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21회차]
저수령-촛대봉-투구봉-시루봉-흙목-솔봉-묘적령-고항치
2011년 3월 12일(토)
日本 史上 最惡의 大地震이 산행 전날 발생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다는 날
비록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조그만 한반도 이지만
이곳에서 살고 있다는게 얼마나 감사한지 섬나라 일본을 바라보며 조국애를 느낌니다
평상시엔 일본에서 나쁜 일이 일어 나면 "쌤통이다~!"라고 핀잔을 주곤 했는데
이번엔 그런 핀잔을 줄 상황이 아닌듯합니다. 오히려 연민의 정이 느껴집니다.
비교적 지진에도 안전한 우리 국토를 자랑스럽게 느끼며 백두대간 속으로 변함없이 갑니다
[산행도]
대간 종주 계획으로는 "대야산 구간"을 가야 합니다.
그러나 '산불예방기간'과 출입금지구간이어서 그렇지 않은 곳부터 산행을 하기 위해
"저수령~묘적령 구간"을 먼저 갑니다.
이 구간은 원래 무박으로 "저수령"에서 "죽령"까지 한번에 가야 하지만,
당일 산행을 기본으로 하는 산악회여서 2번으로 나누어 진행 합니다.
[舍人巖] 9시 50분
"백두대간 저수령"으로 가는 도중에 "단양8경"으로 유명한 ""사인암 舍人巖"에
잠시 들렸습니다. 충북 단양군 대강면 사인암리.
"舍人巖" 앞에는 보시는 바와 같이 구름다리도 놓여 있어 잠시 들려 구경하기에 편리해
졌습니다.
[舍人巖 靑蓮庵]
다리를 건너 가면 "靑蓮庵"이라는 암자가 자리 잡고 있는데 "舍人巖"과 조화를 이룹니다.
이 암자는 고려시대 "나옹화상"이 창건한 사찰이라고 하는데.....
"나옹선사"는 "무학대사"와 함께 고려말 정치적 승려였지요.
유명한 시조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를 쓰신 분
[舍人巖 靑蓮庵 山神閣]
"靑蓮庵" 우측으로 "舍人巖" 정상으로 올라 가는 길이 있습니다.
"舍人巖" 옆에는 절묘한 곳에 산신각이 자리 잡고 있고,
올라 가는 입구에는 눈에 익은 時調 한수가 세겨진 時調碑가 단연 눈길을 끕니다.
[嘆老歌]
時調碑에는 유명한 "嘆老歌"가 세겨져 있었습니다.
작자를 알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時調여서 고등학교 고문시간에 고문을 당하며 공부했던
時調라는거 희미하게 생각 나시죠? ㅎㅎ '청구영언'에 수록되 있답니다.
"嘆老歌"
한 손에 막대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이 시조는 고려말 "舍人 易東 禹倬선생"이 쓴 시조인데
세수가 전해져 내려 오고 있습니다. 다음 한수는...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데 없다
져근 듯 비러가다 마리 우희 불니고져 (그 봄바람을 슬적 빌려다가)
귀밑에 해 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또 다른 한수는....
늙지 않고 다시 젊어 보려 했으나
백발이 거의 되어 꽃밭을 지나려면
괜히 죄를 지은 것 같노라
늙음을 한탄하는 수많은 시조 가운데 절창으로 손꼽히는 "易東 禹倬선생"의 작품입니다.
작자를 알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
[舍人巖 山神閣에서 내려다 본 '사인암리']
'舍人巖 山神閣'에 올라 雲仙九曲을 이루는 '운계천'을 내려다 봅니다.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저수령-묘적령'사이의 백두대간에서 흘러 내려 오는 "운계천"이
유구한 세월을 아는지 모르는지 흐르고 있고, '사인암' 앞 마을이 펼쳐져 있습니다.
[舍人巖]
"易東 禹倬"선생은 단양이 고향으로, 관직에 있을 때나 떠난 후에도 이곳을 좋아해
자주 찾았답니다. "우탁선생"은 고려말 "정4품 舍人"이라는 관직을 지내셔서
후대에 그를 기리기 위해 이곳의 이름을 "舍人巖"이라고 하게 되었다는군요
"易東 禹倬"선생은 유명한 "포은 정몽주"의 스승이기도 한 성리학의 대가.
"우탁선생"의 성리학은 "퇴계 이황선생"으로 이어져 "역동서원"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퇴계 이황선생"도 이곳 단양의 현감을 지내셨지요.
단양현감 시절, 근엄하신 "퇴계선생"도 남자였음을 증명하는 유명한 러브스토리가 있습니다.
"두향 杜香"이라는 어느 여인과의 ... 다음 산행기에서 들려 드리겠습니다.
[舍人巖]
"舍人巖"이 유명한것은 "단원 김홍도 檀園 金弘道"의 그림도 한몫합니다.
"정조대왕"이 어명으로 "四郡山水圖"를 그려 오라고 지시하며, 그림을 그리기 쉽도록 아예
"연풍현감"으로 발령을 내 "四郡-영춘, 단양, 제천, 청풍"의 山水圖를 그리게 했는데
"檀園 金弘道"가 이곳 '사인암'을 그리러 왔다 그냥 간 상황을 기록한 책이 있는데,
당시 단양현감이었던 "한진호"가 쓴 '도담행정기(島潭行程記)'에 기록되 있습니다.
『김홍도가 사인암에 이르러 그리고자 했으되 그 뜻을 얻지 못하더니
10여 일 동안이나 머물러 가면서 익히 보고 노심초사하였는데도
끝내 참모습을 얻지 못한 채 돌아갔다고 한다』라고 기술되 있습니다.
'사인암'의 절경이 워낙 독특해 천재화가인 "檀園 金弘道"도 표현하기가 어려웠던가 봅니다.
그로부터 1년이 걸려 그림을 완성하고 '정조대왕'에게 바쳤다고 합니다.
천재화가 "檀園 金弘道"가 지금의 군수에 해당하는 "연풍현감"을 하게되는 사연이 잼있죠?
'정조대왕'이 "단양8경"에 직접 가서 절경을 구경하고 싶었으나, 직접 갈수는 없어
천재화가 '김홍도'를 '연풍현감'으로 까지 발령을 내 그려 오게 할 정도 였으니,
"단양8경"이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구경하고 싶은 유명한 곳이었는지 짐작할수 있습니다.
전국에 산재해 있는 각 고을의 '8경'들이 수없이 우후죽순처럼 요즘에 만들어 졌습니다만,
그러한 것들이 "단양8경"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인위적으로 만들어 진것이고,
아직까지도 "8경"이라고 하면 단연 "단양8경"이 가장 유명하고, 그 계기가
바로 "단원 김홍도"가 '정조대왕'의 어명을 받들어 진경산수화를 그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檀園 金弘道의 舍人巖圖]
'정조대왕'은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에서 '김홍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 있는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다.
삽십 년쯤 전에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홍도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 "
"정조대왕"의 어명으로 그린 檀園 金弘道의 "四郡山水圖""는 현재 전해 지지 않고
기록으로만 전해지는데... 현재 전해지는 "김홍도의 4군 산수 그림"은 1796년에 만든
'병진화첩'속에 있는 것이고, 윗 그림은 '병진화첩'속에 있는 "檀園 金弘道의 舍人巖圖".
아마도 "김홍도'는 2장 이상의 같은 그림을 그려 잘 그린 것은 "四郡山水圖"에 넣어
정조대왕께 바치고, 나머지를 "병진화첩"에 넣은듯 하니 윗 그림은 좀 못 그린 작품?ㅎ
이 화첩에는 '사인암'외에도 '옥순봉'과 '도담삼봉'등 산수화와 풍속화 20점이 들어
있으며, 인물화, 풍속화를 주로 그린 '檀園 金弘道'인데, 진경산수화에 대해서도
천재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檀園 金弘道'에 대해선 산행을 하며
조금 더 기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수령] 10시 24분
"舍人巖"을 구경하고 바로 오늘 산행 들머리인 "저수령"에 도착했습니다.
"저수령"은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과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 사이에 있는
해발 850m의 높은 고개입니다.
또한 '문경시'와 '예천군', '단양군'의 행정구역 경계가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밀재"에서 이곳까지 "경북 문경시"에 접해 있는 백두대간길을 뒤로 미루고
먼저 '예천군'과 '단양군'의 경계를 이루는 대간길을 가는 것입니다.
[단체 기념 사진]
변함없이 우리 국토를 깊이 느끼고 싶어하는 산객들이 모였습니다.
[저수령 산행 들머리]
"저수령 低首嶺"-해발 850m
"낮을 低, 머리 首"이니 "머리를 숙이는 고개"라는 뜻이겠죠.
해발 850m이니 높은 고갯길이라 오를 때 숨이 차고 힘들어 고개가 숙여지는 곳.
우리는 관광버스를 타고 공짜로 850m를 올라 "1,080m 촛대봉"으로 오르니
고개가 숙여지지는 않고, 오히려 모처럼 편안한 산행길이 되는 군요. ㅎㅎ
[구글어스]
오늘 산행길은 해발 850m의 '저수령'에서 1,000m~1,300m 사이의 봉우리들을 연이어
오르락 내리락 하며 가는 도상거리로 백두대간 약11km, 접속거리 3.7km인 짧은 구간.
느린 걸음을 걷는 저는 7시간이 걸렸습니다.
[구글어스]
'저수령'에서 '촛대봉' '투구봉'을 지나 '시루봉'까지 확대한 구글어스입니다.
구글어스로도 어렵지 않은 구간이라는 걸 알수 있지요?
[산행 출발] 10시 33분
'경상북도 저수령 표지석' 뒤로 나 있는 산행들머리로 올라 갑니다.
[저수령]
'촛대봉'으로 올라 가며 '저수령"을 내려다 봅니다.
'저수령' 정상에는 휴게소가 있는데 거의 폐쇠 상태로 손님이 없었습니다.
해발 850m 고갯길을 오르는 사람들은 대간길을 가는 우리같은 사람들 뿐.
대부분 고속도로나 잘 뚫린 국도를 이용하겠지요
[용두휴게공원 갈림길] 10시 53분
'저수령'에서 20분 정도 오르면 '용두휴게공원' 가는 길을 만나고....
[촛대봉 정상] 11시 2분
'저수령'에서 30분만에 해발 1,080m 높이의 "촛대봉"에 도착합니다.
참~ 쉽지요--이잉
[촛대봉 정상]
"촛대봉"은 아마도 앞에 있는 바위가 촛대 모양이라 붙여진듯...
[촛대봉 정상석] [촛대봉 이정표]
오늘 구간에는 "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산은 없고, 모두 "봉"이라는 이름만 있습니다
1,080m이면 높은 산이지만, 해발 850m 저수령에서 오르니 낮은 산으로 느껴집니다.
['촛대봉' 정상에서 뒤돌아 본 '저수령'과 '문복대']
꽃샘추위가 잠시 물러 가고 화창한 봄날이 성질 급한 식물들을 자극하는 맑은 날입니다만
일교차가 커 박무가 조망을 방해해 사진빨이 좋지 않습니다
'저수령'과 '벌재' 사이에 있는 "문복대"가 가까운 곳인데도 흐릿하게 멀리 보이는군요
['촛재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투구봉']
'저수령'에서 '묘적령'까지는 한 봉우리에 오르면 다음 봉우리가 훤히 보입니다.
예측 가능하여 마음이 한결 편합니다.
'촛대봉'에서 '투구봉'은 500m정도로 지척에 있습니다.
[투구봉 정상] 11시 16분
'촛대봉'에서 10분 정도 걸려 '투구봉'에 도착합니다.
매우 가깝습니다.
[투구봉 정상]
'투구봉' 정상에는 투구 모양의 바위가 있어 붙여진듯....
어떻게던 "소백산"의 일부로 빌붙으려는 듯한 인상을 주는 팻말이 있는데,
이곳은 "소백산국립공원"에 포함 되지 않는 곳입니다.
['투구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시루봉']
'투구봉'에서 '시루봉'도 20여분 거리에 있습니다
[시루봉] 11ㅣ 36분
'시루봉' 정상에는 '시루봉'을 알리는 정상석이 없습니다.
평범한 봉우리로서 특별한 구경거리는 없고....
['시루봉'에서 뒤돌아 본 '투구봉'과 '촛대봉']
'시루봉'에서 뒤돌아 보니 '투구봉'과 '촛대봉'이 이별을 고하고 있습니다.
['유듀봉2' 정상] 12시 5분 ★길주의 ★
'시루봉'에서 안부를 하나 지나 오르면 "1,084m 유두봉2"를 만나는데
지도에는 특별한 표기가 없는 봉우리입니다.
저 봉우리를 올라 직진하지 말고, 우측, 즉 동쪽으로 가야합니다.
['유두봉2' 정상표지판]
친절하신 분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이 봉우리가 뭔 봉우리인지 모르고
지나 갔을 것입니다.
[배재] 12시 21분
"유두봉2"에서 15분 정도 내려 오면 "배재"를 만납니다
"예천군 상리면 야목마을"로 내려 가는 갈림길입니다.
[배재] 12시 22분
사진은 "배재"에서 "유두봉"으로 올라 가는 길입니다.
이곳이 "배재"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를 알듯도 합니다.
"배재"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뾰족한 "유두봉"과 "유두봉2"가 솟아 있습니다.
마치 풍만한 여인의 가슴처럼...그래서 "유두봉 乳頭峰"이라 한듯하고....
그렇다면 "배재"가 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짐작이 가지요? 상상에 맡김..ㅎ
['유두봉'으로 오르며 뒤돌아 본 '유두봉2']
"유두봉 乳頭峰"으로 오르며 뒤돌아 본 "유두봉2"
이제서야 확실히 "유두봉"과 "배재"의 상관관계를 알수 있을듯 하지요? ㅎㅎ
['유두봉'에서 조망한 '단양군 대강면'] 12시 38분
저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가 "사인암" 앞으로 흘러 "운계천"을 이룹니다.
다음 구간에는 "죽령"에서 남진을 하여 '도솔봉', '묘적봉'을 지나 '묘적령'에서
앞에 보이는 "단양유황온천"으로 내려가 온천욕도 하고 서울로 간다네요
['유두봉'에서 바라보는 '흙목']
앞으로 가야할 대간길이 펼쳐집니다.
이름이 다소 특이한 "흙목 정상"도 예측 가능하게 가까이 조망됩니다.
['유두봉'에서 바라보는 '솔봉'과 '도솔봉']
날씨가 좋으면 미륵보살이 산다는 "도솔봉"이 화려하게 암봉을 자랑하며 보일텐데
박무로 가시거리가 짧아 희미하게 보이는군요.
['유두봉'에서 뒤돌아 본 '시루봉' '투구봉']
'유두봉'에서 다시 한번 뒤돌아 보고...
봉우리가 순서대로 있어 길 잃을 염려는 없습니다.
['유두봉'에서 '싸리재'로 내려 가는 길]
"흙목"으로 가려면 "싸리재"를 건너야 합니다.
다시 내림짓, 오름짓을 하고....
[싸리재] 12시 54분
"유두봉"에서 15분 정도 내려 오면 "싸리재"를 만납니다.
이곳에서 앞 사진에서 본 "단양온천"으로 바로 내려 갈수도 있고,
우측으로는 예천 '원용두 마을'로 갈수 있는 갈림길
['싸리재'이정목] 식사 30분간
"싸리재" 조금 지나 있는 헬기장에서 점심식사를 약30분간 하고......
['흙목'으로 오르며 뒤돌아 본 '유두봉']
"흙목"으로 오르며 뒤돌아 보니 "유두봉"의 모양도 "유두봉2"와 비슷하다는걸
알수 있습니다. 아주 탄탄하고 싱싱한 풍만한 여성의 젖가슴 같습니다.
['암봉'에서 바라보는 '흙목'] 1시 49분
"싸리재"에서 23분 정도 오르면 봉우리에 바위가 하나 있는 암봉에 오릅니다.
이 봉우리에서 "흙목 정상"이 조망됩니다.
[암릉구간] 1시 53분
"암봉"에서 "흙목"까지에는 암릉구간이 조금 있습니다.
모두 우회해서 갈수 있는 우횟길이 있어 쉽게 갈수 있습니다.
[흙목 정상] 2시 7분
높은 산봉우리를 하나 지나면 조금 낮은 곳에 "흙목 정상"이라는 곳이 나옵니다.
[흙목 정상 이정목]
"흙목 정상 - 해발 1,070m"
地名의 어원은 모르겠습니다만, 아랫 마을 이름이 "흙목 마을"이더군요.
['흙목'에서 내려다 본 '예천군 상리면']
예천군 상리면 백석리가 조망됩니다.
"舍人 易東 禹倬선생"이 쓴 "嘆老歌"외에도 늙어 감을 한탄하는 노래는 많습니다
특히 "춘향전"에 나오는 "백발가"가 그것입니다.
"백발가 白髮歌"-춘향전
등장(等狀) 가자, 등장 가자
하느님 전(前)에 등장 갈 양이면 무슨 말을 하실는지
늙은이는 죽지말고, 젊은 사람 늙지 말게
하느님 전 등장 가세
원수로다.원수로다
백발이 원수로다.
오는 백발 막으려고
우수(右手)에 도끼 들고, 좌수(左手)에 가시들고
오는 백발 두드리며
가는 홍안(紅顔) 끌어 당겨
청사(靑絲)로 결박하여 단단히 졸라매되
가는 홍안 절로 가고, 백발은 시시(時時)로 돌아와
귀 밑에 살 잡히고
검은 머리 백발되니
조여청사모성설(朝如靑絲暮成雪)이라. 무정한 세월이라
소년 행락(少年 行樂) 깊은들
왕왕(往往)히 달라 가니 이 아니 광음(光陰)인가
천금준마(千金駿馬) 잡아 타고 장안 대로(長安 大路) 달리고져
만고 강산 좋은 경개(景槪) 다시 한번 보고지고
절대 가인(絶對 佳人) 곁에 두고
백반(百般) 교태(嬌態) 놀고 지고
화조 월석(花朝月夕) 사시가경(四時佳景)
눈 어둡고 귀가 먹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어, 하릴 없는 일이로세
'흙목 정상'에서 바라보는 '솔봉'과 '도솔봉']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솔봉"이 보입니다.
봉우리 몇개 넘었더니 벌써 종착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구글어스]
"흙목"에서 "솔봉"을 지나 "묘적령 갈림길"에서 "고항치"로 가는 구글어스입니다.
거리는 제법 되나 높낮이가 별로 없는 걷기 편한 산길입니다.
[암릉구간] 2시 26분
"흙목"에서 암릉구간을 지나고...
[송전 철탑] 2시 30분
조금 가면 송전철탑을 하나 지납니다.
조선 선조 때 외교관으로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 갔던 조선인들을 환국 시킨
"신계영(1577~1669)"선생이 쓴 "탄로가"도 유명하지요
嘆老歌-- 신계영
아이 적 늙은이 보고 백발을 비웃더니
그동안에 아이들이 날 웃을 줄 어이 알리
아이야 하 웃지 마라 나도 웃던 아이로다.
사람이 늙은 후에 거울이 원수로다
마음이 젊었으니 옛 얼굴만 여겼더니
센 머리 씽건 양자 보니 다 죽어만 하아랴
늙고 병이 드니 백발을 어이하리
소년행락이 어제론 듯 하다마는
어디가 이 얼굴 가지고 옛 내로다 하리오
[헬기장-뱀재] 2시 50분 - 30분 휴식
송전철탑에서 20분 정도 더 전진하면 '헬기장'이 나오는데 여기가 "뱀재"
이곳에서 약30분 휴식
[띠동갑]
육십년의 세월을 연결 시키고 있는 이 한장의 사진
나름 시인이 되고 싶어 지는 이유는 뭘까요?
세월은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며
시간 속에 사는 우리가 가고 오고 변하는 것일 뿐입니다.
세월이 덧없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기 때문에 덧없는 것입니다
'嘆老歌'로 산행기를 덮어버린 오늘
법정스님의 '세월과 인생'이라는 글로
뒤집어 보는 인생과 세월이라해도
가는 세월의 냉혹함을 자신 탓으로만 돌릴수 있을까
하루에 하루를 더 넘기는 하루가 여러 감회를 주는 그런 세월을
한장의 사진으로 함축해 봅니다.
하염없이 세월은 가는데........
또 어느 산을 갈까
어느 산속을 헤메며 세월을 아낄까
- 파란문 -
['솔봉' 갈림길] 3시 48분
헬기장-뱀재에서 25분 정도 오름짓을 하면 "솔봉 갈림길"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좌측 길로 오르면 "솔봉 정상"이고, 우측, 산 옆구리로 가면 정상을 우회해서
질러 가는 길입니다. 물론 어디로 가나 대간길을 다시 만납니다.
[솔봉 정상] 3시 50분
제법 가파른 경사를 치고 오르면 "솔봉 정상"입니다.
저 정상에서 우측으로 가야합니다.
['솔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모적봉'과 '도솔봉'] 3시 50분
"솔봉 - 해발 1,021m"
"솔봉 정상"에서 "묘적봉"과 "도솔봉"을 조망하고...
['모시골' 갈림길] 4시 7분
"솔봉 정상"에서 15분 정도 내려 가면 "모시골 갈림길"이 나옵니다.
['1,011m봉' 정상] 4시 14분
"모시골 갈림길"에서 봉우리를 하나 오르면 의자가 있는 "1,011m봉"을 넘어 갑니다
['1,022m봉 정상] 4시 25분
"1,011m봉"에서 다시 봉우리를 하나 더 오르면 또 다시 의자가 있는
"1,022m봉"이 나옵니다.
['1,022m봉'에서 바라보는 '묘적령 갈림길']
"1,022m봉"에 오르면 "묘적령 갈림봉"이 보이고 우측으로 "고항치"로 가는 능선이
갈길을 알려 주는데, 계곡을 따라 "고항치"로 가는 것이 아니고 능선을 따라 갑니다.
['묘적령' 갈림봉] 4시 42분
"1,022m봉"에서 17분을 걸으면 "묘적령 갈림봉"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고항치"는 우측으로 내려 갑니다만, 대간길은 직진해야 합니다
['묘적령 갈림봉'에서 바라보는 '묘적령'과 '묘적봉'] 4시 44분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대간길이 낭떨어지 아래로 나 있습니다.
이곳으로 내려 가면 위험하니 되돌아 가 우횟길로 가야합니다.
['묘적봉'과 '고항치' 갈림길] 4시 45분
"고항치" 가는 방향으로 조금 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길은 백두대간 "묘적령"으로 내려 가는 우횟길이고,
"고항치"는 직진입니다.
['고항치'로 내려 가며 조망되는 '옥녀봉'] 4시 55분
"고항치"로 내려 가면 "옥녀봉 888.2m"이 자태를 뽐내는데...
'옥녀봉자연휴양림'이 유명하다고 하네요. 저 산 넘어에는 "영주시"입니다.
오늘 구간에는 제가 아는 잼있는 story가 없습니다. 경치도 박무로 흐릿하고..
그래서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단원 김홍도 檀園 金弘道"에 대한 얘기를 덧붙입니다
"단원 김홍도 檀園 金弘道"
'김홍도'는 영조 때에 세자였던 "이산-정조"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이러한 인연은 "이산"이 보위에 올라 "정조대왕"이 되었을 때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추대 되어 "정조대왕"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또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화성 "용주사"에 [삼세여래후불탱화]도 그림니다. 물론 모두 국보입니다
['고항치'로 내려 가며 조망되는 '도솔봉'과 '소백산']
"고항치"로 내려 가는 능선에선 북쪽으로 "묘적봉", "도솔봉"이 새로운 모양으로
보이고...소백산도 안개 속에 희미하게 보입니다.
"단원 김홍도"에 얽힌 이야기 중에 아주 특별한 것이 있지요
"정조대왕"은 1789년에 몰래 '일본 지도'를 그려 오라고 지시합니다.
그래서 '김홍도'는 몰래 일본으로 잠입하여 일본 지도를 수집해 모사해 옵니다.
다시말해 스파이 활동을 한것인데, 일본에서 그림을 그려 팔며 스파이 활동을 한것이죠
언젠가 [KBS 역사스페셜]에서 이 당시 김홍도의 활동 상황을 재조명하는 걸 보았는데
지금 일본에 국보급으로 남아 있는 작자 미상의 그림이 '김홍도'의 그림기법과 아주
흡사하다고 그 그림의 작가가 틀림없이 '김홍도'일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공부를 더해 조만간 제가 "화가와 간첩"이라는 역사소설 한권 쓸려고 합니다. ㅎ
['고항치'로 내려 가는 길]
무덤 한기와 헬기장을 지나면...
"바람의 화원"에 나오는 정조대왕과의 대화
정조 :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무엇이냐?"
단원 :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그림이 되고 그림은 그리움을 부르지요."
정조 : "그림은 머릿속에도, 서안 위에도, 도화서의 낡은 양식에도 있지않다."
"그러니 너희는 거리로 나서 '바람의 화원'이 되어라"
"정조대왕"은 봉건사회를 개혁하여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려고 했지요
그러한 뜻에 걸맞는 화가가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조대왕'은 그들을 자신의 곁에 두고 '민중들의 삶의 모습'을 그리도록 했고,
그 그림들은 지금도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정조대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르네상스 시대'는 물 건너 가고,
봉건 수구세력인 안동 김씨들의 세도정치가 횡횡하며 우리나라는 망해 갑니다.
따라서 '정조대왕'의 개혁세력들....정약용 등 실학자들은 유배를 가고...
김홍도는 쓸쓸한 노년을 보내며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고항치] 5시 30분
에코브릿지가 놓여 있는 "고항치"에 도착했습니다.
우측으로는 "예천군 상리면 고항리"이고, 좌측으로는 "영주시 풍기읍"입니다.
[고항치]
백두대간 등산 안내판이 설치되 있는 에코브릿지
['고항치'에서 바라보는 '소백산'] 5시 33분
소백산이 박무로 희미하게 보이는 "고항치"에서 7시간의 산행을 마침니다.
[구글어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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