茂朱 赤裳山을 가다
서창-장도바위-적상산성 서문-향로봉-적상산-
안렴대-안국사-사고지-적상호-송대-치목마을
2009년 11월 28일(토)
진양기맥 마지막 구간인 '남령-남덕유산'을 가려고 했으나
11월15일부터 12월15일까지 특별 국립공원 산불예방기간이라
남덕유산으로 진입은 어려워, 덕유산국립공원 내에 있으나
출입이 가능한 "적상산"으로 어쩔수 없이 발길을 돌렸습니다
| 적상산[赤裳山] 위치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에 있는 "덕유산국립공원"의 산중에 하나입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무지 크게 볼수있습니다
[赤裳山 산행 개념도]
"서창 매표소"에서 출발하여 "적상산성 서문지", "향로봉"으로 갑니다.
"향로봉"에서 되돌아와 "적상산 정상"과 "안렴대"를 갑니다.
그리고 "안국사"를 보고 "적상산 사고지"와 호수를 구경합니다.
"송대"를 거쳐 "치목마을"로 하산합니다.
도상거리 약10km로 5시간정도 걸리겠습니다.
[무주군 적상면 사천리 서창골] 10시 12분
赤裳山 산행들머리는 "서창 西倉"이라고 하는 조그만 마을입니다.
'대전-통영 고속국도'의 "무주 I.C."에서 나와 '사천리'방향으로 오면 이정표가
잘 설치되 있습니다.
[적상산 산행로 입구] 10시 18분
'서창 마을'에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약100m쯤 오르면 "적상산 산행로"가
시멘트 포장도로 우측으로 "안국사 3.2km"를 가리키며 넓게 나 있습니다.
[적상산 산행로 입구]
시멘트 포장도로에서 우측 "안국사 3.2km" 가리키는 등산로로 들어 섭니다.
[적상산 산행로] 10시25분
비교적 넓고 잘 정비된 등산로를 조금 오르면 산행 안내도가 보입니다.
[산행 안내도]
앞으로 가실 분들은 이 등산 개념도를 참고하시면 제일 좋을것입니다.
'적상산'은 여기에 나와 있는 地名이 거의 전부 입니다.
다시 말해 '적상산'은 등산로가 단순하고, 가서 볼거리가 명확합니다.
"장도바위", "향로봉", "안렴대", "안국사", "사고지", "적상호수", "전망대", "송대"
[샘터]
적상산 산행로는 거의 외길이라 길을 잃을 염려는 없습니다.
요즈음 가물어서인지 샘터나 골자기에서 물을 볼수는 없었습니다
[S자 登路]
적상산은 엄청나게 가파른 절벽 수준의 산이었습니다만,
등산로를 "S"자로 만들어놔 전혀 가파른지 모르고 오를수 있습니다
[적상산 안렴대]
오늘도 雲霧로 선명하고 깨끗한 사진은 기대할수가 없어 아쉽습니다.
요즘 계속 이렇게 雲霧가 끼어 산행기까지 어두침침합니다.
雲霧 속으로 보이는 절벽이 나중에 가게 될 "안렴대"가 있는 곳이었는데
적상산은 산 둘레가 대부분 절벽이어서 천연산성을 이루어 외부의 침입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史料를 보관하는 史庫를 두었답니다.
[S자 登路]
엄청나게 가파른 된비알이지만 등로를 "S"자로 만들어 놔서 가파른지 모르고 오릅니다.
[전망바위] 11시20분
산행들머리에서 한시간 정도 오르면 처음으로 전망바위가 나옵니다.
산행들머리인 '서창 마을'과 "대전-통영고속국도"와 "37번 국도"가 보입니다.
[장도바위 오르는 길]
"S"자 등로를 한시간 정도 오르면 갑자기 엄청난 암벽이 앞을 가로 막습니다.
그냥 지나칠수 없는 볼거리 "장도 바위"가 나옵니다.
앞의 암벽을 돌아 서면.....
[長刀바위] 11시25분
"장도 바위"는 한자로 "길 長"에 "칼 刀"를 쓰는 "긴칼 바위"라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바위는 "긴칼바위"가 아니라 "긴칼"로 내리쳐 "쪼개진 바위"였습니다
큰 바위가 두동강이 나 있습니다.
[長刀바위]
"긴칼바위"가 아닌 "긴칼로 내리쳐 쪼개진 바위"임이 확실합니다.
최영장군이 긴칼로 내리쳐 쪼갰다는 웃기는 내력이 있더군요. 웃어 넘깁시다.
불변의 진리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지요
"쌍칼은 두자루다!"
"단검은 짧다~" ㅎㅎ확실합니다.
[長刀바위]
長刀로 내리쳐 쪼개진 바위 틈새로 올라와서 내려다 보니
틈새가 칼로 내리쳐 쪼개진듯합니다만, 이런 바위는 전국에 수없이 많지요.
최영장군을 미화 시키려는 의도에서 지어진 이름이라 생각됩니다.
최영장군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이여서 곳곳에 그를 미화 시키는 것들이 많을까요?
오늘은 '최영장군'에 대해 간략히 알아 보며 산행을 하겠습니다.
[長刀바위에서 바라 본 '안렴대']
"안렴대"는 고려시대에 거란의 침입이 있었을때
'안렴사 按廉使'라는 관직을 가진 분이 군사들을 이끌고 저곳에 올라 진을 치고
피난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후세들에게 자랑할만한 얘기꺼리도 아닌 챙피한 것을 내걸고 있는 "안렴대"는
피난하기엔 최적이라고 할 정도로 깍아지른 듯한 절벽위에 있어서이겠지요
"안렴대"에 가서 다시 얘기하겠지만, 여기서 "안렴대"를 보아야 그 의미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미리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赤裳山城] 11시29분
"長刀바위" 바로 윗쪽에는 "赤裳山城"이 아직도 성곽의 윤곽을 들어내며 있습니다.
최영장군을 말하면 제일 먼저 어떤 것이 떠오릅니까?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 말도 최영장군이 한 말이 아니고, 최영장군 아버지 최원직의 말이지요.
저는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황금은 황금으로 봅니다.
비록 청렴하라고 상징적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바보들이나 황금을 돌같이 봅니다.
대부분의 우리국민들은 '최영장군'에 대해 너무 모르더군요.
하다못해 어느 시대의 장군인지도 모르더군요. 하지만 '최영장군' 이름은 모두 암니다.
[赤裳山城]
"赤裳山城" 안으로 들어와 올라 갑니다.
"赤裳山城" 안에 들어 오면 "赤裳山 登山"은 거의 끝납니다.
'최영장군'은 고려말 '충숙왕 3년'인 1316년에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나
高麗末의 政治史를 장식하고 이성계 일파에 의해 1388년 처형되어 사라지는 때까지
당시로는 엄청 장수한 武人이며, 또한 문하시중까지 하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見金如石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글자를 큰 띠에 써서 평생 지니고 다녔다고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최영장군이 태어나 활약하던 고려말 시대의 고려 28대 왕인 '충혜왕'이라는 인간에 대해
잠깐 알아보고 지나 가겠습니다.
[赤裳山城 西門址] 11시30분
赤裳山城의 西쪽 門이 있었다는 西門址가 나옵니다.
대부분의 산객들은 "長刀바위"의 갈라진 바위틈으로 오르지 않고 바로 이곳으로 오릅니다
고려 28대 왕 '충혜왕'
대부분 사람들은 고려라고 하면 '왕건'이나 '공민왕' 정도 아시지요?
고려에 왕이 몇명 있었는지도 까맣게 모르실겁니다. (34명)
왜냐하면 高麗史는 뒤돌아 보기 싫은 역사일수도 있기 때문일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가장 추악한, 속된 말로 개쌔끼라고 할만한 왕이 '충혜왕'입니다.
高麗史는 이 쌔끼를 '희대의 패륜아'라고 적고있을 정도이니 알만하지 않습니까?
[赤裳山城 西門址와 안내판]
원래 이곳에는 2층 3간의 門樓가 있었다는군요
고려 28대 왕 '충혜왕'
이 쌔끼는 '충숙왕'의 장남이며 이름은 '정禎'이고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입니다.
정치에 염증을 느낀 충숙왕이 병약해져 왕위를 이놈에게 물려주었는데,
16살에 왕이 되었습니다. 즉위하면 우선 열심히 國務를 인수인계받고 잘하려고 노력하는데
그런데 이 쌔끼는 즉위하자마자 6일 동안이나 政事를 폐하고 놀기 시작하여
2년 동안이나 있으나 마나한 왕이 되어 아버지 충숙왕으로부터 왕에서 짤리기도했습니다.
아버지인 충숙왕이 '충혜왕'을 "날건달"이라고 불렀으나 죽음이 임박하자
다시 그 쌔끼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습니다. 개판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赤裳山 능선 오르는 마지막 오르막]
赤裳山城 西門址를 지나면 완만한 오르막이 잠시 펼쳐집니다.
고려 28대 왕 '충혜왕'
다시 왕위에 오른 이 쌔끼는 눈에 보이는 여자들은 모두 강간하기 시작했습니다.
강간한 여자들은 셀수 없을 지경이고, 그 중에서 대표적인 강간 사례만 몇개 알려드림니다.
첫째, 아버지 충숙왕의 세칸드, 즉 자기 계모를 강간하고
둘째, 역시 아버지의 후비인 '숙공휘령공주'를 강간하였습니다.
저항하는 '숙공휘령공주'를 부하들을 시켜 양 팔과 다리를 잡게하고
입을 틀어 막고 강간하였던 것입니다.
셋째, 내시 '유성'의 아내인 인씨가 예쁘다고 겁탈하고
넷째, 자신의 장인의 후처, 즉 장모를 겁탈하고........
다섯째, 주변 신하들의 와이프가 조금이라도 눈에 들어 오면 무조건 강간하였답니다.
일반 백성들 중에 조금이라도 눈에 들어 오는 아녀자들에 대한 강간 행위는 헤아릴수 없었답니다.
'충혜왕'은 이런 난잡한 성관계로 성병에 걸려, 강간 당하는 여자들까지 임질에 걸렸다고
高麗史는 전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것들만도 이러한데 기록되지 않은 것들을 합치면 얼마나 될까요?
결국 이쎄끼는 중국 원나라에 호출되어 압송당하고, 원나라 수도 연경에서 2만리 떨어진 '게양'에
귀양 보내져 이국만리에서 1344년 30살의 짧은 나이로 독살당하여 죽었답니다.
원나라 순제가 내린 유고에는 "백성들의 고혈을 긁어먹은 것이 너무 심하여, 비록 그대의 피를
온 천하의 개에게 먹인다 해도 부족하다."라고 할 정도였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고려에 전해졌는데도 슬퍼하는 백성이 아무도 없었다고 하며
심지어는 기뻐서 날뛰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실록은 전합니다.
'충혜왕'이 이 정도이니 '양귀비'라고 하는 아들의 와이프, 즉 며느리를 자신의 와이프로 만든
중국 당나라의 현종은 비교하자면 양반입니다.
[층층나무]
저는 이제까지 다니면서 "층층나무"라는 나무는 처음 봅니다.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나무라 소개해 드림니다. 저만 그렇겠지요?
우리나라 곳곳에 자라는 낙엽교목으로 우산모양을 하고 있다네요
최영장군
다시 '최영장군' 얘기로 돌아 가겠습니다.
국민학교 노래책에도 등장했던 최영장군이라 우리에게 친근감있게 느껴지지만
'최영장군'은 역사의 敗者입니다.
그 유명한 "최영의 요동정벌론"과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서로 상충되는 역사의 아이러니.
'요동정벌'을 계획하게 된 동기는 명나라가 고려의 철령 이북의 땅을 자신들의 땅으로
예속시키자, 최영장군은 우왕에게 주청하여 수복하기 위한 '요동정벌'을 계획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요동정벌에 나설려고 했으나 우왕이 자신의 신변의 위협을 느껴
최영장군을 자신의 곁에 있게 하고 이성계에게 출정을 명령합니다.
[赤裳山 능선 오르는 마지막 오르막]
西門址에서 조금 오르면 능선이 나타납니다.
저 능선이 赤裳山의 정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赤裳山은 향로봉에서 안렴대까지 거대한 능선으로 이루어진듯합니다.
최영장군
잘 아시다시피 '요동정벌'에 이성계는 "四不可論"으로 맞서고 출정을 반대합니다.
첫째, 小國이 大國을 칠수없고,
둘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농사를 지을수 없고,
셋째, 원정을 틈타 왜적이 침입할 우려가 있고
넷째, 장마로 인해 활에 먹인 아교가 풀릴 염려가 있고 군사들이 병에 걸릴 우려가 있기때문에
[赤裳山 향로봉]
赤裳山 능선으로 오르며 좌측을 보면 오늘 갔다가 다시 되돌아 올 "향로봉"이 보입니다.
최영장군
이성계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왕과 최영장군은 출정을 명령합니다.
요동정벌에 출병한 병력수는 총5만여명이며, 말이 2만1천6백82마리였다고하니
고려의 거의 전 군사가 동원 된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군사를 모두 이성계에게 맡겼으니
우왕과 최영장군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이성계에게 내 준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성계는 위화도까지 갔다가 요동정벌은 커녕 돌아와 고려 왕실을 정벌하였습니다.
이성계에게 정권을 내주고 최영장군은 합포(마산)으로 귀양 갔다가 충주로 이배되고,
1388년12월 개경으로 압송되어 참수 당하며 생을 마감합니다.
훌륭한 일도 많이하고, 적군들도 많이 무찔렀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敗者로 비참한 최후를 당한 장군이었습니다.
최영장군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자기네 고향 사람이라고 우기는 지역이 세곳있지요?
충청도 홍성, 경기도 고양, 강원도 철원이 서로 최영장군이 자기네 고장 출신이라고
지금도 우기고 있는데 탄생지가 불분명해서 입니다.
[향로봉 갈림길] 11시 46분
赤裳山 능선에 올랐습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향로봉"을 갔다가 다시 되돌아 와야합니다.
赤裳山 정상은 통신철탑들이 점령하고 있어 赤裳山 정상은 실제 "향로봉"이라고
할수 있으니 "향로봉"은 꼭 갔다가 돌아 오는 것이 좋습니다.
멀지도 않습니다. 가는데 10분 걸림니다.
[赤裳湖]
赤裳山 능선에 오르면 넘어에는 "赤裳湖"가 보입니다.
"赤裳湖"는 앞으로 더 설명 드리겠지만 우리나라 "양수 수력발전소"의 상부댐입니다.
청평의 호명산에도 양수수력발전소 상부댐인 호명호가 있지요? 기억나세요?
[향로봉 가는 길]
'향로봉"까지는 아주 가깝고, 경사도 완만합니다.
[향로봉 정상]
능선갈림길에서 10분쯤 가면 향로봉 정상이 나옵니다.
정상 같지 않은 정상입니다.
[향로봉 정상] 11시56분
정상 같지 않은 정상입니다만, 정상의 바깥은 천길 낭떨어지입니다.
적상산 정상은 통신철탑들이 점령하고 있어 적상산의 실제 정상은 "향로봉"입니다
[향로봉 정상 표지판]
해발 1,034m로 표기되 있으나 이것은 적상산 정상을 대신하기 때문에
적상산 정상의 높이를 향로봉에 표기해 놨군요.
"향로봉"의 높이는 1,029.2m이고, "적상산"의 높이가 1,034m입니다.
[향로봉 정상에서 내려다 본 茂朱]
"향로봉"의 높이는 1,029.2m이고, "적상산"의 높이가 1,034m이니
"향로봉"과 "적상상 정상" 사이의 능선은 거의 평지로 표고차가 없습니다.
그래서 "향로봉 정상"은 정상같지 않은 정상이라고 했지만,
서쪽 방향으로는 천길 낭떨어지로 천혜의 요새와 같습니다.
"茂朱邑"이 펼쳐져야 하는데 운무로 잘 보이지 않는군요, 아쉽습니다.
[赤裳山으로 되돌아 가는 赤裳山능선]
완만한 능선을 따라 적상산 정상 방향으로 걸어 갑니다
[서창-향로봉-적상산 갈림길]
"향로봉"에 갔다가 다시 '서창 산행 들머리'에서 올라오는 갈림길을 만나 지나 갑니다
향로봉에서 적상산까지는 거의 직선상에 있습니다.
[癌에 걸린 나무]
평소에 건강관리 잘하시기 바람니다.
[赤裳山 정상으로 가는 길]
赤裳山 정상으로 가는 길도 완만한 능선길입니다.
[赤裳山 정상]
赤裳山 정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동통신철탑이 보이면 그곳이 "赤裳山 정상"입니다.
[赤裳山城 史積碑]
赤裳山 정상에는 갈수도 없지만 정상석도 없습니다
赤裳山 정상에 가는 길엔 이런 "赤裳山城 史積碑"가 길옆에 쓸쓸히 서 있을 뿐입니다
[赤裳山 정상] 12시22분
赤裳山 정상입니다.
하지만 올라 갈수 없고 옆으로 지나칠 뿐입니다.
赤裳山 정상은 살리고 철탑은 약간 옆 다른 곳에 세워도 되지만
우리나라의 무책임한 인간들은 오로지 정상에 자신들의 허세를 부림니다.
[安國寺-안렴대 갈림길] 12시23분
赤裳山 정상 철탑을 지나면 바로 "安國寺-안렴대 갈림길"이 나옵니다.
[安國寺로 내려 가는 계단]
"安國寺-안렴대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나 있는 계단을 내려 가면 바로 "安國寺"입니다.
"안렴대"를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저 계단으로 내려 갑니다.
이곳에서 약50분 동안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안렴대' 가는 길] 오후1시12분
"安國寺-안렴대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안렴대"로 갑니다.
갔다가 다시 되 돌아 옵니다.
[산불감시 카메라탑] 오후1시13분
"안렴대"를 향해 조금 가면 봉우리가 나오는데 "산불감시카메라"가 설치되 있는 곳입니다
[산불감시 카메라탑 전망대]
"산불감시카메라탑"을 지나면 바로 전망대가 나오는데 좋습니다
전망대가 무슨 고래같기도 하죠?
[암벽위에 자라는 절묘한 나무]
고래같은 모양을 한 암반 위에 자라고 있는 나무
[향로봉]
산불감시 카메라탑 전망대에서 뒤돌아 본 "향로봉"
"향로봉"에서 이곳까지 완만한 일직선의 능선이라는 걸 확실히 느낄수 있습니다
[按廉臺 가는 길]
"按廉臺"는 산불감시카메라에서 조금 전진합니다.
[按廉臺]
"按廉臺"에는 특별한 것이 있는 곳이 아니고, 절벽 위에 있는 암봉 전망대였습니다.
고려시대 거란족이 쳐들어 왔을때 "三道 按廉使"가 군사들을 이끌고 와
이곳에 진을 치고 난을 피한 곳이라 하여 "안렴대"라고 한다고 명시해 놨습니다.
'按廉使'는 고려말의 관직으로 지금의 '도지사' 정도 되는 관직입니다.
그러므로 "三道 按廉使"는 세개의 道를 관할하는 '도지사'이겠지요. 높은 직위입니다.
설명대로 군사들을 이끌고 와 여기에 진을 치고 난을 피했다면 이 '按廉使'는 사형에
처해야 할 중대 범법행위를 했다고 생각되는데 이게 무슨 얘깃꺼리라고 안내판에 나발거리는지...
적군이 쳐 들어 오면 나가서 적군과 싸워 목숨을 걸고 우리 백성을 보호해야하는데,
이 개쌔끼 '按廉使'는 이 산꼭대기로 피난을 와? 아휴~~ 능지처참을 해야하는데...
이런 쌔끼들 때문에 나라의 발전이 없었고 고려는 멸망하게 되었을지도....
무주군은 이런게 뭐가 자랑거리라고 안내를 할까요? 그렇게 붙일 얘기가 없어서일까요?
[按廉臺에서 조망]
천길 낭떨어지 위에 '안렴대'는 있습니다.
적군이 얼씬거리지 못할 천연요새이군요.
남서쪽으로 "적상면"이 조망 되어야 하는데 운무로 어렵습니다.
[按廉臺]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실록"등 史料를 보관하는 史庫를 "적상산"에 만들었는데
병자호란 때에는 실록을 이 "按廉臺" 바위 속 굴에 숨겨 禍를 면했다고합니다.
[按廉臺에서 뒤돌아 본 '향로봉']
[安國寺 가는 길] 1시 42분
按廉臺 구경을 마치고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 安國寺로 내려 갑니다.
아주 가깝습니다.
[安國寺]
"安國寺"는 국가의 안녕을 빌기 위해 만들어진 절이라고 합니다.
특히 이곳에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역사적 기록물을 보관하는 史庫가 있어
安國寺와 護國寺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절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安國寺] 1시 47분
여느 절과 대동소이합나다
[安國寺 우물]
산에서 생활하려면 중이던 신도이던 물이 있어야겠지요.
安國寺 우물은 산꼭대기인데도 규모가 큽니다.
'적상산성'의 병력을 모두 먹일수 있는 우물일테니....
[安國寺 一柱門] 1시 50분
安國寺까지 자동차가 올라 올수 있으니 적상상 정상을 쉽게 오를려면
차를 타고 오르면 간단합니다.
[安國寺 一柱門에서 내려다 보이는 "赤裳湖"]
안국사 일주문에 서니 "赤裳湖"가 가깝게 눈에 들어 옵니다.
"史庫址"는 "赤裳湖" 앞에 있습니다.
[安國寺 一柱門]
"赤裳湖"로 내려 가며 일주문을 뒤 돌아 봤습니다.
["赤裳湖"와 "史庫" 가는 길]
자동차 포장도를 따라 내려 가도 되지만, 조금 돌기 때문에 산길로 바로 내려 가면
다시 자동차도로를 빨리 만납니다.
["赤裳湖"와 "史庫"]
자동차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 가면 "赤裳湖"와 왼쪽에 "史庫"가 보입니다.
[치목마을로 하산하는 길]
"赤裳湖"와 "史庫"가 보이는 곳에 도착하면 우측에 "치목마을로 하산하는 길"이
있는데, "赤裳湖"와 "史庫"를 구경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하산하여야합니다
[赤裳山 史庫]
"赤裳山 史庫"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왕조의 史庫입니다.
물론 이것도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면서 없어진것을 복원한 것입니다.
"史庫"
글자 그대로 역사적 기록물을 보관하는 창고입니다.
조선왕조는 "조선왕조실록"을 영원히 보관하기위해 전국 여러곳에 똑같은 실록을
분산하여 보관하였습니다. 실록이 없어 지는 것은 국가가 없어 지는 걸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赤裳山 史庫 안내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조선왕조실록"과 기타 역사적 기록물을 전국 곳곳에
분산 보관하였는데, 서울 춘추관에 제1본을 보관하고, 충주, 전주, 성주등에 보관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주 史庫'에 소장된 실록 이외에는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끝나고 광해군은 새로운 史庫를 만드는데, 서울 춘추관 이외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도시 지역을 피해 산속에 史庫를 4곳 만들었습니다.
서울 춘추관,
강화도 마니산 史庫,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史庫,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史庫,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史庫,
[赤裳山 史庫]
"무주 赤裳山 史庫"는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史庫"를 옮겨 온 것인데,
누루하지의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위협하자 묘향산에서, 천연의 요새인 적상산으로
옮겨 보관하게 된 것이며, 복원되어 남아 있는 유일한 史庫가 되겠습니다.
또한 강화도 마니산 史庫는 인근의 정족산 史庫로 옮겨 보관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에는 지방 4대 史庫로
"태백산, 오대산, 정족산, 적상산 史庫"를 말하는 것으로
史庫 주변에 守護사찰을 두어 史庫를 안전하게 지켰습니다.
그 守護사찰이 유명한 다음과 같은 절입니다.
강화도 전등사 - 정족산 史庫
무주의 안국사 - 적상산 史庫
봉화의 각화사 - 태백산 史庫
평창의 월정사 - 오대산 史庫
이렇듯 오늘날 우리가 조선왕조실록을 원형 그대로 볼수 있는것은
분산보관이라는 원칙을 지키고, 안전한 산간지역에 보관한 선조들의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됩니다.
[赤裳山 史庫에서 바라 본 赤裳湖]
赤裳山 史庫는 원래 저 호수에 있었다고 합니다.
호수를 만들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다는군요.
'양수발전소'에 대해서는 호명산 산행기에서 상세히 설명 했으므로 생략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전기가 남아도는 심야에는 전기로 물을 끌어 올리고,
전기가 모자르는 낮에는 물을 떨어뜨려 전기를 발전하는 발전소를 말합니다.
이런 양수수력발전은 6초만에 전기를 발생시킬수 있고, 그 어떠한 환경오염물질도
발생되지 않으며, 落水路에 수많은 발전기를 연이어 설치해 엄청난 전기를 발전할수
있어서 매우 바람직한 발전소이지요.
발전 용량이 60만kw/h라고 하는군요.
그리고 플레밍의 오른손 법칙과 왼손 법칙 배웠지요? ㅎㅎ
[치목마을로 하산하는길] 2시 12분
赤裳山 史庫에서 다시 돌아와 "치목마을"로 하산하는 길로 갑니다.
현재는 "조선왕조실록"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나?
이 물음을 확인하기 위해 많은 조사를 했습니다.
일제침탈시대에 우리나라 4대 史庫의 실록들은 모두 조선총독부에 의해 접수되어
1. 정족산, 태백산 史庫의 실록은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2. 적상산 史庫의 실록은 '창경궁 장서각'에
3. 오대산 史庫의 실록은 1913년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 되었답니다.
그 이후 오늘날에는
1. 정족산 史庫의 실록은 현 '서울대 규장각'에
2. 태백산 史庫의 실록은 현 '국가기록원"(부산센터)에
3. 적상산 史庫의 실록은 6.25때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현재 북한 김일성종합대학에
보관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4. 일본 동경제국대학에 있던 오대산 史庫 실록은 1923년 관동대지진 때에
지진의 여파로 소실되어 일부만이 동경대학교에 47책, 서울대 규장각에 27책이
남아 있다가 2006년7월 마침내 93년만에 동경대학에 있던 47책이 금의환향
서울대 규장각으로 돌아 왔습니다.
우리나라 역사가 화려하던 못하던 우리의 역사입니다.
역사가 없는 나라는 나라라고 할수도 없으니 우리의 역사를 잘 지켜야겠습니다.
그리고 '실록'은 우리 후손들에게 잘 물려 주어야 하겠습니다
[치목마을로 하산하는 길에 있는 '부도']
하산하는 길-갈림길에는 "부도"가 여럿 있었는데 안국사 중들의 부도였습니다.
조선왕조는 27대까지 왕이 있었으나 유네스코에 등재된 실록은 25대 철종임금까지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고종과 순종임금의 실록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사람들에 의해 쓰여져
그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하는군요.
또한 연산군과 광해군은 실록이 아니라 일기라고 하고,
노산군 일기는 후에 단종실록으로 바뀌어졌지요?
적상산 사고에 보관 되었던 실록은 현재 김일성대학에서 보관 중인 것으로 추측한다고하니
천만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
쪽바리들이 가지고 간것보다는 낫지않습니까?
[하산하는 길]
하산하는 길도 山勢는 급경사이나 하산로는 완만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송대"부근을 제외하고는 크게 급경사는 없었습니다.
[하산길에 뒤돌아 본 赤裳山]
"송대"로 내려 가며 뒤돌아보니 '적상산'은 예사 산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급경사 내리막]
"송대"부근에 오면 급경사 내리막이 있습니다.
사진의 우측 난간 아래가 "송대"인데 내려 갈때는 몰라 그냥 지나쳤습니다.
[松臺] 2시 38분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가니 절벽이 나왔는데 이곳이 "송대"였습니다.
[松臺]
松臺는 절벽과 절벽 사이로 계곡물이 내려 오고 있으며, 주변 풍광이 제법 좋습니다.
[松臺 안내]
[松臺]
[松臺]
松臺를 꽁짜로 구경해서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습니까? ㅎㅎ
[松臺 앞 계곡]
松臺 앞 계곡의 모습도 보여드림니다. 입체감 있게....
우측 하산로는 산허리를 휘감고 내려 갑니다.
[松臺 앞 "치마바위"]
적상산 赤裳山은 "붉을 赤", "치마(아랫도리 옷) 裳"으로
붉은 치마를 두른 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붉은 치마가 이 바위 절벽을 말한다고 합니다.
가을 단풍이 물드는 때에 이 암벽은 붉은 치마를 연상케 한다는데
가을이 지난 지금도 미니 스커트를 입은 그래머같아 보이는군요.
[松臺 "치마바위" 앞에서 내려다 본 "치목마을"]
앞으로는 덕유산 "향적봉"이 보여야하는데 운무로 잘 보이지 않습니다.
[松臺 앞에서 하산하는 길]
산허리를 따라 부드러운 하산을 합니다.
[전망대] 2시 56분
마지막 쉼터이자 전망대인 곳이 나오는데...잠시 쉬며 조망합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치목마을"]
앞에 보이는 산이 '단지봉 768.5m'인듯...
치목마을이 가깝게 보입니다.
[치목마을 날머리]
산행 날머리인 '치목마을'로 내려 왔습니다.
[치목마을 이정표]
치목마을은 깨끗하게 정리정돈되 있어 첫인상이 좋았으며,
이정표까지 세워져 있습니다.
[치목마을 날머리에서 뒤 돌아 본 赤裳山]
이정표가 있는 날머리에서 赤裳山을 뒤돌아 봤습니다.
치목마을 담장에 그려진 벽화도 이쁩니다.
'치목마을'은 "삼베를 짜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하더군요.
[치목마을] 3시25분
치목마을회관 앞에서 뒤풀이를 하고
예의로 치목마을 특산품이라는 검은 콩을 사서 왔습니다.
산행시작 : 오전 10시12분
산행종료 : 오후 3시 25분
총산행시간 :5시간13분
도상거리 : 약10.2km
클릭하면 엄청 크게 볼수있습니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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