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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광주 명소를 찾아서』 [곤지암] 신립장군묘-경기도자공원-곤지바위 여행기 곤지암역-신립장군묘-경기도자공원-곤지바위-곤지암역 "수선화에게"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 정호승 - ['구글맵'] ['구글어스']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에 있는 "곤지암역"을 출발하여 "신립장군묘역-경기도자공원-곤지바위"를 둘러 보고 원점회귀하는 코스입니다. ['곤지암역 2번출입구'] 12:57~1:00 2018년 11월 20일 (화) 맑음 미세먼지 다소 늦은 시간에 [경강선]을 타고 "곤지암역 2번출입구"로 나갔습니다. 여기서 "신립장군 묘역"을 가기 위해선 다음 사진의 "네이버지도"를 참고 하면 되겠습니다. ['네이버지도' 캡춰] [곤지암역 2번출입구]에서 약1km로 매우 가까운데... "곤지암 만나교회"만 찾아 가면 됩니다. ['신립장군묘' 조망] [곤지암역 2번출입구]에서 북쪽으로 [곤지암 만나교회]가 조망되므로 [신립장군 묘역]을 찾아 가는건 너무 쉽습니다. 직진해서 도로로 가면... ['만나교회' 조망] 1:01 [만나교회]가 가까이 다가 오며.... [신립장군 묘역]도 조금씩 보입니다. 도로를 따라 [만나교회]를 찾아 4분 정도 가면... ['신립장군묘' 입구] 1:05 [신립장군 묘역]을 알리는 안내판이 우측 골목으로 500m만 더 가면 된다고 알려 줍니다. 골목으로 들어가 200m 정도 진행하면... ['만나교회' 앞] 1:07 [만나교회]와 주차자장을 만나며... 교회 정문 앞으로 직진해 가면.... ['예수재림교' 정문] [만나교회] 부속건물인듯한데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라고 하는 교회 안으로 들어 가야 하더군요. 교회는 도로를 자기 정문인듯 꾸며 [신립장군묘]로 가는 길인지 혼란스럽게 했더군요. 왔다리 갔다리 하다가 이 길이 교회 정문이 아니라 일반 도로라는걸 알고 들어가면... ['삼성아트빌' 앞] 1:10 [삼성아트빌]이라는 빌라를 만나는데... [신립장군 묘역]으로 가는 길안내판이 잘 찾아 왔다는 인사를 하며 탐방객을 맞아 줍니다. [삼성아트빌라] 뒷골목으로 100m 정도 진행하면.... [''평산신씨 종중'] 1:13 "신립장군 묘역 정문"을 만나는데 [평산신씨충장공종중] [충장공재실]이라는 문패가 [임진왜란]의 그날을 상기시켜 주는데 현대식 종중 재실이 약간 낮설게 느껴 지는군요. [안내문] 묘역으로 올라 가는 길 입구에 "신립장군묘"에 대한 안내문이 있는데... [인진왜란] 때에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항전했으나 참패하고 강물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고 알리고 있습니다. [오름길] 재실에서 제법 가파르고 긴 계단 오름길을 오르면... ['신립장군 묘역'] 1:18~1:32 "신립장군 묘역"을 만나는데...총 다섯기의 묘가 있더군요. 다섯기의 묘 중에 "신립장군 묘"는 세번째에 있더군요. 첫번째 묘는 누구의 묘인지 비석이 없었고 [두번째 묘] 두번째 묘에는 비석이 있으나 이름을 고의로 지운듯 이름만 보이지 않아 누구의 묘인지 모르겠고... ['신완' 선생묘] ['신준' 선생묘] 세번째 "신립장군 묘" 뒤에는 "신완 선생 묘""신준 선생 묘"가 있더군요. "신립장군"의 종중 인물인듯한데, 안내문이 없어 그들의 삶은 알수 없었습니다. ['신립장군 묘'] "신립장군 묘 申砬將軍墓" 武將인 장군의 묘에는 武人石은 없고 文人石이 있어 조금 의아스러웠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의 인물인 해군 "이순신장군"이나 "원균장군"의 묘에 비하면 너무 초라하군요. 비록 참패한 육군 장수이긴하지만....그래도 육군 장수 중에선 우리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장수이죠? "신립장군"은 '조선 최고의 쪼다리 왕'인 "선조"와 사돈지간이고 당시 요즘으로 치자면 국방부 장관 격인 '도원수 권율장군"의 사위이기도 하죠.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도 "권율장군"의 사위여서 "신립장군"과 "백사 이항복"은 동서지간. "백사 이항복"은 영의정까지 올랐죠. [묘비] 碑文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답니다. '임진왜란' 당시 "팔도순변사 신립 八都巡邊使 申砬"이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 背水陣"을 치고 저항하다가 남한강에 투신 자살하였다고 하죠. 당시 나이 47세. 그러니까 戰死했다기 보다는 물에 빠져 익사했다는 표현이 어떨지... 대부분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어서 다른 내용은 생략하고...한가지 언급하고픈 것은 "신립장군"은 방어에 유리한 "문경새재"를 버리고, 더 이상 물러 설곳이 없는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당시엔 섬이었던 "탄금대"에서 쪽바리들을 맞아 싸우는 병법을 사용했을까?...하는 의문입니다. "신립장군"은 "漢나라' 장수 "韓申"의 병법을 좋아해서 말을 타고 싸우는 '기마술'에 능통했답니다. 그래서 '철기군'이라는 기마병을 양성했다죠. 바다를 건너와 말이 없어 말을 타지 못하고 걸어서 진격하는 왜병들을 무찌를수 있는 최선의 병법은 기마병을 이용하는 병법이 최선이라 생각했던거죠. 기마병을 이용하려면 산간계곡인 '문경새재' 보다는 넓은 들판이 있는 "충주 탄금대 앞 들판"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던거랍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바보같은 짓이었다고 후세 학자들은 질책을 했죠. 왜군이 쳐들어 올때는 4월로 농번기여서 "탄금대" 앞 들판 논에 물을 대 질퍽거려 말을 타고 싸울수 없어서 보병을 쳐부술수 있는 유력한 방법인 '기마병'을 운용 할수 없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8,000명의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조총'으로 무장한 20,000여명의 준비된 일본 정예군과 대항할 준비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뿐 아니라, 상대가 되지 않는 戰力을 간파하지 못했다고 봐야죠? 모든 전투에선 피신 할 통로를 두고 싸워야하는데 "배수진"을 친것은 자폭하려는 것과 다름아니죠. 작전상 후퇴도 병법 중에 하나인데... 이로서 우리 역사서엔 조선 병사는 거의 몰살 당했다고 기록되 있는데... '일본서기'에는 약3,000여명을 죽이고 4~5백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기술하고 있으니 8,000명 중에 절반 이상인 4,500여명은 싸우지도 않고 먼저 도망 갔다고 봐야 할듯... 이러니 전쟁 상대가 되었겠습니까? [임진왜란]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하는 인간은 당연히 "선조"이고 지금이라면 당연히 탄핵을 받고 사형를 당해야했겠지요? ['신립장군 묘'에서 조망] "신립장군묘" 앞으로 펼쳐지는 '곤지암 마을'과 '곤지암'을 둘러 싸고 있는 산군들을 바라보며 "신립장군의 투신 자살"에 대한 한가지 의문을 나름대로 상상해 봅니다. '조선 왕 27명' 중에 제가 가장 미워하고 씹는 "선조"라는 쪼다리 왕을 먼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는 武將을 무지 경계하고, 그들의 실책은 상상 이상으로 냉혹하게 벌을 내렸는데, 전투에서 조금이라도 실패하거나 패전을 하면 가차없이 사형을 시켰습니다. 한명 한명의 군인을 양성해도 모자르는 판에 사형을 시켰던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정권 안보를 위해서... "이순신장군"도 사형 당할뻔 했죠? 이젠 나가 싸울 군인이 없으니 어쩔수 없이 '이순신'을 방면해서 전장으로 다시 보내 싸워 죽게 했지만... "이순신 장군"은 '명랑해전'에 승전하고도 "나의 죽음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역사에서 사라졌지요. 우리 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그랬다고 하지만..천만에... 살아서 돌아 가더라도 지나번 어명을 어긴 죄로 "선조"에게 다시 사형 당할것이 확실할걸로 판단하고 船上에서 "자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자취를 감춘거라고 저는 주장을 항상 하지요. 당시 '이순신장군'은 적탄에 맞아 젼사한것이 아니라 '죽음을 선언'하고 '은둔'한거라고... 그래서 "나의 죽음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라고 한것이라고... "신립장군의 투신 자살"도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 간들 "선조"에게 사형 당할것이 확실하니 차라리 투신 자살을 한것이 아닐지.... [서남쪽 조망] 서남쪽으로는 '온조'가 도읍을 정하려고 많은 왕래를 하였다는 '도척면'과 그 뒤로 제가 여러번 종주했던 [태화산-마구산-정광산-노고봉-발리봉-백마산] 능선이 조망됩니다. [남동쪽 조망] 남동쪽으로는 "앵자지맥" 마루금이 지나는 [넋고개-정개산-천덕봉] 마루금 능선이 조망됩니다. [앵자지맥] 너머는 '이천시'이며 안쪽엔 [동원대학]이 있지요. 특히 "넋고개"는 "신립장군"과 깊은 관계가 있답니다. "탄금대"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이 물에서 "신립장군"을 건졌을 때 장군의 모습은 두 눈을 부릅뜨고 당장이라도 호령할 것 같은 기세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부하들이 시체를 건져 한양으로 오는 도중 '장군님'하고 부르면 관속에서 '오냐'하는 대답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이천시'를 지나 "기치미 고개"에 이르러 또 '장군님'하고 부르니까... 대답 대신 '에헴'하는 기침소리가 나는 것이었답니다. "넋고개"에 이르러 또다시 '장군님'하고 부르니까 그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는군요. 그때부터 사람들이 "신립 장군"의 넋이 기침을 한 고개라 하여 "기치미고개"라 하고 장군의 넋이 완전히 떠난 고개라 하여 "넋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치미고개"는 '이천 설봉산' 근처 "다산고등학교" 근처에 있고 "넋고개"는 사진에 표기한 곳인데 '이천시'와 '광주시'의 경계이며 [동원대학교]가 있는 근처에 있습니다. 장군의 시신은 "기치미고개"와 "넋고개"를 지나 현재의 이곳 근처까지 운구되었는데 운구된 장군의 관이 이곳에 이르자 관이 땅에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아 이곳에 묘를 만들었다고... [묘역 입구 회귀] 1:38 되돌릴수 없는 역사를 곱씹으며 "신립장군묘역"을 둘러 보고 다시 도로로 내려 와서 ['초월' 방향] 1:40 북쪽 "초월읍" 방향으로 조금 올라 가면 조그만 삼거리를 만나는데 좌회전하여 ['경강선'] [경강선] 철로 밑을 통과하여 진행하면... [다리] 1:46 [신대사거리]로 건너가는 [곤지암천] 다리를 건너 갑니다. 좌측에 보이는 육교로 가야 합니다. ['곤지암천'] 다리에서 [곤지암천]을 조망하는데 [곤지암역]도 보이는군요. ['신대사거리' 육교에서 조망] 1:49 [3번국도]가 지나고 있는 육교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는데 "백마산"이 보이는군요. "경기도자공원"으로 가는 길입니다. 14분 정도 [3번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직진하면... ['경기도자박물관' 입구] 2:03 [경기도자박물관] 입구를 만나는데... 이곳의 위치는 ['네이버지도' 캡쳐] '네이버지도'를 캡쳐하여 "경기도자공원"의 위치와 전경을 먼저 알아 보고... [경기도자박물관' 입구] 2:06~2:50 ['드날문'] "경기도자박물관"의 정문인 "드날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 갑니다. [좌측] 정면에 있는 박물관의 좌측에는 [도자기 판매점]들이 있고 [우측] 우측에도 도자기 판매점과 편의점이 있으며 특히 [열린마당]이라고 하는 공연장이 있어서 들어 가 보니 [공연장] 야외공연장은 이런 모양을 하고 있고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으로 들어 갑니다. [관람료] '경기도민'에게는 1,000원 할인하여 2,000원 ㅎ [1층 로비] 정문을 통과하면 1층 로비를 만나는데 좌측 [도자문화실]부터 관람을 시작합니다. 이어서 [기획전시실] [상설전시실]등이 이어 졌습니다. 도자기에 대해선 문외한이어서 눈팅만 하며 관람했습니다. [전시실] [도자기의 정의와 원료] [관요와 지방요] [조선도자의 대외교류] [조선관요 사옹원 분원] [백자의 기형 변롸] [백자의 문형 변화] [2층 로비] 2층 로비에는 초등학생들이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 있었고 [1층 로비] 2층에서 1층으로 내려 가며 바라보는 1층 로비 안내소입니다. 저 안내소에서 신분증을 확인하더군요. '경기도민'인지..'경로'인지... [박물관 정면 조망] 박물관을 나와 정면에 펼쳐지는 광경을 촬영했습니다. 앞에는 [모자이크공원]이라는 물없는 연못이 있고 '초월읍'에 있는 "무갑산"이 보이는군요. [좌측] [우측] 좌우측에는 도자기 판매점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는데...조용하고 우측으로 돌아 가면... [도자공원 입구] "도자공원"이 펼쳐지는데... 규모가 제법 큼니다. [도자 조형물] 도자 박물관 다운 조형물들도 이채롭습니다. [공원] 산책코스로도 괜찮을듯... [정자] 도자기와 뭔 관계가 있는지 연못 가운데 정자도 만들어져 있고... [전통가마] "2001년 제1회 세계도자기엑스포"의 개최를 기념하여 지은 '가마'라고 합니다. 이 공원의 볼거리 1호라고 생각됩니다. [체험장] 도자기 체험장도 있군요. ['나들문'] 2:50 "경기도자공원"을 45분여 둘러 보고 "나들문"을 나서서 ['3번국도'] 다시 [3번국도]로 나가 남쪽으로 진행합니다. 10여분 진행하면... ['신대사거리' 방향] 3:00 다시 [신대사거리]로 돌아 갑니다. ['네이버지도' 캡춰] [곤지암]이라는 마을 이름을 만들어 준 [곤지바위]의 위치를 알아 보고 갑니다. 위치는 [곤지암초등학교]를 찾아 가기만 하면 되겠습니다. ['곤지암교회'] 3:04 [신대사거리]에서 우측 구도로로 들어 가면 [곤지암교회]가 있고 [곤지암교회] 뒤에 [곤지암초등학교]가 있습니다. [곤지암초등학교]를 지나면... ['곤지암' 쉼터] 3:07~3:10 [곤지암초등학교] 울타리가 끝나는 곳에 정자 쉼터가 있는데 이곳이... ['곤지바위'] ['곤지바위'] [안내문] "곤지암 昆池岩" 자세한 내용은 위 안내문을 참고 하시고... "곤지암읍"이라는 이 고을은 2011년까지만해도 "실촌읍"이었죠? 이름이 좋지 않다고 "곤지암읍"으로 고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기악하시나요? ㅎ "곤지암읍"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준 바위가 바로 이 바위랍니다. "신립장군"과 관련이 있다는군요. ['곤지암 구도심'] 옛[3번국도]가 지났던 도심거리를 지나는데... "이괄의 난" 아시죠? ㅎ 명분도 없었던 [인조반정]....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이괄"이 논공행상에서 제외되자 다시 쿠데타를 일어켰죠. 그리고 쿠데타에 실패하자 '이천'으로 도망을 가다가 이 근처에서 잠을 잦는데 배신한 부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곳이 이 근처 "묵방 墨防"인데 '모반하는 검은 마음을 방지하였다'고 해서 '묵방 墨防' 이라 한답니다. ['곤지암 버스터미널'] 3:13 [곤지암버스터미널]로 들어가 약국 옆 통로로 나가면... ['곤지암역' 조망] [곤지암역]이 가까이 있습니다. ['곤지암역' 1번출입구] 3:22 [곤지암역] 1번출입구로 돌아와 [경강선]을 타고 귀가했습니다. [구글어스] [고도표] 오늘 걸은 거리는 6.8km였으며, 2시간 25분이 걸렸습니다. 한번쯤 가 볼만한 여행지라고 생각되는군요.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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