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난고 김병연의 고향를 찾아서』 [양주] 김삿갓풍류길 1코스 답사기 덕정역-태봉산-서재마을-풍류정-김삿갓교-회암사지박물관-회암사- 108바위-삿갓바위-삿갓향기쉼터-김삿갓쉼터-벽화거리-김삿갓교 [詠笠] 浮浮我笠等虛舟 一着平生四十秋 牧竪輕裝隨野犢 魚翁本色伴白鷗 醉來脫掛看花樹 興到携登翫月樓 俗子衣冠皆外飾 滿天風雨獨無愁 [나의 삿갓을 읊다] 머리 위에 둥둥 뜬 내 삿갓은 빈 배와 같고 한번 쓰고 사십 평생 같이 살아왔도다. 목동이 들에서 소를 몰 때 가볍게 걸치고 늙은 어부 강가에서 쓰고 갈매기와 벗했네 한잔 술에 취하면 꽃나무에 걸고 꽃구경하고 흥겨우면 손에 들고 다락에 올라 달구경하며 달과 속삭이고 속물들은 의관을 모두 겉치레로 꾸미지만 비바람 가득찬 하늘일지라도 홀로 근심없으라 ['김삿갓풍류길 안내도'] ['구글어스'] '경기도 양주시 덕정동'에 있는 "덕정역"에서 출발하여 "태봉산"을 넘고 "지공선사-나옹선사-무학대사"의 얼이 서려있는 "회암사"를 다녀 오는 코스로서 "난고 김삿갓 김병연 蘭皐 金炳淵"의 고향을 둘러 보는 약10km의 태마길을 갑니다. ['덕정역'] 10:12 2019년 2월 21일 (목) 맑음 연무 미세먼지 오전 날씨는 맑았으나 연무와 미세먼지로 조금 기분 나쁜 날씨였습니다만 오후엔 조금 좋은 날씨... [분당선-경의중앙선-1호선]을 환승하여 "양주시 덕정역"에 도착했습니다. [덕정역]의 출입구는 [1번출입구] 하나만 있어서 어디로 나가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더군요. "김삿갓풍류길"은 [덕정역1번출입구]에서 우측, 즉 남쪽으로 바로 시작됩니다. 100m 정도 진행하면... ['덕정삼거리'] 10:15 [덕정삼거리]를 만나는데, [김삿갓풍류길1코스]는 좌측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덕정삼거리]에는 이정표가 있는데, 이정표 앞으로 가면... [이정표] [1코스]는 좌측으로 [←4.4km김삿갓쉼터][←5.1km회암사] 방향으로 가고 [2-3코스]는 우측 [체육공원0.4km→][덕계역3.4km→] 방향으로 가더군요. 오늘은 [1코스]를 답사 하므로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면... ['덕정삼거리' 횡단] [덕정삼거리] 가운데 조그만 가로공원이 있는데 안내판이 설치되 있습니다. 안내판 앞으로 가면... [풍류길안내도와 현위치] ['태봉산구간' 구글어스] "김삿갓풍류길1코스 안내도"가 현위치와 길안내를 자세히 하고 있습니다. 눈여겨 볼 코스는 [태봉산]을 통과하는 코스인데, 도로를 이용해도 되고, 등산로를 이용해도 된다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구글어스는 제가 직접 진행한 "태봉산"을 넘어간 등산로 코스입니다. ['덕정중학교' 후문] 10:20 [덕정삼거리]를 건너면 바로 [덕정중학교 후문]을 통과하게 되고 ['행전교회' '태봉산' 조망] 이어서 바로 [태봉산]이 조망되기 시작하며, 우측엔 [행전교회]가 보이고 정면엔 "S-OIL금정주유소"가 보입니다. 주유소 앞으로 가면... ['S오일 금정주유소' 앞 삼거리] "S-OIL금정주유소" 앞에서 좁은 도로를 직진하여 건너면 바로 "태봉산 들머리"가 있습니다. ['태봉산' 들머리] 10:27 "태봉산 들머리" [덕정삼거리]에 있었던 안내도에도 나타나 있드시, 등산로를 이용하지 않고 우측 도로를 따라 직진해도 됩니다만, 저는 "태봉산" 등산로를 따라 진행하기로 하고 [태봉산]으로 올라 갑니다. [오름길] 산행의 느낌을 조금 주는 산길 오르막을 12분여 오르면.... [첫번째 봉우리] 10:39 장의자가 하나 있는 첫번째 봉우리에 오르고... [삼거리] 10:40 이어서 삼거리를 만나는데 [덕정성당]에서 오르는 길과 합류하는 삼거리였고... [두번째 봉우리] 삼거리를 지나면 바로 두번째 봉우리를 만납니다. [두번째 봉우리에서 정상 조망] 10:42 두번째 봉우리엔 운동시설도 있었고, 정면으로 [태봉산 정상]이 가까이 조망되었습니다. ['태봉산' 정상] 10:46 "태봉산 187.32m" 어느 이 지역 향토학자가 쓴 글에는 한자로 "胎峰山"이라고 하는데 누구의 "태 胎"를 묻었는지는 알수 없고, 부근에 옹주 부마인 "권대항"의 묘소가 있어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며 추정한답니다. 동행한 "조용원선생님"이 표지기 하나를 부착했습니다. [능선길] "태봉산 정상"에서 능선길을 10여분 진행하면.... [삼거리] 10:55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덕정고등학교]로 연결되는 곳이라고 알리고 있고 [삼거리] 10:56 이어서 다시 삼거리를 만나는데 어느 곳으로 가던지 상관없다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김삿갓 그림]이 있는 길은 모두다 [김삿갓풍류길]이니까요. 그리고 어디로 가나 비슷비슷... 저는 좌측 [←0.9km서재마을][←3.9km회암사지] 방향으로 갑니다. [갈림길] 10:59 다시 갈림길을 만나는데 이곳에는 이정표가 없군요. 그래서 사람들의 통행흔적이 많은 우측길로 진행했습니다. ['SK모정주유소' 조망] 조금 진행하니 절개지 아래에 [SK모정주유소]가 보였습니다. 조금전 이정표가 없는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가면 주유소 좌측 능선으로 내려 갈듯... [내림길] 사람들의 통행흔적이 많은 길로 조금 내려 가면... [절개지] 11:06 집을 지을려고 하는지 산을 절개하고 방치한 곳으로 길은 이어졌고... [양주 화합로'] 11:07 [덕정]에서 [포천]으로 이어지는 새로 개설된 도로를 만나 [SK모정주유소]를 지나면... ['서재말교차로' 버스정류장] 11:10 [서재말교차로 버스정류장]을 만나고... ['서재마을' 입구] 11:16 이어서 "서재마을 안내석"을 만납니다. 여기선 좌회전 ['서재마을' 통과] 11:20 계속해서 [서재마을]을 진행하면.... [포천-구리 고속도로]와 연결되는 [양주-포천 고속도로]를 통과하고... ['예인어린이집' 앞] 11:23 이어서 [예인어린이집]을 만나는데, 좌측 "회암천 둑"으로 올라 갑니다. ['회암천' - '연동교' 조망] "회암천 둑"으로 올라 가면 앞에 "연동교"라고 하는 다리가 보이는데 다리를 건너, 건너편 둑으로 [김삿갓풍류길]은 이어지더군요. 이정표가 길안내를 잘하고 있습니다. 다리를 건너 가면... ['회암천변 둑'] 11:26 "회암천" 북쪽 둑방길을 만나는데, 둑방길로 가던 개천변길로 가던 상관없겠습니다. ['회암천변'] 현재 "회암천"에는 산책로 공사를 하고 있더군요. 7분여 진행하면... [현수교] 11:33 조그마한 다리를 현수교로 만든 다리를 지나고 ['풍류정'] 11:37~11:41 이어서 "회암천변"에 쓸쓸히 서 있는 "풍류정"을 만납니다. 주변엔 "난고 김병연"이 쓴 詩들이 여럿 전시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만 소개합니다. [김삿갓의 辱詩] 위 시 안내판만 보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를수도 있어서 제가 이해하기 쉽게 앞뒤 상황을 첨가하여 좀 풀어서 알려 드리자면... 김삿갓이 추운 겨울날에 잘곳이 없어 늘 그랫드시 어느 시골 서당엘 찾아가 재워 주기를 청하였답니다. 서당에서 "이리 오너라 훈장님좀 뵙자해라"하고서는 마루 턱에 걸터 앉아서 "물 한잔 가져오너라"했는데 제일 큰 학동놈이 나와서 보니 남루한 옷차림으로 삿갓 쓴 주제에 큰소리로 명령을 하니 학동은 영 못마땅해 하며 대꾸도 없이 들어가서는 훈장선생에게 이르기를 “어떤 삿갓 쓴 거지가 찾아 왔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이 되먹지 못한 훈장은 나와 보기는 커녕 학동에게 이르기를 “여기는 글 공부 하는 곳이지 비럭질 하는 곳이 아니라고 해라”라고 하니 그 스승에 그 제자였답니다. 이 학동놈이 나와서는 훈장 말을 그대로 전하는데... 우리의 천재시인 감삿갓이 품위는 있어 그놈을 한대 팰수는 없는 노릇이니 지필묵을 꺼내들고 일필휘지로 인정머리없는 훈장과 학동놈을 욕한 詩가 바로 위의 詩입니다. [1] 내용을 한자의 뜻대로 해석하면... 辱說某書堂(욕설모서당) - 어떤 서당 욕하기 서당 내조지(書堂乃早知)이요 : 이 서당을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지요 방중 개존물(房中皆尊物)인데 : 방안에는 모두 존경하는 분들이지만 생도 제미십(生徒諸未十)이라 : 생도는 모두 열 명도 못 되는데도 선생 내불알(先生來不謁)이다 : 선생(훈장)은 나와 보지도 않는다. [2] 한자음을 그대로 발음하면.... 辱說某書堂(욕설모서당) - 어떤 서당 욕하기 [書堂은 乃早知] = 서당은 내조지이고 [房中은 皆尊物] = 방중은 개존물이라 [生徒는 諸未十] = 생도는 제미십이고, [先生은 來不謁] = 선생은 내불알이다. "김삿갓"은 위의 詩를 학동놈에게 주면서 “네 선생께 전하거라“ 하고서는 줄행낭을...ㅎ 학동놈이 그것을 받아 들고는 "거지가 그래도 글씨는 잘 쓰네~" 싶어서 스승한테 갖다 바치니 한참을 기웃거리던 훈장 별것 아니다 생각 하고서는 잘 쓴 글씨가 아까워 그것을 학동에게 주면서 "너희들도 공부를 했으니 이것이 무슨 뜻인지 같이 뜻풀이를 해 보거라" 했답니다. 그것을 명심보감 정도를 떼었을 듯한 공부 잘하는 놈이 한참을 갸웃거리며 읽다가 킥킥하고 숨 넘어 가는 소리를 했답니다. 뜻풀이로야 큰 욕이 아니건만 우리말로 새기면 "서당은 내좃이요. 방중은 개좃물이라. 생도는 제미씹이요. 훈장은 내불알이로다."이니 사실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썼으니 얼마나 웃겼겠습니까...ㅎㅎ 스승이란 작자가 그것을 아이들에게 주면서 뜻풀이 하라고 했으니 얼마나 실력없는 훈장이었을까요. ㅋ 하나 더 알려 드리면... 어느 기생집에서 기생이 거문고를 타는 것을 보고 쓴 글도 유명하죠. 爾年十九齡 : 너의 나이 열아홉에 乃早知瑟琴 : 일찍이도 거문고를 탈 줄 알고 速速拍高低 : 박자와 고저 장단을 빨리도 알아서 勿難譜知音 : 어려운 악보와 음을 깨우첬구나 한자의 뜻으로만 해석하면 기생을 칭찬하는 글이지만 한자음으로만 읽으면...무지 야한 음담패설 "이년씹구멍 내조지슬금 속속박고저 물난보지음" 너무 야해 더 이상의 해석은 않겠으나, 한자뜻과 한자음을 합쳐 해석하면 더 야한 음담패설이 되지요. 뽀너스로 하나 더.... 돈을 벌려고 학동들을 모집하려고 꼬시는 글도 너무 유명하죠? ㅎㅎ 自知면 晩知고 補知면 早知다 혼자서 알려 하면 늦게 알게되고 도움받아 알려 하면 빨리 알게된다. 그러나 한자음으로 읽으면.... "자지는 만지고 보지는 조지라" 漢詩는 音이 있고 새김이 있지요. '음 音'은 소리 나는 대로 읽는 것이고 '새김'은 그 뜻을 깊이 있게 음미하는 것이라 하지요. "난고 김병연"의 詩들은 대부분 한자뜻과 한자의 한글음을 교묘하게 연관지어 쓴게 특징이라면 특징인데 한자의 뜻을 새김하면 매우 좋은 뜻이지만 한글음으로 읽으면 완전 다른 욕이나 음담패설이 되지요. ㅎ ['풍류정'에서 '김삿갓교' 방향 조망] "풍류정"에서 진행방향을 조망하고 7분여 "회암천변"을 진행하면... ['김삿갓교'] 11:48 [양주-포천 고속도로]가 [회암천]을 지나는 밑에 "김삿갓교"가 있습니다. [김삿갓교]를 건너 자동차 도로로 나가 "회암사지"로 갑니다. ['풍류길안내도'와 현위치] [김삿갓교]에도 현위치를 알리는 풍류길 안내도가 설치되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김삿갓 고향 입구이니까요. 여기서 좌측으로 진행해도 되고 우측으로 진행해 돌아 와도 되는군요. 이곳이 [김삿갓풍류길1코스] 종점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측으로 돌아 오려고 합니다. ['김삿갓교' 앞 사거리] [김삿갓교] 횡단보도를 건너서 ['김삿갓교'] 11:54 [김삿갓교]와 [양주-포천 고속도로]를 바라보면 이곳이 "김삿갓의 고향 회암동"이란걸 알수 있습니다. 저는 챙피하게도 "김삿갓 난고 김병연"의 고향은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인줄로만 알았습니다. '경기도 양주시'에 [김삿갓풍류길]이 있다고해서 지방자치단체들의 자기 고장 연관짓기의 일부인줄 알았는데 진짜로 이곳이 고향이란걸 알고는 무척 의아해 했으며 바로 찾아 보아야겠다고 이렇게 찾은 것입니다. "김삿갓"은 명문세가 '안동 김씨 가문'으로 선천지방 수령인 '선천부사와 방어사'를 지낸 "김익순"의 손자로 1807년 3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회암리'에서 "父 김안근-母 함평 이씨"사이에 차남으로 출생하였답니다. 바로 이곳이랍니다. ['회암사지 박물관' 방향] "포천"으로 넘어가는 도로를 따라 6분여 진행하면.... ['회암사지 박물관' 입구] 12:00 [회암사지박물관]의 정문은 아니지만 지름길이어서 샛길로 들어 가면.... ['회암사지 박물관'] "회암사지 박물관"을 만납니다. "회암사" 발굴조사를 하며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이었습니다. 박물관 뒤에 보이는 [왕방지맥]에 대해서 관심있는 분들은 제가 쓴 [왕방지맥 산행기]를 참고 하세요~ [박물관 내부] 12:05~12:21 [일월오봉도 왕좌에서 한컷] 박물관 내부를 횡하니 둘러 보고 '일월오봉도'를 배경으로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외치며 오랜만에 등장하고 박물관을 나가면... ['회암사지' 입구] 12:22 [회암사지]로 들어 가는 입구엔 "왕실 축제장"을 만들어 놨습니다. 주말엔 구경오는 분들이 많다고... [어가행렬] '양주시'는 많은 예산을 들여 [회암사지]를 관광지로 만들고 있더군요. ['회암사지'] "회암사 檜巖寺"가 현재의 "회암사지"와 같은 대규모의 사찰로 중창(重創)된 것은 고려 말에 인도의 고승인 "지공"이 “회암사의 산수형세가 천축국(天竺國 : 현재의 인도)의 "나란타사"와 같기 때문에 이곳에서 불법을 펼치면 크게 흥할 것”이라 하였고, 그의 제자인 "나옹선사"가 그러한 뜻에 따라 대대적인 불사(佛事)를 이루면서 랍니다. 또한 '태조 이성계'의 왕사를 역임한 "무학대사"가 "나옹선사"의 뒤를 이어 주지승으로 있을 때에 절정을 찍었는데 [태조(太祖) 이성계]가 [정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있을 때에 이곳에 자주 기거했답니다. 그래서 "회암사"는 일반적인 사찰과는 달리 궁궐과 유사한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음이 확인되었고, 왕실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던 도자기류와 기와류 등 귀중한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고려말, 조선초 최대의 사찰로서의 위상과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사찰들은 그 세를 이어가지 못했으나 그 이후에도 이 절에 효령대군(孝寧大君), 정희왕후(貞熹王后), 문정왕후(文定王后) 등의 왕실의 열열 불교신자들이 "회암사"에 대규모의 불사를 단행하여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으나 '숭유억불' 정책과 여러번의 전쟁으로 완전 소실되었고 그 터만 덩그러이 옛 영화를 추억하며 빈 공간을 채우고 있습니다. "회암사 檜巖寺"라는 이름은 앞에 보이는 "천보산 天寶山의 바위"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옛날엔 "천보산 바위" 주변에 "회나무"가 많았다고... ['회암사지 전망대'] 12:38 "회암사지 檜巖寺址"를 전체적으로 조망 할수 있는 전망대입니다. 조망을 하면... ['회암사지' 조망] 일반 절간이 아니라 왕궁의 형태를 띈 사찰로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수 없는 독특한 사찰이랍니다.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지 상상이 가죠? 백성들에겐 "불교"를 버리고 "유교"를 믿으라고 강력 밀어 부치면서 자기들 왕족들만 몰래 "불교"를 믿은 이율배반의 조선왕조였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회암사 일주문' 앞 갈림길] 12:41 "회암사지 檜巖寺址" 전망대를 지나면, "회암사 일주문"을 만나는데 사라진 "회암사"에 조그마한 "회암사"를 새로 지어 포교활동을 하고 있는 "회암사 입구"입니다. [김삿갓풍류길]은 여기서 우측 산길로 안내됩니다. 고양이 한마리가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뒹굴며 따뜻한 봄볕에 일광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름길] 새로 만든 "회암사 일주문"에서 등산로를 올라 갑니다. 15분여 오름짓을 하면... [부도] 12:56 안내판이 없는 부도를 만나는데..누구의 부도인지 모르겠고... [약수터 가는 길] 계곡으로 잠시 들어 가면.... ['회암사 약수터'] 12:58~1:00 "회암사 약수터"를 만나는데, 수질검사표에 [음용적합]이라고 해서 한바가지 마시고... [오름길] 약수터에서 잠시 올라 가면... ['무학대사 부도탑'] 1:04 [부도탑 안내문] ['쌍사자석등' 안내문] "무학대사 부도탑"을 만납니다. "회암사"에는 보물이 세개있는데 그 중에 두개가 [무학대사 부도탑 보물388호]와 [쌍사자 석등 보물389호]라고 하는데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면 되겠고.... "무학대사"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알려져 있어 제가 다시 언급 할 필요는 없겠지만... "무학대사"는 한자로 "無學大師"로 쓰지요? 혹시 "舞鶴"으로 알고 있지 않나요? ㅎ 한마디로 "춤추는 학"이 아니라 "못 배운 놈-무식한 놈"이라는 뜻이지요? ㅎ 스스로를 낮추어 지은 법명이라고 할수 있지만, 여러 재미있는 일화들이 있습니다만 생략하고... 그리고 "무학대사"의 본명은 "박 자초 朴自超"이며, 경남 합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지요. 아버지는 삿갓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유지하는... 그러한 그가 불도를 성실히 닦아 중국 원나라의 연경으로 유학을 가서 "지공선사"에게서 사사를 받고오지요. 혼탁한 정치 경제상황으로 멸망해 가는 고려 말에 "이성계의 꿈 해몽"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조선 개국 후에는 "태조 이성계의 王師"가 되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큰 역활을 했죠 ['무학대사 비'] 불교를 국교로하던 고려에서 유교를 국교로하는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면서 불교 수난의 시대가 왔죠 당연히 "무학대사"도 신군부 정치세력들에 의해 폄하의 대상이 되었고 수난의 시대는 '순조'때까지 이어졌죠 앞에 보이는 우측 비석도 새로 만든 것이고, 오리지날 비석은 좌측에 귀부만 남아 있고, 파괴되었습니다. 누가 파괴했냐구요? ㅎ 당연히 유교를 신봉하는 권력층의 유생들에 의해... 이곳에 있는 비석은 모두 파괴 되었는데, 유교를 신봉하는 조선의 유생들이 깨부수고 자기가 깨부셨다고 자랑까지 하며 다녔을 정도라고 하니 권력층 유생들의 안하무인 행위는 도를 넘어 나라의 근간까지 무너뜨려 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누가 비석을 홰손했는지 알수 있다는데...1821년에 "이응준"이라는 유생이 부셧다고... "무학대사"는 조선왕조를 세우는데 일등 공신이라고도 할수 있지만, 종교적 대립으로 유교에 밀린 불교의 "무학대사"는 수난의 세월을 보내며, 기록에는 어디서 죽었는지도 나타나 있지 않고, 전국을 떠돌며 방황하다가 '경남 안의'에서 은신하며 살다 갔다는 설이 있고, 금강산에 들어가 죽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또한 죽어서 '사리'도 나오지 않은 스님으로 매도 당하기도 했죠. "무학대사"가 실제 '사리'가 나오지 않았을수도 있겠습니다만, 역사의 승자들이 쓴 시나리오여서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부도"라는게 '사리'나 '유골'을 모시는 일종의 납골당이니 사리는 분명 있었겠지요? ['지공선사 부도비'] [안내문] "지공선사 부도 指空禪師" '指空스님'에 대해선 여러 각도에서 알아 보아야 겠지만 간단하게 언급하자면... '指空스님'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인디안'입니다. '指空스님'의 본명은 "디야나바드라(Dhyanabhadra·提納薄陀)"로 인도의 마가다국(摩竭提國) 출신. 당시 인도에는 불교가 거의 몰락하고 힌두교가 성행 할때여서 아직도 불교를 믿는 나라로 탈출여행을 했는데, 그가 히말라야산맥을 넘고 원나라 수도 연경에 머물고 있을 때 '원나라'로 유학을 갔던 "나옹선사"를 만나 충숙왕 13년(1326년)에 "나옹선사"와 함께 고려에 들어와 불교를 國敎로 믿는 고려에서 '환생한 부처'로 극진한 환대를 받았으며 이 양반은 우리나라에 약2년 정도 머물렀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의 행적을 보면 일반 대중들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지공'이 티베트에 머물었을 때엔 주술사가 독약을 타놓은 차를 마셔야 했고, 하성(蝦城)에서는 이교도들로부터 얻어맞아 이가 부러졌으며, 중국의 양자강 상류에 속하는 대독하(大毒河)에서는 도적을 만나서 다 뺏기고 알몸으로 도망가기도 했답니다. 1361년 겨울 중국 연경에서 입적했는데 그의 유골을 네 사람이 나눠 그 중 두개를 고려로 가져와 이곳 "회암사"와 "장단 화장사", "묘향산 안심사"에 안치 했다는 것입니다. "환생한 부처"가 아니라 그도 이 세상의 수많은 인간 중에 한사람이었을 뿐이라고 단정 짓는 대목입니다. 이러한 '指空'의 행적은 '목은 이색'이 지은 '지공의 회암사 부도비명 병서', 즉 윗 사진의 비석에 자세히 전했는데, 조선 중기에 "숭유억불"의 열혈 유생들이 저 비석을 깨부수고, 순종 때에 다시 세웠지만, "무학대사비"와 함게 1821년에 유생 이응준이 개인의 영달을 위해 다시 없애버렸답니다. 윗 사진의 오른쪽 '귀부'에 오리지날 비석이 있던 자리이고, 좌측 비석이 새로 세워진 비석이랍니다. ['나옹선사 부도와 석등'] [안내문] "나옹선사 懶翁禪師, 1320-1376" 고려 말 '공민왕'의 王師였으니 요즘 말로 대통령의 멘토였던 대단한 인물이었답니다. "지공선사"의 제자임을 강조했던 인물이고, "무학대사"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경북 영덕 출신으로 출생설화도 유명하지요. 혼탁한 부정부폐 가렴주구의 고려말에 아버지가 세금을 내지 못해 도망가 버려서 어머니가 대신 관헌에 끌려 가다가 개울가에서 그만 애를 낳고 관헌으로 갔다지요. 치마에 피를 본 사또가 연유를 알고는 빨리 가서 애기를 구하라고 하는데, 가 보니 수백마리 까치들이 '나옹선사'를 에워싸고 보호하고 있었다는 탄생설화는 유명하다면 유명합니다. ㅎ "나옹선사"의 부도는 "여주 신륵사"에도 있지요? "회암사"에서 불법을 강론하면 인근 부녀자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는데... 여하튼 여자들에게 무지무지 인기가 있어서 여자들이 집안 일은 내팽개치고 절간에만 가니 "나옹선사"와의 스켄달이 끊이지 않아서, 집안 어른들과 남편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듯 높았다니... 이에 부녀자들의 남편들이 살수 없다는 상소가 '공민왕'에게 수없이 올라 가니 왕도 어쩔수 없이 "나옹선사"를 귀양 보내는데 "밀양 영원사"로 내려 가라고 어명을 내렸지요. 마포나루에서 서해를 통해 밀양으로 가야 하는데, 지병이 있던 "나옹선사"는 스스로 입적의 시기를 알고는 뱃머리를 여주로 돌려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신륵사"와 "회암사" 두곳에 부도가 있는 것이라죠. 그보다도 이 분의 詩가 더 유명하지요? "나옹선사"의 유명한 詩는 원문으로 감상해 보세요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 (료무노이무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회암사' 전경] 1:13 [대웅전] 사라진 "회암사"를 새로 만들어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짝퉁 "회암사"입니다. 올때 마다 건물이 하나씩 늘어 나는군요. "天寶山"과 잘 어룰리는 "회암사"라고 여겨집니다. ['삼성각'] 1:15 [김삿갓풍류길]은 "회암사" 끝에 있는 "삼성각" 옆으로 이어집니다. 좌측 돌계단을 잠시 올라 가면... ['나옹선사 추모비'] 1:17 [안내문] [보물 제387호]로 지정된 "회암사지 선각왕사비"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 하자면 "나옹선사 추모비"입니다. 안내문에는 산불이 나서 비석이 홰손되어 모조비를 세웠다고 합니다만.... ['나옹선사 추모비'의 초석과 기단] 오리지날 "나옹선사 추모비"는 모조비 뒤에 이렇게 초석과 기단만 남아 있고 홰손된 비석은 문화재청에서 별도 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돌비석이 산불로 저렇게 처참하게 부서지지는 않죠? 이 비석도 유생들이 깨부셔 홰손시켰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안내문에 쓸수는 없을테니... ['108바위' 조망] ['108바위' 줌인] [나옹선사 추모비]에서 뒷쪽 "천보산" 아래에 있는 "108바위"가 조망됩니다. [김삿갓풍류길]은 저 [108바위]로 이어 집니다. ['108바위 전망대' 오름길] [108바위]로 올라 가는 계단을 오르면... ['108바위 전망대] 1:31 "108바위 전망대"에 도착했습니다. ['108 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108바위"와 "천보산"은 멀리서 조망했을 때보다 못하군요. ['회암동' 조망] [108바위] 전망대에서 108 번뇌를 벗어 놓고, "난고 김삿갓"의 고향인 '양주시 회암동'을 조망합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살다간 방랑시인 김삿갓이 어른거리는듯 합니다. [내림길] [108바위 전망대]에서 8분여 계곡길을 내려 가면.... ['삿갓바위'와 '선녀탕'] 1:40 "삿갓바위와 선녀탕"이라고 주장하는 곳을 만나는데... 글쎄 주장 하는거야 자유지만 여기서 선녀가 미역까지 감을수 있었을까....ㅎ ['警世'] "김삿갓 탄생 당시의 우리나라 정치 상황과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 개혁군주 "정조대왕"의 갑작스런 의문의 죽음에 이어 탄생되는 "안동김씨 세도정치"시대였죠.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걸 빼고는 못하는게 없다"라고 할 정도의 위세를 떨치며 매관매직, 가렴주구, 부정부패가 횡횡하던 암울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치하였답니다. '김삿갓'의 할아버지인 "김익순"은 '안동김씨' 세도가의 집안이어서 '안동김씨'가 아니고선 오를수 없는 "선천부사"와 "선천방어사"까지 올라 섭정을 하는 명문세가의 중심이었답니다. [선천]은 현재의 북한 '신의주' 아랫쪽에 있는 군사와 경제 핵심 요충지였다죠. 당시의 세도정치 치하에서 핏박받는 백성들은 먹고 살기가 어려워 조정에 대한 원성이 하늘을 찌를듯 하여 전국 여러 곳에서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나던 암울한 세상이었답니다. 그 대표적 반란이 1811년에 '평안도'에서 일어 난 "홍경래의 난"이었죠. [내림길] 암울했던 "세도정치시대"를 곱씹으며 13분여 완만한 내림길을 더 내려 가면.... [삼거리] 1:53 삼거리를 만나는데, 여기서 조금 떨어져있는 "삿갓향기쉼터"를 다녀 가는게 좋습니다. 길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쉬우니 유의해야겠죠? ['삿갓향기쉼터' 입구] 1:54~1:56 "김삿갓향기쉼터" [김삿갓풍류길]에서 약간 떨어져 있지만 꼭 다녀 가야하는 쉼터이더군요. 그렇게 넓은 쉼터는 아니지만 숲속도서관도 있고 그네도 있어서 김삿갓을 추억하며 쉬어 갈수있는 쉼터라고 생각됩니다. [김삿갓의 '風月'] "홍경래의 난" 당시에 [평안도 선천부사겸 방어사]였던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은 ​"홍경래"의 농민군에 항복하여 목숨을 구걸해 살아 남았다가, 농민군이 관군에게 쫓길 때는 농민군 참모인 '김창시'의 목을 1천 냥에 사서 조정에 바쳐 공을 위장하는 이중 인격이 드러나자 참형을 당하였고, 비열한 인물의 상징으로 조정이나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답니다. 이리하여 당시 여섯살이던 "난고 김병연"의 집안은 멸족 [역적의 집안]이 되어 대궐같던 '양주 회암동'의 집을 떠나고 아버지 "김안근" 마저 홧병으로 죽었답니다. "김삿갓의 어머니-함평 이씨" 저는 '김삿갓'보다 그의 어머니가 "신사임당"보다 더 훌륭한 여인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앙하죠. 왜냐하면... '충남 홍성'이 고향인 '김삿갓의 어머니'는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많은 학문을 익힌 新女姓이었답니다. 그러니 당시 세도가 집안인 '안동김씨 문중'으로 시집 갈수 있었던 것이었겠죠. 하지만 시아버지인 "선천부사 김익순"의 폐행으로 멸문집안이 된후 앞으로 다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자식들에겐 집안 내력을 철저히 숨기고, 첩첩산중 '강원도 영월'의 계곡 속으로 숨어 들어가 아들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과거를 준비하게 했답니다. 그러니까 '강원도 영월 김삿갓면'은 그들의 피난처이자 미래를 꿈꾸는 곳이었다 할수있겠습니다. 김병연의 나이 스무해쯤, 영월현에서 시행하는 지방향시에 응모한 김삿갓 앞에 시험문제가 출제 되는데 "嘆金益淳罪通于天 論鄭嘉山忠節死" "김익순의 죄가 하늘까지 미쳤음을 꾸짖고 가산 군수 정시의 충절어린 죽음을 논하라"였답니다. 시험지를 받아든 '김병연'은 일필휘지로 "한번 죽어서는 그 죄가 가벼우니 만번 죽어 마땅하다"라는 내용의 답안지를 작성하고 장원을 차지 했다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아들의 답안지 내용을 들은 어머니는 "출세도 중요하지만 어찌 조상을 능멸할수 있는가!"라고 꾸짖으며 자신의 시아버지이자 '김병연'의 할아버지인 "김익순"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었답니다. 출세를 보장해줄 수단으로 믿었던 과거시험이 조상을 욕하는 어이없는 만행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로부터 "후손으로서 하늘을 볼수 없는 죄인이로다"라며 삿갓을 쓰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방랑시인으로 세상을 풍자하며..또한 비판하며 살았다고 그의 인생을 좋게 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파란문"은 조금 달리 생각합니다. 한 가정의 家長이 강원도 두메산골에 사는 궁핍한 가족들을 보살피지 않고 저 혼자 떠돌아 다니며 제멋대로 산것은 家長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나쁜 아빠"와 "나쁜 남편"의 대명사로 요즘같으면 이혼을 당해도 여러번 당하는 그런 무책임한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지방 향시에서 모르고 할마버지를 욕하는 글로 장원이 되었다는 것이 어머니와 처자식을 버리고 가출을 하는 이유가 되었을까?하는 의구심을 무지 불러 일으킵니다. 할아버지의 죄에 대해선 시험보기 전에 이미 잘 알고 있었다는 연구 논문도 있는 걸로 보아 "모르고 할아버지를 욕했다"는 것은 가출을 위한 명분이 아니었을까.... 현실과 낭만은 별개지만 김삿갓의 인생을 너무 미화하는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사리사욕에 눈 먼 관료나 양반들에겐 조롱과 해학이 곁들인 풍자를 퍼붓고 ​가난한 농민들에겐 즐거운 해학과 웃음으로 많은 민중들을 포용하며 산 그의 낭만에 대해선 찬사를 보냅니다. [김삿갓과 함께] 이번 [김삿갓풍류길]에 함께하신 분들입니다. 평생을 교직에서 후학들을 위해 헌신하시다가 정년퇴직하시고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를 벗 삼아 김삿갓처럼 유람을 다니시는 즐거운 노년을 보내시는 산객들이십니다. "김삿갓과 함께 한컷 ♬ ~" ['회암동' 통과] [삿갓향기쉼터]를 나와 김삿갓의 고향인 "회암동'을 10여분 진행하면... ['풍류길 등산로' 입구] 2:07 벽화거리 앞 삼거리에 도착하면 이곳에 쉼터가 또 있는데 ['김삿갓쉼터'] 2:08 "김삿갓쉼터"가 또 하나 있습니다. 이용객이 보이지 않아 조금 안타깝지만, 그런대로 여러 편의시설들을 요소요소에 설치 했다고 생각됩니다. 쉼터 뒤에 보이는 돔 형태의 시설은 이 지역 [게이트볼장]이더군요. "김삿갓의 고향"과 "게이트볼장"...좀 묘한 뉴앙스가 풍깁니다. ㅎ ['김삿갓 벽화거리'] [김삿갓쉼터]에서 [김삿갓교]까지는 "김삿갓벽화거리"가 이어 집니다. 군부대 담장에 벽화를 그렸더군요. 버스시간 때문에 빠른 걸음으로 벽화거리를 6분여 통과하면... ['김삿갓교'] 2:15 2시간반 전에 통과했던 [김삿갓교]에 다시 돌아 왔습니다. 다리를 건너 버스정류장으로 갑니다. ['김삿갓교' 버스정류장] 2:16 [덕정역]으로 가는 시내버스는 비교적 자주 있었습니다. 미니시내버스를 타고 20여분이 걸려 [덕정역]으로 가서 ['덕정역1번출입구' 정면 시장 입구] ['만두사랑' 음식점] [덕정역] 정면에 있는 시장 골목으로 들어 가서... "만두사랑"이라는 음식점에 들어가 [수제비만두국]과 [고기만두]에 소주 한잔했는데 가격과 맛이 괜찮아 앞으로 [김삿갓풍류길]을 가실 분들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추천하오니 많이 이용하시길...ㅎ ['회암사' 부근 구글어스] [고도표] 제가 두발로 걸은 [김삿갓풍류길1코스] 거리는 10.4km였으며, 4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한번쯤 가 볼만한 곳이라고 생각됩니다. 평생을 방랑하며 살다간 김삿갓도 고향생각을 많이 했더군요. 고향을 그리며 쓴 詩 한수 思 鄕 고향생각 西行己過十三州 (서행기과십삼주) 서쪽으로 이미 열세고을 지나왔건만 此地猶然惜去留 (차지유연석거유) 이곳에서 떠나기 아쉬워 머뭇거리네 雨雲家鄕人五夜 (우운가향인오야) 아득한 고향을 한밤중에 생각하니 山河逆旅世千秋 (산하역려세천추) 천지산하가 천추의 나그네 길일세 莫將悲慨談靑史(막장비개담청사) 역사 얘기하며 비분강개 하지말게 須向英豪問白頭(수향영호문백두) 영웅호걸들도 백발이 되어버리고 玉館孤燈應送歲 (옥관고등응송세) 여곽 외로운 등불아래 또 한해를 보내고 夢中能作故園遊 (몽중능작고원유) 꿈속에서 고향동산에 노닐어 보세 '김삿갓'이 '전남 화순'에서 마지막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한 말이 너무 가슴 아프게 다가 옵니다. "안초시, 춥구려, 이제 불을 꺼 주시오. 어머니가 보고 싶소"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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