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명승지를 찾아』
[남파랑길] "부산구간 영도-태종대-감지해변" 답사기
봉래교차로-봉래치안센타-봉래골그린공원-해돋이전망대-청봉약수터-
해돋이배수지-고구마역사공원-고신대-와치복지회관-해양대입구-태종대입구-
태종대전망대-영도등대-태종사-태종대입구-감지해변-태종대주차장
[국토지리원 지도]
'부산광역시 영도구 봉래동'에 있는 "봉래교차로"에서 출발하여 "봉래치안센타"로 올라 가
"봉래골그린공원"에서 "고구마역사공원-고신대 영도캠퍼스"를 둘러 "와치종합사회복지회관"까지
"봉래산둘레길"을 통과하고 "동삼동"을 통과하여 "태종대"를 둘러 봅니다.
['부산항대교'에서 '영도' 조망]
잔뜩 찌푸린 날씨로는 여행에 '운수 무지 없는 날', 그러나 걷기엔 괜찮은 '운수 좋은 날'에
"부산항대교"를 건너며 버스 안에서 촬영한 "영도"입니다.
"부산항"을 세계적 항구도시로 만들어준 천혜의 방파제 역활을 하는 "영도 影島".
오늘은 그 "영도 影島" 속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영도 봉래교차로'] 11:50
2019년 10월 23일 (수) 흐림
'부산광역시 영도구 봉래동'에 있는 "봉래교차로"에 내려 여행을 시작합니다.
이곳은 [부산대교]에서 '영도'로 바로 통하는 '영도'의 중심 교차로였습니다.
위의 고가도로는 [부산항대교]와 [남항대교]를 직접 연결하는 "영도고가도로"였고...
['봉래산' 조망]
[봉래교차로]를 건너면서 "봉래산 蓬萊山 396.2m"을 조망합니다.
"영도 影島"가 존재 할수 있게 하는 '영도의 중심'이 되는 산이라죠.
[봉래산 蓬萊山]은 원래 중국의 전설 속에 나오는 신선이 사는 3대 神仙山 중에 하나이죠.
[영주산, 방장산]과 함께...[봉래산]은 특히 신선이 먹는다는 "불노초"와 "불사약"이 있다고하죠?
[蓬萊山]의 "蓬"은 "쑥"을 의미하고 "萊"는 "잡초"를 의미하지만 합쳐 불로초라 하기도 한답니다.
[조봉 祖峯]·[자봉 子峯]·[손봉 孫峯]의 세 봉우리가 [봉래산 蓬萊山]을 형성하고 있답니다.
또한 "봉황이 날라드는 형세"라는 "鳳來山"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하기도 한답니다.
여하튼 '봉황'이 날라들며 '불노초'가 서식하는 전설 속의 [봉래산 蓬萊山]을 꿈꾸며
살기 좋은 곳이라는 의미 부여를 해 봅니다.
참고로 [영도 스토리텔링 최종보고서]에 나와 있는 [봉래산]에 관한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원래 봉래산(蓬萊山)은 중국 전설에 나타나는 영산(靈山)인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이다.
동쪽 바다의 가운데 있으며, 신선이 살고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고 한다.
'서복(徐福)'이라는 진시황의 신하는 문헌상으로 '서복' 또는' 서불(徐巿)'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중국을 천하 통일한 진나라의 진시황제는 불로장생을 위한 영약을 구하기 위해 신하들을
사방으로 보냈으나 불로초를 구해오지 못했다.
제나라 출신의 '서복'은 기원전 255년 제나라에서 태어서 진나라의 방사(方士)로 일했다.
그의 생애 동안 불로초를 찾아 동해를 두 번 가게 된다.
자기가 불로초를 구하러 갈 차례임을 알고 기원전 219년(시황 28년) 진시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저 멀리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사가야 할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고자 합니다." 이에 시황은 크게 기뻐하여 동남동녀 수천을 뽑아
그에게 주고 바다로 나가 신선을 찾아 오게 하였다.
'서복'의 상소문에 있는 봉래산(蓬萊山)은 금강산이요, 영주산(瀛洲山)은 한라산 이다.
그리하여 기원전 219년에서 210년 사이에 시작된 그의 행적은 일본까지 이어진다.
60척의 배와 5,000명의 일행, 3,000명의 동남동녀와 각각 다른 분야의 장인들이 동반한 그 여행은
기원전 210년까지 이어졌으나, 이후 그는 다시 황도로 돌아오지 않았다.
"여름 금강산"을 "봉래산 蓬萊山"이라 하는 건 모두 아실거고...
조선 시대 최고 문장가 중에 한분인 "양사언선생"의 호가 "봉래 蓬萊"이기도 하죠.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태산가"를 지어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양사언선생"은
'여름 금강산"의 이름인 "봉래산 蓬萊山"을 너무 좋아해 자원하여 '철원 현감'으로 가서
금강산을 자주 유람하며 신선의 세계와 현세를 함께할 꿈을 꾸며 많은 기록을 남겼답니다.
['봉래언덕길' 입구 삼거리] 11:55
[봉래교차로]에서 [부산항대교]와 [남항대교]를 직접 연결하는 [영도고가도로]를 좌측으로 따라
몇백m를 진행하면 처음으로 삼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으로 [봉래언덕길]이 이어집니다.
['봉래언덕길']
[봉래산]을 바라보며 제법 가파른 언덕길을 5분여 올라 가면...
['봉래길']
[봉래산] 비탈에 형성된 [봉래동4가] 골목길을 다시 5분여 올라 가는데
길찾기의 포스트가 되는 [선불사]와 [유진캐슬아파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봉래치안센타' 앞] 12:04
이어서 "봉래치안센타"를 만나며, 치안센타와 "유진캐슬아파트" 사이에 "봉래골그린공원 입구"가 열립니다.
['봉래골그린공원' 입구]
"봉래골그린공원"으로 올라 가는 길 좌측에는 "선불사"라는 절이 있고...
공원 정문을 통과해 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봉산약수터'] 12:07
"봉산약수터"가 있는데 주민들의 생활운동시설들과 쉼터가 함께 조성되 있더군요.
[오름길]
[봉산약수터]를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 가면...
[편백나무 숲]
편백나무 숲이 우거진 "봉래산둘레길"를 만나는데
이제부터 [고신대학교 영도캠퍼스]까지 이 둘레길을 진행합니다.
8분여 숲길을 진행하면...
[갈림길] 12:15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해돋이배수지 →] 방향으로 올라 가고
['주막집'] 12:16
이어서 바로 주막집을 지나는데 앞에 [해돋이전망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시간 있으면 묵사발에 막걸리 한잔 하고 싶지만... ^*^
['해듣이전망대' 조망]
아쉬움 뒤로하고 [해돋이전망대]로 갑니다.
['해돋이전망대' 앞] 12:18~12:21
"해돋이전망대" 앞에는 "청학동 해돋이 마을"에 대한 안내도가 있는데
이제부터 [봉래동]을 벗어나 [청학동]으로 들어 가는군요.
[부산시 지명의 유래]에서 인용합니다.
임진왜란 이후 영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으나, 한말에는 6호의 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청학동의 동명은 이곳이 숲이 울창하여 청청(靑靑)하고,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이 지대가 학맥설(鶴脈說)에 따라 해운대에서 영도를 바라보면, 마치 학(鶴)이 남쪽으로 날으는
형상을 이루고 있다하여 청학동이란 동명을 짓게되었다고 한다.
청학동이라 하기 이전에는 지금의 청학동시장과 부산은행지점 바닷가 일원을 조내기라 불러왔다.
조내기 일대는 어장으로 많은 생선이 잡혔다고 한다. 어장의 개발에 따라 뚜겁바구, 넉섬방우,
덤버들 등의 해안지명이 생겨나고, 이후 인가가 들어섬에 따라 조내기라는 지명도 얻게되었다.
조내기란 지명의 유래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이곳의 바닷가는 낮고 개펄이 많아 썰물 때는
물이 군데군데 고여있는 조락(潮落)한 곳이 많아서 붙여졌다고 한다.
또는 통신사(通信使) 조엄이 일본에서 고구마를 가져와 이곳에서 처음으로 재배하여
조씨가 고구마를 캐내기 시작하여 조내기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현재까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청학동 해돋이 마을' 안내도]
[청학동 해돋이 마을 안내도]를 보는데....
神仙들이 푸른 鶴을 타고 불노초가 자생하고 불사약이 있다는 전설 속의 "봉래산"에 날라와
천년만년 살았을 "靑鶴洞"이 현재도 과연 그런 전설 속의 마을일까?
다닥다닥 붙은 서민 주택들이 봉래산 기슭에 안감힘을 쓰며 붙어서 삶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서북쪽 방향]
神仙들이 푸른 鶴을 타고 불노초가 자생하고 불사약이 있다는 전설 속의 "봉래산"에 날라와 살았다고
하는 "靑鶴洞"에 있는 "靑鶴洞 해돋이 전망대"에 올라 우리나라 최대의 항구도시 "부산"을 조망합니다.
서북쪽으로는 [낙동정맥]이 마지막 안간힘을 쓰며 [몰운대]로 향하는 산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금정산 고당봉-백양산-엄광산-구덕산-시약산]들이 [몰운대]로 향하고 있고...
[북쪽 조망]
북쪽으로는 우리나라 최대의 항구인 "부산북항"이 전체적으로 조망되며
그 뒤로 [낙동정맥]이 [천성산]에서 이어지고 있으며
우측엔 [황령산]과 [금련산]이 조망됩니다.
[북동쪽 조망]
북동쪽으로는 [부산항대교]가 [부산항]을 가로지르고 있고
그 뒤로 [장산]과 [해운대]의 '엘씨티'등이 조망됩니다.
[동쪽 조망]
동쪽으로는 [해파랑길]과 [남파랑길]의 시종점인 "오륙도"와 "오륙도SK뷰아파트"가 보입니다.
['봉래산 둘레길']
[청학동 해돋이 전망대]에서 조망을 마치고 둘레길을 잠시 진행하면...
['청골약수터'] 12:25
"청골약수터"를 만납니다.
[영도 봉래산]은 일제강점기 시절 이후 쪽바리들이 "고갈산 沽渴山-목 마른 산"
또는 "고갈산 枯蝎山-삐삭 마른 도마뱀"이라고 비하하며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라의 정기를 끊는다고 쇠말뚝을 무수히 박았답니다.
그런데도 이 약수터에는 음용 적합 판정을 받은 약숫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정기를 끊을려고 해도 굳건히 일어나는 대한민국을 쪽바리들은 막을수 없습니다.
언제 마셔 보겠냐 싶어 한바가지 시원하게 마시고...혹시 불노초 썩은 물이라도 들어 있으려나? ㅎ
[갈림길] 12:27
[봉래산둘레길]을 따라 조금 더 진행하면
['연화사' 뒷길]
[연화사]라는 절간 뒤를 지나고
['해돋이 배수지'] 12:31
이어서 [해돋이 배수지] 정문을 만나는데
조그마한 섬 [봉래산] 산비탈에 수돗물을 공급하려면 이런 배수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겠지요.
['영도 고구마 역사공원' 앞] 12:31
[해돋이 배수지] 정문 건너편에 "영도 조내기 고구마 역사공원"이 있습니다.
['조내기 고구마 역사공원' 정문]
['고구마 시배지 상징 조형물']
"고구마 시배지"
대표적 [구황작물 救荒作物]인 고구마를 최초로 심어 수확한 곳을 상징하는 상징물이 있는
"영도 조내기 고구마 역사공원"이더군요.
* 구황작물 救荒作物 - 가뭄이나 장마에 큰 영향을 받지 않으며 양분이 많지 않은 땅에서도
재배할 수 있는 작물들로서 조·피·기장·메밀·고구마·감자등이 있다고 하며
* 현재 '조내기 고구마 종자'는 없어지고 다른 품종의 고구마를 전국 각처에서 재배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구마의 원산지는 일본이 아니라 '남아메리카'라고 하더군요.
['조엄과 조내기 고구마' 안내문]
"조엄"은 176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가던 도중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처음 보고 구황작물로
좋다고 판단하여 종자를 부산으로 보냈고, 다음 해(1764) 봄에 부신진 첨사가 봉래산 해안지대에
심어 조내기 고구마의 시초가 되었다는 공원 안내판의 설명이네요
'고구마'라는 말 자체가 그가 지은『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일본인이 이를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부른다고 기록한 데서 "고구마"라는 단어가 유래되었다 합니다.
그러니까 "고구마"는 일본말 '고귀위마'의 우리식 변음이군요.
밤 맛을 지닌 조내기 고구마는 작고 붉은 것이 특징인데
조내기의 어원은 조엄이 가져와 처음 재배해 내었다는 의미에서 나왔다는 설,
작은 것을 뜻하는 이곳 말인 쪽내기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 여럿이 있는데 정확한건 모른다고...
"조엄 1719~1777"은 '풍양 趙氏'로 '강원도 원주' 출신이랍니다.
"정조대왕"의 외조부인 "홍봉한"의 누이동생이 "조엄"의 부인이라는군요.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고, [혜경궁 홍씨]는 "정조"의 어머니이죠.
"조엄"은 과거에 급제하여 일본통신사를 비롯 암행어사, 동래부사, 경상도-평안도관찰사등으로 승승장구
했으나, 뇌물죄등으로 파직당하고 김해로 귀양가 그곳에서 병사하였답니다.
['조내기 고구마 역사공원' 안내도]
[공원길]
[공원 어린이 놀이터]
[현장학습 나온 어린이들] 12:35
['동삼동' 조망]
[공원길] 12:39
"영도 조내기 고구마 역사공원"은 고구마 시배지에 대한 역사공원이기도 하지만
주민들을 위한 놀이공원으로 조성되 있어 많은 어린이들이 체험학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둘레길]
계속해서 둘레길을 진행하면 중간에 데크 다리를 하나 만납니다.
이곳에선 조망이 트이는데...
['조도' 조망] 12:44
'부산'에서 아침을 가장 먼저 맞이 하는 곳이라고 "아치섬 朝島"라고 하는 조그마한 섬이 보이는데
현재는 매립되어 육지와 붙은 섬이 아닌 섬이 되었고, "해양대학교"가 자리잡고 있더군요.
그리고 동양 최대의 해양박물관이라는 "국립해양박물관"도 보이는군요.
"조도"는 "영도"와 함께 '부산항'의 천연방파제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봉래산 둘레길]
다시 [봉래산둘레길]을 10여분 진행하면...
'영도구 청학동'에서 '동삼동'으로 들어 갑니다.
['고신대 영도캠퍼스' 뒷길]
"고신대학교 영도캠퍼스"를 만나는데 예전 1980년까지는 "고려신학교"였었죠.
[고신대]는 캠퍼스가 '부산 영도' '부산 송도'에 있고, '천안'에도 캠퍼스가 있답니다.
[사거리] 12:53~12:56 ★ 길조심 ★
[고신대] 울타리가 좌측으로 90도 꺽어지는 곳에 이정표가 있는 사거리가 있습니다.
여기선 이정표에 [←목장원] 방향이라고 가리키는 좌측으로 방향 전환하는게 [태종대]로 가기 쉽습니다.
[남파랑길]은 아직 정립된 길이 없기 때문에 어느 길이 바른길이라고 할수는 없습니다.
[영도 影島]는 삼국시대부터 명마를 사육하는 말목장이었답니다.
그리고 조련된 말들이 무지 빨리 달려 말의 그림자가 따라 가지 못할 정도여서 한자로 "節影馬"라고 했는데
"節影馬"를 기르는 섬이라고 "節影島"라고 불리워 지다가 줄여서 "影島"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정표에 나와 있는 [목장원]은 부산에서 제일 큰 음식점 중에 하나라는데
'영도'의 서쪽 [절영로]에 있는데 주로 '돌잔치' '회갑년'등을 하는 소갈비 등을 파는 음식점이랍니다.
[내림길]
잘 조성된 내림길을 5분 정도 내려 가는데, 이 곳이 "와치공원"이더군요.
['와치공원'] 1:01~1:03
"와치공원" 출입구에서 헤어졌던 횐님들을 기다렸다가 다시 만나고
['와치종합복지회관']
[와치종합복지회관] 앞으로 내려 갑니다.
"와치 臥峙"는 '임진왜란' 부산포 해전 때 이곳에 주둔했던 적의 기치를 끌어 눕혔다는데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던데...믿거나 말거나...ㅎ
['영도어울림문화공원'] 1:08
"영도구 동삼동 東三洞"은 '상리', '중리', '하리'의 3개 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이를 합쳐 '동삼동 東三洞'이 되었고, '영도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가장 큰 洞이랍니다.
그래서인지 '영도구'의 공공시설들이 이 부근에 움집해 있었습니다.
['동삼동' 통과]
'동삼동'의 [와치로]를 따라 15분여 내려 가면...
['조도' 조망] 1:23
"조도"가 성큼 다가오는데 예전에 바다였던 곳을 매립해 해양관련시설을 건립했더군요.
[점심식사] 1:27~2:07 (40분간 점심식사)
[목천돼지국밥]이라는 음식점에서 부산의 토종 음식인 "돼지국밥"을 먹었습니다.
"돼지국밥'은 한마디로 '6.25 전쟁'이 낳은 음식인 셈이죠.
부추무침과 소면을 함께 국밥에 넣어 먹는게 특징이라면 특징.
먹을 것이 부족하던 그 시절에 값이 싸면서도 든든한 돼지국밥은
가난한 피난민들의 배를 채워 주었고 영양을 보충해 주었다는데,
오늘은 [남파랑길]에서 별미 특식으로 쐐주와 함께 즐겼는데 여행의 참맛을 느끼는 귀한 점심식사였습니다.
['동삼동' 통과]
'돼지국밥'과 소주...또한 「구름나그네님」이 주신 맛술이 더해져
도보여행길에서 접하는 흥겨운 특별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이제부터 [태종로]를 진행합니다.
5분여 [태종로]를 진행하면...
['해양대' 입구] 2:13
"한국해양대학교" 입구를 만나는데, 입구 우측에 "동삼동패총전시관"이 있더군요.
신석기시대 조개 무덤을 전시하고 있다는데 지금으로부터 8천년 전부터 4천년 전까지 약4천년 동안
만들어진 패총이라고 합니다.
['태종대' 가는 길]
[태종대]로 가는 외길인 [태종로]를 10여분 더 진행하면
['태종대 온천 찜질방'] 2:25
나이 좀 드신 여성들이 좋아할 [태종대 온천 찜질방]을 만나고
['태종대앞 교차로'] 2:28
이어서 [태종대 앞 교차로]에 도착합니다.
교차로에는 "순직선원위령비"가 있고
['태종대' 입구]
['태종대 안내석'] 2:30
"태종대 太宗臺"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주변 환경은 완전 깨끗하고 아름답게 조성되었습니다.
['태종대 순환로' 입구] 2:35
[태종대]를 한바퀴 돌아 나오는 순환로가 있는데, 순환로의 길이는 4.3km라고 합니다.
걸어서 다녀 올수도 있고, 우측에 있는 [다누비 열차]를 이용해 순환할수도 있더군요.
['다누비 열차' 타는 곳]
걸어서 [태종대]를 둘러 볼수 있지만 이번 기회에 [다누비 열차]를 타 보는 것도 좋은 체험이라
[다누비 열차]를 타고 [태종대]를 돌아 보기로 했습니다.
[다누비 열차]는 순환로에서 세 곳에 정차하는데, [태종대전망대]와 [영도등대] 그리고 [태종사]이더군요.
그리고 승차권을 한번 끊으면 각 승하차장에서 내렸다가 구경하고 그 다음 [다누비열차]를 다시 타고
계속 이동할수 있더군요.
['다누비열차'] 2:42
[다누비열차]를 타고 10여분 진행하면 ...
['태종대전망대' 승하차장] 2:51~2:57
첫번째 승하차장인 "태종대전망대"에 도착합니다.
['태종대전망대']
"태종대 전망대"는 민간 자본으로 건설되었다고 하며 전망대와 음식점, 커피샵, 편의점등이 있는데
오늘은 휴업 중이더군요.
['모자상']
[전망대] 앞에는 "모자상 母子像"이라고 하는 조형물이 있는데
'6.25'이후 1970년대에 삶에 지쳐 자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이 "모자상"을 설치하게 되었답니다.
실제 이 조형물을 설치하고는 자살하는 사람들이 확 줄었는데, 대신에 [영도다리]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었답니다. 이래 저래 세상과 이별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그 시절을 회상해 봅니다.
[전망대]
태평양이 훤히 펼쳐지는 전망대로 나가서 조망을 합니다.
['주전자섬' 조망]
[태종대 전망대] 바로 앞에는 "주전자섬 (生島, 유분도 鍮盆島)"이 있습니다.
주전자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글쎄
그리고 일본의 "대마도"가 여기서 56km 거리에 있어 맑은 날에는 잘 보인다고 하는데
오늘은 흐린 날씨로 아쉬움만 가득 태평양에 퍼져 나갑니다.
'서울 북한산'에서 '수원 광교산' 정도 되는 거리일텐데....
['대마도' 조망도]
[태종대전망대]에 있는 "대마도 조망 안내도"인데, 조망안내도에는 [대마도]가 잘 보이지만
오늘은 흐린 날씨로 아쉬움만 가득합니다.
['자살바위']
전망대 앞 절벽 아래엔 [자살바위]가 암울했던 시절을 부서지는 포말과 함께 회상하고 있습니다.
'6.25전쟁' 때에는 말할것도 없고 1970년대에도 한해에 30여명이 이곳에서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망대가 있는 이곳에 자살을 예방하기 위해 "구명사 求命寺"라는 절을 천막 형태로 짓고
자살을 막고 고혼을 추모했는데, 그 후 1969년 해안작전도로 개설 시에 순직한 육군 제1203 건설공병단
장병 네 사람의 영령을 봉안하기 위해 지난 1976년에 군 지원으로 이곳 천막형태의 "구명사"를 철거하고
전망대에서 태종대 입구 방향 중간쯤에 새로이 번듯한 "구명사"를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다음은 "구명사"에 있는 "구명사 창건 비화"인데 인용합니다.
1959년 여름, 영도 신선동에 살고 있던 정영숙(鄭英淑)은 군에서 제대한 남편이 병환으로 사회활동이
어렵게 되자 생계수단으로 수목이 울창한 태종대 전망대 절벽 위 모퉁이에 작은 가게를 차려
소풍객들을 상대로 사이다 과자류를 판매하면서 틈틈이 남편의 쾌유를 위해 절벽 아래 생도(生島)를
미륵불 삼아 불심을 다해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당시는 6.25 동란 직후라 피란민들과 이산가족들로 인해 다양한 사회적 혼란이 지속되던 힘든 시절이라
현 전망대 아래 절벽으로 몸을 던지는 자살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어느 해에는 30여명이 바다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바람에 사회적 큰 문제가 되기도하여 이곳을 자살바위라고 부르기도 했다.
매일 새벽 절벽 위 모퉁이 가게로 출근하던 정영숙은 동틀 녘 절벽 위에 거지런히 벗어둔 신발을 보곤
섬뜩함을 느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안 되겠다 싶었던 정영숙은 절벽 바위를 찾은 사람들을 살피다
자살을 하러 온 듯한 사람이 보이면 그들의 애달픈 사연을 들어주며 '자살 시도자'들의 결심을 돌리게
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다 보니 마침내 '자살바위에 신들린 사람'이 되었다.
1961년 어느 여름날, 극약을 먹고 바위에 쓰러진 처녀를 업고 와 비누를 갈아 먹여 위장의 내용물을
토하게 하고 죽을 쑤어 먹여 살려놓았다. 그랬더니 "아주머니가 고마워 이 곳을 떠날 수가 없다"라며
20일 가까이 함께 가게를 돌보며 부처님께 합장을 올린 일도 있었다.
처녀는 서울의 명문 여대 재학생 실연의 아픔을 이기지 못해 이곳을 찾았음을 서울로 돌아간 뒤 보내준
편지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이 편지 서두는 "바다 밑 이름없는 조개껍질이 되었을 저를 구해주신
아주머니께"로 시작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실직한 가장의 눈물도 보았고, 의부(義父)의 학대에
몸서리치는 여공의 슬픈 사연도 들었다. 그렇게 정영숙의 설득으로 발길을 돌린 이가 한해 15~20여명이
되니, 십여년 동안 150여 명은 족히 넘는 목숨을 구제하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자리한 지 3년 후, 지성이면 감천이지 남편도 건강을 회복하여 가정이 안정을 찾자,
이 곳에 절을 지어 불행한 사람들을 돌보기로 결심하고 가게 일 틈틈이 돌을 모아 담장과 울타리를
쌓기 시작했다. 조금씩 돈이 모이면 시멘트도 바르고 인부를 사서 슬레이트 지붕도 올렸다.
마침내 1968년 움막 같은 절이 완성되었고, 부산 청룡사(靑龍寺)에서 스님도 모셔왔다.
그리고 생명을 구원하고, 고혼을 달래기 위해 불사를 일으킨 곳이라고 하여 '구명사(救命寺)'라는
작은 현판도 달았다.
그러나 태종대 해안도로 공사가 시작되면서 1970년 철거가 되고 말았는데 때마침 도로공사작업 중
발파작업 사고로 육군 제1203 건설공병단 장병 네 분이 순직하는 일이 벌어져 이 분들의 영령을
봉안하는 일이 큰 화두가 되자 육군 공병단에서 지원하여 1971년 10월에 현재의 장소에다
새로이 절을 건립하여 4분의 영령을 봉안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살로 이승을 하직한 사람들도 함께
명복을 빌어드리는 축원을 올리기 시작하였는데 그러한 공덕이 쌍여 오늘날에 와서는 부모형제 등
가족을 떠나보낸 이들이 조상을 극락으로 이끄는 제를 올리는 명당으로 불리는 곳이 되었다.
특히 구명사는 산신각, 천불전의 현판 글씨와 돌에 새긴(서각) 절 표지석 이 세점은
모두 일봉 서경보 스님의 글씨이다.
- 글쓴이 영도구 문화관광 자문위원 姜太仁 -
['영도등대' 승하차장] 2:59
[태종대전망대]에서 [영도등대 입구]까지는 200m로 잠깐이면 걸어 갈수 있어 [다누비열차]를 타지 않고
2분 정도 걸어서 갑니다.
[등대 출입구] 3:00
[영도등대 출입구]를 통과해 내려 가면...
[계단 내림길]
계단 내림길이 이어지며
['해기사 명예의 전당']
먼저 "해기사 명예의 전당"이 계단 중간에 있습니다.
** "해기사 海技士"는 일정 수준의 기술 또는 기능이 있어 선박의 운용과 관련하여 특정한 업무수행을
할 수 있도록 면허받은 자격, 또는 그 자격을 가진 자를 말함.
[등대 조망]
[해기사 명예의 전당]에서 [영도등대]를 조망하고
[계단 내림길]
['바다헌장']
계단 내림길을 내려 가면 [바다헌장]과 조형물이 있고
['무한의 빛' 조형물]
이어서 "무한의 빛"이라는 조형물이 내방객들을 기다립니다.
이 조형물은 "해양도시 부산, 나아가서는 대한민국이 세계로 뻗어나갔으면 한다."라는 염원을 담았다고
['태종대']
바다 속에서 긴 세월 동안 퇴적되 만들어진 퇴적암들이 지각변동으로 융기하여 형성된 바위 지층들.
수많은 세월 동안 파도에 침식되어 부산의 대표적 지질공원을 이루고 있는데...
"태종대 太宗臺"의 위치는 [태종산]이 있는 [영도]의 남쪽 끝 해안 절벽 전체를 포괄적으로 일컷지만
그 중에서도 실제 "태종대 太宗臺"는 어디일까?...궁금하지 않나요? 그래서 심층 조사를 했습니다.
'신라 29대 왕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활을 쏘며 쉬어 갔다고 하는 바위가 사진 속에 수십명이 앉아도 될
평평하고 넓직한 바위가 실제 "태종대 太宗臺"랍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바위는 "망부석 望夫石"이라고 하는 바위인데
옛날 왜구에게 끌려 간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던 어느 여인이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눈보라가 치건
땡볕이 내리쬐건 굴하지 않고 일본 땅이 아련하게나마 보이는 이곳에서 돌처럼 서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돌덩이로 굳어 버렸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런 전설을 따라
이 바위를 남편을 기다리는 "망부석 望夫石"이라 일컫게 되었답니다.
"신선대 神仙臺, 神仙岩"
예전에는 [태종대]를 [신선대]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신선이 머물만한 아름다운 경치를 가졌기 때문인데
옛날 神仙이 바로 이 바위 위에서 도끼자루가 썩는 줄 모르고 느긋하게 앉아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또한 이곳 [신선대]는 선녀들이 내려와 놀고, 아이를 낳기도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답니다.
바위에는 아이의 태를 끊는 가위와 실패의 흔적, 그리고 출산한 선녀의 오른쪽, 왼쪽 무릎이 닿은 흔적도
남아있다고 하는데, 오른쪽 무릎에 힘을 더 주었기 때문에 오른쪽 흔적이 더욱 선명하다고 하는군요. ^.^
신선 선녀들이 사랑을 하며 아이까지 낳던 바위여서 지금도 순산을 기원하는 산모들이 찾는다고...ㅎ
['영도등대 해양문화공간']
"영도등대"는 일제강점기시절에 만들어져 세계로 뻗어 가는 '부산항'의 길잡이가 되어 왔답니다.
지금은 불빛이 아닌 첨단 과학기술로 선박운항을 돕는 "영도 항로 표지 관리소"로 변모했답니다.
그리고 관광객들을 위해 등대 시설, 예술 작품 전시실, 자연사 박물관 등 다양한 문화공간도 설치했더군요.
자연사박물관에는 이 근처에서 발굴했다는 공룡알 공룡발자욱등도 있고
['영도등대 선착장']
항로표지소 아래 해변엔 배처럼 생긴 건물이 눈길을 끄는데, [태종대 관광유람선 선착장]이었습니다.
['태종대']
"태종대"의 핵심 "태종대"라고 하는 "태종대 바위와 망부석, 신선대"...그리고 "주전자섬"...
진짜 "太宗臺"가 펼쳐집니다. '대마도'까지 보였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
['희망의 빛']
[영도 항로 표지 관리소]에는 "희망의 빛"이라는 조형물이 있는데 인어상이었습니다.
물고기 비늘 모양 그물 팬티스타킹만 입고 옷을 벗고 있어 오늘처럼 바람이 심한 날에는 춥겠군요.ㅎ
반드시 옷 벗은 여자가 횟불을 들어야 "희망'을 주는가? ~ ㅎ 예술이라 믿겠습니다.
['등대자갈마당']
관광 유람선 선착장에는 해삼 멍게에 소주도 팔고...
오늘 바람이 좀 심해 유람선이 운행을 못해서 손님이 없는데,
우리 횐님 중에 몇분은 내려 가서 기여코 소주에 해삼 멍게를 맛보고 올라 오더군요. ㅎ
이곳이 "등대자갈마당"이라고 하는데, [태종대]에는 '자갈마당'이 세군데 있다는군요.
['자갈마당' 각 위치]
[태종대]엔 '자갈마당'이 이곳 [등대자갈마당]과
그리고 [태원자갈마당]...오늘 마지막 종점이 될 [감지자갈마당]이 있답니다.
['오륙도''해운대' 조망]
[영도등대]에서 바라보는 [오륙도]와 [해운대]방향입니다.
['태종대']
"무한의 빛"이라는 조형물과 "주전자섬"..그리고 "태종대"와 "망부석"..."신선대"
사람들 중에는 "무한의 빛"이라는 조형물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더군요.
천혜의 자연 경관을 뽐내는 "태종대-망부석-신선대"와 "주전자섬"에 어울리지 않는 뜬금없는 조형물이라는
분들도 있고, 그런데로 독특하다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파란문'의 생각은 어떻냐구요? ㅎ 언급 않겠습니다. 감상은 자유니까요 ~
하지만 이런 명승지에는 명승지에 어울리는 조형물을 설치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ㅎ
['영도등대' 승하차장] 3:23~3:37
약 25분 정도 "영도등대"를 둘러보며, 실제 "태종대"를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다누비열차] 승하차장으로 돌아가 [다누비열차]를 타고 원점 회귀했습니다.
['다누비열차' 승하차장] 3:45
[영도등대]에서 8분 정도 [다누비열차]를 타고 [태종대입구 승하차장]으로 돌아 갔습니다.
['태종대 입구 관광안내소'] 3:48
[태종대] 입구 [관광안내소]를 통과하여 주차장으로 가면...
['태종대 주차장'] 3:50
[태종대주차장] 서쪽으로 "감지해변"이 있어 다녀 오기로 합니다.
다음 구간으로 연결되는 [감지해변]인데 요즘 [갈맷길 개량공사]로 연말까지 출입 할수 없다고...
그래서 다음 구간은 [중리해변]에서 시작한다는 산악회장의 안내가 있어서 다녀 오는 것입니다.
['감지해변' 입구] 3:52
['감지해변 자갈마당']
['부산 남항' 방향 조망] 3:54
"감지해변 甘池海邊"
[영도]는 우리나라 名馬를 키우는 國馬場이었다는 것과 이곳에서 자란 말들은 '자기 그림자보다 빨리 달려서
絶影馬'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는 것은 [삼국사기]등 여러 고문서에 기록으로 나와 있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자라는 말들이 더욱 빨라질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는데, 여러 이유 중에서 하나는...
이 지역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의 물이 맑고 달콤하여 [영도]에서 방목되는 말들이
목이 마르면 가서 그 연못의 물을 먹었답니다. 그리하여 그 연못의 이름이 "감지 甘池"가 되었고
[영도]에서 방목되는 말들이 이 물을 마시고 絶影馬가 되었으며, 그후 이 섬의 이름까지 絶影島→影島가
되게 했으니 이 "감지해변 甘池海邊"의 "감지 甘池"가 주는 의미는 크다 아니할수 없겠습니다.
[영도등대 자갈마당]에서도 언급 했습니다만, 이곳도 [태종대]의 "자갈마당' 세곳 중에 한곳.
[부산항] 밖에서 정박하고 있는 대형 선박들이 엄청 많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남파랑길-영도 태종대구간]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올라가 버스를 타고 귀경했습니다.
오늘 걸은 거리는 [다누비열차] 거리 포함하여 13.4km였으며 4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태종대 항공사진']
마지막으로 [네이버지도 항공뷰사진]을 캡쳐하여 이해하기 쉽게 편집도 한 "태종대"입니다.
엄청나게 큰 거북이 한마리가 태평양을 향해 느린 헤엄을 치는 듯한 "태종대"는 이렇게 보아야
그 진면목이 보이는듯 하군요.
또 다시 기회가 오려는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온다면 관광 유람선을 타고 "태종대"를 바다에서 보고 싶군요.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Saddle The Wind - Lou Christ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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