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허황옥의 발자취를 찾아』
[남파랑길]
"진해구간 1코스 망산도-안골포-웅천읍성" 답사기
송정공원-망산도-유주각-부산신항-웅천안골왜성-안골포-진철교-황포돛대노래비-
흰돌메공원-웅천남문신도시-주기철목사기념관-웅천읍성-제덕사거리
[구글어스]
[국토지리원 지도]
'부산 강서구 송정동'에 있는 "송정공원"에서 출발하여
"망산도-유주각"등 "허황옥 왕비"의 흔적을 돌아 보며 [부산신항] [안골포]를 지나
'경남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에 있는 "제덕사거리"까지 약16km를 갑니다.
['송정공원' 앞 버스정류장] 11:30
2020년 1월 22일 (수) 흐리고 비
금방이라도 하늘에선 굵은 빗줄기가 쏟아질듯한 잔뜩 찌푸린 날
[죽전]에서 약4시간이 걸려 '부산 강서구 송정동'에 있는 "송정공원"에 도착하여 바로 답사를 시작합니다.
위에 보이는 고가도로는 [부산신항]과 [가덕도]로 연결되는 [녹산산업대로]더군요.
이곳 [송정공원버스정류장]엔 안내도가 있는데...
['남파랑길 창원6코스' 안내도]
['남파랑길 창원6코스' 안내도 확대]
"남파랑길 창원 6코스"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남파랑길]을 안내한다면 "남파랑길 6코스"로 하던지, "남파랑길 창원1코스"라고 해야 할듯 합니다.
저는 [남파랑길] 진해구간 1코스라고 표기 했는데, 이 지역은 원래 [진해시] 지역이어서
[진해]가 더 친근감이 있어서 편의상 [진해구간 1코스]로 표기했습니다.
[남파랑길]은 이렇게 아직 그 전체적 기준을 잡지 못하고
지역별로 나름대로 기준을 설정하여 안내하고 있는듯...
['부산시-창원시 市界'] 11:31
[송정공원] 앞 삼거리를 건너면 바로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이었습니다.
원래 "금관가야"의 국제항구 역활을 하던 지역이 [부산신항] 건설로 엄청 변했습니다.
['용원동 사거리'] 11:32
이어서 [용원동 사거리]를 만나는데 이정표가 좌측 [←2.6km 39분 웅천안골왜성]이라고 알려 주는데
"39분" 걸린다고 안내하는 섬세함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군요. ㅎㅎ.
사람에 따라 다양한 걷기 능력을 감안 한다면 [약40분}이라고 해도 될껄...39분...ㅎ
['망산도' 앞] 11:35
'경남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의 중심지인 "망산도 望山島"앞 주차장에 도착합니다.
['망산도'와 '유주정']
"망산도 望山島"와 "유주정 維舟亭"이 나그네를 반겨 주는데 어쩐지 주변 풍경이 씁쓸합니다.
요즘 지방자치단체들은 어떡해서던 조그만 역사관계만 있어도 예산을 들여 관광지화 하는데...
[금관가야]의 첫왕비인 "허황옥 許黃玉"이 자기 어머니의 꿈을 믿고
머나먼 이억만리 "인도 아유타국"에서 '돌배'를 타고 시집을 왔는데 도착한 곳이 이곳 "망산도"랍니다.
당시 "허황옥"의 나이는 16세, 오빠 "허보옥"과 20여명이 넘는 선원들과 함께 입국했으며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인도의 공주와 왕자, 선원들이 국경을 넘어 입국 한 곳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 조그마한 섬이 주는 의미는 크다 아니할수 없겠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 기록에 있는 국제결혼으로는 첫 '국제 결혼'이 이루어지는데
"가락국"의 "김수로왕"과 "인도 아유타국"의 "허황옥"이 즉시 결혼을 하고 신혼밤을 보냈답니다.
여기서 [김해 왕궁]으로 가는 길목인 [명월산 흥국사]에서 첫날밤을 보냈는데
얼마나 좋았는지 2박3일간이나 붙어 떨어지지 않했다나 뭐래나...ㅎㅎ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첨부한 [삼국유사 제2권 가락국기]를 참고 하면 되겠습니다.
['망산도' 입구]
['망산도' '유주암' 안내문]
이곳은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이지만 앞에 있는 조그마한 섬 [망산도]는 [부산시 강서구 송정동]이랍니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입국하여 첫발을 내디딘 곳인데도 개발은 커녕 출입금지를 시키며
일반 관광객들의 접근을 오히려 막고 있습니다.
['망산도']
['삼국유사 제2권 가락국기' 원문 일부]
"허황옥"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를 비롯해 여러 역사책에 상세한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원문 일부와 번역문을 올려 참고하겠습니다.
건무(建武) 24년 무신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아뢰기를 “대왕이 강령하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으니 청컨대 신들의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항려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니 짐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일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라고 하고,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경주(輕舟)를 이끌고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 [망산도는 서울 남쪽의 섬이고 승점은 연하(輦下)의 국(國)이다.]으로 가게 하였다.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 색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매달고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은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곧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왔다.
신귀간은 이것을 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그것을 아뢰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찾아 보내어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이에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과 본래 모르는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서로 따라가겠는가”라고 하였다.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그렇다고 여겨 유사(有司)를 이끌고 행차하여,
대궐 아래로부터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곳의 산 주변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에 배를 대고 땅으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고 있는 비단바지를 벗어 폐백으로 삼아 산신령(山神靈)에게 바쳤다.
그 밖에 시종한 잉신(媵臣)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라고 했으며,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이었다.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된 장신구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있는 곳에 가까이 오니 왕은 나아가 그를 맞아서
함께 유궁(帷宮)으로 들어왔다. 잉신 이하 여러 사람들은 섬돌 아래에 나아가 뵙고 곧 물러갔다.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들을 인도하게 하고 말하였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 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옷과 비단과 보화도 주었고, 군인들을 많이 모아서 그들을 보호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있는데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하였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황천(皇天)을 뵈었는데, 황천은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라는 자는 하늘이 내려 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곧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것이 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갔다. 꿈을 깬 뒤에도 황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아름다운 모습으로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왔으니
이 사람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이틀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니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재갈을 나란히
수레를 함께 탔으며, 중국의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되려 하였다. 왕후는 이에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을 주어 나누어 들어가게 하였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지급하는 것은 풍부하게 하고, 그들이 싣고 온 진귀한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고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허황옥 왕후']
우리나라 "許氏 시조의 어머니"인 "허황옥 왕후"의 동상입니다.
"허왕후의 릉" 앞에 있는 동상인데, 제가 예전 [가야 역사 탐방]을 할때 촬영한 사진입니다.
[김수로왕]과 [허왕후]는 궁합이 찰떡이었던가 봅니다. ㅎㅎ
아들을 열명 낳고, 딸을 둘 낳아, 총 열두명의 자녀를 낳았으니 궁합 얘기를 해도 되겠죠? ㅎ
제 눈엔 풍채도 좋고 아기 잘 낳게 생긴 몸매같습니다. ㅎ
['김수로왕'] ['삼국유사' '거등왕'과 '왕비'의 죽음]
"허황옥 왕비"와 "김수로왕" 사이에서 10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이 탄생했다는거 위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첫째 아들은 [수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거등왕 居登王"이 되고, "김해 김씨 시조"가 되었으며
둘째 셋째 아들은 "김해 허씨 시조"가 되는데, 이는 "허왕후"가 이억만리 타국에서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흔적이 영원히 사라진다고 자신의 姓을 사용케 해 달라고 요청해서 붙여진 姓이랍니다.
그리고 [居登王] 편을 보면
아버지는 수로왕(首露王), 어머니는 허황후(許皇后)이다. 건안(建安) 4년 기묘 3월 13일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39년으로 가평(嘉平) 5년 계유 9월 17일(253년)에 죽었다.
왕비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으로 태자(太子) 마품(麻品)을 낳았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고 구지봉(龜旨峰) 동북 언덕에 장사하였다
['유주암' 조망]
"허황옥 일행"이 타고 온 "돌배"를 정박 시켰는데, 그 "돌배"가 뒤집혀 남아 있다는 "유주암 維舟岩"은
"망산도" 건너편에 보이는데, 제가 예전에 [가야역사탐방] 때에 촬영한 사진을 보여 드리면...
['유주암'과 '망개산'] 자료사진
예전에 촬영한 "유주암 維舟岩" 사진입니다.
역사 기록엔 그 어느 곳에도 "유주암 維舟岩"에 대한 언급이 없답니다.
그래서 이 바위가 [유주암]이라고 단정 할수는 없고 그저 참고로 재미로 보면 될듯 합니다.
하지만 "허황후"가 타고 온 "돌배"에 대해선 확실한 언급이 [삼국유사]와 여러 고서에 나와 있더군요.
['파사석탑'] ['삼국유사' '파사석탑']
"허황후"가 돌배에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 婆娑石塔"과 관련 [삼국유사] 기록입니다.
[파사석탑]은 "허황후의 무덤" 앞에 현재도 남아 있는 그녀의 유물이죠.
[파사석탑]은 돌배가 항해 할때 배가 기우러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 주는 돌탑이었답니다.
그리고 이 바위는 우리나라에는 없는 성분의 바위이고 현재 "인도 아유타국" 근처에 같은 형질의 바위가
산재 하고 있어 "허황후"가 가지고 왔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된다고 합니다.
['유주정']
[망산도] 옆에는 "유주정 維舟亭"이라는 정자를 현대에 만들어 놨는데
이곳이 그 옛날의 추억을 불러 일으키기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건 나 뿐일까...
['유주비각' 가는 길] 11:39
[유주정]에서 뒤돌아 보면 [유주비각]으로 가는 길이 열립니다.
[정우마트]와 [장수식품점] 사이 골목으로 100m쯤 올라 가면...
['용원초' 앞 사거리] 11:41
[용원초등학교] 앞 사거리를 만나는데 좌회전하면...
['유주비각' 조망]
[유주비각]이 보입니다.
['유주비각'] 11:43
['유주비']
[안내문]
"유주비 維舟碑"가 있는 "유주비각 維舟碑閣"입니다.
"大駕洛國 太祖王妃 普州太后許氏 維舟之地"
"가락대국의 태조왕비인 보주태후 허씨의 유주지지"라고 비석에 쓰여 있습니다.
"유주지지 維舟之地"라는 말의 뜻은 "배를 정박시킨 곳"이라는 뜻
['수로왕과 허왕후 영정']
"김수로왕과 허황후 영정"입니다.
머나먼 '인도 아유타국'에서 [망산도]를 통해 [가락국]으로 온 "허황옥"은
현재 "흥국사"라는 절에서 신혼 첫날밤을 보냈다고 하는 [삼국유사] 기록을 위에서 보여 들였죠.
하룻밤으로론 부족해 2박3일을 보냈다고 하니 궁합이 찰떡궁합인듯...
['신혼여행지']
[망산도]에서 [흥국사]까지 가서 신혼첫날을 보내는 루트를 대략 추측해 봤습니다.
루트에 있는 지명은 모두 그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지명이라고 하더군요.
"밝은 보름달 같은 허황후"의 모습을 빗대어 "명월산"이라고 했으며, "보배같은 여인"이라고 "보배산"이라고
산 이름까지 "보배산"이라고 할 정도 였다니 "김수로왕"이 "허황후"의 미모에 얼마나 반했는지 알수 있습죠?
첫날밤을 보내고 넘어 간 고개를 "배필정고개"라고 하는 것도 현재까지 전해 지고 있답니다.
['부산신항 아파트단지']
['용원교'] 11:50
[유주비각]을 둘러 보고 바닷가로 나가면
바다를 매립하여 만든 "부산신항"과 신항 신시가지로 들어 가는 [용원교]라는 다리를 건너는데
이름은 [부산신항]이지만 '경남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이었습니다.
['송정공원'에서 '안골포'까지 상세 지도]
여기서 [송정공원]에서 [안골포]까지의 상세 지도를 참고하고
['신항물조은온천'] 11:58
[부산신항]의 신항 신시가지로 들어 가는데
"신항 물조은 온천"이라는 상당한 규모의 온천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초록오름공원'] 12:08
신시가지를 통과하면 [초록오름공원]이라는 가로공원을 만나는데 우회전하면
[다리]
육지와 매립지의 경계를 이루는 수로 다리를 건너고
['안골포' 가는 길] 12:16
[안골포]로 향하는데 좌측에 [안골왜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웅천안골왜성'] 12:19
[안내문]
"웅천안골왜성"
임진왜란 때 일본군(倭軍)이 쌓은 일본식 성곽(왜성)으로 당시 '일본 수군의 본거지'였답니다.
[남파랑길]을 직접 걸으니 '일본 수군의 본거지'가 어디인지 이제서야 알게 됩니다.
[생태통로] 12:24
이어서 우측에 있는 "망개산"과 좌측 "안골왜성"을 연결하는 생태통로를 넘어 가면...
['안골포 신도시' 조망]
[안골포 아파트단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안골포' 조망] 12:31
[안골포]로 내려가 [안골포] 바다를 조망하고 우회전하면...
[삼거리]
삼거리를 만나는데 [남파랑길]은 우측으로 '안골포 마을'을 빙 둘러 가라고 합니다.
['진해유치원']
옛 초등학교 자리에 "진해유치원"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유치원은 [공립단설유치원]으로 국가가 운영하는 유치원이더군요.
초등학교는 모두 아파트단지로 옮겨 가고 텅빈 초등학교를 유치원으로 개조하여
맞벌이 부부들을 위한 유치원으로 활용하고 있어서 저도 괜히 즐거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크고 넓고 아름다운 유치원은 처음 봅니다. 운동선수들이 많이 배출 될듯...ㅎ
['안정공원 (무궁화공원)'] 12:35
[진해유치원] 뒤에는 "안정공원 (무궁화공원)"이라는 공원이 있는데 [안골포]를 대표하는 공원인가 봅니다.
엄동설한에 이곳이 남쪽 나라라는걸 강조라도 하듯 나뭇잎과 잔듸들이 푸른빛을 띄고 있습니다.
[점심식사] 12:37~1:12
[안골포]에서 점심식사는 칼국수로...
손님이 많았는데, 품질은 글쎄....ㅎ
['안골포' 마을과 신도시 조망]
[안골포]의 구시가지와 건너편에 보이는 신시가지가 확연히 비교되는 "안골포 마을" 전경입니다.
앞에 보이는 산은 "망개산"입니다.
['안골포']
['웅동만'으로 넘어 가는 길]
['청안동']
[안골포]를 한바퀴 빙 돌아 나가는데 포구 입구를 매립하여 육지화해서 [부산신항]과
[진해웅동경제자유구역]을 만들어서 바다인지 호수인지 알수 없게 되었군요.
22분 정도 걸어 [안골포]를 빠져 나가면....
['웅동만'] 1:34
[웅동만 熊洞灣]이 펼쳐지는데, [안골포]는 [웅동만]의 일부분이란걸 알게 해 줍니다.
잠시후 찾아뵐 [황포돛대노래비]와 [흰돌메공원]이 시원하게 조망됩니다.
['남양동' '마천동' 조망]
'진해구 남양동-마천동'이 펼쳐집니다.
[대장천]을 건너는 [진철교]가 보이기 시작하는군요.
뒤에 보이는 산은 "마봉산 400.8m"인듯한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진철교' 앞 사거리] 1:47
[진철교] 앞 사거리에 도착해서 좌회전하면...
['진철교'] 1:48
[대장천]이라고 하는 개천을 건너는 [진철교]를 만나 건너는데...
[대장천]은 [불모산]과 [굴암산]등 [신낙남정맥]의 산줄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개천이더군요.
['진철교' 서쪽 끝]
[진철교]를 건너면 이정표는 좌회전 하라고 알려 주며...
[전력선 지중화] 1:52
대규모 전력선을 地中化하는 곳을 만나는데 이 곳이 [마천일반산업단지]여서 전력 수요가 많은가 봅니다.
요즘 새로 건설하는 신시가지나 공단들엔 전력선을 地中化하고 있죠.
['진해마천지방 산업단지']
'진해구 남양동'의 [영길마을]을 통과하면...
['황포돛대 노래비' 이정표] 1:56
[영길마을]을 통과하여 [황포돛대 노래비]로 가는 이정표를 만나 지름길로 10여분 진행합니다.
['진철교'에서 '제석사거리'까지 상세 지도]
[영길마을]에서 [제덕사거리]까지 상세지도를 확인하고 진행하면 보이는게 많아 집니다.
['영길마을' 입구 공원] 2:05
[영길마을]이 끝나는 곳에 가로공원이 하나 있는데 [황포돛대 노래비] 표지가 있습니다.
이곳이 [황포돛대 노래비]인가? 확인해 보니 앞으로 12분 정도 더 가야 하더군요.
['황포돛대 노래비 공원'] 2:17~2:21
['황포돛대 노래비']
"황포돛대 노래비"
여기서 "황포돛대"라는 노래를 만들었는줄 알았는데 안내문을 보니 아니올시다 ~ ㅎ
이 고장 출신인 작사가 "이일윤씨"가 '경기도 연천'에서 군복무를 할때
어린 시절의 고향 눈 내리는 '영길만'을 회상하며, 흘러가는 배에 슬픈 마음을 담아 노랫말을 지었다고
노래비 아래엔 노래를 직접 들을수 있도록 음향시설을 해 놨는데 버튼을 밟으면 노래가 실제 나왔습니다.
[해안도로]
[황포돛대 노래비]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10여분 진행하면...
['흰돌메공원' 휴게소] 2:31~2:47
['흰돌메공원' 전망대 조망]
[전망대에 있는 안내판]
"흰돌메공원"을 만납니다.
비는 계속 부슬부슬 내립니다만, 우산을 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전망대에는 [부산신항 조감도]가 있었는데...
날씨가 나빠 눈에 뵈는게 없어 아쉬웠던 [흰돌메공원]이었습니다.
['부산신항-진해신항' 조감도]
공원 옆엔 [[창원 진해 신항] 방향 조감도가 있고
['웅포해전 기념비'] 2:48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장군"의 승전장이었던 "웅포해전" 기념비도 있더군요.
"웅포 해전 熊浦海戰"은 1593년 "이순신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기 전, '전라좌수사'였을 때에
"원균장군"의 경상우수영 함대와 "이억기장군"의 전라우수영 함대와 연합하여
왜군 100여 명을 사살한 전투이나, 이 해전에서 조선군 배 2척이 전복되었다고 합니다.
이곳 '웅포'의 왜성들을 초토화 시키고 '부산포'로 진격하려던 "조선 함대"가 이곳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 못해 '부산진' 출격에 차질이 생겼다고 합니다.
[웅포해전]을 우리나라 역사서엔 우리나라가 승리한 해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조선에서 자기들이 승리한 해전이 세번 있었는데,
그 중에 한곳이 이곳 [웅포해전]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인명 피해가 100여명 있었으나, 조선 전함 2척을 침몰시켜 더 큰 피해를 줬다고
자기들이 이긴 해전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에서는 연전연패하던 일본수군은 이때부터 절대 바다로 나가 싸우지 말고 육지 근처에서 싸우라는
일본 본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가 있어서 육지의 왜성과 연계해 포구에서만 싸운 결과라고...
['남문대교'] 2:56
[남해고속도로] 본선에서 [부산신항]과 [진해웅동공단]으로 연결되는 [남해고속도로 제3지선]이 지나는
[남해대교] 밑을 통과하면...
['남문동 신시가지'] 3:00
[진해구 남문동 신시가지]가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전국의 대부분이 구도심을 버리고 신시가지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남문동 아파트단지']
['웅천초등학교']
['남문경제자유지역']
'진해구 남문동'의 신시가지를 15분여 통과하면....
['세스페데스공원 사거리'] 3:16
[세스페데스공원]이 있는 사거리에 도착하는데
이정표가 우측으로 가라고 알려 줍니다.
['2번국도-진해대로']
['웅천읍성' 가는 길]
그러면 [2번국도]이자 [진해대로]가 지나는 다리 밑을 통과하여 5분 정도 진행합니다.
[2번국도]를 가운데 두고 신시가지와 구도심이 나뉘어 지더군요.
['주기철목사기념관' '웅천읍성' 조망]
옛 "웅천" 구도심의 정취가 느껴지는 "웅천읍성"과
이 고장이 낳은 항일 독립운동가였던 "주기철목사 기념관"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주기철목사 기념관'] 3:24
"주기철 목사"
신사참배거부와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5회나 체포되어
5년 4개월동안 모진 고문을 받으며 황실불경죄,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44년에 순국했답니다.
['웅천읍성' 전경] 3:26~3:34
[안내문]
"웅천읍성 熊川邑城"
군사적 방어 역활을 하는 城이 아니라 행정업무를 보는 관청을 邑城이라고 하지요.
[세종 16년]에 건설된 읍성이라는데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고...
['해자']
['해자 조교']
"해자 垓子"는 '성벽 밖에 적이 접근하기 어렵게 파 놓은 참호 시설로 물을 채워 놓는 곳'이라죠.
"해자 조교"는 '해자'를 건너는 도개교를 말합니다.
['동운 입구']
['견룡문']
"견룡문 見龍門"
"웅천읍성"의 東門으로 복원된 유일한 門이랍니다.
[북쪽 '해자' 조망]
東門에 올라 사위를 조망합니다.
먼저 북쪽으로는 복원된 성곽과 '해자'가 있으며
저 멀리 산줄기 들은 "신낙남정맥"의 산들인듯한데 확실한 산이름들은 운무로 잘 모르겠습니다.
['주기철목사기념관' 조망]
동남쪽으로는 [주기철목사기념관]과 그 뒤로 [남문동 신시가지]가 조망됩니다.
[남쪽 성곽 조망]
남쪽으로도 '해자'와 성곽이 보입니다.
[城 안 조망]
서쪽으로는 앞으로 진행해야할 [남파랑길]이 '성내동'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 우체국은 "진해웅동우체국"이었습니다.
['성내동' 사거리] 3:40
東門에서 우체국을 지나 잠시 직진하면 사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엔 [웅천고등학교]가 있더군요.
이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城內洞'을 6분여 통과하면...
['2번국도-진해대로'] 3:46
[2번국도]이자 [진해대로]가 지나는 굴다리를 지나 [제석사거리]로 가는데
이 근처 [두부랑 고기랑]이라는 음식점에서 술한잔 했습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겨울비 속에서 "두부와 고기"를 안주로 소주 한잔하는 그 맛은 아직도 잊을수 없습니다.
[구글어스]
[국토지리원 지도]
오늘 걸은 거리는 약16km로 4시간반 정도가 걸렸습니다.
귀경하는 고속도로엔 굵은 빗줄기가 겨울인지 여름인지 분간 못하게 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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