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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사랑이야기

파란문 2020. 6. 2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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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華嚴宗의 根本道場』  
    『영주 부석사』  
 


  ['풍기역']                10:27

  2020년 6월 24일 (수) 흐림 
  [청량리역]에서 7시38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를 타고 10시 24분 정시에 [풍기역]에 내려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뛰었습니다. [영주]에서 10시 정각에 출발하는 버스가 25분 정도 걸려 
  [풍기역]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알았기에 급히 뛰어야만 했는데.....


  ['풍기역' 앞]                 10:28

  열차에서 [풍기역] 플랫홈에 내리면 버스정류장까지 200m 정도 되는듯 했는데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풍기역] 앞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역 정면의 좌측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야 [부석사]로 갈수 있으며, 
  우측에는 [풍기인삼시장]이 있습니다.
  버스가 다행이 10시28분에 도착하여 탈수 있었는데, 이 버스를 타지 못하면 1시간30분 후에 
  다음 버스가 있으니 유의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택시를 타야하는데 [부석사]까지 25km 정도
  이상 되는 먼 거리이니 택시비가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부석사' 방향 '풍기역' 버스정류장]               10:28

  [부석사]로 가는 [27번] 버스는 다행이 10시28분에 도착했습니다.
  이 [27번 버스]가 1~2분만 빨리 왔으면 못타는 것이었습니다.
  열차에서 내려 2~3분 정도 밖에 여유가 없으니 서두르지 않으면 택시를 타야 합니다.


  ['부석사' 앞 주차장]                     11:00

  ['부석사' 입구]

  [풍기역]에서 32분이 걸려 [부석사] 앞 주차장에 도착하여 바로 [부석사] 답사에 나섭니다.
  우측에 '무지개가 피어 나는 폭포'가 있다고 해서 먼저 들려 봅니다.


  ['폭포공원']

  인공폭포를 설치한 공원인가 본데 아직 가동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무지개는 폭포 주변에서 인공 물안개를 만들어 무지개를 만든다고 하더군요.



  [오름길]

  [부석사]로 오르는 山路를 따라 10여분 올라 가면...


  ['부석사 일주문']                 11:13

  일주문을 만나는데 "太白山浮石寺"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태백산'은 좀 먼 곳에 있습니다만 [태백산 권역]이라 붙인듯...
  지리적으로만 본다면 [소백산]과 [태백산] 중간쯤에 있는데 오히려 [소백산]에 더 가까울듯...
  [부석사] 뒷산은 "봉황산 818m"이여서 일주문 뒤에는 "봉황산 부석사"라고도 알리고 있습니다.


  ['당간지주']                 11:18

  일주문을 지나 5분여 올라 가면 "부석사 당간지주"를 만납니다.
  [보물 제255호]로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석조 유물이랍니다.


  ['천왕문']                 11:19

  이어서 "천왕문"을 통과하게 됩니다.
  저는 절에 갈때마다 느끼는 의문인데...
  절간에는 왜 [天王門]에 "四大天王"이 중무장하고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수문장 노릇을 하며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인 부처가 이런 보디가드가 실제 필요한건지...
  그렇다면 보디가드가 필요한 일반인과 능력에서 뭐가 다른지...설명 좀 해줘요~~ㅎ


  ['범종루']

  [천왕문]을 지나면 [부석사] 경내로 들어 가게 됩니다.
  상당한 규모와 조화를 이룬 건축물들...그리고 조경까지 우리나라 대표적 사찰임을 보여 주는듯


  ['사리탑']          

  "佛舍利塔移建碑"와 삼층석탑이 있고


  ['안양루']

  "안양루 安養樓"로 올라 갑니다.
  "안양 安養"이란 불교에서 마음을 편하게 하고 몸을 쉬게하는 극락정토의 세계를 일컷지요.
  모든 일이 원만하게 풀려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없는 자유롭고 아늑한 이상향의 세계를 말한답니다.
  '경기도 안양시'도 안양유원지 근처에 있는 "안양사"라는 절에서 이름을 따와 "안양시"가 되었다고 
  하니 살기 좋은 이상향의 도시라는 걸 나타 내려고 한것이겠지요?


  ['석등']

  "안양루 安養樓"를 통과하면 석등이 [무량수전] 앞에서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무량수전 석등 石燈"인데 [국보 제17호]로 지정된 우리나라의 國寶랍니다.
  높이가 2.97m로서 신라시대 작품으로 조각수법이 정교하여 최고의 걸작이라고 합니다.


  ['무량수전']

  "무량수전 無量壽殿"
  [국보 제18호]로 지정된 우리나라 最古의 건축물로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건축물이죠.
  하지만 그동안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현재는 "국보 제15호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 되었다고 
  밝혀졌으며 "봉정사"는 여기서 가까운 [안동]에 있습니다.'설악산 봉정암'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그 다음이 "국보 제18호 부석사 무량수전"이고, 
  세번째가 "국보 제49호 수덕사 대웅전"이라고 정립되었답니다.
  "무량수 無量壽"의 뜻은 알고 [무량수전]을 이야기 해야죠?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수나 량을 헤아릴수 없는 수명"이라고 할수 있는데
  한마디로 하자면 "죽지 않고 무궁무진하게 사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무량수전' 내부]
           
             ['소조여래좌상']

  "부석사 소조여래 좌상 浮石寺塑造如來坐像" 國寶 第45號
  [무량수전]의 특징 중에 하나는 본 건물은 남향이지만,
  내부에 있는 [소조여래좌상 塑造如來坐像]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보 제45호]로 지정된 이 불상은 '아미타불'을 향해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조상 塑造像"이라는 말의 뜻도 알아야 하겠죠? 
  "소 塑"는 '진흙'을 의미하니 '진흙으로 만든 불상'이라는 뜻이겠죠.
  진흙으로 만든 불상으로는 그 예술적 가치나 규모가 엄청나 국보로 지정되었으리라...
  "아미타불( 阿彌陀佛"은 산스크리트어 '아미타유스 Amitāyus'를 한자로 阿彌陀라고 음역 한것을
  다시 우리말로 음역하여 "아미타"라고 한것이니 산스크리트어인 "Amitāyus"를 알아야 
  그 뜻을 알수 있겠죠. "Amitāyus"는 '무량한 수명을 가진 자'라는 뜻이라는데 불교에서 
  부처 중에 한분으로 모셔와 서방정토(西方淨土)인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인간들에게 
  무한한 삶을 준다는 부처로 모시고 있답니다.


  ['선묘각' 가는 길]

  [무량수전]에서 [선묘각]으로 가려면 [무량수전] 우측에 보이는 삼층석탑 앞에서 
  좌측으로 올라 가면 됩니다.


  ['선묘각']

  "선묘각 善妙閣"
  [의상대사]를 무한대로 사랑한 중국 아가씨인 "선묘 善妙"를 모시는 전각이라는데 근간에 지은 건물.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기록들이 있어 내방객들을 위해 만든듯 합니다.
  오늘은 제가 2007년도에 쓴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사랑이야기"를 다시 음미해 보겠습니다.
  "원효와 의상...그리고 선묘"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제일 오래된 기록은 '송나라'의 "찬녕(贊寧 919~1002)"이라는 분이 982년부터 988년에 걸쳐 편찬한
  <송고승전 宋高僧傳>『당신라국의상전』입니다.
  그리고 "최치원 崔致遠"이 지은『의상본전(義湘本傳)』과『원효대사의 행장』등이 있습니다.
  그 이후 고려의 "일연(1206~1289)스님"이 1282년경에 쓴 <삼국유사>의 『의상전교(義湘傳敎)』가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대부분 이 기록을 인용하죠.
  중국 한국 뿐만 아니라 日本에도 이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의 "명혜 스님(明慧 1173~1232)"이 1228년경에 쓰고 그린 
  『화엄종조사회전 華嚴宗祖師繪傳』이라는 두루마리로 된 삽화 그림이 있는데 
  이 삽화는 일본의 國寶로 지정되 있습니다.
  우리나라 [원효-의상]스남과 [선묘]에 대한 그림과 글을 일본스님이 직접 쓰고 그려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 '교오토'의 [고남사]라는 절에 보관되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 할수 없죠.
  일본 불교는 우리나라에서 전래 되었으니...
  이러한 기록들은 내용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큰 줄기는 같더군요.
  [삼국유사]에는 "선묘낭자"에 대한 내용은 아쉽게 없어서, 중국기록인 '찬영의 송고승전"과
  일본의 "명혜스님의 화엄종조사회전"을 주로 참고하고, 기타 '부석사의 안내문'등을 참고하여
  오늘은 중국 한국 일본의 기록들과 [파란문]의 개인 생각까지 합쳐 나름 이해하기 쉽게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사랑이야기"를 풀어 알려 드릴려고 하는데, 개인적 추정이 좀 있으니
  종교적으로 보지 마시고 그냥 재미로 읽어 주시기 바라며 
  진실여부에 대한 논쟁은 의미 없음을 미리 알립니다.


  ['선묘 영정']

  당시 신라시대...특히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 시대엔 요즘 말로 하자면 '해외유학'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답니다. 열성적 스님들은 불교를 더 알기 위해 머나먼 '불교 발상지'인 
  "인도(천축국)"으로 떠나고, 마음이 좀 약한(?) 스님들은  가까운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답니다.
  종교적 유학 뿐만 아니라 일반 유학도 붐을 이루었답니다. 
  더 넓은 세상과 만나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서죠.
  대표적 인물들이 "최치원"등이지만 유학 가는 젊은이들이 그 수를 헤아릴수 없을 정도였답니다.
  골품제도로 출세에 한계가 있어서 해외유학으로 출세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시도로 봐야지요.
  "원효"와 "의상"도 불교 유학을 시도했다는것은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만 더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죠?
  신라 진평왕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1300여년 전의 일입니다.
  원효와 義湘의 첫 유학길은 육로를 이용하여 의주, 압록강을 지나 요동반도로 갔는데 그쯤 갔을때, 
  당나라 수비병들에게 붙잡혀 감옥살이를 하게됩니다. 죄명은 간첩죄였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우리의 삼국을 독립국으로 보지 않고 자기들의 속국으로 보았는데, 
  삼국 중에 특히 고구려가 당나라에 맞짱뜨고 있을 때여서 국경수비가 삼엄했을 때였다고 합니다. 
  수십일간의 옥살이 끝에 간신히 탈출한 원효와 의상은 유학을 포기하고 고향인 신라로 돌아 옵니다. 
  1차 유학길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끝낼 인물들이 아닌건 다 아시죠? ㅎ
  중국과 일본 기록에는...
  학구열에 불타는 원효와 義湘은 기필코 더 많은 것을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2차 유학길에 오름니다.
  지난 1차 유학길은 陸路를 이용하는 바람에 곤혹스런 감옥살이를 했으므로 이번엔 뱃길을 
  이용하기로 하고, 지금의 수원을 지나 남양반도의 남양을 거쳐 지금의 '화성시 송산면'에 있는 
  "당항성" 근처에 갔을때 엄청나게 퍼붓는 폭우로 길이 넘치고 땅이 질어 한발자국도 이동 
  못할 지경이었고 설상가상 해가 지며 어두워져 어느 묘지 토굴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
  그리고 원효가 잠자다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어젯밤에 마신 물은 해골 바가지에
  시체 썩은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때서야 배를 부여잡고 토하고 난리법석을 떨었다지요?. 
  그 사건으로 "원효"는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 갔습니다만...
  하지만 義湘은 한번 먹은 마음 변할수 있겠는가..꼭 많은 것을 배워 돌아 오겠다는 의지를 꺽지않고
  때마침 당나라 사신이 본국으로 귀국하는 배가 있어 얻어 타고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산동반도의 '양주'에 도착하게 되는데 지금의 '봉래시 등주(登州)'가 됩니다.
  [삼국유사]에는 
  "양주의 장수 유지인(劉至仁)이 의상을 청하여 관청에 머무르게 하고 성대하게 대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찬영의 송고승전]에는
  " 배멀미와 몸살로 기진맥진한 "의상"을 양주의 장수 유지인(劉至仁)이 자기 집에서 몸조리를
  하게 하며 그의 딸로 하여금 "의상"을 극진히 간호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지인의 딸"이 바로 윗 사진의 "선묘 善妙낭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묘낭자"의 본명은 "유 선묘"가 정식 이름이 되겠습니다.

              
              
      [일본 국보 <華嚴宗祖師繪傳>에서 '의상대사'에게 '선묘낭자'가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

            "善妙낭자"는 극진히 의상을 간호하며 범상치 않은 훌륭한 "의상"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엔 국경도 없다'라는 말을 오천년 우리나라 역사에 아로새긴 장본인이 아닐까...
            그러나 佛子의 길을 걷는 義湘에겐 사랑은 한낱 사치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義湘은 善妙낭자의 사랑을 받아 들일수 없었던 것입니다


  [삽화 1]

  "유지인의 집'에서 "선묘낭자"의 극진한 간호로 건강을 회복한 "의상"은 예정대로 공부를 하러 떠나고
  "선묘낭자"의 애절한 사랑을 오로지 공부를 위해 뿌리친거죠. 쉽지 않은 일인데...ㅎㅎ
  그리곤 계획한대로 지금의 '상해' 근처의 '종남산'의 '지상사(至相寺)'에 가서 '지엄(智儼)스님'과 함께
  화엄경(華嚴經)을 모체로 화엄학(華嚴學)을 탐구하게 되는데 스승인 "지엄스님"이 자신보다 더 깊은
  학문에 감탄을 하죠.  제자로 온 '의상'이 스승인 '지엄스님'보다 한수 위 였으니...
  이 대목은 중요하니  [삼국유사]의 원문 번역본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얼마 후에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 가서 지엄(智儼)을 뵈었다.
  지엄은 그 전날 밤 꿈에 큰 나무 하나가 해동에서 생겨나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서 중국까지 와서 
  덮었는데, 그 가지 위에 봉황의 둥지가 있어 올라가 보니 마니보주에서 나온 빛이 먼 곳까지 비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자 놀랍고 이상해서 청소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의상이 곧 도착하였다.
  지엄은 극진한 예로 그를 맞이하고 조용히 말하였다.
  “내가 어젯밤 꾼 꿈은 그대가 내게 올 징조였구려.”
  그리고 스승의 방에 들어와 수업하는 것을 특별히 허락하였다.
  의상은 『화엄경(華嚴經)』의 미묘한 뜻을 그윽하고 은미한 곳까지 해석하였다.
  지엄은 함께 학문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을 기뻐하였고 또 새로운 이치도 터득하였다.
  의상은 심오하고 은미한 사물의 이치를 찾아내었으니, 마치 남초와 천초가 그 본래의 색을 잃은 것과
  같이 의상은 이미 스승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다.

  '상해'근처의 '종남산'의 '지상사(至相寺)'에서 공부를 시작한지 십여년만에 화엄학을 설파하고
  "의상"은 귀국길에 오르게 됩니다.
  10여년전, 배멀미 감기 몸살로 초죽음이 되있던 자기를 사랑이 함께하는 지극정성으로 
  간호해준 "선묘낭자"를 마지막으로 만나 감사의 말이라도 전해 주고 떠나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양주의 '선묘낭자'의 집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 그들을 가로 막았을까요
  불행이도 '선묘낭자'는 집에 없었고, 신라로 떠나는 여객선은 기다려주지 않고......
  "의상"이 자기 집을 찾았다는 그 사실을 안 '선묘낭자'가 죽을 힘을 다해 뛰어와 부두에 섯을 때에는
  이미 "의상"이 탄 그 배는 두둥실 망망 황해 바다로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님을 떠나 보내는 선묘낭자의 이별의 슬픔을 헤아려 보지 않아도 얼마던 헤아릴수 있겠지요?
  님이 떠나 가실 날에 드릴려고 십여년동안 정성으로 만든 법복과 행장을 싼 보자기를 떠나는 배를
  향해 던집니다. 그 순간 바다에 일진광풍이 불어 그 선물보자기가 '義湘'에게로 전달되어집니다.
  따뜻한 '선묘낭자'의 마음을 하늘도 알아 주었기 때문이겠지요.
  이 광경에 대해 일본의 "명혜 明慧스님"이 1228년경에 쓰고 그린 일본 국보인 <화엄종조사회전>에는  
  "재가(在家)의 애심(愛心)은 용맹한 신심(信心)을 일으켰다. 공경에 의하여 사랑을 이루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님과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 '선묘낭자'는 바다로 뛰어 듭니다.
  "저는 내세를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바로 지금 현재의 몸으로 법사의 대원을 돕는 몸이 되게 하소서’
  라며 바다에 뛰어들어 龍으로 변신하여 배를 수호합니다. 
  그녀는 참으로 솔직하면서도 대담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감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 국보 <화엄종조사회전>에서 '선묘낭자'가 바다에 투신하는 장면]


                    [일본 국보 <화엄종조사회전>에서 '선묘낭자'가 龍이 되어 호위하는 장면]

海龍으로 변신한 '선묘낭자'는 "義湘대사"가 탄 배를 호위하며 그리운 고국 신라까지 안전하게 모십니다.
위의 사진이 '선묘낭자'가 바다에 뛰어 들어 海龍으로 변신해 "의상"이 탄 배를 안전하게 호위하는 
그림으로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화엄종조사회전>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선묘각]에 있는 그림은 <화엄종조사회전>에 그려진 그림을 참고하여 옮겨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원본 사진을 보면 일본 국보인 <화엄종조사회전>의 모작이란걸 확신 할수 있죠? ㅎ


  [삽화 2]

  신라로 돌아 온 義湘은 화엄학을 전파할 사찰을 지어야했습니다
  전국의 여러 곳을 다녀 보았으나 가장 적합한 곳이 지금의 [부석사] 자리라고 판단했답니다.
  공사를 시작하려는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건축반대 데모대들이 머리에 '결사반대' 붉은 띠를 두르고
  모여들어 홰방을 놓기 시작했는데, 이미 그곳에서 토속신앙등으로 먹고살던 기득권 집단이었답니다.
  날로 격화되는 데모대들로 공사를 할수 없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義湘대사를 사랑하여 국경을 초월하고 만경창파에 몸을 던져 龍이 된 '선묘낭자'는
  사랑하는 님 곁에서 언제나 맴돌고 있었는데...
  기득권을 지키려는 토속신앙 수구집단 데모대 500여명 이상이 격렬하게 저항하며 시위를 하자
  그 집단들을 혼내서 님의 뜻을 이루도록 해 주기로 작정을 하고
  '선묘낭자'는 어마어마한 '바위'로 변신하여 데모대 위로 위협사격을 가했습니다.
  얼마나 놀랬는지 혼비백산한 데모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고 말았답니다.
  윗 사진의 그림이 浮石으로 변신한 "선묘낭자"가 데모대를 위협하는 그림입니다.
  그리하여 義湘은 이 절을 건설하고, "부석사"로 이름 지은 것도 바위가 하늘로 떠 올랐다는데에서 
  "뜰浮 돌石"자를 사용하여 "浮石寺"라 했다는건 浮石으로 변신한 "선묘낭자"를 기리기 위함이었겠죠.


  ['선묘각'에서 조망]

  "원효"의 유학 포기에 대한 기록과 '파란문 개인생각'을 피력 할까요? ㅎ
  중국과 일본 기록을 위에서 언급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한번 더 언급합니다.
  학구열에 불타는 원효와 義湘은 기필코 더 많은 것을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2차 유학길에 올랐지요.
  지난 1차 유학길은 陸路를 이용하는 바람에 곤혹스런 감옥살이를 했으므로 이번엔 뱃길을
  이용하기로 하고 지금의 수원을 지나 남양반도의 남양을 거쳐 지금의 '화성시 송산면'에 있는
  "당항성" 근처에 갔을때 엄청나게 퍼붓는 폭우로 땅이 질어 한발자국도 이동 못할 지경이었고
  설상가상 해가 지며 어두워져 어느 묘지 토굴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
  그리고 원효가 잠자다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어젯밤에 마신 물은 해골 바가지에
  시체 썩은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때서야 배를 부여잡고 토하고 난리법석을 떨었다지요?.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해골물을 마셨다는 기록은 단 한줄도 없습니다.
  비를 피해 잠을 잔곳이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토감 土龕"이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토감 土龕"은 큰 무덤에만 있는 방인데 관을 놓는 곳 앞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는군요.
  그래서 [삼국유사]에는 그 날 "원효"가 한 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前)의 우숙(寓宿-정한 숙소)가 토감(土龕-흙방)이라 하여 자못 편안하여 이 밤에
  유소(留宵-밤을 묵어 감)하니 귀향(鬼鄕-귀신나오는 마을)에 의탁(依託)하고 다숭(多崇)하니
  심생고종종법생(心生故種種法生-마음이 생겨 여러 법들도 생김)임을 알겠다.
  심멸고감반불이(心滅故龕墳不二-마음이 없어지면 흙방과 고분이 둘이 아님)이로다.
  또 삼계유심만법유식(三界唯心萬法唯識)도 심외무법(心外無法-마음밖에 있는 법이 아님)이고
  어찌 따로 구하리? 나는 입당(入唐)치 않으리라.(당나라에 가지 않겠다)"
  요약하자면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사는 집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는 거이죠?  즉,'세상만사 마음 먹기 달렸을 뿐'이라는 의미의 말이겠죠. 

          
            [일본 국보 <화엄종조사회전>에서 '원효'가 해골이 있는 무덤에서 잠자는 장면]

  중국 기록과 우리나라 기록이 약간 다르지만 이 하나의 헤프닝이 원효에겐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르게 했다는 것은 공통점이라고 할수 있는데.....

          心生卽種種心生 心滅卽種種心滅 
          如來大師云 三界虛僞 唯心所作

          한 생각이 일어나니 갖가지 마음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사라지니 갖가지 마음이 사라진다. 
          여래께서 이르시되, 삼계가 허위이니 오직 마음만이 생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깨달음이라 할지라도 "당나라 유학은 포기 한다"는 선언은 왜 했을까요?
  유학 포기 선언의 핵심 내용은 "어디에 가서 무엇을 구하고, 어디에 가서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나라에는 있고, 당나라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라고 반문하며
  원효는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 갔다는거....
  뒤집어 보면 유학 가기 싫어 핑개 대는것 같지 않나요?
  [파란문]은 '원효'의 이 깨달음은 "유학 가기 싫어 만든 핑개"라고 생각합니다만 
  여기선 자세한 내용을 생략하고 더 자세한 [파란문]의 개인 생각을 알고 싶으시면 
  2007년에 쓴 글을 찾아 읽어 보세요~ㅎㅎ


  ['삼층석탑']

  "삼층석탑 三層石塔" 보물 제249호
  [선묘각]에서 내려 가면 [삼층석탑]을 만납니다.
  높이가 5.26m, 기단 너비는 3.56m로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답니다.


  ['조사당' 가는 길]

  ['조사당' 조망]

  [삼층석탑] 우측 옆으로 "조사당" 가는 길이 이어지는데 제법 높은 곳에 있어서 오르는데 힘이 
  좀 들지만,  "의상대사 像"을 안치하고 있는 곳이기에 [부석사]에 가면 반드시 찾아 봐야 하는 곳입니다.


  ['조사당']

  "조사당 祖師堂" 國寶 第19號
  "浮石寺"를 창건한 "의상대사"의 像을 모시는 곳으로 국보로 지정된 건물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안내문을 참고 하고...


  [안내문]



  ['의상대사' 원경]

  [약간 줌인한 '의상대사']

  "의상대사 義湘大師"
  [三國遺事 卷第四 義解 第五]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 있습니다.

  法師義湘 考曰韓信 金氏 年二十九 依京師皇福寺落髮 未幾西圖觀化
  遂與元曉道出遼東邊 戍邏之爲諜者 囚閉者累旬 僅免而還[事在崔侯本傳及曉師行狀等]
  법사 의상(義湘)의 아버지는 한신(韓信)이고 성은 김씨다.
  나이 29세에 서울 황복사(皇福寺)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얼마 후 중국으로 가 부처의 교화를 보고 싶어서, 드디어 원효(元曉)와 함께 요동(遼東)으로 갔다.
  그러나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이 첩자로 여겨 갇혀 있은 지 수십 일만에 간신히 풀려나 돌아왔다.
  [이 일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의상본전(義湘本傳)」과 원효대사의 「행장」 등에 실려 있다.]

  "의상대사"는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불교라 할수 있고, "원효대사"는 서민들을 위한 대승불교죠.
  또한 "의상"은 자신이 직접 쓴 책을 거의 남기지 않았는데, "원효"는 많이 남겼습니다.
  '쏘크라테스'와 '플라톤', '예수'와 12제자처럼 "의상"은 10명의 제자들이 후에 그의 위업을 
  계승 발전시켰고 "원효"는 제자에 대한 기록이 없는듯 합니다.

「"의상"은 열 곳의 절에 교리를 전하게 하였으니, 태백산의 부석사, 원주(原州)의 비마라사(毗摩羅寺),
가야산(伽倻山)의 해인사(海印寺), 비슬산(毗瑟山)의 옥천사(玉泉寺), 금정산(金井山)의 범어사(梵魚寺),
남악(南嶽)의 화엄사(華嚴寺) 등이 이것이다.」라고 삼국유사에 기록되 있습니다.


  ['선비화']

  [안내문]

  또한 [부석사]를 찾으면 꼭 보고 가야할 명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조사당] 처마 밑에 있는 "선비화 禪扉花"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에 있습니다.


  ['퇴계선생'의 '선비화 詩']

  "퇴계 이황선생"이 이곳을 찾았을 때 쓴 "선비화 禪扉花" 詩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삼층석탑']

  [조사당 祖師堂]을 둘러 보고 다시 [삼층석탑]으로 돌아 내려 가면 [부석사]를 조망하고


  ['무량수전' 옆 '부석']

  ['부석']

  [삽화]

  "무량수전 無量壽殿" 좌측 뒤에는"부석 浮石"이 있습니다.
  龍이 되어 "의상대사"를 호위하던 "선묘낭자"가 다시 바위로 변신하여 '부석사 건립 반대 데모'를 
  하던 토속신앙인들로 구성된 데모대들을 물리 쳤다는 그 바위가 실제 있습니다.


  ['석등'과 '안양루']

  [부석사]를 둘러 보고 나가면서『石燈』과『安養樓』앞에 섭니다.
  그 이유는 1967년 5월에 "신라오악학술조사단"이 [무량수전] 앞뜰에서 "선묘낭자 설화"를 
  뒷받침하는 5m 가량의 "석룡 石龍" 하반부를 발굴 했다고 해서 입니다.
  공식 안내문에 나와 있지만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ㅎ


  ['안양루' 아래 전경]

  ['안양루' 앞 내림길]

  『安養樓』를 통과해 내려 가는데 龍으로 변신한 "선묘낭자"의 꼬리가 뻗어 있는 듯 하기도 하군요.
  "원효" 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一切唯心造"처럼  생각하기에 따라 "용 꼬리"로 볼수 있겠죠? ㅎㅎ


  [석축]

  [부석사]의 "석축 石築"도 창건 당시의 지형을 알게 해 주는 독특하고 오래된 석축이라 하는데...
  극락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16가지 방법이 있답니다.
  그 16가지 방법 중에 마지막 세가지 방법인「3품 3배관의 9품 만다리를 형상화」한것이랍니다.
  "부석사"는 이곳에만 있는게 아닙니다. 우리나라엔 짝퉁 浮石寺도 몇곳 있읍니다.
  '충청남도 서산시'와 서울 근교에도 똑같은 이름과 내력의 '부석사'가 현존하고 있습니다.
  서산 쪽에 가실 일이 있으시면 꼭 한번 들려 보세요. 상당한 규모의 절이었는데
  "선묘낭자"에 대한 이야기도 [영주 부석사]와 똑 같이 자랑하고 있더군요.
  또한 선묘낭자는 울진 불영계곡의 [불영사]를 지을 때에도 연못의 큰 나무를 들어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 오고 있더군요.


  [산딸기]                  12:27

  [부석사]에서 일주문을 나서니 할머니가 "산딸기 覆盆子"를 한 컵에 1,000원으로 팔고 있었습니다.
  동행한 '조회장님'이 산딸기는 정말 오랜만이라고 사줘서 입이 호강을 했습니다.


  [주차장]                 12:40

  약 1시간 40분간의 '부석사 탐방'을 마치고 12시50분에 출발하는 [27번 시내버스]를 타고 
  [소수서원]으로 갔습니다. 이어지는 [소수서원] 답사기도 계속됩니다.
    [부석사]를 떠나며 『삼국유사』에서 "일연스님"이 "의상"을 찬미하는 詩를 음미해 봅니다.

                披榛跨海冒烟塵 至相門開接瑞珍
                采采雜花栽故國 終南太伯一般春
                가시덤불 헤치고 연기 티끌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니
                지상사 문 열려 귀한 손님 맞이했다네.
                화엄 사상을 배워 고국에 심었으니
                종남산과 태백산이 똑같은 봄빛이라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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