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릉과 역사』
     『동구릉의 가을』 속으로
  

    ['실트랙']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의 왕릉-동구릉 東九陵"으로 간다.
  
  "동구릉 東九陵"은 "동쪽에 있는 아홉기의 왕릉"이라고들 알고 있죠?
  반은 맞고 반은 틀림니다.
  
  <東九陵>에는 일곱명의 왕을 모신 "왕릉 7기"와 열명의 왕비를 모신 "왕후릉 10기"가 있어 
  "총 열일곱명의 왕-왕후릉"이 있는데....조금 더 디테일하게 들어 가면...
  1. 단릉: 왕이나 왕후의 능을 단독으로 조성한 릉으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健元陵>과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의 휘릉 徽陵>, <경종>의 정비인 <단의왕후의 혜릉 惠陵>이 있다.
  2. 합장릉: 하나의 릉에 왕과 왕후를 같이 모신 릉으로 <조대비>로 유명한 구한말 <신정황후>와 
     그의 남편 추존왕인 <문조(효명세자)>의 합장릉인 <수릉 綬陵>이 있고
  3. 쌍릉: 왕과 왕비를 옆으로 나란히 모신 릉인데, <영조>와 <정순왕후>의 <원릉 元陵>과
     <현종>과 <명성왕후>의 릉인 <숭릉 崇陵>이 있다.
  4. 동원이강릉: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릉을 말하는데,
     <선조>와 정비인 <의인왕후>, 계비인 <인목왕후>의 <목릉 穆凌><과 <세종대왕의장남>인 <문종>과
     <현덕왕후>의 릉인 <현릉 顯凌>이다.
  5. 삼연릉: 왕과 두 왕후의 릉을 나란히 3봉분으로 조성한 릉을 말하는데
     <24대 현종>과 그의 정비인 <효현왕후>, 계비인 <효정왕후>의 릉인 <경릉 景凌>이 있다
      
  이렇게 그룹으로 릉을 묶으면 9개가 되어 <東九凌>이라 하고, 그룹으로 묶지 않고 <합장릉>을
  하나의 봉분으로 계산하면 16기의 무덤이 된다.

  

    ['동구릉역']        1:25           
  2024년 11월 12일 (화) 맑음      
  <지하펄 8호선>이 <별내>까지 연장되어 교통이 무척 편리해진 "8호선 동구릉역3번축구"로 나가
  직진하며 8분여 진행하면...



    ['동구릉' 입구]          1:33            
  "동구릉 입구 주차장"에 도착한다.
    


    ['정문']          1:35            
  매표소가 있는 정문을 통과해 들어 가면...



    ['홍살문']         1:38      
  <東九陵> 전체 홍살문을 통과하게 되고
  


    ['재실']            1:42                      
  이어서 <東九陵>에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 齋室"이 있습니다
  조선왕릉 최대의 <동구릉>의 재실로는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재실>에서 우측 길로 200m쯤 올라 가면....
  


    ['수릉']            1:46       
  제일 먼저 만나는 릉이 "수릉 綬陵"이다.
  <대한제국> 때에 황제로 추존된 <문조>와 <신정황후 조씨>를 모신 합장릉(合葬陵)이다. 
  드라마와 영화에 자주 나오는 유명한 인물들인데, 그냥 이름만 말하면 아는이가 거의 없는 인물이죠?
  
  <문조>는 <순조>의 아들로 유명한 <효명세자>인데 '대리청정'을 할 많큼 강인한 세자였는데 일찍 죽었고
  세자빈이었던 <신정왕후 조씨>가 낳은 아들이 <현종>이 되자, "왕비"는 못되었지만 바로 "왕대비"가 
  되며, 그 유명한 "조대비"로서 권력실세가 되어 국정을 주도하며 
  <흥선대원군>과 <고종>에게 권력을 넘겨 주며 '세도정치'에서 벗어나게 했는데
  그녀의 무덤이 바로 "수릉 綬陵"이란걸 알면  아!~ 그래? 라는 소리가 나오겠죠? ㅎ




    ['현릉']            1:50         
  <수릉>에서 200m쯤 더 올라 가면 "현릉 顯陵"을을 만나다.
  제세한 내용은 안내문을 참고 라시고
  


    ['현릉' 항공사진]            (출처:궁릉유적본부-조선왕릉)  
  "현릉顯陵"은 알기 쉽게 <세종대왕의 장남>인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릉인데,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현릉' 조망]                  
  <제5대 문종>에 대해선 나의 여러 답사기에서 많이 언급된바 있다.
  <세종대왕>의 자식복, 며느리복등 가정사의 비극을 말 할때마다 대표적으로 나오는 인물이다.
  <문종>의 무덤을 바라보니 <세종대왕>이 먼저 생각 난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유명한 고사성어를 모두 아시져?
  그런데 '세종대왕'은 "治國平天下"는 최고인데 "修身齊家"는 빵점이란거 아시나여?.
  자식들은 권력싸움으로 서로 헐뜯고 죽이고, 며느리들은 동성애에 빠지거나 미친년이었고
  사위도 술주정뱅이등 제대로 된 인간들이 없어 정치는 잘했지만 가정사는 최악이었다우.



    ['현덕왕후릉']                  
  이미 몇번 언급한 내용을 한번 더 언급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의 성욕은 똑 같습니다.
  정상적 남성 100%가 자위를 하고, 여성도 별반 차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동성애를 하는 자들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많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세자빈 김씨'는 학문에만 열중할 뿐 자신을 모른 
  체하는 남편을 견디다 못해 "압승술 壓勝術"을 행하다가 시아버지 '세종대왕'에게 적발되었다고 합니다. 
  "압승술"이란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일종의 민간 미신이랍니다. 구체적으로
  "압승술"은 남편이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 뒷굽을 태워 가루를 내고 나서 그것을 술에 타 
  남편에게 먹이는 일종의 미신인데요. "세자빈 김씨"는 세자가 자주 출입하는 궁녀의 신을 훔쳐다가 
  그 신을 태워 세자의 술이나 차에 섞어 마시게 하거나, 교미하는 뱀을 잡아 가루를 만들어 먹이는 등
  세자를 곁에 두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게 되지만 
  당연히 이 모든 일은 허사가 되고 오히려 그녀의 행각은 탄로 나서, 
  '세종대왕'은 장차 왕비가 될 큰며느리가 그런 요상한 짓을 한다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고
  국모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여 큰며느리 '김씨'를 곧바로 쫓아내 버렸지요. 
  
  그러나 '김씨'가 쫓겨난 후 들어온 두번째 큰며느리 '봉씨'도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것은 
  여자이니 마찬가지였답니다. .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 "세자빈 봉씨"
  이 여자가 세종실록에 아주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동성애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세자빈이 궁녀와 동성애-레즈비안을 한것이죠.
  궁녀들 사이의 동성애를 그 당시 보통 <대식 對食>이라고 했답니다. 
  물론 '대식'은 궁녀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어쩌다가 예기치 않은 일로 드러나곤 할 뿐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하겠죠?ㅎ
  이렇듯 은밀하게 행해지던 궁녀들의 동성애가 겉으로 드러난 대표적인 사건이 
  '세종대왕'의 첫째 아들인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가 주인공이었던 사건입니다.
  세종대왕은 궁녀들 사이의 '대식'이 적발되면 곤장 70대~100대씩 때려서라도 금지시키려고 했답니다.
  당시 세종대왕을 비롯하여 조정관료들의 성 윤리가 대단히 엄격하여 동성애를 절대 용납하지 못했던
  때였습니다만, 조물주가 인간에게 준 성욕은 왕의 위력으로도 막을 길이 없었던 것이죠.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의 두번째 와이프인 '세자빈 봉씨'가 
  궁녀와 동성애를 벌이다 적발되어 쫓겨나는 이 사건에 대해 『세종실록』에 자세하게 기술되 있는데
  세자빈과 궁녀의 동성애에 관한 기록은 이때의 상황이 처음이랍니다.
  그 이유는 '세종대왕'이 큰며느리 '봉씨'를 내치면서 부득이하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다 보니 내용이 구체적으로 실록에 기록된 것이죠.

  세종이 큰며느리를 내친 이유는 근본적으로 아들, 즉 '문종'에게 있었답니다. 
  '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여색을 멀리한 모범적인 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일 밤 독수공방을 했다는 말이 됩니다.
  다만 '봉씨'는 '김씨'처럼 "압승술"을 쓰는 대신 동성애에 
  빠져 궁녀들과 성욕을 불태우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는 노발 대발 난리가 났고 결국 폐서인을 시켜 추방합니다. 
  쫏겨난 '봉씨'는 반성은 커녕 성욕을 해결한게 뭔 죄가 되냐고 항변하다가 
  결국 자기 친아버지로 부터 비참하게 목 졸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남자 구실 못하는 '문종'이 이혼 대상이고 위자료를 줘야 할텐데...
  
  이러한 와중에 '문종'이 꼴깝을 합니다.
  자신의 부인들이 성욕을 해결 못해 "압승술"이나 '동성애'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궁중의 어느 궁녀와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유일한 아들 "단종"이며, 그 궁녀가 "단종"의 어머니인 "양원 권씨"로서 
  '문종'의 세번째 부인인 "현덕왕후"가 됩니다.  바로 윗 사진의 무덤에서 잠자고 있는 여인입니다.
  '수양대군'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 '단종'을 더욱 인정하려하지 않았고, 
  그렇지 않아도 왕권찬탈의 빌미를 찾으려 혈안이었는데 이것은 좋은 미끼여서....
  이로서 '세종대왕' 자식들과 며느리들의 불행은 극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세종대왕'의 큰며느리들은 성욕을 해결하지 못해 "압승술" "동성애"를 하다 쫏겨나고
  "모락산"이라는 산 이름을 만든 "임영대군"의 와이프는 정신질환자로 시아버지인
  '세종대왕'에게 반말 막말을 하는 등 '미친년'이었으니 지지리도 '며느리 복'이 없는 
  '세종대왕'이었던 것입니다.





    ['건원릉']           1:58~2:08      
  <조선왕조>의 시조인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이 <동구릉>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공식적인 안내문을 참고하시고...



    ['건원릉; 항공사진]          (출처:궁릉유적본부-조선왕릉)      
  아랫쪽에선 <건원릉>을 촬영하기가 어려워 항공사진을 쎄비해 왔다.
    

             
 
    ['건원릉 비문']                                 [건원릉 신도비']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모르는 이는 없겠지만
  이 분 많큼 불행하고 자식 복 없기로는 <세종>보다 더 불행한 왕이었던 것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태조 이성계>는 목숨 걸고 탈취한 권력을 고작 6년여 향유하다 자식 <이방원>이 한테 통째로 빼앗긴
  불행한 아버지이고, 본 부인인 <신의왕후>에게서 낳은 아들들과 사랑하는 여인 <신덕왕후>에게서 낳은 
  아들들을 거의 몽땅 <이방원>이 한테 죽임을 당했으니 <역성혁명>으로 얻은 기쁨보다 자식들을 잃은 
  슬픔이 하늘을 찌를 것이리라~~
  
  그래서 왕위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 가 조용히 살려고 까지 했는데
  뒤 따르는 '함흥차사' 이야기가 더욱 그의 아픈 가슴을 느끼게 해 준다.




    ['건원릉']                              [건원릉 신도비']    
  "내가 죽으면 고향 함흥의 억새로 덮어 주라~"라고 유언을 한 "태조 이성계"
  조선 왕릉 중에 유일하게 "억새"로 봉분을 한 릉이 바로 "건원릉"이다.
  억새 봉분이 특별한 운치와 의미가 있어 보이나요? 
  아니면 하늘거리는 억새처럼 조선왕조의 미약한 앞날을 보는 듯 한가요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그래도 고향의 억새풀과 함께 잠들고 있어 덜 애처롭구나
  그러기에 쿠데타는 왜 일으켰냐~♪




    ['목릉]            2:09~2:19        
  <조선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목릉' 항공사진]            (출처:궁릉유적본부-조선왕릉)     
  <목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정자각>에서 두 왕비로 가는 "신로 神路"가 선명히도 조성되 있다.
  X새끼 <선조>에겐 과분한 왕릉으로 보이는건 나 뿐일까...
    


    ['선조'와 '의인왕후'릉]                           
  <목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다포식 공포"로 지어져 있고, 
  17세기의 건축 연구 자료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보물로 지정되었단다.
  <정자각>에서 <의인왕후릉>과 <인목왕후릉>으로 "신로 神路"가 연결된게 특이하다.
  


    ['선조릉']                   
  조선왕조 최악의 군주중에 첫손가락에 꼽히는 <선조>의 무덤인데
  조선왕조에선 도저히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최초의 서자 출신 왕이며 <임진왜란>의 책임을 져야할 
  인간인데, 저만 살겠다고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북으로 북으로 도망간 나쁜놈이다.
  <경복궁>을 불태운 자들은 침략자 쪽바리가 아니라 열받은 우리 백성들이란거 아시나요~
    

 
    ['의인왕후릉']                        
  "선조의 정비-의인왕후"
  <의인왕후>는 성품이 온화하여 자애로운 면모를 지녔으나, <선조>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하여
  후궁의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특히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친아들처럼 대해주었고,
  훗날 왕세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는데...
  에휴~ 왕자를 낳지 못하는 왕비는 찬밥신세.... 애를 못 낳은 천추의 한을 안고 잠들고 있다.




    ['인목왕후릉']                    
  "인목왕후 김씨"
  <의인왕후>가 죽자 18살에 왕비가 된 소녀 ...그 유명한 <김재남의 딸>인 <인목왕후>의 능이다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의 새엄마가 되는데 아들<광해군>보다 열살 가량 적은 엄마가 있을수 있나~
  <영창대군>이란 아들을 낳았지만 <광해군>에게 살해 당하고 유패되어 살다가 <인조반정>으로
  복수를 하는 "복수의 화신"으로 유명하죠.
 
  

    ['건원릉' 앞 사거리]          2:22         
  다시 <건원릉> 앞 사거리로 돌아 와 직진하면....
  (앞으로 가실 분들은 이 사거리는 꼭 기억해야 한다)

 


    ['휘릉']           2:24      
  "휘릉 徽陵"
  <조선 16대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역사를 아시는 분들에겐 유명한 여인이죠.
  
 

    ['휘릉' 항공사진]          (출처:궁릉유적본부-조선왕릉)       

    ['휘릉']                
  "휘릉 徽陵"
  <조선 16대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왕비로 10여년, 왕대비로 10여년, 대왕대비로 30여년을 산 파란만장한 여인이다. 무려 50여년을....
  <인조>와의 사이에 <효종>을 낳았는데, 아들 <효종>이 먼저 죽자 장례를 치루며 
  <장렬왕대비>가 "상복"을 입을 기간을 두고, 그 유명한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내용은 "장남"이 죽으면 3년 동안 상복을 부보가 입고, "차남"이하는 1년 동안 부모가 상복을 입기로
  <성리학>에 나와 있는데.....
  <효종>은 "장남"이 아니고 "차남"이기에 당시 정치세력인 <서인>과 <남인> 사이에 논쟁이 벌어 진것.
  <서인>의 두목은 그 유명한 <우암 송시열>이 대표고, <남인>의 대표는 <미수 허목><윤선도>등이었다.
  겉으론 단순한듯 하기도 하지만 속으론 당파싸움이 들어 있어 사활을 걸고 싸웠다.
  결국 <효종>이 "차남"이므로 1년간 상복을 입는 것으로 <서인>의 승리로 끝나며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이를 "1차 예송논쟁"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고
  
  문제는 <효종>의 와이프 <인선왕후>가 죽었을 때 다시  <예송논쟁>이 불붙었다.
  차남의 와이프, 즉 <장령왕후>의 둘째 며느리 임으로 9개월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서인>과 
  왕위에 적법하게 오른 <효종>임으로 적장자로 보아야 하니 그의 와이프도 적법한 "왕비"였으니
  <장령왕후>가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논리로 치열하게 싸웠는데,
  이번엔 <남인>의 승리로 끝나며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를 "2차 예송논쟁"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고....
  
  여하튼 <장령왕후>는 <인조>의 왕비, <현종>의 왕대비, <숙종>의 대왕대비로 3대에 걸쳐
  50여년간 왕실의 큰어른으로 자리 메김했으니 파란만장하다고 할수 있겠다.




    ['원릉']           2:34            
  "조선 제21대 영조"와 두번째 부인 "정순왕후"의 쌍릉이다.
  공식 안내는 안내문을 참고하고

 

    ['원릉' 항공사진]           (출처:궁릉유적본부-조선왕릉)          
  "정순왕후 김씨"
  15세의 어린 나이로 51세 연상인 66세의 <영조>와 '창경궁'에서 가례를 치르고 왕비로 정식 책봉되었다.
  왕비가 되는 <정순왕후>의 할아버지가 남편이 될 <영조>보다 5살이 적었으니...ㅎㅎ
  
  간택 당시 <영조>와 <정순왕후>의 면접대화가 유명하다 
  <영조>: (왕비 후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
           (왕비 후보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고 대답했지만,...)
  <정순왕후>: 인심이 가장 깊다고 생각합니다.
  <영조>: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무엇이냐?
  <정순왕후>: 보릿고개라 여겨집니다.
  <영조>: 호~~ 기특하구나. (66세의 영조는 15살 애를 와이프로 맞이했습니다)
  
 

    ['원릉']              
  "정순왕후 김씨"
  <정순왕후>는 의붓아들인 <사도세자·혜경궁 홍씨>(둘다 1735년생)보다도 10살이나 어리며, 
  <정조(1752년 생)>의 '계조모'지만 실제 두 사람의 나이는 겨우 7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심지어 결혼할 당시에는 <정순왕후>의 할아버지인 <김선경>도 생존해 있었는데, 
  1699년생으로 <영조>가 5살 더 많았다. 
  조선의 역대 왕비들 중에 가장 국왕과의 나이 차가 큰 관계이다.



    ['동구릉의 가을']                           
  東九陵의 가을은 깊어 가고.....
  내가 동구릉에 처음 왔던 기억은 <교동국민학교> 다닐 때 소풍을 간 것인듯 한데...
  대학 때 미팅을 왔던 기억도 난다.
  그 때 제일 야한 게임은 파트너와 다리 묶고 뛰기 시합이었던 걸로..ㅎㅎ
  



    ['경릉']           2:41       
  "24대 헌종"
  황제로 추존된 <문조(효명세자)>와 <신정황후 조씨>의 아들로 8살의 어린 나이에 "24대 헌종"이 되고
  <안동 김씨 세도정치> 치하에서 허수아비 왕으로 살다가 22살에 후사 없이 요절했다.



    ['경릉' 항공사진]          (출처:궁릉유적본부-조선왕릉) 

    ['경릉']                          
  "경릉 景陵"
  <조선 24대 헌종>과 첫 번째 왕비 <효현황후 김씨>, 두 번째 왕비 <효정황후 홍씨>의 능이다. 
  <경릉>은 세 개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三連陵)"의 형식으로 조선왕릉 중 유일하다.
  앞쪽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헌종>, 가운데가 <효현황후>, 오른쪽이 <효정황후>의 능이다
  <효정왕후>는 1906년까지 살아 73세로 장수 한 것으로 유명하다.

 


    ['혜릉']                   
  "혜릉 惠陵"은 <조선 20대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이다

 

    ['혜릉' 항공사진]          (출처:궁릉유적본부-조선왕릉)        
  <20대 경종>은 유명한 <장희빈>의 아들이죠.
  <장희빈>이 죽을 때 아들 성기를 잡아 당겨 성불구자로 만들어 후사가 없다는 설이 있다.
  <단의왕후>는 세자빈 시절에 죽어 왕비가 되지 못하고, 후에 왕비로 추존된 여인이다.
  
 


    ['숭릉']          2:52    
  "숭를 崇陵"은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다
  <헌종>은 <효종>의 아들로 외국에서 태어난 유일한 조선 왕이죠.
  <병자호란> 패전으로 인질로 잡혀간 <봉림대군-효종>이 북경에서 낳은 아들이다.
  
  앞에서 <장렬왕후-인조 왕비> 릉에서 언급 한 <예송논쟁> 때의 왕이었다.
  아버지 <효종>의 '북벌정책'이 실효성이 없다고 폐기했는데 34세로 일찍 죽었다.
  


    ['숭릉' 항공사진]             (출처:궁릉유적본부-조선왕릉)

    ['숭릉']                
  "명성왕후 明聖王后"는 <19대 숙종>의 친어머니가 된다.
  <명성왕후>라는 이름은 두명이 있는데 <고종>의 왕비도 <명성왕후>



               

    ['동구릉역' 3번 출입구]            3:26       
  <동구릉역 3번출입구>로 돌아와 귀가했다.
  
  오늘 걸은 거리는 6.3km였으며 2시간이 걸렸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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