禮山 伽倻山 山行記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 본지도 무척 오래된듯합니다
특히 장항선 열차를 타기는 아주 오래 전 인것 같습니다
진학만이 살길이라고 압박과 설움의 고3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뚤고
대학생으로서 성인으로서 처음 마지한 자유로운 피서여행을
어른들의 아무른 간섭없이 친한 친구들과 함께
장항선 열차를 타고 해방구 '대천해수욕장'으로 가던 때가....
오늘은 베낭을 메고 禮山과 瑞山에 걸쳐있는 도립공원 伽倻山을 찾아
장항선 열차를 타고 홀로 떠났습니다
[천안역]
이른 아침 전철1호선 첫차를 타고 천안으로 갔습니다
천안에서 장항선 열차로 바꿔타고 예산의 '삽교'로 향합니다
천안에서 삽교까지는 한시간 정도 가는데 무궁화호가 지정좌석으로 2,800원이더군요
한가지 특이한것은 천안에서 삽교까지는 서해안방향이라 터널이 없을줄 알았는데
터널을 무려 6개나 지나더군요.
천안역-천안 아산 KTX역-온양온천역-도고온천역-新禮院역-예산역-삽교역까지
중간에 다섯개 역을 서는데 터널이 6개이니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저에게는 특이했습니다
[삽교역]
아침에는 매우 쌀쌀한 날씨로 예년 기온보다 많이 낮다는 예보가 있었으나
삽교역에 도착 할때쯤에는 전형적 가을 날씨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일평생 처음으로 조영남씨 고향이라는 '삽교역'에 서니 이국땅을 밟은듯합니다
[삽교역사]
삽교역사는 '수덕사' 모양을 따 지었다는군요
한옥 기차역이 새로운 느낌으로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역앞에 있는 관광 안내도]
[삽교역앞 번화가]
자동차 문화가 발달되기 전까지는 이곳 '삽교'가 예산과 덕산보다 훨신 큰 도시였는데
자동차가 많아 지면서 교통과 경제 중심지로 예산과 덕산에게 그 자리를 내 주고
삽교역은 여객을 실어 나르던 역활 대신에 태안반도의 산업단지에서 생산되는
수출품을 실어 나르는 역활로 바뀐지 오래여서 발전이 없는 마을로 남아 있답니다
삽교역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덕산가는 버스를 탓습니다
버스는 자주 있었고 요금은 1,000원이었고 15분정도 걸렸습니다
여행의 기분이 새로웠습니다
8시 50분 버스를 타고 덕산으로 갔습니다
[덕산 버스 정류장]
9시 5분에 덕산 버스 정류장에 내렸습니다
저는 원래 이곳에서 서산시 운산읍 용현으로 가서 '서산삼존마애불상'을 보고
가야산의 수정봉-옥양봉-석문봉-가야산 정상- 남연군 묘-덕산으로 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만 덕산에서 용현으로 가는 대중교통수단이 별로 없어 포기하고
택시도 20,000원이나 달라고하여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덕산에서 택시를 타고 '남연군 묘'로 가서 옥양봉-석문봉-가야산 정상-대치리로 가는
코스를 택했습니다
덕산에서 '남연군 묘'까지는 버스가 있으나 두시간후 11시쯤에나 있다고 해서
거금 6,000원을 들여 택시를 타고 갔는데 가서 보니 걸어서 가도 되는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택시로 5분도 안걸리는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4명이서 6,000원은 괜찬은데 혼자 6,000원이라 아깝더군요 ㅎㅎ
앞으로 가실 분들은 걸어서 가세요
[남연군 묘 신도비]
이곳에서 택시를 내려 걷기 시작했습니다
가야산의 등산코스로는 가장 많이 알려져있으며 제일 유명한 코스를 가는 것입니다
이 때 시각이 9시 15분
[남연군 묘 앞 갈림길]
제가 오늘 이렇게 멀리 기차를 타고 길을 물어 가야산을 찾은 이유가 짐작이 되시나요?
제일 큰 이유야 가야산 산행이지만 "남연군 묘"를 찾아 보기 위해서입니다
왜 제가 "남연군 묘"라는 무덤을 찾아 여기까지 왔을까요?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들은 이 무덤이 얼마나 유명한 무덤인지 모두 아십니다
핵교 때 시간이 부족해 공부 못하신분들은 오늘 "이 무덤이 그 무덤이야~?"
"그 무덤이 이곳에 있어?"하며 놀라실 겁니다
[남연군 묘앞 이정표]
안내판 뒤가 '남연군 묘'이며, 오른쪽이 "옥양봉" "석문봉"으로 가는 코스이고
왼쪽이 가야산 정상인 "가야봉" 가는 코스입니다
남연군 묘는 어느쪽으로 가나 만납니다
저는 왼쪽으로 가서 "남연군 묘"를 보고 다시 오른쪽 "옥양봉"코스로 갔습니다
[남연군 묘]
왼쪽 길을 따라 조금 올라 가니 오른쪽으로 '남연군 묘"가 나옵니다
그런대로 정리정돈이 되있어 유명세가 있긴 있는가보다고 생각했습니다
'南延君"이 누구입니까?
구한말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빼 놓을수 없는 실제 통치자-고종황제의 아버지였던
大元位大監 흥선군 이하응의 아버지입니다
大元位大監 이하응의 아버지 '남연군 李 球'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합니다
'남연군 李 球'는 인조(16대)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입니다
그런데 '남연군 李 球'는 운좋게 영조(21대)의 아들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
'은신군'이 아들을 못 낳아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 아들이 됩니다
사도세자의 첫째 아들이 '정조대왕'이니, 정조대왕의 조카가 되는 것입니다
정조대왕의 조카인 '남연군'의 아들이 '흥선군 이 하응'이고,
이 하응의 큰할아버지가 정조인 셈이죠
[남연군 묘]
남연군 묘로 올라 가는 입구 정면입니다
남연군 묘는 저 뒤의 봉우리 위에 있습니다
이 당시의 정치 상황을 알아야 오늘 '남연군 묘'를 잘 이해 할수 있습니다
'남연군 묘'는 한낱 하나의 무덤이 아니기 때문에 이 무덤의 사연을 알아야하기에...
지금까지의 저의 여러 산행기에서 정조대왕에 대한 얘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왕조 최고의 진보 개혁적인 왕이었기때문입니다
정조는 수구 꼴통세력들을 몰아 내고, 西洋文化와 實學을 받아들여
봉건사회인 우리나라를 대대적으로 改革하려했습니다
그러나 수구꼴통세력들의 반격으로 의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개혁은 물건너 가고
'세도정치'가 등장하여 우리나라를 결국 파국으로 몰고 가지요
그 세도정치의 주축이 안동 김씨 세력이었습니다
안동 김씨의 수장 '김조순'은 어린 순조를 왕위에 앉히고, 자기 딸과 결혼 시킵니다
그러니까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이 되는거죠. 세조 시대때 한명회와 유사한 인물입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조선 순조의 나라가 아니고 실제 개인 김조순의 나라가 됫습니다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일을 빼고는 못 할 일이 없다”로 대변되는 세도정치 -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 김좌근의 양아들 '김병기'로 이어지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이후 60년간 계속됩니다. 이런 역사는 사람들이 외면하고 크게 비판하지도 않습니다
들추기도 싫은 부끄러운 역사라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제시대 일본 역사학자들이 이런 역사는 슬거머니 감추고 자기들 유리한 역사를
주로 외곡하였다고 욕을 하는데,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더 활발하게
역사 바로 세우기에 나서야 하는것 아닙니까? 에구 수구꼴통세력들에게 휘둘리며
한발짝도 앞으로 못나가는 ... 그래서 발전이 없는....ㅠㅠ~
[남연군의 부인 '여흥 민씨'의 비석]
남연군의 부인 - 즉 대원군의 어머니인 '여흥 민씨'의 비석
어머니 비석은 아버지 무덤 아래에 별도로 세워놨습니다
王權의 회복은 기대 하기 어려울 정도로 절망적인 상태였고 정치기강의 문란으로
홍경래의 난(순조 11년)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깨부시고 다시 정통성있는 王權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王族 李氏들에 의해서도 암암리에 시도되었지만 안동 김씨들에 의해 처참하게 짖밟혔습니다
그래서 王族인 흥선군 이하응은 거지꼴을 하고 바보 행세를 하며 암중모색하였던것입니다
개혁만이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고 생각한 야심찬 왕족출신 흥선군 이하응은
王權을 회복하여 세력을 잡아 그의 뜻을 이루려면
먼저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해야 한다고 결심합니다
그래서 전국의 명당자리를 찾아 헤메이기를 십여년.....
흥선군 이하응은 운좋게 풍수지리가 정만인(鄭萬仁)을 만납니다
[남연군 묘]
대원군의 어머니 비석을 지나 아버지 '남연군 묘'로 올라 가는 길입니다
남연군의 묫자리가 역사책의 페이지를 바꾼 '天下名堂'으로, 二代天子之地라 합니다
풍수가 정만인(鄭萬仁)은 흥선군 이하응에게 두곳을 추천하며 말합니다
"한곳은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어 자손대대로 부귀 영화를 누릴수 있으며,
그리고 또 한곳은 덕산 가야산 동쪽에 二代에 걸쳐 天子가 나올 二代天子之地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 묘를 쓰면 10여년 안에 틀림없이 두 명의 제왕이 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흥선군 이하응은 귀가 번쩍하고 하늘이 열리는듯하였다며
二代天子之地인 이곳 德山 伽倻山 자락을 선택하였답니다
이 때가 흥선군 이하응의 나이가 26세였다는군요
왕권을 향한 엄청난 암중모색...
어렵고 어렵게 잡은 王權을 나중에 며느리 閔妃에게 뺏기니
어찌 대원군과 며느리인 명성황후사이에 불화가 생기지 않을수 있었겠는지 이해되는지요
[남연군 묘]
그런데 흥선군이 지관 정만인을 따라 그 자리에 도착해보니
이미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고
더구나 묘를 쓸 자리에는 5층 석탑이 우뚝 서 있었답니다.
절의 탑 자리에 묘를 이장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흥선군은 차례차례 일을 벌여 나갑니다.
그는 우선 경기도 연천 南松亭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임시로 탑 뒤의 영조 때 판서를 지낸
윤봉구의 사패지를 그 후손에게서 빌려 옮김니다. 이때가 1844년입니다
다음 일은 가야사(伽倻寺)를 폐사(廢寺)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흥선군이 전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절반을 가야사 중들에게 주고
절에 불을 지르게 했다고 하기도 하고, 당시의 충청감사에게 중국산 명품 단계벼루를
뇌물로 선사하여 가야사 중들을 불러다가 강압하여 불을 지르게 했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흥선군의 계략에 의해서 가야사는 폐사(廢寺)되고
탑의 뒷산에 임시로 모셨던 남연군의 유해를 다음해인 1845년에
현재의 이곳으로 남연군묘를 이장하였다고합니다.
이장을 하며 새로 묘를 만들때 풍수지리가 정만인은 후에 도굴의 위험이 있으니
석회 3백 부대를 써서 관곽(棺槨)을 단단하게 다져 놓아야 한다고 하여
흥선군 이하응은 석회 3백 부대를 다져 넣어 강력한 묘를 만듭니다.
[남연군 묘]
남연군묘의 주산(主山)은 伽倻山 石門峰(653m)입니다.
석문봉의 좌우에는 옥양봉(621.4m)과 가야봉(677.6m)이 연이어 시립하고 있는데,
이를 두고 풍수에서는 천을(天乙), 태을(太乙)이 호위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고로 여기서 천을, 태을이라 함은 天皇大帝星인 북극성 주변의 별로서
天皇大帝星을 좌우에서 보좌하는 별을 말한답니다.
석문봉을 중심으로 천을, 태을로 3개의 봉우리가 균형 잡힌 형태로 늘어서 있는 모습이
마치 큰 봉황의 머리와 양쪽 날개를 연상시키게 하여 뭔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특히 서쪽 봉우리인 가야봉 너머로 석양이 질 때 더욱 그러한 분위기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는군요
[남연군 묘]
어느 풍수지리가가 이곳에 대해 쓴 글을 인용해 드립니다
남연군묘의 좌향(坐向)은 亥입수룡에 따라 해좌사향(亥坐巳向)을 하였다.
좌향이란 등을 대고 정면으로 바라보는 방향으로 혈의 뒤쪽 방위를 좌, 혈의 정면을 향이라 한다.
결국 좌와 향은 180도로 대칭 되는 방향이 된다.
풍수의 좌향법은 일차적으로 용혈사수(龍穴砂水)에 의하여 좋은 혈처를 결정했더라도
그 좌향을 파구의 방위와 양기의 흐름에 따라 정해진 법에 따라 적법하게 적용했을 때만이
생물체가 가장 좋은 생기를 취할 수 있는데 이곳이 그런 곳이다"
[남연군 묘]
묘의 뒤에서 바라 보았습니다
느끼기에 명당자리로 보이십니까?
좌측 '서운산'이 '청룡'이며 우측 가야산 자락이 '백호'랍니다
다시 어느 풍수지리가가 이곳에 대해 쓴 글을 인용해 드립니다
"남연군묘의 청룡과 백호를 이루는 산줄기를 살펴보면,
청룡줄기는 옥양봉에서 길게 뻗어 목성(木星)의 산들을 연이어 기봉시키며
서로 이어져 혈을 감싸면서 상가리 입구에서 수구(水口)를 막아준다.
백호줄기는 가야봉에서 뻗어 금성과 목성의 산들을 연이어 기봉시키며
서로 이어져 혈을 감싸면서 상가리 입구에서 청룡끝자락의 안쪽으로
그 끝자락을 오므려 역시 수구를 막아준다.
청룡은 길고 백호는 짧은 용장호단(龍長虎短)의 형세로 수구를 관쇄(關鎖)해주고 있고,
청룡과 백호가 여러 겹으로 중첩되어 물을 역수(逆水)시키니 길격 형상이다.
또한 청룡, 백호의 여러 줄기가 혈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듯이 산자락을 맞대고 있어
어전회의(御前會議)를 하는 듯한 모습이다. 가히 天子之地라 할 만하다"
남연군 비석 앞면과 뒷면
[石燈]
石燈의 이름은 長明燈이라합니다
이곳에 아버지의 묘를 이장시킨 흥선군 이하응은 아들 '명복'이를 낳는데
이 명복이가 후에 조선의 26대 고종황제이며, 고종의 아들이 순종이 되니
풍수가 정만인의 예언이 맞은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묫자리 때문에 2대에 걸쳐 왕을 탄생시켰다는 설은 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근간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대선주자들도 거의 대부분 자기 아버지의 묘를
소위 명당자리라고하는 곳으로 이장했지요?
그 결과는 김대중씨만 성공했나요? ㅎㅎ
이회창씨는 두번이나 실패했으니 명당설을 과연 믿어야하나요?
이런것도 미신이라고하는 일종의 종교적인것이라 생각합니다
[石燈-長明燈] 아랫쪽 문양
대원군의 글솜씨와 그림솜씨는 잘 알려져있지요
요즈음 그의 글이나 그림은 무지무지하게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습니다
이곳에 잇는 石燈이나 石柱에 새겨져 있는 문양은 모두 대원군이 그린 것이랍니다
[묘에서 바라 본 상여가 보관된 집]
사진의 바로 앞에 있는 岩盤이 옥쇄를 닮았다고 왕이 나올것이라 믿었다는 암반이며
가운데 기와집에 남연군의 喪輿가 보관되 있습니다
멀리 가야산의 정상 가야봉이 보입니다
[남연군 喪輿 보관 전시관]
상여는 연천에서 가야산까지 왕손을 운구하는 일이었으므로
한 지방을 지날 때마다 그 지방민이 동원되어 메었고,
오리지날 상여는 가장 마지막에 맨 '남은들'마을에 기증되었다고하며.
여기에는 '재현품'이 전시되 있다는군요
[남연군 喪輿 재현품]
이 상여는 龍鳳상여로 4귀에는 용모양의 금박이 있고, 중앙부에는 나무로 만든 동자상이 있으며
빨강 노랑 검정 흰색천으로 덮여져 근엄하면서도 호화롭다는군요
진품은 예산군 광천리 보호각에 보관되 있으며,
이것은 중요무형문화재 대목장 전흥수씨가 재현한 것이랍니다
현 위치를 나타내 주는 안내도입니다
남연군 묘를 나와 오른쪽 '옥양봉'으로 가는 등산로를 따라 갑니다
멀리 보이는 돌산이 '옥양봉'입니다
남연군묘를 나온 시각이 9시 40분
자동차가 다닐수 있는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 가면
마지막 음식점이 나오며 여기서 부터는 비포장 도로입니다
이 동네 이름이 예산군 덕산읍 상가리인데
저 아주머니에게 이 동네 이름을 '상가리'라고 하는 연유를 물어 보았으나
알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혹시 남연군 묘와 상가리가 연관이 있을 듯해서 물어 보았는데....
마지막 음식점에서 올라 가면 이런 임도가 나오며 제법 걷습니다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으로 직진하면 '석문봉'으로 가는 길이며, 오른쪽은 '옥양봉'으로 가는 길입니다
저는 오른쪽 '옥양봉'을 오르고 석문봉-가야봉으로 가려합니다
이 안내도를 잘 기억해 두셔야합니다
저는 옥양봉으로 올라 석문봉 - 가야봉 - 헬기장으로 가서 헬기장 넘어 '대치리'로 갑니다
비교적 좋은 산책로를 따라 갑니다
임도가 끝나는 곳에 와서 본격 산행 준비를 했습니다
물도 마시고 수건도 꺼내고....옷도 벗고...
10시 5분이었습니다
조금 올라 가니 '옥양봉' 오르는 등산로에 입산금지를 알리는 현수막을 크게 달아 놨더군요
아무른 이유도 없이 무조건 입산금지라고 해서 무시하고 입산금지를 넘어 갔으며,
또한 이 길이 아니면 옥양봉 가는 능선코스를 탈수 없기에 무시하고 간것입니다
올라 가서 보니까 이 등산로를 잘 만들기 위한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더군요
이런~~
공사중이라 '입산금지'라고 했다네요. 아무데나 "금지"라는 말을 쓰니 무식하기는..ㅉㅉ
그래서 공사 관계자 책임자를 찾아 혼내주었습니다
공사중이라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고 해야지
공사 편의를 위해 "금지"를 시키면 어떻게하나?
이 등산로 공사도 더 많은 등산객을 불러 들이기 위해 하는것 아니냐?
아래 직원 핑개를 대며 죄송하다고 당장 철거하겠다고 하더군요
공사하는 곳에서 부터는 무지 급경사를 오릅니다
이제 진짜 등산하는 기분이 듭니다
이곳에는 등산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하죠. 밑에서 "입산금지"를 시켰으니...ㅎㅎ
'옥양봉 중턱에 오르니 전망이 확트이는 전망대가 나오며
남연군묘가 있는 상가리가 펼쳐집니다
남연군묘가 있는 상가리 전경
여러분!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天下名堂같습니까?
사실 저는 이 사진을 찍기 위해 가야산 산행을 처음 계획했씁니다
옥양봉 중턱에서 바라 보는 가야봉과 원효봉
방송송신탑이 있는 봉우리가 가야산의 정상 '가야봉'입니다
그 좌측 봉우리가 '원효봉'입니다
옥양봉 정상 부근으로 오릅니다
상가리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가 또 있으며, 처음으로 등산객을 만났습니다
옥양봉 정상부근은 경치 좋은 전망대가 많더군요
다시 남연군묘가 있는 천하명당이라는 상가리를 촬영했습니다
감상은 자유입니다
좌청룡 우백호이라 생각하던 말던...ㅎㅎ
그런데 자꾸 보니 꽤 괜찮은 곳 같죠? ㅎㅎ
남연군묘는 二代天子之地라는 ‘명당설’로도 유명하지만,
이 묘의 명당설 때문에 ‘남연군묘 도굴사건’이 일어나는 단초를 제공하여
우리나라 근대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기에 더욱 유명합니다
‘남연군묘 도굴사건’은 옥양봉 꼭대기에서 설명합니다
저는 산행시에 줌인을 해서 사진을 잘 찍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시는 분들이 거리를 착각할수 있기때문이죠
그러나 '남연군묘' 많큼은 줌인하여 촬영했습니다
오로지 '홍어와 무인도'를 사랑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그리고 天下名堂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니....
天下名堂을 너무 좋아 하지 마시고 명당 찾아 다니지 마시라~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죽으면 한줌의 흙으로 돌아 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니라
죽은 놈이 후손을 위해 뭔 큰일을 해준다야~~!!
오늘 하루 하루를 중요시 하며 열심히 사는게 天下名堂이니라 - 파란문 말씀
삼거리
오른쪽이 '수정봉'으로 가는 길이며, 서산삼존마애불상이 있는 용현리로 가는 길입니다
저는 원래 서산삼존마애불상이 있는 용현리에서 수정봉을 거쳐 이곳으로 올라와
석문봉, 가야봉을 거쳐 상가리 '남연군묘'로 가는 코스를 가려했으나
덕산에서 교통불편으로 남연군묘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이곳으로 왔습니다
좌측으로 석문봉 가야봉으로 갑니다
평평한 길을 따라 조금가면 '옥양봉 정상'이 나옵니다
옥양봉 정상에는 흔한 정상석도 없더군요
그러나 조망이 너무나 좋아 가슴이 확트이는듯 합니다
[옥양봉에서 바라 보는 서해 방향]
바로 앞 산이 '일락산'입니다
그리고 '해미읍'이 좌측에 보입니다. 해미읍에 유명한 '해미읍성'이 있어 특별히 표시했습니다
'해미'도 줌인하여 촬영했습니다
좌측으로 안면도 사이의 바다도 보입니다
해미 바로 앞으로 지나가는 '서해안 고속도로'도 잘 보입니다
'해미'를 줌인하여 촬영한 이유가 있습니다
'해미'는 한문으로 海味이더군요. 한문으로 쓰니 뭔뜻인지 모두 아시겠죠?
그리고 해미 앞의 뜰이 간척사업을 하기 전까지는 모두 바다였다는군요
그리고 지금은 서해안고속도로의 휴게소가 되버린 '행담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안내판이 있습니다
“이곳 행담도는 1868년 흥선대원군 시절 '남연군묘 도굴사건'의 주역인 '오페르트'가
'차이나호'를 타고 와서 상륙했던 역사적인 섬이다.
오페르트는(oppret.E.J)는 독일 상인으로 1866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하고 돌아간 후 고종 5년인 1868년 4월에 세 번째로 조선의 답사를 계획했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를 도굴해 시체와 부장품을 이용하여 통상 문제를
흥정하려는 의도로 사건을 계획하고, 미국인 젠킨스를 자본주로 하여 프랑스인 선교사 페롱을
통역관 겸 보좌관으로 삼고, 묄러(Moeller)와 조선인 모리배 2명, 백인 8명, 조선인 천주교인 약간 명,
말레지아인 20명과 유럽, 필리핀, 중국선원 등 총 140명으로 도굴단을 구성하여
680톤의 기선 차이나호에 소중기선 8톤급 그레타호를 달고 일본 나가사끼를 거쳐
4월 18일 당시 홍주목 신평현(현 당진군 신평면) 행담도(行淡島)에 북독일 연방의 국기를 계양하고 정박했다.
여기서 그들은 그레타호에 옮겨 타고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가 현 예산군 덕산면 구만포에 상륙하여,
러시아 군병이라 자칭하며 어둠을 틈타 덕산 가동(伽洞)에 있는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덕산군수 이종신(李鍾信)과 묘지기 및 주민들의 저항으로 쉽게 도굴작업을 할 수 없었기에
새벽녘에야 겨우 석회로 다져진 무덤의 한부분만을 파낼 수 있었다.
이러는 동안에 날이 밝아오고 주민들이 운집하고 감조하천인 삽교천의 퇴조시간도 다가오게 되어,
이들은 관곽(棺槨)까지 파낸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 구만포(현 예산군 고덕면)로 퇴각했다.
이러한 비행은 국내에서는 물론 상해 주재 외국인들 사이에도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켜
마침내 젠킨스는 불법 파렴치한 행동의 피고인으로 체포기소 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되고 말았으며
해적의 무모한 소행과 다름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우리국민에게 악감정을 일으키고,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 가야할 '석문봉'과 가야봉, 원효봉이 차례로 보입니다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한 그후 흥선군은 예언대로 대원군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과 손자는 고종과 순종으로 2대에 걸쳐 황제가 되었습니다.
비록 조선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한 비운의 황제였을 망정 황제는 황제였던 것입니다.
대원군은 가야산과 가야사의 음덕에 보답하는 의미였는지
아니면 자신의 욕심이 지나첬음을 뉘우치는 의미였는지는 모르지만
고종이 등극한 2년째 되던 해에 남연군의 묘 맞은편 산기슭에
報德寺란 절을 짓고 원당사찰로 삼았습니다.
이 절은 토목금벽으로 치장하여 대단히 화려하였으며,
많은 전토와 보화가 내려졌다고 전하는데 6.25때 소실되었고,
근래에 중창되어 수덕사의 여승들이 정진하는 도량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가야사 터가 광할한 느낌의 도량이었다면
보덕사는 이와 대조적으로 산중턱에 감춰진 듯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답니다.
옥양봉을 하산하고 있습니다
옥양봉을 내려 가는 암벽은 경사가 심하나 짧은 거리여서
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진에 나오는 분들은 옥양봉에서 만난 山客들이신데 이곳에 자주 오시는 분들인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옥양봉에서 석문봉까지 동행하며 여러 지형 地名에 대해 들었습니다
이 분들 사진은 석문봉에서 보여 드림니다
옥양봉에서 석문봉으로 가는 능선은 완만한 경사로 쉽게 갈수 있습니다
옥양봉과 석문봉 사이에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이름 모를 돌탑만 하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산객들이 이곳은 그냥 지나치더군요
옥양봉에서 석문봉까지는 제법 먼 거리였습니다
중간에 삼거리 이정표가 두군데 나옵니다.
모두 내려 가면 남연군묘가 있는 상가리 주차장으로 갑니다
이곳의 현위치는 석문봉 바로 아래인것을 알수 있지요?
가야봉 방향으로 조금 갑니다
[가야산 석문봉]
가야산 석문봉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나타납니다.
멋진 정상이 연출되더군요.
태극기와 우측의 돌탑이 암릉 위에 석문봉을 더욱 멋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석문봉에서 일락산 방향]
석문봉 정상을 먼저 오르지 않고 일락산 쪽으로 가서 석문봉을 조망하렵니다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西北방향으로 안성의 칠장산까지 "한남금북정맥"이 뻗어 나가고
안성의 칠장산에서 다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져 제갈길을 가는데...
아시다시피 한남정맥은 용인 영동고속도로 마성터널 위를 거쳐 수원의 광교산과 백운산을 거쳐
지지대 고개를 넘어 인천의 계양산으로 가 김포반도의 끝, 강화도 바로 앞 문수산에서 그 맥을 다하고
금북정맥은 안성 칠장산에서 시작하여 서운산, 태조산, 국사봉, 덕숭산을 넘어 와
가야산 정상인 가야봉을 거쳐 이곳 석문봉에서 방향을 서북쪽으로 틀어 일락산을 거치면서
백화산으로 뻗어 내린 후 태안반도 끝에서 소멸하는 266㎞의 기나긴 정맥입니다
금북정맥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錦江의 北쪽을 가로지르는 산줄기를 말합니다
지금 그 금북정맥의 마루금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는 것입니다
금북정맥의 산줄기가 일락산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海味邑과 서산, 태안반도와 서해가 보입니다
저 태안반도의 끝에서 이 산줄기는 바다로 가라앉습니다
일락산쪽 금북정맥 마루금에서 바라 본 석문봉
여러 산을 다녀 봤습니다만 석문봉은 정말 멋있는 봉우리 중 하나인듯합니다
남연군묘에서 설명 드린바와 같이
'남연군묘'를 명당자리로 만드는 主山이 이 石門峰이고 北極星으로서 天皇大帝星이라 했으니
그리고 天皇大帝星을 보좌하는 별인 天乙이 옥양봉이며, 太乙이 가야봉이라했으니
가야산의 主峰은 石門峰이라 말하지 않을수 없겠군요
석문봉과 가야봉을 함께 카메라에 담아봤습니다
[石門峰 정상]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습니다
사진 속의 산객은 저는 모르는 사람이며 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내려 오질 않아 그냥 찍었습니다. 뭔 영화 찍냐?하고 묻고 싶더군요 ㅎㅎ
[석문봉 정상석]
가야산 봉우리들 중에 유일하게 멋있는 정상석이 있는 봉우리이더군요
11시 40분에 석문봉에 도착했습니다
남연군묘에서 옥양봉을 거쳐 오는데 대략 2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해미 산악회가 쌓았다는 백두대간종주 기념탑
요즘은 백두대간 종주가 붐을 이루고 있습니다
저는 백두대간을 종주 하고픈 생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산행은 건강증진과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백두대간 종주는 너무 힘들어서 오히려 건강에 害가 될것 같고
종주가 즐겁다기 보다는 괴로울 것 같아 인생을 낭비하며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체력이 약해 고안해낸 핑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ㅎㅎ
가야산 같은 적절한 산을 찾아 산과 함께 산을 친구로 삼으며 그냥 그렇게 계속 산행을 하렵니다
[한서대학교]
이곳 가야산 밑 해미에 한서대가 있군요
[석문봉에서 바라 보는 해미읍과 서산]
서해바다가 바로 앞에 있습니다
대원군은 오페르트가 자신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할때에 천주교 신자들이 스파이짖을 했다고
이를 빌미로 엄청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이곳 해미읍성에서 처형했답니다
당시 관아가 있던 이 곳으로 충청도 각 지역에서 잡혀 온 수많은 신자들이 고문을 받고 죽음을 당했으며,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는 그때에만 1,000여명이 처형됐다고하는군요
성 안 광장에는 대원군 집정 당시 체포된 천주교도들이 갇혀 있던 감옥터와,
신자들을 나뭇가지에 매달아 모진 고문을 했던 노거수 회화나무가 지금도 서 있답니다
지나온 옥양봉
제가 오늘 원래 산행코스 들머리로 하려고했던 서산삼존 마애불상이 있는 서산 용현리가
멀리 능선 아래에 있습니다
남연군묘를 참관하지 않는다면 저는 이 코스를 추천하고싶습니다
서산삼존마애불상-수정봉-옥양봉-석문봉-(여기에서 가야봉으로 가지 않고)-일락산-
보문사지-서산삼존마애불상
원점회귀코스로서 승용차를 몰고 오시는 분들은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I.C에서 나오면
바로 운산-용현리로 20분이면 갈수 있으니 좋다고 생각됩니다
석문봉 정상에서 휴식을 취하며 간단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옥양봉에서 만나 석문봉까지 함께한 산객들
함께한 산행 즐거웠습니다
저의 블로그를 잘 찾아 왔는지 궁금하군요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날이 되길 바라며
산행 많이 하시고 늘 건강하세요~
그리고 베풀어주신 후의에 감사드림니다
석문봉 정상의 암벽을 타고 내려와 가야봉으로 향합니다
우회로도 있습니다
석문봉 다음 봉우리에서 뒤돌아 보며 석문봉을 촬영했습니다
아름답습니다
詩人 황동규 전 서울대 영문과 교수가 쓴 詩
소유언시(小遺言詩)에 이곳 가야산 주변과 관련된 지역의 이름이 많이 등장합니다
황동규 시인은 우리나라 문학사의 한획을 긋고있는 '소나기'와 '카인의 후예'를 쓴
황순원 작가의 아들이지요
황동규시인의 "소유언시(小遺言詩)"는 가끔 즐겨 읖조리던 시입니다
글자 그대로 조그만 遺言이라는 의미의 詩이라 산행을 하며 음미해 봅니다
"소유언시(小遺言詩)"
열반에 머문다는 것은 열반에 속박되는 것이다 - 원효
1
살기 점점 더 덤덤해지면,
부음(訃音)이 겹으로 몰려올 때
잠들 때쯤 죽은 자들의 삶이 떠오르고
그들이 좀 무례하게 앞서갔구나 싶어지면,
관광객도 나대지 않는 서산 가로림만(灣)쯤에 가서
썰물 때 곰섬(熊島)에 건너가
살가운 비린내
평상 위에 생선들이 누워 쉬고 있는 집들을 지나
섬 끝에 신발 벗어놓고
갯벌에 들어
무릎까지 뻘이 차와도
아무도 눈 주지 않는 섬 한구석에
잊힌 듯 꽂혀 있다가
물때 놓치고 세상에 나오지 못하듯이.
2
그냥 가기 뭣하면
중간에 안국사지(安國寺址)쯤에 들러
크고 못생긴 보물 고려 불상과 탑을 건성 보고
화사하게 핀 나무 백일홍들
그 뒤에 편안히 누워 있는 거대한 자연석(自然石) 남근을 만나
생전 알고 싶던 얘기나 하나 묻고
대답은 못 듣고.
가야봉을 향해 갑니다
이곳부터는 산객이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산객들이 석문봉과 가야봉 사이의 계곡길로 하산하더군요
윗 사진의 산객들도 하산하고 홀로 가야봉을 걸었습니다
3
길 잃고 휘 둘러가는 길 즐기기.
때로 새 길 들어가 길 잃고 헤매기.
어쩌다 500년 넘은 느티도 만나고
개심사의 키 너무 커 일부러 허리 구부린 기둥들도 만나리.
처음 만나 서로 어색한 새들도 있으리.
혹시 못 만나면 어떤가.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
나무, 집과 새들을 만났다.
이제 그들 없이 헤맬 곳을 찾아서.
4
아 언덕이 하나 없어졌다.
십 년 전 이곳을 헤매고 다닐 때
길 양편에 서서 다정히 얘기 주고받던 언덕
서로 반쯤 깨진 바위 얼굴을 돌리기도 했지.
없어진 쪽이 상대에게 고개를 약간 더 기울였던가.
그 자리엔 크레인 한 대가 고개를 휘젓고 있다.
문명은 어딘가 뻔뻔스러운 데가 있다.
남은 언덕이 자기끼리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을까.
지난날의 갖은 얘기 이젠 단색(單色) 모놀로그?
중간에 이름 모를 봉우리를 하나 넘고....
5
한 뼘 채 못 되는 시간이 남아 있다면
대호 방조제까지만이라도 갔다 오자.
언젠가 직선으로 변한 바다에
배들이 어리둥절하여
공연히 옆을 보며 몸짓 사리는 것을 보고 오자.
나이 늘며 삶이 점점 직선으로 바뀐다.
지난 일들이 빤히 건너다보이고.
6
곰섬 건너기 직전
물이 차차 무거워지며 다른 칸들로 쫓겨다니다
드디어 소금이 되는 염전이 있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든 억지로든
칸 옮겨 다님,
누군가 되돌아가지 못하게 제때마다 물꼬를 막는다.
자세히 보면
시간에도 칸들이 쳐 있다.
마지막 칸이 허옇다.
쌓아 논듯한 바위를 지나고....
7
물떼샌가 도요샌가
긴 발로
뻘에 무릎까지 빠진 사람은
생물로 치지 않는다는 듯이
팔 길이 갓 벗어난 곳에서 갯벌을 뒤지고 있다.
바지락 하나가 잡혀 나온다.
다 저녁때
바지락조개들만
살다 들키는 곳.
오솔길을 따라 나갑니다
8
어둠이 온다.
달이 떠오르지 않아도
물소리가 바다가 된다.
밤새가 울 만큼 울다 만다.
왜 인간은 살 만큼 살다 말려 않는가?
생선들 누웠던 평상 위
흥건한 소리마당 같은 비릿함,
그 냄새가 바로 우리가 처음 삶에,
삶에 저도 모르게 빠져든 자리!
그 속에 온몸 삭히듯 젖어
육십 년 익힌 삶의 뽄새들을 모두 잊어버린다.
이 멈출 길 없는 떠남! 내 안에서 좀체 말 이루려 않는
한 노엽고, 슬거운 인간을 만난다.
곰처럼 주먹으로 가슴 두들기고
밤새처럼,
울고 싶다.
상가리 주차장으로 내려 가는 길과 가야봉을 알리는 삼거리가 다시 나오는데....
[삼거리]
젊은 아빠가 너댓살 되 보이는 예쁜 딸을 데리고 이 높은 가야산을 올라
오붓이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 발길을 멈추고 얘기를 나눴습니다
어린이는 걷다가 아빠 등에 업혔다가를 반복하며 이곳까지 올랐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자랑스럽게 생각됩니다. 예쁘고 똑똑하더군요
에구~ 난 저런 손자 손녀를 조만간 볼 때가 �으니...괜히 센티해 지더군요
앞에 보이는 갈림길의 왼쪽으로 가면 상가리 주차장으로 가기 때문에
반드시 직진해야하며,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별로 없으니 실제 이곳이
가야산 산행의 종착지인 셈입니다
저는 직진하여 가야산 정상으로 갔습니다
직진하니 사람들의 통행 흔적이 별로없는 길에 가야봉 정상의 방송 송신탑과
무선통신 송수신탑이 여러개 우뚝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른쪽으로 '한서대'가 잘 조망되고 서해바다가 훤히 보였습니다
안면도가 손에 잡힐듯....
지나온 옥양봉과 석문봉을 마지막으로 뒤돌아 보고....
가야봉 정상의 암벽을 올랐습니다
[가야봉 정상]
가야봉 정상은 각 방송사와 통신사들이 점령하고 산객들의 출입을 막고 있습니다
다른 산들은 그래도 산객들에게 숨통은 터주고 점령하는데 가야봉은 완전히
빈틈을 보여주지않네요
좌측으로 난 우회로를 내려 갑니다
이곳은 '금북정맥'이 지나는 마루금이므로 정맥 종주자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라
산객들이 달아 논 리본들이 있더군요
[갈림길 이정표]
정상부에서 조금 내려 오면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곳이 중요하더군요
[헬기장] 방향으로 암벽에 길이 있습니다
저 암벽길로 올라 갑니다
오른쪽 정상부를 끼고 돌아 가면 너덜지대가 나오며 송신탑이 보입니다
가야봉 정상부에서 마지막으로 남연군묘가 있는 상가리를 내려다 봅니다
오른쪽 좁은 길로 숲을 헤치고 올라 갔습니다
[가야산 정상]
숲을 헤치고 올라 갔더니 자동차 도로가 나오며, 송신소 정문이 나오더군요
이곳까지 승동차를 타고 데이트를 하러 온 청춘들이 몇 보였습니다
이 도로는 S자로 굴곡을 이루며 대치리까지 뚤려있는 송신소 전용도로입니다
[가야봉에서 바라 본 원효봉]
자동차 도로는 S자로 많이 돌아 감으로 아랫길로 직선으로 내려 갔습니다
내려 온 길을 뒤돌아봤습니다
지금부터는 車路를 따라 대치리까지 내려 갑니다
하산길이 편해서 관절이 닳아 시원찮은 저에겐 좋았습니다
[헬기장]
가야봉과 원효봉 사이의 헬기장이 나왔으며
이곳에 『내포 문화 발원탑』이 있었습니다
내포는 옛날에 서산 덕산 예산 홍천등 이 지방을 통칭하여 내포라고 하였다고하며
海味가 그 중심지로 관아가 해미읍성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곳 가야산이 그『내포 문화 발원지』라 기념탑을 만들었나 봅니다
『내포 문화 발상탑』현위치
좌측 자동차 도로를 이용해 대치리까지 갑니다
내려 가며 뒤돌아 본『내포 문화 발원탑』과 헬기장
길을 따라 한없이 내려갑니다
차로 중간 계곡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세수도 하고 발도 씻고....
이 계곡물에 피래미들이 많이 살고 있는것으로 보아 물이 마르지 않는 곳이 틀림없습니다
맑은 물속의 피래미들이 보이시나요?
피래미들에게 빵 부스러기를 많이 주었습니다. 무지 잘 먹더군요
대치리 마을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집들이 모두 좋더군요
全州李氏 讓寧大君 七世孫 副尉公派 宗中 齊堂
대치리 마을 어귀로 내려 오는데 예산-해미간 신설 도로가 시원하게 뚤려있습니다
교보생명 창업자 신용호씨의 묘지가 남연군묘 보다 훨씬 크게 조성되있습니다
묘지에는 시인 고은선생의 추모시비도 엄청 크게 세워놨습니다
뒤로 가야산이 잘 조망됩니다. 여기도 명당?
대치리 마을회관
[예산-해미간 국도]로 나왔습니다
앞에 보이는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서 덕산을 거쳐 삽교 가는 버스를 탓습니다
대치리 버스 정류장에서 바라 본 가야산
오늘도 많이 걸었습니다
오후 3시 40분을 가리키고.....
예산- 해미-서산간 신설 국도가 넓직하게 시원하게 뚤려있으나
다니는 차는 별로 없습니다
[덕산온천]
버스가 덕산온천은 둘러서 가더군요
버스 안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여기가 대중탕이 있는 덕산 온천이며 화려한 '덕산스파'는 새로 조성되어있더군요
[덕산읍내]
덕산은 관광지로서 또한 교통의 요지로서 날로 발전하는데
삽교는 발전이 없다는군요
[삽교역]
4시 15분경에 삽교역에 왔는데 기차가 5시45분에 있다는군요
그래서 근처 페리카나에 들어가 소주한병 맥주한병 통닭 반마리로 하산주를 하고....
노을 지는 삽교역에서 기차를 기다립니다
멀리 지나온 가야산이 노을에 물들어 가며 정겹게 보입니다
권력을 향한 몸부림인가..아버지 묘까지 이장하면서 大元位大監에 오른 흥선군 이 하응
결국 권불십년이란 사자성어를 뛰어 넘지 못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대원군
대원군과 함께 조용한 아침의 나라 '朝鮮王祖'도 몰락해 갑니다
外勢의 침략과 강점기시대로......조용할 날 하루도 없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 - 朝鮮
좌석이 없어 입석을 끊어 무궁화호를 탓습니다
천안에 가서 전철로 갈아 타고 가려합니다
입석표이기에 재빨리 매점칸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캔맥주 하나 먹으며 천안까지 갔습니다
식당칸은 없고 매점칸만 있더군요. 기차를 오랜만에 타봐서 몰랐습니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펼쳐지는 예산의 가을 풍경
멋진 하루 산행겸 여행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