龍鳳山 山行記
낮과 밤을 묶어 하루라 하듯
즐거움과 괴로움을 묶어 인생이라한다니
그러니 이렇게도 살아 보고
또 저렇게 뒤집어서도 살아 보자고.....
오늘은 정말 독특한 산악회를 따라
그 동안 꼭 한번은 찾아 보려했던 龍鳳山으로 향했습니다
朝夕間에 일교차가 커 안개가 심하게 깔려있는 2008년 10월15일 수요일
서해안 홍성군에 위치한 龍鳳山으로 버스는 속력을 냈습니다
[산행 들머리 - 용봉초등학교]
버스는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안성에서 평택으로 가는 새로운 고속도로를 타고
다시 서해안 고속도로로 접어 들어 '서산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하고
홍성 I.C를 지나 龍鳳山산행 들머리인 '용봉초등학교' 정문 앞에까지
신속 친절하게 우리를 옮겨다 놓았습니다
[용봉초등학교 앞 - 상산리 버스 정류장]
평면TV에 성능 좋은 오디오 시설을 갖춘 관광버스는
안락하고 쾌적하고 넓직한 의자는 편안함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홀로 시외버스를 타고 기차를 갈아 타고, 길에 길을 물어 다니는 산행을 주로 하다
목적지 - 산행 들머리까지 친절하게 실어다 주는 관광버스를 이용하니
이 또한 색다른 산행의 감흥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용봉초등학교]
충남 홍성군 홍북면 상하리에 위치한 '용봉초등학교'
상하리는 上下里로 용봉산을 기준으로 산의 윗쪽 동네를 上山里, 아래를 下山里라 하는군요
교문은 활짝 열려 있었으며, 수업중인지 학교는 매우 조용했습니다
학교 뒤로 보이는 龍鳳山은 새로운 도전 의욕을 불러 일으키고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을 다짐하며 10시 15분경에 산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용봉초등학교' 좌측 산행 들머리를 따라 대부대가 이동을 시작합니다
용봉산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듯합니다
'용봉산'은 입장료를 받고 있더군요
국립공원의 입장료도 없어 진지 오래인데 이런 조그만 산에 입장료를 받는 것은 특이합니다
어른 1,000원이며 단체는 800원이더군요
[용도사]
산행 들머리에서 조금 오르니 '용도사'라는 절이 나왔습니다
절간은 근간에 새로 지어진 것으로 보였습니다
안내판에는 이 절의 내력은 알수없는 절이라고 솔직히 고백하고 있으며
수덕사의 말사라고 합니다
[홍성 상하리 미륵불]
이 미륵불은 자연 암석을 바로 조각한 미륵불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를 자랑하는 듯했습니다
고려 중기에 조성된 충청도 지방의 불상 양식이 잘 표현되 있다고 하며
이 미륵불은 먼 훗날 이 땅에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미래의 부처'라고 하는군요
저 돌부처가 앞으로 우리를 구제해 줄려는지...구제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ㅎㅎ
[용도사]
용도사에서 龍鳳山 정상이 바로 보입니다
대부분의 산객들은 이 절을 그냥 지나치더군요
[등산길]
용도사 오른쪽으로 등산로가 잘 열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부터 본격적인 글자 그대로 登山입니다
경사가 가파른 登山路를 1시간 30분 정도 올라야합니다
'용도사'를 벗어나니 바로 외부 세계를 조망 할수 있었습니다
서해안의 산들은 아시다시피 30억년의 풍상 속에서 너무 늙어
허리가 꼬부라지고 단단하던 암반은 흙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용봉산은 아직 岩陵이 살아있는 서해안의 몇 안되는 젊은 산입니다
岳山 다웁게 외부 조망이 한결 좋습니다
약 30여분 오르니 여기쯤에선 땀이 나기 시작합니다
친절하게도 여기쯤에서 쉬어 갈수 있도록 정자를 만들어 놨더군요
'쉼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쉼터 정자]
산악회팀은 처음엔 한팀으로 뭉쳐서 시작하였으나
산행 능력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분들이 혼합해 있어
이후 부터는 제각각 산행을 즐기고......ㅎㅎ
이 쉼터 정자에서 내려다 보이는 건너편 산이 '백월산'입니다
용봉산과 백월산 사이의 마을 이름이 '소향리'이고....
단체 산객들과 떨어져 龍鳳山을 느끼며 오릅니다
용봉산과 백월산에 관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를
산행을 하며 재미로 읽으시라고 전해 드립니다
[홍성군 홍북면 상산리 마을]
오늘 안개가 너무 심해 사진이 깨끗하지 못해 아쉽습니다만
또 그런대로 신비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군요
이 이야기는 이 고을 문화원 사무국장이라는 김경식씨에 의해 전해진 이야기임을 밝혀둡니다
슬슬 시작해 볼까요?
용봉산과 백월산 장수의 싸움 이야기
우리 고장에 용봉산과 백월산이 있잖어. 저기 저 산 말여.
저 두 산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잖어.
(손으로 백월산과 용봉산을 가리키며) 저기 저 산 좀 봐.
두 산에 크고 재미있게 생긴 돌들이 참 많잖어.
특히 용봉산에는 온통 돌이 뒤덮이다시피 했단 말여.
그리고 이 두 산 사이에 소향리라고 하는 마을이 있단 말여.
소향리는 백월산이 있는 홍성읍 소속이구 말여. 여기에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
옛날에 저 용봉산과 백월산에 장수가 각각 살고 있었다는구먼.
그런데 용봉산과 백월산 사이에 소향이라고 하는 아주 예쁜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는 거여.
이 두 장수가 소향 아가씨를 짝사랑했었대. 그런데 건너편 산에 있는 장수가 눈에 가시란 말여.
'저놈만 �으면(없으면) 소향 아가씨는 내 차지가 될 텐데!' 하고 말여.
두 장수는 서로 상대편 산에 있는 장수를 경계하며 눈치만 살피고 있었어.
그러다가 마침내 큰 싸움을 벌이게 되었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어.
자기 쪽 산에 있는 돌을 집어서 상대편 산 쪽으로 던지기 시작했어.
[투석봉에서 바라 보는 최영장군 활터]
"에잇 받아라 이놈아!"
두 장수는 상대편 장수를 쓰러뜨리기 위해 쉬지 않고 돌을 던졌어.
힘 센 장수들이 던지는 돌이니께 얼마나 정신없이 날아갔겠어?
아마도 쌩쌩 소리를 내며 포탄처럼 날아갔겠지.
그렇게 치열한 싸움을 벌인 것이 얼마나 지났는지 물러(몰라). 한 일주일 쯤은 싸운 모양이여.
점점 두 산에서 던지는 돌이 용봉산 쪽에 많이 쌓이기 시작했어.
백월산 장수가 돌을 더 많이 던졌기 때문이지.
마침내 치열하던 싸움이 끝났어. 백월산 장수가 싸움에서 이긴 거여.
그 덕분에 백월산에는 그 많던 돌들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는 거여.
하지만 용봉산에는 백월산 장수가 던진 돌들이 많이 쌓여서 기암괴석이 많게 되었다는구먼.
결국 두 산의 가운데 살았던 소향 아가씨는 백월산 장수의 차지가 된 거지.
그 바람에 홍성군 홍성읍과 홍성군 홍북면의 가운데에 위치해 있던 소향리도
백월산이 있는 홍성읍의 차지가 되었구 말여.
하지만 요즘은 용봉산으로 돌들을 보러 오는 관광객이 얼마나 많은지 물러.
전국에서 사람들이 사시사철 몰려든다구.
용봉산 장수가 싸움에서 지기는 했지만 그 덕분으로 돌이 많이 쌓여서 유명한 관광지가 된 거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오는 얘기는 재미로 읽는 이야기이니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읽습니다만
뻥이 좀 쎄지요? ㅎㅎ
[투석봉]
"투석봉"의 이름이 왜 "투석봉"인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백월산 장수와 맞서, 용봉산 장수가 백월산으로 돌을 던진 곳입니다
그래서 投石峰입니다.
[용봉산 정상에 다가 가며 바라 본 최영장군 활터와 전망대]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라던 최영장군이 이 고장 홍성 출신입니다
아마 무술 연마를 할때 이 곳에서 한 모양인데.....
[용봉산 정상]
1시간 20여분 만에 너무 쉽게 龍鳳山 정상에 올랐습니다
화려한 경관이 오른이들에게 환상적 분위기를 자아 냅니다
양쪽의 경비병들이 도열하여 용봉산 정상 등극을 축하라도 하는듯하군요
사진의 가운데 '용봉산 정상석'이 하얗게 보입니다
[용봉산 정상]
山 이름에 '봉'자가 들어 가면 일반적으로 '峰'이라는 한자를 쓰는데
용봉산은 용龍자와 봉황鳳자를 씁니다.
분명히 龍과 鳳凰에 대한 전설이 있을 듯해 알아 봤습니다
이곳에서 자라나 살고 있는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인 '한상숙선생님'의 구연으로
들려드리겠습니다
저 용봉산은 원래 용과 봉황이 살았던 산이라는구먼.
그래서 용봉산이라는 이름이 생긴 유래가 재미있게 전해지고 있어.
용봉산에는 원래 산꼭대기 대나무 숲에 봉황새가 살았었대.
그리고 용봉산 아래 연못에는 커다란 용이 한 마리 살었었고 말여.
하느님은 봉황에게는 육지를 다스리도록 했었대.
그리고 용에게는 물 속을 다스리도록 했었고 말여.
땅위에서는 들짐승과 날짐승들이 봉황의 다스림을 받아서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다는 거여.
물론 물 속에서도 많은 물고기들이 용의 다스림을 받으며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고 말여.
하지만 이렇게 평화로운 시절도 오래가지 못했어.
오래도록 가뭄이 들면서 평화가 깨어지기 시작했어.
어느 해부턴가 갑자기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거여.
산천초목이 말라붙고 연못까지도 물이 없어서 심한 고통을 겪게 된 거지.
육지에 사는 동물들은 물론이고 연못에 사는 물고기들도 걱정이 태산같이 쌓이게 된 거여.
요즘에 비가 안 와서 걱정이 많듯이 말여.
"안되겠다. 내가 비를 몰아와야겠구나."
드디어 용봉산 아래 연못에 사는 용이 용기를 내었어. 내가 비를 몰고 오겠다고 말이지.
용이 뛰쳐나와서 하늘로 올라갔어.
그리고 하느님께 사정사정 해서 비를 몰고 온 거여. 비가 오기 시작했으니 얼마나 좋겠어?
"와아. 우리 용왕님이 제일이다."
모두들 용을 위해서 만세를 불렀겠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어.
한 번 내리기 시작한 비는 몇 달이 되도록 그칠 기미가 안 보이는 거여.
더군다나 육지에 있는 들짐승과 날짐승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지.
물 때문에 어디 가서 제대로 쉴 수가 없단 말여.
하지만 물 속에서 사는 물고기들이야 무슨 걱정이 있겠어? 아무리 홍수가 나도 걱정이 없는 거지.
태평가를 부르며 물 속을 헤엄치고 다니는 거여.
육지에 사는 짐승들이 물고기들을 보니까 괘씸하기 짝이 없거든.
자기들은 물 때문에 고생하는 줄도 모르고 좋아서 날뛰는 모습이 한없이 괘씸하단 말여.
[용봉산 정상석]
상하리 쪽에서 본 용봉산
"우리들은 이렇게 고생하는 줄도 모르고 좋아서 날뛰다니."
짐승들은 용봉산 꼭대기에 있는 봉황에게 괘씸한 얘기를 일러바쳤단 말여.
이 말을 들은 봉황도 괘씸하거든. 물고기들의 소행이 말여.
"에이 괘씸한 것들 같으니라고. 내가 이것들을 그냥 두지 않을 테다."
봉황이 화가 잔뜩 나서 소리쳤어.
"여봐라. 지금부터 육지에 있는 모든 새들을 불러모아라."
봉황은 힘이 세고 부리가 날카로운 새들을 불러모았단 말여.
그리고는 짐승들을 시켜서 물고기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오도록 했어.
육지의 새들이 물고기들을 잡아간다는 소식은 곧바로 연못에 사는 용에게 전해졌어.
"뭐라고? 새들이 물고기들을 모두 잡아간다고? 봉황이 시킨 일이란 말이지?"
이 소식을 들은 용이 몸을 부르르 떨었어. 자연히 용과 봉황이 서로 감정이 격해졌단 말여.
그러다가 싸움이 벌어졌어. 이 싸움은 치열하기가 이를 데 없었어.
용봉산 꼭대기와 아래를 오르내리며 싸움을 했어.
이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푸르고 아름답던 산은 포탄을 맞은 것처럼 변해가기 시작했어.
뾰족뾰족한 돌들만 앙상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거여.
산 위에서 흘러내린 흙더미로 산 아래 연못도 점점 묻혀갔고 말여.
얼마 후에 하느님은 봉황과 용이 싸운다는 소식을 들었어.
화가 난 하느님은 당장 봉황과 용을 이곳에서 내쫓았다는구먼.
그 뒤로 봉황이 살았다는 용봉산은 대숲만 덩그라니 남게 되었다는구먼.
용봉산 아래 하산 마을에 용이 살았다는 연못도 텅 비고 말여.
지금은 조그맣고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데 사람들은 이 연못을 '용못'이라도 부르고 있어.
[용봉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최영장군 활터]
홍성 출신 역사적 인물을 꼽으라면 최영장군과 사육신 중 한분인 성삼문선생과
독립군 대장으로 잘 알려 진 김좌진 장군을 꼽는답니다
대부분 '최영장군'을 떠 올리면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라는 유명한 말이 생각납니다
이 말은 최영장군이 한 말이 아니고, 그의 부친 최원직(崔元直)으로부터 받은 유훈(遺訓)입니다
최영장군은 이 유훈(遺訓)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실천하여서 유명한 것이지요
'말 보다 실천이 중요하다'라는 말을 강조 할때 쓰는 말인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라는 말이
'말 보다 실천이 중요하다'라는 말 보다 더 유명해 진것입니다
저는 절대 황금을 돌로 보지 않습니다.
황금은 황금으로 보며 오히려 황금을 찾아 헤메며 이 세상을 살죠. ㅎㅎ 과연 속물일까요?
최영장군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으며 용력이 출중하여
문신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히어 무장의 길을 걸었습니다
아마도 저 곳에서 무술을 연마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으리라
그는 16살에 장군이 되어 고려시대 말 元나라와 홍건적을 물리치고
쪽바리 왜구들까지 얼씬도 못하게 한 名將입니다만
그 유명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의한 쿠데타로 무신정권에서 물러나며 처형당해 죽습니다
[용봉산 정상에서 바라 보는 '악귀봉]
용봉산은 병풍처럼 나란히 옆으로 봉우리들이 나열 되 있는 듯하게 보입니다만
봉우리들이 지그재그로 있더군요. 물론 멀리서 보면 나란히 있는 듯 보입니다
[용봉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홍북면 상하리 마을]
안개 속에서 龍과 鳳凰이 나올듯 하군요 ㅎㅎ
안개가 시야를 가리지만 또한 신비스런 그런 느낌도 주는군요
이곳 출신 역사적 인물들은 출생지에 대한 논란이 많이 있습니다
최영장군의 출생지로 지목되는 곳은 강원도 철원군 어운면과
경기도 고양시,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인데 서로 자기 고장 출신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용봉산 정상에서 바라 보는 앞으로 가야 할 봉우리들]
'노적봉' '악귀봉' '전망대봉' '병풍바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백두대간에서 흘러 내린 정맥과 지맥들이 서해바다로 사그러 들어 가기에
대부분의 서해안 산들이 山勢는 미약하기 그지없으나
'용봉산'은 아직도 그 젊은 기백이 살아 있는 듯 쌩쌩합니다
용봉산은 기암괴석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아직 죽지 않았슴을 만천하에 공표하는듯하군요
[노적봉으로 내려 가면서 바라 본 '최영장군 활터 능선']
'용봉산 정상'에서 바로 하산할수 있는 코스가 저 능선입니다만
보시다시피 하산길이 평탄치 않으므로 '용봉산과 노적봉 사이의 안부'를 이용하면 편합니다
[사자바위 능선]
'최영장군 활터 능선' 좌측으로 '사자바위 능선'이 있으며, '사자바위도 있습니다
사자바위는 육안으로는 조그만하게 보였으나 카메라에는 담지는 못했습니다
'용봉산'과 노적봉' 사이에 안부가 있으며,
힘드신 분들은 여기서 '청소년수련원' 방향으로 용봉산을 탈출 할수 있습니다
노적봉은 직진합니다
노적봉 올라 가는 길에 서있는 奇岩怪石들
저는 최영장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보이시나요? ㅎㅎ
노적봉은 여러 산에 있습니다만, 북한산의 '노적봉'이 유명하지요?
이곳 용봉산의 노적봉은 다른 산의 노적봉과는 완연히 틀리는군요.
왜냐하면 노적봉은 노적가리를 쌓아놔 둥그런 모양을 해야 하는데
용봉산의 노적봉은 둥그런 모양을 볼수 없습니다
[노적봉 정상]
지금 배경 음악으로 흐르고 있는 曲은 Charlie Landsborough가 부르는
What Colour Is The Wind? Daddy입니다
앞 못보는 한 어린이가 세상을 상상속에 그리는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곡입니다..
"아빠!~ 바람의 색깔은 뭐에요?"
두 눈을 가지고 이 아름다운 용봉산의 경치를 즐길수 있다는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느끼시라고
배경 음악을 이 노래로 정했습니다
[노적봉에서 뒤돌아 본 '용봉산 정상']
봉우리들이 능선으로 이어져 있는게 아니고, 각자의 봉우리를 가지고 있어
오르락 내리락 해야하니 운동이 많이 됩니다
노적봉 봉우리는 岳山이라서 초보산꾼들을 위해 계단시설을 친절히 해 놨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즐길수 있더군요
[노적봉에서 바라 보는 '악귀봉']
'악귀봉'은 이곳에서 바라 봐야 그 진면목을 볼수 있더군요
아마도 '악귀봉'은 岳鬼峰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귀신처럼 솟아있는 큰 岳山
노적봉의 바위들
서로 기대고 귓속말을 하는듯...."나 너 좋아해~~"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박우현
이십대는
서른이 두려웠다
서른이 되면 죽는 줄 알았다
이윽고 서른이 되었고 싱겁게 난 살아있었다
마흔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삼십 대에는 마흔이 무서웠다
마흔이 되면 세상 끝난 줄 알았다
이윽고 마흔이 되었고, 난 슬프게 멀쩡했다
쉰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예순이 되면 쉰이 그러리라
일흔이 되면 예순이 그러리라
죽음 앞에서
모든 그때는 절정이다
모든 나이는 아름답다
다만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를 뿐이다
노적봉을 내려 갑니다
노적봉 난간을 다시 오르고...
이 고장 출신 김좌진 장군에 대해 아는대로 좀 나열해 볼까합니다
김좌진 장군은 홍성출신이 확실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좌진 장군은 만주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무찌른 독립군 장군으로만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청산리 전투가 그 많큼 유명해서이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백야 김좌진선생은 군인이라기 보다는 文人이었으며 사업가로도 성공한 분입니다
김좌진 선생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재산이 많았는데 그 재산을 모두 처분해
홍성 최초의 新學文을 배울수 있는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 학교 이름이 '호명학교'입니다
이때의 나이가 불과 18살이었습니다.
20세 때에는 이봉창과 같이 서울에 고아원을 설립하여 무의무탁 고아들을 양육하는 한편,
한성신보의 이사로 취임하였고, 관철동 대관원자리에 이창 양행과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설립하여
사업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군인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죠?
노적봉 사이 사이로 돌고 돌아 내려 가는 길이 미로찾기 같습니다
나라 잃은 설움을 통탄하며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위한 노력이 독립운동으로 시작됩니다
文人이 鬪士가 됩니다.
31세가 되던 해에 서백리아에 출전중이던 일본의 '가납'이 이끄는 연대 3,000명을
화룡현 청산리로 유인하여 연대장 '가납' 이하 1,200명을 함몰시키고
천수백명을 전상자로 만든 싸움이 그 유명한 1920년 10월 21에 있었던 청산리 전투입니다
노적봉을 내려와 뒤돌아 봤습니다
내려와 보니 멋있게 생겼더군요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전투' 이후에도 우리나라 만주 독립군의 여러 주요한 요직을 거치며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40세가 되던해에 중국의 항일세력과 연합전선을 결성하고 대일항전을 위하여 준비를 하던 중,
1930년1월24일 하오 2시 중동 산시역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당원의 흉탄으로
일세의 풍운아 - 백야 김좌진 장군은 생의 장막을 내렸습니다.
오호~ 통재라~
안부를 지나 '악귀봉'으로 올라 갑니다
김좌진 장군은 또한 그의 아들 '김두한'으로도 유명세를 타고있지요?
김두한은 비록 깡패이지만 反日깡패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까지 �으며
국회에서 싸우는 여야 정치인들이 더럽다고 파고다공원 공중변소에서 똥을 퍼다
국회에서 정치인들에게 퍼 부은 사건으로도 유명합니다
그의 딸 탈렌트 '김을동'여사, 김을동여사의 아들 탈렌트 '송일국'
모두 김좌진장군의 피를 이어 받은 사람들이죠
악귀봉을 오르는 곳엔 모두 '岳鬼'들이 모여있는듯
바위들도 모두 괴상망측하게 생겼습니다
악귀봉의 奇岩怪石들로 오늘 本錢 몇배 뽑았습니다
산악회 회비가 15,000원이었는데 거의 꽁짜로 용봉산 산행을 했습니다
[악귀봉에서 뒤돌아 본 '노적봉'과 '용봉산 정상']
용봉산은 웅장한 산은 아니지만 매우 아기자기하고 오손도손하며
주머니에 넣어도 쏙 들어 갈듯한 그런 아담싸이즈 산이었습니다
[하늘 다리]
악귀봉 정상에는 '하늘 다리'가 걸려 있었습니다
근심걱정의 속세에서 하늘나라로 건너 가는 속세와 이별하는 다리 같았습니다
俗離橋....
악귀봉에서 보이는 봉우리들은 또 새로운 감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멋진 경치에 몇번이고 감탄했습니다
서해안에 있는 조그만 산이라고 우습게 보면 큰일 나겠더군요
비록 381m의 산이지만 해발 381m이며 바로 해수면에서 시작하므로 매우 높은 산입니다
높이는 서울의 북한산 정도 되는듯합니다
앞으로 가야 할 전망대봉과 '병풍바위'가 아득히 보입니다
산꾼들은 저런 봉우리가 펼쳐지면 "아우~ 멋있다~! 빨리 가 봐야지~!"라고 하는데
아마추어들은 "어머 저렇게 멀어~ 어떻게 가지? 지름길은 없어?"라고 하지요 ㅎㅎ
[하늘 다리]
악귀봉의 하늘다리를 건넙니다
용봉산까지 와서 '하늘다리'를 건너보지 못하고 가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저의 이 산행기로 대리만족하세요 ㅎㅎ
건너와서 뒤돌아 본 '하늘 다리'
요즈음 미국발 신용위기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워하며 고생하고있습니다만
이 '하늘 다리'를 건너 인간사 근심걱정 다 잊어버리고 다시 생업으로 돌아 가시기 바람니다
악귀봉을 하산하고 있습니다
저 보다 연세가 훨신 많은 할머니라고 하면 화 내실것 같은 그래서 아주머니라고 부르기로한
아주머니들이 저와 동행하며 끝까지 완주하였습니다. 대단한 산행 능력을 자랑했습니다
알고봤더니 저와 같은 아파트 옆동에 사시는 분들이더군요
오늘 좋은 산행을 하셨다고 즐거워했습니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악귀봉의 쉼터]
악귀봉 봉우리에서 조금 내려 가니 쉼터 정자가 설치되있었습니다
앞에 보이시는 분은 모 자동차회사 판매 대리점을 하시는 사장님이신데
아주머니들과 함께 오늘 '龍鳳山'을 마음껏 즐기며 함께 했습니다
이 쉼터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했으며, 저는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언제 다시 함께 산행을 할지는 모르겠으나 앞으로도 즐거운 산행 많이 하시고
건강하시기 바람니다
악귀봉을 하산하고 있습니다
이제 뒤따라 오던 일행들과 합쳐져 식구가 늘었습니다
숨은 벽 사이로 가야 할 '전망대봉'이 보입니다
악귀봉과 전망대봉 사이의 안부를 지나갑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내려 가면 '용봉사'로 바로 갈수 있더군요
전망대봉을 오르고 있습니다
전밍대봉은 용봉산과 같은 地脈을 이루고 있는 수암산으로 가서
덕산온천으로 가는 갈림길입니다
전망대봉은 보기보단 높지 않았으며
가는 길에 용봉산에서 가장 유명한 바위인 "용바위"가 있더군요
가파른 오르막을 잘 오르고 있는 아주머니들
이렇게 땀 흘려 오른 후의 성취감은 오르지 않고는 느낄수 없지요
[龍바위]
龍바위 龍을 닮았습니까? ㅎㅎ
龍바위를 바라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양이 많이 다르겠습니다만..글쎄요...ㅎㅎ
저의 산행기는 많은 사람들이 보기 때문에 개인 사진은 잘 올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오늘은 우리 아파트 옆동에 사시는 아주머니들이 저를 열심히 따라
용봉산을 즐기며 완주 하셨기에 그 기념으로 용봉산에서 용봉산을 상징한다는
龍바위를 배경으로 촬영하여 저의 산행기에 올려드림니다
앞으로도 즐거운 산행 많이 하시고 내내 건강하시기 바람니다
[전망대봉]
전망대봉우리에 왔습니다
전망대 봉우리에는 쉼터 정자가 있었으며
북쪽으로 수암산과 덕산온천 방향을 조망할수 있으며,
서쪽으로는 덕숭산과 수덕사, 가야산 도립공원을 조망 할수 있는데
오늘은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동쪽 방향으로 가야할 "병풍바위" 봉우리가 잘 보입니다
아름답습니다
북서쪽으로 수학의 계절 가을이 익어가는 들판을 보여 줍니다
북쪽으로는 수암산이 보입니다
용봉산과 수암산, 덕산온천 위치도
용봉산을 찾는 산객들은 이곳 전망대 바위에서 수암산을 지나 덕산온천으로 산행을 계속해
온천욕을 즐기고 집으로 돌아 간다고하는군요
전망대봉에서 내려와 병풍바위쯤에서 뒤돌아 보았습니다
"龍바위"와 전망대 팔각정이 보입니다
[병풍바위]
기암괴석은 병풍바위에 제일 많았습니다
보이는 봉우리는 병풍바위에서 제일 높은 곳인데, 낙타바위가 있군요
찾아 보세요
꿈보다 해몽이라 했으니 제가 이 바위를 해몽해 볼까요?
ㅎㅎ 아빠가 아들을 야단치고 있는듯합니다
"공부 좀 해라~!!"
낙타바위가 보입니다
낙타바위에 올라 가서 내려다 보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가운데 바위는 저 아래에서 보니까...ㅎㅎ 더욱 남자 그것처럼 보이더군요
옆의 소나무와 바위들이 어우러져 음탕한 생각을 갖게 하는군요 ㅎㅎ
이 바위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정말 절묘합니다
병풍바위를 내려 갑니다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소나무가 분재처럼 서 있습니다
우리 집에 옮길수 있으면 그 가치는 어마어마하겠는데....
옆의 바위가 수줍은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습니다
병풍바위를 내려 오면서 낙타바위가 있던 곳의 '기묘한 바위'를 올려다 보니
더욱 그렇게 보이지요? ㅎㅎ 찾았어요? ㅎㅎ
천길 낭떨어지 바로 위에 있는 이 소파같은 바위에는 아마도 龍이 앉아 있었을 듯합니다
천길 낭떨어지에서 얼굴을 쑥~내밀고 있는 이 바위는 하늘로 오르려는 이무기 같기도하고
外界에서 온 E.T.같기도 합니다
자연만이 만들어 낼수 있는 절묘한 조각품입니다
용봉사로 하산하고 있습니다
[병풍바위]
저 멀리 악귀봉에서 병풍처럼 보이던 "병풍바위"가 이제서야 그 참모습을 드러냅니다
가까이서 보니까 병풍이라기 보다는 삼국지의 영웅 호걸들이 모여 있는듯합나디
제갈공명, 유비, 관우, 장비, 조조......
[병풍바위]
가까이서 보니
병풍하고는 거리가 먼 병풍바위는 절묘한 독특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군요
병풍바위를 끝으로 산행은 마감됩니다
용봉사로 내려 갑니다
[용봉사]
용봉사가 나무 사이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용봉사]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은 용봉사가 산행에 지친 산객들을 맞아 줍니다
[용봉사]
용봉사 뒤로 병풍바위가 보이는데, 용봉사를 감싸고 있어서 '병풍바위'라고 하는듯하군요
용봉사의 역사는 알수 없다고 솔직히 안내판에 써놨으며, 수덕사의 말사라고 합니다
[용봉사에서 내려 가는 길]
우측에 '마애석불'이 있습니다
[마애석불]
불상의 오른 쪽에 '정원(貞元)15년'이란 글이 새겨져 있어, 신라 소성왕 원년 (799년)에
만들어 졌다는 걸 알수 있다는군요
'마애불상'라는 말도 쉽게 표현 할수 있는데 어려운 말을 계속 쓰고있어 좀 그렇군요
암벽의 단면을 애[崖]라고 하고, '마'는 한문으로 [磨]이니 갈고 다듬는다는 의미이죠
그러므로 '암벽의 단면을 음각으로 조각한 불상'이라는 말이 마애불상이니
얼마던지 이해하기 쉽게 표현 할수 있는데도 계속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신비주의?
龍鳳寺 일주문을 나섭니다
현판에 '용봉' 한문을 그냥 보면 알아 볼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이곳이 용봉산이라 '용봉산 용봉사'라고 대략 추측해서 넘어 가지
다른 곳에 저렇게 써 놓으면 알아 보는 사람이 별루일겁니다
불교도 일반인들에게 가깝게 접근 할려면 어려운 한문부터 쉽게 고쳐 써야 할것입니다
휴양림이라고 입장료를 받는다는군요
아기자기해서 재미있었던 용봉산 산행을 마침니다
산행과 휴식을 모두 합쳐 약4시간이 걸렸습니다
山은 어느 山이나 나름대로의 멋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동네 이름도 심상치 않은 禮山, 德山, 瑞山, 洪城에 걸쳐있는 "龍鳳山"은
언제나 잊혀지지 않을 듯합니다
오늘 용봉산 산행 개념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