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崇山 遊山記
新女性과 女僧
佛敎를 단절하고
儒敎를 國家의 基本理念으로 삼았던 朝鮮王祖 500年
七去之惡·三從之義·夫唱婦隨·女必從夫
한마디로 男尊女卑사상이 지배하던 封建社會
朝鮮王祖 500年, 男尊女卑로 중무장한 封建社會의 엄청난 장벽을 뚫고
女性의 社會的, 人間的 平等을 최초로 부르짖은 女性.
金 元周, 나 혜석이라는 여인을 아시나요?
그녀가 우리나라 新女性 1號 金 元周, 나 혜석이라는 여인입니다.
그리곤 新女性으로 살던 속세의 사연을 줄줄이 끊고 女僧이 되어
가수 송춘희가 불러 공전의 힛트를 친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의
실제 주인공인 修德寺의 一葉스님
[홍성 新驛舍] 오전 10시 20분경
용산역에서 오전 8시 10분에 출발하는 장항선 1553호 무궁화호를
천안역에서 9시 20분경에 타고, 홍성역에 10시 20분경에 내렸습니다.
눈이 내리면 꼭 찾아 가 보려고 남겨 두었던 德崇山 修德寺를 찾아
나 혜석이라고 하는 新女性과 그의 친구 "김 원주"라고하는 新女性과
'수덕사의 여승'으로 돌아간 "一葉스님"의 삶을
나름대로 음미해 보려고 기차를 타고 길을 나섯습니다.
[홍성 新驛舍에서 바라보는 洪城市內]
2010년 1월 9일(토)
장항선 무궁화호를 타고 오전 10시20분경에 홍성역에 내렸습니다.
지난해에 왔을때엔 홍성역이 저 앞에 있었는데, 새로히 역사를 지어 이사를 했습니다
洪城이라는 城이 있어서 도시 이름이 '홍성'이 되어버린 홍성읍내가 펼쳐지며
멀리 금북정맥의 백월산이 보입니다.
날씨는 잔뜩 흐려 금방이라도 다시 눈이 쏟아질듯합니다.
[德崇山 修德寺 入口] 10시 50분
홍성역에서 종합버스터미날로 와서 시내버스를 타려고 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택시를 타고 약 10분 정도 달려 德崇山 修德寺 入口에 도착했습니다.
택시비는 미터요금으로 11,500원이 나왔습니다.
德崇山 修德寺 入口에는 商街들이 늘어서 있으며
登山客보다는 관광객이 훨신 많이 줄을 서서 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德崇山 修德寺 入口]
商街를 지나면 멀리 德崇山 정상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德을 배우고, 德을 베풀고, 德을 받들며 살라고 하는 듯 합니다.
[修德寺 一柱門]
최근에 새로 세운듯한 修德寺 一柱門이 나오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됩니다.
[德崇山 修德寺 안내도]
주차장에서 수덕사 내부를 관통하여 '덕숭산 정상'으로 갑니다.
오늘은 '덕숭산 산행'이라기 보다는 '수덕사의 여승'을 생각해 보는 여행이라고
해야겠습니다.
[修德寺 안내도]
修德寺는 女僧들만이 수행하는 사찰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더군요.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禪房'이 만들어진 절간이라 그렇게 인식되는
모양입니다. 修德寺는 女僧과 男僧이 함께 수행하는, 즉 '비구니'와 '승려'가 함께
수행하는 二尼寺刹입니다
女僧들이 수행하는 견성암 見性庵을 눈여겨 봐 주시기 바람니다.
다른 곳에 있는 견성암은 見聖庵인데, 이곳의 견성암은 見性庵입니다
[修德寺로 올라 가는 길]
朝鮮王祖 500年, 男尊女卑로 중무장한 封建社會의 엄청난 장벽을 뚫고
女性의 社會的, 人間的 平等을 최초로 부르짖은 女性.
金 元周라는 여인
修德寺의 女僧 , 一葉스님
[修德寺 매표소] 11시 00분
일인당 2,000원의 입장료를 받았습니다.
2,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드디어 修德寺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新女性"
"연애"....."자유연애"........"姦通"
"離婚"..........."再婚"........"情死".....
이러한 單語가
'男尊女卑'로 중무장한 朝鮮이라는 封建社會의 엄청난 장벽을 뚫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900년대 초에 새로운 유행어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 新思潮 앞에 섯던 女人들 중에 그 대표 여성들이
김원주, 나혜석, 윤심덕이라 할수 있다고 나름대로 생각하며
뒤따라서 모윤숙, 노천명, 최정희등이라 할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모두 이화여고, 진명여고, 호수돈여고등 일류학교를 나오고,
대학은 이화여대를 비롯해 해외 유학을 다녀온 말 그대로 新女性들이었습니다.
최근 아프리카 수단이라는 회교국가에서 한 여성이 전통복장을 하지 않고
청바지를 입었다는 이유 하나로 감옥에 보내는 판결이 내려져 온 세계의 이목을
받았습니다. 요즈음 우리가 들으면 개도 웃고 갈 이야기가 해외 토픽으로 전해지지만,
사실 우리나라도 불과 얼마전까지는 물론 현재까지도 여성들의 사회적 입지는
많이 좋아 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좁은 것은 사실입니다.
[修德 旅館]
매표소 정문을 지나자마자 바로 왼쪽으로 초가집이 하나 보입니다.
이 초가집이 유명한 "修德 旅館"입니다.
1900년대 초
외국으로 유학을 가는 학생들이 늘고 더 넓은 세계와 접하면서 新文化가 들어오며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는 물론, 문학에서도 新思潮가 번성하며 우리나라에도
현대문학이 태동하게 됩니다.
1908년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新詩가 발표되어
현대자유시 붐이 일어 나지만,
사실 최초의 新詩는 1907년 "김원주"가 쓴 "동생의 죽음"이라는
詩라고 강조하는 국문학자들이 많습니다.
그 "김원주"라는 詩人이 "수덕사의 여승"이 되고,
그 여승의 절친한 친구인 "나혜석"이라고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서양화가이자
詩人이며 수필가, 소설가인 "정월 나혜석" 화가가 자신도 중이 되게 해 달라고,
수덕사에 찾아와 이 "수덕여관"에 묵으며, 시위를 했던 것입니다.
[修德 旅館 안내]
이 여관은 한국이 낳은 천재적인 화가 -
韓國畵를 世界畵로 만든 "고암 이응로 화백"의
고택이라고 "정월 나혜석"보다 먼저 안내하고 있습니다.
"고암 이응로화백"에 대해선 다음에 얘기하기로 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新女性이라고 하는 "一葉스님, 김원주"와 "정월 나혜석"에 대한
사연부터 알아 보고 가겠습니다.
[修德 旅館]
우리나라 최초의 新女性인 "김원주 여사"가 머리 빡빡 깍고 女僧이 되어 修德寺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정월 나혜석"이 나도 중이 되겠다고 절친한 친구인 "一葉스님"을
찾아 옵니다. 하지만 당시 "一葉스님"의 선사이던 "滿空스님'이 "정월 나혜석"을
중이 될 재목이 되지 못한다고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滿空스님'이 "정월 나혜석"에게 "절간이 세속에서 버림 받고 현실 도피하러 오는
곳이 아니다"라는 이유로서 "정월 나혜석"은 도저히 세속을 끊을수 없어 중이 되지
못할거라고 단언합니다. 그래서 "정월 나혜석"은 이곳 '수덕여관'에 3년이나 머물며,
"중이 되게 해 달라"라고 시위를 했던 것입니다.
[修德寺 禪美術館]
어마어마한 여인 "정월 나혜석"
우리나라 근대 미술사상 최초의 '여성서양화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소설가'
나혜석이 쓴 소설 "경희"는 당시의 베스트셀러였던 "춘원 이광수"의「무정」보다도
더 높은 문학적 평가를 받아 '한국 페미니즘 문학의 원전'으로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3.1운동 때 '유관순 누나'만 있는 줄 아십니까?
나 혜석은 3.1운동 때 "이화학당 만세운동"을 주도해 감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
였습니다. 뭐니뭐니해도 나 혜석은 김 원주와 함께 "여성해방운동가"였습니다.
자유분방한 '애정관'은 당시 '男尊女卑'로 중무장한 朝鮮이라는 封建社會의 엄청난
장벽을 뚫고 숱한 스캔들을 뿌리며 "연애대장"이라는 별명을 얻어 가며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修德 旅館]
조금있다가 "김 원주 - 일엽스님"의 스캔들도 알려 드리겠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新女性인 "김 원주"는 女僧이 되어 수덕사로 들어 가고,
또 한명의 우리나라 최초의 新女性인 "나 혜석"은 女僧이 되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수덕여관'에서 3년을 죽치며 애걸복걸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新女性인 "김 원주"와 "나 혜석"은
'男尊女卑'로 중무장한 朝鮮이라는 封建社會의 엄청난 장벽을 결국 넘지 못했습니다.
"여성의 정조는 마음에 있는 것이지, 육체에 있는게 아니다"라고 외치며
남녀 평등을 주장했지만 세상은 그들에게 싸늘한 비극만을 안겨 주었습니다.
결론 부터 말씀 드리면, "정월 나혜석"은 어느 거리에서 객사하여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며 52세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는데, 행려병자라 화장을 하여 무덤조차 남아
있지않습니다.
'나 혜석'의 말로는 고독 그 자체였습니다.
'나 혜석'은 이혼후 18년 동안 혼자 살았으며,
큰아들을 잃고, 딸 셋이 있었는데(현재도 살아 있는 분이 있다는군요)
딸들은 '엄마 나혜석'을 탕녀로 여겨 평생 혈육을 부정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사회적 관념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인지 지금까지도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는 분들
많지요?
[顧庵 李應魯선생이 쓰던 방]
'고암 이응로 화백'은 "정월 나혜석'의 후배이지요
그러나 '나 혜석'이 여기에 기거할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고암 이응노화백'은 '동백림 간첩사건'으로도 유명하지요?
최근에 재심에서 최종 무죄 판결이 났습니다만, 냉전 이데올로기를 정권연장의
수단으로 사용하던 박통시절의 비운의 화가였지요
[修德 旅館]
"정월 나혜석"의 삶을 간략하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수원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나 혜석은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동경으로 유학을 가서 '동경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 다녔습니다.
당시 같은 동경 유학생이던 '최승구'라는 남성과 첫사랑에 빠져 듭니다.
하지만 '최승구'라는 유학생은 이미 결혼을 한 유뷰남이었습니다.
최승구는 이혼을 하고 나혜석과 결혼하려고 했지만 봉건사회의 벽을 넘지 못하고
폐병을 얻어 26살의 젊은 나이에 죽어버림니다.
최승구가 떠나고,
1년 뒤 수필 <회생한 소녀에게>를 발표해 그의 죽음에 대한 심경을 토로하며,
그의 곁에 조금 더 머물렀더라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회환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사랑했던 연인의 죽음은 나혜석에게 많은 변화를 주었고 그녀를 비련의 여인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가까스로 마음을 잡은 그녀는 자신의 친오빠 나경석의 소개로
'김우영'이라는 남자와 약혼을 합니다.
김우영은 교토대 법학부를 나와 일본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변호사였습니다.
하지만 김우영은 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압송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던 친일파 인물입니다.
한편 나혜석은 김우영과 약혼한 상태에서 "춘원 이 광수"와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춘원 이광수"와 염문을 뿌리지 않은 新女性들이 없을 정도로
"춘원 이광수"는 스캔들 메이커.
제가 알고 있는 여성들만해도 '모윤숙', '김원주', '김선희'등이 있으니,
유부남이었던 이 광수는 나 혜석을 비롯해 수많은 新女性들 틈에서 놀았습니다.
특히 모윤숙이 쓴 "랜의 애가"는 이광수를 사모하는 글로 유명하지요?
[修德 旅館]
하지만 김우영의 끈질긴 구애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나혜석은 당시엔 상상할수도 없었던, 국내 최초로 일간지에 '청첩광고'를 내고
1920년 4월 정동교회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림니다.
김우영은 본처와 사별하고 딸 하나를 두고 있었습니다.
당대의 인습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결혼조건을 내 겁니다
“일생을 두고 지금처럼 나를 사랑할 것”,
“어떤 경우에도 그림을 그리는 데 방해가 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함께 살지 않을 것”,
“애인(자신의 첫사랑 - 최승구)의 묘지에 묘비를 세워줄 것”등을 내걸어
결혼 전제조건의 승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떠나는데...
이들 신혼부부가 찾은 곳은 자신의 첫사랑-최승구의 묘지였습니다.
나혜석은 옛 애인을 영원히 잊기 위해서라며 비석을 세워 달라고 청했고,
착한(?) 남편 김우영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비석까지 세워 줍니다.
하지만 이들의 결혼생활은 그리 평탄치 않았습니다.
이때 황옥경부 폭탄사건이 터지는데,이 사건의 변호를 맡았던 김우영이
궁지에 몰린 일본의 제의로 이들 부부는 유럽 유학길에 오르게되는데,
이때부터 불행의 씨앗은 잉태됩니다.
김우영은 베를린으로 법학공부를 하러 떠나고,
나혜석은 파리에서 프랑스 야수파 화가인 비시에르의 화실에 드나들면서 그림공부를
합니다. 이국만리 프랑스 파리에서 그림공부를 하며 홀로 사는 新女性을 뭇남성들이
그냥 둘리 만무했겠죠? '3.1운동 33인' 중에 한 사람이며, 파리로 도피해 있던
"최린"이라는 남성을 만나 사랑을 불태웁니다.
그러나 파리에서 맺어진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최린은 독립운동가였지만 나중에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는 그런 놈이었습니다
귀국 후 어려운 생활 때문에 나혜석은 시댁인 부산 동래에 머물게 되었으며,
김우영은 서울에서 변호사사무소를 개업하여 딴살림을 차렸습니다.
시댁살이에 적응하지 못한 나혜석은 최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고,
최린은 친구 권승렬 변호사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습니다.
그러나 권승렬은 연회장에서 이를 발설했고 결국 남편 김우영이 알게 되어
간통죄로 고소하겠다는 협박에 결혼 10여년 만에 3남1녀를 두고,
그녀 나이 서른둘에 이혼도장을 찍어야 했습니다.
'정월 나혜석'의 남성 편력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결국 이혼 후에 이곳 修德寺에 찾아와 중이 되게 해 달라고 하지만
滿空스님과 일엽스님은 중이 될 준비가 되있지 못하다는 이유로 거절하니
이곳 "修德 旅館"에서 기거하며 약3년간이나 중이 되게 해 달라고
애걸복걸 하였던 것입니다
[修德寺 금강문]
“일생을 두고 지금처럼 나를 사랑할 것”,
“어떤 경우에도 그림을 그리는 데 방해가 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함께 살지 않을 것”,
“애인(자신의 첫사랑 - 최승구)의 묘지에 묘비를 세워줄 것”
이러한 요구조건을 모두 수락하고 결혼을 했던 '변호사 김우영'이었지만,
간통 사실을 안 '변호사 김우영'은 간통죄 협박으로 나혜석으로부터 이혼 항복을
받아 냅니다
나혜석은 이혼하면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던 최린의 말을 그대로 믿었지만,
최린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남자는 다~그래~~ ㅎㅎ
사랑과 쌕스는 별개의 문제이라는 것이었겠죠.
아이들 때문에 멀리 떠날 수 없어 수원에 작업실 겸 미술교습소를 차려 작품 활동에
몰두합니다. 하지만 생활은 몹시 궁핍했고 부정한 여자로 낙인찍혀 사회로 부터
냉대와 질시를 받습니다.
"남편 김우영"과 "연인 최린"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놀다가
졸지에 외톨이가 된 '나혜석'.
그즈음 김우영은 일본총독부 상공과장으로, 최린은 중추원 칙임참의로 승승장구하며,
당시 남성들은 첩을 두고 새 살림을 차릴수 있는 시대여서 이들은 새 살림을 차려
산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나혜석'은 1934년 우리나라 최고의 연애잡지 "삼천리"에
자신의 이혼과 관련한 내용을 수록한 <이혼고백장>이라는 글을 연재하면서
남성우월주의의 封建社會에 다시 파문을 일으키며 반격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나혜석의 <이혼고백장>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의 추문에 입방아 찢기를
좋아하는 인간들의 큰 관심사이니, 이런 얘기들을 동아일보, 조선일보등 일간지에서 까지
대대적으로 보도하게되니 얼마나 참새들의 입방아가 심했겠습니까.
그런정도로 끝내는게 아니라
'나혜석'은 경성법원에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면서
엄청나게 장안의 화제가 되었으며, 남성이나 여성이나 모두 놀라기는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남녀평등이 거의 완벽해졌다는 현재에도 생각하기 어려운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그 당시 봉건사회에 냈으니
그녀가 남녀 불평등의 인습, 관습에 대한 저항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하시겠죠?
궁지에 몰린 '최린'은 어쩔수 없이 위자료를 주고 합의했으나,
싸움에서 승리한 '나혜석'에게 돌아온 것은 사회적 비난과 멸시뿐이었습니다.
사회적 관습과 인습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두 아시지요?
이후 작품활동에 전념하면서 '일본제국미술원 전람회'에서 서양화부문에서 입선하고,
'제10회 조선미전'에 입선하는 기쁨도 맛봅니다
하지만 <이혼고백장>과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이 두 사건으로
개인적으론 승리했으나 여성으로는 사회에서 고립되어 그녀의 외로움은 병으로
이어지고 맙니다. 그 무렵 큰아들을 폐렴으로 잃고, 무너지는 삶의 의지를 부둥켜안고
이곳 수덕사로 왔던 것입니다.
'男尊女卑'로 중무장한 朝鮮이라는 封建社會의 장벽에
온몸으로 부닥친 新女性-"나 혜석"
남녀평등은 어디서 시작되었던 것인가~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은 이런 분들에게 감사해야하지 않을까
21세기를 살고 있는 여러분들은 '姦通'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 소리 하지말고 들키지 않게 몰래 하라구요? 에구 인간들아~~~ㅋㅋ
"정월 나 혜석"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소설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운동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故이응노 화백의 부인인 "박인경 화백"이랍니다.
나혜석이 갈곳이 없어 잠시 안양 경성보육원에 머물고 있을 때였는데,
당시 보육원은 '박인경 화백'의 외사촌 오빠가 운영하고 있었답니다.
미대생이었던 박인경화백은 “우리 보육원에 여류화가가 있으니 미대생으로서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는 외사촌 오빠의 말에 박인경 화백은 그곳을 찾았다고 합니다.
'나혜석을 만난 박인경 화백은 그녀가 늙고 병들어 있었지만,
뒷모습은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다웠다고 회고했습니다.
그 이후, 거리에서 차가운 시체로 발견되기까지
'나혜석'의 행보를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혹시 그녀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사랑했던 옛 연인 '최승구의 묘지'가 아니었을까 - -
[圓通寶殿]
'금강문'을 지나면 바로 좌측에 '圓通寶殿'이 보입니다.
圓通寶殿 앞에는 歡喜臺라는 건물이 있는데 꼭 들려보고 가야하는 곳입니다
歡喜臺는 옛날엔 見性庵이었다는데, 見性庵은 엄청 큰 현대식 건물을 지어
윗쪽으로 옮겨갔고, 見性庵이었던 이곳 건물은 歡喜臺라고 하게 되었답니다.
見性庵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禪房으로 유명하며
"나 혜석 新女性" 다음으로 제가 이야기 하려고하는 '나 혜석'의 절친한 친구였던
"金 元周"라는 新女性이 머리 빡빡 깍고 女僧이 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圓通寶殿]
"金 元周"라는 新女性이 머리 빡빡 깍고 修德寺의 女僧이 된 곳 - "歡喜臺"
"金 元周" "新女性" "一葉스님" "修德寺의 女僧" 화려한 수식어가 붙은 이 여인은
1896년 평양 근처 용강군 삽화면 덕동리에서, 교회 목사인 아버지와 "딸도 잘 키우면
아들보다 낫다"고, 그 당시에 이미 남녀평등을 주장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波瀾萬丈한 人生"의 주인공 "金 元周"라는 新女性의 행로를 요약해 보겠습니다.
金 元周는 불운하게도 아빠 엄마를 일찍 여의고, 동생들 마저도 모두 일찍 죽어
이 세상에 외톨이가 되었다고 그의 저서 "청춘을 불사르고"에서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의 자전적 에세이집 "청춘을 불사르고"의 첫페이지를 먼저 읽을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나의 과거, 꽃답고 기꺼움만이 천진 난만하였을 나의 처녀 시대!
그러나 불행이 불공평한 운명의 손에 번롱을 받아 파란 많고, 곡절 많은 생활에
슬픔과 눈물로 지내던 처녀 시대를 면하고, 새 가정을 가지게 된 지 어느듯
세 겨울을 맞게 되었나이다. 파란 많던 처녀 시대에 비하여 지금의 새 생활은
실로 안온安溫하고 따뜻한 즐거운 것이외다. 그러나 꽃 웃는 아침, 달 돋는 저녁에
마루 위에 고요히 앉아 불귀不歸의 객客 되신 양친을 애모哀慕하는 회포로
기꺼운 현재를 깨뜨리는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 수 없나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청춘을 불사르고"는 자신의 현 처지와 일찍 돌아 가신 부모님이
보고 싶어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 가며 어린 시절과 고향의 모습, 어머니의 무덤을
앞에 두고 상념에 잠기는 글을 읽으면 눈물없인 끝까지 읽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歡喜臺]
圓通寶殿 앞에 있는 歡喜臺라는 이 건물이 "金 元周"라는 新女性이 머리를 깍고
스님이 된 곳입니다
"波瀾萬丈한 人生"의 주인공 "金 元周"라는 新女性의 행로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金 元周'는 이쁘고 공부는 엄청 잘했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求世學校를 다녔는데 부모님을 일찍이 여의고 동생들도
단명하여 서울로 와 '이화학당'에 들어가고 지금의 '이화여대'까지 졸업합니다.
3.1운동 때엔 자신의 집에서 전단을 살포하며 만세 운동에 앞장서고, 일본경찰에
쫏기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日本東京英和學敎"에서 공부하고 1920년에 돌아 옵니다.
일본에서의 2년간의 유학생활에 대해서는 별도로 알려드리겠습니다.
1920년 서울로 돌아 와서부터 "우리나라 최초"라는 일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歡喜臺에서 바라본 圓通寶殿]
일본 유학을 끝내고 돌아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를 창간하는데 그 잡지의 이름이 "新女子"입니다.
이때 함께한 여성들이 앞에서 파헤쳐 보았던 "여류화가 나혜석"이었습니다.
그리고 "박 인덕", "신 줄리아", 나중에 이화여대총장이 된 "김 활란"이었으며,
"小波 방정환"선생이 고문격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그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金 元周'가 주창한 "신정조론新貞操論"
그의 저서 '청춘을 불사르고'에서 인용합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다. '자유 연애*자유 결혼*자유 이혼'은 신성한 것이며,
이를 금하는 것은 후진적 폐습이 아닐수 없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런 말을 했으니, 사람들은 나를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일생을 통하여 거듭거듭 결혼의 파경을 더듬지 않으면 않되었다."
“…남녀가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다.
정신적으로, 남성이라는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여인이라면
언제나 처녀로 재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여인을 인정할 수 있는 남자라야
새 생활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여인, 그것이 바로 나다.”
"신정조론新貞操論"
"女性의 貞操"는 마음에 있는것이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창하며
많은 남성들과의 정사와 결혼, 그리고 이혼을 거듭하며 결국 '결혼의 파경'을
맞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것들이 부처님의 자비여서 결국
여승이 되었으니 '살거리'를 미리 장만한 잘된 일이라고 밝힙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四天王門]
저는 절간에 가서 "四天王門"을 지나며 "四天王"을 보면,
석가모니, 아미타, 비로자나도 일반 사람과 뭐가 다른지 궁금증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완벽한 경지에 오른 神적인 절대적 지존의 지위에 있는 분들이
四天王이라는 경호원이 필요한것인지......
[德崇叢林 修德寺]
新女性으로 불리워지는 "金 元周"에 대해 제가 알고있는 행적을 몇가지 들여다
보겠습니다. 다른 업적이 많습니다만, 여기서는 세간의 참새들에게 숫하게
입방아에 올랐던 것들에 대해, 또한 그런 남성편력들에 더 관심이 있을
"홍어와 무인도" 애독자들을 위해 '연애와 결혼, 이혼'에 대해 우선 들여다 보겠습니다.
당시에는 조혼이 성행하던 시대이라 여자는 14세 정도면 결혼을 하던 때였습니다만,
新女性들은 학업을 계속해야했기에 자연히 결혼은 당시로는 노처녀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김원주는 18살이나 위인 어느 남성과 결혼합니다
(본인은 "뭣도 모르고 살기위해 관습상 결혼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일본 유학시절에 詩人인 모 유부남과 열애에 빠져 간통으로 이혼을
당합니다. 다시 일본의 명문가, 모 은행 총재의 장남인 "오다 세이죠"와
사랑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이 최근 자전집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를 펴낸
일본 이름으로 '오다 마사오’이고,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불교에 귀의한
"일당스님. 속세명 김태신"입니다. 무지 유명한 분이시죠?
김일성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 초상화를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으며,
직지사 스님으로 있다가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당스님"은 최근에 자전집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를 펴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김일엽은 춘원 이광수의 애인이었다, 그래서 숨겨놓은 아들이 있다,
혹은 김일엽은 연애대장이다 등등 어머니를 둘러싼 안 좋은 소문이 많았어요.
한때는 어머니와 저를 두고 세간에 오르내리는 이야기에 신경을 쓰기도 했지만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어머니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 책을 냈어요.”
하지만 '김 원주'는 아들 '오다 마사오 - 김태신’을 낳은지 3일만에 한통의 편지를
남기고 서울로 돌아 옵니다.
'일당스님'의 말에 의하면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답니다.
"당신하고 살면 내 일신은 편안하겠지만 평생 조국을 배신한 괴로움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당신도 나로 인해 천륜을 끊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니
다른 여자와 가정을 꾸려 '오다 마사오'와 행복하게 사세요"
*"오다"가문은 조센징과의 결혼은 절대 불가라고 했습니다만,
"오다 세이죠"는 끝까지 결혼하겠다고 했으니 그는 가문에서 쫏겨나 평생 홀로 살다
죽었답니다. 그리고 "오다 세이죠"는 일엽스님이 노환으로 누었을 때에 한번
수덕사를 찾아 일엽스님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었다고 일엽스님의 아래 여승들이
전하고 있답니다.
[德崇叢林 修德寺]
서울로 돌아 온 김원주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 "新女子"를 발간하며 활발한
활동을 합니다. 그러면서 친구 애인(춘원 이광수라고 추측)과 염문을 뿌리며
삼각관계를 이루다가 동아일보 모 기자와 동거생활도 합니다.
그러다가 운명적 사랑 "B씨"를 만나게 되며 인생을 뒤바꾸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운명적 사랑 B씨"에 대해 파 헤치지 않을수 없겠지요?
김원주가 진정한 사랑을 느끼며 끝까지 흠모했던 "B씨"는 다름아닌 "백성욱씨"입니다
'백성욱씨'는 1897년에 태어나 1981년에 돌아 가셨으니 85세로 장수했습니다
'김원주'는 1896년에 태어나 1971년에 돌아 가셨으니, "B씨"는 연하의 남성이었습니다.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백성욱씨'의 프로필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1919년 경성불교중앙학림(京城佛敎中央學林)을 졸업하고,
1922년 독일의 뷔르츠부르크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 1925년 동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28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취임,<대방광불화엄경 大方廣佛華嚴經>을 제창했다.
1945년 8·15해방과 함께 애국단체인 중앙공작대를 지도, 민중계몽운동을 했고,
1950년 내무부장관에 임명되었다. 1951년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
1953년 동국대학교 총장, 1954년 동국학원 이사장을 지냈다."
김원주가 백성욱을 만나는 과정, 사랑하게되는 이유, 연애하는 과정,
헤어지게되는 과정, 그리고 비구니僧이 되었어도 그리워하는 연정을
그의 자전적 에세이집 "청춘을 불사르고"에 상세히 기록해 출간까지 했습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만하지요?
비구니僧이 되었어도 그리워하는 연정을 책으로 공개적으로 표현하였기에,
1960년대 즉 제가 고교시절에 "청춘을 불사르고"가 최고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 '파란문'도 한권 사서 읽었던 것입니다.
또한 장사 될일만 있으면 재빠른 레코드사가
김문흥 작사, 한동훈 작곡의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가요를 만들어,
'가수 송춘희'에 의해 불려지게하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가요로
엄청난 힛트를 쳐서 레코드사가 때돈을 벌었다는거 아닙니까
[修德寺 大雄殿앞]
하지만 그토록 흠모했던 "백성욱"씨로 부터 버림받습니다
'백성욱씨'에게서도 버림 받고 난후의 감상을 다음과 같이
'청춘을 불사르고'에서 회고하고 있습니다
"속세의 사랑이라는 것
이렇게 공중을 나는 새마저 냉정하게 대해주는 세상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같이 냉정해져야 할 텐데 내 가슴에는 그래도 더운 기온이 남아서
내 눈시울까지 뜨뜻하게 해주었다. 그래도 이 눈물은 차가운 세상이 야속해서
나는 눈물이 아니라, 너무도 따뜻이 감싸주던 그 옛날이 그리워서 나는 눈물이었다"
"세월은 흐르고 또 흘러 그와 만났던 봄, 즐거움을 누리던 그 봄은 해마다 와서,
먼 산에는 아지랭이가 가물거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와의 일이 그리 멋쩍을 뿐,
원심은 가져본 기억이 없으며, 나는 누구를 그리 원망하지 않는 성미라는 것을
스스로 알았을 뿐이다. 정말 허전했다. 기다리는 사람도, 기다려지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울고 울 뿐이었다.
사랑! 사랑의 의존인 내 마음이었다. 그를 사랑하는데 빠저서 사랑이 나의 마음의
전체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육체를 불사르기로
결국 나는 그를 아주 단념해버리고 다른 '그'를 따르기로 하였다"
[修德寺 大雄殿 안내]
부석사에 있는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 最古의 목조건물인 수덕사 대웅전입니다.
국보 49호로 지정되있는 대웅전에 대해선 사진 속의 설명을 참고하시기 바람니다.
[大雄殿에서 내려다 본 修德寺]
수덕사 대웅전에서 바라보니 앞에는 "홍동산"이 보입니다.
"홍동산'은 "금북정맥"줄기로서 덕숭산으로 이어져 가야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수덕사의 위치는 풍수지리를 모르는 필자가 봐도 좋은 곳인듯합니다.
[大雄殿 왼쪽 옆 "등산로 입구"]
"德崇山 登山路"는 大雄殿 왼쪽 옆에 바로 있습니다.
"육체를 불사르기로"
"결국 나는 그를 아주 단념해버리고 다른 '그'를 따르기로 하였다"
자신을 버리고 떠나 버린 '백성욱'을 체념하고 새로운 '그'를 만나 동거에 들어 갑니다.
새로운 '그'는 재가승 하 윤실이었습니다.
이 당시 김원주는 학교 교사도 여러 해 했습니다.
'하 윤실'과의 동거생활에 대해 '청춘을 불사르고'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나는 한때나마 내 생활에 만족하고 편하게 되어야 했다. 그런데 새로 사귄 그와는
사랑의 사귐보다 생활의 방편이었다. 나는 여남은 살 때부터 행복과 불행이 내 마음에
달렸고, 좋다 언짢다 하는 느낌이 내 정신 작용이라는 것을 짐작하게되어
'우선 편하고 보자'하는 생활 모토를 세우게 되었었다"
[大雄殿옆 德崇山 登路]
"만공선사滿空禪師를 만나다"
"나를 버린 '그'이의 대신인 새로운 상대와도 몇해 사귀어 왔지만, 억지로 만든 사랑은
권태가 느껴지는 법이다. 그때는 남자도 변하고, 나도 달라지는 것이 인간의 생활임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사랑, 인간적 내적 생활에 만족을 주는 오직 하나의 것으로 알던
그 사랑마저 믿을 것은 못 되었다"
"나는 내게 있는 것은 다 쏟아내고 지내는 그러한 여인이라, 곧 사랑도 못 믿을 것으로
느낀 그 심정을 동아일보에 발표했더니, 그때 그 신문 편집자인 '설인식씨'가 가십난에
'눈가리고 아옹!'이라고, '그대가 사랑을 버리고 살아!'하면서 비웃는 말을 했다.
내가 시비할 마음으로 간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이튼날 그 편집실에 갔더니, 설씨는
얼굴빛이 핼쑥하게 변해지고, 국장인 이광수李光洙씨는 '공인이기 때문에 옳고 그르건
간에 公言을 듣게 되는 것이니 어찌 생각하지는 마오'하고 위로인지 사과인지 부드러운
말로 일러주던 기억이 떠올라 지금도 나의 미소가 내 눈가를 가늘게 주름 잡히게 한다.
나는 그때 곧 입산하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이다.
[德崇山 登路]
"나는 무엇이던지 마음대로 취할수도 있는 지식을 가진 건강하고 잘 생긴 여인이
前人未踏의 어려운 길을, 아주 세상을 잊어버리고 빈 마음으로 發心出家하는 일같이
생각되어 스스로는 크게 장쾌한 일로 알게 되고, 또 큰 자부심도 가졌던 것이다."
이리하여 '사랑과 이별'을 일삼던 "김 원주"는 "修德寺의 女僧"이 됩니다.
[德崇山 登路에서 뒤돌아 본 修德寺]
"수덕사의 여승"
김문흥 작사, 한동훈 작곡, 송춘희 노래
인적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온 님 잊을길 없어
법당에 촛불켜고 홀로 울적에
아~~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산길백리 수덕사에 밤은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길 없어
법당에 촛불켜고 홀로 울적에
아~~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德崇山 登路]
"수덕사의 여승"을 부른 가수 "송춘희씨"의 근황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친절한 파란문이 여기저기 알아봤습니다.
가수 송춘희
노래 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
가수 송춘희씨(72)를 보면 아무래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굳히게 됩니다.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수덕사의 여승’은 그의 인생을 깡그리 바꿔놓았습니다.
고모 할아버지가 답십리 장로교회를 건립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이 노래 -수덕사의 여승-이 힛트하고 나서 불교로 개종했습니다.
아니 개종하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요.
[소림초당 少林草堂]
滿空스님이 안거하던 곳이랍니다.
절묘한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송춘희씨가 불교도가 된 계기도 재미있습니다.
"수덕사의 여승"이 한창 인기 있을 때에 이 노래로 하루에만 5개 극장에서 하루 4회씩
20회, 방송과 야간업소 등 여덟 군데를 돌기도 했다고 합니다.
엄청난 인기를 대변합니다.
워낙 빅히트하다 보니 공연 때마다 아나운서나 사회자들이
“수덕사에 가보셨어요”라는 질문을 빼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울서 먼 수덕사엔 못가고 가까운 절에 갔다 왔다고 대답하곤 했답니다.
절을 할 줄도 몰라 찾아가 우두커니 서있다 왔다면서
“그때 부처님이 슬며시 웃었다"고 회고합니다
[소림초당 少林草堂]
'송춘희씨가 이 노래를 발표하고 난 뒤의 에피소드.
수덕사 견성암의 일엽 스님 문도들이 찾아와 “노래하지 마라”
“가사 바꿔달라”며 거칠게 항의했다고 합니다.
이 노래가‘청춘을 불사르고’라는 책까지 펴낸 '일엽스님'을 떠올리게 하고
'일엽스님'을 욕되게 한다는 항의였답니다.
요즘에는 당시 스님들이 “그때 왜 그랬지?”라고 되묻는다고 합니다.
현재는 수덕사 입구에 "수덕사의 여승" 노래비까지 세워져 있으니 격세지감을 느낌니다.
가수 송춘희씨는 일엽스님과 비슷한 면이 있지요? 우선 같은 이북 출신이고,
모두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불교도가 되었다는 점에서 입니다.
한편 일엽스님은 결혼을 여러번 한적이 있지만, 송춘희씨는 아직도 처녀라지요? 72세
[향운각]
少林草堂에서 조금 올라 가면 무슨 城같은 것이 나타는데 "향운각"이었습니다
[향운각 관세음보살상] 11시 40분
'향운각'앞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서 있습니다.
[향운각]
[향운각 관세음보살상]
[향운각에서 바라본 '홍동산']
금북정맥의 산줄기인 '홍동산'이 바로 앞에 있으며,
저 산줄기는 '안성의 칠장산'에서 이곳 '덕숭산'으로 오고,
'가야산'을거처 '일락산 백화산'을 거쳐 태안반도의 끝 '안흥진'으로 갑니다.
아시다시피 "파란문"은 저 '금북정맥'을 모두 종주 한바있습니다.
제가 쓴 "금북정맥 산행기"를 시간 나시면 읽어 보세요~~
[정혜사 定慧寺]
'향운각'을 지나 조금 올라 가면 "정혜사"가 나옵니다.
定慧寺는 근대 한국불교의 禪脈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경허ㆍ만공스님의 얼이 숨쉬고
있는 승려들이 수행하는 禪房입니다.
見性庵은 비구니 禪房이고....
[定慧寺 滿空탑 오르는 길]
수덕사 입구에서 정혜사까지 오르막은 계단으로 되있어서
등산이 아니고 계단 오르기가 "덕숭산 산행"입니다.
[滿空탑과 定慧寺] 11시 50분
"만공滿空스님 부도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있습니다.
'千思不如一行 천사불여일행'
"천번 생각하는 것보다 한번 행하는 것이 낫다."
一葉스님이 스승으로 모시고 불법을 배운 수덕사 중창의 대명사 - 滿空스님
"空"은 텅 빈것이 아니라 가득차 있는것 滿이라고 한 - 滿空스님
수덕사를 생각하면 "一葉스님"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은 속세의 인간들이고,
"滿空스님'을 먼저 떠 올리면 진정한 佛子라고 합니다.
그 많큼 수덕사는 "滿空스님'에 의해 크게 발전 되었다고 합니다.
[定慧寺]
"一葉스님"은 그의 저서 "청춘을 불사르고"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덕숭산은 도인, 곧 문화인을 기르는 곳으로 滿空禪師가 퇴폐된 이 산을 몸소
개척하시고 많은 문화인을 길러내고 17년전에 입적하셨는데, 인걸은 地靈이라는
속담도 있지만 문화인도 문화지의 靈氣의 감화로 이루어지는 법이라,
명소에 명인의 영감이 어린 이 산은 팔면으로 갖추어진 문화지인만큼
온 세계에 알리어 현실의 眞實體를 찾게하는 이 법회로 운집하여
故 滿空 큰스님의 遺志와 사업의 상속자가 배출하게 되어야 할것을
느끼어 이 글을 쓴 것이다"
"청춘을 불사르고"라는 책이 엄청나게 팔려
그 수익으로 "견성암"을 새로 지었다는 얘기도 있더근요.
[定慧寺]
"一葉스님"은 그의 저서 "청춘을 불사르고" 맨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내가 歸依한 宋滿空 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세상을 버리고 산에 들어와서 하는 공부는 '먼저 살고 보자!'는 것이다.
즉 끝없는 생명이 살아가는 일인 것이다. 먼저 살고 나서야 살 차비인 먹을 것,
입을 것, 사회 국가 세계가 필요한 것이 아니냐? 살기야 벌레라도 지옥인간이라도
아니 살수는 없는 것이지만 다니고 먹는다고 사는 것이 아니며,
다만 누구나 자기의 전체적 생명력을 회복하여 만능적인 행동력으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사는 것이다. 지금 우리 인간은 생명의 가장 작은 파편의 의존이니,
그 파편을 다 모아 한 큰 조각의 정신, 즉 전체적 정신으로 만들어 전체력으로 살게
되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요. 또 삶의 보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물건도 자기 물건을 못 찾아 쓰는 인간이라면 백치라고 하지 않느냐?
그런데 직접적인 자기 생명이요,자기 정신을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인간이
어찌 인간이냐? 아무튼 지금 우리는 내 마음에 달렸지, 내 맘먹기에 있지 하는
허세 부리는 말을 하면서 왜 마음대로 쓸 수는 없느냐?
그것을 해결하는 일이 인간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德崇山 정상으로 가는 길] 12시
定慧寺를 지나면 修德寺를 완전히 벗어나 덕숭산 정상으로 오르는 登路가 나옵니다.
[德崇山 登路]
눈이 흩날리기 시작하며 완벽한 겨울 눈 산행을 환상적으로 합니다.
[德崇山 登路]
눈 덮힌 덕숭산
환상적인 풍경을 만드는 덕숭산에 오르니
新女性 일엽 김원주와 정월 나혜석이 저와 함께 데이트 하는 듯 합니다.
[德崇山 登路]
눈이 내리면 오고자 했던 덕숭산 수덕사에 결국 왔습니다.
덕숭산 수덕사가 반겨 주는 듯 합니다.
[德崇山 登路에서 내려다 본 홍동산]
[德崇山 登路]
[德崇山 정상]
[德崇山 정상] 12시 20분
'일엽 김원주스님'과 '정월 나혜석화가'가 수없이 올랐을 德崇山 정상
그들의 삶은 성공이었을까.....비극이었을까........
[德崇山 정상석]
[德崇山 정상에서 바라본 "가야산"과 "원효봉"]
이 덕숭산 정상을 통가하는 금북정맥 마루금은 저 앞 가운데 "가야산'을 지나 갑니다
저의 "가야산 산행기"를 참고하세요
[德崇山 정상]
환상적인 눈꽃 밑으로 금북정맥 마루금을 따라 조금 내려 가서.....
[德崇山 정상근처에서 점심식사] 12시 25분
아무도 다니지 않는 곳에 자리를 펴고
눈으로 뒤덮힌 德崇山에서 新女性들에 대해 조잘대며
준비한 불고기를 구워 소주 한잔하는 그 맛은 ~~ 캬 ~ 상상만 하시라~
눈까지 내려 약2시간을 마시고 놀았습니다. ㅎㅎ
[山友들과 한잔]
뜨끈 뜨끈한 오뎅 국물과 지글지글 불고기를 안주로
쇠주를 한잔 하다보니 댓병 한병을 다 마셨습니다. ㅎㅎ
[눈꽃]
[德崇山 정상에서 기념사진] 2시 20분
이제 언제 다시 올줄 모르기에 증명사진 한장 찍었습니다
[修德寺로 하산]
일엽스님이 남긴 말 중에 유명한 말이 있지요
“내가 할 도리라면 나를 흙이나 걸레처럼 아낌없이 쓰련다.
흙은 아무리 써도 단단해지고 걸레는 더러운 것을 훔쳐내므로
그 자리는 언제나 깨끗하게 남아있다.”
[修德寺로 하산]
[修德寺로 하산]
원통보전 앞마당, 환희대歡喜臺 뒤 정자에 걸린 쪽지에 적힌 선시禪詩가
가슴에 와 닿으며 덕숭산 산행을 마칩니다.
本是無南北 본시무남북 본디 남북이 없는데
何處有東西 하처유동서 동서가 어디 있을까
天地本虛空 천지본허공 천지가 본래 허공이니
白雲無定處 백운무정처 흰구름은 정처가 없도다
[修德寺 입구로 하산]
[修德寺 입구에서 뒤 돌아 본 "덕숭산"] 3시 25분
덕숭산 정상에서 하산하는데는 약 1시간 걸렸습니다.
[덕산온천]
덕숭산 산행을 마치고 "덕산온천"으로 택시를 타고 왓습니다.
택시요금은 11,500원이 나왔고, 덕산온천 입욕료는 4,000원이었습니다
덕산온천 건물 뒷쪽에 보이는 산이 유명한 "용봉산"과 붙어 있는 "수암산"입니다.
수암산 뒤로 "용봉산"도 쬐끔 보이는군요
저의 "용봉산 산행기"도 심심하면 찾아 읽어 보세요
용봉산도 매우 아름다운 산이었습니다.
[삽교역]
삽교역에서 장항선 상행열차를 타고 돌아 왔습니다.
[장항성 열차 카페에서]
열차는 좌석이 없어서 입석을 끊고 열차 카페로 들어 갔습니다.
[장항선 열차 카페에서]
열차 카페 바닥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돌아 왔습니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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