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눈 내린 남한산성』    .


  ['전승문 (북문)']            
  2021년 2월 4일 (목) 맑음 
  그 동안 많이 다녔지만 눈 내린 <남한산성>을 산책한지는 벌써 10여년이 지난듯 해서
  모처럼 눈이 내렸기에 <남한산성>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남한산성 제1코스]는 공사관계로 출입금지 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남한산성>에서 가장 인기있는 코스인 <남문-수어장대-서문-북문 코스>가 출입금지였습니다.


  ['계곡산장']         
  그래서 <행궁>에서 <서문>으로 연결된 도로를 따라 <서문>으로 올라 갑니다.


  ['온조'와 '숭렬전']                
  <남한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되었고 <백제의 온조>가 기거하지 않았을까..하는 예상을 하고 있고


  ['국청사']            
  <국청사> 입구를 통과하여 <서문>으로 올라 갑니다.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 동안 고립무원의 城에서 벌어진 참담한 내분, 
  삶과 죽음의 등치에 관한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의 <병자호란>. 
  그해 겨울은 치떨리도록 모질었답니다. 
  "병자호란"
  조선왕조 왕들중 최고로 의심이 많았던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한양과 백성을 버리고
  개망신 당해 가며 개피를 보며 북으로 북으로 도망을 가고......
  전란이 끝나고는 오로지 '明나라'에만 충성을 다해 왕권만 유지 하려한 '선조'.
  당시 중국의 상황은 '후금'이 세력을 키워 '明'을 위협하고 있었는데도 ....
  그래서 '광해군'은 양다리 외교를 펼쳐 '후금'과 '명나라'를 함께 아우러는 
  외교정책을 시행하며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수구꼴통들은 이러한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물론 다른 꼬투리도 있지만) 
  외교정책을 꼬투리로 잡아 쿠데타를 일으켜 불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반정' 세력들..
  이들은 오로지 '明나라'만 섬겼습니다. 그 결과가 '병자호란'인데...
  '후금'의 '누루하찌'가 '明나라'를 초토화 시키며 '靑나라'를 세우는 시대가 도래하니
  '明나라'에게만 외교를 고집했던 '인조'와 수구꼴통세력들은 하루 아침에 
  '청태종'으로부터 보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라 할수 있지요


  ['서문' 가는 길]          
  1637년 1얼 30일
  [인조]는 이 길을 통해 <행궁>에서 <서문>으로 올라가 <서문>을 통과하여 <삼전도>로 갔습니다.
  오늘은 우리집 귀염둥이 "우리"와 함께 눈 내린 <남한산성>의 <서문 가는 길>을 오르고 있습니다.
  발이 시려워도 안아 달라고 하지 않고 무조건 뛰어 다닐려고 하더군요. ㅎ
  조금 올라 가면...
 


  ['한경직 목사' 우거처]                     
  <한경직 목사>도 <남한산성>에서 은거했고....
  <대광 중고등학교>를 설립 하셨죠?



  ['국청사']          
  <남한산성>에는 9개의 사찰을 두었었죠.
  <국청사>는 그 중에 하나로 주로 <서문>을 관리 방어하는 역활을 했답니다.


  ['서문']                    
  "우익문 右翼門" (西門)"
  1636년12월14일~1637년1월30일....47일간의 혹독한 겨울
  이 <남한산성>에는 '인조'라는 쪼다리 임금이 있었고,
  체찰사로서 난국의 해결을 시간에 맡기는 양다리의 명수 영의정 '김류'가 있었고,
  의로움과 충성심으로 절대 굴복은 없다고~오로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  예판 '김상헌'이 있었고,
  매국의 오명을 뒤집어 쓰더라도 임금이 살길은 화친이라고
  말이 화친이지 실제는 항복이라는 말을 비틀어 화친이라고 말 하는 이판 '최명길'이 있었습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옥신각신 말싸움만 하다가  바로 저 西門을 통해 내려가 항복을 하며
  그들은 결국 대한민국 역사에 도리킬수 없는 오점을 남기며 
  얼마나 더 오래 살지도 모를 목숨을 부지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仁祖實錄>에는 그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인조 15년, 1637년 1월 30일'의 "仁祖實錄"입니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성 밖에 와서 왕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왕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중략
  「왕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 남염의(藍染衣) :일반 백성들이 입는 허름한 옷





  ['서문'에서 '수어장대' 가는 길]              
  <남한산성>에서 가장 인기있고 경치가 좋은  <서문>과 <수어장대> 사이 탐방로를 둘러 보고


  ['대모산' '관악산' 조망]

  ['롯데월드' '북한산' 조망]
  서울과 주변 산들을 조망하고


  ['검단산'용마봉' 조망]                    
  <검단산>과 ,용마봉>도 조망하고
  산체비빔밥 한그릇 하고 하산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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