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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옛길-삼남길]을 따라서... '진위면사무소'에서 '오산천교'까지 답사기 진위면사무소-진위향교-흔치휴게소-작은덕암산-원균장군묘역-팔용담저수지- 옥관자정-평택소사벌아파트단지-배다리저수지공원-대동법기념비-안성천교 서풍이 부는 날 오준영 작사 작곡 장미화 노래 어느날인가 서풍이 부는 날이면 누구든 나를 깨워주오 무명 바지 다려입고 흰 모자 눌러 쓰고 땅콩을 주머니에 가득 넣어 가지고 어디론가 먼 길을 떠나고 싶어도 내가 잠 들어 있어 못가고 못보네 그래도 서풍은 서풍은 불어 오네 내 마음 깊은 곳에 서풍은 불어 오네 아~ 아~ 아~ 서풍아 불어라 불어라 [구글지형맵] '경기도 평택시 봉남면'에 있는 "진위면사무소"에서 출발하여 "진위향교"를 구경하고 "쌍령지맥"이 지나는 "흰치고개"로 올라 "쌍령지맥 마루금"을 따라 "작은덕암산"을 오르고 "원균장군 묘역"을 둘러 보고 "옥관자정""평택소사아파트단지"를 통과하여 "대동법시행기념비"를 지나 종착지인 '경기도 평택시 유천동'에 있는 "안성천교"로 갑니다. GPS로 측정된 거리는 21.7km였습니다. ['진위역'] 9:28 2016년 10월 7일 (금) 흐림 [전철 1호선]을 타고 "진위역"에 내려 [1번 출구]로 나가면 정면에 육교가 보입니다. 육교로 올라 가서 뒤돌아 본 "진위역"이고 ['진위면사무소' 방향 버스정류장] "진위면사무소"로 가는 시내버스 정류장은 }진위역" 앞 육교 건너편 삼거리에 있으니 유의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곳엔 버스정류장이 여러곳 있기 때문입니다. "진위면사무소"로 가는 시내버스는 25분~40분 간격으로 비교적 자주 배차되고 있으며 [6번] [6-1번] [8번] 중에 먼저 오는 버스를 타면 되겠습니다. ['진위면사무소'] 9:38 "진위역"에서 5분 정도 걸려 "진위면사무소" 앞 삼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진위면사무소"에 얽힌 유래에 대해선 지난 답사기에서 알아 봤으니 바로 다음 구간을 이어 진행합니다. "진위향교"로 가는 길은 "진위면사무소" 앞에서 우측으로 이어지는 골목을 따라 가더군요. [골목길] "진위면사무소"에서 골목을 따라 5~6분 진행하면... ['진위향교'] 9:46~9:50 "진위향교 振威鄕校"를 만납니다. 옛날엔 '평택'이 "진위현" 관할이었답니다. 다시 말해 현재 '평택시'의 진원지가 "진위"라고 하는군요. 하지만 화려했던 옛 명성은 사라지고 옛 유적지만 쓸쓸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향교'이니 특별한 것은 없어 휭하니 둘러 보고 갑니다. ['진위향교'] "진위향교"에 대해선 위의 안내문을 참고 하시고... ['진위천' 건넘] 9:50 "진위향교" 정면에 "진위천"이 흐르고 있으며 [삼남길]은 "진위천"을 건너 갑니다. "진위천"은 "쌍령지맥"의 북쪽 水界이고 남쪽 水界는 "안성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진위천"을 여기서 건너 "쌍령지맥"을 넘고 "안천천"으로 가는 것입니다.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진위천' 둑방길] 9:52 "삼봉 정도전선생"의 후손들인 "봉화 정씨"들이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신대마을'에 많이 산다고 합니다. 안내판에는 "정도전선생"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사실 이 마을이 "정도전선생"하고 직접 관련이 있는 마을은 아니고 그 후손들이 살고 있을 뿐인데, "정도전선생"과 무슨 관계가 있는양 언급하고 있습니다. 할 얘기도 무지 없는가 보군요. ㅎ 바로 앞에 있는 삼거리에서 이정목이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라고 알려 줍니다. ['마산리' 가는 길] 9:53 오늘도 지긋지긋하게 농로를 걷는 [삼남길]이 이어 지는군요. [경기옛길-삼남길]은 농로 개천갓길 등산로등 '옛길'과는 관계없는 "新作路". 6분여 농로를 진행하면... ['306번지방도' 횡단] 9:59 [306번지방도]를 건너서 건물 뒤로 나있는 골목길 들어 가서 4분 정도 진행합니다.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마산리'로 들어 가는 것입니다. [삼거리] 10:03 삼거리를 만나 좌회전하고 [삼거리] 10:04 이어서 바로 다시 삼거리... 좌측으로 150m 정도 올라 가면 [쉼터] 10:06~10:13 (7분간 휴식) 12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있는 정자 쉼터를 만납니다.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마산리'인데 "마산4리"의 입구라는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더군요. 여기서 간단한 아침식사와 휴식을 취하고 출발합니다. ['마산리' 마을 통과] 정자 쉼터에서 진행방향으로 [마산4리 입구 삼거리]가 보이는데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가야하니 길조심을 해야 하고 ['부부화가네' 가는 길] 5분여 도로를 진행하면.... ['부부화가네'] 10:19 "부부화가네"라는 집을 지나 갑니다. ['수촌마을' 입구 사거리] 10:20 ★ 알고 가야하는 삼남길 ★ "부부화가네"라는 집을 지나면 바로 [317번지방도]가 지나는 사거리를 만납니다. 여기서 길을 선택해야 하는데 [삼남길]은 직진하여 "수촌마을"을 통과하여 앞에 보이는 산줄기 숲길로 이어져 있습니다. 저는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하고 시간 단축을 위해 좌측 도로로 진행하는데... 다음 '구글어스'를 보시면 [구글어스] [현위치 1]이 윗 사진의 "수촌마을 입구 사거리"인데 저는 도로를 따라 시간 단축을 했습니다. 10여분 후에 [삼남길]과 다시 만납니다. ['317번지방도' 고개 조망] "수촌마을 입구 사거리"에서 좌측 도로방향을 바라보면 [삼남길]과 다시 만나는 고개가 조망됩니다. 이 도로를 따라 저 고개까지 10분 정도 올라 가면... [고개 - 동물이동통로] 10:31 동물이동통로를 설치한 고갯마루를 만나고 [구글어스] ['현위치2' 지점] 10:35 고갯마루 동물이동통로를 통과하면 구글어스의 [현위치 2] 지점이며 [삼남길]과 다시 합류하여 진행하게 됩니다. 이 도로를 따라 4분 정도 내려 가면... ['지산동 사거리'] 10:39 신호등이 있는 "지산동 사거리"를 만나는데 대각선 방향으로 건너 가서 진행합니다. ['흰치고개'로 올라 가는 길] "지산동 사거리"를 대각선으로 건너 잠시 올라 가면 [갈림길] 10:44 ★ 길조심 ★ "남부전원교회 주차장 입구"라는 안내판이 있는 곳을 만나 우측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저 앞에 "흔치쉼터"가 있는 고개가 조망되는데 저곳으로 우측 길을 이용해 올라 가게 됩니다. 그리곤 좌측에 보이는 동물이동생태통로가 있는 "흰치" 고갯마루로 진행하게 됩니다. 여기서도 "흔치쉼터"를 들리지 않고 바로 도로를 따라 "흰치고개"로 갈수 있습니다만 "흔치쉼터"는 중요한 곳이므로 들리는게 좋겠다고 생각되어 "흔치쉼터"로 진행합니다. ['흔치쉼터'로 가는 길] "흔치쉼터"로 가는 길은 좌측길이고 ['흔치쉼터'로 가는 길]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5분 정도 올라 가면.... [삼거리] 10:50 변경되기전의 [삼남길]과 다시 만나는 삼거리에 도착하여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흰치고개'] "쌍령지맥" 마루금이 지나는 "흰치고개(흔치고개)"를 만나는데 저에게는 추억을 일깨워주는 그런 고개입니다. ['흔치휴게소'] 10:53 "흔치(흰치고개)"에는 제법 큰 휴게소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 800m 지점에 "국제대학교"와 "은혜중고등학교"가 있기도 하고 그러니까 "송탄"의 중심부가 가까이 있는 곳이라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건강산책코스라고 합니다. ['흔치휴게소'에서 바라보는 '쌍령지맥'] [삼남길]은 [덕암산 정상 3.1km →] 방향으로 갑니다. "흔치휴게소"에는 수돗물, 화장실등 편의시설이 있고 ['덕암산' 방향] 10:54 "덕암산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그런데 이 고개의 휴게소 이름은 "흔치휴게소"인데, [삼남길] 안내판에는 "흰치고개"라고 안내합니다. 아마 "흔치"는 이 지방 방언인듯... [쉼터] 11:00 "흔치휴게소"에서 잠시 봉우리를 오르면 쉼터가 있고 ['힌치고개'로 내려 가는 길] 이어서 다소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 가면 ['흰치치고개' 동물이동통로] 11:02 [317번지방도]가 지나는 "흰치고개"에 설치되 있는 동물이동통로를 건너 갑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지나 다니는...ㅎ ['쌍령지맥' 마루금] "쌍령지맥" 마루금이 지나는 능선을 진행합니다. 이곳은 제가 2012년 2월 19일에 답사 한바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쌍령지맥 산행기"를 참고 하세요. 고도차가 거의 없는 "쌍령지맥 마루금"을 따라 15분 정도 진행하면... ['자작나무' 군락지] 11:17 요즈음 산에서는 보기 어려운 "자작나무 군락지"를 즐겁게 만나고 [삼거리 1] [삼거리 2] 이어서 삼거리를 두군데 만나는데 [삼남길]은 모두 우측으로 안내 합니다만 "작은덕암산" 정상을 오를려면 두번째 삼거리에선 반드시 좌측길로 가야 합니다. 오르는데 큰 어려움은 없으니 정상을 밟고 가야겠죠? 우측 [삼남길]은 "작은덕암산"의 정상 우회로입니다. ['작은덕암산' 정상] 11:23 "작은덕암산 " "준.희씨"의 "쌍령지맥 안내판"에는 높이가 162.9m라고 표기되고 있고 "서래야 박건석씨"의 "작은덕암산 안내판"에는 높이가 164m로 표기되 있습니다만 국토지리원 1/25,000 지도에는 "162.9m"로 표기되 있으니 참고 하시고... "큰덕암산"의 높이가 "164m"이더군요. "준희님""서래야 박건석씨"는 정맥 지맥을 다니시는 분들에겐 매우 고마우신 분들이지요. 사비를 들여 이런 안내판을 설치하며 길안내를 해 주기 때문입니다. "준.희님"은 본명이 "최남준"씨로 아내와 사별한후 아내의 이름 끝자인 "희"를 자신의 이름 끝자에 붙여 "준*희"로 자신의 이름을 표기하는 아내사랑이 이만저만이 아닌 烈夫랍니다. 부산에 거주하시는데... '그대와 가고 싶은 山 그리움으로 솟아 나고 ... 그리움. 보고 싶은 마음! ' 산길을 걸으면 그의 표지기도 볼수 있는데 표지기엔 아내를 사모하는 이런 글귀도 눈길을 끕니다. "서래야 박건석씨"는 6,200산을 오른 산행매니아이죠. 무명봉에 산이름을 찾아주는 분으로 "월간 산"에도 기획기사로 등장했던 유명한 분이시죠. "서천"의 쌀 브랜드가 "서래야"이죠? 참고로 "덕암산 정상"을 보여 드리면 [21012년 2월 19일에 '쌍령지맥'을 종주하며 촬영한 사진] 이곳 "작은덕암산"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덕암산 德岩山 164m" 정상의 모습입니다. ['작은덕암산' 내림길] "작은덕암산"에서 "쌍령지맥 마루금"을 5분여 내려가면... ['원균장군 묘' 갈림길] 11:29 "원균장군묘" 방향 이정표가 있는 사거리 고개에 도착합니다. "쌍령지맥"은 여기서 좌측으로 갑니다만, [삼남길]은 직진해 고개를 넘어 내려 갑니다. 예전에도 있던 "원균장군묘 안내판"이 그대로 있는데 거리가 [0.6km]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삼남길 이정목]에는 [1.94km]라고 하는데, 제가 직접 걸으며 GPS로 측정된 거리는 [1.94km]에 가까웠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내림길] 10여분 완만한 내림길을 내려 가면... ['137.4m봉' 앞 밴치쉼터] 11:40~11:52 (12분간 휴식) "137.4m봉" 앞에 있는 쉼터 의자를 만나는데 우측길은 "137.4m봉" 우회로이며 [삼남길]입니다. [삼남길]은 대부분 정상을 밟지 않고 우회로를 이용하더군요. 여하튼 여기서 휴식을 취하고 갑니다. [내림길] 다시 내림길을 6분여 진행하면 [조망] 11:58 시원하게 조망이 트이는 곳이 나오는데 '평택시 도일동 내리'가 조망됩니다. "원균장군묘"는 앞 어딘가에 있을텐데 ...아직은 어딘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림길] 산길을 조금 내려가 마을로 접어 들면... ['도일동 내리' 마을길] '도일동 내리' 마을길을 진행하고 [삼거리] 12:05 이어서 삼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으로 안내 됩니다. 우측 고개로 올라 가면... ['원균장군 사당' 조망] 12:08 고갯마루에서 "원균장군 사당"이 조망됩니다. ['원균장군' 사당] 12:11 "원균장군 사당" 임진왜란이라는 역사 속에서 "이순신장군"과 늘 함께 등장하는 "원균장군" "원주 원씨"는 중국 당나라 때에 고구려에 파견한 8학사 중에 한명인 "원경"이 시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중국사람이 시조인거죠. 우리나라 성씨의 대부분이 그렇지만... "원주 원씨"는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문과 급제자 60명, 무과 급제자 136명을 배출했답니다. ['원균장군 묘' 조망] "원균장군 사당"에서 "원균장군 묘"를 조망하고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 갑니다. "원균장군 사당"과 "묘"는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데, 원래는 사당이 묘 옆에 있었답니다. 그런데 사당 주변에 물이 나고 건물이 낡아서 옮겼다는군요. [읽어 보고 가야할 안내판]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한 원균장군"이라는 안내판을 지나게 되는데 이 안내판을 자세히 읽어 보시기 바람니다. "역사적 재평가?" 저는 재평가를 할께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확실히 알려 주면 자연스럽게 "원균장군"의 역사적 지위가 재평가 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우리나라는 "역사적 사실"을 감추거나 왜곡하는 경우가 너무 많이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특히 군인들에 대해서 '군사쿠데타정권'들에 의해 자행된게 많다고 생각 됩니다. "이순신장군"을 영웅화 하는 과정에서 "원균장군"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고 생각되는데 지금부터 "이순신장군의 허상""원균장군의 실상"을 나름대로 핵심 포인트만 골라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허상과 실상을 알아 보기 위한 노력이지 장군들을 폄하하거나 추겨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고, 이러한 관점은 각자 다를수도 있으니 옥신각신 할 필요까진 없고 참고만 하시기 바람니다. ['원균장군 묘역' 입구] 12:15~12:22 "원균장군의 묘소"는 처음 보는 분들이 많겠지만 생각보다 대단한 규모이죠? 모두들에게 '이순신장군'은 위대한 우리민족의 영웅으로 각인되 있는데, 英雄도 모자라 聖雄으로 ㅎ 그와 대비되는 '원균장군'은 일반적으로 '이순신장군'을 시기하고 미워한 나쁜놈으로만 알고 있지요? 그렇습니까? 맞아요? 하지만 역사를 아시는 분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겁니다. "원균장군"은 "이순신장군"보다 다섯살 위의 대고참 군인이었습니다. "원균장군"이 요즘말로 ☆장군이 되어 북쪽의 오랑캐들을 무찌르며 전과를 올릴 때에 "이순신"은 미관말직의 이름없는 군인이었습니다. '23전 23승'에 빛나는 '이순신장군'을 폄하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존경합니다. 단지 "원균장군"에 대한 인식이 너무 왜곡되 있어 부득이 비교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선생'과 '원균장군''이순신장군'은 현재의 '서울 종로구 인현동'에 살았는데 요즘 '오장동 냉면집 거리'로 유명한 곳 쯤에서 살던 이웃들이었습니다. 그런 연고로 "이순신"은 '영의정 유성룡'의 천거에 의해 하루 아침에 7계급 특진을 하여 "전라좌수사"에 오르게 되는데, 군대 대선배인 "원균장군"과 같은 계급의 "이순신"이 낙하산 인사로 임명되니 "원균장군"이 "이순신"에 대해 마땅하게 생각하지는 않았겠지요? 당연 그렇겠죠? 하지만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였던 "원균장군"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된 "이순신장군"을 무시하지 않고 때마침 터진 "임진왜란"에 함께 협력하며 초창기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경상우수사 원균장군'과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이 힘을 합쳐 '옥포해전'에서 적함 26척을 격침시키고, 이어서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사천포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한산도대첩,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등에 참전하여 "이순신장군"과 함께 일본 수군을 무찔렀습니다. 그런데도 왜? 역사는 "이순신장군" 만을 부각시키고 "원균장군"은 역사의 그늘에 서게 했을까요... ['원균장군 묘' 전면] {'원균장군' 뒤에서 조망] 그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선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원균장군"과 "이순신장군"의 사이가 언제부터 악화되었는지... 그 원인은 무었인지를 알아 보아야 하겠지요? 위에서 언급한 '임진왜란' 초기의 海戰에서 "원균장군"과 "이순신장군"의 연합함대는 상호협력으로 왜군을 무참히 무찔렀습니다만 그들의 사이가 최악으로 가는 원인은 "장계 狀啓" 때문이었답니다. "狀啓"란 "지방에 파견된 관리가 중요한 일을 임금에게 글로써 보고하는 문서를 이르던 말"인데 군인들에겐 주로 "전투결과보고서" 였답니다. "원균과 이순신의 연합함대"가 적군을 무찌른 '전투결과보고서'를 함께 올리기로 약속했는데 "이순신장군"이 단독으로 "원균장군"의 이름을 빼고 자신의 이름으로만 상의없이 몰래 올렸던 것입니다. 물론 '이순신 함대'가 '원균 함대'보다 전과가 높았다는 것은 어느정도 인정합니다만... 전쟁의 공로를 "이순신장군" 혼자만(?) 차지 하려고 '경상우수사 원균장군'의 이름은 빼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 자기 이름으로만 전투결과 보고서인 "장계"를 임금에게 올렸고 이로서 "이순신장군"은 '宣祖'로부터 엄청난 칭찬을 받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참모총장인 "삼도수군절도사"에 오르게 되는데 "원균장군"보다 계급이 갑자기 높아지게 된것이죠. "원균장군"이 기분이 좋았을까요? 이빨을 갈 정도로 기분이 나빠졌겠죠? 이로써 "원균장군"은 '이순신'을 씹기 시작하는거죠. 이들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나빠지는 계기가 바로 "장계 狀啓" 사건이었답니다. 누가 곧고 옳은 인간일까요? '이순신장군' 일까요? ㅎㅎ 내용을 알면 '이순신장군'은 좀 거시기하죠? 여러분들이 "원균장군"이라면 "이순신"을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ㅎ ['원균장군 묘역' 입구 주차장과 "모선제"] 12:27 임진왜란 와중에 바다에선 선전했습니다만, 육지에선 쪽바리들의 위세는 더욱 강해져 우리나라 강토를 완전 점령하여 한양으로 치고 올라가니.... 비겁한 왕 '宣祖'는 한양과 백성을 버리고 북으로 북으로 몽진길에 오릅니다. 저만 살겠다고.... 아들 "광해군"에게 분임조라는 왕권행사를 일부 때어주며 나가 싸우라고 하고 저는 도망간거죠. 그러면서 이기적인 '宣祖'는 "이순신 장군"에게 쪽바리들의 핵심 거처인 "부산진"을 치라고 어명을 내립니다. "X도 모르는 놈이 탱자 보고 부랄~ 부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순신장군"은 '宣祖'에게 요즘 유행어로 하자면 "휘발유통을 메고 불속에 뛰어 드는 꼴"이라고 어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조선 水軍전체가 몰살 당한다고.... 소인배 '宣祖'는 노발대발 "어명을 어겨? 이 쌔끼! 사형 시켜!!"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순신장군"은 '삼도수군절도사'에서 졸지에 쫄병으로 강등 당하고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며 사형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순신'의 후임으로 "원균장군"에게 다시 휘발유통을 짊어 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졸지에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최고 자리에 앉혀진 "원균장군"도 현지에 내려가 상황을 살펴 보니 '이순신'이 왜? 어명을 어겼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산진' 침공을 이 핑개 저 핑개로 차일피일 미루었습니다. '원균장군"을 천거한 사람이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권율 도원수"였는데 자기가 천거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장군'이 출전을 하지 않고 어명을 어기고 있으니 난감했겠죠. 그래서 "원균장군"을 불러 가두고 태형을 가합니다. 곤장을 치는 것이었죠. 물론 '宣祖'의 지시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삼도수군절도사'를 '도원수'가 어떻게 매질을 해? 애휴~ 그리하여 "원균장군"은 어쩔수 없이 휘발유통을 메고 '부산진' 불속으로 뛰어 들어 조선수군 모두와 자신이 함께 활활 산화해 갔던 것입니다. '칠천량해전'이었습니다. '宣祖' 이 졸열한 왕은 어쩔수 없이 사형 시키려했던 감옥에 있는 "이순신장군"을 다시 '삼도수군절도사'에 앉히며 휘발유통을 메어 줍니다. 너덜너덜 걸레가 된 조선 수군과 함께.... 지난번 "인덕원"을 지나며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하는 과정에 인덕원에서 쉬어 갔다고 알려 드렸죠? 현장에 도착한 "이순신장군"은 마지막 海戰인 '명랑해전'에서 도망가는 쪽바리들을 죽여버리고 스스로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며 역사 속에서 사라 집니다. 전쟁이 끝나는 것을 알고 있었던 '이순신장군'은 살아서 가도 "선조"에 의해 어명을 어긴 것에 대한 처벌을 받을 것이 분명하기에 차라리 사라지겠다고 결심한것으로 저에겐 그렇게 보입니다. 저의 산행기를 보신 분들은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을 기억하시죠? "원균장군"과 "이순신장군" 그리고 "宣祖".... 누가 충신이고 누가 역적인가!!~~?? 누가 사형 당해 죽어야 하는가!! 과연 누가 역사 속의 인물인가? 왕은 자기 꼴리는대로 놀고 지랄해도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인가!! 전투에 대해선 X도 모르는 놈이 자기 꼴리는대로 이래라~ 저래라 할수 있는가~ 원인과 결과에 모든 책임이 있는 쪼다리 "선조"가 사형 당해야 하지 않나요? 정치 권력을 쥔 저급한 놈들의 무능과 오만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치가 떨리지 않나요?......... ['내리'] 사거리' 가는 길] [뒤돌아 본 '원균장군 묘'] '내리 사거리'로 나가며 뒤돌아 본 "원균장군 묘"입니다. "원균장군"의 후손이나 역사학자들이 "역사적 재평가"를 주장하는 이유를 나름대로 기술했습니다. "원균장군"이 시기와 질투의 화신인가... 해전 결과 공로를 홀로 독식한 "이순신장군"이 당당한 인간이냐... 전장에 나가면 패해 죽을게 불보듯 뻔하다고 어명을 거역하고 감옥행을 택한 "이순신장군"이 충신인가... 어명을 받들어 전장에 나가 장열하게 전사한 "원균장군"이 충신인가... 판단은 여러분 각자 알아서 해 주십시오.~~ 별도로 판단 할것도 없지만...ㅎ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순신장군"을 민족의 영웅으로 생각할까 "세종대왕"을 기리는 거리가 "세종로"이고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기리는 거리는 "충무로"인데 군사쿠데타 정권이 들어선 이후 "세종대왕"이 있던 "세종로"엔 "세종대왕 동상"이 없어지고 그 자리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었던 시절이 있었지요. 지금은 두분이 다 "세종로"에 서 있지만.... 이렇듯 정치권력에 의해 역사적 인물들의 우상화 영웅화가 시도 된것이지요. 요즘 역사교과서를 국정화 한다죠? 모두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순신장군의 허상"이라는 책을 펴낸 분이 있더군요. 다름아닌 '해군사관학교' 교수부장을 지낸 "임원빈교수"가 연구 결과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책이더군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책을 읽어 아는 그런 "이순신 장군"은 많은 부분이 "가짜 이순신"이라고... 특별히 기억 나는 글귀는 "오늘날 충무공은 무협지 주인공처럼 초인적 역량을 지닌 인물로 각인됐다" "허상을 걷어낸 '정론(正論) 이순신'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쉽게 말해 "이순신장군"에 대해 "뻥튀기가 너무 많다~"라는 것이죠. 그런데 '파란문' 생각은 그런 "뻥튀기 된 영웅"을 백성들은 오히려 더 갈망하는듯 하지 않습니까? 살기가 얼마나 어려우면 그런 "뻥튀기 된 영웅"이 나타나 허우적대는 수렁에서 자기들을 건저주기를 더욱 학수고대하는게 아닌가? 라고도 생각됩니다. "이순신장군"의 실상보다는 전지전능한 허상을 더욱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요즘같은 남북관계에선 더욱 현명한 정치지도자를 기대하듯... ['내리 사거리'] 12:32 '평택시 도일동 내리'의 "내리사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경기옛길-삼남길]의 [제9길 진위고을 길]이 끝나고 [제10길 소사원길]이 시작되는 곳이었습니다. 사거리를 직진해 건너가서 계속 직진합니다. ['VOLVO 건설기계자격시험장' 가는 길] "내리사거리"에서 7분여 도로를 진행하면... ['VOLVO 건설기계자격시험장'] 12:39 "VOVO 건설기계자격시험장" 정문 앞에 도착하고 [삼남길]은 좌측으로 이어 집니다. ['팔용담저수지' 가는 길] "VOVO 건설기계자격시험장" 정문 앞 좌측에 있는 이정목엔 "옥관자정"까지 "3km"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골목을 200m 정도 진행하면... [삼거리] 12:42 삼거리를 만나는데 좌측으로 방향을 잡고 4분 정도 더 진행하면 ['팔용담저수지'] 12:46 "팔용담저수지"를 만나고 저수지 둑을 지나가면... [공단길] ['302번지방도'] '평택시 도일동'과 '안성시 원곡면 내가천리'의 경계인 공단 골목을 통과하여 도로로 나가서 우측으로 조금 가면... [삼거리] 12:54 신호등이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에 "에코폐차장"이 있습니다. 여기서 횡단보도를 이용해 좌측 길로 가야 하더군요. 좌측 좁은 도로에는 레미콘 차량들이 수없이 다니며 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는데 "평택 신도시 건설 현장"에 레미콘을 공급하는 공장이 있어서더군요. ['송탄톨게이트' 옆 으로 가는 길] 폐차장 레미콘공장 건설자재공장등 먼지를 날리는 공장들과 차량이 공기를 더럽히고 있었고 갓길도 없어 위험하기도 한 길을 5분여 진행하면... ['송탄톨게이트' 진입로 아래 굴다리] 1:02 굴다리를 통과하게 되는데 [평택-제천간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송탄톨게이트] 날개 도로이더군요. ['평택종합물류단지'] 굴다리를 통과하면 대규모 평택물류단지가 펼쳐지고 ['송탄톨게이트' 옆] 1:07 좌측엔 [송탄톨게이트]가 있고, [삼남길]은 우측길로 진행 합니다. ['평택-제천 고속도로' 굴다리] 1:13 [평택-제천간 고속도로]를 만나며 굴다리를 통과합니다. ['옥관자정' 가는 길] 굴다리를 통과하면 '평택시 칠원동'이 펼쳐지며 아파트단지를 통과합니다. 앞에 보이는 아파트 단지를 통과하면 바로 "옥관자정"입니다. 10여분 진행하면... ['옥관자정'] 1:22~1:33 (11분간 휴식) "옥관자정"을 만납니다. "인조"가 지날때 이곳 우물의 물맛을 보곤 너무 좋다고 "옥관자"를 하사했다는데... "옥관자 玉貫子"란 조선시대 '정3품' 이상의 벼슬아치들에게 하사하는 "옥으로 만든 망건 관자"이죠. ['옥관자정'] 기념비석에는 이곳에 대해 안내를 하고 있는데 어느 분이 쓴 글인지 궁금하더군요. "이조 제16대 인조대왕께서 옥관자를 붙이고 가신 이래 대한민국 제6대 박정희 대통령께서 전국 새마을 가꾸기 사업용으로 하사하신 세멘트 삼백삼십오포로 1971년 5월 15일 준공되었음" 요즈음 '조선'을 '이조'라고 표기하는 사람도 있군요. 그리고 "인조"를 "인조대왕"으로 높이고 있는데 조선 왕 27명 중에 위에서 언급된 "선조"와 함께 가장 저질의 왕이었는데 "대왕"이라고 호칭하다니 웃깁니다, 명분없는 쿠데타로 '광해군'을 몰아 내고,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맞춰 외교를 해야 하는데 국운이 기울어 가는 '명나라'에게만 충성을 맹세하다가 '병자호란'을 맞아 남한산성으로 도망갔지만 뛰어야 벼룩이 신세인 "인조"는 삼전도에서 '꼰아박아 실시'를 하며 마빡에 피가 나도록 절을 하며 '청나라'에 항복한 쪼다리 왕이고,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청나라에 보내고 왕위를 유지한 비열한 아버지이며, 돌아 온 "소현세자"를 자기 뜻과 맞지 않는다고 앞으로 왕이 될 자기 아들을 죽여버리는 패륜아 아버지이기도 한 "인조"에게 "大王"이라는 칭호를 붙여 줄수 있습니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삼전도로 나가 청나라에 항복하는 그날의 상황을 조선왕조실록 "仁祖實錄"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인조 15년, 1637년 1월 30일'의 "仁祖實錄" 원본 번역문입니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성 밖에 와서 왕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왕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중략) 삼전도에 내려가「왕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남염의(藍染衣) - 색이 바랜 옷, 즉 평민복. 그리고 "제6대 대통령 박정희"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 제5대 대통령인데 계속 6대, 7대, 8대, 9대 대통령까지 지내다가 최측근인 "김재규 중정부장"의 총탄에 저승으로 갔는데 어찌 "제6대"라고만 표기 했을까. 하사 받은 세멘트 335포로 준공되었다는데 뭘 준공했다는 건가요? 우물을 세멘트로 메꾸었는지 우물은 없어지고 수도꼭지 세개가 있을뿐 '옥관자'를 하사 받았다는 우물은 어디를 둘러 보아도 없었습니다. 저런 기념비석이 아무른 비판없이 아직도 떳떳하게 서 있으니 ['갈원'] 그리고 "옥관자정"이 있던 이곳 근처엔 "갈원"이라고 하는 院이 있었는데 요즘 말로 쉽게 하자면 "관용 여관"이 있었다는 뜻이죠? ['칠원동'] "옥관자정"이 있는 "칠원동"을 통과합니다. 이 도로 우측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이 있습죠. 이 도로를 따라 계속 직진을 5분 정도 하면.... [갈림길] 1:38 ★ 길조심 ★ 아파트 건설공사장을 만나는데 중간에 좌측으로 들어 가는 길이 있으니 유의 해야 하더군요. 한눈 팔거나 딴 생각 하며 걸으면 무조건 직진하는 곳이 되겠습니다. [아파트 공사장 진입로] 1:40 삼거리에서 좌회전 하면 바로 우회전해야하고... [공사장 통과] 공사장 옆 도로를 따라 진행합니다. ['45번국도' 굴다리 조망] 공사장을 통과하면 [45번국도]가 보이기 시작하며 국도 밑에 굴다리가 보입니다. 굴다리를 통과해 나가면... ['45번국도' 굴다리 통과] 1:49 다시 대규모 택지 개발현장을 만나며 비포장도로를 7분여 진행하고 ['변경전 삼남길' 갈림길] 1:56 이어서 축사가 있고 이정목이 있는 곳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 대해 알고 가야 하더군요. [변경전 삼남길]은 여기서 직진하게 되 있었다는군요. 지금은 공사로 통행이 매우 어려워 우회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곳에 대한 지리를 다음 구글어스로 상세히 알아 보고 가겠습니다. [현위치 구글어스] 축사가 있는 윗 사진이 이 구글어스의 [현위치 1] 지점입니다. 변경전 삼남길은 하늘색으로 표기되 있는데 직진하여 지름길이고 변경된 삼남길은 파란색 선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무지 돌아 가고 있습니다. '파란문'이 진행한 길은 빨간색으로 표기 되 있는데.... 후답자들은 참고하여 마음에 드는 길로 가면 되겠습니다. ㅎ [우회길] 1:58 축사가 있는 [현위치 1]을 지나면 들판이 펼쳐집니다. [변경된 삼남길]은 저 멀리로 빙 돌고 있어서 괜히 거리만 늘리는 결과라 생각하고 저는 우측 들판의 논두렁으로 가로 질러 가 거리를 단축시키기로 합니다. [들판 통과] 논두렁을 6분여 진행하면 건너편 [통복천 둑방길]에 다달으는데 [뒤돌아 본 통과 들판] 2:04 [통복천 둑방길]에 올라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본 광경입니다. 이해하기 쉽죠? ㅎ ['통복천' 둑방길] [통복천 둑방길]을 잠시 진행하면.... [변경전 '삼남길' 조망] 2:06 축사가 있던 [현위치 1] 지점에서 직접 이어지는 [변경전 삼남길]을 조망합니다. 공사장으로 올라가 공사장 축대 위로 요리조리 진행할수도 있겠군요. ㅎ 앞으로 공사가 끝나면 또 어떻게 길이 바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경기옛길-삼남길]을 만들 때에 앞날을 예측하지도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죠? ['통복천' 둑방길] 이제 다시 [삼남길] 표지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통복천 둑방길]을 5분여 더 진행하면... ['통복천' 건너는 길] 2:12 [통복천]을 건너 가는 길을 만나고 ['통복천' 징검다리] [통복천] 징검다리를 건너 가면 ['통복천'에서 '소사벌택지개발단지' 가는 길] 2:14 평택신도시 아파트 건설현장으로 들어 가는 송전선을 지중화하는 공사를 하고 있고 ['소사벌반도유보라아이비파크 아파트' 조망] 다시 농로를 진행해 건너편 아파트 단지로 가야 합니다. ['반도유보라아이비파크 아파트' 앞] 2:23 농로를 지나면 도로를 만나는데 이곳은 "평택소사택지개발단지"이더군요.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지방도] 지방도로를 200m 정도 진행하면 [사거리] 2:26 ★ 길조심 ★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를 만나는데 길조심을 해야 하는 곳이더군요. 그리고 이곳에서 [변경전 삼남길]과 [변경후 삼남길]이 갈라지는 곳이니 구글어스를 이용해 상세한 내용을 알아 보고 가겠습니다. 다음 구글어스를 보면.. [현위치 구글어스]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 윗 사진이 이 구글어스의 [현위치 1] 지점입니다. [변경전 삼남길]은 하늘색으로 표기되고 있는데 무척 돌아 가고 있죠? "평택소사벌아파트단지" 공사가 많이 완료되어 길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제가 진행한 길은 빨간색으로 표기된 길로서 최단거리로 진행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미개통 도로] ★ 길조심 ★ 기존 도로가 좌측으로 있습니다만, 새로 생긴 아파트 옆 큰도로로 들어가 진행 합니다. ['배다리저수지' 가는 길] "배다리저수지"로 가는 새로 생긴 도로입니다. [변경된 삼남길]은 길바닥에 페인트로 표기되 있으니 유의 해야 합니다. 무조건 직진해서 가기만 하면 되더군요. [육교 사거리] 2:36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 [현위치 1]에서 10여분 진행하면 생태통로같은 육교가 있는 사거리를 만납니다. 길을 건너 좌측 육교 옆 공원으로 올라 갑니다. ['배나무생태근린공원'] "배나무생태근린공원"이라고 하는 공원 안으로 들어가 공원을 통과합니다. ['배나무생태근린공원'] 2:41~3:11 (30분간 오수) "평택세무서"가 보이는 곳에 공원 광장과 쉼터가 있어 누워 잠시 잠도 자고 쉬었다 갑니다. 딱딱한 평지 도로를 걸으니 발바닥이 아픕니다. 산길을 걸으면 발바닥이 아프지는 않고 다리가 힘들지요. ['배다리저수지' 가는 길] "배나무근린공원"에서 "배다리저수지"로 가는 길인데 연결되어 있더군요. ['배다리저수지공원'] 3:18 "배다리저수지" 앞 공원 광장에 도착합니다. [변경된 삼남길]은 길 바닥에 페인트로 표기해 놨다는 것을 모르면 길을 찾아 갈수 없습니다. ['배다리저수지'] 3:21 "배다리저수지"에는 둘레길을 데크로 만들어 놨군요. 일산신도시의 호수공원같은 느낌을 주는군요. 이제 서울과 지방이라는 차이는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전국이 상향 평준화 되 가는군요. 좋은 현상입니다. ['배다리저수지'에서 조망] "배다리저수지" 건너편으로 [변경전 삼남길]이 조망됩니다. ['배다리저수지' 데크길] "배다리저수지" 데크길을 진행하여 제가 빨간 점 찍어 놓은 곳으로 가서 뒤돌아 보면... [뒤돌아 본 '배다리저수지'] 3:24 "배다리 저수지"는 "평택소사벌신도시"의 중심공원 역활을 하는듯 합니다. 평택이라는 도시 이미지가 확 바뀌는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사거리] 3:25 "배다리저수지"를 지나면 큰사거리를 만나는데 대각선 방향으로 길을 건너 진행합니다. ['삼남길' 이정목] 3:32 조금 올라 가면 [삼남길 이정목]을 다시 만나 이정목의 안내에 따라 진행합니다. [현위치4 구글어스] 윗 사진이 이 구글어스의 [현위치 4] 지점입니다. [사거리] 3:39 사거리를 만나면 [소사동 방향]으로 직진해 가고 ['굿모닝병원'] "굿모닝병원 주차장"을 지나면 ['굿모닝병원' 앞 삼거리에서 '대동법 시행 기념비' 가는 길] 3:45 직진금지를 알리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대각선 방향 골목으로 [삼남길]은 이어 지더군요. [대동법시행기념비] 길안내판이 있는 골목 앞으로 가면.... ['대동법시행기념비' 조망] 3:46 [대동법시행기념비]가 있는 조그만 동산이 조망 됩니다. 길안내판이 길을 인도하니 길찾기는 쉽지요? ㅎ '소사동' 골목을 잠시 통과하면... ['대동법 시행 기념비'] 3:50~3:51 "대동법 시행 기념비"에 도착하고 ['대동법 시행 기념비'] "대동법 시행 기념비"를 휭하니 둘러 보고 그냥 떠납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판을 참고 하시고... ['소사1교'] 3:55 "대동법 시행 기념비"를 지나면 이어서 [소사1교]를 만나 건너 우측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좌측에는 "소사뜰쌀"이라는 정미소가 보입니다. 우리나라 정미소의 대부분이 문을 닫았다고 들었는데 이 정미소는 가동 중에 있더군요. [둑방길] [소사1교]에서 둑방길을 따라 진행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저 앞에 보이는 빨간 점으로 표시한 곳까지 진행하면 [사거리] 4:00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라는 이정목을 만나고 ['소사들'] 지긋지긋한 농로길을 걷습니다. 펼쳐지는 벌판이 "소사들"이랍니다. [사거리] 4:11 빗물이 카메라 렌즈를 적셔 흐릿해 지는데 "장수촌"이라는 음식점이 있는 사거리를 직진해 건너면 ['유천1동 마을회관'] 4:13 '평택시 유천1동 마을회관' 앞을 지나 가는데 이 마을은 "소사들" 한 가운데에 섬처럼 있더군요. ['안성천교' 조망] "유천1동마을회관"을 지나면 다시 "소사들" 벌판이 펼쳐지고 멀리 우측에 [경기옛길-삼남길]의 종착지인 "안성천교"가 조망되기 시작 합니다. ['안성천교'] "안성천"은 "한남정맥"과 "금북정맥" 사이에 있는 제일 큰 개천입니다. 하지만 "안성천"은 "강"이라는 이름은 얻지 못하고 "아산만"으로 흘러 가고 있습니다. '수원'의 "서호천"이 "황구지천"과 합류하여 "황구지천"으로 이름이 통일되고, "황구지천"이 다시 "진위천"과 합류하여 "진위천"으로 이름이 바뀌고 "쌍령지맥"이 끝나는 '평택시 동고리'에서 "진위천"은 이 "안성천"과 합류하여 최종 "안성천"이 되어 "아산만"으로 흘러 가고 있지요. 그러니까 "쌍령지맥"은 "진위천"과 "안성천"의 水界가 되는 것이죠 ['안성천교' 앞] 4:26 비 내리는 "안성천교".... 우리나라 [1번국도]가 지나고 있습니다. [국보1호 남대문]에서 출발하여 [경기도]와 [충청남도]의 道界인 "안성천교"까지 완주했습니다. GPS로 측정된 총거리는 114.2km였습니다. 이곳에서 [평택역]으로 가는 버스는 약25분 마다 한대씩 있어 조금만 참으면 시내버스를 탈수 있더군요. 저는 5분만에 버스를 타고 5분 정도 걸려 [평택역]으로 갔습니다. [구글지형맵] [고도표] 오늘 걸은 거리는 GPS 측정으로 21.7km였으며 6시간 45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이로서 114.2km의 [경기옛길-삼남길]을 완주했습니다. [서울 남대문]에서 [평택 안성천교]까지 "114.2km"를 여섯번으로 나누어 하루 평균 19km씩 걸었습니다. 역사적 고증을 통해 많은 예산을 투입해 만들었다는 [경기옛길-삼남길]은 제가 걸어본 결과 [경기옛길-삼남길]이라는 이름을 사용 할수 없는 [경기 新作路]였다는 것을 알려 드림니다. 다만 단순한 걷기코스로 갈곳 없는 분들이나 호기심 많으신 분들은 시간 날때 한번 정도 걸어 볼수는 있겠습니다만 추천까지 하고 싶지는 않네요.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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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山者不可以無錄 而有錄之有益於遊山也 유산자불가이무록 이유록지유익어유산야 산을 즐기는자 기록이 없어서는 아니되고, 기록이 있음은 산을 즐기는데 유익하다 -"퇴계 이황 선생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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