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시 둘레길』
[평택섶길] 제11코스 정도전-원균길" 답사기
은산리종점-정도전묘-던지고개-내리-모선재-원균장군묘-상리-내리입구-복지대사거리
"평택섶길"
쉬어가며 돌아 가는 길
평택의 자연, 역사, 문화, 사람을 만나는 길
길을 걸으며 인생의 쉼과 여유를 찾는 길
대로가 아닌 작은 길
[평택섶길]에 위와 같은 의미가 있다고 해 그 길을 찾아 갑니다.
- 파란문 -
['평택섶길 전체 안내도']
['평택섶길 11코스 원균길 안내도']
[평택섶길] 제10코스 숲길은 변경되어 "정도전길"이 추가 되었더군요.
그래서 이번 [평택섶길 11코스]엔 "정도전길"과 "원균길"을 합쳐 답사하기로 했습니다.
두 길을 합쳐도 10km 정도여서 비교적 편안하게 걸을수 있는 길이어서 걷기 보단 역사적 인물에 대한
고찰을 하며 걸어 볼까 합니다.
['11코스 구글맵 지형도']
['11코스 구글어스']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1리'에 있는 "은산리버스종점"에서 출발하여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내리'에 있는 "원균장군묘"를 둘러 보고
'경기도 평택시 장안동'에 있는 "한국복지대입구사거리"까지 "9.6km"를 갑니다.
['진위역'] 8:50
2018년 4월 30일 (월) 맑음 연무
"삼봉 정도전 기념관"으로 가기 위해 먼저 [진위역]으로 갔습니다.
여러번 이용한 전철역이어서 낮설지 않습니다.
['진위역-하북삼거리' 버스정류장 조망]
[진위역] 앞에 있는 [1번국도]에 설치된 육교를 건너면서
"진위역.하북삼거리 버스정류장"의 위치를 확인합니다.
갈때와 올때의 [진위역.하북삼거리 버스정류장] 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진위역-하북삼거리' 버스정류장] 8:59
"진위역.하북삼거리 버스정류장"에서 [진위역]과 육교를 뒤돌아 본 광경입니다.
때마침 [은산리]로 가는 [8번 마을버스]가 들어 오고 있습니다. 시간을 맞춰 왔기 때문입니다.
이곳 [8번 마을버스] 시간표를 보면...
['8번 버스시간표']
[송탄]에서 8시50분에 출발하는 버스는 이곳에 9시 정각에 도착하더군요.
그러니까 [송탄]에서 [진위역]까지는 10분이 걸리다는 뜻이니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은산리버스종점'] 9:16~9:24
['은산종점슈퍼' 앞]
[진위역]에서 약15분이 걸려 종점인 [은산리 버스종점]에 내렸습니다.
버스종점에는 "은산종점슈퍼"가 있는데
앞에 있는 전봇대에 [평택섶길 정도전길]을 알리는 안내리본이 길안내를 시작합니다.
이 골목길을 100m 정도 올라 가면...
['정도전선생 묘' 입구] 9:27~9:38
오거리가 있는 고개에 오르는데 "정도전선생묘"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묘를 다녀와 좌측으로 고개를 넘어 가면 되겠습니다.
[전망대 조망]
고개 오거리에서 "정도전선생묘"가 있는 곳을 바라보는데 전망대가 살짝 보입니다.
전망대로 올라 가면...
[전망대]
[詩碑]
전망대에 도착하면 "정도전선생"이 쓴 "고의 古意"라는 詩碑가 있습니다.
이런 시는 감상하는 이들에 따라 감상이 매우 다를수 있겠습니다.
"정도전선생"은 봉건왕조체재에서 새로운 "조선"이라는 국가를 건설하며
왕의 역활과 재상들의 역활 분담을 주창했지요. 정치는 재상들이 하고 왕은 나라의 주군 역활만 하고...
요즘 말로 하자면 "이원집정부제"를 그 옛날 서슬퍼런 봉건왕조체재에서 주창한것이죠.
그러다가 "태종 이방원"이가 "뭔 개소리하냐!"라고 하며 '정도전'을 죽여버렸죠.
그리하여 조선왕조는 "왕에 의해~" "왕을 위해~" "왕의 나라"가 되었으며
능력이 있던 없던 스물일곱명의 절대 군주가 나라를 500여년 지배했죠.
民本은 사라지고...
['정도전묘지']
전망대에서 바라본 광경입니다.
"정도전선생묘"는 맨 아랫쪽에 있더군요.
['정도전 묘']
"삼봉 정도전 묘"
"조선 朝鮮" 건국의 설계자이자 정치개혁의 선구자였던 "삼봉 정도전"...
"정도전선생은 "이방원"의 자객에 의해 철퇴를 맞고 죽었지요.
그리곤 "삼봉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역적으로 500년을 어둠 속에 뭍혔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삼봉 정도전"을 역사의 어둠에서 꺼낸 사람은 다름아닌 "흥선대원군"이었죠.
역적으로 몰린지 500여년만에...
['정도전기념관' 조망]
지난 코스에서 탐방했던 "삼봉 정도전 기념관"과 사당을 조망합니다.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이 무덤에는 "정도전선생"의 시신은 없고 유품들이 뭍혀있다는군요.
그 이유는 "이방원"이 한테 죽임을 당하고 시신을 야산에 버려 시신을 찾을수가 없었다는군요.
[내림길] 9:39
"삼봉 정도전선생 묘"를 둘러 보고 다시 [평택섶길]을 진행합니다.
마을로 내려 가면...
[마을 사거리] 8:41
마을 사거리를 만나는데...
가운데 원두막이 독특하게 보입니다. 기둥이 하나이군요
[갈림길] 9:42
이어서 갈림길을 만나는데 전봇대에 안내리본이 있습니다만
이후부턴 안내리본이 없으니 "소망의 집"을 안내하는 안내판을 보며 가는게 좋더군요.
좌측길로 5분 정도 진행하면...
[삼거리] 9:47
다시 삼거리를 만나는데 [소망의 집] 방향인 좌측으로 진행하고
['큰산앞골']
이 계곡의 들판을 "큰산앞골"이라고 네이버 지도에 나와 있더군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 가면...
[삼거리] 9:50
다시 삼거리를 만나는데 계속 [소망의 집] 방향인 우측으로 5분여 진행하면...
['소망의 집' 앞 삼거리] 9:55
[소망의 집]이 보이는 삼거리에 도착합니다.
여기선 [소망의 집] 방향을 버리고, 좌측 길을 따라 가야 하더군요.
['던지고개' 조망]
[소망의 집] 삼거리에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10여분 진행하면
[쌍령지맥] 마루금이 지나는 "던지고개"가 조망되며
"정감 묘"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정감 묘' 입구] 10:08
"정감 묘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평택섶길]은 우측 섶길로 진행하지만 [정감 묘]를 둘러보고 가겠습니다.
출입금지를 하고 있는 [정감 묘] 입구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잠시 올라 가면...
['정감 묘']
[안내문]
"정감 묘"에 오릅니다.
"정감"은 '조선 선조'때의 인물로 "문장, 인물, 가문"이 모두 옥구슬같다고 "삼옥공"이라는
시호를 하사 받았다고...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시고
['던지고개' 가는 길] 10:13
[정감 묘]에서 "던지고개"로 바로 가는 길입니다.
['던지고개' 오름길]
처음엔 길이 흐릿하지만 조금 직진하면 [섶길 리본]을 만나고
우측에서 오는 정식 등산로를 만납니다.
10여분 오름짓을 하면...
['쌍령지맥' 마루금]
[쌍량지맥 마루금]과 [경기옛길-삼남길]이 지나는 능선에 오르게 됩니다.
['던지고개'] 10:23
능선에 올라 우측을 보면 "던지고개"가 있습니다.
저는 이곳을 세번쩨 방문하게 됩니다. [쌍령지맥]을 할때와 [경기옛길-삼남길]을 할때...
[쌍령지맥]과 [경기옛길-삼남길]이 지나는 길인데 [평택섶길]은 바로 좌측 지름길로 가도 되고
우측 [던지고개]에서 좌측으로 가는 [쌍령지맥 마루금]을 따라 가도 됩니다.
아주 잠시면 다시 만나는 길이니 어느 길로 가도 상관없겠습니다.
잠시 진행하면...
[사거리] 10:25
다시 사거리를 만납니다.
좌측에서 오는 길이 조금전 [던지고개]에서 오는 우회로인데 여기서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쌍령지맥]은 직진하여 "덕암산"으로 가고
[원균장군 묘]와 [경기옛길-삼남길] [평택섶길]은 모두 우측으로 가라고 합니다.
우측길로 조금 진행하면...
[이정목] 10:27
[현위치]가 [덕암산]이라고 알리는 이정목을 만납니다.
이곳은 물론 [덕암산] 일부입니다만, 정상은 이곳이 아니죠.
그냥 그렇다치고 진행합니다.
[내림길]
[평택섶길 둘레길]이라는 팻말이 처음 보이는 내림길을 10여분 내려 가면...
[삼거리] 10:36
벤치와 [삼남길] 이정목이 있는 삼거리를 만나는데 우측으로 가라고 알려 줍니다.
직진해서 앞 봉우리를 오르고 우측으로 가도 다시 만납니다.
[내림길]
7분여 내림길을 진행하면...
['평안 해오름길'] 10:43
[평안 해오름길]이라는 이정표가 있는 들날머리를 만나 좌회전하고
['내리' 마을길]
이어서 '내리' 마을길을 진행하게 됩니다.
6분여 진행하면...
[삼거리] 10:49
삼거리를 만나는데 [경기옛길-삼남길]은 우측으로 가지만
[평택섶길]은 좌측으로 가라고 합니다.
[평택섶길]은 좌측으로 돌아 "원균장군 묘"를 둘러보고 다시 우측길로 와 좌측으로 가게 되더군요.
['내리마을회관' 가는 길]
[내리마을회관]으로 가는 길로서 100m 정도 진행하면...
['내리마을회관'] 10:52
삼거리를 만나는데 "내리마을회관"이 있습니다.
"원균장군 묘"를 다녀와 여기서 북쪽으로 [원균길]을 갈 예정입니다.
우측 아래로 "원균장군 묘"로 잠시 내려 가면...
['원균장군 묘' 조망]
우측에 "원균장군 묘"와 [내리저수지]가 보이기 시작하고
['모선재'] 10:57
이어서 "모선재 慕先齊"에 도착하는데 "원균장군과 원주 원씨" 선조들을 모선하는 곳이고
['원균길' 안내석]
[평택섶길-원균길]의 출발점이며, [과수원길]의 종점이라고 알리는 안내석이 있습니다.
[평택섶길]의 12코스인 [과수원길]만 역방향으로 진행한다고 표시하고 있군요.
"원균장군"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여기서도 강조 하는군요.
[역사 재평가가 필요한 원균장군]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한 원균장군"이라는 안내판을 지나게 되는데
이 안내판을 자세히 읽어 보시기 바람니다.
['원균장군 묘' 조망] 10:59
"원균장군 묘"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다음 글은 제가 [경기옛길-삼남길]을 진행할때 쓴 글입니다만, 못 보신 분들을 위해 다시 올림니다.
"역사적 재평가 ?"
저는 재평가를 할께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려 주면 자연스럽게 "원균장군"의 역사적 지위가
재평가 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우리나라는 "역사적 사실"을 감추거나 왜곡하는 경우가
너무 많이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특히 군인들에 대해서 '군사쿠데타정권'들에 의해 자행된게 많다고
생각 됩니다. "이순신장군"을 영웅화 하는 과정에서 "원균장군"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고 생각되는데
지금부터 "이순신장군의 허상"과 "원균장군의 실상"을 나름대로 핵심 포인트만 골라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허상과 실상을 알아 보기 위한 노력이지 장군들을 폄하하거나 추겨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고, 이러한 관점은 각자 다를수도 있으니 옥신각신 할 필요까진 없고 참고만 하시기 바람니다.
[홍살문] 11:01
"원균장군의 묘소"는 처음 보는 분들이 많겠지만 생각보다 대단한 규모이죠?
모두들에게 '이순신장군'은 위대한 우리민족의 영웅으로 각인되 있는데, 英雄도 모자라 聖雄으로 ㅎ
그와 대비되는 '원균장군'은 일반적으로 '이순신장군'을 시기하고 미워한 나쁜놈으로만 알고 있지요?
그렇습니까? 맞아요? 하지만 역사를 아시는 분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겁니다.
"원균장군"은 "이순신장군"보다 다섯살 위의 대고참 군인이었습니다.
"원균장군"이 요즘말로 ☆장군이 되어 북쪽의 오랑캐들을 무찌르며 전과를 올릴 때에
"이순신"은 미관말직의 이름없는 군인이었습니다.
'23전 23승'에 빛나는 '이순신장군'을 폄하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존경합니다.
단지 "원균장군"에 대한 인식이 너무 왜곡되 있어 부득이 비교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선생'과 '원균장군''이순신장군'은 현재의 '서울 종로구 인현동'에 살았는데
요즘 '오장동 냉면집 거리'로 유명한 곳 쯤에서 살던 이웃들이었습니다.
그런 연고로 "이순신"은 '영의정 유성룡'의 천거에 의해 하루 아침에 7계급 특진을 하여 "전라좌수사"에
오르게 되는데, 군대 대선배인 "원균장군"과 같은 계급의 "이순신"이 낙하산 인사로 임명되니
"원균장군"이 "이순신"에 대해 마땅하게 생각하지는 않았겠지요? 당연 그렇겠죠?
하지만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였던 "원균장군"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된 "이순신장군"을
무시하지 않고 때마침 터진 "임진왜란"에 함께 협력하며 초창기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경상우수사 원균장군'과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이 힘을 합쳐 '옥포해전'에서 적함 26척을 격침시키고,
이어서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사천포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한산도대첩,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등에 참전하여 "이순신장군"과 함께 일본 수군을 무찔렀습니다.
그런데도 왜? 역사는 "이순신장군" 만을 부각시키고 "원균장군"은 역사의 그늘에 서게 했을까요...
['원균장군 묘']
그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선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원균장군"과 "이순신장군"의 사이가
언제부터 악화되었는지... 그 원인은 무었인지를 알아 보아야 하겠지요?
위에서 언급한 '임진왜란' 초기의 海戰에서 "원균장군"과 "이순신장군"의 연합함대는
상호협력으로 왜군을 무참히 무찔렀습니다만
그들의 사이가 최악으로 가는 원인은 "장계 狀啓" 때문이었답니다.
"狀啓"란 "지방에 파견된 관리가 중요한 일을 임금에게 글로써 보고하는 문서를 이르던 말"인데
군인들에겐 주로 "전투결과보고서" 였답니다.
"원균과 이순신의 연합함대"가 적군을 무찌른 '전투결과보고서'를 함께 올리기로 약속했는데
"이순신장군"이 단독으로 "원균장군"의 이름을 빼고 자신의 이름으로만 상의없이 몰래 올렸던 것입니다.
물론 '이순신 함대'가 '원균 함대'보다 전과가 높았다는 것은 어느정도 인정합니다만...
전쟁의 공로를 "이순신장군" 혼자만(?) 차지 하려고 '경상우수사 원균장군'의 이름은 빼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 자기 이름으로만 전투결과 보고서인 "장계"를 임금에게 올렸고
이로서 "이순신장군"은 '宣祖'로부터 엄청난 칭찬을 받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참모총장인
"삼도수군절도사"에 오르게 되는데 "원균장군"보다 계급이 갑자기 높아지게 된것이죠.
"원균장군"이 기분이 좋았을까요? 이빨을 갈 정도로 기분이 나빠졌겠죠?
이로써 "원균장군"은 '이순신'을 씹기 시작하는거죠.
이들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나빠지는 계기가 바로 "장계 狀啓" 사건이었답니다.
누가 곧고 옳은 인간일까요? '이순신장군' 일까요? ㅎㅎ 내용을 알면 '이순신장군'은 좀 거시기하죠?
여러분들이 "원균장군"이라면 "이순신"을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ㅎ
['원균장군 기념관']
임진왜란 와중에 바다에선 선전했습니다만, 육지에선 쪽바리들의 위세는 더욱 강해져
우리나라 강토를 완전 점령하여 한양으로 치고 올라가니....
비겁한 왕 '宣祖'는 한양과 백성을 버리고 북으로 북으로 몽진길에 오릅니다. 저만 살겠다고....
아들 "광해군"에게 분임조라는 왕권행사를 일부 때어주며 나가 싸우라고 하고 저는 도망간거죠.
그러면서 이기적인 '宣祖'는 "이순신 장군"에게 쪽바리들의 핵심 거처인 "부산진"을 치라고
어명을 내립니다. "X도 모르는 놈이 탱자 보고 부랄~ 부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순신장군"은 '宣祖'에게 요즘 유행어로 하자면 "휘발유통을 메고 불속에 뛰어 드는 꼴"이라고 어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조선 水軍전체가 몰살 당한다고....
소인배 '宣祖'는 노발대발 "어명을 어겨? 이 쌔끼! 사형 시켜!!"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순신장군"은 '삼도수군절도사'에서 졸지에 쫄병으로 강등 당하고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며 사형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순신'의 후임으로 "원균장군"에게 다시 휘발유통을 짊어 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졸지에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최고 자리에 앉혀진 "원균장군"도 현지에 내려가 상황을 살펴 보니
'이순신'이 왜? 어명을 어겼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산진' 침공을 이 핑개 저 핑개로
차일피일 미루었습니다. '원균장군"을 천거한 사람이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권율 도원수"였는데
자기가 천거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장군'이 출전을 하지 않고 어명을 어기고 있으니 난감했겠죠.
그래서 "원균장군"을 불러 가두고 태형을 가합니다. 곤장을 치는 것이었죠. 물론 '宣祖'의 지시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삼도수군절도사'를 '도원수'가 어떻게 매질을 해? 에휴~
그리하여 "원균장군"은 어쩔수 없이 휘발유통을 메고 '부산진' 불속으로 뛰어 들어
조선수군 모두와 자신이 함께 활활 산화해 갔던 것입니다. '칠천량해전'이었습니다.
'宣祖' 이 졸열한 왕은 어쩔수 없이 사형 시키려했던 감옥에 있는 "이순신장군"을 다시 '삼도수군절도사'에
앉히며 휘발유통을 메어 줍니다. 너덜너덜 걸레가 된 조선 수군과 함께....
현장에 다시 도착한 "이순신장군"은 마지막 海戰인 '명랑해전'에서 도망가는 쪽바리들을 죽여버리고
스스로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며 역사 속에서 사라 집니다.
전쟁이 끝나는 것을 알고 있었던 '이순신장군'은 살아서 가도 "선조"에 의해 어명을 어긴 것에 대한
처벌을 받을 것이 분명하기에 차라리 사라지겠다고 결심한것으로 저에겐 그렇게 보입니다.
저의 산행기를 보신 분들은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을 기억하시죠?
"원균장군"과 "이순신장군"
그리고 "宣祖"....
누가 충신이고 누가 역적인가!!~~?? 누가 사형 당해 죽어야 하는가!!
과연 누가 역사 속의 인물인가?
왕은 자기 꼴리는대로 놀고 지랄해도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인가!!
전투에 대해선 X도 모르는 놈이 자기 꼴리는대로 이래라~ 저래라 할수 있는가~
원인과 결과에 모든 무한 책임이 있는 쪼다리 "선조"가 사형 당해야 하지 않나요?
정치 권력을 쥔 저급한 놈들의 무능과 오만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치가 떨리지 않나요?.........
[벽화] 11:08
"원균장군 사당"으로 올라 가는 길에 있는 벽화입니다.
"원균장군"의 후손이나 역사학자들이 "역사적 재평가"를 주장하는 이유를 나름대로 기술했습니다.
"원균장군"이 시기와 질투의 화신인가...
해전 결과 공로를 홀로 독식한 "이순신장군"이 당당한 인간이냐...
전장에 나가면 패해 죽을게 불보듯 뻔하다고 어명을 거역하고 감옥행을 택한 "이순신장군"이 충신인가...
어명을 받들어 전장에 나가 장열하게 전사한 "원균장군"이 충신인가...
판단은 여러분 각자 알아서 해 주십시오.~~ 별도로 판단 할것도 없지만...ㅎ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순신장군"을 민족의 영웅으로 생각할까
"세종대왕"을 기리는 거리가 "세종로"이고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기리는 거리는 "충무로"인데
군사쿠데타 정권이 들어선 이후 "세종대왕"이 있던 "세종로"엔 "세종대왕 동상"이 없어지고
그 자리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었던 시절이 있었지요.
지금은 두분이 다 "세종로"에 서 있지만....
이렇듯 정치권력에 의해 역사적 인물들을 자기들 집권의 수단으로 우상화 영웅화가 시도 된것이지요.
['원균장군 사당'] 11:10
[안내문]
"이순신장군의 허상"이라는 책을 펴낸 분이 있더군요.
다름아닌 '해군사관학교' 교수부장을 지낸 "임원빈교수"가 연구 결과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책이더군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책을 읽어 아는 그런 "이순신 장군"은 많은 부분이 "가짜 이순신"이라고...
특별히 기억 나는 글귀는
"오늘날 충무공은 무협지 주인공처럼 초인적 역량을 지닌 인물로 각인됐다"
"허상을 걷어낸 '정론(正論) 이순신'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쉽게 말해 "이순신장군"에 대해 "뻥튀기가 너무 많다~"라는 것이죠.
그런데 '파란문' 생각은...
그런 "뻥튀기 된 영웅"을 백성들은 오히려 더 갈망하는듯 하지 않습니까?
살기가 얼마나 어려우면 그런 "뻥튀기 된 영웅"이 나타나 허우적대는 수렁에서 자기들을 건저주기를
더욱 학수고대하는게 아닌가? 라고도 생각됩니다.
"이순신장군"의 실상보다는 전지전능한 허상을 더욱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요즘같은 남북관계에선 더욱 현명한 정치지도자를 기대하듯...
['내리마을회관'으로 넘어 가는 길] 11:12
벽화가 있는 곳에서 올라와 사당을 둘러 보고 직진해 [내리마을회관]으로 진행합니다.
[삼거리] 11:15
조금 전 10시49분에 통과했던 삼거리로 다시 돌아와 [내리마을회관]으로 갑니다.
['내리마을회관'] 11:18
다시 온 [내리마을회관]입니다.
이번엔 북쪽으로 올라 갑니다.
[갈림길] 11:19
이어서 삼거리를 만나는데 전봇대에 좌측으로 가라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앞에 보이는 조그만 마을을 돌아 다시 우측으로 가는 길이라 우측으로 바로 갑니다.
그래서 이곳 [원균길]에 대한 공식 트랙을 캡쳐해 보여 드립니다.
['평택섶길 공식안내도']
[평택섶길] 공식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원균길] 지도입니다.
1. 초록색 선이 [정도전길]이고
2. 주황색 선이 [원균길]입니다.
윗 사진의 갈림길이 이 지도에 표기한 [현위치1]입니다.
['파란문 실트랙']
저는 위의 안내도에서 [원균길]이 [정도전길]과 많이 겹치고 있어
새로운 경험을 쌓기 위해 우측 [상리]를 돌아 나왔으니 후답자들은 각자 취향에 맞게 진행하시길
['안승구화실' 앞] 11:22
조금 올라 가면 다시 전봇대에 길안내 표시가 있습니다.
네이버 지도에는 앞에 보이는 집이 "안승구화실"이라고 표기되 있더군요.
우측 고개로 올라 가면...
[고갯길] 11:24
고갯길이 이어지고...
['덕암산' 조망]
고개를 넘으면 [쌍령지맥]이 지나는 "덕암산"이 정면에 보입니다.
내려 가서 좌측 계곡을 바라보면...
['상리 던지재골'] 11:31
'상리 던지재골'이 전체적으로 보이는데 [원균길]은 이 길로 올라 가서
좌측 [정도전길]이 지나는 산줄기로 돌아 내려 갑니다.
저는 갔던 길을 다시 가기 보다는 못가본 길을 가기 위해 아랫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여기서 이곳 현위치를 다시 알아 보면...
[현위치]
[평택섶길 공식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지도를 다시 보여 드림니다.
윗 사진은 이 지도의 [현위치2]인데....
저는 올라 가는 대신 노란색으로 표기한 선을 따라 내려 갑니다.
['상리']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의 "상리마을"을 통과하면
['상리' 버스종점] 11:41~11:44
"상리 버스 종점"을 만납니다.
여기는 [7-3번] [7-4번] [7-7번]이 운행되고 있습니다.
버스 운행정보를 인터넷으로 보니 한시간 후에나 도착한다고 합니다.
그레서 버스가 좀 많이 다니는 [복지대입구사거리]로 걸어 가기로 합니다.
거리는 2km 정도 되더군요.
['내리' 방향]
[내리 입구]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5분 정도 진행하면...
['도일감리교회' 앞 '금강루'] 11:49
조금 독특한 모양의 음식점인 [금강루]를 지나고
['내리입구 사거리'] 11:51
이어서 [내리 입구 사거리]를 만나는데...
이곳은 [경기옛길-삼남길]과 [평택섶길-과수원길]이 통과하는 곳
['원균길 시작점' '과수원길 종점']
"원균장군묘"가 조망되는 [내리입구사거리]인데
[평택섶길-원균길]과 [과수원길]의 시종점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다음 코스인 [과수원길]을 가기 위해선 한번 더 와야 하는 곳입니다.
['경기옛길-삼남길' 9길-10길 시종점]
[내리입구사거리]는 [경기옛길-진위고을길]과 [소사원길]의 시종점이기도 하고..
[경기옛길-삼남길]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 제가 쓴 답사기를 참고하세요.
['한국복지대' 입구 사거리 가는 길]
[내리입구]에서 [한국복지대입구]로 가는 도로변에는 수많은 현수막이 걸려 있는데
내용은 쓰레기 소각장 설치 반대 현수막이더군요.
쓰레기 소각장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우리 동네에는 않된다는 뜻이겠죠? ㅎㅎ
인간의 기본 욕심이니 뭐라고 욕만 할순 없지요?. 입장 바꿔 보면...
이러한 갈등을 잘 풀어 나가는 게 政治이죠?
['복지대입구사거리'] 12:08
[상리버스종점]에서 24분이 걸려 [한국복지대입구사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서정리역] 가는 버스정류장은 건너편에 있습니다.
['복지대' 조망]
[복지대입구사거리]에서 "한국복지대학"을 조망하고
['복지대입구 버스정류장'] 12:10
버스시간에 여유가 있어 앞에 있는 음식점에서 '평양냉면' 한그릇 먹고..
[서정리역]으로 가 전철을 타고 귀가 했습니다.
오늘은 훤한 대낮에 답사를 마쳤군요.
[구글어스]
[고도표]
오늘 진행한 거리는 GPS 측정으로 "9.6km" 였으며 2시간 50분이 걸렸습니다.
예상보다 짧은 거리였으나 다음 구간을 고려해서 여기서 마쳤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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