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경기도 도립공원"
'위례신도시'에서 오르는 "남한산성" 산행기
[국토지리원 1/25,000 지도]
[구글어스-정동방향]
[구글어스-정북방향]
'경기도 성남시-하남시'에 걸처있는 "위례신도시"의 [위례그린파크푸르지오아파트 6511동]에서 출발하여
[남한산성]을 오르고 하산합니다.
[위례 그린파크 푸르지오아파트 6511동]
2020년 2월 20일 (목)
[위례그린파크푸르지오아파트 6511동] 앞에 있는 출입문에서 출발하여
[오름길]
[삼거리]
[쉼터]
잘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잠시 오르면 독특한 모양의 쉼터를 만나는데
여기서 좌측 등산로로 들어 가면...
[숲 오름길]
[전망대 오름길]
전망대로 오르는 등산로가 이어집니다.
[전망대]
[전망대]
아파트단지 주민들을 위한 공원 쉼터가 조성되 있는데 전망대가 있습니다.
[조망]
서울시내를 조망하는데 연무와 미세먼지로 조망이 나쁘군요.
바로 아래에 있는 옛 [남성대골프장]이 보입니다.
['남성대골프장']
전망대에서 잠시 내려 가면 옛 [남성대골프장] 안으로 들어 갈수 있는데,
[남한산성]의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이 조망됩니다.
[남성대골프장]은 폐장되어 일반인들의 공원으로 변모해서 골프장의 형태만 남아 있는데
이 코스는 [16번홀]이었던 코스
[오름길]
골프장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등로가 이어집니다.
30여분 오름짓을 하면...
['남문매표소' 앞]
[남한산성]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만나는데,
이곳은 [남문매표소앞]이라는 버스정류장이 있는 곳이고
[남문 가는 길]
[남문]으로 가는 일반등산로는 도로 옆길입니다.
도로를 이용 할수도 있습니다만, 보행자용 보도가 없어 좀 위험하더군요.
옆길을 이용해 잠시 진행하면...
['산성터널']
[산성터널]을 만나는데, 우측 [성남누리길]로 진행합니다.
['남문' - '지화문']
[성남누리길]의 [1코스]와 [2코스]의 시종점이기도 한 "남한산성 지화문(남문)"에 도착하고
['서암문-제6암문' 가는 길]
[수어장대]를 향하여 성곽 대신 일반도로를 따라 올라 갑니다.
['서암문'-'제6암문']
[님힌신성]의 [제6암문(서암문)]에 도착하는데 우측에 [수어장대가 있죠.
['수어장대']
오래만에 "수어장대 守禦將臺"에 오릅니다.
[남한산성]의 서쪽 작전지휘소로서 "서장대 西將臺"라고 하는데,
[남한산성]에 남아 보존되고 있는 유일한 將臺로서 가장 큰 작전지휘소랍니다.
"수어장대 守禦將臺"는 적을 공격하고자 설치된 將臺가 아니라 수비를 하기 위한것이라고
강조하는데, [지킬 수 守]와 [막을 어 禦]라는 비슷한 뜻의 한자 두개를 중첩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병암남성신수비']
[안내문]
"병암남성 신수비"
[수어장대] 뒷쪽 성곽을 개보수할때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실명을 기록한 바위 비석이랍니다.
공사 실명제가 실시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휴식]
[西門] 근처 테이블에서 간식을 좀 먹으며 쉬고
['서문'-'우익문']
본명이 "우익문 右翼門"인 "西門"을 지나 [연주봉 옹성]을 다녀 옵니다.
참고로 [동문]의 본명은 [좌익문]이라고 하죠.
['연주봉 옹성' 입구]
"연주봉 옹성" 출입구로 나가면...
['연주봉 옹성']
['옹성'에서 '수어장대' 조망]
"연주봉 옹성"은 [남한산성]의 북쪽 성벽을 감시하는 城이죠.
조망이 좋습니다.
남쪽으로는 [서장대]인 "수어장대"와 [남장대], 그리고 그 뒤로 [검단산]이 조망됩니다.
['옹성'에서 '산성안' 조망]
남동쪽으로는 [남한산성]의 중심부인 [종로]와 [동문]이 조망되고
['서문']
다시 본명이 "우익문 右翼門"인 "西門"으로 돌아와 [종로]로 하산합니다.
1636년12월 겨울
이 남한산성에는 '인조'라는 쪼다리 임금이 있었고,
체찰사로서 난국의 해결을 시간에 맡기는 양다리의 명수 영의정 '김류'가 있었고,
의로움과 충성심으로 절대 굴복은 없다고~
오로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 예판 '김상헌'이 있었고,
매국의 오명을 뒤집어 쓰더라도 임금이 살길은 화친이라고
말이 화친이지 실제는 항복이라는 말을 비틀어 화친이라고 말 하는
이판 '최명길'이 있었습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옥신각신 말싸움만 하다가 바로 저 門을 통해 내려가 항복을 하며
그들은 결국 대한민국 역사에 도리킬수 없는 오점을 남기며
얼마나 더 오래 살지도 모를 목숨을 부지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仁祖實錄"에는 그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인조 15년, 1637년 1월 30일'의 "仁祖實錄"입니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성 밖에 와서 왕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왕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중략
*남염의(藍染衣) :일반 백성들이 입는 허름한 옷
「왕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북문'-'전승문']
본명이 "전승문 全勝門"이라고 하는 "北門"에서 [종로]로 내려가 버스를 타고 귀가했습니다.
조선왕조 왕들중 최고로 의심이 많았던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한양과 백성을
버리고 개망신 당해 가며 개피를 보며 북으로 북으로 도망을 가고......
전란이 끝나고는 오로지 明나라에만 충성을 다해 왕권만 유지 하려한 '선조'.
당시 중국의 상황은 후금이 세력을 키워 明을 위협하고 있었는데도 ....
그래서 '광해군'은 양다리 외교를 펼쳐 '후금'과 '명나라'를 함께 아우러는
외교정책을 시행하며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수구꼴통들은 이러한 광해군의 외교정책을(물론 여러가지 다른 꼬투리가
많지만) 꼬투리로 잡아 쿠데타를 일으켜 불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세력들..
이들은 오로지 明나라만 섬겼습니다. 그 결과가 '병자호란'인데...
후금의 '누루하찌'가 明을 초토화 시키며 靑나라를 세우는 시대가 도래하니
明나라에게만 외교를 고집했던 '인조'와 수구꼴통세력들은 하루 아침에
청태종으로부터 보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지요.
요즘도 뒤돌아 보며 참고 해야하는 비극의 역사인 "병자호란"의 현장을 둘러 보았습니다.
[국토지리원 지도]
[고도표]
오늘 걸은 거리는 7.6km였으며 걸린 시간은 3시간 40여분이 걸렸으나 모처럼 친구 부부들과 함께한
산행이어서 걸림 시간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遊山者不可以無錄 而有錄之有益於遊山也
유산자불가이무록 이유록지유익어유산야
산을 즐기는자 기록이 없어서는 아니되고,
기록이 있음은 산을 즐기는데 유익하다
-"퇴계 이황 선생님"의 말씀-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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