들의 침공에 한양과 백성을 버리고 저만 살겠다고 북으로 북으로 도망친 조선의 '선조' 북의 김일성이 쳐 내려온다고, 한강 철교를 폭파하고 또 백성과 서울을 버리고 남으로 남으로 도망친 '이승만' 독재정권. 병자년에 하필이면 얼마나 도망 갈 곳이 없었으면 여기 초라한 남한산성으로 도망친 조선의 쿠데타 정권 겁쟁이 '인조'. '리승만'은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는 '인조'가 하나의 위안이 되었을까.... 그래서 이곳을 방문하여 쪼다리 임금 '인조'를 추모하며 식수를 했을까.... [右翼門 (西門)] '수어장대'에서 성곽을 따라 잠시 진행하면 일반적으로 '西門'이라고 불리워지는 "우익문 右翼門"이 바로 나타납니다. [右翼門 (西門)] "우익문 右翼門 (西門)" '남한산성'의 "오른쪽 날개"에 해당하는 門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겠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서 치열하게 대립하는 '보수'와 '진보'를 칭하는 용어로 먼저 다가 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東門"의 본명은 당연히 "좌익문 左翼門"이었습니다. [右翼門 (西門)에서 城안으로 들어 가는 길] 1637년 1월 30일 쪼다리 겁쟁이 '인조'가 50여명의 쫄따구들을 데리고 삼전도로 나가 항복한 門이 "右翼門 (西門)"이라 행궁으로 통하는 길을 바라보며 그 옛날을 생각해 봤습니다. [右翼門 (西門)] 1636년12월 겨울 이 남한산성에는 '인조'라는 쪼다리 임금이 있었고, 체찰사로서 난국의 해결을 시간에 맡기는 양다리의 명수 영의정 '김류'가 있었고, 의로움과 충성심으로 절대 굴복은 없다고~ 오로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 예판 '김상헌'이 있었고, 매국의 오명을 뒤집어 쓰더라도 임금이 살길은 화친이라고 말이 화친이지 실제는 항복이라는 말을 비틀어 화친이라고 말 하는 이판 '최명길'이 있었습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옥신각신 말싸움만 하다가 바로 저 門을 통해 내려가 항복을 하며 그들은 결국 대한민국 역사에 도리킬수 없는 오점을 남기며 얼마나 더 오래 살지도 모를 목숨을 부지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仁祖實錄"에는 그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인조 15년, 1637년 1월 30일'의 "仁祖實錄"입니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성 밖에 와서 왕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왕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중략 *남염의(藍染衣) :일반 백성들이 입는 허름한 옷 「왕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서울 조망] "삼전도 三田渡" '인조'가 치욕의 "삼배구고두례 三拜九叩頭禮"를 한 "삼전도"가 보입니다. 첫번째 절 : 이마를 땅에 세번 대고, 두번째 절 : 이마를 땅에 세번 찧으며, 세번째 절 : 이마를 땅에 세번 박는 '三拜九叩頭禮'를 한 '인조' 피투성이가 된 마빡이지만, 청태종은 머리 박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소리가 날때까지 꼰아박아 실시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알아야 하겠습니까? 쉬~쉬 해야겠습니까. 지금 이 사진 속에 서울의 발전 된 모습이 보이십니까? 아니면 그날의 삼전도 굴욕이 보이십니까. 감상은 자유입니다...... [연주봉 옹성 암문] 저의 학교 선배 '김훈'의 역사소설 '남한산성'에서 인용합니다. (이조판서)최명길이 말했다. "제발 예판(예조판서)은 길, 길 하지 마시오. 길이란 땅바닥에 있는 것이오. 가면 길이고 가지 않으면 땅바닥인 것이오." (예조판서)김상헌이 목청을 높였다. "내 말이 그 말이오. 갈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니란 말이오" 일제침탈시대에 쪽바리들의 똥구멍을 빨며 목숨을 부지하며 富와 권력을 가졌던 친일파들 까지도 "그 때의 상황으로는 그럴수 밖에 없지 않았느냐?" 라고 옹호 해 주는 분들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치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운 분들은 어떻게 해석 해야 한답니까? 바보? 쪼다리? [연주봉 옹성] 조선왕조 왕들중 최고로 의심이 많았던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한양과 백성을 버리고 개망신 당해 가며 개피를 보며 북으로 북으로 도망을 가고...... 전란이 끝나고는 오로지 明나라에만 충성을 다해 왕권만 유지 하려한 '선조'. 당시 중국의 상황은 후금이 세력을 키워 明을 위협하고 있었는데도 .... 그래서 '광해군'은 양다리 외교를 펼쳐 '후금'과 '명나라'를 함께 아우러는 외교정책을 시행하며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수구꼴통들은 이러한 광해군의 외교정책을(물론 여러가지 다른 꼬투리가 많지만) 꼬투리로 잡아 쿠데타를 일으켜 불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세력들.. 이들은 오로지 明나라만 섬겼습니다. 그 결과가 '병자호란'인데... 후금의 '누루하찌'가 明을 초토화 시키며 靑나라를 세우는 시대가 도래하니 明나라에게만 외교를 고집했던 '인조'와 수구꼴통세력들은 하루 아침에 청태종으로부터 보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지요. 요즘도 대한민국 정부는 편향 외교라는 비판이 많이 있는데 '병자호란'을 교훈으로 삼아야겠습니다. [북문 가는 길] "병자호란' 당시 "청태종"이 "인조"에게 보낸 편지 전문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지모 있는 자가 지략을 다하고 용감한 자가 종군하게 하지 않고서 몸소 一戰을 담당하려 하느냐. 짐은 결코 힘의 강대함을 믿고 남을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도리어 약소한 국력으로 우리의 변경을 소란스럽게 하고, 우리의 영토 안에서 산삼을 캐고 사냥을 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짐의 백성으로서 도망자가 있으면 너희가 이를 받아들여 明나라에 바치고, 또 明나라 장수 두 사람이 짐에게 귀순코자 하여 짐의 군대가 그들을 맞이하러 그곳으로 갔을 때에도, 너희 군대가 총을 쏘며 이를 가로막아 싸운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가 섬으로 도망쳐 들어가 和親을 애걸했을 때, 글이 오고 간 상대는 그들이 아니고 누구였더냐. 짐의 아우나 조카가 너만 못하단 말인가. 몽골의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는데도 너는 여전히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들은 당당한 元나라 황제의 후예들인데 어찌 너만 못하랴! 元나라 때에는 너희 조선이 끊이지 않고 조공을 바쳤는데, 이제 와서 어찌 하여 하루아침에 이처럼 도도해졌느냐. 너희 조선은 遼·金·元 세 나라에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대대로 臣이라 일컬었지, 언제 北面하여 남을 섬기지 않고 스스로 편안히 지낸 적이 있었느냐. 정묘년의 치욕을 씻으려 했다면 어찌 하여 몸을 도사려 부녀자의 처소에 들어앉아 있느냐. 네가 비록 이 성 안에 몸을 숨기고 구차스레 살기를 원하지만 짐이 어찌 그대로 버려두겠는가. 짐의 나라 안팎의 여러 왕들과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의 칭호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네가 「이런 말을 우리나라 君臣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느냐」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대저 황제를 칭함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네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도우면 필부라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라도 외로운 필부가 될 것이다. 그러니 네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방자하고 망령된 것이다. 이제 짐이 大軍을 이끌고 와서 너희 팔도를 소탕할 것인데, 너희가 아버지로 섬기는 明나라가 장차 너희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를 두고 볼 것이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렸는데, 부모된 자가 어찌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들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억조중생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네가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분명하게 고하라. 崇德 2년 정월2일 [북장대터] "우익문(서문)"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성곽을 따라 조금가니 "북장대터 北將臺址"를 지나 갑니다. [북장대터 근처] 점심식사 시간이 되어 장소를 물색하던중 명당자리를 발견했습니다. [점심식사] 12명이 동시에 테이블에 앉아 함께 식사시간을 가질수 있는 명당자리는 '휘마루' 창립 이래 처음인듯 합니다.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얼마나 즐거웠는지는 알켜 줄수 없고 비밀입니다. ㅎ 궁금하면 다음에 나와 보세요~~ [전승문(북문) 가는 길] 점심식사를 끝내고 "北門"으로 향합니다. '남한산성'의 규모는 본성이 9.05km, 옹성이 2.71km로서 총 11.76km라고 합니다. 경기도의 3大 山城 중에 하나로 "북한산성" "문수산성"과 함께 한양을 수호하는 山城이었습니다. 지금은 관광지? ㅎ [전승문(북문)] "싸우고 지키지 않으면 화친할 길은 마침내 없다"며 斥和論을 주장한 예조판서 '김상헌'과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라며 主和論을 내세운 이조판서 '최명길'. 여러분은 누구의 손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양다리를 걸치겠습니까? 에휴~~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미리 대비를 잘 하지... "병자호란"을 초래한 실질적 원인은 사색당파 권력 쟁취싸움이 만들어 낸 부산물이라고 한마디로 짤라 말할수도 있습니다. 자폭한것이지요.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현재의 정치꾼들은 "병자호란"의 교훈을 잊지 마시길 [전승문(북문) "전승문(北門) 全勝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유일한 門입니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바위에 계란 던지기', 더더욱 적의 계락에 빠져 300명이 전멸하고 말았는데, 이를 "법화골전투"라 하고,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로 참패한 전투였습니다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그때의 참패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전승문 全勝門"이라 하였다는데.... [성곽길] 치욕의 세월을 알던 모르던 우리는 성곽순례를 계속합니다. 산행겸 산책겸 관광겸 겸사 겸사로 하루를 보내기엔 안성맞춤입니다. [뒤돌아 본 '수어장대'] 뒤돌아 보면 '남한산성'의 지형을 어림해 보며.... [제1 軍鋪址] [제2 軍鋪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초소"에 해당하는 "군포지 軍鋪址"를 지나 갑니다. [봉암성 蜂巖城] 앞에 城밖에 있는 城門은 "봉암성문 蜂巖城門"입니다. "蜂巖城"은 '남한산성'에 붙어 있는 城인데, '병자호란' 때에는 없던 城이랍니다. 병자호란때 청나라의 군대가 남한산성의 동쪽에 위치한 '벌봉'에서 남한산성을 엿보며 위협하므로 호란후 숙종 12년(1686) 이에 대한 대책으로 남한산성과 연결하여 추가로 쌓은 보조성곽이랍니다. 특이한것은 "봉암성"과 "남한산성"을 연결지어 문을 만들지 않아 '봉암성"에서 직접 "남한산성"으로 갈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봉암성"이 함락되면 "봉암성"만 버리기 위해서랍니다. [女墻] [성곽] 이쪽의 성곽은 개보수가 덜 이뤄졌군요. [東將臺터] [城廓] [暗門] 남한산성에는 4개의 대문과 16개의 暗門이 있다고 합니다. "북한산성"은 "남한산성"보다 규모가 큰데도 6개의 암문만 있는데 "남한산성"에는 암문이 훨신 많습니다. 이는 외부와 통하는 통로가 많아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군요. [성곽] "남한산성" 성곽종주를 우습게 보면 않됩니다. 거리도 거리이지만 오르내림도 심합니다. ['장경사' 앞] '장경사"라는 절간 앞까지 차량이 들어 오는군요. [장경사] "장경사 長慶寺" '남한산성'에는 원래 9개의 사찰이 있었다는데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 "국청사"가 복원되었답니다. '남한산성' 안에서는 "개원사"가 으뜸 사찰입니다. 이나저나 요즘 빡빡이들 왜 그래요? 완존히 개판 만들고 있으니... '병자호란'이 터지기 전 우리나라 조정 대신들의 당파 싸움 보는듯하니... 역사는 지나간 유물이 아니라 현재의 거울이라는 것을 알아야 발전이 있는데... 허기사 빡빡이들도 인간이고,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左翼門(東門) 가는 성곽] "장경사"에서 "左翼門(東門)"으로 가는 성곽길에서 내려다 보니 '광주'에서 산성 안으로 들어 가는 길이 보입니다. 그리고 '남한산성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이 城을 호령하듯 내려다 보고 가운데 복원된 행궁이 보이는군요. [東門에서 南門으로 가는 성곽길] 가운데 [342번지방도로]는 광주시에서 '남한산성'을 관통하여 '성남시'로 가는 도로입니다. 도로 건너편에 '지화문(남문)"으로 가는 성곽길과 산봉우리가 무지 힘드니 더 이상 종주를 하지 말고 뒷풀이하라고 알려 줍니다. ㅎㅎ [東門] '남한산성'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좌익문(동문)"입니다. [東門] "좌익문 左翼門 (東門)" [廣州로 통하는 길] "좌익문 左翼門 (東門)" 옆으로 광주와 성남을 잇는 [342번지방도로]가 분주한 차량들로 붐비고 있습니다. 힘도 들고...시간도 많이 되고해서 산행은 여기서 끝내고 뒷풀이하러 갑니다. [남한산성 역사관] '동문'에서 산성 안으로 조금 올라 가면 "남한산성 역사관"이 나옵니다. ['남한산성 역사관'에서 보이는 '서흔남 묘비'와 공적비] '남한산성 역사관' 앞 주차장 끝에 있는 허름한 묘비를 찾아 보고 가지 않으면 '남한산성'을 왔다가 갔다고 할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눈길 조차 주지 않는 묘비이지만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들에겐 아주 흥미진진한 "서흔남"이라는 사람의 묘비와 공덕비가 있는데... ['서흔남' 묘비와 공적비] [서흔남 묘비]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12월 14일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황급히 피난을 왔다는 것은 모두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인조'를 모시던 신하들은 하나 둘 흩어져 도망가 버리고, '인조'는 얼마 남지 않은 신하들과 함께 송파강을 겨우 건널 수 있었다고합니다. 강은 건넜으나 날은 어두워지고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흩날려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까지 올라 갈 일이 아득했답니다. 인조는 신하의 등에 번갈아 업혔으나 지친 신하들은 얼마 못 가서 주저 앉기를 거듭했다고합니다. 에구~~왕이나 신하나 모두 븅신들~ 더구나 남한산성으로 올라 가는 산길은 험했고, 때마침 눈이 깊이 쌓여 걸어서 올라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 한 총각이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나무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고 하네요. '인조'는 그 총각에게 "나를 좀 업어서 성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고. 이에 그 총각은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더니, '인조'를 업어서 성까지 한숨에 모시고 갔답니다. 남한산성에 무사히 도착한 인조는 산성으로 들어올 때, 그 총각이 불편하게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은 것이 못내 궁금했다고합니다. 그래서 "왜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느냐."고 물었고. 이에 총각은 "당신은 피난민 같은데, 만약 신을 바로 신고 오르게 되면 눈 위에 발자국이 나서 적군에게 들키게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될까봐,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다."고 말했답니다. 인조는 그 총각이 너무나 신통하고 고마워서, "너의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하였답니다. 이에 총각은 인조가 입고 있던 곤룡포(袞龍袍)가 너무 좋아 보여서,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을 벗어 달라."고 하였답니다. '인조'는 흔쾌히 자신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그 총각에게 벗어주었다고합니다. 이렇게 '인조'를 업고 무사히 산성 안으로 피신시킨 총각이 바로 '서흔남'이라는 천민이었는데, '인조'는 그에게 정2품 '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의 지위를 내리며 생명의 은인으로 대우했답니다. [남한산성 역사관] [뒷풀이] '남한산성' 안에서 유명하다는 손두부집에서 얼큰하게 뒷풀이를 하고..... 버스를 타고 내려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 갔습니다. 다음 산행지는 고구려의 숨결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아차산성"이 있는 "아차산"과 "용마산"으로 갑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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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 - 나훈아
수리산 도립공원 산행기 명학역-안양청소년수련원-관모봉-태을봉- 슬기봉-수암봉갈림길-병목안골-창박골-안양중앙시장 修理山 京畿道立公園 경기도에는 세개의 도립공원이 있습니다 첫번째가 1971년에 지정된 "남한산성 도립공원"이고, 두번째가 2005년에 지정된 가평의 "연인산 도립공원"입니다. 그리고 지난 해에 세번째로 "修理山"이 경기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고교 교우회 경기 남부 지회 교우들과 오랜만에 함께 산행을 합니다 지난해에 이미 "修理山 從走 遊山記"를 쓰고 알려드렸기때문에 이번에는 간략하게 안내 하니 자세한 "修理山 從走 遊山記"는 지난해 산행기를 참고 하시기 바람니다. [수리산 산행로 구글어스] 오늘 산행은 "修理山 從走 山行"이 아니고 교우들과 친선 산행이어서 대부분의 산객들이 이용하는 코스를 따라 가 보겠습니다. "전철1호선 명학역 1번 출구"로 나와 육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내려와 좌측 시가지 도로를 직진하여 "안양시 만안 청소년 수련원"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관모봉"-"태을봉"-"작은 슬기봉"-"슬기봉"-"수암봉 갈림길"-"병목안골"- "최경환 성인 성지"-"창박골 삼거리"까지 입니다. [명학역] 오전 9시 50분 만남의 장소 "전철1호선 명학역 1번 출구"에서 9시 50분에 산행을 시작합니다 "울 鳴" "학 鶴"이니 이 지역은 鶴이 많이 사는 지역인가 봅니다. [안양청소년수련원 가는 길] 오늘은 지나번 "수리산 종주"가 아니므로 최단코스로 갑니다. '명학역'에서 나와 육교를 건너 육교 오른쪽으로 내려와 바로 좌측 큰골목으로 올라 갑니다. [수리산 관모봉] 명학역에서 서쪽으로 오늘 오를려고 하는 "수리산 관모봉"이 보입니다. 첫번째로 올라야 할 봉우리입니다. [안양시 만안 청소년 수련원] 10시 5분 '명학역'에서 약25분 정도 안양 도심 속을 걸어 가면 "안양시 만안 청소년 수련원"이 제법 큰 규모를 하고 나타납니다. [수리산 산행 개념도] 붉은 선이 오늘 산행을 한 코스 입니다. 수리산 종주를 하려면 "수암봉"까지 가야 합니다. [산행 들머리] 10시 6분 '안양시 만안 청소년 수련원' 정문 옆이 "수리산 관모봉" 들머리 입니다 [관모봉 오르는 등로] 修理山은 군포시 속달동(4.3㎢), 안양시 안양동(2.55㎢), 안산시 수암동(0.12㎢)에 걸쳐 있고 주말 기준으로 1일 1만4천명, 연간 140만명이 이용하는 도심속 녹색섬이라고 자랑합니다. 京畿道立公園으로 지정되어서 산을 공원으로 가꾸는데 관련 예산 약116억원이 앞으로 집중 투입된다고하니 몇년후에는 더 많은 산객들이 찾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안부 - 쉼터] 10시 11분 청소년 수련원 들머리에서 약 5분 정도 오르면 안부가 나오며 운동시설이 있는 쉼터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올라 갑니다. [돌탑] 안부에서 좌측 "관모산" 방향으로 조금 오르면 돌탑이 하나 있고... [관모봉 오르는 된비알] "관모봉"까지의 登路가 가장 된비알입니다. [관모봉 정상] 11시 정각 산행 들머리에서 약 50분 정도 오르면 "수리산"의 봉우리 중에 첫번째 봉우리인 "관모봉 冠帽峰 426m"정상이 나옵니다. 특히 여러 봉우리 중에서 조망이 가장 좋은 곳이라 생각 됩니다. 冠帽峰 정상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먼곳에서 보면 "관이나 모자"를 쓴 봉우리로 보여 글자 그대로 冠帽峰이라고 한답니다. [관모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산본', '모락산', '광교산'] 바로 앞에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수리터널'을 뚫고 나와, 산본 인터체인지를 만들고, 가운데 '모락산', 그 뒤로 수원의 '광교산"이 보입니다. [관모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안양', '삼성산', '관악산'] 북동쪽으로는 '안양시가지'와 그 뒤로 '삼성산', '관악산'이 위용을 자랑합니다. [관모봉 정상에서 바라 보는 가야할 '태을봉'] 서쪽으로는 앞으로 가야할 "태을봉"이 보입니다. 수리산에 가장 높은 봉우리가 "태을봉"입니다. ['태을봉' 가는 길] 완만한 능선을 따라 "태을봉"으로 갑니다 "관모봉"과 "태을봉" 사이에는 두군데 안부가 있는데 "노랑바위" 안부가 눈길을 끕니다 그래서 "노랑바위"에 대해 조사를 해 봤습니다. "노랑바위"는 이곳에서 산본쪽으로 내려가는 길 중턱에 산신제당 위쪽에 있는 바위로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더군요 옛날에 어느 임금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그에게는 불혹이 넘도록 왕통을 이를 왕자가 없었답니다 지극 정성으로 기원하여 드디어 하늘이 감복했는지 기골이 장대한 왕자가 태어납니다. 왕자가 세 살이 되던 해 전란이 일어나자 궁궐을 떠나 강화도로 피난가기 위해 나룻배를 탔으나 심한 폭풍우를 만나 배가 난파하려는 순간 거북이 한 마리가 나타나 왕자를 구해 태우고 육지로 나와 은신처를 찾던 중에 이곳까지 다다라 관모봉 중턱까지 왔답니다. 거북이의 등에 업혀 며칠을 굶다보니 왕자의 몰골은 말이 아니어서 왕자에게 드릴 음식을 구하기 위해 거북이는 마을로 내려갔고, 거북이의 뜻을 모르는 왕자는 거북이가 자신을 버리고 가버린 것으로 오해하여 분한 마음과 배신감에 사로잡혀 바위를 힘껏 주먹으로 내리쳤다고 합니다.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위가 무너지면서 왕자를 덮쳤다는군요. 바위에 깔린 왕자는 노란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두었고, 마을로 내려간 거북이는 우박처럼 쏟아지는 바위를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그 후부터 왕자의 피가 흐른 이 바위를 ‘노랑바위’라 불렀고, 근처 광정마을에 안양군의 신도비가 세워진 바위를 ‘거북바위’라 불렀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습니다. [태을봉 정상] 11시 30분 "관모봉"에서 약20분 정도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면 '수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태을봉"에 오릅니다. [태을봉 정상에서 기념 사진] 489.2m높이 "태을봉 太乙峰" 옛 기록에는 '수리산'의 옛 이름이 "태을산 太乙山"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수리산'의 주봉인 "태을봉"을 하나의 독립된 산으로 "태을산"으로 불렀답니다. "太乙"의 의미는 동양사상에서 우주의 본체, 즉 천지만물의 출현및 성립의 근원을 뜻하며, 풍수지리에서는 큰독수리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 내리는 모습을 매우 귀한 지상으로 삼았다는데 그런 현상을 "천을봉", "태을봉"이라 한다고 합니다 [병풍바위 - 슬기봉 가는 길] '태을봉'에서 '슬기봉' 가는 길이 알바하기 쉬운 곳입니다. 왜냐하면 '슬기봉' 가는 길은 "병풍바위"를 직접 넘어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종주때 저도 계곡으로 내려가 알바를 했었습니다. ['병풍바위'에서 내려다 본 '외곽순환고속도로 수암터널'] 수리산 종주는 저 앞에 보이는 "수암봉"을 돌아 그 능선을 타고 내려 와야 합니다 오늘은 바로 앞 '외곽순환도로' 병목안골로 내려 갑니다. "수암봉" 밑에는 "수암터널"이고 이곳 아래에 있는 터널은 "수리터널"입니다. '수암터널'과 '수리터널' 사이에 있는 저 다리 이름이 "수리교"이며, "병목안골"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최경환 성인 고택과 묘지도 바로 아래 '병목안골' 마을에 있습니다. ['병풍바위'를 지나며 바라본 '軍레이다 기지-꼬깔봉'] '병풍바위'가 '슬기봉'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지나 가야 합니다. 그러나 제법 위험한 암릉구간이니 조심해야합니다. ['칼바위'를 지나며 바라본 '軍레이다기지-꼬깔봉'] '태을봉'에서 '수리봉'까지 능선에는 "병풍바위"와 "칼바위"라는 딸랑 두개의 바위가 있는데, "칼바위"를 지나 갑니다 약50분간의 점심식사 시간을 갖고..... [뒤돌아 본 '칼바위'] 12시 53분 "칼바위"는 지나와 뒤돌아 봐야 모양새를 알수 있습니다. 우회로도 있습니다만, 수리산의 명물이라니 직접 타고 가야합니다. [슬기봉 오르는 길] 다소 가파른 된비알을 조금 오릅니다. [작은 슬기봉 정상] 1시 12분 '수리산'에는 "슬기봉"과 "작은 슬기봉"이 있는데..... "슬기봉"은 군부대가 점령하고 있어 올라 갈수가 없어 "작은 슬기봉"을 그냥 "슬기봉"이라고 표기해 놨습니다. ['작은 슬기봉'에서 내려다 본 '산본'] 수리산의 모든 봉우리는 조망이 좋습니다. [슬기봉 정상] 1시 20분 '작은 슬기봉'에서 조금 더 가면 "슬기봉"이 나옵니다. "슬기봉" 정상은 군부대가 점령하고 있어 더 이상 올라 갈수 없고...... [슬기봉 우회 데크] 대신에 친절하게 우회 데크를 만들어 놨습니다. 이 우회 데크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아주 좋더군요 [슬기봉 우회 데크에서 바라 본 '軍레이다기지-꼬깔봉'] '軍레이다기지'가 있는 봉우리를 "꼬깔봉"이라고 하는데, 한남정맥이 지나가는 산봉우리입니다. ['수암봉' 가는 길] '슬기봉' 우회 데크를 내려와 조금 갑니다. ['수암봉' - ' 병목안골' 갈림길] 1시 38분 '슬기봉' 우회 데크를 돌아 내려 오면 軍道路가 나오며 도로를 따라 내려 오면 "수암봉 갈림길"이 나옵니다. "수암봉"은 좌측으로 가고 군사도로를 따라 내려 오면 "병목안골"입니다. ['병목안골'로 내려 가며 바라본 '태을봉'] '병목안골' 군사도로로 내려 오면 앞에 "태을봉"이 보입니다. [고교동기동창들] 서로들 아직 젊다고 하는데......젊어 보이나요? ㅎㅎ [병목안골] 2시 16분 외곽순환고속도로 "수리교" 밑이 "병목안골"입니다. [최경환 성인 고택] "병목안골"에는 '최경환 성인의 옛집이 있는데 현재는 '성지순례지'로 예배도 보는 다목적 가옥이더군요 [최경환 성인 묘소 올라 가는 길] 최경환 성인 고택 앞쪽으로 묘소가 잘 만들어져 성역화하고 있었습니다 최경환 신부는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때에 형장의 이슬로 순교한 순교자로, 한국 천주교 200 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에 성인 (聖人)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는군요 [최경환 성인 묘소] 골고다의 길을 연상케하는 최경환 신부의 묘소 오르는 길 [창박골 삼거리 - 산행 날머리] 2시 45분 '병목안골'에서 승용차를 얻어 타고 "창박골 삼거리"까지 내려 왔습니다. 그래도 약5시간이 걸린 산행이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자세한 "수리산 종주 산행기"는 지난번 산행기를 참고하세요 오늘은 간략 합니다 [안양 중앙시장 홍어집] 오늘의 하일라이트는 "안양 중앙시장" 안에 있는 홍어집에서 한잔 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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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산 도립공원 종주] 명학역-175m봉-관모봉-태을봉-병풍바위-칼바위- 429m봉-슬기봉-수암봉-335m군철문-병목안공원 修理山 京畿道立公園 경기도에는 세개의 도립공원이 있습니다 첫번째가 1971년에 지정된 "남한산성 도립공원"이고, 두번째가 2005년에 지정된 가평의 "연인산 도립공원"입니다. 그리고 금년에 세번째로 "修理山"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修理山이 京畿道立公園으로 지정되었다기에 그럴만한 값어치가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어 직접 찾아 보았습니다. 저와 함께 修理山으로 함께 가 볼까요? [修理山 京畿道立公園 종주 개념도] 修理山은 군포시 속달동(4.3㎢), 안양시 안양동(2.55㎢), 안산시 수암동(0.12㎢)에 걸쳐 있고 주말 기준으로 1일 1만4천명, 연간 140만명이 이용하는 도심속 녹색섬이라고 자랑합니다. 京畿道立公園으로 지정되어서 산을 공원으로 가꾸는데 관련 예산 약116억원이 앞으로 집중 투입된다고하니 몇년후에는 더 많은 산객들이 찾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修理山 京畿道立公園 종주 개념도]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수리산 종주 개념도를 보여 드림니다. 전철 1호선 "명학역"에서 바로 산행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관모봉, 태을봉, 슬기봉, 수암봉을 돌아 안양 "병목안골"로 내려오는 제법 긴 거리입니다. [명학역] 추석연휴에 산행을 못해, 10월 5일(월)에 짬을 내어 "명학역"으로 갔습니다 '명학'은 "울 鳴"에 "학 鶴"이니 "鶴이 소리내어 우는 곳"이라는 의미이겠죠 조금 늦은 오전 11시 40분에 명학역에 내렸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바로 걷기 시작합니다 산행 들머리를 찾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멀리서 산은 보이지만 어디로 들어 가야하는지는 잘 모르기에 가고 싶어도 산행 들머리를 몰라 못가시는 분들이 많으실겁니다 이제부터 저와 함께하면 그런 걱정은 완전히 없어 질 것입니다 [명학역 앞 도로] 명학역에서 서쪽문으로 나와, 수원방향으로 약150m정도 갑니다. 그러면 조금 넓은 도로와 만나는 삼거리가 나옵니다. [성결대 입구 사거리] 삼거리에서 우측을 보면 "성결대입구 사거리"가 바로 앞에 보입니다. 사거리 뒤로 오늘 오르고자 하는 "수리산"이 어서 오라고 반기며 손짓하고 있습니다. 이 "성결대입구 사거리"를 대각선으로 건너 갑니다. [산행 들머리 가는 길] [수원쪽 첫번째 골목] 성결대입구 사거리를 대각선으로 건너 "수원 방향"으로 약 300m쯤 가면,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우측으로 첫번째 골목이 나옵니다 이 골목 좌측 길건너에는 "OIL BANK 주유소"가 있습니다. [명학 아파트] [효행1로] 첫번째 골목으로 들어가 50m쯤 가면 "4층짜리 명학 아파트"가 나오며, 명학아파트에 "효행1로" 안내표지가 있는 우측 골목으로 들어 갑니다. 그러니까 '명학아파트'를 끼고 아파트 뒤로 돌아 가는 것입니다 [명학아파트 뒤 산행 들머리 철계단] 명학아파트 뒤에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은 "철제 사다리 계단"이 "수리산 종주 산행 들머리"가 되겠습니다. [산행 들머리] 철제 사다리 계단을 오르면 바로 수리산 등산로가 펼쳐집니다. 이제 설명을 들으니 길 찾기가 쉽지요? 설명 없이는 도져히 찾아 갈수 없지만....ㅎㅎ 도심 속에 수리산이 있기 때문에 수리산 산행 들머리는 무수히 많습니다. 그런데 왜 이곳을 특별히 산행 들머리로 하는지 궁금하신가요? "수리산 종주"를 하는 경우엔 이곳이 가장 동쪽 끝에 있으므로 이곳에서 출발하여야 종주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더 느낄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갈림길 - 175m봉 가는 길] 수리산의 산행로는 도심 속에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왕래로 등산로가 잘 나있습니다. 또한 사방이 도시이기 때문에 갈림길이 무척 많았습니다. 산행 들머리에서 "관모봉"까지는 갈림길에 유의 해야겠더군요. 사진에서 보이는 희미한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올라 가면 175m봉을 오르고 가는 길이며 직진을 하면 175m봉을 오르지 않고 바로 가는 길입니다. 두 길은 결국 다시 만납니다. 저는 종주를 하기 때문에 175m봉으로 좌측으로 올라 갑니다. [175m봉에서 바라 보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175m봉에 오르니 요란한 자동차 소리가 산을 진동 시키고 있습니다. 바로 옆에 "서울 외곽 순환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아래에 "산본 I.C."가 있는데 숲으로 잘 보이지 않습니다 좌측엔 "외곽순환고속도로"와 우측에는 "성결대학교 캠퍼스"를 양쪽에 두고 "관모봉"까지 올라 간다고 생각하면되겠습니다 [175m봉에서 바라보는 "태을봉"] "수리산"도 전체적으로 肉山이기때문에 숲이 울창하여 외부 조망이 쉽지 않습니다. 175m봉에서 처음으로 수리산의 "태을봉"이 조망되었습니다. 좌측에는 "산본 I.C."와 "수리터멀" 입구가 있습니다 [5번 송전철탑] 12시 30분에 "5번 송전철탑"을 지나 갑니다. 등로는 비교적 양호합니다 [두번째 갈림길] '5번송전철탑'을 지나면 두번째 갈림길이 나오는데 직진해야 합니다. 좌측으로 가면 산본으로 내려 가는 길이라고 하더군요. 추석명절을 바로 지난 월요일 오후여서 산객들이 많지않아 길 묻기가 어려웠습니다. 주말에 가면 아마도 엄청난 산객들로 붐빌것 같습니다. [관모 쉼터] 12시 40분에 "관모 쉼터"에 도착했으니, '명학역'에서 1시간 걸렸습니다. [관모 쉼터] [이정표] "관모 쉼터"는 이 산의 봉우리 이름이 "관모봉 冠帽峰"이기에 붙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부터는 이정표가 잘 설치되 있습니다. '수리약수터'는 산본신도시 방향에 있으며, 안양쪽 '수리약수터'도 있더군요. [관모봉 오르는 길] 제법 가파른 비알을 치고 오릅니다 [관모봉 정상부] 관모봉 정상부근에 오르면 암릉길이 시작됩니다. [관모봉 정상] 12시 50분에 "관모봉"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명학역에서 1시간 10분 걸렸습니다. 태극기가 인상적이었는데, 수리산의 봉우리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곳은 이곳 "관모봉" 뿐입니다 [관모봉 정상] 冠帽峰 정상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먼곳에서 보면 "관이나 모자"를 쓴 봉우리로 보여 글자 그대로 冠帽峰이라고 한답니다. [관모봉 정상석과 이정표] [관모봉 내력] 관모봉에 대해서는 사진 속의 설명을 참고 하시기 바람니다. [관모봉 정상에서 바라 보는 "山本과 軍浦"] "수리산"의 봉우리들 중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 이곳 "冠帽峰"이었습니다. 사방을 조망하겠습니다. 먼저 남쪽 방향에는 "山本과 軍浦"가 펼쳐지고..... [관모봉 정상에서 바라 보는 "山本과 모락산", 수원 광교산] 동남쪽으로는 "山本과 의왕시"가 펼쳐지며, 가운데 "모락산"이 의왕시를 지키며 우뚝 솟아 있습니다. 그리고 모락산 뒤로 "백운산"과 "광교산"이 "한남정맥" 산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관모봉 정상에서 바라 보는 "坪村"과 "청계산"] 동쪽으로는 "안양 坪村"이 화려하게 펼쳐지고 그 뒤로 멀리 "청계산"과 "우담산"이 보이며 그 사이에 "하우고개"가 보입니다. 우측 바로 앞에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산본인터체인지"가 보이며, 수리산 터널 속으로 들어 가고 있습니다. 외곽순환로 옆의 산줄기를 타고 올라 온것입니다. [관모봉 정상에서 바라 보는 "安陽과 삼성산,관악산"] 동북쪽으로는 "安陽市內"와 그 뒤로 "삼성산과 관악산"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장관입니다. 이렇게 조망이 좋을 줄은 미쳐 몰랐고, 관악산에선 이 산을 바라 보면서도 이 산이 무슨 산이지도 몰랐으니...... 이 사진을 보니 "수리산 관모봉"을 오르고 싶은 생각이 솟아나지 않나요? [관모봉 정상에서 바라 보는 "안양 병목안 청박골"] 북쪽으로는 안양시 "병목안" '청박골'의 아파트가 보입니다. 저 아파트가 있는 삼거리가 오늘 산행의 날머리가 되겠습니다. [관모봉 정상에서 바라 보는 "태을봉"] 서쪽으로는 가야할 "태을봉"이 보입니다. "태을봉"은 수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입니다만 완만한 경사여서 오르기 쉽습니다. "태을봉"으로 가는 첫번째 우측 봉우리가 "475m봉"입니다. [노랑바위 안부] "관모봉"과 "태을봉" 사이에는 두군데 안부가 있는데 "노랑바위" 안부가 눈길을 끕니다 그래서 "노랑바위"에 대해 조사를 해 봤습니다. "노랑바위"는 이곳에서 산본쪽으로 내려가는 길 중턱에 산신제당 위쪽에 있는 바위로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더군요 옛날에 어느 임금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그에게는 불혹이 넘도록 왕통을 이를 왕자가 없었답니다 지극 정성으로 기원하여 드디어 하늘이 감복했는지 기골이 장대한 왕자가 태어납니다. 왕자가 세 살이 되던 해 전란이 일어나자 궁궐을 떠나 강화도로 피난가기 위해 나룻배를 탔으나 심한 폭풍우를 만나 배가 난파하려는 순간 거북이 한 마리가 나타나 왕자를 구해 태우고 육지로 나와 은신처를 찾던 중에 이곳까지 다다라 관모봉 중턱까지 왔답니다. 거북이의 등에 업혀 며칠을 굶다보니 왕자의 몰골은 말이 아니어서 왕자에게 드릴 음식을 구하기 위해 거북이는 마을로 내려갔고, 거북이의 뜻을 모르는 왕자는 거북이가 자신을 버리고 가버린 것으로 오해하여 분한 마음과 배신감에 사로잡혀 바위를 힘껏 주먹으로 내리쳤다고 합니다.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위가 무너지면서 왕자를 덮쳤다는군요. 바위에 깔린 왕자는 노란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두었고, 마을로 내려간 거북이는 우박처럼 쏟아지는 바위를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그 후부터 왕자의 피가 흐른 이 바위를 ‘노랑바위’라 불렀고, 근처 광정마을에 안양군의 신도비가 세워진 바위를 ‘거북바위’라 불렀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습니다. [태을봉 오르는 길] '475m봉'을 지나 태을봉으로 오릅니다. 경사는 비교적 완만합니다. [太乙峰 정상] 드디어 하늘이 열리고 수리산의 최정상인 "太乙峰" 정상에 오릅니다. [太乙峰 정상] 太乙峰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으며, 월요일 오후인데도 제법 산객들이 보입니다. 1시 20분에 도착했으니, 명학역에서 1시간 40분이 걸렸습니다 [太乙峰 정상석] [太乙峰 설명] 太乙峰에 대해선 사진 안의 설명을 참고하시기 바람니다 [太乙峰 정상에서 바라 보는 "안양과 삼성산,관악산"] 太乙峰 정상에서의 조망은 "관모봉"보다는 못했습니다. 동북쪽으로 안양과 삼성산, 관악산이 보입니다. [太乙峰 정상에서 바라 보는 "서울 금천구" 방향] 북쪽으로는 서울 금천구 방향이 보입니다. [太乙峰 정상에서 바라 보는 "인천 송도" 방향] 북서쪽으로는 인천 송도신도시가 보입니다. [太乙峰 정상에서 바라 보는 줌인한 "인천 송도" 방향] 송도신도시는 물론 인천 앞 바다까지 잘 보이는군요 [太乙峰 정상에서 "슬기봉" 가는 길] 이런 유명 산에서도 오늘 알바를 했습니다. 여기 태을봉에서 슬기봉 가는 길에서 알바를 했으니 앞으로 가실 분들은 유의하시기 바람니다. 태을봉 정상에서 슬기봉으로 가려면 서쪽으로 가야 합니다. 사진의 우측입니다. [병풍바위] 太乙峰 정상에서 조금 가면 곧 바로 "병풍바위"가 나옵니다. 특별히 병풍처럼 생겼다고는 느껴지지않는 바위입니다만, 육산인 수리산에서 이런 바위는 흔치 않기 때문에 병풍바위란 이름이 붙여졌나봅니다 [병풍바위] 병풍같나요????? [슬기봉 가는 길] 이 로프가 쳐진 내리막길에서 바로 좌측 능선으로 붙어야 "슬기봉"으로 가는 능선을 탈수 있습니다 그런데 좌측 능선이 잘 보이지 않더군요. 제 눈에는.... 그래서 계속 내려가게 됫습니다. [계곡길 - 알바 구간] 태을봉을 중턱까지 내려갔으니 .... 민망하게 알바를 한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태을봉을 두번 오르는듯한 산행을 하게 됬습니다. [계곡 갈림길 이정표] [수리산 옆구리 길] 길을 잘못들었다고 느낀때는 이 이정표를 보고나서입니다. 이 계곡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 '병목안'이 바로 나오는 곳이더군요. 여기서 좌측으로 산옆구리를 따라 "제2만남의 광장"방향으로 다시 올라 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길이 수리산 옆구리 횡단로이더군요. [수리산 옆구리 횡단로] 횡단로를 따라 전진하면 '병목안'에서 올라 오는 길을 다시 만나는데 여기서 좌측으로 가야합니다. 능선을 탓으면 간단한걸 어렵게 갑니다. ㅎㅎ 하지만 이런것도 산행의 재미중에 하나입니다. 이 정도의 알바는 '지맥"에서는 애교 정도입니다. [수리산 옆구리 횡단로에서 보이는 "슬기봉"과 "꼬깔봉(군레이다봉)"] 횡단로에서 좌측으로 보이는 능선으로 올라 가야합니다. 얼마나 엉뚱한 길로 왔는가를 이제서야 알수 있습니다. 하지만 등산은 더 많이합니다. [삼거리 갈림길] 중간에 갈림길을 만나는데 직진합니다. 내려가면 "제2만남의 광장"으로 하산 하는 것입니다. [삼거리 이정표] "순환지점" 방향으로 직진합니다 [태을봉에서 슬기봉 가는 능선 삼거리] 아까 太乙峰 "병풍바위" 바로 지나서 좌측 능선길에서 오는 수리산 능선을 다시 만납니다. 이제부터 다시 능선길로 산행을 계속합니다. [능선 갈림길 이정표] [슬기봉 가는 길] 이곳에 도착하니 오후 2시 정각이었습니다. 太乙峰에서 40분이 걸렸군요. 능선길로 왔으면 650m이니 20분 정도면 올수있었는데.... 머리가 나쁘면 다리가 고생을 합니다. [슬기봉 가는 길에서 내려다 보이는 "외곽순환고속도로"] 외곽순환고속도로 '수리터널'과 '수암터널' 사이에 있는 "수리교"가 아래에 보입니다. 다리 뒤의 산줄기를 타고 저 '수리교'로 내려 가야합니다. [슬기봉 가는 길에서 내려다 보이는 줌인한 "외곽순환고속도로"] 修理橋를 줌인했습니다. 왜냐고요? 수리산 능선을 종주하고 저 계곡을 따라 내려 가야하는 오늘 산행의 날머리가 되겠습니다 '수리교'가 있는 저 계곡이 "병목안"인데, 말발굽 모양으로 생긴 수리산 가운데 계곡입니다. 흡사 호리병의 목 안에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병목안"이라는 이름이 지어 졌다는군요 그래서 조선시대에 천주교를 박해 할때 천주교 신자들이 몰래 숨어 들어 담배를 재배하며 살았다고 '담배촌'이라고도 하더군요 "병목안 계곡"은 안양의 유명 피서지이자 유흥음식점들이 많이 있는 곳이란걸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칼바위 부근길] 이곳에서 '슬기봉'까지의 능선이 암릉길이었습니다 [칼바위 안내판] [칼바위에서 바라 보는 "꼬깔봉(軍레이다봉)"] '칼바위'에 오니 "병목안"을 만들고 있는 산봉우리들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제일 먼저 눈길을 끄는 봉우리는 451m높이의 軍레이다 돔이 있는 봉우리였습니다. 저 봉우리는 "꼬깔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더군요. 송나라의 대문호 "소동파"는 여산廬山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지요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건 내가 이 산 속에 있어서라네 修理山 속에 들어 오니 소동파의 노래와 달리 저는 修理山의 眞面目을 알수 있을듯합니다...아름답습니다 [칼바위에서 바라 보는 "수암봉"] 그리고 북서쪽으로 "수암봉"이 보입니다. '수암봉'은 안산쪽에서 올려다 보면 "독수리"모양을 하고 있답니다. '수암봉'은 '빼어날 秀, 바위 岩'이라는 한자를 씁니다 이 산의 이름이 "수리산"으로 지으지는 결정적 역활을 한 봉우리가 "수암봉"이었답니다 "수리산"이 독수리산에서 온 것이라고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가운데 계곡이 '병목안'이며, '수리산 산림욕장'입니다. [칼바위] 이곳 칼바위는 석영암이더군요. 다른 산에 있는 대부분의 칼바위는 능선을 이루고 있는데 수리산의 칼바위는 딸랑 이거 하나 [슬기봉으로 오르며 뒤돌아 본 "칼바위"] 슬기봉으로 오르며 뒤 돌아 본 "칼바위" [밧줄바위] 칼바위에서 조금 더 가면 '밧줄바위'가 나오는데 특이한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밧줄이 있다는 이유로 밧줄바위가 된듯..... [밧줄바위 에서 바라보는 "작은 슬기봉"과 "슬기봉", "꼬깔봉(軍레이다 돔峰)"] 바로 앞 봉우리를 오르면 "슬기봉"이라고 실제 표기해 놨습니다. 429m 높이의 이 봉우리는 실제 "슬기봉"이 아니고, 사진의 가운데 있는 475m 높이의 봉우리가 실제 "슬기봉"입니다. 그런데 밑에 작은 봉우리를 "슬기봉"으로 표기해 놓은 이유는 진짜 "슬기봉"에는 군부대 시설이 있어 올라 갈수가 없어서 등산객들의 편의(?)를 위해 아랫 봉우리에 "슬기봉"으로 표기하고 "슬기봉"에 대한 설명이 있는 안내판을 설치해 놨더군요. 그래서 저는 편의상 "작은 슬기봉"과 "슬기봉"으로 표기했습니다. [작은 슬기봉 오르는 길] 작은 슬기봉을 오르는 등로에는 최근에 설치한듯한 계단이 곳곳에 있습니다. [작은 슬기봉 정상] 429m 높이의 '작은 슬기봉'에 올랐습니다. 오후 2시 30분경이었습니다. 휴식과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작은 슬기봉 정상] 정상에는 안내판과 전망설명판이 설치되 있었습니다. '작은 슬기봉'에는 이곳이 진짜 "슬기봉"으로 설명해 놨습니다. 하지만 이 봉우리는 진짜 '슬기봉'이 아니고 "작은 슬기봉"입니다. [슬기봉 설명] 슬기봉에 대한 설명이 있는 안내판에 높이가 475m라고 써놨는데, 뭘좀 아는 분이 숫자를 뭉개놨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앞에서 설명한데로 이 봉우리는 475m 높이의 진짜 슬기봉이 아니고, 429m 높이의 작은 슬기봉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아시는 분이 숫자를 뭉개 놓은듯합니다. [작은 슬기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山本] 남쪽방향 [작은 슬기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山本] 동남쪽방향 山本 新都市가 잘 조망됩니다. [작은 슬기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山本과 의왕시 모락산, 수원 광교산] 山本과 의왕시, 모락산, 멀리 수원의 광교산과 백운산이 보입니다. [작은 슬기봉 정상에서 "슬기봉" 가는 길] ["작은 슬기봉"과 "슬기봉" 사이에 있는 안부와 "슬기봉" 오르는 길] [슬기봉 정상] 실제 "슬기봉" 정상에 왔습니다만, 정상부에는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어 더 이상 올라 갈수없고 대신에 우회 통로 데크를 만들어서 편의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슬기봉"은 수리산에서 489m 높이의 "태을봉" 다음으로 높은 475m입니다. [슬기봉 정상에 있는 우회 데크 통로] '수리산 修理山'이란 이름의 유래는 몇가지가 전해져 내려 오고 있는데 빼어난 山峰의 바위가 마치 독수리와 같아 수리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고 신라 진흥왕때 (539∼575) 창건한 절이 信心을 닦는 聖地라 하여 修理寺라 하였는데 그후 山名을 수리산이라 칭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또 조선조 어느 때 어느 왕손이 이 산에서 수도를 했기 때문에 李氏가 修道한 산이라 해서 '수리산(修李山)'으로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슬기봉 정상에 있는 우회 데크 통로] "수리산" 이름의 유래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1. 세종실록 지리지 (1454년간행) : 京畿 南陽郡 都護府 案山郡편을 보면 高麗開爲安山郡... 本朝因之. 鎭山. 曰鷲岩(在郡東)... 2. 동국여지승람(1481년간행) : 案山郡 山川에 보면 修理山 : 군동쪽 1리되는 곳에 있으며 일명 견불산(見佛山)이라 한다고하며. 鷲 岩 : 수리산에 있다라고 쓰여있습니다.. 3. 大東地志(1864년간행) : 安山郡 山水에 보면 修理山 : 東五 一云太乙山 一云見佛山 頗峻高 有鷲岩峯 方言 謂鷲爲修理 "동5리에 있는 산을 일러서 태을산 또 일러서 견불산이라고 한다. 자못 크고 높은 취암봉(수암봉)이 있는데 독수리 취자를 일컬어 사투리로 수리修理라고 한다." [슬기봉 정상 우회 데크 통로에서 뒤 돌아 본 태을봉] "태을봉"에서 능선을 따라 간단하게 올수있는 길을 중턱까지 내려 갔다가 다시 올라 왔으니 '머리가 나쁘면 다리가 고생을 하죠' 여하튼 산줄기가 멋있습니다. 능선 가운데에 "칼바위"가 있었습니다. [슬기봉 정상 우회 데크 통로에서 바라 본 "꼬깔봉(軍레이다峰)"] 앞에 보이는 레이다 돔이 있는 봉우리가 "꼬깔봉"입니다. 그리고 "漢南正脈"이 좌측 산줄기를 타고와 "수암봉"으로 가는 시작 봉우리이기도 합니다. 공군부대가 점령하고 있어 꼬깔봉은 오를수 없고 우회로를 따라 가야합니다 [슬기봉 정상에 있는 우회 데스크 통로] 슬기봉의 우회 데스크 통로는 잘 설치해 놨습니다. 홍콩의 "OCEAN PARK" 오르는 에스컬레이트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軍用道路] '슬기봉' 우회 데스크 통로가 끝나는 지점에 軍用道路가 잘 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슬기봉" 정상까지 자동차가 다닐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軍部隊정문] [수암봉 가는 길] 軍用道路에 나와 좌측을 보면 바로 軍部隊정문이 보이며 갈수 없고, 우측 아랫쪽으로 가야 합니다. [軍레이다 돔] 내려가는 軍用道路에서 보이는 '軍레이다 돔' 멀게만 느껴졌던 '軍레이다 돔' 바로 아래를 지나고 있습니다. [뒤돌아 본 "슬기봉"과 "우회 데크 통로"] 軍用道路에서 뒤돌아 본 "슬기봉"과 "우회 데크 통로" 우회 데크 통로가 잘 만들어져 있지요? 그리고 진짜 "슬기봉" 정상에는 군시설물들이 있어 갈수 없다는 사실도 확인 가능하구요 [수암봉 갈림길] 軍用道路를 따라 조금 내려 오면 갈림길을 만납니다. 직진하면 "병목안"으로 빨리 하산 할수 있습니다 "수암봉"으로 종주를 하지 않으려면 여기서 내려 가는게 제일 쉽습니다. [수암봉 이정표] "秀岩峰"은 좌측으로 갑니다. [수암봉 가는 길] 갈림길 좌측에는 "수암봉 가는 길"이라는 계단과 팔각정이 있습니다 [수암봉 가는 길] 수암봉 가는 길은 찾기가 매우 쉽습니다. 안내를 잘 해 놨기 때문이며 시설물이 제법 특징이 있게 공을 들였습니다 [군포 갈림길] '수암봉 가는 길'로 "꼬깔산" 옆구리를 타고 오르면 처음으로 "한남정맥 마루금"을 만나는데 이곳이 '군포 軍浦'와 '수암봉'으로 가는 갈림길입니다. 수암봉은 우측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 진행 합니다. [가야할 "수암봉"]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 나아 가면 멀리 가야할 "수암봉"이 빼어난 암봉을 자랑하고 어서 오라고 손짓합니다. 독수리를 닮아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취암 鷲岩이라고 했다고 앞에서 설명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리면 高麗開爲安山郡... 本朝因之. 鎭山. 曰鷲岩 독수리처럼 보이시나요? 안산 쪽에서 올려다 봐야 더욱 실감이 난답니다. [안산 갈림길] 군부대 철조망이 끝나는 지점에 다시 갈림길이 나옵니다 좌측이 안산으로 내려 가는 길이고, 직진이 "수암봉" 가는 길입니다 [안산 갈림길에서 바라 보는 안산과 "시화호"] 시흥에서 화성까지 바다를 막아 호수를 만들었다고 "시화호" 아주 가깝게 보입니다. [수암봉 앞 사거리] 수암봉 오르기 직전에 사거리 안부가 있는데 현재 공사중이었습니다. 앞으로 이 안부가 많은 산객들을 유치하겠더군요. 왜냐하면 왼쪽이 안산, 오른쪽이 안양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합쳐지는 곳이기 때문 [수암봉 앞 사거리 이정표] 이정표의 거리 표시는 정확하지 않은듯했습니다. 안양시, 군포시, 안산시가 따로 자기 구역에 자기가 만든 이정표를 따로 설치했기 때문에 3개市가 함께 협조하며 거리 측정을 하지 않아 서로의 거리표시가 부정확한듯.... [헬기장에서 바라보는 "수암봉"] 사거리 안부에서 조금 오르면 바로 헬기장이 나오며 "수암봉"이 눈앞에 다가 옵니다. [수암봉 오르는 길] 안부 사거리에서 20분이면 수암산 정상까지 오를수 있도록 계단을 설치해 놨습니다 [수암봉 오르는 계단] 제법 긴 계단을 오릅니다 [수암봉 정상부에서 바라 보는 "태을봉"과 "수리터널"] "수암봉"에 오니 "修理山'의 "太乙峰", 칼바위가 있는 능선이 완벽하게 조망됩니다. 그리고 "수리터널"과 "수리교"가 그 모양을 뽑냅니다. [수암봉 정상부에서 바라 보는 "슬기봉"과 "꼬깔봉(軍레이다돔峰)" - 漢南正脈] 칼바위 능선에 연이어 "작은 슬기봉", "슬기봉", "꼬깔봉(軍레이다돔峰)"이 선명하며, 수암봉으로 오는 漢南正脈마루금도 뚜렸합니다. 안부 사거리에서 올랐던 헬기장이 바로 앞에 내려다 보입니다. 修理山 속에 들어 오니 소동파의 노래와 달리 저는 修理山의 眞面目을 알수 있을듯합니다...아름답습니다 [秀岩峰 정상] 오후 4시 "빼어날 秀, 바위 岩"을 쓰는 秀岩峰 정상에 올랐습니다. '명학역'에서 4시간 20분이 걸렸습니다. [秀岩峰 정상석] 秀岩峰은 글자 그대로 빼어난 岩峰입니다. 395m높이로 높지는 않지만 서해가 가까운 이곳에서는 보기 드문 岩峰이기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오고 있다고하네요 [秀岩峰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남분기점"] 秀岩峰 정상에서는 조망도 일품이었습니다. 우선 서북쪽으로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이 秀岩峰을 관통하여 나아가 "서해안고속도로"와 만나는 "조남분기점"이 조망됩니다. 외곽순환고속도로를 타고 지나 다니면서 언제나 한번 올라 갈려는지 했는데 오늘 드디어 올라서 내려다 보고있습니다. 감개무량~ 이 맛에 산을 오르기도 하지요 [秀岩峰 정상에서 바라보는 "태을봉"과 "수리터널", 그리고 멀리 "관악산"] 좌측 능선을 따라 하산하여 저 "수리교"로 갈 예정입니다. 여기서 약 한시간 정도 걸려 '병목안'으로 내려가 버스정류장까지 갔습니다. [秀岩峰 정상에서 바라보는 "시화호"] 秀岩峰 정상에는 대단한 규모의 전망대를 설치하고 있었습니다. 도립공원 지정으로 돈을 바르는 중인듯 합니다 서해로 기우는 태양의 빛을 반사하며 '시화호'가 빛나고 있습니다 [秀岩峰 정상 이정표] 秀岩峰 정상에는 이런 이정표가 친절히 설치되 있습니다. '소나무 쉼터'를 지나 "순환지점(통제지점)"이라는 곳까지 가야합니다. 여기도 漢南正脈 마루금입니다 [秀岩峰 정상에서 바라보는 "" 순환종점봉우리] 표시를 해 놓은 조그만 봉우리가 "순환지점(통제지점)"이라는 곳입니다. 저곳에서 우측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 가야 합니다. ["소나무 쉼터" 가는 길] "소나무 쉼터" 가는 길에도 온통 소나무들이 빽빽히 서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소나무 쉼터] 秀岩峰에서 약 15분이 걸려 "소나무 쉼터"에 왔습니다 추석을 바로 지낸 월요일 오후인데도 건강산행을 하는 주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소나무 쉼터 이정표] "순환지점"이라는 곳으로 계속 직진합니다 [수리산 335m순환봉 가는 길] 아주 완만한 경사를 여유롭게 오릅니다. [수리산 335m순환봉] 더 이상 직진할수 없는 335m봉우리에 왔습니다 군부대 출입금지 철조망이 쳐져있어 더 이상은 갈수 없고 "수리산 종주 코스"는 여기서 우측 능선을 탑니다. ["병목안골"로 하산] '335m순환봉'에서 우측으로 능선을 따라 하산합니다. [갈림길] 조금 내려 가면 또다시 군부대출입통제구역 갈림길 삼거리가 나옵니다. 여기서 "수리산종주능선"과 "漢南正脈 마루금"을 버리고 "병목안" 계곡으로 내려 갑니다 [갈림길 이정표] [병목안으로 하산하는 길] '순례자 성당" 방향으로 내려 갑니다. 이 "병목안 계곡"에는 천주교 박해 당시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 담배를 재배하며 목숨을 연명하던 천주교 신자들이 살았다고 앞에서도 설명드린바 있습니다. "병목안 계곡"은 숨어 살기에는 좋은 곳 같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제법 알려진 '순례자 성당'이 있다는군요 [음식점] 산길을 벗어 나면 바로 음식점 두곳이 나옵니다. 이런 곳에 있는 음식점들은 대부분 오리나 닭을 팔지요 [태을봉을 바라 보며 포장도로를 따라 하산] 포장길으 따라 조금 내려 오면..... [외곽순환고속도로 "수리터널"과 "수리교"] 태을봉에서 부터 슬기봉 수암봉을 돌때까지 보이던 외곽순환고속도로 "수리터널"과 "수리교"가 드디어 나타납니다. [외곽순환고속도로 "수리교"] 저 다리 안쪽으로 대형 주차장이 있으며, 안양에서 오르는 수리산 산행들머리 "만남의 광장"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수리산의 봉우리를 오르려면 이 곳에서 시작하면 쉽습니다. [병목안골]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 가는데 45분이 걸렸으니 제법 긴 거리입니다. 이런 날머리가 지루하고 재미없지요 ["안양 병목안 공원"과 "안양 한증막"] 40분 정도 내려 가면 우측으로 "안양 한증막"이 큰규모로 있고, 앞에는 "안양 병목안 시민 공원"이 조성되 있습니다. [안양 병목안 공원] '안양 병목안 공원'의 규모가 상당했습니다. 시간 관계상 들어 가 구경은 못했습니다. [병목안 청박골 - 버스 타는 곳] 오후 5시 10분에 "병목안 청박골" - 버스 타는 곳으로 내려 왔습니다 저 앞 아파트가 있는 삼거리에 안양시내로 나가는 버스가 수시로 다니고 있더군요 [병목안 청박골 삼거리에 있는 "병목안 공원 입구"] 공원 정문 입구 삼거리에 버스 정류장이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금정역'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나왔습니다 걸은 거리는 잘 모르겠으나 대략 12~3km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왜냐하면 제가 산행을 평균 1시간에 2.2km정도를 걷기 때문에 역산해서 나온 수치입니다. (오르막, 내리막, 휴식, 식사 시간을 모두 포함하여 평균을 낸 속도입니다) 명학역에서 오전 11시 40분에 출발하여 오후 5시 10분에 '병목안 청박골'에 도착했으니 "수리산종주"에 5시간 30분이 걸렸습니다. 하루 산행으로 아주 적당한 건강 산행 코스로 강력 추천 드림니다.

파란문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天子의 冕旒冠을 쓴 天冠山을 가다
王도 王 나름이고 王冠도 王冠 나름입니다 王冠의 챙에 다는 진귀한 보석류의 구슬을 旒(류)라 하는데 한줄의 旒(류)에는 12개의 旒(류)를 꿰어 달아 한줄을 만들고 다시 그러한 旒(류) 12줄을 王冠에 메달아 놓은 관이 冕旒冠입니다 王 中에 王이 쓰는 冠이라 皇帝가 주로 冕旒冠을 썼습니다만, 우리들은 주로 玉皇上帝, 즉 하느님이 쓰는 王冠을 冕旒冠이라 말합니다 제가 산행기의 서두부터 거창하게 冕旒冠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를 어림 짐작하시겠죠? 무슨 표현으로 이 산에 대한 山行記를 장식 해야 할지 몰라서 이 산의 이름에서부터라도 풀어 나가려는 실마리를 찾아 보기 위해서 이람니다 "天冠山" 冠岳山이 王冠을 썼다면, 天冠山은 분명 冕旒冠을 쓴 神山이 분명하다고 느꼈습니다 [천관산이 있는 곳] 천관산은 전라남도 장흥군에 위치하고 있으며 늘푸른 南海의 多島海를 바라 보며 우뚝 서 그 위용을 태평양 건너 멀리 멀리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난~支提靈山-天冠山이다~~!!" [호텔] 산행기에 처음부터 왠 호텔 사진이냐구요? ㅎㅎ 이번 산행은 고교 교우회의 "徽山會"와 세번째 함께하는 山行입니다만 전남 장흥에 있는 "천관산"이라 서울에선 너무 먼 거리에 있어서 1박 2일 코스로 산행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태로던 길 떠나는 나그네에겐 하룻밤을 묵은 旅館은 추억에 남습니다 이름 모를 객지에서 하룻밤을 그것도 고교 선후배 교우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크나큰 색다른 즐거움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후배 교우들이 떼를 지어 하룻밤을 묵은 호텔을 첫면에 올리는 것입니다 다른 학교 나오신 분들도 충분히 공감하시리라 믿습니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도착했습니다 하룻밤을 묵고 일어나니 눈앞에 펼쳐지는 남해 바다가 우릴 더욱 반기는 듯합니다 호텔은 지방의 호텔치고는 제법 그럴듯한 규모를 자랑하며 밤새 마시고 마신 선후배들 간의 친목酒로 떠지지 않는 눈 상큼한 바닷바람과 햇살이 사정없이 기상 나팔을 불어 어쩔수 없이 일어났습니다 요즈음 일교차가 너무 커 안개가 많이 낌니다만 희뿌연 안개를 뚤고 태양은 솟아 오르는데 여기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남쪽 나라가 맞는지..... 매일 어느 곳에서나 뜨는 태양이지만, 남쪽 나라 바닷가에서 맞는 日出은 새로웠습니다 13층짜리 호텔의 9층에서 내려다 보는 광경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곳이 전남 보성의 어느 해변이라는 것 이외에는 저는 아직까지도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어느 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는 것이 더 큰 추억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호텔 뒷쪽에는 터널도 있고, 관광객을 유혹하는 펜션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시설은 잘 해 놨는데....비수기엔 손님이 너무 없어 조금 안타까웠습니다 [지난 밤에 생긴 일] 지난 밤에는.......?? ㅎㅎ 밤 늦게 도착하여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는 와중에도 교우들간의 "친목행위"는 주님을 모시고 밤새는 즐 모르며 성대히 거행 됬습니다 어떻던 많은 교우들과 호텔앞 해변 벤치에서 라면을 끓이고 꽁치를 구으며 이런 저런 얘기와 "천관산"과 장흥이 배출한 인물들 얘기로 다음날 뜻깊은 천관산 산행 준비를 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밤에 생긴 일] 非酒流派는 가고 酒流派는 다시 호텔 방안으로 옮겨 酒流와의 투쟁은 끈질기게 계속되었습니다 이 바람에 저는 천관산 산행을 고생스럽게 했습니다. ㅎㅎ [아침식사후 호텔 라운지] 호텔에서 준비한 아침 식사를 마친후 호텔 라운지에서 천관산 산행을 준비하며 안개 속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南海를 바라 보며 커피 한잔씩....캬~~ 커피인데도 캬~~!! 소리가 나더군요 ㅎ 점심 도시락을 지급 받은 산객들은 전남 장흥에 있는 "천관산"으로 출발합니다 호텔에서 천관산까지 제법 긴 시간을 달리더군요 [장흥군 관산면 소재 '천관산' 주차장] 준비운동을 하며 산행 준비를 합니다 주차장은 넓은 편이었으며 여러 편의 시설이 잘 되있었습니다 기념 촬영을 하고 ..... 천관산을 감상하기 위해 산행 들머리로 들어 갑니다 아주 멀리 가운데 맨 마지막 희미하게 뾰쪽 나온 봉우리가 大勢峰입니다 [천관산 산행 약도] [천관산 산행 개념도] 위 개념도의 아래 우측에 있는 [정안사]를 시간 관계상 다녀 오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번 천관산 산행시에 최우선으로 들리려고 했던 곳입니다만 불행이도 직접 다녀 오지 못해 지금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 산행을 하며 설명 드림니다 [호남제일지제영산] 湖南第一支提靈山 들머리 부터 뭔가 대단한 느낌을 주며 우릴 반기니 오를 생각으로 가슴 설래였습니다 지리산과 내장산, 월출산, 변산과 더불어 湖南地方에선 5대 명산에 속한다는 천관산은 支提靈山이라고도 불리워진답니다 支提山은 佛書 화엄경에서 '天冠보살이 머무른 곳'이라하는데서 연유하였다고 합니다 과연 天冠山에 天冠보살이 머무르는 곳인지 오늘 확실히 알아 보기 위해 지난밤 마신 酒님으로 움직이지 않는 발걸음이지만 支提靈山-天冠山으로 발길을 재촉합니다 [위덕규선생 유허비] 장흥 魏氏 家門의 독립투사 덕암 위석규 선생(德庵 魏錫珪, 1878∼1913)의 遺墟碑가 나옵니다 遺墟地에는 '德庵魏錫珪先生遺墟碑(덕암위석규선생유허비)'와 義烈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독립투사 德庵 魏錫珪선생에 대해선 저쪽 비석에 쓰여있는 글의 내용으로 간단하게 갈음합니다만 평생을 독립운동으로 살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사라져 간 선생의 뜻을 기리고 또 기려야겠습니다 '짐승(倭)이 사람의 영토를 침탈하니 장차 모두 죽겠도다. 슬프다, 吾國(오국)이 盜獸(도수)들의 擄掠(노략)으로 國家(국가)가 存亡之秋(존망지추)에 다달아 백성이 盡滅(진멸)케 되었으니 우리들은 팔을 걷어 주먹을 쥐고 踊躍奮鬪(용약분투) 萬死一生(만사일생)의 각오로 이 領土(영토)를 지키자. 사람이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大義(대의)를 따르면 사람이요, 私慾(사욕)을 취하면 禽獸(금수)라. 항차 이런 일임에랴! 古今(고금)을 莫論(막론)하고 국난을 당하여 國家社稷(국가사직)을 붙잡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義憤慷慨(의분강개)하여 일어서면 모두가 이룰 수 있는 것이다. -1906 독립전선에 투신하면서' 친일파들과 그 자손들이 아직까지도 당시 친일 행위를 정당화 하려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어쩔수 없었다". "지금의 당신이라도 그때였다면 친일행위를 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왜 나만 갖고 그래~!!?. 그때 부정축재한 재산 내 놓을 수도 없고 뺏어 간거 도로 내줘~~!!" 이런 괘변을 백범 김구선생이 들으면 뭐라고 할까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며 산화해간 안중근의사가 들으면.. 유관순 누나의 만세운동은 한낱 부질없는 촛불시위 정도이었겠습니까? 만해 한용운선생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소리입니다 부유한 가정을 송두리째 갖다 바치며 목숨을 걸고 싸우다 사라져간 김좌진장군이 들으면 통곡을 하며, 그런 친일파 후손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시지 않을까요 " 너희들은, 자존심도 자긍심도 없냐? 쪽바리가 그렇게 좋으면 외놈으로 국적을 바꾸라" "왜? 이 땅에서 아직도 살고 있냐? !!" [영월정] 최근에 새로 지은 듯한 영월정이 산행의 들머리이자 날머리입니다 오른쪽으로 올라 왼쪽으로 내려 옵니다 湖南地方이 어디인지 모르시는 분은 안계실겁니다 그러나 왜 湖南地方이라고 하는지에 대해선 아시는 분이 거의 없으실겁니다 일반적으로 전라남북도를 湖南地方이라고 합니다만 ..... 영남, 영동지방은 왜인지 모두 아시죠? 嶺南地方은 경상남북도를 의미하지만, 鳥嶺(문경새재)의 南쪽, 竹嶺의 南쪽 지방이라 嶺南地方이라한다는거.... 그리고 영동(嶺東)地方은 大關嶺의 동쪽이라고 嶺東이라하고 반면에 大關嶺의 西쪽은 嶺西地方이라고 한다는거는 아시는 분들이 많으실겁니다 [금강굴 코스] 우리는 금강굴 코스로 가며 대부분의 천관산 내방객들은 이 코스를 이용합니다 湖南地方의 기준은 어디를 말하는가? 분명히 "湖"의 南쪽인것은 틀림없는데 그 "湖"는 어디인가? 아시는 분을 아직까지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택리지, 신동국여지승람, 산경표, 대동여지도등 여러 문헌을 찾아 봤지만 확실한 해답은 얻지 못했으나 몇가지 說은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첫번째 說이 김제의 "벽골제"를 가리킨다고 하며, 이 '벽골제'를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湖南地方, 서쪽으로는 湖西地方으로 한다는 군요. 두번째 說은 錦江을 하나의 로 보고 錦江의 南쪽湖南地方이라 한다는군요 이렇다면 충청도의 일부도 湖南地方이 되는 것입니다 [長川齋와 太古松] 長川齋는 이 고장이 배출한 인물 중에 조선후기 실학자인 존재 위백규(存齋 魏伯珪, 1727~1798)선생이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는 곳입니다. 書堂인 셈이죠 長川齋는 현재 대대적인 보수공사 중이어서 들어 가 볼수 없었으며, 들어 가도 볼것은 없을듯합니다 [長川齋와 太古松] 600여년의 풍상을 거치며 흐르는 세월을 몸소 느끼며 살아 왔을 소나무는 아직도 젊음을 짱짱하게 유지하고 있는듯하며 한순간을 위해 이 산을 오르는 우리들에게 좀더 멀리, 좀더 크게, 좀더 자세히 천관산을 보고 가거라 !!~~라고 하는 듯합니다 長川齋를 지나 체육공원으로 오르는 길은 잘 꾸며진 공원이었습니다 長川齋는 이곳 옆의 개천이 '長川'이라 존재 위덕규선생이 붙인 이름이라 하며 長川齋 앞 계곡에 가로놓인 장천교를 건너 아름드리 소나무숲이 우거져 있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 長川 약 백미터에 이르는 계곡은 위백규선생이 長川八景이라 명명한 장천동이랍니다. 장천팔경에는 청풍담(淸風潭), 백설뢰(白雪瀨), 도화량(桃花梁), 세이담(洗耳潭), 명봉대(鳴鳳臺), 추월담(秋月潭), 청령뢰(淸靈瀨), 와룡홍(臥龍弘) 등이 있다고 하는데 단체 산행의 바쁜 일정으로 하나 하나 확인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체육공원] 누구를 위한 체육시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체육시설을 해 놓은 공원이 있습니다 이곳엔 "冬柏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자생하고 있더군요 겨울에 피는 꽃이라 冬柏이라면, 지금은 秋栢이겠군요 '체육공원'을 지나 다리를 지나면 본격적인 오르막 산행이 시작됩니다 빠른 산행을 하는 교우들을 따라 가기 위해선 서둘러야 합니다 이런 저런 것들을 자세히 관찰해도 집에 돌아 와 산행기를 쓸때엔 아쉬운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가급적 단체 산행으로 시간에 쫒기며 하는 산행은 피하고 홀가분하게 여유있게 산을 배우며 느끼며 하는 홀로 산행을 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관산' 같이 너무 멀리 있어 '나 홀로 산행'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과 경비가 들어 이런 경우엔 이런 저런 산악회를 따라 다닙니다 [쉼터] 땀이 나고 숨이 조금 차기 시작하니 쉼터가 나왔습니다 이럴때 쯤에는 언제나 묘하게도 이런 쉼터가 나오지요 [쉼터] 교우회의 7자 기수들을 따라 잡았습니다 7자 기수들이 제일 아래 기수인데 언제나 맨뒤에서 꼬리부분을 만들고 있으며 선배님들이 오히려 선두에서 산행을 더욱 힘차게 합니다. 이들은 선배들을 보호 하며 산행을 해서인지, 힘들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 7자 기수들은 요즘 8자 기수들이 新兵으로 참여한다고 즐거워 하는지, 세월을 탓하는지...??ㅎㅎ 오르막은 계속됩니다 [선인봉] 조금 오르니 이 능선의 첫번째 봉우리인 "선인봉"이 '나 여기 있노라~!!'하며 날카로운 자태를 드러 냅니다 [선인봉]의 옆구리로 선인봉을 오릅니다 선인봉은 커다란 바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선인봉]의 옆구리로 선인봉을 오릅니다 [선인봉] 선인봉을 올라 가까이 가 보았습니다 [선인봉을 이루고 있는 바위 중에 하나] [선인봉] 왜 선인봉이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모양이 그럴듯합니다 仙人을 말하는거겠죠? '선인봉'을 지나니, 앙상한 나무가지 사이로 이상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풍광이 금강산의 산수화를 보는듯 瑞氣가 느껴지기 까지 합니다 안개 속에 나타나는 奇岩怪石 저 奇岩怪石으로 아홉개의 봉우리를 만들어 天冠山의 秘景을 만들어 낸답니다 奇岩怪石으로 이루어진 천관산의 봉우리들이 정말로 天冠을 쓴듯, 冕旒冠을 쓴듯 장업하게 다가 옵니다 이곳에서 바라 보는 天冠山이 가장 冕旒冠에 가깝게 보입니다 이 사진을 잘 기억하시기 바람니다 이름 모를 봉우리가 나타났습니다 이런 정도의 岩峰은 천관산에선 이름조차 없습니다 와~우!!~~ 저도 우리나라의 이런 저런 산들을 많이 다녀 보았다고 자부하는 자칭 산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멋진 산이 이런 곳에 있을 줄은 정말 까맣게 몰랐습니다 어떠십니까? 바로 앞에 있는 암봉은 이름도 없는 봉우리이고 바로 그 뒤의 암봉이 금강굴이 있는 鐘峰입니다 이 코스가 금강굴 코스라고 이름 붙여졌으니 鐘峰은 기억해 둬야겠죠? 종봉의 바로 뒤가 노승봉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이는 날카로운 봉우리가 大勢峰입니다 이곳에서 '금강굴 코스'의 모든 암봉이 보이는군요. 아름답습니다 大勢峰에서 북서쪽으로 뻗어있는 능선에도 멋진 봉우리들이 우리를 부름니다 시간 관계상 모든 곳을 가지 못해 아쉽습니다 저 능선에 선재봉, 관음봉, 신상봉, 홀봉, 삼신봉 등 다섯개의 봉우리가 있답니다 지나온 능선을 뒤돌아 봤습니다 선인봉이 이제는 오히려 초라한 모습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지나온 선인봉을 뒤 돌아보니 장흥군 관산읍과 관산평야가 눈아래로 펼쳐지고, 그 너머로는 제암산에서 사자산을 지나 일림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이 유장하게 뻗어나가는데 오늘은 안개로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이는군요. 오늘 산행에 최대 아쉬움이 안개로 주변 경관을 촬영하지 못한것입니다 [금강굴] 鐘峰 아래에 있는 '금강굴'에는 약수가 나왔습니다. 바위로만 이루어진 岩峰에 샘물이 있다는 것은 기이한 일입니다 그래서 지나는 산객들은 한모금이라도 마셔 보려고 길게 줄을 섰습니다 [金剛窟] 금강굴(金剛窟)의 천정에서는 물이 병아리 눈물 많큼씩 떨어져 '샘'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이 깊이 들어가 조금씩 퍼 올려야 한모금 마실수 있는데도 행렬은 줄지 않았습니다 이 샘물은 인간 보다도 날짐승과 들짐승들에게 더 유용할텐데...그들이 마셔야 할텐데... 베낭에 물을 가득 가지고 다니는 인간들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물론 저도 욕심 많은 놈 중에 하나였습니다 초라한 표지판이 [鐘峰]임을 알리고 있으며 계단을 이용해 鐘峰을 오릅니다 [鐘峰] 鐘峰에 올라 鐘을 찾아 보았는데 이것이 鐘을 의미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바위들은 제각각 자신의 특징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鐘峰]뒤에서 내려다 본 [선인봉] 봉우리들은 보는 각도에 따라 멀리 보이기도 하고 가까이 보이기도 합니다 [老僧峰] 鐘峰 다음 봉우리가 老僧峰입니다. 저는 老僧과 젊은 僧이 함께 '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을 외고 있는듯합니다 마주보고 목탁을 치고 있는것 같죠? [鐘峰]에서 줌인하여 올려다 본 [大勢峰] 우측 바로 앞이 [老僧峰]이고 가운데 하늘을 찌를듯 솟아 있는 봉우리가 大勢峰입니다 그리고 좌측의 봉우리가 [문수보살봉]이랍니다 주차장에서 멀리 보였던 봉우리가 이 大勢峰이었던 것입니다 천관산 冕旒冠의 하일라이트라 생각되는 봉우리입니다 老僧峰 옆구리를 돌아 大勢峰으로 올라 갑니다 이곳은 암벽이라 계단을 설치해 놨더군요 무릉도원을 가는 듯.... 玉皇上帝가 사는 天上으로 가는 듯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천관산에서 느낀 '가장 천관산 다운 광경'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大勢峰은 분명히 冕旒冠 같았고, 가는 길은 天上路였습니다 [大勢峰] 관악산의 왕관바위와는 비교됩니다 물론 천관산의 모든 봉우리를 합쳐 冕旒冠이라 했겠지만, 어느 봉우리를 冕旒冠으로 칭할려는지 꼭 하나를 꼽으라면 大勢峰이라고 하고싶습니다 大勢峰 아래 갈림길에 왔습니다 이곳에서 바로 좌측으로 가면 天柱峰에 빨리 갈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직진하여 사진에 멀리 보이는 두사람이 서있는 곳 大勢峰과 [善才峰] 사이로 넘어가 빙 둘러 가면 엄청나게 아름다운 천관산의 山勢를 볼수 있으니, 힘 들드라도 넘어야 합니다 大勢峰과 [善才峰]을 다른 각도에서 촬영했습니다 大勢峰과 [善才峰] 가운데 두사람 서 있는 곳 보이시죠? 꼭 저 고개를 올라가 善才峰 능선 아래에 있는 "天冠寺"도 내려다 보고 大勢峰을 좌측에 끼고 빙 돌아 나가세요 大勢峰과 [善才峰] 사이의 고개에 올랐습니다 암벽들이 잡아 먹을 듯 보이지만 위험하지 않으니 안심 하세요~ ㅎㅎ [大勢峰] 멀리서 그렇게 神秘한 冕旒冠처럼 보였던 大勢峰도 가까이서 보니 하나의 암벽일 뿐이군요...에구~ 허무해라~~ 에구~ 사는게 그렇고 그런기니끼~~그래도 '大勢峰'에 올랐습니다 주차장에서 여기까지 1시간 40분정도 걸렸으니 제법 먼 거리입니다 [선재봉(善才峰)] 이 봉우리 이름 선재봉은 정확한 이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선재봉이라 부르더군요. 맞을겁니다 이 능선에는 선재봉(善才峰)과 관음봉(觀音峰), 신상봉(神象峰), 홀봉(笏峰), 삼신봉(三神峰) 등 다섯 개의 암봉이 차례로 솟아 있다고 하며 끝에 "천관사"가 있다고 합니다 지척 거리인데도 오늘은 안개 때문에 사진 촬영을 못했습니다 善才峰에서 내려다 본 지나온 봉우리들 노승봉, 종봉, 선인봉이 줄을 서서 능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오른쪽 능선이 {金水窟]이 있는 금수능선입니다 善才峰에서 대세봉 사이의 고개 저의 일행들- 특히 후배들이 올라와 이제부터 함께 하산 할때까지 같이 산행을 하게 됩니다 대세봉을 왼쪽에 끼고 고개를 넘어 돌아 나아가니 건너편 능선에서 새로운 天冠山이 우리 앞을 가로 막고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의 첫사랑 "천관녀"를 들어 보신 분들이 많으실겁니다 "삼국사기" 위인열전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김유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에 "천관녀"가 등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된 "천관녀" 그녀는 정말 천관산으로 가 "천관보살"이 되었을까? 대세봉 뒤로 또다시 펼쳐지는 동양화 같은 풍경이라면 그녀는 틀림없이 날개 달린 백마를 타고 "천관산" 여기로 날라와 "천관보살"이 되었을것 같기도 합니다 아름답습니다 [문수보현봉]을 돌아 가니 돌탑이 하나 있으며, 문수보현봉은 가까이서 볼수 없었습니다 우회도로를 돌면 중요한 봉우리를 놓치기 일수입니다 신라에 의해 멸망한 '금관가야국'의 왕족인 김유신 신라에 빌붙어 잘 살아 가려면 신라 진골세력들에게 잘 보여야했겠습니다 철저한 품골 계급사회였던 신라에서, 패망한 나라의 왕족은 더욱 경계시 되었습니다 그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유신의 어머니는 아들 김유신을 공부 잘하고 튼튼한 사나이로 키워 진골세력에 들어 가 신라의 핵심 권력 속으로 들여 보내고 싶어했습니다 어느 어머니나 모두 같은 마음이겠지만 특히 김유신의 어머니는 자식 교육을 철저히 했죠 현대 교육학에서도 김유신 어머니의 가정교육은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문수보현봉 에서 바라보는 "眞竹峰" 환희대에서 구룡봉 가는 길에서 알게 된 이름입니다만 "眞竹峰" 정말 아름답습니다 김유신이 화랑 훈련병 시절 - 그러니까 사춘기 때 쯤이겠지요 이 놈의 씨끼가 엄마가 하라는 공부는 않하고 어떤 여자를 무쟈게 좋아해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그 년한테 가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김유신의 어머니는 화가 머리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뿔따구가 났습니다 어느 날, 참다 못한 엄마는 김유신을 불러 꿇어 앉혀 놓고 작살을 냅니다 "너 이놈!!~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새파란 놈이 기생 치마 폭 속에서 노닥거려서 되겠냐?" " 다시 한번 더 그 뇬한테 가서 연애질 하면 다시는 너를 안볼것이야!!~~" 김유신은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않겠다고 어머니에게 맹세를 합니다 그 뇬이 "天官女"라고 하는 기생이었답니다 삼국사기에 娼家의 女이라 "天官女"를 역사학자들이 기생이라고 추측했습니다만 요즘 새로운 학설에는 "天官女"가 왕실에서 제사를 지내는 관직을 가진 여자였다고 합니다 일종의 무당 같은 것이란거죠. 아직 확실한 결론이 난 것은 아닙니다 [天柱峰] 문수보살봉을 돌아 나아가니 天柱峰이 나왔습니다 천몇백년전 어느 날 -- 김유신이 화랑 무예 수련을 마치고 자신의 말을 타고 집에 돌아 오는 도중 너무 피곤해서 말위에서 잠이 들었답니다 "히이~이히힝" 하며 우는 말 울음 소리에 잠이 깬 김유신앞에는 언제나 처럼 "天官女"가 화려한 옷을 입고 요염한 모습으로 김유신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잠자고 있는 사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말은 천관녀의 집으로 간것입니다 김유신은 어머니와 한 약속이 뇌리를 때리고 지나갔겠죠 성질 무쟈게 난 김유신은 그 자리에서 말의 목을 베어 버렸습니다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이 놈의 말이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갔다는 보복이죠 말의 목에서 터져 나오는 피를 흠벅 맞은 "천관녀" 여자의 온갖 자존심 다 망가지는 치욕의 순간이었죠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지 개쎄이가 왜 죄없는 말의 목까지짜르고 내몸에 개피도 아닌 말피를 퍼 붓고 스타일 꾸기고 개지랄이야? 내가 세상에 남자가 한둘이냐? 이 씨~세이야~!! 김유신과 천관녀는 이렇게 볼썽사나운 이별을 했습니다 말(馬)이 죽어 영혼이 하늘 나라로 가며 김유신에게 이렇게 씨부렸겠지요 "이 쎄파라~ 니가 매일 가던 곳으로 간것 뿐인데~~ 왜 나한테 화풀이를 하냐? XX씨끼" 내가 잘못한게 뭐가 있냐? 어제는 딴대로 간다고 지랄하더니... 아이구~ 내 목아지 어디갔어? 내 목아지 내놔~~개쎄이" [天柱峰] 천주봉 아랫도리를 돌아 천주봉으로 올라 갑니다 말의 목을 베면서까지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했다는 대장부 기질을 묘사하기위해 김부식이는 다소 과장해서 삼국사기를 썼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천관녀"와 헤어진 이유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다른 이유를 대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천관녀"는 기생이 아니라 왕실에 제사를 관장하는 궁중무당같은 여자이라 왕궁에 자주 드나 들어 김유신과 뗄래야 뗄수없는 관계에 있던 "김춘추"와 서로 "짝사랑"을 했던 삼각관계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김춘추는 후에 무열왕이 되며 삼국통일을 이루는 신라 최고의 왕이 되는 진골계급이어서, 패망한 금관가야의 김유신이 김춘추에게 잘 보이기 위해 "천관녀"를 양보 할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김유신과 천관녀와의 관계를 잘 아는 김유신의 어머니가 김춘추를 의식해서 천관녀를 만나지 못하게했다는 설도 유력하다고 생각 됩니다 男子란 묘한 동물이라 무당 같은 기괴하게 신들린 듯한 여자들로부터 더욱 쎅씨함을 느낀다네요. 그런데 저는 아님니다~~ 울 마눌만 좋아합니다 ㅎㅎ 뒤따라 오는 후배들 - 무어가 그리 즐거운지 마냥 웃고 다닙니다 세월이 흘러 삼국퉁일을 이룩한 후 김유신의 나이가 환갑을 넘을 쯤 서라벌의 어느 길모퉁이에서 김유신이 "그 때 그 여인"을 만납니다 "천관녀"임을 알아 본 김유신이 달려가 아는 척 합니다 다음은 제가 그냥 날라리로 꾸며 본 그들의 대화입니다 김유신 : 천관녀!!~~ 천관녀 맞지요? 천관녀 : (눈을 아래로 깔며 약간 튕기며) ...... 김유신 : 이게 얼마만입니까? 정말 오랜만이군요 천관녀 : ....... 김유신 : 그 때는 정말 내가 잘못했소... 엄마가 하도 야단을 쳐서.... 천관녀 : ....... 김유신 : 용서해 주구려~ 그리고 이젠 같이 살자구요~ 천관녀 : 이제 모두 지나간 추억일뿐입니다. 저는 인간이 아닙니다. 옥황상제께서 저를 내려 보내며 삼국을 통일 시킬 인물을 찾아내라는 명을 내렸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군을 선택하여 삼국을 통일 시키게 하였으니 저의 임무는 이제 끝난것입니다 김유신 : 무신 말씀을.... 이제 삼국통일도 했으니 나랑 같이 백년해로하자꾸여~ 나 이젠 돈도 무지하게 많어~ 사 달라는거 모두 사 줄께~ 집도 새로 짖고 (김유신은 진짜로 천관녀를 기리는 "천관사"라는 절을 지었습니다.) (현재 경주에 복원하고 있습니다) 천관녀 :(쭝얼쭝얼 ~주문을 외우니 하늘에서 날개 달린 백마가 내려 옵니다.백마를 타고 날라 가며) 안뇽~~ 빠이 빠이 잘 먹고 잘살아라~ 김유신 : (자신의 말을 몰고 백마를 빠지게 따라 갑니다) 같이 가!!~~ 왜? 내가 이젠 늙었다고 싫은거야? 이 할망구야!!~~ 너도 이젠 할망구야!!~~ 아직도 니가 2x8청춘인줄 아냐? 가지마!!~~ 김유신이 한없이 따라 갔는데 어느 산에서 갑자기 천관녀가 탄 백마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산이 바로 여기 "天冠山"이라는 것입니다 [天柱峰] 천주봉을 오르고 있습니다 위에 이야기는 제가 각색을 해서 약간 재미있게 꾸민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고있는 내용과 비슷할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확실한 것은 천관산과 천관녀의 한자 표기가 서로 다른 天山과 天女이라 같은 천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天冠은 면류관이라는 뜻이고, 天官은 어떤 관직을 뜻하는데 궁중무당이 아니었는지 한답니다 재미있었나요? ㅎㅎ [天柱峰] 천주봉에선 眞竹峰이 더욱 아름답게 보입니다 천관녀를 천관산에 끌어 들인 사람은 아마도 이 지역 공무원이나 지역발전협의회 관련자들이 아닐까요? 느닷없이 천관산과 천관녀가 관련이 있다고 사람 횃갈리게 만들어서 그 바람에 저는 삼국사기 공부를 많이 했답니다. ㅎㅎ 그 덕택에 김유신과 천관녀 이야기는 제법 깊이 있게 알게 됬습니다 [天柱峰] 올라 와서 [天柱峰]을 바라 보니 또 허무합니다 하늘에 기둥을 박아 '천관녀'가 옥황상제께로 올라 갔을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 아래에서 볼때는 신비스럽게 보였는데.... 천관녀가 저 돌기둥에 앉아 염불을 외지는 않았겠죠? 궁둥이 아퍼~ㅋㅋㅋ 天柱峰에서 바라 보는 우측의 眞竹峰과 좌측에 보이는 봉우리가 우리가 가야할 大藏峰과 歡喜臺 [大藏峰] 만권의 책이 쌓아 진것같다고 대장봉이라 한답니다 歡喜臺가 저 大藏峰위에 있기 때문에 歡喜臺에선 大藏峰이 보이지 않더군요 [歡喜臺] 기쁘할 歡, 기쁠 喜얼마나 기쁘겠습니까 !!~ 드디어 하늘이 열리고 계곡에서 움터 올라온 기운들이 폭발하여 하늘로 올라 가는 듯합니다 동행한 후배들은 알겠지만 여기서 정수라의 "歡喜"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대 기쁨을 나에게 보내 주오~~♬ 그런데 끝까지 몰라 ■☆←♣♧⊙♨ 중단했습니다 ㅎㅎ [歡喜臺] 정상은 언제나 기쁨과 허무를 줍니다 그러나 [歡喜臺]는 사방이 뻥 뚤려있어 가슴을 후련하게 해 주는군요 [歡喜臺]와 이정표 사진 속의 설명을 읽으세요. 글 쓰기 힘들어요~ ㅠㅠ [歡喜臺]에서 바라 본 지나온 봉우리들 환희대에서 부터 북쪽으로 솟아 있는 대장봉과 천주봉, 문수보현봉, 대세봉, 선재봉, 관음봉, 신상봉, 홀봉, 삼신봉 등 아홉 개의 암봉을 일러 "九程峰"이라고 한답니다. 이 아홉개의 봉우리가 만들어 내는 "天子의 冕旒冠을 쓴 天冠山"을 이제까지 지나 왔습니다 [歡喜臺]에서 바라 보는 앞으로 가야할 연대봉과 억새능선 가운데 보이는 봉우리가 722m봉이며 그 다음이 710m봉, 멀리 뾰쪽한 젖꼭지같은 봉우리가 천관산의 최고봉인 烟臺峰입니다 九龍峰을 다녀와 다시 이 길을 갈것입니다 남서쪽 九龍峰 방향 九龍峰이 좌측에 조금 보입니다 환희대에 오르면 九龍峰은 반드시 다녀 와야하는 코스이랍니다 억새 숲을 지나 九龍峰으로 나아 가는데 龍頭가 보입니다 벌써부터 九龍峰의 모양새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 사진 전체가 龍이 昇天을 하려는 듯 트림을 하고 있는 듯 하지 않습니까? 九龍峰으로 가는 억새밭 사이 사이로 가을 정취는 뭍어나고.... [眞竹峰] 大勢峰, 天柱峰에서 바라 보던 [眞竹峰]을 바로 앞에서 바라 봅니다 歡喜臺에서 북서쪽으로 眞竹峰과 비로봉, 중수봉으로 뻗어가는 능선은 능선 전체가 하나의 연재 소설처럼 재미있는 설화가 있더군요. 산행 들머리에 있는 장천제를 지은 존재 위덕규선생이 천관산을 너무 사랑하여 천관산에 대해 한권의 책을 쓰셨는데 이 책의 이름이 "支提誌"인데 재미 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수록하고 있더군요 存齋선생의 "支提誌"에서 이 眞竹峰능선을 가리켜 '관세음보살이 석가모니의 말씀을 따르고자 진불(眞佛)을 돌배(石船)에 싣고 바다를 건너 천관산으로 가서 불경을 내려놓은 곳이 大藏峰이고, 돛대가 眞竹峰이며, 돌배가 石船峰이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니 眞竹峰의 우뚝 솟은 돌기둥이 "돛대"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眞竹峰에 대한 설명 九龍峰으로 나아 갑니다 금방 龍이 튀어 나올것만 같습니다 九龍峰 입구 九龍峰 설명과 九龍峰 입구 九龍峰은 보시는 바와 같이 아홉마리의 용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노닐던 곳이라 九龍峰이라합니다 九龍峰 정상 九龍峰 정상 九龍峰 아래로는 천길 낭떨어지입니다. 안내판에서도 보았지만 명주실 한타래를 풀어도 닫지 않을 정도이니 얼마나 깊은 낭떨어지인지 짐작이 가시지요? 九龍峰 정상에서 바라 보는 眞竹峰과 비로봉 九龍峰 정상에는 아홉마리의 용이 노닐때 파여졌다는 발자국 웅덩이가 여기 저기 있습니다 이 웅덩이는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물 보이시죠? 九龍峰 정상에서 바라 보는 좌로부터 환희대, 722m봉, 연대봉 멀리 보이는 연대봉도 좋지만 바로 앞에 보이는 九龍峰의 바위들이 살아 꿈틀대는 듯 합니다 龍의 다리가 움직이는듯하군요 九龍峰 정상에서 정상酒를 한잔 했습니다 사진 속의 인물들은 저와 동행한 저의 "띠동갑"들입니다만 저를 친구처럼 대해줘서 항시 함께 산행을 했습니다 ㅎㅎ 저는 후배들이 많이 돌보아 줍니다 저 친구들도 쬐끔만있으면 금새 세월 흘러 나와 같은 선배 되리라~ 에구 세월아 네월아-- 九龍峰 정상에서 쇠주 한잔은 龍이 昇天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저를 챙겨주는 후배들을 위해 詩 한수 읊어 드려야 겠습니다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박우현


                  이십대는
                  서른이 두려웠다
                  서른이 되면 죽는 줄 알았다
                  이윽고 서른이 되었고 싱겁게  난 살아있었다
                  마흔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삼십 대에는 마흔이 무서웠다
                  마흔이 되면 세상 끝난 줄 알았다
                  이윽고 마흔이 되었고, 난 슬프게 멀쩡했다
                  쉰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예순이 되면 쉰이 그러리라
                  일흔이 되면 예순이 그러리라

                  죽음 앞에서
                  모든 그때는 절정이다
                  모든 나이는 아름답다
                  다만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를 뿐이다

 

 

 

 

九龍峰 에서 환희대로 되돌아 가고 있습니다 진죽봉과 환희대가 그림 같습니다 앞에 올라 오는 어린이들 보이시죠? 어른들의 가이드도 없이 이렇게 높고 험난한 산을 자기들끼리 올라 오더군요 초등학교 6학년 3명과 4학년 한명이, 일요일을 이용해 천관산엘 올랐답니다 요즘 컴퓨터 앞에서 세월 가는지 모르고 게임이나 하는 어린이들이 많은데 땀을 흘리며 자기와의 싸움을 하며 천관산을 오르는 이 어린이들이 하도 가상해서 기념 사진을 찍어 주기로 했습니다 이 어린이들입니다 山을 오른다는 것은 人生을 오르는 것입니다 이 친구들 넷이서 오늘은 천관산을 점령해 보자고 했답니다 그래서 천관산 '구룡봉'에서 이들이 추억을 남기고 간직할수 있도록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첨단 인터넷 시대에 살고 있어 이 사진은 곧바로 이 어린이들에게 전달 될것입니다 저의 블로그 '홍어와 무인도'를 알려 주었기 때문에 쉽게 찾아 들어 왔을겁니다 "얘들아! 이 사진 보았으면 댓글 하나 달고 가렴~~ 그래야 너희들이 보았는지 알수 있쟌아~" 요즘 인터넷 모르는 어린이는 없으니까요....그리고 사진 퍼 가고 싶으면 얘기해~ 내가 이메일로 보내 줄테니까 이 어린이들 대단하고 예쁘고 씩씩하고 공부 잘 하게들 생겼죠?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탑산사 계곡에도 기암괴석들은 난무하고 있습니다 천관산이 천관보살이 살던 신령스런 산이라 옛날엔 이 천관산에 엄청나게 많은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대부분 사라지고 천관사와 탑산사, 장안사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九龍峰에서 歡喜臺로 되 돌아 오는 풍경도 만만치 않습니다 장흥이 낳은 文人중에 "한승원"씨가 있지요. 그냥 한승원씨라 하면 잘 몰라도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쓴 소설가 한승원씨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아!~ 그 사람!!합니다. (사실 소설 이름은 알아도 작가 이름은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지요 ㅎㅎ)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더욱 유명해졌으며 강수연이라는 배우를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으로 수상하게하여 스타덤에 올려 놓아 세계적 배우로 발돋움 시키기도 했습니다 강수연이라는 배우가 그도 여자인데 그 여자가 아무리 배우라 해도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머리를 빡빡 밀기는 쉽지 않은데 과감히 밀고 열연을 했습니다 율부린너, 헤글러 보다도 더 빡빡 민 강수연. 그래서 더욱 유명해진 영화와 소설입니다. 그러니 저도 알지요 그 "아제아제 바라아제" 소설의 배경이 이곳 천관산 천관사에서 부터 시작되었다는군요 아!~ '파란문'의 산행기는 왠지 자꾸 읽고 싶지 않은가요? ...ㅎㅎ--- 환희대로 돌아 오고 있습니다 한승원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소설 공부를 하기 위해서 천관산의 천관사에 갔다가 억새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깊은 심오한 느낌을 받아 오랫 동안 잊을 수 없었답니다 그 양반이 쓴 어느 글에서 그는
'..... 자드락길 굽이굽이마다 들솟아 있는 억새풀, 띠풀, 싸리풀들이 내 키를 재면서 겨울 찬바람에 몸부림치며 울어댔다. 내 몸속에 그 억새숲의 울음이 절절이 스며들고 있었다. ...... 그 바람소리는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가슴 속에 머무르고 있다. .......' 그 당시의 기억을 소설로 풀어낸 것이 바로 '아제아제 바라아제'라고 그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환희대에서 연대봉으로 가고 있습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부성의 아픔 만을 남기고 떠난 아버지 운봉스님, 돈과 섹스에 눈이 먼 어머니 제주댁, 어머니와 내연의 관계이면서 자신을 겁탈한 중년의 사내, 현종 선생 현종 선생과의 오해로 인한 이별 등으로 속세의 아픔을 느낀 순보(강수연)는 이 세상 등지고 여승이 되고자 덕암사에 찾아오고..... 머리 빡빡 깍고..... 더 자세한건 직접 읽어 보세요....더 이상 쓰려니 눈물 나요 [722m봉에서 뒤 돌아 본 환희대] 멀리서 보는 광경과 가까이서 보는 광경이 너무나 다름니다 장흥이 낳은 또 한분의 소설가 - 이 청준 이분 아깝게 지난 7월에 운명하셨죠. 광주일고와 서울대 독문과를 나온 수재이십니다 운명 소식은 뉴스에 무지 많이 나왔으며 특히 연예뉴스에 많이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인기 연예인들이 문상을 많이 해서이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이청준선생이 쓴 소설이 어디 한두권이겠습니까만 제가 아는 소설은 묘하게도 또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더욱 유명해진 "서편제"입니다 '서편제'를 생각하면 생각만 해도 저는 눈물이 납니다 임권택 감독은 이청준선생의 "서편제"라는 영화로 오정혜라는 신출내기 국악인을 배우로도 성공시켰으며, 김명곤이라는 배우가 '우리나라 제8대 문화관광부 장관'이 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작품이기도하죠 천관산의 정상 烟臺峰은 점점 더 가까워 오는데 "서편제" 1960년대 초 이 천관산이 있는 장흥과 보성 사이의 보성 소릿재에서 누나와 아버지를 찾아 다니던 동호(김규철)는 주막 여주인의 판소리를 들으며 회상에 잠기면서 영화는 시작됩니다요. 이 천관산 봉우리의 억새밭이 그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마을 대갓집에서 소리품을 팔던 유봉(김명곤)은 동호(김규철)의 어미 금산댁을 만나 자신의 양딸 송화(오정해)와 함께 새 삶을 꾸리고 살아 가던 중에 금산댁이 아이를 낳다 둘 다 죽자 유봉(김명곤)은 아이들(동호와 송화)을 데리고 소리품을 팔며 이곳 저곳 이 마을 저마을을 떠돕니다. 동호에게는 북을 송화에게는 소리를 가르치던 중 동호가 생활고와 유봉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떠나버림니다 유봉은 송화도 자신을 떠날까 봐 떠나지 못하게 아릿따운 송화의 눈을 멀게 하지요. 봉사를 만듭니다. 아무리 양아버지라도 어찌 이런 짓을.... 또한 눈이 멀면 이 아릿따운 소녀에게 얼마나 한이 서리겠습니까? 봉사가 된 송화의 소리에서 한서린 통곡의 소리가 나오도록 하기 위해 그녀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이 장면을 생각만해도 눈물이 납니다 시력을 잃어가는 송화를 정성스레 간호하는 유봉, 그러나 그는 죄책감으로 죽어가며 송화에게 그 일을 사죄합니다. 세월이 흐른 후, 유봉과 송화를 찾아 헤매던 동호는 이름 없는 주막에서 송화를 만납니다. 송화에게 판소리를 청하는 동호, 송화는 아버지 유봉이 치던 똑같은 북장단을 치는 그가 동호임을 알지만... (흑흑..아이구 슬퍼라) 눈먼 송화는 벌써 희끗 희끗한 머리카락으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데..... 아 너무 슬퍼 더 이상 산행기를 쓸수가 없네요. 책 사서 읽던지 검색해서 영화를 보시던지 하세요 이 대사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년아! 가슴을 칼로 저미는 恨이 사무쳐야 소리가 나오는 뱁이여...! " '아제아제 바라아제'와 "서편제"는 자꾸 생각납니다 모두 너무나 슬픈 사연을 안고 살아 가는 한많은 여인의 이야기라 더욱 가슴 저밉니다 長興은 정말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下山하면서 長興이라는 고을 이름을 탄생시키는 女人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연대봉 못미쳐서 오른쪽으로 甘露泉이 있습니다 이런 곳은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1~20m정도 밖에 안되는 거리를 갔다 오는 분들이 별로 없더군요 [甘露泉] 남쪽 나라이기에 아직도 억새는 푸른빛을 띄고 있습니다 억새꽃에 맺힌 아침 이슬이 녹아 들어 만들어진 샘물 - 甘露泉 이 엄청난 억새가 만들어 낸 달콤한 샘물 甘露水를 마시지 않고 그냥 가시는 분들은 뭣하러 천관산에 왔는지 이해 할수 없습니다 띠 동갑들이 친절하게 떠 주는 甘露水를 마시니 甘露水여서라기 보다는 띠동갑들의 정성에 더욱 달콤함이 느껴지며 힘이 솟는 듯 했습니다 연대봉 가는 길 烟臺峰은 어느 여인의 풍만한 가슴 같아 보였습니다 산은 늙어 모난데는 없고 그저 평온하고 포근한듯 합니다 풍랑의 청춘을 지나, 중년의 풍요를 맛보고, 늙어 가는 듯 합니다 大勢峰, 天柱峰, 眞竹峰, 九龍峰등의 지나 온 산등성이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烟臺峰] 천관산의 최고봉 烟臺峰에 왔습니다 천관산은 환희대를 기점으로 모습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북서쪽으로는 아홉개의 봉우리가 아직도 젊음을 보이며 날카로운 산세를 보여 주었지만 연대봉 방향, 즉 동남쪽 방향으로는 산은 늙어 무등산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烟臺峰은 중요한 봉수대가 있던 봉우리여서 烟臺峰이라 한답니다 [烟臺峰] 천관산의 정상입니다 많은 산객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天冠山이 天子의 冕琉冠이라 생각하면 天冠山의 실제 정상인 [烟臺峰]은 天冠山을 대표하는 봉우리로 생각되지않습니다 오히려 지나온 大勢峰, 天柱峰, 眞竹峰, 九龍峰등이 天冠山을 대표하는 듯합니다 [烟臺峰 정상석과 연대봉에 대한 설명] 烟臺峰의 자도 연기 "연"자이지요, 煙자와 같은 뜻입니다만 烟臺 는 하나의 단어 입니다 .烟臺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제가 부연 설명합니다 烟臺(연대)는 고려시대부터 만들어 사용했으나 조선초에 본격적인 역활을 합니다 조선(朝鮮) 시대(時代) 4대 세종(世宗)대왕 때 외적의 침입(侵入)을 막기 위해 최변경(最邊境)에 설치(設置)한 봉수대(烽燧臺)를 말한다는군요 대(臺)는 사각형으로 쌓아 올렸는 데, 높이가 30척(尺), 밑면 1변의 길이가 20척이며, 그 둘레 바깥에 깊이 3척의 끝이 뾰족한 목익(木弋)(나무 말뚝)을 여러겹 둘러 박았답니다 대(臺) 위에는 가옥(假屋)을 짓고, 무기(武器)와 생활(生活) 용구를 준비하고, 봉화간(烽火干) 5인, 화포군(火砲軍) 2인, 망군(望軍) 2인, 감고(監考) 1인이 10일씩 근무하였답니다. 적이 나타나면 연기(煙氣)와 횃불로 다른 烟臺에 알리고, 신포(信砲)(신호(信號)로 쓰던 화포)를 쏘아 인근 주민(住民)에게 재빨리 알렸으며, 적이 침입(侵入)하면 요새로서 화포와 궁노(弓弩)를 쏘아 적을 방어하였답니다 그러므로 烟臺와 烽燧臺는 엄밀하게 얘기하자면 조금 다름니다 [烽燧臺] 烟臺峰 봉수대는 1149년(고려 의종 3년)에 처음 설치한 이래 계속적인 개축을 해왔는데, 지금의 봉수대는 1986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봉수대는 외적의 침입을 장흥의 억불산과 병영면의 수인산으로 알리는 동시에 제주도 한라산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내륙으로 전하는 곳이었다고합니다. 연대봉은 장흥에서 가장 높고 전망이 뛰어난 곳이어서 봉수대의 입지로는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군요 [烽燧臺 위에서] 여기서는 호남정맥 마루금이 지나는 제암산과 사자산이 보이고 또한 완도의 상황봉, 해남의 두륜산, 영암의 월출산, 광주의 무등산까지 다 보인답니다 날씨가 아주 맑은 날은 한라산도 보인다고 하는데.... 닝기리~ 오늘은 안개 때문에 모두가 오리무중입니다..ㅉㅉ. [烽燧臺에서 지나온 환희대 방향과 아홉개의 구정봉] 歡喜臺에서 부터 북쪽으로 솟아 있는 大藏峰과 天柱峰, 문수보현봉, 大勢峰, 善才峰, 觀音峰, 神上峰, 홀봉, 삼신봉 등 아홉 개의 암봉을 일러 "九程峰"이라 한다는 능선이 잘 보입니다 이 아홉개의 봉우리가 만들어 내는 "天子의 冕旒冠을 쓴 天冠山"이 아름답습니다 앞에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페라글라이딩을 준비하는 광경이 보였습니다 [烽燧臺에서 九龍峰을 바라 봅니다] 九龍峰을 배경으로 준비하던 페라글라이딩이 날개를 펴고 하늘로 솟아 오릅니다 페라글라이딩하는 실제 상황은 처음 봅니다. 바람이 불어 오는 방향으로 날라 오르더군요 九龍峰이 더욱 신비롭게 보입니다 [烽燧臺에서 바라 보는 불영봉 능선] 이 능선이 남동쪽으로 뻗은 불영봉 능선이라고 한답니다 봉황봉 능선으로 하산 이제 언제 또 다시 올것인가!~~ 그 동안 제법 많은 산을 돌아 다녔지만 오늘 天冠山은 영원히 잊지 못할 산으로 각인 되었습니다 '홍어와 무인도'를 아껴 주시는 횐 여러분! 시간 나실때 天冠山은 꼭 한번 다녀 오시라고 추천 드림니다 산행 시간도 슬렁슬렁 볼것 다 보고, 조사 할것 다하며 걸어도 5시간 정도 걸렸으니 거리가 멀다는 단점 이외에는 부담도 없으니 추천하고싶군요 하산하는 길목에 쌓여져 있는 돌무덤을 애뜻한 연정만을 남기고 홀로 떠나니 어쩐지 쓸쓸해 보여 미안한 느끼마져 듭니다 하산 하며 뒤돌아 본 연대봉 산객들도 무척 많이 찾아 왔더군요. 저만 이제까지 몰랐지, 다른 분들은 이미 아시고 천관산 품에 안기셨더군요 평범한 듯 보이는 능선을 내려 오니 곳곳에 전망대가 있었습니다 이 능선이 멀리서 볼때엔 평평한 능선으로 보였으나 의외로 아기자기한 암릉이더군요 제가 오늘 산행 들머리에서 [산행 개념도]를 보여 드리면서 "정안사"를 꼭 들리려고 했는데 시간 관계상 들리지 못해 매우 아쉽다고 했습니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좋은 공부거리도 되오니 읽어 보시기 바람니다 長興이라는 이 고을 이름을 한문으로 보면 금방 그 뜻을 알수 있겠죠? "길이~길이 흥하라"라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이 長興이라는 이름이 지어지는 이유가 高麗史에도 나오니 얼마나 중요한 시대적 산물인지 가늠할수 있어 집중 탑구를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900년전 어느 날 밤... "황색의 큰 깃발이 집의 중문에 세워지면서 깃발의 꼬리가 왕의 침소인 선경전 지붕의 용마루 끝을 감싸고 돌며 휘날리는 꿈을 꾸었다" - 高麗史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 앞으로 쓰는 글들도 高麗史를 토대로 나름대로 풀어 씁니다 이 꿈을 꾼 사람은 당시 문하시랑-요즘으로 따지자면 대통령 비서실장 정도 되는 "이 위"라는 사람이었고 이 사람은 앞으로 태어날 "女人"의 외할아버지가 됩니다 외할아버지 "이 위"가 꾼 꿈은 후에 궁궐의 왕의 침소인 선경전에서 놀게 될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했습니다 이 "여인"의 아버지는 당시 중서령이라는 관직에 있었던 이곳 長興 출신 "임 원후"라는 분입니다 1126년 여름으로 가는 6월에 이 "여인"이 高麗 인종의 왕비가 되고 아들 다섯을 낳는데 그 중에 아들 셋이 줄줄이 왕이 되니 그들이 "의종","명종","신종"입니다 우리나라 5,000년 역사에서 이런 엄마는 눈씻고 찾아 볼려고해도 찾아 볼수 없습니다 가히~ 우리나라 최고의 "여인'이자 "엄마"입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어디 가서 "나는 이 얘들의 엄마야~"라고 폼좀 잡을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엄마가 가끔 친정을 찾아 개경에서 머나먼 이곳 장흥까지 행차 할때는 가히 상상이 가시나요? 이 엄마는 딸도 넷이나 낳아 왕자와 공주를 데리고 행렬을 이루며 금의환향하곤 했답니다 오래도 살았는데 75세까지 살았습니다. 당시로는 무지무지 장수한것입니다 하여간 여자는 애를 잘 낳아야 건강하기도 하고 대우 받는 다니까요~ ㅎㅎ 이 "女人"이 그 유명한 공예왕후입니다 인종이 공예왕후에게 너무 고마워 공예왕후의 고향 이름을 지어 주었는 데 그것이 "長興"입니다 지금도 장흥에서는 매년 공예왕후의 친정 나들이를 재현하는 행사를 한답니다 공예태후의 생가가 "정안사(定安詞)"이며 천관산 입구에 있는데 꼭 가볼려고 했는데 시간 관계상 못가서 이렇게 안타까워 한답니다 [陽根岩] 해설 할 필요 없지요? ㅎㅎㅎ [陽根岩 아래에 있는 여성암 같은 바위] 요거이 여성봉 처럼 생겼더군요. 양근암이 바라 보고 있는 진짜 여성굴이 있다는데 그 굴이 金水窟이랍니다. 이 앞의 금수능선 어느 곳에 있다는데 .... 金水가 흐른다네요 공예왕후공예태후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왜내하면 왕비로 보다 아들이 왕이 되어 태후로 더 많은 세월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예태후는 그렇게 행복한 75년의 세월을 보내지는 못하고 오히려 복장 터지는 서글픈 세월을 더 많이 보냈다고도 할수 있겠습니다 이자겸의 척신정치와 무신정권의 출현으로 무신정권 밑에서 태후를 했기 때문입니다 高麗史에 나오는 공예태후의 어린 시절 이야기 조금 더 하지요 그 녀가 성년이 되어 김인규라는 평장사의 아들 김지효와 약혼을 하여 혼례식을 치르는 날 밤에 신랑인 김지효가 신부집 대문에 이르러 갑자기 사경을 헤매는 돌발 상황이 발생하였답니다 그래서 혼례를 중단하고 신랑을 돌려 보내고 난 다음 아버지 임원후는 점쟁이에게 점을 보았더니 점쟁이가 "그 녀는 곧 왕후가 돨 운명이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딸을 왕비가 되게하려고, 하늘이 찾아 들어 오는 새신랑을 반 죽여 돌려 보냈으니 앞으로 왕비의 아버지가 될 임원후는 물론 엄청 기뻣겠죠 그러나..... 이러한 사연이 개경에 소문이 납니다 그리고 당대의 실제 권력자인 "이자겸"의 귀에 들어 가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핵교 때 공부를 열심히 했다해도 "이자겸의 난"만 기억 하시죠? 뭔지도 모르고....ㅎㅎ 인종의 첫번째 왕후가 이자겸의 셋째딸이고, 두번째 왕후가 이자겸의 넷째딸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왕비에 관한 소문은 이자겸에게 치명타가 될수 있는 사안이라 펄쩍 뛰며 임원후를 한직으로 좌천 시켜버림니다 이자겸은 인종의 아버지인 예종의 장인 어른입니다 간단하게 말해 인종과 공예왕후의 외할아버지인것이죠 당시 이자겸은 조선시대 대원군 같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면 가장 쉽습니다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이자겸은 인종의 첫번째 왕비로 자신의 셋째딸을 시집 보냈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넷째딸도 인종에게 시집 보냅니다 그런데 이것 꽁까루 집구석도 아니고 괴상 망측한 집구석 아닙니까? 인종의 아버지가 예종이고, 예종의 왕비가 이자겸의 둘째딸(순덕왕후)인데 예종과 이자겸의 둘째딸(순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인종은 이자겸의 셋째딸과 넷째딸하고 결혼을 하니......황당하지만 진짜입니다 요즘같은 세상에는 상상도 할수 없는 근친혼례아닙니까?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자면 인종은 자기 엄마의 여동생 - 즉 '이모' 둘 하고 한방 쓰며 결혼 생활했다는거 아닙니까 그리고 이모들 하고 헤어진 후 인종의 셋째 부인으로 공예왕후가 다시 들어 오는 것입니다 그통에 "長興"이라는 고을 이름이 유명세를 타며 생겨나게 됩니다 딸을 왕에게 시집 보내기의 명수라면 전세계에서도 최고라고 자랑 할 이자겸 그리고 이자겸의 딸들...아무리 아버지가 시집 가라고 정해 줘도 외조카한테 어찌 시집을 가나요 世界史에서 야리꾸리한 비슷한 이야기를 하라면 이 뇨자 빼 놓을 수 없죠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이 뇨자는 자기 친 남동생 두명하고 결혼을 하지요? 그리고 권력 휘두르는데 걸림돌이라고 결혼한 자기 남편이자 친남동생인 두놈을 모두 죽이고 로마의 씨이져와 결혼해서 아들까지 낳고는 다시 안토니우스와 결혼한 '클레오파트라' 정말 끝내줍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쳐들어와 자기를 죽일려고 하자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다고 서른아홉살에 독사 풀어 놓고 독사에 물려 죽는 자살을 했으니..毒하긴 毒한 여자의 대명사이죠? 우리나라 현대에서 가장 毒한 여자 꼽으라면 최근에 자살한 최진실씨를 꼽을 수 있을려는지... 자기에게 안티 네티즌들이 최'진실'이 아니라 최'가식'이라고 악플 단다고... 사채놀이 않했는데 했다고 수근거린다고..그런 저런 이유로 그렇게 돈 많이 버는 스타 집어치우고 죽어버리면 그런 소리 안들을테니 에이 씨파- 자살이나 하자고 자살을 했으니 얼마나 독해요? 에구~자살도... 쉽지 나같은 평범한 맹물같은 인간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인데... 고려의 이자겸은 조선시대의 한명회의 스승 쯤 되는 인간이죠. 딸 셋을 왕비로 만들고 특히 외손자에게 친딸 두명을 시집 보냈으니 엄청난 역사적 인물이죠 한명회는 딸 두명을 왕비로 만들었죠? 그래도 조선의 聖君에 속하는 성종과 예종의 왕비가 한명회의 딸들입니다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던 이자겸 이자겸이 무지 울궈먹은 "十八子爲王" - 즉 李氏가 王이 된다는 도참설을 예언하고 놀다 사돈지간인 척준경에게 배반의 뒷통수를 맞고 죽어 갑니다. "十八子爲王" - 즉 李氏가 王이 된다는 도참설은 이미 이자겸이 울궈먹은 것인데 얼마후에 그러니까 고려말에 이성계가 뒤따라 또 울궈 먹고, 그 때는 성공을 하죠? 이자겸의 사돈인 척준경은 이자겸과 한패였는데, 이들 사이를 이간질 시켜 죽이게 만드는 역활을 인종과 인종의 셋째 왕비 "공예왕후"가 했다는거 아입니까 그렇게 무서운 권력을 휘두르던 이자겸도 부루터스 같은 척준경의 칼에 죽고 왕비가 된 그의 딸들도 폐비가 되며 좆겨납니다 [오전에 출발 했던 영월정에 되돌아 왔습니다] 한가지 꼭 덫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자겸이 그의 넷째딸을 인종에게 시집 보낸 중요한 목적이 인종을 감시 하도록 한것이었습니다 어린 인종이 점점 커 권력을 잡으려하며, 말을 잘 듣지 않자 이자겸은 외손자인 인종을 왕비인 딸을 시켜 독살을 하려했는데 毒藥을 들고 가던 넷째딸이 자기 남편인 인종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를 배반 하고, 일부러 넘어져 毒藥을 쏟아버림니다. 또 毒이 든 떡을 인종에게 보냈는데 이 뇨자가 일러받쳐 인종이 먹지 못하도록하고 인종이 까마귀에게 던져 주었더니 까마귀가 먹고 죽었답니다 이런식으로 몇번이나 인종의 목숨을 구해줍니다 高麗史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 여자는 친정 떠나 출가 하면 아버지보다 남편이 더 우선이라는 것은 인간의 天倫인가 !!~~ [주차장] 자동차로 만원입니다 '테마캠프'라는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 왔습니다 天冠山 정말 아름답고 멋진 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얘기꺼리가 너무 많은 산이기도 했습니다 글 읽느라고 힘드셨죠? ㅎㅎ 저는 쓰느라고 힘들었습니다
파 란 문 印  ★살며..느끼며..서로 사랑하며 ☆홍어와 무인도☆


主屹山 산행기 

綠陰芳草勝花時
"푸른 나무와 향기로운 풀이, 꽃피는 시절보다 낫다"
오전에 안개가 조금 끼었으나 푸르른 6월의 화창한 날씨에
新錄은 타는 여름의 태양 아래에서 검푸르게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6월14일(토) 
경상북도 문경시의 진산이며 조령산과 함께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한양에서 영남지방으로 가는 중요 교통로 였던 "문경새재"를 이루고 있는
주인 主, 산 우뚝할 屹이란 이름을 가진 주흘산을 찾아 나섰습니다.
잘 사용하지 않는, 저는 처음 알게된 '산 우뚝할 屹자'에서 부터 심상치 않은 
山이란 느낌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산을 향해 일찍부터 준비하여, 山友들과
승용차를 몰고 중부,중부내륙고속도를 따라 소백산맥이며 백두대간인
이화령을 뚫고 '문경새재'로 갔습니다

[문경새재 주차장]
오전10시 정각에 문경새재 주차장에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예정 시간보다 1시간이 늦었는데 이제 정신까지 가물거리는지 제가 집에서
정확하게 1시간을 착각하고 만남의 장소로 나가는 愚를 범해 발생한것입니다
동행자들에게 송구한 마음 이렇게라도 전하옵니다

[주차장에서 '문경새재 제1관문'으로 가는 길]
주차장에서 '영남제1관문인 주흘관'까지는 20여분정도 걸리는 제법 거리가 있었습니다

[선비의 상]
문경새재라하면 우선 옛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오르내리는 광경을
연상하게 됩니다. 머리 좋은 지역사람들이 관광객들을 위해 자신들이 '선비의 고장'에서
대물림하며 사는 듯한 연상을 하도록 잘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율곡선생이나 퇴계선생등 여러 선인들의 詩碑도 있었습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문경새재 입장료를 받았는데, 지금은 받지 않고
KBS 촬영셋트 입장료만 별도로 받았습니다

[문경새재길의 시작]
멀리 주흘관(영남제1관문)이 보이면 鳥嶺, 즉 새재는 시작됩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이곳에서 행사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새재 맨발 걷기 대회"
그래서 평상시보다 무척 많은 사람들이 새재를 꽉 메우고 있었습니다

주흘관 뒤로 오늘 가야할 주흘산이 길게 뻗어 있습니다

[主屹關 - 嶺南第一關]
오늘 맨발걷기대회가 있어서인지 옛복장을 한 영화에서나 보는 성지기들이
울긋불긋한 복장을 하고 새재를 찾은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城門은 뒷쪽에서는 嶺南第一關이 되겠으며,
등산로는 이 사진의 왼쪽, 즉 주흘관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나 있습니다

[주흘관의 오른쪽 등산로 입구]
등산로 입구는 이 길 하나이므로 혼돈할 염려는 없습니다

주흘관에서 조금 가면 조그만 다리를 오른쪽으로 건너 등산로로 들어 섭니다

[주흘산 등산안내도]
주흘산 등산로는 크게 [1코스, 2코스] 두 코스가 있는데, 1코스는 주흘산 정상을
오르고 영봉을 돌아 내려 오는 코스이며, 2코스는 주흘산 종주를 하는 긴 코스입니다
우리는 2코스를 점령하기로 하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 했습니다

우거진 숲 때문에 주흘산 정상 근처까지 올라야 바같 세상을 만날수 있습니다
계곡길은 언제나 시야를 가린다는 단점이 있으며, 그늘 속에서 걷기에
덥지않아 좋은점도 있습니다. 저는 더워도 시야가 확 트이는 암산을 좋아합니다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며, 경사는 심해 주흘산 주봉까지는 매우 힘겹더군요

심한 경사면을 타고 오르다보면 땀이 날때쯤에 주흘산의 자랑거리인
[여궁폭포]에 다다릅니다

[여궁폭포]
이런 비슷한 규모의 폭포들이 이곳 저곳에 제법 있기도 했습니다만
아마도 주흘산에선 제일 규모가 큰 폭포인듯합니다.
특히 이 폭포의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여궁폭포]
물론 여성의 성기를 닮아 붙인 이름이겠지요.
그런 각도라면 사실 거의 모든 폭포가 닮지 않았나요?
차라리 저 같으면 "愛瀑"으로 짖겠습니다

[여궁폭포옆의 기암괴석]
보는 사람들의 수준에 따라 감상하시길....

산행로는 경사가 심해 힘들었지만, 깊은 숲과 계곡으로 시원했습니다

앞에가는 산꾼은 저의 산행기에 자주 등장하죠? 뒷모습을 주로 보여드리는데ㅎㅎ
토욜엔 산에 가고 일욜엔 교회 가는 일로 삶의 만족을 얻는 산꾼이죠
'북한산성12문종주산행기' 보시면 앞모습도 나옵니다. 궁금하시면 가서 보세요ㅋㅋ
오늘은 특별히 이 산행기의 마지막 부분에 동반자들의 사진을 조그마하게 올렸습니다

[안정암]
주차장에서 50분, 주흘관에서 30여분 오르니 [안정암]이란 곳이 나왔는데
안개와 숲이 태양을 가려 껌껌했으며, 어떤 암자나 볼거리는 없었고 휴식터 같았습니다

사진을 찍을 땐 각도를 지형의 각도에 맞추어 찍으므로, 사진으로 볼때엔
경사도가 심하지 않은것처럼 나옵니다만, 실제 경사는 사진보다 훨씬 심하죠

숲속을 헤치고 오르니....

[대궐터 약수]
'대궐터 약수터'가 나왔는데 물맛은 좋았습니다. 이 약수는 매우 오래�다는군요.
고려말 공민왕(恭愍王)이 피신와서 여기에 대궐을 지어려 했다는 데서 유래�다는군요.
에구~ 불쌍한 공민왕. 노국공주를 사랑하다 왕위까지 버려야했던 비운의 왕이었죠
이 친구는 청량산에까지 피난가죠? 청량산 가는 길목이 또한 이곳 문경새재이니까요

[대궐터]
오두막 정도 지을많한 좁은 곳인데..대궐터라니 좀 그렇군요. 하기야 피신하는
패망한 고려의 왕이 남들이 안보이는 곳에 눈에 뜨이지 않게 피신해야했으니
웅장하게 지을 수는 없었겠죠. 그래도 고정관념에 잡혀있는 저로서는
대궐터라니...초라해 보였습니다. 권력무상

대궐터에서 대궐터 능선으로 오르는 길

주흘관에서 여기 [대궐터 능선]까지가 가장 힘든 등산코스였습니다
주차장에서 1시간30분, 주흘관에서 1시간10분 걸렸습니다.
오늘 같이 산행을 하는 산꾼들이 어찌나 빨리 걷는지, 일반인들이 1시간50분에 걷는
코스를 1시간10분에 걸었으니....
저때문에 늦게 걸어서 그것도 더 걸렸다고 하니 상상이 가죠? ㅎㅎ
우리 동창회 가면 그래도 제가 등산에 대해 폼좀 잡는데 이분들 땜시 새�습니다

[小 天關門]
깊은 터널을 뚫고 나와 처음으로 바깥 세상을 조망했습니다
하늘로 가는 작은 문이었습니다

[天關門]
조금 올라 가니 가슴 속까지 얼어 붙게 할 정도의 바람이 불어 오는 [天關門]이 나왔습니다
하늘로 가는 큰 문인 天關門은 聞慶市를 조망 할수 있게해 주었습니다
 聞慶 - 들을 聞, 경사스러울 慶
즉 경사스런 소리만 들리는 그런 곳 - 문경
이름도 잘 지었습니다. 살기 좋은 동네는 언제나 경사스런 소리만 날테니까요
퇴계 이황선생님 - 아시죠? 제가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
이 분이 옛날에 이 문경 새재를 넘어 안동 고향으로 갈때 詩를 읊었는데
퇴계선생은 '경사스런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표현하지않고
한양에서 충청도를 지나 문경새재를 넘으니 사투리가 정겨운
"경상도 소리가 처음으로 들리는 곳'- 즉 고향의 소리가 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경상도라는 말도 경사스러울 慶에 높힐 尙으로 언제나 경사롭기를 바라는 의미이죠
경주와 상주를 합쳐 경상도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전주와 나주를 합쳐 전라도로 하고
충주와 청주를 합쳐 충청도......강릉과 원주를 합쳐 강원도....믿거나 말거나

천관문을 지나 주흘산 主峰으로 올라 갑니다

주흘산 주봉 정상

[主屹山 主峰]
주흘산 주봉 정상은 짐작에 기암괴석의 암봉일것이라고 추측했는데
평범한 그런 봉우리였습니다.
그래도 재미있는 것은 주흘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는 앞으로 갈 [주흘산 靈峰]인데
이곳을 主峰이라고 한 사연이 있더군요.

[主屹山 정상석]
이곳 주흘산 주봉의 높이는 보시는 바와 같이 1,075m입니다만
앞으로 갈 주흘산 靈峰은 1,106m로서 主峰보다 31m가 더 높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主峰이라 한것은 모양새가 주흘산을 대표할수 있는 봉우리를 지정하려면
이곳이 영봉보다 훨씬 상징성이 더 있다고해서라니 영봉은 얼마나 볼품이없겠습니까?
주흘산의 명성을 견주어 보면 저는 이곳 주봉도 볼품없어 보입니다

[주흘산 주봉에서 바라 본 문경시내]

[주흘산 주봉에서 영봉 가는 길]
처음 가시는 분들은 매우 유의 해야하는 갈림길입니다.
저희들은 여기서 상식적 방향감각과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길이 나있어서 알바를 했습니다
길을 물어 보았는데 자세히 아는 분들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여기까지를 산행 코스로
잡고 있는 분들이라 길을 아는 분들이 없었습니다. 천관문까지 갔다가 다시 올라왔지요.
길안내를 잘못해준 분들을 욕할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도움을 주려 했을테니..
사진에 보이는 끈의 좌측이 천관문에서 올라 온 길입니다.
이 끈의 우측으로 거의 되돌아 가듯이 우측으로 가야 靈峰으로 갈수 있습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영봉 가는 길
여기서 부터는 등산객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주흘산 주봉 정상을 오르고 바로 하산합니다
경상도 이야기가 나왔으니 무뚝뚝하기로 세계적인 경상도 남자와
여자의 대화 하나를 유머로 소개 해 드리겠습니다
漢陽夫婦와 慶尙道夫婦의 差異 一話
서울부부와 경상도부부가 배를 타고 여행을 가고 있었다.
서울부인이 마침 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고 애교스런 음성으로 
"자기야~ 저기 저 달 너무 예쁘다 그지”

하고 말하자 서울 남편은“아냐, 자기가 더 예뻐”
이걸 옆에서 보고 있던 경상도부인
 "자기야, 달이 참 밝제” 하자

남편이 하는 말
.
.
.
“와, 달이 니보고 뭐라 카더나”


주봉에서 영봉 가는 길은 한적하고 평이합니다

주봉에서 2~30분 정도 가면

영봉 표지판이 나옵니다
[제3관문]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영봉 정상으로 올라 가는 길

[주흘산 영봉]
주흘산이라는 명성에 비해 최고봉인 주흘산 영봉은 다소 초라합니다
오죽하면 자기보다 높이가 낮은 봉우리에게 主峰자리를 뺏겻겟습니까

[주흘산 영봉 정상석]
높이가 主峰보다 31m가 높은 1,106m입니다

주흘산 영봉에서 [釜峰]을 가는 길은 저 정상석 뒤로 나 있습니다

영봉에서 부봉 가는 길엔 산객들을 더욱 볼수 없습니다

점심식사와 휴식을 1시간정도

영봉에서 부봉까지는 능선입니다
많은 봉우리를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하지만, 완만한 경사로 걷기에는 별 문제 없습니다

주흘산 정상 능선에 올라 서니 사방으로 조망 할수 있었는데.....

어디가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묘하게도 주흘산은 방향감각 잃기가 쉽더군요
하지만 산행로는 외길이라 몇군데를 제외하고 길찾기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월악산 방향이나 앞에 보이는 암산이 월악산은 아니고 월악산은 그 뒷쪽에 있다는데...

능선길을 따라 제법 오랜 시간을 걷습니다

[백두대간 라인]
걷다보면 위와 같은 이정표를 만나는데 
여기서부터 釜峰 안부까지는 [백두대간길]입니다
포암산과 이곳 사이의 '하늘재'를 건너 이 곳으로 뻗어 와 釜峰안부를 거쳐 '새재제3관'인
鳥嶺關을 지나 조령산과 이화령으로 가는 백두대간 길입니다.

[백두대간 종주자들의 기념 리본들]
이산 저산을 다니다 보면 대간이나 정맥 종주자들의 리본을 많이 보게 됩니다
정말 그 분들 존경스럽습니다. 언제 나도 한번 도전해 봐야 할텐데.....★이루어지려나~

백두대간길 만나는 지점에서 북쪽으로 직진해 갑니다
백두대간을 線, 즉 line으로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크게보면 line이라 할수 있지만 글자 그대로 線이 아니고 幹입니다
幹은 줄기 '간'이며 大幹은 큰줄기를 말하는 것이므로 線이 지나는 
산줄기가 모두 幹인것입니다. 
線은 面積이 없지만 幹은 面積이 있습니다

釜峰 가는 길에서 부터 암릉이 많아 구경거리가 많았습니다

로프를 타고 오르내리는 곳이 이제부터 많이 있습니다

주흘산을 오시는 분들은 최소 釜峰능선까지는 산행을 해야 온 보람을 느끼리라~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먼곳까지 와서 주흘산 주봉과 영봉만 오르고 갔더라면
후회 많이 할뻔했습니다
저 앞의 釜峰의 제1봉이 보입니다

암벽을 내리고 올라서....

[釜峰 안부 이정표]
이정표의 뒷쪽으로 釜峰 가는 길이고, 오던 길에서 계속 직진해 가면 제3관문으로 갑니다
우리는 釜峰을 넘기 위해 곧바로 올랐습니다

釜峰의 제1봉을 오르고 있습니다
釜峰은 6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긴 능선입니다.
백두대간에 붙어 있는 支幹인 셈입니다.
하지만 능선이라 하지 않고 6개봉우리를 모두 합쳐 하나의 봉우리-釜峰으로 표현하고있습니다
6개를 합쳤을때 진정 釜峰의 美가 살아 난다나요? 뭐래나

[부봉의 제1봉 정상]
제1봉 정상엔 무덤이 하나 있었는데, 가신 분을 좋은 자리에 모시고자하는 정성을 느낄수
있었으나 살아 있는 자손들이 성묘를 가려면 무척 고생 스러울듯합니다.
그래서인지 무덤은 찾는 이들이 별로 없어 많이 홰손되 있습니다. 이럴바엔
찾기 쉬운 곳에 묘자리를 쓰는게 더 좋을듯....

[부봉의 정상석]

[부봉에 대한 안내판]

      가야할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군요.
      해는 벌써 기울어 지기 시작하는데....

[제2봉 밑의 천연 대피소]
갑작스런 기후변화로 조난을 당하면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이용 가능

[부처 바위]
공식적 안내판에는 제2봉과 제3봉 사이에 있다고 표기되있으나....
봉우리 계산을 잘못했는지 저는 1봉과 2봉 사이에 있는듯 합니다..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럴듯하죠? 釜峰이 내세우는 대표적 구경거리입니다

2봉을 오르고 있습니다

2봉 중턱에서 1봉을 뒤돌아 봤습니다

2봉도 암봉이었습니다

[2봉에서 바라 본 3봉]
3봉은 오르지 못하도록 막아놨습니다

3봉 옆구리를 지나

[제4봉]
5봉 오르는 중턱에서 바라 본 사진만 올립니다

5봉을 오르고 있습니다

[5봉 사자바위]
사자 같나요?

5봉에서 바라 본 6봉

[5봉 정상]

[주흘산 주봉과 영봉]
멀리 주흘산의 주봉과 영봉이 이제서야 윤곽을 드러 냅니다
어휴~험난한 길을 무지무지하게 걸었군요

5봉을 내려 가고 있습니다

5봉과 6봉 사이의 안부

6봉을 오르고 있습니다
6봉은 거대한 바위덩어리로 되있어 철제 사다리를 설치해 놨더군요

6봉 오르는 중턱에서 바라 본 5봉

6봉 정산을 암벽 옆구리로 오르고 있습니다

6봉 정산에서 바라 본 지나온 주흘산

6봉에서 바라 본 조령산과 가운데 [문경새재] 계곡길
문경새재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釜峰의 제6봉 정상 이정표
아직도 갈길이 많이 남았는데 서산에 해는 기울기 시작합니다

엄청나게 왔는데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네요
제1관문 아래의 주차장까지 가야 합니다

6봉에서 하산 하고 있습니다
이 곳을 안왔더라면...가정법입니다만 후회막급이었을 것입니다
주흘산의 釜峰의 여섯봉우리를 가 보지 않고는 주흘산 다녀 왔다는 말을 삼가야 하겠습니다
관악산 6봉능선 정도는 될듯합니다

6봉을 하산하는 것도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가파르기도 하지만, 거리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암벽을 내려와 숲을 헤치고 나아가니....

맑은 문경새재의 계곡물이 우리를 반겼습니다
여기서 지친 몸을 추스리고 피로를 풀었습니다

계곡에서 새잿길로 나오니 '동화원'이라는 옛 숙박업소가 있던 자리에
현대식 휴게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손님은 이미 모두 하산 한듯
조용했습니다

[조령산성 안내도]

[문경새재 길]
문경새재길은 잘 정비되있어 걷기에 한결 편했습니다.
하산길이 이렇게 평이하지 않았다면 무척 고생했을텐데....좋았습니다
여기까지가 약 8시간을 걸었는데 앞으로도 1시간 반 정도 가야합니다

오늘 같이 산행을 한 형제분
이 분들 등산프로들이라 무지 빨리 걷는 통에 저는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어거지로
완주를 했습니다


[옛 문경새재길]
중간 중간 정비해논 새재길 옆으로 옛길들이 남아 있었고, 그것도 자랑이라고
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嶺南第二關]인 [鳥谷關]

[鳥谷關 약수]

[嶺南第二關]인 [鳥谷關]
경상남북도를 영남지방이라고하죠?
영남지방이라는 말이 이곳 鳥嶺- 즉 문경 새재의 南쪽지방이라는 뜻이죠
사람들에 따라서는 竹嶺도 鳥嶺과 함께 포함 시키기도하더군요

 [鳥谷橋에서 본  [鳥谷關]

[鳥谷關 앞 鳥谷橋앞에 있는 조곡폭포]
천연폭포인지 인공폭포인지....잘 모르겠더군요

조곡폭포에서 덜어지는 물을 연결해서 물레방아를 돌리고

꾸구리 바위를 지나는데....
꾸구리는 우리나라에만 서식하는 잉어과의 물고기라고 하는데
여기에 있던 꾸구리는 송아지를 잡아 먹을수 있을 정도로 컸었다고하며
새재길에 여자가 지나 가면 희롱을 하며 희죽거려 저 바위가 덜썩거렸다고 하네요

[용추바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가 마지막으로 죽는 장면을 촬영한 장소
원래는 철원의 명성산에서 궁예가 통곡을 하며 최후로 넘었다고 하죠?

[交龜亭]


[조령원 터]
제3관문 근처의 동화원과 유사한 요즘으로 말하자면 호텔, 영빈관 같은 곳으로
주로 관리들이 이 새재를 넘을 때 묵고 가던 곳이랍니다
      

[지름틀 바위]
지름은 기름의 경상도 사투리이죠?
깨나 콩등을 찧어 기름을 짜는 방아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지름틀 바위]라 한답니다

[KBS 드라마 촬영 셋트장]
태조 왕건, 대조영, 요즘은 '대왕 세종'을 촬영하고 있다는군요

오전에 산행을 시작했던 제1관문인 주흘관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주차장이 있는 곳 근처 음식점에 들어 가니 저녁 7시30분이었습니다
오전 10시에 이곳을 출발 했으니 9시간30분이 걸렸군요
두부와 청국장, 소주로 오늘 산행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거의 밤 12시가 가까웠으나, 내일 또 청계산 산행 약속이 있어
내일 산행 준비를 하는라....또 잠도 제대로 못자고 청계산으로 향했습니다

행운의 절반은 내가 만들고, 나머지 절반은 친구가 만들어 준다

- 스텐톨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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