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경기옛길] 평해길

[경기옛길-평해길] 제2길 미음나루길

파란문 2021. 4. 13.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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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옛길-평해길』
 『제2길 미음나루길』    

  ['평해길 좀합안내도']                       
  <평해길>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관동대로>라고 부르는 길로서 <서울>에서 <원주><강릉><삼척>을 지나
  [관동팔경 월송정]이 있는 '경북 울진군 평해'까지 이어지는 길이랍니다..
  <평해길> 중에 <경기도 구간>만을 [경기도]가 걷기코스로 개발하였답니다.
  그러므로 실제 <옛길 경기 평해로>와 <걷기코스>로 새로 개발된 길은 다릅니다.
  걷기코스로 새로 개척한 길이니 <옛길>이 아니라 <新作路>...


  ['합수머리세월교']                    1:07             
  <제1길 망우왕숙길>의 종점인 "합수머리세월교"에서 계속해서 <제2길 미음나루길>을 진행합니다.
  이 간이 다리는 '구리시'와 '남양주시'의 市界가 되기도 하더군요.
  그러니까 건너편은 '남양주시' 입니다.


  ['합수머리세월교'에서 북쪽 조망]                 
  <합수머리세월교>를 건너 가며 조망을 합니다.
  <합수머리세월교> 중간에서 먼저 북쪽을 바라보면 지나온 <제1코스>의 <왕숙천> <구리타워>가 보이고...
  가운데 보이는 산은 <남양주시 황금산>이라는데 여기도 <황금산>이 있군요.


  ['합수머리' 조망]                       
  남쪽으로는 <왕숙천>이 <한강>과 만나는 <합수머리>가 보이며 그 위로 서울강변북로 연장선이 지나는
  <수석교>가 보입니다.


  ['제2코스 출발지]                  1:09         
  2021년 4월 8일 목요일 맑음
  <합수머리세월교>를 지나면  "제2길 미음나루길"의 출발지가 반겨 줍니다.
  이곳에는 <평해길 경기도구간 안내도>와 <제2길 스탬프함>이 설치되 있습니다.
  이곳 <스탬프함>은 뒤에서 열어야 하더군요. ㅎ ㅎ앞에선 안열립니다.
  <망우리>에선 옆에서 열도록 하더니 여긴 뒤에서...ㅎ다음 스탬프함은 또 어쩔려나..위에서 열어야 할까? ㅋ


  ['평해길 남양주구간' 종합안내도]
  <평해길 남양주시 구간>은 2개 구간으로 여기서 <운길산역>까지 "24.9km"라고 알려 줍니다.


  ['평해길 2코스 실트랙'] 
  이 지도는 제가 실제 진행한 <제2길 미음나루길>의 실트랙 지도이고


  ['제2코스 안내도']                           
  그리고 "평해길 제2길 미음나루길"은 <합수머리세월교>에서 <한강변>을 따라 <팔당역>까지 
  "12km"라고 공식적으로 알리고 있습니다.


  ['수석교']

  ['합수머리 전망대']                    1:17          
  <수석교>를 통과하면 <합수머리 전망대>가 설치되 있어 조망을 하고 갑니다.


  ['강동대교' 조망]                             
  서쪽으로는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가 지나는 <강동대교>가 보이고


  ['남한산성' 조망]                          
  남쪽으로는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과 <남한산>등이 보입니다.


  ['미음나루' 방향 조망]                   
  동쪽으로는 앞으로 진행해야할 방향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특히 이 길의 이름을 <제2길 미음나루길>이라고 만들어 준 <미음나루>가 가까이 있습니다.


  ['미음나루음식문화특화거리']               1:26      
  여기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水石洞'이며 "미음나루 음식특화거리"라고 합니다.
  <수석한강공원>과 함께 먹자거리를 형성하고 있어서 저도 한번 밥먹어러 와 본 적이 있습니다.


  [한정식집 '초대']           
  여기에 <초대>라는 한정식집이 있는데 저는 아들들 덕분으로 한번 다녀 간 적이 있습니다.
  이 한정식집에 대해 제가 다녀와 포스팅 한게 있으니 궁금하시면 클릭해서 보세요
                   "가족나드리-"초대"


  ['미음나루']                         1:33

  [안내문]                      
  "미음나루 渼陰津"
  옛날 강원도에서 한양으로 배와 땟목이 운송수단으로 쓰일때 뱃사공, 나그네들이 여기서 쉬며 식사도 하고
  술도 한잔하고 가던 나룻터였답니다.
  지금은 음식특화거리로 조성되어 손님을 끌고 있고...


  ['미음나루' 앞 전경]                           
  <미음나루> 앞에는 차단 가드레일이 설치되 있어 나룻터였다는 흔적은 사라지고
  한강 건너편엔 <하남시> 아파트 단지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 있습니다.
  이곳 <한강>이 <미호 渼湖>라고 하는 <한강 옛 이름>인데 "미음나루 渼陰津"라는 나룻터의 이름을
  만드는 지명이었으니 잠시 후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미음나루 음식카페거리' 통과]                           
  10여분 <미음나루 음식특화거리>를 통과하면...


  ['미음나루고개' 오름길]

  ['미음나루고개']                   1:45             
  <평해길>과 <한강자전거길>은 강변을 벗어나 고개로 올라 갑니다.
  고갯마루의 이름은 <미음나루고개>라 하는데 여기서 <자전거길>을 버리고 좌측 산으로 올라 갑니다.
  입구에 <조말생 묘> 안내판이 있습니다.


  ['조말생 묘' 조망]                           
  산으로 잠시 올라 가면 우측에 <조말생 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상당한 크기의 봉분이어서 금방 알아 볼수 있었습니다.




  ['조말생 묘']                  
  "조말생 趙末生 1370~1447 고려말 공민왕19년~조선 세종29년"
  1370년(고려 공민왕 19년) 생입니다. 이름이 좀 재미있죠? 
  이름이 <끝 말(末)>, <날 생(生)>이지만 막내는 아닙니다. ㅎㅎ
  부모가 애들 이젠 그만 낳자고 <말생 末生>이라고 지었다가, 하나가 더 생겼던지 막내 이름은 <조종생>으로
  <마칠 종(終)> 자를 사용하여 <趙終生>이었으니 형제가 너무 많았던게 틀림없습니다. ㅎㅎ
  <조말생>은 <태종1년>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수재인데, <태종 이방원>이 무척 좋아하고 아낀 인물로
  <태종>이 후궁 사이에서 낳은 옹주와 <조말생>의 장남을 결혼시키고, <태종>의 아들과 <조말생>의 딸을
  다시 결혼 시켜서 <태종>과 <조말생>은 겹사돈이 되는 관계였죠. 
  조선왕조 최대의 권혁형 뇌물 스캔들인 <조말생의 권력형뇌물사건>
  그 사건을 감추려하는 치졸한 술수...2차 범죄...
  <조말생>은 무지 똑똑한 머리로 잘 한 일도 많지만, 정말 치졸한 방법으로 뇌물을 받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한 술수가 더 치졸해 요즘 정치 스캔들 영화에나 나올 법한 방법으로 감추려 해
  수사를 했던 의금부 관리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듯 했고 사헌부가 사형을 구형했지만 
  <세종>은 큰 벌을 내리지 않았답니다.
  오히려 <세종>은 그를 의금부 제조로 임명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뇌물 전과자가 대법원장 혹은 
  검찰총장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헌부 관리들이 항의의 표시로 집단 사표를 제출하기도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 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한데 
  "세종은 <조말생> <황희>등 범죄사건에 연루된 도덕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정치적 동반자로서의
  능력을 중시한 실용적 판단"이라고들 평가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
  ㅎ 저는 아직도 훌륭한 <세종대왕>이 왜 그랬는지 지금도 전혀 이해 못합니다.
  그리하여 <조말생>은 78세까지 장수하고 <양주 조씨>의 중시조가 되었죠.


  ['조말생 묘'에서 조망]                              
  <조말생의 묘>는 원래 이곳이 아니고 현재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고종의 홍릉>이 있는 자리에 있었는데
  <고종>이 그 묘터를 빼앗아, 1900년에 <조말생 묘>는 이곳으로 이장하였으니 
  이곳으로 이장 한지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았지요.
  그런데 이곳의 묫자리는 그 어느 곳 보다도 정말 명당 자리같지 않나요?
  아 ~~ 권력과 富....모두 허망한 것이리라
  한줌의 흙으로 돌아 가는 인생에 욕심은 치욕을 남길 뿐....
 <세종실록 116권, 세종 29년 4월 27일 무오 2번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 있습니다. 
  "諡文剛, 學勤好問文, 追補前過剛。 末生氣度恢洪, 處事寬厚, 太宗重器之。 然玷汚其身, 終不任國事"
  "시호를 문강(文剛)이라 하였으니, 문(文)은 학문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함을 뜻하고,
  강(剛)은 지난 허물을 뒤쫓아 고쳐 기움을 뜻한 것이다. 말생(末生)은 기개와 풍도가 크고 너르며
  일을 처리함에 너그럽고 후덕하여 태종이 소중한 그릇으로 여겼으나, 
  옥에 티가 신상에 오점(汚點)이 되어 끝끝내 국무 대신이 되지 못하였다."
    
  "기개있고 도량이 크며 일처리 방식이 너그럽고 후덕했지만,
  뇌물 사건의 오점이 커서 정승이 되지는 못했다"는 평을 <세종실록>에도 남겼습니다


  ['석실서원 터']                   1:53         
  <조말생 묘> 우측 앞에는 석물을 나열해 놨는데 뭔지 잘 모르겠고
  앞에 옛날 "석실서원 石室書院"이 있었던 곳이라고 표지석을 세워 놨는데 깜빡 촬영을 못했습니다.
  <석실서원>에 대해선 잠시 후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제2길 미음나루길>의 하일라이트이니까요.


  ['영모재' 조망]

  ['영모재']                        1:58             
  <조말생 묘> 아래에는 <양주 조씨 중시조>인 <조말생 선생>을 배향한 사당인 "영모재"가 있습니다.
  1997년에 후손들이 창건했다고 하네요.
  <영모재>에서 마을을 통과해 내려 가서 뒤돌아 보면....


  ['석실마을']                    2:03          
  "석실마을 石室마을"
  그 치욕의 역사 <병자호란>의 핵심인물 중에 주전파로 꼿꼿한 절개를 지켰던 
  "청음 김상헌 淸陰 金尙憲" 선생이 은거하며 말년을 보낸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손자들이 그들의 고향인 '안동'을 떠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곳에 둥지를 틀고 
  <영조시대>에 영의정 등 숱한 고위 관직에 올라 국정을 운영하는 집안이 살던 곳이였죠.


  [안내문]                         
  그런데 안내문에는 <청음 김상헌 선생>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군요.
  "병자호란과 김상헌"
  1636년12월 14일 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간
  유난히도 춥고 눈도 엄청 많이 내렸고 일식도 나타나는 겨울에
  <남한산성>에는 [인조]라는 쪼다리 임금이 있었고,
  체찰사로서 난국의 해결을 시간에 맡기는 양다리의 명수 영의정 '김류'가 있었고,
  의로움과 충성심으로 절대 굴복은 없다며 오로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  예판 '김상헌'이 있었고,
  매국의 오명을 뒤집어 쓰더라도 임금이 살길은 화친이라고
  말이 화친이지 실제는 항복이라는 말을 비틀어 화친이라고 말 하는 이판 '최명길'이 있었습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옥신각신 말싸움만 하다가  <남한산성 西門>을 통해 내려가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며
  그들은 결국 대한민국 역사에 도리킬수 없는 오점을 남기며 
  얼마나 더 오래 살지도 모를 목숨을 부지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주화파와 척화파 사이에서 삶과 죽음을 오갔던 <인조>는 치욕의 삶을 감수하고 살아 남았습니다.
  <병자호란> 한달쯤 후인 1637년 2월 27일 <청음 김상헌>은 보따리를 싸서 고향 '안동'으로 낙향했답니다.
  그리고 '안동'의 거처를 '청나라를 멀리 한다'라는 의미의 <청원루 淸遠樓>라 하고 살았는데
  그로부터 2년여 후인 1639년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 군대의 출병을 요구하자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 <심양>으로 압송되었는데,
  이때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훗날의 효종)>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습니다.
  또한 항복을 주도했던 <최명길>도 2년후 '명나라'와 비밀외교를 하다 적발되어 <심양>으로 압송 
  되었으니 주전파 주화파가 모두 '청나라'의 볼모가 된거죠.
  이렇게 오랜기간 '심양'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김상헌>은 <장동 무속헌(無俗軒)>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선영이 있는 <덕소>로 돌아왔습니다. 몇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사양하고 이곳에 은거했답니다.
  *<장동 무속헌(無俗軒)>*은 현재 청와대 옆 옛 안기부의 안가였던 <궁정동 안가> 자리에 있었는데
  <궁정동 안가>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 난 곳이죠.
  지금은 안가를 허물고 <무궁화동산>으로 변모한 곳이 <김상헌선생의 자택>이었답니다.
  현재 공원화 되었고 선생의 집터를 알리는 표지석과 시비가 세워져 있더군요.


  ['겸재 정선 선생'의 '미호']                             
  "미호 渼湖" 보물 제1950호-'겸재 정선' 作 
  <겸재 정선 선생>은 <양천현감> 시절 한강을 거슬러 올라 가며 <김상헌 선생>이 여생을 보낸 <石室마을>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미호 渼湖"는 이 마을 앞 <한강>을 이르는 당시 명칭이었답니다.
  그림의 제목은 "미호 渼湖"이지만 <청음 김상헌선생>이 기개와 지조를 지키며 사신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양주 선비'들이 세운 서원인 <석실서원>을 그린 것이랍니다.
  <겸재 선생>의 이 그림이 아니었다면 글로만 전해질 그 모습들을 실물에 가깝게 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이 들어 있는 <경교명승첩>을 우리나라 <보물 제1950호>로 지정하였겠지요.
  <겸재 선생>은 화가이지만 <감상헌선생 가문 김씨>들의 힘으로 관직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릴수 있어서
  특별히 <장동 김씨(안동 김씨)>들에 대한 그림이 많다는군요.


  [현재의 '미호']                                
  "미호 渼湖"에 대해선 잠시후 "당정섬"에 가서 언급하겠습니다.
  주화파와 척화파 사이에서 삶과 죽음을 오갔던 <인조>는 치욕의 삶을 감수하고 항복으로 살아 남았습니다.
  <병자호란> 한달쯤 후인 1637년 2월 27일 <김상헌>선생은 보따리를 싸서 고향 '안동'으로 낙향했답니다.
  그리고 '안동'의 거처를 '청나라를 멀리 한다'라는 의미의 <청원루 淸遠樓>라 하고 살았는데 현재도 있습니다.
  그로부터 2년여 후인 1639년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 군대의 출병을 요구하자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 <심양>으로 압송되어 볼모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때 '청나라 심양'으로 압송 될때 읊은 시조가 그 유명한 이 시조이죠.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야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時節)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병자호란> 때에 살길은 오직 항복이라고 항복을 주도했던 <최명길>도 
  2년후 '명나라'와 비밀외교를 하다 적발되어 <심양>으로 압송 되었으니 주전파 주화파가 모두 포로가 된거죠.
  '심양감옥'에서 다시 조우한 <김상헌>과 <최명길>
  여기서 <김상헌>이 <최명길>에게 한 말이 오히려 더 의미있습니다.
      成敗關天運(성패관천운)  성공과 실패는 천운에 달렸으니
      須看義與歸(수간의여귀)  모름지기 모든 것은 의로 돌아가야 하느니.
      雖然反夙暮(수연반숙모)  아침과 저녁은 바꿀 수 있을망정
      未可倒裳衣(미가도상의)  웃옷과 아래옷을 거꾸로 입을소야.
      權或賢猶誤(권혹현유오)  權권은 어진  이도 그르칠 수 있으나
      經應衆莫違(경응중막위)  經경은 사람들이 어길 수 없느니.
      奇言明理士(기언명리사)  이치 밝은 선비에게 말하노니
      造次愼衡機(조차신형기)  급한 때라도 저울질은 삼가할진저


  ['덕소' 조망]              2:04            
  <석실마을>을 뒤로 하고 <덕소>를 향해 <평해길>을 진행합니다.
  <청음 김상헌 선생 묘>는 이 사진의 좌측 <덕소> 뒷쪽 선영에 있는데
  주소는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 5번지' 입니다.
  20여분 강변길을 진행하면.....


  ['한강공원 삼패지구']                   2:26          
  "한강시민공원 삼패지구"
  약 240,000㎡ 크기의 한강시민공원으로 2015년에 개장했답니다.
  자전거공원, 대규모공연장, 피크닉장, 생활체육시설, 물놀이장, 음악분수, 테마초 화원...등등이 있다고


  ['평구마을']                      
  "평구마을 平丘마을"은 고교학창시절 고문시간에 배운 <정철선생>이 지은 <관동별곡>에도 등장하는
  <평해로>에서 매우 중요한 驛인 "평구역 平丘驛"이 있던 곳인데 이제서야 현장을 찾아 봅니다.
  그 유명한 <관동별곡>의 첫구절 다시 한번 감상해 볼까요? ㅎ
  
           江강湖호애 病병이 깁퍼 竹듁林님의 누엇더니,
           關관 東동 八팔百백里니에 方방面면을 맛디시니,
           下하直직고 믈너나니 玉옥節졀이 알패 셧다
           延연秋츄門문 드리다라 慶경會회南남門문 바라보며,  
.          平평丘구驛역  말을 가라 黑흑水슈로 도라드니,
           蟾셤江강은 어듸메오, 雉티岳악이 여긔로다.
           昭쇼陽양江강 나린 믈이 어드러로 든단 말고

  {송강 정철 선생]은 <강원도 관찰사>라는 직책을 제수 받아 강원도로 가며 <평구역>에서 말을 갈아 타고
  <여주><원주><춘천><철원><화천>을 지나 <금강산>으로 갔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많큼 <강원도로 가는 길>에서 중요한 驛이었다는 것을 <관동별곡>에서도 알수 있죠.
  이런 얘기로 '스토리텔링' 안내판을 만드는게 좋지 않을까요?


  ['다산길1코스' 출발지]                      
  "한강시민공원 삼패지구"
  이곳은 "남양주시 다산길1코스 한강나루길 출발지"이기도 합니다.
  <다산길>은 13개 코스로 되 있는데 저는 2016년에 몇개 코스를 다녀 온바 있습니다.


  ['미사대교']                 2:32~2:49    
  <서울↔양양 고속도로>가 통과하는 한강다리인 <미사대교> 밑에서 휴식을 취하고



  [고래]                  2:51         
  강 가에 왠 고래? ㅎ
  고래는 이쁘고 상어는 무섭고...


  ['덕소역' 앞]                  2:55        
  이어서 <덕소역> 앞에 있는 <6번국도>가 지나는 <덕소강변대로> 밑에 도착합니다.
  <덕소역>은 여기서 200m 정도 거리인듯....
  다리 아프신 분들은 여기서 <평해길 구간>을 끊어 진행하면 접속구간을 줄일수 있겠더군요.


  ['6번국도' '덕소강변대로']                         
  <6번국도>인 <덕소강변대로> 밑을 40여분 진행하면....


  ['강북아리수정수센타']                 3:33       
  <강북아리수정수센터>를 지나고
  다시 25분 정도 더 진행하면....


  ['한강공원 팔당지구']                   3:59          
  <한강시민공원 팔당지구>에 도착합니다.
  더디어 <팔당대교>와 <검단산>이 가까이 조망됩니다.


  ['당정섬' 조망]                      4:11

  [안내문]                           
  <한강시민공원 팔당지구> 앞에는 "당정섬"이라는 섬이 있습니다.
  뒤에는 <미사리 조정경기장>이 있고....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한강>이라는 이름이 실제 탄생합니다.
  그리고 이 <한강>은 <한강>이 <임진강>과 만나는 <교하 交河>까지만 이어지고 
  그 이후 <강화도> 앞 바다까지는 <조강 祖江>이라고 하지요.
  <예봉산>과 <검단산> 사이 협곡을 빠르게 통과한 <한강>은 <팔당대교(옛 도미나루)>를 지나면
  강폭이 넓어지면서 유속은 느려지고 퇴적물인 모래가 주로 쌓이는데, 
  이렇게 쌓여 만들어진 섬이 "당정섬(堂亭섬)"이랍니다.
  이 섬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 사라졌다가 다시 생겨나고 한강제방공사와 도시개발을 위한 모래 채취로
  사라지기도 했으나 자연은 다시 모래섬을 만들었습니다.
  이 한강 물이 흘러 <왕숙천> 물길과 만나는 <합수머리>까지의 <한강>을 "渼湖"라고 했답니다.
  江이지만 湖水같다고 붙여진 이름이죠. 조금전 <석실서원> 그림의 제목이 "渼湖"인 이유랍니다.
  그리고 건너편 동네가 "미사리 渼沙里"가 된 사연이지요.
  <渼>라는 한자는 "물놀이 할 渼" "물이 아름다울 渼"이더군요.
 조선시대까지는 <한강>의 지역별 이름을 별도로 구분지어 호칭했답니다.
 <미호 渼湖>를 지나면 <압구정> 앞에 흐르는 <한강>을 <동호(東湖)>라 부르고, <서강>을 <서호(西湖)>,
 <행주산성> 앞 강을 <행호(幸湖)>라고 불리워 졌으니 <옛 한강>은 <미호 渼湖> <동호 東湖> 
 <서호 西湖> <행호 幸湖>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팔당대교' 앞]

  [갈림길]                       4:16           
  <당정섬> 조망처를 지나면 <팔당대교>를 만나는데 여기서 <팔당역>은 매우 가깝습니다만
  <팔당대교 날개부분>을 통과 할수 없어 먼 길을 우회해야 했습니다.
  안내판은 "1.7km"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갈림길]                      4:20~4:28         ★ 길조심 ★         
  <팔당대교> 북단 날개 부분을 4분 정도 진행하면 갈림길을 만나는데 여기서 알바를 했습니다.
  무심결에 직진했더니 더 이상 길이 없어서 되돌아 와야 했습니다.
  여기선 좌측 골목으로 가야 하더군요. 안내표지기가 나뭇닢 속에 있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팔당리' 골목]                           
  한 끗빨하는 분들의 별장인듯한 화려한 집을이 늘어선 골목을 5분여 진행하면....


  [삼거리]                  4:33          
  삼거리를 만나 우회전 하고


  ['6번국도' 굴다리]                           
  이어서 <6번국도> 굴다리를 통과하면...


  ['경의중앙선' 굴다리]                 4:36          
  다시 <경의중앙선> 철도 굴다리를 직진해 통과하게 됩니다.
  따마침 전철이 지나 가고 있었습니다.


  ['경의중앙선' 옆길]

  ['경의중앙선' 굴다리]                   4:43         
  철길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7분 정도 진행하면 다시 <경의중앙선> 굴다리를 지나고


  ['팔당역' 옆길]

  ['팔당역']                          
  이어서 <팔당역> 옆으로 나가더군요.


  ['팔당역'과 '남양주시립박물관']                    4:50        
  <남영주시립박물관>이 함께 있는 <팔당역>에서 <평해길 1~2코스>를 종료하고 전철을 타고 귀가했습니다.


  ['제1~2코스 실트랙']

  ['평해길 2코스 실트랙']                           
  <2코스>의 실트랙 거리는 12.1km였으며 3시간 40분이 걸렸습니다.
  <2코스>는 <한강변>을 따라 걷는 길이어서 다소 지루 할수 있으나 역사의 흔적을 느끼며 걸으면
  새로운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길이라 생각됩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걷는 것과 사는 것


걷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한 팔이 앞으로 가면
다른 팔은 뒤로
한 발을 앞으로 내밀면
다른 발은 뒤에 남는다

두 팔의 어긋남과
두 발의 어긋남의 연속이
걷는 모습이다

그래,
어긋남의 반복이 삶이었구나

흔들리면서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었구나

- <걸으면서 눈치 챈 것> 신광철 지음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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