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도립공원 하남위례둘레길"
 "이성산-금암산-연주봉-남한산-벌봉-객산"산행기 2부
     덕풍골-사리고개-이성산-향여교개-금암산-연주봉-남한산성북문-
     봉암상-벌봉-막은데미고개-사미고개-객산-매봉-샘재
    "하남위례둘레길을 찾아서" 
        '병자호란'의 아픈 역사가 남아 있는 "법화골"
        그 "법화골"을 에워싸고 있는 '하남'의 산줄기를 찾아 갑니다.

      -  - - 산행기 2부 - - -

  
  ['위례둘레길' 위치 구글어스]

  지난 [1부 산행기]에 이어서 [2부 산행기]를 시작합니다.
  오늘은 "남한산성 종로"에서 출발하여 "봉암성"을 지나 "샘재"로 하산하는 코스가 되겠습니다.
  거리는 GPS 측정으로 10.7km 였습니다.


  [지하철8호선 '산성역2번출구' 버스정류장]       11:13

  2014년 8월 26일 (화) 맑음 
  모처럼 안개가 없는 맑은 날인듯하여 부랴부랴 보따리를 꾸려 길을 나섯습니다.
  지난번 예기치 못한 사유로 절반의 산행만을 한 "위례둘레길"의 나머지 구간을 다녀오기 위해
  이번엔 [지하철8호선]을 타고 [산성역 2번출구]로 나가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52번시내버스]로 환승하여 "남한산성" 안으로 올라 갔습니다.


  [남한산성 종로 로타리]     11:30

  [52번버스]는 약10여분 정도 걸려 "남한산성 종로" 종점에 도착했습니다.
  "종로 鐘路"는 이곳에 산성을 총괄 연락하는 "종각 鐘閣"이 있었다고 "종로"라 한답니다.
  간단하게 산행 준비를 하고 우측 "북문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다소 늦은 시각에 출발을 하는군요.
  "남한산성 南漢山城"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경기도남한산성도립공원'은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고 합니다.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남한산성'에서 맞으며 치욕의 역사를 쓴 곳이기도 합니다.
  '남한산성'의 규모는 
  본성이 9.05km, 옹성이 2.71km로서 총 11.76km라고 합니다.
  경기도의 3大 山城 중에 하나로 "북한산성" "문수산성"과 함께 
  한양을 수호하는 山城이었습니다. 지금은 관광지? ㅎ
  '인조 15년, 1637년 1월 30일'
  저 앞에 보이는 "행궁"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왕인 "조선 제16대왕 인조"는 
  '남염의'라는 색 바랜 평민들이 입는 옷을 입고, 계급장 모두 떼고, 
  시종 50명과 왕세자 '소현세자'를 대동하고, 백마를 타고 나와  "서문"으로 나갔습니다.
  왜냐구요?  "누루하찌"에게 항복하러...
  조선왕조실록 "仁祖實錄"에는 그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인조 15년, 1637년 1월 30일'의 "仁祖實錄" 원본 번역문입니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성 밖에 와서 왕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왕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중략)
  삼전도에 내려가「왕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북문' 가는 길]     11:33

  "북문" 가는 길입니다.
  가는 길은 평지성이며 5분 정도 걸리는 매우 가까운 곳에 "북문"은 있습니다.
  앞에 보이는 산 우측에 있습니다.


  [北門-全勝門]     11:38

  "北門 - 全勝門"
  [위례둘레길]의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고골-법화골"로 통하는 성문입니다.
  '병자호란' 당시 이 문을 통해 300명의 정예부대가 '청나라' 10만대군을 처부수러
  내려 갔다는데 조금 있다가 자세한 내용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북문]

  300명으로 10만 대군에 대항하러 나갔다는 그 자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이순신장군'은 자기가 불리하면 절대 싸우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싸워 모두 이겼습니다.
  지난 역사를 생각하면 씁쓰름하기만 합니다.


  [남한산성 본성 성곽길]

  이제부터 "봉암성 암문"까지 '남한산성 본성 성곽'을 따라 진행 합니다.
  25분 정도 걸리더군요.


  ['1부' 산행코스]                        

  지난 1부 산행코스인 "이성산-금암산-연주봉"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한눈에 들어 오며
  "아차산-망우산-불암산-수락산-도봉산-북한산"으로 이어지는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아득히 "북한산 백운대-인수봉-만경대"와 "도봉산"이 새롭게 보입니다.


  ['고골' (법화골)]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기습 공격한 "고골-법화골"이 앞에 펼쳐집니다.
  10만 대군이 포위하고 있는데 300명이 내려가 기습공격을 해? 
  당시엔 겨울이어서 앙상한 나무가지로 시야가 트여 성문으로 누가 들락거리는지도 철저하게
  감시 당하고 있었고, 당시에도 망원경이 있어 동태파악이 확실이 되었는데도
  성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수는 없으니 뭔 껀수를 만들려고 한게 '바위에 계란 던지기'였습니다.
  조선군의 동태를 훤하게 파악하고 있던 청나라군은 앞에 보이는 계곡에 없는듯 숨어 있다가
  아무도 없는 계곡에 어리둥절하여 철수하는 조선군 300명을 단 한명도 남기지 않고 전멸시키고
  말았는데, 이를 "법화골전투"라 하고,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로 참패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후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북문'을 개축하고 
  그때의 참패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전승문 全勝門"이라 개명 하였답니다.
  그날의 상황은 "인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 있습니다.
  '인조 14년 병자년 (1636년 12월 29일)' 
  이날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체찰사 김류가 성위에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올라 오라고 전령하였다.
  그 때 갑자기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申誠立)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待罪)하니,
  왕이 위유(慰諭)하였다.


  ['북문'방향 조망]

  '수어장대'와 '북문' 사이 성 안에 "행궁"이 있습니다.
  조금 있다가 오를 "봉암성"의 "벌봉"근처가 앞에 보이는 "청량산" 보다 높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은 "벌봉"을 먼저 점령하여 저 앞 행궁을 향하여 '화포'를 쏘았습니다
  '인조실록'에는 포탄이 행궁까지 날라와 행궁에 타격을 가하여 항복하지 않을수 없었다고...


  ['봉암성' 방향]

  조금 있다가 답사할 "봉암성"이 보입니다.
  저곳에서 화포를 무자비하게 발사했다는 것 아닙니까.
  '남한산성'으로 접근하기가 가장 쉽다는 능선이 "객산"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오늘 진행할 능선이며,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이 이용한 능선이 되겠습니다.


  [제4암문]        11:58

  "북문"에서 성곽을 따라 20여분 진행하면 첫번째로 "암문"을 만나는데
  [제4암문-북암문]이라고 합니다.


  [제2군포지]

  '암문'은 비밀통로'를 의미함으로, '암문' 근처엔 요즘 말로하자면 '초소'인 "군포지"가
  있었답니다. 이곳에는 [제2군포]가 있었던 곳이라 합니다.


  ['봉암성암문' 오름길]

  [제4암문]에서 [제3암문-봉암성암문]으로 오르는 길은 급경사 오르막입니다.
  오늘 코스에서 가장 힘든 곳입니다. ㅎㅎ 7분 정도 오르면...


  [제3암문]        12:06~12:11

  [제3암문-봉암성암문]이 나옵니다.


  ['봉암성암문']

  [제3암문-봉암성암문]은 암문으로는 제법 규모가 있는 암문입니다.
  그 이유는 "봉암성"으로 통하는 유일한 門이기 때문일것입니다.


  ['봉암성' 가는 길]

  "봉암성"으로 가려면 성밖으로 나가야 하며...
  성밖으로 나가 우측으로 50여m 진행하면...


  ['봉암성문']       12:13

  "남한산성 본성"에 빌붙어 있는 "봉암성 성문"을 만나고...


  ['봉암성' 안]

  "봉암성" 안으로 들어 가면 성곽이 홀쭉하게 나란히 축성되 있습니다.


  [뒤돌아 본 '동장대터'와 '봉암성문']

  "봉암성" 안으로 조금 들어가 뒤돌아 보면
  "남한산성 본성"과 "봉암성"의 관계를 알수 있습니다.
  "봉암성"은 오로지 "남한산성 본성"을 지키기 위한 보조 城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봉암성"이 함락되어도 본성으로 들어 갈수 없도록 설계하였답니다.
  그리고 "여장 女墻"이라고 표기한것 보이시죠?
  "여장"은 성곽 위에 다시 성곽을 쌓은 것을 말한답니다.
  본성을 지키기 위해 다시 "여장"을 쌓은 것이겠지요?
  조금전 "북문"을 지날때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이 "벌봉" 근처에서 화포를 쏘아 '산성 안'이
  치명적 피해를 입어 항복하게 되었다고 알려 드렸죠?
  그래서 병자호란 이후 '숙종' 때에 이 "봉암성"을 새로 축조했다는 것입니다.
  이나저나 "봉암성"은 아직 복원을 하지 않아 허물어진채로 방치되있습니다.


  ['검단산-망덕산-두리봉' 조망]

  "봉암성"에서 남쪽을 조망합니다.
  며칠후 답사할 예정인 "남한산성-검단산-망덕산-두리봉-군두레봉" 산줄기가 조망됩니다.


  ['노적산-약사산-약수산-한봉' 조망]

  그러니까 '광주방향'에서 오르는 "남한산성 입구"인 "광지원"에서 출발하여
  "노적산-약사산-약수산-한봉-남한산성 동문-남장대터-검단산-망덕산-두리봉-군두레봉-
  청룡산-광지원"으로 원점 회귀하는 코스를 가려고 합니다.


  ['남한산' 조망]

  "봉암성"은 우측 끝이 "남한산"이고, 좌측 끝은 "벌봉"입니다.
  "봉암성"의 규모가 매우 작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앞에 보이는 '남한산'과 좌측에 있어 보이지는 않는 '벌봉'에서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이 '화포'로 '남한산성'을 포격 했다는 것입니다.


  [삼거리]         12:23

  50여m 성곽을 따라 들어 가면 첫번째 삼거리를 만납니다.
  [위례둘레길] 이정표는 좌측으로 안내하고 있고, "벌봉"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만
  앞에 보이는 "남한산 정상"을 밟고 "벌봉"으로 가겠습니다.


  ['봉암성' 외동장대지]

  "봉암성"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외동장대"가 있었다는 곳입니다.
  우측 "남한산 정상"을 오르고 앞에 보이는 성곽을 따라 좌측으로 진행하여 "벌봉"으로
  가겠습니다. 우측으로 50여m 진행하면....


  ['봉암성' 동쪽 끝]       12:28

  "봉암성 성곽"이 끝나는 곳이 나옵니다.
  직진하여 우측으로 가면 "한봉"으로 이어지는 "외성 外城"으로 가고,
  직진하여 다시 직진하면 "검단지맥 은고개"로 가는 길입니다.
  이길은 이미 답사한적이 있습니다. 제가 쓴 "검단지맥 산행기"를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곳에서 "남한산 정상"은 좌측으로 올라가 뒤로 5m정도 후진하면 됩니다.


  ['남한산' 정상]      12:28

  북쪽을 향하고 있는 "봉암성 성곽"에 "남한산 정상"이 있습니다.
  "남한산 522.1m"
  '남한산성 본성'에서 가장 높은 산인 "청량산"의 높이가 "497.1m"이니 비교되지요?
  다음 사진을 보면...


  [ 서쪽 '봉암성문-동장대터-관악산' 조망]

  "남한산성 본성"위 "동장대터"가 보이며 "봉암성문"도 보입니다.
  여기서 '화포'를 쏘면 "남한산성 본성" 안에 무차별적으로 떨어지겠죠?
  앞에서도 언급했드시 그래서 이곳에 本城을 지키는 보조성인 "봉암성"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진은 줌인한 사진이 절대 아닌데도 "관악산"이 우람하게 가까이 있는듯 조망되는데 
  여기서 이렇게 가까이 조망 될줄은 예전엔 미쳐 몰랐습니다.


  [ 동쪽 '검단산-고추봉-용마산' 조망]

  동쪽으로는 "검단지맥"의 하일라이트인 "검단산-고추봉-용마산"이 조망되는데
  여기서 직진해 내려 가면 "은고개"로 가서 "검단산"으로 이어 집니다.
  이 "검단지맥 코스"는 제가 쓴 "검단지맥 남한산성구간"을 참고 하시면 되겠습니다.


  [암문]

  북쪽으로 30여m 성곽을 따라 가면 폐허가 된 암문을 지나는데...


  [뒤돌아 본 '남한산 정상']

  암문에서 뒤돌아 보면 "남한산 정상"을 다시 확힌 할수 있습니다.


  [허물어진 성곽]

  북쪽 방향으로 진행하면 허물어진 성곽을 볼수 있고...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벌봉'으로 이어지는 '봉암성' 성곽]

  "벌봉"으로 이어지는 "봉암성 성곽"의 위용을 잘 볼수 있습니다.


  ['외동장대터']       12:36

  "병자호란"은 왜 일어났을까?
  조선왕조 왕들중 최고로 의심이 많았던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한양과 백성을 버리고
  개피를 보며 저만 살겠다고 임진강을 건너 북으로 북으로 도망을 가고......
  전란이 끝나고는 오로지 '明나라'에만 충성을 다해 왕권만 유지 하려한 '선조'였습니다.
  당시 중국의 상황은 '후금'이 세력을 키워 '明'을 위협하고 있었는데도 ....
  그런 과정에서 사림파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이러한 국제정세를 잘 파악하고 양다리 외교를 펼쳐 '후금'과 '명나라'를 함께 아우러는
  외교정책을 시행하며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정권을 잃어버리고 와신상담 권력을 되찾을려는 수구꼴통세력들인 '훈구파'들이
  이러한 광해군의 외교정책을(물론 다른 꼬투리들도 있지만) '외교정책'을 꼬투리로 잡아 
  '쿠데타-인조반정'을 일으켜 불법으로 정권을 잡고는 이들은 오로지 '明나라'만 섬겼습니다.
  그 결과가 '병자호란'인데...
  후금의 '누루하찌'가 '明'을 초토화 시키며 '靑나라'를 세우는 시대가 도래하니
  '明나라'에게만 외교를 고집했던 '인조'와 수구꼴통세력들은 하루 아침에 
  청태종으로부터 보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지요.


  ['벌봉' 조망]

  "벌봉"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明나라'를 처부수고 '靑나라'를 세운 '누루하찌'는 '明나라만 섬긴 조선'을 보복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니, 쪼다리 왕 '인조'는 이곳 '남한산성'으로 도망을 쳤던것이죠.
  뛰어 봐야 메뚜기 인데...
  쿠데타로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수구꼴통세력들은 저만 살겠다고 대부분 도망쳐 흩어지고
  숨어 살며 목숨을 부지하고...다시 호시탐탐 정권을 잡을 궁리만 하며...
  '인조'만이 개피를 보게 되었지요.


  ['벌봉' 오르는 길]

  '인조'라는 인간에 대해서도 정치권력의 무상함을 곱씹게 합니다.
  병자호란 패배로 삼전도에서 '삼배고구두례'를 하며 항복을 하고, 
  자신의 장남인 '소현세자'를 인질로 청나라로 보내죠?
  '인조'가 한 치욕의 항복식은 "삼배구고두례 三拜九叩頭禮"라는 방식으로 했는데
     첫번째 절 : 이마를 땅에 세번 대고,
     두번째 절 : 이마를 땅에 세번 찧으며,
     세번째 절 : 이마를 땅에 세번 박는 방법이었습니다.
  치욕의 '三拜九叩頭禮'를 하는 '인조'는 마빡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청태종은 머리 박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소리가 날때까지 '꼰아박아 실시'를 하였던 것입니다.
  요즘 이슈회되는 군대 '김일병사건'이 생각납니다. 에휴~
  그 이후 '청나라'가 '명나라'를 완전 접수하고는 '소현세자'를 풀어 주었습니다.
  8년정도 인질로 잡혀있었던 '소현세자'는 그곳에서 진보된 서양문물과 학문을 접하고
  돌아 올때 그런 서적과 문물을 많이 가지고 들어와 조선을 개혁하려고 했습니다.
  '청나라'에게 개피를 본 '인조'는 '청나라'에 대한 감정이 좋을리 없었는데다가
  다시 수구꼴통세력들의 득세로 그러한 '소현세자'를 엄청 못마땅해했습니다.
  수구꼴통세력들은 '변화와 개혁'을 제일 싫어하죠?  자신들이 '변화와 개혁의 대상'이니까...
  우리나라는 오천년 역사 동안 수구세력들로 부터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변화와 개혁을 감행하려하는 '소현세자'에게 이상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감기가 든듯했는데 주치의가 '학질'이라고 진단을 하고 침을 세방 놓습니다.
  그리고 3일후 '소현세자'는 갑자기 죽어버렸습니다. 의문사!
  '소현세자'가 죽고난 그 이후의 '인조'와 수구세력들의 행동을 보면 '독살-암살'이라는 추리가 
  충분히 가능합니다. 왜냐구요?
 '인조'는 자기의 장남인 '소현세자'가 세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평민의 장례절차'를 밟고,
  참관인원을 종실로 규정하고, 침을 놓았던 담당어의를 처벌하라는 논의 자체를 금지했습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와이프, 즉 자신의 며느리인 세자빈을 사약을 내려 죽였습니다.
  그뿐입니까? 자신의 손자인 '소현세자'의 아들 셋까지 모두 제주도로 귀양 보내 죽게하고...
  여러분!~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초등학생이 생각해도 '인조'와 수구세력들에 의해 암살 당했다고 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도 '변화와 개혁'을 주장하면 그런 사람은 결국 어떻게 되던가요? 의문을 던집니다.

             
                 ['봉암신성신축비']       12:41

  '숙종 12년'에 '봉암성'을 신축했다는 비문이 있는 바위를 지나 갑니다.
  '병자호란' 이전에 쌓았어야  효과를 볼수 있었을텐데,
  '死後藥方文','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는 속담이 가장 적절하게 맞아 떨어지는 城입니다.
  엄청난 돈과 노력을 들여 城을 쌓았습니다만, 그 이후 한번도 사용된적이 없었습니다.
  쪼다리 '인조'같은 왕들을 위해 죄없는 백성들만 개고생하였던 것이지요.
  城을 쌓을 것이 아니라 '외교정책'을 잘 썼어야 했던 것입니다. 
  현재는 어떠한가? 외교정책을 잘하고 있는지 언제나 다양한 시각에서 감시해야합니다.
  수구정치권력들의 문제가 아니라 피해는 언제나 국민들에게 오는 것이니 ...


  ['벌봉' 정상부]       12:43

  성곽을 따라 진행하는 코스로 가야 "봉암 蜂岩"을 볼수 있고, 일반등산로로 가면 볼수 없습니다
  바위가 갈라져 벌의 날개 같아보이는 '벌봉 정상부'의 "벌바위"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는 전체적 '벌봉'의 모양을 가늠할수 없군요.
  산 아래 멀리서 봐야 '벌' 모양으로 보인다고 하는데 요즘은 여름철이라 ...


  ['벌봉' 정상]       12:45

  '벌봉' 정상의 모습입니다.
  기대치에 못 미치는 벌봉 정상에서 잠시 상념에 잠겼다가 바로 내려 갑니다.


  ['벌봉' 조망]      12:48

  안내판이 있는 '벌봉' 아래로 내려 가서 올려다 봅니다.
  여름철이라 무성한 수풀로 '벌봉'의 형상을 헤아리기 어렵군요.
  그런데 "벌봉"에 대한 안내판의 설명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암문 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벌처럼 생겼다하여 벌봉이라 한다"
  '바위가 벌 모양'이라면 "벌봉"이 아니라 "벌바위 - 봉암 蜂岩"이라고 해야하지 않나요?
  그리고 "벌바위-봉암 蜂岩"이 있는 산봉우리는 "벌바위봉-봉암봉 蜂岩峰"이라 해야 하고...
  이곳에 축성한 城의 이름은 분명히 "봉암성 蜂岩城"이라고 하고 있으니
  안내판의 설명은 어딘가 이상한듯합니다. 나만 그런가? ㅎ


  [현위치]

  현위치를 확인하고...
  10여m 북쪽으로 내려 가면...


  ['벌봉' 앞 주등산로 삼거리]       12:49

  "벌봉앞" 이정표가 서있는 삼거리를 만나서 우측으로 진행합니다.


  ['제13암문' 조망]

  삼거리에서 우측을 바라보면 [제13암문]이 보입니다.


  ['제13암문']       12:50

  [제13암문]
  "봉암성"의 복쪽 끝에 있는 암문으로서 이제부터 이 암문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곤 "위례둘레길(샘재)→" 방향으로만 가면 길찾기는 끝!~
  "샘재"까지 6.8km라고 알려 줍니다.
  좌측 '고골'계곡으로 내려 가면 음식점들이 많은가 보군요. 계속 먹고 가라고 안내를 하는듯..


  ['제13암문']

  [제13암문]을 통과해 나가 5분정도 진행하면....


  ['가지울' 갈림목]        12:55

  "가지울 갈림목"을 지나고...
  마을 골짜기 모양이 "나뭇가지 모양"이라고 "가지울"이라 한다는 설명....
  100m쯤 더 내려 가면...


  ['법화골' 갈림목]        12:58

  "법화골 갈림목"을 지납니다.
  '북문'을 지날때 "법화골 전투"에 대해 이미 언급 했기에 생략하고....
  '병자호란' 때엔 "누루하찌"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우리나라로 쳐들어 온게 아니고
  자기 매부인 "양고리"등의 장수들을 시켜 침공한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양고리"가 이곳 "법화골"에서 죽는 바람에 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법화암"이라는
  암자를 지은데서 지명의 유래가 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여기서 4분 정도 다시 내려 가면.... 


  ['제2토루' 갈림목]       1:02
 
  "제2토루" 갈림목을 지나고....



  ['토루']

  등산로는 매우 좋습니다.
  "토루"에 대해선 안내판을 참고 하시고...


  ['토성']

  "봉암성" 밖에서 "봉암성"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완만하고 다니기 쉽군요.
  그래서 "토루" "토성"등 외곽 방어시설을 城밖까지 설치를 해 놨었군요.
  여하튼 이 지역이 "남한산성"의 최대 취약지역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바람재']         1:11

  산행길도 좋고 이정표와 안내판이 잘 설치되 있습니다.
  "바람재"에 바람은 별루였습니다...ㅎ


  [' 전망바위' 갈림목]       1:13

  "전망바위 갈림목"을 만나는데....
  "전망바위" 까지 0.1km라고 해서 다녀 오기로 합니다.
  실제로는 50m도 않되는 가까운 곳에 "전망바위"가 있었으니 다녀 가시길...


  [전망바위]

  "전망바위"는 이런 모양을 하고 있으며...


  ['검단산-고추봉-용마산' 조망]

  건너편 "검단산-고추봉(두리봉)-용마산"이 조망되었습니다.
  아래 계곡은 '하남시 산곡동'으로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습니다.


  ['제1토루' 갈림목]      1:16

  "전망바위"에서 되돌아 나와 잠시 진행하면 [제1토루]를 지나고..
  다시 6분 정도 숲길을 눌루날라 진행하면...


  ['상사창동' 갈림목]       1:22

  "상사창동 갈림목"을 지나 갑니다.
  앞에서도 언급 했드시 계속 "위례둘레길(샘재)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사창동 司倉洞"은 "국가 창고"가 있던 마을이라고 하고...
  '사창동'을 단순 발음으로만 하면 동네 이름으로는 적합치 않은듯 합니다만...
  본뜻이 "국가 창고"라고하니 그냥 넘어 갑니다. '화천군'에 '사창리'라고 있죠?
  그곳도 같은 의미


  ['갈라진 이빨바위']        1:24

  이름 붙이기 나름....
  '갈라진 이빨'이라고 하는 이빨은 난생 처음 봅니다.
  실제로 '갈라진 이빨' 보신분 계세요?  부셔지거나 깨진 이빨이라면 몰라도...


  ['새바위-개구리바위' 갈림길]        1:25

  '갈라진 이빨'을 지나자마자 친절한 안내판이 있는 갈림길이 나옵니다.
  좌측길로 가면 "개구리바위"를 볼수 있고, 우측길로 가면 "새바위"를 볼수 있답니다.
  어느 길로 가나 다시 만나더군요. 그러니 선택은 자기 마음대로 하면되는데...
  좌측길은 능선길이고, 우측길은 산옆구리를 돌아가는 일반등산로 였습니다.


  [새바위]        1:27

  [새바위]

  지난번 "금암산 정상" 오르는 곳에도 "아기새와 어미새 바위"가 있었죠?
  여기는 "참새 모양 바위"인듯... 병아리를 닮았나?


  ['새바위' 아래]        1:29

  "새바위 아래 갈림목"을 지나면...


  ['새바위'-'개구리바위' 갈림길]        1:32

  "새바위"가 있는 산옆구리길과 "개구리바위"가 있는 능선길이 다시 만나는 곳을 지나고...
  후답자들께선 "새바위"는 여기서 봤으니 "개구리바위"로 가 보세요~ㅎ
  그리고 사진 찍어서 여기 "홍어와 무인도"에도 올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ㅎ


  [ 위례둘레길]

  길찾기는 '식은 죽 먹기' 입니다.  
  리본도 100M간격으로 메달려 있고, 이정표도 필요한 곳에 반드시 있더군요.
  몇군데 빼고...ㅎㅎ


  ['하사창동' 갈림목]        1:42

  "샘재 방향"으로만 진행하면 됩니다.


  [이정표 없는 갈림길]       1:50

  그런데 이정표 없는 갈림길이 나옵니다. ㅎ
  좌측 넓고 선명한 길로 가면 되겠습니다.


  [내림길]

  넓고 선명한 길만 따라 가면 됩니다.
  잠시 내려 가면...


  ['막은데미고개']        1:51

  "막은데미고개"를 지나 갑니다.
  지명의 유래는 안내판을 참고 하시고...


  [오름길]

  "막은데미고개"에서 3분 정도 완만한 오름길을 오르면...


  [송전탑]        1:58

  송전탑을 지나고...


  [쉼터]        1:59~2:10

  쉼터가 있는 조그만 봉우리에 오릅니다.
  여기서 10여분 휴식을 취하며, 점심을 먹고...


  [송전탑]      2:13

  다시 송전탑 하나를 더 지나 조그만 봉우리로 올라 가면...


  ['243.8m봉' 정상 쉼터]      2:15

  "243.8m봉"에 오릅니다.
  특별한건 없어서 그냥 통과하고...

 
  [내림길]

  내림길을 8분여 내려 가면...


  ['사미고개']       2:21~2:24

  제법 모양이 있는 "사미고개"를 만납니다.


  ['사미고개']

  "사미고개"는 좌측 '하사창동'과 우측 '하산곡동'을 잇는 고개라고 하며
  "객산"과 "남한산성"을 잇는 능선에서 가장 낮은 곳이랍니다.


  ['골말' 방향]

  "사미고개"에서 좌측 "하사창동-골말" 방향을 바라보고...


  ['산곡초등학교' 방향]

  "사미고개"에서 우측 "하산곡동"에 있다는 "산곡초등학교" 방향도 바라보고


  [묘지]        2:25

  "사미고개"에서 직진해서 50m정도 올라 가면 묘지를 만나는데
  조망이 트이는 곳입니다.


  [지나온 길 조망]

  "남한산" "봉암성"에서부터 이어지는 능선길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이런 곳에서 조망을 놓치면 않되겠지요?


  ['북문' 방향 조망]

  서쪽으로 방향을 약간 더 바꾸면
  "남한산성 연주봉"도 조망됩니다.
  "연주봉-북문-벌봉"으로 이어지는 남한산성 앞 계곡이 "고골-법화골"이란게 실감나고


  ['사미고개 위' 갈림목]

  묘지를 지나면 "사미고개 위 갈림목"을 지나며...


  ['객산' 오름길]

  10여분 완만한 오름길을 오르면...


  ['객산' 정상부]

  "객산" 정상이 보입니다.


  ['객산' 정상]       2:40~2:49

  "객산 客山 292.1m"
  국토지리원 지도에는 292.1m 높이로 나오며 정상 삼각점 표시에도 292.1m로 표기되 있는데
  안내판에는 301m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지명의 유래는 안내판을 참고 하시고...
  조망이 좋은 "객산"이었습니다.
  동서남북 조망을 하면...


  ['골말' 조망]

  먼저 북서쪽 산 애래를 조망하면 '하남시 교산동' 부근이 가까이 조망됩니다.


  ['이성산' 방향 조망]

  머리를 들어 북서쪽을 바라보면...
  [1부]에서 출발했던 "덕풍동-이성산"이 건너편에 보이며 
  그 사이에 "중부고속도로"와 "서울외곽고속도로"가 분기하는 [하남 J.C]가  보입니다.
  특별한것은 그 뒤로 "북한산 백운대-인수봉"과 "도봉산".."수락산-불암산"까지 조망되는군요


  ['하남시' 방향 조망]

  북쪽으로는 "하남시"가 펼쳐지며...
  바로 앞에 진행해야할 "산불감시초소봉-매봉-샘재" 가는 능선이 보입니다.


  ['검담산' 조망]

  동쪽으로는 "검단산"이 계속 따라 다니고...


  [내림길]

  "객산" 정상에서 우측으로 내려 가야하니 길조심해야 하겠더군요
  잠시 내려 가면...


  ['객산' 갈림목]      2:53

  "객산 갈림목"을 만나는데 좌측으로 90도 꺽어 내려 갑니다.


  [내림길]

  로프가 쳐진 내림길을 3분여 내려 가면...


  ['선법사' 갈림목]       2:56

  "선법사 갈림목"을 지나고...


  [소나무 숲길]

  소나무 숲길을 4분여 진행하면...


  [소나무숲 전망대]       3:00~3:15

  "소나무숲"이라는 안내판이 있는 곳에 평상이 있는데 조망소였습니다.
  여기서 조망을 하며 5분여 휴식을 취하고...


  ['예봉산' 조망]

  "팔당대교"와 "예봉산-적갑산"이 조망됩니다. 아름답습니다.
  "하남"이나 "강남"은 같은 뜻이죠?
  "河南" "江南"이니 의미는 같습니다. 그런데 땅값은 완전 천양지차? ㅎㅎ

 
  [주변 지리]

  이 주변 지리를 구글어스를 이용하여 일목요연하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언급되 있는 산들은 모두 답사한적이 있으며, 모두 산행기가 있습니다.


  [소나무 숲길]

  조망과 휴식을 취하고 5분 정도 소나무 숲길을 거닐면....


  ['마루공원' 갈림목]       3:20

  "마루공원 갈림목"을 지나는데
  우측으로 내려 가면 가까운 곳에 "마루공원"과 "등기소"가 있답니다.
  그러니까 "하남시"의 중심부로 내려 가고 있는 것입니다.


  [거북바위]       3:22

  '거북이'인지...'거북이' 두마리가 짝짓기를 하는 것인지...
  여튼 감상은 쟈유....ㅎ


  ['안샘재' 갈림목]        3:26

  "안샘재 갈림목"을 지나는데 "샘재"가 다가 오고 있다는 것을 감지 할수 있고..
  조금 올라 가면...


  ['184.3m봉'-산불감시초소봉]        3:28~3:32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184.3m봉"에 오릅니다.
  이 봉우리도 조망이 좋았습니다.
  동서남북을 조망하면...


  ['검담산' 조망]

  먼저 동쪽에는 계속 "검단산"이 모양새를 바꾸며 따라 다니고...


  ['은고개' 조망]

  남동쪽으로는 "검단지맥"이 지나는 "은고개"가 조망됩니다.
  "은고개"가 '하남시'와 '광주시'의 경계가 되겠습니다.
  '하남시 산곡동' 가운데로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습니다.


  [뒤돌아 본 '객산']

  뒤돌아 남쪽을 보니 지나온 "객산"이 머리를 삐쭉 내밀고 있고...


  ['연주봉-금암산' 조망]

  남서쪽으로는 지금까지 수없이 언급했던 "연주봉"과 "금암산"이 누워있고


  ['제2롯데월드' 조망]

  서쪽으로는 공사중인 "제2롯데월드"가 조망됩니다.

 
  [숲길]

  3분 정도 고도를 조금씩 낮추며 내려 가면...


  ['바깥샘재' 갈림목]       3:35

  "바깥샘재 갈림목"을 지나고...
  다시 4분 정도 진행하면...


  ['매봉' 앞]        3:39

  "매봉 앞"이라는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매봉"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어서 "매봉"을 올랐다가 갑니다.
  그리고 "매봉"에서 좌측길로 내려 가면 이길과 다시 합류하더군요


  ['매봉' 정상]       3:41

  "매봉 128.1m"
  보시는바와 같이 "매봉"은 산봉우리라고 할수 없을 정도이고
  잡풀을 헤치고 삼각점을 간신히 찾아 촬영했습니다.
  국토지리원 지도에는 "쥐봉"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숲길]

  "매봉"을 내려가 다시 일반등산로와 합류하여 잠시 진행하면...


  ['샘재' 갈림목]        3:45

  '중부고속도로'의 굉음이 소란스런 곳에 도착하면
  좌측으로 내려 가라는 "샘재 갈림목"을 지납니다.


  [계단]        3:47

  그러면 '중부고속도로'가 앞을 가로 막으며 계단이 좌측으로 길안내를 합니다.


  ['중부고속도로'와 '샘재']

  등산로 출입구가 있는 "샘재"에 도착했습니다.
  '중부고속도로'가 8차선으로 "샘재" 위를 질주하고 있고...


  ['이성산'과 '덕풍동' 조망]

  [1부] 출발지였던 "덕풍1동"의 아파트들이 보이며
  "이성산성-이성산"도 가까이 조망됩니다.
  '중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 휴게소'도 앞에 보이는군요.


  ['샘재' 들날머리]     3:49

  "샘재 날머리"에 도착하니 "여기서부터는 시청 가는 길"이라고 안내 합니다.


  ['중부고속도로' 굴다리 통과]

  '중부고속도로 굴다리'를 통과해 갑니다.


  ['43번국도' 삼거리 가는 길]

  [43번국도]가 지나는 삼거리로 나가면...


  [삼거리-버스정류장]       3:56

  삼거리 건너편엔 "마방집"이라는 음식점이 있고 
  버스정류장은 길건너 우측에 [마방집.동경주]라는 정류장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13번시내버스]를 타고 "천호역"으로 가야 했는데 먼저 오는 [16번버스]를 탓더니
  '하남시' 아파트단지라는 단지는 다 들리며 "천호역"으로 갔습니다.
  후답자들은 반드시 [13번] 또는 [13-1번] 버스를 타시기 바람니다.

    
  [구글어스]

  1636년 12월 겨울
  이 남한산성에는 '인조'라는 쪼다리 임금이 있었고,
  체찰사로서 난국의 해결을 시간에 맡기는 양다리의 명수 영의정 '김류'가 있었고,
  의로움과 충성심으로 절대 굴복은 없다고~
  오로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  예조판서 '김상헌'이 있었고,
  매국의 오명을 뒤집어 쓰더라도 임금이 살길은 화친이라고
  말이 화친이지 실제는 항복이라는 말을 비틀어 화친이라고 말 하는 
  이조판서 '최명길'이 있었습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옥신각신 말싸움만 하다가 앞에 보이는 남한산성 西門을 통해 '삼전도'로 내려가 항복을 하며
  그들은 결국 대한민국 역사에 도리킬수 없는 오점을 남기며 
  얼마나 더 오래 살지도 모를 목숨을 부지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저의 학교 선배 '김훈'의 역사소설 '남한산성'에서 인용합니다.
    (이조판서)최명길이 말했다.
      "제발 예판(예조판서)은 길, 길 하지 마시오. 
       길이란 땅바닥에 있는 것이오. 가면 길이고 
       가지 않으면 땅바닥인 것이오." 
    (예조판서)김상헌이 목청을 높였다.
       "내 말이 그 말이오. 갈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니란 말이오"
  항복을 하자는 '이조판서 최명길'과 끝까지 싸우자는 '예조판서 김상헌'이
 옥신각신하는 장면입니다.
  "싸우고 지키지 않으면 화친할 길은 마침내 없다"며 斥和論을 주장한 예조판서 '김상헌'과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라며 主和論을 내세운 이조판서 '최명길'.
  여러분은 누구의 손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했던 '예판 김상헌'은 '소현세자'와 함께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가 포로로 잡혀 가며 지은 유명한 詩가 있지요?

          가노라 三角山아 다시 보쟈 漢江水야 
          古國山川을 떠나고쟈 하랴마는 
          時節이 하 殊常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항복하자고 주장했던 '이조판서 최명길'은 한양에 살아 남았습니다.
  후에 '최명길'이 지은 시도 제법 유명합니다. 후회의 시이죠
  상황 끝난후 하는 후회의 글이야 저도 쓸수 있습죠. ㅎㅎ
  그래도 후회의 시는 한수 썻군요.

           鼓角喧空海接天(고각훤공해접천) 
           五千兵甲載樓船(오천병갑재루선) 
           山城不死皆臣罪(산성불사개신죄) 
           泣向春風拜杜鵑(읍향춘풍배두견) 
           고각소리는 공중을 흔들고 바다물결은 하늘에 닿았는데
           오천여 甲兵을 樓船에 싣는구나.
           남한산성에서 죽지 못한 것이 모두 신하의 허물이니
           울면서 봄바람을 향하여 두견새에 절하노라


  [고도표]

  [1부 코스]의 거리가 "10.4km"였으며, [2부코스]는 "10.7km"였습니다. 합해서 "21.1km"
  오늘 걸린 시간은 4시간 20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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