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마루' 5월 정기산행
南漢山城 둘러보기
남문-영춘정-수어장대-서문-연주봉옹성-
북장대터-북문-군포지-女墻-동장대터-
장경사-동문-남한산성역사관
산을 좋아 한다면서
산에 대해 말해 보라면 사실 할말이 별루입니다
산을 말하고 ...노래하고...음미하려 하지 말자
그저 열심히 다니다
또 그러다 보면
언제인가
나도 산을 말하고...노래하고...음미하는 때도 있겠지
바람따라 구름따라 세월따라 흘러 가는 산행길
[남한산성 안내도]
"남한산성 南漢山城"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경기도남한산성도립공원'은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고 합니다.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남한산성'에서 맞으며 치욕의 역사를 쓴 곳이기도 하죠
[至和門 (南門) 앞]
2012년 5월 20일 (일) 맑음
고교 동기동창 12명이 의기투합하여 푸르런 5월을 맛보러 길을 나섯습니다.
이왕 가는 봄나들이니 그렇게 힘들지도 않고 느낄만한 것도 많은 '남한산성'으로
등산겸 나들이겸 겸사겸사 하루를 함께 즐기기로 뭉친것입니다.
자꾸 가는 세월을 탓하기만 할것이 아니라
이렇게 걸을수 있을 때를 잘 활용하자고.....
그런데 사진 찍는다니까 초장부터 너무 무게 잡지요? ㅎ
['지화문' 위에서 성문 밖 조망]
'남한산성'에서 규모가 가장 큰 문이고, 현재까지 보존이 가장 잘되있다는
"지화문 至和門"
싸움 보다는 화합을 더 내세우는 의미 인듯한데, 사람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일반적으로 부르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일반명사 "남문 南門"으로
더 불리워지는 城門입니다. 그 城門에 올라 城밖을 내려다 봅니다.
예전엔 이곳으로 자동차가 다녔었는데, 지금은 옆에 터널을 뚫어 우회 시키고
이곳은 잘 가꾸어 공원화 하였는데 오래 전에 했다니 저도 오래 된 사람인가
봅니다. 城門이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도록 나무를 심어 가렸다는데 360년이
넘은 나무들이 그 생명력을 부지하는데 인간들의 도움을 받고 있어
지난 하세월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영춘정'으로 올라 가는 길]
지하철8호선 "남한산성입구역 1번출구"에서 만나 조금 올라 가 "상원초등학교"
버스 정류장에서 [9번시내버스]를 타고 남한산성 남문까지 올라 가 종주를
시작했으니 등산은 빼고 성곽둘레길을 종주 했으니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만하게 볼 코스는 아니었다는 것을 첨언해 둡니다.
'南漢山城'은 복원이 잘되어 옛 본 모습보다 더 멋있어 졌답니다.
오늘 '남한산성 종주'에서 오르막이 가장 심한 구간을 올라 갑니다.
오르막 구간이라 해 봤자 몇백m이지만.....
[영춘정]
"영춘정 迎春亭"은 南門 아래에 있던것을 옮겨 온 것이라 합니다.
차갑고 어두운 겨울 같은 전쟁에서 어서 빨리 봄이 오기를 기대하는 곳이었을까
아마도 그들은 어서 빨리 봄이 오기를 학수고대 했을 것입니다.
['영춘정'에서 바라보는 '검단산']
'검단지맥'과 '성남市界'가 뻗어 가는 산줄기가 '검단산'으로 이어 지고 있습니다.
[암문]
'수어장대' 뒷쪽 성곽에는 '암문 暗門'이 있군요.
비밀통로였던 곳이죠? 남한산성에는 16개의 암문이 있다고 합니다.
현재 일반인들의 통행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城 안팎]
城안팎을 동시에 볼수 있는 곳이 많이 있었습니다.
[守禦將臺]
'수어장대'가 있는 산봉우리의 이름은 '남한산성'의 주봉인 "청량산 497.9m".
가장 높은 곳에 "수어장대 守禦將臺"가 자리잡고 '남한산성'을 호령하고 있습니다
'남한산성'에서 최고의 볼거리이기도 하지요.
[守禦將臺 정문]
'남한산성'을 대표하는 '守禦將臺'로 들어 가는 정문은 정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어 '옆문'처럼 느껴 졌습니다.
[將臺]
'南漢山城'에는 4개의 將臺, '東將臺' '南將臺' '北將臺' '西將臺'가 있었는데
그 중에 "서장대 西將臺"가 "守禦將臺"이랍니다.
將臺는 요즘말로 최고사령관이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곳이라죠?
[守禦將臺]
저는 처음에 '수어장대'는 '어御'를 사용하여 임금을 수호하는 '守御將臺'인줄
알았는데, '어 禦'를 쓰는군요. '어 禦'는 '수 守'와 같은 의미로 '수비하다'
'방어하다'라는 뜻이죠. 겹겹이 수비한다는 뜻으로 '守禦'라고 한듯합니다.
에구~수많은 세월 동안 뭘 수비했는지 한탄만 나옵니다만,
사람들은 그날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즐거운 나들이를 하고 있습니다.
4개의 장대 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대라는데 '경기도유형문화재1호'랍니다.
[守禦將臺 기념사진]
국민학교 때 소풍 와 보고 처음 와 본다는 분들....ㅎㅎ 오래 된 사람들.
요즘 초딩들은 외국으로 간다지요?
감회가 새롭습니다.
[守禦將臺 앞마당]
'守禦將臺'에서 山城 안이 훤히 내려다 보일줄 알았는데
자연보호로 울창해진 나무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無忘樓]
[無忘樓 안내]
[리승만대통령 행차 기념 식수비]
'守禦將臺' 옆에는 전각이 하나 있는데 "무망루 無忘樓"라는 편액을
일반인들도 볼수 있게 전시 해 놓은 곳이었습니다.
내용은 윗 사진을 참고하시고...
그 옆에는 "리대통령행차기념식수-단기4286년9월6일"이라는 식수비가 세워져
있는데, 저에겐 아이로니컬한 느낌이 듭니다....... 왜냐구요?
'인조'와 '리승만대통령'...공통점이 있는 분들이라서...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도망친 고려의 '고종'.
임진년에 쪽바리들의 침공에 한양과 백성을 버리고 저만 살겠다고
북으로 북으로 도망친 조선의 '선조'
북의 김일성이 쳐 내려온다고, 한강 철교를 폭파하고 또 백성과 서울을
버리고 남으로 남으로 도망친 '이승만' 독재정권.
병자년에 하필이면 얼마나 도망 갈 곳이 없었으면
여기 초라한 남한산성으로 도망친 조선의 쿠데타 정권 겁쟁이 '인조'.
'리승만'은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는 '인조'가 하나의 위안이 되었을까....
그래서 이곳을 방문하여 쪼다리 임금 '인조'를 추모하며 식수를 했을까....
[右翼門 (西門)]
'수어장대'에서 성곽을 따라 잠시 진행하면
일반적으로 '西門'이라고 불리워지는 "우익문 右翼門"이 바로 나타납니다.
[右翼門 (西門)]
"우익문 右翼門 (西門)"
'남한산성'의 "오른쪽 날개"에 해당하는 門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겠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서 치열하게 대립하는 '보수'와 '진보'를 칭하는 용어로
먼저 다가 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東門"의 본명은 당연히 "좌익문 左翼門"이었습니다.
[右翼門 (西門)에서 城안으로 들어 가는 길]
1637년 1월 30일
쪼다리 겁쟁이 '인조'가 50여명의 쫄따구들을 데리고 삼전도로 나가 항복한 門이
"右翼門 (西門)"이라 행궁으로 통하는 길을 바라보며 그 옛날을 생각해 봤습니다.
[右翼門 (西門)]
1636년12월 겨울
이 남한산성에는 '인조'라는 쪼다리 임금이 있었고,
체찰사로서 난국의 해결을 시간에 맡기는 양다리의 명수 영의정 '김류'가 있었고,
의로움과 충성심으로 절대 굴복은 없다고~
오로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 예판 '김상헌'이 있었고,
매국의 오명을 뒤집어 쓰더라도 임금이 살길은 화친이라고
말이 화친이지 실제는 항복이라는 말을 비틀어 화친이라고 말 하는
이판 '최명길'이 있었습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옥신각신 말싸움만 하다가 바로 저 門을 통해 내려가 항복을 하며
그들은 결국 대한민국 역사에 도리킬수 없는 오점을 남기며
얼마나 더 오래 살지도 모를 목숨을 부지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仁祖實錄"에는 그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인조 15년, 1637년 1월 30일'의 "仁祖實錄"입니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성 밖에 와서 왕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왕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중략
*남염의(藍染衣) :일반 백성들이 입는 허름한 옷
「왕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서울 조망]
"삼전도 三田渡"
'인조'가 치욕의 "삼배구고두례 三拜九叩頭禮"를 한 "삼전도"가 보입니다.
첫번째 절 : 이마를 땅에 세번 대고,
두번째 절 : 이마를 땅에 세번 찧으며,
세번째 절 : 이마를 땅에 세번 박는 '三拜九叩頭禮'를 한 '인조'
피투성이가 된 마빡이지만, 청태종은 머리 박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소리가 날때까지 꼰아박아 실시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알아야 하겠습니까? 쉬~쉬 해야겠습니까.
지금 이 사진 속에 서울의 발전 된 모습이 보이십니까?
아니면 그날의 삼전도 굴욕이 보이십니까.
감상은 자유입니다......
[연주봉 옹성 암문]
저의 학교 선배 '김훈'의 역사소설 '남한산성'에서 인용합니다.
(이조판서)최명길이 말했다.
"제발 예판(예조판서)은 길, 길 하지 마시오.
길이란 땅바닥에 있는 것이오. 가면 길이고
가지 않으면 땅바닥인 것이오."
(예조판서)김상헌이 목청을 높였다.
"내 말이 그 말이오. 갈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니란 말이오"
일제침탈시대에 쪽바리들의 똥구멍을 빨며 목숨을 부지하며 富와 권력을
가졌던 친일파들 까지도 "그 때의 상황으로는 그럴수 밖에 없지 않았느냐?"
라고 옹호 해 주는 분들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치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운 분들은
어떻게 해석 해야 한답니까? 바보? 쪼다리?
[연주봉 옹성]
조선왕조 왕들중 최고로 의심이 많았던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한양과 백성을
버리고 개망신 당해 가며 개피를 보며 북으로 북으로 도망을 가고......
전란이 끝나고는 오로지 明나라에만 충성을 다해 왕권만 유지 하려한 '선조'.
당시 중국의 상황은 후금이 세력을 키워 明을 위협하고 있었는데도 ....
그래서 '광해군'은 양다리 외교를 펼쳐 '후금'과 '명나라'를 함께 아우러는
외교정책을 시행하며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수구꼴통들은 이러한 광해군의 외교정책을(물론 여러가지 다른 꼬투리가
많지만) 꼬투리로 잡아 쿠데타를 일으켜 불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세력들..
이들은 오로지 明나라만 섬겼습니다. 그 결과가 '병자호란'인데...
후금의 '누루하찌'가 明을 초토화 시키며 靑나라를 세우는 시대가 도래하니
明나라에게만 외교를 고집했던 '인조'와 수구꼴통세력들은 하루 아침에
청태종으로부터 보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지요.
요즘도 대한민국 정부는 편향 외교라는 비판이 많이 있는데
'병자호란'을 교훈으로 삼아야겠습니다.
[북문 가는 길]
"병자호란' 당시 "청태종"이 "인조"에게 보낸 편지 전문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지모 있는 자가 지략을 다하고
용감한 자가 종군하게 하지 않고서 몸소 一戰을 담당하려 하느냐.
짐은 결코 힘의 강대함을 믿고 남을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도리어 약소한 국력으로 우리의 변경을 소란스럽게 하고,
우리의 영토 안에서 산삼을 캐고 사냥을 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짐의 백성으로서 도망자가 있으면 너희가 이를 받아들여
明나라에 바치고,
또 明나라 장수 두 사람이 짐에게 귀순코자 하여
짐의 군대가 그들을 맞이하러 그곳으로 갔을 때에도,
너희 군대가 총을 쏘며 이를 가로막아 싸운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가 섬으로 도망쳐 들어가 和親을 애걸했을 때,
글이 오고 간 상대는 그들이 아니고 누구였더냐.
짐의 아우나 조카가 너만 못하단 말인가.
몽골의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는데도
너는 여전히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들은 당당한 元나라 황제의 후예들인데 어찌 너만 못하랴!
元나라 때에는 너희 조선이 끊이지 않고 조공을 바쳤는데,
이제 와서 어찌 하여 하루아침에 이처럼 도도해졌느냐.
너희 조선은 遼·金·元 세 나라에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대대로 臣이라 일컬었지, 언제 北面하여 남을 섬기지 않고
스스로 편안히 지낸 적이 있었느냐.
정묘년의 치욕을 씻으려 했다면 어찌 하여 몸을 도사려
부녀자의 처소에 들어앉아 있느냐.
네가 비록 이 성 안에 몸을 숨기고 구차스레 살기를 원하지만
짐이 어찌 그대로 버려두겠는가.
짐의 나라 안팎의 여러 왕들과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의 칭호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네가
「이런 말을 우리나라 君臣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느냐」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대저 황제를 칭함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네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도우면 필부라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라도 외로운 필부가 될 것이다.
그러니 네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방자하고 망령된 것이다.
이제 짐이 大軍을 이끌고 와서 너희 팔도를 소탕할 것인데,
너희가 아버지로 섬기는 明나라가 장차 너희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를
두고 볼 것이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렸는데,
부모된 자가 어찌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들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억조중생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네가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분명하게 고하라.
崇德 2년 정월2일
[북장대터]
"우익문(서문)"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성곽을 따라 조금가니
"북장대터 北將臺址"를 지나 갑니다.
[북장대터 근처]
점심식사 시간이 되어 장소를 물색하던중 명당자리를 발견했습니다.
[점심식사]
12명이 동시에 테이블에 앉아 함께 식사시간을 가질수 있는 명당자리는
'휘마루' 창립 이래 처음인듯 합니다.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얼마나 즐거웠는지는 알켜 줄수 없고 비밀입니다. ㅎ
궁금하면 다음에 나와 보세요~~
[전승문(북문) 가는 길]
점심식사를 끝내고 "北門"으로 향합니다.
'남한산성'의 규모는
본성이 9.05km, 옹성이 2.71km로서 총 11.76km라고 합니다.
경기도의 3大 山城 중에 하나로 "북한산성" "문수산성"과 함께
한양을 수호하는 山城이었습니다. 지금은 관광지? ㅎ
[전승문(북문)]
"싸우고 지키지 않으면 화친할 길은 마침내 없다"며
斥和論을 주장한 예조판서 '김상헌'과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라며
主和論을 내세운 이조판서 '최명길'.
여러분은 누구의 손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양다리를 걸치겠습니까?
에휴~~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미리 대비를 잘 하지...
"병자호란"을 초래한 실질적 원인은 사색당파 권력 쟁취싸움이 만들어 낸
부산물이라고 한마디로 짤라 말할수도 있습니다. 자폭한것이지요.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현재의 정치꾼들은 "병자호란"의 교훈을 잊지 마시길
[전승문(북문)
"전승문(北門) 全勝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유일한 門입니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바위에 계란 던지기', 더더욱 적의 계락에 빠져 300명이 전멸하고
말았는데, 이를 "법화골전투"라 하고,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로 참패한 전투였습니다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그때의 참패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전승문 全勝門"이라 하였다는데....
[성곽길]
치욕의 세월을 알던 모르던 우리는 성곽순례를 계속합니다.
산행겸 산책겸 관광겸 겸사 겸사로 하루를 보내기엔 안성맞춤입니다.
[뒤돌아 본 '수어장대']
뒤돌아 보면 '남한산성'의 지형을 어림해 보며....
[제1 軍鋪址]
[제2 軍鋪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초소"에 해당하는 "군포지 軍鋪址"를 지나 갑니다.
[봉암성 蜂巖城]
앞에 城밖에 있는 城門은 "봉암성문 蜂巖城門"입니다.
"蜂巖城"은 '남한산성'에 붙어 있는 城인데, '병자호란' 때에는 없던 城이랍니다.
병자호란때 청나라의 군대가 남한산성의 동쪽에 위치한 '벌봉'에서 남한산성을
엿보며 위협하므로 호란후 숙종 12년(1686) 이에 대한 대책으로 남한산성과
연결하여 추가로 쌓은 보조성곽이랍니다.
특이한것은 "봉암성"과 "남한산성"을 연결지어 문을 만들지 않아 '봉암성"에서
직접 "남한산성"으로 갈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봉암성"이 함락되면 "봉암성"만
버리기 위해서랍니다.
[女墻]
[성곽]
이쪽의 성곽은 개보수가 덜 이뤄졌군요.
[東將臺터]
[城廓]
[暗門]
남한산성에는 4개의 대문과 16개의 暗門이 있다고 합니다.
"북한산성"은 "남한산성"보다 규모가 큰데도 6개의 암문만 있는데
"남한산성"에는 암문이 훨신 많습니다. 이는 외부와 통하는 통로가 많아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군요.
[성곽]
"남한산성" 성곽종주를 우습게 보면 않됩니다.
거리도 거리이지만 오르내림도 심합니다.
['장경사' 앞]
'장경사"라는 절간 앞까지 차량이 들어 오는군요.
[장경사]
"장경사 長慶寺"
'남한산성'에는 원래 9개의 사찰이 있었다는데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 "국청사"가 복원되었답니다.
'남한산성' 안에서는 "개원사"가 으뜸 사찰입니다.
이나저나 요즘 빡빡이들 왜 그래요? 완존히 개판 만들고 있으니...
'병자호란'이 터지기 전 우리나라 조정 대신들의 당파 싸움 보는듯하니...
역사는 지나간 유물이 아니라 현재의 거울이라는 것을 알아야 발전이 있는데...
허기사 빡빡이들도 인간이고,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左翼門(東門) 가는 성곽]
"장경사"에서 "左翼門(東門)"으로 가는 성곽길에서 내려다 보니
'광주'에서 산성 안으로 들어 가는 길이 보입니다.
그리고 '남한산성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이 城을 호령하듯 내려다 보고
가운데 복원된 행궁이 보이는군요.
[東門에서 南門으로 가는 성곽길]
가운데 [342번지방도로]는 광주시에서 '남한산성'을 관통하여 '성남시'로 가는
도로입니다. 도로 건너편에 '지화문(남문)"으로 가는 성곽길과 산봉우리가
무지 힘드니 더 이상 종주를 하지 말고 뒷풀이하라고 알려 줍니다. ㅎㅎ
[東門]
'남한산성'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좌익문(동문)"입니다.
[東門]
"좌익문 左翼門 (東門)"
[廣州로 통하는 길]
"좌익문 左翼門 (東門)" 옆으로 광주와 성남을 잇는 [342번지방도로]가
분주한 차량들로 붐비고 있습니다.
힘도 들고...시간도 많이 되고해서 산행은 여기서 끝내고 뒷풀이하러 갑니다.
[남한산성 역사관]
'동문'에서 산성 안으로 조금 올라 가면 "남한산성 역사관"이 나옵니다.
['남한산성 역사관'에서 보이는 '서흔남 묘비'와 공적비]
'남한산성 역사관' 앞 주차장 끝에 있는 허름한 묘비를 찾아 보고 가지 않으면
'남한산성'을 왔다가 갔다고 할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눈길 조차 주지 않는 묘비이지만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들에겐 아주 흥미진진한 "서흔남"이라는 사람의 묘비와 공덕비가 있는데...
['서흔남' 묘비와 공적비]
[서흔남 묘비]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12월 14일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황급히 피난을 왔다는 것은 모두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인조'를 모시던 신하들은 하나 둘 흩어져 도망가 버리고,
'인조'는 얼마 남지 않은 신하들과 함께 송파강을 겨우 건널 수 있었다고합니다.
강은 건넜으나 날은 어두워지고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흩날려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까지 올라 갈 일이 아득했답니다. 인조는 신하의 등에 번갈아 업혔으나
지친 신하들은 얼마 못 가서 주저 앉기를 거듭했다고합니다.
에구~~왕이나 신하나 모두 븅신들~
더구나 남한산성으로 올라 가는 산길은 험했고,
때마침 눈이 깊이 쌓여 걸어서 올라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 한 총각이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나무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고 하네요.
'인조'는 그 총각에게 "나를 좀 업어서 성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고. 이에 그 총각은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더니, '인조'를 업어서 성까지
한숨에 모시고 갔답니다. 남한산성에 무사히 도착한 인조는 산성으로 들어올 때,
그 총각이 불편하게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은 것이 못내 궁금했다고합니다.
그래서 "왜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느냐."고 물었고.
이에 총각은 "당신은 피난민 같은데, 만약 신을 바로 신고 오르게 되면 눈 위에
발자국이 나서 적군에게 들키게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될까봐,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다."고 말했답니다.
인조는 그 총각이 너무나 신통하고 고마워서,
"너의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하였답니다.
이에 총각은 인조가 입고 있던 곤룡포(袞龍袍)가 너무 좋아 보여서,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을 벗어 달라."고 하였답니다.
'인조'는 흔쾌히 자신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그 총각에게 벗어주었다고합니다.
이렇게 '인조'를 업고 무사히 산성 안으로 피신시킨 총각이 바로 '서흔남'이라는
천민이었는데, '인조'는 그에게 정2품 '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의 지위를
내리며 생명의 은인으로 대우했답니다.
[남한산성 역사관]
[뒷풀이]
'남한산성' 안에서 유명하다는 손두부집에서 얼큰하게 뒷풀이를 하고.....
버스를 타고 내려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 갔습니다.
다음 산행지는 고구려의 숨결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아차산성"이 있는
"아차산"과 "용마산"으로 갑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