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저산 산행기』 『장흥 천관산』"天子의 冕旒冠을 쓴 天冠山을 가다"天子의 冕旒冠을 쓴 天冠山을 가다 王도 王 나름이고 王冠도 王冠 나름입니다 王冠의 챙에 다는 진귀한 보석류의 구슬을 旒(류)라 하는데 한줄의 旒(류)에는 12개의 旒(류)를 꿰어 달아 한줄을 만들고 다시 그러한 旒(류) 12줄을 王冠에 메달아 놓은 관이 冕旒冠이라죠. 王 中에 王이 쓰는 冠이라 皇帝가 주로 冕旒冠을 썼습니다만, 우리들은 주로 玉皇上帝, 즉 하느님이 쓰는 王冠을 冕旒冠이라 말한답니다 제가 산행기의 서두부터 거창하게 冕旒冠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를 어림 짐작하시겠죠? 무슨 표현으로 이 산에 대한 山行記를 장식 해야 할지 몰라서 이 산의 이름에서부터라도 풀어 나가려는 실마리를 찾아 보기 위해서 이람니다 "天冠山" 冠岳山이 王冠을 썼다면, 天冠山은 분명 冕旒冠을 쓴 神山이 분명하다고 느꼈습니다그 당시의 기억을 소설로 풀어낸 것이 바로 '아제아제 바라아제'라고 그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천관산이 있는 곳] 천관산은 전라남도 장흥군에 위치하고 있으며 늘푸른 南海의 多島海를 바라 보며 우뚝 서 그 위용을 태평양 건너 멀리 멀리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난~支提靈山-天冠山이다~~!!"
[호텔] 산행기에 처음부터 왠 호텔 사진이냐구요? ㅎㅎ 이번 산행은 고교 교우회의 "徽山會"와 세번째 함께하는 山行입니다만 전남 장흥에 있는 "천관산"이라 서울에선 너무 먼 거리에 있어서 1박 2일 코스로 산행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태로던 길 떠나는 나그네에겐 하룻밤을 묵은 旅館은 추억에 남습니다 이름 모를 객지에서 하룻밤을 그것도 고교 선후배 교우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크나큰 색다른 즐거움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후배 교우들이 떼를 지어 하룻밤을 묵은 호텔을 첫면에 올리는 것입니다 다른 학교 나오신 분들도 충분히 공감하시리라 믿습니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도착했습니다
하룻밤을 묵고 일어나니 눈앞에 펼쳐지는 남해 바다가 우릴 더욱 반기는 듯합니다 호텔은 지방의 호텔치고는 제법 그럴듯한 규모를 자랑하며 밤새 마시고 마신 선후배들 간의 친목酒로 떠지지 않는 눈 상큼한 바닷바람과 햇살이 사정없이 기상 나팔을 불어 어쩔수 없이 일어났습니다
요즈음 일교차가 너무 커 안개가 많이 낌니다만 희뿌연 안개를 뚤고 태양은 솟아 오르는데 여기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남쪽 나라가 맞는지..... 매일 어느 곳에서나 뜨는 태양이지만, 남쪽 나라 바닷가에서 맞는 日出은 새로웠습니다
13층짜리 호텔의 9층에서 내려다 보는 광경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곳이 전남 보성의 어느 해변이라는 것 이외에는 저는 아직까지도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어느 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는 것이 더 큰 추억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호텔 뒷쪽에는 터널도 있고, 관광객을 유혹하는 펜션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시설은 잘 해 놨는데....비수기엔 손님이 너무 없어 조금 안타까웠습니다
[지난 밤에 생긴 일] 지난 밤에는.......?? ㅎㅎ 밤 늦게 도착하여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는 와중에도 교우들간의 "친목행위"는 주님을 모시고 밤새는 즐 모르며 성대히 거행 됬습니다 어떻던 많은 교우들과 호텔앞 해변 벤치에서 라면을 끓이고 꽁치를 구으며 이런 저런 얘기와 "천관산"과 장흥이 배출한 인물들 얘기로 다음날 뜻깊은 천관산 산행 준비를 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밤에 생긴 일 非酒流派는 가고 酒流派는 다시 호텔 방안으로 옮겨 酒流와의 투쟁은 끈질기게 계속되었습니다 이 바람에 저는 천관산 산행을 고생스럽게 했습니다. ㅎㅎ
[아침식사후 호텔 라운지 호텔에서 준비한 아침 식사를 마친후 호텔 라운지에서 천관산 산행을 준비하며 안개 속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南海를 바라 보며 커피 한잔씩....캬~~ 커피인데도 캬~~!! 소리가 나더군요 ㅎ
점심 도시락을 지급 받은 산객들은 전남 장흥에 있는 "천관산"으로 출발합니다 호텔에서 천관산까지 제법 긴 시간을 달리더군요
[장흥군 관산면 소재 '천관산' 주차장] 준비운동을 하며 산행 준비를 합니다 주차장은 넓은 편이었으며 여러 편의 시설이 잘 되있었습니다
기념 촬영을 하고 .....
천관산을 감상하기 위해 산행 들머리로 들어 갑니다 아주 멀리 가운데 맨 마지막 희미하게 뾰쪽 나온 봉우리가 大勢峰입니다
[천관산 산행 약
[천관산 산행 개념도] 위 개념도의 아래 우측에 있는 [정안사]를 시간 관계상 다녀 오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번 천관산 산행시에 최우선으로 들리려고 했던 곳입니다만 불행이도 직접 다녀 오지 못해 지금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 산행을 하며 설명 드림니다
[호남제일지제영산] 湖南第一支提靈山 들머리 부터 뭔가 대단한 느낌을 주며 우릴 반기니 오를 생각으로 가슴 설래였습니다 지리산과 내장산, 월출산, 변산과 더불어 湖南地方에선 5대 명산에 속한다는 천관산은 支提靈山이라고도 불리워진답니다
支提山은 佛書 화엄경에서 '天冠보살이 머무른 곳'이라하는데서 연유하였다고 합니다 과연 天冠山에 天冠보살이 머무르는 곳인지 오늘 확실히 알아 보기 위해 지난밤 마신 酒님으로 움직이지 않는 발걸음이지만 支提靈山-天冠山으로 발길을 재촉합니다
[위석규선생 유허비] 장흥 魏氏 家門의 독립투사 덕암 위석규 선생(德庵 魏錫珪, 1878∼1913)의 遺墟碑가 나옵니다 遺墟地에는 '德庵魏錫珪先生遺墟碑(덕암위석규선생유허비)'와 義烈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독립투사 德庵 魏錫珪선생에 대해선 저쪽 비석에 쓰여있는 글의 내용으로 간단하게 갈음합니다만 평생을 독립운동으로 살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사라져 간 선생의 뜻을 기리고 또 기려야겠습니다 '짐승(倭)이 사람의 영토를 침탈하니 장차 모두 죽겠도다. 슬프다, 吾國(오국)이 盜獸(도수)들의 擄掠(노략)으로 國家(국가)가 存亡之秋(존망지추)에 다달아 백성이 盡滅(진멸)케 되었으니 우리들은 팔을 걷어 주먹을 쥐고 踊躍奮鬪(용약분투) 萬死一生(만사일생)의 각오로 이 領土(영토)를 지키자. 사람이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大義(대의)를 따르면 사람이요, 私慾(사욕)을 취하면 禽獸(금수)라. 항차 이런 일임에랴! 古今(고금)을 莫論(막론)하고 국난을 당하여 國家社稷(국가사직)을 붙잡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義憤慷慨(의분강개)하여 일어서면 모두가 이룰 수 있는 것이다. -1906 독립전선에 투신하면서 친일파들과 그 자손들이 아직까지도 당시 친일 행위를 정당화 하려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어쩔수 없었다". "지금의 당신이라도 그때였다면 친일행위를 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왜 나만 갖고 그래~!!?. 그때 부정축재한 재산 내 놓을 수도 없고 뺏어 간거 도로 내줘~~!!" 이런 괘변을 백범 김구선생이 들으면 뭐라고 할까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며 산화해간 안중근의사가 들으면... 유관순 누나의 만세운동은 한낱 부질없는 촛불시위 정도이었겠습니까? 만해 한용운선생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소리입니다 부유한 가정을 송두리째 갖다 바치며 목숨을 걸고 싸우다 사라져간 김좌진장군이 들으면 통곡을 하며, 그런 친일파 후손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시지 않을까요 " 너희들은, 자존심도 자긍심도 없냐? 쪽바리가 그렇게 좋으면 외놈으로 국적을 바꾸라" "왜? 이 땅에서 아직도 살고 있냐? !!"
[영월정] 최근에 새로 지은 듯한 영월정이 산행의 들머리이자 날머리입니다 오른쪽으로 올라 왼쪽으로 내려 옵니다
[금강굴 코스] 우리는 금강굴 코스로 가며 대부분의 천관산 내방객들은 이 코스를 이용합니 湖南地方의 기준은 어디를 말하는가? 분명히 "湖"의 南쪽인것은 틀림없는데 그 "湖"는 어디인가? 아시는 분을 아직까지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택리지, 신동국여지승람, 산경표, 대동여지도등 여러 문헌을 찾아 봤지만 확실한 해답은 얻지 못했으나 몇가지 說은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첫번째 說이 김제의 "벽골제"를 가리킨다고 하며, 이 '벽골제'를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湖南地方, 서쪽으로는 湖西地方으로 한다는 군요. 두번째 說은 錦江을 하나의 湖로 보고 錦江의 南쪽을 湖南地方이라 한다는군요 이렇다면 충청도의 일부도 湖南地方이 되는 것입니다
[長川齋와 太古松] 長川齋는 이 고장이 배출한 인물 중에 조선후기 실학자인 존재 위백규(存齋 魏伯珪, 1727~1798)선생이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는 곳입니다. 書堂인 셈이죠 長川齋는 현재 대대적인 보수공사 중이어서 들어 가 볼수 없었으며, 들어 가도 볼것은 없을듯합니다
[長川齋와 太古松] 600여년의 풍상을 거치며 흐르는 세월을 몸소 느끼며 살아 왔을 소나무는 아직도 젊음을 짱짱하게 유지하고 있는듯하며 한순간을 위해 이 산을 오르는 우리들에게 좀더 멀리, 좀더 크게, 좀더 자세히 천관산을 보고 가거라 !!~~라고 하는 듯합니다
長川齋를 지나 체육공원으로 오르는 길은 잘 꾸며진 공원이었습니다 長川齋는 이곳 옆의 개천이 '長川'이라 존재 위덕규선생이 붙인 이름이라 하며 長川齋 앞 계곡에 가로놓인 장천교를 건너 아름드리 소나무숲이 우거져 있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 長川 약 백미터에 이르는 계곡은 위백규선생이 長川八景이라 명명한 장천동이랍니다. 장천팔경에는 청풍담(淸風潭), 백설뢰(白雪瀨), 도화량(桃花梁), 세이담(洗耳潭), 명봉대(鳴鳳臺), 추월담(秋月潭), 청령뢰(淸靈瀨), 와룡홍(臥龍弘) 등이 있다고 하는데 단체 산행의 바쁜 일정으로 하나 하나 확인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체육공원] 누구를 위한 체육시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체육시설을 해 놓은 공원이 있습니다 이곳엔 "冬柏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자생하고 있더군요 겨울에 피는 꽃이라 冬柏이라면, 지금은 秋栢이겠군요
'체육공원'을 지나 다리를 지나면 본격적인 오르막 산행이 시작됩니다 빠른 산행을 하는 교우들을 따라 가기 위해선 서둘러야 합니다 이런 저런 것들을 자세히 관찰해도 집에 돌아 와 산행기를 쓸때엔 아쉬운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가급적 단체 산행으로 시간에 쫒기며 하는 산행은 피하고 홀가분하게 여유있게 산을 배우며 느끼며 하는 홀로 산행을 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관산' 같이 너무 멀리 있어 '나 홀로 산행'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과 경비가 들어 이런 경우엔 이런 저런 산악회를 따라 다닙니다
[쉼터] 땀이 나고 숨이 조금 차기 시작하니 쉼터가 나왔습니다 이럴때 쯤에는 언제나 묘하게도 이런 쉼터가 나오지요
[쉼터] 교우회의 7자 기수들을 따라 잡았습니다 7자 기수들이 제일 아래 기수인데 언제나 맨뒤에서 꼬리부분을 만들고 있으며 선배님들이 오히려 선두에서 산행을 더욱 힘차게 합니다. 이들은 선배들을 보호 하며 산행을 해서인지, 힘들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 7자 기수들은 요즘 8자 기수들이 新兵으로 참여한다고 즐거워 하는지, 세월을 탓하는지...??ㅎㅎ
오르막은 계속됩니다
[선인봉] 조금 오르니 이 능선의 첫번째 봉우리인 "선인봉"이 '나 여기 있노라~!!'하며 날카로운 자태를 드러 냅니다
[선인봉]의 옆구리로 선인봉을 오릅니다 선인봉은 커다란 바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선인봉]의 옆구리로 선인봉을 오릅니다
[선인봉] 선인봉을 올라 가까이 가 보았습니다
[선인봉을 이루고 있는 바위 중에 하나]
[선인봉] 왜 선인봉이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모양이 그럴듯합니다. 仙人을 말하는거겠죠?
'선인봉'을 지나니, 앙상한 나무가지 사이로 이상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풍광이 금강산의 산수화를 보는듯 瑞氣가 느껴지기 까지 합니다 안개 속에 나타나는 奇岩怪石 저 奇岩怪石으로 아홉개의 봉우리를 만들어 天冠山의 秘景을 만들어 낸답니다
奇岩怪石으로 이루어진 천관산의 봉우리들이 정말로 天冠을 쓴듯, 冕旒冠을 쓴듯 장업하게 다가 옵니다 이곳에서 바라 보는 天冠山이 가장 冕旒冠에 가깝게 보입니다 이 사진을 잘 기억하시기 바람니다
이름 모를 봉우리가 나타났습니다 이런 정도의 岩峰은 천관산에선 이름조차 없습니다
와~우!!~~ 저도 우리나라의 이런 저런 산들을 많이 다녀 보았다고 자부하는 자칭 산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멋진 산이 이런 곳에 있을 줄은 정말 까맣게 몰랐습니다 어떠십니까? 바로 앞에 있는 암봉은 이름도 없는 봉우리이고 바로 그 뒤의 암봉이 금강굴이 있는 鐘峰입니다 이 코스가 금강굴 코스라고 이름 붙여졌으니 鐘峰은 기억해 둬야겠죠? 종봉의 바로 뒤가 노승봉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이는 날카로운 봉우리가 大勢峰입니다 이곳에서 '금강굴 코스'의 모든 암봉이 보이는군요. 아름답습니다
大勢峰에서 북서쪽으로 뻗어있는 능선에도 멋진 봉우리들이 우리를 부름니다 시간 관계상 모든 곳을 가지 못해 아쉽습니다 저 능선에 선재봉, 관음봉, 신상봉, 홀봉, 삼신봉 등 다섯개의 봉우리가 있답니다
지나온 능선을 뒤돌아 봤습니다 선인봉이 이제는 오히려 초라한 모습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지나온 선인봉을 뒤 돌아보니 장흥군 관산읍과 관산평야가 눈아래로 펼쳐지고, 그 너머로는 제암산에서 사자산을 지나 일림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이 유장하게 뻗어나가는데 오늘은 안개로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이는군요. 오늘 산행에 최대 아쉬움이 안개로 주변 경관을 촬영하지 못한것입니다
[금강굴] 鐘峰 아래에 있는 '금강굴'에는 약수가 나왔습니다. 바위로만 이루어진 岩峰에 샘물이 있다는 것은 기이한 일입니다 그래서 지나는 산객들은 한모금이라도 마셔 보려고 길게 줄을 섰습니다
[金剛窟] 금강굴(金剛窟)의 천정에서는 물이 병아리 눈물 많큼씩 떨어져 '샘'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이 깊이 들어가 조금씩 퍼 올려야 한모금 마실수 있어서인지 행렬은 줄지 않았습니다 이 샘물은 인간 보다도 날짐승과 들짐승들에게 더 유용할텐데...그들이 마셔야 할텐데... 베낭에 물을 가득 가지고 다니는 인간들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물론 저도 욕심 많은 놈 중에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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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한 표지판이 [鐘峰]임을 알리고 있으며 계단을 이용해 鐘峰을 오릅니다
[鐘峰] 鐘峰에 올라 鐘을 찾아 보았는데 이것이 鐘을 의미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바위들은 제각각 자신의 특징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鐘峰]뒤에서 내려다 본 [선인봉] 봉우리들은 보는 각도에 따라 멀리 보이기도 하고 가까이 보이기도 합니다
[老僧峰] 鐘峰 다음 봉우리가 老僧峰입니다. 저는 老僧과 젊은 僧이 함께 '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을 외고 있는듯합니다 마주보고 목탁을 치고 있는것 같죠?
[鐘峰]에서 줌인하여 올려다 본 [大勢峰] 우측 바로 앞이 [老僧峰]이고 가운데 하늘을 찌를듯 솟아 있는 봉우리가 大勢峰입니다 그리고 좌측의 봉우리가 [문수보살봉]이랍니다 주차장에서 멀리 보였던 봉우리가 이 大勢峰이었던 것입니다 천관산 冕旒冠의 하일라이트라 생각되는 봉우리입니다
老僧峰 옆구리를 돌아 大勢峰으로 올라 갑니다 이곳은 암벽이라 계단을 설치해 놨더군요 무릉도원을 가는 듯.... 玉皇上帝가 사는 天上으로 가는 듯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천관산에서 느낀 '가장 천관산 다운 광경'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大勢峰은 분명히 冕旒冠 같았고, 가는 길은 天上路였습니다
[大勢峰 관악산의 왕관바위와는 비교됩니다 물론 천관산의 모든 봉우리를 합쳐 冕旒冠이라 했겠지만, 어느 봉우리를 冕旒冠으로 칭할려는지 꼭 하나를 꼽으라면 大勢峰이라고 하고싶습니다 大勢峰 아래 갈림길에 왔습니다 이곳에서 바로 좌측으로 가면 天柱峰에 빨리 갈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직진하여 사진에 멀리 보이는 두사람이 서있는 곳 大勢峰과 [善才峰] 사이로 넘어가 빙 둘러 가면 엄청나게 아름다운 천관산의 山勢를 볼수 있으니, 힘 들드라도 넘어야 합니다
大勢峰과 [善才峰]을 다른 각도에서 촬영했습니다 大勢峰과 [善才峰] 가운데 두사람 서 있는 곳 보이시죠? 꼭 저 고개를 올라가 善才峰 능선 아래에 있는 "天冠寺"도 내려다 보고 大勢峰을 좌측에 끼고 빙 돌아 나가세요
大勢峰과 [善才峰] 사이의 고개에 올랐습니다 암벽들이 잡아 먹을 듯 보이지만 위험하지 않으니 안심 하세요~ ㅎㅎ
[大勢峰 멀리서 그렇게 神秘한 冕旒冠처럼 보였던 大勢峰도 가까이서 보니 하나의 암벽일 뿐이군요...에구~ 허무해라~~ 에구~ 사는게 그렇고 그런기니끼~~그래도 '大勢峰'에 올랐습니다 주차장에서 여기까지 1시간 40분정도 걸렸으니 제법 먼 거리입니다
[선재봉(善才峰)] 이 봉우리 이름 선재봉은 정확한 이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선재봉이라 부르더군요. 맞을겁니다 이 능선에는 선재봉(善才峰)과 관음봉(觀音峰), 신상봉(神象峰), 홀봉(笏峰), 삼신봉(三神峰) 등 다섯 개의 암봉이 차례로 솟아 있다고 하며 끝에 "천관사"가 있다고 합니다 지척 거리인데도 오늘은 안개 때문에 사진 촬영을 못했습니다
善才峰에서 내려다 본 지나온 봉우리들 노승봉, 종봉, 선인봉이 줄을 서서 능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오른쪽 능선이 {金水窟]이 있는 금수능선입니다
善才峰에서 대세봉 사이의 고개 저의 일행들- 특히 후배들이 올라와 이제부터 함께 하산 할때까지 같이 산행을 하게 됩니다
대세봉을 왼쪽에 끼고 고개를 넘어 돌아 나아가니 건너편 능선에서 새로운 天冠山이 우리 앞을 가로 막고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의 첫사랑 "천관녀"를 들어 보신 분들이 많으실겁니다 "삼국사기" 위인열전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김유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에 "천관녀"가 등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된 "천관녀" 그녀는 정말 천관산으로 가 "천관보살"이 되었을까? 대세봉 뒤로 또다시 펼쳐지는 동양화 같은 풍경이라면 그녀는 틀림없이 날개 달린 백마를 타고 "천관산" 여기로 날라와 "천관보살"이 되었을것 같기도 합니다 아름답습니다
[문수보현봉]을 돌아 가니 돌탑이 하나 있으며, 문수보현봉은 가까이서 볼수 없었습니다 우회도로를 돌면 중요한 봉우리를 놓치기 일수입니다 신라에 의해 멸망한 '금관가야국'의 왕족인 김유신 신라에 빌붙어 잘 살아 가려면 신라 진골세력들에게 잘 보여야했겠습니다 철저한 품골 계급사회였던 신라에서, 패망한 나라의 왕족은 더욱 경계시 되었습니다 그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유신의 어머니는 아들 김유신을 공부 잘하고 튼튼한 사나이로 키워 진골세력에 들어 가 신라의 핵심 권력 속으로 들여 보내고 싶어했습니다 어느 어머니나 모두 같은 마음이겠지만 특히 김유신의 어머니는 자식 교육을 철저히 했죠 현대 교육학에서도 김유신 어머니의 가정교육은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문수보현봉 에서 바라보는 "眞竹峰" 환희대에서 구룡봉 가는 길에서 알게 된 이름입니다만 "眞竹峰" 정말 아름답습니다 김유신이 화랑 훈련병 시절 - 그러니까 사춘기 때 쯤이겠지요 이 놈의 씨끼가 엄마가 하라는 공부는 않하고 어떤 여자를 무쟈게 좋아해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그 년한테 가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김유신의 어머니는 화가 머리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뿔따구가 났습니다 어느 날, 참다 못한 엄마는 김유신을 불러 꿇어 앉혀 놓고 작살을 냅니다 "너 이놈!!~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새파란 놈이 기생 치마 폭 속에서 노닥거려서 되겠냐?" " 다시 한번 더 그 뇬한테 가서 연애질 하면 다시는 너를 안볼것이야!!~~" 김유신은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않겠다고 어머니에게 맹세를 합니다 그 뇬이 "天官女"라고 하는 기생이었답니다 삼국사기에 娼家의 女이라 "天官女"를 역사학자들이 기생이라고 추측했습니다만 요즘 새로운 학설에는 "天官女"가 왕실에서 제사를 지내는 관직을 가진 여자였다고 합니다 일종의 무당 같은 것이란거죠. 아직 확실한 결론이 난 것은 아닙니다
[天柱峰] 문수보살봉을 돌아 나아가니 天柱峰이 나왔습니다 천몇백년전 어느 날 -- 김유신이 화랑 무예 수련을 마치고 자신의 말을 타고 집에 돌아 오는 도중 너무 피곤해서 말위에서 잠이 들었답니다 "히이~이히힝" 하며 우는 말 울음 소리에 잠이 깬 김유신앞에는 언제나 처럼 "天官女"가 화려한 옷을 입고 요염한 모습으로 김유신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잠자고 있는 사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말은 천관녀의 집으로 간것입니다 김유신은 어머니와 한 약속이 뇌리를 때리고 지나갔겠죠 성질 무쟈게 난 김유신은 그 자리에서 말의 목을 베어 버렸습니다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이 놈의 말이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갔다는 보복이죠 말의 목에서 터져 나오는 피를 흠벅 맞은 "천관녀" 여자의 온갖 자존심 다 망가지는 치욕의 순간이었죠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지 개쎄이가 왜 죄없는 말의 목까지짜르고 내몸에 개피도 아닌 말피를 퍼 붓고 스타일 꾸기고 개지랄이야? 내가 세상에 남자가 한둘이냐? 이 씨~세이야~!! 김유신과 천관녀는 이렇게 볼썽사나운 이별을 했습니다 말(馬)이 죽어 영혼이 하늘 나라로 가며 김유신에게 이렇게 씨부렸겠지요 "이 쎄파라~ 니가 매일 가던 곳으로 간것 뿐인데~~ 왜 나한테 화풀이를 하냐? XX씨끼" 내가 잘못한게 뭐가 있냐? 어제는 딴대로 간다고 지랄하더니... 아이구~ 내 목아지 어디갔어? 내 목아지 내놔~~개쎄이"
[天柱峰] 천주봉 아랫도리를 돌아 천주봉으로 올라 갑니다 말의 목을 베면서까지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했다는 대장부 기질을 묘사하기위해 김부식이는 다소 과장해서 삼국사기를 썼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천관녀"와 헤어진 이유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다른 이유를 대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천관녀"는 기생이 아니라 왕실에 제사를 관장하는 궁중무당같은 여자이라 왕궁에 자주 드나 들어 김유신과 뗄래야 뗄수없는 관계에 있던 "김춘추"와 서로 "짝사랑"을 했던 삼각관계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김춘추는 후에 무열왕이 되며 삼국통일을 이루는 신라 최고의 왕이 되는 진골계급이어서, 패망한 금관가야의 김유신이 김춘추에게 잘 보이기 위해 "천관녀"를 양보 할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김유신과 천관녀와의 관계를 잘 아는 김유신의 어머니가 김춘추를 의식해서 천관녀를 만나지 못하게했다는 설도 유력하다고 생각 됩니다 男子란 묘한 동물이라 무당 같은 기괴하게 신들린 듯한 여자들로부터 더욱 쎅씨함을 느낀다네요. 그런데 저는 아님니다~~ 울 마눌만 좋아합니다 ㅎㅎ
뒤따라 오는 후배들 - 무어가 그리 즐거운지 마냥 웃고 다닙니다 세월이 흘러 삼국퉁일을 이룩한 후 김유신의 나이가 환갑을 넘을 쯤 서라벌의 어느 길모퉁이에서 김유신이 "그 때 그 여인"을 만납니다 "천관녀"임을 알아 본 김유신이 달려가 아는 척 합니다 다음은 제가 그냥 날라리로 꾸며 본 그들의 대화입니다 김유신 : 천관녀!!~~ 천관녀 맞지요? 천관녀 : (눈을 아래로 깔며 약간 튕기며) ...... 김유신 : 이게 얼마만입니까? 정말 오랜만이군요 천관녀 : ....... 김유신 : 그 때는 정말 내가 잘못했소... 엄마가 하도 야단을 쳐서.... 천관녀 : ....... 김유신 : 용서해 주구려~ 그리고 이젠 같이 살자구요~ 천관녀 : 이제 모두 지나간 추억일뿐입니다. 저는 인간이 아닙니다. 옥황상제께서 저를 내려 보내며 삼국을 통일 시킬 인물을 찾아내라는 명을 내렸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군을 선택하여 삼국을 통일 시키게 하였으니 저의 임무는 이제 끝난것입니다 김유신 : 무신 말씀을.... 이제 삼국통일도 했으니 나랑 같이 백년해로하자꾸여~ 나 이젠 돈도 무지하게 많어~ 사 달라는거 모두 사 줄께~ 집도 새로 짖고 <김유신은 진짜로 천관녀를 기리는 "천관사"라는 절을 지었습니다. 현재 경주에 복원하고 있습니다> 천관녀 : (쭝얼쭝얼 ~주문을 외우니 하늘에서 날개 달린 백마가 내려 옵니다. 백마를 타고 날라 가며) 안뇽~~ 빠이 빠이 잘 먹고 잘살아라~ 김유신 : (자신의 말을 몰고 백마를 빠지게 따라 갑니다) 같이 가!!~~ 왜? 내가 이젠 늙었다고 싫은거야? 이 할망구야!!~~ 너도 이젠 할망구야!!~~ 아직도 니가 2x8청춘인줄 아냐? 가지마!!~~ 김유신이 한없이 따라 갔는데 어느 산에서 갑자기 천관녀가 탄 백마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산이 바로 여기 "天冠山"이라는 것입니다
[天柱峰] 천주봉을 오르고 있습니다 위에 이야기는 제가 각색을 해서 약간 재미있게 꾸민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고있는 내용과 비슷할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확실한 것은 천관산과 천관녀의 한자 표기가 서로 다른 天冠山과 天官女이라 같은 천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天冠은 면류관이라는 뜻이고, 天官은 어떤 관직을 뜻하는데 궁중무당이 아니었는지 한답니다 재미있었나요? ㅎㅎ
[天柱峰] 천주봉에선 眞竹峰이 더욱 아름답게 보입니다 천관녀를 천관산에 끌어 들인 사람은 아마도 이 지역 공무원이나 지역발전협의회 관련자들이 아닐까요? 느닷없이 천관산과 천관녀가 관련이 있다고 사람 횃갈리게 만들어서 그 바람에 저는 삼국사기 공부를 많이 했답니다. ㅎㅎ 그 덕택에 김유신과 천관녀 이야기는 제법 깊이 있게 알게 됬습니다
[天柱峰] 올라 와서 [天柱峰]을 바라 보니 또 허무합니다 하늘에 기둥을 박아 '천관녀'가 옥황상제께로 올라 갔을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 아래에서 볼때는 신비스럽게 보였는데.... 천관녀가 저 돌기둥에 앉아 염불을 외지는 않았겠죠? 궁둥이 아퍼~ㅋㅋㅋ
天柱峰에서 바라 보는 우측의 眞竹峰과 좌측에 보이는 봉우리가 우리가 가야할 大藏峰과 歡喜臺
[大藏峰] 만권의 책이 쌓아 진것같다고 대장봉이라 한답니다 歡喜臺가 저 大藏峰위에 있기 때문에 歡喜臺에선 大藏峰이 보이지 않더군요
[歡喜臺] 기쁘할 歡, 기쁠 喜얼마나 기쁘겠습니까 !!~ 드디어 하늘이 열리고 계곡에서 움터 올라온 기운들이 폭발하여 하늘로 올라 가는 듯합니다 동행한 후배들은 알겠지만 여기서 정수라의 "歡喜"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대 기쁨을 나에게 보내 주오~~♬ 그런데 끝까지 몰라 ■☆←♣♧⊙♨ 중단했습니다 ㅎㅎ
[歡喜臺] 정상은 언제나 기쁨과 허무를 줍니다 그러나 [歡喜臺]는 사방이 뻥 뚤려있어 가슴을 후련하게 해 주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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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歡喜臺]와 이정표 사진 속의 설명을 읽으세요.
[歡喜臺]에서 바라 본 지나온 봉우리들 환희대에서 부터 북쪽으로 솟아 있는 대장봉과 천주봉, 문수보현봉, 대세봉, 선재봉, 관음봉, 신상봉, 홀봉, 삼신봉 등 아홉 개의 암봉을 일러 "九程峰"이라고 한답니다. 이 아홉개의 봉우리가 만들어 내는 "天子의 冕旒冠을 쓴 天冠山"을 이제까지 지나 왔습니다
[歡喜臺]에서 바라 보는 앞으로 가야할 연대봉과 억새능선 가운데 보이는 봉우리가 722m봉이며 그 다음이 710m봉, 멀리 뾰쪽한 젖꼭지같은 봉우리가 천관산의 최고봉인 烟臺峰입니다 九龍峰을 다녀와 다시 이 길을 갈것입니다
[남서쪽 九龍峰 방향] 九龍峰이 좌측에 조금 보입니다 환희대에 오르면 九龍峰은 반드시 다녀 와야하는 코스이랍니다
억새 숲을 지나 九龍峰으로 나아 가는데 龍頭가 보입니다 벌써부터 九龍峰의 모양새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 사진 전체가 龍이 昇天을 하려는 듯 트림을 하고 있는 듯 하지 않습니까?
九龍峰으로 가는 억새밭 사이 사이로 가을 정취는 뭍어나고....
[眞竹峰] 大勢峰, 天柱峰에서 바라 보던 [眞竹峰]을 바로 앞에서 바라 봅니 歡喜臺에서 북서쪽으로 眞竹峰과 비로봉, 중수봉으로 뻗어가는 능선은 능선 전체가 하나의 연재 소설처럼 재미있는 설화가 있더군요. 산행 들머리에 있는 장천제를 지은 존재 위덕규선생이 천관산을 너무 사랑하여 천관산에 대해 한권의 책을 쓰셨는데 이 책의 이름이 "支提誌"인데 재미 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수록하고 있더군요 存齋선생의 "支提誌"에서 이 眞竹峰능선을 가리켜 '관세음보살이 석가모니의 말씀을 따르고자 진불(眞佛)을 돌배(石船)에 싣고 바다를 건너 천관산으로 가서 불경을 내려놓은 곳이 大藏峰이고, 돛대가 眞竹峰이며, 돌배가 石船峰이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니 眞竹峰의 우뚝 솟은 돌기둥이 "돛대"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九龍峰으로 나아 갑니다 금방 龍이 튀어 나올것만 같습니다
[九龍峰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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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龍峰 설명과 九龍峰 입구] 九龍峰은 보시는 바와 같이 아홉마리의 용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노닐던 곳이라 九龍峰이라합니다
[九龍峰 정상]
[九龍峰 정상] 九龍峰 아래로는 천길 낭떨어지입니다. 안내판에서도 보았지만 명주실 한타래를 풀어도 닫지 않을 정도이니 얼마나 깊은 낭떨어지인지 짐작이 가시지요?
[九龍峰 정상에서 바라 보는 眞竹峰과 비로봉] 九龍峰 정상에는 아홉마리의 용이 노닐때 파여졌다는 발자국 웅덩이가 여기 저기 있습니다 이 웅덩이는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물 보이시죠?
[九龍峰 정상에서 바라 보는 좌로부터 환희대, 722m봉, 연대봉] 멀리 보이는 연대봉도 좋지만 바로 앞에 보이는 九龍峰의 바위들이 살아 꿈틀대는 듯 합니다 龍의 다리가 움직이는듯하군요
九龍峰 정상에서 정상酒를 한잔 했습니다 사진 속의 인물들은 저와 동행한 저의 "띠동갑"들입니다만 저를 친구처럼 대해줘서 항시 함께 산행을 했습니다 ㅎㅎ 저는 후배들이 많이 돌보아 줍니다 저 친구들도 쬐끔만있으면 금새 세월 흘러 나와 같은 선배 되리라~ 에구 세월아 네월아-- 九龍峰 정상에서 쇠주 한잔은 龍이 昇天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저를 챙겨주는 후배들을 위해 詩 한수 읊어 드려야 겠습니다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박우현
이십대는
서른이 두려웠다
서른이 되면 죽는 줄 알았다
이윽고 서른이 되었고 싱겁게 난 살아있었다
마흔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삼십 대에는 마흔이 무서웠다
마흔이 되면 세상 끝난 줄 알았다
이윽고 마흔이 되었고, 난 슬프게 멀쩡했다
쉰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예순이 되면 쉰이 그러리라
일흔이 되면 예순이 그러리라
죽음 앞에서
모든 그때는 절정이다
모든 나이는 아름답다
다만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를 뿐이다
九龍峰 에서 환희대로 되돌아 가고 있습니다 진죽봉과 환희대가 그림 같습니다 앞에 올라 오는 어린이들 보이시죠? 어른들의 가이드도 없이 이렇게 높고 험난한 산을 자기들끼리 올라 오더군요 초등학교 6학년 3명과 4학년 한명이, 일요일을 이용해 천관산엘 올랐답니다 요즘 컴퓨터 앞에서 세월 가는지 모르고 게임이나 하는 어린이들이 많은데 땀을 흘리며 자기와의 싸움을 하며 천관산을 오르는 이 어린이들이 하도 가상해서 기념 사진을 찍어 주기로 했습니다
이 어린이들입니다 山을 오른다는 것은 人生을 오르는 것입니다 이 친구들 넷이서 오늘은 천관산을 점령해 보자고 했답니다 그래서 천관산 '구룡봉'에서 이들이 추억을 남기고 간직할수 있도록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첨단 인터넷 시대에 살고 있어 이 사진은 곧바로 이 어린이들에게 전달 될것입니다 저의 블로그 '홍어와 무인도'를 알려 주었기 때문에 쉽게 찾아 들어 왔을겁니다 "얘들아! 이 사진 보았으면 댓글 하나 달고 가렴~~ 그래야 너희들이 보았는지 알수 있쟌아~" 요즘 인터넷 모르는 어린이는 없으니까요....그리고 사진 퍼 가고 싶으면 얘기해~ 내가 이메일로 보내 줄테니까 이 어린이들 대단하고 예쁘고 씩씩하고 공부 잘 하게들 생겼죠?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탑산사 계곡에도 기암괴석들은 난무하고 있습니다 천관산이 천관보살이 살던 신령스런 산이라 옛날엔 이 천관산에 엄청나게 많은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대부분 사라지고 천관사와 탑산사, 장안사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九龍峰에서 歡喜臺로 되 돌아 오는 풍경도 만만치 않습니다 장흥이 낳은 文人중에 "한승원"씨가 있지요. 그냥 한승원씨라 하면 잘 몰라도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쓴 소설가 한승원씨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아!~ 그 사람!!합니다. (사실 소설 이름은 알아도 작가 이름은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지요 ㅎㅎ)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더욱 유명해졌으며 강수연이라는 배우를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으로 수상하게하여 스타덤에 올려 놓아 세계적 배우로 발돋움 시키기도 했습니다 강수연이라는 배우가 그도 여자인데 그 여자가 아무리 배우라 해도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머리를 빡빡 밀기는 쉽지 않은데 과감히 밀고 열연을 했습니다 율부린너, 헤글러 보다도 더 빡빡 민 강수연. 그래서 더욱 유명해진 영화와 소설입니다. 그러니 저도 알지요 그 "아제아제 바라아제" 소설의 배경이 이곳 천관산 천관사에서 부터 시작되었다는군요 아!~ '파란문'의 산행기는 왠지 자꾸 읽고 싶지 않은가요? ...ㅎㅎ---
환희대로 돌아 오고 있습니다 한승원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소설 공부를 하기 위해서 천관산의 천관사에 갔다가 억새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깊은 심오한 느낌을 받아 오랫 동안 잊을 수 없었답니다 그 양반이 쓴 어느 글에서 그는 '..... 자드락길 굽이굽이마다 들솟아 있는 억새풀, 띠풀, 싸리풀들이 내 키를 재면서 겨울 찬바람에 몸부림치며 울어댔다. 내 몸속에 그 억새숲의 울음이 절절이 스며들고 있었다. ...... 그 바람소리는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가슴 속에 머무르고 있다. .......'
환희대에서 연대봉으로 가고 있습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부성의 아픔 만을 남기고 떠난 아버지 운봉스님, 돈과 섹스에 눈이 먼 어머니 제주댁, 어머니와 내연의 관계이면서 자신을 겁탈한 중년의 사내, 현종 선생 현종 선생과의 오해로 인한 이별 등으로 속세의 아픔을 느낀 순보(강수연)는 이 세상 등지고 여승이 되고자 덕암사에 찾아오고..... 머리 빡빡 깍고..... 더 자세한건 직접 읽어 보세요....더 이상 쓰려니 눈물 나요
[722m봉에서 뒤 돌아 본 환희대] 멀리서 보는 광경과 가까이서 보는 광경이 너무나 다름니다 장흥이 낳은 또 한분의 소설가 - 이 청준 이분 아깝게 지난 7월에 운명하셨죠. 광주일고와 서울대 독문과를 나온 수재이십니다 운명 소식은 뉴스에 무지 많이 나왔으며 특히 연예뉴스에 많이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인기 연예인들이 문상을 많이 해서이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이청준선생이 쓴 소설이 어디 한두권이겠습니까만 제가 아는 소설은 묘하게도 또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더욱 유명해진 "서편제"입니다 '서편제'를 생각하면 생각만 해도 저는 눈물이 납니다 임권택 감독은 이청준선생의 "서편제"라는 영화로 오정혜라는 신출내기 국악인을 배우로도 성공시켰으며, 김명곤이라는 배우가 '우리나라 제8대 문화관광부 장관'이 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작품이기도하죠
천관산의 정상 烟臺峰은 점점 더 가까워 오는데 "서편제" 1960년대 초 이 천관산이 있는 장흥과 보성 사이의 보성 소릿재에서 누나와 아버지를 찾아 다니던 동호(김규철)는 주막 여주인의 판소리를 들으며 회상에 잠기면서 영화는 시작됩니다요. 이 천관산 봉우리의 억새밭이 그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마을 대갓집에서 소리품을 팔던 유봉(김명곤)은 동호(김규철)의 어미 금산댁을 만나 자신의 양딸 송화(오정해)와 함께 새 삶을 꾸리고 살아 가던 중에 금산댁이 아이를 낳다 둘 다 죽자 유봉(김명곤)은 아이들(동호와 송화)을 데리고 소리품을 팔며 이곳 저곳 이 마을 저마을을 떠돕니다. 동호에게는 북을 송화에게는 소리를 가르치던 중 동호가 생활고와 유봉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떠나버림니다 유봉은 송화도 자신을 떠날까 봐 떠나지 못하게 아릿따운 송화의 눈을 멀게 하지요. 봉사를 만듭니다. 아무리 양아버지라도 어찌 이런 짓을.... 또한 눈이 멀면 이 아릿따운 소녀에게 얼마나 한이 서리겠습니까? 봉사가 된 송화의 소리에서 한서린 통곡의 소리가 나오도록 하기 위해 그녀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이 장면을 생각만해도 눈물이 납니다 시력을 잃어가는 송화를 정성스레 간호하는 유봉, 그러나 그는 죄책감으로 죽어가며 송화에게 그 일을 사죄합니다. 세월이 흐른 후, 유봉과 송화를 찾아 헤매던 동호는 이름 없는 주막에서 송화를 만납니다. 송화에게 판소리를 청하는 동호, 송화는 아버지 유봉이 치던 똑같은 북장단을 치는 그가 동호임을 알지만... (흑흑..아이구 슬퍼라) 눈먼 송화는 벌써 희끗 희끗한 머리카락으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데..... 아 너무 슬퍼 더 이상 산행기를 쓸수가 없네요. 책 사서 읽던지 검색해서 영화를 보시던지 하세요 이 대사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년아! 가슴을 칼로 저미는 恨이 사무쳐야 소리가 나오는 뱁이여...! " '아제아제 바라아제'와 "서편제"는 자꾸 생각납니다 모두 너무나 슬픈 사연을 안고 살아 가는 한많은 여인의 이야기라 더욱 가슴 저밉니다 長興은 정말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下山하면서 長興이라는 고을 이름을 탄생시키는 女人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연대봉 못미쳐서 오른쪽으로 甘露泉이 있습니다 이런 곳은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1~20m정도 밖에 안되는 거리를 갔다 오는 분들이 별로 없더군요
[甘露泉] 남쪽 나라이기에 아직도 억새는 푸른빛을 띄고 있습니다 억새꽃에 맺힌 아침 이슬이 녹아 들어 만들어진 샘물 - 甘露泉 이 엄청난 억새가 만들어 낸 달콤한 샘물 甘露水를 마시지 않고 그냥 가시는 분들은 뭣하러 천관산에 왔는지 이해 할수 없습니다
띠 동갑들이 친절하게 떠 주는 甘露水를 마시니 甘露水여서라기 보다는 띠동갑들의 정성에 더욱 달콤함이 느껴지며 힘이 솟는 듯 했습니다
연대봉 가는 길 烟臺峰은 어느 여인의 풍만한 가슴 같아 보였습니다 산은 늙어 모난데는 없고 그저 평온하고 포근한듯 합니다 풍랑의 청춘을 지나, 중년의 풍요를 맛보고, 늙어 가는 듯 합니다 大勢峰, 天柱峰, 眞竹峰, 九龍峰등의 지나 온 산등성이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烟臺峰] 천관산의 최고봉 烟臺峰에 왔습니다 천관산은 환희대를 기점으로 모습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북서쪽으로는 아홉개의 봉우리가 아직도 젊음을 보이며 날카로운 산세를 보여 주었지만 연대봉 방향, 즉 동남쪽 방향으로는 산은 늙어 무등산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烟臺峰은 중요한 봉수대가 있던 봉우리여서 烟臺峰이라 한답니다
[烟臺峰] 천관산의 정상입니다 많은 산객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天冠山이 天子의 冕琉冠이라 생각하면 天冠山의 실제 정상인 [烟臺峰]은 天冠山을 대표하는 봉우리로 생각되지않습니다 오히려 지나온 大勢峰, 天柱峰, 眞竹峰, 九龍峰등이 天冠山을 대표하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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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烟臺峰 정상석과 연대봉에 대한 설명 烟臺峰의 烟자도 연기 "연"자이지요, 煙자와 같은 뜻입니다만 烟臺 는 하나의 단어 입니다 .烟臺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제가 부연 설명합니다 烟臺(연대)는 고려시대부터 만들어 사용했으나 조선초에 본격적인 역활을 합니다 조선(朝鮮) 시대(時代) 4대 세종(世宗)대왕 때 외적의 침입(侵入)을 막기 위해 최변경(最邊境)에 설치(設置)한 봉수대(烽燧臺)를 말한다는군요 대(臺)는 사각형으로 쌓아 올렸는 데, 높이가 30척(尺), 밑면 1변의 길이가 20척이며, 그 둘레 바깥에 깊이 3척의 끝이 뾰족한 목익(木弋)(나무 말뚝)을 여러겹 둘러 박았답니다 대(臺) 위에는 가옥(假屋)을 짓고, 무기(武器)와 생활(生活) 용구를 준비하고, 봉화간(烽火干) 5인, 화포군(火砲軍) 2인, 망군(望軍) 2인, 감고(監考) 1인이 10일씩 근무하였답니다. 적이 나타나면 연기(煙氣)와 횃불로 다른 烟臺에 알리고, 신포(信砲)(신호(信號)로 쓰던 화포)를 쏘아 인근 주민(住民)에게 재빨리 알렸으며, 적이 침입(侵入)하면 요새로서 화포와 궁노(弓弩)를 쏘아 적을 방어하였답니다 그러므로 烟臺와 烽燧臺는 엄밀하게 얘기하자면 조금 다름니다
[烽燧臺] 烟臺峰 봉수대는 1149년(고려 의종 3년)에 처음 설치한 이래 계속적인 개축을 해왔는데, 지금의 봉수대는 1986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봉수대는 외적의 침입을 장흥의 억불산과 병영면의 수인산으로 알리는 동시에 제주도 한라산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내륙으로 전하는 곳이었다고합니다. 연대봉은 장흥에서 가장 높고 전망이 뛰어난 곳이어서 봉수대의 입지로는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군요
[烽燧臺 위에서 여기서는 호남정맥 마루금이 지나는 제암산과 사자산이 보이고 또한 완도의 상황봉, 해남의 두륜산, 영암의 월출산, 광주의 무등산까지 다 보인답니다 날씨가 아주 맑은 날은 한라산도 보인다고 하는데.... 닝기리~ 오늘은 안개 때문에 모두가 오리무중입니다..ㅉㅉ.
[烽燧臺에서 지나온 환희대 방향과 아홉개의 구정봉] 歡喜臺에서 부터 북쪽으로 솟아 있는 大藏峰과 天柱峰, 문수보현봉, 大勢峰, 善才峰, 觀音峰, 神上峰, 홀봉, 삼신봉 등 아홉 개의 암봉을 일러 "九程峰"이라 한다는 능선이 잘 보입니다 이 아홉개의 봉우리가 만들어 내는 "天子의 冕旒冠을 쓴 天冠山"이 아름답습니다 앞에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페라글라이딩을 준비하는 광경이 보였습니다
[烽燧臺에서 九龍峰을 바라 봅니다] 九龍峰을 배경으로 준비하던 페라글라이딩이 날개를 펴고 하늘로 솟아 오릅니다 페라글라이딩하는 실제 상황은 처음 봅니다. 바람이 불어 오는 방향으로 날라 오르더군요 九龍峰이 더욱 신비롭게 보입니다
[烽燧臺에서 바라 보는 불영봉 능선] 이 능선이 남동쪽으로 뻗은 불영봉 능선이라고 한답니다
봉황봉 능선으로 하산 이제 언제 또 다시 올것인가!~~ 그 동안 제법 많은 산을 돌아 다녔지만 오늘 天冠山은 영원히 잊지 못할 산으로 각인 되었습니다 '홍어와 무인도'를 아껴 주시는 횐 여러분! 시간 나실때 天冠山은 꼭 한번 다녀 오시라고 추천 드림니다 산행 시간도 슬렁슬렁 볼것 다 보고, 조사 할것 다하며 걸어도 5시간 정도 걸렸으니 거리가 멀다는 단점 이외에는 부담도 없으니 추천하고싶군요 하산하는 길목에 쌓여져 있는 돌무덤을 애뜻한 연정만을 남기고 홀로 떠나니 어쩐지 쓸쓸해 보여 미안한 느끼마져 듭니다
하산 하며 뒤돌아 본 연대봉 산객들도 무척 많이 찾아 왔더군요. 저만 이제까지 몰랐지, 다른 분들은 이미 아시고 천관산 품에 안기셨더군요
평범한 듯 보이는 능선을 내려 오니 곳곳에 전망대가 있었습니다 이 능선이 멀리서 볼때엔 평평한 능선으로 보였으나 의외로 아기자기한 암릉이더군요
제가 오늘 산행 들머리에서 [산행 개념도]를 보여 드리면서 "정안사"를 꼭 들리려고 했는데 시간 관계상 들리지 못해 매우 아쉽다고 했습니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좋은 공부거리도 되오니 읽어 보시기 바람니다
長興이라는 이 고을 이름을 한문으로 보면 금방 그 뜻을 알수 있겠죠? "길이~길이 흥하라"라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이 長興이라는 이름이 지어지는 이유가 高麗史에도 나오니 얼마나 중요한 시대적 산물인지 가늠할수 있어 집중 탑구를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900년전 어느 날 밤... "황색의 큰 깃발이 집의 중문에 세워지면서 깃발의 꼬리가 왕의 침소인 선경전 지붕의 용마루 끝을 감싸고 돌며 휘날리는 꿈을 꾸었다" - 高麗史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 앞으로 쓰는 글들도 高麗史를 토대로 나름대로 풀어 씁니다 이 꿈을 꾼 사람은 당시 문하시랑-요즘으로 따지자면 대통령 비서실장 정도 되는 "이 위"라는 사람이었고 이 사람은 앞으로 태어날 "女人"의 외할아버지가 됩니다 외할아버지 "이 위"가 꾼 꿈은 후에 궁궐의 왕의 침소인 선경전에서 놀게 될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했습니다 이 "여인"의 아버지는 당시 중서령이라는 관직에 있었던 이곳 長興 출신 "임 원후"라는 분입니다
1126년 여름으로 가는 6월에 이 "여인"이 高麗 인종의 왕비가 되고 아들 다섯을 낳는데 그 중에 아들 셋이 줄줄이 왕이 되니 그들이 "의종","명종","신종"입니다 우리나라 5,000년 역사에서 이런 엄마는 눈씻고 찾아 볼려고해도 찾아 볼수 없습니다 가히~ 우리나라 최고의 "여인'이자 "엄마"입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어디 가서 "나는 이 얘들의 엄마야~"라고 폼좀 잡을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엄마가 가끔 친정을 찾아 개경에서 머나먼 이곳 장흥까지 행차 할때는 가히 상상이 가시나요? 이 엄마는 딸도 넷이나 낳아 왕자와 공주를 데리고 행렬을 이루며 금의환향하곤 했답니다 오래도 살았는데 75세까지 살았습니다. 당시로는 무지무지 장수한것입니다 하여간 여자는 애를 잘 낳아야 건강하기도 하고 대우 받는 다니까요~ ㅎㅎ 이 "女人"이 그 유명한 공예왕후입니다 인종이 공예왕후에게 너무 고마워 공예왕후의 고향 이름을 지어 주었는 데 그것이 "長興"입니다 지금도 장흥에서는 매년 공예왕후의 친정 나들이를 재현하는 행사를 한답니다 공예태후의 생가가 "정안사(定安詞)"이며 천관산 입구에 있는데 꼭 가볼려고 했는데 시간 관계상 못가서 이렇게 안타까워 한답니다
[陽根岩 해설 할 필요 없지요? ㅎㅎㅎ
[陽根岩 아래에 있는 여성암 같은 바위 요거이 여성봉 처럼 생겼더군요. 양근암이 바라 보고 있는 진짜 여성굴이 있다는데 그 굴이 金水窟이랍니다. 이 앞의 금수능선 어느 곳에 있다는데 .... 金水가 흐른다네요
공예왕후는 공예태후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왜내하면 왕비로 보다 아들이 왕이 되어 태후로 더 많은 세월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예태후는 그렇게 행복한 75년의 세월을 보내지는 못하고 오히려 복장 터지는 서글픈 세월을 더 많이 보냈다고도 할수 있겠습니다 이자겸의 척신정치와 무신정권의 출현으로 무신정권 밑에서 태후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연이 개경에 소문이 납니다 그리고 당대의 실제 권력자인 "이자겸"의 귀에 들어 가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핵교 때 공부를 열심히 했다해도 "이자겸의 난"만 기억 하시죠? 뭔지도 모르고....ㅎㅎ 인종의 첫번째 왕후가 이자겸의 셋째딸이고, 두번째 왕후가 이자겸의 넷째딸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왕비에 관한 소문은 이자겸에게 치명타가 될수 있는 사안이라 펄쩍 뛰며 임원후를 한직으로 좌천 시켜버림니다
이자겸은 인종의 아버지인 예종의 장인 어른입니다 간단하게 말해 인종과 공예왕후의 외할아버지인것이죠 당시 이자겸은 조선시대 대원군 같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면 가장 쉽습니다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이자겸은 인종의 첫번째 왕비로 자신의 셋째딸을 시집 보냈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넷째딸도 인종에게 시집 보냅니다 그런데 이것 꽁까루 집구석도 아니고 괴상 망측한 집구석 아닙니까? 인종의 아버지가 예종이고, 예종의 왕비가 이자겸의 둘째딸(순덕왕후)인데 예종과 이자겸의 둘째딸(순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인종은 이자겸의 셋째딸과 넷째딸하고 결혼을 하니......황당하지만 진짜입니다 요즘같은 세상에는 상상도 할수 없는 근친혼례아닙니까?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자면 인종은 자기 엄마의 여동생 - 즉 '이모' 둘 하고 한방 쓰며 결혼 생활했다는거 아닙니까 그리고 이모들 하고 헤어진 후 인종의 셋째 부인으로 공예왕후가 다시 들어 오는 것입니다 그통에 "長興"이라는 고을 이름이 유명세를 타며 생겨나게 됩니다
딸을 왕에게 시집 보내기의 명수라면 전세계에서도 최고라고 자랑 할 이자겸 그리고 이자겸의 딸들...아무리 아버지가 시집 가라고 정해 줘도 외조카한테 어찌 시집을 가나요 世界史에서 야리꾸리한 비슷한 이야기를 하라면 이 뇨자 빼 놓을 수 없죠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이 뇨자는 자기 친 남동생 두명하고 결혼을 하지요? 그리고 권력 휘두르는데 걸림돌이라고 결혼한 자기 남편이자 친남동생인 두놈을 모두 죽이고 로마의 씨이져와 결혼해서 아들까지 낳고는 다시 안토니우스와 결혼한 '클레오파트라' 정말 끝내줍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쳐들어와 자기를 죽일려고 하자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다고 서른아홉살에 독사 풀어 놓고 독사에 물려 죽는 자살을 했으니..毒하긴 毒한 여자의 대명사이죠? 우리나라 현대에서 가장 毒한 여자 꼽으라면 최근에 자살한 최진실씨를 꼽을 수 있을려는지... 자기에게 안티 네티즌들이 최'진실'이 아니라 최'가식'이라고 악플 단다고... 사채놀이 않했는데 했다고 수근거린다고..그런 저런 이유로 그렇게 돈 많이 버는 스타 집어치우고 죽어버리면 그런 소리 안들을테니 에이 씨파- 자살이나 하자고 자살을 했으니 얼마나 독해요? 에구~자살도... 쉽지 나같은 평범한 맹물같은 인간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인데...
고려의 이자겸은 조선시대의 한명회의 스승 쯤 되는 인간이죠. 딸 셋을 왕비로 만들고 특히 외손자에게 친딸 두명을 시집 보냈으니 엄청난 역사적 인물이죠 한명회는 딸 두명을 왕비로 만들었죠? 그래도 조선의 聖君에 속하는 성종과 예종의 왕비가 한명회의 딸들입니다
[오전에 출발 했던 영월정에 되돌아 왔습니다 한가지 꼭 덫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자겸이 그의 넷째딸을 인종에게 시집 보낸 중요한 목적이 인종을 감시 하도록 한것이었습니다 어린 인종이 점점 커 권력을 잡으려하며, 말을 잘 듣지 않자 이자겸은 외손자인 인종을 왕비인 딸을 시켜 독살을 하려했는데 毒藥을 들고 가던 넷째딸이 자기 남편인 인종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를 배반 하고, 일부러 넘어져 毒藥을 쏟아버림니다. 또 毒이 든 떡을 인종에게 보냈는데 이 뇨자가 일러받쳐 인종이 먹지 못하도록하고 인종이 까마귀에게 던져 주었더니 까마귀가 먹고 죽었답니다 이런식으로 몇번이나 인종의 목숨을 구해줍니다 高麗史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 여자는 친정 떠나 출가 하면 아버지보다 남편이 더 우선이라는 것은 인간의 天倫인가 !!~~
[주차장] 자동차로 만원입니다
'테마캠프'라는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 왔습니다 天冠山 정말 아름답고 멋진 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얘기꺼리가 너무 많은 산이기도 했습니다 글 읽느라고 힘드셨죠? ㅎㅎ 파란문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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